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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수성구민 안녕과 나라 평안을 기원한 수성사직제

지난 1일 대구 수성사직제가 대구 노변동 사직제단에서 열렸다. 대구 수성구청이 후원하고 수성문화원이 주최한 사직제에는 경산유림연합회, 경산향교, 대구향교 등 유림단체와 기관단체장, 주민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직제에 앞서 식전행사로 대구경북 전통음악보존회의 제례악 공연이 있었고 뒤이어 자료에 의한 고증을 거쳐 제례의식이 봉행됐다. 초헌관에는 김대권 수성구청장, 아헌관에는 반용석 수성문화원장, 종헌관에는 최진태 수성구의회 부의장이 맡았으며 수성구민의 안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다. 수성구 사직제는 2010년부터 매년 봄 수성구 노변동 사직단에서 봉행되고 있다. 전통 의례를 기반으로 현대적인 해설과 공연을 접목해 전세대가 함께 할 수 있는 행사로 진행해 왔다. 사직단의 기원은 중국 전국시대 이전부터 토지와 농업을 관장하는 신을 존중하며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사단이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원동 사직단은 1999년 시지지구 택지개발과정에서 발굴됐으며 사직단은 문헌을 기록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대구 노변동 사직단은 2006년 대구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됐다. 초헌관을 맡은 김대권 수성구청장은 “수성사직제 봉헌을 통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주민들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져 기쁘다”고 말했다. /김윤숙 시민기자

2025-04-06

외로움을 달래주는 반려식물

사람은 외로운 존재다. 어쩌면 외로움 때문에 공동체가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여전히 외로운 것은 물질만으로, 지식만으로는 채울 수 없다는 뜻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외롭다’고 어느 시인은 읊었다. ‘그대’를 사랑하지만 그대는 ‘나’를 구속하려하고, 외면하고, 잔소리를 한다. 세상에서 나를 온전하게 이해해 줄 대상은 없는 것일까. 오롯이 내 마음을 풀어놓고 싶은 대상은 없을까. ‘반려’, ‘함께’라는 뜻이다. 서로가 교감하고 반려자가 되어 가족구성원을 이룬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반려 대열에 동물이 끼어들었다. 예부터 사람과 동물은 공생관계를 이루며 살아왔다. 사냥터에서 집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산업사회로 치달으면서 가족간, 이웃간의 소통과 대화의 부재가 생겼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을 배척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보면서 말을 걸고, 껴안으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된다. 아무리 푸념을 늘어놓아도 동물은 짜증을 내지 않았다. 되레 꼬리치며 품에 안긴다. 자연스럽게 집 밖에서 기르던 동물이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반려동물이 인간의 외로움을 해소해 준다. 매스컴의 영향인지 연예인을 모방하며 너도나도 반려동물을 곁에 두고 있다. 반려동물의 먹을거리며, 옷이며, 장난감이 어린아이 키우는 비용 못지 않다. 그뿐 아니다. 수족관의 물고기, 모르모트 흰쥐,청거북이, 고양이 등 반려동물의 종류도 다양해지면서 부담스러운 일이 늘어났다. 게다가 반려동물을 키우는 과정에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바쁘거나 여행을 다니려면 반려견이 문제가 된다. 전문 시설에 맡겨놓으니 그 비용 또한 만만찮다. 경제적인 문제와 그들의 수명이 다했을 때 대처하는 방법도 부담스럽다. 이런 문제로 동물 보다는 식물을 기르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반려식물이 부각되는 이유다. 반려식물은 마음에 드는 화초를 구입하여 적당한 장소에 두기만 하면 된다. 적당한 보살핌으로 가꿀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며칠 여행을 다녀와도 큰 문제가 없다. 새순을 틔운다거나, 꽃망울을 달거나, 열매가 맺히는 과정을 보면서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일은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반려식물 기르기는 애완동물 기르는 것보다 경제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장애인에게 반려식물 보내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홀몸 어르신들께도 반려식물은 상당한 위안을 준다. 말할 줄 모르는 식물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저 너머의 진리를 터득하는 것과 비슷하다. 자세히 보면 예쁘지 않은 식물이 없고, 자세를 낮추면 낮은 꽃들이 대지를 환하게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삶 속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나태주 시인의 시 구절이 향기롭다. /이병욱 시민기자

2025-04-06

불굴의 의지로 노래하는 영혼, 월광수변공원을 울리다

지난달 23일 대구 월광수변공원. 기타 선율과 함께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따스한 봄바람을 가르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노래의 주인공은 대구 ‘원조 통기타 가수’ 엄덕수 씨(60)다. 생후 4개월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장애를 얻었지만 그는 36년간 음악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1995년 KBS 전국 장애인 가요제 대상 수상을 시작으로 수성구 들안길 축제 금상 등 수많은 무대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의 이력을 보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소년원, 장애인 단체, 복지원, 범죄 피해자 등을 위로하는 공연도 많이 했다. 그들을 위로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김범룡, 권인하, 송대관, 태진아, 이선희 등 국내 정상급 가수들과도 함께 위문공연을 많이 했다. 위문공연과 거리공연을 통한 재능기부를 인정받아 표창과 상장도 많이 받았다. 또 TBC, KBS, MBC, 라디오 휴먼 다큐에도 출연해 그의 봉사인생이 소개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영남서예대전 대상(대구시장상), 낙동미술대전 종합대상, 대한민국 서예대전 4회 입선을 하기도 했다. 어릴 때 소아마비로 지체장애를 얻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36년간 갈고 닦은 그의 노래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손으로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인생을 살아왔다. 그는 수성못, 월광수변공원 등 곳곳을 찾아 버스킹 공연을 하지만 때로는 까다로운 공연 조건 등으로 애로도 겪는다고 귀뜸 했다. 특히 제도가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됐다고 하지만 장애인을 위한 제도는 아직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현재 그는 법원 앞에서 덕인당 간판을 걸고 인장업을 하고 있다. 전국 장애인 기능경기대회에서 인장부 대상을 수상한 경력을 바탕으로 시작한 인장업에 대해서도 만족해 한다고 말했다. 이날 버스킹 현장에는 한창실업(주)의 한대곤 회장도 바쁜 일정 속에서 시간을 내어 그와 함께 드럼연주를 해주어 봉사의 기쁨을 같이 했다. 또 문인협회 부회장인 방종현 씨와 시인 김윤숙 씨도 참석, 하모니카 연주로 관중에게 기쁨을 주었다. 공연장을 찾은 한 시민은 “엄씨의 노래를 들으며 용기를 얻었다”며 “장애를 극복하고 이렇게 멋진 공연을 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엄 씨의 이야기는 단순한 음악 공연을 넘어, 역경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감동이다. 월광수변공원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연주되는 엄씨의 음악이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문성희 시민기자

2025-04-06

벽화봉사활동을 하고 나서

지난달 23일 일요일, 반(Van)벽화봉사단의 101번째 벽화봉사가 대구 안심 4동에서 진행됐다. 시민기자는 2023년 3월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안심사랑벽화봉사를 함께 해오고 있으며, 이번이 7번째 참여다. 반벽화봉사단의 벽화 활동은 2011년 6월부터 시작돼 올해로 14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 봉사단은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과 공공시설을 대상으로 새로운 길거리 문화를 조성하며, 나눔과 소통을 통해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주부 모니터단 활동을 하던 주부 5명과 대학생 2명으로 시작된 반벽화봉사단은 14년의 세월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미대 지망 고등학생들도 참여했고, 일부는 서울로 진학하면서 참석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또한, 경북대학교 동아리에서도 다수의 인원이 참여해 봉사단의 규모를 키웠다. 한때는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벽화 봉사활동은 11월, 12월, 1월을 제외한 매달 실시되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잠시 중단됐다가 2023년부터 다시 매달 활동을 재개했다. 올해는 의뢰받은 곳이 많아 매월 일정이 꽉 찬 상태다. 벽화 봉사의 시작은 의뢰와 답사로 이뤄진다. 의뢰비는 면적과 벽면 상태에 따른 재료비만 받으며, 나머지 작업은 회원들의 재능 기부로 진행된다. 의뢰를 수락하면 회원들에게 공지해 날짜를 정하고, 특정 컨셉을 요청받는 경우 해당 컨셉에 맞는 도안을 찾아 논의한다. 벽화를 그리기 전에는 먼저 벽면을 깨끗이 청소해야 한다. 단순히 먼지를 제거하는 것을 넘어, 기존의 페인트가 더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철저히 긁어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제대로 긁어내지 않으면 새로 칠한 페인트의 무게로 인해 더 많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염 방지를 위해 밑칠을 꼼꼼히 해야 한다. 밑칠 없이 그림만 그린 벽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매우 지저분해질 수 있다. 반벽화봉사단의 밑칠은 특히 밝은 색상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며, 이로 인해 그림을 본 많은 사람들이 따뜻함을 느낀다고 이야기한다. 반벽화봉사단의 회원들 중 미술 전공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회장과 총무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회장은 의뢰인 또는 의뢰 단체와의 미팅, 사전 답사, 재료 구입, 도안 결정, 그림의 위치 및 조색 등을 담당한다. 회원 중에는 화가가 없지만, 총무의 외사촌 오빠가 미술 교사이자 화가로서 자문을 맡고 있다. 그는 현장에서 회원들을 지휘하며 그림 교육을 담당하고, 완성도가 떨어지는 부분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벽화 현장에서는 각자의 역량에 맞게 봉사를 수행하며, 그 외에도 다양한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어, 객원들을 위해 스케치를 담당하는 회원, 사진을 책임지고 촬영하는 회원, 찍은 사진을 카페에 올리거나 편집하는 회원 등이 있다. 모든 회원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벽화가 완성된다. 이러한 헌신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반벽화봉사단은 다른 봉사단과 달리 하루 종일, 혹은 이틀이나 벽화 작업에만 전념해야 한다. 이는 고상하게 그림을 그리는 봉사가 아니다. 온갖 힘든 일을 하며 시간과의 싸움 속에서 정해진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극한의 봉사다. 이러한 극한의 봉사를 짧게는 5년, 길게는 14년 동안 함께 해온 반벽화봉사단 회원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표한다. /장혜숙 시민기자

2025-04-06

선비의 마을 봉화 ‘노루골’의 옛 향기

산불과 어지러운 정세, 무너진 생활경제로 삶이 고단한 시절이다. 그래도 또 다른 현실과 만남에서 좋은 생각을 얻기 위해 홀가분하게 집을 나서보는 건 어떨까? 학문과 풍류를 즐겼던 선현들의 행적을 더듬으며, 오래된 툇마루에 걸터앉아 시간 속을 흐르는 풍경을 마주해보는 것도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봉화 춘양을 지나 노루재를 넘기 전 노루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진성이씨 집성촌이 있고, 고택과 정자가 즐비한 풍경이 들어온다. 노루골 앞에는 영동선 녹동역이 숨은 듯 폐역이 된 채 자리를 지키고, 옆으로 문 닫은 대폿집과 서낭당이 철길 옆을 자리했다. 포근한 남향 마을 노루골은 진성이씨 집성촌이다. 난은 이동표(1644~1700)가 터를 잡은 300년 세거지로, 이동표가 삼척부사에 임명돼 부임길에 노루골 산천이 눈에 띄어 정착하게 됐다. 기품 있는 선비들이 많이 나와 영남의 손꼽히는 유림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동표는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집의, 호조참의, 전라도관찰사로 내정되었으나 모친 봉양을 위해 작은 고을 관리(광주목사)를 원했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그의 관료 생활과 목민 생활의 행적을 살펴보면 불의를 용납하지 않은 깐깐한 선비로 국가의 대의를 위해 일했고, 워낙 청렴하게 살아온 터라 이동표가 사망하자 장례를 치르기 힘들 정도로 빈곤했다고 전한다. 2023년 이동표 선생 학문과 사상 학술발표회가 있었으며, 진성이씨 후손들은 불천위 제사를 모시고 있다. 노루골 마을엔 이동표의 아들 두릉 이제겸(1683~1742)이 지은 두릉정이 있고, 소파정, 운고정, 귀은재 등 정자와 이정하 고택, 충간공 난은신도비도 있다. 입향조 이동표의 아들 이제겸은 노루골에 본격적으로 터전을 열었다. 이제겸은 영조 원년 문과급제해 참사관이 되었으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으나, 경사로 풀려나기도 했다. 이후 노루골에 은거하며 두릉정을 짓고 산천을 벗하며 여생을 보냈다. 두릉정 앞으로 네모난 연못에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는 두릉정을 주렴처럼 살며시 가리고, 화장산을 등진 두릉정은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근엄하고, 절제된 짜임새와 중후한 품격으로 옛 멋을 느끼게 한다. 운고정은 운고재 이중경(1724~1754)을 기리기 위해 1906년 건립됐다.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로 온돌방을 둔 중당 협실형이며, 전면에 4분합문을 설치해 마루방을 이루게 했다. 귀은 이교영(1823~1895)은 청송부사, 풍기군수, 영해부사 등 아홉 고을을 다스리며 여덟 고을에 선정비가 있으며, 만년에 귀은재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4월 초. 개울가로 늘어선 벚꽃이 필 때는 화사함이 정자를 감싼다. 이정하 고택은 참봉 이흥노(1849~1923)가 건립한 가옥으로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위압적이지 않으면서 근엄하고, 온화한 분위기의 이정하 고택에는 시집올 때 타고 온 가마가 잘 보관되고 있기도 하다. 창애정은 창애 이중광(1708~1778)이 건립한 정자로 운곡천이 내려다보이는 춘양구곡 5곡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이다. 토속 담장 사이에는 사주문을 세워져있다. 창랑정사는 두릉 이제겸을 추모하기 위해 1901년에 건립한 정자다. 창애정 맞은편 동쪽 언덕 위에 있으며 이제겸의 호가 말년에 ‘창랑’이었기에 창랑정사라 이름 지었다. 4월이 되면 속살을 드러낸 흙냄새와 꽃향기가 뒤섞인다. 산불과 국내외 혼란스런 정세 탓에 헝클어진 상념도 다스릴 겸 봄바람을 타고 향수와 옛사람의 흔적이 있는 길로 나서보자. /류중천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4-03

아이와 함께 찾은 단석도서관

출근 할 때 조금 피었던 벚꽃은 퇴근 무렵에 온전히 다 피어버렸다. 팝콘이 튀겨지듯 작은 꽃송이들은 금세 한 아름 나무를 다 채워 새하얗게 만들어버렸다. 주말을 앞둔 경주사람에겐 위험신호다. 벚꽃 풍경이 보여주는 세상은 더없이 아름답지만 교통지옥은 끔찍하다. 더욱이 이번엔 마라톤까지 추가다. 주말이 되기 전 해치워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을 마무리한 다음에야 잠시 벚꽃을 눈에 담았다. 봄은 담아야 하니까. 그래야 한 해를 버티고 다음 봄까지 견뎌낼 것이다. 올해는 개나리까지 유난히 풍성하게 피었다. 드디어 주말이 되자 우리 가족은 관광객과 반대 코스를 살폈다. 갑자기 소설가가 꿈이 된 아이는 요즘 책이 더 좋아진 듯하다. 덕분에 최근 들어 도서관에 가자고 조르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이번 외출은 건천에 위치한 단석도서관으로 정했다. 1996년 11월 22일에 개관한 공립 도서관이다. 건천초등학교 근처에 위치해 있어서 첫 방문에도 찾기가 쉬웠다. 3대 정도의 주차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황성동에 위치한 중앙도서관이나 충효에 있는 송화도서관 등에 비해 규모가 작고 아담하다. 정감가는 외관이다. 1층에는 일반 도서 자료실, 2층에는 열람실과 어린이 도서 자료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 일반 도서 자료실엔 직원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어색함을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엔 한 가족인 듯 보이는 일행이 책을 읽고 있었다. 읽을 책을 얼른 고른 후 자리를 잡았다. 입식 형태의 좌석도 있었지만 어린이 도서 자료실이라 그런지 좌식으로 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입식 공간과 달리 어느 정도 분리된 느낌이라 좌식을 택했다. 바닥에 앉자 따듯한 온기가 올라왔다. 아이가 고른 책 한 권, 내가 고른 책 두 권. 엄마가 고른 책은 경북독서친구에서 선정한 책 중 일부다.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책들을 읽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나머지 두 권도 싫은 내색 없이 읽어나갔다. 시내 쪽 시립도서관들보다 사람이 없어 조용하니 책에 더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책 3권을 읽는 동안 먼저 있던 가족 일행은 돌아간 듯했다. 3권째 책을 완독한 아이는 조바심이 나보였다. 부쩍 어린이 자료실에 비치된 책보다 일반 도서 열람실에 비치 된 책에 관심을 보이고 있던 터라 1층 상황이 궁금한 듯했다. 밖으로 나오니 대신 똑똑하게 생긴 아이 한명이 스스로 책을 대여하는 중이었다. 다 읽은 책은 제자리에 정리하고 빌려 갈 책만 따로 챙겼다. 키오스크 방식으로 책을 빌린 후 1층으로 내려갔다. 검색용 컴퓨터로 아이가 원하는 책을 검색했다. 이곳에 보유 중인 6만2239권 중에 그 책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려 유리문 앞에 섰는데 귀여운 문구가 보였다. 고양이가 들어오니 문을 꼭 닫고 다니라 적혀있다. 누굴까? 분명 근처에 있을 듯 했다. 차에 몸을 싣는 순간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 생활 탓인지 털은 꼬질꼬질해 보였지만 끼니는 잘 챙기는지 토실토실한 외형이었다. 작은 도서관과 고양이가 묘하게 잘 어울렸다. 덕분에 아이에게 이곳 인상이 한층 더 좋아졌다. 귀여운 고양이가 앞마당을 지키고 있는 단석도서관은 여느 시립 도서관과 같은 운영시간을 갖고 있다. 자료실은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주말은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며 열람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된다. 매주 월요일과 법정공휴일은 휴관일이다. /박선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4-03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다

지난 3월 27일, 봄비가 흩날리자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어떤 이는 울기까지 한다. 이는 단비가 아니라 생명수다. 28일 새벽까지 내린 강수량이 겨우 1~3mm에 불과했지만 그 적은 양으로도, 일주일째 의성을 시작해 안동, 청송, 영양, 영덕으로 내달리며 속수무책 미친 듯 날뛰던 화마를 진정시킨다. 흩날리듯 내린 봄비의 도움으로 그렇게 주불을 잡았다. 그러나 그 피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화마가 지나간 자리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처참하다.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80여km(직선거리)나 떨어진 영덕 바다 끝 석리마을을 전소 시킬 것이라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일명 따개비 마을을 폐허로 만들고도 성에 차지 않는 듯 포효하며 바다위에 떠 있는 배까지 태워버린 성난 화마는 그렇게 바다도 태워버릴 기세였다. 22일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안동 길안까지 확산된 25일, 낮 기온이 28도까지 오르며 더 건조해진 나뭇잎에 때마침 불어 온 강풍을 타고 불길은 영덕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비화(飛火)되어 내달린다. 시급히 내린 대피령보다 화마가 먼저 들이닥친다. 시뻘건 솔방울이 날아다니는 불구덩이 속에서 극한 공포와 함께 지옥을 보았노라 그들은 말한다. 화마가 지나간 자리. 집도 추억도 일상도 남김없이 타 버렸다. 영덕 국민체육센터 이재민 대피소를 찾았다. 재난 기부 물품들이 쌓여가고 많은 봉사자가 분주히 오간다. 강구 여성의용소방대원들, 행정안전부 재난심리회복 지원센터, 대한적십자사 외에도 각지에서 모여든 많은 봉사단체 단원들이 힘들어하는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다. 산불 피해 지원 성금도 줄을 잇는다. 심각한 산불피해를 본 의성, 안동, 청송, 영양, 영덕 5개 지역은 경북도에서 ‘긴급재난지원금’도 지급 계획이다. 강구 여성의용소방대원들은 영덕에 불길이 닿은 25일 그날부터 봉사중이다. 삶의 터전이 전소된 피해자들이 임시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봉사는 계속된다. 피해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크다보니 복구가 쉽지 않아 장기간이 될 것 같다며 김성호 영덕군의회 의장이 찾아와 수고를 부탁한다. 도시락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이들에게 지나가던 많은 사람이 엄지 척을 한다. 힘든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자기들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고맙고 든든하다. 행정안전부 재난심리회복 지원센터 김지태님은 부산에서 왔다. 재난을 당한 피해자들은 물론 구조요원, 봉사자, 산불을 경험한 누구라도 원하면 현장에서 초기상담으로 심리적 응급처치를 한다. 피해자들의 힘든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위로한다. 설마 했던 집이 전소된 것을 보고 온 피해자가 대피소를 방문한 정치인에게 욕을 하고 고함지르는 것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 또한 마음을 푸는 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심하면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자분자분 희망을 상담하면서도 가슴은 먹먹하단다. 그 어떤 물건도 인연이 다하면 떠난다지만 평생을 살아 온 거처가 한순간에 사라진 이 엄청난 현실 앞에서 그들은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또 내일을 희망한다. 절망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보듬고자 많은 사람이 불길보다 더 뜨거운 온정 담아 봉사로, 물품으로, 심리상담으로, 성금으로 희망을 전한다. 희망은 절망을 치유한다.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4-03

LP와 함께한 집들이

오랜만에 집에서 하는 집들이에 초대받았다. 귀찮고 불편해서 대부분 사람은 맛집을 골라 배달한 음식을 내놓거나 식당에서 먹고 새집을 소개하고 티타임을 갖는 것으로 대신한다. 이런 과정도 생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이번 초대는 아주 융숭한 상차림이었다. 아침부터 전복을 솔로 문질러 손질해 솥밥을 하고, 향긋한 달래장을 곁들여 냈다. 가장 좋아하는 떡볶이도 놓였다. 이렇게 안주인이 준비하는 사이 바깥주인은 손님들을 데리고 안방에서 두 아이의 방과 팬트리까지 소소한 사연까지 덤으로 올려 들려주었다. 전망 좋은 고층 아파트의 장점을 살린 어여쁜 집이었다. 감성파인 남주인이 준비한 하이라이트는 티타임에 나왔다. 밀크티부터 시원한 녹차 물 건너온 커피까지 골라 마시는 재미가 있었다. 여기에 차 맛을 깊게 해주는 음악을 추가했는데, 턴테이블이 거실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어릴 적 우리 집 안방에 젤 좋은 자리 차지했던 전축이 떠올랐다. LP판을 올리고 바늘을 올려주면 낮게 ‘지직’ 소리를 내며 좋아하던 임병수의 ‘약속’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었다. 집주인이 준비한 LP는 여러 장이었다. 제일 먼저 들려준 것은 1984년 강변가요제 앨범이었다. J에게, 오랜만에 듣는다. 잘 들으면 아는 목소리 나올 거라고 귀띔한다. 중간쯤 한석규의 목소리다. 장려상, 동국대학교 덧마루 팀의 한 사람이었다. 노래 제목도 ‘길 잃은 친구에게’이다. 직설적인 요즘 제목과 다르게 다정하다. 그다음 음반은 드라마 ‘멜로가 체질’ OST였다. 열 번은 돌려보며 대사와 장면을 외울 정도인 최애 드라마이다. 노래가 나올 때마다 어떤 장면에 깔리던 곡인지 알아 더 좋았다. 마시던 차가 떨어져 리필 받아 마셨다. 아파트 입주까지 바닥과 냉장고 같은 것을 골라야 하는 선택지가 너무 많아 힘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즐거운 고민이었을 거라는 것을 그들의 얼굴에 미소가 알려준다. 또 다른 LP가 돌아가고 그동안 창고에 있다가 앞으로 나와 손님을 맞이하는 군자란의 전설까지 들었다. 그 사이 음악은 우리를 노래가 태어난 시대로 데려가 주었다. 주말에 새로 들어선 도서관을 방문했다. 집들이는 이미 지난 후였고, 많은 사람이 책장 사이, 빛 좋은 창가 자리, 또 조용한 구석에 노란 조명을 켜 둔 자리까지 거의 빈자리가 없었다. 그중에 2층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남자 한 분이 작은 턴테이블을 앞에 두고 앉아 헤드폰을 쓰고 있었다. 책장에 꽂힌 앨범 중에 듣고 싶은 것을 골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CD와 DVD 보는 자리도 따로 있었다. 벽면이 피아노 건반으로 구성된 하모니스텝의 경우 평소에는 책을 읽는 공간으로 쓰이다가 필요하면 소규모 음악 공연장으로 변신하는 오픈 스튜디오로 구성됐고, 경상북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흥해 농요 등을 감상할 수 있는 향토음악 전시 및 감상 코너도 마련돼 이곳이 영남권 최초의 음악 특성화 도서관임을 실감케 했다. 레트로 열풍과 더불어 최근 가요 업계가 LP 앨범 발매에 나서자 젊은이들이 구매에 나섰다. 구매자의 연령별 비율을 살펴보면 10대(0.9%) 20대(16.5%) 30대(19.8) 40대(35%) 50대(21.2%) 60대 이상(6.6%) 순이었다. 이 중 30대 이하의 MZ세대 비율만 합치면 37.2%로 50대보다 많다. LP를 거의 접해보지 않은 세대인데 놀랍다. 그들에게 LP는 오래된 것이라기보다 처음 보는 새로운 문화다. LP 발매 성장세가 가장 두드러진 장르는 가요다. 새 노래를 발표할 때 CD앨범과 LP앨범을 같이 발매하기도 한다. 깊숙이 넣어 두었던 ‘화양연화’ LP를 꺼내 닦아야겠다. 두 번째 화양연화를 즐기려면. /김순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4-01

에코백, 정말 친환경적이 되려면

21세기 필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에코백. 요즘 길거리에서 이를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아마도 친환경적인 소비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에코백은 세계적인 연예인들이 ‘나는 비닐백이 아니다 (l’m not a plastic bag)’라고 적힌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유명해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환경을 위해 일회용품을 줄이자는 움직임 속에서 친환경을 내세우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이게 얼마나 환경에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에코백’은 ecology(생태학)에서 유래한 말로 친환경 가방을 말한다. 플라스틱 봉투 대신 사용하는 천연소재의 에코백이 사랑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가볍고 예쁜 디자인, 비교적 저렴한 가격, 친환경 소비라는 인식이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구매를 유도했다. 특히 친환경임을 내세워 소비자들에게 죄책감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며,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에코백을 선택하도록 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에코백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면서 필요에 의한 구입이 아니라 다양한 디자인을 소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각종 행사는 물론이고 유명 브랜드에서 제공하는 무료 에코백까지 더해져 어느새 집집마다 사용하지 않는 에코백이 쌓여가고 있다. 포항시민 A(47)씨는 “여러 행사에 참여해서 받은 에코백이 많다. 지난해에도 아이들이 받은 것과 합쳐 여러 개가 생겼다. 에코백을 받으면 처음에는 예쁘다 싶어도 집에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 친환경이라는 관심도 덜 해지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에코백을 만드는 데도 많은 자원이 소모된다는 사실이다. 친환경이 아닌 합성 원단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본래의 친환경이라는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는 부분이다. 생산과 폐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오히려 비닐봉지 한 장이 더 친환경적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천연소재가 아닌 합성 원단으로 만들어진 에코백은 이렇게 만들어진 가방은 모양새만 그럴듯하고 판매가 목적인 듯, 물건을 담기에도 적절하지 않다. 구입 시에 잘 따져봐야 하는 이유다. 에코백이 원래의 취지대로 친환경적이 되려면 이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우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비닐봉지를 대체한 에코백을 131회 이상을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완전한 효과가 있으려면 7100번까지도 사용해야 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에코백도 오랫동안 사용해야 그 가치가 드러난다. 반면 비닐봉지는 37회만 재사용하면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상쇄한다고 한다. 이는 에코백을 소모품처럼 사용하게 되면 비닐봉지보다 더 환경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에코백이 친환경이 되려면 중요한 건 재사용을 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를 오래도록 사용하는 것인데 이미 가지고 있는 에코백을 일상적으로 활용하고 불필요한 구매나 수집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함께 나눠 쓰는 방식도 고려해야 한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기존 제품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새로 구입하는 것보다 더 현명한 선택이다. 에코백을 오래 사용하기 위한 세탁 방법도 잘 알 필요가 있다. 천 소재이기 때문에 쉽게 더러워질 수 있어서 세탁기보다 손빨래를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모양이 뒤틀리지 않고 구김이 없고 프린팅도 손상이 덜 하다. 이처럼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 에코백을 제대로 사용한다면 정말 친환경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허명화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4-01

전통시장에 봄소식이 도착했어요

봄은 어디에서 가장 먼저 우리에게 도착 소식을 알려줄까? 그 궁금증에 관한 대답을 들려주는 풍경이 있다.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에 자리한 의성전통시장은 1946년 정기시장으로 출발한 역사 깊은 시장이다. 마늘전, 곡물전이 있고 주요 판매 상품은 양파, 홍화, 고추, 참깨 등이 많이 거래되는 곳이다. 지역민은 물론 외지인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진 ‘아는 사람은 이미 아는’ 공간이다. 특히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은 연탄구이 무뼈닭발이다. 불향 가득한 닭발집에는 막걸리 한 잔에 벌겋게 양념한 닭발 안주와 묵밥이며 잔치국수 손님으로 북적인다. 2일, 7일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떡볶이, 어묵, 핫도그, 호떡 노점에도 인파로 북적이고 오징어며 고등어를 파는 어물전 앞도 흥정으로 시끌벅적하다. 정겨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는 장터의 봄소식을 전해주는 노점 꽃집이 가장 인기다. 봄을 맞은 장터에는 각종 꽃모종과 꽃화분이 가득하다. 다육이부터 천리향, 아젤리아, 퀸로즈, 노블, 장미, 목마가렛, 비올라, 미니수선화, 왕수선화, 은방울수선화 등 빨갛고 노랗고 알록달록한 꽃이 상자 안에 정렬해 주인을 기다린다. 주인장은 물 주는 법, 관리하는 법을 알려주느라 바쁘고 손님들은 팻말에 적힌 꽃이름을 외우고 꽃내음을 맡느라 바쁘다. 화분갈이를 할 계획을 세우고 화분 받침대가 필요한지도 따져보고 색깔별로 한 종류를 여러 개 구입해 가기도 한다. 가격도 저렴해 단돈 몇천 원에 봄을 산 손님들은 즐거운 얼굴로 집으로 돌아간다. 도동리에 거주하는 김씨 할머니는 “꽃구경하는 재미에 장날이면 자주 나온다”고 한다. “즐거울 일이 별로 없는데 이렇게 꽃이 예쁘게 핀 것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며 활짝 웃었다. 바쁜 발걸음도 멈추게 하는 노점 꽃집 앞엔 얼굴 찌푸리는 사람 하나 없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아름다운’ 봄꽃 가득한 시장에서부터 어느새 우리 앞에 성큼 봄이 다가와 있다. /백소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4-01

고녕가야 답사기

역사 유적지를 직접 방문하는 고적답사는 책으로 공부하는 것과는 느낌부터가 다르다. 학습의 심화효과는 물론이거니와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느낌이 마치 역사와 마주치는듯한 감정으로 신비롭다. 고녕가야가 존재했던 경북 상주시 함창읍 일대를 답사했다. 고녕가야는 경북 상주시 함창읍과 예천읍 지역에 존재한 6가야 중 하나다. 다른 가야에 비해 역사가 짧다. 위치가 북쪽에 떨어져 있어 존재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학계에서는 건국 당시 위치에 대한 이론과 존재가 자주 논란을 빚는다. 하지만 역사란 기록에 의해 전승되고 유물과 유적으로 그 실체를 증명하기에 그런 논란 따위에는 개의치 않는다. 고녕가야의 역사는 42년 즉위한 1세 고로왕에 이어 2세 마종왕, 3세 이현왕으로 이어졌으나 서기 254년 7월 신라 이사금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내가 방문한 고녕가야의 옛 성터는 남산고성이다. 일명 오봉산성으로 부르고 있다. 성의 둘레가 4530척이고 우물이 한 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개 고대국가들은 도읍에 성을 쌓고 기초를 튼튼히 해 나라를 유지하고 접경지역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성을 지었다. 내가 찾은 남산고성도 영남의 길목과 낙동강 중류연안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이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신라와 백제의 각축장이 된 듯하다. 고성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오봉산 봉화봉이 나오고 그 밑으로 성벽이 무너진 곳을 발견할 수 있다. 성터의 다른 곳에도 석축이 무너진 흔적을 발견할 수 있고 성터로 짐작할 수 있는 돌무더기들도 볼 수 있다. 또 돌무더기를 따라 약 200m 정도 더 올라가면 고녕가야 병사들과 신라군이 만나 전투를 벌였을만한 장소와도 마주친다. 창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고녕가야의 큰 저수지는 공검지다. 다른 이름으로 공갈못이라 한다. 이는 제천의 의림지,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와 가야시대에 축제된 농업용 저수지이다. 공검지는 서기 1997년. 경상북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됐다. 공검지의 축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재 신채호는 함창의 고녕가야를 ‘고링가야’로 표기했다. 이 ‘고링가야’가 와전되어 ‘공갈’이 되었고, 현재의 ‘공갈못’이 그 유허라고 했다. 공검면이라는 이름도 이 못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예부터 공검지는 연꽃이 풍성하여 꽃이 만발하면 중국의 전당호와 견줄 만하다고 하였고, 이로 인해 ‘공갈못 노래’가 만들어져 전파되기도 했다. 유적지 현장에서 보고 듣는 역사 이야기가 고적답사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김성문 시민기자

2025-03-30

국학진흥원에 보관 중인 ‘금강유람가’

일제시대 금강산을 여행하고 ‘금강유람가’를 쓴 장일상 선생의 손자 장세민씨(칠곡군 거주)를 만나 ‘금강유람가’의 전승 내력과 내용을 들어 보았다. ‘금강유람가’는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한문의 진본이 보관 중이다. ‘금강유람가’는 담재 장일상 선생(1897-1963)이 1930년 30대 나이로 금강산을 둘러보고 적은 기행문이다. 본래는 한문으로 글을 썼으나 부모님이 볼 수 있게 한글로도 작성했다고 한다. 그는 “진서 한불 꾸려놓고 언문으로 가사지어 부모님께 드린다”고 별도 주석을 붙였다. 효심을 느끼게 한 대목이라 하겠다. 장 선생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 때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한 장석영 선생의 손자다. 손자 장세민씨에 의하면 집안에 언문으로 필사한 ‘금강유람가’가 전해져 오는데, 조부의 형수인 풍양 조씨와 학성 이씨, 맏며느리 여강 이씨 등이 필사했고, 현재 본인은 맏며느리 여강 이씨가 필사한 것을 보관 중이라 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장일상 선생은 1930년 음력 6월 15일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친구들과 칠곡 약목을 출발하여 석달 간의 금강산을 유람했다. 이후 경원선을 타고 철원을 거쳐 서울로 돌아와 총독부 건물과 동물원으로 변한 창덕궁을 둘러보고 “주권 잃은 백성의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내용 중에 금강산을 둘러보니 많은 사람들이 석벽에 이름을 남기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당시만 해도 금강산 구경이 쉽지 않은 여행길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또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우리말 방언이 많이 수록돼 있다는 것이다. 당시 칠곡을 중심으로 영남지역 방언을 연구하는데도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예를 든다면 ‘돌뿔딱’(돌뿌리) 우케덕석(벼를 말리는 멍석), 산만당이(산꼭대기), 까끔끼다(팔짱끼다), 틔들다(끼어들다), 홑바락이(홑옷바람) 십전구도(엎어지고 자빠지며), 수괴지심(부끄러움), 모력(힘을 다해), 괘영하다(영정을 걸다), 소두방(솥뚜껑) 등의 표현이다. 장세연씨는 내방가사 작가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내방가사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지역 목록을 넘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김윤숙 시민기자

2025-03-30

문화재 가치로서 최치원 둔세시

현재 가야산 홍류동 계곡 농산정 건너편 바위에는 신라시대 문장가 최치원의 둔세시가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때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선비들이 그의 글을 보러 찾아왔다고 소문난 시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란 제목의 이 시의 내용은 이렇다. “돌 사이 흐르는 세찬 물에 온 산에 울리니/ 곁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 분간하기 어려워라/ 옳으니 그르니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늘 두려웠으나/흐르는 물로 온 산을 에워쌌다네” 최치원이 조정의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가야산으로 은퇴한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평화로운 심경을 노래한 시다. 조선시대 한강 정구(1543-1620)가 쓴‘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는 “최 고운(崔孤雲)의 시 한 수가 폭포 곁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장마철이면 물이 불어나 소용돌이치며 바위를 깎아 내는 바람에 지금은 더 이상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725년 정식이 쓴 ‘가야산록(伽耶山錄)’에는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승려가 “돌에 최치원의 친필이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었다. 그래서 그가 이곳에 옮겨와 다시 새긴 것”이라 했다. 선비들의 유람록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최치원의 시는 처음 홍류동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던 것이 오랜 장마와 폭우로 글씨 대부분이 마모된 것을 우암 송시열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농산정 맞은편 바위에다 자신의 글씨로 다시 새겨 넣은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시대에 살았던 학자이자 문장가이며 사상가다. 말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산에 들어와 해인사와 관련한 많은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해인사와 최치원의 인연은 해인사에 친형인 현준스님이 있었던 것과 불교 관련 책들을 그가 많이 썼던 것 때문이다. 가야산에 은거하며 쓴 최고의 작품으로 ‘법장화상전’이 있으며, 해인사 창건과 중창에 힘쓴 스님들의 기록인 ‘순응화상찬’, ‘이정화상찬’ 등 수도 없이 많은 최치원의 기록이 남아 있다. 최치원과 가야산의 인연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계곡 바위에는 시대를 떠나 많은 조정의 인물들이 찾아와 크고 작은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새긴 석문을 살펴보면 당시 조정 인물의 반은 홍류동 계곡에 다녀갔다고 해도 거짓이 아닐 듯하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그의 은둔 생활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친형인 현준 스님과 도우를 맺고 한가히 은거하다 노년을 마쳤다.” 가야산과 해인사는 최치원과 뗄 수 없는 인연의 장소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석벽은 홍류동 계곡의 노상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돼 있다. 바위에 새긴 글씨는 풍랑으로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찾는 많은 이들이 이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최치원 둔세시의 역사성과 문화재적 가치를 잘 살펴 지금이라도 이를 문화재로 등록하는 절차를 밟았으면 좋겠다. 문화재의 훼손도 막고 후손으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성두 시민기자

2025-03-30

구구삼삼 행복대학

“구구삼삼을 아세요? 인생은 60부터입니다.” 구구삼삼(9933)은 30살의 인지로 3번을 산다는 개념으로 100세 시대에 노년기를 보다 활기차게 살아가자는 뜻으로 붙여진 조어다. 대구 서구 비원노인복지관(관장 권덕환)에서는 지난 3월 14일 비원노인복지관 강당에서 9933 행복대학 4기 입학식 및 제3기 졸업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장에는 류한국 서구청장, 정영수 서구의회의장, 이재화 대구시의회 부의장, 지역기관장 등 100여 명이 참석해 늦깍이 공부를 하는 노인들의 학습 의욕을 격려했다. 9933 행복대학은 노년기를 맞은 어르신을 대상으로 각종 강연과 취미활동, 여행, 문화 체험 등을 통한 수업을 하고 있다. 특히 노년기에 빠지기 쉬운 사회적 고립감을 해소하고 노년기 학생들 간 상호교류로 삶의 만족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 배움을 통해 두뇌를 자극해 치매 예방 등 건강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 이 과정은 2022년 구구삼삼 행복대학이 처음 문을 연후 올해로 3년째를 맞고 있다. 류한국 서구청장은 “9933 행복대학을 통해 젊고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이 너무 좋고 늘 건강하길 기원하고 졸업과 입학을 축하한다”고 축사를 했다. 행복대학 졸업생 박구정 씨는 “2년 동안 행복대학을 다니면서 정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또 다른 졸업생 한성주 씨는 “봉사활동과 지역행사 참여 등을 통해 노년기에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발표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3-30

꽃피는 봄날의 모꼬지 행사

톡 톡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춘삼월. 옆집 담장 넘어 매화나무 한 그루가 온 동네를 그윽한 향으로 채우는가 싶더니 벌써 4월의 벚꽃축제 소식이 여기저기서 난무하다. 여자들의 바깥출입이 쉽지 않던 시절에도 봄이 오면 진달래 꽃잎 따다 찹쌀전에 곱게 얹어 화전의 풍미를 음미하며 봄을 즐겼다. 화사한 봄꽃 소식은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모꼬지 행사를 부추긴다. ‘모꼬지’는 순 우리말이다. 놀이나 잔치 또는 그 밖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뜻한다. 모내기의 다른 표현인 ‘모 꽂이’가 ‘모꼬지’로 변모했다는 것이 민간어원설이다. 농경사회에서 가장 큰 일인 농사를 시작하는 봄철이면 품앗이가 생활이던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볍씨로 싹을 틔워 둔 모를 쪄서 두레질한 논에 옮겨 심었던 모내기가 모 꽂이라는 설이다. 모꼬지는‘MT(Membership Training)’를 대신해 쓰기도 한다. 하지만 모꼬지는 사사로운 모임을 뜻하고 MT는 공식적인 수련모임을 뜻한다 해서 다소 의미가 다르다는 이유로 모꼬지로 대신하는 것을 꺼리기도 한다. 봄날의 많은 모꼬지 행사 중 화수회(花樹會)라는 것이 있다. 같은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모임이다. 종친회와 유사한 친족 모임이지만 본관이 달라도 성이 같으면 함께 한다. 산업화에 따라 고향을 떠난 이들이 타향에서 만난 같은 성을 가진 친족들을 집안사람들이라는 유대로 덕담을 나누고 조상에 대한 은덕을 기리며 뿌리를 알아가는 소중한 모꼬지인 것이다. 화수회 개념의 집안 모꼬지 행사도 있다. 1년에 한 번, 꽃피는 3월에 타 지역에서 살고 있는 집안의 삼촌, 사촌, 오촌, 육촌이 고향에 모여 먼저가신 선조를 기리고 촌수의 개념도 알리며 친족끼리 친목을 다진다. 그러나 화수회나 집안 모꼬지 행사는 기성세대들에 한하는 경향이 있고, 젊은 친구들의 참석 유도가 쉽지 않다. 집안모임이나 제사에 대한 개념이 예전과 사뭇 다른데다 이미 우리나라 법은 조건이 합당하면 친모 성(姓)으로 성본 변경이 가능한 사회로 변하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에는 가문대대로 잘 정리되어 내려오는 족보(族譜)가 있어 자신의 혈통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족보는 개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 집안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 서양학자는 이를 두고 국가·사회·가정의 질서를 잡아주고 자손을 도덕적으로 바른길로 인도하는 족보의 기능을 높게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족보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많은 견해 차이가 있어 일부는 기득권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봄꽃들의 향연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마음을 들뜨게 한다. 진달래 꽃잎 따다 화전을 부치는 사람은 보기 힘들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상춘객이 되어 이 봄을 즐긴다. 달라진 세월 속에서 가까운 사촌끼리도 서먹서먹한 지금, 춘삼월 꽃 필 때의 친족 모꼬지행사가 계속 대(代)를 이을지는 모를 일이다. 매화를 지극히 사랑했던 퇴계 이황은 ‘시류를 따르라’ 했다. 지금은 AI 시대. 봄날 집안 모꼬지 행사를 다녀와 500여 년 전 다른 시대를 살다간 퇴계 선생의 이 말을 깊이 되새겨 본다. /박귀상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3-27

마음이 아플 때는 詩라는 약을 복용하라

살다 보면 누구나 힘든 날이 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듯 막막한 그런 날 말이다. 이 세상에 나를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혼자 내팽개쳐진 것 같은 절망이 밀려온다. 얼마 전 그런 일을 겪었다. 우주의 미아가 된 듯 누구 하나 손잡아 줄 이가 없어 보였다. 부모님은 오래전 돌아가셨고 친정 식구들은 모두 멀리서 제각각 살기 바쁘다. 허물없이 찾아갈 친구도 생각나지 않았다. 혼자 쓸쓸히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었다. 또각또각 내 구두 소리만이 밤거리에 울렸다. 이렇게 답답할 때는 무엇을 해야 할까. 걸으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자꾸 부정적으로 빠져드는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데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야 함을 깨달았다. 문병란 시인의 시 ‘희망가’를 한 줄씩 암송했다. “얼음장 밑에서도 / 고기는 헤엄을 치고 / 눈보라 속에서도 /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 절망 속에서도 /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 보리는 뿌리를 뻗고 / 마늘은 빙점에서도 / 그 매운맛 향기를 지닌다. //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 고통은 행복의 스승 /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 긴 고행 길 멈추지 말라 / 인생항로 / 파도는 높고 /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 한 고비 지나면 / 구름 뒤 태양은 다시 뜨고 /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 문병란 시 ‘희망가’ 전문 시인이 IMF 시절 힘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쓴 시라고 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어떤 어려움 앞에서 다시는 희망이 없을 것처럼 절망하고는 한다. 그래서 좋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지금 어두운 감정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 감정에 깊이 몰입되어 자꾸 절망 쪽으로 빠졌었다.‘희망가’를 한 줄 한 줄 소리 내어 읊조리다 보니 어두웠던 마음이 조금씩 희석되었다.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힘을 내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시낭송이 주는 치유 효과를 새삼 느꼈다. 시가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짐도 절실히 느꼈다. 사람은 우울하면 말을 하기 싫어진다. 그럴 때 일부러라도 또렷한 발음으로 천천히 시를 낭송해 보기 바란다. 사람의 말소리는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어서 긍정적이고 좋은 문장을 말하면 그 소리에 스스로 용기를 얻게 된다. 자꾸 반복해서 소리를 내면 어느 사이엔가 깊은 어둠에서 빠져나온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이 온갖 생각으로 복잡하고 괴로울 때면 다 덮어두고 시를 암송해 보길 권한다. 입 속으로 말고 꼭 소리를 내서 시를 읽어보기 바란다. 마음이 아플 때 시만큼 큰 치유의 약도 없다. /엄다경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3-27

불국사 목련

찬바람 불던 계절에도 관음전에 오르면 습관처럼 목련나무를 쳐다봤다. 언제쯤 피려나. 이번엔 때를 놓치지 않겠다 벼르고 있었다. 봄 강아지 꼬리 같은 보송한 모습을 한 꽃봉오리는 겨우 내내, 그리고 완연한 봄이 임박했을 때도 꿈적하지 않고 있었다. 아이를 등교 시킨 후 불국사로 향했다. 평일 오전이라 비교적 조용한 모습이다. 오늘은 대규모 단체 관광팀도 보이지 않는다. 달라진 날씨 탓인지 겹벚꽃이 벌써 꽃을 틔울 태세다. 철을 기다리느라 애써 붙잡고 있는 봉오리 사이로 진분홍 꽃잎이 제법 삐져나와 있다. 늘 조금 긴장하며 들어서는 사천왕문을 지나자 성급한 매화는 벌써 꽃잎을 떨구고 있다. 대웅전으로 올라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목적지로 향했다. 가파른 낙가교가 언제나 부담스러운 관음전이다. 관음전은 불국사 내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으로 조선 초기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계단을 오르는 수고스러움은 뒤에 만날 관음전 뒷마당의 매력과 비교할 수 없는 까닭에 열심히 오른다. 계단을 다 오르자 새하얀 목련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께 먼저 예를 표하는 것이 맞다 싶어 처마 아래에 섰다. 합장하며 올려다본 관음보살상 얼굴에 미소가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그날그날 찾아간 마음 따라 표정이 달라진다. 인사를 마친 후 뒷마당으로 넘어갔다. 햇볕에 바싹 말라 하얘져 버린 모래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 위로 드려진 기와 그림자가 선명하게 내려 앉아있다. 목련 나무가 있는 곳엔 이미 관광객 몇과 커다란 사진기를 든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동안 뒷 마당을 구경하며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경내에서도 조용한 편인데다 사람들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 까닭에 조용함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다. 멀리서 들려오는 염불 소리와 새 소리, 바람 소리가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롭다. 보통 10시쯤이면 염불이 시작된다. 사바세계, 극락세계에서 중생들의 고뇌를 해소해 주는 대자대비 보살로 알려진 관세음보살이 머무르는 공간이어서일까. 금세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시 후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자 목련 나무 앞에 섰다. 짙은 무채색 기와 담장 옆에 자리 잡은 하얀 꽃들이 파란 하늘을 만나 더 환해 보인다. 세월과 자연이 만나 만든 색들은 조금의 이질감 없이 잘 어우러진다. 합장하듯 모아진 덜 여문 꽃봉오리는 좀 더 노란 빛을 완전히 펼쳐진 꽃잎들은 더 하얗게 조금씩 다른 얼굴들이다. 이쪽저쪽 아쉬울 것 없이 한참을 들여다 보고 나서야 마당을 떠났다. 가장 아래로 내려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입구에 있는 매점에 들러 습관처럼 콘아이스크림을 샀다. 따뜻한 날만큼 부드럽고 달콤하다. 봄은 봄이다. /박선유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3-27

봉화사람 이상섭의 ‘더불어 사는 삶’

3월이지만 봉화 산골은 잔설이 남아있고 아직 바람이 차갑다. 자식들은 도시로 떠나보내고 어른들만 덩그러니 남은 농촌 마을에는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봉화군엔 마을을 돌아다니며 칼갈이 봉사와 수도, 보일러 수리 등 손길이 필요한 노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이상섭(65)씨가 있다. 몇 년째 봉화 지역 마을들을 방문해 어르신들을 돕는 봉사활동 하고 있으며, 올겨울에도 30여 마을을 다니며 재능나눔 봉사를 했다. 그리고 봉화군 춘양면 20개의 마을에 보일러, 수도, 변기 등의 무상수리 쿠폰을 배부해 소외계층이나 손길이 필요한 어르신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이상섭 씨는 봉화군 소천면 임기 산골에서 태어나 춘양면 도심리에서 살고 있다. 어려운 산골생활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어르신들의 고충을 알고 있기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기술을 활용해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데 이바지 중이다. 추운 겨울에 갑자기 보일러가 고장나면 20~30리 떨어진 읍내에서 수리기사가 바로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간단한 고장 같은 경우는 아예 방문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르신들은 이런 경우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고, 오래된 주택에는 단열이 부실하고 외풍이 세서 추위에 떨어야 한다. 이런 산골생활을 잘 알고 있는 이상섭 씨는 도움이 필요한 곳에 달려가 봉사를 하고 있다. 어려운 노인이나 취약계층에게 어려운 사정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 이 씨는 춘양면사무소를 찾아가 20개 마을 이장들에게 ‘무상수리 쿠폰’ 배부를 부탁한다. 수리 또는 교환을 해야 할 때는 이 씨의 사비를 들여 연탄보일러 등을 새 보일러로 교체해주기도 한다. 어느 마을에선 보일러 순환모터를 교체 수리하는 등 춘양면 마을 곳곳을 찾아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 1인 가구 증가로 지역사회의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소통 부재로 농촌 노인세대도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전통적으로 농촌 마을은 힘든 작업을 같이 하고, 지역공동체를 형성해 서로 돕고 소통하며 미풍양속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농촌마을 공동체가 예전과 같지 않다. 독거노인들은 무기력과 외로움을 겪는다. 이상섭 씨는 몇 년 전 큰 사고로 수술을 했고,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나 새롭게 태어난 삶이라 생각하고 손길이 필요한 곳에 언제든 달려갈 것이라고 한다. 이씨 같은 사람이 있어 외롭게 살아가는 농촌 어르신들이 위로와 힘을 얻고 있다. 지역사회에 퍼지는 이런 선한 영향력은 많은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는 이상섭 씨의 사연이 산골 마을에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류중천 시민기자

2025-03-25

콩국의 계절이다

해가 지자 봄바람이 제법 차다. 이런 날에는 뜨끈한 국물이 생각난다. 월정교의 야경을 보다가 경주 사는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따뜻한 음식을 추천해달라 했다. 오래된 맛집이라며 콩국을 먹어보라고 했다. 콩국수? 라고 되물으니 콩국이라고 고쳐 말했다. 일단 맛을 봐야 안다며 위치를 상세히 설명했다. 이른 저녁 시간이라 그런가, 주차장이 한산해 맛집이 맞나 의심스러웠다. 메뉴를 보니 직접 만든 순두부찌개도 있어서 낯선 콩국은 놔두고 익숙한 찌개를 시켰다. 옆 테이블에 외국 손님과 뒤에 앉은 손님은 콩국과 꽈배기가 함께 나오는 세트 메뉴를 시켰다. 그 맛이 궁금했지만 남편이 여름에 와서 먹자고 해 말았다. 콩국은 따뜻한 콩물에 찹쌀과 밀가루 튀김을 잘라 넣고 콩가루와 달걀노른자를 풀어 먹는 대구광역시의 향토 음식 중 하나이다. 대구 콩국은 1960년대 대구에 정착한 화교들이 만들어 팔던 중국 음식에서 영향을 받은 음식이다. 중국의 토우장(豆醬)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지만 대구식 콩국이 훨씬 진하고 고소할 뿐만 아니라 찹쌀 튀김과 밀가루 튀김 두 종류를 같이 사용하여 발효시킨 밀가루 반죽을 튀겨 낸 중국의 요우티아오와는 차별화된다. 대구 콩국은 포장마차와 24시간 영업을 하는 콩국 가게가 많았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택시 기사와 경찰 등의 야간 근무자와 술꾼들에게 인기 야식이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아이는 물론 학생 등 남녀노소 누구든 좋아하는 음식이다. 설탕이나 소금을 식성에 맞게 첨가하여 먹는다. 콩국을 판매하는 대부분 식당에서 양배추와 달걀을 구운 토스트를 같이 판매하고 있어 한 끼 식사나 해장국으로도 손색이 없다. 아이들 식성을 고려해 돈가스를 곁들인 곳도 있어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콩을 깨끗이 씻은 후 하루 정도 불려 삶은 다음 걸쭉하게 갈아 콩국을 만든다. 콩물에 콩가루, 달걀노른자, 땅콩, 들깨, 참깨를 넣는다. 찹쌀과 밀가루는 반죽하여 숙성시킨 후 길게 튀긴다. 튀김을 잘라 콩물에 넣어 준다. 콩물만 있을 때보다 꽈배기가 동동 뜬 모양이 훨씬 식욕을 자극한다. 1980년대 문을 연 제일콩국을 비롯하여 대구 지역 곳곳에 콩국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다. 특히 대구도시철도 3호선 명덕역 주변에 콩국 전문점 여럿이 성업 중이다. 다른 지역의 콩국이 차게 먹는 냉국이라면 대구 콩국은 겨울철에 생각나는 따뜻한 음식이다. 콩으로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 대구 사람들의 식성을 잘 반영한 현대에 생긴 향토 음식이다. 부산 등 영남지방에서 주로 알려져 있다가 TV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포항 오천시장에서는 우뭇가사리 묵을 넣어서 우뭇가사리 냉콩국으로 판다. 더운 날 시장에 가서 몇 병 사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꺼내 마시면 속이 든든하다. 물에 불린 콩을 삶아서 맷돌 또는 믹서기로 간 다음, 소금으로 간은 맞춘다. 레시피에 따라 국수를 넣어 콩국수로 먹기도 하고, 우무를 말아 우뭇국으로 먹기도 한다. 대구에 사는 지인이 주말에 콩국을 먹었다며 자신의 블로그에 사진을 올렸다. 우연히 맛을 본 후 빠져버렸다고 했다. 소울푸드라며 다른 지역에 가서도 맛집을 찾아내 친구와 방문했다고 한다. 6·25 전쟁 당시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에게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벽에 붙은 집이다. 포항에도 콩국을 파는 곳이 있을 거라고 해 검색하니 같은 분점이 용흥동에 성업 중이었다. 꽈배기가 헤엄치는 콩물을 보니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서리태 두유라도 꺼내 따라 해 봐야겠다. 남편에게 꽈배기도 사 오라 주문을 넣는다. 오늘 저녁은 뜨끈하고 달달한 콩국이다. /김순희 시민기자

2025-03-25

나른한 봄날 포항초로 깨우세요

사방에서 봄이 쏟아진다. 휴대폰 속 지인들의 사진도 앞다투어 봄소식을 전하느라 손길이 바쁘다. 바야흐로 꽃샘추위가 물러나 날씨가 따뜻해지고 자연이 새롭게 살아나는 때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불청객처럼 찾아온 환절기로 면역력이 떨어지고 알레르기, 감기로 인해 건강에 신경이 쓰이기도 한다. 이럴 때는 무엇보다 제철 음식이 최고다. 봄철 나른한 입맛을 깨우고 에너지를 찾아주는 제철 음식 중 슈퍼 에너지라 불리는 ‘시금치’가 있다. 시금치는 비타민을 포함해 엽산, 철분, 루테인, 미네랄 등이 들어있어 모두가 반기는 음식이다. 포항에도 특별한 시금치가 있는데 포항의 바닷바람을 머금고 자란 이 시금치를 ‘포항초’라 부른다. 2015년 1월에는 정부에서 보증하는 지리적표시농산물 인증을 받았다. ‘포항초’라는 이름만 들어도 어디에서 재배되는 시금치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포항의 호미곶, 곡강을 비롯해 청림동, 연일읍, 동해읍 등에서 출하된다. 일 년 내내 재배할 수 있는 일반 시금치와 달리 겨울에만 재배한다. 또 포항의 바닷가에서 재배되어 풍부한 햇빛과 적당한 염분을 머금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란다. 바람의 영향으로 길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퍼져 자란 일반 시금치보다는 길이가 짧은 게 특징이다. 그래서 뿌리부터 줄기와 잎까지 영양분이 고르게 스며있어 일반 시금치보다 당도가 높다. 피로 회복과 감기 예방, 콜레스테롤 감소의 효능이 있어 봄철 입맛을 돋우고 활력을 되찾는데 제격이다. 수확 후에도 잎이 쉽게 시들지 않아 저장성이 뛰어나고 신선도를 유지하기도 쉬워 보관과 유통하기에도 어렵지 않다. 외식업에서도 포항초 시금치는 인기다. 최근에 포항초가 들어간 닭강정이 인기를 끌기도 하고 함박스테이크와 파스타에 포항초를 넣어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기도 한다. 영양사들도 꼭 챙겨 먹는다는 건강과 맛을 동시에 잡는 슈퍼푸드 시금치, 가정에서도 ‘포항초’ 시금치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다양하다. 조리법에 따라 다양한 식감을 즐길 수 있는데 살짝 데쳐 나물로 먹으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국이나 찌개에 넣어 먹기도 하고 부침개나 쌈밥으로 즐기면 더 특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포항초로 가정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 두 가지다. △포항초 무침 재료: 포항초 100g, 참기름 1/2큰술, 소금 1/2작은술, 설탕 1/2작은술, 간장 1큰술, 다진 마늘 1/2큰술, 고춧가루와 통깨 약간 1. 포항초를 깨끗이 씻어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30초~1분가량 데쳐 찬물에 헹구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짧은 시간에 데쳐야 영양소 파괴를 최소화할 수 있다. 2. 볼에 잘라 놓은 포항초를 담고 참기름, 다진 마늘, 간장, 고춧가루, 설탕을 넣고 버무린다. 3. 통깨와 참깨를 뿌려 마무리한다. ※된장으로 무쳐도 맛있다. △포항초 계란볶음 재료: 시금치 1/2단, 계란 5개, 소금 1/3T, 설탕 1/4T, 식용유 2큰술, 대파 1. 시금치를 손질해 깨끗이 씻어 적당한 길이로 쓴다. 2. 볼에 달걀 5개를 넣고 소금을 넣어 간을 하고 설탕으로 계란 비린내를 잡는다. 3. 달군 팬에 식용유를 붓고 스크램블 에그를 만든다. 익으면 접시에 담는다. 4. 식용유에 잘게 썰어놓은 대파와 소금으로 파기름을 내고 시금치를 넣는다. 5. 살짝 숨이 죽으면 계란을 넣고 잘 섞어 빠르게 시금치를 볶는다. 6.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넣는다. /허명화 시민기자

2025-03-25

왜 우리는 ‘전선시첩’을 읽어야 하는가

올해는 6·25전쟁 발발 75년 되는 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현재 81억 인구가 함께 사는 지구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 분단국의 슬픈 역사를 자각하고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문학이 당대 인간 삶의 투영이라 한다면 전쟁 중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그랬고 35년간의 치욕적인 일제강점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은 또한번 우리민족에게 깊은 상처를 안긴 전쟁이었다. 개인도 나라도 힘이 없으면 무너지게 마련이다. 힘을 길러야 하고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어야 하는 동족상잔의 전쟁의 아픔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문학사적으로 보면 한국전쟁 중 전선이 무너지면서 문인들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문단의 주요 작가들이 대구로 몰려오면서부터다. 그들은 ‘문총구국대’를 결성하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6·25전쟁 참전 문인들은 전선에서 체험한 것을 시로 남겨 전쟁중인 군인은 물론 국민의 사기 진작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기록을 남긴 것이 바로 전쟁 체험시 모음인 ‘전선시첩’이다. ‘전쟁문학’을 우리 문학사에서 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 체험시를 담은 ‘전선시첩’도 마땅히 우리가 챙겨야 할 소중한 시적 자료다. 전쟁 중에 쓴 시적 기록을 폐허가 된 당시는 물론이고 이 후 75년이란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온전히 보존할 수가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기록물 자체가 매우 한정적이어서 자료의 수집과 접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전선시첩’은 제3집까지 발간이 되었고, 참여 시인은 37명이며 작품은 78편에 이른다. 모윤숙의 개별 작품을 포함하면 38명의 79편이 된다. 필자는 전체를 일독하고 제1집과 제2집의 ‘서문’ 등을 살펴서 해설을 쓰면서 지금은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서른여덟 분 모두를 애국시인으로 명명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애국지사’‘의사’나 ‘민족시인’이란 칭호를 붙인 기록은 봤지만 ‘애국시인’이란 공식적 기록물은 접하지 못해 봤다. 한국전쟁에 직접 참여하거나 전쟁 중의 체험을 시로 써서 국가수호와 국군의 사기 진작에 기여한 것은 늦었지만 그 공로를 인정받는 것은 마땅 한 것이다. 6·25전쟁 75주년을 맞아 애국적 시인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들의 피끓는 애국적 감성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또 문학사적 의의를 짚어보는 심포지엄이라도 열어 그들의 애국심을 느껴보자. 우리 기성세대는 1950년대 한국전쟁을 치를 때 그야말로 굶주림에 허덕이며, 연명해 온 세대들이다. 당시의 교육 수준은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시인들은 상대적 지식층으로, 소수 정예의 작가들이었고 그들의 시대적 작가정신은 분투적이었다. 전쟁발발 75년을 맞은 오늘, 그들의 작품을 일독하기를 감히 권한다. /손수여 시민기자

2025-03-23

노년기 취미생활로 난 가꾸기어떠세요

난초 재배를 취미생활로 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난초를 키우는 재미가 쏠쏠한데다, 취미생활로서는 품격도 있고 자기 수양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시간 선용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으니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의 취미생활이라고 할 만하다. 40여 년 동안 난초를 애지중지하며 가꾸어 온 애호가 이영수 씨(80)의 집 아파트 베란다에는 다양한 종류의 난초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줄잡아 수백 종은 될 것 같았다. -옛 선비들은 키우던 난이 꽃을 피우면 친구들을 불러서 난향을 같이 맡으며 시를 짓고 놀았다고 하던데요. 난초 키우기에 입문한 동기는 무엇인가. △난과의 만남은 40여 년 전 초여름 어느 화원을 지나다 맑고 깨끗한 동양란 꽃을 보고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인격이 청렴결백한 귀인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자주 대하다보면 잎이 보여주는 곡선의 아름다움과 유연함에 매혹을 느끼게 되었다. 지인으로부터 춘란(春蘭) 화분 하나를 선물로 받고 난(蘭)과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어떤 종류 난을 얼마쯤 소유하고 있는지. △소심·적화·왕화·주금화 등 300여 점의 한국 춘란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소장하려면 돈도 많이 들어가겠다. △처음 입문할 때 주말에는 전라도 어느 산속 계곡에서 난을 찾아 헤매며 난이 한두 촉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 힘든 줄 모르게 난을 찾아다녔다. 여름에는 잎이 그려내는 조형미와 가을에는 물 줄 때마다 포토를 뚫고 올라오는 꽃망울을 보면서 환희의 기쁨을 느꼈다. 촉이 늘어나고 더러는 구입도 하면서 지금은 300 화분을 소장하게 되었다, -가격대도 만만찮을 것 같다. △한 촉에 몇백 또는 몇십만 원 단위의 난도 있다.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아파트에서 키워도 잘 자라는지? △아파트 베란다 환경은 난초를 기르기에 적합한 공간이다. 빛과 온도를 적절히 조절하면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다. 난초는 대부분 밝은 빛을 필요로 하지만, 직사광선은 피해 줘야 좋다. 오전에 부드러운 햇빛이 드는 위치가 이상적이다. 온도는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20도에서 28도의 따뜻한 환경에서 잘 자란다. -물 주기는 어떻게 하나. △물 주기는 난초 관리에서 매우 중요하다. 습도가 너무 높으면 뿌리가 썩을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난석의 상층부가 마르면 물을 주는 것이 좋다. 특히 물을 줄 때는 저수온의 물을 사용하여야 하며, 미지근한 물이 이상적이다. 이영수 씨는 한국 동양란 연합회 심사위원. 대구 난 연합회 자문위원, 팔공난우회 회장을 역임했다. 전국 난 전시회 심사 위원도 맡았으며 2024년 봄, 가을 전시회에서 특별 대상 대구시장상을 수상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3-23

앞산의 귀룽나무, 대구의 봄을 먼저 알린다

117년만에 폭설을 기록한 뒤 입춘을 지내고도 정월 대보름에 또 많은 눈이 내렸다. 우수를 지나고 포근하다가 또 추운 날씨가 오르락내리락 갈피를 잡지 못한다. 정월 대보름 폭설에 이어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도 한라산과 설악산 등 강원도에는 3월 16일에도 눈이 내렸고, 3월 18일에는 전국적으로 눈이 내렸다. 대구의 앞산은 도시와 연접된 거대한 산으로 이루어져 북쪽으로 방향을 두고 있으니 음지쪽이 될 수밖에 없다. 음지쪽 암석 절벽 바위틈을 비집고 찔끔찔끔 흘러내리던 물방울은 고드름으로 매달려 정취를 더한다. 박쥐가 동굴 천장에 매달리는듯한 모습이 신기하다. 음지쪽은 햇살이 우글거리지 않으니 풀과 나무들은 당연히 잠에서 깨어날 줄 모른다. 그럼에도 매화 잔가지 껍질은 어디든 혹한에도 잔뜩 푸르다. 이즘 땅속에서는 따스한 체온을 느낀듯 꽃샘추위와 만설에도 아랑곳없이 탱글탱글한 꽃망울을 팡팡 터트린다. 매화가 봄을 가장 빨리 알린다고는 하나 귀룽나무를 앞지르진 못한다. 특히 앞산 안지랑골 귀룽나무는 계절 따라 절기를 꿰뚫고 유난히도 봄을 일찍 알린다. 안일사 뒤편 해발 약 350m에 자생하고, 남부도서관 뒤 산자락에도 여러 그루 있다. 안지랑골은 안일사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200m쯤 올라가다 보면 오로지 한자리에서만 늙어가는 예닐곱 그루가 모여 자라는 귀룽나무를 만나게 된다. 휑하니 지나가는 골바람을 타고 꽃샘추위에 휘청거리는데, 이미 죽은 두 그루는 썩어지는 몸이니 아마도 부모일 테다. 수명을 다해 자연사로 나자빠진 몸통의 밑둥치는 이미 부패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미 죽은 몸통을 한 번 더 죽이듯 구멍 뻥뻥 뚫어놓은 것은 지나치던 오색딱따구리의 행적이다. 끼니 고픈 참에 행여 꼬물거리는 식감이라도 내장되어 있을까 싶어서 행한 잔혹한 흔적이다. 봄이 오기 전부터 몸이 근질근질한 귀룽나무는 몸통에 붙은 아주 작은 가지 끄트머리에서 봉긋봉긋 감싸고 있던 새순 봉우리를 곧 터트릴 준비에 바쁘다. 천안삼거리 수양버들처럼 휘영청 늘어진 가지에선 이미 참새부리만큼 커버린 동아(冬芽)가 곧 벌어질 채비를 한다. 그러자 며칠 뒤 그 부위를 갈색으로 감쌌던 껍질이 벌어지고 샛노란 이파리가 나온다. 이렇게 며칠을 두고 봄은 그렇게도 바쁜데 갑작스레 또 생각지도 않은 하얀 눈이 내린다. 어찌나 당황했을까. 샛노랗게 돋아나는 윗자리에 내린 하얀 눈은 그대로 얹어놓은 채 모른척한다. 근데 끄떡 않던 땅거죽이 자꾸자꾸 꾸물거린다. 넌지시 푸른 이파리를 그대로 밀어 올리니 얼었던 동토에 그렇게 봄을 앞당기고 있다. 이를 볼 테면 겨우내 움츠렸던 어깨가 펴진다. 앞산순환도로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구간의 옹벽 위에 50여 그루의 귀룽나무가 도로를 따라 열 지어 나란하게 자란다. 대구시에서 과거 ‘푸른 대구 가꾸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식재한 나무다. 산악지역인데도 가장 먼저 움 틔우는 나무이기 때문에 대구에 봄이 오는 것을 시민들에게 가장 먼저 알릴 수 있도록 귀룽나무를 줄지어 심어 놓은 것이다. 지금 모두 아름 들이로 성장해 당초의 취지에 맞게 시민들에게 배려하듯 봄을 알리고 있다. 귀룽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아시아와 유럽이 원산지이다. 꽃은 5월에 하얗게 핀다. 꽃대 길이가 10~15cm이고 꽃 하나의 지름은 1~1.5cm이다. 6월에 익는 열매는 검은색이며 동그랗다. /권영시 시민기자

2025-03-23

우리네 민요 속 삶과 애환 담긴 ‘트로트 전성시대’

“바람만 스쳐가도 아팠던 세월/ 추웠던 겨울은 가고/ 따스한 봄 향기로/ 소리 없이 내 곁에 다가왔네/ 밤하늘의 달빛마저 숨죽이고/ 숨어 울던 지난 세월 속에/ 눈물로 얼룩졌던/ 그 세월에 슬픔을 감사하리.” 이 글은 나훈아의 ‘감사’ 노랫말이다. 지난 13일 막을 내린 ‘미스터트롯’ 시즌3에서 자신의 인생곡으로 이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훔쳤던 김용빈이 왕좌에 오른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 그늘에서 자란 김용빈은 건강마저 좋지 않아 할머니의 지극정성 보살핌으로 아픈 세월 견디며 올곧게 자란다. 손자가 ‘미스터트롯’ 무대에 서는 게 소원이었던 할머니는 끝내 손자의 무대를 보지 못한다. 임종 당시 ‘죽어서도 손자가 가수로서 성공할 수 있게 돕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노래를 좋아해 트로트 수백 곡을 외웠지만 나훈아의 ‘감사’를 듣는 순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그는 노랫말이 자신의 인생을 꼭 닮았단다. 마지막 무대는 떨지 않았다. 할머니가 지켜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먹먹한 할머니. 감사한 마음 담아 섬세한 감성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는 손자를 아끼는 할머니의 애틋한 정까지 그대로 관객과 시청자들 가슴에 스며든다. 그의 인생곡을 듣는 시청자들의 애잔한 마음이 문자투표에 사뿐히 실려 27.01%라는 높은 득표율로 이어진다. 시청자들은 이미 그의 노래 실력만큼이나 노랫말에 녹아든 그의 아팠던 삶을 공감한 것이다. 외에도 ‘톱7’의 인생곡으로 저마다의 애환이 얽힌 굴곡진 인생을 대변해 주는 노래를 부른다. 그 중에서도 RB 가수였던 천록담(이정)은 암 투병을 이겨낸 후 삶의 희망과 용기를 노래하고자 트로트 가수가 되어 무대에 오른다. 감동적인 스토리에 진정성을 담아 불렀던 그의 인생곡은 나훈아의 ‘공’이었다. ‘살다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트로트에는 우리네 민요에 담긴 삶의 애환과 한(恨)이 서려있다. 1960∼70년대를 살다 가신 어른들은 트로트계의 여왕이었던 이미자에 열광했다. 당시는 트로트라 불리지 않고 대중가요, 가요, 유행가라고만 불리다가 1970년대부터 트로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1980년대 ‘포크송’ ‘발라드’의 흥행으로 장르가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던 유행가가 뽕짝이라며 저급한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의 트로트는 젊은 감성으로 세련미를 더하며 다시 뜨겁게 사랑받고 있다. 트로트 사랑은 편안함에 있다. 우리네 조상들이 삶의 애환과 한(恨)을 해학으로 풀어 나갔듯 애잔한 노랫말에 비해 노래 분위기가 외려 흥겨운 트로트에는 힘든 삶을 해학으로 이겨낸 선조들의 지혜가 묻어 있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신나게 부르는 ‘막걸리 한잔’의 가삿말을 새기던 이효리가 너무 슬퍼서 가슴이 아리다며 울컥했던 것처럼.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이라는 프로그램이 시즌 3까지 방송되면서 트로트가 다시 많은 이의 사랑을 받기 시작하며 이미지 또한 격상된 듯하다. 한국의 전통 민요와 소통하며 한국인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장르인 트로트는 이제 한국을 넘어 K-트롯이 되었다. 가수의 인생곡이 시청자의 인생곡이 되기도 하는 것은 그만큼 공감도가 높기 때문이다. 암울했던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잘 버티게 해 준 것도 트로트였다. 봄비가 꽃샘추위 탓인지 새초롬히 내리고 날씨 탓인지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 듣고 싶어진다. /박귀상 시민기자

2025-03-20

새봄과 함께 문학여행… ‘동리목월문학관’을 가다

한껏 봄기운을 내보이더니 주말내내 비가 예보되어있다. 가볍게 나설만한 곳을 찾다 동리목월문학관을 선택했다. 갑작스런 찬바람 탓인지 관광객 하나 없이 적막감마저 감돈다. 입구에 들어서 왼쪽은 소설가 김동리 선생, 오른쪽은 박목월 시인이 자리 잡고 있다. 동리 전시관 입구에 사단법인 동리목월기념사업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적혀있다. 먼저 길을 내어준 선배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 그리고 의미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 고생스런 그 과정 덕분에 오늘 이렇게 두 작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고마운 마음이다. 전시장은 김동리 선생의 흉상과 연보를 전시한 이미지 홀, 선생의 생전 습작 노트 및 원고, 발간서적, 사진, 상패, 소장품 등의 유품이 전시된 생애와 문학 코너, 서재를 재현한 창작실과 생전 작품들을 미디어매체로 감상가능한 작품세계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지런히 놓인 소품들 사이 시계와 노트들이 눈에 띈다. 스스로를 관리하기 위해 착용했다는 다섯 개의 시계에서 작가의 강단이 느껴졌다. 친일 단체인 문인보국회와 국민문화연맹으로부터 가입통지서가 날아왔으나 불살라버렸다는 점, 소설들이 일제의 검열에 걸려 전면 삭제되자 해방 때까지 절필하고 침묵했다는 부분은 그가 얼마나 큰 사람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아픈 시대에 받고 난 천부적 재능과 신념은 고통이다. 다이어리엔 정초에 찾아오는 세배객들의 선물 목록을 잊지 않으려 기록해두었다고 한다. 사과, 잣, 호두, 깡통상자에 이어 인삼, 양주, 갈비도 적혀있다. 그 시절엔 뭘 주고 받았나 유독 재미나게 살펴봤던 부분이다. 로비를 지나 목월 전시관으로 건너갔다. 입구엔 최근에 발견된 미발표 작품들이 적힌 노트들이 전시되어있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AI 풍의 그림들을 배경으로 시가 적혀있고 아래엔 작품에 대한 부연설명이 적혀있어 이해를 도왔다. 곱슬머리가 부룩송아지 같이 귀엽던 ‘슈산보오이’(6·25 전쟁에서 고아가 된 구두닦이를 묘사한 박목월의 시)는 어떻게 자랐을까 궁금해졌다. 동리 전시관과 마찬가지로 이미지홀엔 선생의 흉상이 놓여있으며 그 외 연보, 시·이미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생애와 문학, 달과 나무에선 습작 노트 및 원고, 발간 서적, 사진, 편지, 소장품 등 총 970점의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장의 마지막에 위치한 창작실에선 동리 선생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서재를 살펴보고 이런 저런 설명들을 읽어나갔다. 인상적이었던 ‘나와 청록집 시절’에서 당시 심정을 회상한 부분을 옮겨본다. “나는 늘 혼자였다. 사무가 끝나면 거리로 나왔다. 거리랬자 5분만 거닐면 거닐 곳이 없었다. 반월성으로, 오릉으로 남산으로, 분황사로 돌아다녔다. 실로 내가 벗할 것이란 황폐한 고도의 산천과 하늘뿐이었다.” 십구문반의 신발을 신고 경주를 거닐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풍경은 달라졌지만 시인을 떠올리며 그 길들을 따라 걷고 싶어졌다. 따뜻한 봄을 기다릴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전시장 밖 로비엔 느린 우체통이 준비되어 있다. 1년 뒤 도착할 편지를 적어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다음을 기약했다. 동리목월문학관은 무료관람이며,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관람 가능하다. 단 동절기인 11월과 12월은 한시간 이른 오후 5시까지다. 매주 월요일, 설날과 추석 당일은 휴무이며 월요일이 공휴일 또는 연휴일 경우 다음날에 휴관한다. /박선유 시민기자

2025-03-20

대한어머니회 문경시지회 새 출발

‘대한의 어머니들아 슬기 모으자. 어머니의 슬기가 빛날 적에는 새 나라 새 역사가 찬란하리라.’ 대한어머니회 회가 시작 부분 가사이다. 대한어머니회는 깨인 어머니들의 슬기가 이 나라의 바른 미래를 이끌어 간다는 신념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교육을 통해 의식이 깨인 어머니가 자녀의 미래를 바르게 이끌고 화목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 감을 슬로건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한어머니회 문경시지회는 2025년 3월 17일 정기총회를 열었다. 총회는 신입회원을 포함한 4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2024년도에 실시한 조손가정돕기 행사와 김장나누기 봉사, 대한어머니회를 창립하고 평생을 여성 권리와 교육을 위해 헌신한 고황경 박사의 생애가 담긴 ‘바롬기념관’ 견학 등 여러 가지 활동을 돌아보고 2025년에는 더욱 다양한 활동으로 발전하는 어머니회를 만들어 가고자 의지를 다졌다. 오점숙 회장은 인사말에서 회원의 친목과 화합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며, 어머니는 가정의 중심이 되어 가족을 보살피고 살림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존재임을 강조했다. ‘살림’이라는 말은 ‘사람을 살린다’는 말이기에 사람을 살리는 중요하고 고귀한 일을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어머니라고 했다. 어머니임에 모두 자부심을 가지고 대한어머니회 회원임을 자랑스러워 하자고 말했다. 그런 어머니의 강하고 귀한 마음을 바탕으로 대한어머니회 문경시지회를 훌륭한 단체로 이끌어가자며 각오를 다졌다. 2025년 핵심 사업으로는 제4회 문경 사과꽃축제를 4월 19일에서 20일까지 양일에 걸쳐 개최한다. 또 경로당을 방문하여 노래와 춤으로 소통하기, 신망애육원 봉사도 계획하고 있다. 매년 기탁하는 문경시장학회에 장학금 기탁도 추진하고, 8월 문경시에서 개최하는 전국 ‘문경새재맨발걷기’에 참석하여 환경캠페인과 환경 정화 활동도 계획하고 있다. 중앙회에서 매년 개최하는 ‘전국여성독후감대회’에 적극적인 참여도 독려한다. 포용하고 양육하고 화합하는 어머니답게 대한어머니 문경시지회 정기총회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대한어머니회의 추진 사업에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 돌발 퀴즈와 회원 축하 시낭송과 축가로 마음을 나누었다. 또 회원 모두가 참여하는 즉석 ‘다섯 자 소감 말하기’ 이벤트도 시행했다. 어머니로서 또 사회 각층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는 대한어머니회 회원들. 앞으로 대한어머니회 문경시지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한다. /엄다경 시민기자

2025-03-20

“얘들아! 커서 어른이 되면 어떤 일을 하고 싶어?”

초등학교 6학년 아이를 둔 학부모 A씨(45)는 3월, 학기 초 기초생활 조사서를 받아 들고 장래 희망을 적기 위해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일도 관심 있는 일도 없다”고 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말해주어야 할지 모르겠고 적성은 또 어떻게 찾아주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부모 B씨(46)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대부분이 꿈이 많지 않아 보인다. 부모가 생각하는 직업을 강요할 수도 없고 어릴 때의 꿈이 다가 아닌 것 같다. 진로 적성은 어떻게 보면 답이 없어 보인다”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꿈이 없다고 쉽게 말하는 아이들, 한 조사 자료에서 나타난 장래 희망은 이랬다.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전국 1,200개 초·중·고 학생 등을 대상으로 조사한 ‘2024 초·중등 진로 교육 현황조사’ 결과에 따르면 희망 직업 1위는 초등학생은 운동선수,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교사가 가장 되고 싶은 직업이었다.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인 운동선수는 2018년부터 7년 동안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학령 인구 감소와 교권 침해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중·고등학생들에 장래 희망 1위의 교사가 18년째 그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대로 부모들은 아이의 장래로 의료인, 법조인, 공무원 등을 원하는 경우도 여전하다. 부모들은 아이가 되고 싶어 하는 꿈이 없다고 말하면 고민이 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아이는 의사나 변호사, CEO 등 부모가 원하는 직업을 말할 가능성이 높은데 어쩌면 이 질문부터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것보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이유라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의사가 꿈이라고 대답한다면 꿈을 이루기 위해 의대를 진학해야 하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꿈은 아이가 원하는 장래 희망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강요받은 꿈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진짜 아이의 꿈이 의사라면 아이 스스로 의사가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이고, 의사 중에서도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를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이럴 때 부모는 아이가 앞으로의 인생을 잘 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의사가 된 후에도 ‘어떤 의사’가 될 것인지 물어야만 진짜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 이런 걸 보면 아이의 진로는 단순히 어떤 직업을 가진다는 것으로 끝이 될 수 없다. 직업이라는 건 어찌 보면 그저 꿈을 이루는 수단이다. 의사가 되는 게 장래 희망이면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 ‘의사라는 직업으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꿈이 자신이 진짜 원하는 꿈인지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아이의 장래 희망은 이처럼 목표를 정하고 방향성을 맞추는 일이다. 성적과 아이의 성격, 성향, 특기, 적성 등과 함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부모들의 아이의 장래 희망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에 한 여행 전문가는 아이와 어릴 때부터 여행을 추천한다. 공교육에서 체험학습이나 수학여행으로 행해지는 단체 여행과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은 ‘내 아이’의 흥미와 수준에 맞는 경험을 제공하기 어렵다. 여행을 통해 아이의 관심사를 발견하고 확장해 나가면 아이의 진로도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허명화 시민기자

2025-03-18

자판기 커피에 얽힌 달콤쌉싸름한 추억들

요즘은 어딜 가든 커피 전문점 하나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 20~30년 사이 생겨난 변화다. 경주에 지금의 커피 전문점 형식을 가진 가게가 등장한 것도 그즈음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이에게 커피는 금기의 음료였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 했을 무렵 엄마를 따라 동네 교회 목사 사모님을 뵈러 간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살짝 맛보았던 커피는 천상의 음식과 견줄만 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엄마가 왜 그곳을 방문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쟁반 위로 머그컵이 아닌 작고 동그란 잔에 갈색의 음료가 크래커 몇 조각과 함께 담겨 나왔다. 커피는 크래커에 살짝 찍어먹는 정도로 허용되었는데 그날 이후 커피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내내 기억됐다. 그리고 그 커피는 생애 가장 맛있는 커피로 남아있다. 스물한두 살쯤 처음 마셨던 에스프레소는 예상치 못한 씁쓸함을 안겨주었다. 방어력 0의 상태에서 맞닥드린 충격은 꽤 컸다. 그리고 함께 안겨준 불면의 시간 덕에 그날 밤 꽤 오랜 시간 뜬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당시만 해도 교정에는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가 층마다 자리잡고 있었다. 강의 사이 사이 친구들과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곤 했다. 동전을 넣고 빨간 불이 들어오면 메뉴를 골랐다. 간혹 동전만 삼키는 날도 있었다. 종이컵이 톡하고 떨어지고 커피가 가득찰 때까지 기다리는게 뭐 그리 힘들었는지 컵을 빼는 시간이 늘 조금 빨랐다. 시절에 대한 그리움인지 맛에 대한 그리움인지 손바닥만한 사이즈의 종이컵으로 마시던 달달한 커피가 때때로 그리울 때가 있다. 큰 컵에 담긴 아메리카노가 대세가 된 지금 학교 교정은 물론 길거리에서 커피 자판기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자판기 커피가 아직 성행 중인 곳이 있다. 흥무공원을 지나 잠시 길을 오르면 김유신 장군묘 매표소가 나온다. 낮엔 등산객들과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데 매번 찾을 때마다 몇몇이 자판기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정확한 사유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자판기 커피가 흔했던 시절에도 이곳 커피가 맛있다고 소문이 났었다. 자판기 한편에 인쇄된 풍경 그림을 보고 있자면 그 시절 시간이 함께 떠오른다. 오래전 노트에 꽤 많이 등장했던 스타일의 그림이다. 경주시민 무료입장 찬스를 활용해 잘 정비된 장군묘를 운동겸 한 바퀴 돌고 나와 마시는 커피는 더 달콤하게 느껴진다. 예나 지금이나 자판기 앞에서 망설이는 이유는 밀크커피냐 율무차냐 하는 선택의 고민 때문이다. 그 당시 커피는 회전율이 높아 신선하지만 다른 음료는 회전율이 떨어져 그렇지 못하다는 편견 아닌 편견도 있었더랬다. 편견에 휘둘리기엔 율무차의 고소함과 달콤함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뽑아든 음료를 들고 벤치에 앉아 아래를 지나는 기차를 구경하는 것도 꽤 흥미로웠는데 경주역이 사라짐으로 이젠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익숙한 풍경이 하나 둘 사라진다는 것은 매우 안타깝고 씁쓸한 일이다. 그래도 벚나무 터널은 남았다. 벚꽃나무 터널의 명성을 지킬 벚나무들은 매년 더 멋진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수상한 날씨가 조금 염려스럽긴 하지만 올해도 분명 분홍빛 봄은 찾아들 것이다. 찬바람이 멈추고 핑크빛 벚꽃이 만개하는 날 400원의 추억을 만끽해보자. /박선유 시민기자

2025-03-18

포항 보경사에는 복 짓는 철학자가 산다

봄비가 내린다. 아롱대던 봄 아지랑이도 얼어붙는다. 이런 촉촉한 봄비는 농부에게는 반갑지만, 걱정인 녀석들이 있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주차하면 차 밑으로 와 비를 피하며 동네를 살금거리는 길냥이들이 털이 젖은 채 밤을 지낼 일이 걱정이기 때문이다. 그렁그렁한 눈동자에 봄비가 고인다. 지나는 사람들은 마음뿐이지만, 동네 떠돌이 강아지 고양이들을 그냥 내보내지 않고 품고 사는 사람이 보경사 처마 밑에 산다. 내연산을 오르는 이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식당이 어깨동무하고 앉은 동네다. 그 가운데 식당, 문수봉에 들어가려고 문 앞에 차를 댔다. 내리자마자 콩콩 짖는 강아지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목줄이 있는 것도 같은데 가까이 오지는 않고 짖는 소리만 높인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키우는 녀석이냐 물으니, 밥도 주고 잠자리도 내주지만 곁을 주지 않는 강아지란다. 보경사에 오래 돌아다닌 개 도순이, 길에 살아서 길 도(道) 자를 붙여 도순이라 부른단다. 구조단체와 119 소방대원이 열 번 넘게 잡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놓치고 말았다. 하지만 새끼 시절 묶인 목줄이 파고들어서 목에 고름 범벅이라 파리가 달라붙고 냄새는 진동하니 다들 싫어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문수봉을 운영하는 사장님(김은주·60)이 아드님과 함께 방법을 동원해 붙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바로 동물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중성화 수술까지 해서 데려왔다. 하지만 오래 떠돌아다닌 도순이가 다 낫기 전에 달아나버렸다. 잡히지는 않지만 늘 가까이 산다. 살려준 사장님이 외출하면 마을 앞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밤이면 가게 문 앞에서 잔다. 다른 강아지 산책시키면 그때마다 따라다닌다고 했다. 문수봉 뒷마당에는 이렇게 사장님 품 안으로 들어온 유기견이 더 있다. 덩치 큰 녀석들이 싸울까 싶어 옥상에 집을 마련해 준 녀석들도 있다. 그리고 슬그머니 안방을 차지한 까만 고양이도 거두었다.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저녁이면 들어와 잠을 청하는 고양이가 세 마리 더 있어 빨간 밍크담요가 깔린 집이 낮이라 빈 상태로 놓였다. 데크 밑에는 참새들의 먹이 그릇도 가득 찼다. 함께 이야기 나누다 밖에서 파 장수 트럭이 지나니 얼른 달려가 세운다. 식자재가 매일 배달되어 오지만, 저렇게 싣고 다니는 분들의 저녁이 허전할까 싶어 몇 단 들여놓는다고 했다. 고무장갑 파는 분이 자주 와서 그때마다 산 장갑이 쟁여져 있다고 한다. 집 앞을 그냥 지나가게 두지 않으셨다. 따라 나갔다가 제비집 본 적 있냐며 처마에 붙은 집을 보여주셨다. 다섯 채의 제비집에 봄이면 다시 제비 가족이 날아든단다. 언제부터 이렇게 보살피는 일을 시작했냐고 물으니 32살부터였다니 지금까지 30년이 넘었다. 9년 전부터 보경사 앞에 와 자리를 잡고 그때 데리고 온 말라뮤트도 이 집에서 17살까지 한식구로 살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유기견과 유기묘를 거두다 보니 동네에 손님이 버리고 간 강아지가 있으면 이 집으로 데리고 온다고 했다. 자신이 보살피지 않으면 길에서 죽거나 버려질까 싶어 거둔 녀석들이 가득하다. 오래 생명을 살피니 철학자가 따로 없다. 농사도 지어야 수확이 있듯이 복을 지어야 복을 받는다며 검은 고양이가 들어온 뒤 좋은 일만 생겼다고 자랑했다. 한 달 열심히 일해 일곱 곳에 돈을 보낸다. 북극곰 살리기, 다문화가정, 중증장애인 같은 도움이 필요한 곳을 정해 기부금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오래 장사해야 한다고 웃으셨다. 가게 안에 베트남 청년이 6년째 일한다. 일만 하고 쉬는 날에도 외출하지 않는 청년을 사장님이 외출할 때 꼭 함께 데리고 다닌다. 며칠 전에 가게로 비싼 강아지 하네스가 택배로 와서 누가 보냈나 했더니 가게서 일하는 청년이 감사해서 이렇게라도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젠 식당 안의 일을 다 알아서 해주니 고마운 일이라고 다독였다. 송라에서 학교 다닌 이 지방 토박이시다. 농가 사서 거둔 강아지 고양이 키우며 사는 게 소망이라고 웃으시는 얼굴에 부처님 미소가 스친다. /김순희 시민기자

2025-03-18

문학 가치를 함께 고민하고 생각한 소중한 여행길

대구문인협회는 지난 11일부터 15일까지 4박 5일 간 일정으로 해외문학기행 행사를 가졌다. 방문지는 중국 서안으로, 이 문학기행에는 안윤하 대구문인협회장과 문무학 시조시인, 김학조 사무국장, 김선완·김복건·노병철 수필가, 문성희·정지홍 시인 등 30여 명이 함께했다. 여정은 실크로드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유적을 탐방하고 백거이 문학 세계를 탐색하는 프로그램으로 짜여졌다. 행사 동안 회원들은 옛 이름은 장안(長安)이며 지금은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西安)에서 중국 역사와 문학이 형성된 흐름을 심도있게 살펴봤다. 특히 시안이 어떻게 중국의 도시 중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도시가 됐는지, 또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장안이 동양의 수도라는 대명사를 갖게 됐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토론도 벌였다. 또한 ‘장안에서 화제다’란 말이 이곳에서 유래한 부분을 공유하며 의미를 새겼다. 5∼6세 때 벌써 시를 짓기 시작한 천재이자 당나라 최고의 시인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를 쓴 주인공 백거이의 묘소 등 유적관도 찾아 위대한 문학인을 추모하고 업적을 기렸다. 일행들은 진시황제의 병마용갱도 둘러봤다. 1974년 어느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천마용갱 앞에선 2200년 전 빚은 병마들이 살아 있는 듯해 정교한 그 시대의 기술 그리고 그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중국 최초로 통일을 이룩한 진시황제의 그 위용을 눈으로 실감한 회원들은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돼 이곳에서 한해 수십여 조원의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선 ‘진시황은 죽어서도 중국을 호령하는 듯하다’며 입을 모았다. 안윤하 회장은 “이번 시안 중국 역사 문학기행은 동서양 문물교류 역사와 문화예술의 흐름에 동참하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특히 “낙양성에서 당나라 대문호 백거이의 묘소를 방문해 그의 문학 세계를 감상한 것 등은 대구문인협회 회원들의 창작 활동에 큰 도움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 이번 문학기행의 내용을 담아 ‘대구문학’에 게재하고 ‘대구예술’지에도 ‘세계속으로 침투하는 대구문인협회’란 주제로 글을 싣고자 한다고 밝혔다. 문학기행에 참여한 이근자 소설가는 “인공지능이 글을 쓰는 시대에 수천 년 전 번성했던 도시를 방문한 이유를 자문해 보고 그곳에서 느끼는 감회가 인상적이었다”고 이번 여정을 평가했다. 그는 “사막의 모래바람에 외아들을 잃은 늙은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지금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 실크로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정말 과거에서 멀어진 것일까 하는 생각에 젖어들곤 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여행이란 공간적 거리뿐만 아니라 시간 또한 뛰어넘게 만든다”고 말하며, “로봇의 관절에 흘러드는 모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 여행의 묘미”라고 강조했다. 김학조 사무국장은 “4박 5일간의 짧은 일정 속에서도 느끼고 고민한 문학적 가치를 동료 문인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던 유익한 여행이었다”고 전했다. /방종현 시민기자

2025-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