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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대경하모니카 아카데미, 하모니카 연주회 성료

(사)대경하모니카 아카데미(대표 이영자)는 지난 6월 21일 경산박물관 대강당에서 ‘이영자와 함께하는 하모니카 연주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번 연주회에는 이영자 대표가 출강 중인 △대구광역시노인종합복지관 △경산시 여성회관 △영천시 금호읍 행정복지센터 △롯데문화센터 율하점 등지에서 활동하는 하모니카 연주자 300여 명이 참가해 한 학기 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무대에서 선보였다. 이영자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어느덧 계절은 여름의 문턱, 6월에 들어섰습니다. 푸르른 자연과 시원한 바람이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이 좋은 날, 하모니카를 통해 여러분과 인연을 맺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동안 준비한 연주를 마음껏 펼치시고,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시길 바랍니다”며 참석자들을 격려했다. 이어 “더워지는 날씨 속에서도 건강과 행복이 가득한 유월 되시길 기원합니다”고 덧붙였다. 한편, 사단법인 대경하모니카 아카데미의 이영자 대표는 ‘사문진 피아노 100대 콘서트’에서 100인의 하모니카 연주단을 지휘하며 큰 호응을 얻었으며, 경산 단오제 행사에도 고정 초청을 받는 등 지역 하모니카 문화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지역사회에서는 그녀를 ‘하모니카 대모’로 부르며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보내고 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6-22

늦잠이 가져다준 선물, 경남 함양 여행

지난 5월 마지막 주 토요일, 엄마와 함께 경남 함양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다. 본래 계획은 신안으로 꽃구경을 가는 것이었지만, 주중 피로가 몰린 탓에 늦잠을 자게 되었고, 보다 가까운 여행지를 찾다가 함양으로 목적지를 급히 바꾸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주먹밥을 싸고, 마실 물을 준비한 뒤 내비게이션에 ‘대봉산휴양밸리’를 찍고 출발했다. 여행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유튜브에서 잠깐 본 대봉산 모노레일이 인상 깊어서 무작정 떠나 보기로 했다. 대봉산휴양밸리 주차장은 넓고 편리했으며, 주차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바로 매표소가 나왔다.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1시였지만, 아쉽게도 오전 시간대 모노레일은 이미 매진되어 오후 2시 30분 이후 탑승권만 남아 있었다. 아쉬워하며 탑승을 포기하자는 시민기자의 말에도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매표소 직원에게 주변 명소를 물어 ‘상림공원’에 가볼 것을 추천 받았다. 우리는 모노레일 오후 2시 30분 표를 예매하고, 차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상림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입구에 도착하자 연꽃, 양귀비, 네모필라가 화사하게 피어 방문객을 반겼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함이 아닌 화사함으로 바꼈다. 꽃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자연 속을 천천히 산책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공원 인근의 ‘산삼주제관’도 둘러보았다. 이곳은 함양의 대표 특산물인 산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전시 공간으로, 다양한 산삼 표본과 건강 측정 체험 기기도 마련되어 있었다. 손가락만 대면 스트레스 지수와 혈관 건강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시간에 맞춰 다시 대봉산휴양밸리로 돌아왔다. 식사를 따로 할 여유가 없어 아침에 싸온 주먹밥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오후 2시쯤 모노레일 탑승 구역으로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탑승 전 안전 교육을 받은 후, 모노레일 정원이 7명이라 함께 몸무게를 측정하는 커다란 체중계에 올라갔다. 한 승객이 “살을 빼고 올 걸 그랬네요”라고 말해 모두를 웃음짓게 만들었다. 모노레일을 타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차 안에 설치된 모니터에서는 대봉산의 역사와 정보를 영상으로 안내해주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정상에 도착해 ‘소원바위’를 구경했는데, 바위 주변에는 방문객들이 남긴 다양한 색의 소원띠지가 매달려 있어 장관을 이루었다. 소원띠지는 매표소에서 1000원에 판매되어 마음에 드는 색에 자신의 소원을 담아 걸 수 있다. 우리는 따로 띠지를 구매하지 않아, 바위에 손을 얹고 간절히 소원을 비는 걸로 대신했다. 내려올 때는 모노레일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어 올라갈 때보다 더 탁 트인 전망을 즐길 수 있었다. 풍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내려오는 시간은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매표소로 돌아온 우리는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기 위해 근처 맛집을 검색해 ‘오리불고기’ 식당으로 향했다. 오후 5시쯤 식당에 도착해 든든히 식사했고, 넉넉한 양 덕분에 남은 불고기는 포장해 집으로 가져왔다. 예정에 없었던 상림공원 방문 덕분에 아름다운 꽃을 감상할 수 있었고, 뜻밖의 선물이 된 하루였다. 참고로 상림공원에서는 매년 9월 ‘함양 산삼축제’가 열린다. 이 시기에 방문하면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더욱 풍성하니 참고해두면 좋다. 대봉산에서는 꽃이 많이 피지 않아 약간 아쉬웠지만,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나 꽃이 가득한 봄에 다시 찾으면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모노레일은 인터넷으로 사전 예약하면 대기 없이 바로 탑승할 수 있다. 공식 예약 홈페이지( http://www.hygn.go.kr/daebongvalley.web )에서는 모노레일뿐만 아니라 짚라인 등 다양한 체험도 예약 가능하다. 바쁜 일상 속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던 이번 함양 여행.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라 더욱 특별했던 하루였다. 마음 편히 웃고, 자연과 함께 여유를 느끼고 싶다면 함양 여행을 꼭 추천한다. /김소라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9

건강한 미래 위한 포항시 급식관리지원센터의 노력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는 지역마다 ‘어린이·사회복지급식 관리지원센터’를 설치해 영양사 고용의무가 없는 소규모 어린이 급식소와 노인·장애인 복지시설을 대상으로 위생과 안전, 영양을 고루 갖춘 양질의 급식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순회방문 지도와 급식소 컨설팅을 한다. 그러나 등록되지 않은 시설에서 불량급식 이슈와 식중독 사고 발생으로 ‘어린이 식생활 안전관리 특별법’을 개정해 소규모 어린이 급식소 등록을 완전 의무화 한다. 그 결과 모든 어린이들이 안전하고 위생적인 영양을 고루 갖춘 급식과 간식을 제공 받고 있다. 그러나 노인, 장애인 시설은 여전히 자율 등록으로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포항시Ⅰ어린이·사회복지급식 관리지원센터’는 한동대학교에 위치하고 있다. 센터에는 15명의 영양사가 사각지대에 놓인 포항지역의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을 위한 건강 증진에 힘쓴다. 소규모 급식소를 주기적으로 직접 방문하여 조리실의 위생관리 교육과 철저한 식단관리로 균형 잡힌 급식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며, 센터 내 쉼터에서는 소규모 급식관계자 대상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지역사회 행사에도 참여해 포항시민과 함께 안전도시 건설에 앞장선다. 또한, 센터는 IOT를 기반으로 식중독 위험 지수를 웹 서버로 전송하여 지속적인 원격관리가 가능한 식중독 예방시스템 ‘IOT 식중독 예방 지킴이’와 도형기 센터장(전 한동대학교 교수)이 직접 자문하고 있는, 식기구와 조리 표면을 긁어 채취한 세균을 배양하여 식중독 유무를 판별하는 ‘미생물 분석실’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을 보유한 곳은 포항시 관리지원센터가 유일하다. 센터는 아토피, 식품알레르기, 성조숙증, 편식으로 인한 저체중, 비만 등의 아이들을 상담하고 이를 개선할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활동을 통해 올바른 식습관 형성에도 힘쓴다. 그 중 ‘뉴트리 튼튼 프로젝트’ 사업은 채소편식예방을 위한 활동으로 지역 농가와 협업하여 개발한 콩나물, 버섯, 토마토 재배키트를 가정에 보급하여 아이가 직접 기른 채소로 콩나물 잡채, 토마토버섯피자 등을 요리해 먹는 과정을 담은 사진과 영상을 시상하는 후기 공모전 등으로 편식을 개선해 나간다. 김미경 총괄팀장은 “센터의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통해 식생활이 개선되어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 가장 뿌듯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방 중심의 사업에는 늘 예산이 부족하다. 인력 부족으로 한 명의 영양사가 20여 곳을 책임지고 있으며, 식약처에 고용된 영양사들의 인건비는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어 봉사정신을 갖지 않으면 지속이 어려운 직업이다. 특성화 사업도 예산 부족으로 축소되기 일쑤다. 그리고 보다 많은 시민의 접근성과 활용도를 고려할 때 센터가 많은 사람이 오가는 포항시청 청사에 위치해 있다면 일반 시민도 건강자료나 프로그램 등을 보다 쉽게 접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결혼이 퇴직으로 이어지던 시절, 육아와 집안일은 당연히 여성의 몫이었다. 그러나 양성평등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으며 어린이 보육 및 돌봄 시설이 폭증하고 영양사 고용 의무가 없는 소규모 급식소의 주먹구구식 식단표와 불량식품 등으로 인한 식중독 사고가 급식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육아가 더는 엄마 혼자만의 몫이 아닌, 부모와 국가가 함께 책임지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라는 것은 그 나라의 미래이며 국력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애쓰는 그들이 있어 밝고 건강한 우리 사회가 지속되고 있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9

제7회 산남의진 무명삼인의병(無名三人義兵)의 넋 기리다

지난 6일 제70회 현충일을 기념하여 (사)최세윤 의병대장기념사업회(이사장 이상준)가 주관하고, 일월충의회(회장 박승대)의 후원으로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 1467-3에 위치한 ‘산남의진항일순국무명삼인의사총(山南義陣抗日殉國無名三人義士冢)’에서 ‘제7회 산남의진 무명3인 의병 호국열사 추모제’ 가 거행되었다. 이 행사에는 상옥리 주민들과 기념사업회 이사 및 회원들, 그리고 일월충의회 회원 등 20여 명이 참석하여, 이름 없이 사자려간 세 명의 의병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며 그들의 넋을 추모했다. 이 장소는 1907년 11월, 산남의진의 제2대 의병대장 정환직이 체포된 곳으로, 당시 대장을 호위하던 세 명의 의병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순국하였다. 일본군은 이들의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한 뒤 버려두고, 대장을 대구로 압송하여 영천 남교(南郊·현 영천시 창구동 조양각 부근)에서 총살하였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세 명의 주검은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한 후, 마을 주민들이 3기의 무덤을 조성하였으나 오랫동안 돌보는 이 없이 가시덤불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1965년경, 윤광열, 박두수, 손용익 등 상옥리 주민들이 이 무덤들을 돌보기 시작했지만, 1995년 도로 확장 공사로 인해 3기의 무덤이 합장되어 이장하여 오늘에 이른다. 추모제는 2019년부터 매년 6월 6일에 상옥리 주민들과 관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어 왔다. 이 날에도 윤광열, 박두수 등 여러 어르신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윤광열 옹은 “이곳에 묻힌 분들은 의병운동 중에 순국한 분들이며, 이름도 알 수 없고 가족들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우리가 직접 벌초를 하며 돌보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의 희생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최근 들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입니다”라고 전했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추모제에 참석하시는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년에도 그분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간절히 바란다. 최근에는 ‘포스코 문화유산 돌봄봉사단’에서 도로변에 안내판을 설치하여,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작은 변화가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고 기리는 데 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순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9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을 찾아서

호국보훈의 달 6월이다. 현충일을 시작으로 6·25 전쟁과 제2연평해전이 있어 우리가 기념해야 할 날들이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포항시 북구 탑산길 14)으로 올라서는 시민기자의 발걸음도 왠지 모르게 경건해졌다. 학도의용군은 학도병이라고도 부른다. 학생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한 병사로 보통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의 소년병을 말한다. 학생이었던 이들이 75년 전, 6·25 전쟁에서 교복 대신 군복을 입고 펜 대신 총을 든 이들이 겪은 전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으로 들어서니 전시실 입구 오른쪽에는 앞서 다녀간 이들이 적은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이들은 대부분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지 않겠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입구 왼쪽에선 학도의용군들의 전장에서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도 보였다. 같은 날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을 찾은 군복을 입은 20대 초반의 군인도 앳된 얼굴인데 사진 속의 학도의용군은 더 어린 나이였다. ‘1950년 8월 그날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지나니 학도의용군 마크 아래에는 학도의용군 자녀와 제주특별자치도 재향군인회에서 보내온 화환이 놓여 있다. 전시실은 학도의용군의 사진과 이름이 함께했고 이들의 희생과 애국의 정신을 새겨 기억하는 이야기가 적혔다. 학도의용군의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포항여중 전투는 ‘11시간의 용기’라는 제목을 달고 이들의 단독전투였다는 설명과 전투 모형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학도의용군 71명. 이곳에서 치열했던 전투와 이들의 희생으로 사람들이 피난 갈 수 있었고 군대는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고 하니 마음이 뭉클해진다. 전시실 한쪽에는 군장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수통을 매단 군장을 직접 메어보니 묵직했다. 무게가 20kg 정도 되어 보였다.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관계자는 “학생들이 방문하면 실제로 전장에서의 느낌을 전하고자 군장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실에서 무엇보다 마음을 울리는 건 학도의용군 이우근의 어머니에게 전하는 편지다. 어린 학생의 시선으로 전쟁을 겪고 있는 실제 상황과 집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편지에 그대로 전해진다. 이 편지는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또 생존자들의 인터뷰도 들을 수 있는데 후세들에게 애국심을 함양하고 국력 신장을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전시실을 나와 역사의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충혼탑과 전적비가 세워진 걸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의 계단을 오르기 전 어머니의 동상을 먼저 만났다. 돌에 새겨진 학도의용군의 사진과 전쟁에 아들을 보내놓고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충혼탑과 전적비는 어린 영혼들이 명복을 빌고 전사한 군인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특히 충혼탑은 학도의용군들이 자신들이 지킨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있어 그 의미가 깊었다. 전시실이 작기는 하지만 외부의 충혼탑과 전적비, 전망대를 보며 길지 않은 시간에도 학도의용군을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학도의용군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은 포항 시내에서 가까워 잠깐 시간을 내어 들러보기 좋다. 또 아이와 함께 가기 좋은 의미 있는 곳을 찾는다면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월요일은 휴관이다.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7

재즈페스티벌로 칠포가 들썩였다

칠포가 들썩였다. 제19회 재즈페스티벌이 6월 14과 15일에 열렸기 때문이다. 토요일 표를 어렵게 구해 처음 참여해 보았다. 며칠 전부터 준비물이 무엇이 필요할까 싶어, 지난 공연을 경험한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돗자리를 준비해라, 오래 잔디에 앉아 있으려면 힘드니까 등받이가 있는 앉은뱅이 의자가 필요하다 했다. 그늘이 없으니 양산도 필수라고 덧붙였다. 좋은 자리에 앉으려면 오후 4시 시작이지만 오후 1시까지는 가야 할 것이고, 길게 줄을 서야 하니 편한 복장으로 가라고 했다. 콘서트는 여러 번 가보았어도 페스티벌은 처음이라 설레고 걱정도 함께였다. 티켓은 오픈하자마자 매진이었으니 사람들로 북적일 거란 생각에 오전 11시에 출발했다. 일회용기는 반입이 안 된다니 집에서 용기를 챙겨 김밥집을 들른 다음 치킨집을 찾았지만, 아직 모두 영업 전이었다. 소풍에 치킨이 빠지다니 아쉬웠지만 시간이 금방 지나서 오후 1시가 가까워졌다. 줄이 길어질까 걱정이 앞서서 칠포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티켓을 손목팔찌로 교환하기 위해 줄이 길다. 오래 기다리며 바로 앞에 선 사람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인천에서 새벽 5시에 나섰단다. 라인업의 세 번째 밴드 이승윤의 팬이라고 입고 온 티셔츠를 자랑했다. 긴 줄에서 콘서트마다 만나는 동료 팬을 만나 반가워하기도 하고, 대형버스로 멀리서 함께 행사장을 찾는 모습에 덕질이란 저런 것이지 싶었다. 가수 이승윤은 무대에서 힘이 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비가 와서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하게도 오후 1시부터 파랗게 하늘이 보이고, 그 위로 곤륜산에서부터 행글라이더에 메달린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도 들렸다. 2시간을 줄 서서 기다리다 행사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대 바로 앞 스탠딩 좌석은 공연 6시간을 서 있기엔 자신이 없었다. 그다음 돗자리석이 명당인데 6시간 좌식 또한 힘들 거 같아서 잔디가 끝나는 맨 앞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다들 따가운 햇살을 피하는 모습이 영화 이티처럼 수건을 뒤집어쓰거나, 애순이 스타일로 손수건을 감싸기도 했다. 차로 달려가 커다란 우산을 들고 와 펴니 뜨거운 태양이 가려졌다. 하지만 오후 4시 공연이 시작되자 우산은 일시에 접어 시야를 가리지 않게 했다. 지소쿠리클럽이 첫 문을 열었고, 그다음 하동균의 노래 솜씨를 들으며 저절로 고개를 흔들어 박자를 맞추었다. 함께 간 지인은 이승윤의 찐팬이라 공연 내내 ‘싱어게인’에 처음 등장한 장면부터 그의 이력을 귓속말로 알려주었다. 오늘 처음 안 사실은 이승윤의 노랫말이 너무 멋지다는 것이다. 폴킴이 등장할 때, 바다 쪽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공연을 보기에 더없는 날씨였다. 모든 날 모든 순간을 합창하고, 커피 한 잔 할래요 하는 폴킴의 프로포즈에 핸드폰의 라이트를 켜서 화답했다. 사이사이 김밥을 먹고 핫도그도 사 먹었다. 반대편에 설치된 화장실은 깔끔해서 즐거운 페스티벌이 되도록 힘을 보탰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더운 날씨 탓인지 맥주를 파는 곳에 줄이 구불구불하다. 애주가 남편은 술은 공연 끝나고 집에서 먹자며 줄 서기를 포기했다. 그러는 사이 주위는 깜깜해졌다. 기다리던 에픽하이의 순서다. 내내 의자에 앉아 보던 우리였지만, 에픽하이 공연은 스탠딩이다. 앞으로 가서 사람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손을 높이 들고 뛰어 올랐다. 마지막 곡까지 모두 함께 불렀다. 공연이 끝나고 돗자리를 걷은 자리가 깔끔하다. 좋은 공연은 라인업도 좋아야 하고 관객 또한 수준이 높아야 한다. 오늘 공연이 그랬다. 다만 재즈페스티벌이라는 이름에 재즈 가수가 첫 공연에 없어서 아쉬웠다. 주차장이 부족한 것 또한 주최 측이 고민할 문제이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7

역사로 사라진 구름 위 누각 ‘고운사 가운루’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 자락에 있는 고운사는 681년(신라 신문왕 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연꽃이 반쯤 핀 모양의 천하명당에 자리한 고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안동을 비롯해 의성, 영주, 봉화 등에 있는 60여 사찰을 관장하고 있다. 원래 고운사(高雲寺)였으나 신라말 대학자 최치원이 여지 대사, 여사 대사와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고운(孤雲)을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천년고찰 고운사는 지금 극락전, 약사전, 가운루, 우화루, 연지암, 연수전 등에 대한 복원불사 모금을 진행 중이다. 지난 3월 경북을 덮친 산불에 소실됐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인 가운루, 연수전 등이 불타고 대웅전, 일주문, 사천왕문 등은 다행히 무사하다. 가운루는 ‘구름 위의 누각’이라는 뜻이다. 처음 지을 때는 ‘가허루’라 하였다가 역시 최치원의 영향으로 ‘가운루’로 바뀌었다. 계곡 위에 우뚝 서 있는 팔작지붕의 중층 누각으로 후대에 보수공사를 하며 부분적인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1층 아래쪽을 지나서 들어갈 수 있었으나 앞에 가운교를 설치하면서 2층 누각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1966년 고운사로 소풍을 간 안동고등학교 학생들은 당시 가운교가 세워지기 전이라 1층 아래쪽으로 출입했었다. 당시 안동 지역 학생들에게 봉정사, 고운사, 도산서원, 백운정 등은 단골 소풍 장소였다고 한다. 이동 수단이 마땅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래서 그 옛날 소풍을 ‘원족(遠足)’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보물로 지정되기 전 가운루에서는 이젤 위에 그림이 얹어져 있기도 하고 기왓장에 그린 그림이 깔려있기도 하는 등 그림 전시도 진행되곤 했다. 종각 방향으로 의자를 놔두고 풍경을 감상하고 자연의 정취에 잠시 젖어있기에도 좋았다. 아침저녁 예불에 어김없이 소리를 내던 범종은 지금은 화재로 금이 가고 말았다. 지금도 고운사는 지역민에게 언제든 편히 갈 수 있는 힐링 장소임에 변함이 없는데, 아름다운 구름 위의 누각을 이제는 볼 수 없다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복원한다고 해서 그 낡고도 예스러운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운 세월의 흔적을 되살릴 수 없을 테니 더욱 그러하다. /백소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7

영남대 출신 천마문인협회 모교서 첫 문학투어

영남대학교 출신 동문 시인·소설가·수필가·아동문학가 등 문인들은 학연이라는 인연으로 만나 문학적 영역과 활동을 넓히기 위해 지난해 12월 천만문인협회 발기인 대회를 가졌다. 이어 올해 3월 천마문인협회 창립총회(준비위원장 손동락·69학번)를 가진 뒤 회장단을 구성했다. 회장에 김종근(76학번 국어국문학과), 부회장에 김선왕·김숙이·류시경·손동락·정춘자씨, 사무국장에 이상일씨를 선임했다. 천마 문인협회는 이사회를 개최하고 영남대 출신 문인들을 수소문해 찾아냈고 회원들의 동의 아래 60여 명의 명단을 확보했다. 이사회 결정에 따라 올 6월 영남대 캠퍼스 및 압독국 고분 투어를 실시하기로 했다. 지난 13일 영남대학교 캠퍼스에서 천만문인협회는 뜻깊은 첫 행사를 진행했고 이날 행사 명칭을 영남대 천마문인협회 문학 투어로 지었다. 이날 행사는 오전 9시 20분 영남대 천마지문 앞에 집결하여 교내버스로 민속촌으로 이동해 2km 정도의 벚꽃 길을 걸었다. 이어 민속촌 내 구계서원으로 이동하여 회원들 각자 소개 시간을 가졌다. 중식을 마치고 박물관 강당으로 이동하여 학교 홍보영상을 보고 나서 해설사의 설명을 곁들인 박물관 관람시간도 가졌다. 마지막엔 희망자에 한해 경산 임당유적 전시관에 들러보는 관람을 끝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김종근 회장은 “영남대 동문들이 결성한 천마문인협회가 창립총회를 가진뒤 모교 방문을 첫 행사로 함으로써 단합과 결속 또 소속감을 고취시키기는 계기가 됐다”고 소회를 말했다. 천마문인협회 회원들은 이날 행사를 통하여 지나간 세월 속에 많이 변한 학교 주변을 살펴보고 학교 내 환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관찰하는 기회도 가졌다. 이상일 사무국장은 영남대 출신으로 문단 활동을 하는 회원이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여 천마인으로서 자존감을 가지는 모임인 만큼 문인으로 활동하는 동문들의 천마문인협회 입회를 권유했다. /권영시 시민기자

2025-06-15

대구 최초 ‘노인종합복지관 개관 30주년’ 맞았다

대구광역시노인종합복지관(관장 전용만)은 개관 30주년을 맞아 지난 9일 복지관 강당에서 ‘30년의 신뢰, 함께 여는 미래’를 슬로건으로 기념식을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대구 노인복지의 역사와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30년을 함께 설계하는 의미 있는 자리로 마련됐다. 기념식에는 김태운 대구광역시 보건복지국장, 정일균 대구광역시의회 문화복지위원을 비롯해 지역 노인복지기관 관계자, 자원봉사자, 복지관 회원 등 100여 명이 참석해 뜻깊은 시간을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복지관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담은 영상과 기념 퍼포먼스를 통해 지난 30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축하와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대구노인종합복지관은 1995년 6월 9일, 대구 최초의 노인복지관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노인복지에 대한 인식과 인프라가 부족했던 시절이었지만, ‘창조하는 노후’라는 운영 이념 아래 끊임없이 변화하고 도전하며 대구 노인복지의 선도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는 하루 평균 약 1100여 명, 연간 27만 명이 넘는 어르신들이 복지관을 이용하고 있다. 여가·건강·배움이 어우러지는 통합형 복지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약 60개에 달하는 취미·여가 교실, 평생교육 프로그램, 건강 특강 등은 은퇴 이후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복지관의 또 다른 특징은 회원 중심의 자율적인 운영 시스템이다. 지역 내 복지관 중 유일하게 운영되고 있는 ‘총학생회(회장 차세희)’는 회원 스스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참여를 독려하는 자치기구다. 큰나무봉사단(단장 정병진)은 어르신들이 주체적으로 복지관을 만들어가는 문화 조성에 기여하고 있다. 이 외에도 복지관은 취약계층 어르신을 위한 모금 활동과 사회공헌 프로그램, 지역사회 연계 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복지의 사각지대를 줄이고, 모두가 함께하는 노후 공동체를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이번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복지관은 9일부터 13일까지를 ‘개관 30주년 기념주간’으로 지정하고 다채로운 행사를 벌였다. 어르신 가요제를 비롯해 건강과 복지를 주제로 한 ‘어르신 골든벨’, 전문가와 함께하는 ‘대구 노인복지 세미나’ 등은 복지관 이용자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함께 소통하는 축제의 장이 됐다. 30년이라는 시간은 한 기관이 지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신뢰를 쌓아온 증표다. 대구시노인종합복지관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어르신들과 함께 웃고 울며 성장해왔다. 이제 복지관은 다음 30년을 향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복지사 김순업 과장은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더 많은 어르신들이 존엄하고 행복한 노후를 누릴 수 있도록, 복지관은 앞으로도 지역과 함께 발맞춰 걸어갈 예정이다” 라고 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6-15

대구근대역사관, 9월 7일까지 ‘이육사 특별전’

옛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건물, 지금의 대구근대역사관에서는 2025년 특별기획전으로 ]백마 타고 온 초인, 대구 이육사'를 4월 30일부터 9월 7일까지 2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하고 있다. 대구근대역사관은 올해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일제강점기 대구사회의 일면과 주요 인물, 사건들을 소개하는 특강과 전시를 병행 진행하고 있다. 이번 특별기획전은 민족 시인이자 독립투사인 이육사(1905-1944)의 생애를 조명하고 그가 순국하기 직전까지의 시대상황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육사는 40년의 생애 가운데 가장 피 끓는 시기를 대구에서 보냈다. 우리 민족이 처한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의식을 글로 표출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한 곳이 대구다. 민족시인 이육사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이육사의 독립운동에 대해 이번처럼 상세하게 기획 전시돼 소개되는 것은 처음이라 한다. 대구에서 시작된 이육사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삶과 당시 대구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어 대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전시는 총 3부로 구성됐다. 1부 ‘대구 사람이 된 이육사’에서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안동에서 나고 자란 이육사와 가족이 대구로 이사를 온 이후 대구 생활, 당시 그가 목격한 대구사회의 모습과 6형제의 활동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영천 처가에서의 백학학원 수학(修學)과 교사 생활, 일본과 중국 유학 등에 대해서 전시하고 있다. 2부 ‘대구에서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서다’는 이육사가 1925년부터 달성공원 앞에 있던 조양회관에 출입하며 사회단체에 가입하고 민족운동을 펼친 사실과 1927년 10월 ‘장진홍 의거’에 연루되어 1년 7개월 간 옥살이한 일이 소개된다. 이때 받은 수인번호 ‘264’를 ‘대구 이육사’라는 이름으로 사용하며 독립운동의 의지를 다졌던 내용도 소개된다. 그리고 이육사는 대구에서 2년 가까이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대구사회와 전통문화, 전통놀이 등에 대한 글을 통해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는데 이런 사실들이 기록된 당시의 신문기사와 사진 자료, 편지 등이 전시되고 있다. 3부는 ‘독립투사, 민족의 별이 되다’편. 1932년 4월 대구를 떠나 중국에서의 무장투쟁을 위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다니고 이후 다시 서울에서 활동, 마지막 베이징에서 독립투사로 활동하던 당시의 모습 등이 편지, 사진 등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이육사의 친필 원고와 1927년 10월 장진홍 의거와 관련된 신문기사, 이육사가 관심을 가진 대구 약령시와 전통놀이인 장(杖)치기에 대한 기록, 2024년 새롭게 발견된 이육사의 신문 기고 등 그동안 대구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자료들이 많이 소개된다. 이번 전시 기간에는 특강, 답사, 어린이 체험학습 등 연계행사도 계획돼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를 좋아하고 알지만, 이육사의 독립투사로의 활동, 대구와 이육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안다. 이번 특별기획전을 보면서 독립투사 이육사의 대구 속 발자취를 다시 더듬어 보고, 이를 통해 당시 이육사가 마주했던 대구사회의 일면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안영선 시민기자

2025-06-15

700년의 잠을 깨운 꽃, 함안의 아라홍련

작년 7월 언론 기관에서 생소하면서도 정겨운 소식이 흘러나왔다. 경남 함안에서 ‘아라홍련’이 만개했다는 소식이었다. ‘아라’라는 말은 그 어감만으로도 아름답고 고풍스럽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홍련이 700년 전 연꽃 씨앗에서 발아해 피어난 꽃이라는 사실이다. 아라홍련은 2009년 함안 성산산성 내 연못에서 출토된 18개의 씨앗 중, 이듬해 8개의 씨앗이 파종되었고, 그중 3개가 꽃을 피웠다. 7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씨앗이 다시 생명의 숨을 쉬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함안군은 이 연꽃에 아라가야의 이름을 따 ‘아라홍련’이라 명명했고, 이를 기념해 ‘함안연꽃테마파크’를 조성했다. 테마파크는 함안군 가야읍에 있다. 홍련 단지를 비롯해 산책로, 전망대, 분수대, 쉼터가 조성되어 주민들의 문화생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아라홍련은 꽃잎 아래쪽이 백색, 중간은 선홍색, 끝은 홍색으로 물들어 고려시대 불교 탱화에 자주 등장하는 연꽃과 흡사하다. 수련과 백련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단조롭지 않고 감상의 즐거움도 배가된다. 홍련의 씨앗이 출토된 성산산성은 해발 140m 남짓의 낮은 산에 조성된 가야시대의 산성이다. 둘레는 약 1.4km이며, 사적 제67호로 지정되어있다. 성 안에는 연못 흔적이 남아 있고, 씨앗이 출토된 지점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 산성을 오르면 성 안의 넓은 평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던 가야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성산산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아라가야의 왕족이 잠든 말이산 고분군이 있다. 이곳은 사적 제5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구릉지에 조성된 160여 기의 고분이 장관을 이룬다.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도굴되었지만, 현재도 일부 고분은 발굴 중이다. 고분 아래에는 아라가야의 문화유산을 전시하는 함안박물관이 자리한다. 석양이 내려앉은 테마파크를 다시 찾았다. 저녁 햇살을 받아 빛나는 아라홍련은 여전히 고고한 자태로 피어 있었다. 수련은 잎을 오므리고 있었지만, 아라홍련은 마지막까지 함안의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테마파크를 떠나는 발걸음 뒤로 아라가야의 기억이 연꽃 향기처럼 남아 맴돌았다. /김성문 시민기자

2025-06-15

모내기가 소중한 이유

고요해 보이는 들녘에 어느 순간 물이 차는가 싶더니 노을 지며 어둠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와글와글 논 개구리 소리 요란하다. 모내기가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이다. 논농사는 볍씨 싹을 틔우기 위해 모판 작업을 하는 4월 중순부터 시작된다. 모판 작업을 한 못자리를 논에서 한 달 정도 키운 것을 모(苗)라고 한다. 이를 밤 기온이 오르는 5월 말 즈음하여 논에 옮겨 심는 것이 모내기다. 소를 이용해 써레질한 논에 물이 가득 채워지면 논을 가로지른 기다란 줄이 놓이고 두 사람이 양쪽 끝에서 맞잡는다. 무르고 질퍽이는 논에서 뒤뚱거리던 사람들은 줄 따라 일렬로 서서, 모판에서 모를 쪄 한 움큼씩 묶어 던져 놓은 것을 들고 허리 숙여 줄 표시에 맞추어 열심히 심는다. 양끝 줄잡은 이가 서로에게 어~이! 하고 외치면 다 심었다는 뜻으로 같이 줄을 들어 적당한 간격으로 옮겨 꽂는다. 그렇게 모는 일렬로 반듯이 열을 지어 심겨진다. 모내기의 백미는 논둑에 둘러앉아 먹는 새참으로 그 국수와 막걸리 맛은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무거운 새참 이고 팔을 휘저으며 바삐 걷는 엄마 따라 고사리 같은 아이 손에도 막걸리 주전자가 쥐어지고 목줄 풀린 강아지도 덩달아 바쁘게 꼬리 흔들며 부산스레 널뛰는 일손 부족한 농번기에는 서로 품앗이로 온 동네가 들썩인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된다. 한창 모내기로 바쁠 시기임에도 보이는 들녘은 고요하다. 세상이 달라져 모판을 등에 업은 이앙기가 탈탈거리며 물 찬 논 위를 왔다 갔다 열심히 모를 옮겨 심는다. 써레질하는 소도, 새참 이고 오는 이도, 막걸리 주전자를 든 아이도 강아지도 보이지 않는다. 농부는 이앙기 잠시 세워두고 식당을 찾는다. 회사를 다니면서 주말에만 농사일을 한다는 박상환(61·경주시 내남면 덕천리)씨 곁에서 딸이 일을 도운다. 기계가 일을 다 한다지만 사람 손길 필요한 잔일이 많다. 이앙기에 모판을 나르고 비워진 모판을 치워주는 일 등으로 바쁜 농번기에 인력 구하기가 힘들어 타지에서 직장 생활하는 자녀를 주말마다 불러 내린다는 그는 푹푹 빠지는 무른 논 위를 걸어 다니며 하는 평토작업이 가장 힘들단다. 또 다른 벼 재배방식으로 볍씨를 직접 파종하는 것인데 올해는 승용 직파기를 따로 준비해 처음으로 직파기에 볍씨와 비료를 나눠 싣고 물을 뺀 무른 논에 직접 파종도 했단다. 이앙기의 모내기와 직파기의 볍씨 파종. 두 재배방식의 수확 차이는 가을에 답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힘들지만 재밌기도 하다는 그의 주변으로 이앙기를 기다리는 찰랑찰랑 물 찬 논이 아직 많이 보인다. 쉴 틈이 없다. 한 나라의 자립은 농사에 달려있다. 모든 농산물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은 지금 곡물 자급률이 매우 낮다. IMF 당시, 식량 생산의 핵심인 종자회사들이 교묘히 외국자본으로 넘어갔다. 쌀 자급률이 그나마 높다지만 값싼 수입쌀로부터 농민을 보호하는 정책이 절실하다. 쌀은 삶이다. 같은 동남아에서 태국은 ‘자급자족 자립경제’ 정책으로 농업의 가치를 유지하며 쌀을 수출하는 반면 필리핀은 산업화와 관광업 정책으로 3모작 가능한 농토에 골프장과 공장들이 들어서며 쌀 수입국이 된다. 곡물을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의 안위는 세계 곡물 가격을 쥐락펴락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남실거리는 모들이 한여름 뙤약볕을 즐기며 포기 수를 늘려 갈 것이다. 너른 들녘을 보고 있자니 시끄러운 세상으로 편치 않은 마음에 고요히 평화로움이 인다. 개구리들은 논에 물이 차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리라.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2

보라색 가득한 여섯 자매의 여행 이야기

우리는 인연의 깊이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지극한 인연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깊은 인연의 끈이 있어야 형제자매의 연을 맺게 될까? 피를 나누고 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인연은 그 어떤 인연보다 크고 깊은 인연일 것이다. 우리 친정은 모두 칠 남매다. 아들 하나에 딸 여섯. 말 그대로 딸 부잣집이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오빠가 갑자기 암 수술을 했다. 예상치 못한 일에 모두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치고 회복 중이다. 그래서 가족회의 끝에 언제나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니 갈 수 있을 때 여행을 가자고 의기투합하여 여섯 딸 모두 여행을 가기로 했다. 장소는 신안 퍼플섬으로 정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사느라 바빠 여섯 딸이 다 모여 여행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여섯 중 넷은 인천에 모여서 살고 셋째는 백령도, 넷째인 나는 문경에 살기에 인천으로 모여서 출발했다. 퍼플섬 검색에서 보라색 옷이나 장신구 등을 하면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단체로 보라색 티셔츠도 준비했다. 먼 거리라 주변 팬션에서 1박을 하고 전날 폭우가 내려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날이 맑았다. 고대 로마에서는 보라색은 귀족과 왕족만이 누릴 수 있는 색이라고 했다. 아마도 보라색이 주는 화려함과 환상적인 느낌 때문이리라. 보라빛에 대한 기대감으로 퍼플섬을 향해 가는 우리의 마음은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설렜다. 어릴 때 동화를 읽으며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보랏빛 섬에 다다랐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듯 보라색 다리를 건너며 우리의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보라색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보라색 아이스크림도 먹으며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흥겨움에 젖었다. 하나의 색을 정해 섬을 명소화 시키는 아이디어가 참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벤더 정원에 다다르자 세상이 온통 보랏빛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보랏빛 라벤더의 행렬에 왜 옛날 사람들이 보라색을 귀하게 여겼는지 알 것 같았다. 색깔이 사람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았다. 풍성한 보랏빛에 물들어 세상의 걱정거리도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어떤 인연의 끈으로 여섯 자매로 세상에 오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여행을 통해 참 소중한 것이 핏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회에서 만난 그 어떤 친밀한 관계라도 혈육의 정만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일 년에 한 번은 시간을 맞춰 여행을 다녀오자고 약속했다. 각자 흩어져 서로의 삶을 살기에 바쁜 요즘이지만 여행만큼 돈독해지는 기회도 없다. 모두 건강해서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음에도 감사하다. 다음에는 또 어떤 멋진 곳이 우리를 기다릴까 벌써 가슴이 두근거린다.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2

‘경주문화관 1918’ 심야 책 마당

초여름이 다가와서인지 오후 7시가 넘어서야 제법 어둑어둑해졌다. 경주문화관 1918 앞 광장에서 ‘경주문화관 1918 심야 책 마당’ 행사가 열렸다. 광장 가운데는 빈백을 배치해 책을 읽게 해두었고 그 주위로 책방 부스와 기타 참여 부스들로 채워져 있었다. 잔디 위로 놓인 빈백에 사람들이 기대어 책을 읽는 모습이 낯설면서 평화로워 보인다. 늦은 시간이다 보니 책 사이 사이 반딧불 같은 독서 등이 놓여있다. 독서 등은 운영본부에서 무료 대여해주고 있다. 행사는 책 토크 콘서트, 책플리, 달빛 책 광장, 바퀴 달린 도서관 등으로 나눠져 있다. 그외에도 작가들이 참여하는 팝업스토어를 비롯해 선착순 신청 참여 가능한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책 콘서트는 6월 7일 백세희 작가의 ‘내 마음 속 그늘, 우울에 관하여’, 6월 14일 이소연 작가의 ‘옷을 사지 않기로 했습니다’, 6월 21일 이유미 작가의 ‘오늘을 재료로 오늘도 쓰는 법’으로 진행된다. 책 토크 콘서트는 오후 4시부터 5시 30분까지며 5월 23일부터 30명 정원 마감시 까지 신청을 받는다. 책과 playlist가 합쳐진 책플리는 책을 읽으며 함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공연이다. 오후 7시에는 프로이데 트리오, 8시엔 여름밤 잔디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방문 당일 마침 연주가 진행 중이어서 책을 구입하러 다니며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다. 책을 주제로 한 행사다 보니 작은 책방들의 참여도 눈에 띈다. 달빛 책 마켓은 총 여섯 개의 동네서점이 참여한다. 어서어서, 책방매화, 서점북미, 너른벽, 책방봄날, 북샵라벤더로 저마다의 독특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평소 알지 못했던 서점들을 뷔페식으로 한 곳에서 만나 서점에서는 홍보 효과를, 고객 입장에서는 새로운 공간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돋보인다. 새 책뿐만 아니라 ‘달빛 책 바자회’ 코너를 통해 시민들이 직접 책장 속 헌책도 자유롭게 판매 및 구매할 수 있다. 그리고 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도서관도 참여한다. 행사장 한 켠에 경주시립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바퀴 달린 도서관 버스가 세워져 있다. 누구나 현장에서 책을 빌려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사를 아우르는 달빛 책 광장에서는 모두가 편안한 자세로 책을 즐기면 된다. 그리고 공연을 감상하다 혹은 책을 읽다 허기가 지면 F&B존에서 간단한 간식을 구입할 수 있다. 그 옆 작가 팝업스토어에서는 이신희, 최정욱, 배지윤 작가가 참여해 직접 만든 아트 상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시민기자는 그곳에서 저절로 눈이 가는 작고 귀여운 돌조각 작품을 데려왔다. 팝업 스토어 옆에는 식물마켓이 위치해 있었으며, 이곳에서는 장식하기 좋은 반려식물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식물과 책의 조합은 상상만으로도 마음을 평화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 끝으로 체험코너를 방문했는데, 이곳에서는 책, 등, 책갈피 등을 현장에서 직접 신청하여 1인 1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심야책마당은 6월 7일, 6월 14일, 6월 21일, 총 3주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진행된다. 토크 콘서트와 책 플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코너는 해가 지는 오후 6시부터 밤 9시 30분까지 운영된다. 행사장에는 별도의 무료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도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오랜 역사가 담긴 곳에서 달과 함께 낭만적인 시간을 느껴보기 좋은 기회다. /박선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2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포항 구룡포 ‘골목길 탐험’

계절은 기다렸다는 듯, 여름으로 들어서고 있다. 6월이 펼쳐놓은 짙은 초록을 따라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구룡포로 향했다. 바다를 품은 골목 위의 역사는 열 마리의 용이 승천하다 한 마리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만큼 궁금해진다. 구룡포는 포항 시내에서 생각보다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30여 분 넘게 달려 입구에 들어서니 벌써 창밖으로 바다 내음이 훅 끼친다. 휴일을 맞아 아침 시간이 이제 막 지났음에도 주차장은 빈자리가 안 보일 정도였다. 줄지어 서 있는 대게 전문 간판을 배경으로 울산에서 온 대형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과 포항역에서 구룡표행 버스를 타고 왔을 전라도에서 온 학생들의 왁자한 소리가 출렁댔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곧바로 마주한 골목길로 접어드니 어렵지 않게 길을 걸을 수 있다. 먼저 구룡포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나는 길에 언뜻 보이는 ‘모리국수’는 구룡포를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다. 노포인 ‘까꾸네 모리국수’를 시작으로 모리국수를 파는 식당만도 열 개나 있을 정도다. 이제는 모리국수만을 먹기 위해 구룡포를 찾는 사람이 생길 정도라니 확실히 명물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시장을 돌아 구룡포초등학교 앞에 70년 전통의 찐빵집으로 이름난 ‘철규분식’도 보인다. 오밀조밀 붙어있는 상가들 사이로 몇몇 사람들이 가게 안을 기웃거리다 이내 안으로 들어간다. 가게 안은 나무 테이블과 벤치 의자 네 개가 오랜 세월을 지켜온 듯했다. 양은 냄비의 국수와 접시에 담겨 나온 찐빵은 단순하고 투박해 보였지만 오래된 정이 느껴졌다. 찐빵집을 뒤로하고 일본인 가옥 거리로 가는 길은 여행객이 즐겨 찾는 골목길이다. 어린아이 손을 잡은 가족, 연인들은 물론 중년의 여행객들로 골목이 가득했다. 일본인 가옥 거리는 100여 년 전 일본인이 건너와 살았던 장소에 조성된 근대 문화 역사의 거리다. 2010년 포항시에서 일본인들의 풍요로운 모습을 재현하고 반대로 경제적으로나 생활적으로 그들에게 착취당했던 우리들의 모습을 남겨 기억하기 위해서 조성한 거리다. 일본 어부들이 살았던 이곳에는 현재 60여 개의 일본식 목조 건물이 남아있다고 한다. 거리는 대부분 상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주택도 눈에 들어온다. 포항 여행으로 가볼 만한 곳인 이 거리는 호미곶과 내연산 등과 함께 포항의 12경 중 하나다. 이 골목에서는 드라마도 촬영되었다. 초등학교 때 재방송까지 열심히 챙겨봤던 ‘여명의 눈동자’와 동백이와 용식이의 ‘동백꽃 필 무렵’과 여러 예능까지 구룡포가 등장했다. 그 인기에 더해 다양한 체험이 가능한 과메기 문화관에서 어촌문화까지 담아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상회나 점빵이라는 말까지 정겹다. 피어라계단이라 불리는 중앙계단에 올라서면 구룡포항이 내려다보이고 옆에는 승천한 아홉 마리의 용의 동상이 함께한다. 이 계단에선 야간 볼거리로 미디어 아트도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구룡포를 소재로 삼은 문학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아동문학가 김일광 작가에서부터 소설가 성석제의 문학작품, 양광모 시인의 시에서도 배경이 되었다. 그림책에까지 구룡포가 등장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료 주차장과 여행자플랫폼라운지까지 갖추고 있으니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 찾아와도 좋을 시장과 일본인 가옥 거리다. 구룡포는 바다의 역사와 문화를 품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골목길에서 언제나 피어나고 있다.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0

오래 간직한다는 것에 대하여

무엇을 오래 간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한켠에 미뤄두고 시간만 흐르면 되겠지 싶지만, 새로운 물건이 사건이 밀고 들어오면 앉은 자리는 물론 그 존재마저 위태로워진다. 우리 동네에 새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길이 넓어졌다. 그 길에 오래 서 있던 벚나무가 벚꽃이 한창 필 시기에 뽑혀 사라졌다. 경주 보문단지 입구에서 포항으로 오는 길도 넓어지며 가을이면 노란 잎을 몇십 년 팔랑이던 키 큰 은행나무도 잘려 나가고 어린나무가 새로운 가로수가 되었다. 나이 든 나무를 옆으로 옮기는 일보다 묘목을 심는 게 경제적인지 한자리에 오래 서 있던 나무의 시간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경주는 오래된 도시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도 경주에 오면 머리에 기와를 얹고 경주와 어우러지려고 애를 쓴다. 발굴하려고 땅을 파면 시루떡처럼 단층이 보인다. 맨 위에는 얼마 전까지 살던 이의 흔적이, 더 내려가면 조선 시대, 그 아래에 신라인의 삶의 부스러기가 발견된다. 무엇이든지 오래 간직하는 일이 젤 쉬워 보이는 도시 경주다. 예전엔 경주로 여행을 올 때, 대부분의 사람은 경주역에 첫발을 내렸다. 안동이 고향인 필자도 그랬고, 장기에 살았던 남편도 수학여행을 와서 경주역에 내렸다. 전국의 많은 사람들의 추억 한 자락이 경주역에 머문다. 지금은 경주문화관 1918로 이름이 바뀌고 기차도 오가지 않는다. 높이 솟은 급수탑이 그간의 전성기를 말해주려고 아직도 우뚝 서 있다. 경주역이란 이름은 잃어버렸지만, 역에서 관사마을로 이어지는 육교는 아직 그대로다. 육교에서 내려다보는 철길 위에 금계국이 노랗다. 구 경주역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살았던 관사촌이 지금은 도시 재생 사업으로 행복황촌 마을로 변신했다. 역과 마을을 나누는 담장을 따라 걸으니 오래된 골목이 정겹다. 대문 앞 의자에 앉아 오가는 여행객을 구경하는 어르신이 계셨다. 행복황촌마을은 주민들이 떠나지 않고 많은 젊은이가 찾아오는 마을 같다. 그래서 오래된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대부분의 마을 개발사업과는 달리 좁은 골목길,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역무원 관사 등 마을이 갖고 있는 옛 정취가 그대로다. 2020년 도시재생사업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폐가를 리모델링해 주민들의 문화 활동 공간인 ‘황오동 사랑채’를 열었다. 가까운 문화센터를 가려고 해도 철길 때문에 마을 어르신들이 이용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양한 수업이 열린다고 한다. 지금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주민제안공모사업 등을 통해 마을의 문제점을 해결했다. 소방차 진입이 되지 안는 좁은 골목길에 ‘보이는 소화기함’을 설치하는 것을 비롯해, 가스누출경보기 설치, 마을 그림책도 만들었다. 또한 ‘마을호텔’은 황촌마을 찾는 이들을 위한 숙박시설이다. 도시민박업은 행복황촌 마을호텔로 인증을 받은 곳은 국내외 관광객이 모두 머무를 수 있다. 골목을 탐색하다가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옛 경주역장 관사가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 만든 카페 ‘보우하사’에 들어갔다. 문손잡이가 세게 잡아당기면 부서질까 조심해서 열어야 했다. 서까래가 그대로 다 보였다. 적산가옥이지만 구부러진 대들보는 우리 산에서 자란 소나무 같았다. 기차마을답게 모퉁이마다 기차를 그려 넣었다. 급수탑에서 물을 채우고 칙칙폭폭 달리던 모습이다. 벽이자 담장인 곳에 빨래가 널렸다. 그 옷이 마르면 입고 육교를 지나 경주역으로 출근해 비둘기호, 통일호, 무궁화호를 타러 갔을 것이다. 기차표에 구멍을 뚫어주며 반가운 눈인사를 나눴을 것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모르는 사람들의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0

봉화 화장산 전투와 600명 임란의병 ‘거룩한 희생’ 기리다

1592년 4월 16만 왜군이 부산에 상륙,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5월에 한양 그리고 함경도까지 진격했다. 왜군을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의병들이 일어났다. 봉화에서도 1600여 명의 왜군을 무찌르고 장렬히 전사한 600여 명의 의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류종개 선생은 김중청, 김륵, 김성일 선생과 함께 의병 600여 명을 모집했다. 류종개는 의병장이 되어 훈련을 시키고, 진중규약 16조와 군령 5조의 규칙을 정해 탄탄한 조직으로 만들었다. 왜군 모리 요시나리는 조선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떠난 한양을 점령하고 강원도 삼척에 이르렀고, 원주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때 왜장은 좌의정이자 도체찰사인 류성룡 선생의 일가가 봉화에 피란을 갔다는 첩보를 접하고 류성룡 일가를 붙잡아 안동을 점령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류성룡 일가를 붙잡기 위해 두 갈래로 나뉜 왜군은 소천면 고선리에서 현동천을 따라 남하했다. 또 다른 왜군은 소천면 현동을 거쳐 산 능선을 따라 춘양 도심리에 피란 중인 류성룡의 형인 류운룡 등 100여 명의 식솔들을 붙잡기 위해 화장산으로 향했다. 이때가 1592년 8월 22일이다. 류운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전란을 피할 수 있는 봉화군 춘양면 감동골로 정하고 10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정감록’ 십승지인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왜군은 류성룡 일가를 붙잡기 위해서 화장산을 넘어야만 했다. 봉화의 의병장 류종개는 왜군이 화장산을 넘을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는 임흘, 김인상, 권경, 윤흠신, 권현수, 윤흠도 등 600여 명의 의병을 춘양 감동골로 가기 위한 길목인 살피재에 매복시켜 적군을 기다렸다.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선발대가 살피재를 지나고 있을 때, 그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활과 칼 그리고 창으로 무장한 봉화 의병은 단숨에 1000여 명의 왜군을 살상하고, 깃발과 말 등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틀 뒤 3000여 명이 넘는 왜군 본진이 살피재에 도착했다. 조총을 앞세운 왜의 대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병은 조총 앞에 하나둘 쓰러졌고, 결국 600여 명 모두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봉화 류종개 의병장이 이끄는 600여 명의 의병은 모시 요시나리 왜군 1600여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 전투로 인해 왜군은 류성룡 일가를 붙잡는 것은 물론 안동에 진출하려던 계획도 포기하고 울진으로 물러났다. 왜군이 더 이상 진격을 포기한 채 물러나도록 만듦으로써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꾸었다는 ‘수정실록’이 평가한 봉화 화장산 전투는 대단한 의의를 지닌 싸움이었다. 430년이 지난 지금, 봉화군 소천면 화장산 노루재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쌓은 적성봉과 임란의병전전기념비가 있다. 화장산 살피재에서 전사한 류종개가 이끌던 의병 600여 명을 두고, 조정에서는 이들의 순국충절을 기리어 류종개 의병장에게는 통정대부 예조참의를 증직했다. 또 김인상, 윤흠신,윤흠도와 함께 정려를 내렸으며, 금은 공조참의를 증직해서 공을 기렸다고 한다. 또한 이 전적지를 관리하기 위해 감관 1인과 산직2인을 두어 고종 36년(1899년)까지 지켜왔다고 한다. 왜군 3600여 명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600명의 의병의 넋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2006년 사당, 전시관, 의총 등 총 7개동(259㎡) 임란의병전적지 충렬사를 지었다. 이곳에서 매년 음력 7월 28일(의병전사날) 임란의병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류운룡 선생이 머무른 춘양면 도심리 감동골에는 그가 심었다는 감나무 세 그루 중 두 그루와 옹달샘이 남아있다. 류운룡 선생이 구국기도를 드렸던 기도단이 40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사과 과수원 중앙에 보존되고 있으며, 감동골 입구 도로변에 문경공겸암류선생도심촌유적비가 서 있다. 임진왜란 때 다른 지역 의병들의 활동은 잘 알려진 것과 달리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600여 명의 봉화 의병은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봉화 600여 명의 의병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고, 거룩한 희생이 계승 발전되기를 바란다. /류중천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10

도동시비동산 현충일 추모행사

비영리법인 도동 시비동산(운영위원장 권대자·회장 여영희)은 지난 6일 오전 10시30분 도동시비동산 야외무대에서 문단과 사회 주요 명사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70회 현충일 추념식을 개최했다. 사설 단체로서 처음으로 회원들이 주관한 이번 현충일 추모 행사는 6월 호국보훈의 달의 의미를 더욱 깊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동 문학 회원들은 과일과 떡으로 제단을 꾸미고, 한국차인연합회의 협찬으로 헌다식도 함께 진행했다. 한국문협 장호병 부이사장, 대구문인협회 도광의 고문, 하청호 대구문학관장, 국제펜한국본부 손수여 제6대 대구지회장, 정인숙 대구동구의회 의장 등이 다례에 동참했다. 이어 박혜진 하모니시스트의 연주와 신표균 고문의 자천시 ‘슬픈 뻐꾸기’ 낭송도 있었다. 여영희 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대구 문단을 대표한 안윤하 회장의 추모사가 있었으며, 권대자 운영위원장은 도동시비동산에 물심양면으로 동참한 조력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특별순서에 국제펜한국본부 정삼일 대구지회장은 순국선열의 조국광복을 염원하는 뜻깊은 의미가 담긴 매헌 윤봉길 의사의 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를 낭송하여 박수 갈채를 받았다. 제2부 순서로는 ‘도동 시비동산 향산정 중수 및 조력록 편액 제막기념시회’가 열렸다. 도동시비동산의 향산정은 대구 명소인 ‘측백수림 천년기념물 제1호 지정 60주년’을 기념하여 대구동구청의 지원을 받아 건립됐다. 이곳은 방문객과 문인들에게 사유와 휴식의 공간을 제공해왔다. 지붕과 목조 대청처럼 창문없이 시원하게 설계가 됐으나 장마철이나 태풍 등 비바람의 피해로 관리가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독지가 몇 분의 뜻에 문인들까지 가세해 중수공사를 하고 이들의 뜻을 담은 조력록 편액을 걸었다. 권대자 운영위원장의 경과보고에 이어 현판 제막식이 진행되었고, 한국문협 홍성훈 시분과 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서 안자숙 시인의 ‘말없으매’, 정지홍 시인의 ‘운부암의 미소’, 조명선 시조시인의 ‘측백수림 읽다’ 등의 낭송과 영제 시조창, 여영희 회장의 ‘팔공산’ 시조창, 그리고 대금 연주로 황영달 국악예술인의 ‘청성곡’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이어지며 힐링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또한 방종현 대구문협 부회장의 하모니카 연주는 분위기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손수여 시민기자

2025-06-08

주권행사의 소중함 깨닫는 시간

지난 3일 6·3 대통령 선거 투표가 있던 날, 나는 지인 4명과 함께 개표사무원에 참여하는 기회를 가졌다. 개표사무원은 정해진 시간에 신분을 증명한 후 개표장 안의 정해진 자리에 대기했다. 개표장은 개표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선거관리위원들이 가장 앞부분에 위치해 있었고, 개표장 입구엔 우편투표전담부가 있고, 개함부, 투표지분류기운영부, 심사 및 집계부의 세 부서가 차례대로 나뉘어 위치했다. 개함부에서 잘 정리한 투표지를 투표지분류기운영부에서 분류기와 컴퓨터로 분류를 하며, 마지막 심사 및 집계부에서 이를 심사 집계하면 개표 업무가 완료된다. 우편투표전담부는 사전 투표한 투표지를 전담한다. 개함부는 접혀진 투표지를 잘 펴서 아래위가 바뀌지 않도록 정리하고, 찢어지거나 오물(특히 끈적이는 오물)이 묻은 투표지를 골라낸다. 개함부에서 제대로 투표지를 정리하지 못하면 분류기에서 오류가 나며, 그 오류를 바로 잡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므로 가장 간단한 업무인 개함부의 투표지를 정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국민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가 뽑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유권자들의 마음이 담긴 투표지를 정성스럽게 정리했다. 투표지는 원래 모양 그대로 인 것이 있었는가 하면, 가로 혹은 세로로 한 번씩 접은 것이 있고, 가로 혹은 세로로 두 번씩 접힌 것도 있었다. 세로로 접은 후 가로로 2번을 접은 것도 있었고 정사각형을 만들기 위해 네 가장자리를 접은 것도 있었다. 모든 후보자에게 도장을 찍은 유권자의 투표지와 빈 투표지도 가끔 발견됐다. 내 손보다 훨씬 커다란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투표지를 열 때마다 투표한 이의 마음을 열어보는 것 같아 한 장 한 장이 소중했다. 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주권 행사를 위해 아흔이 넘은 어머니를 모시고 투표장에 갔었다. 내 마음이 그러했기에 투표지 한 장 한 장에 담겨있을 유권자들의 마음도 내 마음과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함부가 투표지를 다 정리하면 투표지분류기운영부로 정리된 투표지를 넘기게 되는데 투표지분류기운영부의 개표사무원들은 개표일 전에 미리 교육을 받은 젊은 층이 많았다. 심사 및 합계부가 심사하고 집계를 하여 전체 합산을 하면 개표 작업은 완료된다. 개표 작업은 새벽 2시 가까운 시간에 끝이 났다. 나는 개표 사무원으로 참가하면서 시종 마음이 조심스럽고 무거웠다. 실수없이 개표작업을 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지만 우리가 뽑은 정치인에게 거는 국민적 기대감이 크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주권 행사에 직접 나선 주민들의 마음을 헤아린 정치가 진정한 정치가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주권행사의 소중함을 몸으로 체험하는 개표사무원 참가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장혜숙 시민기자

2025-06-08

호국보훈의 달, 현충일의 참뜻을 되새기며

6월, 호국보훈의 달이 돌아왔다. 매년 이맘때면 언론과 각종 매체에서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긴다. 올해로 70회를 맞는 현충일은 1956년 6월 6일, 제1차 국무회의에서 제정된 법정기념일로, 6·25전쟁과 제2연평해전 등 국가적 아픔이 집중된 6월에 맞춰 지정되었다. 이날은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과 국군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한 날이다. 현충일 아침, 전국 곳곳에는 조기가 게양되고, 오전 10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온 국민이 1분간 묵념에 들어간다. 이 짧은 시간은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장에 나섰던 명예로운 호국영령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감사와 위로를 전하는 소중한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현충일의 의미를 얼마나 가슴 깊이 새기고 있을까? 현충일 노래의 가사처럼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라는 구절은 나라를 위한 희생이 결코 잊혀서는 안 됨을 일깨운다. 시민기자는 현충일 아침, 아파트 단지 내 태극기 게양 현황을 살펴보았다. 527세대 중 태극기를 단 집은 30세대 남짓. 북한과의 긴장 상황 속에서도 점점 무뎌져 가는 우리의 경각심과 애국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라 없는 삶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다. 6·25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세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시민기자 역시 어린 시절의 희미한 기억만 남아있지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처럼, 국방의 중요성과 국민의 단결이 곧 국가의 힘임을 역사는 분명하게 말해준다. 이승만 대통령의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정치인들은 이 말을 가슴 깊이 되새기고 실천해야 한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오히려 국민을 분열시키고, 국가 근간을 흔드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내부의 분열은 외부의 침략보다 더 무섭고, 망국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우리는 공기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듯, 대한민국의 소중함도 종종 잊고 산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야 할 때다. 호국보훈의 달 6월, 단 한 번이라도 태극기를 달고, 1분간의 묵념에 진심을 담아보자.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그리고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잊혀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 작은 실천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나라를 위한 희생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임을, 이 호국보훈의 달에 다시 한번 깊이 되새겨 본다. /김윤숙 시민기자

2025-06-08

문화가 되어 가는 동물 장례식

반려동물 소유의 사례는 북부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사람과 개가 함께 묻혀있는 약 1만2000년으로 추정되는 화석이 발견되어 증명된다. 이 무덤에서 발견된 사람의 한쪽 팔이 개의 어깨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은 주인과 개 사이의 깊은 애정과 애착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동물의 가축화는 식량자원으로써의 역할과 운송을 위한 사역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인류의 오랜 초기 역사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화석의 발견은 동물들이 반려감을 목적으로 사람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한반도에서는 구석기 유적지인 경남 사천의 늑도라는 곳에서 기원전 약 8000년 전 신석기 후기와 청동기 전기의 화석으로 발견되었는데 고고학자들은 개들의 뼈가 온전하고 그중에는 작은 개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반려용으로 키운 개들로 추정하였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의 견우직녀도(408년)에도 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서 반려견과 교감했다는 증거로 충분하다.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의미의 ‘반려동물’(companion animal)은 198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최한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라는 주제로 하는 국제심포지엄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애완동물이란 용어를 사용했지만, 소유의 개념이 강해서 근래에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강조되면서 반려동물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이러한 반려동물도 결국에는 죽음을 맞아야 하는데 사람의 장례와 유사한 과정으로 이별을 하게 된다, 농림축산식품부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2025년 5월 현재 전국에 73곳의 반려동물장례식장(화장장)이 운영되고 있다.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지역에도 여러 곳이 운영되고 있다. 행정구역 상 대구시 군위군, 경상북도 성주군, 칠곡군, 구미시, 김천시, 경산시, 청도군에 각 한곳씩 운영되고 있지만 시설의 가동률은 30% 정도에 그친다. 예전에는 매장하거나 동물병원에서 의료폐기물로 처리하였지만, 환경관련 법에서 매장이 금지되고 반려동물의 가족화가 심화 되어가면서 장례에 대한 인식이 점차 바뀌고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인구도 증가하는 추세다. 매장(埋葬)으로 인한 2차 감염이나 훼손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례식장을 통한 이별의 절차가 유족의 마음 챙김에는 도움이 된다고 한다. 교감을 통해 받은 사랑을 온전히 돌려주는 장례 의식이 문화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6-08

대구 비원노인복지관, ‘아모르파티, 운명을 사랑하라’개강식

대구 서구(구청장 류한국) 비원노인복지관(관장 권덕환)은 지난달 30일, 2025년 서구 노인복지기금사업 사회적 취약 독거노인의 정서안정을 위한 집단상담 프로그램인 ‘아모르파티, 운명을 사랑하라’개강식을 개최했다.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개강식에서 비원노인복지관은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참여 어르신들 사이의 유대감을 증진 시키고, 긍정적이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데 동기를 부여하는 행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본 과정은 오는 6월 10일부터 10월까지 정서상담, 관계나눔, 만들기, 나들이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집단상담 프로그램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노년기에 빠지기 쉬운 사회적 고립감을 해소하고 사회적 관계망 강화 및 정서적 안정을 통한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예정이다. 비원노인복지관 회원 이남희 어르신은 이번 프로그램에 대하여 “내가 여든 해를 살아왔다. 요즘 들어 같이 웃던 얼굴들이 그리워 자꾸 마음이 허전하였는데, 여기서 마음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모처럼 설레인다.”라고 말했다. 비원노인복지관 권덕환 관장은“외로움에 다소 빠지기 쉬울 수 있는 어르신들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이곳에서 희망찬 인생을 기대하며 좋은 친구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6-04

인생 첫 선거 치른 고3 미래 위해 ‘투표 인증’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번 대선의 선거권은 2007년 6월 4일 이전에 태어난 만 18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에게 주어졌다. 교육부에 따르면 전체 고3 학생 45만3812명 중 유권자는 19만2439명이라고 한다. 대략 42.4%의 학생이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2007년은 황금돼지띠의 해이다. 그해 태어나는 아이들은 재물복과 길운이 따른다고 하여 출산율이 반짝 오르기도 했다. 올해 고3인 수험생 이정은 학생 또한 황금돼지띠다. 생일이 상반기에 있어 이번에 첫 투표권을 행사했다. 같은 반 친구 중 대략 1/3 정도가 유권자였다고 한다. 5월 30일 금요일, 사전 선거 이틀째 날 가족과 함께 투표를 마친 이정은 학생이 남다른 소감을 밝혔다. “기분이 좋아요. 첫 투표를 대선 투표로 해서 그런지 그 느낌이 더 특별해요. 운동 경기로 치면 예선전이 아닌 결승전을 치른 기분이랄까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전 선거일 이틀 모두 평일이었던 것과 고3으로서 직관적으로 와 닿는 교육 공약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한다.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투표 참여의 다양한 방법 중 ‘투표 인증’을 빼놓을 수 없다. 기존 선거에서는 투표소 앞에서 찍은 사진, 기표 도장을 찍은 손등 인증샷 등이 흔했다면 이번 대선에서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가득했다.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포토카드나 각종 캐릭터가 있는 인증 용지, 리플릿이나 가랜드 형태의 인증 용지를 이용해 개성 만점의 투표 인증샷을 남겼다. 혹 인증 용지를 잊었더라도 투표 확인증을 받아 찍어오기도 하는 등 ‘핫’하고 ‘힙’한 세대는 선거조차 축제처럼, 이벤트처럼 즐겼다. 이정은 학생은 담임선생님이 준 용지로 투표 인증을 했다. 인생 첫 투표를 앞둔 고3 제자들을 위해 선생님이 기념으로 주셨다고 한다. 인증 용지의 모음 ‘o’자에 기표를 해 글자를 완성하면 된다. 고3을 위해 완성된 문구는 ‘수능대박’이다. 그리고 학업에 지친 아이들에게 반짝이는 응원의 문구가 함께 적혀 있다. “반짝반짝 빛날 너의 내일에 투표해.” /백소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03

지구환경을 위한 소비생활, 가치소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환경은 우리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소비도 중요해졌다. 그렇다면 소비를 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소비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지구환경을 위한 소비생활은 무엇일까. 지난 금요일 꿈마루 작은 도서관에서 마련한 찾아가는 지구환경 수업이 있었다. 수업의 주제도 ‘가치 사서 같이 살자’였다. 포항환경학교에서 나온 환경 교육 강사와 함께 수업에 참여한 시민들은 자신의 소비 모습을 돌아보며 지구환경을 위한 지속 가능한 소비, 소비문화와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사는 먼저 경제와 환경을 연결 지으며 우리들이 하루에 만들어내는 쓰레기가 엄청난데 그 쓰레기가 문제라고 강의를 시작했다. 우리가 사용한 쓰레기를 볼 때면 한 번쯤은 절로 인상이 찌그러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소비하고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사이 지구는 병들어 가고 있다. 소비로 인한 많은 쓰레기 가운데 첫 번째는 플라스틱이다. 1인당 사용량을 보면 부끄럽지만 우리가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소비로 인한 많은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fast fashion’ 영향으로 이제는 재활용보다는 대부분 소각되고 있는 의류 폐기물도 하루에 880t이나 된다. 먹거리로 인한 오염, 파괴되는 산림, 모두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가전제품, 생활에서 쓰는 물 사용량도 많아 1인당 사용량이 하루에 300L를 넘는다고 한다. 우리가 하루에 마시는 물의 양이 2L가 안 되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양이다. 이렇게 쓰레기로 오염된 환경이 결국은 우리에게 기후변화와 기상이변이라는 결과로 돌아오고 있다. 지구를 생각하고 우리들의 생활을 위한 가치소비를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가치소비는 보통 가성비보다는 가심비를 생각하는 소비라 할 수 있다. 가심비 소비는 비용에 상관없이 만족스러운 것을 구매하는 소비다. 가성비와 반대되는 말로 성능보다는 심리적 만족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가치소비와 맞닿아 있다. 가치소비에는 친환경, 사회적 약자, 공정한 사회를 만든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어찌 보면 넘쳐나는 소비문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가치소비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다. 가치소비에는 MZ세대가 가장 적극적이다. 10명 중 8명이 가치소비를 하고 있어 가치제품 판매도 증가하고 있다. 선(善)행 업체 제품을 적극적으로 구매하는 모습, 플로킹, 업사이클링, 재활용 등. 적극적인 소비모습이 그렇다. 이전 세대와 다른 이들의 소비성향을 대신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제로소비도 마찬가지다. 제로소비는 ‘사지 않는 것이 가장 친환경적이다’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노 쇼핑 챌린지, 제로 웨이스트 카페, 공유경제의 확산, 중고 거래의 확산, 디지털 디톡스 등이다. 단순히 아끼는 절약이 아닌 의식적으로 소비를 절제하고 환경과 사회, 나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환경을 위한 소비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한은미(46·포항시 북구 장량동) 씨는 “환경을 위한 소비에 인식은 잘하고 있지만 실천이 쉽지 않다. 가치소비와 지속 가능한 소비는 가정에서 가족들이 잘 동참해 주어야 하는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말했다. /허명화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03

고향을 그리게 하는 콩잎물김치

휴일이라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친정에서 보내온 겉절이, 오이김치, 물김치에 지난주부터 콩잎김치가 새로 등장했다. 초록색 여린 잎이 존재감을 잃지 않고 푸릇푸릇 살아있는 물김치다. 압력솥에 방금 한 밥을 퍼서 빡빡장과 함께 쌈을 싸서 먹으니 콩밭을 가득 품은 듯 뿌듯하다.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딱 요맘때, 경상도에서만, 아니 모든 경상도가 아닌 포항 근처에서만 즐겨 먹는 음식이다. 안동이 고향인 나는 중학교 2학년에 포항으로 전학오며 처음 콩잎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점심시간 친구의 반찬통에 얌전히 누운 노란 잎, 호기심에 한 잎 떼어 입에 넣었다가 질겅거리는 식감에 몰래 뱉어야만 했다. 깻잎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물으니, 콩잎도 모르냐고 친구가 어이없어했다. 낙엽을 먹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부드러운 깻잎과는 식감이 완전히 달랐다. 고향인 안동보다 포항에 더 오래 살다보니 이젠 노란 콩잎김치를 사랑하게 되었다. 젓갈과 제피 향이 가미된 맛은 밥도둑이다. 하지만 초록 콩잎을 맛있게 느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젊을 때는 특유의 풋내가 싫었다.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물들어 이젠 늦봄 잠깐 나오는 이때 열심히 찾아 먹는다. 제철 음식을 찾아 먹어야 한다고 몸에서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친정엄마는 벌써 이 백 재기 넘게 콩잎김치를 담궜다. 한 묶음을 엄마의 입말인지 포항 사투리인지 한 재기 두 재기 이렇게 사고팔았다. 해 뜨기 전에 새순을 따서 친정에 새벽 3시면 자루 가득 담아 배달해 주신다. 그것을 이웃 친구들과 나눈다. 벌써 세 번째 주문이라고 했다. 포항시 북구 흥해읍 초곡리에 콩 농사하시는 분들은 이틀에 한번 여린 순을 따서 내다 팔아 자식 다 키웠다고 했다. 콩보다 잎 농사였다. 그러다 어느 날 밭을 갈아엎어 가을콩을 심는다고. 푸른 콩잎 쌈을 싸던 남편이 서울 작은 아버님께 택배로 보내드리고 싶다고 했다. 오래 병석에 누워 입맛이 없으니 고향 음식이 그리운 것이다. 8년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서울 시동생에게 매년 이즈음 보낸 고향 소식이었었다. 죽도시장에서 사서 보냈더니, 그 맛이 아니라 하셔서 올해는 친정엄마 손을 빌렸다. 넉넉히 담궈서 스티로폼 박스에 담아 서울로 보냈다. 만드는 방법을 물으니, 된장 풀고 양파 썰어 넣고 그럼 된다고 힘든 거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하니 콩잎은 너무 씻으면 짓물러 특유의 풋내가 나서 살살 씻고 참쌀풀을 쑤어 국물을 준비한다. 된장을 풀고 양파를 채 썰어 넣고 숨이 죽을 때까지 그냥 놔둔다. 오랜 세월 몸에 익힌 방법이라 그냥 하면 된다고 ‘숩다’고만 하셨다. 함께 싸 먹는 빡빡장도 꼭 필요하다. 강된장이라고도 부른다. 다양한 채소와 된장을 이용해 만드는 걸쭉한 한국 전통 요리다. 주로 쌈이나 비빔밥에 곁들여 먹으며, 깊은 풍미와 감칠맛이 특징이다. 기본 재료 애호박, 양파, 대파, 청양고추, 버섯 등 다양한 채소를 잘게 다져 준비한다. 두부도 추가할 수 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파와 호박을 먼저 볶다가 된장을 넣고 함께 볶아준다. 쌀뜨물이나 해물 분말 육수를 자작하게 부어 다진 마늘, 고춧가루 넣고 끓여준다. 마지막에 청양고추와 버섯을 넣고 한 번 더 끓여 마무리한다. 된장을 너무 많이 넣으면 짤 수 있으니, 끓이면서 간을 보며 조절하는 것이 좋다. 빡빡장은 냉장고에 보관하면 다른 국물 요리에 활용할 수 있다. 콩잎에 따끈한 밥 올려 빡빡장 곁들여 먹으니 밥 한 그릇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설거지 후 손을 씻고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잡다가 시큼한 향에 왼손 냄새를 맡았다. 콩잎김치가 그대로 거기 있었다. 작은 아버님이 그리워하는 고향 냄새다.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6-03

한끝차이

노인복지대학에 이름난 3총사가 있다. 군의원에 출마한 이력이 있는 황만보씨와 부면장(副面長)을 끝으로 은퇴한 고주태씨와 마지막으로 초등학교에서 교감을 역임한 강만태씨다. 세 사람 중 성격이 활달한 호걸풍의 황만보씨는 사업 수완이 좋아 벌어놓은 재산이 많아 돈도 제법 잘 써서 무리 중에 대장 격이다. 흠이라면 두 번이나 군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일이다. 군의원에 당선되어 의원님 소리 들어보는 것이 꿈이었을 터 두 번째 출마했을 때 고작 두 표 차이로 낙선했다 하니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더욱 기가 막힌 사연은 가까이 지내든 지인이 투표 날 외양간에 불이나 경망 중에 투표하지 못했다. 나중 복기(復記)를 해보니 그 지인 가족 4인이 갔으면 자기가 두 표 차로 이겨 당선되었을 것이다. 땅을 칠 일이지만 더는 군의원에 출마할 꿈을 접고 마음의 군의원으로 남기로 했다. 고주태씨는 공무원의 로망인 사무관에 진급해서 면장님 소리를 들어 보는 게 꿈이었을 테고 강만태씨는 만년 교감에서 교장 선생님 소리 들어 보는 게 꿈이었을 테니 세 사람은 모두 부(副)자 콤플렉스를 가진 셈이다. 어느 날 술자리를 했을 때이다. 황 낙선의원이 한마디 한다. “우리 갑장이니 거추장스럽게 말을 들지 말고, 트도록 하자” 며 제안하고 화투판에 갑오나 여덟 끗 은 한 끗 차이로 별 차이가 아니니 오늘부터 우리 호칭도 한 끗 올리기로 하잔다. 눈치 빠른 고 부면장이 손뼉을 치면서 한마디 거든다. “아 강만태 교감 오늘부터 자네는 교감에서 교장으로 한 끗 승진한 것이네!” 하며 “황 의원님 내 말이 맞지요” “그렇고 말고지 이 사람 고 면장” 하하하 삼총사의 웃음소리가 골목길을 메운다. 그 후로 복지대학에서 셋은 스스로 올림 직함이 대견한지 평소에는 넌지시 부르든 소리가 이제는 “어이 강 교장 차 한잔하시게” 하며 부르기도 하고 “고 면장 점심 먹으러가세” 하는 둥 기고만장하다. 하모니카 반에는 원래 강 교장 혼자 수강했는데 나중 두 사람을 끌어들여 이제 삼총사가 모두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강 교장은 홍 여사와 같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 수강하는 짝꿍이다. 홍 여사는 말수가 조용하고 싱글이라 소문이 나 뭇 할배들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 홍 여사를 강 교장은 매일 볼 수 있고 옆자리에 앉히고 독점하기에 하루하루가 즐겁다. 어느 날 강 교장이 조금 늦게 나온 날이었다. 오매도 불망인 홍 여사 옆에 황 의원이 떡 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수완 좋은 황 의원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두 사람이 수업시간 내 키득거려 강 교장의 심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수업이 끝나자 황 의원이 강 교장을 부른다. “어이 강 교장 고 면장 불러오게 홍 여사랑 점심 같이하세” 평소에는 구내식당에서 하는 게 상례인데 이쯤 되면 괜찮은 식당에서 황 의원이 한턱을 내는 게 십상이라 속은 쓰리지만, 말없이 따른다. 식당에서도 황 의원의 구수한 입담이 좌중을 휘어잡는다. 황 의원의 농담에 손을 가리고 웃는 홍 여사가 여간 신경 쓰이지 않는다. 조금 전 식당을 나서며 홍 여사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냈는데 고개를 숙이는 품새도 전과 다른 것 같아 애가 탄다. 강 교장은 내심으로 이러다가 홍 여사를 황 의원한테 뺏기는 건 아닐까 봐 속이 탄다. 내일은 일찍 나와서 홍 여사 옆에 앉으리라 다짐해 본다.

2025-06-01

한국전쟁이 낳은 전선문화의 보고

대구근대역사 골목길을 걷다보면 한국전쟁이 낳은 전쟁문화의 기록들을 모아 놓은 한국전선문화관을 만날 수 있다. 대구시 중구 대구근대역사관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북성로에 위치해 있으며 대구시가 6·25전쟁 당시 술집이었던 대지바 건물을 철거직전 인수해 리모델링을 거쳐 작년 3월 개관했다. 대구를 찾는 여행객들이 한국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문화를 꽃피었던 당시 모습을 상상하며 이곳을 많이 찾는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대구는 피란민의 도시이자 한국문학과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전국서 피란 온 예술인들이 대구에 모여 전쟁의 포화 중에도 문화예술의 꽃을 피웠던 것이다. 그 흔적들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다. 한국전선문화관을 개관하게 된 동기는 한국전쟁 시기 대구를 무대로 맹활약했던 예술인들의 자료를 보존하고 대구만이 가진 독특한 문화자원인 ‘전선문화’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또 당시 문화예술가들의 흔적을 찾아 그 기억을 시민들과 공유하면서 대구문화예술의 현재와 미래 가치를 조명하고자 하는데도 목적이 있다. 1층은 기억의 공간, 2층은 재현의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전선문화란 가장 어두웠던 시대의 우리의 기록이다. 그래서 한국 문화예술의 소중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후대인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란 생각으로 전선문화관을 둘러보면 나름의 의미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곳에는 구상 시인이 육군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인 ‘전선문학’을 발행하고 문학방송을 하던 기록들이 보존돼 있다. 육군, 공군기자단과 이중섭 화가 등이 피난시절 군인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도 쓰고 토론하던 흔적도 만나볼 수 있다. 또 육군종군 작가단에서 발행한 ‘전선문학’ 창간호를 연극 장르로 재해석한 프로그램 등 ‘전선문학’을 다양한 장르에서 현대적으로 재조명한 지역 문화예술 협력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전선문화관은 대구시 중구 북성로 104-11에 있다. 전화는 (053)426-1231. /유병길 시민기자

2025-06-01

“품격있는 노후생활 영위에 힘 보태자”

대구광역시노인종합복지관(관장 전용만) 노인대학 총학생회(회장 차세희)는 지난달 27일 김태령 안현진 복사의 안내로 경북 경산시 남천면 일원에서 2025학년도 봄 야유회를 개최했다. 이번 야유회는 노인대학의 각 반을 대표하는 회장 23명이 참석해 어르신 간의 소통과 연대의식을 높이는 소중한 교류의 시간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날 행사는 노인대학 리더로서 활동하고 있는 반 회장단의 노고를 격려하고, 향후 학사 운영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기획됐다. 본 회의에서는 상반기 운영에 대한 각 반의 성과를 나누고, 하반기 일정에 대한 건의사항을 공유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각자의 반에서 체감한 학습 만족도와 개선점, 건의사항 등을 활발히 제안하였으며, 복지관 운영진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경청하고 실제 반영 방안을 함께 모색하였다. 차세희 총학생회장은 “노인대학은 단순한 교육 공간을 넘어, 어르신들이 주체적으로 노후를 설계하고 사회와 소통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며 “오늘의 봄 야유회처럼 어르신 스스로가 리더로서 성장하고 주도하는 문화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큰 나무 봉사단 정병진 단장은 “학생회 각반 회장님은 각자 반에서 모두가 묵묵히 앞장서며 봉사정신이 몸에 밴 분”이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학생회 이계동 변춘열 부회장은 “앞으로 어르신들이 보다 주체적이고 품격 있는 노후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대구광역시노인종합복지관은 오는 6월 9일 개관 30주년을 맞는다. 대구 최초의 노인복지관으로, 대구시가 설립하고 아시아복지재단이 위탁 운영하고 있다. ‘창조하는 노후’를 운영 이념으로 내세운 대구시노인복지관은 현재 약 60개의 취미여가교실과 평생교육, 특강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지역 노인들에게 다양한 배움과 여가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대구 지역 노인복지관 중 유일하게 이용자 자치기구인 ‘총학생회’를 통해 회원 주도의 활동을 장려하고 있다. 또한 회원들을 대상으로 모금 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지역 내 취약계층 노인의 권익 향상에도 지속적으로 힘을 쏟고 있다. 2024년 기준 연간 이용 회원 수는 27만 명을 넘었고, 하루 평균 약 1100명의 회원이 복지관을 찾고 있어 명실상부한 대구노인복지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6-01

“독도는 우리 땅, 확실하게 말하자”

지난 달 30일 영남대학교 천마아트센터에서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가 주최 하고 교육부, 경상북도, 한국연구재단이 후원하는 독도 학술포럼이 열렸다. 영남대 독도연구소 설립 20주년을 기념하는 이날 학술포럼은 ‘우리나라 독도 연구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개최됐다. 포럼에는 독도 단체 대표와 독도의 역사와 지리학 교수, 독도 연구자 등 120여 명이 참석했다. 최재목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장(영남대 철학과 교수)은 인사말에서 “이달로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가 전국 대학 최초의 전문연구소로 설립된 지 20주년을 맞았다”며 “그동안 독도연구, 독도자료 수집과 학술대회와 세미나, 전시회를 개최하여 독도 연구의 허브 역할을 했다”고 말하고 ”독도 교육에서도 교육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면서 연구 성과의 대부분은 외교부와 교육부의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했다. 또 이번 포럼이 독도 연구의 성과를 뒤돌아보고 새로운 연구 방향을 제시하여 한일 간의 갈등 해소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주제 발표에 나선 김병렬 명예교수(국방대학교)는 광복 이후 한국과 일본 간의 독도 문제는 조용했던 적이 없었다고 밝히고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의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 △1954년 등대 건설 및 독도 기념우표발행 △1996년 독도 접안시설 착공 △2005년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일본 외무성의 다케시마 10포인트 등 이런 움직임에 대응하는 우리나라의 반박자료 등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영남대학교 독도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독도연구에 수많은 업적을 냈다고 칭찬하는 한편 17세기 독도영유권, 마쓰시마(松島) 도해면허설, 대일강화조약 등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며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하나는 “현재대로 우리가 독도를 게속 차지하고 있으면 일본이 포기하게 될 것이고 독도는 아무 문제없이 우리의 땅이 되는가?” 또 하나는 “우리가 원하지 않으면 독도 문제는 절대로 국제사법제판소에 가지 않아도 되는가? 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포럼에 참석한 많은 교수와 학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결론은 내지 못했다. 이어서 패널토론에서 문철영 명예교수(단국대)는 역사학 분야 독도 연구의 회고와 방향을 독도학 정립을 위한 학제 간 연구의 시작, 독도영유권 확립을 위한 연구, 독도연구소의 강점에 대해 발표했다. 손승철 명예교수(강원대)는 도서(島)관리정책 분야 연구 전망을 도서를 중심으로 발표했다. 이어서 이상태 한국영토학회장 은 지리학 분야 독도 연구의 성과와 향후 과제에 대해서 독도의 지리학적 연구, 고지도가 증명하는 독도영유권, 조선 후기의 고지도에 나타난 독도, 조선 고지도의 우산도 위치에 대해 발표했고, 이석용 한남대 명예교수는 국제법 분야 독도 문제에 대해 울릉도 경계, 도해 금지령, 안용복 사건, 삼국사기, 세종신록지리지, 고려사 등에 대하여 역사적 지리적 사실에 대해 발표했다. 이날 포럼은 독도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독도 단체 대표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고, 유익한 정보를 교환하는 자리였다는데 모두 공감하고 독도학술포럼의 잦은 개최를 희망한다며 마무리 되었다. /안영선 시민기자

2025-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