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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국내서 해외로 이어진 사회공헌활동 ‘뜨리마 까시, 포스코’

◇ 뜨리마 까시, 포스코“저는 포스코가 도와 달라고 하면 어떻게든 힘을 보탤 겁니다.”지난달 30일 찔레곤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에서 약 2㎞ 떨어진 꾸방사리(Kubangsari) 마을.납시아씨(Napsiah·55·여)는 거실과 방 2개가 딸린 집에서 자식 내외, 손녀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찔레곤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집 안은 맞바람이 들어 시원했다. 글 싣는 순서1. 포항 영일만의 기적, 인도네시아에 닿다2.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포항시 기회 찾으려면3. 인도네시아와 포항 기업 간의 교류 현 주소4. K기업문화, 인도네시아에 퍼진 한국기업 저력5. 탄소중립 시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떻게납시아씨의 집은 포스코가 ‘스틸빌리지’ 사업의 일환으로 새로 지은 집이다. 포스코는 2018년부터 2022년까지 포스코1%나눔재단, 포스코 비욘드 봉사단 등 포스코 사회공헌 역량을 총 동원해 찔레곤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 인근 저개발 지역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펼쳤다.봉사자들이 직접 지은 집이라 다소 투박하지만 깨끗한 하얀 벽, 하얀 타일이 깔린 납시아씨의 집은 이 동네 집 중 비교적 신식이다. 납시아씨는 집을 찾아온 취재진을 반기며 포스코 덕분에 편안한 집에서 잘 수 있게 됐다며 연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그는 “포스코와 관련된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자고 가도 좋다”며 “포스코가 도와 달라고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꾸방사리 마을에 거주하는 마스투아(Mastuah·55·여)씨도 반갑게 취재진을 맞았다. 마스투아 씨가 살던 집은 빗물조차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몇 달 씩 매일같이 비가 쏟아지는 우기(雨期) 동안엔 마스투아씨와 가족들은 비에 젖은 축축한 바닥을 닦고, 또 닦아야 했다. 포스코는 2018년 마스투아씨 집에 방 두개와 거실이 있는 새 집을 선물했다. 마스투아 씨는 “불편하기도 했지만 집이 무너질까봐 늘 불안했는데 새 집이 생긴 뒤로 편하게 잘 수 있다”고 밝혔다.찔레곤 현지에서 포스코가 받는 사랑을 한 눈에 체감할 수 있었다.스틸빌리지 사업으로 포스코는 주택 25세대 외에도 화장실 30개소, 학교 건물 3개소, 쓰레기 처리시설 1개소를 새로 지었다. 3년이 넘게 진행된 프로젝트에는 포스코그룹 임직원들, 포스코 비욘드 봉사단, 해비타트 봉사단 등이 개인 시간을 쪼개 참여했다.마을에는 스틸빌리지 사업을 통해 시설을 보수한 초등학교도 있다. 하교를 하던 아이들이 취재진과 포스코 직원들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며, 졸졸 따라다녔다. 익숙한 듯 크라카타우 포스코 직원들이 아이들에게 인사를 나누자, 아이들은 밝은 표정으로 ‘뜨리마 까시’(terima kasih·감사합니다)를 외쳤다.크라카타우 포스코 관계자는 “인도네시아가 빈부격차가 심해 찔레곤 제철소 인근 저개발 지역은 사람들이 흙바닥에 나무 판자로 지은 집에 거주하는 등 주거 환경이 좋지 않다”며 “특히 학교, 유치원, 보육시설 등 교육환경이 열악한 경우가 많아, 스틸빌리지 프로젝트를 할 때도 미래세대 아이들이 희망을 느낄 수 있는 마을을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교육시설 개선도 함께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의 자립을 돕는 사회공헌 프로그램포스코는 크라카타우 포스코를 건설한 직후부터 제철소가 위치한 찔레곤의 지역 발전을 위해 다양한 도전을 해왔다. 2013년 인도네시아 사업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2015년, 포스코는 크라카타우 포스코 사회적 기업, PT.KPSE (Krakatau POSCO Social Enterprise)를 설립했다. PT.KPSE는 포스코 1%나눔재단 기금 7억원과 KOICA 기금 7억원을 투입해 설립된 포스코의 자회사형 사회적 기업이다.PT.KPSE는 특별한 설립 배경이 있다.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 가동 초기, 인근 마을 청년들이 생계를 이유로 자재를 훔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돈을 벌고 싶지만 일자리가 없어 생긴 일이었다. 포스코는 지역 빈곤층에게 드리운 가난의 고리를 끊기 위해 지역에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민들이 경제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고심 끝에 나온 것이 바로 사회적 기업, ‘PT.KPSE’다.PT.KPSE의 사업은 장기적으로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주민들이 역량 개발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PT.KPSE는 6개월 단위로 30명씩 인성 교육, 직업역량 강화 교육 등을 실시한 후 교육을 이수한 지역민을 공장 환경 정비 요원 등으로 채용해 지속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돕는다. 마을 주민 대상으로 소규모 창업 지원 교육도 실시하고, 제철소가 위치한 인근 공단에 취업할 수 있도록 컴퓨터, 워드 등 기본 직무 능력 교육도 제공한다. 사회적 기업 운영으로 발생하는 이윤의 70%는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사회공헌기금으로 재환원해 선순환을 만들고 있다. 2015년 설립 이후 2023년 상반기까지 총 378명이 교육을 이수했고, 2022년까지 237명이 취업에 성공했다.포스코만의 특별한 사회공헌 활동의 정점은 포스코 커뮤니티 러닝센터(P-CLC, Community Learning Center)다. 2022년 스틸빌리지 사업 일환으로 개관한 찔레곤의 다목적 시설인 CLC는 현재 PT.KPSE에서 운영하고 있다. 시 정부에서 제공한 연면적 약 661.16㎡(200여 평) 규모의 부지에 세워진 지상 2층의 ‘스틸’ 건물은 낮은 목재주택들이 즐비한 찔레곤 마을에서도 단연 눈에 띈다. 지역 주민들의 교육시설이자 문화 공간인 CLC에는 강의실, 컴퓨터실, 도서관 등 지역민들의 역량 개발을 위한 시설들이 자리해 있다. 인근 지역에서 드물게 에어컨이 있는 이 건물은 지역 주민들이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쉼터가 되기도 한다.P-CLC에 들어서자 한국에서 온 포스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포항과 광양제철소에서 근무하다 인도네시아로 파견을 간 직원들이었다. 현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포스코 주재원, 현지 직원들은 ‘아요 스망앗’(Ayo Semangat·파이팅합시다)이라는 봉사단을 구성해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포항제철소에서 하고 있는 재능봉사활동과 유사하다. 이날 직원들은 P-CLC에 조만간 들어설 한국어 학교 개관을 준비하고 있었다.크라카타우 포스코는 제철소 인근 지역사회 청년 및 보육시설 학생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위한 ‘K-Dream 한글학당’을 지난 7일 개원했다. 크라카타우 포스코의 한국인 임직원과 통역사 직원이 학생들에게 직접 한글을 가르치며, 약 1년간의 교육과정 운영 후 우수학생은 크라카타우 포스코 및 협력사로 직원으로 채용을 추진할 계획이다.포스코 생산기술전략실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지난해 9월부터 크라카타우 포스코 열연 공장장을 맡고 있는 이정희 부장은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중시하는 포스코 직원들답게 인도네시아에서도 주재원들이 봉사활동에 많은 열정을 쏟고 있다”며 “주민들의 만족도가 높은 게 눈에 보이니 봉사하는 직원들의 의욕도 함께 올라가는 것 같다”고 전했다.지역 주민들이 교육 프로그램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PT.KPSE 아리(Mr. Arie) 대표는 자신있게 “그렇다”고 답했다.그는 “PT.KPSE가 들어서고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있다”며 “PT.KPSE는 지역민들에게는 ‘희망’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른 사회공헌 프로그램들 보다도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 세계로 뻗어나가는 ‘기업시민’ 글로벌 임팩트, 그 원류는찔레곤을 감동시킨 포스코 커뮤니티 러닝 센터, 재능봉사단 아요 스망앗을 보면 포항의 ‘포스코 나눔스쿨’, ‘포스코 재능봉사단’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자회사형 사회적 기업 PT.KPSE는 장애인 고용 사업장인 ‘포스코 휴먼스’를 닮았다. 포스코가 국내에서 펼치고 있는 기업시민 활동이 이들의 원류이기 때문이다.기업의 사회 공헌 개념이 낯설었던 창립 초반부터 포스코는 사회환원과 지역상생에 매진해 왔다. 창립 후 광양제철소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포스코는 작은 어촌이었던 포항의 인프라 건설에 중점을 두고 사회공헌 활동을 개진했다. 문화시설인 효자아트홀 개관, 실내체육관 건립 지원이 대표적인 사례다.주목할 점은 미래세대 육성에 중점을 둔 것이다.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86년 국내 최초로 연구중심대학 포스텍을 설립, 산학연 협력체제를 구축했다. 포스코의 선견지명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수도권 중심 주의가 강화되면서 지역 대학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며, 지역 대학들의 경쟁력이 위협받고 있는 가운데 포스코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포스텍은 굳건히 국내 최정상 이공계 대학의 아성을 지키고 있다.연이어 설립한 실용화 기술 전문연구기관인 RIST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은 포스코, 포스텍과 시너지 효과를 내어 포항이 산업 연구 도시로 발전하는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포스텍-RIST-포스코로 이어지는 산학연 협력 체계는 지방 소멸 시대 포항이 지닌 주요 자산이다. 든든한 산학연 협력 체제가 있기에 비수도권 지역으로서는 드물게 벤처기업들도 포항을 주목하고 있다. 체인지업그라운드 등 포스코의 벤처 지원 사업과 맞물려 미국 CES에서 주목한 유망스타트업 그래핀스퀘어는 수도권에서 포항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전기차 배터리 플랫폼 기업 피엠그로우, 협동로봇 전문기업 뉴로메카 등은 포항에 공장을 신설했다.조업이 안정된 90년대 이후에는 더 적극적인 사회공헌 활동을 추진했다. 포항테크노파크, 환호해맞이공원 건립을 지원하고, 프로축구단 스틸러스를 설립해 지역 문화 발전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했다. 소외계층을 위한 기부 사업도 꾸준히 개진했다. 실직자를 위한 실업기금, 연말 불우이웃돕기, 수재의연금 등으로 900여 억원을 출연했다.포스코의 사회공헌활동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임직원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1991년부터 포스코는 각 부서와 포항의 마을, 단체, 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어 봉사활동, 교류활동을 펼쳤다. 2003년부터는 포스코봉사단을 창단해 더욱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직원들이 휴일을 활용해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2022년 1월부터 9월까지 봉사활동에 참여한 인원만 누적 5천55명으로, 누적 봉사시간은 11만 시간이 넘는다.나눔과 봉사 문화가 있었기에, 10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크라카타우 포스코 역시 기업시민 활동에서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임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든든한 뒷받침이 됐다.포스코 관계자는 “한국 최초 일관제철소를 만들며 포항과 강건한 상생관계를 만들어낸 사례가 있듯, 인도네시아에서도 모범적인 지역 상생 모델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고 밝혔다./인도네시아에서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9-17

“이차전지 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지원과 규제 완화 필요”

◇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글로벌 전기차 허브 도약 꿈꾸다인도네시아가 전기차에 주목하고 있다. 배터리 필수 원료인 니켈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약 2천100만t의 니켈을 보유하고 있는 니켈 세계 최대 매장국이다. 2019년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전기차산업 글로벌허브 국가 발전전략을 제시했다. 2030년까지 전기차 생태계를 조성하고 전기자동차 생산·수출 기지로 도약하겠다는 그림이다. 아세안 국가 중 가장 큰 자동차 시장을 보유하고 있는 인도네시아는 전기차 허브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자국 전기차·이차전지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인도네시아가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은 ‘무역장벽’이다. 인도네시아는 2020년부터 배터리 필수 원료인 니켈 원광 수출을 금지했고, 현지 가공품 수출만 허용했다. 자원을 무기로 삼은 셈이다.기술력을 가진 해외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현지화율에 따른 인센티브 제도도 마련했다. 인도네시아는 전기차 생산 회사의 현지화율을 2030년 이후 80%까지 끌어올리고자 계획하고 있다.아세안 국가 사이의 국제 협력도 탄탄하기 때문에 전기차 관련 기업들은 인도네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2018년 맺은 아세안무역협정(AFTA)에 따라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한 차량은 아세안 회원국에 무관세로 출국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 생산 공장을 건설하면 인근 국가인 태국, 베트남 등 다른 아세안 국가들로 진출이 용이한 것이다.국내 기업들도 빠르게 인도네시아에 진출하고 있다. 공공시설에서 현대자동차 아이오닉5 광고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연산 15만대 규모의 아세안 지역 첫 완성차 생산공장을 인도네시아에 준공한 뒤,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지난 5~7일 열린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현대자동차는 아이오닉5, 아이오닉6, 제네시스 G80 전동화모델 등 전기차 3종으로 특별제작한 아트카 23대를 운행하며 2023부산국제박람회와 자사 전기차 라인을 홍보했다. 현대자동차는 LG에너지솔루션과 함께 배터리셀 공장도 건설하고 있다. 2024년 상반기 중 배터리셀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합작 공장에서 생산되는 고성능 NCMA리튬이온 배터리셀은 2024년부터 생산되는 현대차와 기아 전기차량에 탑재될 예정이다. 글 싣는 순서1. 포항 영일만의 기적, 인도네시아에 닿다2.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포항시 기회 찾으려면3. 인도네시아와 포항 기업 간의 교류 현 주소4. K기업문화, 인도네시아에 퍼진 한국기업 저력5. 탄소중립 시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떻게◇‘전기차’ 블루오션에서 먹거리 찾는 포스코그룹지난달 29일 방문한 포스코 가공공장은 훈훈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자카르타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까라왕에 있는 포스코 IJPC 인근에는 최근 전기차 공장이 들어섰다. 포스코 IJPC는 도요타, 혼다를 비롯한 자동차 기업들이 다수 포진한 KIIC(Karawang International Industry City) 공단 내에 위치해 있다. 지난해 새로 준공된 현대자동차 완성차 공장과는 차로 40분 정도 떨어져 있고, 2021년 5월 준공한 3공장 인근에는 LG에너지솔루션과 현대자동차의 합작공장이 건설되고 있다. 자동차 밸류체인 한 가운데 자리잡은 것이다.포스코 IJPC는 포스코로부터 철강 제품을 수입해 고객사가 요구하는 규격으로 절단, 가공해 판매하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 현재 주력하고 있는 분야는 단연 자동차용 철강재다. 자동차 외판부터, 부품에 쓰이는 소재까지 다양한 철강재를 이곳에서 공급하고 있다. 늘어나는 철강 수요에 발맞춰 지난해 포스코 IJPC는 3공장을 신설했고, 2010년 연간 5만t이었던 판매량은 지난해 27만t을 돌파했다.포스코 IJPC 관계자는 “크라카타우 포스코 제철소 2기투자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인도네시아 내에서 냉연, 도금, 자동차 강판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면 생산부터 가공, 유통까지 포스코그룹이 수행하는 밸류체인이 완성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전기차 확대 정책에 따라 현대자동차의 인도네시아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면, 일본 기업이 장악해왔던 인도네시아 자동차 시장을 한국 기업이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포스코 IJPC는 판매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현재 4공장 신설도 추진하고 있다.포스코그룹은 이차전지소재 분야에서도 인도네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포스코홀딩스는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니켈 생산 사업 2건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 기업 최초로 이차전지용 니켈 생산에 도전한 것이다.하나는 중국 닝보리친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에 니켈 함유량 기준 연산 12만t 규모의 니켈 중간재(MHP 이Mixed Hydroxide Precipitate) 생산공장을 건설하는 것이다. 먼저 1단계로 니켈 함유량 기준 6만t 규모의 생산공장을 연내 착공해 2025년에 생산을 개시할 예정이다. 닝보리친은 니켈 광산에서부터 제련, 트레이딩까지 밸류체인 전반에 대한 사업을 한다. 이미 2021년 인도네시아 최초로 이차전지용 니켈 습식제련공장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는 선도기업이다. 이번 협력을 통해 포스코그룹은 니켈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 원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신흥국과의 경쟁, 포항시의 강점 찾으려면정부 주도의 강력한 전기차 산업 육성 계획에 따라 인도네시아는 글로벌 투자 국가로 주목받고 있다. 테슬라 주요 배터리 공급업체인 중국 CATL은 인도네시아에 59억 6천800만달러(약 7조 3천346억원) 규모의 원자재 포함 배터리 생산 단지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도요타와 미쓰비시사도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전기차 생산공장 설립을 선언했다. 전세계를 ‘투자 유치 전쟁’에 뛰어들게 만들었던 테슬라 기가팩토리의 유력 후보지도 인도네시아다.에코프로, 포스코퓨처엠 등 유수의 이차전지 소재 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포항도 최근 이차전지산업 특화단지로 지정되면서 ‘전기차 산업의 허브’로 발돋움하고자 힘쓰고 있다. 경북도는 포항시가 이차전지 양극재 산업 특화단지로 최종 선정됨에 따라 인근 구미, 김천, 경산, 영천, 경주 등과 함께 이차전지 산업벨트를 구축해 새로운 도약을 꾀하고 있다. 포항시는 2030년까지 양극재 100만t 생산, 매출액 70조원, 고용창출 인원 1만 5천명을 목표로 경북도와 이차전지 특화단지 추진단을 꾸리고 국내 이차전지분야 전문가, 선도기업들로 구성된 전지보국 전문가 자문단(TF) 가동 계획을 밝혔다. 관련 기업의 동반 성장과 협력 체제 구축을 위한 이차진저 기업 협의체도 오는 10월 발족 예정이다.포항시가 이차전지 특화단지의 성공적인 운영에 이토록 간절한 이유는 이차전지 사업 활성화가 지역 발전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포항시는 이차전지 특화단지 유치를 통해 생산 유발효과 23조 3천억원, 부가가치 유발효과 9조 5천억원, 취업유발효과 5만 6천여 명이 예상된다고 밝힌 바 있다.실제로 긍정적인 신호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중국 CNGR사와 화유코발트가 포스코그룹 및 LG화학과 손잡고 각각 1조원 가량의 포항 투자를 약속했다. 이차전지 소재 기업들의 집적효과로 한국 기업들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셈이다.파격적인 규제개혁을 위한 포항시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지난 4일 대구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대구·경북 정책간담회에서 규제개혁추진단 위원장인 홍석준 국회의원과 김병욱·한무경 국회의원,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국토교통부, 교육부 등 7개 정부 부처와 포항시, 대구상공회의소, 기업인들은 규제개혁 안건에 대해 토론했다.포항시는 원활한 기업경영과 국가첨단전략산업 육성을 위해 산업단지계획과 관리기본계획을 조기에 변경할 수 있도록 관계 부처와의 협의기간을 단축하고 우선 처리하는 ‘패스트트랙’ 처리를 건의했다.김병욱 의원은 “차세대 주력산업인 이차전지 산업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지원 뿐만 아니라 관련 규제 완화도 반드시 필요하다”며 “포항이 글로벌 이차전지 산업도시로 거듭날 수 있도록 관계부처와 규제 완화 방안을 계속 협의해 나가겠다”고 말했다.그러나 글로벌 보호무역 주의 기조와 해외 국가들의 파격적인 투자 인센티브로 기업들의 탈(脫) 한국 기조가 강해지고 있는 것은 유의해야할 신호다. 반도체 분야의 경우 TSMC, 삼성전자, 미국 마이크론 등 기업이 올해 잇따라 일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일본에 300억엔 이상을 투자할 예정이다. 이에 따른 보조금은 100억엔 이상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미국 텍사스주는 삼성전자 오스틴 반도체 공장에 대한 추가 투자 인센티브도 제시했다. 이미 2021년 9월 10년간 재산세의 92.5%, 이후 10년은 90%, 추가 10년은 85%를 돌려받는 인센티브를 적용받았으나, 텍사스 기업프로젝트의 ‘트리플 점보 기업 프로젝트’로 선정해 고용에 따른 지원금을 추가로 제시했다. 파격적인 투자유치책, 안정적인 노사환경 등을 내세우는 해외국가들 사이에서 투자처로서 포항의 매력을 호소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긴밀한 협업이 필요한 대목이다. 인터뷰자카르타 사무소 문홍부 경북도소장인도네시아 시장이 성장하면서 지역 강소기업들의 진출 기회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포항에는 금속 가공 기업이 다수 포진해 있어, 포스코를 비롯한 한국 철강기업들의 강세는 지역기업들에게도 호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 경북도는 2015년부터 경상북도 자카르타사무소를 개소해 경북도 지역 중소기업의 인도네시아 시장 진출을 지원하고 인도네시아와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자카르타 사무소 문홍부사진 경북도소장을 만나 지역 기업의 진출 현황에 대해 들어보았다.-경북도 자카르타 사무소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지역중소기업 인도네시아 진출 지원이 가장 큰 업무다. 도내 수출 중소기업과 인도네시아 내 바이어를 찾아서 연결하고, 수출 상담을 지원한다. 인도네시아 진출을 희망하는 기업들에게 현지 정보를 제공하고, 행정 절차를 도와 성공적으로 현지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주요 목표이다. 지역 기업의 제품 홍보를 위해 각종 박람회와 행사에도 참석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인도네시아 내에서 한국 관광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경북도는 K-드라마의 성공과 함께 인도네시아 현지인들에게 관광지로서의 매력도 높다. 포항의 경우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킹더랜드’ 등이 흥행하면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이런 트렌드에 발맞춰 경북 주요 관광지, 음식 등을 여행박람회에서 홍보하고, 인스타그램을 운영해 경북도 관광지를 알리고 있다.-인도네시아 내 경북도 기업들의 활약상이 궁금하다.△중소기업들도 인도네시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경산시에 위치한 기남금속은 지난해 31만 달러 규모의 맨홀뚜껑 수출 계약을 성사시켰다. 인도네시아 진출 전 과정을 함께 했기 때문에 더욱 뜻깊은 성과였다. 포항에 본사가 있는 제일연마공업도 인도네시아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고 있다. 제일연마공업은 2002년 인도네시아 현지생산법인을 설립한 선구자다. 인도네시아에서만 공장 2곳을 운영하고 있는 국내 최대 연마석 제조기업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장기간 안정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새롭게 인도네시아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다른 지역 기업들에게 노하우를 공유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경북 농산물도 진출하고 있다. 경북도 사무소는 도내 농가의 해외수출 판로를 확보해 농가 수입의 안정성을 높이는 것에도 집중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청송사과 수입 쿼터 300t을 확보했고, 청도 네이처팜 반건시, 상주 복숭아와 배 등을 수입했다. 올해에는 판매처를 다양화하고, 샤인머스켓 등 수입품목도 추가하고자 한다.-인도네시아 진출을 꿈꾸는 지역 기업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인구와 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의 성장 잠재력은 단연 주목할 만하다. 경제 성장률 또한 가파르기 때문에 지역 기업도 주시해야 할 시장이다. 그러나 지나친 낙관은 금물이다. 초창기 낮은 인건비가 강점이었지만 최근들어 최저임금이 지속적으로 인상되고 있는 추세다. 산업구조도 변화하고 있다. 이슬람 인구가 대다수인 만큼 식품, 화장품 같은 경우에는 할랄인증을 받아야 하고, 한국과 다른 행정 절차도 신규 진출의 장벽이 될 수 있다. 어려움을 감수할 가치와 매력이 있는 시장이지만, 충분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지역기업들이 진출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고충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북도 자카르타 사무소는 최선의 지원을 다하겠다. 지역기업들이 인도네시아 시장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궁극적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부용기자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9-10

포스코, ‘영일만의 기적’ 넘어 ‘찔레곤의 기적’ 만든다

산업의 기초가 돼 ‘산업의 쌀’ 이라 불리는 철강. 철강 패권을 거머쥐는 것은 곧 제조업의 근간을 다진다는 뜻. 철강은 제조업 전반에 소재로 쓰이고 있기에, 제조업 발달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철강 소재 확보가 필수적이다.한국은 일찌감치 ‘철’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미국, 유럽, 일본에 비하면 후발주자지만 철강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열정은 뒤지지 않았다. 전후 최빈국이었던 1960년대 대한민국은 일관제철소 건설에 사활을 걸었다. 실패하면 바다에 빠져 죽겠다는 ‘깡다구’로 만들어진 포항의 한국 최초 일관 제철소는 이후 반세기 동안 산업 성장의 기수가 돼 ‘산업의 쌀’로서 역할을 다해왔다. 철강이라는 토대 위에서 한국 산업은 꽃을 피웠다.포스코가 이룬 ‘영일만의 기적’은 한국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50년 역사 속에서 어느덧 아시아 철강 산업의 희망이 됐다. 포스코는 동남아시아 최초의 일관제철소를 인도네시아에 건설했다.글 싣는 순서1. 포항 영일만의 기적, 인도네시아에 닿다2. 이차전지 날개 단 인도네시아, 포항시 기회 찾으려면3. 인도네시아와 포항 기업 간의 교류 현 주소4. K기업문화, 인도네시아에 퍼진 한국기업 저력5. 탄소중립 시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어떻게 ◇ 영일만 신화, 인도네시아에 닿다인도네시아는 포스코의 첫 해외 일관제철소 건설 기지였다. 포스코는 2008년 인도네시아에 제철소 건설을 결정했다. 2008년 인도네시아와 한국 정부가 맺은 기본 합의를 바탕으로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국영 철강사인 크라카타우 스틸(Krakatau Steel)과 손잡고 연산 300만t 규모의 제철소 ‘크라카타우 포스코’ 를 건설했다.2000년대에 들어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는 빠른 경제 성장을 겪으며 새로운 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망한 시장이었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5~6%의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했고, 인도네시아 정부가 사회간접자본(SOC)확충과 조선업육성정책을 추진하면서 건설, 조선 산업이 크게 성장했다.그러나 인도네시아 철강 산업의 성장은 더뎠다. 2008년까지 인도네시아의 철강 수입 의존도는 52%. 철강 수입 증가율도 해마다 13.6% 가량 높아졌다. 철강 수요는 높은데, 철강 생산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인도네시아 시장의 잠재력을 본 포스코는 과감한 투자를 결정했다. 동남아시아 최초의 일관 제철소를 인도네시아에 짓겠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철강 기업이 제품을 생산하는 하공정 설비만 해외에 건설해 반제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전략을 세워오고 있었기에 상·하공정을 모두 해외에 짓겠다는 포스코의 발표는 이례적이었다. 포스코는 인도네시아 내 하공정 공장을 이미 보유하고 있는 일본 철강사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고로 건설을 결정했다.야심찬 해외 시장 진출이었던 만큼, 건설 초기 인도네시아로 가던 포스코 직원들의 마음가짐은 비장했다. 한국과 다른 기후환경, 철강 시장 악화 등의 악재가 겹쳐 준공 이후 제철소가 안정화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러나 영일만 신화를 만들어낸 특유의 집념으로 포스코는 포기하지 않았다.약 10년간 이어진 고군분투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021년 크라카타우 포스코의 영업이익은 5억200만 달러로 창립 이래 최고점을 찍었다. 다음해인 2022년에도 2억2천1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달성했다. 무엇보다 영업이익률에서 큰 성과를 냈다. 크라카타우 포스코의 2021년, 2022년 영업이익률은 각각 20%와 10%로, 같은 해 포스코 본사의 영업이익률을 상회했다.모두가 기피하는 일관제철소를 건설한 ‘뚝심’도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 내에 고로부터 제품 공장까지, 상·하공정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포스코가 유일하다. 하공정만 보유한 기업의 경우, 반제품을 수입해 가공해야하기 때문에 무역 리스크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에 반해 자체 고로를 보유하고 있는 포스코는 비교적 외풍으로 인한 영향이 적어 안정적인 철강 생산이 가능하다. 향후 자동차 강판 생산라인까지 구축되면 인도네시아 철강 산업의 패권도 쥘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수많은 자동차 기업들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지만, 일관제철소를 보유한 것은 크라카타우 포스코 뿐이다.실제로 ‘영일만의 기적’을 넘어 ‘찔레곤의 기적’을 만들기 위해 포스코는 크라카타우포스코 제철소에 고로 1기를 추가 건설해 연간 조강량을 600만t 이상으로 확대하고, 자동차 강판을 비롯한 냉연 설비를 구축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포스코는 향후 2030년까지 1천만t 철강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야심찬 포부를 품고 있다. 포스코만의 K-기업 신화가 인도네시아에까지 널리 뻗어나간 셈이다. ◇ 포항 영일만, 역사의 시작한국 제조업을 견인한 철강 산업의 원류는 바로 포항이다. 한국 최초의 일관제철소,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생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1964년 12월 4일 제102차 경제장관회의에서 박정희 정부는 철강공업 육성계획을 의결했다.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기술이 뒷받침돼야하기 때문에 당시 철강 선진국이었던 미국, 유럽, 일본 등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선진 우방국조차 이제 막 전쟁이 끝난 ‘아시아의 빈곤하고 작은 나라’가 추진하는 종합제철 건설에 선뜻 힘을 보태려 하지 않았다.그럼에도 정부는 종합제철 건설계획안을 수립하고 국제차관단 구성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1966년에는 미국, 서독, 영국, 이탈리아 4개국 7개사와 한국에 종합제철을 건설하기 위한 기본사항에 합의하고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을 발족했다. 1967년 1월 프랑스가 추가로 참여해 구성원은 5개국 8개사로 늘어났으며, 1967년 10월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했다.이후 1967년 7월 포항을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최종 입지로 선정하고,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공식 출범했다.그러나 KISA 출범으로 빠른 진전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KISA를 통한 차관 교섭이 여의치 않자, 1969년 1월 31일 정부와 박태준 사장 일행은 KISA 대표단과의 담판을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경제적 타당성 부족을 이유로 KISA를 통한 차관 조달은 결국 실패했고, 1969년 9월 2일 시효가 만료됨에 따라 KISA와의 기본협정은 자동적으로 해지됐다.종합제철 사업의 좌초를 막기 위해 새로운 자금 공여처와 기술 제휴처를 확보해야만 했다. 한일 양국이 농림수산 부문에 주로 투자하기로 합의한 대일청구권자금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 자금으로 전용하고 일본 철강업계의 기술지원을 받는 것만이 제철소 건설사업 실현을 위한 마지막 대안이었다.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 민관 합동 노력에 나섰다. 일본 정부를 설득해 자금을 제철소 설립에 유용하는 것에 합의했다. 일본 철강업체들의 기술협력 분위기를 조성해 극적으로 제철소 건설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다.정부 수립에서부터 한일 간의 기본협약이 체결되기까지는 무려 여섯 차례의 종합제철 건설 시도가 있었다. 결국 그 결실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자금이 마련되고 제철소 건설은 빠르게 진행됐다. 창립 2주년을 맞은 1970년 4월 1일 경북도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건설 현장에서 포항 1기 설비 종합 착공식을 거행했다. ◇ 한국 최초 일관제철소 만든 집념, ‘아시아 철강’ 시대 이끌다포항 1기 사업은 조강 연산 103만t(톤) 규모, 1973년 7월 완공을 목표로 계획됐다. 당시 언론은 종합 착공 관련 보도를 통해 포항제철소 건설사업이 유사 이래 최대 규모 단일투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철강재 자급 촉진, 국제 수지 개선 및 고용 증대, 자주국방 능력 강화 등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고 평가했다.제철소 건설이 시작되자 박태준 사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건설현장을 시찰하며 모든 건설요원들에게 “민족의 숙원사업에 동참한다는 긍지와 사명감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특히 “선조들의 피값인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건설하는 만큼 실패하면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는 남다른 각오를 요구했다.이러한 각오는 곧 빠른 제철소 건설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열연 비상’ 사건이다. 생산설비 중 가장 앞서 1970년 10월 1일 착공했던 열연공장은 1971년 4월 콘크리트 타설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계획이 여러 번 변경되면서 설계가 지연됐다. 건설업체의 자재와 인원 부족에 여름 장마까지 겹치면서 공기지연 문제가 표면에 떠올랐다. 공기를 맞추기 위해 포항종합제철은 전사적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관리, 행정 직원까지 모두 투입돼 24시간 ‘돌관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밤낮없이 공사에 참여했다. 그 결과 2개월만에 5개월 분의 콘크리트를 타설할 수 있었다. 심지어 건설 공기를 예정보다 1개월 단축할 수 있었다.산업 역군을 자처하고 나선 직원들의 곧 한국 최초 일관제철소 완공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소는 1기 종합 준공을 무사히 완수했다.박태준 사장은 종합 준공에 대해 “종합제철의 탄생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온 국민의 열의의 소산”이라며 “우리나라 철강공업의 기틀이 되고 중화학공업의 핵심적인 위치를 점해 더욱 비약적인 국가 경제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고 밝혔다.박정희 대통령은 치사에서 “초현실적인 제철소를 준공하게 된 데 대해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다”고 회고하며, “조강 연산 103만 톤의 종합제철공장을 완공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의 문턱을 넘어서 훨씬 더 깊은 곳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전했다.포항제철소가 국가 경제 발전에 공헌할 것이라던 박태준 사장의 말은 곧 현실이 됐다. 포항 1기 설비 건설은 국내 철강산업 성장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조선, 전자, 건설 등 국내 수요산업에 소재를 공급할 수 있게 됨으로써 국내 산업의 경쟁력 제고와 비약적인 성장의 밑거름이 됐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를 통해 성장한 국내 수요산업 또한 철강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든든한 수요 기반이 되며, 선순환 구조를 이룰 수 있게 됐다. 계속/인도네시아에서 이부용기자 lby1231@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9-03

봉화 베트남마을, 韓-베트남 관계 한 단계 더 발전시키길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그곳을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호안끼엠(還劍) 호수’를 찾게 된다. 서울이라면 광화문, 대구라면 두류공원, 포항이라면 영일대해수욕장처럼 외국인은 물론 그 지역 주민들까지 산책과 휴식을 즐기는 공간. 기자 또한 지난 5월 두 차례에 걸쳐 그곳을 돌아봤다.호안끼엠 호수 산책로엔 거대한 조형물이 서있다. ‘리 왕조’의 태조 이공온(李公蘊·974~1028)의 동상이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처럼 우뚝하다. 이공온은 어떤 인물일까? 이 궁금증에 ‘리브레위키’가 답한다.“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지금의 하노이를 수도로 정한 황제다. 974년 박린성 뜨선에서 태어났다. 1009년 나라가 내란에 휩싸이자 학식과 인품 모두에서 존경받던 이공온이 차기 황제로 추대된다. 수도를 옮긴 후에는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각 계층간의 화합에도 힘을 기울였다. 불교를 국교로 삼아 문화를 발전시켰고, 주변 국가의 침탈도 막아내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한 나라 수도 한복판에 동상을 만들어 그 업적을 기릴 정도라면 ‘리 왕조’와 이공온이 베트남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터.‘리 왕조’는 216년간 지속되다가 사라진다. 영원히 지속되는 영광이란 세상에 없는 법. 차오른 달은 때가 되면 기운다. 왕국 통치자의 성(姓)이 ‘이씨’에서 ‘진씨’로 바뀐 것. 이어 ‘리 왕조’ 혈족들에 대한 살육이 시작된다.글 싣는 순서1. 한국과 베트남 교류 역사의 시작2. 동반 성장의 파트너가 된 베트남3. 봉화군이 조성할 베트남마을4. 베트남인들이 생각하는 한국과 봉화군5. 봉화군과 베트남이 함께 꿈꾸는 내일 ◆봉화 충효당의 주인공 이장발은 베트남 ‘리 왕조’ 태조의 후손이공온의 7대손인 왕자 이용상은 목숨이 백척간두에 선 상황을 피해 먼 고려로 몸을 피한다. 망명이었다. 고려의 왕은 이용상을 내치지 않고 예를 갖춰 맞았다.그가 처음으로 밟은 고려의 땅이 황해도 화산이기에 ‘화산 이씨’라는 성(姓)도 사용하게 했다. 지금으로부터 800여 년 전인 1226년이다.몰락한 ‘리 왕조’의 왕족들은 이후 고려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세월은 흘러 1392년 왕국의 이름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었다. 화산 이씨 역시 고려의 백성에서 조선의 백성으로 살게 됐다.1592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섰다. 봉화도 다르지 않았다. 봉화가 고향인 화산 이씨 가문의 장발(長發)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문경 일대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나선다. 홀어머니를 두고 이장발이 전사했을 때 그의 나이 겨우 열여덟이었다.‘베트남마을 조성 예정지’ 가운데 들어서 있는 봉화 충효당은 이장발의 기개와 애국심을 높이 평가한 조선의 유림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만들었다. 자그마치 8세기 가까이 이어진 ‘화산 이씨’와 ‘봉화군’의 인연은 위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그간 한국과 베트남은 두 나라 모두 왕국에서 공화국으로 변했고, 수없이 많은 통치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양국이 오래 이어온 인연의 끈은 그것들과는 무관하게 아직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60년 전 베트남전쟁에서의 비극을 떨치고,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우방국으로 서로를 인식하며 경제와 문화 교류를 가속화하고 있는 한국과 베트남.봉화군이 전력을 기울여 추진하고 있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이 21세기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주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역사와 문화를 잇는 교류의 다리될 것”인터뷰 박현국 봉화군수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교류의 다리가 되고, 미래세대에겐 두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교육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할 ‘베트남마을 조성 프로젝트’는 박현국 봉화군수의 역점 추진사업 중 하나다.베트남마을 조성의 신속한 추진을 위해 박 군수는 지난 5월 초 17명의 봉화군대표단을 구성해 ‘리 왕조’의 태동지 베트남 박린성 뜨선시를 방문하기도 했다.본지는 서면 인터뷰를 통해 베트남마을 조성과 관련해 현재까지의 진행 상황을 묻고, 박 군수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구체적인 봉화군 베트남마을의 모습을 들어봤다.-봉화군에 ‘베트남마을’이 조성돼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뭔지.△나라가 서구열강에서 독립해 부강해지면 많은 국가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반드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을 거친다. 베트남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 중국에서 독립해 독립된 국가를 이뤘던 베트남 ‘리 왕조’에 대한 문화나 역사에 대한 재조명이 아닐까. 봉화군은 베트남 리 왕조의 역사가 이어지는 국내 유일의 유적지로서 다른 어떤 지역보다 한국-베트남 교류와 협력의 상징이 될 베트남마을 조성의 최적지라고 믿는다.-베트남마을 조성은 봉화군이 추진할 주요사업 중 하나다. 어떤 이유에서 이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것인가.△봉화는 현재 지방 소멸 위기에 직면한 인구 3만의 농촌지역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과 차별화 된 킬링 콘텐츠가 절실하다. 나는 우리 군과 베트남 리 왕조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베트남마을 조성, 즉 베트남 콘텐츠 선점은 농촌 일자리, 농산물 판로 확대, 문화교류와 관광 활성화, 인구 증가 등 다양한 방면에서 봉화군에 활력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측된다. 그렇기에 사명감을 가지고 추진 중이다.-올해 새롭게 추진될 베트남마을 조성 관련 사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우선 하드웨어적으로는 봉화 충효당과 재실을 잇는 ‘교류의 길’과 연꽃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특별교부세 20억 원을 신청해 놓았다. 대규모 사업 전 기초 인프라를 닦기 위해서다. 소프트웨어적으로는 올 하반기 베트남 뜨선시 우호대표단 초청과 국제 자매결연 체결을 통한 지속적인 문화 교류를 진행할 예정이다.-지난 5월 초 베트남 박린성 뜨선시를 찾았다. 베트남마을 조성에 관해 어떤 구체적인 협조와 지원을 약속 받았는지 궁금하다.△이번 방문에서 많은 성과를 얻었다. 항 바 위 뜨선시장은 베트남 건축양식에 대한 자문을 약속했고, 꾸억 투언 박린성 부성장은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며 사업 성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하반기 봉화군 우호교류단 초청과 국제 자매결연 체결 요청에 흔쾌히 응하며 실무단 구성을 지시했다.-예상되는 고용 창출 효과, 인구 증가 효과, 지역 경제 활성화 효과 등을 포함한 베트남마을의 대략적인 모습은.△베트남을 생각할 때 우선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한 역동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붕화군이 만들 베트남마을도 현지 주민과 베트남 다문화인, 다양한 관광객이 공존하는 역동적인 명소가 되었으면 한다. 구체적인 사업 계획과 고용 창출 및 인구 증가 등의 효과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 보완용역에 반영해 연말에 가시화 시키려고 한다. 여러분들의 관심과 기대를 부탁하고 싶다.끝/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6-06

고난의 역사 겪은 한국과 베트남, 강한 나라로 거듭나다

“현재 경북 봉화군은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그곳 봉성면 창평리엔 당신들의 조상인 ‘리 왕조’ 후손 이장발의 애국심을 기려 세운 충효당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일대에 역사와 문화, 휴양을 동시에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베트남역사관, 공연장, 연수·숙박 시설, 잘 꾸며진 정원까지 들어설 예정이다.”기자의 말을 들은 주한 베트남관광청 리 쓰엉 깐(65) 대사는 “그 소식은 들어서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가 이어졌다.“이미 천 년 전부터 활발하게 교류했던 두 나라의 관계가 재정립되고, 지금 진행되는 한국과 베트남의 협력이 보다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기에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36년, 베트남에서 29년을 살았다. 두 나라는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는 점과 충효를 중시하는 정서 등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리 쓰엉 깐 대사는 13세기 초반 베트남에서 고려로 ‘정치적 망명’을 감행한 ‘리 왕조’의 왕자 이용상의 후손이다. 1994년 베트남으로 귀화하기 전엔 이창근이란 이름의 한국인으로 생활했다. 그러니, 누구보다 양국의 국민성과 지향점을 잘 알고 있을 터.비단 이창근 대사만이 아니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과 베트남 모두가 과거 식민지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 정도는 인지하고 있다.글 싣는 순서1. 한국과 베트남 교류 역사의 시작2. 동반 성장의 파트너가 된 베트남3. 봉화군이 조성할 베트남마을4. 베트남인들이 생각하는 한국과 봉화군5. 봉화군과 베트남이 함께 꿈꾸는 내일 ◆식민지 경험과 뜨거웠던 독립 의지라는 공통점한국은 20세기 초반 팽창하던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게 국토와 국권을 빼앗긴다.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자신의 땅에서 생산된 각종 재화를 일본에게 수탈당했다. 국민의 거의 전부가 일본의 종살이를 한 형국이었다.베트남은 이보다 먼저 19세기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됐다. 제국주의의 착취 양상은 유사하다. 프랑스도 베트남 노동자들을 강제 징발했고, ‘아편의 원료를 재배하라’는 부도덕한 명령까지 내리는 등 베트남 국민의 일상을 파괴했다.억압이 심해질수록 한국과 베트남의 독립의지는 뜨겁게 불붙었다. 이민족으로부터 나라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독립투사들’이 생겨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유관순은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옥사(獄死)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을 때 그녀의 나이 겨우 열여덟이었다. 윤봉길은 자신의 나라를 탄압하던 일본의 고위관료와 장성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품고 중국 상해로 떠난다. 당시 그의 나이도 겨우 스물넷.한국에 유관순과 윤봉길이 있다면, 베트남엔 ‘보 티 사우’가 있다. 150㎝ 남짓의 조그만 소녀는 자신의 민족을 배반하고 프랑스의 주구(走狗)로 살던 베트남 관료를 폭사시킨다. 보 티 사우가 던진 폭탄에 프랑스 군인 20명도 부상당한다.식민지 베트남에서 열린 프랑스의 법정. 법관은 그 조그만 소녀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총살이 집행되던 날. “내 나라의 강과 산을 보며 죽겠으니 눈가리개를 풀어라”고 당당하게 일갈하며 순국한 보 티 사우는 유관순보다 한 살 어린 열일곱이었다. ◆나라 위해 기꺼이 생명 버린 베트남계 조선인 이장발한국과 베트남 청년들의 순정한 애국심은 비단 20세기 전후에만 발휘된 게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도 봉화 출신의 열여덟 살 청년 하나가 문경새재에서 일본군과의 교전 중 사망한다. 이장발(1574~1592)이다.홀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던 그는 ‘더 큰 어머니’인 조국을 위해 주저함 없이 생명을 바친다. 그는 ‘리 왕조’의 혈통인 화산 이씨. 그러니, 말하자면 베트남계 조선인이다.1750년 조선 유림들은 이 어린 청년의 기개와 용기를 높이 평가해 ‘충효당 화산 이공 유허비’를 세우고, 충효각을 지어 그의 정신을 기렸다. 이장발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남겼다는 시는 이런 내용이다. ‘두산백과’를 인용한다.百年存社稷·백년사직을 구할 계획을 가지고六月着戎衣·유월에 갑옷을 입었다憂國身空死·나라를 위해 몸은 죽지만思親魂獨歸·어머니 못잊은 혼백은 돌아가네이장발은 1226년 베트남에서 고려로 이주한 이용상의 후손이다. 이용상 역시 몰락한 외국의 망명객을 따스하게 맞아주며 ‘화산 이씨’라는 성(姓)까지 선물한 고려를 위해 몽골군과의 전투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난 이창근 대사와 ‘리 왕조’ 건국 기념행사 덴도 축제가 열린 박린성 뜨선시에 동행한 화산 이씨 종친회 이부영 부회장은 입을 모아 말했다.“아무리 강한 외세일지라도 굴복하지 않고, 부모를 섬기는 걸 높은 가치로 평가하며, 무엇보다 자녀들의 교육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한국과 베트남은 닮았다”고. 여기에 이런 말도 덧붙였다.“한국은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반면, 베트남은 그렇지 않다. 인구의 대다수가 30대 이하인 젊은 국가다. 한국의 경제개발 노하우와 베트남 젊은이들의 열정이 효과적으로 결합된다면 두 나라는 더불어 커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사실 1960~1970년대에 걸쳐 벌어진 베트남-미국간 전쟁에 한국이 참전한 시기를 제외하면 양국의 우애는 나빴던 때가 거의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한국-베트남간 우호적 교류 전통 이어갈 봉화 ‘베트남마을’‘동북아문화연구 제26집’에 실린 강은해(계명대학 인문대)의 논문 ‘한국 귀화 베트남 왕자의 역사와 전설’의 서두는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한국과 베트남 두 나라는 일찍이 서로 동경하고 소통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중국이나 몽골, 일본 등 주변 국가와 달리 양국의 관계는 침략으로 얼룩지지 않았다…(중략) 우리나라 고려시대 황해도 옹진현에는 베트남 리 왕조의 왕자 이용상(李龍祥)이 망명해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과 문헌 사료가 전해오고 있다…(중략) 조선시대 1598년 정유왜란 때 진주에 살았던 선비 조완벽은 왜구에게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교토의 상인에게 팔려 문자를 안다는 이유로 상선을 타고 베트남을 세 차례나 오갔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에게 이수광의 시를 보여 주며 고아(高雅)한 시를 쓴 조선 선비에 대한 존경과 호의를 표시하기도 하였다…(하략).”위의 논문을 통해 알 수 있듯 2023년 현재 한국과 베트남의 활발한 경제·문화 교류와 양국 사람들이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나, 관광을 하러 서로의 나라를 찾는 건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이미 수백 년 전, 아니 1천여 년 전부터 두 나라가 밀접하고 호의적인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왔다는 건 여러 고문헌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다.위에 언급한 논문엔 ‘망명객 이용상’이 정치적 박해 탓에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고향 땅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에 관한 구전도 인용된다. 이런 대목이다.“高麗(고려) 때, 安南國(안남국·베트남)의 왕자 李龍祥(이용상)이라는 이가 우리나라에 망명을 해왔는데, 그는 고국 생각을 잊을 수 없어, 항상 이 바위 위에 올라서서 고국이 있는 남쪽 하늘 끝을 바라보고는 방성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로 인하여 뒷날 이 바위를 越聲岩(월성암)이라 불러온다는 것이다.”고려와 대한민국, 13세기와 21세기가 무엇이 다를까? 고향을 그리워하는 건 인간 보편의 감정이다. 오죽하면 미물인 여우조차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했을까.봉화군이 추진 중인 ‘베트남마을 조성 프로젝트’는 한국인에겐 오랜 친구인 베트남과의 교류 역사를 떠올리게 하고, 한국으로 이주한 베트남인들에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5-30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 착착… 韓-베트남 모범적 사례되길

한국 기업의 현지 생산 공장이 다수 들어서 있고, 한 해 평균 200만 명에 가까운 한국인 관광객이 드나드는 베트남은 우리와 가장 친숙한 국가 중 하나다.갈수록 ‘국경’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있는 21세기. 서로 다른 정치·이념 체계로 인해 갈등하고 반목했던 20세기 중반과 달리 이제 한국과 베트남은 떼어놓기 힘든 우방국으로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과 베트남은 아직 사회와 학교, 가정에 유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국가라는 공통점까지 가졌다.봉화군은 이런 시대적 추세와 유사한 민족성에 주목해 몇 해 전부터 베트남마을 조성에 진력하는 중이다.2017년 11월 당시 대통령이던 문재인이 고려로 망명한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을 언급한 이후 2018년 초엔 응웬 부 투 주한 베트남 대사가 봉화군 충효당(임진왜란 때 순국한 화산 이씨 이장발의 애국심을 기려 지은 사당)을 찾았다.이어 같은 해 봄에는 봉화군 대표단이 베트남을 방문해 우호·교류의향서를 전달했다. 베트남 ‘리 왕조’의 태동지인 박린성 뜨선시에서 열리는 덴도 축제에 참가한 것도 이때부터.베트남마을 조성을 위한 양국의 협력과 교류는 2019년에도 이어져 봉화군 대표단이 거듭해 덴도 축제를 찾았고, 지난해 12월엔 박현국 군수가 베트남 정부의 최고위급 인사인 주석을 만나 MOU를 체결했다.지난 5월 초순 역시 군수와 군의회 의장을 포함한 17명의 봉화군 관계자들이 하노이와 뜨선시를 찾아 두 나라가 함께 만들어갈 봉화 베트남마을에 관해 진지한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글 싣는 순서1. 한국과 베트남 교류 역사의 시작2. 동반 성장의 파트너가 된 베트남3. 봉화군이 조성할 베트남마을4. 베트남인들이 생각하는 한국과 봉화군5. 봉화군과 베트남이 함께 꿈꾸는 내일 ◆베트남 현지 분위기 또한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에 호의적5월 1일부터 5일까지 취재를 위해 베트남 하노이와 박린성 뜨선시를 돌아봤다. 아시아를 넘어 북미와 유럽까지 뒤흔들고 있는 ‘K-팝’과 ‘K-드라마’의 열풍은 베트남에서도 그 위력을 과시 중이었다. 베트남 젊은이들이 모이는 이른바 ‘핫 플레이스’에선 어렵지 않게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기자가 탑승한 버스에 오른 몇몇 청년들은 핸드폰을 통해 베트남어 자막이 달린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그들은 원체 많은 한국 여행자를 봐 온 터라 낯선 외국인에게 가질 수 있는 경계심도 거의 없어 보였다. 수많은 고층 건물이 들어선 하노이 중심가엔 한국 물품을 판매하는 매장이 적지 않았다. 불고기와 비빔밥 등 ‘K-푸드’의 위세도 대단했다.통역을 맡아준 화산 이씨 종친회 이부영 부회장에 따르면 “베트남 10~20대가 한국 문화와 음식에 열광한다면, 역사를 전공하는 대학생이나 지식인 계층에선 한국과 베트남간의 교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차츰 늘어가는 추세”라고 한다.베트남 박린성과 뜨선시 인민위원회 고위급 간부들이 봉화군이 추진하는 베트남마을 조성 프로젝트에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인다는 건 현재 취재를 통해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베트남인들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자존심이 강하다. 그 배경엔 제갈공명에게 일곱 번이나 사로잡혔으나 결코 항복하지 않았던 베트남 장수 맹획에 관한 칠종칠금(七縱七擒)의 고사(故事)가 있고, 초강대국 프랑스와 미국에게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던 베트남 현대사가 있다.자존심이라면 한국인도 이에 지지 않는다.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려는 당당한 태도가 없었다면 5천 년 내내 지속됐던 숱한 외침과 내환을 견뎌내고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터.베트남 정부 관계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정부 역시 양국의 모범적 협력 사례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은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에 주목하고 있다.이를 반영하듯 이달 초 오영주 주베트남 대사는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인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 증진을 위해서라도 이 사업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계속) “베트남과 한국 잇는 가교 역할에 보람”인터뷰 주한 베트남관광청 이창근 대사 지난 5월 1일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의 현지 취재를 위해 하노이에 갔다. 그날은 마침 주한 베트남관광청 리 쓰엉 깐(65) 대사가 업무를 위해 하노이를 찾았던 때. 급하게 연락해 리 대사의 하노이 사무실을 찾았다.그는 800여 년 전 고려로 망명한 이용상의 31대손으로 1994년 베트남으로 귀화했다. 한국 이름은 이창근. 인터뷰 자리엔 ‘리 왕조’ 탄생 축제 참석을 위해 베트남을 방문한 화산 이씨 종친회 이부영 부회장도 동석했다.-베트남을 여행하는 한국 관광객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주한 베트남관광청 대사를 맡은 건 언제부터인지.△2017년이다. 3년 임기인데 현재 연임 중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재임명을 받았다. 나는 화산 이가(花山 李家)고, 1958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거기서 살았다. 조상의 땅인 베트남과 30대 중후반까지 살아온 한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음에 보람을 느낀다.-어린 시절에도 당신의 뿌리가 베트남에 있음을 알고 있었는지.△숙부가 혈통에 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셨다. 그에게 1천 년 전 베트남 왕족이었던 우리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다보니 학생 때도 베트남 관련 기사가 나오면 신문을 꼼꼼하게 읽었고, 대학 땐 화산 이씨와 관련된 논문을 찾아보기도 했다. 아쉽게도 숙부는 1975년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가 단절되면서 세상을 떠났다.-1990년대 한국-베트남 수교가 재개된 후 귀화했다고 들었다.△내 중시조(中始祖)는 1226년 고려 고종 13년에 망명한 이용상이다. 그는 고려와 베트남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애썼다. 나 역시 미력하나마 그런 삶을 살고 싶어 1994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베트남에 정착했다. ‘리 왕조’를 기억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호의적인 태도가 여기서 자리 잡는데 큰 힘이 됐다.-현재 경북 봉화군이 베트남마을 조성에 힘을 쏟고 있는데.△환영할 일이다. 베트남마을 조성은 한국과 베트남이 보다 친숙한 나라가 되는데 작지 않은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화산 이씨들은 ‘한국에 세종대왕이 있다면, 베트남엔 리 왕조가 있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봉화군이 관련된 조언과 도움을 요청할 때면 언제든 기쁜 마음으로 응한다. 게다가 봉화엔 우리 조상을 모신 충효당도 있지 않나. 마음 같아서는 조성에 필요한 자금도 보태고 싶다.-한국에 거주하는 ‘화산 이씨’는 어느 정도 되는가.△대략 2천여 명 정도다. 적은 숫자이니 종친회 활동이 다른 가문 같지 않지만, 소수라 결속력은 더 강하다. 베트남마을 조성 등의 계기가 생긴다면 더 잘 뭉치지 않겠는가.(웃음)-한국과 베트남에서 인생의 절반씩을 살았는데.△두 나라는 유사한 측면이 많다. 애국심과 효심을 높이 받드는 것이 특히 그렇다. 그러니, 이질적인 민족성으로 인한 어려움은 없었다.-베트남 사람들에게는 ‘리 왕조’가 존중의 대상인 듯하다.△왕조가 생겨난 것을 기념해 해마다 ‘덴도(DO-temple) 축제’를 열고, 수도인 하노이 한복판에 ‘리 왕조’ 태조의 동상도 서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베트남인들이 내 조상이 다스렸던 시기를 좋게 평가하는 것 같다.-향후 한국과 베트남 관계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보는지.△내겐 태어난 한국과 뿌리가 있는 베트남 모두 중요하다. 두 나라는 오래 전부터 교류를 해오던 사이였다. 그런 역사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올해 베트남 인구가 1억 명을 넘어섰다. 베트남은 30대 이하 인구가 다수인 젊은 국가다. 교육열과 발전가능성 또한 높다. 한국과 베트남이 윈윈(win-win)하는 사이로 동반 성장할 수 있었으면 한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5-23

다낭 여행자 한 해 100만명… ‘경상북도 다낭시’ 불리기도

불과 50~60년 전엔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적과 적으로 만났다. 하지만 엄혹했던 냉전체제가 붕괴되고, 국가들 사이에 실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보편화되면서 한국과 베트남은 이제 ‘친구 이상의 나라’가 됐다.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화다.짙푸른 바다가 유혹하는 베트남의 유명 관광지 다낭(Da Nang)을 찾는 한국 여행자는 한 해에 100만 명. 그중엔 경북도민도 수없이 많다.허니, 베트남어보다 한국어가 더 많이 들리는 그곳을 ‘경상북도 다낭시(市)’ 혹은 ‘경상북도 다낭군(郡)’이라 부르는 농담까지 나오는 상황.뿐 아니다. 근래에 들어 국제결혼이 늘어나면서 베트남은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나라’로 불리기도 한다.노동 가능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한국 농촌에서 노인들을 대신해 각종 농작물의 파종과 수확을 도와주는 베트남 계절근로자 역시 봉화군을 포함한 경북 전역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봉화군이 진행하고 있는 ‘베트남마을 조성 프로젝트’는 이런 흐름 속에서 기획됐다. 여기에 봉화군은 베트남과 관련된 주요한 유적지까지 가졌으니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를 상징할 공간을 우리 고장에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명분이 충분하다.글 싣는 순서1. 한국과 베트남 교류 역사의 시작2. 동반 성장의 파트너가 된 베트남3. 봉화군이 조성할 베트남마을4. 베트남인들이 생각하는 한국과 봉화군5. 봉화군과 베트남이 함께 꿈꾸는 내일 ◆봉화 충효당(奉化 忠孝堂)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와 의미800여 년 전. 베트남 북부를 통치하던 리 왕조의 직계 후손 중 일부가 정치적 박해를 피해 고려로 망명한다. 고려 왕실은 이들을 깍듯한 예법으로 받아들여 우리 땅의 일원으로 살게 했다. 그들이 바로 ‘화산 이씨(花山 李氏)’다.봉화엔 화산 이씨 장발(長發)의 강직한 품성과 애국심을 기려 세운 유적이 있다. 이름하여 충효당. ‘두산백과’는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에 자리한 이곳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경상북도 기념물로 1750년경 후손과 유림에서 조선 선조 때 사람인 이장발(1574~1592)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했다. 이장발의 자는 영백(榮伯)으로, 어려서부터 재질과 의지가 굳어 배움에 부지런했고 효성이 지극했다.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열아홉 어린 나이에 편모슬하의 가장이면서도 망설임 없이 전장으로 달려가 문경새재에서 혈전 끝에 전사했다. 죽기 바로 직전에 못다 한 충효의 마음을 읊은 시를 남겨 후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됐다. 나라에서 순국의 공을 치하하고자 공조참의의 직위를 추증하고 출생지인 봉성면 창평리에 ‘충효당 화산 이공 유허비’를 세우고 충효각을 지었다. 충효각은 정자 뒤편에 있다.”사선을 넘어 베트남에서 고려로 왔을 때 따스하게 맞아준 은혜를 잊지 않고, 목숨을 걸어 ‘제2의 고향’이라 할 고려와 조선을 지키고자 했던 ‘화산 이씨’는 이장발만이 아니었다.리 왕조의 직계손이자 ‘화산 이씨’ 시조인 이용상(李龍祥·리 왕조 6대 왕의 일곱 번째 아들) 역시 고려를 침탈한 몽골 군대에 용맹하게 맞섰다. 다시 ‘두산백과’를 인용한다. 이런 내용이다.“1253년 12월. 고려로 망명한 이용상이 정착해 살던 웅진성 동쪽 화산에 몽골군이 침입하자 토성과 목책을 쌓아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이에 고려 고종은 이용상에게 관직을 내리고, 옹진 화산 지역 30리 인근과 식읍 2천호를 선사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제수를 내리고, 화산관(花山館)의 문미에 수강문(受降門)이란 글자를 써주기도 했다.” ◆봉화군과 리 왕조의 태동지 박린성 뜨선시의 공통점충효의 정신과 인간 사이의 예법을 중시하는 건 긍정적 측면에서의 유교적 전통이다. 봉화군은 아직 그런 전통이 남아있는 고장. 이는 베트남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기자는 지난 4월에 봉화 충효당을, 5월 초순엔 베트남 박린성 뜨선시(市)를 찾았다.충효당 앞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의 말과 뜨선시 덴도((DO-temple)축제 현장에서 만난 ‘화산 이씨 종친회’ 이훈 회장의 이야기는 그 뜻이 서로 통했다. 요약해 전달하자면 이런 내용이다.“한국과 베트남은 어른을 공경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걸 높은 가치로 여긴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앞장섰던 선열을 존중하고, 부모를 극진히 모신 효자, 효녀에 얽힌 설화가 흔한 건 두 나라가 비슷하다.”그런 소프트웨어의 동질성 때문일까? 충효당이 위치한 봉화군 봉선면과 리 왕조가 시작을 알린 뜨선시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외부적 환경, 즉 하드웨어까지 닮아있었다.2023년 초여름 현재. 봉화군은 충효당 일원에 베트남마을을 조성하는 사업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를 실증하듯 지난 1일엔 5일간의 일정으로 박현국 봉화군수를 단장으로 한 ‘봉화군 교류단’이 리 왕조의 발원 지역인 뜨선시를 방문했다.여기엔 봉화군의회 김상희 의장과 박동교 부의장 등도 동행했다. 올해 봉화군의 주요 시책 중 하나인 베트남마을 조성사업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베트남 정부와 박린성, 뜨선시의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방문 일정을 리 왕조 건국을 기념하는 덴도축제 기간에 맞춘 것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 이 일정을 취재하며 직접 확인한 뜨선시의 환대는 800년 전 이용상을 받아들인 고려 왕실의 그것처럼 살가웠다.지난 5월 3일 저녁. 맛깔스런 베트남 전통요리로 차려진 환영 만찬을 준비한 뜨선시 측에선 건축을 전공한 황 바 휘 시장이 봉화 베트남마을에 들어설 건축물에 관한 자문을 약속했고, 부엉 꾸억 투언 박린성 부성장(한국의 부지사격)은 한국-베트남 문화교류를 위해 올 하반기 공연단을 파견하겠다고 말했다.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한 결과물로 만들어질 베트남마을이날 봉화군 교류단은 베트남 리 왕조의 후손 ‘화산 이씨’와 관련된 유적지인 충효당 일대에 베트남마을이 만들어져야 하는 당위성을 박린성과 뜨선시 관계자들에게 설명했다.“역사·문화·휴양을 테마로 한 베트남역사관, 전통공연장, 연수·숙박·교육시설, 정원 등을 조성하기 위해 국비 확보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말에 만찬에 참석한 베트남 사람들은 박수로 화답했다.사실 이번 자리가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봉화군과 박린성, 봉화군과 뜨선시 간의 교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다.지난 2018년엔 봉화군 관계자들이 응웬 티 킴 응언 베트남 국회의장을 만나 베트남마을 조성에 협조를 부탁했고, 2019년에는 응구옌 투 꾸인 박린성 인민위원장(한국의 도지사격)을 단장으로 하는 우호교류단이 봉화군을 찾아 충효당을 둘러봤다. 베트남마을 조성 예정지를 미리 살핀 것.설화 또는, 전설처럼 전해오는 인연을 귀하게 여겨 그 끈을 놓치지 않은 베트남 리 왕조와의 교류는 800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봉화 베트남마을 조성 프로젝트의 구체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박순교 경북대 특임연구원의 논문 ‘花山君 李龍祥(화산군 이용상)에 관한 연구’는 한국과 베트남, 미시적으로 봉화군과 뜨선시 사이 우호의 출발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전승에 의하면 대월(리 왕조) 출신 이용상은 고려 고종 치세에 송나라를 거쳐 고려로 이거했다. 황해도 웅진 화산에 정착한 그는 얼마 뒤 몽골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고려 조정으로부터 화산군에 책봉되었고,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리 왕조의 혈손인 그의 존재는 한국과 베트남 양국 선린의 가교이자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5-16

베트남 ‘리 왕조’와봉화군 연결고리는

국가와 국가 간에는 영원히 지속되는 우호도 없고, 불화도 없다.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 역시 그랬다. 현대사의 비극 중 하나로 기록된 베트남전쟁. 한국군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 군대와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였다.1992년 수교가 이뤄지기까지 19년 동안 베트남은 한국 대중들에게 적성국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그런 불화가 있기 1천여 년 전 한국과 베트남은 호의적 관심을 가지고 교류하던 사이였다. 이런 사실은 그 당시를 연구한 여러 논문을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고려의 왕이 위기에 처한 베트남 왕족 이용상의 정치적 망명을 흔쾌히 받아들여 작위를 주고, 화산 이씨(花山 李氏) 성을 사용하게 해 우리나라로의 정착을 적극 도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지금의 베트남 북부 박린성(省) 뜨선시(市)에서 태동한 ‘리 왕조’는 216년 동안 지속되며 8명의 왕을 탄생시켰다. 1대 왕인 태조 이공온은 베트남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 수도인 하노이 한복판에 동상을 세울 정도의 역사적 위상을 가진다.바로 이 태조 이공온의 후손이 고려로 망명한 이용상이고, 그들의 후손인 이장발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맞서다 목숨을 잃었다. 그 공로가 인정돼 세워진 것이 봉화군 봉성면의 충효당.21세기에 들어서며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협력은 여러 부문에서 보다 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두 나라의 우호적 관계는 해마다 200만 명의 한국 관광객이 베트남을 찾는 것에서 확인된다.봉화군은 이런 흐름에 주목하고 몇 해 전부터 충효당 일대에 베트남마을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베트남 주석과 박린성장, 뜨선시장 등도 이 사업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협력을 약속한 바 있다.본지는 매주 수요일 5회에 걸쳐 기획기사 ‘봉화군과 베트남 리 왕조의 연결고리를 찾아’를 연재할 예정이다. 고대 베트남 리 왕조의 역사와 봉화군 베트남마을 조성 프로젝트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관련기사 16면/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3-05-09

1226년 베트남 ‘리 왕조’ 7대손 이용상, 망명객으로 고려 정착

1960~1970년대에 걸쳐 진행된 베트남전쟁의 비극은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하지만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나고, 냉전체제가 해체된 1990년대 이후 베트남은 한국의 주요한 우방국 중 하나가 됐다.양국 사이 교류 속도는 하루가 다르게 가속화 돼 이제 한국과 베트남은 사회 전 분야에 걸친 협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봉화군은 베트남마을을 만들기 위해 힘을 쏟는 중이다.봉화엔 베트남 리 왕조의 왕족 출신 화산 이씨(花山 李氏) 이장발(李長發·1574~1592)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충효당(忠孝堂)이 자리해 있다.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겨우 열여덟 어린 나이에 홀어머니를 두고 전장에 뛰어들어 전사한 이장발은 1226년 고려에 정착한 베트남 왕족 이용상(李龍祥)의 후손.본지는 5회에 걸친 연재기사를 통해 리 왕조의 흥망성쇠와 현재 베트남인들이 평가하는 리 왕조, 베트남 박닌성 뜨선시와의 교류·협력 속에서 베트남마을 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봉화군의 오늘을 면밀하게 점검하고자 한다.글 싣는 순서1. 한국과 베트남 교류 역사의 시작2. 동반 성장의 파트너가 된 베트남3. 봉화군이 조성할 베트남마을4. 베트남인들이 생각하는 한국과 봉화군5. 봉화군과 베트남이 함께 꿈꾸는 내일 할머니가 들려주던 전설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한국에선 고려가 태동해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던 1009년. 지금의 베트남 북부에 독립된 왕국이 건설된다. 탕롱(현재 명칭 하노이)을 도읍으로 한 ‘리 왕조’다.1대 왕 태조 이공온은 당시 강위력한 힘을 가졌던 중국의 군대를 격퇴한 문무겸비(文武兼備)의 인물. 베트남인들은 ‘리 태조’를 기리며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산책로 중앙에 그의 동상을 세워놓았다.‘환검’(還劍·칼을 돌려받다)이란 뜻을 가진 호안끼엠은 국가적 재난이 닥칠 때면 거북이가 칼을 물고 나와 나라를 구하게 했다는 설화가 전하는 호수다. 베트남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공간.그런 곳에 리 태조를 형상화한 거대한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건 베트남인들이 리 왕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케 해준다.◆베트남 리 왕조 후손 이용상은 왜 고려에 왔을까리 왕조는 216년 동안 베트남을 지배했다. 과거제도를 도입하고, 국립대학을 만들었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베트남이 안남(安南)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한 것도 리 왕조였다. 알다시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에서 수확되는 쌀을 ‘안남미(安南米)’라고 부른다.그러나, 어떤 왕조도 흥할 때가 있으면 필연적으로 쇠락의 시기가 있는 법. 리 왕조의 고종 이용한 시대에 들어서며 이반된 민심이 백성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리 왕조의 마지막 왕 혜종(惠宗)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딸을 왕으로 세우면서 2세기에 걸친 리 왕조의 시대가 저문다.오늘날과 같은 선거의 형식이 아닌 무력을 통해 정권이 바뀌면 무자비한 학살과 숙청이 잇따르는 게 고대 왕국들의 특징. 리 왕조의 혈족들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이용상(李龍祥)은 리 왕조 태조의 7대손. 그는 주변에서 친인척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1226년 일이다. 리 왕조를 주제로 다룬 여러 논문에 따르면 소수의 측근들만을 데리고 망망대해를 떠돌던 이용상이 도착한 곳이 황해도 옹진군 화산면이다.당시 고려의 왕 고종(高宗)은 이용상 일행을 내치지 않고 따스하게 맞이했다. 화산군(花山君)이란 작위(爵位)까지 내렸다.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적 망명객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은 이용상은 몽골군이 고려를 침탈했을 때 앞장서 싸움으로써 은혜를 깊이 새기고 살았음을 보여주었다. ◆800년 전에도 베트남과의 교류는 빈발했다인하대학교 전임연구원 허인욱은 ‘高宗代 花山 李氏 李龍祥(고종대 화산 이씨 이용상)의 高麗(고려) 정착 관련 기록 검토’라는 논문을 통해 이미 800여 년 전부터 베트남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며, 이와 동시에 이용상에 관한 보다 상세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베트남 왕족 출신으로 고려에 정착한 이용상에 관한 이야기는 화산 이씨 집안의 족보에 전한다. 현재 전하는 화산 이씨 집안의 가장 오래된 족보는 1921년에 해주에서 이승재가 간행한 ‘花山李氏世譜’(화산이씨세보)다. 화산 이씨의 시조인 이용상의 베트남 리 왕조 탈출과 고려 정착 등의 내용은 ‘花山君本傳’(화산군본전)에 기재돼 있다. 이용상과 관련한 사실은 1925년의 ‘개벽’과 1928년의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릴 정도로 일찌감치 알려져 있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이 내용은 고려시대에 베트남과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이와 관련해 부산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조흥국 교수는 한국인과 베트남 사람들의 유사성과 동질성을 언급하며, 다시 한 번 고려로 이주한 리 왕조의 망명객 이용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전략)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 가정에 충실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효심이 지극하다. 베트남 사람들의 한국 이주는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인 13세기 초 베트남의 왕족이 한국에 와서 花山 李氏(화산 이씨)를 창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화산 이씨의 始祖(시조)인 李龍祥(이용상)이 베트남인이란 것이 밝혀지면서 한국과 베트남의 언론과 학계는 이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후략)”매우 적은 숫자가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을 피해 타국으로의 이주를 결행했던 이용상을 포함한 리 왕조 사람들.화산 이씨 종친회 이부영 부회장에 따르면 “지금도 한국에 거주하는 화산 이씨는 1천700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그럼에도 이용상이 고려의 군사들과 함께 원나라 기병대의 말발굽 앞에서도 당당하게 저항했듯, 리 태조와 화산군 이용상의 후예인 이장발도 일본군의 조총과 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봉화 충효당’을 세워줄 정도의 기개였다. ◆이장발의 충효정신 서린 봉화에 베트남마을 조성을충효당이 자리한 봉화는 베트남에 뿌리를 둔 화산 이씨, 좀 더 의미를 확장하면 베트남과 쉽게 떼놓을 수 없는 고장이다. 그렇기에 ‘베트남마을 조성’은 봉화군의 주요한 숙원사업 가운데 하나였다.이 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박현국 봉화군수는 지난해 12월 리 왕조의 태동지인 베트남 박린성 뜨선시와 ‘우호협력 강화 협약서’를 체결했다.이미 몇 년 전부터 봉화군과 뜨선시는 베트남마을 건설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서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을 함께 고민해왔다.체결식이 열린 날 항 바 위 뜨선시 인민위원장(한국의 시장격)은 “봉화 베트남마을이 한국과 베트남 양국의 역사적 뿌리를 공감할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전했다. 물론 앞으로 전폭적인 협력도 약속했다.이에 박현국 군수는 “베트남마을의 성공적인 조성은 봉화군과 뜨선시의 우의를 다지는 것을 넘어 한국과 베트남의 동반 성장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화답했다고 한다.‘코로나19 사태’가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2020년 이전엔 한 해 200만 명을 넘나드는 한국인들이 베트남을 오갔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하노이를 여행할 때 리 왕조를 떠올렸을 듯하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꼬리를 감추기 시작한 2023년 봄. 베트남으로 향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다시 늘고 있다.이를 감안해 지난 3일엔 베트남관광총국 응우엔 쭝 칸 총국장이 주한 베트남관광청을 찾았다. 베트남관광청 대표부 관광대사는 화산 이씨 31대손 이창근(베트남 이름 리 쓰엉 깐)씨. 두 사람은 베트남 관광 홍보 활성화 방안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한국과 베트남의 교류는 역사와 관광 외의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봉화군 역시 지난 3월 국내 각지에 거주하는 베트남 다문화인들을 충효당으로 초청했고, 거기서 베트남마을 조성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계속)/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3-05-09

소규모 황금노선 운항 성공 ‘투자 선순환’ 부른다

□ 에어포항, 우여곡절 겪으며 포항공항에서 사라지다포항의 하늘길 관문인 ‘포항공항’은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된 활주로 재포장공사 이후 취항 항공사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다.이에 포항시·포항시의회·포항상공회의소·포항지역발전협의회가 국토교통부와 아시아나항공을 방문해 35만여 명이 참가한 경북 동남권 주민들의 서명부를 전달하는 등 항공기 재취항을 위해 노력해왔다. 그 결과 김포행 대한항공의 재취항에는 성공했지만, 기존 아시아나가 운영하던 제주노선이 없어져 ‘절반의 성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운항횟수 축소, 노선의 단일화, 지속적인 재정지원부담 문제가 매번 발목을 잡자 아예 민자 유치를 통한 지역 저가 항공사 설립으로 돌아섰다.설립 초기, 한중 합자사업 형태로 추진되기로 했으나 당시 사드 배치로 인한 한·중 관계 악화로 인해 무산된 후, 동화전자가 초기 자금 100억 원을 들여 지난해 2월 7일 포항∼김포 노선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운항에 나섰다.포항∼제주 노선과 김포∼포항 노선에 편도 총액 1만원이라는 파격적 할인도 운항 초기에 실시하며 이용률이 최고 85.5%에 달하는 등 인기를 얻기도 했다.하지만, 할인기간 이후 책정된 정상 가격이 KTX 요금과 비교해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고, 사우스웨스트 항공사가 ‘박리다매’정책을 펼치며 잠재 고객들을 발굴하고 유지시켜온 행보와는 달리 에어포항은 그자리에만 머물렀다. 점차적으로 승객이 줄어들었고 최저 이용률이 40.4% 수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이에 에어포항은 매달 4억∼5억원 가량 적자가 계속적으로 발생했고, 경영상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더욱이 에어포항이 보유한 항공기 2대 운행에 적합한 인력 수준이 많아야 90명으로 업계가 분석했지만, 무려 120명을 고용하며 자금압박을 가중시켰다.또한 외부 투자자와 합리적인 회사 경영을 진두지휘할 임원진들의 절반 가량이 군 출신으로 배치돼 있어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할만한 대책도 성사시키지 못했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의 경우, 군 출신들은 대부분이 비행기 조종사에 그쳤고, 경영진과 임원진들은 모두 타 항공업계에서 주목할 만한 실적을 낸 바 있는 ‘검증된 전문경영인’으로 구성됐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이러한 문제점이 중첩되다보니 결국에는 ‘매각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지난해 10월 기존 동화전자에서 신설 소형항공사 법인인 베스트에어라인으로 대주주가 바뀌게 됐다.동화전자 투자분의 15% 정도를 인정하는 조건과 동화전자의 기존 채무 50억 정도를 상환하기로 했고, 직원 고용도 보장해주기로 한 것으로 당시 알려졌다.그러나 이미 ‘곪아있던’ 에어포항의 기존 채무가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었고 베스트에어라인 측도 결국 기존 직원들을 대거 권고사직 등의 형태로 해고하기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직원들의 급여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직원들이 노동청 등에 소송을 내는 사태로 악화되는 등 회사의 명운이 더욱 암울해져만 갔다.이어 보다못한 경북도와 포항시가 출자지원금 40억원을 에어포항에 지원하려고 했으나 ‘이미 포항공항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것으로 알려진 에어포항은 이마저도 거부했다. 끝내, 지난해 12월 1일부터 포항∼김포 노선, 12월 10일부터 포항∼제주 노선 운항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당시 에어포항을 이용하던 시민들의 불편함과 실망감은 컸다.에어포항을 회사 출장용으로 자주 이용하던 한 시민은 “회사와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고 무엇보다도 업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어 자주 애용했다”며 “하지만 무턱대고 이리 운항을 중단해버리는 것은 이용객들을 우롱하는 일”이라고 토로했다.운항 중단 당시, 에어포항(베스트에어라인)은 중단 이유로 비행하던 CRJ-200기종이 지난 2007년부터 생산이 중단돼 정비부품 공급에 어려움을 겪어서라고 설명했고, 이후 언론을 대상으로 한 공식기자회견에서 ‘포항 본사 사무실을 철수해 서울로 직원을 집중시키겠다’고 말한 뒤, 보잉 기종의 도입과 새 노선을 준비 중이라며 ‘장밋빛 계획’을 내세웠지만 끝내 실현하지 못했다.에어포항의 재기가 어렵다고 본 포항시도 ‘새로운 지역항공사’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추가 투자자 등의 확보가 어려워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시는 이에 포항공항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대한항공의 포항∼제주 노선 재운항에 초점을 맞췄고, 지난 9월 16일 이 노선이 운항을 시작했다.그러나 대한항공이 기존에 수익을 내지 못해 시의 재정지원금을 받아온 김포∼포항 노선의 운항을 중단하면서, 포항공항의 온전한 하늘길이 또다시 무산돼 버렸다.□ 포항 지역항공사 다시 취항하나세계 3대 항공사 사우스웨스트(South West)가 자리잡고 있는 미국 텍사스 댈러스는 요즘들어 가장 급부상하고 있는 ‘핫’한 도시다.미 연방 인구조사국이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6년 7월부터 2017년 7월 사이 텍사스 주 댈러스 대도시권(댈러스-포트워스-알링턴) 인구는 14만6천238명이 증가하며 전체 인구 740만여 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신생아 수(10만 2천423명)가 사망자 수(4만5천826명)을 크게 상회했고, 국내 전입자 수가 전출자보다 5만8천829명 많아 미국내 최고를 기록했으며, 해외 유입 인구도 3만798명에 달했다.댈러스의 이러한 성장의 배경에는 ‘교통’편의가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교통 인프라 구축이 뛰어나 기업들이 사업하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해, 기업들이 사업 정착을 하면서 일자리가 자연스레 늘어나게 되고 이에 뒤따른 부가사업도 증가하고 있다.실제로 최근 삼성전자 공장이 댈러스에 위치하면서 한인사회가 떠들썩하기도 했다. 10만명이 웃돈다고 추산되는 한인사회의 규모가 3만명 이상 더욱 늘 것으로 한인사회는 전망하고 있다.한인 김모(43)씨는 “삼성전자 공장이 댈러스에 들어오면서 한인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며 “입지 선정에 까다롭기로 알려진 삼성전자의 선택은, 타 유수기업들에서도 반영되는 만큼 댈러스의 발전이 더더욱 기대된다”고 말했다.러브필드 공항의 터줏대감인 ‘사우스웨스트’항공사는 우리나라 포항공항 격인 러브필드 공항에서 오랜 시간동안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국내 노선을 확장시켜 왔다.‘10분 턴’ 등 빠른 회전율로 특히, 시간이 촉박한 비즈니스맨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이러한 신뢰가 결국 기업들 유치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지역주민들의 평가다.댈러스 주민인 KIM(50·여)씨는 “대학생 때부터 사우스웨스트를 애용해왔다”며 “저렴한 가격과 다양한 노선이 구축돼 지역 교통의 자랑거리이다”고 말했다.사우스웨스트 기장 출신인 빌 콜씨는 ‘에어포항’의 좌초에 대한 얘기를 듣자마자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낭비적인 운영’이었다고 일갈했다.우선, 전문 경영인들과 회계사 등이 구성돼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최소 노선을 구비하고, 최소 인력으로 ‘여러번’ 운항하는 실리적인 운영방식을 보여야 흑자운영에 접어들 수 있다고 조언했다.흑자운영이 전제돼야 투자자들이 수익을 기대해 추가적으로 투자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선순환’구조가 형성된다고도 했다.빌 콜씨는 “포항 지역항공사가 재부활하려면 우선 시민들 중에서 사업자 등이 크라우드 펀딩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시나 지자체가 이러한 과정을 도우며 머리를 맞대 작지만 강한 항공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첨언했다.에어부산 측도 마찬가지다.에어부산 관계자는 “우리 에어부산도 초기에 일정부분 자금적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황금노선이라 지칭되는 서울∼부산 노선의 성공을 위해 집중했고 이를 토대로 오늘날의 에어부산이 자리잡게 되는 큰 힘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이런 가운데, 울릉공항도 올해 말까지 설계공모를 마친 뒤 오는 2023년 공사에 돌입, 2025년 공사를 마무리할 예정이다.울릉도의 관광 수요는 물론이거니와, 포항공항을 허브공항으로 세운 새로운 ‘지역항공사’가 이를 통해 국내 노선 확장을 시도할 수 있어 그 존재 필요성이 다시금 부각된다는 것이 업계 전현직 관계자들의 평가다.특히 서울에서 울릉도까지 비행시간이 1시간 정도로 짧고, 최소 6∼7시간이 걸리는 등 육지와 연결되기 위한 시간과 비용 모두 단축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어 ‘황금노선’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2019-11-13

안전·편리·경제성 집중… 영남권 제1항공사 자리잡게 했다

□ 12년간 에어부산이 걸어온 길에어부산은 지난 2007년 8월, 부산시와 부산 지역 상공계가 힘을 합쳐 부산국제항공으로 처음 출범했다. 이후 2008년 2월, 아시아나항공의 대주주 참여를 통해 에어부산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재출범했다. 에어부산은 지역의 항공교통 편의 증진과 일자리 창출, 그리고 지역 관광 활성화를 목표로 2008년 10월 27일, 부산∼김포 노선으로 첫 취항했다. 당시 항공기 2대, 임직원 수는 100명이 채 되지 않는 항공사였다. 포항의 지역항공사였던 에어포항과 비슷한 규모였다. 하지만 취항 초부터 일관되게 회사의 핵심가치인 안전성·편리성·경제성을 잘 지켜가며 운영해온 결과, 2019년 현재 26대의 항공기, 국내외 39개 노선, 1천400명이 넘는 임직원이 근무하는 LCC 대표 항공사로 거듭났다. 특히 취항 첫해인 2008년 김해국제공항 전체 이용객 점유율이 1.4%에 불과했지만 6년 만인 2014년에 점유율 34.5%를 기록하며 대형 항공사를 제치고 김해국제공항 이용객 1위 항공사로 등극했다. 현재는 김해공항과 대구공항에서 총 32%의 이용객 점유율을 차지해 명실상부 영남권 제1항공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부산 하늘길 확장의 일등공신, 에어부산지역의 항공 교통 편의 증진을 사명으로 출범한 에어부산은 2008년 부산∼김포 노선 취항 후 지속적으로 지역의 하늘길을 넓혀왔으며, 현재 김해공항을 이용하는 승객 중 가장 많은 승객이 에어부산을 이용하고 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부산에서는 가까운 해외 지역의 직항 노선이 없어 인천공항까지 가서 항공편을 이용해야만 했다. 일반대중교통수단은 수도권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유독 항공편만은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에 비해 노선 수나 운항횟수가 매우 적었다. 이러한 열세는 지역민들이 인천공항까지 갈 수밖에 없게 만들어 불필요한 시간과 비용 가중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는 것이 에어부산의 설립 목적 중 또다른 한 가지였다.에어부산은 현재 국내 7개, 국제 32개 등 총 39개 노선을 운항하고 있다. 초창기 당시에는 인기 노선이 아니었던 부산∼타이베이, 부산∼마카오 노선 등 신규 노선을 발굴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현재와 같은 인기 노선으로 만들었다. 또한 기존 대형항공사의 인천발 독점 노선이었던 몽골 울란바토르 노선에 어렵게 진입해 승객들의 선택폭을 넓혔으며, 대만 가오슝, 중국 시안 노선 등 부산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노선도 적극적으로 개발·취항해 새로운 여행 수요를 창출했다.한국공항공사의 항공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김해국제공항 전체 이용객은 약 1천700만 명으로 본격적으로 이용객 수가 증가한 2010년과 비교해 약 900만 명이 증가했다. 지난해 에어부산의 이용객은 600만여 명으로 2010년 대비 약 400만 명 증가했다. 김해공항 이용객 증가분의 절반 수준인 44% 이상을 담당하며 김해공항 전체 이용객 증가를 이끈 것이다.특히 에어부산이 국제선을 첫 취항한 2010년 이후의 전체 이용객 수 증가 추이와 김해국제공항 전체 이용객 수의 증가 추이가 같은 증가폭을 보이는 점을 감안해보면, 김해국제공항의 이용객 및 항공수요 증대의 일등공신이 바로 에어부산임을 알 수 있다.□ 에어부산의 성공 비결에어부산에는 독특한 이벤트도 있다. 7년째 ‘웃음 전용기’행사를 벌이고 있기 때문. 이는 사우스웨스트의 직원 및 고객들의 웃음 유도 이벤트와도 흡사 닮아있다.올해는 코미디언 변기수와 오나미가 일일 승무원으로서 참여해 기내 분위기를 더욱 따뜻하게 만들었다.이 행사는 매년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의 시작을 알리는 에어부산의 대표적인 행사이기도 하다. 코미디언들의 유쾌한 입담과 기내방송을 진행하며 이용객들의 웃음을 자아내 ‘타면 즐거운’ 에어부산의 이미지 창출에도 기여를 하고 있다.음료 제공과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 공연 관람 티켓 증정, 에어부산 굿즈 등 경품 추첨 이벤트도 에어부산에서만 이뤄지는 진풍경이다. 에어부산의 승무원들이 직접 야구장에 등장해 시구를 하는 행사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야구 경기 관람시 주의해야 하는 사항을 평소 기내 안전방송을 하듯이 안내하는 색다른 장면도 연출됐다.지역민들과 소통하는 퍼포먼스의 개발을 통해 에어부산을 알림과 동시에, 향후 국내외 노선 개척시 잠재 이용고객을 미리 선점하는 기대효과도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마케팅 효과가 에어부산의 탑승 자체의 매력을 전달해 이용객들로부터의 좋은 반응도 얻고 있다.국토교통부와 한국교통연구원의 ‘2018년 항공교통서비스 평가’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에어부산은 ‘예약 및 발권의 용이성’과 ‘탑승 수속의 용이성’, ‘정보제공의 적절성’에서 높은 만족도를 보이며 이용자 만족도 1위에 올라섰다.이러한 성과와 더불어, 에어부산은 부산지역 사람들의 애향심을 크게 자극하는 이미지인 ‘부산 갈매기’모양을 로고로 사용해 일명 ‘끼룩이네’라는 애칭으로도 불리고 있다.“항공사 규모·조건 맞는 틈새노선 발굴 중요해”인터뷰 ▶▶ 박진우 에어부산 홍보팀 과장-에어부산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린다.△에어부산은 지난 2007년 부산국제항공으로 창립됐다. 부산시와 부산상공계 기업체들이 십시일반해 투자금을 모아 시작했다. 특히 신정택 전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 에어부산의 산파 역할을 함과 동시에 부산시와의 가교 역할, 아시아나 기업 유치 등 혁혁한 도움을 주셨다. 사우스웨스트의 ‘허브 켈러허’와 비슷한 역할을 하셨다. 이후 2008년 2월 아시아나가 대주주로 참여했고 이때 ‘에어부산’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같은해 10월 비행기 2대로 부산∼김포 노선을 취항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LCC 항공사 운영의 애로사항은.△LCC가 안전하지 않다는 막연한 인식을 타파하는 것이 선행 과제였다. 이에 안전 관련 투자에 초기 역량을 집중했다. 기존 대형항공사로부터 견제도 만만치 않았다. 영업과 계약부분 등 지역 여행사들이 에어부산과의 관계를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하는 ‘텃세’가 존재했다. 또한 운항승무원을 채용해 양성하면 일부를 대형항공사에서 빼가기도 했다.-에어부산을 자랑한다면.△가장 안전한 항공사이자 정부로부터도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LCC 항공사가 ‘에어부산’이라고 자부한다. 국내 3대 서비스 평가기관에서도 LCC 중 유일하게 최고 7년 연속 등 1위를 계속 선점하고 있다. 안전에서도 검증됐고 지역에서도 사랑받고 있는 항공브랜드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특히 부산지역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일반사무직 인원의 70%가 지역 출신으로 구성돼 있고 올해로 12년째인 에어부산은 직원수 기준으로 부산 기업 중 6위를 차지할 정도로 지역경기 활성화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포항 거점 LCC 항공사 설립을 위해 조언을 한다면.△에어부산은 2014년부터 대한항공을 제치고 김해공항 점유율 1위로 올라섰다. 이 과정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우리 역시 대형항공사뿐만 아니라 KTX·SRT 등과도 경쟁해야 했다. 이에 출장 수요가 많은 점에 착안해 신속하면서도 안전에 대한 신뢰도를 확보하는 것에 주력했다.항공사는 또한 자본금이 든든하게 받쳐줘야 하는데, 포항에서도 주요 대기업·중소기업들이 십시일반해 지역 하늘길 창출에 도움을 주는 방식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넉넉한 자본금은 곧 안전과 서비스로의 투자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국토부에서도 최근 신규 LCC 항공사 면허 발급시에도 자본금 헤드라인을 따로 정해놓은 것으로 알고 있다.-지역항공사 설립을 준비하는 포항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각 지역에 맞는 항공사는 그 존재가치가 분명하다. 유럽의 경우, 소형항공기를 운항하는 지역항공사가 많이 있다. 포항지역에 맞는 노선을 우선 검토해야 하고, 울릉공항이 신설되는 것을 대비해 울릉 노선도 고려해 볼만하다. 무조건 특정 노선을 고집하기보단 항공사 규모와 조건에 맞는 틈새노선을 발굴해 특색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2019-11-06

직원을 사랑한 사우스웨스트, 탄탄한 조직력 비결 됐다

□ 직원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사우스웨스트설립 초기, 임원인 킹이나 라마 뮤즈 등은 사원용 선술집에 가서 직원들과 격의 없이 맥주를 마시는 일이 흔했다. 일례로 이런 모습을 본 경쟁사 브래니프 조종사들은 놀라서 맥주 잔을 떨어뜨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특히 킹과 라마 뮤즈는 직원들의 만남을 통해 승객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승객들의 반응을 궁금하게 여겨 물었다고 한다. 킹은 현장에 나가 직원들과 자주 어울리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여겼다고 알려졌다. 한달에 25∼30시간 비행기를 타면서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고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공항 현장을 점검할 기회를 가졌다. 심지어 킹은 1971년에 현장에 나가 최전선에서 뛰는 직원들과 함께하는 날을 제정함으로써 이러한 행동을 하나의 기준으로도 확립했다.사우스웨스트의 창업자 허브 켈러허. 그는 올해 1월 3일(미국 현지시간) 87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했다. /사우스웨스트 제공□ 의사소통이 핵심이다사우스웨스트의 창업 첫해는 매우 어려웠다. 자원은 풍부하지 못했고 이용 승객수도 많지 않았다. 비행기 연료조차 두달씩이나 라마 뮤즈의 개인 신용카드로 구입해야 할 정도였다.지상 장비도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 있는 것도 낡아서 잘 가동되지 않았다. 때때로 직원들은 아주 낡았거나 버린 장비를 구해다가 대체품으로 사용했다. 한창 브래니프와 사우스웨스트 사이에 치열한 법정공방이 오갈 때여서 갈등이 심했지만, 브래니프 정비공들은 부품이나 도구를 사우스웨스트에게 빌려주기도 했다.어쩌면 불쌍하게 생각했거나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았을 공산도 크다. 업계 기준으로 볼 때 지상 장비가 불충분하고 작업 환경이 열악했지만 사기는 어느 회사 못지 않았다고 한다.열성적이고 직업 윤리가 강한 직원들은 항상 중진들과 격의 없이 의사소통을 했고 ‘재미를 추구하는’기업문화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외인구단이었던 사우스웨스트 직원들사우스웨스트 초창기 직원들은 상당수가 다른 항공사에서 해고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망해버린 퍼듀 항공사 출신이 많았고 군대 출신들도 받아주는 데가 없어 사우스웨스트의 문으로 들어오게 됐다.이런 사람들은 실직이 얼마나 뼈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직원들은 남들보다, 다른 경쟁 항공사들보다도 더 잘해내야 한다고 알고 있었고, ‘10분 턴’ 등도 이러한 절박한 마음에서 궁여지책으로 나오게 된 정책이였다고 회상한다.조종사, 승무원, 정비공 등도 틈만 나면 기내로 들어가 좌석을 정리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수화물을 정리하는 일들을 도왔다고 한다. 그들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실제로도 정말 해냈다.직원들 사이에서는 그때 금기사항이 2가지가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못해’와 ‘그건 내 일 아니야’였다. 이러한 생존 전략은 창의적인 정신만 함양시킨 것이 아니라 모든 직원들의 유대 의식을 아주 단단하게 단련시켰다.인터뷰 ▶▶ 빌 콜(BILL COLE) 전 사우스웨스트 기장험난했던 법정 소송과 갖가지 방해 공작에도 사우스웨스트는 살아남았고 오히려 성공했다. 이러한 전설을 남긴 초창기 직원들은 아직도 회사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심이 강하다. 22년 동안 사우스웨스트 항공기를 조종했던, 창립자 중 한 명인 허브 캘러허와 개인적으로도 교류가 있었던 빌 콜 전 기장을 만났다.-본인의 소개를 부탁한다.△이름은 빌콜, 올해로 77세다. 현재는 러브필드 공항 근처에 위치한 항공박물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이곳은 사우스웨스트는 물론이고 지역 투자자들이 합심해 만든 비행역사의 기록보관소 역할을 하고 있다.196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월남전 참전도 한 경력이 있다. 대한민국도 군 복무 당시 임무 수행차 들린 적이 있어 친근하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22년 동안 사우스웨스트에서 기장으로서 일을 했다. 마지막 2년 동안은 조종 훈련 시뮬레이터 강사로 일하기도 했다.- 성공한 항공사인 사우스웨스트에도 사고사례가 있었는지.△기체 결함 정도는 있어도 큰 사고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근무 당시 단 한번 사망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고도 옆의 비행기 펜이 고장나 조각이 날라오면서 우리 비행기 창가 승객 1명이 맞아 사망한 사례가 있었다. 그때 기장과 부기장이 침착하게 대처해 비행기를 급강하시켜 산소마스크를 내려오게 했고 대형 인명피해를 막아냈다. 우리 사우스웨스트는 조종사 훈련이 굉장히 철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비상상황에 대응 방법도 이미 숙지해 항상 승객 안전에 최선을 다한다.-사우스웨스트에 도움을 준 기관, 정부 등이 있다면.△정부는 우리에게 도움을 거의 안줬다. 거의 개인투자자들 중심이었다.새로운 지역항공사도 지자체나 우리의 ‘캘러허’같은 의지가 강한 인물이 나서서 투자자를 모으는게 우선으로 보인다. 사우스웨스트 설립자도 종잣돈을 가지고 개인 투자자들을 모아 시작했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를 자랑한다면.△최고의 직장이었다. 직원들이 가족 같은 분위기였고, 사우스웨스트를 직장으로 가진 건 축복이었다. 일하면서 은행에 예금도 잘 되있고, 직원들간 소통도 잘돼 서로 잘 뭉쳤다.특히 허브 캘러허는 나에게 있어 영웅이었다. 기존의 리더가 아닌 전혀 색다른 타입의 리더였다. 다른 항공사는 해고를 잘 하는데 사우스웨스트는 정말 큰 이유가 아니면 해고를 안한다.그래서 직원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흔히 회사가 어려울때 하는 정리해고도 우리 회사는 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실수를 해도 기간을 주고 개선하도록 도와준다.-회사에서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면.△뭐니뭐니 해도 허브 캘러허가 제일 기억이 난다. 직원들을 가족처럼 아끼고 소속감을 느끼도록 항상 배려했다. 한번은 내가 조종사였을 때 공항에 내리면서 마주쳤는데 캘러허가 “조종사, 차가 어딨냐”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직원 주차장에 있다”하니, 캘러허가 “1번 게이트에 내 차가 있으니 같이 가자”라며 운전해줬다. 캘러허는 항상 직원들에게 친근했고 스킨십도 서스럼없이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직원들을 안고 키스하기도 했다.또한 내가 아들과 야구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캘러허가 담배를 입에 물고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와 시구하는 등 그는 정말 자유분방하면서도 그릇이 크게 느껴진 사람이었다.요즘에는 컴퓨터로 하지만 옛날에는 조종사들이 모여 노트에 몇시에 비행기를 타는지 기록하는 ‘파일럿 라운지’가 있었는데 캘러허가 항상 매일 아침 나와 인사하고 ‘우리’라는 개념을 상기시켰다.콜린 법률사무장도 기억에 남는다. 사우스웨스트 조직 문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사우스웨스트 문화조직위원장을 맡기도 했다.어느날 직원들에게 줄 먹을 것을 챙겨온 적이 있는데 직원들과 얘기하다가 “우리 이날을 문화의 날로 만듭시다”라며 즉흥적으로 제안해 실제 기념일이 정해지기도 했다.-포항시를 기반으로 했던 저가항공사가 최근 운항을 중단했다. 항공사를 두고 싶어하는 포항시에 조언을 한다면.△논리적으로 봐도 이용자가 시민들이다. 시민 중 사업하는 사람도 있을텐데 커뮤니티 등 단체를 만들어 ‘우리는 지역항공사를 원한다’라는 슬로건으로 항공사 창립 또는 유치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세계적인 철강업체인 포스코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러한 대기업들의 지원을 받는 것도 좋을 듯하다./황영우기자 hyw@kbmaeil.com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2019-10-30

고향 지킨 ‘뚝심’, 직원과 이익 나눈 ‘파격’ 통하다

□ 댈러스의 토종 공항, 러브필드댈러스 러브필드(DALLS LOVE FIELD) 공항은 지난 1917년에 군공항으로 개항해서 1927년부터 민항기를 취급하고 있다.러브필드의 ‘러브(LOVE)’는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닌 1911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조종사 모스 러브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THE REASON PEOPLE HAVE ALWAYS LOVED LOVE FIELD(우리가 러브필드를 러브(사랑)해온 이유’라는 캐치프레이즈로 공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사우스웨스트의 본사 역시 이 공항에 있다.러브필드 공항은 단순한 공항으로 보기보단 댈러스 지역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역사를 함께해온 공항으로서도 의미가 크다. 그 유명한 존 F. 케네디 대통령도 암살 당하기 전, 1962년 11월 22일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타고 러브필드 공항에 첫발을 내딛은 바 있다.그때 미국 정계는 혼란한 상태였다. 케네디 대통령의 민권을 앞세운 정책이 각계에서, 특히 극우세력들의 거센 반발을 받는 상황이었다.케네디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 텍사스 주 지역의 지지도가 떨어지자 이를 회복시키기 위한 의도로 댈러스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를 역사로 남기기 위해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다운타운 딜리 플라자에 ‘6층 박물관(6th floor museum)’이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에는 현재까지도 케네디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한 미국 갤럽의 조사결과, 미국인의 60% 이상은 여전히 케네디 암살에 배후가 있다고 믿었고 오스왈드 단독범행이라는 답변은 30%에 그쳤다.러브필드 공항에서 내린 케네디 대통령은 시가지에 오픈카 종류인 전용차를 타고 부인과 행진하다가 암살범 오스왈드에 의해 모두 3발의 총격을 맞고 사망했다.한발은 전용차를 빗나갔고, 한발은 케네디 대통령과 텍사스 주지사를, 나머지 한발은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직격했다.오스왈드는 대통령 암살을 위해 여러 장소를 물색하다가 다른 곳에 비해 덜 눈에 띄면서도 대통령의 동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소이기에 딜리 플라자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박물관에는 당시 행진 이후의 스케쥴이었던 댈러스 지역 유지들과의 만남 장소에서 사람들이 대통령의 총격소식을 듣고 손을 모은 채 회복을 기도하는 사진 등 역사의 흐름이 여실히 소개되고 있다.박물관에서 만난 텍사스 주민 앤더슨 씨는 “러브필드 공항은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로 케네디 대통령 방문 역사는 물론, 현재 댈러스 발전에 일등공신 역할을 하는 교통인프라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러브필드 공항을 고집한 사우스웨스트지금의 댈러스 제1공항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이 완공되어가는 당시, 사우스웨스트는 기존의 러브필드 공항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면서 공항 관리공단 측에 신공항으로 옮겨 가지 않겠다는 뜻을 미리 전했다.댈러스 도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러브필드 공항이 도시에 빨리 들어가 일을 보고 싶어하는 출장자들에게 안성맞춤 공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객들을 상대로 도심에서 30분이나 떨어진 포트워스 공항으로 발착지를 옮겨 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게 사우스웨스트의 입장이었다.하지만, 1968년 채권 규정에 의하면, 신공항은 항공사들의 이착륙비와 시설 사용비 등 공항 이용료를 통해 공항 시설에 투자된 돈을 회수하기로 되어 있었고 만약 손실이 발생하면 공항 관리공단이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결국 이전에 사우스웨스트가 휴스턴의 인터컨티넨털에서 하비로 옮겨 간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휴스턴과 포트워스 일대의 항공사들은 또다시 사우스웨스트의 공항 비이전 고집을 괘씸하게 생각해 1972년 6월 6일, 법원에 고소한다.또다시 법정 싸움에 돌입한 사우스웨스트는 32일간의 심리 끝에 ‘러브필드 공항에 머물러도 좋다’는 판결을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연방 대법원에서도 상소를 ‘이유 없음’으로 기각했다.오히려 1975년 2월 14일 사우스웨스트를 공격한 브래니프와 택사스 인터내셔널이 미 정부에 의해 기소됐다. 혐의는 사우스웨스트의 정당한 영업 행위를 방해해 그들을 항공업계로부터 쫓아내려 했다는 것이었다.브래니프와 텍사스 인터내셔널은 ‘이의 없음’으로 혐의를 인정했고 10만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1977년, 러브필드 공항을 사수하기 위한 5년간의 법정공방은 사우스웨스트의 승리로 끝났다.물론 33회에 걸친 사법부 및 행정부 처분을 거치면서 사우스웨스트는 전국의 법원이나 행정부 중 가보지 않은 곳이 손에 꼽을 정도로 경험(?)을 쌓았다.이후에도 1979년에 연방의회가 포트워스 공항을 살리기 위해 러브필드에서 장거리 영업을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하자, 사우스웨스트는 해당 조항에서 취항이 허가된 인근 주에 미니 허브를 만들어서 환승환적을 해가면서까지 영업했다.해당조항은 지난 2006년에 폐기됐고 사우스웨스트는 사랑하는 러브필드를 지켜냈다. 더욱이 공항에서 나가는 도로 이름마저 사우스웨스트의 창업자의 이름을 따 ‘허브 캘러허 웨이’로 바꿔버렸다.□ 러브필드 사랑만큼 색다른 조직 운영러브필드 공항을 고집하는 사우스웨스트는 그 애향심만큼이나 조직운영에서도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사우스웨스트의 정신을 키워온 캘러허는 1978년 회장에 취임했다. 취임 후 인사부에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을 채용하라’라는 특별 주문을 했다.사우스웨스트는 유머가 많은 사람일수록 변화에 잘 적응하고, 스트레스를 받아도 창조적이며 또 보다 효율적으로 일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놀 때 열심히 놀고 남들보다도 더 건강하다는 것.사우스웨스트는 직장 분위기가 밝지 않으면 생산성, 창조성, 적응성을 떨어뜨리며 직원 채용 기준에서 유머를 최우선 조건으로 설정함으로써 직장 안팎에서 즐거움, 자부심, 재미 등을 찾아가는 방법을 고민한다.특히 직원을 자원 이상의 존재로 여긴다. 직원 채용에 통일된 하나의 근본 원칙으로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을 뽑는다는 것이다.유머 감각은 물론이고, 남들에게 베풀 줄 아는 이타심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도 중요 기준이다. 즉, 태도를 본다는 것인데 실제로 항공업계에서는 파격적인 회사 제복인 버뮤다 반바지를 입을 용의가 있냐고 물어보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탈락시켰다.모험정신을 본다는 의미로, 필요한 일은 뭐든지 하려고 달려든다는 정신을 함양시키는 문화로써 사우스웨스트에 유난히 장기 근속자가 많은 이유 중 하나로도 들고 있다.‘10분 턴’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적 자세가 이미 입사에서부터 만들어짐을 볼 수 있다.사우스웨스트는 항공사의 이익도 직원들에게 나눠줄 만큼 파격적이다. 1973년 사우스웨스트는 항공사로는 처음으로 직원을 위한 이익 나누기 계획을 도입해다.오늘날에도 모든 사우스웨스트 직원은 채용된 다음해 1월 1일자로 이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사우스웨스트는 세전 소득의 15%를 이익 나누기 계획에 배정한다. 1970년대에 사우스웨스트는 사원들의 임금 양보를 요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사 주식을 나눠 준 유일한 항공사였다.1973년 이래, 매년 이익을 내온 사우스웨스트는 이익을 직원들에게 나눔으로써 오히려 주가가 몇배로 뛰어오르는 진풍경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익 나누기는 중역들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직원들을 백만장자로 만들었다. /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2019-10-23

‘무조건 성공’ 보장 없어… ‘지역관광 상생’ 전략 세워야

김영록 전라남도지사는 지난 10월 18일 ‘목포해상케이블카’ 탑승체험을 한 후 정인채 새천년종합건설 회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도지사가 직접 케이블카 사업을 맡은 건설사에 감사패를 전달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데, 이는 그만큼 목포해상케이블카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전남도청에 따르면 새천년종합건설은 850억원을 투자해 목포 북항∼유달산∼고하도를 잇는 총 연장 3천234m(해상 820m·육상 2천414m)의 목포해상케이블카를 조성해 지난 9월 개통했다. 이 케이블카는 국내 최장 운행거리와 전 세계 최고 지주 높이 155m를 자랑하고 있다. 목포해상케이블카 개통 이후 18일까지 33일간 케이블카를 탑승한 이용객 수는 21만1천여명에 달한다. 하루 평균 6천400명이 이용한 셈이다. 주중 5천여명, 주말 1만여명이 이용하는 등 케이블카 개통으로 목포를 찾는 관광객 수가 급증하면서 서남해안을 대표하는 명품 관광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김 지사는 감사패를 전달하면서 “최근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새천년종합건설의 아낌없는 투자와 헌신에 감사드린다”며 “전남 서남해안의 아름다운 섬과 바다 등을 세계적 해양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자 하는 전남의 새천년 비전인 ‘블루투어(Blue Tour)’ 실현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지역 사회가 똘똘 뭉쳐 케이블카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경우도 있다.설악산오색케이블카 사업이 전형적인 예다. 설악산오색케이블카사업의 경우 이를 백지화시킨 환경부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며, 이와 관련해 친환경설악산오색케이블카추진위원회는 지난 10월 10일 양양군 양양읍 남대천 둔치에서 ‘환경부 규탄 범도민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앞서 환경부는 지난 9월 16일 설악산오색케이블카사업과 관련해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사업이 자연환경과 생물 다양성 등에 미칠 영향과 사업 승인 부대조건의 이행 방안을 검토한 결과, 환경 가치 훼손이 심각하고 보완 대책도 미흡해 사업이 재검토돼야 한다”며 부동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지난 2015년 8월에 국립공원위원회가 조건부 승인을 낸 이후 4년 만에 이러한 결정이 떨어지자, 친환경설악산오색케이블카추진위원회를 비롯한 지역사회는 “환경부는 적폐를 내세워 강원도와 양양군을 헌신짝처럼 버렸다”며 “사업을 불허하려면 일찍 할 것이지 수년 동안 끌어오다가 이제 와서 부동의 한 환경부를 그냥 둘 수 없다”고 즉각 반발했다. 김진하 양양군수 역시 “양양군민 모두가 단합된 힘으로 밀고 나가자”고 밝히는 등 민관이 하나 돼 케이블카 사업을 다시 재개하기 위한 바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이들 사례 외에도 통영케이블카의 성공으로 촉발된 케이블카 건설 사업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수많은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다. 포항을 비롯해 강화, 춘천, 화성, 거제 등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케이블카 사업에 뛰어드는 등 전국이 케이블카로 들썩이는 상황이다.□ 양날의 검, 케이블카그렇다면 케이블카는 절대 실패하지 않는 사업일까.여수해상케이블카의 경우 출발은 좋았으나, 현재 시와 업체가 소송을 벌이며 시끄러운 상황이다. 사업 시작 당시 운영업체에서 매출액의 3%에 해당하는 기부금을 지역사회 환원 명목으로 내기로 했었지만, 이를 약 2년 전부터 거부하며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이어 업체 측은 지난 2016년 만들어 여수시에 기부한 오동도 주차타워도 다시 찾아오겠다는 의지를 최근 내비치고 있어 지역 사회와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이는 기본적으로 민자사업으로 추진됐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는데, 사천시시설관리공단이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사천바다케이블카의 경우 “민자사업 이슈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관광 사업의 경우 서로 상생하는 ‘공적인 측면’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사천시시설관리공단 박태정 이사장은 “우리나라 케이블카 중 케이블카 수익만으로 제대로 돌리는 곳이 절반도 될까 말까다”며 “사천시와 같이 시설공단이나 공사가 하는 것이 버티는 면에서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는 케이블카의 미래에 대해 “어느 시점에 가면 분명히 인건비가 나오지 않을 경우가 있다”면서 “만약 시에서 운영한다면 적자분에 대한 보전이 되면서 재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겠지만, 개인 회사는 바로 문을 닫아야 한다. 이는 상당한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하며 실패에 대한 대비가 충분히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케이블카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그는 “돈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이와 관련해 “이 상태로 가면 5년 내나 10년 내 적자로 가지 않을까 싶다. 다른 것을 찾아서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주변에서 연계하고 소비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로서의 케이블카를 강조했다. 즉 주변과 시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며, 이런 부분은 민자 사업으로는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을 내비친 것이다.그는 “개인이 한다면 주변 땅을 다 사서 하지 않는 이상 서로 상생하는 점은 불가능하다. 케이블카를 실컷 지어놨더니 주변 식당이나 상가가 돈을 벌어가는 상황이 온다면 사업주는 어떤 판단을 내리겠나. 고철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10년을 해야 본전을 찾을 것이다. 그 이후를 돌아봐야 하고 대비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포항은 아직 시작단계, 지역 사회와 충분한 소통 필요민자 사업 이슈 외에 지역민과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부산에서는 해운대와 이기대를 연결하는 해상케이블카 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를 둘러싸고 지역사회는 찬반 논란이 가열되며 둘로 쪼개진 상황이다. 반대 측에서는 “공공재인 부산 앞바다가 기업에 사유화되고, 동백유원지와 이기대가 상업 개발로 환경이 훼손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찬성 측에서는 “해상케이블카가 설치되면 연간 312만명이 이용할 것으로 추정되는 등 침체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 케이블카 도입은 필수다”라고 맞서고 있다.포항의 경우 아직 시가 업체와 MOU만 맺은 상황이어서 구체적인 계획은 나오지 않았지만, 타 지자체의 사례를 충분히 검토해 사업 실패 확률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업지 선정부터 사업 추진 방식까지 전부 백지화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지역민을 포함한 전문가들과의 충분한 검토와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소리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민자 사업으로 추진하더라도 지역 관광과의 상생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이다. 만에 하나 케이블카가 수익성 저조로 폐쇄돼 흉물로 전락한다면, 영일만관광특구 지정으로 상승기류를 타고 있는 포항 관광에 찬물을 끼얹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입지에 대한 재논의도 필요하다. 포항의 현 사업지인 영일대해수욕장과 관련해 타 케이블카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풍광이 걱정스럽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즉 동해 자체가 지평선 외에 볼 것이 없는 상황에, 영일대 해수욕장의 나름 장점인 포스코 야경의 경우에도 “산업단지라는 정서가 관광적인 목적으로 크게 와 닿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상생의 손으로 대표되는 일출 명소이자 호미반도 해안둘레길로 이미 풍광의 우수성이 입증된 호미곶과 같은 최적의 장소는 제외하고, 굳이 주거지와 상가가 몰려 있는 영일대해수욕장을 고집하는 것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계획대로 영일대해수욕장이 사업지가 된다면, 해수욕장과 바로 인접해 있는 주민들과의 갈등 또한 신경 써야 할 부분이다. 이미 국제적인 행사로 거듭나고 있는 포항국제불빛축제만 하더라도 영일대해수욕장 인근 주민들이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으며, 여기에 추가로 케이블카가 들어서면서 생기는 소음과 인파는 분명히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여수시 관계자는 이와 관련, “여수는 섬지역이고 교통이 평지와 비교하면 제한돼 있어서 일시적으로 몰리면 여파가 시 전체로 퍼져 나간다”며 “포항의 경우에도 케이블카 사업지 인근에 주거지가 있다고 하는데, 복잡한 곳에 설치하게 되면 교통 문제가 가장 걱정이다”고 밝혔다.사업 타깃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케이블카는 인근 관광지와의 연계가 중요하며, 어떤 연령층을 주요 타깃으로 잡느냐에 따라 이 연계의 방향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즉, 사업 초기단계부터 고령층을 중심으로 정적이고 휴양적인 프로그램으로 짤 것인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활동적이고 체험적인 프로그램을 짤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잡아나가야 한다.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케이블카가 무조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전국에서 너도나도 해당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케이블카 자체가 ‘레드오션’이기 때문이다. 수요는 정해져 있는데 파이만 늘어나면 경쟁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포항시가 단순히 “MOU만 맺었으니 끝”이라는 자세에서 벗어나 좀 더 적극적으로 사업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끝※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2019-10-21

‘어떻게 하면?’ 끊임없는 질문이 항공사 날게 했다

교통은 지역의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까지 모두 큰 강의 유역이다. 하나같이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다는 장점과 함께 교통이 편리하다는 특징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세계 무역의 중심이었던 실크로드 또한 세계 각국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교통로이다. 중국 비단의 로마로의 무역, 당제국과 비단길 무역, 불교의 전래 유통로, 몽골 제국와 동남아시아 및 해상 비단길까지 아우르고 있다. 현재 실크로드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의해 철도, 항로 등 신 비단길이 형성되고 있다.동해를 끼고 있는 포항시도 최적의 교통망 개설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향후 북한과 러시아 연해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환동해 물류중심도시도약의 길이 열려 있다.하지만, 인구 50만의 도시에 비해 하늘길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포항시가 야심차게 기획했던 지역항공사 ‘에어포항’은 임금체불, 경영난 등으로 취항 10개월여만에 운항을 중단했다. 미국 댈러스 러브필드 공항을 허브공항으로 두고 있는 세계 3대 항공사인 ‘사우스웨스트’의 성공사례를 토대로 날개가 꺽인 포항의 저가항공사 재취항 가능성을 짚어봤다.□ 사우스웨스트의 성공은 정신에 있다위대한 업적을 기록한 회사들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신념, 의무, 사명감 등이 있다. 사우스웨스트도 예외는 아니다.이 회사 직원들은 단순한 수익을 내기 위한 고용된 직원이라기보다 스스로 항공사업에 동참한 ‘십자군 운동가’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토대가 바로 사우스웨스트의 최저운임 유지의 기반이 되고 있다.직원들은 평상시에도 ‘우리 비행기를 타는 손님들을 어떻게 하면 잘 보호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중소기업을 보호할 수 있을까, 저비용 때문에 우리 회사 비행기를 타는 노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해드릴 수 있을까’ 등을 수시로 확인하는 원칙을 고수한다.이러한 원칙들을 사우스웨스트가 포기했다면 미국 소비자들이 혜택받은 연간 수십억 달러의 요금 인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익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수익을 추구하는 이면에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바로 이러한 정신적 원칙에 기인하고 있고 이 점은 회사 창립에서부터 두드러지고 있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의 역사를 보면 용기와 인내로 점철돼 있다. 미국 항공 업계 역사상 사우스웨스트 항공사처럼 극적인 투쟁을 거쳐 항공업에 진출한 유래가 없다.사우스웨스트 항공사는 샌안토니오의 사업가이면서 자그마한 항공 서비스 회사를 소유한 콜린 킹과 그를 지원하는 은행가 존 파커의 합작품이었다.1966년 킹은 대형 비행기를 가지고 텍사스 주의 주요 3개 도시를 운항하는 새로운 항공 회사를 만들겠다는 기획서를 들고 현재까지도 사우스웨스트의 역사적 인물로 일컬어지는 ‘허브 캘러허’를 찾아간다.캘러허는 처음엔 이 아이디어가 황당하다고 생각했으나, 흥미도 가지고 있어 사업구상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다. 1967년 3월 15일, 캘러허는 에어 사우스웨스트 컴퍼니(현재 사우스웨스트)의 법인 설립 서류를 법원에 제출한다.킹은 캘러허의 도움을 받아 사업 구상을 대내외에 적극적으로 알리며 최초의 종자 자본을 모금했다. 2차 자본 모집에도 박차를 가했고, 정계의 정치적 도움도 요청했다. 결국 2차 자금 모집에서 킹, 캘러허, 내글리(캘러허의 처남), 피스(샌안토니오의 변호사·사업가·정치가) 등 4명의 사업가는 54만 3천 달러를 거두게 됐다.1967년 11월 27일 캘러허는 사우스웨스트의 신청서를 텍사스 항공 위원회에 제출했고 1968년 2월 20일, 항공위원회는 이 신청을 허가했다.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하늘에 비행기를 띄워 보기도 전에 브래니프, 트랜스 텍사스, 컨티넨털 항공사 등 기존 항공사들로부터 법적인 공격에 직면하게 된다.□ 어려움 속에 싹튼 기업 정신기존 항공사들이 항공 위원회가 사우스웨스트에 항공업 면허증을 발급하지 못하도록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다. 이들 항공사들은 사우스웨스트가 취항하려는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이며 신규 회사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양측의 소송은 너무나 치열해 ‘텍사스 리포트’지는 한때 독자들에게 연예 오락이 따로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캘러허와 기존 항공업체를 대변하는 변호사들 사이의 법정 싸움이 매일 벌어졌으며 1심 법원에서 사우스 웨스트가 이 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것은 허가할 수 없다는 판결마저 내려졌다.종잣돈도 소송 비용으로 다 써버린 탓에 사우스웨스트 이사회 이사들은 피곤한 데다 좌절감마저 느꼈다.이사회 중 일부 이사들이 차라리 손절매하고 회사 설립 구상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마저 내놓았다.하지만 ‘파이터’캘러허는 당시 “여러분, 한 번만 더 싸워 봅시다. 내가 계속 회사의 법정 대리인으로 나서겠습니다. 나에게 주는 변호사 비용의 지불을 무기한 연기해도 좋습니다. 또 각종 법정 비용은 내 호주머니에서 대겠습니다”라며 설득했다.캘러허의 열변과 사자후가 통했는 덕분이였을까. 대법원은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엎고 사우스웨스트의 손을 들어주게 됐고 결국 사우스웨스트는 항공업 면허를 받게 됐다.사우스웨스트가 중요한 싸움에서 이겼지만, 기존 항공사들은 ‘끈질긴 방해공작’을 그만두지 않았고 연방 대법원에 항소하며 향후 몇년 동안에도 여러번 법정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다행히 타 항공사에서 백전노장으로 알려진 라마 뮤즈를 신임 대표 이사로 영입하면서 희망의 불씨가 재차 살아났다. 뮤즈는 항공업계 친구들 및 관련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7백만달러의 자금을 추가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사우스웨스트의 초창기 법정싸움은 직원들을 오히려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직원들은 댈러스 모닝 뉴스나 댈러스 타임스 헤럴드 등 지역 신문지에서 본인들의 회사 전망이 암울하다는 기사를 보면서 회사와 함께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경쟁 속에서 생존 전략을 찾아내다사우스웨스트는 저운임 정책을 혁신적으로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 항공 업계는 민간 항공국에서 승인받은 균일한 운임을 책정했다.항공사들은 시장은 비행기 값을 낼 여력이 있는 세력과 그렇지 못한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고 바라봤다. 항공료 인하는 곧 수입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존 항공사들은 항공기 수송에 문제가 생기거나 비용이 상승하면 곧장 항공료를 올렸다.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이와 정반대로 움직였다. 낮은 운임과 훌륭한 서비스를 연결시키면 얼마든지 새로운 승객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고 봤다.1973년이 되자 수익이 어느 정도 나기 시작한 상태에서 뮤즈는 리오그란데 밸리 일대에 눈독을 들이고 할링언 공항에 추가 취항을 신청한다.이 판단은 정확했고 당시 텍사스 인터내셔널이 심한 노사 분규에 휘말린 상태에서의 밸리 일대 공백을 정확히 노려 기존 승객수의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하는 성과를 거둔다.증가의 원인으로는 사우스웨스트의 낮은 운임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비행기를 탈 기회를 줬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박리다매 가격 정책의 성공을 한번 더 확신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또한 지금도 회자되는 ‘10분 턴’전략을 실시해 마찬가지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비행기를 빠른 시간 안에 회전시켜 정기 스케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 항공업계 내에서 정시 발착을 가장 잘 지킨다는 전통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기장 등 조종사와 타 부서 직원들도 비행기 출항 준비에 부서 구분없이 협력한 것이 비결이었다./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2019-10-16

낮엔 한려수도의 눈부심이, 밤엔 다리 밝히는 황홀한 조명빛이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최초로 띄운 곳인 사천만에 자리를 잡은 사천시는 경남의 서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상으로는 여수시부터 거제시까지 이르는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중심에 있다. 인구는 11만5천여명이며, 시 중에서 면적은 그리 크지 않은 약 399㎢로 전국 63개 시 중 58번째로 작은 도시다. 그러나 작은 규모가 단점은 아니다. 사천은 지형 요건이 매우 뛰어난 편인데, 시의 동과 남은 고성군과 남해군을 경계해 와룡산과 바다에 걸쳐 있고 서북은 진주시와 하동군이 경계하며 지리산이 뻗어내린 산악으로 형성돼 있어 해안평야가 남북으로 전개돼 있다. 또한 덕천·사천·죽천·백천·곤양천이 흘러 수리이용이 높고 토양은 비옥하며, 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고 있어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다. 사천시는 이 외에도 한려수도의 중심 기항지이며 서부 경남의 관문 항구로서 교통의 요지이자 수산물 집산지다.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여름은 서늘하고, 겨울은 온화해 농수산업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환경은 전략산업인 항공우주산업과 더불어 사천시가 남해안 해양관광의 거점 도시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전국의 가장 아름다운 길에서 대상을 차지한 삼천포 대교와 연인들로부터 가장 가고 싶은 곳 1위를 차지한 삼천포 대교공원 등을 중심으로 한려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와룡산, 각산을 비롯해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 체험거리가 넘쳐나는 해양 관광의 파라다이스다. 그리고 이러한 관광의 중심에는 사천바다 케이블카가 있다.□ 사천바다 케이블카사천 관광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사천바다 케이블카는 2018년 4월 개통된 이래 성황리에 운영되고 있어 사천시가 해양관광 거점도시로 발돋움하는데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사천시의 바다케이블카는 통영과 여수케이블카를 합쳐놓은 국내 유일하게 바다와 산을 동시에 지나가는 명품 케이블카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일단 사업 현황을 살펴보면 사천바다 케이블카는 지난 2015년 12월 설치사업에 들어가 2018년 7월 4일 준공했으며 사천시 동서동(초양도∼각산) 일원에 위치해 있다.국비 50억, 도비 100억, 시비 448억 총 598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돼 2.43㎞의 길이에 정류장 3곳, 캐빈 45대가 운영 중이다. 왕복 시 운행시간은 20∼25분정도 소요된다. 사천시시설관리공단이 운영하고 있으며, 2019년 6월말까지 128만2천123명의 탑승객이 다녀가 186억여원의 이용료 수익을 냈다.사천시가 내세우는 사천바다 케이블카의 장점은 무엇보다 ‘산-바다-섬’을 잇는 국내 최초의 케이블카라는 점이다. 즉 우리나라 대부분의 케이블카는 산 아니면 바다를 잇는 단조로운 코스를 가지고 있는 반면, 사천바다케이블카는 섬(초양도)과 바다와 산(각산)을 잇는 3개 정류장(대방, 초양, 각산)의 승하차 시스템을 적용해 더욱 역동적이고 다양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다.안전성 역시 확보했다. 10개월에 걸쳐 풍동(風動)실험을 실시한 후 자동순환 2선식을 채택해 한겨울의 매서운 바닷바람에서도 흔들림을 최소화한 든든한 안전장치로 설계됐고, 순간 돌풍과 강풍 등 돌발상황을 대비해 모든 지주에 풍향, 풍속 계측기를 추가로 설치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을 대비한 구조시스템도 마련했다. 전력 공급이 끊기면 비상 엔진으로 구동용 케이블을 돌려 비상 운행하고, 자체 모터를 가진 특수 구조차가 캐빈에 직접 접근해 승객을 안전하게 구조하게 된다.모든 구간이 무진동으로 운행된다는 점도 사천바다 케이블카의 특징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대부분의 케이블카는 지지하고 있는 철탑부분을 통과할 때마다 덜컹거리는 진동으로 공포감을 느끼는데, 사천바다케이블카는 모든 구간이 무진동으로 운행돼 케이블카를 타는 내내 쾌적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사천바다케이블카는 직선코스(국내 대부분의 케이블카)가 아닌 대방역사에서 각산역사로 올라가는 구간이 초양역사와 대방역사 구간보다 약 26.6도가 꺾여 더욱 고도화된 기술이 필요한 부분이며 이 무진동의 묘미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그 밖에 사천바다 케이블카는 쾌적한 캐빈의 내부 환경을 고려해 10인승 중형 캐빈을 이용하고 있으며 최대 속도 6m/s로 시간당 최대 1천300명이 이용할 수 있다. 크리스탈 캐빈은 총 45대 중 15대로 바닥이 투명 유리로 돼 있어 816m 바다 구간을 최고 높이 74m(아파트 30층 높이)에서 관람할 수 있다.□ 사천바다 케이블카와 연계된 사천 관광사천바다 케이블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천혜의 자연환경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을 조망할 수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는 다른 케이블카가 가지지 못한 장점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은 1968년 우리나라에서 4번째이자 해상공원으로는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다. 경남 거제시 지심도에서 전남 여수시 오동도까지 300리 뱃길을 따라 크고 작은 섬들과 천혜의 자연경관이 조화를 이루는 해양생태계의 보고이자 가장 아름다운 바닷길로 이름난 한려수도는 71개의 무인도와 29개의 유인도가 있다. 사천바다 케이블카는 한려해상국립공원 중에서도 사천지구에 속해 있고, 이러한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둘러볼 수 있는 유람선 선착장 역시 케이블카 바로 인근에 위치해 있다.사천 8경 중 제1경인 창선·삼천포대교도 케이블카를 타면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케이블카 선로 자체가 이 두 대교를 따라 건설됐기 때문이다. 창선·삼천포대교는 사천시의 대방과 남해군의 창선을 연결하는 연륙교로 우리나라 최초의 섬과 섬을 잇는 다리다. 낮이면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눈부심이, 밤이면 대교를 밝히는 아름다운 빛의 조명이 황홀한 풍경을 만들어낸다.케이블카가 각산 정상에 도착하면 각산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약 해발 400m에서 사천시와 삼천포대교, 한려해상국립공원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횃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수단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는 곳인 각산 봉수대도 전망대 바로 뒤에 위치해 있다. 봉수대는 높은 산봉우리에 봉화를 올릴 수 있게 설비해 놓은 곳으로, 과거 횃불과 연기로 적의 침입을 중앙에 알리던 군사 통신 수단으로 삼국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산 봉수대는 각산의 정산인 해발 408m의 고지에 있으며 수많은 자연돌을 모아 둥그렇게 만든 형태이다. 고려시대에 설치된 것으로, 남해 금산에 있는 구정봉의 연락을 창선 태방산을 거쳐 받았다. 사량도의 공수산 봉수를 고성 좌이산 봉수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사천시 관광진흥과 박용국 관광시설팀장“충분한 관광수익 올리는친환경 시설로 인정받아 ”- 사천바다케이블카만의 장점은.△바다구간 길이가 820m다. 즉 한려해상국립공원 위를 횡단한다. 이후 각산정류장까지는 산을 올라가기 때문에 바다와 산을 모두 지나갈 수 있어 누가 봐도 인프라가 뛰어나다. 사업비를 많이 들인 만큼 케이블카도 자동순환 2선식으로 지어져 매우 안전하다. 또한 바다 구간에는 지주를 박지 않아 환경적인 면도 고려했다. 1년 반 정도 운행하는 기간 강풍으로 인한 예방적 차원에서 잠시 케이블카를 세웠던 것 등의 조치를 제외하면 사고도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사천 관광에 많은 도움이 되나△많은 도움이 된다. 케이블카가 건설되고 나서 재래시장 등 지역 상인들이 관광객들이 많아졌다고 몸소 느끼고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워낙 방문객이 많기 때문에 숙박을 하지 않고 식사한 한 끼 해결하고 가더라도 엄청난 규모다. 케이블카 주변 땅값도 많이 올랐다.- 사업 추진에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환경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이슈가 있었으나 큰 반대가 있지는 않았다. 기존에 개발이 많이 됐던 곳이라 오히려 케이블카를 설치하길 주민들이 원했다. 바다쪽에 지주를 박게 된다면 바로 어민들이 반대에 나섰겠지만, 지주를 박지 않는 쪽으로 건설을 해서 이 문제도 해결했다.- 사업을 시작하는 지자체에게 한마디△케이블카는 누가 봐도 공해 시설이라고는 볼 수 없고 기본 목적이 운송이다. 외국 사례를 보더라도 주택가를 지나는 곳이 많다. 주민들이 노파심에 많은 걱정을 하는 것으로 안다. 지역에 대한 발전 등을 생각하면 대의적인 측면에서 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자체에서도 이를 적극 어필해야 한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2019-10-07

천혜의 경관이 계획된 관광인프라와 만나 세계적 명소 탄생

서울 면적의 채 두배도 되지 않는 1천100여㎢에 7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는 홍콩은 최근 잇따른 시위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도시지만, 원래는 아시아 금융과 물류 허브이자 쇼핑의 메카로 유명세를 떨쳐왔던 곳이다. 1841년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은 그 이유에서인지 중국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즉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1국 2체제라는 이름 아래 자치권을 누리는 지방행정구역이며, 현재까지도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제도와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 영토지만 역사적인 이유로 인해 많은 부분에서 중국 본토와 분리된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배 흔적이 남아있는 이러한 이질적인 모습은 한국을 포함한 다른 아시아 국가와는 차별된 많은 매력을 갖추고 있어 연중 수많은 외국인들이 방문하는 등 도시 전체가 관광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세계 3대 야경 중 하나로 꼽히는 마천루들의 모습,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홍콩 영화의 태생지, 중세 중국의 건축물 유적, 서양·중국·동남아시아가 혼재된 문화 등 많은 것들이 홍콩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대부분의 인파가 몰리는 곳은 흔히 홍콩섬과 홍콩섬 맞은편이자 중국 대륙과 붙어 있는 구룡반도다. 그러나 홍콩 국제공항이 위치한 란타우 섬도 ‘의도적으로’ 관광을 위한 각종 명소가 자리를 잡고 있다. 우선 디즈니랜드가 있으며, 그다음으로 옹핑360 케이블카를 중심으로 한 란타우 섬 일주 관광 코스가 대표적이다. 특히 옹핑360 케이블카는 홍콩을 1박 이상 머무는 관광객들이 들르기도 좋지만, 공항 인근에 위치하고 있어 비행기를 환승하려고 대기하는 방문객들이 잠깐 서너 시간 짬을 내 홍콩을 구경하기에 최적화됐다.한해 200만명 이상이 이용하고 있고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계속 흑자를 유지하고 있는 옹핑360 케이블카와 그 주변 관광지에 대해 살펴보면, 풍광은 돈을 주고도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계획된 관광 인프라가 맞물려야 관광객들이 매력을 느끼고 방문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란타우 섬 관광의 시작지 옹핑360 케이블카홍콩 란타우 섬은 1998년 국제공항이 생기기 전까지는 불모지였다. 그러나 공항 건설 이후 해변 휴양지인 ‘디스커버리 베이’, 유원지인 ‘홍콩 디즈니랜드’, 아시아에서 가장 긴 이중 케이블 선로를 사용하는 ‘옹핑 360’까지 들어서며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홍콩 내에서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느긋함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다. 란타우섬의 관광은 구룡반도를 통과한 지하철이 멈추는 퉁청역에서 시작하는데, 그곳이 바로 옹핑360이 위치한 곳이다.옹핑360은 퉁청역에서 출발해 포린사가 위치한 옹핑 빌리지까지 이동한다. 길이는 5.7㎞로 총 소요시간은 25분이다. 케이블카는 스탠다드와 크리스탈 두 가지가 있는데, 크리스탈의 경우 요금은 더 비싸지만 바닥이 유리로 이뤄져 발아래의 모습까지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5분이라는 시간이 얼핏 길고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란타우 섬의 다채로운 풍광은 그러한 걱정을 말끔히 씻어준다. 바다와 섬을 공중에서 바라보며 이동하는 경험은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다. 출발하면 가장 먼저 퉁청 개발 지역을 지나 자연 서식지이자 낚시·조개잡이로 잘 알려진 퉁청 해안이 눈에 들어온다.이 해안은 습지와 바다 식물의 독특한 조합으로도 유명하다. 이어 매일 약 1천100회의 비행이 이뤄지는 국제공항, 아시아 월드 엑스포가 먼 거리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50㎞ 길이인 홍콩-주하이-마카오 브릿지의 전경 또한 탁 트인 남중국해와 함께 어우러진다. 홍콩 란타우 섬, 마카오 반도와 광둥 지역의 주하이 시를 연결하는 이 다리에는 인공 섬과 해저 터널도 있다. 특히 란타우 섬 일대는 그 자체가 국립공원이라 케이블카 역시 친환경적으로 지어졌고, 그 덕분인지 잘 보존된 경관은 하이킹 코스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1978년에 설립된 22㎢ 면적의 이 공원에는 네이 락 샨과 옹핑 북부를 비롯해 선셋 픽, 이 퉁 샨, 리 파 샨, 란타우 픽 북부 경사로와 같은 꽤 많은 인기 하이킹 명소가 있다. 마지막으로 케이블카가 옹핑에 도착하기 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티안 탄 부처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옹핑360 케이블카와 연계된 란타우 섬 관광옹핑360 케이블카는 그 자체로도 관광상품이지만, 란타우섬 관광을 시작하는 출발지로서의 의미도 있다. 즉 케이블카만으로도 아시아에서 으뜸가는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주변 관광 인프라 역시 그에 못지않게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케이블카가 도착하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은 옹핑 빌리지다. 이 곳은 불교 테마 마을로 옹핑의 경치 좋은 자연에 동화되도록 설계·조경된 마을이다. 식당과 각종 기념품점 외에도 붓다의 길, 원숭이 극장 등의 볼거리가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옹핑 빌리지를 걸어서 조금만 지나면 바로 포린사가 나온다.홍콩 최대 규모의 불교 사원으로 바로 옆에 위치한 티안 탄 부처상(천단대불)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 부처상은 높이 26.4m로, 연꽃 좌석과 받침대까지 포함한 총 높이는 34m다. 250t의 청동으로 만들어져 12년 동안 주조됐으며,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야외 부처 동상이다. 관광 목적이 아니더라도 불교계에서도 유명해 세계 각지의 승려들이 많이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68개의 돌계단을 올라 3층 제단에있는 큰 불상에 도달하면 플랫폼에서 란타우 섬과 남중국해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포린사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이동하면 타이오라는 어촌 마을이 나온다. 타이 오는 홍콩에서 가장 오래된 어촌 마을로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수상 가옥들이 유명하다. 또한 핑크 돌고래가 출몰하는 인근 바다로 떠나는 돌고래 투어도 있다. 이 외에도 청사 해변, 홍콩의 유럽이라 불리는 디스커버리 베이 등도 들를만한 곳이지만, 란타우 섬 관광의 마지막은 시티게이트 아웃렛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옹핑360의 출발지인 퉁청역에 있는데 공항과 아주 가까워 입출국을 앞두고 방문하기에도 좋다. 아웃렛이라 가격도 크게 비싸지 않고 다양한 브랜드가 입점해 있으며, 대형슈퍼 TASTE도 있어 이를 구경하는 재미도 특별하다.□ 옹핑360 케이블카의 위상옹핑360 케이블카는 란타우 섬 관광의 처음이자 끝이며,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이동 수단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예약 없이 방문할 경우 짧게는 한 시간, 적어도 두 세 시간은 기다려야 탈 수 있을 만큼 인기도 있다. 이러한 모습은 케이블카 이동 구간마다 꽉 채워진 자연 풍광과 건축물들도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타 관광지와 유기적으로 연계된 프로그램의 역할도 크다고 볼 수 있다. 즉, 서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이런 부분은 케이블카의 매력이 더욱 빛을 발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케이블카는 무조건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아니다. 자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천혜의 경관을 전제로 하고, 거기에다 철저한 계획을 통한 주변 관광 자원과의 연계가 뒷받침돼야만 제 역할을 발휘할 수 있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2019-09-30

100m 상공서 감상하는 도심속 바다 지역경제 활성화 원동력 키워낸다

포항시가 ‘해양관광 1번지, 명품해양관광도시’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걸고 ‘바다’를 이용한 활발한 관광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특히 시는 지난 8월 관광특구로 지정된 영일만 일대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영일만 관광특구는 포항시 환호동에서 송도동을 잇는 약 2.41㎢(약 73만평)로 우리나라 관광특구로는 33번째다. 영일만 일대는 환호공원, 영일대해수욕장, 중앙상가 영일만친구 야시장, 죽도시장, 포항운하, 송도솔밭 도시숲 등 여러 관광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는 포항의 관광메카로, 연간 11만 명이 넘는 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이다. 관광특구는 현재 전국 32개로 경북도는 경주시(1994년), 울진군(1997년), 문경시(2010년)가 지정돼 있다. 경북 자체로 보면 문경관광특구 지정 이래 10년만으로, 영일만관광특구는 경상북도 내 유일한 도심 속의 바다를 끼고 있는 관광특구라 특별한 의미를 더한다. 포스코 야경과 국제불빛축제, 저렴한 가격으로 맛볼 수 있는 싱싱한 포항물회와 호미곶 해안선이 내려다보이는 ‘영일대해수욕장’ 일대는 우수한 해양관광 자원을 품고 있어 이번 지정으로 포항관광의 브랜딩 효과 및 대외 인지도를 높이고 새로운 관광트렌드에 부합하는 관광명소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이 중에서도 포항시는 영일대해수욕장 인근인 포항여객선터미널과 환호공원 전망대를 연결하는 총 길이 1.8㎞의 해상케이블카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영일만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리고 환경훼손이 없는 범위 내에서 바다 위 100m 높이에 해상케이블카를 설치해 아름다운 영일대해수욕장과 깨끗한 영일만 바다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해상케이블카는 이미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여러 사례가 많다. 이 중에서 성공적인 곳을 벤치마킹해 포항 해상케이블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진단해 본다.□ 선풍적인 케이블카 인기이달 초 다도해와 유달산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전남 목포 해상케이블카가 개통했다. 3.23㎞ 코스로 국내 최장 길이를 자랑하는 목포 해상케이블카는 왕복 40분이라는 탑승 시간 동안 유달산과 목포 앞바다, 목포대교, 다도해를 두루 감상할 수 있다. 모두 55대의 케빈이 시간당 1천200여명을 태울 수 있고, 이 중에서도 15대는 바닥까지 투명한 유리로 제작돼 발아래를 감상할 수 있는 장점도 갖췄다. 이를 반영하듯 추석 연휴 기간 총 3만명에 가까운 인원이 이용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케이블카 설치 열풍은 비단 목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전국에서 대유행처럼 번지며 지자체에서 너도나도 케이블카를 추진하고자 발벗고 나서는 상황이다. 어림잡아 전국 50여곳에서 관광 케이블카를 건설 중이거나 건설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이러한 인기는 통영 한려수도조망케이블카로부터 촉발됐다. 지난 2008년부터 운행을 시작해 10년 넘게 지역 관광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통영 케이블카는 해마다 140만명 이상이 찾고 있으며, 누적 탑승객은 올해까지 1천400만명을 넘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케이블카 열풍이 좋은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후죽순 난립하는 케이블카가 서로 경쟁하며 수익성이 떨어질 수도 있고, 만일의 경우 폐쇄되면 애물단지로 전락할 뿐만 아니라 환경 훼손의 가능성마저 있어 신중해야 한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일례로 부산 해운대와 이기대를 연결하는 해운대 해상케이블카 사업의 경우 찬반 논란으로 뜨거운 상황이다.이 사업을 둘러싸고 반대 측은 민자 사업에 대한 우려와 환경 훼손을, 찬성 측은 침체된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맞서는 상황이다.□ 포항 해상케이블카 설치 사업포항시는 해상케이블카 설치사업을 지난 2016년 말부터 준비해 왔다. 당시에는 영일대해수욕장 일원(포항여객선터미널∼환호공원 전망대)에 580억원의 민간자본을 투입해 2019년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현재는 시일이 일 년 가량 뒤로 밀린 상황이다.이에 포항시의회에서도 올해 6월 사업 현장을 방문해 “영일대 해상케이블카는 침체된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해양관광산업을 선도할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될 수 있도록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추진해줄 것”을 주문하며 신속한 건설을 요구하고 나선바 있다.시는 애초 영일만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리고 환경훼손이 없는 범위 내에서 해상케이블카를 설치해 바다 위 100m 높이에서 아름다운 영일대해수욕장과 깨끗한 동해를 한눈에 감상하고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을 세웠다.이는 대한민국 대표 해양도시인 경남 통영과 사천, 전남 여수 등이 해상케이블카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 큰 바탕이 됐다. 이들 해상케이블카 탑승객은 연간 120만명에서 많게는 200만명까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지역 경제에 미치는 파급도 큰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이처럼 포항지역에서도 해상케이블카가 완공되면 1천억원 이상의 생산·부가가치 유발효과와 약 1천400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포항시는 침체된 지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신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행히 산악케이블카보다 해상케이블카가 높은 수익을 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고, 성공사례도 해상케이블카가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포항의 해상 케이블카 사업은 일단 출발에서는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포항 해상케이블카 어디까지 왔나영일대 해수욕장 일원(여객터미널∼환호공원)에 추진되고 있는 포항 해상케이블카는 애초 계획대로 길이 1.8㎞, 높이 100m의 자동순환식 왕복 모노케이블카로 추진되고 있으며, 사업기간은 오는 2020년까지다. 총 사업비도 내진 적용기준을 1등급으로 상향하면서 최초 발표 당시보다 100억원 가량 증가한 687억원이 됐다.사업비 모두는 민자유치 방식으로 건설되며, 2017년 6월 제3자 제안 공모 공고를 통해 그해 9월 우선협상대상자로 대한엔지니어링(주) 컨소시엄이 선정됐다. 이어 진행된 수요예측과 재무모델 등 사업성 평가에서는 연간 128만명이 이용할 것으로 나타나며 사업에 청신호가 켜졌다.2018년 11월에는 포항해상케이블카 특수목적법인이 설립됐고, 이 법인은 2019년 5월 사업시행지로 지정 통보됐다. 8월에는 GS건설이 특수목적법인 지분의 60%를 사들이며 사업에 뛰어들었고, 이를 계기로 케이블카 건설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이달 들어서는 도시공원위원회 심의를 통과해 본격적인 사전 준비를 마쳤으며, 10월 중으로 궤도시설에 대한 실시계획인가를 거쳐 내년 하반기에는 준공할 것으로 예상된다.환호공원 쪽 탑승장은 해변공원 인근 두호동 42번지 일대로, 환호공원 내 해변공원은 동해를 조망하기 좋은 위치로 유명한 곳이다.여객선터미널 쪽 탑승장은 항구동 58-54에 위치한 여객선터미널 주차장으로, 여객선을 이용하는 고객이 배를 기다리는 동안 케이블카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복안이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포항시 관계자는 “케이블카 사업은 포항의 해양관광산업을 선도할 사업일 뿐만 아니라, 죽도시장·포항운하·크루즈·영일대 및 송도해수욕장 등 다수 관광지 시설과 연계해 관광산업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며 “특히 신규 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 활성화의 견인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2019-09-16

전시회·예술교육·체험까지 ‘원스톱’ 복합문화예술공간 세계 예술산업 새 기준점 제시

글 싣는 순서 1. 밀라노 예술가들의 성지 ‘토르토나’의 탄생2. 이탈리아 넘어 세계 최고를 꿈꾸다 ‘슈퍼 스튜디오 그룹’3. ‘두마리 토끼 한 번에’ 순천 문화의 거리4.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에서 가능성을 보다5. 자생적 문화생태계 구축을 향해 가야할 길□ 토르토나 지구를 문화예술지구로 만들다이탈리아 밀라노는 화려한 패션과 명품거리로 대변되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돼 있다.여느 성공한 도시와 마찬가지로 패션 1번지 밀라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존재했다.밀라노라는 도시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패션 1번지였고 100년, 200년 뒤에도 아무 노력없이 패션 1번지 자리를 사수할 수 있다면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다.이처럼 오늘날 밀라노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기업이 있다.이탈리아 최고의 문화예술기업 슈퍼 스튜디오 그룹(Super Studio Group)이다.슈퍼 스튜디오 그룹은 1983년 슈퍼 스튜디오 13(Super Studio 13)이라는 이름으로 토르토나 지구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슈퍼 스튜디오 13은 오픈당시 사진작가, 미술감독, 패션디자이너, 홍보전문가 등 문화예술산업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춘 사진스튜디오 13개로 구성됐다.독립적인 시설인 개별 스튜디오에 의상실, 분장실, 음향장비 등을 갖췄고 작품제작, 사진촬영, 홍보활동 등 모든 작업이 한 번에 가능했다.불과 2∼3년 만에 유명세가 퍼지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이 이 스튜디오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슈퍼 스튜디오 13은 세계 예술산업에 새로운 기준점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슈퍼 스튜디오 그룹 공동창업자인 플라비우 루치니(Flavio Lucchini)씨는 “처음에는 단순히 밀라노에서 유명한 사진작가를 모아 이들을 키워내기 위한 장소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며 “그런데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밀라노를 국제적인 패션도시로 만드는데 마중물이 되기로 하고 또다른 벽을 넘어서는 도전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 복합문화예술공간 ‘슈퍼 스튜디오 피우’슈퍼 스튜디오 13이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전시회, 예술교육, 체험활동이 가능한 복합문화예술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슈퍼 스튜디오 그룹 공동창업자인 플라비우 루치니와 지셀라 보리올리(Gisella Borioli)는 패션, 커뮤니케이션, 창조영역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체계적인 공간을 밀라노에 제공하고자 했다.이에 그들은 슈퍼 스튜디오 13에서 200여m 떨어진 장소에서 생산공장을 가동했던 미국계 전기조명업체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이 떠난 폐공장부지 1만7천㎡를 매입해 슈퍼 스튜디오 피우(Super Studio Piu)를 만들었다.슈퍼 스튜디오 피우는 현대적이고 다재다능하고 횡단하는 멀티 장소이자 패션, 예술,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문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활발한 사람들과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또한 밀라노 패션 위크(Milano Fashion Week), 밀라노 디자인 위크(Milano Design Week)로 대표되는 각종 행사, 전시회, 컨벤션, 박람회 등 대규모 행사 개최장소로 활용되고 있다.뿐만 아니라 사내 파티, 동호회 모임, 댄스공연 등 비공식적이고 소규모로 치러지는 행사를 위한 장소로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크기가 다른 공간들은 가구, 자동차, 광고 영화, TV촬영 등 어떤 종류의 서비스든 넓고 편안한 공간이 필요한 곳에 딱 맞는 공간이며 트럭형 입구 형태라 접근하기도 용이하다. □ ‘세계적 기업이 한 곳에’ 지상 최대 디자인 쇼슈퍼 스튜디오 그룹은 매년 4월 개최되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Milano Design Week)에서도 자신들의 진가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약 1주일간 진행되는 이 전시회에서 슈퍼 스튜디오 그룹은 지난 2015년부터 슈퍼 디자인 쇼(Super Design Show)라는 단독행사를 마련해 디자인 위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슈퍼 디자인 쇼는 예술과 디자인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크고 작은 글로벌기업의 제품을 새롭게 디자인하며 상품가치를 창출하는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회다.이탈리아 자국 기업 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중국, 프랑스, 덴마크, 일본, 벨기에, 영국 등 세계 20여개국에서 각 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기업들이 저마다 독특한 디자인으로 작품을 출품하고 있다.한국에서도 삼성과 LG가 슈퍼 디자인 쇼에 참여해 국가 위상을 드높였다.시대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이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2천명이 넘는 기자와 1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행사장을 찾고 있으며 불과 4년 만에 지상 최대의 디자인 쇼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치아라 페렐라 팔다(Chiara Ferella Falda) 슈퍼 스튜디오 홍보팀장은 “세계 트렌드를 이끄는 이탈리아 밀라노이지만 변화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없이 결과를 기대한다면 그 상태 그대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며 “지금까지도 충분히 성공적인 쇼를 보여줬지만 앞으로도 더욱 뛰어난 쇼를 만들기 위해 인도, 러시아, UAE 등 이전까지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의 기업을 유치하는데 주력할 계획이다”고 밝혔다.지셀라 보리올리슈퍼 스튜디오 그룹 창업자 인터뷰비전과 진심을 팔아라장기적 투자 바탕으로창작활동에 매진하라포항 꿈틀로,한국의 밀라노로재탄생할 것모두가 안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불가능해 보였던 도전을 성공적인 결과로 이끌어낸 그들은 이제 신화로 남게 됐다. 이탈리아 최고의 문화예술기업 슈퍼 스튜디오 그룹(Super Studio Group) 공동창업자인 지셀라 보리올리(Gisella Borioli·사진) 대표와 남편 플라비우 루치니(Flavio Lucchini)씨의 이야기다.이탈리아의 유명 잡지 클래스(Class)가 선정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으로 꼽힌 보리올리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나눠봤다.- 슈퍼 스튜디오 그룹의 창업배경은△남편이 패션잡지 보그(Vogue)의 창간인이자 편집장이었고 나 또한 패션관련 리포터로 근무하고 있어 패션, 예술, 디자인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패션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머리를 맞댄 결과 작품제작, 사진촬영, 전시회, 예술가양성 등 모든 과정을 한 곳에 모은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좋은 아이디어였지만 실행을 하기에는 부담이 컸다.주어진 돈이 많지 않았는데 밀라노 도심의 건물은 입주비용이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적당한 공간을 찾다보니 토르토나(Tortona)라는 옛 공장지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폐허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근처에 기차역이 있어 교통이 좋았고 건물임대료도 매우 저렴했다. 그리하여 슈퍼 스튜디오 그룹의 원조인 슈퍼 스튜디오 13(Super Studio 13)을 설립했는데 이곳에는 사진촬영공간, 의상실, 예술인 양성학교 등이 마련됐다. - 슈퍼 스튜디오 그룹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문화예술기업으로서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1999년 토르토나 구역 내에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공장 부지가 매각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정원과 테라스, 야외공간, 사무실, 창고가 있는 1만7천㎡의 넓은 공간이었지만 매각대금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은행에 대출을 시도했지만 뚜렷한 비즈니스 계획이 없다며 거절당했다.고민 끝에 투자설명회를 열어 당시 3천만유로라는 많은 투자금을 모았다. 우리는 투자자들에게 비전을 팔았고 그 진심이 통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매입한 건물에는 슈퍼 스튜디오 피우(Super Studio Piu)를 세웠다. 단순히 예술활동 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예술, 패션, 디자인, 엔터테인먼트 등이 모두 가능한 복합예술문화공간이 탄생했다.슈퍼 스튜디오 피우가 설립된 이후 토르토나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르마니(Armani), 펜디(Fendi) 등 유명 패션브랜드들이 줄지어 이곳에 쇼룸을 만들었고 크고 작은 공방들도 들어왔다. 오직 토르토나 만을 위해 일하는 컨설팅업체 토르토나 로케이션스(Tortona Locations)의 역할도 토르토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 슈퍼 스튜디오 그룹의 성공사례를 바탕으로 포항 ‘꿈틀로’에 조언을 부탁드리자면△슈퍼 스튜디오 그룹을 처음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4가지가 있다.엄격한 작품선정, 최상의 품질, 혁신적인 요소, 미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의 가장 끝부분에 연결돼 있는 단어는 예술이다. 아무리 뛰어난 쇼여도 예술적인 요소가 결여돼 있다면 그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더라도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슈퍼 스튜디오 그룹은 밀라노를 제작의 공간에서 창조의 공간으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장기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인내심을 갖고 창작활동에 매진한다면 꿈틀로도 포항이라는 도시를 창조의 공간으로 충분히 탈바꿈시킬 수 있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8-08-21

폐허가 된 공장에서 꽃 피는 예술… 세계 문화예술 허브로 재탄생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다.2차 산업인 철강산업을 기반으로 수십년간 성장하다 최근 철강산업 성장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항도 4차 산업을 재도약의 기회로 판단하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세계에서 3번째로 구축한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신약개발, 질병원인 분석, 신에너지 개발 등 부가산업을 창출할 전망이고 포항 수중로봇복합실증센터에서 개발 중인 수중로봇, 국민안전로봇 등은 산업뿐만 아니라 실생활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 새로운 먹거리 산업 중 하나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문화예술산업이다. 인류 역사상 문화와 예술은 대중의 소비 속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어왔다. 오늘날 이러한 문화예술적 콘텐츠를 산업화시킨 것이 바로 문화예술산업인 것이다.포항시도 지역에 문화예술을 부흥시키기 위해 지난 2016년부터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조성에 나서고 있다.아직까지는 시작단계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많지만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인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에 꿈틀로가 선정되면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본지는 이번 기획시리즈를 통해 문화예술이라는 콘텐츠를 활용해 침체된 구도심과 지역경제 회복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이탈리아 밀라노, 전남 순천 등 타지역 사례를 살펴보고 철강도시 포항이 문화예술도시로 재도약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해본다.글 싣는 순서 1. 밀라노 예술가들의 성지 ‘토르토나’의 탄생 2. 이탈리아 넘어 세계 최고를 꿈꾸다 ‘슈퍼 스튜디오 그룹’3. ‘두마리 토끼 한 번에’ 순천 문화의 거리4.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에서 가능성을 보다5. 자생적 문화생태계 구축을 향해 가야할 길□ 19세기 밀라노의 대표 공업지역이탈리아 북부지역 최대 도시이자 로마와 함께 이탈리아 경제를 이끌어가는 양대 축인 밀라노는 ‘패션의 본고장’이라는 수식어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평가받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20년 가까이 지내며 ‘최후의 만찬’을 포함한 수많은 작품을 남긴 도시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오랜 세월동안 세계의 문화와 예술을 선도하고 있는 밀라노이지만 정작 밀라노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지구 조나 토르토나(Zona Tortona)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이탈리아어 ‘조나(zona)’는 영어 ‘존(zone)’과 같은 의미이며 조나 토르토나는 곧 토르토나 지구를 뜻한다.밀라노 서남부에 위치한 토르토나 지구는 1865년 포르타 제노바역(Porta Genova)이 들어선 이후 외곽의 농촌에서 도심시가지 중 하나로 급성장했다.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농경지와 과수나무들이 자리잡고 있던 자리는 공장과 주택가가 대신하게 됐다. 토르토나 지구는 나빌리오(Naviglio)와 올로나(Olona) 두 하천에서 공업용수를 원활히 공급받을 수 있고 포르타 제노바역에서 유럽 전역에 화물운송이 가능하다는 뛰어난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1960년대 말까지 약 100년간 밀라노를 대표하는 공업지역으로 유명세를 떨쳤다.이 시기 철도회사인 안살도(Ansaldo), 생수업체 비슬러리(Bisleri), 조명업체 오스람(Osram), 식가공업체 네슬레(Nestle) 등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토르토나 지구에서 생산공장을 운영했다.그런데 1960년대 말 생산체계의 급격한 변화와 에너지 위기로 인해 토르토나 지구에 자리잡고 있던 기업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살도는 대부분의 생산라인을 제노바로 옮겼으며 많은 회사들이 다른지역으로 생산공장을 이동시켰다.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며 석유가격이 최대 4배까지 오르는 오일쇼크 사태가 발발하자 남아있던 공장들 마저도 문을 닫거나 해외로 생산시설을 빼냈다.토르토나 지구를 가득채웠던 거대한 공장 부지는 순식간에 폐허나 다름없는 공간이 됐다. 수만평에 이르는 부지가 한꺼번에 산업유휴시설화 되면서 일대는 우범지대로 전락했다.사람들이 떠난 거리는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고 각종 범죄가 급증하며 암흑도시처럼 변해갔다. □ 폐허로 변한 공장지역, 예술가들의 성지로 재탄생하다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토르토나 지구에 구원의 손길이 뻗친 것은 1983년.이탈리아의 유명 패션잡지 편집장 플라비오 루치니(Flavio Lucchini)는 패션전문기자이자 자신의 부인인 지셀라 보리올리(Gisela Borioli)와 함께 토르토나 지구를 찾았다.10년이 넘도록 폐건물로 방치된 포르타 제노바역 인근 옛 상들리에 제조공장을 살펴본 그들은 임대료가 저렴하고 접근성이 뛰어난 이곳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문화예술과 관련된 제품을 사진으로 촬영해 잡지, 광고, 홍보물 등에 활용하는 사업으로,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업이었다.사진작가인 파브리시오 페리(Fabrizio Ferri)도 사업에 참여하며 슈퍼스튜디오(Super Studio)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 업체는 오늘날 토르토나 지구가 밀라노를 넘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지구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1985년에는 유명 사진작가인 카를로 오르시(Carlo Orsi)가 비아 토르토나(Via Tortona)에 스튜디오를 마련하며 문화예술사업을 시작했고 같은해 루시아노 포르미카(Luciano Formica)도 비슬러리 제조공장의 일부를 개조해 자신의 작업장으로 만들었다. 1987년 또다른 사진작가인 지오바니 가스텔(Giovanni Gastel)은 자신의 작업실인 가스텔 앤 어소시에티(Gastel Associati)를 비아 토르토나(Via Tortona)로 옮긴 후 세계적인 패션작가로 거듭나게 됐다. 밀라노시는 1990년 철도회사인 안살도(ansaldo)가 사용했던 2만㎡ 규모의 대형공장 건물을 매입했고 이곳을 이탈리아에서 가장 웅장한 오페라하우스라 평가받는 스칼라극장(Teatro alla Scala)의 무대제작실로 활용하고 있다.대장장이, 목수, 세트 디자이너, 경치 기술자, 조각가, 의상 디자이너 등 150여명이 근무하는 이 무대제작실은 세트디자인, 의상디자인, 세트조립, 기계작업 뿐만 아니라 오페라 출연자들의 합창연습실과 공연 리허설을 위한 무대공간도 마련돼 있다.이밖에 1991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역작 ‘최후의 만찬’을 복원한 예술작품 복원전문가인 피닌 브람빌라 바르실론(Pinin Brambilla Barcillon)도 토르토나 내 비아 사보나(Via Savona)에 작업실을 마련하며 수많은 예술작품을 재탄생시켰다.유명 예술가들이 토르토나 지구에 하나 둘씩 입주하면서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젊은 예술가들도 덩달아 토르토나 지역에 입주를 희망하기 시작했다.오래된 공장 건물은 예술가들이 창의성을 발휘하는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노동자들이 출퇴근길로 이용하던 철도 선로는 패션모델의 런어웨이 무대가 됐다.근래에 들어서는 아르마니(Armani), 제냐(Zenga), 토즈(Tods)와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토르토나 지역에 쇼룸을 설치하고 안도 타다오(Ando Tadao),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이 지역 건축물을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하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토르토나 지역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예술문화 중심지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 세계 문화예술 허브 ‘토르토나’ 토르토나 지구는 2000년대 들어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전시회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브레라(Brera), 람브라테(Lambrate) 등 밀라노의 또다른 시가지와 함께 분산 개최하고 있다.토르토나 디자인 위크로 불리기도 하는 이 행사는 2004년 설립된 컨설팅업체 토르토나 로케이션스(Tortona Locations)의 주도 하에 매년 4월 열리고 있으며 전세계 160여개국에서 30만명이 넘는 방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행사 주관업체인 토르토나 로케이션스는 디자인 위크를 포함해 토르토나 지역에서 연간 10여회에 달하는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시기에 맞춰 점포 임대를 희망하는 기업 또는 개인에 대한 종합적인 카운슬링을 하며 토르토나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4㎡에 불과한 작은 가판대에서부터 3천㎡에 달하는 옛 공장건물에 이르기까지 입주 희망자들이 원하는 컨셉에 맞춰 짧게는 1주일에서 길게는 수개월 동안 작업공간을 임대해주고 있다.여기까지는 우리나라 부동산 중개업소들이 하는 일과 매우 흡사해 보일 수 있으나 토르토나 로케이션스는 단순히 건물을 임대해주는 것으로만 자신들의 업무를 끝내지 않는다.토르토나 지구에 입주한 사업자들이 사업설계, 세트디자인, 설비구축 등을 위해 지구 내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컨설팅업체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토르토나 지구 내 업체들 사이에서는 인적교류가 활발히 이뤄졌고 자연스레 예술가로 구성된 네트워크가 형성됐다.이렇게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토르토나 지구는 최근 또 한 번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토르토나 지구와 150년을 함께한 포르타 제노바역은 예전만큼 기차가 많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 100m 거리에 포르타 제노바 지하철역(Porta Genova FS)이 개통되며 기차역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대부분 기차가 인근 기차역인 산 크리스토포로역(San Cristoforo)에 멈춰서기 시작했다.밀라노시는 역 주변 공간을 공원으로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는 토르토나 지구의 흥망성쇠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토르토나 지구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조프(Zoff)씨는 “토르토나 지구는 산업단지를 문화예술지구로 변모시켰다는 역사적인 배경과 나빌리오 운하와 같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인접해 있는 장점 등이 복합돼 관광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며 “최근 밀라노 내 타지역에 토르토나 지구와 같은 문화예술지구를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토르토나 지구 만이 지닌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오랜 기간 동안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글·사진/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8-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