기자 일을 시작한 게 20세기 말이다. 돌아보면 제법 먼 과거다. AI 같은 건 물론 없었고, 포털사이트 검색도 초기 단계였으니. 나이 지긋한 선배들은 사무실 책상 위에 재떨이를 놓고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속에서 기사를 썼다. ‘비흡연자 보호’가 일상화된 지금이라면 어림없는 일이다. 기억에 따르면 그때는 신문사와 방송사 할 것 없이 기자들 상당수가 모주꾼의 풍모였다. 음주는 주야를 가리지 않았다. 아직은 햇살이 환한 점심시간. 언론사 인근 허름한 한식당이나 중국집에선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어 넣은 김치찌개나 칼칼한 짬뽕국물을 가운데 놓고 술잔을 돌리는 기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주석(酒席)에서 낮술을 배웠다. 혈통적으로 주당이었으니 자리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외려 즐거웠다. 본래 낮술은 백일몽을 부르는 것 아닌가. “정오를 조금 넘겨 시작한 술자리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석간시대(夕刊時代) 시니어 기자의 회고에는 낭만이 서려 있었고, 후배들은 눈을 크게 뜨곤 했다. 그런 1990년대 말을 허술했지만 정다웠다고 말하면 과장이 되려나? 어쨌건. 비단 기자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술과 해장국은 떼놓을 수 없는 법. 낮술이 밤술로 이어져 숙취가 사나운 들개처럼 몰려오는 명정(酩酊)의 아침이면 쓰린 속을 풀어줄 따끈한 해장국이 간절한 법이다. 서울에서 살 때는 광화문의 유명짜한 북엇국 식당과 종로구 인사동 생태찌개집을 자주 다녔다. 명불허득(名不虛得)이라 해도 좋을 밥집들. 문제는 해장하러 가서 또 다시 술을 시작한다는 것이었지만…. 30대 때 전라북도 전주로 출장 가서 맛본 콩나물국과 따끈한 모주도 전날의 술독을 깨끗하게 풀어주는 힘이 있었다. 제주도에선 동료들과 걸쭉한 고사리육개장으로 위와 간을 달래기도 했다. 팔도에 술꾼이 있으니, 전라-경상, 경기-강원, 충청-제주 어느 곳이나 해장국 없는 지역과 도시는 없다. 술 좋아하는 이들에겐 다행스런 일이라고 해야 할 터. 6~7년 전이다. 경상북도 상주로 취재를 갔다. 일을 마친 뒤 낙동강변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젊은 날을 떠올렸고, 섬세해진 감정이 과음을 불렀다. 주종(酒種)을 묻지 않고 꽤나 마신 날이었다. 이튿날 여관에서 눈을 뜨니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새벽. 칼로 긁어내는 듯한 위통을 참으며 거리로 나왔다. ‘뭘 먹긴 먹어야하는데 문을 연 식당이 있으려나?’ 남들에겐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하며 서성이는데, 예전에 얼핏 “상주엔 끝내주는 우거지해장국 식당이 있고, 거긴 아침 일찍 영업을 시작한다”란 말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부랴부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옥호(屋號)와 위치를 찾아냈다. 택시에 올라 목적지를 알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사가 “나도 잘 아는 곳”이라며 시장통으로 차를 몰았다. 정말이지 조그맣고 소박한 밥집이었다. 그런데, 놀라워라. 1936년부터 영업을 했단다. 업력이 1세기에 육박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일제강점기였던 1936년은 선친이 태어나기도 전이니 ‘까마득한 옛날’이라 불러야 할까? 깜짝 놀라게 한 건 또 있었다. 우거지해장국 한 그릇이 2500원. 당시 한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헐한 밥값이었다. 그럼에도 해장국 속 잘 삶아낸 채소는 보드랍고 매끈했으며, 어떤 된장을 사용했는지 맑은 국물에선 더없이 구수한 향이 올라왔다. 일금 1000원의 막걸리까지 한 잔 주문해 달게 먹고 마셨다. 속이 시원하게 풀린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며칠 전 다시 한 번 그곳 상주 우거지해장국집을 검색했다. 지금은 가격이 3000원으로 올랐단다. 그 가격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살다보면 돈을 더 내고 싶은 식당도 있다’더니…. 상주는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적지 않은 고장이다. 그럼에도 기자의 기억 속에 가장 오래도록 선명하게 남을 ‘상주의 명물’은 시장통 우거지해장국이 분명하다. 그곳이 100년 세월에도 변함없는 가게로 남아주길 기대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당연한 이야기지만 술을 마시면 취한다. 정도가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음주 후 취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그렇다면 술을 마신 후 취기가 오르는 이유는 뭘까?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체내로 들어간 알코올이 피의 흐름을 따라 뇌에 도달하고 이것이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주기 때문. 술을 자주, 즐겨 마시는 이들은 말한다. “무더운 여름엔 조금만 마셔도 빨리 취한다” “비행기에서 공짜로 준다고 술이 과하면 낮은 기압과 부족한 산소 탓에 몽롱해지기 쉽다” “따뜻한 곳에서 마시다가 차가운 바깥으로 나오면 머리가 띵하다” 등등. 모두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취하지 않으려면 술을 마시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임을 대부분은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술을 피해가지 못한다. 음주가 주는 위로와 위안, 심리적 안정감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게 인류의 역사다. 무모한 술꾼이라 할지라도 건강을 걱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숙취로 인해 두통과 속쓰림에 시달리는 이들은 그래서 해장국을 찾는다. 해장국의 시작은 술의 시작과 궤를 같이하지 않았을까? 해장국의 종류는 술 종류 이상으로 많다. 집과 식당 할 것 없이 오늘도 주방에선 육류와 채소, 해물 등 수십 가지 식재료로 해장국이 만들어진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소고기, 닭고기, 돼지의 뼈, 콩나물, 북어, 복어, 황태, 다슬기, 오징어, 냉이와 대파, 매생이, 시래기, 심지어 소의 피까지…. 해장국으로 요리되는 재료는 열거가 힘들 정도로 다종다양하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 한 가지. 어떤 해장국도 그 자체로는 숙취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한다. 수분과 전해질이 보충되는 정도의 효과만 있다고. 그러니, 해장국은 ‘몸이 아닌 마음을 위로하는 음식’이라고 불러야 할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북쪽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바깥으로의 외출이 망설여지는 시기다. 특별한 이유 없이도 너나없이 심란해지는 길고 긴 1월의 겨울밤. TV와 휴대폰을 끄고 책과 만나는 것으로 외로움과 혹한을 이겨보면 어떨까? 이 방식을 택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2권의 책을 아래에서 권한다. ▲이경재의 ‘요즘 소설이 궁금한 그대에게’ “요즘 나오는 소설을 대할 때면, 가장 먼저 느끼는 건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직접적 감각이다. 그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도, 카프카의 소설에서도 맛볼 수 없는 오직 ‘요즘 소설’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만이 읽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흥미롭다.“ 문학평론가 이경재의 말이다. 그는 여전히 소설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려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로 살고 있다. 이제는 드물어진. 소설은 허구로 만들어진 창조물. 쉽게 이야기하면 세상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 쓴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 거짓이 많은 인간을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게 바로 소설의 힘이자, 문학의 효용이 아닐지. 지난 시절, 비단 문학청년만이 아닌 수많은 독자들이 소설과 시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려 했다. 문학이 가진 보편과 전형의 힘을 믿었던 시대였으니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한 인터넷 소통과 TV에 넘쳐나는 영화와 드라마, 연예 관련 프로그램을 보며 세상을 감각하고 느끼는 세대들이 2026년 이 땅의 주류로 떠올랐다. 시간의 흐름과 세태의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본지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한 숭실대 이경재 교수가 쓴 ‘요즘 소설이 궁금한 그대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책은 이 교수가 36편의 소설을 읽고 그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서는지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요즘 소설이 궁금한 그대에게’에서 언급되는 소설가와 작품은 그 프리즘이 넓다. 남녀와 노소, 주제와 소재가 다양한 것은 물론, 소개되는 소설의 형식 또한 각기 다르다. 이 책에서 이경재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에서부터 서성란, 김애란, 심윤경, 조해진, 황정은, 정용준 등의 작품을 두루 읽고, 그 작가들이 자신의 소설을 매개로 사람과 세상을 향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요즘 소설이 궁금한 그대에게’에서 사용된 문장과 문체는 모두 친절하다. 평소 딱딱한 비평서를 써온 학자답지 않은 말랑말랑한 문구로 편한 책읽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어렵지가 않다는 이야기. 책 속에서 발견한 걸로 예를 들자면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나라는 장벽을 부수고 너와 하나가 될 수 있으니까요’라는 문구, 또는 ‘어쩌면 인간은 벌레를 넘어 키오스크가 되어 가고 있지만, 그런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얼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문장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휴대폰으로 SNS 속 짧은 영상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헌데, 가끔은 책을 통해 세상과 인간을 들여다보는 시간도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권성훈의 ‘밤은 밤을 열면서’ 기자가 아는 권성훈 시인은 싱거운 말은 물론 진지한 이야기까지 우스개처럼 하는 사람이다. 얼굴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내내 떠나지 않는다. 별다른 고민이 없는 중년으로 느껴질 수 있는 어법과 표정. 하지만, 정신의 고통과 육체의 고뇌 없이 생산되는 시는 없는 법이다. 얼핏 가벼워 보이는 권성훈의 제스처와 말투는 철저한 위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를 만난 지 10년이 넘어서야 알게 된 일이다. 권 시인의 선배 시인인 이승하는 권성훈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우리 시의 유구한 전통에서 단절된 것이 있다면 해학성 혹은 골계미다. 권성훈의 시는 끊어진 맥을 되살려내면서 유쾌한 해학, 건강한 골계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의 시는 재미에 그치지 않고 인간을 반성케 한다.” ‘밤은 밤을 열면서’는 지천명을 앞둔 시절 권성훈이 내놓은 절창을 모아둔 시집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시어(詩語)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우스개와 미소가 위장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거기서 가장 먼저 읽히는 건 죽음의 냄새다. 이런 것이다. ‘새끼를 키우려고 새끼를 내다 팔던 할머니/지하 골방에 죽음이 다녀갔다/개를 기르던 노인이/노인을 기르던 개가 들어 있다/홀로 두고 발길 돌리기 안타까웠는지/두 장 빛바랜 엽서처럼 붙어/서로를 애처롭게 만지고 있다….’ - 위의 책 중 ‘골방 엽서’ 부분 인용. 이른바 동반 고독사(孤獨死)다. 곁을 지켜주던 개가 노파의 유일한 말동무였을 터. 말을 할 수 없는 개였기에 끝끝내 부재했을 소통. 둘은 끌어안고 함께 죽었다. 악취 비산하는 좁은 방을 권성훈 이렇게 묘사한다. “한 생애를 지리고 나온 부패한 사연이 지독한 흉터로 인쇄된 증표 같이 굳어져 떨어지지 않는다.” 죽음의 향기는 시집 곳곳에 잠복했다가 불쑥불쑥 나타난다. 책장을 넘기기가 저어될 지경이다. 권성훈의 어디에 이런 어둠과 그늘이 숨겨져 있었던 걸까? ‘남은 이유’라는 제목을 택한 시 또한 노래하는 소재가 사라짐과 소멸이다. ‘평생 농사일로 검게 탄 눈을 껌뻑이다가/장마 전선에도 쑥쑥 자란 암소 한 마리 팔아 와서/사고 쳐 징역 간 손주 녀석 한 번만 살려 달라 애원한다….’ 죽음 같은 삶, 혹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는 게 비단 개와 죽은 할머니, 그리고 소를 팔아 손자 구하려는 노인만일까?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느끼는 자들에게 세상이란 ‘죄 없이 갇힌 감옥’과 다를 바 없다. 시인은 느끼는 인간이다. 이를 알고 있는 동료시인 이수명은 “권성훈은 누군가의 통점(痛點)을 헤아리고 살피는 쪽에 서 있다. 그의 시들 역시 통점 안에서 쓰이고 읽힌다”고 해석했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로는 수난이나 고통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혹한의 겨울밤. ‘밤은 밤을 열면서’는 우리에게 세계의 진실을 보여주며 어깨를 다독여줄 책이 분명해 보인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그 옛날. 바닷가에서 목선에 올라 뱃일로 잔뼈가 굵은 노인들은 두 눈을 무섭게 뜨고 동네 아낙과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너희들 모두 조심해야 돼. 이 괴기(생선)를 함부로 먹다간 혀가 목구멍을 막아 죽게 되니까. 알겠지?” 볼을 부풀리며 풍선처럼 몸을 변화시키기도 하는 복어는 재밌게 생긴 생선인 동시에 맛도 기막히다. 얼큰하게 탕으로 먹어도, 무럭무럭 김 오르는 솥에서 쪄 먹어도, 부드러운 내장을 숯불에 살살 구워 야금야금 맛봐도. 그러나, 아름다운 꽃 장미가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것처럼, 복어에게선 위험한 독이 발견된다. 극소량만으로도 인체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히는. 이름하여 테트로도톡신(Tetrodotoxin)이다. 저 멀리 화성과 목성으로 우주선을 보내고, AI가 똑똑한 학자와 교수 1000명의 역할을 대신하는 ‘과학의 시대’인 21세기. 그럼에도 인류는 아직 테트로도톡신을 해독하는 약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래서다. 복어는 그걸 먹기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줘왔다. 일생 어촌에서 살아오며 회갑과 칠순을 넘긴 할머니도 함부로 칼을 들어 복어를 손질하지 않는다. 복어와 일부 망둑어과 물고기, 몇몇 문어가 가진 테트로도톡신은 독성이 청산가리의 5~15배에 이른다. 16mg만으로도 70kg 안팎의 성인 남성을 12시간 안에 죽일 수 있는 맹독이다. “자격 없이 복어를 손질해 밥상에 올리는 건 살인 행위”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그러니, 복어를 먹을 때는 반드시 전문요리사의 손을 거쳐야 하는 게 섭식의 제1원칙이 돼야 마땅하다. ‘복어 요리는 전문가에게!’ 이는 어떤 미식가도 잊어서는 안 될 경구(警句)이기도 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6-01-13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부산이 마찬가지다. 어디를 가더라도 영남 바닷가 마을에선 복어를 요리하는 식당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모주꾼의 아프고 쓰린 속을 달래주는 해장국으로 알려졌지만, 술을 마시지 않는 이들도 시원하고 담백한 맛에 매료되는 경우가 흔한 게 바로 복어탕. 기호에 따라 매운 양념을 넣어 먹어도 좋고, 맑은탕을 훌훌 마셔도 혀에 착착 감긴다. 이에 이론(異論)을 재기하는 이들은 드물다. “복어 좀 먹어봤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특히 껍질과 정소를 귀하게 여긴다. 어금니를 매혹하는 쫄깃한 복어 껍질과 비교 대상이 드물게 부드러운 복어 정소는 바람 차가운 겨울에 기막히게 어울리는 별미고 별식이다. 다소 뜬금없이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복어를 설명하기 위해선 먼저 중국 월나라의 국색(國色) ‘서시(西施)’를 알아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남의 빨래를 대신 해주는 보잘것없는 신분이던 젊은 여성 서시는 월나라 왕의 ‘전략적 선택’에 의해 라이벌 국가인 오나라로 보내진다. 월나라의 계획대로 육체적 아름다움 하나로 오나라 왕의 혼을 뒤흔들어놓은 서시.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오나라는 맥없이 멸망한다. 혼이 빠진 왕이 통치하는 국가가 오래 갈 까닭이 있겠는가?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다. 한 나라를 무너뜨릴 정도의 미색을 지닌 여성을 지칭한다. 서시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위통을 앓던 서시는 늘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 그런데, 이것도 흉내의 대상이 됐다. 서시가 살던 마을에선 일곱 살 여자아이부터 일흔 살 할머니까지 모조리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던 것. 서시를 닮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웃긴 이야기지만 이런 것도 ‘유행 선도’가 될 수 있을지. 뿐 아니다. 서시가 빨래를 하러 냇가에 가서 쪼그려 앉으면 얼굴을 올려다보던 붕어가 넋을 잃어 헤엄쳐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물고기가 물에 빠져 죽는’ 해괴한 사건(?)을 만들어낸 게 서시의 미모였다. 이른바 ‘침어(沈魚)’의 고사다. 과장과 허풍이 섞여 있는 게 분명하지만, 이 정도면 서시의 외적 수려함이 탁월하고 출중했음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제 다시 ‘복어’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미식가들은 복어의 정소를 ‘서시유(西施乳)’라 부르며 즐긴다. 한자를 풀어 쓰면 ‘서시의 젖’이란 뜻 아닌가. 복어가 중국 최고의 미녀 가운데 한 명으로 손꼽히는 서시의 가슴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식탁에서 먹음직스럽게 끓고 있는 복어탕에서 익어가는 정소를 터뜨리면 국물이 불투명한 흰색이 되면서 감칠맛을 한층 높인다. 사람에 따라서는 화롯불에 구워 먹기도 하는 게 복어 정소. 최고급 푸아그라(거위의 간) 못지않은 식감을 가졌다는 말이 떠돈다. 그만큼 절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언제부터 복어를 요리하기 시작했을까?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이 완성된 건 17세기 초반. 그 책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실렸다. “복어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달며 독이 있다. 허약함을 보충하고 습함을 제거하며 허리와 다리에 좋고 치질과 벌레를 죽인다. 하지만, 간과 알의 독성이 강하니 조리법을 정해진 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의 인용을 감안한다면 우리 선조들은 최소 400년 전부터 복어를 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 만만찮은 식재료인 것이다. 조선의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1762~1836)도 복어를 즐겼다고 한다. 폐일언. 복어는 환한 빛과 어둡고 짙은 그림자를 동시에 지닌 물고기다. “복어 10마리의 독이면 코끼리도 죽인다”는 말처럼 잊을 만하면 복어 독 탓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안타까운 소식이 신문이나 방송에 등장하곤 하니까. 내장과 핏속에 치명적인 독을 숨겼음에도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복어. 최고의 음식은 최고의 위험마저도 감수해야 맛볼 수 있는 걸까? 질문이 공포를 부를 정도로 무겁지만, 미리 겁을 먹고 복어 요리를 멀리할 필요는 없다. 복어탕을 판매하는 식당엔 복어 독을 없애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격증 가진 요리사들이 널려 있으니. 그래서다. 다가오는 일요일 점심 땐 푸릇푸릇한 미나리를 올린 복어맑은탕 먹으러 청옥빛 파도 일렁이는 구룡포로 나가볼 생각이다. 벌써부터 설렌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충북 괴산군 연풍면 적성리 입석 고갯마루에 이르는 길은 조용했다. 시루봉휴게소 뒤편의 옛길을 따라 오르면 문득 세월이 꺾인 듯한 고요한 능선이 펼쳐진다. 650m 남짓한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 발밑을 스치는 바람은 뒹구는 낙엽 소리와 함께 오래전 이곳을 넘나들던 길손들의 숨결을 되살려낸다. 영남에서 문경새재를 지나 한양으로 향하던 과거의 선비들, 장짐을 둘러멘 보부상들, 생의 희망을 안고 먼 곳을 향하던 이름 모를 사람들의 발자취가 층층이 켜진 고갯길이다. 지금은 고갯마루 아래를 지나는 터널과 새 도로가 생겨 사람들의 발길은 끊겼지만, 고갯마루에는 여전히 그 옛날부터 장엄한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과거의 역사를 품은 채 그 자리를 지키며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듯, 물결처럼 너울거리는 가지 사이로 오후 한낮의 햇살이 푸른 솔잎 위에 반짝인다. 놀라웠다. 몸의 오각이 열리고 오감이 땅속에서 꼬물꼬물 솟아나는 맑은 샘물처럼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경외감의 발로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몸집과 근육질의 건강한 수형, 장수의 기운 앞에서 이 나무는 내 삶의 스승처럼 느껴졌다. 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내가 배우고 본받아야 할 가치였다. 대지를 움켜쥔 채 노출된 뿌리의 꿈틀거리는 끈질긴 모습 또한 내 삶으로 반추되었다. 우리 삶 역시 뿌리, 곧 기본이 튼튼해야 한다는 것을 이 나무는 말없이 일러 주고 있었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나무 가까이 다가가 그를 안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나무가 되었다. 그사이 뒤따르던 대붕 아우가 도착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같은 행동을 했고, 소나무를 안은 채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나무와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은 나무와 닮아가고 있었다. 마주 보이는 백두대간의 경관은 한 편의 시이자 그림이었다. 백두산 천지에서 시작된 한반도의 등줄기가 금강산과 설악산, 태백산의 고산준령을 지나 소백산과 속리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조령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영남의 관문 백두대간 문경새재 고갯길을 넘어 이곳 적성리 고갯마루에 섰던 옛 길손들은 떠나온 고향을 바라보며 어떤 심정이었을까. 꼭 성공하여 금의환향하여 부모님께는 자랑스러운 아들로 처자식에게는 믿음직스러운 남편과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그 원대한 꿈을 괴나리봇짐에 숨겨놓고 결기를 다졌을까. 입석마을이 생기기 백 년 전부터 이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는 천연기념물 제383호 소나무 노거수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 적성리 산 26-4번지에 살아가고 있다. 나이 약 500년, 키 21.2m, 가슴높이 둘레 3.48m에 이른다. 마을 동제를 지내던 국사당 소나무는 이미 고사했지만, 그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 대신 이 천연기념물 소나무가 살아남아 지금까지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 속리산 정이품송과 형제처럼 닮은 모습이다. 줄기 윗부분은 붉은빛을 띠고 아랫부분은 검은빛을 띠어 소나무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원래는 가지가 사방으로 균형 있게 뻗어 있었으나, 2003년 설해(雪害)로 동쪽 가지 일부를 잃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서낭당이 있어 당제를 지냈으나, 한국전쟁 이후 당집은 사라지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향하던 조선의 길손들은 먼 길을 떠나며 마음 한켠에 두려움과 기대를 함께 품었으리라. 산을 넘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형을 건너는 일이 아니라, 고단한 삶의 무게를 딛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일이었다. 고갯마루는 그 길 위에 놓인 경계이자 시험대였다. 발목에 묻은 흙먼지가 무겁게 내려앉을수록 마음은 더 가벼워지기를 바랐고, 낯선 계곡의 바람에도 스스로 다독여야 했다. 험한 고개를 앞둔 나그네는 잠시 숨을 고르며 언젠가 이 길 끝에서 다시 웃을 날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충북 괴산 적성 고갯마루에 우뚝 서 있는 천연기념물 소나무는 수백 번의 사계를 견디며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 어쩌면 이곳을 지나며 옷깃을 풀고 쉬어 가던 길손들의 침묵을 오래도록 들어온 존재일 것이다. 고개를 넘기 전 무거운 마음을, 밤바람 속에 스미는 외로움을, 짚신에 구멍이 나도 되돌아갈 수 없었던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소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되 꺾이지 않았고, 그 아래를 지나는 나그네를 말없이 품어 주었으리라. 흔들리는 가지 끝마다 나그네의 사연이 걸리고, 껍질에 새겨진 세월만큼이나 간절한 기도들이 차곡차곡 쌓였으리라. 나이테의 연륜만큼이나 그 사연 또한 깊었을 것이다. 길손의 삶의 애환을 고갯마루에서 풀어헤친 보따리들이 가지 끝에 주렁주렁 매달려 바람에 흩날리며 통한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는 적성리 고갯마루 소나무 노거수를 찾는 이만이 느낄 수 있는 바람의 전설이 되었다. 고갯마루에 서서 나무가 되어 푸른 그늘을 올려다보면, 길을 떠난 모든 이들의 숨결이 바람결에 되살아난다. 어쩌면 이 소나무는 길과 사람, 삶과 희망을 잇는 수호목이었을 것이다. 도적이 나타날까 두려워 서로를 기다리던 손, 낯선 이에게 내밀던 따뜻한 보리밥 한 숟가락의 정, 넘어야 했던 수많은 인생의 고비들. 그 모든 사연이 솔잎 사이로 스며들어 지금도 은은히 내려앉는 듯하다. 길을 걷다 지친 마음을 잠시 멈춰서 쉴 때, 소나무는 묵묵히 말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 인생 또한 그러하다고, 희망을 품고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면 떠나는 길 위에 펼쳐진 고개는 끝이 없다. 언젠가 목적을 이루고 금의환향하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인생길은 되돌아올 수 없는 외길이기에 고갯마루에서 쉬면서도 앞만 보고 가야 하는 숙명의 길임을 깨닫는다. 내 또한 늘 힘든 고갯마루를 넘으면 신천지가 도래할 것이란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아픈 다리 끌면서 인생 고갯길을 넘어왔다. 본래 적성리 고갯마루 소나무 주변에는 숲이 있어 고갯길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토지 소유주가 나무들을 베어내고 경작지로 바꾸어 버렸다. 주민들은 강풍으로 인해 소나무가 쓰러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실제로 괴산군 삼송리 천연기념물 왕소나무, 일명 용송(龍松)이 2012년 태풍 볼라벤의 거센 바람에 뿌리째 뽑혀 땅을 베고 눕고 말았다. 그와 같은 일이 이 소나무에도 되풀이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속에서, 토지 변경을 허가한 관계기관에 대한 원성도 컸다고 한다. 이에 충북 괴산군과 국립환경산림과학원은 송홧가루가 날리기 전 건강한 꽃가루를 채취해 유전자은행에 장기 보존하고, 후계목 육성에 활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군민들의 깊은 나무 사랑이 추운 겨울날을 따뜻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고사한 삼송리 왕소나무 노거수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산 250번지. 왕소나무는 1982년 11월 4일 천연기념물 제290호 지정, 나이 600살, 키 12.5m, 둘레 4.7m이다. 숲에서 가장 커서 왕소나무라 부르며, 줄기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용송(龍松)이라고도 한다. 근처에 이와 비슷한 노송 3그루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삼송리라 한다. 매년 1월에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며 새해의 풍년과 마을의 평화를 기원했다고 한다. 2012년 8월 28일 태풍 ‘볼라벤’이 동반한 강풍에 쓰러졌다. 쓰러진 상태로 보존하기로 하고 괴산군은 나무병원 직원들을 동원해 뿌리 부분 복토, 석축 작업, 새 뿌리 발생을 돕기 위한 약품 처리, 햇볕을 막기 위한 차광망 설치 등을 진행했다. 나무 주사를 놓고 병해충 방제 작업을 벌였다. 노력이 1년 정도 계속되었지만 끝내 고사했다. 2014년 12월 5일에 천연기념물 지정을 해제했다. 충북도 산림환경연구소가 청주시 미원면 미동산수목원 뒤편 산기슭에 후계목을 기르고 있다고 한다.
2026-01-08
병오년이 시작됐다. 한 해 계획을 세우며 모두가 분주한 시기. 이즈음이면 많은 이들이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이 어때야 할 것인지 고민한다. 무게감 있는 소설을 읽는 것도 청사진을 그려 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듯하다. 아래 2026년 첫 독서 목록에 넣어도 좋을 작품 2편을 소개한다. ▲‘소유’라는 개념이 사라지면 모두 행복해질까?-소설가 남한의 ‘무한복제기계’ 1970~1990년대. 적지 않은 한국의 청년들은 칼 마르크스(1818~1883)의 ‘역사 발전 5단계설’에 매료됐다. 독일 철학자 마르크스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역사가 ‘물질 생산력의 계속된 발전 과정’이라고 설파했다.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단어도 함께 언급됐다. 인간이 생겨나면서부터 마르크스 당대와 이후의 세상이 ‘원시 공동체 사회-고대 노예제사회-중세 봉건제사회-근대 자본주의사회-공산사회’로 변화·발전할 것이란 게 그가 주장한 역사 발전 5단계설의 핵심이다. 인간이 만들어갈 역사의 최종 지점, 마지막 단계가 공산주의사회라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와 동유럽, 아시아와 남아메리카 등의 일부 국가에서 혁명 또는, ‘혁명 수출’이란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게 “실패했거나, 실패에 가까웠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고, “온전한 공산사회는 아직 형성된 적이 없다”고 진단하는 견해도 있다. 아래 언급되는 한 편의 소설은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공산사회의 형성과 마침내 도달한 유산자와 무산자가 없는, 인간 모두가 물질적으로 평등한 세상을 그려내고 있어 주목받았다. 서울대와 미국 메릴랜드 주립대에서 철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작가 남한의 ‘무한복제기계’가 바로 그것. 소설 ‘무한복제기계’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게 요약될 수 있다. 수십 개의 기업을 소유한 거부(巨富)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과학자에게 ‘세상 모든 것을 복제할 수 있는 기계’의 제작을 의뢰한다. 천문학적 돈이 사용된 이 프로젝트는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똑같이 복제해낼 수 있는 기계 ‘오메가’가 만들어진 것이다. 더 이상 값비싼 보석과 명품 시계, 커다란 아파트와 모피 코트를 가지려고 서로 다투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소유’라는 개념이 증발했다. 마르크스는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소유권이 사라지면 누군가는 낚시를 하고, 누구는 책을 읽고, 또 다른 누군가는 토론을 벌이는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소설가 남한은, 자본 중심의 사회에서 공산사회로 변화하는 단계엔 획기적 기술의 발달이나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의 격변이 수반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는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로 평가받는 이유가 될 수도 있을 터.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변화·발전을 설명하는 과정에선 마르크스조차 농업기술의 비약적 발전, 방직기계의 발명처럼 사회 구조를 바닥에서부터 최상위까지 모조리 바꿀 무언가를 찾지 못했다”는 게 이 소설 작가의 생각이다. ‘자본론’에 이어 ‘공산당 선언’에 이르면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에서 막연한 ‘의지주의’로 전락해버린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소설 ‘무한복제기계’는 세상의 모든 재화를 끝없이 만들어내 그걸 원하는 누구나 나눠 쓸 수 있게 하는 기계의 탄생이라는 혁명적 변화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축조된 공산사회의 모습을 서술·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걸 무한으로 복제해 낼 수 있는 기계는 인간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현재의 자본주의사회를 마르크스가 말한 바 평등한 공산주의사회로 건너가게 만들어줄까? 한 번도 설거지나 청소를 해본 적이 없는 재벌의 아내와 일생 남의 집 가사를 대신해주며 살아온 노동자 모두가 ‘평등하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돈을 포함한 일체의 재화를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인간의 선한 의지가 발현되는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오히려 어둡고 습한 디스토피아일까? 남한의 ‘무한복제기계’는 독자들을 끝없는 질문 속으로 던져 넣는다. 책이란 인간에게 생각하는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 아닐지.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인간을 무너뜨리는 건 무엇인지…-소설가 이은정의 ‘비대칭 인간’ 어느 날 문득, 불현듯 찬찬히 얼굴을 살펴보니 좌측과 우측의 대칭이 무너져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궁금증 속에서 고개를 갸웃하며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거리를 걷는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안면 윤곽술에 도통한 의사에게도 대놓고 하소연하기도 힘든 상황. 곤혹스러움이 주위 사방을 어둡게 만들었다. 이런 ‘안면 비대칭’은 어떤 이유로 생긴 것일까? 물음의 출발점이 모호하니, 답을 찾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위의 서술은 이은정의 소설집 ‘비대칭 인간’의 표제작 내용 중 일부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끌어가고, 마무리 짓는 솜씨가 만만찮다. 이 작가의 또 다른 단편집 ‘완벽하게 헤어지는 방법’이 궁금해졌다. ‘비대칭 인간’에 실린 다른 단편들도 훈련과 연마가 거듭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향기가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허술하지 않은 문장에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을 시적(詩的)인 문체, 거기에 지난 시절과는 전혀 다른 삶과 마주한 21세기 청년들의 환멸까지를 담담한 시선으로 묶어낸 역량까지가 그랬다. 소설가 이은정은 2018년부터 소설가의 삶을 살아왔다. “책을 낼 때마다 작업 과정은 달랐고, 나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지금이 아니면 내지 못할 것 같은 목소리를 하나라도 더 넣으려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현대사회가 외형이건 내면이건 인간의 비대칭을 만들거나, 인식하게 한다면 그걸 만들거나 인식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뭐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시선이 아닐까 싶다. 타인의 시선, 카메라의 시선, 자신의 시선. 그걸 인식하는 순간,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 힘들다. SNS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시선들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고 답했다. 비관하고 절망하고 고단해야 희망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작가는 자신의 소설이 대놓고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비대칭 인간’의 수록작 중에서는 ‘눈이 와요’를 살펴 읽어주면 좋겠다고 했고,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연초에 어울리고,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돼줄 것”이라 부연했다. 앞으로는 사람을 죽게 하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을 살리는 것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풀어보고 싶다는 이은정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그 단면들을 소설로 쓰면서 나도 많은 걸 깨닫게 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소설가를 끊임없이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이 작가. 이 ‘선량한 싸움꾼’이 앞으로 써낼 작품들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6-01-06
‘환경’과 ‘에너지’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21세기다. 어느 지자체 할 것 없이 이에 관한 대비책을 골몰 중이다. 성주군도 이런 상황을 체감하지 않을 수 없기에 미래 청사진의 주요한 부분에 ‘환경 친화’라는 방점을 찍고 있다. 성주군은 전 세계적인 탄소중립시대를 대비하고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하여 2026년 약 76억원의 국도비 예산을 투입해 다양한 대기질 개선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이에 성주군은 이동 오염원의 대기오염물질을 저감하기 위해 노후경유차 조기폐차 지원, 매연저감장치 부착, 전기․수소 등 친환경차량 보급을 추진한다. 더불어 사업장의 노후 방지시설 개선, 탄소중립 포인트 인세티브 지원 등을 통해 전반적 지역 대기질 개선에도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현재 성주의 전기차 및 전기이륜차 등록 대수는 약 1635대. 이는 경북도내에서 인구대비 무공해차 비율이 가장 높은 수준. 2026년엔 57억원의 예산을 들여 승용전기차 150대, 화물전기차 128대, 버스 2대, 이륜차 70대, 수소전기차 2대를 2월중에 신청 받을 계획도 세웠다. □ 전기-수소 자동차 확대와 보급 위한 대책 마련 그린모빌리티 시대로의 전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지원하는 동시에 부족한 충전 인프라 구축을 위해 예산도 편성했다. 이는 급속 및 완속충전기의 민간 설치 지원을 위해 사용된다. 경유차는 미세먼지와 질소산화물의 주된 배출원이다. 노후될수록 대기오염물질을 많이 배출하고 있어 정부는 조기폐차 지원사업을 통해 노후경유차를 조기에 폐차하도록 유도 중이다. 이에 발맞춰 성주군은 2026년에 7억5000만원의 예산을 확보, 3월 2일부터 461대의 노후경유차 조기폐차를 지원한다. 또한, 어린이통학차량LPG전환에 300원, 지게차와 굴착기 등 노후건설기계엔진교체 사업에 3억6000만원을 편성했고, 매연저감장치부착예산 3300만원을 확보해 경유차 배출가스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을 추진한다. 소규모 사업장 방지시설 설치 지원사업은 영세 사업장의 노후 방지시설 개선 비용 부담 완화 및 미세먼지 저감을 위한 국도비 사업으로 2019년도부터 시행되고 있다. 수년간 방지시설 지원사업을 시행한 결과 매연, 악취 등 대기오염으로 인한 환경 민원이 감소해 주민들에게 좋은 호응을 얻고 있다. 그런 상황을 감안해 국도비 예산을 최대한 확보해 영세 사업장의 시설 개선도 지원할 계획이다. 가정 에너지 사용을 줄이면 보상금을 지급하는 탄소포인트 제도와 자동차 연료 사용량을 줄이는 차주에게 포인트를 지급하는 자동차 탄소포인트 제도도 4000만원의 예산으로 시행한다. □ 대기오염물질 배출사업장 불법행위 철저 감시 성주군에는 360개의 대기오염물질 배출사업장이 있다. 산업단지 조성과 대도시 인근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등으로 인해 대기배출사업장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런 대기배출사업장에 대해서는 정기-수시 점검을 실시하고, 사업주에게 환경 관련 준수 사항을 지도하는 등 환경오염 등 불법을 방지하는 데도 집중한다. 방지시설 미가동 등 불법 행위 적발 시에는 관련 법령에 따라 고발, 행정처분 등 엄중 조치함으로써 경각심을 고취하고, 공장 가동 시 대기오염물질의 배출을 줄이기 위해 노후된 방지시설은 개선을 유도하는 등 시설 적정관리 및 대기오염물질 저감에도 집중할 방침이다. 그간 축사·퇴비공장 등에서 악취 민원이 자주 발생됐으나 악취 발생 시간대 및 장소가 일정하지 않고 날씨, 기상에 따라 악취 상황이 급변하는 등 악취 민원 관리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에 따라 성주군은 악취 측정과 포집이 가능한 대기오염 이동측정차량을 확보해 민원 발생 지역을 줄여나갈 계획이다. 성주군은 향후 주민 요청지역, 대기오염 취약․우심 지역을 대상으로 대기질을 측정해 주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행정신뢰도를 제고하고, 모니터링 한 데이터를 환경 정책에 반영해 쾌적한 정주 여건 조성에 활용하게 된다. 이와 함께 다중이용시설 실내 공기질 지도·점검을 지속한다. 점검 대상은 어린이집, 의료기관 등 26개 시설이다. 2026년 성주군의 다중이용시설 지도·점검 대상지는 총 15곳. 시설별 관리 실태와 기준 준수 여부를 확인하고, 점검 과정에서 개선이 필요한 사항은 안내 및 개선 조치한다. 이러한 제반 사업의 세부 요건, 제출 서류, 접수 방법은 성주군 홈페이지 공고와 담당 부서 안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환하게 떠오른 2026년 첫날의 붉은 태양. 그 아래를 선명한 붉은빛을 가진 말이 뛰어간다. 말은 진취적 기상과 역동성, 거기에 꿈틀대는 생명력까지 가진 동물이다. 재론의 여지없이 활기찬 에너지가 넘친다. 올해는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다. 전쟁터에선 장수를 태우고 종회무진 적진을 헤쳐 나가고, 무거운 짐이 등에 실렸을 때는 게으름 피우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빨리 한다. 그 옛날, 인간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줬던 말이 2026년엔 어떤 기운을 국민들에게 선물할까? 그 기운을 토대로 우리는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삶을 가져갈 수 있을까? 질문이 많아지는 새해 벽두다. 누구나 이때쯤이면 한 해를 설계하고 미래를 계획하게 된다. 올해는 이기심보다는 이타(利他),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청사진을 그려보면 어떨까 싶다. 2026년 열두 달을 살아가는 동안 한 번쯤 읽어본다면 인간과 삶에 대한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사랑·연민·희망이란 귀한 메시지를 품은 시 3편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죽음도 이겨내는 사랑... 송수권 ‘석남꽃 꺾어’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 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 들고 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 가며 네 집에 들리라. ‘남도의 소월’로 불리는 송수권 시인의 서정시 중 으뜸이라 불러도 좋을 ‘석남꽃 꺾어’는 어떤 존재에 대한 깊은 사랑이 어디에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를 간명하고 질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전정한 사랑은 너와 내가 오가는 방에도, 부엌에도 웅크리고 있으며 심지어 젖은 행주에도 깃드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가 웃을 때도, 울 때도 사랑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강고하게 건재한다. 그 사랑의 힘은 때로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도 발휘된다.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 들고’ 싶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2026년 사람들의 지상목표는 그게 사람이건 사물이건 단 하나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찾아가는 것이 돼야 할 듯하다. ▲연민이 없다면 인간도 없다,.. 이면우 ‘화엄경배’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 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에게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연민(憐憫), 즉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은 인간만이 가진 소중한 것이다. 저 혼자 잘 먹고, 저 혼자 잘살겠다는 마음가짐이야 금수(禽獸)라도 못 가질 게 없다. 연민을 가지려면 평범한 삶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면우는 실제로 온갖 육체적 노동을 하며 시를 써온 시인이다. ‘보일러 새벽 가동중 화염 투시구로 연소실을 보는’ 일을 했다. 그의 작품에서 근육의 꿈틀거림과 진솔한 생활의 냄새가 나는 것은 이면우가 일상을 고마워하는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 아닐지. ‘보일러공의 기도’라고 불러도 좋은 ‘화엄경배’에선 뜨거운 불기운이 느껴진다. 세상의 하찮은 것들을 다사롭게 끌어안는 휴머니티 가득한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 ‘연민을 가질 수 있어야 마침내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고 이면우는 노래한다. 아프지만 아름답지 않은가? ▲희망은 언제나 우리의 숙제... 이성부의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와 문학을 사랑하는 적지 않은 독자들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최고의 절창(絕唱)’으로 손꼽는 게 이성부 시인의 ‘봄’이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분홍빛 꽃들과 함께 봄은 온다. 겨우내 꽁꽁 언 땅에서 새파란 새싹이 돋아나듯 희망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해마다 그 모습을 드러내며 인류와 함께 공존해왔다. 삶이 있다면 희망도 있고, 생이 소멸하지 않는 한 희망도 소멸하지 않는다. 2026년 1월 초. 아직은 북풍에 어깨를 움츠려야 하는 차가운 날씨지만, 머지않아 희망의 메타포라 할 봄이 ‘눈 부비며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다. 만약 그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네 세상살이가 얼마나 메마르고 팍팍할 것인가. 맞다. 병오년의 봄도 멀지 않았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6-01-01
몇 해 전 겨울이다. 가수 진성이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대답 없는 사람아/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고 노래한 ‘안동역’ 인근 조그만 식당에 갔다. 바람이 차가운 날이었고, 무언가 따끈한 게 먹고 싶었다. ‘냄비밥’이란 메뉴가 눈에 띄었다. 알고 찾아간 게 아니었는데, 거긴 이미 기자 외엔 알 만한 사람이 다 아는 맛집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다른 메뉴를 쳐다볼 것도 없이 냄비밥을 주문했다. 기대했던 대단한 밥상이 차려지진 않았다. 그저 몇 가지 나물반찬에 담백하게 끓인 된장찌개, 거기에 고등어조림 한 토막. 헌데, 얇은 냄비에 갓 지어낸 밥이 기가 막혔다. 반찬 없이 밥만 먹어도 구수하고 달았다. 그 옛날 교주 최시형을 따르던 동학교도들은 “밥이 곧 하늘”이라 했다. 거창한 의미 따위를 붙이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밥은 ‘섬김의 대상’이었다. 뿐인가? 반세기 전만 해도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간다”는 말에 토를 다는 이들이 없었다. 싱싱한 푸성귀 무침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따끈한 냄비밥을 깨끗하게 비운 그날. 냄비에 지은 밥이 선물한 ‘또 다른 별식’ 누룽지를 씹으며 기억의 회로 저 먼 곳에서 잠자고 있던 추억 한 조각을 떠올렸다. 선친과 외조모에 얽힌 에피소드였다. 주전부리나 별식 따위가 없던 시절엔 반찬도 부실했다. 그래서였을 터다. 지난 세기 한국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주식이라 할 밥을 무지하게 많이 먹었단다. 물론 제 땅이 없고, 소작할 땅도 마땅찮아 극도로 가난했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보리와 콩 등 잡곡을 섞은 밥도 양껏 먹지 못했겠지만.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 선교 등의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농부나 어부의 식사량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고 한다. ‘밥을 무지막지하게 많이 먹는 조선 사람’에 대한 놀라움은 그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쓴 책에 고스란히 남았다. 커다란 밥그릇을 앞에 놓고 앉은 상투 튼 조선인 사진 몇 장도 함께 전해진다. 1947년에 태어난 모친은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농사일을 도우며 시골에서 살았다. 반면 선친은 일제강점기인 1938년 ‘세련된 도회지’라 불러도 좋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서 첫 울음을 터뜨렸다. 1944년, 그러니까 해방 한 해 전에 나고야에서 부산으로 이주한 아버지는 혼인하기 전까지 내내 도시에서만 살았다. 그리고, 일생 소식(小食)했다.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는 경우가 드물었다. 아기 주먹만한 조그만 밥그릇임에도. 그런 아버지가 장가를 갔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날. 처음으로 처가에 갔을 때 몹시 곤혹스러웠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선친의 첫 번째 처갓집행(行)은 벼 수확이 한창이던 1970년 가을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위는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았다. 이런저런 처갓집 피붙이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니 저녁밥 먹을 때가 됐다. 장모가 들고 온 밥상을 본 아버지는 대경실색(大驚失色) 했단다. 황소 머리통만한 밥그릇엔 푸른 염료로 큼직하게 ‘福(복)’자가 새겨져 있었고, 밥그릇에서 솟아오른 밥의 높이가 족히 10cm는 넘어 보였다는 것. 이른바 농사짓는 상일꾼이 먹는 ‘고봉밥’이었다. 선친은 매사에 과장이 없는 사람. “이걸 혼자서 어떻게 다 먹나? 쌀 한 되로 밥 한 그릇을 만든 형국”이란 혼잣말을 참지 못하고 했다는데, 그걸 장모는 듣지 못했을까? 만약 들었다면 꽤 서운했을 듯하다. 맏사위를 위해 정성껏 차린 밥상이었으니.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그 밥을 아버지는 결국 남겼고…. 세월무상(歲月無常)이다. 지난 2007년. 산처럼 높고 높은 고봉밥을 퍼주던 1920년생 외조모(아버지의 장모)가 세상을 떴고, 이듬해 시골 사람들 밥그릇 크기와 밥의 양에 경악했던 사위(선친)도 귀천했으니. 그리고 2025년 찬바람 매운 오늘.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믿던 1970년에서부터 55년이 흘렀다. 이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밥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 나와 모친도 겨우 쌀 한 홉으로 밥을 지어 둘이서 나눠 먹는다. 그러고도 그걸 남길 정도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먹고 싶어진다. 외조모의 가마솥 고봉밥이나 낡은 냄비에 고슬고슬 지은 따끈한 밥이. 그런 걸 보면 기자도 어쩔 수 없는 한국 사람인 모양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30
한국에 전기밥솥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언제였을까? 아마도 20세기 중후반이 아닐까 싶다. 장작이나 연탄 없이도 전기를 사용해 빠르고 간편하게 밥을 지을 수 있는 수단이 생기면서 주부들의 ‘밥 짓기’ 고민은 사라졌다. 아쉽게도 그 고민과 동시에 하나 더 사라진 게 있으니 바로 ‘누룽지’다. 깜밥, 깐밥, 깡개밥, 깡개, 누룽갱이, 가마치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던 누룽지는 가마솥이나 냄비에 밥을 할 때 바닥에 밥이 눌어붙은 걸 지칭한다. 고소하고 묘한 단맛이 나기에 군것질거리가 많지 않던 1970년엔 대부분의 아이들이 별미로 먹었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룽지를 프라이팬에 구워 설탕이라도 조금 뿌리면 인기는 더 높아졌다. 어른들은 누룽지에 물을 붓고 푹 끓인 숭늉을 지금 사람들이 커피 마시듯 즐겼다. 요즘엔 일부러 밥에 열을 가해 누룽지를 만드는 가게도 있다. 옛 기억을 잊지 못하는 어르신들은 그렇게 만든 ‘21세기 스타일 누룽지’를 잔뜩 구입해 냉동실에 넣어두고 과자처럼 먹거나, 식후 입가심용 숭늉으로 마시기도 한다고. 누룽지는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수분이 대폭 줄어들고, 적지 않은 양만 먹어도 시간이 지나면 포만감이 생기기에 젊은 여성의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누룽지의 쓰임새도 변하고 있는 모양. 한국인들의 ‘누룽지 사랑’을 알려주듯 사탕도 누룽지 맛이 나는 게 있고, 백미보다 건강에 좋다는 현미로 누룽지를 만들어 먹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누룽지를 한국 사람만 먹는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아직도 전기밥솥이 아닌 전근대적인 수단으로 솥에 불을 때서 쌀을 익혀 먹는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 심지어 유럽 몇몇 나라 사람들도 누룽지를 즐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나는 상상할 때 가장 즐겁고 행복하다. 역사를 재료로 글을 쓰면서 가슴이 뛰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주관적 상상력을 기사에 담을 수는 없었다. 이제 마음껏 상상할 수 있고 상상한 세계를 글로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는 것이 신이 나고 보람 있다.” 누군가에게는 ‘명성황후’라는 극존칭으로 불리고, 어떤 사람들에겐 ‘민비’로 비하되는 조선 26대 왕 고종의 아내 민자영(1851~1895). 민씨는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사망했다.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 일본인의 칼에 찔린 처참한 죽음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은 TV와 영화를 통해 지켜봤을 이 유명한 살인 사건은 왜 발생한 것이고, 그 이전엔 어떤 일이 있었으며, 중전 민씨를 살해한 이들의 정체는 뭐였을까? 35년 동안 연합뉴스 기자로 일하고 올해 봄 퇴직한 권영석은 앞서 언급한 3가지 의문을 자신의 첫 소설 ‘작전명 여우사냥’을 통해 추적한다. 권영석은 역사적 사실과 자신의 상상을 교직(交織)하는 방식으로 중전 민씨의 죽음 직전 일주일을 긴장감 넘치게 묘사, 또는 서술한다. 오랜 기자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짧고 명확한 단문이기에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이명재와 아다치 겐조의 치열한 지략 대결 펼쳐져 소설의 주인공은 19세기 말 온건 개화파의 수장이던 민영익의 호위무사 이명재. 가상의 인물이다. 그와 대척점에 서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인물은 아다치 겐조다.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나라에 세운 일간지 ‘한성신보’ 사장이며 실존 인물. 책을 펴낸 출판사는 “‘작전명 여우사냥’은 주인공 이명재와 라이벌 아다치 겐조의 치열한 지략 대결과 한성 시내를 뒤흔든 대형 사건들을 연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한다”는 설명으로 이 작품이 딱딱한 역사소설의 모습만이 아닌 흥미진진한 스릴러의 면모도 지니고 있음을 알려준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중전 민씨의 죽음은 정확한 전말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관련된 논란도 현재 진행형이다. 권영석의 첫 장편 ‘작전명 여우사냥’은 이 풀리지 않은 역사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작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까? 권영석은 1991년에 연합뉴스에 입사해 올해 봄 정년퇴직했다. 여러 부서에서 근무했고, 재직 마지막 시기엔 북한부와 통일언론연구소 등 북한 관련 부서에서 주로 일했다. 이에 관해 권 작가는 “역사적인 삶을 살자는 것이 변하지 않는 내 생각이다. 역사적 삶이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독립전쟁을, 독재 치하에 산다면 민주화 투쟁을 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지금은 분단시대다. 그래서 한반도 평화와 통합을 위하는 삶에 조금이나마 다가서고 싶었다”고 부연한다. 소설을 쓴 이유에 관해선 “지금까지 남이 하는 얘기만 썼다. 기사는 쓸 만큼 썼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쓰려 한다”고 했다. 크게 봐서는 똑같은 글쓰기지만, 소설과 기사는 그 작법과 호흡이 다를 수밖에 없다. 분량만을 보자면 소설의 길이는 기사를 크게 압도한다. 그래서다. ‘작전명 여우사냥’이 나오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지난 2022년 5월 권 작가는 영화감독 한 명과 통음했다. 그 자리에서 감독에서 우연히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을 설명했고, “흥미로운 소재고 의미 있는 이야기”라는 격려를 얻었다. “그때 이후 조금씩 시간을 쪼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탈고까지 거의 3년 걸렸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보다 상상력을 발휘하며 소설 쓸 때가 더 행복했다.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는 게 그 시간을 떠올리는 권영석의 회고다. ▲자신의 문장으로 소설 쓰는 시간, 너무 행복해 작가라면 자신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평가가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권영석은 명성황후, 혹은 민비로 불리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아래는 그에 관한 대답이다. “명성황후란 명칭은 귀에 거슬린다. 내 소설 속에선 중전 민씨라고 불렀다. 황후라고 높여 부를 필요도 없지만 민비라고 업신여길 필요도 없다. 총명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자식들이 잇따라 죽으면서 하나 남은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나쳤다. 무당에게 의지하고 뇌물도 좋아했다.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탐욕이 끝이 없었다. 가장 큰 죄는 사대주의였다.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 조선을 청나라 속국으로 만들었고 청나라가 망하자 그 다음에는 러시아에 의지했다.” 시계를 과거로 돌려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의 아픔은 패전국들의 몫이었다. 동독과 서독처럼 일본도 미국과 러시아가 분할 점령을 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에 대해 한반도 분할 점령을 제안했다. 권영석은 바로 여기서 우리 민족 비극의 시작을 봤다. 그래서일까? 소설 속에도 일본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처음 제안한 1895년 상황이 서술된다. 러시아가 일본의 대륙 진출을 봉쇄하자 한성 주재 일본 공사가 러시아 공사 베베르에게 한반도를 분할해 나눠 갖자고 제안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 권 작가는 독자들에게 “특히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읽어주며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 예순 살. 기자에서 소설가로 존재 전이한 권영석에 “이젠 또 어떤 책을 쓰고 싶은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그의 단단한 결심을 짐작하게 해줬다. “이번 소설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으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을 생각이다. 글을 쓰는 재능도 없으면서 하찮은 소설 하나 더 보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 독자들이 소설을 계속 써도 좋다는 평가를 내려준다면 남북한 문제를 다룬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다.” 독자들은 그에게 “당신은 앞으로 소설가로 살아가도 좋다”는 평가를 내려줄까? 그가 새롭게 써낼 남북관계에 얽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현재까지는 고종과 중전 민씨의 한쪽 측면만 과대 포장한 소설이나 드라마가 많았다. 그걸 알기에 권 작가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보탰다. “‘작전명 여우사냥’이 고종과 중전 민씨를 입체적으고 사실적으로 그린 소설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23
2010넌 입사 전기정비직으로 만 15넌 현재 ‘냉연의 꽃’ PCM 압연 공정 맡아 설비 고장 예측·예방 최적의 상태 유지 - 본인 소개와 현재 맡고 있는 주요 업무를 말해달라. 포항제철소 압연설비2부 냉연정비2섹션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헌제 계장이다. 2010년 포스코에 입사해 전기정비직으로 일한 지 만 15년이 됐다. 현재는 냉연의 꽃이라 불리는 PCM 압연 공정을 맡고 있다. PCM 압연은 쉽게 말해, 두꺼운 철판을 얇고 매끈하게 만드는 ‘철판 다듬기 공정’이다. 마치 밀가루 반죽을 밀대로 눌러 원하는 두께로 펴는 과정과 비슷하다. 열연 코일이라는 ‘반죽’을 압연 롤이라는 ‘밀대’로 강하게 눌러 얇게 만들고, 표면을 고르게 다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압연 롤과 철판이 맞물리며 강한 압력과 마찰이 발생하고, 여기에 고속 회전으로 인한 열까지 더해진다. 아주 미세한 두께 조정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면밀한 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현장에 설치된 각종 센서와 전기설비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데이터를 분석해 고장을 예방하는 일을 맡고 있다. 또한 생산 효율과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설비 제어 프로그램을 개선하고 있다.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 어릴 때부터 내 꿈은 포항제철소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포항제철공고에 입학한 순간부터 그 목표는 더욱 확고해졌다. 하지만 졸업할 무렵엔 경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바로 목표를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취업 시장도 얼어붙어서 대기업에 들어가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중장비를 제작하는 제조업체에 입사하게 되어 약 2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단순 반복적인 조립 공정은 내 적성과 잘 맞지 않았고,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도심 생활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고민 끝에 오랜 꿈이었던 포스코 입사를 목표로 다시 준비를 시작했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 - 냉연정비섹션을 소개한다면, 어떤 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냉연정비섹션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설비의 명의(名醫)’다. 사람의 병을 미리 발견해 예방하고, 병이 생기더라도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치료하는 의사처럼, 우리는 설비의 건강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철강 산업이라고 하면 거친 현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요즘 현장은 점점 스마트하게 변하고 있다. 다양한 기술이 접목되면서 설비의 ‘아픈 곳’을 미리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몇 년 전 도입된 PIMS(POSCO Intelligent Maintenance System)이다. 이 시스템은 과거에 발생했던 고장이나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데이터로 분석해, 설비 고장을 미리 예측하고 예방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직은 활용도가 높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면 정비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곧 ‘스마트 제철소’로 가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냉연정비섹션은 그 길을 묵묵히 준비하며, 설비가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오늘도 현장을 지키고 있다. “1인분은 반드시 하자” 평소의 생활 신조 내가 지키고 싶은 원칙은 ‘책임’과 ‘헌신’ 신뢰받고 안전한 현장 만들기 위해 필요 - 회사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원칙은 무엇인가? 내 회사생활의 신조는 단순하다. “1인분은 반드시 하자.” 내가 맡은 몫을 다하지 않으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동료에게 넘어간다. 그렇게 되면 불필요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하지만 ‘1인분’은 단순히 주어진 일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만큼 배우고, 익히고, 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정비 업무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필요한 부품을 미리 준비하고, 고장에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설비 상태를 숙지하는 것이 필수다. 이런 역량을 키우기 위해 압연기능장, 산업안전기사, 설비보전산업기사 등 다양한 자격증을 취득하며 꾸준히 자기계발에 힘쓰고 있다. 현장에서 요구되는 전문지식을 높이는 것이 곧 팀의 안정성과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선후배 사이의 연결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경험이 많은 선배들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하고, 후배들의 새로운 시각과 아이디어를 선배들에게 전달하며 팀이 하나로 움직이도록 돕는다. 설비에 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야간에 발생하는 돌발 상황에도 주저 없이 현장에 나서 문제를 해결한다. 결국 내가 지키고 싶은 원칙은 ‘책임’과 ‘헌신’이다.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지고, 동료와 조직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것. 그 두 가지가 모여야 비로소 안전하고 신뢰받는 현장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 포스코의 복지 제도 중에서 특히 만족하며 누리고 있는 제도가 있다면? 우리 회사는 직원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방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연극 프로그램, 클래식 공연, K-POP 콘서트까지 그 폭이 넓고 수준도 높아 다방면에서 만족하고 있다. 특히 8세 자녀가 있는 나에게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문화행사가 큰 의미로 다가온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공연 프로그램들을 보며 가족 모두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런 경험은 포스코의 복지 혜택이 아니었다면 쉽게 누릴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이다. 올여름 블루원 워터파크 대관 행사도 잊을 수 없다. 평소 대형 워터파크는 인파 때문에 선뜻 가기 어려웠는데, 대관 행사 덕분에 아이와 함께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시원한 물놀이와 함께 소소한 이벤트, 기념촬영까지 하루 종일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경험은 단순한 ‘행사 참여’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이고, 삶의 활력을 주는 순간이었다.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애써주시는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직원들의 문화생활 다양한 지원 큰 만족 연극·클래식·K-POP 까지 수준도 높아 가족과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 삶의 활력 - 국내 철강업계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로서, 앞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철강 산업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어야 한다. 글로벌 경기 변동, 세계적인 철강 수요 둔화, 특히 중국의 과잉 생산과 저가 수출은 국내 철강업계의 경쟁 환경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에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석탄을 쓰는 고로 제철 방식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 포스코는 이러한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미 수소환원제철(HyREX) 기술 개발에 착수하여,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석탄 대신 수소를 사용해 철을 생산하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더 나아가 2050년까지 모든 제철소를 수소환원제철소로 전환해, 환경 친화성과 글로벌 경쟁력을 동시에 갖춘 ‘탄소중립 철강기업’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 업그레이드가 아니다. 국내 철강업계가 세계 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고, 미래 세대에게 자랑스러운 산업을 물려주기 위한 필수 과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힘, 그리고 변화를 선도하는 실행력 그것이 포스코가 걸어온 길이며, 앞으로도 걸어갈 길이라고 믿는다. 조직 내 MZ세대가 주력 인력으로 자리 세대 교체되는 큰 변화의 흐름 속에서 협력·소통이 강한 조직 만드는 것 목표 - 앞으로의 포부나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대한민국은 지금 큰 세대 교체의 흐름 속에 있다. 60년대에 태어난 선배들이 차례로 현장을 떠나고, 이제 MZ세대가 주력 인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중견사원으로서, 선배들의 경험과 후배들의 열정을 이어주는 연결점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후배 사원들과의 좋은 유대 관계를 유지하며, 업무를 빠르게 습득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동시에 관리자를 보필하고, 현장에서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중간 리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 변화하는 인력 구조 속에서, 세대 간의 협력과 소통이 강한 조직을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12-21
경북 영덕 상대산(上臺山) 관어대(觀魚臺)에 올랐다. 깎아지른 절벽 끝에 서자 사방으로 열린 하늘과 바다, 능선과 들녘이 한 폭의 거대한 산수화처럼 펼쳐졌다. 동쪽으로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푸른 동해가 숨결처럼 일렁이고, 북쪽으로 이어진 울진 후포항의 해안선은 산과 바다를 꿰매어 붙인 곡선의 비단 폭이 고요히 흐른다. 아래로는 영해와 병곡의 평야가 평화롭게 누워서 잠들고, 명사 20리라 불리는 고래불해수욕장과 솔숲은 푸르고 유쾌한 기운을 밀어 올린다. 푸른 바다와 솔숲 사이 황금빛 모래 해변은 또 어떤가. 발아래 헤엄치는 고기를 헤아릴 수 있다고 하여 붙인 이곳, 관어대는 오래 바라볼수록 물결 속에 숨 쉬는 생명과 풍광의 깊이를 새삼 느끼게 한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고, 옛 시절 목은 이색 선생을 비롯한 시인, 묵객들이 시심을 틔웠을 까닭을 알 듯하다. 퇴직 후 황혼의 청년이라 자처하는 고향의 친구 정기채, 이승구, 황조연, 이희열님과 함께 이 멋진 풍광을 즐겼다. 한 주가 멀다고 하며 유명한 산천을 주유하는 이들이다. 오랜 공직 생활 내내 성실과 청렴을 지켰고, 고위 공직자로 명예롭게 퇴임한 뒤에는 새 일자리를 찾기보다 몸을 돌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인생 2막 황혼의 삶을 꾸리고 있다. 이름난 명소라면 이미 대부분 다녀온 터라, 우린 여행지를 추천하기보다 어떻게 자연을 느끼고, 걷고, 쉼을 얻으며 노년의 삶을 균형 있게 꾸밀 것인지에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부신 풍경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속도를 늦추고, 해풍에 마음을 걸어두고 침묵의 명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고래불이라는 이름에는 바다 내음처럼 긴 시간을 품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옛사람들은 목은 이색 선생이 이곳을 찾았을 때, 해수욕장 앞 바다에서 고래가 흰 물줄기를 뿜으며 장난치듯 노니는 장관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고 전한다. 그날의 놀라움과 감탄이 바람결에 스며 지명으로 남았으니, 고래가 노니는 모래뻘이라는 뜻에서 고래불이라 불린 것이다. 여기서 불은 뻘의 옛말이라 한다. 1986년 국제 고래잡이 금지 전까지 바다에서 실제로 고래잡이가 행해졌고, 2000년엔 멸치잡이 어선이 이빨부리고래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는 소식을 마을에 전했다. 고래불 해변, 북쪽의 솔숲이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면 또 하나의 지명 이야기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용머리이다. 마을 앞 바다에는 용이 머리를 내밀고 파도를 내려다보는 듯한 바위가 있는데,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 바위를 신령스러운 존재로 여겨 용머리라 불러왔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곳곳에 말뚝을 박아 민족의 기운을 꺾으려 했던 어두운 시절에도 마을 사람들은 용머리를 잃지 않기 위해 팔각정을 세워 수호처인 듯 위장했다 한다. 그들의 작은 지혜와 간절함이 마을의 숨결을 지켜낸 것이다. 지금도 5년마다 풍어제가 열리면 첫 제의는 용머리에서 드린다. 바위에 제사가 올려지고 북소리가 바다를 흔들며 퍼져 나가면, 오래된 믿음과 바다의 영혼이 조용히 호흡한다. 전국에서 무속인과 여행객이 기도를 위해 찾아온다. 바람에 흔들린 촛불과 파도 소리가 어우러지면, 이곳은 세월을 건너 이어져 온 마음의 안식처가 된다. 고래불 해변을 신발 벗고 맨발로 걷다 보면 모래가 체온을 닮아 따스하다. 발끝 사이로 스며드는 파도는 오래된 슬픔마저 씻어주는 듯하다. 수평선 위 붉은빛이 서서히 번지고, 둥근 해가 바다를 뚫고 솟구치던 순간, 윤슬이 바다를 타고 내게로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두 손이 절로 합장되고, 감사와 소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렸다. 그 황홀한 빛의 파동이 몸을 스치자 잠자던 세포가 꽃잎처럼 터져 오르는 듯했으니, 자연의 감동이란 이토록 말없이도 깊고 환한 것임을 깨닫는다. 세상의 소음은 멀어지고, 오직 파도와 바람, 나의 숨결만이 투명하게 남는다. 모래 해변, 그 이름만으로도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는 낭만의 장소이다. 그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면, 바다 건너 오래전 고래가 수면을 가르며 솟구치던 순간의 물빛이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 파도친다. 파도는 은빛 결을 이루며 모래 위를 밀어내고 다시 끌어당긴다. 무심한 물결에 발끝을 내맡기고 한참을 걷다 보면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근심이 바닷물에 씻겨 나가는 듯 가벼워진다. 모래를 딛는 발걸음은 더디고 힘들지만, 바람에 실린 조개껍질의 미세한 반짝임과 파도 소리의 리듬은 그조차 잊게 만든다. 돌아올 때는 고래불 솔숲으로 들어섰다. 공기는 한층 더 맑고, 수천 그루 소나무가 선선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솔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은 송진과 흙냄새가 어우러진 향기를 머금고 있다. 식물이 몸을 지키기 위해 내뿜는 피톤치드가 온몸에 닿아 정신과 폐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테르펜이라 불리는 이 향은 살균, 진정, 소염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약리의 힘을 품고 있다. 숲을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과 몸의 균형이 되살아난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생각의 먼지가 털리고, 초록의 물결이 눈과 가슴을 편안하게 덮어준다. 숲은 설명보다 먼저 감각으로 스며들고, 치유는 어느새 몸속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이곳은 영덕 고래불해수욕장으로 뿐만 아니라 국민 야영지로 유명하여 많은 사람이 찾아든다. 녹음이 짙어질수록 마음의 결도 부드러워진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을 그리워하는 존재, 생명애라 부르는 바이오필리아의 흔적이 DNA 속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숲길을 걷는 동안 도시의 빌딩 숲에서 느꼈던 숨 막힘은 사라지고, 심장은 넓어지고 호흡은 길어진다. 자연은 값을 치르지 않아도 우리에게 풍요를 내어준다. 모래의 질감, 파도의 리듬, 숲의 향기, 흙의 온도, 시원한 바람…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몸과 마음을 어루만진다. 고래불 솔숲 길과 모래 해변을 걷는 일은 잃어버린 생기를 되찾는 조용한 귀향이다. 고래불 솔숲과 황금 모래 해변, 푸른 동해,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에 부드러운 파도가 스친다. 숲길을 따라 솔향이 은은히 번지면 곧장 바다가 열린다. 모래 위로 햇살이 반짝이고 윤슬이 길을 내어주듯 손짓한다. 걸을수록 바람은 맑고 잎사귀 사이에서 흘러나온 푸른 향은 마음 깊은 곳의 오래된 응어리까지 씻어 낸다. 숲의 숨결과 바다의 리듬이 만나 한 걸음마다 시가 되고, 파도는 발뒤꿈치를 적시며 다시 돌아오라 속삭인다. 고래불, 그곳은 한 번이라도 마음에 스며들면 다시 찾고 싶은 자리이다. 보고 싶고 걷고 싶은 낭만이 불빛처럼 번져 가슴 끝을 환히 밝히는 곳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포구(浦口) 용머리 시비는… 동해(東海) 가을 깊어 파도는 멀고 안개 갠 포구에 갈매기 앉네 어이차 한 소리에 님은 십 리 밖 오늘도 무사하길 바라는 아내 상대산 우뚝 솟아 십리 같은데 펼쳐진 백사장은 이십 리라네 언제나 철썩이는 파도와 같이 마음껏 날고파라 물새와 함께 -2000년 4월 17일
2025-12-17
보석처럼 붉은 조그만 열매. 매혹적인 빛깔과 여러 가지 효능을 가졌다고 알려진 오미자는 어떤 식물일까? 먼저 이 궁금증에 답해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산골짜기, 모가 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돌이 있는 곳에서 잘 자란다. 잎은 어긋나며 넓은 타원모양. 잎의 길이는 7∼10㎝, 너비 3∼5㎝로 가장자리에 작은 치아상의 톱니가 있다. 열매는 8~9월에 빨간색으로 익으며 둥글거나, 달걀 모양이다. 이 열매는 달고, 시고, 쓰고, 맵고, 짠 다섯 가지의 맛을 낸다. 그 가운데서도 신맛이 가장 강하다. 한방에서는 약재로 이용된다. 대뇌신경을 흥분시키고 강장작용이 나타났으며, 호흡중독에도 작용한다. 또한, 심장활동을 도와 혈압을 조절하고, 간장의 대사를 촉진시키는 효과가 인정됐다.”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차와 진액을 만들 수 있고, 각종 요리의 재료로 흔하게 사용되는 오미자가 건강에도 좋다면 그걸 먹지 않겠다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경북 문경은 오미자로 유명세를 탄 고장이다. 1993년에 야생 오미자를 이식해 재배 시험을 진행했고, 1996년엔 유휴산지에서 소득시범사업으로 오미자를 재배한 문경은 2006년 ‘오미자 산업특구’로 지정됐다. 전국 시장에 풀리는 오미자의 45% 이상이 문경에서 나온다. 오미자를 지역 특산물로 잘 키워왔기에 2013년엔 지역경제 활성화 우수사례 발표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문경에서 자라고 수확되는 질 좋은 오미자로 만드는 오미자청은 각지로 판매돼 ‘오미자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오미자청은 만들기 어렵지 않다. 흐르는 물에 씻어 이물질을 제거한 후 물기를 없애고 설탕이나 꿀에 버무린다. 이를 밀봉한 후 뚜껑을 덮어 공기를 차단한 다음엔 주 1회 정도 통을 잘 흔들어 준다. 직사광선을 피해 2~3개월 숙성하면 오미자청이 거의 완성된다. 이걸 잘 걸러 서늘한 곳에 두고 용도에 따라 사용하면 된다는 게 요리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12-16
오미자(五味子)를 재료로 만든 술을 처음 맛본 건 20대 초반 때다. 엄마를 대신해 생일상을 차려줄 정도로 터무니없이 날 귀여워했던 친구의 어머니는 곱상하고 귀티 나는 외모에 한식에서부터 양식, 일식까지 무엇이건 능수능란하게 차려내는 수준급 요리사이기도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50대 중반에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재인박명(才人薄命). 다시 한 번 그녀의 명복을 빈다. 어쨌건 그 친구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던 1990년대 초반이다. 구멍가게에서 사간 맥주 한 박스를 다 비우고도 술이 모자랐던 우리는 주방 선반에서 매혹적인 빛깔을 뽐내는 담금주 한 병을 발견했다. 조그맣고 새빨간 열매가 독한 소주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망설일 것 있나? 주인에겐 물어보지도 않고 뚜껑부터 열었다. 시끌시끌한 소리에 자다가 일어난 친구 어머니가 “아이고, 이놈들. 결국은 약하려고 만든 오미자주까지 너희들이 먹는구나. 그래 잘했다. 젊으니 한 말 술인들 못 마실까”라며 사람 좋게 웃어줬다. 기자와 친구도 도도한 취기 속에서 따라 웃었다. 새벽까지 통음한 그날 밤이 벌써 30년도 더 된 옛 기억이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흐른다. 오미자의 이름이 어째서 ‘오미자’인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오미자나무는 바위가 많은 산에서 자라는 덩굴성식물이다. 바로 여기서 열리는 열매가 오미자. 색깔은 다르지만 포도와 유사한 모양이기에 ‘붉은 포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열매엔 달고, 쓰고, 시고, 맵고, 짠맛이 동시에 담겼다. 그래서다. ‘다섯 가지 맛을 가진 열매’라는 뜻에서 온 작명이 바로 오마자인 것. 한자를 보면 이해가 어렵지 않을 터. 헌데, 오미자의 다섯 가지 맛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감지해내는 절대미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쨌건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 사람들은 오미자나무를 재배했고, 그 열매를 따서 술을 담고, 차(茶)도 만들고, 설탕이나 꿀을 섞어 발효시킨 후 청으로도 먹었다. 병을 치료하는 한약재를 연구하는 ‘본초학(本草學)’에선 오미자의 효능에 관해 ‘쇠진한 몸을 완화시키고, 눈을 밝게 해주며, 신장을 데워준다. 여기에 더해 남성의 정기를 높이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30여 년 전 친구 어머니가 “약에 쓰려고 담근 술”이라 말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주려고 정성껏 만들었을 귀한 술을 아들도 아닌, 아들 친구가 한 방울 남김없이 다 마셔버렸으니 마음속으론 밉지 않았을까? 너무 늦었지만 이 대목에선 용서를 구한다. 경상북도 문경은 이름난 오미자 생산지다. 오미자 열매는 초여름에 열리는데 그 시기에 맞춰 뻑적지근할 정도로 성대한 축제가 해마다 펼쳐진다. 취재를 위해 그 계절에 맞춰 두어 번 문경을 찾은 적이 있다. 처음으로 문경 오미자 축제에 간 게 아마 7~8년 전쯤인 듯하다. 그곳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돼지불백 식당에 들렀다. 동료들과 함께였다. 연탄불에 석쇠를 올리고 구워주는 고추장 양념 돼지불고기 맛은 유별났다. 잡내가 없었고 육질은 부드러웠다. 돼지고기 특유의 부들부들한 식감과 불에 익힌 단백질의 고소함, 과하지 않은 매운맛과 단맛이 근사하게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던 것. 기자들 서너 명의 논쟁이 시작됐다. “이건 돼지고기를 양념할 때 오미자청을 넣은 게 틀림없어” “아냐. 고추장을 만들 때부터 오마자를 재료로 사용한 것 같은데…” 운운하는. 정신없이 바쁜 식당 주인에게 “누구 말이 맞습니까?”라고 물어보기엔 미안했다. 사실 먹음직한 돼지불고기를 안주 삼아 오미자가 들어갔다는 핑크색 막걸리를 들이켜기에도 바빴고. 때마다 문경을 다녀올 때면 오미자청, 오미자차, 오미자 열매를 구입하곤 한다. 엄마는 오미자차를 즐겨 마셨고, 오미자청은 이런저런 볶음 요리의 재료로 사용했다. 지난해엔 오미자주도 만들었는데, 우리 집 거실에서 붉게 익어가는 그걸 다가오는 설에 마실 생각이다. 여전히 스물두어 살 때 친구 집에서 마셨던 그 맛일까? 궁금하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지역 곳곳 실뿌리 내린 아홉 노포와의 여정 웃음과 슬픔 버무린 일상의 경이로움 전해 시민과 애환 함께한 다른 노포 소개도 기대 지난 2019년 필자는 칼럼에서 노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포항 원도심에는 코주부사 외에도 50년 된 포항이발소, 40여 년 된 동아세탁소, 할매떡볶이 같은 노포가 있다. 이 오래된 점포의 주인들은 소소한 기술과 성실한 노동으로 어렵게나마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웠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한 톨의 씨앗도 품기 어려웠던 폐허에 힘겹게 실뿌리를 내리며 평생을 보낸 것이다. 인생의 황혼에 이른 노포의 주인들을 만나 삶의 여정을 들어보면, 진정한 역사는 이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생명력이 서로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한평생 지켜온 점포가 작은 박물관이고, 이들이 사용해온 재봉틀, 이발도구, 요리도구가 역사 유물이며, 이들이 웃음과 슬픔을 버무려 풀어놓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역사책이 아닐까. 지역 공동체의 정서와 문화를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애틋한 삶을 잘 갈무리해 널리 그리고 오래도록 전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궁리해야 할 때가 됐다. - 「코주부사,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작은 역사」, 『경북매일신문』 2019년 12월 2일 자. 그로부터 6년이 흘러 ‘포항의 노포 기행’ 연재가 진행되었다. 2021년부터 『경북매일신문』 지면을 통해 포항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해온 참여자들의 뜻이 모여 이 기획이 만들어졌다. 노포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지역의 문화,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서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 9월부터 시작된 이 연재는 개복치점, 열쇠점, 막걸리 양조장, 양복점, 제과점, 국수공장, 속옷가게, 중화요리점, 마크사 등 지역 곳곳에 있는 노포 아홉 곳을 다루었다. 물론 주목할 만한 다른 노포도 있다. 이를테면 1967년 개업한 로타리냉면은 오랜 세월 냉면의 깊은 맛을 선사해온 맛집으로 포항 사람치고 모르는 이가 없다. 그 밖에 초원통닭, 시정당, 제일화공약품상사 등도 시민과 애환을 함께해온 노포다. 이 노포의 이야기는 다른 기회를 통해 펼쳐 보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포항고 부지 기부 김춘생 창업주 ‘동성조선’ 3대 이어 전국서도 유명한 조선소로 발전 박일천 첫 민선시장과의 끈끈한 인연은 포스텍 설립 이끈 ‘선한 영향력’으로 발휘 포항고 대신동 부지를 기부한 동성조선 창업자 노포 외에도 포항의 기업 중에 3대째 이어온 기업이 있다. 중소형 조선소인 동성조선이 대표적이다. 전국에서 이름이 높은 동성조선은 1946년에 설립된 향도조선(向島造船)이 모체로 1955년에 지금의 상호로 변경되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소를 일본이 패망하여 철수하자 그곳에서 일하던 대목장(大木匠) 김춘생이 인수해 향도조선을 설립한 것이다. 김춘생의 차남 김성호에 따르면, 조선소 인수 과정에서 자금이 부족했던 김춘생은 지역 유지 김용주에게 도움을 부탁했다. 그러자 김용주는 차용증도 작성하지 않고 김춘생에게 큰돈을 빌려주었다. 김용주의 통 큰 도움 덕분에 향도조선을 설립한 김춘생은 성실한 자세로 사업에 임해 사업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그 후 김춘생의 친구인 박일천 첫 민선 포항시장이 김춘생에게 당시 두호동에 있던 포항고등학교를 시내로 이전해야 하는데 김춘생 소유의 대신동 땅을 기부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김춘생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포항고등학교는 1954년 9월 1일 대신동 신축 교사로 이전할 수 있었다. 지금 동성조선 사무실 벽에는 포항고등학교 교장과 기성회장 명의로 김춘생에게 수여한 감사장이 걸려 있다. 박일천은 뒷날 포항 4년제 대학 설립 유치 청원에 앞장섰으며, 이 청원은 포항공대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다. 1998년 박일천 사후에 유족들이 유산을 포항공대 발전기금으로 기탁한 바 있다. 포항의 역사·문화기록 대장정에 도움 준 지역 원로들의 ‘안타까운 죽음’ 깊이 애도 지난 5년간 포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게 도와준 세 분의 별세 2021년에 발간된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1』을 시작으로 포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포항뿐 아니라 서울, 부산, 인천, 대구에서 여러 분이 이 작업을 지켜보며 따듯한 격려를 해주었다. 그들 중 작년 12월에 별세한 손장원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잊을 수 없다. 손 관장은 필자와 얼굴 한 번 본 적 없건만 귀한 사진 자료를 기꺼이 제공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이른 타계를 인천 학계가 안타까워했는데 필자로서도 아픔이 아닐 수 없었다. 포항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작업에 많은 도움을 준 고 손장원 관장의 명복을 빈다. 5년간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인터뷰에 응해준 세 분이 별세했다.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2』(2022)에 나온 이봉식 선생은 향년 93세로 작년 3월에, 김두호 화백은 향년 89세로 올해 8월 작고했다. 『포항의 예술인』(2024)에 나온 문신구 영화감독은 향년 70세로 올해 5월 영면에 들었다. 이들의 부음을 들으며 이 작업의 의미와 무게를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고인들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한다. ‘포항의 노포 기행’을 지켜본 문학평론가 최영호 교수(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가 감상평을 보내왔다. 그의 표현처럼 이 연재는 “포항의 정체성과 풍경, 그 기억의 사잇길”을 걸어간 것이 아닐까 싶다. 넉 달간의 여정을 함께해준 독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공간(space)과 장소(place)는 같을까 다를까? 눈에 보이는 것은 같지만 공간은 비어 있되 장소는 꽉 차 있다. 텅 빈 질그릇이 무엇인가 담긴 후부터 전혀 다른 것이 되듯 말이다. 그 질그릇의 ‘빈 중심’과 관계성이 질그릇의 새로운 본질을 창조한다. 하나의 공간이 장소로 재탄생하는 것은 우리와의 관계 때문이다. 포항 사람들의 마음 한구석엔 애틋하고 친밀한 포항이 깃들어 있다. 이 연재는 포항 사람들이 관계 맺고 있는 장소로서의 포항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시계 바깥의 시간으로 축적된 포항 노포를 찾아가는 이 연재에는 우리가 잊을 뻔한 장소로서의 포항 가는 길이 산지사방으로 열려 있다. 포항의 정체성과 풍경, 그 기억의 사잇길을 걷고 싶다면 이 연재의 일상적 경이로움에 마음의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끝> 필 자 : 김도형 사 진 : 김 훈
2025-12-14
홍합서 분비되는 단백질 접착력 125㎏ 무게 들어 올릴 정도 강력 지금은 지중해 담치에 밀려 ‘귀물’ △ 토종홍합의 달큰한 맛이 일품인 홍합밥 울릉도 홍합밥이 인기 있는 것은 홍합 덕분이다. 울릉도 홍합밥에 들어가는 홍합은 요즘 흔한 지중해담치가 아니라 토종 홍합이다. 지중해담치보다 크고 살이 두텁고 탱글탱글하고 쫄깃한 진짜 우리 홍합이다. 지중해 담치는 토종이 아니라 외래종이다. 토종 홍합은 지역에 따라 합자, 합, 열합, 담치, 참담치, 담채, 섭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옛날에는 성질이 따뜻하고 피부를 매끄럽고 윤기 있게 가꿔준다는 속설이 있어서 동해부인(東海夫人)이라고도 했다. 본래 우리 바다에는 토종 홍합들이 다수였는데 지금은 보기 드문 귀물이 되었다. 외국을 왕래하는 화물선의 밸러스트(Ballast)에 지중해 담치의 유생이 섞여 들어오면서 이제는 전 연안을 장악해버렸기 때문이다. 벨러스트란 배에 실은 화물의 양이 적어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 안전을 위해 배 바닥에 싣는 물(평형수)이나 돌 등의 중량물을 의미한다. 우리 바다에는 토종 홍합과 지중해담치 외에도 비단담치, 털담치 등 13종 내외의 홍합류가 서식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합은 조개 살이 붉은 빛이라 홍합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지지만 실상 암수에 따라 그 살 색이 다르다. 암홍합은 붉은색, 숫홍합은 흰색을 띤다. 암홍합이 맛이 더 뛰어나다. 홍합은 폴리페놀이라는 접착력 강한 단백질을 분비해 바위에 몸을 고정시켜 살면서 바닷물 속의 영양분을 걸러 먹는다. 홍합 하나에서 분비되는 단백질 족사의 접착력은 무려 125kg의 무게를 들어 올릴 정도로 강하다. 울릉도 토종 홍합의 강력한 접착력이 거친 파도를 버티며 살아가게 만든다. 울릉도 홍합의 맛과 영양이 뛰어난 것은 그 강한 생명력 때문이 아닐까? 귀한 특식인 홍합밥 뿐만 아니라 울릉도에는 부족한 곡물의 양을 늘리기 위해 산나물이나 해초를 넣어서 지어먹던 구황 밥도 많았다. 개척 시기 울릉도 사람들의 목숨을 이어준 나물답게 명이로 지은 밥도 있었다. 명이 밥은 명이 줄기를 썰어서 보리나 조, 감자 등의 곡식과 섞어 지어먹던 울릉도의 구황 음식이다. 명이 줄기는 삶으면 찐득찐득 해지기 때문에 명이 밥은 먹기에 편치 않다. 소화가 잘 안 되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명이 밥은 양을 늘려 주린 속을 채우려는 고육지책으로 해 먹던 밥이다. 따개비라고도 불리는 삿갓조개 속살이나 우려낸 국물을 이용해 따개비밥·죽·칼국수·무침 요리 △ 대형 바다 말로 만든 대황밥과 따개비 밥 대황은 울릉도 바다의 대표적인 대형 바다 말이다. 과거 울릉도 사람들은 대황을 넣은 대황밥으로 굶주림을 면했을 정도로 고마운 음식이다. 대황은 바다에서 베어 갯바위에 널어 말린 뒤 마르면 짊어지고 와서 장작불을 때서 삶았다. 삶은 대황의 줄기는 빼고 잎만 썰어서 보리나 감자, 옥수수를 섞어서 밥을 한 것이 대황 밥이다. 울릉도에는 따개비밥 있다. 하지만 따개비라 부르는 것은 실상 진짜 따개비가 아니다. 삿갓조개다. 따개비밥도 정확한 명칭은 삿갓조개 밥이라 해야 맞다. 진짜 따개비는 굴등이라고도 하는데 바닷가 암초나 말뚝, 배 밑 등에 붙어서 고착생활을 한다. 몸은 산(山)자 모양이며 딱딱한 석회질 껍데기로 덮여 있다. 삿갓조개(bernique)는 배말이라고도 하며 바닷가 바위에서 고둥과 함께 사는 삿갓 모양의 조개다. 따개비는 갑각류이고 삿갓조개는 연체동물문 복족강 삿갓조개류(Patello gastropoda)에 속하는 조개다. 둘이 전혀 다른 종이다. 따개비는 고착 생물이고 삿갓조개는 움직이며 산다는 점도 큰 차이다. 그런데 울릉도 사람들은 이 삿갓조개를 따개비라 부르며 따개비밥, 따개비칼국수, 따개비죽, 따개비무침 등 다양한 음식들으로 만들어 먹었다. 여기서는 울릉도 표현대로 삿갓조개를 따개비로 칭한다. 따개비는 속살이나 우려낸 국물을 이용해 요리를 한다. 채취해온 따개비는 깨끗이 씻고 껍질에 붙은 불순물을 제거한다. 따개비를 물에 넣고 껍질이 벌어질 정도로 삶는다. 속살은 건져낸 뒤 껍질만 남기고 물을 조금 더 넣어 다시 5시간 정도 푹 끓인다. 이렇게 끓인 따개비 물은 요리의 육수로 사용한다. 속살은 다양한 요리에 따라 활용한다. 따개비밥은 따개비 육수와 따개비 속살을 함께 넣고 지은 밥이다. 감자는 삶은 감자나 감자전이 대표적인 요리지만 감자 인절미, 감자 팥죽, 감자밥도 즐겨 먹던 울릉도 음식이다. 감자밥은 옥수수나, 보리 등 곡식에 감자를 넣고 해 먹었다. 이 또한 곡물이 부족한 울릉도에서 밥의 양을 늘리기 위해 만들어낸 음식이다. 옥수수 밥도 있었다.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다 보니 과거에는 옥수수도 귀한 곳이 울릉도였다. 그래서 옥수수밥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집에서나 해 먹던 밥이다. 옥수수를 갈아서 감자를 넣고 지었다. 식량이 귀한 울릉도에서는 잔치에도 음식으로 부조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웃집에 결혼식 같은 잔치가 있으면 돈이 아니라 옥수수와 콩나물, 두부 등으로 부조를 대신했다. 쌀밥은 명절이나 제사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한 울릉도 이웃집에 결혼식 같은 잔치땐 옥수수·콩나물·두부로도 부조 △ 옥수수밥과 무밥으로 굶주림 면해 옥수수는 1500년경 폴란드인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고, 1700년대에 조선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1766년에 편찬된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 옥수수의 한자식 표현인 ‘옥촉서(玉蜀黍)’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옥수수밥은 ‘강냉이밥’이라고도 부르는데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옥수수 알갱이로 밥을 짓는 방법과 옥수수 가루로 짓는 방법이다. 옥수수 알갱이로 밥을 지을 때는 옥수수를 물에 불려두었다가 맷돌에 갈아 겉껍질을 벗긴 후 절구로 찧어 작은 알갱이로 만든 뒤 쌀밥과 동일하게 짓는다. 옥수수 가루 밥을 할 때는 삶은 팥, 밤, 감자 등을 함께 넣거나 불린 쌀을 조금 넣기도 한다. 솥에 감자나 콩을 먼저 넣고 끓인 후 그 위에 옥수수 가루를 넣고 끓이면서 뜸을 들여 밥을 짓는다. 옥수수를 저장할 때는 맷돌에 갈아서 ‘옥수수쌀’로 만들어 저장하기도 했다. 그래야 옥수수 밥을 해 먹기 편한 까닭이었다. 육지에서는 주로 봄철에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춘궁기 구황 음식을 먹었다. 초여름 보리가 나기 전까지 봄을 견뎌야 했기에 보릿고개란 말도 생겼다. 하지만 늘 음식이 부족했던 울릉도는 사시사철 구황 음식을 먹었다. 대표적인 구황 음식이 목숨을 이어가게 해 줬다는 명이밥, 대황밥, 무밥, 옥수수밥 등이다. 무밥은 보리, 옥수수 등에 무를 썰어 넣고 지은 밥이다.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무를 많이 넣으면 그나마 살림이 나은 집이라 했을 정도였다. 울릉도의 무밥은 무를 굵게 채 썰어 솥 밑에 깐 다음, 삶은 보리나 갈아서 물에 불린 옥수수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하여 지었다.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는 무가 “오장의 나쁜 기운을 씻어 체기를 가라앉히고 속을 따뜻하게 하여 설사도 다스리는 고마운 약재”라 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도 “무의 생즙은 소화를 촉진하며 매운 맛은 열을 내려 속을 가라앉히고 해독 작용으로 독성을 풀며 숙취를 해소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도 섣달그믐날 먹는 생무는 산삼과 같고, 이때 무를 먹으면 부스럼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가난할 때 먹던 구황 음식이었지만 무밥은 음식인 동시에 약이었던 셈이다. 울릉도 사람들은 밥이 곧 약이 되는 식약동원의 시대를 살았다. 절대 궁핍을 건너 풍요의 시대에 도달 했으나 잊지 말고 전승해야 할 소중한 가치다. <끝> /강제윤(시인,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2025-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