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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7.6 강진… 전국서 문화재 구조대 3900명 달려와”

단정민 기자
등록일 2025-09-02 18:19 게재일 2025-09-03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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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화마의 표적이 되다 <3>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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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 리츠메이칸대학교 전경.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노토반도 강타 600여명 숨지고
등록된 문화재만 460여건 피해

현장 투입 전문가•자원 봉사자 
불상•고문서 등 200여건 구출

1월 26일은 ‘문화재 방재의 날’
전국 사찰•성곽 소방훈련 시행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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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2일 일본 교토 리쓰메이칸 대학에서 열린 제19회 문화유산과 역사 도시 재해 저감 심포지엄 회의장으로 참석자들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 무너지는 돌담 앞에서
7월의 교토, 한여름 특유의 습한 바람이 국제회의장 문틈을 타고 들어왔다. 리쓰메이칸대 국제회의장은 한국과 중국, 일본 3개국의 학자와 관계자들로 가득했다. 제19회 문화유산과 역사 도시 재해 저감 심포지엄이 막을 올린 7월 12일 회의장의 분위기는 무겁고 진지했다. 불과 반년 전 일본 열도를 뒤흔든 노토반도 지진의 상흔이 여전히 생생했기 때문이다.

참석자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일본 발표자들에게 향했다. 피해를 겪은 당사자의 목소리가 앞으로 다가올 재난에 어떻게 대비할지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가장 먼저 연단에 선 이는 요시토미 신타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 교수였다.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문화재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기억"이라면서 "그러나 최근 재해의 빈도가 높아지며 이 기억을 잃을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회의장은 고요해졌다. 이어폰을 꽂은 통역사들의 속삭임만이 흘러나왔다. 참가자들은 눈을 내리깔고 메모지에 빠르게 펜을 움직였고, 누군가는 화면에 떠오른 피해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무너진 기와, 무더기로 쌓인 석재, 불에 그을린 목조 건물이 빔프로젝터에 비쳤다.

요시토미 교수의 발언은 경고이자 선언이었다. 일본은 수십 년간 방재 연구기관을 세우고 문화재 보호 시스템을 구축해왔지만, 최근 기후변화와 연쇄 재난 앞에서는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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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 발표자로 나선 한국, 중국, 일본 교수가 참석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노토반도 지진의 교훈
이날 가장 주목받은 발표자는 하라다 이시카와현 교육위원회 문화재과장이었다. 그는 단상에 올라 목례를 한 뒤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새해 첫날, 진도 7.6의 강진이 노토반도를 강타했다. 사망자는 600명을 넘었고 전파된 주택만 6000여 동에 달했다”. 

그는 스크린에 띄운 슬라이드를 가리키며 “한겨울 단수와 정전 속에서 주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흩어지고 버려지는 문화재를 볼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지진은 문화재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발굴 현장은 무너지고 옛 사찰의 불상은 기둥에 깔려 부서졌다. 이시카와현에 등록된 문화재는 국·현 지정만 881건, 시·정촌 지정까지 합하면 2400건이 넘는데, 무려 460여 건이 피해를 입었다. 돌담이 갈라지고, 목조 건물은 반쯤 주저앉았으며 수백 년 된 고문서는 빗물에 젖어 갈기갈기 찢어졌다.

하라다 과장은 "지진 발생 일주일이 지나도록 피해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주민은 차 안에서 추위를 견뎌야 했고 그 와중에 문화재는 폐기 위기에 내몰렸다”라면서 당시의 긴박함을 회상했다. 

이때 투입된 것이 ‘문화재 구조대’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전문가와 자원봉사자 3900여 명이 피해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무너진 집터에서 불상과 고문서를 꺼내 임시 보관소로 옮겼다. 구출된 건수만 200여 건. 박물관, 지자체, 연구자들이 함께 나선 전례 없는 협력의 장이었다.

하라다 과장은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직면한 한계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응급조치는 무료로 시행했지만, 본격 수리에 들어가게 되면 소유자의 부담이 크다. 생활 재건이 우선인 상황에서 문화재 복구는 늘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등록 문화재 문제도 이야했다. 등록 절차가 길어 피해가 나도 지원이 닿지 않는 경우가 많고, 앞으로는 지정·등록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청중석의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화재는 공공재이면서도 사유재산인 경우가 많아 보호와 소유의 경계가 늘 고민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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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 한편에 목조 문화재 방재와 관련된 사진과 설명이 전시돼 있다.

◇ 연구소에서 현장까지
일본의 문화재방재 정책은 1950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면 소유자와 지자체는 반드시 방재계획을 수립해야 하며 문화청은 내진 보강과 방화 시설 구축에 재정 지원을 한다.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는 그 정책을 연구와 현장으로 연결하는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충격을 교훈 삼아 2003년 설립한 이 연구소는 교토라는 역사 도시를 기반으로 전통 건축물의 내진 보강 기술, 시민 방재 훈련, ICT 활용 아카이브 구축 등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요시토미 교수는 특히 ‘시민 참여’를 강조한다. 매년 1월 26일은 일본의 ‘문화재 방재의 날’. 이날은 전국 사찰과 성곽에서 일제히 소방 훈련이 시행된다. 불을 피운 모의 훈련에서 주민들이 소화기를 들고 뛰어드는 모습은 이제 교토의 흔한 풍경이 됐다.

교토의 전통 가옥 밀집 지역에서는 ‘시민 소화전’도 설치됐다. 2024년 1월, 교토 니넨자카에서 발생한 화재가 대형 참사로 번지지 않은 것도 이 장비 덕분이었다. 주민이 직접 물을 뿌려 불길을 초기에 잡은 것이다.

일본은 문화재를 디지털로 보존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3D 스캔과 드론 촬영으로 기록을 남기고, 지진 위험 지역 문화재의 위치를 디지털 대장으로 관리한다. 노토반도 지진 때도 이러한 데이터가 신속한 대응에 큰 힘이 됐다. 

교토 심포지엄은 화려한 선언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재난을 겪은 도시가 흘린 눈물과 땀을 나누는 자리였다. 일본은 노토반도 지진을 계기로 문화재 구조대라는 혁신을 세웠고 국가·지자체·연구기관·주민이 함께하는 방재 체계를 다져왔다. 그러나 미등록 문화재의 사각지대와 소유자 부담 문제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번 심포지엄과 인터뷰는 분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문화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회의 기억이며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할 자산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경험은 한국에도 중요한 울림을 준다. 방재 없는 보존은 허상이고, 기억을 지키는 일은 국경을 넘어선 공동의 과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글·사진/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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