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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속리산 법주사 정이품송과 부인 정부인송

우리가 흔히 짐승이라 부르는 동물이나 새들은 타고난 본성에 따라 목숨을 걸고 자신의 영역을 지킨다. 수천 년 동안 대를 이어 마치 개미가 쳇바퀴 돌 듯 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계절을 맞고 보내는 사이, 특히 갈바람이 나뭇잎을 물들이는 가을이면 어딘지 모르게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이럴 때면 어느 때보다 생각이 깊어지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나 또한 그렇다. 가을이 짙어가던 어느 날, 아우 대붕과 함께 대구에서 출발해 속리산 법주사 천연기념물인 정이품송과 그의 부인 정부인송을 만나러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속리산(俗離山)은 백두대간의 태백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중간 허리에 솟은 해발 1058m의 명산이다. 이름 그대로 ‘속세를 떠난다’는 뜻을 지녀 예로부터 수행과 깨달음의 도량으로 여겨졌다. 병풍처럼 둘러선 산세 속에는 천왕봉과 문장대 등 고봉이 즐비하고, 문장대에 오르면 백두대간의 능선이 파도처럼 굽이친다. 사시사철 다른 빛깔의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보은 장안면 600살 된 소나무 ‘정부인송’ 치맛자락처럼 두 갈래로 펼쳐진 줄기들 천연기념물 제352호… 평안 품은 名木 세조의 벼슬을 받은 소나무 ‘정이품송’ 600년 세월 외줄기 곧은 자태 ‘남성적’ 천연기념물 제103호, 정부인송과 부부 산기슭에는 1500년 역사의 신라 고찰 법주사가 자리하여 불심의 중심을 이루고, 그 속의 팔상전은 우리나라 유일의 목탑으로 보물처럼 남아 있다. 이렇게 속리산은 자연과 불심, 그리고 문화가 어우러진 성산으로, 지금도 사람들에게 세속을 벗어나 마음의 고요와 깨달음을 찾게 하는 영산이다. 속리산의 치맛자락 아래, 마치 가을 하늘의 별빛처럼 박혀 있는 정이품송과 정부인송을 만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갈바람을 헤치며 달리는 고속도로 위로 펼쳐진 황금빛 들판과 붉게 물들어가는 숲의 풍경은 내 지나온 세월처럼 아득했다. 자연은 ‘가을’이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을 물들이고 있었고, 그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또한 노거수를 찾아가는 순례길 같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자동차는 순식간에 고속도로를 벗어나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 49-4번지로 향했다. 그곳에 정부인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 선비의 아내답게 풍채는 점잖고 단정하여, 한 집안의 맏며느리처럼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치맛자락처럼 펼쳐진 가지들은 동서남북을 고루 감싸며 너그럽게 품어주는 여인의 품을 닮았다. 나이 600살, 높이 15.2m, 가슴둘레 4.7m. 높이 70cm 지점에서 두 갈래로 나뉜 줄기 하나는 3.3m, 다른 하나는 2.9m였다. 동서로 23.8m, 남북으로 23.1m나 되는 치마 품의 그늘에 서면, 부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한 평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의 삼가천을 안고, 법주사로 이어지는 장안로를 곁에 두고 살아간다. 지나가는 이들을 굽어보며 유유자적 세월을 이어가는 품이 건강하고 고요하다. 사람들 또한 정부인송의 미모와 하늘로 뻗은 두 줄기의 힘찬 기운에 매료되어 많이 찾고있다. 마을 사람들 역시 경외감이 들어 매년 음력 초이튿날, 정부인송 아래에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있다.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마을은 평화롭고 주민들은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라에서도 1988년 4월 30일 천연기념물 제352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정부인송의 치맛자락 속에는 세월의 나이테만큼이나 깊은 연륜과 지혜가 깃들어 있다. 지난 폭설에 몸이 다소 상했지만, 곧 회복해 다시 아름다운 자태를 되찾았다. 그 회복력은 놀라우리만큼 강인했다. 그래서 보은 사람들은 정이품송과 부부의 연을 맺어주어 ‘정부인송’, ‘보은의 딸’, ‘보은의 며느리’라 부르며 아끼고 사랑한다. 그 곁에 서면 누구라도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긴 듯한 평안을 느낀다. 그녀의 남편은 바로 조선 세조로부터 정이품 벼슬을 받은 정이품송이다. 법주사 입구, 이곳에서 7km 떨어진 곳에 서 있다. 수많은 나무 가운데 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은 나무는 아마 이 정이품송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세조 10년(1464),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였다.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려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가마가 걸릴 듯했다. 세조가 “가마가 걸리는구나” 하고 말하자,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했다. 또 다른 날, 세조가 비를 피하려 이 나무 아래 머물렀고, 그 충정을 기리기 위해 정이품, 곧 장관급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정이품송은 한때 삿갓처럼 둥글고 단정한 자태였으나, 1993년 강풍에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많이 상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연히 서 있다. 나이 600살, 높이 16.5m, 가슴둘레 5.3m.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오늘도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정이품송이 외줄기로 곧게 자란 남성적이라면, 정부인송은 우산 모양으로 치맛자락을 드리운 여성적이다. 서로 닮았으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세월을 견디며 부부의 연을 이어오고 있다. 이 두 그루의 인연을 맺어준 중매자는 다름 아닌 충북 보은의 주민들과 산림청이다. 천지자연의 모든 존재가 이들의 장수와 평화를 축복했으리라. 오늘도 많은 사람이 정이품송 앞에서 부부 인연의 중요함을 인식하며 그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부부의 인연이란 무엇일까. 우연처럼 시작되지만, 실은 오랜 세월의 실로 꿰어진 인연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우연이 있을까. 젊은 날의 설렘이 생활의 언어로 바뀌어도, 그 속에는 서로의 웃음과 눈물이 켜켜이 쌓이며 단단해진다. 옛사람들이 부부를 ‘천지지합(天地之合)’이라 한 것은, 하늘과 땅처럼 서로의 햇살과 그늘이 되어주는 삶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결국 서로의 얼굴 속에서 자신을 비추어 본다. 부부는 소유나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며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늙어가는 동행자다. 젊은 날의 사랑이 불꽃이라면, 세월의 사랑은 서로의 숨결로 켜지는 등불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상대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일이다. 오늘 속리산 법주사의 정이품송과 서원리 정부인송을 마주하며 나는 부부의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나무를 부부의 연으로 맺어준 보은인(報恩人)의 나무 사랑에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부부는 말없이 눈빛으로 약속한다. “내일도, 알콩달콩 함께 걸어가자.” /글·사진=장은재 작가 속리산 국립공원 기념비문의 내용은… 아름다운 자연을 예찬하고 옛 문물을 숭상함은 문화 민족의 자랑이다. 웅장하면서도 청아한 영봉과 기암괴석이며 첩첩이 굽이도는 절묘한 계곡과 하늘을 덮는 울창한 숲은 찾는 이로 하여금 한 여름에도 옷깃을 여미게 하고 신라 진흥왕 때 창건한 천년 향기 그윽한 법주사가 그 중턱에 자리 잡아 여기에 불교문화의 정수인 값진 문화제를 간직한 우리의 속리산은 역조의 왕이 행어 하셨고 많은 문인재사에 의하여 시와 노래로 읊어져 천하의 절승으로 널리 알려진 지 오래이다. 이 유서 깊은 지역은 1966년 6월 24일 사적지 제4호로 지정되었고 1969년 1월 21일에는 관광지로 1970년 3월 24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자연보호와 국민의 보건 휴양에 이바지하는 바 지대하다. 1970년 5월 4일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이곳에 이르시어 국민 정서 순화의 요람지로서 속리산 국립공원 보호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시고 공원 환경 조성과 사찰 정화에 관하여 구체적 개발 방향을 지시하심과 아울러 정부에서 적극 지원토록 조처하심으로써 1970년부터 사내리 신도시 건설 등 국립공원 연관 사업을 이룩도록 하였고 친히 공원 표제를 써 주시었기 우리는 조상의 얼이 담긴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가다듬을 것을 다짐하고 이에 속리산 국립공원의 연역을 밝힌다. 1970년 10월 3일 충청북도 지사 정해식 엮음

2025-11-12

피보다 깊은 정신의 혈맥, 한 마을의 뿌리가 되다

나무를 심어 그로 하여금 가훈을 삼거나 그의 삶을 좌우명으로 삼아 살아가는 가문이 있다는 사실을, 노거수를 쫓아다니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나무의 삶과 상징성은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요, 인문학의 교과서 같다는 생각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서원과 향교는 물론이고 각 가문의 종택, 제실, 정자에 살고 있는 나무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안동은 유교 문화, 선비 문화의 고장으로 우리 한국학의 본고장 정신문화의 수도이다. 안동은 발길 닿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옛 선비의 고고한 문화생활과 끈끈한 가족 사랑을 엿볼 수 있다. 경북 안동 정상 770번지 귀래정(歸來亭)에는 은행나무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귀래정이라는 말에서 삶의 철학이 묻어나고 은행나무에서 공자의 인의예지가 생각나고 노거수라는 말에서 삶의 경륜이 반짝인다. ‘귀래정 은행나무 노거수’는 낙포 이굉(李宏, 1441~1516)이라는 조선 선비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7호인 귀래정은 조선 중기에 문신이었던 이굉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조선 중기 이굉이 안동에 지은 ‘귀래정’ 후학양성·쉼터 ‘경북 문화재 17호’ 지정 500년 세월 귀래정에 터잡은 ‘은행나무’ 1982년 보호수 지정·키 18m·둘레 6m 유교문화·선비정신·가문의 정신 상징 귀래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도연맹의 귀래처사(歸來處士)에서 따온 말이다. 그는 1480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귀양을 가기도 한 사람이다. 1513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이곳에서 귀래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원래는 강변 가까이 있어 낙동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으나 도로 개설로 인하여 이곳으로 물러나 옮겨놓았다. 그는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李增)의 둘째 아들로 귀래정에 은행나무를 심어 후학을 가르쳤다. 이 은행나무는 이굉을 상징하는 가문의 가훈 역할을 반세기 동안 이어 오고 있다. 조선의 가문(家門)은 한 집의 울타리를 넘어, 나라의 기둥이자 사회의 뿌리였다. 피붙이의 혈맥으로 이어진 그 울타리 안에는 예의와 도리, 충과 효가 자라났고, 조상의 숨결과 후손의 뜻이 한 줄기로 이어졌다. 은행나무는 세월이 흘러도 푸른 기개를 잃지 않았고, 그 정신은 후손들에게로 이어져 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그의 후손인 임청각의 이상용은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으로 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가문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뿌리로 맺은 정신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 신의와 충절의 상징이 되었고, 조선의 가문은 그렇게 한 사람의 도덕을 세우고, 한 마을의 질서를 바로잡으며, 한 나라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가문은 피보다 깊은 정신의 혈맥이었고, 그 정신이 모여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문화의 줄기의 바탕이었다. 또한 그의 현손인 이응태(李應台 1556-1586) 가족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영화 제작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그 주인공은 부인(원이 엄마)의 애절한 편지이다. 1998년 안동시 정하동 택지 개발 시 30세의 젊은 나이에 숨진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써서 무덤의 관 속에 넣어 둔 것이 발견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병을 간호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어린 아들과 유복자를 두고 세상을 떠나자, 그 안타까운 마음과 사모하는 그리움을 편지로 썼다. 편지의 절절하고 애틋한 내용은 평소 가족의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500년의 세월이 지나 그 편지가 세상에 다시 빛을 보았을 때, 그 속에는 한 인간이 지닌 가장 순수한 사랑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피로 맺힌 인연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다리이며, 떠나도 사라지지 않는 온기의 흔적이다. 말 한마디, 손길 하나, 밥 한 그릇에 스며 있는 정, 그것이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가족애의 언어이며,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지는 자리다. 이곳 귀래정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뛰어놀며 나무를 보고 자란 이굉의 가정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다. 귀래정의 은행나무와 원이 엄마의 공원을 찾은 것은 한국산림문학 가을 문학기행(안동 이육사 발자취, 청송 객주문학관) 때 김선길 이사장님과 김선완 교수(회원)와 함께 짬을 내어 귀래정 은행나무와 원이 엄마 상을 답사 했다. 우리는 은행나무를 통하여 원이 엄마의 가족애와 고성이씨 가문의 독립운동 등 내력을 더 깊게 알게 되었다. 가족과 가문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은행나무를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나무는 옛날부터 이래저래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았다. 산림문학회는 문학이 숲이 되고 숲이 문학이 되는 날까지 나무와 숲, 생명, 환경을 모티브로 하여 문학으로 우리 삶의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는 문학단체이다. 귀래정 은행나무 노거수는 1982년 10월 26일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나이 500살, 키 18m, 가슴둘레 6m, 앉은 자리 폭이 16m인 거인이다. 원래는 귀래정 담장 안에 있던 나무를 지금은 담장 밖으로 나와 있다. 낙포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은행나무는 5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선비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귀래정에 은행나무가 없다면 그저 하나의 오래된 정자로 기억될 뿐일 것이다. 택리지에서도 하회의 옥연정, 임청각, 군자정과 함께 안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라고 했다. 또한 안동 팔경 중 제2경 귀래조운(歸來朝雲) 즉, 귀래정의 아침 구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귀래정을 품고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단풍이 가을 햇살에 반짝인다. 원이 엄마의 편지는… 원이 아버지에게 병술년 1586년 6월 초하룻날 아내가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 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이르시는 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 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가로 58.5cm, 세로 34.0cm 크기의 이 편지는 한지에 한글 고어체로 쓰여진 것으로 형의 만시 미투리, 의복 등 다른 출토 유물들도 함께 안동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무덤은 안동시 풍천면 어담리로 이장하였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11-05

'송시열 선생 유배지' 은행나무와 장기초등학교

조선 유배지의 고장, 경북 포항시 장기면 마현리 331번지, 장기초등학교 교내 운동장에 은행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살고 있다. 그는 17세기 조선의 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이 장기에 유배되어 머무르던 시절, 제자들을 가르치며 심은 나무라 전한다. 그때가 1675년 6월, 선생은 세월의 부침 속에서도 학문과 도의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장기에 남긴 것은 가르침만이 아니라, 그 뜻을 담은 한 알의 씨앗이 바로 은행나무였다. 그로부터 3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선생은 떠나고 세상은 변했으나, 그가 심은 나무는 그 자리를 지켰다. 바람과 비, 전쟁과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묵묵히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펼쳤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쉬었고, 아이들은 그 잎새 아래 자랐다. 이런 외형뿐만 아니라 이들의 내면 정신세계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정신이 세대를 거듭하며 나무는 선생을 대신하는 시간의 스승이 되었다. 1946년 3월 5일 은행나무는 장기초등학교의 교목으로 지정되었다. 어린이들의 성장과 배움의 상징이 되었고, 1972년 6월 9일 포항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시민 모두의 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1993년, 장기초등학교 제40회 졸업생들은 나무의 뜻을 기려 세월을 잇는 존경의 비석을 세웠다. 이렇게 나무를 통하여 선생의 가르침이 대를 이어오고 있다.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선생으로 또한 역사서로 그의 나이 350살, 키 14m, 몸 둘레는 2.3m의 노거수이다. 굵은 줄기마다 조선의 선비 정신이 서려 있고, 잎사귀마다 배움과 인내의 빛이 어른거린다. 인간의 생은 짧지만, 한 사람의 뜻이 나무로 이어질 때, 그것은 세대를 넘어 마을의 정신이 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는 바로 그런 삶의 흔적이자, 교훈의 나무로 오늘날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몸에 난 상흔으로 보아 그동안의 삶이 순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상흔은 고난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그 상흔이 선생의 당시 희생의 고통처럼 느껴져 마음이 아프다. 옛날 공자는 은행나무 그늘에서 제자들에게 인의와 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350년 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 장기에 은행나무를 심을 때도 아마 그런 뜻을 품었을 것이다. 거대한 줄기로 세월을 견디며, 잎이 돋고 지는 사이에도 나무는 묵묵히 배움의 상징이 되어 왔다. 지금 그 나무 곁에는 장기초등학교가 서 있다. 교실 창가를 스치는 바람은 마치 우암의 숨결처럼 아이들의 머리 위에 내려앉고, 아이들은 그늘에서 세상의 바름을 배운다. 공자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피어난 학문의 혼이 이곳에 옮겨와, 오늘의 아이들 마음속에서도 조용히 잎을 틔우고 있다. 푸른 바다와 맞닿은 포항 장기 들녘에는 한때 외로운 유배객들의 발자취가 머물렀다. 조정에서 밀려나 이곳으로 흘러든 선비들은 절망 속에서도 학문을 놓지 않았고, 그 고요한 세월을 사유와 깨달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암 송시열은 제자를 가르치며 도의의 뿌리를 심었고, 다산 정약용은 목민의 길을 떠올리며 새 세상을 그렸다. 그렇게 포항 장기는 한때의 유배지였으나, 지금은 사색과 성찰의 땅, 인간의 깊은 정신이 깃든 문화의 터전이 되었다. 포항 장기는 조선의 두 거목,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머물며 사유의 깊이를 더한 유배의 땅이다. 우암은 장기에서 예와 의리를 가르치며,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바름의 길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한 인간이 먼저 마음을 닦아야 나라가 바르게 선다는 신념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 뜻을 은행나무 한 그루에 담아 후세에 남겼다. 한 세기가 지나 다산 정약용 또한 장기의 바람과 바다를 마주하며 인간과 세상을 새롭게 성찰했다. 그는 고난을 학문으로 승화시켜 백성을 위한 정치, 실천적 정의의 길을 모색했다. 두 선비가 거쳐 간 장기는 유배의 고통이 사색의 빛으로 변한 곳, 그리고 오늘날까지 ‘자신을 닦아 세상을 바르게 한다’라는 수신위정(修身爲正)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성찰의 고장이다. 수신위정(修身爲正)은 자신을 먼저 바로 세움이 세상을 바르게 하는 첫걸음이라는 뜻이다. 장기초등학교가 동학의 기상과 동해의 정기를 품고 배움의 터를 연 지 백 년, 그 세월은 한결같이 이 뜻을 지켜 온 시간이었다. 교정의 바람 속에서 아이들은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법을 배우고, 바른 품성과 정직한 마음을 길러 사회의 등불이 되었다. 조국의 어려움 앞에서는 나라를 위해 헌신했고, 평화로운 시대에는 근면과 성실로 이웃을 밝혀 왔다. 수신위정의 가르침은 단지 공부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방향이었다. 장기초등학교의 백 년은 바로 그 철학이 피워낸 푸른 역사이며, 앞으로의 백 년 또한 그 뿌리 위에서 더 깊고 단단하게 자랄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이곳 출신 주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애국지사 장헌문(蔣憲文) 의병장과 엄주동(嚴柱東) 선생 추모비가 은행나무 곁에 세워져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장헌문(蔣憲文) 의병장은 김재홍, 김복선 등과 뜻을 모아 300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영일을 중심으로 경주, 죽장, 흥해, 청하 등지에서 항전하며 정환직, 신돌석 의진과 연계해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고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애국지사 엄주동 선생은 이우용, 최규익 등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피탈 당하고 있는 각종 산업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함께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쳤다.”라고 새겨진 추모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상징하는 은행나무 노거수 곁에 세워져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과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장기를 방문하신 일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최고의 학문을 접할 수 있는 큰 행운이었다. 두 분이 남긴 가르침과 덕망은 오랫동안 장기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고, 그 고매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이 글은 포항 장기의 자긍심과 학문의 전통을 기리는 마음에서 ‘장기 발전연구회’가 돌비석에 새겨 놓았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우암 송시열이 망실(亡室) 이씨(李氏) 에게 올린 제문 아, 나와 당신이 부부로 맺은 지가 지금 5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나의 가난함에 쪼들리어. 거친 밥도 항상 넉넉하지 못하여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던 그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쌓은 앙화 때문에 아들과 딸이 많이 요절하였으니, 그 슬픔은 살을 도려내듯이 아프고 독하여 사람들이 견디어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근세(近歲)에 이르러서는 내가 화를 입어서 당신과 떨어져 산 지가 이제 4년이 되었는데, 때때로 나에 대해 들려오는 놀랍고 두려운 일들 때문에 마음을 녹이고 창자를 졸리면서 두려움에 애타고 들볶이던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끝내 몸이 지쳐 병에 걸려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시종을 따져보면 나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습니다. 타고난 운명이 좋지 않아서 이같이 어질지 못한 사람과 짝이 되었으니, 당신이야 비록 원망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내 어찌 부끄러운 마음을 이겨내겠습니까. 우암 송시열은 71세였던 1677년 3월 22일 부인 이씨의 상을 당하여 멀리서 통곡했다. -장기 유배문화 체험촌 우암의 벽 기록을 옮김

2025-10-29

천년고도 불국사의 가을, 불국토를 품다

경주라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천년고도의 깊은 숨결이고, 그 중심에 우뚝 선 토함산과 남산은 마치 거대한 역사박물관과도 같다. 토함산 자락을 따라 오르면 불국사의 장엄한 기와가 햇살을 받아 빛나고, 다보탑과 석가탑은 천년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지혜의 상징처럼 서 있다. 토함산 정상에서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석굴암은 고요히 부처의 미소를 간직한 채 세상의 번뇌를 감싸안는다. 토함산과 남산은 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신라인의 정신과 예술, 그리고 우리 민족의 혼을 품은 살아 있는 시간의 성전이다. 불국사 가는 토함산 끝자락에 뿌리내려 키 17m·몸둘레 6m·앉은자리 폭 29m 700년 오랜 세월 살아온 마을의 큰 어른 정자·복지회관 품고 사람들 삶 속에 녹아 나누는 담소·두 손 모아 기도하던 간절함 아이들 해맑은 미소까지 고스란히 스며 토함산 자락에 자리한 가을의 불국사는 그 이름처럼 불국토를 옮겨 놓은 듯 장엄하면서도 서정적이다. 단풍잎이 금빛과 붉은빛으로 물들어 경내를 수놓으면, 청아한 기와지붕 위로 흩날리는 낙엽은 천년 세월을 품은 고즈넉한 숨결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를 이룬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가을 햇살 속에서 더욱 단단히 빛나며, 경내를 거니는 발걸음마다 신라인이 꿈꾸던 이상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불국사의 가을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불심과 평화의 빛을 일깨워 주는 순간이다. 불국토의 상징인 불국사로 가는 토함산 끝자락 마동 588번지, 하천 변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살아가고 있다. 그는 700년 세월을 살아온 마을의 어른이다. 키 17m, 몸 둘레 6m, 앉은 자리 폭 29m나 되는 거인의 노인이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는 정자와 복지회관을 품고 있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든 존재가 되었다. 주민들은 그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다. 세 개의 지팡이를 선물하여 노령의 몸을 지탱하게 했다. 그리고 작은 원통형 돌담을 경계로 함부로 접근을 금지했다. 나무 아래 제단을 만들어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동신제를 지내며,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한다. 세월 앞에 조금씩 속을 비워내며 쇠약해지는 듯 보이지만, 느티나무는 여전히 제 역할을 잃지 않는다. 한 줄기에서는 먼저 잎이 돋고 꽃이 피어나고, 다른 줄기에서는 늦게 잎과 꽃이 터져 나오니, 같은 뿌리이되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묘한 대비가 눈길을 끈다. 보기에 따라 한 나무인 것 같기도 하고 두 나무가 하나의 나무로 된 연리목 같기도 하다. 뿌리는 분명히 하나로 연결된 연리근 나무일 것이다. 나무줄기 높이 2미터에서 다섯 가지가 뻗어 올라 서로 얽히고 합쳐진 연리목의 나무임이 분명해 보였다. 주민들은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크기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회상하고 있다. 잎의 크기와 무성함이 줄어든 것을 보며 나무의 나이를 실감한다. 비 오는 날이면 줄기 속에서 스며 나온 물이 고여 흐른다는데, 그 빈속조차 생명을 품은 흔적처럼 여겨진다. 불국사가 가까이 있는 이곳에서, 마동 느티나무는 세월의 집, 사람들의 기도를 담아온 신목(神木)으로 남아 지금도 조용히 마을을 품고 있다. 뿌리에서 갈라져도 결국 함께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닮았다. 나무의 곁에 앉으면 자갈이 깔린 바닥 너머로 잔잔히 흐르는 하천의 물소리와 함께 천년고도의 숨결이 들려오는 듯하다. 마을이란 집들이 모여 있는 거주지만은 아니다. 세월의 결을 따라 전통과 기억이 겹겹이 쌓여 형성된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노거수는 마을의 얼굴이자 품격을 드러내는 기둥으로, 수백 년 동안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마을의 역사를 증언한다. 지도 위의 작은 점에 불과한 마을은 노거수를 통해 이름과 이야기를 얻고, 외부에 그 존재의 위상을 드러낸다. 노거수가 없는 마을은 제단 없는 의식과 같아 중심이 희미하고, 광장이 없는 도성처럼 모임의 자리가 비어 있다. 그러나 노거수가 있는 마을은 그 자체로 풍경이 되어, 아늑한 그늘과 푸른 수관이 마을을 감싸안으며 사람들에게 안도와 휴식을 준다. 웅장한 수형은 마을의 품격을 한층 높이고, 사계절의 빛을 담아내며 마을 경관을 풍성하고 풍요롭게 한다. 결국 한 그루의 노거수는 마을의 정신을 세우고 삶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문화적 상징이자 공동체의 심장이다. 마을의 노거수는 오랜 세월 한자리에 서서 주민들의 삶을 지켜본 따뜻한 증인이다. 그늘에 모여 담소를 나누던 이들의 웃음소리, 제의를 올리며 두 손 모아 기도하던 간절한 마음,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까지 모두 나무의 가지와 잎새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노거수는 바람과 비를 막아주는 보호막이자, 사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며 주민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건네는 마을의 큰 품이다. 그 존재만으로도 노거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준다. 굵은 줄기와 드넓은 수관은 마을의 품격을 높이고, 그 아늑한 그늘은 언제나 열려 있는 쉼터가 된다. 농사일에 지친 어른에게는 평온을, 뛰노는 아이에게는 자유를, 외지인에게는 마을의 아름다움과 따스한 기운을 선물한다. 이렇듯 노거수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공동체의 마음을 한데 모아주는 살아 있는 기둥이자 감동의 근원이다. 노거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교육적이고 정서적인 스승이 된다. 그 그늘에 어른들은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역사를 전하고, 아이들은 자연의 이치를 배우며 자란다. 세월을 견뎌온 굳건한 줄기는 인내와 끈기를 가르치고, 사계절 따라 변하는 수관은 삶의 무상함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일깨운다. 또한 그 아늑한 품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평온을 주어, 마음을 달래고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정서적 균형을 길러준다. 마을 노거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우주이자 생명의 집합체이다. 굵은 줄기의 갈라진 틈은 올빼미와 딱따구리의 보금자리가 되고, 무성한 수관은 여름의 햇볕을 가려 새와 곤충들에게 그늘을 내어준다. 떨어진 잎은 땅으로 돌아가 흙을 살찌우고, 그 속에서 곤충과 균류가 자라나 또 다른 생명의 터전을 마련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품은 공간은 수많은 종에게 삶을 잇는 다리가 되어, 보이지 않는 생명의 사슬을 이어준다. 이렇게 느티나무는 마을 생태계의 심장으로 뛰고 있다. 바람을 흡수하고 뿌리로 물길을 잡아 토양을 지탱하며, 그늘은 미세 기후를 조절해 사람과 생물 모두에게 안온한 환경을 마련한다. 거대한 수형 속에서 이어지는 생명들의 공존은 마치 교향곡처럼 조화롭고 서정적이다. 그래서 노거수 앞에 서면, 생명이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거대한 순환과 자연의 질서를 마주하게 된다. 경주에서 열리는 2025년 APEC 정상회의는 세계가 모여 미래의 협력과 지속가능성을 논의하는 자리이지만, 그 무대 뒤에는 천년고도 경주가 품은 자연자산이 살아 있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노거수들은 인간의 문명을 넘어선 생명의 시간과 기억을 간직한 존재들이다. 경주의 노거수와 숲을 세계에 드러내는 일은,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지구 공동의 유산임을 알리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아닐까 싶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노거수의 외과 수술 지역에 잔존하는 노거수는 그 지역 삼림의 임령(林齡)보다도 훨씬 수령(樹齡)이 오래된 경우가 많다. 지역에서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유일한 고령의 잔존 생물체이며, 고령의 생물체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생물 종들에게 유일한 삶의 터전으로 기여하는 핵심 서식처 자원(생물 종과 개체들의 서식을 제어하는 생태적 요소는 조건과 자원이며, 조건이 무제한이라면 자원은 소모되어 버림으로써 제한적 요소임)이다. 올빼미류와 딱따구리류는 노거수를 필요로 하는 조류들이며, 엄청난 수의 분해자들은 노거수에 의존한다. 향토 문화적 요소로서 잔존하는 노거수일지라도 노거수 개체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늙은 개체는 필연적으로 분해자들에 의하여 썩어가는 부위가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보다 노쇠한 노거수 개체에서 관찰되는 생태적 메커니즘에 ‘외과수술’이라는 인위적 노거수 관리는 그러한 조류들의 서식을 크게 위협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민속적 목적에 의한 노거수의 경우 적절한 외과수술이 적용될 수도 있다. 해당 노거수에 대한 주요 생물종의 서식 상황에 대한 모니터링을 통한 면밀한 생태적 조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2025-10-22

'맑은 바람처럼 사리사욕 버린 재상'을 닮은 나무

오늘날 언론에 비치는 선출직 고위 공직자, 소위 말하는 의원 나리들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비리에 연루된 소식을 들을 때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실망과 허탈감을 느낀다.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야 할 이들이 책임과 도리를 저버린 채 개인의 이익을 좇는 현실은, 공동체 전체를 어둡게 만들고 신뢰를 흔들어 놓는다. 이럴 때 나는 세종을 도와 나라의 기틀을 다졌던 황희 정승을 떠올린다. 청렴과 인자함으로 백성을 보듬고, 사리보다는 공익을 좇으며 청백리의 모범이 되었던 그의 삶은 오늘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세월은 흘러 시대와 제도는 달라졌지만, 참된 정치의 본질은 여전히 ‘깨끗한 마음’과 ‘곧은 뜻’에 있음을 그는 일찍이 몸소 증명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길 역시 그 맑은 정신과 청백의 자세 속에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조선 황희 정승 7대손 황시간 선생이 심은 장수황씨 종택 마당 400살 넘은 탱자나무 청렴·절개의 상징으로 수백 년 자리 지켜 1982년 보호수·1999년 경상북도기념물 2021년 천연기념물로 승격돼 보호 관리 날카로운 가시로 집안 지킨 탱자나무 옆 배롱나무 연리지도 함께 가문 지탱해 와 조선 초 명재상 황희는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로 황군서(黃君瑞)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관으로 관직을 시작한 뒤, 조선조에 들어와 판서, 대사헌 등을 두루 거쳐 세종 13년, 영의정 자리에 올라 무려 18년 동안 세종을 보좌하여 훌륭한 공적을 남겼다. 그는 평소 인자하고 깨끗한 관직 생활로 청백리로서 귀감이 되었다. 권세보다 도덕을 숭상하고, 탐욕보다 청렴을 지켰으며, 인자하고 포용력 있는 태도로 신하와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청백리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삶은 세속의 욕망에 물들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향한 곧은 뜻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후세에는 그를 두고 ‘맑은 바람처럼 사리사욕을 버린 참된 재상’이라 칭송한다. 저서 방촌집은 그의 학문과 사유를 남겨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황희의 7대손 황시간 선생(1558-1642)은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집을 짓고, 마당 한가운데 탱자나무를 심었다. 이 탱자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려 단단히 버티며, 날카로운 가시로 자신의 몸을 지키고, 작고 쓴 열매를 꿋꿋이 맺었다. 화려한 풍요가 아니라 정신의 올곧음을 중히 여기는 가풍처럼, 탱자나무는 청렴과 절개의 상징으로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선비의 삶이란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공정과 의리를 좇으며, 학문과 도덕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길이다. 황시간 선생은 말이 아닌 탱자나무를 가훈으로 삼아 후손들에게 가문의 기둥이 무엇인지를 전하고자 했을 것이다. 권세와 이익 앞에서도 마음을 흐리지 말고, 맑고 곧은 길을 걸으라는 무언의 가르침, 그것이 탱자나무에 담긴 정신이 아닐까 싶다. 탱자나무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세월을 넘어오는 바람 속에서 후손들에게 조용히 뜻깊은 가훈을 전하고 있다. 탱자나무 노거수의 나이는 약 400살, 키 6.3m, 몸 둘레 2.1m, 앉은 자리 폭은 동서 9.2m, 남북 10.3m이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1번지 장수황씨 종택 마당에 살아가고 있다. 1982년 10월 26일 보호수로 시작하여 1999년 11월 25일 경상북도기념물 제135호, 마침내 2021년 10월 29일 천연기념물로 승격하여 자연유산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 탱자나무는 경계 울타리로 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담장용이나 논밭 두렁이나 옛날 군사적 요충지에 적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또는 중한 죄수를 가두어 두는 위리안치에 주로 심었다. 그러나 탱자나무를 가훈으로 삼아 마당에 심고 늘상 보면서 가문의 유훈처럼 마음에 새기도록 한 예는 실로 보기에 드물고 흔치 않은 일로 그 지혜로움이 돋보인다. | 장수황씨 종택은 사정공파 종가로 세월을 품은 담장 너머로 고요한 기품을 뿜어낸다. 황시간 선생이 거처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집은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와 사당이 정연하게 어깨를 맞대며 서 있다. 방촌 황희 정승의 분재기와 벼루가 보존된 유물관은 이곳이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공간임을 일깨운다. 탱자나무와 오래된 기와 한 장마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한 가문의 뿌리를 지키는 상징이자 우리 모두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고택의 고즈넉한 마당에 서면, 옛 선비들의 청렴한 기상이 바람결에 스며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묵묵히 말을 건넨다. 문경 대하리의 장수황씨 종택은 수백 년 세월을 품은 채 선비 정신을 지켜온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고즈넉이 서 있는 마당 한가운데에는 천연기념물 탱자나무와 연리지 배롱나무 노거수가 어른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고 서 있다. 노거수는 한 가문의 역사와 정신을 묵묵히 지탱해 온 상징이다. 사계절의 햇살과 비바람을 함께 견디며 살아온 탱자나무와 배롱나무는 조상의 숨결이 깃든 종택과 한 몸처럼 어울려 있다. 굳건히 뻗은 뿌리는 가문의 뿌리를 닮았고, 해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순환은 선비 정신의 끊임없는 계승을 떠올리게 한다. 날카로운 가시로 집안을 지켜낸 탱자나무는 가문 울타리로 그리고 여름마다 붉게 타오르는 배롱나무 연리지는 꺾이지 않는 기개와 효도, 사랑의 상징물이 되었다. 지난 시절 공직에 있을 때 동료이며 친구인 황조연 교수는 황희 정승의 직계 후손임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또한 청렴을 몸소 실현하였다. 황희 정승의 청백 정신을 품은 탱자나무는 후손들의 삶을 묵묵히 지켜오는 가훈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슴에도 맑은 바람 같은 울림을 전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문경 장수황씨 종택, 숙청사(肅淸祠)와 숭모각(崇慕閣)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236호.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6에 위치했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은 경북 문경에 있는 양반 가옥으로 장수황씨 사정공파 종택(長水黃氏 司正公派宗宅)이며 조선 초기 재상인 황희 정승의 후손 황시간 선생(1558∼1642)이 살았던 곳이다. 이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중문채, 고방채가 있고 우측에 별도로 사당 및 유물관이 담장 내 배치되어 있으며 유물관에는 방촌 황희 선생의 분재기와 벼루 등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문경 장수황씨 종택 내 숙청사(肅淸祠)는 ‘방촌(厖村) 황희(黃喜)’의 영정을 모신 곳, 숭모각(崇慕閣)은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16세기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위치는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사묘가 있는 곳에 있었으며 1960년대에 종택 내의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황방촌유물(黃厖村遺物)은 경북 유형문화유산 제123호. 조선 전기 황희 정승의 유물로서 옥으로 된 종이 누르개(옥서진) 1쌍, 산호로 된 갓끈 1종, 옥 벼루 1개, 코뿔소의 뿔로 된 띠(서각대) 1개, 재산 분할문서 1매(분재문서) 들이다. 홍치(弘治) 13년 경신년(庚申年) 연산군 6년(1500년) 황희(黃喜)의 증손인 정(庭)은 아들 사웅(士雄)에게 특별히 논, 밭을 지급하고 상국(相國)의 유물이 몇 점뿐이나 종가에서 잘 보존하여 잃어지지 말도록 하고 후일 다른 자손 중에 이를 두고 다투는 자가 있으면, 재산분할 문서(분재문서)로 해결하라고 밝혔다.

2025-10-15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국내 유일의 카르스트 습지

하천 주변도 아니고 산 정상에 람사르가 지정한 습지가 있다고?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란 표정으로 반문한 대붕 아우와 함께 직접 그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문경 돌리네 습지로 향했다. 돌리네 습지가 위치한 도리실 마을은 문경시 산북면 우곡리 읍실 마을에서 산 정상으로 1.2km 더 올라가야 했다. 우곡리 읍실 마을만 해도 그렇다. 대승사로 가는 도로를 벗어나 산자락을 부여잡고 굽이 돌고 돌면서 산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었다. 옛날 같으면 전쟁이 일어나도 모를 깊은 산골에 숨은 마을이었다. 산속 마을답게 마을 어귀에는 수백 년 넘은 느티나무 노거수가 군집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다. 나무줄기 둘레만도 5m나 되는 느티나무 노거수에서 마을의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노거수는 마을의 상징물이며 수호신으로 마을의 품격을 높여주었다. 도리실 마을은 이제 태고의 습지로 돌아가 전설로 남고 음실 마을이 돌리네 습지의 주인이 되었다. 돌리네 습지 2017년 람사르 습지 지정 희귀식물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며 지질학·생태학적으로 가치 인정받아 한때 과수원과 논밭으로 쓰이던 땅 이제는 생명의 숨결을 품은 보고로 습지와 사람, 두 세계 나란히 걸으며 자연과 인간 공존하는 삶의 길 일깨워 돌리네 습지는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국내 유일의 카르스트 습지로서, 2017년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다. 돌리네라는 독특한 지형 속에 희귀식물과 멸종위기종이 서식하며, 지질학적, 생태학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람사르 지정은 습지가 지닌 생물다양성과 수문학적 기능을 국제적으로 공유하고 후세에 전승해야 할 자산으로 보존할 의무를 부여한 것이다. 또한 지역 주민들에게는 지속 가능한 이용을 통해 생태관광과 교육 자원으로 발전시킬 기회를 열어 주어, 자연 보전과 지역 사회의 공존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담고 있었다. 문경 돌리네 습지는 한때 과수원과 논밭으로 쓰이던 땅이 이제는 생명의 숨결을 품은 보고가 되었다. 농약이 사라진 자리에 풀꽃이 돌아오고, 새와 곤충이 다시 날아들어 자연성이 회복되자 마을은 활기가 넘쳤다. 주민들은 습지를 중심으로 생태관광과 환경교육에 나서며 새로운 소득을 얻었고, 마을은 행정의 지원 속에 주거와 생활 인프라가 정비되어 삶의 질도 한층 빛을 더했다. 습지와 사람, 두 세계가 나란히 걸으며 서로를 살리는 윈윈의 길이 열린 것이다. 습지의 생태적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지난 시절, 습지를 메워 주택, 산업단지, 공용지로 사용하여 가뭄과 홍수가 빈번하였고 생물다양성 감소 등 안타까운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석회암 지대가 품은 습지는 빗물을 저장해 맑은 물을 선물하고, 홍수와 가뭄을 완화하며 천연의 방패가 되어 주었다. 멸종위기 생물이 깃들고 희귀식물이 자라는 곳, 그 풍경은 자연의 장면을 넘어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생태계의 어머니와도 같다. 또한 고요히 잠든 습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내고, 역사와 시간이 새겨진 풍경은 마음의 쉼터가 되어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삶의 길을 일깨워 주었다. 습지 숲은 물과 숲이 만난 신비로운 세계이다. 물에 잠긴 뿌리와 습지에 기대어 자라는 나무들, 그 사이를 누비는 새와 양서류, 곤충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생태계의 든든한 기둥이 된다. 그 풍요로운 생명력은 인간에게 식량과 의약품, 맑은 공기와 물을 내어주며, 동시에 영감과 문화, 정신적 위안을 건네준다. 돌리네 습지는 그렇게 다양성과 조화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서사시이다. 돌리네 습지는 굴봉산 정상부에 아늑히 자리한 산지형 습지다. 이곳은 육상 초원 습지 생태계가 공존하는 드문 공간으로, 좁은 면적에도 꼬리진달래, 낙지다리, 쥐방울덩굴, 들통발 같은 희귀 식물이 피어나고, 삵과 수달, 담비가 숲을 누비며, 새매와 붉은배새매, 원앙, 수리부엉이, 소쩍새, 황조롱이 같은 멸종위기 조류가 살아왔다. 처음 조사에서는 산림청이 지정한 위기 식물 3종을 비롯해 731종의 야생생물이 확인되었으나, 주민들의 보호와 보전의 손길이 더해지면서 지금은 200여 종이 늘어난 932종의 생명이 해발 290미터 바닥 위에서 어우러진다. 돌리네 습지는 그렇게 작은 그릇에 큰 생명을 담아낸, 풍요로운 생태의 무대가 되었다. 돌리네 습지가 품은 마을의 옛 지명들은 세월을 넘어 살아 있는 이야기로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동그랗게 돈 모양에서 비롯된 돌실(도리실) 마을, 제사를 지내던 제궁골, 참새가 지저귀던 참새골, 그리고 천 년 된 팽나무의 이름을 남긴 팽나모리까지 이름마다 마을 사람들의 삶과 신앙이 깃들어 있다. 옥황상제의 병을 낫게 했다는 전설의 옥녀샘, 나뭇가지가 동서로 갈라져 나무꾼들의 쉼터가 된 동서나무, 습지를 넘어가는 돌재 고개, 바다라 불린 서긋바다와 가파른 암벽 서긋이마, 성황나무가 있던 서낭굿재 또한 기억 속 풍경으로 남아 있다. 옹기를 굽던 정골, 참나무가 빽빽하던 참나무배기, 소의 입을 닮은 우구지골과 소의 뿔에 비유된 각골에 이르기까지 그 옛날 사람들의 눈과 마음이 빚어낸 이름들은 삶의 흔적이자 전설처럼 지금도 습지와 마을에 숨 쉬고 있다. 그 옛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김한웅 문화해설가의 목소리에는 세월을 꿰뚫는 향수가 배어 있었다. 과수원이던 땅,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습지, 겨울이면 얼음판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 등 모두가 생생한 삶의 무대였다. 버드나무 껍질로 키와 소쿠리를 엮고, 메기와 붕어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던 시절, 습지는 마을의 생명줄이자 보물창고였다. 장마철 두 달 동안 잠긴 물 때문에, 농사는 대마와 담배밭으로 변하고 그로 인해 물동이를 등에 지고 또 머리에 이고는 힘든 비탈길 논밭을 오르내렸다. 그뿐만 아니다. 황토에 발이 빠져 오르내리던 고단한 삶은 이제 이 땅의 기억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70가구의 마을은 23가구만 남아 노년의 주민들이 조용히 지켜가지만, 주말이면 수백 명이 이곳을 찾아오고 서울에서 먼 길을 달려오는 발걸음도 있다. 식당 하나 없는 불편함조차 오히려 순박한 정취로 어우러지고, 무료로 열려 있는 습지는 여전히 마을과 사람을 품으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살아 있는 이야기의 무대가 되고 있다. 머루와 다래, 으름과 오미자가 얽히고설켜 만든 300미터의 초록 터널은 한 걸음마다 향긋한 내음을 흘려내며 우리를 맞았다. 그 길 끝에 모습을 드러낸 돌리네 습지는 산 정상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세계, 마치 하늘이 내려앉은 신천지 같았다. 연못 위에 걸린 구름은 물결에 흔들리며 빛을 쏟아냈고, 그 곁을 산책하는 우리는 잠시나마 신선이 된 듯 가벼웠다. 전망대에서 대붕 아우와 나란히 사진을 찍으며, 전설로만 남은 도리실 마을의 고단한 삶을 떠올렸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추억이 되어, 우리 마음속에 한 장의 그림처럼 새겨졌다. 전동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다시 지나던 덩굴 터널 속에서 차를 세우고 주워 먹은 다래 한 줌은 달콤하고 향긋했다. 아우가 “이 맛은 잊을 수 없겠다”라며 웃었을 때, 돌리네 습지는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머무는 풍경이 되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람사르 습지 지정 협약의 주요 내용은… 정식 명칭 : 습지에 관한 특별히 중요한 국제협약 채택 : 1971년 2월 2일, 이란 람사르에서 채택 목적 : 세계적으로 중요한 습지를 보전하고, 지속 가능한 이용을 촉진 행정 기구 : 스위스 글란(Gland) 소재 IUCN 사무국 주요 내용 : 습지는 철새 이동 등으로 국제 협력이 필수, 공동 연구, 정보 교류, 공동 관리 돌리네 습지 지정일 : 2017년 6월 15일 (환경부 고시 제2017-117호) 위치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우곡리 굴봉산 정상부. 지정 면적 : 49만 4434㎡

2025-10-01

신라 고갯길, 천년고도 문경 하늘재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여름의 더위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며 좀처럼 물러날 기미가 없다. 대구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며, 우리는 삼국시대 신라·백제·고구려가 서로를 오가던 고갯길,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삼국시대 신라가 처음으로 개척한 문경 하늘재로 향했다. 그 옛날에는 봇짐을 지거나 말을 타고 넘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자동차의 바퀴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거리를 줄인다. 그러나 길을 오르는 사람의 마음은 다르지 않다. 고갯마루에 닿자, 흰 구름은 하늘 높이 솟아올라 푸른빛을 가르며 무심히 흘러가고 있다.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식혀 주고, 우리는 정자에 앉아 옛사람들의 자취를 생각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하늘의 구름과 땅의 숲, 자연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데, 인간 삶의 시스템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눈앞에 펼쳐진 포암산 베바위를 바라보며, 이 재를 넘나들던 옛사람들의 역사와 애환을 그려 보았다. 신라 아달라왕 3년 북진 위해 길 열어 한강과 낙동강 잇던 가장 이른 고갯길 사람·사상·물자와 함께 불교도 전해져 오늘날엔 배움과 치유 공간으로 발길 잘 다듬어진 숲길 나무들로 울창하며 오솔길은 굽이치는 물길처럼 이어져 “민족의 숨결과 역사가 함께 흐르던 길 우리에게 시련을 넘어설 힘 일깨워줘” 하늘재는 신라가 처음 개척한 역사의 길로 삼국의 군사들이 오르내리며 흘린 땀과 한숨이 배어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온달 장군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평강공주의 내조와 자신의 노력을 바탕으로 장군이 되었다. 신라와 맞서 싸우던 그는 결국 전장에서 쓰러졌지만, 그의 죽음은 나라를 되찾으려는 고구려의 간절한 뜻을 상징했다. 개인의 비극을 넘어, 국토 회복의 열망과 민족의 충정을 일깨워주는 서사로 지금까지 전해오면서 가슴을 저리게 한다. 또한 고구려 실권자 연개소문은 백제와 함께 반(反)신라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 손을 잡아 나당 연합군을 형성하여 여제 연합군에 맞섰다. 645년, 당 태종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연개소문은 안시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당의 침략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고구려는 결국 나당 연합군에 의해 무너진다. 온달이 빼앗긴 국토를 되찾기 위해 맞선 신라와 갈등은 한 개인의 비극으로 끝났다면, 연개소문의 대립은 국가의 흥망으로 이어져 삼국시대의 거대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이 고개를 넘어 삼국통일의 뜻을 이루었으나 통일신라 말에는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안고 이 길을 넘어갔다. 이렇듯 하늘재는 통일의 꿈과 망국의 설움이 교차한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아달라왕 3년, 서기 156년 북진을 위해 이 길을 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던 가장 이른 고갯길, 사람과 사상과 물자가 오가던 통로였다. 불교 또한 이 길을 따라 전해졌다. 고구려 승려 아도(阿道)가 불법을 전할 때, 지형상 가장 그럴듯한 길목이 바로 이 하늘재였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고개 남쪽의 관음리와 북쪽의 미륵리라는 지명은 불심을 전하는 이름 그대로다. 관세음을 찾고 미륵을 기다리던 신앙의 기운이 고개에 서려 있다. 지금도 관음사와 포암사의 법고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지며, 폐사 터의 기왓조각과 옛 주막터의 흙냄새가 옛 발자취를 떠올리게 한다. 신라 이차돈의 순교 이전부터 이미 이 고개에는 신심의 불씨가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문경새재에 자리를 내어주었지만, 고개와 산사, 마을들은 오래된 길이 품은 위안과 인연을 오늘까지 간직하고 있다. 하늘재 고갯마루 정상에는 ‘백두대간 하늘재’라 새긴 비석이 서 있고, 그 맞은편에는 ‘계림령 유허비’가 빼곡한 글자를 품은 채 옛 역사를 증언한다. 높이 520m에 불과한 고개지만, 백두대간의 포암산과 탄항산 사이에 자리하여 한반도의 등줄기를 잇는 요지이다. 하늘과 맞닿은 듯한 이름처럼, 이 길은 초월의 상징으로 읽혔다. 지금은 명승 49호로 지정되어 그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고개란 늘 인간의 삶을 비유한다. 높은 산이 가로막아도 그 너머로 길은 이어지고, 사람은 언젠가 그 고개를 넘는다. 그래서 ‘재’를 넘는 일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극복과 인내의 상징이며,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문턱이다. 이 길은 단절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하며, 낯선 세계와 소통하게 하는 깊은 강을 건너는 다리처럼 험준한 산을 넘는 재였다. 하늘재를 넘던 발걸음마다 고난과 희망, 슬픔과 기쁨이 함께 배어 있는 아리랑 고갯길이 되었다. 고갯길만을 줄기차게 찾아다니며 그 뜻을 음미하고 살아가는 마니아도 있고 보면 고갯길은 곧 삶의 여정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늘재 숲길은 사단법인 산과 자연의 친구 우이령 사람들과 남부지방산림청 영주국유림관리소가 협약을 맺어 ‘단체의 숲’으로 관리되고 있다. 안내판에는 숲 가꾸기 체험, 휴양과 문화 체험, 산림보호 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소개되어 있었다. 하늘재는 옛날에는 길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배움과 치유의 공간으로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숲길을 걷고 있었다. 우리 또한 주차장에서 출발해 관음정사와 포암사를 지나 표지석까지 올랐다. 그 길은 2.9km였고, 충주 미륵리까지 이어지면 5.4km에 달했다. 잘 다듬어진 숲길은 나무들로 울창했고, 오솔길은 굽이져 흐르는 물길처럼 이어졌다. 고갯마루를 찾는 발걸음은 사람의 흐름이자 세월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숲은 쉼 없이 하늘에 물을 뿌려 더위를 식혀 주었고, 나뭇잎은 바람의 부채가 되어 에어컨과 선풍기가 따로 필요 없게 했다. 자줏빛 물봉선화는 호젓한 숲길을 지나는 이들을 반기듯 피어 있었다. 오늘은 대붕 아우와 함께 하늘재를 찾았다. 동생은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래 걷지 못했지만, 다음에 다시 와서는 마음껏 걸어 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말은 숲의 위안처럼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숲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보약이 숨어 있는 듯했고, 매미 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서로 어울려 자연의 오케스트라를 이루었다. 나는 그 순간을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두고 싶어 가만히 심호흡했다. 풀잎 향은 맑았고, 흙냄새는 오래된 시간의 기억을 끌어올렸다. 몸도 마음도 최상의 상태로 정화되는 듯했다. 하늘재는 민족의 숨결이 오가던 고갯길, 역사가 흐르던 고갯길이며, 지금도 우리에게 시련을 넘어설 힘을 일깨워주는 숲길이다. 언젠가 다시 찾아, 이 길 위에 쌓인 이야기와 초월의 숨결을 더 깊이 마시고 싶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하늘재는… 하늘재 옛길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 525m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로 삼국시대 156년대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하였다. 고구려 온돌과 연개소문은 빼앗긴 하늘재를 다시 찾기 위해 끈질긴 전쟁을 벌였으며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몽진할 때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렇듯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조선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전에는 계림령(鷄林領), 대원령, 지릅재 등으로 불렀으나 요즘에는 거의 모든 지도에 하늘재라 표기하고 있다. 오래된 세월만큼 길 양쪽에는 전나무 굴참나무 상수리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2025-09-24

‘별의 고장’ 영천, 신기한 연리목 노거수 발견

경북 영천시는 별의 고장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1.8m 반사 망원경과 태양 플레어 망원경 등 다수의 천체 관측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보현산천문대가 있다. 국내에서 발견한 소행성 13개 중 12개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1.8m 반사 망원경의 이름은 도약이며, 1만 원권 지폐의 뒷면 도안에도 존재한다. 광활한 우주의 별들을 관측한다는 것은 마음 설레는 일이다. 대구와 포항 간 고속도로 영천 나들목을 빠져나와 청송과 보현산천문대로 가는 구불구불한 길을 가다 보면 오리장 숲(五里長林)을 만나게 된다. 우주의 소행성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오리장 숲에서 신기한 연리목 노거수를 발견했다. 지난 청송군청에 근무할 때 대구를 오갈 때면 가끔 내려서 숲속의 연리근 회화나무와 느티나무를 만나 그 신비함을 체험하곤 했다. 아름드리 거목 울창한 ‘오리장 숲’… 수령 150∼300년 된 300여 그루 서식·천연기념물 제404호 지정 회화·느티나무 한 몸처럼 자라난 연리목, 사랑나무라 불리며 세 번 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도 아름드리 거목의 울창한 숲이다. 수령이 150년에서 300년, 줄기 둘레 3m, 키 10여m 이상의 노거수 300여 그루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도로와 하천을 따라 길게 조성된 숲은 왕버들, 말채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은행나무, 굴참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노거수가 살아가고 있다. 오리장 숲은 1999년 4월 6일 천연기념물 제404호로 지정되어 나라에서 자연유산으로 보호 관리하고 있다. 예부터 마을 앞을 따라 오리(五里)에 걸쳐 뻗어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도로 확장과 개발로 본래의 숲이 많이 사라지고 군락지 몇 곳만 남았지만, 여전히 마을을 품에 안은 채 푸르름을 자랑하고 서 있다. 숲에 들어서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거대한 나무들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연리목(連理木)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이다. 다른 두 뿌리에서 돋아난 나무가 몸을 맞대고 한 생명을 이루듯 자라난 나무이다. 자천리 오리장 숲의 연리목은 나무 둘레만도 4m가 넘는다. 마치 회화나무가 느티나무를 양팔로 안은 모습이다. 예로부터 회화나무는 학자수(學者樹)라 하여 선비 나무라 하였다. 그리고 느티나무는 오지랖이 넓은 수형과 뭇 생명을 품는 여성목이라 했다. 그리고 보면 남자가 여자를 포근히 감싸 안은 형상의 모습이다. 주민들은 이를 보고 사랑 나무라 하여 나무 주위를 세 번 돌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귀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 인간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까. 사랑에 웃고 울며 목숨을 거는 인간 세상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연리목 앞에 서면, 이런 사랑에 대한 오래된 전설이 떠오른다. 옛날 중국에서는 하늘에는 비익조(比翼鳥)가 살고, 바다에는 비목어(比目魚)가 살고, 땅에는 연리지가 있다고 했다. 비익조는 암수가 각각 한쪽 날개와 한쪽 눈만 가지고 있어 서로가 합쳐져야만 날 수 있는 새이고, 비목어는 눈이 하나밖에 없어 좌우가 붙어야만 헤엄칠 수 있는 물고기다. 홀로는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함께해야만 완전해지는 생명체이다. 연리목 또한 그러하다.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뭉쳐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연리지는 원래 중국의 후한서 채옹 편에 나오는 말로써 효심의 상징으로 전해졌지만, 당나라 시인 백낙천의 장한가라는 시가 나온 후에는 사랑의 나무란 의미가 덧붙였다. 그의 대표작 장한가(長恨歌)는 중국 당나라 황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찬란하게 노래하면서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는 역사적 비극을 노래했다. 궁의 온천에서 꽃처럼 피어난 사랑은 황제의 총애와 권세의 그늘 속에 더욱 농밀해졌으나, 그 뜨거운 사랑은 끝내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무겁고 치명적이었다. 권력과 사랑을 얻은 대가는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대가로 끝이 났다. 역사는 냉정했다. 안녹산의 반란, 즉 안사의 난이 일어나면서 당나라의 전성기는 무너졌다. 반란의 두목인 안녹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의심한 황제 호위병들은 피난길에 황제에게 양귀비의 목숨을 요구했다. 결국 황제의 피난길에서 양귀비는 군사들의 원망을 받아 마외역에서 목숨을 잃었다. 황제는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명령으로 사랑하는 양귀비의 죽음을 보게 되었다. 황제와 양귀비의 사랑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시인 백낙천은 사랑을 오히려 죽음 너머에도 이어지는 영혼의 결합으로 승화하여 노래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 이 맹세는 천지가 무너져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영원을 증언한다. 그래서 장한가는 단순한 옛 황제와 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사랑의 가장 숭고하면서도 비극적인 진실을 보여주는 불멸의 서정시가 된 것이다. 오늘날 자천리 오리장 숲의 연리목은 그 시와 전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하다. 뿌리는 따로지만 줄기와 가지를 하나로 엮어 살아가는 나무는 인간의 삶과 사랑을 닮았다. 혼자서는 완전하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가 서로를 의지하며 비로소 온전해지는 모습, 그것이 바로 인간의 진정한 삶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둘을 갈라놓아도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하나로 연결되어 숭고함을 잇고 있다. 사랑이란 믿음이라는 세상에서 무성히 그리고 온전히 자라고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자천리 천연기념물 오리장 숲 연리목 앞에서 시인 백낙천의 장한가에서 그 의미를 찾아 되새겨본다. 별의 고장 영천, 보현산천문대에서 별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꿈, 오리장 숲에서 나무에 기대어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염원, 이곳을 찾아 연리목 앞에 선 나의 소망, 이 모두는 하나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별빛과 숲, 전설의 시가 한곳에 만나는 자천리 오리장 숲. 이곳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야 하는지를 말없이 가르쳐주는 역사책이다. 자연을 자세히 보고 명상하면 자연은 우리의 지혜를 일깨워주는 스승과 같다. 연리목 아래서 바라본 하늘은 더없이 높고 깊고 푸르다. 언젠가 나 또한 이 땅에서 인연을 마무리하더라도 누군가와 함께한 사랑이 연리목처럼 하나의 흔적으로 남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자천리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 숲을 마을의 수호림으로 여겼다. 홍수와 바람을 막아내고, 제방을 지켜주며, 때로는 신령이 깃든 신목으로 모셔졌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은 숲에서 제사를 올렸다. 숲이 푸르고 잎이 무성하면 그해 풍년이 들리라 믿었고, 나무의 기운이 약하면 흉년을 점쳤다. 숲의 생태는 곧 마을의 운명과 맞닿아 있었다. 근대화와 함께 제사의 전통은 끊어졌다. 그러다 2003년부터 마을 이장 협의회 주도로 다시 기원제가 부활했다. 노후화된 재단은 새로 정비되었고, 면민의 정성이 담긴 돌비석이 숲 한켠에 서 있다. 숲은 마을의 역사와 신앙, 삶의 기억을 간직한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다. 백낙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는… 양귀비(楊貴妃)와 당나라 황제 현종(玄宗) 둘의 로맨스가 워낙 유명했으므로 시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장한가이다. 생전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언약했다고 하는데, 당나라의 시인 백낙천이 당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인 사랑을 장한가라는 장대한 서사시로 읊었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장한가의 끝 구절로 이렇게 노래했다.​ 현종은 안녹산의 난으로 꽃다운 나이에 비명에 간 양귀비를 잊지 못해 늘 이 말을 되뇌었다고 한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7월 7일 장생전에서 夜半無人和語時(야반무인화어시)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우리의 맹세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선 연리지가 되자고 간곡히 언약한 말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은 차라리 끝이 있을지라도,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님을 사모하는 이 마음의 한은 끝이 없으리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9-17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그리고 봄’ 촬영지 주산지

금강산의 봄 풍경이 마치 황금처럼 빛나고 생동감이 넘친다고 해서 금강산(金剛山)이라 하고, 여름은 안개와 구름이 자욱한 모습이 신선이 사는 산과 같다고 하여 봉래산(蓬萊山)이라 한다. 가을은 붉게 물든 산의 모습에서 풍악산(楓嶽山)이라 하고, 겨울은 눈으로 덮여 마치 깨끗하고 청정한 골짜기 같다고 하여 개골산(皆骨山)이라 불리 운다. 이렇게 계절별 산의 아름다운 모습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북 청송 주왕산 자락에 주산지라 불리는 저수지 또한 계절별로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다.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김기덕 감독은 주산지는 어느 한 계절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2003년 ‘봄. 여름, 가을, 겨울…그리고 봄’이라는 주산지를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신비스러운 주산지의 사계절 변화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주산지 자연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이루어져 있기에 계절을 달리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모하는 자연의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봄에는 생명의 탄생을, 여름에는 성장의 신비함을, 가을에는 황혼의 화려함을, 겨울에는 한 생명의 침묵을 노래한다. 그 중심에는 물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에 목을 내밀고 물속에서 살아가는 왕버들 노거수이다. 주왕산 깊은 계곡에 자리한 ‘주산지’ 조선시대 농업용 저수지로 만들어져 사계절 신비로운 풍경, ‘황홀’ 그 자체 영화 촬영지로 유명… 명소로 우뚝 청송 주산지 상징 ‘왕버들’ 고사 위기 현재 300년 왕버들 6그루, 총 28그루 생태복원 등 ‘노거수 살리기’ 진행 중 주산지는 주왕산 깊은 계곡 속에 있어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계곡을 따라 30여 분을 걸어 들어가야 볼 수 있다. 주산지는 약 300년 전 1721년 조선 경종 때 농업용 저수지로 길이 100m, 너비 50m, 수심 8m로 축조되었다. 마을 주민의 울력으로 계곡의 잘록한 동쪽과 서쪽의 산자락을 부여잡고 묶어 놓으니 자연스럽게 분지에 물이 고여 산속의 작은 호수가 되었다. 주민이 만든 주산지에 계절별 풍경은 주왕산 신이 숨겨놓은 특별 전시장의 걸작품이다. 걸작품을 바라보는 순간, 나 또한 작품 속 일부가 되고 고요 속에 스며든다. 주산지는 사계절 내내 우리에게 기다림과 변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비로운 풍경은 마음속에 오래도록 잔잔히 머문다. 주산지도 사계별로 그 아름다움이 달라 별도의 계절별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 같다. 주왕산 치맛자락이 주산지를 감싸고 있으면서 때때로 치맛자락을 들쳐 흔들기라도 하면 그 풍광은 180도로 변하여 또 다른 선경의 황홀함에 빠져든다. 주왕산 자락에 자리한 주산지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그리고 주산지 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왕버들이 사계절 내내 변주곡처럼 다양한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전국의 많은 사람이 이곳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기 위하여 또는 즐기기 위하여 찾아오고 있다. 계절별 풍광은 서로의 계절이 더 아름답다고 뽐내면서 자랑하는 것만 같다. 어느 계절이 못하고 좋음이 없이 모두가 훌륭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영화 촬영의 배경 지역으로 부각하여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그리고 주산지 절경은 사진작가들의 1순위 촬영지로서 주왕산국립공원의 대표적인 경관자원이자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어쩐 일인지 물속 왕버들은 점점 쇠약해져 고사 되어만 갔다. 주왕산 주산지 하면 물속 왕버들이 압권인데, 이에 주왕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는 나무의 수세가 약화 되어 점점 쇠퇴해 가는 왕버들을 살리고 보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사업은 기청산식물원 강기호 박사(현 국립세종식물원 본부장)가 맡아 진행되었다. 이에 나는 자문 위원으로 참여했다. 왕버들 고사 원인을 분석했다. 1987년 더 많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하여 2m 둑 높이 공사를 한 결과 주왕산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저수지에 모이면서 연중 만수로 인하여 저수지 주변에 살던 왕버들이 완전히 물에 잠기어 오늘날까지 물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고 있다. 그러나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수문이 열리면 수면이 하강하여 왕버들 줄기에 난 부정근이 햇볕에 노출되어 줄기와 잎에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해 주지 못하여 수세가 약화 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수면이 낮아지면서 노출된 뿌리 주변의 경사가 심해 뿌리를 덮고 있던 흙이 유실되었다. 그 두 가지가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에 노출된 뿌리를 낙엽이나 부엽토로 덮어주고 종종 물을 뿌려서 건조하지 않도록 하고 토양의 경사가 급하여 덮은 부엽토가 흘러내릴 수 있는 곳에는 돌쌓기하기로 하였다. 먼저 주산지 물속 왕버들이 고사한 빈자리에 이식할 왕버들을 찾기로 했다.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낙동강 상류 지역인 청송 파천면 신기리 하천에 왕버들이 군락을 지어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살고 있는 가슴높이 둘레가 25cm 정도 되는 왕버들 4그루를 선택하여 이식했다. 이제 주산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왕버들은 모두 28그루나 된다. 저수지 축조 당시에 살고 있던 나이 300살, 가슴 높이의 둘레가 2.4m 이상인 왕버들 노거수 6그루가 아직도 주왕산 주산지 사계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는 주역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는 가끔 이곳 물속의 왕버들을 찾는다. 볼 때마다 다른 풍광 다른 느낌을 받는다. 봄은 생명의 기운이 잔잔한 수면 위로 봄 햇살이 반짝이며 나무의 그림자를 어루만진다. 수면에 비친 풍경은 마치 꿈결처럼 아름답다. 산새들의 지저귐이 물 위로 울려 퍼지고, 봄바람에 이따금 물결이 일 때 주산지는 마치 초록빛 꿈의 호수이다. 여름은 자연이 그려낸 초록의 싱그러움이 온 세상에 넘쳐흘러 젊음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저수지에 물안개가 스며들면 풍경은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이다. 온천에 몸 담근 실루엣 걸친 왕버들은 푸른 향기 뿜어내는 천사이다. 가을의 왕버들 잎사귀는 붉고 노란빛으로 물들어 저수지에 담아 놓은 꽃바구니이다. 갈바람에 나뭇잎들은 하늘과 물속에서 춤춘다. 겨울의 주산지는 얼음과 눈으로 덮이면서 고요함을 더한다. 적막하지만, 그 안에서 묵직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내가 간택한 왕버들이 주산지 왕버들 후계목이 되어 잘 자라고 있었다. 사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영화 같은 소설 같은 아름다움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필자의 시] 주산지 왕버들 초록 꿈을 물들이는 녹화(綠花) 가지에 생명이 피어난다. 물안개 속 고요한 숨결 푸르름이 주산지에 깊게 뿌리내린다. 곱게 물든 단풍 수면 위 춤사위 바람이 꾸며 놓은 콘서트장 앙상한 가지에 서린 하얀 숨 고요 속에서도 생명은 깨어 있다. 주산지를 떠난 물속 왕버들 빈자리에 후계목 네 분을 모셔 오는 날 사계를 맞이하고 또 보내면서 만세무강을 기원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9-10

“맹아 발아해 살아났다”… 500여년 노거수가 남긴 이야기

볼품이랄까 몰골은 말이 아니지만, 경북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376-2번지 한 자리에 500여 년을 살아온 느티나무 노거수를 만났다. 성내리 마을은 조선시대 영해부(영덕, 영양, 울진)의 관아가 있던 유서 깊은 문향의 마을이다. 마을 주민의 보호 속에 느티나무 노거수는 원 줄기는 고사 되었지만, 다른 줄기가 길게 뻗어 담장에 몸을 걸치고 있었다. 수세는 매우 약해 보였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멘트 담장으로 둘러쳐진 좁은 공간에 팽나무와 함께 나무의 신이 좌정한 당우와 갇혀 있다시피 했다. 영덕 성내리 노거수는 마을의 시간과 기억을 지탱하는 살아 있는 뿌리 신령스럽게 여겨 제사를 올렸으며, 나무는 그들의 기원을 묵묵히 품어 이런 자연의 경외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를 중시하는 정신으로 이어져 목은•신돌석 같은 위인의 정신적 바탕은 이 땅의 나무로부터 길러진 것 주민들이야 나무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높은 담장으로 접근을 막았다지만, 노거수는 햇볕과 바람, 뿌리에서 물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여 생육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무의 지속적인 성장과 건강을 위해서 통풍이 잘되도록 담장을 헐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담장 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어 들어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다행히 성내리 마을 박광환 노인회장과 조청해 주민이 친절하게 사다리를 가져다주어 담장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무 앞에는 제단과 노동신위(路東神位)란 비가 세워져 있었다. 박광환 노인회장은 정월 대보름날이면 온 마을이 이 나무 아래 모여 제사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기원의 소지를 태운다고 했다. 영해 향교에도 제사를 지내는 나무가 있다고 하면서 한번 가 보기를 권했다. 아내와 함께 그곳으로 발걸음 옮겼다. 영해 향교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 두고 몇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곳에 제당과 함께 느티나무와 향나무 노거수에 금줄이 쳐져 있었다. 나무 앞 안내판에 “영해 향교 내 이 자리는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 지역에 파병 윤씨가 틀을 잡고 영해 박씨가 세를 누리며 살던 때부터 토속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재사를 올리던 곳이다. 지금은 300여 세대의 보금자리로서 매년 정월 보름날의 전통 제례에 따라 마을 제사를 올리고 있다.”라고 하는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고사한 느티나무에서 맹아가 발아하여 자라고 있는 나무의 주변에 목책을 둘러쳐서 보호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성내리 마을 주민은 노거수 보호의 지극함을 느꼈다. 한 마을에 두 곳의 나무를 당산목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도 그리 흔치 않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서 향교로 들어가라는 하마비(下馬碑)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온 조선 선비의 품의가 돋보였다. 영해 향교에도 대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담장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마침 문화재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바람에 함께 들어갈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언덕 위에 있는 영해향교 마당에서 또 다른 노거수와 마주했다. 바로 회화나무 두 그루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선비의 기상과 학문적 이상을 상징하는 나무로, 선비나무,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렸다. 옛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집 안에 심으면 학문이 높은 인물이 나오고, 대문 앞에 심으면 잡귀가 드나들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특히 양반가에서는 출세와 벼슬, 학덕을 상징하는 길상목으로 여겼다. 회화나무 가지마다 맑은 기품을 품고 서 있는 모습은 오래전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들의 의연한 뒷모습을 닮았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은은히 흔들려, 마치 경전의 장(章)이 바람에 읽히듯 속삭인다. 향교의 마루에 앉아 글을 읽던 선비들은 이 나무를 두고 “하늘의 지혜가 깃든 스승”이라 여겼을 것이다. 회화나무는 정신을 바로 세우는 묵언의 교사였다. 회화나무는 향교의 담장을 넘어 저 멀리 칠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풍경이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곳에서는 동해의 바다를 볼 수 없지만, 칠보산 정상이라면 동해의 푸른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칠보산을 보면서 동해의 무한한 에너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요산요수( 樂山樂水)란 말이 있다. “이는 자연 풍광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길게 산다.”고하는 뜻이 품어 있는 말이다. 회화나무와 칠보산을 바라보면서 동해를 연상하게끔 하는 이 풍광은 선비들의 삶에 자연히 스며들지 않았나 싶다. 영해 향교는 고려 후기, 충목왕 1346년에 세워졌다. 수백 년 동안 책 읽는 소리와 향내가 흘렀다. 임진왜란의 불길에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고, 또다시 고쳐 세워지며, 마치 불사조처럼 살아온 건물이다. 이곳의 기둥들은 세월을 버텨낸 나무의 뼈처럼 우직하고, 회화나무는 그 역사를 곁에서 묵묵히 증언해 왔다. 나무를 경외시하는 영해 주민의 자연관을 보면서 그들의 삶이 보였다. 나무의 넉넉한 품은 주민들의 정신적 뿌리로 작용하여 이곳 출신의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와 용기를 주지 않았나 싶다. 향교와 바로 이웃한 괴시리 전통 마을은 목은 이색 선생의 고향이다. 기와 담 골목마다 세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2백 년, 3백 년을 견뎌낸 고택들이 흙담에 기대어 서 있다. 마을을 걸으면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고, 선비들의 발자취가 돌길에서 소곤거린다. 목은 선생은 혼란의 고려 말에 학문의 불씨를 지켜낸 대학자이다. 정도전과 정몽주, 이성계에게 사상적 뿌리를 내리게 한 것도 바로 그의 학문이었다. 목은의 정신은 곧 새로운 나라 조선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영해는 의병장 신돌석 장군을 낳은 고장이다. 평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산맥을 넘어 퍼졌고, 그의 전술은 일본군조차 두려워했다. 끝내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 울분과 정의는 지금도 영해 땅의 바람 속에 살아 숨 쉰다. 성내리의 노거수는 마을의 시간과 기억을 지탱하는 살아 있는 뿌리다. 사람들은 나무를 신령스럽게 여기고 제사를 올렸으며, 나무는 그들의 기원을 묵묵히 품었다. 이런 자연의 경외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를 중시하는 정신으로 이어졌다. 목은 같은 대학자와 신돌석 같은 영웅이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정신적 바탕은 바로 이 땅의 나무로부터 길러진 것이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노거수 앞에 서면, 시간은 고요히 흐르고, 인간은 겸허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되 쓰러지지 않는 나무처럼, 우리도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노거수는 지금도 말을 걸어오는 현재의 존재다. 그것은 마을을 지켜온 뿌리이자, 사람을 길러낸 품이며, 역사를 이어온 숨결이다. 영해의 노거수와 향교, 그리고 그 땅에서 태어난 이들이 남긴 정신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한 그루의 노거수처럼 묵직한 울림으로 서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신돌석 장군은... ---------------------------------------------------------------------------- 신돌석 장군(申乭石, 1878~1908)은 경북 영덕 출신으로, 평민 신분에서 항일 의병장이 된 인물이다. 본명은 신태호이나 어린 시절 이름인 ‘돌석’으로 불렸다. 1896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그는 100여 명의 동지를 모아 의병 활동을 시작했고, 1906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관군을 공격했다. 의병은 최대 3천 명에 달했으며, 울진·삼척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과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크게 괴롭혔다. 일본군은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 불렀다. 그러나 1908년, 배신한 옛 부하의 손에 독살당하며 짧은 생을 마쳤다. 비록 활동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신분을 넘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항일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독보적 인물이다. 영해에 신돌석 장군의 기념 공원이 있다.

2025-09-03

깊은 땅속 두 그루 나무의 은밀한 사랑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볼 수 없는 것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소름 돋는 경이적인 일이다. 노거수를 찾아 나선 지도 25여 년이 지났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사실의 광경을 목격했다. 한 나무의 두 가지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붙어 하나의 가지로 된 것을 연리지(連理枝)라 하고, 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의 가지로 된 것을 연리목(連理木)이라 한다. 연리지와 연리목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효도, 사랑, 우정의 징표’로 귀하게 여기고 많은 사람이 경외감을 가진다. 이에 대한 전설과 함께 신비롭고 또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두운 땅 속에서 운명처럼 서로 만나 아무런 보호막 없이 모진 세월 겪으며 마침내 한 생명의 숨결 나누는 사이로 하나의 숨결이 된 검고 굵은 뿌리줄기 마치 오래 잠든 용의 등처럼 굽이치고 무심한 비바람이 깎아낸 굴곡들마다 시간의 손길이 새겨져 신비로움 품어 그런데 땅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 두 그루 나무의 뿌리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하나의 뿌리로 된 연리근(連理根) 것을 발견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한 2003년 봄에는 알 수도 볼 수도 없었던 흙 속에 숨겨져 있었다. 10여m 떨어진 느티나무 두 그루의 굵은 뿌리가 하나로 붙은 연리근이 바깥세상으로 나와 나의 눈앞에 떡하니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찬찬히 연리근을 만져보고 또 살펴보았다. 연리지와 연리목은 가끔 보아 왔지만, 이렇게 굵은 뿌리의 연리근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은 떨렸다. 땅속에 있어야 할 뿌리가 땅 밖으로 나와 노출되어 있으니 신기할 수밖에 없다. 뿌리를 덮고 있던 흙이 빗물로 인하여 유실되어 연리근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 신비하고 경이로움에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연리근 느티나무 노거수가 살아가는 곳은 경북 김천시 농소면 월곡리 산 75번지이다. 일명 못골마을이라 한다. 마을 입구 언덕 위에 도로와 들판을 내려다보면서 살아가는 느티나무는 나이가 380살, 키 20m, 가슴둘레 4.6m, 앉은 자리 폭이 27m나 되었다. 이웃 나무는 이보다 나이도 키도 가슴둘레 굵기도 작은 느티나무이었다. 1993년 7월 7일 보호수로 지정되어 시에서 보호 관리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정자와 의자 등 편익 시설을 설치하여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었다. 연리근은 두 나무의 뿌리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찾아와 포개지고, 마침내 한 생명의 숨결을 나누는 은밀한 사이가 된 것이다. 아무도 볼 수없는 흙 속에서 그들은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을까.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세상에 알려져 세월과 비바람을 견디며 서로의 생을 지탱해 주는 조용한 사랑이 아직도 뜨겁게 흐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연하고 하얀 뿌리가 아무런 보호막이 없이 모진 세월의 풍파에 발가벗겨졌으니 얼마나 고통에 시달리며 살았을까. 연리근은 두 나무의 뿌리가 가까이 자라면서 접촉 부위의 형성층이 유착되어 물과 양분이 오가게 된 상태이다. 동일 수종일 때 유착이 잘 일어나지만, 토양 조건에 따라 다른 수종 사이에서도 드물게 관찰된다고 한다. 생태학적으로는 두 나무의 뿌리 경쟁 대신 상호 연결을 통한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적응으로 보인다. 이는 식물사회의 생존을 위한 협력이다. 내가 처음 올 때만 해도 나무의 뿌리는 흙 속에 있었는데, 그동안 비로 인한 흙의 유실로 뿌리가 땅 바깥으로 노출되었다. 10여m 떨어진 두 나무가 힘을 합쳐 뿌리로 경사진 흙의 유실을 붙잡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나무들이 미리 알고 생존을 위해 서로 힘을 합쳐 토양의 유실을 막아내기 위해 연리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땅 바깥세상에 드러난 연리근의 괴이한 모습은 하나의 걸작품이고 인연은 고래힘줄 같다. 두 그루의 느티나무 뿌리가 어두운 땅속에서 어느 순간 운명처럼 서로를 만났다. 그 만남은 서로의 숨결을 느끼고 마침내 두 뿌리는 하나가 되었다. 마치 세월이 조각한 거대한 조형물 같다. 검고 굵은 뿌리줄기는 마치 오래 잠든 용의 등처럼 굽이치고, 비바람이 깎아낸 굴곡마다 시간의 손길이 새겨져 있다. 거친 살결 위로는 이끼가 푸른 숨을 내쉬고, 틈새마다 어린잎이 고개를 들어 줄기 인양 새 생명의 문장을 써 내려간다. 두 나무의 뿌리는 흙 속에서 이미 오래전 서로의 숨을 섞었을 것이다. 가뭄에도, 장마에도, 그들은 땅속 깊은 곳에서 물줄기를 나누어 마셨고 폭풍의 밤엔 서로의 몸을 버팀목 삼았다. 이제 그들의 뿌리는 누가 먼저였는지 가릴 수 없는 하나의 심장, 한 몸의 맥박이 되어 땅 위로 드러나 있다. 마주 선 두 나무가 하나의 뿌리로 이어진 모습은 연인보다 더 깊은 결속이다. 형제보다 더 질긴 인연을 보여준다. 연리근이라 불리는 이 결속은 힘겨운 세월을 살아내는 나무들의 동맹이자 연대다. 폭풍이 몰아쳐도, 가뭄이 길어져도, 서로의 뿌리에 의지하며 버텨낸 증표이다. 숨은 인연으로 땅 위에서 보이지 않아도, 땅속에서 맺어진 끊을 수 없는 연결로 외부의 시련을 무릅쓰고 이어지는 영원한 인연이 되었다. 그리고 양분의 나눔과 상생으로 뿌리를 통해 서로를 살리는 관계를 부부, 형제, 우정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 안에는 다투지 않고, 서로의 생존을 위해 한 몸이 되기를 택한 지혜가 깃들어 있다. 사람의 인연도 이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억지로 끊으려 하지 않고, 서로의 결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 인간 사회에 본보기가 아닐까. 한 뿌리의 민족이 좌우 이념으로 갈라져 두 나라의 정부를 세우고 서로를 적대시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계절마다 연리근 느티나무의 모습은 변주를 거듭한다. 봄이면 연둣빛 새순이 뿌리 틈새에서도 솟아나 오래된 나무의 숨결에 젊음을 더한다. 여름이면 푸른 이끼가 뿌리를 감싸고 더위를 식혀준다. 가을에는 황금빛 잎이 쌓여 마치 뿌리가 금빛 옷을 입은 듯하다.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 사이로 흰 눈이 내려와 뿌리 위를 덮으며 오랜 결속을 포근히 감싸준다. 연리근 나무를 보면서 누군가는 형제를, 누군가는 친구를, 누군가는 연인을, 또 누군가는 오래 함께 살아온 가족을 떠올릴 것이다. 바람은 가지를 흔들지만, 그 뿌리의 결속은 흔들리지 않는다. 두 나무는 지금도 묵묵히 서서 “서로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함께 늙고 함께 사는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연리근에 얽힌 전설 연리지와 유사하지만, 땅속에서 맺어진 인연이라는 점에서 더 은밀하고 깊은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연인의 환생 설화: 신분 차이로 결혼하지 못한 남녀가 죽어 각기 다른 나무로 환생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뿌리가 땅속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 세상에서는 맺어지지 못했지만, 사후 땅속에서라도 평생 함께하는 부부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부부 장수 설화: 부부가 오랜 세월 한집에 살며 해로하다 죽은 뒤 무덤가에 심은 두 그루 나무가 뿌리로 이어진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집안의 화목과 번영을 상징하는 길조로 여겼다. ▲마을 수호목 설화: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연리근으로 이어져 마을의 복을 지키고 재난을 막는다고 믿었다. 매년 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8-27

태평양을 하나로 잇는 보석 ‘왕피천’의 수호신들

경북 울진의 왕피천이 낙동정맥 동쪽 산마루를 타고 흘러내린 만 가지의 물줄기가 하나 되어 동해로 흘러간다. 그 굽이치는 푸르고 맑은 물길이 장장 62km이다. 동해를 거쳐 태평양을 하나로 잇는 생명의 하천이다. 이처럼 하천은 물질과 에너지를 전 세계로 이어지는 지구의 동맥이다. 한국의 마지막 청정 하천이라 불릴 만큼 원시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수달, 열목어, 하늘다람쥐 등 희귀 생물이 서식하며, 각종 고산식물과 야생화가 계절마다 어우러진다. 천연기념물 제96호 지정 350살 굴참나무 오랜 시절 풍파로 상처투성이 된 몸통 동서로 8m씩 뻗은 가지 지탱하며 건재 한때는 길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해 와 100년 넘게 자라온 수산리 해변 소나무들 1890년대부터 방수·방풍 목적 식재 ‘유전자보호림’ 지정 430여 그루 관리 가장 큰 나무 둘레 2.2m 높이 18~20m 여기에 더하여 도보여행 명소로도 사랑받는다. 부처의 그림자가 물에 비친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신라 고찰 불영사와 명승 제6호로 지정된 불영계곡,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된 석회암 동굴로, 종유석과 석순, 지하수 웅덩이가 어우러져 신비로운 자연미를 자랑하는 성류굴, 천연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된 350살 굴참나무, 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된 수산리 소나무 숲 등이 왕피천 물줄기에 자연이 빚어놓은 이 보석 같은 경관과 문화가 어우러져 있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태의 상징이 되고 있다. 사계절 내내 숲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힐링의 길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중 울진에서 불영사로 가는 근남면 수산리 381-1 번지, 도로변 언덕 위에 서 있는 천연기념물 수산리 굴참나무와 왕피천 하류, 동해와 맞닿은 해변에 펼쳐진 소나무 유전자보호림을 찾았다. 서로 이웃하고 있어 먼저 굴참나무를 만났다. 천연기념물 굴참나무는 과거를 말하고, 유전자보호림 소나무 숲은 미래를 약속한다. 그 둘을 이어주는 왕피천은 지금도 묵묵히 흐르며, 세월의 이야기와 생명의 노래를 동해로 실어 나른다. 왕피천 너머로 푸른 바람이 불어오는 마을 어귀 언덕 위 덩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백 번의 여름을 맞이하고 보냈을 굴참나무의 모습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지나가는 바람과 햇살을 견딘다. 키는 20m, 가슴둘레는 6m이다. 가지는 동서로만 8미터씩 뻗어 있어, 마치 양팔을 벌리고 세상을 감싸안는 듯하다. 상처투성인 몸은 주민들이 외과수술로 잘 치료하여 아직 건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안내판에 한때 이 나무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불영사를 찾아가는 스님이나, 석류굴을 향하던 나그네들이 이 나무를 기점으로 남은 거리를 짐작하고 쉬어 갔을 것이다. 지도가 없던 시절, 나무 한 그루가 방향이자 위로였고, 기다림이자 약속이었다. 굴참나무 아래에서 이마의 땀을 식히고, 소매를 걷어 왕피천 물을 떠 마시던 그들의 숨결이 이 나무의 껍질 어딘가에 고요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래 사는 거대한 굴참나무는 드물다. 참나뭇과의 낙엽활엽교목으로 깊은 숲속에서도 잘 자라고, 바람이 센 언덕에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나무껍질은 두껍고 울퉁불퉁한 코르크처럼 발달해 있으며, 껍질은 예부터 굴피라 불려 지붕을 이던 생활 자재가 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다. 열매인 도토리는 지난 우리 조상들의 가난한 시절에 흉년을 버티게 해준 구황식품이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한 기호식품으로 산행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수산리 굴참나무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인내, 삶의 기억이 가지마다 스며든 생명의 상징이다. 그리고 지금 순간에도 조용히 우리를 품고 있는 커다란 마음이다. 굴참나무를 뒤로하고 바닷바람이 쉬어 가는 곳 수산리 왕피천 생태공원 숲을 찾았다. 수백 그루의 소나무가 나란히 선 녹색의 병풍이 되어 세찬 바닷바람을 막아섰다. 숲의 소나무들은 백 년 넘게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백 년을 바닷모래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벌리고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바람을 막고 물길을 막아섰다. 태풍 하이선이 할퀴고 간 꺾인 한 소나무의 단면을 보았다. 베어진 그의 몸에 나이테는 107개의 고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매년 단 한 줄씩 성실하게 새겨진 그 세월의 문장은 말이 없지만 그 속에는 지금까지의 기후 환경을 고스란히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연대연륜학이 발달하여 언젠가는 이 나이테가 울진 왕피천의 기후를 밝혀내리라 믿는다. 수산리 해변의 울창한 소나무 숲은 생태공원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자연을 보전하거나 훼손된 생태계를 복원하여 생물들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을 조성한 공간으로,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관찰하고 체험하며 휴식과 치유를 누릴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생태공원이다. 다양한 생태 요소들이 공원 내에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에게는 생태 교육의 장, 어른들에게는 삶의 여백을 채우는 쉼터가 되고 있었다. 지난 7월 10일 명산과 문화유산을 체험하는 문화단체인 명문단(회장 권경수) 회원 100여 명이 이곳 생태공원을 찾아 숲 체험을 하였다. 수산리 해안의 왕피천 생태공원은 100년 넘게 자라온 소나무 숲이 바다와 왕피천이 만나는 모래땅 위에 펼쳐져 있었다. 해풍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가꾼 이 숲은 오늘날 국가 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생명과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자연 교과서로써의 역할 하고 있었다. 1938년 발행된 ‘조선의 임수’라는 자료에 의하면 수산리 주민들이 방풍과 방수의 목적으로 1890년경부터 ‘수산송림’을 가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음력 2월 1일 식수 일로 정하고 초지에 천연생 소나무를 이식하고 도벌과 벌채 금지로 보호 관리에 힘써 현재 아름다운 숲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산림청은 이 숲을 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하여 특별 관리하고 있으며 현재 100살이 넘는 소나무 430여 그루가 아름다운 공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장 큰 소나무 둘레가 2.2 m 높이가 18에서 20m 정도나 되었다. 마치 한 세기를 넘어온 장정들이 하늘을 향해 도열해 있는 듯하다. 과거에는 군부대가 주둔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울진군이 조성한 생태공원으로 바뀌어, 주민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쉼터가 되었다. 이 숲을 ‘지속 가능한 시간’이라 부르고 싶다. 생명의 다양성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유전자의 보루이다. 보이지 않는 그 속의 유전자가 언젠가는 또 다른 숲의 씨앗이 될 것이다. 보존이란 과거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지키는 이 나무 한 그루, 그 안에 깃든 유전자의 무게는 시간보다 무겁고, 말보다 깊다. 수산리 유전자보호림, 생태공원은 다음 세대를 위한 생명의 약속이다. 유전자보호림(遺傳子保護林)이란… 유전자보호림은 생물종의 유전적 다양성과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국가가 지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특별한 산림이다. 희귀하거나 지역에 고유한 수종, 또는 유전적 형질이 우수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생태적으로 중요한 공간으로, 산림 자원의 원형을 지켜가는 생명의 저장고라 할 수 있다. 지정 목적은 첫째, 유전자원을 장기적으로 보전하고, 둘째, 산림생태계의 안정성을 유지하며, 셋째, 미래의 산림 복원이나 품종 개량을 위한 연구 자료를 확보하는 데 있다. 특히 기후변화나 병해충 등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유전적 형질을 지닌 산림 자원이 필요하다. 유전자보호림은 그러한 미래 대응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생태적 자산이다. 경북 울진군의 수산 송림 유전자보호림은 왕피천 하구의 모래땅 위에 조성된 소나무 숲으로, 100년 이상 자라온 나무들이 해풍과 바닷물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소나무들은 해안 방풍림이나 기후에 강한 숲 조성을 위한 중요한 유전자 자원으로 평가받는다. 산림 생명의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거점이다. 오랜 세월 자연이 길러낸 유전 정보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 숲에서 우리는 생명의 다양성을 배우고, 그 가치를 지켜야 할 책임 또한 함께 느끼게 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8-20

세종대왕 아들들의 ‘태’ 묻은 태봉을 지켜오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끝자락에 조용히 솟아오른 꽃봉오리 모양의 작은 산봉우리는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자식들의 태를 묻은 태봉이다. 그 숫자가 놀랍게도 18명의 자식과 1명의 손자란다. 그 역사 현장을 나즐로 찾아 나섰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주차하여 놓고는 안내판의 설명에 따라 천천히 숨을 고르면서 태봉으로 올랐다. 솔숲을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이 고요해지고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진다. 마치 시간이 쉬어가는 길목이자, 자연과 인간, 그리고 기억이 만나 속삭이는 풍경이다. 오솔길의 소나무들은 사람을 맞이하는 문이자, 왕자의 영혼들이 솔바람으로 합창하는 생명의 복도 같았다. 태봉에 제 올리러오던 왕실의 사신들 선석사 드나 드는 수행자·마을 사람들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그늘이 돼 주던 느티나무·소나무·팽나무의 가로 숲길 일제강점기 지나며 강제 이식·벌목 등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은 ‘귀한 존재’ 숲속 오솔길 돌계단을 따라 150m쯤 오르니, 세종대왕자 태실이 봉안된 태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258.2m의 완만한 봉우리에 조성된 이곳은 조선왕조의 혼이 담긴 성역이다. 태실은 태어나자마자 아기의 태를 담아 땅에 봉안하던 조선 왕실의 의례, 생명의 뿌리를 정성스레 모시던 신성한 공간이다. 이곳에는 세종의 아들 18명과 단종을 합쳐 19기의 태실이 모여 있다. 그중에는 다섯 왕자의 태실이 사각형의 기단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조성 당시의 형식을 간직한 채 생명의 출발점이자, 왕실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던 한 왕조의 기원이 담겨 있어 나를 숙연하게 했다. 왕자들의 태실 앞에 왕자보다는 세종대왕이 먼저 생각났다. 말과 글이 달라 뜻을 표현하기 어려운 일반 서민에게 빛과 희망이 된 한글 창제 때문이다. 대왕께서 반포하신 훈민정음은 백성의 입술에 빛을 내려 준 글이었다. 말은 있었으나 글이 없어 침묵하던 민중의 목소리에 문을 열어 준 그 위대한 한글 창제는, 단지 소리를 기록하는 도구를 넘어서, 마음을 전하고 사유를 나누는 문학의 뿌리를 틔운 생명의 씨앗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시와 수필, 소설, 희곡 등 문학을 발전시키고 즐겁고 의미 있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자연과 사람, 고통과 사랑, 역사와 꿈이 한글이라는 그릇 안에서 꽃을 피웠다. 조용한 백성의 가슴속에도 시심이 깃들게 한 그 위대한 애민의 문자, 그것은 조선이 우리에게 건넨 가장 고귀한 선물이자, 오늘 우리가 문학으로 세상과 이어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다리이었다. 태봉에서 내려와 선석산 아래에 있는 명찰 선석사를 찾았다. 고찰 선석사로 들어가는 가로수를 따라 걷는 길은 너무 인상적이었다. 느티나무, 소나무, 팽나무 등 오래되고 거대한 노거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가로 숲을 이루었다. 그 늘어선 나무의 모습 또한 여느 나무 못지않게 괴이한 모습이 아름답고 멋진 산사의 풍경을 연출했다. 아마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이곳은 울창한 숲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이 나무를 심어 인공 가로 숲을 만들었다기보다 기존의 울창한 숲의 나무를 베고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다양한 나무들로 멋진 가로 숲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길에서 문득 나무와 나무 사이로 햇살을 본다. 빗방울이 말라간 자리에 맑은 이슬이 맺혀 반짝인다. 느티나무의 주름진 껍질 사이로, 오랜 세월을 이겨낸 생명의 의지가 돋아난다. 500년을 버텨온 느티나무 앞에 섰다. 아득한 시간 속에서 자리를 지키며 사람과 계절을 품어 온 나무는, 마치 선석사로 들어서는 영혼들의 수호자 같다. 노거수는 단순한 생물이 아니라 한 시대를 기억하고 있는 존재이다. 그 아래를 지나니, 300년은 족히 넘었을 소나무들이 바람결에 춤을 춘다. 하늘로 뻗은 가지는 자유롭고도 단정하며, 땅에서 솟은 줄기는 묵묵한 지조를 품는다. 그 모습은 마치 옛 선비의 절개처럼 서 있다. 팽나무 노거수가 해안 지방이 아닌 이곳 조용한 산사에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특별하게 남달라 보였다. 길을 따라 흐르는 개울물은 선석산에서 흘러온다. 맑은 물소리는 나무의 숨결과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시처럼 들린다. 예로부터 선석사로 드나드는 수행자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태봉에 제를 올리러 온 왕실 사신들이 오르내리던 길이었다. 그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비와 눈을 피할 그늘이 되어 주던 나무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느티나무는 민중의 신목으로 여겨져 마을 어귀나 사찰 입구에 즐겨 심었다. 느티나무의 펼친 가지는 품처럼 넓어 누구든 그 아래에서 쉼을 얻을 수 있었고, 소나무는 절개와 기개의 상징으로 우리 국민이 선호한 나무였다. 선석사 가로 숲은 그렇게 조선왕조의 예법과 백성들의 일상이 만나는 경계에 서 있었고, 오랜 세월 그 사연들을 묵묵히 품어 온 자연 가로 숲이었다. 역사적 기록으로 보면, 이 숲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강제 이식이나 벌목의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은 귀한 존재다. 태실이 전국적으로 훼손되거나 이전될 때도 성주 태봉은 예외적으로 원래 자리를 지켰고, 그 길목을 지키는 나무들 역시 뿌리째 뽑히고 베어지는 아픔을 면했다. 가로 숲은 침묵의 저항이자 살아남은 기록이며, 조용한 수호자였다. 오늘날 그 가로 숲길을 걸으면 바람 소리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그 길을 걷는 이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조용히 옮기는 이유는 어쩌면 그 숲이 기억하는 것들이 너무나 깊고도 소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주 인촌리 선석사 가로 숲은 단지 오래된 나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시간, 믿음과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생명의 서사시이다. 이곳을 걷는 이마다 나무로부터 위로와 깨달음을 얻으며 많은 것을 사유하게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나뭇잎처럼 흔들리다, 바람처럼 스며든다. 선석사는 신라 효소왕 69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원래는 신광사로 불리다가 고려 공민왕 1361년, 나옹왕사 혜근이 이곳으로 옮겨오며 선석사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큰 바위(禪石)가 터에서 나와 절 이름이 되었고, 그 바위는 지금도 선석사에 서 있다. 임진왜란으로 불탔다가 다시 중창된 절은 조용하고 단아하다. 대웅전과 태장전, 명부전과 칠성각, 사천왕문과 산신각이 나란히 어우러져 있으며, 대웅전은 조선 후기 다포양식의 맞배지붕 구조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선석사 경내에도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 등 수백 년 된 벚나무가 살아가고 있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태실이란 왕실의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씻어서 태항아리에 담아 봉안한 곳을 말한다. 태을 묻는 과정이 장태(藏胎)는 고려 시대도 있었으며 왕의 태를 묻었으나 조선 시대에 이르면서 왕자와 공주의 테를 묻었다. 조선 초기부터 장태 의례는 왕실의 주요 의례였으며 엄정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태가 국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명당인 이곳의 태봉까지 태를 옮겨 태실을 조성한 것은 태어난 아기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동시에 왕실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러한 장태 의례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면서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세종 20년 1438년에서 세종 24년 1442년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세종의 아들 18명과 손자인 단종을 합쳐 모두 19기의 태실이 모여 있다. 보통 1기씩 조성되어 따로 떨어져 있는 태실과는 달리 이곳에는 많은 수의 태실이 모여 있는데 전국 어디에도 이런 규모의 태실은 없다. 일제강점기 전국의 태실이 일본에 의해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일부 옮겨졌을 때에도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제자리를 지켜 옛 모습을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조선 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왕실의 태실 조성 방식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볼 수 있는 조선시대의 중요한 자료이며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태란 태반이나 탯줄과 같이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조직을 이루는 말. 봉안이란 시신을 화장하여 그 유골을 그릇이나 봉안당에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는 아기의 태를 담아 모시는 것을 뜻한다.-(안내판 글 옮김)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8-13

경주 최진립 장군의 충절과 청백의 정신

경주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의 생가 잠와고택 충의당은 상류층의 도덕성을 얘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국적 뿌리이다. 곧 경주 최부잣집, 명문 가문의 출발지다. 45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최씨 가문을 빛나게 한 유훈 정신의 출발 선상에는 충의당 동쪽에 있는 최 장군이 직접 심은 회화나무가 있다. 나이 450살, 키 15m, 몸 둘레 4.7m의 거대한 노거수이다. 수많은 수난의 역사를 겪었지만, 아직도 건재하게 경북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234-2번지에 생을 이어가고 있다. 회화나무 노거수에 깃들여있는 최진립 장군의 충절과 청백의 정신은 여름 더운 햇살에도 불구하고 푸른 하늘 향해 가지를 뻗고, 잎들이 바람에 손짓한다. 역사는 침묵 위에 기록된 울림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어떤 이의 삶을 통해 더욱 맑고 깊게 퍼진다. 병자호란의 참담한 국난 속, 나이 칠십을 바라보던 한 노장은 말에 올라 창을 들었다. “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하지만, 싸우다 죽지도 못하겠는가!”라는 일성은 조선의 마지막 충의(忠義)를 밝힌 횃불이 되었다. 그는 바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국적 뿌리 최진립 장군 생가 경주 잠와고택 충의당엔 최 장군이 심은 나이 450살·키 15m·몸 둘레 4.7m 거대한 회화나무가 함께해 그 나무 아래서 자란 후손들 ‘가거십훈(家居十訓)’ 유산 삼아 청부 정신 피워내 회화나무 노거수 주변은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받은 돈으로 장군의 동상과 업적을 소개한 글들을 새겨놓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에 의병을 이끌고, 왜적과 싸웠다. 그리고 사십여 년이 흐른 병자호란, 이미 노쇠한 장군은 다시 칼을 들었다. 몸은 늙었지만 뜻은 굳세었고, 용인의 험천에서 끝내 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였다. 벼슬길에 있을 때는 녹봉을 아껴 향교를 고치고 성곽을 보수하며,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았다. 나라는 그의 절개와 청렴을 높이 평가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선정하였고, 불천위로 모셔 그 정신을 길이 전하도록 하였다.” 싸움터에 쓰러진 그의 마지막 모습은 한 줄 시처럼 뜨겁고 장엄했다. 그러나 최진립의 위대함은 단지 무사의 충절에만 머물지 않았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공직자들에게 장군의 삶은 단순한 옛이야기로만 머물지 않는다. 공직은 부귀의 수단이 아니라 섬김의 자리고, 권위가 아니라 신뢰로 세워져야 한다. 탐욕이 아닌 절제, 아첨이 아닌 곧은 소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성을 향한 따뜻한 눈빛. 최진립 장군의 삶은 이러한 공직자의 자세를 온몸으로 증명한 교과서이며, 우리는 그분의 숨결을 통해 오늘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최진립 장군의 위대한 정신은 그의 생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 숭고한 뜻은 혈맥을 타고 이어져 후손의 삶 속에서도 실천으로 되살아났다. 그의 아들 최동량은 집안을 다스리는 도덕적 지침으로‘가거십훈(家居十訓)’을 지어 후손들의 삶을 경계하고 이끌었다.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말 것,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할 것, 흉년엔 땅을 사지 말 것, 과객을 후히 대접할 것, 100리 안 굶는 백성이 없게 할 것… 십계처럼 빛나는 그 가훈은 물질보다 사람을 앞세운 삶의 윤리였고, 부유하되 청렴하고 넉넉하되 절제하는 삶의 태도였다. 이러한 정신은 장군의 손자 최국선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실제 만석꾼이 되었으나, 그 부를 권력의 사다리로 삼지 않고 백성과 나눔의 다리로 삼았다. 모내기와 시비법을 도입해 농법을 혁신했고, 흉년엔 차용 문서를 불태우며 빈민을 구제했다. 재산을 쌓기보다 ‘청부(淸富)’를 실천했고, 윤리 없는 풍요를 부끄러워했다. 이 같은 삶의 자세는 이후 400년 넘게 이어져 오늘날 ‘경주 최부자집’이라 불린 가문의 명예로 도덕적 자산이 되었다. 그 시작점, 곧 최진립 장군이 태어난 집이 바로 경주 내남면 이조리의 잠와고택 충의당(潛窩古宅 忠義堂)이다. 충의당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국적 원형이 꽃핀 공간이다. 생가 뜰에 뿌리를 내린 회화나무는 장군의 화신과도 같이 ‘부는 나눔을 통해 빛나고, 권력은 겸손을 통해 완성된다.’라는 장군의 정신을 지켜온 존재가 아닐까 싶다. 최진립 장군이 손수 심었다는 나무는 사백 해를 넘는 세월을 살아냈고, 지금도 충의당의 마당 한가운데에서 그늘을 드리운다. “임진왜란 때 최진립 장군이 갑옷을 이 나무에 걸면 나무가 능청 능청하였다.”라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바람과 비, 전란과 평화를 견뎌낸 회화나무는 이제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장군의 분신이자, 가문을 지켜온 살아 있는 유산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당시의 인물들이 모두 세월에 묻히고 잊혀가는 가운데, 회화나무는 그 옛날의 장군의 기개와 정신을 일깨워 우리에게 숭고한 정신을 전하고 있다. 회화나무 아래에서 자라난 자식과 손자들, 그리고 그 후손들은 나무를 조용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 최진립 장군의 모습으로 여겨왔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한데, 장군의 절개는 나무의 줄기요, 잎의 푸르름은 장군의 청백 정신으로 여겨졌다. 넓은 그늘은 후손들에게 쉴 자리와 삶의 방향을 일러주는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나무를 보면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보면 나무를 닮는다.”이조리의 회화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철학이고, 유산이며, 삶의 태도였다. 장군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뿌리는 나무를 타고 살아났고, 그 나무의 기품은 후손들의 마음에 뿌리내렸다. 가거십훈(家居十訓)은 나뭇잎처럼 가지마다 매달렸고, 청부(淸富)의 정신은 사계절마다 다시 피어났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회화나무는 단지 한 장군의 흔적이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함께 품고 살아온 신비로운 생명체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 나무는 갑작스레 잎이 마르고 고사하여 죽은 듯 보였으나, 1945년 해방과 함께 다시 싹을 틔워 살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추위를 피하려고 불을 피우다 불꽃이 나무 둥치에 번졌고, 겉은 타버렸지만, 그 해를 지나 다시 푸른 잎을 피워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나라의 혼이 되살아난 징조라며 감격했고, 그 나무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이들도 생겨났다. 나무에 금줄이 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 수호신으로 동제를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 몇 차례의 죽음과 부활을 겪으며 살아온 회화나무 노거수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이는 장군의 기개가 뿌리로 살아 있었고, 나라의 영혼이 가지마다 깃들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람 불 때마다 나뭇잎은 떨림이 아닌, 조용한 대화처럼 울렸고, 나무 아래를 지나던 이들은 저마다 가슴 한편에서 조상의 숨결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회화나무 노거수는 그렇게 한 장군의 철학이자, 한 민족의 의지로서 오늘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경주 최씨 가문의 육훈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벼슬을 하지 말라. :공직은 봉사의 자리이지 부와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강조.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부를 독점하지 않고 사회와 나누는 윤리.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남의 불행을 기회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 ▲과객을 후히 대접하라. :타지에서 온 손님, 특히 가난한 이들을 따뜻이 맞이하라는 뜻.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가문의 책임은 울타리 안에 있는 이웃 전체를 포괄한다는 선언.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겸손과 절약을 몸에 익히게 하는 교육.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8-06

숲,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 깨어나는 생명의 서사

숲,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 다시 깨어나는 생명의 서사이다. 나무들이 모인 곳, 숲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고 힐링 되는 기분이다. 숲은 모임의 장소, 만남의 장소, 삶의 터전이며 시장과 같은 생명체가 모여드는 공공의 장소이다. 숲은 많은 동물과 식물도 마찬가지겠지만, 인간이 태어난 최초의 자궁이다. 4억 년 전 숲이 지구에 생겨난 후,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200만 년 전, 인류가 처음으로 숲의 품속에서 첫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첫울음 소리를 내질렀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의 인간은 거대한 숲의 품 안에서 열매를 따 먹으며 살았다. 나무 위는 적들로부터 피난처였고, 숲속의 바위 아래에서 눈비를 피했다. 뇌는 작고 언어도 없었지만, 본능은 또렷했고, 바람과 빛, 동물의 발소리를 기억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숲은 도시였고, 나무는 집이었고, 물은 길이었으며, 짐승은 두려움의 대상이자 친구였다. 인간의 가장 깊은 무의식 속에는 그 숲에서 살아온 기억이 고스란히 세포의 유전자 DNA에 담겨 남아 있다. 조선시대 주막을 운영한 김설보 여인 월포만 해풍 막기 위해 조성한 비보림 홍수 때 마을 구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 노거수회 이삼우 회장, 숲의 가치 발굴 ‘여인의 숲’이라 이름 짓고 기념비 조성 공동체 위한 헌신·공익 위한 정신 상징 원초적 기억은 문명이 발달해도 오늘날까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직립보행을 하며 불을 다루고, 언어를 익히고,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인류는 점차 사유하는 존재로 진화해 갔다. 그때부터 숲은 단지 생존의 터전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을 품는 공간이 되었다. 사계절 따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숲의 풍경은 인간의 정서를 풍요롭게 했고, 존재의 의미를 되묻게 했다. 숲의 자연은 사람을 안정시키고 또한 깨우치며, 아름다움을 형성했다. 숲은 인간 삶의 그 모든 기능을 수행해 온 최초의 스승이자, 인류 정신의 뿌리였다. 이처럼 숲은 인간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그 깊은 연대감은 단순한 상징이나 은유를 넘어, 실제적인 구원으로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경북 포항 하송리 ‘여인의 숲’이 바로 그런 사례다. 경북 포항 하송리 ‘여인의 숲’을 아내와 함께 찾았다. 낙동정맥이 동해를 향해 마지막 숨을 고르는 포항-울진 간 7번 국도변에 인접한 포항시 청하면 하송리 마을에는 오래된 인공 숲 하나가 있다. 숲에는 봄이면 녹색 잎의 꽃을 피우고, 여름엔 짙은 녹음 아래 새소리가 적막을 깼다. 가을엔 누렇게 익은 들녘 곁에서 단풍이 붉게 타오르고, 겨울이면 가지마다 나뭇잎을 떨꾼 채 하늘 향해 팔을 벌렸다. 하지만, 숲이 진정 위대한 것은 이런 계절의 풍경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의로운 여인의 용기와 따뜻한 마음 때문이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 말기, 관동에 찰방이 주둔함에 따라 외역이 되어 번성했던 하송리 마을에는 김설보라는 여인이 있었다. 주막을 경영하며 큰 부를 쌓게 된 그녀는, 마을을 향한 사랑과 책임으로 한 가지 결단을 내린다. 월포만에서 불어오는 거센 해풍을 막고 마을이 배 형태인 고로 풍수 사상에 따라 ‘수구막이 숲’을 조성한 것이다. 참나무, 쉬나무,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등 활엽수를 심어, 마을 앞으로 열려 있던 자연의 틈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단순한 조경이 아니라, 마을의 생명과 복을 지키는 숭고한 장벽의 비보림 숲이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어느 해 거대한 홍수로 안청계리 소재 저수지가 범람하여 마을과 전답을 덮쳤다. 이때 이 숲이 그 걸름막 역할을 하게 되었다. 떠내려가던 가구랑 볏단이며, 가축, 그리고 사람들까지 이 숲에 걸려 살아났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그 숲을 ‘식생이 숲’ 곧 생명을 살린 숲이라 불렀고, 간편하게 ‘외역숲’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다. 이는 그냥 전설이라기보다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이름도 사라지고 기억도 희미해졌을 무렵, 노거수회 이삼우 회장이 숲의 가치를 다시 발굴했다. 김설보 여사의 공덕을 기리며 숲의 존재 가치를 고무시키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그 숲을 ‘여인의 숲’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단순히 여성이 만든 숲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름에는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사적인 부를 넘어 공익을 위해 나선 담대한 기부 실천이 담겨 있다. ‘여인의 숲’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한 풍수적 기능이나 홍수 방지책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곧 ‘공동체적 기억의 공간’이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한 여인이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는 이야기와 그녀의 결단이 자연을 이기려 하지 않고 품으려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마을 주민과 홍수에 떠내려가는 가축 등 뭇 생명을 구했다는 감동적인 전설은 지금 시대에도 잔잔한 울림을 준다. 오늘날 우리가 다시 ‘여인의 숲’을 찾는 이유는 단지 자연을 보기 위함이 아니다. 그 숲에 깃든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마음을 닮고자 함이다. 포항 하송리 ‘여인의 숲’은 바로 그러한 이야기의 보고다. 그늘에서 참나무 씨앗인 도토리를 두 손으로 품에 안고 기도하는 다람쥐를 보며, 우리는 숲을 만든 한 여인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여름의 녹음 아래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가을에 누렇게 익은 풍성한 벼들을 바라보면서, 겨울의 쓸쓸한 가지 틈으로 하늘을 올려다볼 때, 고요한 침묵 속에 여인의 용기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름에는 단지 여성이 조성한 숲이라는 뜻만이 담겨 있지 않다. 그것은 사적인 부를 넘어 마을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재산을 내어준 한 여인의 용기 있는 실천 그리고 생명을 품은 결단의 기록이자, 우리가 숲에서 다시 배워야 할 고귀한 정신을 상징한다. 도시는 숲을 떠났지만, 인간은 끝내 다시 숲을 찾고 있다. 이는 단지 쉼의 욕구가 아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생태계의 법칙을 무시해 온 인간이 그 법칙 앞에 다시 무릎 꿇는 과정이다. 숲은 지금도 스스로를 가꾸고, 생명을 순환시키며, 인간이 잃어버린 질서를 조용히 되돌려주고 있다. 포항 하송리 ‘여인의 숲’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숲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현재형이다. 나무 아래 드리운 그늘에서 우리는 김설보라는 이름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가지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보며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 숲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오늘도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김설보의 숲은, 아직도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되돌아올 길을 가르쳐주고 있다.” 수구막이 숲, 생명을 품은 ‘여인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깨닫게 해 주고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설보 여사 송덕비는… -김설보(金薛甫) 여사: 본관은 청풍김씨(淸風金氏), 헌종 7년(1841) 12월 30일생, 고종 37년(1900, 광무4년, 更子年) 1월 18일 60세를 일기로 사망. 그해 9월 8일 내연산 계조암에 논 5두락(5마지기, 약 1500평 정도)을 시주하였고, 남편 윤기석 공의 영정이 보경사에 봉안. 묘는 현재 포항시 북구 송라면 방석1리 뒷산에 남편 윤기석 묘역 내에 있다. -송덕비 : 出身坡平尹公琦碩妻淸風金氏薛甫不忘碑(출신파평윤공기석처청풍김씨설보불망비) 出義捐財 壬年我藪 百堵頌德(출의연재 임년아수 백도송덕) 罕覩基人 幾滅更新 銘此采隣(한도기인 기멸갱신 명차채린) 光武元年丁酉九月日外一二三洞立(광무원년정유구월일외일이삼동립) 재물을 희사하여 임년에 조성한 우리 숲을 백대로 송덕하노니 보기 드문 그 분이 거의 사라질 뻔한 것을 새롭게 하였으매 옥돌을 캐어다 이를 새겨 두노라. -남편 윤기석 : 여인의 남편 윤기석(尹琦碩)은 무과에 급제해 부사과(副司果, 조선시대 종6품 무관 벼슬)를 지냈으며, 고승 대덕의 영정만이 안치되는 보경사 원진각에 영정이 봉안될 정도로 예우를 받았다. /자료 제공: 이삼우 노거수회 명예회장

2025-07-30

‘객주’ 청송의 왕버들, 전설 간직한 채 살아나

소설가 김주영 선생의 고향이자 소설 ‘객주’의 배경이 된 경북 청송군 진보면과 인접한 파천면 관리 721번지, 한적한 도로변에는 오랜 세월을 말없이 견뎌온 왕버들이 전설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몸을 감싸지만, 겨울에는 잎을 모두 떨군 나목의 몸으로 세찬 바람과 마주 선다. 그 곁엔 오래전부터 함께한 마을 공동 우물이 있고, 한때는 나란히 선 소나무 노거수 한 그루도 있었다. 마을 공동 우물터와 왕버들, 소나무라는 소재로 구성된 한 세트의 농촌 풍경은, 겉보기와는 다른 청춘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사랑과 이별, 기다림과 아픔이 얽힌 이야기의 증인이며, 전설의 무대이자 마을의 심장이었다.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스러져간 사랑, 그리움이 나무가 되어 뿌리내린 이야기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전설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지는 삶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1968년 천연기념물 제193호 지정 18필지 땅에 뿌리 내린지 470여 년 높이 18m 부챗살처럼 퍼진 가지들 한 총각이 사랑하는 여인의 부친 대신 전쟁터에 나서며 심었던 ‘약속의 나무’ 조선시대 청춘남녀의 변치 않는 사랑 오랜세월 이겨낸 ‘철인’ 같은 왕버들 그 옆에 새순 돋아난 소나무 ‘만세송’ 민속과 사랑의 전설 간직한 자연유산 청송 관리의 왕버들은 1968년 3월 9일 천연기념물 제193호로 지정된, 민속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자연유산이다. 나이 470살, 키 18m, 몸 둘레가 5.7m, 앉은 자리 폭 23m로 그의 넓은 품은 키보다도 5m나 더 크다. 품고 있는 토지가 무려 18필지나 된다고 한다. 왕버들은 1560년경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원줄기에 난 굵은 가지는 태풍에 부러지거나 잘려 나갔으며, 원줄기에서 바로 뻗은 가지들이 부챗살 모양의 수형을 이루며 하늘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모습이다. 오랜 세월 속에서 줄기 속이 동공되어 외과수술을 받아 이물질을 안은 채 통증을 견디며 여전히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철인 같은 인상을 준다. 왕버들은 한 총각이 이웃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처녀의 늙은 아버지 대신 대리 출정을 나서며, 훗날을 기약하며 심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채 변치 않는 약속의 상징물로 남아 있다. 우물과 함께 마을의 시간을 지켜온 산 증인이며, 신분을 뛰어넘어 애틋한 사랑을 지켜낸 한 여인의 정한이 깃든 존재이다. 오래된 공동 우물은 예부터 마을 사람들의 쉼터이자 교류의 장소였고, 사랑이 움트고 이별이 고여 있던 공간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많이 흘러 소나무 노거수는 생을 마감하였고, 어린 후계목 소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나무는 조용히 한 편의 전설을 떠올린다.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끝내 이루지 못한, 조선시대 청춘 남녀의 슬픈 이야기이다. 마을에 채씨 성을 가진 예쁜 처녀가 늙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정숙하고 곧은 심성으로 마을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라에서는 의병을 모집하게 되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60세가 넘은 아버지 채 노인에게 출정 징집 명령 영장이 왔다. 이미 환갑을 넘긴 노인이 어찌 전쟁터에 나갈 수 있으랴. 딸은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당시 여인의 입장으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걱정만 하고 있던 터에, 이웃 마을에서 머슴살이 하던 젊은 청년이 찾아왔다. 그는 검게 그을린 손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한 총각이었다. 평소 처녀를 흠모해 왔던 총각은 신분 차이를 알면서도 감히 그녀에께 마음을 품고 있었다. “제가 대신 출정하겠습니다. 부친을 지키는 일은 그대의 몫이고, 나라를 지키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 말에 처녀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심이 담긴 말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전쟁이 끝나 돌아오면 부친의 허락 아래 백년가약을 맺기로 약속했다. 처녀는 오직 한마음으로 총각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기로 굳게 결심했다. 출정을 하루 앞둔 전날 밤, 두 사람은 우물가에서 남몰래 만났다. 그때 총각은 손에 들고 온 어린 왕버들 한 그루를 처녀에게 보이며 “이 나무를 우물가에 심어 놓고 가겠으니, 날 보듯 고이 길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총각이 떠난 뒤 매일 나무에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그를 기다리는 마음은 날마다 한결같았다. 왕버들은 점점 자라났지만, 총각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딸이 처녀로 늙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다른 사람과의 혼인을 서둘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처녀는 총각이 떠날 때 심어 놓은 나무를 어루만지며 상념에 젖었다. 드디어 결혼식 전날이 다가왔다. 마지막 순간까지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깊은 밤중에 아버지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아버지께 용서를 빌고는, 불효막심한 이 여식을 용서해달라는 유서를 남긴 채, 명주 수건으로 왕버들 가지에 목을 매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단 하나의 사랑만을 간직한 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왕버들 옆에서 새순 하나가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도 그곳에 나무를 심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한 그루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나무가 처녀의 일편단심 그리움이 환생한 것이라 여겼다. 전쟁터로 떠나면서 총각이 왕버들을 날 보듯 가꾸어 달라고 부탁했기에, 그 누구도 왕버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소나무는 처녀의 넋이 환생한 것이며, 한결같은 기다림이 나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고지순한 사랑은 세월에 묻혀 사라지고 없지만, 지금도 왕버들과 우물터, 후계목 소나무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죽은 처녀의 넋이라고 전해지는 소나무는 ‘만세송’이라 불리다 2006년경 고사 되었다. 두 나무 모두 마을의 당나무로서 음력 정월 14일 동제를 지내고 있으며, 이때 사용한 종이로 글씨 연습을 하면 글씨를 잘 쓰게 된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이처럼 애달픈 전설을 간직한 왕버들은 살아 숨 쉬는 문화유산이다. 소나무와 왕버들, 두 나무는 서로를 바라보듯 나란히 서 있다. 거대한 왕버들과 그 곁에 조용히 선 소나무. 이 두 나무는 세월을 이긴 풍경이며,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이야기이다. 왕버들은 말한다. 사랑은 신분을 넘고, 죽음을 넘으며, 기다림은 뿌리가 되어 세월을 감싼다. 그리고 지금의 인연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이다. 왕버들은 여전히 푸르고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고, 처녀의 넋이라 전하던 만세송은 세월 앞에 스러졌지만, 후계목으로 인해 그 기억은 잊히지 않았다. 나무는 말하지 않지만, 침묵 속에 많은 것을 전한다. 버들가지에 매달린 약속, 소나무에 스며든 그리움, 그리고 우물가에 흐르던 눈물까지도 나무는 기억하고 있다. 살아 있는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오늘의 사랑을 더 간절히 품어야 한다. 기다림이 뿌리가 되어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처럼, 삶 또한 그리움과 약속의 뿌리 위에서 피어난다. 왕버들과 만세송이 전하는 이야기는 단지 옛사랑의 전설이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조용한 울림이기도 하다. 만세송(萬歲松) 기념비의 내용은… 우리 지역의 예나 지금이나 산자수명하여 골짝 굽이굽이 늘 푸른 소나무가 많기로 유명하다. 이런 연유로 우리 군의 군목은 역시 소나무다. 생각컨대 옛 조상들이 청송이라 칭한 심오한 뜻이 어찌 없으랴. 문헌상 많은 기록이 있지만 이를 깊이 생각하고 정리 해 보면 아마 청(靑)은 오색지수(五色之首)이며 송(松)은 만수지장(萬樹之長)이라 하여 우리 지역 지명을 청송이라 칭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헤아려 보면 우리 지역의 지명을 청송이라 칭하고 군목을 송(松)으로 삼은 지가 어언간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우리 군을 표징하는 장송(長松)이 없었다. 이에 우리 군민의 뜻을 모아 한데 모우고 우리 청송을 더욱 빛내기 위해 고을 안에 있는 소나무 중 가장 크며 고송(古松)인 이 나무를 우리 군의 수호목으로 삼아 그 이름을 만세송이라 짓고, 나무 주변 땅을 매입하여 먼 후대까지 길이길이 보호하고 관리코자 여기에 이 비를 세워 그 뜻을 기록해 둔다. -1995년 5월 6일 입하(立夏) 청송군민 일동.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7-23

‘장사리 마을 숲’이 기억하는 그날의 기억

파도는 언제나 그 자리를 잊지 않는다. 동해의 먼바다 물결이 장사 해변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먼바다 수평선이 하얗게 열려 있었고, 내 앞엔 그날의 기록이 무연히 남아 있는 전승 기념관이 해변의 얕은 바다에 홀로 떠 있었다. 그리고 그 해변에는 바다를 향해 절규하고 있는 듯한 전몰 용사위령탑이 발길을 붙들었다. 풍경은 단지 추모의 대상이 아니라, 시간의 갈피 속에서 되풀이되는 한 민족의 기억이자 울림의 아픈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었다. 1950년 9월 새벽 동해안 장사리 해안 장사상륙작전에 참여한 학도병718명 139명 전사… ‘우국 청년의사’로 불려 그 바다는 한민족의 아픈 역사로 남아 2009년 천연기념물 지정 ‘도천마을숲’ 400년 전 ‘마을 보호하는 숲’으로 조성 정월대보름땐 마을 평안 기원 당제 등 마을 공동체 중심, 세월 품은 공간으로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4일 새벽 4시, 마침내 동해안의 장사리 해안에 정박한 문산호는 나이 17~19세 고등학생, 정식 군번도 계급도 없는 대부분 대구, 밀양에 거주하는 고등학생으로 편성된 학도병 718명을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우국충성심 하나로 총을 들었고, 악천후 속에서도 상륙을 감행했다. 정규 군대가 아닌 청소년들은,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최전선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무려 4일간 고지를 사수하며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어냈다. 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은 보다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단순한 전술적 성공이 아니라,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러나 그 대가는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 수십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들은 누구의 아들이자 친구였으며, 이름 없이 스러진 ‘우국 청년의사’라는 칭호로만 남았다. 그들의 넋이 아직도 바다를 감돌고 있는 듯,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 눈을 두고 한참을 서 있었다. 바다에는 젊은 청소년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송림 아래에서는 나이 드신 피서객이 조용히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고 있었다. 문득 해수욕을 즐기는 청소년들과 전쟁에 희생된 학도병들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지금의 평화는 그때의 희생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위령탑에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희생을 숙연한 모습으로 오랫동안 묵념을 했다. 이곳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도천리 마을, 그곳에는 2009년 12월 30일 천연기념물 제514호 면적 1만9064㎡로 지정된 도천마을숲이 있다. 400년 전 조성한 마을 숲은 바다에서 목숨을 내던져 나라를 지켰던 장사리의 기억과는 달리, 이곳은 시간을 지키고 공동체를 품어온 마을 숲이었다. 도천숲은 마을이 처음 생길 때 조성되었다고 전해 오고 있다. 앞산의 뱀 머리 모양이 마을을 해친다는 풍수적 해석에 따라, 이를 막기 위한 비보림(裨補林)으로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숲은 자연의 방패로 바람과 액운을 막는 신령의 집이었다. 주민들은 나뭇가지 하나 꺾지 않았고,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두려워하며 숲에 예를 다했다.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까지도 살아 있는 존재로 여기던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해야 한다는 오랜 철학이 뿌리내려 있었다. 정월 대보름, 숲속 당집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가 열린다. 다른 마을과는 달리 마을 청년들이 모두 참여하고, 다른 곳으로 떠날 때는 제당에 들러 인사를 하고 떠난다. 숲은 단지 녹색의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삶을 자연에 의지했고, 자연은 그들에게 응답했다. 지금은 줄어들었지만, 한때 숲은 산기슭에서부터 하천을 따라 남쪽 국시당들까지 이어졌고, 이 울타리 덕분에 도천리는 영덕 제일의 부자 마을로도 이름을 날렸다. 지축을 흔드는 전쟁 때도 도천리 숲은 마을을 숨기고 주민의 안녕을 품었을 것이다. 숲 안에는 삼베를 삶던 ‘삼굴’이라는 남한 유일의 구조물이 남아 있다. 조상의 손길이 담긴 노동의 자취, 땀방울이 스며든 생명의 흔적. 숲은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라, 조용히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역사였다. 나무 데크가 깔린 숲길을 걸었다. 발밑에서 들려오는 나무의 숨결, 머리 위로 퍼지는 녹음의 향기. 어느새 말없이 자연에 감싸여 있었다. 느티나무, 이팝나무, 말채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등 숲은 수백 년 된 노거수로 가득 차 있었다. 숲속 당집은 단정하게 기와집으로 돌담에 둘러싸여 있었다. 2006년 제7회 아름다운 숲 전국 대회에서 마을 숲 부분 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해양 문화와 내륙 문화가 연계된 융합의 독특한 문화를 향유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건강을 담보하고 있었다. 문득, 폐교된 도천국민학교의 교문 곁에 서 있는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1960년 개교와 함께 심어진 나무는 1994년도에 폐교되었지만, 지금도 굳건히 자라고 있었다. 아이들은 떠났지만, 나무는 남았다. 그것은 기다림이자 기억이었다. 나무 옆에 세워진 교적비가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평화와 일상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이름 없는 땀과 희생, 지혜와 인내 위에 놓여 있는가. 바다는 기억하고 숲은 품었다. 그 둘이 있기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 장사리의 바다와 도천리의 숲. 하나는 격렬한 희생의 장소이고, 다른 하나는 조용한 보전의 터전이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었다. 앞서간 이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후대의 평화는 없었을 것이다. 무너진 뿌리를 회복하지 못한 마을은 더 이상 공동체로 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두 장소는 대척점에 있는 듯하지만, 본질은 하나다. 바다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외적 헌신의 장소였고, 숲은 마을을 지키기 위한 내적 보전의 상징이었다. 바람은 장사리에서 울고, 나무는 도천리에서 속삭인다. 그리고 모든 것을 듣고 전하는 이들은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다. 역사는 전쟁과 평화, 파괴와 창조,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모순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는 존재한다. 그것은 ‘기억’이다. 장사리의 젊은 넋들을 기억하는 일, 도천리의 숲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 이 모두가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누리는 자유와 평화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오늘 장사리 해안의 시원한 바람을 등에 지고 도천숲 그늘에 잠시 쉬어 간다. 그 어느 곳보다 고요하고, 그 어느 곳보다 숭고한 두 장소가 전해주는 말 없는 가르침 속에서,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나 또한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누군가의 기억이 되고, 누군가에게 이어질 지혜의 숲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아내와 함께 평화가 깃든 시골 전원주택으로 향했다. 장사상륙작전은… 6.25 전쟁 교착상태 타개를 위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실제 상륙지역인 서해안 인천의 반대편에 있는 동해안 장사리 해안을 기습 상륙을 감행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상륙지역을 오판하도록 하여 경인 지역으로 병력 증원을 방지하고, 북한의 수뇌부와 적들의 주의를 동해안 지역으로 집중시키고, 아울러 낙동강 전선에서 방어 중이던 국군 3사단이 포항 남쪽에서 반격을 개시할 때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적의 진로를 차단하며, 아군의 전진로를 계척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1950.8.24 대구, 밀양에서 772명(대다수 학생) 대원 모집 8.27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대 창설(편성) 8.27~8.30 밀양에서 훈련 9.10 육군 작전명령 제174호 출동 명령 하달 9.13 오전 출정식(부산 부두,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국방부 장관 신성모 참석) 9.13 14시 LST 문산호 부산항 출발 9.14 04:30 장사 해안 도착 9.14 14:50 상륙 성공, 적의 주 보급로 포항 영천 방면 국도 완전 차단. 적군 후방 활동 마비. 적 2개 연대, 전차 4대 영덕 방면 유인 장사상륙작전 당시 평양방송. 유엔군 2개 연대 동해안 상륙 보도. 육군본부에서 “우국 청년의사”라고 칭호.(육군 교보 제13840호 1952.12.27) 미군 군사전문가들조차 성공 확률 5000분의 1로 점치며 만류했던 20세기 마지막 상륙작전인 인천상륙작전에 성공케 만든 장사상륙작전은 경주, 부산을 사수하고 서울을 수복하는 6․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7-16

500살 느티나무 노거수, 25년 만에 스승으로 우뚝

어릴 적 마을 당산목이라 하면 두려움과 함께 경외의 대상으로 함부로 손을 대면 동티가 나는 그런 근접할 수 없는 신령스러운 나무로 생각했다. 식물사회를 공부하면서 우연히 노거수와 인연을 맺고 노거수를 찾아 연구하고 공부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25년이란 세월이 지나니 이제는 노거수가 나의 스승으로 자리매김했다. 노거수는 우리 전통 민속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친 민속 식물자원으로 귀중한 자연유산이다. 경북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 507번지 들녘에 계단식 논과 밭이 펼쳐지는 고요한 풍경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하나의 생명, 그것은 바로 마을의 보호수인 500살 느티나무 노거수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순간들마다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을 잇는 중간자로 동신목(洞神木)·당산목으로 뿌리내려 몸통엔 사철나무 의지해 자라고 있어 하나의 생명이 또 다른 생명 품은 경이 그 아래 서면 시간 멈춘 듯 장엄한 기세 살아 있는 민속박물관이며 자연 유산 수형의 아름다움 등 문화적 가치 충분 천연기념물 지정해 보호 관리했으면 처음 나무와 마주한 날, 나는 말을 잃었다. 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잔잔한 여름날, 4m 높이에서 공중으로 솟은 아름드리 가지는 하늘을 덮고 그 원줄기의 키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기록에 의하면 29m나 된다고 했다. 그의 몸 둘레는 6.7m, 앉은 자리 폭이 무려 키보다 4.6m 큰 33.6m이다. 큰 키, 굵은 줄기와 무성한 잎이 하늘을 덮은 둥근 수형은 마치 이 땅의 시간과 사계절을 품은 살아 있는 성소 같았다. 그 줄기 가까이 다가가면 이끼와 지의류가 덮인 거친 껍질에는 세월의 결이 흐르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던 순간마다, 마을 주민은 물론 찾아오는 사람에게 기대에 부응했을 것이다. 나무는 단순히 오래된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중간자,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상징물로, 우리 민속문화에 뿌리내린 동신목(洞神木)이자 당산목이다. 마을 사람들이 두 손 모아 치성을 드리던 나무, 재앙과 풍년을 기원하든 그 믿음이 지금도 이 울창한 가지 사이로 흐르고 있다. 실제로 나무의 주변에는 낮은 돌담이 원형으로 둘러쳐져 있고 제단과 나무에는 금줄이 쳐져 있어 그 신성함을 가늠하게 한다. 어떤 가지는 부러진 채로 남아있으나, 그것조차도 존엄의 일부다. 상처 입은 채로 꿋꿋이 자리를 지키는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되고 뭔가 기대고 소원을 말하면 들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느티나무가 뿌리 내린 자리는 마을 앞 들판, 뒷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이 있는 평탄한 곳이다. 주변에는 팽나무, 고욤나무, 뽕나무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특히 느티나무의 몸통엔 사철나무가 의지해 자라고 있어, 하나의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품고 있는 장면은 경이롭다. 이런 생태적 공존은, 마치 세대와 세대를 잇는 문화의 흐름처럼 느껴진다. 나무는 그저 한 그루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생물들과 함께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얼마까지 동거할지 모르지만,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느티나무는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어 주민은 물론, 그로부터 경주시의 보호의 손길이 계속 이어졌다. 북쪽 가지는 바람에 부러졌지만, 동남쪽 가지는 왕성하게 뻗어 나간다. 그 긴 가지는 이제 땅으로 내려와 사람이 서서 거뜬히 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 농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나무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 길 끝에서 마주하는 나무의 기세는 참으로 장엄하다. 그 아래 서 있으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하고, 내가 살아온 삶조차도 어느 결 하나로 스며들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좁은 농로는 벼농사를 짓는 관계로 늘 질퍽하게 물이 고여 있어 다니기에 불편했지만, 그 불편한 과정을 겪고 만난 거대한 느티나무를 볼 때면 그 불평은 하얗게 잊고 만다. 노거수란 단지 오래되고 큰 나무가 아니다. ‘노(老)’는 세월이 깃든 존엄을 의미하고, ‘거(巨)’는 마을의 정신적 구심점을 뜻한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 많은 노거수들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 하구리의 느티나무 노거수는 살아 있는 민속박물관이며, 천년 고도 경주의 문화유산이고 자연유산이다. 나무의 생태적 가치와 더불어, 마을 공동체가 함께 지켜온 문화적 유산으로써 그 의미는 더욱 깊다. 경주는 신라 고도 문화 도시답게 나무 수형의 아름다움과 건강한 생태 그리고 민속문화적 가치로 보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 관리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느티나무 앞에 서 있다. 새들이 가지 사이로 날아들고, 들판 너머로 바람이 불어올 때면 나무가 나지막이 말을 건네는 듯하다. “흐르되 머무르라.” 그 말은,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도 지켜야 할 뿌리와 중심이 있음을 일깨운다. 500년을 버텨온 그 생명력은 단지 자연의 힘만은 아니다. 그것은 하구리 마을 사람들의 기억, 기도, 믿음이 어우러진 공동체의 숨결이다. 그래서 느티나무 아래 선 누구나 잠시 멈추게 된다. 나 또한, 이 나무처럼 굳건히 살아가기를, 뿌리를 잃지 않고 가지 넓히기를 바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마을 나무 노거수는 주민과 밀접한 생활 관계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나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 등 재미있는 일화도 있지만, 믿기 어려운 실화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켜야 할 법적인 근거는 없지만, 주민들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다양한 전설로 금지 사항을 정하여 서로를 감시하며 지켜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는가 하며 개인적으로도 병을 낫게 해달라, 자식을 갖게 해달라는 등 마음속 품고 있는 갖가지 소원을 빌기도 한다. 민속 신앙의 기능을 노거수가 일조하며 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거수는 마을에 여러 그루가 될 수 없다. 자연 부락 마을마다 한 그루가 되거나 여러 마을이 모여 한 그루를 선정하여 동목, 신목이라 하였다. 느티나무 노거수와 마을 주민과의 관계는 외관상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주민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 오백 년을 함께하여 오고 있다. 앞으로 또 오백 년을 함께 살아갈 것이다. 노거수 조사 연구 발달사 최초로 일제 강점기 시대인 1919년 조선총독부 ‘조선거수노수명목지’를 발간했다. 거수(巨樹), 노수(老樹), 명목(名木)에 대한 66종 5,330개체의 수종과 소재지, 흉고 둘레, 수령, 종류 및 고사, 전설 등 임학상의 자료 및 그 보존을 위한 정보를 포함하여 7가지 수목의 이용 유형별로 분류했다. 1972년 내무부에서 전국에 산재한 노거수 조사하여 ‘보호수지’를 발간했다. 보호수 지정 기준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지정된 천연기념물 이외의 나무로써 수령 100년 이상의 노거수이거나 수목 또는 풍치 경관 수림을 구성하는 개체 등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품격 분류를 위하여 수목의 수령과 진귀성에 따라 시도 나무는 수령이 500년, 시군 나무는 수령이 300년, 읍면 나무는 수령 200년, 마을 나무는 수령이 100년 이상으로 기준을 처음으로 채택하여 적용했다. 1984년 산림청은 법적 근거를 마련하여 노거수 관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노거수를 중요한 식물자원으로써 그리고 문화유산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1992년 경북 포항 지역에 발족한 ‘노거수회’는 ‘노거수’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현장에서 노거수 복원과 보존 시민운동을 오늘날까지 전개하고 있다. 현재 법적으로는 천연기념물 노거수는 국가 문화유산청에서 보호수는 산림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보호 관리하고 있으나 그 중심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을 주민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7-09

‘물처럼 바람처럼’ 오랜 아픔과 고요를 모두 안고 서있는 나무

한반도 백두대간을 이어 힘차게 뻗어 내린 낙동정맥의 동남을 부여잡고 맑고 푸른 동해에 몸을 담그고 있는 형국의 경북 영덕은 산과 평야, 해변, 바다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을 빚어 놓은 아름다운 고장이다. 특히 영해, 병곡, 창수는 옛 영해부의 핵심지역으로 자연에 인문학이 입혀진 유서 깊은 문향의 고을이다. 이곳 영덕 창수로 들어온 지도 어언 20여 년이 되어간다. 창수는 낙동정맥이 갈라놓은 동해안과 경북 내륙지방 영양, 안동을 연결하는 산중 통로이다. 창수(蒼水)의 뜻은 글자 그대로‘맑고 푸른 물’의 고장을 의미한다. 낙동정맥 골골이 동해바다에서 생성된 구름의 빗물이 계곡을 따라 송천이라는 내로 모여들어 고래불 해변을 관통하여 또다시 동해에 합류한다. 이런 수려한 자연경관은 찬란한 문화와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영덕 창수면 가산리서 나옹선사 출생 고려 공민왕때 서산 아래 장육사 창건 버려진 아기 까치들이 날개 펴 살려내 ‘까치소’라 이름 붙인 ‘탄생설화’ 전해 20세때 출가하며 꽂아둔 반송지팡이 움 돋아 낙락장송 되어 600년간 살아 지금도 ‘반송정’이라 부르며 행적 기려 오랜세월 마을 지킨 신기리 느티나무 키 16m·둘레 8m·앉은 자리 폭 26m 거대함과 오래됨에 놀라 경외감 절로 풍상에 큰 두 줄기만 남아 안쓰럽지만 거대한 젊은 느티나무들 둘러서 호위 그 한 그루가 절이 되고 수행처 되는 곳 특히 창수 출신 나옹선사는 고려 공민왕 때 운서산 아래 1355년 장육사(裝陸寺)를 창건하고 불교 혁신에 앞장섰다. 집으로 드나들 때면 일부러라도 장육사를 찾아 생활에 쌓였던 심신의 피로를 푼다. 구름도 쉬어가는 곳,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장육사에 들어서면 바깥세상과는 단절되는 아늑한 느낌을 받는다.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둘러 처진 산과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 바람에 흘러가는 구름뿐이다. 아내와 함께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도 그랬다. 장육사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요사채 앞 평상에 누워 낮잠을 즐기는지 아니면 하늘의 흰 구름을 보고 명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너무나 편안하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나옹선사는 1320년 고려 충숙왕 7년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서 출생했다. 호는 나옹(懶翁). 법명은 혜근(惠勤). 시호는 선각(禪覺), 별호 강월헌(江月軒), 왕사보제존자(王師普濟尊者)이다. 그는 위태로운 고려말, 자신만의 불교 사상으로 꺼져가는 선풍(禪風)의 법등을 다시 밝히고, 불교계의 통합과 민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회암사 도량을 정비하여 불교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고 염불은 곧 참선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쉬운 가사 문학으로 지어 민중들을 교화하여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나옹의 삼가(三歌) 중 백남가에 “헤어진 옷 한 벌에 여윈 지팡이 하나, 천하를 횡횡해도 걸릴 데 없네.”라는 말로 검소한 생활 속에 깨달음을 강조했다. 그렇다. 신앙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백번 공감했다. 나옹선사의 탄생 설화도 있다. “나옹의 어머니인 정씨 부인은 남편이 관리의 횡포에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가자 남편 대신 만삭이 된 몸으로 동헌에 잡혀갔다. 가는 도중에 작은 냇가에서 아이를 출산하지만, 관리들은 아기를 버려두고 부인만 관아로 데리고 갔다. 사정을 들은 부사가 정씨 부인을 풀어주었고, 다시 냇가에 도착했을 때 수십 마리의 까치들이 날개를 펴서 핏덩어리의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나옹은 하늘의 보호를 받고 살아났다.”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금도 그곳을 ‘까치소’라고 한다. 또한 식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나옹은 20세 젊은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보고 인생무상을 느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의 길을 떠나면서, 그때 반송 지팡이 하나를 거꾸로 땅에 꽂아 두고 ‘이 나무가 살아서 자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라.’라는 말을 남기고 문경 사불산 대승사 묘적암에서 당대 명필인 요연선사에게 출가하였다. 그때 반송을 꽂았던 그 자리가 바로 반송정이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이곳에 꽂아 둔 반송 지팡이에서 움이 돋아 낙락장송이 되어 600여 년 살다가 1965년 고사(枯死) 되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마을 전체를 반송정이라 한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장육사 못미처 나옹왕사 교육관이 있어 나옹에 대한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다.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339번지에 살아가고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다. 장육사와 또한 우리 집과 가까이 있는지라 여러 번 가 보았지만, 갈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오늘은 가는 도중에 비가 내렸다. 현장에 도착하여 우산을 받쳐 들고 나무 밑으로 갔다. 아내는 그를 보자 깜짝 놀라워하면서 두 손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무심코 한 행동으로 우리 민족의 DNA에 노거수에 대한 경배의 마음이 들어있지 않나 싶었다. 나 역시 거대함과 오래됨에 놀라 여느 때처럼 고개를 숙이고 경외감을 표했다. 그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외모의 풍채에서 느끼는 무게감은 천년의 세월이 묻어나왔다. 키 16m, 몸 둘레 8m, 앉은 자리 폭 26m나 되었다.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크다 보니 나무줄기는 오랜 세월에 부러져 나가고 큰 두 줄기만 남아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비가 내리다 보니 주변의 계곡물과 하천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어울려 묘한 정취를 느끼게 했다. 멀리서 보면 노거수가 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가까이 가 보면 거대한 젊은 느티나무들이 노거수를 중심으로 주변에 서서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무는 인간과 달리 호위무사를 싫어하고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햇볕을 나누어 갖기보다는 혼자 독차지하고 싶은 나무 본연의 욕망일 것이다. 언덕이라 흙이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주민들의 울력으로 돌담을 쌓아 놓았다. 제단이 있고 나무에 금줄이 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물과 바람처럼 살라는 나옹선사의 가르침은 단지 마음을 닦는 도의 말씀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며 살라는 지극히 실천적인 철학이기도 하다. 나옹이 심어두고 떠난 반송 한 그루가 세월을 품고 자라났듯, 이 신기리의 느티나무 또한 오랜 침묵 속에 마을을 지키며 하늘을 우러러 서 있다. 그 나무 앞에 서면 사람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인다. 인간이 만든 거대한 건축물 앞에서는 웅장함에 놀라지만, 나무 앞에서는 고요한 경외가 깃든다. 그 이유는 나무가 세월을 품었기 때문이다. 아무 말 없이도 삶의 본질을 일깨우는 나무, 아픔과 고요를 모두 안고 서 있는 나무는 곧 나옹선사가 말한 ‘물같이 바람같이’의 표상이다. 천 년을 묵은 느티나무 노거수 앞에서 마음을 다잡고 삶을 돌아본다. 나무처럼 한 자리에 뿌리내리고, 나무처럼 무심하게 햇살을 품고, 나무처럼 침묵 속에 사람들을 품는 그런 삶, 그것이 어쩌면 나옹이 남긴 진짜 법문일지 모른다. 나무 한 그루가 절이 되고, 수행처가 되는 곳. 바로 이곳 신기리 느티나무 아래, 바람도 물도 잠시 머물다 간다. 나옹선사의 ‘청산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을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7-02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부처의 마음이 있듯이…

늘 경험하는 일이지만, 노거수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 펼쳐지는 농촌의 정겨운 풍경에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도 있다. 내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 감정선이 떨리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어릴 때 일들이 가물가물 잊을 만도 한데 실상은 더욱 또렷하게 가슴 한 곳에 저장되어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피어오른다. 물오른 나무처럼, 젊은 시절의 패기로 인한 후회와 미련은 이제 물처럼, 바람처럼 떠나보내고, 마음은 평정심으로 노년의 삶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니 무심한 세월을 탓할 만도 아닌가 싶다. 삼라만상의 천태만상을 보면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로움으로 관조할 수 있는 생각의 근육도 생겨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한 숨겨진 그 무엇도 보였다. 자신의 감정과 입장에서 아니라 상대의 위치에서 보고 느끼는 현상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세종 때 낙향 선비 황전 ‘첨모당’ 짓고 도토리 열리는 구황 나무 마을에 식재 갈참나무 중 천연기념물 지정은 유일 장사 ‘허 장군’ 관련된 수호석과 함께 경배의 대상으로 별도로 동제 지내와 나즐로 노거수를 찾아 나서는 일 또한 그러하다. 나무의 웅장한 자태와 그 오래됨의 역사 앞에 서면 마을의 재미나는 전설과도 만나게 된다. 전설의 실타래를 풀어보면 지난 삶의 역사와 함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언중 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오늘만도 그렇다. 경북 영주시 단산면 병산리 산 338번지 마을 동산에 우뚝 높이 선 천연기념물 제285호 갈참나무 노거수이다. 외형상으로 나이 600살, 키 15m, 가슴둘레 4m나 되는 거대하고 오래된 나무이다. 그러나 마을 주민과 함께한 600년이라는 장대한 세월의 삶을 어찌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며,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까지 살아오고 있다. 천연기념물 갈참나무 노거수 앞에 서면 또 하나의 전설이 기다리고 있다. 나무는 묘하게도 마을 중심에 있는 꽤 높은 동산의 넓은 정상에 살아가고 있다.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마을 주민은 갈참나무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나무 앞에 큰 돌을 기단석 위에 세워놓고 그 앞에는 제단석을 만들어 놓았다. 돌에는 금줄을 쳐 놓은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보였다. 그 돌이 마을 수호석(守護石)으로 허 장군석이다. 그 유래를 보면 이렇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이 마을에 아주 힘이 센 젊은 허장사(許壯士)가 살았다고 한다. 하루는 젊은 장정들이 마을 뒤에서 제일 높은 시루봉에 올라 돌 던지기 시합을 했는데, 허장사가 던진 돌이 10여 리를 날아 이곳 병산리 마을 앞 논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허장사를 ‘허 장군’이라 불렀다. 허 장군이 던진 돌을 신성시하다가 어느 날 이곳으로 모셔 마을 수호석(守護石)으로 삼았다고 한다. 해마다 정월 초에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등 제관을 정하고 제사 음식을 정성껏 마련하여 정월보름날 자시에 수호목인 갈참나무와 함께 서낭제를 올리고 풍년 농사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동제를 올린다고 한다.” 이 전설은 누가 봐도 허무맹랑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을 들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1m도 던질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면 왜 마을 수호석으로 믿고 또 허 장군돌이라 이름 붙이고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며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할까. 수석처럼 특별하게 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값나갈 것도 아니 보였다. 병산리 마을은 창원황씨 집성촌인데 황 씨가 아니고 허 씨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그 끝이 없다. 그 답은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설 속에 우리 조상들의 자연관이 고스란히 숨어 있지 않을까 싶다. 도도처처불심(到到處處佛心)이라고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부처의 마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 민중 사이에 전해오는 자연관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어귀나 뒷산, 주변 어느 공간에 나무 두 그루를 심어 음양오행설에 따라 남자를 상징하는 전나무와 여자를 상징하는 느티나무를 한 세트로 심었다. 그 변천 과정에 수종도 바뀌어 여성을 상징하는 나무와 남성을 상징하는 나무 대신 돌이나 돌탑으로 바뀐 마을을 흔히 볼 수 있다. 보통 마을에서는 수호목과 돌이 한 세트로 제단도 하나인데, 병산리 마을은 별도의 제단을 두고 제사도 별도로 지낸다는 것이 좀 특이할 뿐이다. 갈참나무는 창원황씨 봉례공(奉禮公)의 황전(黃纏 1391~1458)이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마을에는 황전이 세워 지방 유생을 가르쳤다는 첨모당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갈참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도, 수호목으로 정한 것도 이 나무가 유일하다. 왜 황전은 갈참나무를 식목하였을까? 그 이유는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너무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 이유가 전해 내려오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부터 흉년이 들면 도토리가 많이 열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흉년에 대비해 구황(救荒)의 의미로 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뭇가지가 구불구불하면서도 우산살처럼 퍼져있는 자유로운 모습의 아름다움은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갈참나무는 참나무로 불리는 나무 중에 한 종이다. 참나무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등 여섯 종이 있다. 나무껍질과 잎, 열매로 구분하나 일반사람이 구분하기에는 그리 쉽지 않다. 나무껍질은 회색으로 그물처럼 얇게 갈라진다. 잎은 마주나며 타원형 또는 도란형이며, 끝이 뾰족하고 뚜렷한 톱니가 있다. 열매는 도토리이며, 꽃이 핀 그해 9~10월에 익는다. 도토리는 식용이나 약용으로 쓰이며, 과거에는 가루를 내어 떡이나 도토리묵 또는 죽으로 이용했다. 나무의 결이 곱고, 내구성이 뛰어나 건축재, 선박재, 가구재, 바닥재 등으로 쓰였다. 병산리 마을 동산 위에 우뚝 서 있는 갈참나무는 가지가 위로 솟기보다 손이 닿을 정도로 아래로 쳐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나뭇잎 아래에 웬 장수풍뎅이 한 마리가 조용히 졸고 있다. 첨모당(瞻慕堂)은… 황전(黃纏, 1391〜1459)이 세종 11년(1429)에 학문을 연마하고 지방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첨모당은 선조들의 학덕과 업적을 우러러 사모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황전은 1458년에 사직하고 병산에 내려와 은거했다. 1535년 가선대부 공조참판에 증직되고 그 3년 후인 1538년에 고택을 중수하여 첨모당 현판을 걸었다. 첨모당 앞에 회화나무가 있고 그 옆에 신위를 모신 숭보사가 있다. 황전에 대한 일화가 있다. “1456년 순흥에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던 금성대군이 사람을 보내 쌀 포대 속에 은괴(銀塊)를 몰래 가지고 와서 만나기를 청했다. 그러나 공은 병이 들어 갈 수 없다며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일찍이 서로 교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지위도 다르니 물건을 받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돌려 보냈다. 이듬해 단종 복위 운동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금성대군은 물론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나 공은 그로 인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세종 8년(1426년)에 조회와 의식을 담당하던 통례원봉례(通禮郞奉禮)의 직을 역임, 병산 마을은 창원황씨(昌原黃氏) 황량중(黃亮仲) 7대손이 고려 공민왕 1357년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황승후(黃承厚)가 개척한 창원황씨(昌原黃氏) 집성촌 마을이다. 아들 황처중(黃處中)은 조선 초에 영일 감무(監務)를 지냈으며, 황전은 그의 아들이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2025-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