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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입방아 오른 명절 떡값

명절 떡값은 박정희 정권 시절 박봉에 시달리는 공무원에게 명절 제수 마련에 보태라고 설과 추석에 두 번 나눠주던 상여금이 시발점이다. 당시 공무원 봉급명세서에는 ‘효도비’라고 적혀 일종의 복지 차원의 복리비를 명절 떡값이라 불렀던 것이다. 떡값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은 명절 제사상에 오르는 떡을 구입하는 비용에 작지만 보태 쓰라는 뜻인데, 이것이 떡값으로 불리게 된 동기다. 1990년대 들어 떡값은 고위 공직자의 부정축재 뇌물이나 부정한 돈을 은유적으로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주식시장 코스피가 5500선을 뚫는 등 활황을 보이나 대부분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처럼 보이는 게 현실이다, 주식시장 활황 소식에도 설 명절을 보내는 서민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는 뜻이다. 경영자협회가 447개 기업 대상으로 상여금 지급 여부를 묻는 질문에 58.7%만이 지급한다는 대답을 했다. 10개 기업 중 4개 기업의 종업원은 상여금을 못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국회의원들이 받는 설 명절 떡값이 서민들 입방아에 올랐다. 국회의원은 명절 휴가비로 일반공무원과 같은 방식으로 월 봉급액의 60%를 받는다. 국회의원 연봉 1억6000만원을 기준하면 이번 설에 국회의원은 각자 439만원의 상여금을 받은 것이다. 직장인의 절반가량이 명절 떡값을 못 받는다는데 국회의원은 일반 직장인 평균의 7배나 되는 떡값을 받았다고 하니 그들이 받는 떡값이 서민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명절마다 “정쟁으로 날 새면서 돈만 챙긴다”는 국회의원을 겨냥한 비난 목소리가 나오나 시간이 지나면 또 잊혀짐을 반복한다. 오는 추석 명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2-19

판사 바꿔주세요

소송과 재판을 이끌어가는 기본원리에 신속과 공정이 있다. 그중에서도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소송법은 공정한 재판을 위한 장치를 두고 있다. 그중 하나가 판사가 공정하지 않은 판결을 할 위험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재판의 결과는 판결이고, 판결은 전적으로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부 법관의 몫이다. 법률과 양심에 의거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판단을 내리고 그에 대한 판결문을 쓰라는 것이 법관의 독립성 보장이다. 따라서 법관은 독립적이어야 하고, 사건 또는 당사자와 학연, 지연으로 연결되어 있어서는 안 된다. 판사 개인 스스로도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 애쓸 것이지만, 판사도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독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민사소송에서 담당 판사가 원고의 혈족이라면, 형사소송에서 담당 판사가 기소된 사건의 피해자라면 아마 공정한 재판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고 판결의 신뢰성도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 소송법엔 법관에 대한 제척, 기피, 회피 제도가 있다. 제척 제도는 일정한 사유가 있을 때 당연히 그 법관이 그 재판에서 배척되는 것이다. 판사와 당사자가 일정한 친족 관계에 있을 때가 가장 대표적이다. 3심제의 심급 재판 보장을 위해 1심에서 판결을 내렸던 판사가 2심에 또 담당 판사가 되었을 때도 제척 사유다. 기피는 제척 사유 외에 불공정한 판결이 우려될 때 당사자 등이 신청하면 담당 법관을 이 재판에서 배제할지 말지를 상급 법원이 판단해 결정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기피 사유는 담당 판사와 소송 대리인인 변호사, 피고인의 변호인이 친족 관계에 있을 때이다. 어떻게 보면 당사자와 판사가 일정 관계에 있는 제척 사유보다 더 많을 수 있기에 이런 경우는 기피 신청을 해야 한다. 회피란 법관 스스로 기피 사유가 있음을 인정하고 재판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것이다. 역시 상급 법원의 허가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제척·기피·회피 제도는 공정한 재판의 보장을 위해 필수적이라 할 수 있지만 이를 재판 지연 목적에서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일단 하고 있던 재판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은 재판 지연 목적이 분명한 경우 해당 재판부가 바로 기피 신청을 기각할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이것이 간이 기각이다. 내란 관련 혐의로 기소된 전 국방부 장관의 구속영장 심문에서 피고인이 반복해 네 차례 기피 신청을 냈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피고인은 헌법상 방어권을 침해당했다는 이유로 재판부 전원에 대한 기피 신청을 냈지만, 재판부는 재판 지연 목적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간이 기각한 것이다. 이처럼 재판을 할 때는 담당 판사와 당사자 또는 사건 간의 관계를 살펴보고 불공정한 사유가 발견될 경우 제척, 기피 요구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제척 등 사유가 없는데도 일단 기피 신청을 해 보자는 태도는 재판 지연을 초래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내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만큼 상대방의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도, 국가의 적정한 재판권과 형벌권 행사의 공익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6-02-19

AI와 문체(文體)

AI가 대학 교육 현장에 미친 효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들이 제출되고 있다. 이제는 모두가 안다. AI의 활용이 단순히 과제 수행 방식의 변화를 넘어, 지식의 생산과 학습의 의미 자체를 변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긍정의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리뷰나 서평, 에세이처럼 ‘사유의 훈련’으로 간주되던 전통적인 과제들마저 생성형 AI에 의해 손쉽게 대체 가능해지면서 인문학과 AI의 관계에 대한 보다 심화된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AI는 이미 학생들을 둘러싼 학습 환경의 일부가 되었다. 검색 엔진이 등장했을 때 도서관 이용 방식이 변했듯, 이제 학생들은 검색창이 아니라 대화형 AI에 온갖 질문을 던진다. AI는 단순한 정보 검색을 넘어, 논지 구성과 문장 생산까지 대신하고 있다. 물론 인문학 교육의 과제는 ‘결과물’만이 아니라 ‘사유의 과정’ 전반을 문제 삼는다. 인문학적 사유의 함양은 텍스트의 형태와 논리적 정합성의 문제로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가의 초점은 완성도 높은 문장만이 아니라 그 문장이 생성되기까지의 사유의 궤적, 텍스트와 맺는 관계의 밀도, 그리고 학생 고유의 정치적 주체성 확보에 있어야 한다. 일본의 비평가 에토 준은 문체(文體)란 “작가의 행동과 작가가 놓인 사회가 빚은 알력이 남긴 자취”라 정의한 바 있다. “작가들은 확실히 언어의 앞으로 뛰쳐나가 직접 현실과 접촉”해야 하며, 이는 “수영 선수들이 행동 뒤로 물보라와 물결을 남기는 것처럼 작가들은 행동 뒤에 문체를 남긴다”는 의미이다. 진정한 문체란 글 쓰는 자가 주위의 현실과 격돌하면서 일으키는 방전 현상의 불꽃과도 같다. 글을 쓰는 행위란 행동한다는 것이고 그 결과 글쓰기의 주체는 자기가 속한 사회와의 긴장과 알력 속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 알력이 남긴 흔적이 바로 문체라는 것이다. AI가 보급되고 대학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문제는 바로 이 문체의 소멸 아니었을까? 반복컨대 문체란 저마다의 개성이 아니라, 현실과 싸운 자기만의 종적을 의미한다. 간단한 질문과 의제에 대한 답조차도 AI에 의탁하여 손쉽게 사고해버리고 마는 행태의 사회적 확산 속에서 학생들은 자기 고유의 문체를 상실하고 있다. 어떠한 주제든 대체로 비슷한 입장에서 비슷한 어투로 비슷한 평가를 하고 마는 자기의 현재를 기술 환경의 변화라는 구실로 그냥 넘어가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문학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언어의 생성’이다. 이는 단지 문장과 사유의 독창성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단 텍스트를 읽고, 텍스트와 충돌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는 경험을 의미한다. AI는 정보를 요약하고 논지를 정리해 줄 수는 있지만, 그 판단의 책임을 져주지는 않는다. 인문학 교육의 지향이란 바로 이 ‘판단의 책임’을 감당하는 주체를 길러내는 일에 있지 않을까. AI 시대에서 인문학의 가치는 기술을 통제하는 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기술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인간의 판단과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샘솟게 하는 데 있다. 오늘날의 인문학자는 우선 이 점에 천착해야 한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6-02-19

의료계 문제

우리나라는 매년 의료질 평가라는 것을 한다. 수술, 질병, 약제사용 등 병원의 의료서비스를 의료의 안전성· 효과성· 효율성 ·환자 중심성 등 측면에서 평가한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다. 지역 종합병원 중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이 고관절 치환술, 췌장암수술, 식도암 수술, 조혈모세포이식술, 위암, 간암 평가등급에서 모두 1등급을 받았다. 이는 의료능력자들이 대거 투입되었거나한 대규모 투자가 있어 시설이나 장비가 엄청나게 보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경북대병원은 췌장암과 식도암, 간암에서 2등급을 받았고, 칠곡경북대학교병원은 췌장암에서 2급, 식도암은 평가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영남대병원은 식도암, 위암에서 2등급을 받았다. 대구카톨릭대병원은 췌장암, 식도암, 위암에서 2등급을 받았다. 모두 1등급 받은 병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울대병원, 분당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서울성모병원 정도라 계명대 동산병원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1등급을 받은 서울의 최상급 병원들은 거의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전국에 있는 중환자들이 이들 병원으로 몰린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제대로 진료받고 싶다는 심리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 병원에서 새벽 수술은 거의 일반화되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밀려드는 수술 환자를 쳐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의료계가 경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방과 서울 의료 격차가 크다는 이야기를 지방에 사는 우린 많이 듣는다. 왜 이런 이야기가 도는지 지역 의사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투자하지 않는 곳에 발전은 없다. 교수들은 자꾸 노령화되어 가고 있고 신기술을 받아들일 여력은 없다. 그렇다 보니 할 수 있는 한계치가 보이게 마련이다. 적자에 허덕이며 주차비 받고 매점 운영해서 병원 운영비 보태야 하는 지금 상황에선 의료 발전을 기대하긴 힘들다. 미국 최고로 꼽히는 ‘빅4’ 병원은 메이요 클리닉, 존스홉킨스대 병원, 하버드대 부속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클리블랜드 클리닉을 꼽는다. 이 병원의 의료 기술은 세계적이라는데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세계 갑부들이 거의 이 병원에서 치료받으니 말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병원을 찾지는 않는다. 이들 병원과 우리 1등급 병원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 병원들이 가지는 모토를 보면 ‘환자가 최우선’이고 ‘창의적인 의학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 병원에는 대략 한국 병원보다 10배 이상 많은 전문의와 교수가 있다. 이들이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 수는 한국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니 개개 환자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최상의 진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은 세계적 수준이라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자. 의료 보험비보다 의료 사보험비를 더 많이 내야 하는 이상한 의료체계를 왜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병원 간병인이 재중동포인 조선족으로 대체된 지 오래됐다. 곧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의사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의사로 대체될 것이다. 수술할 의사가 없어지는 데도 정치권은 지금도 의료인 숫자놀음에 빠져 한가하게 국민 세금을 축내고 있다. /노병철 수필가

2026-02-19

넘어지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새해 벽두, 우리는 멋진 장면을 목격했다.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결선에서 두 번씩이나 추락 후 끝내 일어선 한 선수가 결국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7미터 높이의 빙벽을 타고 올라 공중회전을 거듭하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위험하다. 작은 실수 하나로 경기는 물론 선수의 생명까지 위협받는다. 추락은 실수를 넘어 ‘끝’처럼 보였다. 선수는 끝이라 여겨진 지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우리는 메달의 색깔과 개수에 반응한다. 결과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새벽 훈련, 실패 반복, 부모의 희생, 부상과 재활, 낙담과 희열. 특히 대한민국 선수들의 현실은 넉넉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충분하지 않은 지원과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국제 무대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개인과 가족의 감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시 일어난다. 넘어짐을 핑계로 삼지 않고, 오히려 추락을 발판으로 삼는다. 추락은 부상을 불렀다. 누구도 기권을 비난하지 않았을 추락이었다. 선수는 통증을 이유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한 선수의 용기를 넘어, 우리가 오랫동안 공유해 온 한 가닥 기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어려움 앞에서 체념하지 않는 끈기, 상황을 변명으로 삼기보다 한 번 더 시도하는 태도, 끝까지 가보려는 고집과 집념. 대한민국은 숱한 굴곡과 곡절을 통과하며 그런 힘을 축적해 왔다. 위기 속에서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성향, 그것이 스포츠 현장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여기서 멈춰,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헌신을 박수로만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극적인 장면에 환호하고 눈물을 나누지만, 정작 선수들이 겪는 구조적 어려움과 훈련 환경의 한계에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가. 위기의 순간에 빛나는 투지를 ‘한국인의 미덕’으로만 칭송하는 사이, 그것이 반복적으로 개인의 희생 위에 세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감동은 값지지만, 감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금메달을 확정한 뒤 ‘엄마!’를 외치며 무너져 내리던 장면이 깊게 남는다. 개인의 승리뿐 아니라, 함께 버틴 시간의 승리였다. 가족의 헌신과 지도자의 인내, 보이지 않는 땀방울이 한순간에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눈물에서 과정을 읽어야 한다. 과정이 있었기에 결과가 더욱 빛났음을 확인해야 한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하프파이프를 마주한다. 넘어짐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일어설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동시에 질문해야 한다. 선수 개인의 집념에만 기대는 시스템으로 충분한가. 그들의 도전이 더 이상 ‘기적’으로 불리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 수는 없을까. 아픈 무릎으로도 가장 높은 자리에 도달했던 장면을 기억해야 한다. 선수의 투지가 개인의 희생으로만 남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2026년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새해에도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날 터이다. 누군가는 포기하고 돌아서겠지만, 우리는 기어이 이겨내는 결기를 다져야 한다. 개인이 지난한 과정을 감내하려면 사회적 고조가 상생과 협력을 지지해야 한다. 건강하게 올라서는 새해를 당겨와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2-18

우리는 ‘SDGs’라는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뤽 스피노자(1632-1677)의 명언으로 널리 알려진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철학으로, 현재 전 세계 147개국 교육과정에서 인성교육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 숭고한 문장은, 오늘날 기후 위기와 인류 멸망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복합 위기)’ 시대에 가장 강력한 울림을 주는 메시지이다. 과거엔 “지구 종말” 또는“인류 멸망”이라는 단어는 종교적 예언이나 공상과학 영화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기후변화, AI의 급속한 발전, 세계경제 환경의 불안정 등 수많은 불확실성에 둘러쌓인 2026년 현재, 우리는 이 단어가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한 실존적 경고임을 목격하고 있다. 지구 가열화(Global Warming을 넘어선 Boiling)는 ‘임계점(Tipping Point)‘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생물 다양성의 붕괴와 극심한 불평등은 사회적 회복 탄력성을 갉아먹고 있다. 째깍거리는 지구의 시계가 가르키는 ‘종말’은 이제 은유가 아닌 현실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과학자가 기후변화가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재앙이 될 것이라며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고 경고해 왔다. 이러한 경고와 절망적인 지표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력감에 빠지거나‘기후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 “어차피 끝날 지구라면, 지금의 노력이 무슨 소용인가?”라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 절망적 상황에 낙담하여 모든 의욕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지구 종말의 위기 속에서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그 결연한 의지를 다시 소환해야 한다. 희망이 사라진 절망적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하는 ‘적극적 대처(Active Coping)’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 시절 스피노자가 말한 사과나무가 내세에 대한 희망이나 개인의 도덕적 완결성이었다면, 21세기 인류가 심어야 할 사과나무는 바로 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이다. UN(국제연합)에서는 2000년부터 2015년까지 시행된 밀레니엄개발목표(MDGs)를 종료하고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전 인류와 국가가 실천해야 할 국제사회의 공동목표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합의하였다. 인류의 보편적 문제(빈곤종식, 질병, 교육, 성평등, 난민, 분쟁 등)와 지구 환경문제(기후변화, 에너지, 환경오염, 물, 생물다양성 등), 경제·사회문제(기술, 주거, 노사, 고용, 생산 소비, 사회구조, 법, 대내외 경제)를 2030년까지 17가지 주요 목표와 169개 세부목표로 이행하는 국제사회 최대의 공동목표이며, 2015년 제70차 UN총회 및 UN지속가능개발 정상회의에서 193개국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이는 인류라는 종(種)이 지구라는 한정된 자원 안에서 어떻게 하면 공멸하지 않고 번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최후의 실천방침이자 생존 매뉴얼이다. SDGs는 단순히 ‘우리 모두 더불어 착하게 살자‘는 캠페인이 아니라 전 지구적 기후위기와 가중되는 복합위기 앞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UN 회원국 모두가 합의한 희망의 상징이다. 환경적 사과나무 (목표 13, 14, 15)는 탄소 배출을 줄이고 해양과 육상 생태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실천의 표상이며, 사회적 사과나무 (목표 1, 5, 10)는 빈곤을 퇴치하고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을 통해 사회적 붕괴를 막는 지지대이다. 또한 경제적 사과나무 (목표 8, 9, 12)는 순환경제와 책임 있는 소비를 통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풍요를 누리는 지혜이다. 종말적 지구의 위기 앞에서 SDGs를 실천하는 것만으로 당장 내일의 온도를 바꾸지 못할 수도 있고, 공동체가 무너진 세상에서는 기후 위기에 대응할 지적, 경제적 동력조차 사라질 것이며, 경제적으로 비효율적일 수도 있다. 단기적 이익을 쫓는 시장의 논리로는 ‘종말‘이 예견된 상황에서 장기 투자를 하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른다. 이 같은 이유로 ‘내일’이라는 희망의 나무를 오늘 심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모레’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나무 심기를 포기하는 순간, 종말은 확정된 미래가 되지만 반대로 우리가 SDGs라는 목표를 향해 움직일 때, 그 행위 자체가 위기의 속도를 늦추고 새로운 가능성의 창을 열게 될 것이다. 사과나무 한 그루가 숲이 되고, 그 숲이 미세 기후를 조절하듯, 개별 기업과 국가의 SDGs 이행은 지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변수가 될지 모른다. 우리 모두 오늘 당장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더 나은 가치를 지향해야만 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현세대의 미래세대에 대한 마지막 책무이다. 이제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고전적 문구는 “SDGs를 달성하겠다”를 넘어 “ESG경영을 실천하겠다”, “탄소 발자국을 줄이겠다”, “소외된 이웃과 연대하겠다”는 현대적 실천으로 구체화되고 확산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심는 ‘사과나무’가 되어야 한다. 설령 내일 지구가 멈춘다 해도, 오늘 우리가 심은 이 나무들의 뿌리는 인류가 추구했던 지속가능한 지구와 세계를 지키는 버팀목이 될 것이다. 그 나무들이 모여 결국 지구의 종말을 저지하는 거대한 방풍림이 될 것이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2-18

욕바가지

진료를 받고 약까지 챙겼다. 바람이 차다. 목도리를 여미고 잰걸음으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이 듦을 확인한 탓일까. 요즘은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마음이 가볍지 않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내 차 앞을 가로질러 화물차 한 대가 서 있다. 앞 유리에 붙은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두어 번 신호가 가자, 곧바로 전화를 받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밝다. 잠시 뒤, 화물차 주인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그는 연신 고개를 꾸벅이며 미안하다는 손짓을 했다. 차를 몰고 나가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같이 고개를 숙이며 내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차에 올라 약봉지를 조수석에 두려는 순간, 누군가 차창을 툭툭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을 내렸다. “야! **, 이 땅이 니 꺼가?” 창문이 다 내려가기도 전에 욕이 먼저 들이닥쳤다. 반말에다 날 선 욕설에 순간 멍해졌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남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왜 이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화를 내지? 병원 건물 벽에 붙은 주차장 화살표를 보고 들어왔고, 빈 공간에 차를 세웠고, 주차 선도 어기지 않았는데. 기억을 빠르게 더듬어 보아도 내 잘못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다짜고짜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었다. 병원이라고 하자, 그의 입은 더 거칠어졌다. 입에 담기 힘든 말들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앞뒤 없이 퍼붓는 욕설 사이사이에 요지가 보였다. 이 곳은 자기 땅인데 왜 마음대로 주차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그 땅이 개인 소유라는 표시가 없었다. 주차금지 팻말도, 안내문도, 경고 문구조차 없었다. 그저 병원 옆에 비워진 공간일 뿐이었다. 그런 곳에 잠시 차를 세웠다는 이유로, 나는 마치 큰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욕바가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다시 돌아보니 병원 주차장은 조금 더 안쪽에 있는 게 보였다. 얼른 고개부터 숙였다. “죄송합니다. 몰라서 그랬어요. 다음부터는 주차 안 할게요.” 나의 사과는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는커녕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조심하라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 일을, 그는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잡스런 말들로 나를 깎아내렸다. 사과를 하면 할수록 그의 말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공격했다. ‘여기가 당신 땅이라는 표시가 어디 있느냐’고, ‘그렇게 욕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욕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대꾸 한마디 하지 못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는데, 눈만 끔뻑이며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천천히 차창을 올렸다. 그의 목소리는 유리창 밖에서 둔탁하게 찌그러졌다.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참아. 참는 거야. 아니, 참을 일도 아니야. 너는 준다고 다 받니? 뭐든 받지 않으면 결국 그건 준 사람 몫이 되는 거지.’ 시동을 걸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최대한 침착한 손놀림으로 차를 움직였다. 지금 네가 뱉은 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너에게 선물로 되돌려 줄게.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사이드미러 너머로 그는 여전히 손짓을 해대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자꾸만 떨렸다. 입에서는 ‘허, 참’이라는 말이 연신 새어 나왔다. 분노도 억울함도 아닌,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든 감정이었다. 어딘가에 이 기분을 풀어놓고 싶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욕바가지를 그대로 되돌려주고 왔다고 하자, 그녀는 잘했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 조용히 한마디 덧붙였다. “얘, 밖에서 새는 바가지가, 안에서는 안 샐까?” 순간,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안 보면 그만이지만, 욕바가지 속에 사는 그의 가족들은 매번 휘청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입이 언젠가 가족의 앞날에 걸림돌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해 봤을까.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현관문을 열자, 아무 말 없이 나를 받아주는 이 공간이 고맙다. 조금 전, 내가 받지 않기로 한 욕 중에 하나라도 우리 집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조용히 목도리를 풀었다. /윤명희 수필가

2026-02-18

미풍양속이 사라진다고요?

몇 년 전 결혼한 딸을 설 연휴 전날 만났다. 올해부터 시가에서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시부모님을 뵈러 남편 고향에 가기는 하지만, 차례가 없어져서 올해부터 시가 방문 일정이 하루 줄었다고 한다. 차례를 주관하는 시가의 큰집에서 결정한 일이라는데, 그 집이 유난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차례나 심지어 제사까지 지내지 않거나 간소화하는 집이 늘어나고 있다. 본래 제사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 한밤중에 조상을 추모하는 의례이고, 차례는 명절이나 특정한 날 아침에 지내는 의례지만, 요즘에는 구분하지 않고 모두 제사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용어를 쓰느냐 하는 것보다 그 의례를 지내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명절에 정성스럽게 차례를 지내는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오랜 기간 외국 생활하는 지인이 명절마다 SNS에 올리는 차례상을 보면 감탄을 넘어 감동에 젖어 든다. 문제는 그런 정성이 우러나오려면 중심을 확실하게 잡아주는 어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집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설이나 추석에 민족이 대이동 하던 일은 우리 학창 시절만큼 뉴스거리는 아니다. 애써 가족이 모였어도 의미 없는 웃음과 상투적인 대화만 오가기 쉽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너무 오랜만에 만나 그럴 것이다. 그래도 60~70대 중 응답자의 35%가 넘는 사람은 명절이 추모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해진 예법대로 유교 의례를 수행하지 못한다 해도 유교 사상이 우리 문화 유전자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대가 내려갈수록 이 비율은 한없이 낮아진다. 2월 15일자 뉴스를 보니, 국민 3명 중 2명이 설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대신 가까운 해외나 국내 여행을 선택하는 추세가 늘어나고 있다. 명절이 충전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2030이 응답자의 50%가 넘는다. 명절이 추모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60~70대는 35%지만 20대는 10%도 안 된다고 한다. 명절이면 부정적인 뉘앙스로 세대 격차에 대한 통계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유교에서는 후손이 차례나 제사를 지내면 음식을 흠향한다고 한다. 조상신이라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조상신이 와서 흠향하고 간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이렇게 명절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 조상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문화 유전자에 유교 사상이 남아있다고 해도 그것을 실천할 여건이나 믿음이 없으면 명절 문화도 바뀌어 갈 수밖에 없다. 돌아가신 부모나 조부모를 기리기 위해 조상신의 흠향을 믿고 전통 의례를 수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가정마다 혹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조선시대조차도 ‘가가례’라고 해서 집집마다 예가 달랐다. 박제된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후손들의 화목과도 거리가 멀다. 전통 의례를 미풍양속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이 사라진다고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 행복한 의미 있는 의례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유영희 인문학자

2026-02-18

어지럼은 자율신경 문제일 수 있다

어지럼증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흔한 증상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지러우면 빈혈이거나 잠이 부족해서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한다. 하지만 임상에서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환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한 빈혈이나 피로가 원인인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오히려 상당수가 자율신경 불균형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우리 몸에는 심장 박동, 혈압, 호흡, 소화, 체온 조절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조절되는 시스템이 있다. 이를 담당하는 것이 바로 자율신경이다. 자율신경은 크게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나뉘는데, 스트레스가 많거나 수면이 부족하거나 몸이 과도하게 긴장하면 교감신경이 과항진 된다. 혈관이 수축되고 혈압이 불안정해지며 뇌로 가는 혈류 역시 미세하게 흔들리게 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이 바로 어지럼증이다. 문제는 이런 유형의 어지럼증이 일반적인 검사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검사, MRI, CT를 해도 특별한 이상 없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다. 환자는 분명 어지럽고 일상생활이 불편한데 검사 결과는 정상이니 답답함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환자들이 내 몸 어디가 잘못된 건가라며 불안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검사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검사 방식이 구조적 이상을 보는 데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능적 문제 즉 자율신경의 불균형은 영상검사나 일반 혈액검사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임상에서 어지럼증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공통된 패턴이 보인다. 잠을 깊이 못 자거나 스트레스 과다, 그리고 목과 어깨가 심하게 뭉쳐 있고 식사 시간이 불규칙한 경우가 많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자율신경이 과도하게 긴장하고 몸은 계속 긴장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로 인해 두근거림, 가슴 답답함, 손발 냉감, 두통, 소화불량 등이 동반된다. 이럴 때 한의학적으로 하는 접근은 환자의 증상과 신체 개선에 큰 도움이 된다. 한의학은 지엽적인 문제보다 자율신경의 균형 자체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두고 치료가 가능하다. 최근에는 초음파 가이딩 약침 치료를 활용해 자율신경과 밀접하게 연결된 부위 예를 들어 성상신경절 주변이나 미주신경을 보다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침 치료를 넘어 자율신경의 과도한 긴장을 직접적으로 낮추는 데 도움을 준다. 여기에 더해 개인의 체질과 상태에 맞춘 한약 처방을 병행하면 어지럼증의 재발을 줄이고 전반적인 컨디션을 안정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물론 모든 어지럼증이 자율신경 문제인 것은 아니다. 갑작스럽게 빙글빙글 도는 회전성 어지럼증은 이석증일 가능성이 있고 한쪽 팔 저림이나 발음 이상이 동반된다면 뇌혈관 문제를 의심해야 한다. 또한 심한 빈혈, 부정맥, 저혈압도 어지럼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처음 겪는 심한 어지럼증이나 점점 악화되는 증상은 반드시 검사를 통해 원인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검사상 이상이 없다고 해서 신경성이다 말로 끝내기에는 어지럼증이 삶의 질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어지럼증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몸이 미리 보내는 이상 신호일 수 있다. 특히 스트레스가 많고 잠이 부족한 현대인일수록 그 신호를 가볍게 넘기지 말고 조기치료를 하는 것이 좋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2-18

설날 분위기 망친 SNS

“할아버지를 앞에 두고도 종일 유튜브와 인스타그램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아예 휴대폰을 없애버리든가 해야지. 답이 없네...” 고등학생 자녀를 둔 지인의 푸념이다. 명절 풍경이 지난 시대와 크게 달라졌다. 1년에 겨우 한두 번 조부모를 만날 뿐이지만, 21세기 손자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잠시 얼굴을 마주할 때는 물론,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시간조차 휴대폰을 놓지 않고 SNS 속 영상에만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고. 그걸 말리다가 부모와 자식 사이에 볼썽사나운 다툼이 벌어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특정한 몇몇 청소년만 그런 게 아니니 더 큰 문제다. 조금 거칠게 이야기하면 인간이 인간과 소통하지 않고, 휴대폰 화면만을 친구로 여기는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SNS에 대한 청소년들의 과도한 집착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가 이로 인한 폐해를 걱정하고 있다. 극단적 처방까지 마련한 나라도 적지 않다. 지난해 12월 호주는 청소년의 SNS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실행했다. 법 제정 이후 16세 미만의 호주 청소년은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틱톡 등의 SNS를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 청소년의 계정을 차단하지 않은 플랫폼기업은 500억 원의 벌금을 부과받는다고 한다. 호주만이 아니다. 프랑스, 영국, 노르웨이 등 유럽 국가들과 우리와 같은 아시아 국가인 말레이시아 역시 청소년의 SNS 사용을 제한하는 법안을 마련하거나, 심의 중이다. 설날 분위기를 망친 것은 물론, 세대 간 단절의 벽을 쌓고 있는 청소년들의 심각한 SNS 중독을 해결할 방법을 이젠 우리도 고민해야 할 때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2-18

아침, 한 잔의 균형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커피를 내린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려두고, 끓는 동안 원두를 간다. 분쇄되는 소리 사이로 스며 나오는 향이 잠을 서서히 밀어낸다. 물이 다 끓으면 종이 필터를 적셔 특유의 냄새를 씻어내고, 동시에 드리퍼를 데워 온도를 맞춘다. 그 다음은 분쇄된 가루 위에 조심스럽게 첫 물을 붓는다. 약 30~40초 동안 커피가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며 기다린다. 이후에는 너무 빠르지도, 지나치게 머뭇거리지도 않게 일정한 속도로 원을 그리듯 물줄기를 붓는다. 한 잔이 완성되기까지는 대략 5분 남짓.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5분여간은 커피에 시선을 떼지 않고 조용히 기다린다. 바쁜 아침마다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일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내리는 시간은 마음의 작은 여유를 가져다준다. 물론 평일의 대부분 아침은 집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커피를 사 마신다. 가격도 합리적이고 기다리는 시간도 짧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사마시는 커피만으로도 하루의 카페인은 충분히 채워진다. 하지만 쉽게 구매해서 마시는 커피 한 잔은 오래 기억에 남지 않는다. 혀끝에 남는 맛도, 깊이 있는 향의 결도 없이 금세 사라진다. 마신 뒤에는 단지 카페인이 몸을 깨웠다는 사실뿐. 커피가 카페인을 채우기 위한 음료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데에는 충분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를 붙잡지는 않는다. 드립커피는 조금 다르다. 맛이 각기 다른 원두를 구비해놓으면 그날의 기분에 따라 원두를 선택할 수 있다. 산뜻한 산미가 필요한 날에는 꽃이나 과일 같은 밝은 향의 원두를, 마음이 가라앉은 날에는 초콜릿이나 견과류 맛이 나는 묵직한 풍미의 원두를 선택한다. 원두 봉투를 여는 순간 퍼지는 향, 손에 잡히는 원두의 촉감, 분쇄되는 소리, 혀에 층층이 감기는 맛까지도 그날의 컨디션과 맞물린다. 그리고 내가 고른 원두에 맞춰 분쇄도를 조정하고, 물의 온도와 붓는 속도를 가늠한다. 같은 커피라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보여준다는 것도 드립의 큰 매력이다. 커피를 내리는 과정은 약간 번거롭지만, 그만큼 날씨와 나의 기분과 그날의 온도에 맞춰진 정성스런 한 잔이 된다. 드립의 기본은 단순하다. 물을 서두르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커피 가루 전체를 골고루 적셔주면 된다. 한 부분에만 물이 오래 머물면 과하게 추출되고, 닿지 못한 부분은 충분히 맛을 내지 못하게 된다. 균일함이 균형을 만들기에, 좋은 맛을 내기 위해선 너무 빠르거나 또는 너무 느리게 물을 붓는 것이 아닌, 고르게 스며든 적당한 시간에서 나온다. 또 중요한 점은 한곳에만 물을 붓지 않는 것이다. 원을 그리듯 천천히 움직이며 전체를 살핀다. 커피가루 하나하나에 고르게 물을 머금게 해주어야 원두 본질의 향이 살아난다. 균형은 어떤 한곳에만 치우쳐 물을 붓는 것이 아니라 고른 관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드립의 또 다른 재미있는 점은 날씨와 습도, 물의 온도에 따라 미묘한 맛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추출해도 오늘은 또 다른 맛의 결과가 나온다. 그날의 원두와 공기, 나의 감각에 맞춰 균형을 찾아야 하고 완벽한 레시피가 있다기보다, 매번 다른 답을 찾는 과정에 가깝다. 우리는 속도에 익숙해져 있다.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많은 일을 해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나 역시 해야 할 일의 목록을 떠올리며 마음이 앞서 달려갈 때가 많다. 충분히 했음에도 조금 더 하려다 스스로를 지치게 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드립 커피를 내리며 생각한다. 한곳에만 물을 붓지 않듯, 하루의 힘도 한 방향에만 쏟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균형은 급함이 아니라 고른 분배에서 생긴다. 요즘의 나는 아침의 몇 분을 드립 커피를 내리는 방식으로 보낸다. 단순히 카페인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천천히 물을 붓는 동안만큼은 하루의 속도를 내가 정하고 싶어서다. 향이 피어오르고, 잔에 커피가 차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며 오늘의 균형을 점검한다. 한 잔의 커피가 하루를 완전히 바꾸지는 않지만 시작의 온도는 바꿀 수 있다. 내가 고른 원두와 내가 조절한 물줄기로 완성된 한 잔은, 누군가의 손을 거친 완성품과는 다른 의미를 남긴다.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거창하거나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다만 매일 아침, 나를 돌보려는 작은 시선에서 비롯될 뿐. 천천히, 그리고 고르게. 원두 드립을 내리는 아침의 몇 분이 하루를 더 건강히 지탱하게 한다. /윤여진(시인)

2026-02-18

소파 옮기기

카페에 홀로 앉아 종일 아무것도 쓰지 못한 날이었다.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홀짝이다 보니 해가 떨어져 있었다. 깜빡이는 커서와 눈을 맞추며 괜한 스트레스만 받은 셈이었다. 우중충한 밤이었다. 아주 많은 미세먼지가 섞여 마치 지점토로 수차례 까만 바닥을 문지른 듯한 밤이었다. 목이 칼칼하고 눈도 따가운 느낌이었다. 얼른 돌아가야지. 그때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너, 우리 집으로 좀 와. 오라고 하면 나는 오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유가 궁금했다. 뽀글이(누나네 반려견. 작은 푸들이다.) 밥을 주고 챙겨달란 일이 아니면 굳이 자기 집으로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후 10시, 뽀글이가 밥을 먹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다. 누나는 뜸들이지 않고 이유를 말했다. 본가로 소파를 옮겨야 하는데 제법 무거우니 와서 도우라는 것이었다. 부모님이 기존에 쓰던 소파는 버리고 누나네가 쓰던 소파를 사용하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 정도야 쉽지. 갈게. 누나네는 본가에서 백 미터 내외 거리로 사실상 앞 단지에 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말은 바로 이 두 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 저 멀리 1층 입구에서 소파를 앞에 두고 매형, 누나, 서후(조카. 운동과 공부를 모두 잘하는 초등학생이다.)가 같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걸 1층까지 내렸으면 이제 별로 어려운 건 없는 거 아닌가? 내심 그런 생각을 했다. 가까이서 보니 소파는 예상보다 더 거대했다. 나무로 된 그것은, 소파라기보단 호수 공원에 놓인 거대한 나무 벤치를 뽑아서 가져온 것 같은 형상이었다. 일단 들어올리자. 나와 매형이 소파를 앞과 뒤에서 들고 양옆에서 서후와 누나가 들었다. 들어올리자마자 알았다. 이건 사람이 손으로 편하게 옮기라고 만든 게 아니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거기에 두고 계속 쓰는 거다. 내 집 이사 문제로 들었던 침대 프레임이나 장롱도 이거보단 덜 무거웠다. 갑자기 약간 진심이 되었다. 서후도 저렇게 힘을 보태는데 삼촌이 힘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사람이 나무 소파를 한 걸음씩 조심조심 옮기기 시작했다. 하나-둘. 하나-둘. 혹시라도 턱에 발이 걸리지 않을까 싶어 신중히 움직였다. 조깅하는 동네 주민이 우리를 굉장히 흥미로운 눈으로 보며 지나갔다. 뭔가 이벤트를 발견한 것처럼 반응했다. 속으로 나도 이걸 왜 손으로 옮기고 있지 싶었으나 그렇다고 용달을 부르기엔 너무 가까운 것 같고 그랬다. 평소에 오갈 때는 딱히 오르막 경사가 크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그날은 유독 그 오르막이 언덕처럼 느껴졌다. 잠시 쉬어가기로 하여 소파를 내려놓았을 때 도대체 이걸 1층까지 어떻게 갖고 내려온 거냐며 물었다. 그러자 서후가 자랑스럽게 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수레를 보여주었다. 매형이 거기에 소파를 세로로 얹어서 끌고 내려왔다고 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했지만 아무래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 위험하기에 거기선 수레로 옮길 수가 없으니 들기로 결심하여 나를 부른 것이었다. 다시 천천히 옮기다가 한 사람씩 눈이 마주치곤 불쑥 웃음이 터졌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나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꼭 이런 장면을 본 것 같았다. 두 시트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온갖 어지러운 사건들 속에서도 지속되는 가족애, 공동체 내에서의 특별한 친밀감이 있다는 것이다. 가까운 사이여도 가까이 있다고 느끼기란 어렵다. 식탁에 모두 함께 앉아 밥을 자주 먹기도 쉽지 않다. 다른 누구의 문제는 아니고 밤낮이 자주 바뀌는 나 때문이다. 다 같이 눈을 맞출 일도 별로 없다. 그러나, 소파를 안쪽으로 두고 나란히 들었으니 우리 모두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소파 하나를 같이 들고 있었을 뿐인데 우리는 계속 킥킥댔다. 그만 웃겨, 힘 빠져. 멈추지 않는 웃음의 이유를 그냥 수레를 들고 흥얼거리고 있던 서후 탓으로 돌렸다. 기어이 모두의 힘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그리고 현관 중문에서 작은 난관은 있었지만 그래도 소파는 본가 거실에 무사히 옮겨졌다. 각자도생의 시대라 그런지 나도 남도 선을 넘길 바라지 않는다. 언제나 자기의 울타리 안에서 스스로를 지킬 뿐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혼자 살아간 적은 없다. 세상과 주변의 영향과 도움이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혼자서는 소파 하나를 들어올릴 수도 없다. 한쪽이 기울면 다른 한 사람이 받쳐주는 일.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시시콜콜한 농담을 우리가 나눌 수 있다는 게 기쁘다. 서후의 등을 토닥이며 떨어지는 땀을 닦으며 우리가 뭔가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파 하나를 옮겼을 뿐이지만. /구현우(시인)

2026-02-18

[역사 에세이] 임진왜란, 16세기판 ‘미니 세계대전’을 다시 보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흔히 조선·명·일본이 맞붙은 ‘동아시아 삼국전쟁’으로 배운다. 그러나 전쟁의 현장을 조금만 넓게 들여다보면, 그 구도는 훨씬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1592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사실상 대항해시대의 파고(波高) 속에서 전개된 ‘16세기판 미니 세계대전’에 가까웠다. 당시 동북아는 이미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에 전해진 조총은 1543년 포르투갈 상인을 통해 규슈 다네가시마에 전래된 ‘아쿼버스’(arquebus)였다. 일본은 이를 신속히 국산화하고 대량 생산 체계를 구축했다. 임진왜란 초반 일본군의 파상적 진격 뒤에는 유럽 화기(火器) 기술의 축적이 있었다. 명나라가 사용한 ‘불랑기포’(佛郞機砲) 역시 포르투갈 계통의 화포를 모방한 무기였다. 유럽의 군사 기술이 마카오를 거쳐 명으로, 다시 조선 전장으로 유입된 셈이다. 한반도 해전의 포성 뒤에는 이미 유라시아 해상 교역망이 깔려 있었다. 인적 구성 또한 다층적이었다. 선조실록에는 외모가 이색적이라 ‘해귀(海鬼)’라 불린 병사들의 기록이 등장한다. “얼굴은 옻칠을 한 듯 검고 눈은 누렇다”는 묘사는 조선인이 처음 목격한 아프리카계 인물에 대한 충격을 보여준다. 이들은 명 수군 장수 진린(陳璘, 1543~1607년) 휘하에 있던 포르투갈계 용병 혹은 모잠비크 등지 출신 노예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동아프리카 인력이 마카오를 거쳐 동아시아 전장에 투입된 것이다. 일본 진영에도 유럽인은 존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으로 1593년 조선에 들어온 스페인 출신 예수회 신부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는 왜성에 머물며 사목(司牧) 활동을 했다. 그가 남긴 편지글은 전쟁 상황을 유럽에 전한 초기 기록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조선의 전쟁이 이미 가톨릭 네트워크를 통해 서구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명군 내부 역시 단일하지 않았다. 광동·광서 등 남방 출신 수군, 이른바 ‘남만’(南蠻) 병사들은 문신(文身)과 독특한 전투 방식으로 조선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들은 긴 창이나 칼 대신, 좁은 배 위에서 휘두르기 좋은 짧은 단검(쌍도)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왜군의 카타나(일본도)가 닿지 않는 초근접 거리로 파고들어 급소를 찌르는 전술을 썼는데, 이는 왜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들에 대해 “명나라 군대 중에 남방에서 온 병사들이 있는데, 이들은 몸이 작고 날렵하며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평지 걷듯 한다. 왜병들이 이들을 매우 두려워하여 이름만 들어도 겁을 먹는다” 언급한 바 있다. 왜구와 싸워온 해상 전투 경험은 이순신 함대와 함께 왜군을 압박하는 데 기여했다. 또 일본군 장수 출신 사야가(김충선)처럼 국적을 넘어 전쟁의 편에 선 인물도 있었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단순한 지역 패권 다툼이 아니었다. 은과 향신료, 선교와 무기, 노예와 용병이 교차하던 16세기 세계체제의 한 단면이었다. 마카오와 나가사키, 한양과 북경이 해상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었고, 그 연결망 위에서 한반도는 격전지가 되었다. 오늘 우리가 이 전쟁을 다시 바라보는 이유는 단순한 흥미 때문이 아니다. 임진왜란은 이미 400여 년 전, 한반도가 세계사적 흐름 속에 깊이 편입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삼국지’로 축소된 기억을 넘어, 세계가 얽힌 전쟁으로 재인식할 때 우리는 역사를 더 넓은 시야로 읽을 수 있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2-17

차례상 간소화 바람

2000년대 초반, 주부 상대 여론조사에서 주부들이 겪는 명절 스트레스의 으뜸은 차례상 차리기였다. 음식장만부터 차례상 준비와 설거지에 이르기까지 온 종일 가사 일을 도맡아하는 주부들의 일 부담이 매우 컸다는 뜻이다. 당시 설문조사에서 “가사 일을 남편이 도와주느냐”는 물음에 절반 이상은 아니라 답했으니 당시 주부들이 느낀 명절 스트레스 강도는 상중하 중 상위급이다. 우리나라 제사문화는 수천 년 역사를 갖지만 격식이 엄격해지고 상차림 음식이 많아진 것은 조선시대부터라고 한다. 조선시대 들어 왕족이 4대 봉제사를 지내면서 사대부 집안도 이를 따르게 되고 이후 서민 가정서도 4대 봉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왕족의 예법이 일반 서민가정으로 전파되면서 더 많은 조상을 모시게 되고 예법도 까다로워진 것이다. 유교문화는 본래 화려함보다 간소하고 단촐함을 추구하는 사상이지만 격식을 중시하는 조선시대 양반문화가 제사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말이다. 과일은 가장자리에 배치하고 밥과 국은 중앙에, 나물류는 왼쪽에, 생선이나 고기는 오른쪽에 둔다고 했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좌포우혜 등의 말이 만들어진 것. 한국유교문화진흥원 산하 한국예학센터는 설 명절을 앞두고 현대 사회의 변화를 포용하는 현대 맞춤형 ‘설 차례 예법’을 제안했다. 센터는 차례상 부담을 줄이고 가족 간 화합과 행복을 새기는 취지로 설 차례상의 음식은 떡국을 포함 4~6가지 품목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전통은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처럼 시대에 맞게 흐를 때 비로소 우리 곁에 머문다”는 말로 제사상 간소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세태가 달라졌다는 뜻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2-12

행정통합, 속도보다 방향이다

행정통합이라는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정부가 대규모 재정 지원과 각종 특례를 약속하자,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속도를 내고 있다.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 통합단체장 선거를 염두에 둔 정치인들도 분주하게 움직인다. 대구·경북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무리하게 과속 페달을 밟는 듯 하다. 행정통합은 속도전이 되어서는 안된다. 충분한 검토와 사회적 숙의 과정 없이 추진되는 행정통합은 지역 경쟁력을 높이기는커녕, 새로운 갈등과 지역 간 양극화를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행정통합은 단순히 광역단체의 외형을 키우는 문제가 아니다. 행정 권한의 재배분, 재정 구조의 변화, 지역 공공서비스의 재편 등 주민의 일상과 직결된 사안이다. 한 번 추진되면 되돌리기 어려운 결정인 만큼, 그 파급 효과는 장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현재 논의는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때 서둘러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통합의 실질적 필요성과 효과에 대한 냉정한 검증이 충분히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특히 경북 내 여론이 단일하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경북의 여러 지역에서는 통합 이후 대구 중심의 행정 집중화, 경북 북부 지역의 소외, 재정 배분의 불균형, 지역 정체성 약화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러한 우려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통합 이후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경고를 내포한다. 공론화 과정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통합을 밀어붙인다면, 이는 지방자치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재정 지원과 특례 보장은 분명 매력적인 유인책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한시적일 수 밖에 없다. 통합 이후 재정 부담을 장기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 행정 효율이 실제로 개선되는지에 대한 판단은 별개의 문제다. 준비되지 않은 통합은 불필요한 비용 증가, 행정 혼선, 조직 비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대했던 시너지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그 책임과 부담은 고스란히 지역 주민에게 돌아간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현재의 행정통합 논의가 오는 6월 3일 지방선거 일정에 맞춰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의 백년대계를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 정치적 일정에 맞춰 졸속으로 진행될 위험에 놓여있는 것이다. 특히 대구·경북 행정통합의 경우 대구시장의 부재로 이철우 도지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행정통합은 선거용 구호로 소비될 사안이 아니다. 지역의 미래를 바꾸는 중요한 결정이 정치적 계산에 좌우된다면, 정책의 지속 가능성은 담보되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세밀한 설계다. 통합의 필요성, 단계별 추진 방안, 통합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대책까지 투명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충분한 정보 공개와 숙의 과정 없이 추진되는 통합은 명분을 얻기 어렵다. 발묘조장(拔苗助長). 급한 마음에 식물의 싹을 억지로 잡아당겨 말라죽게 한다는 의미로 성급함이 일을 그르치게 한다는 고사성어다. 이미 국회로 넘어간 대구·경북 행정통합 논의는 지금이라도 속도를 늦추고, 차분히 절차와 내용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신중하지 못한 통합은 오히려 지역의 부담을 가중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2-12

기후위기 취약계층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별명이 익숙해진 대구의 여름은 이제 극심한 폭염을 넘어 기후재난의 위협에 직면했다. 최근 기록적 폭염부터 갑작스러운 호우, 한파까지 다양한 재난이 잦아지며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고통이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다.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는 방어력과 회복력이 약한 계층에게 가장 먼저, 가장 깊숙이 파고든다. 지역 사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선 ‘기후위기 취약계층’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맞춤형 지원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기후위기 취약계층’일까? 기후에너지환경부와 한국환경연구원이 발간한 ‘기후위기 취약계층 실태조사 안내서’에 따르면, 이들은 크게 세 가지 특성으로 분류된다. 첫째, 사회·생물학적 특성으로, 신체적 조절 능력이 약한 65세 이상 어르신, 영유아, 장애인 등이 해당한다. 둘째, 경제적 특성으로, 냉난방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이다. 셋째, 주거환경적 특성으로, 쪽방이나 고시원, 30년 이상 된 노후 주택, 그리고 침수 위험이 높은 반지하에 거주하는 분들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개념은 ‘중점관리지역(Hot Spot)’이다. 이는 기후위험 노출도가 높으면서 동시에 취약계층이 밀집해 있고 주거 환경마저 열악한 세 가지 악조건이 겹치는 지역을 말한다. 분지 지형으로 열이 갇히기 쉬운 대구의 특성상, 성서산업단지 주변이나 구도심의 노후 주택가는 대표적인 핫스팟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여름철 쪽방촌의 실내 온도가 40도를 넘나든다는 조사 결과는 우리 지역 취약계층이 겪는 생존의 위협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국내·외 선진 사례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서울시의 경우, 단순히 물품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 ‘안부 확인 콜 서비스’, ‘쿨루프(지붕 차열 도색) 시공’, ‘사물인터넷(IoT) 기반 돌봄’ 등 맞춤형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대구 역시 ‘쿨링포그’ 설치나 ‘안심하이소’ 앱 운영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우선, 우리 지역 곳곳에 숨겨진 취약계층을 찾아내는 ‘정밀한 실태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안내서를 활용하여 대구·경북의 지역적 특성에 맞는 자체 조사를 기획해야 한다. 단순히 소득 수준으로만 대상을 한정하지 말고, 폭염에 노출된 야외 노동자나 환기조차 어려운 주거지에 사는 이들을 찾아내야 한다. 또한, 찾아낸 이들에게는 획일적인 지원이 아닌, 주거 환경 개선이나 심리 상담, 커뮤니티 기반의 돌봄 등 실질적인 적응 사업을 연결해야 한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민의 특성을 고려할 때, 디지털 기기 활용이 어려운 어르신들을 위해 마을 방송이나 통·반장을 통한 정보 전달 체계를 강화하는 세심한 배려도 필수적이다. 기후위기 적응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오늘 우리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질 때 사슬 전체가 끊어진다”라는 말처럼 우리 사회 가장 취약한 곳을 튼튼히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지속가능발전이다. 올 겨울,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따뜻하고 안전한 대구·경북을 꿈꿔본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6-02-12

나잇값 하기

병원에선 나이를 만으로 쓰라고 한다. 어린 나이에 이런 것은 짜증 나는 일이었다. 특히 머리가 나빠 수(數) 계산에 약한 터라 더욱 그랬다. 그래서 한참을 생각하고 대충 나이를 적는다. 지금 내 나이에서 한 살을 빼야 하는지 두 살을 빼야 하는지 잘 몰라서다. 옆 친구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조건 한 살 빼란다. 친하긴 하지만 머리 쓰는 쪽으로는 별로 믿음이 안 가는 친구라 똑똑한 반장에게 물어본다. 생일이 안 지났으면 두 살 빼고 지났으면 한 살 빼란다. 어렵다. 그래서 나도 친구 따라 무조건 한 살 빼는 것을 택했다. 복잡한 건 무조건 싫어하니깐. 남자라는 족속들은 족보 따먹기에 민감한 시절을 거친다. 특히 고등학교 때 유독 심하다. 중학교까지는 같이 다니다가 아파서 한 학년 쉬다가 들어와 밑에 학년이 되는 경우가 있다. 동네에선 같은 친구지만 학교에선 학년이다. 나이와는 관계없다. 무조건 학년이다. “빠른 몇 년생이다.” 같은 학년이지만 나이가 한 살 적은 경우가 있다. 1월부터 3월생들이다. 우린 이런 애들을 ‘빠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이야기한다. 이들은 나이는 같지만, 학년은 높아 밑에 후배들에게 나이를 한 살 속이기도 한다. 혹자는 돌아가신 애먼 할아버지 핑계를 댄다. 언제 죽을지 몰라 일 년 뒤에 신고했다고. 어떤 이들은 어른들이 애들 출생신고를 한꺼번에 모아서 가는 바람에 몇 년 늦었다고 하기도 한다. 실제 그런 일이 있기도 한 시절이라 그냥 넘어간다. 그놈의 나이가 뭐라고. 복(福) 많이 받으라는 인사 시즌이다. 신정 때 한번 하고 구정 때 또 한 번 해야 한다. 참으로 희한한 나라다. 그래서 어릴 적엔 신정 때 한 살 먹고 구정 때도 한 살 더 먹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음력이란 걸 알았고 생일이 왜 매년 달력과 다른지도 알게 되었다. 생일이 언제인지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음력”이란 말을 꼭 붙인다. 요즘도 업체에선 내 생일도 아닌데 축하 메시지를 보내와 당황스럽다. 음력 생일을 양력 생일 날짜에 맞춰 문자를 발송해서 생긴 일이리라. “붉은 말의 해” 뭐 때문에 ‘붉은’ 말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만, 그렇게 부른다. 누가 내게 붉은 부적 한 장을 들이민다. 올해 삼재(三災)란다. 불교에선 삼재란 말이 없다. 정통 명리학에도 삼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삼재니 뭐니 하면서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쥐어짜서 한푼 벌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도 부족해 들삼재, 눌삼재, 날삼재라고 세분화한다. 12개 띠 중에 9개 띠가 항상 삼재에 걸리게 만들어 놓고선, ‘삼재팔난’ 운운해 가면서 난리다. 양력에 나이를 먹든지 음력에 나이를 먹든지 먹었으면 나잇값이나 하고 살아야 할 텐데 사리 판단 제대로 못 하고 엉뚱한 행동하는 사람이 자꾸 보인다. 신년 되었다고 점집 찾아 토정비결이나 보고 다니면 젊은 애들에게 욕먹는다. 그리고 나이 들어 미신 찾으면 굉장히 추해진다. ‘만 나이’ 헤아리고 ‘학년’ 따지고 ‘빠른 나이’ 따지는 시절 다 지나가고 이젠 한 살이라도 줄여보려고 애쓴다. 더는 나이 계산할 나이가 아닌 모양이다. 나잇값을 해야 하는 나이다. /노병철 수필가

2026-02-12

빙판과 설산, 뉴스 너머 동계올림픽

뉴스의 분량과 속도는 숨이 가쁠 만큼 거세고 빠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국제 정세가 뒤집히고, 경제 지표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젓는다. 대체로 불안과 분노, 피로와 공포를 전한다. 그런 가운데 이탈리아 밀라노-코르티나에서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있다. 예년 같았으면 거리의 전광판이 바빠지고 포털의 첫 화면이 요란했을 텐데, 이번은 왠지 비교적 차분하다. 마치 세상의 소음에 묻혀 설원 위의 함성이 멀게만 들려오는 느낌이다. 스포츠가 차지하던 자리를 이제는 수많은 뉴스와 이슈들이 차지해 버렸다. 전쟁과 갈등, 정치현안과 경제불안이 일상화된 시대에 올림픽축제는 잠시 숨을 고르는 틈새 정도로 취급되는 듯하다. 그래도 화면을 조금만 멈춰 바라보면, 그 ‘틈’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장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빙판을 가르는 스케이트 날은 군더더기 없는 선으로 시간을 자르고, 설산 언덕을 질주하는 선수의 몸짓은 중력을 거부하는 하나의 곡선이 된다. 촌각을 가르는 승부 뒤에는 수년의 반복과 실패, 부상과 회복이 숨 쉬고 있다. 무명의 젊은 선수들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며 만들어 올리는 동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며 환희다. 박수는 메달 색깔이 아니라 그 과정에 먼저 가닿아야 한다는 사실을 올림픽은 조용히 숭고하게 상기시킨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아직 출발선에 서 있는 셈이다. 국가대표라는 이름을 짊어진 개인들의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훈련장을 오가며 흘렸을 땀, 남들보다 한 발 일찍 빙판에 서야 했던 새벽들,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다시 장비를 고쳐 신었던 순간들. 우리는 국기를 배경으로 선 시상대 장면만을 기억하지만, 올림픽의 진짜 이야기는 대부분은 그 이전의 드라마로 채워져 있다. 동계올림픽이 던지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속도의 대비다. 일상의 뉴스는 즉각적인 판단을 요구하지만, 스포츠는 기나긴 기다림을 전제로 한다. 한 번의 도약을 위해 수백 번의 실패가 필요하고, 4년에 꼭 한 번 무대를 위해 선수들은 오랜 시간을 견디고 견딘다. 신속한 결론에 익숙해진 사회에서 우리는 시간의 느린 리듬이 낯설다. 결과를 재촉하지 않고 과정을 지켜보는 끈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지낸 필수 감각이 아닐까. 아직 열흘 일정이 남아 있다. 많은 경기와 많은 얼굴들이 등장할 것이다. 어떤 이는 환호를 받을 것이고, 어떤 이는 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한 채 돌아설 수도 있다. 설산과 빙판에서 최선을 다하는 순간만큼은 모두에게 같은 무게를 지닌다. 그런 장면들이 세상의 소음과 잡사에 묻히지 않기를 기대한다. 복잡한 시대에 올림픽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라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비춰주는 거울이 아닐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 실패를 딛고 서는 인내, 상대를 존중하는 용기. 이번 겨울, 대한민국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도한 기대보다 차분한 응원이다. 화면 너머로 보내는 작은 박수 하나가 긴 시간을 견뎌온 이들에게 엄청나게 큰 힘이 된다. 마지막 남은 열흘, 우리가 젊은 선수들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2-11

아, 집이여!

5월 9일 주택양도소득세 중과 종료를 앞두고 이재명 대통령이 더 이상 유예는 없다고 연일 강조하고 있다. 주택 정책은 온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다. 어느 정도냐면, 주택 정책의 성패가 정권의 명운을 좌지우지할 정도다. 집값이 유례없이 상승했던 문재인 정권이 끝나가는 2021년 말, 다주택자에게 최대 82.5%를 적용했고, 단기 매매에 대한 세금도 60-70%였다. 결국 2022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선거에 진 것은 집값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윤석열 정부는 양도세 중과 유예했고, 4년이 지난 올해 5월 9일 유예 종료를 앞두고 있다. 이렇게 양도소득세율은 상황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한다. 1967년 이전에는 양도소득세가 없었다. 그러다가 주택값 상승 조짐이 보이자 1967년에 법령을 제정한 것인데, 이 법령은 1세대 다주택에도 물가상승률을 공제해주었고, 시가표준액을 기초로 과세해서 실효가 없었다. 그 후 양도세가 조금 강화되다가 1970년대 말 경기 불황 때, 1997년 외환위기 때 양도세를 완화했다. 그러다가 2002년 집값 급등으로 다시 양도소득세를 강화했다. 최근 서울 반포의 래미안원베일리의 경우, 2021년 입주 당시 34평형 기준 20억짜리가 4년 만에 60억이 넘었다. 집값 상승 국면에서 이만큼 시세차익을 봤다면 양도소득세를 중과세하는 것은 조세 정의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소득이 있으면 세금을 내는 것이 국민의 의무라는 점을 생각하면 주택 매매로 이익을 얻었을 때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양도세 강화가 집값 안정에 과연 도움이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이 속시원하게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부자들은 양도세에 꿈쩍도 안 하고 임대로 생활하는 다주택자만 피해를 본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력 있는 다주택자는 매물을 잠그는 식으로 대응하여 집값을 높인다는 조사 결과도 있어서 오히려 소득세 강화가 집값을 부추긴다는 주장까지 반론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보유세이다. 보유세를 양도세보다 높이면 매물이 나올 가능성이 많다.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세금을 매기는 대상은 많다. 주택처럼 고가의 물건에 대해서는 보유세를 매길 명분이 있다. 그러나 중과라는 말을 굳이 붙이면 많은 국민이 반발한다. 일반 소득세는 8단계 누진세율로 정해진다. 주택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집값 구간을 단계별로 나누어 누진세율을 적용하면 중과니 완화니 하는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제안할 점은 장기보유특별공제다. 아무리 고가 주택이라도 2년 이상 거주하고 3년 이상 보유하면 장기보유특별공제를 받을 수 있는데, 공제 비율이 연 8%(인플레 반영 4%, 거주기간 공제 4%)이고 최대 10년 80%까지 공제해준다고 한다. 4년 만에 40억 이상의 차익을 실현한 아파트에 매년 8%씩이나 감면한다면 일반 국민이 공감하기 어렵다. 소소하지만, 유상 무상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양도라는 용어를 유상의 의미만 있는 매도로 변경하면 어떨까? 양도세보다 매도세가 저항감 줄이는 데 약간의 효과는 있을 것 같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2-11

봄과 등산 그리고 무릎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면 사람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밖을 향한다.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따뜻한 햇볕을 따라 깨어나듯 산은 다시 활기와 생기가 돌고 등산객들의 숨결이 퍼진다. 등산은 단순한 운동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스트레스를 줄여 자율신경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발밑의 흙냄새와 새싹이 올라오는 기운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우리 몸과 마음을 함께 일깨운다. 봄철 등산의 이로움은 분명하다. 완만한 오르막을 꾸준히 걷는 것만으로도 심장은 적절한 자극을 받고 폐는 더 깊고 규칙적으로 깨끗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혈액순환이 좋아지면서 겨울 동안 정체되었던 신진대사도 살아난다. 무엇보다 자연 속에서 걷는 행위 자체가 스트레스를 낮추고 자율신경의 균형이 무너졌던 것을 바로 잡아준다.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새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가라앉고 잡념은 옅어진다. 그러나 봄철 등산에는 반드시 함께 따라붙는 숙제가 있다. 바로 무릎 관리다. 겨우내 활동량이 줄어든 상태에서 갑자기 산을 오르면 무릎 관절과 주변 근육, 인대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 과부하를 받기 쉽다. 특히 하산 길이 문제인데 올라갈 때는 심폐 기능이 힘들지만 내려올 때는 무릎이 힘들게 버텨야 한다. 체중의 몇 배에 해당하는 충격이 반복적으로 가해지면 연골과 인대에 미세 손상이 쌓일 수 있다. 실제 초음파로 무릎을 살펴보면 오랜 기간 등산을 즐겨 온 분들 중 상당수가 한쪽 무릎만 유난히 많이 닳아 있는 경우를 자주 본다. 어떤 경우에는 7~80대 노인의 무릎에서 보일 법한 연골 마모와 골극(뼈가 뾰족하게 자라난 형태)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나타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 한쪽 무릎이 더 심하게 망가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몸의 중심을 한쪽으로 더 실어 걷거나 통증이 있는 쪽을 보호하려다 반대쪽에 더 많은 부담을 주는 과정이 누적된 결과다. 한쪽 무릎이 자주 아픈 사람이라면 통증을 참고 무작정 산에 오르기보다 먼저 제대로 치료하고 등산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순한 근육통이 아니라 관절이나 연골 문제라면 방치한 채 반복적으로 하중을 주는 것은 회복을 늦출 뿐 아니라 구조적인 손상을 키울 수 있다. 봄철 등산은 잘 올라 가는 것 보다 잘 내려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리막에서는 보폭을 줄이고 상체를 너무 앞으로 숙이지 말아야 한다. 가능하면 스틱을 사용해 무릎의 부담을 분산시키는 것도 좋다. 무릎보호대를 준비하고 무릎에 통증이 오면 바로 무릎 보호대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또 등산 전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을 충분히 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근육이 유연할수록 관절이 받는 충격이 완화된다. 봄에 시작하는 등산의 핵심은 균형이다.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되 몸의 신호를 존중하고 빠르게 정상에 오르기보다 안전하게 다시 내려오는 것에 신경을 쓰자. 그리고 아픈 무릎이 있다면 서두르지 않고 먼저 돌보고 그렇게 걸을 때 비로소 등산은 우리에게 건강과 평온을 동시에 선물한다. 봄바람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무릎을 아끼는 마음으로 산을 오른다면 이 계절은 더욱 풍요롭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2-11

포항시민 김숙희 여사-죽도시장 할매죽집

나는 봤다 사파이어 바이올렛 너머의 아득한 깊이 가늠할 수 없는 향기 나는 그렇게 오롯한 존재의 증명을 봤다 현현(顯現)의 부처님일까 싶기도 했다 쑥부쟁이처럼 들판을 누비는 밥벌이의 수고로움 일렬종대로 혹은 하 수상한 세월에 대한 부역이어도 내 새끼 목구멍은 포기할 수 없는 가당찮은 세월 견디고 주무르며 적당히 타협하며 이합과 집산의 현란한 블루스 그렇게 지금까지 왔다 세상의 안녕함을 기원하며 늘 맞이하는 새벽부터 안개와 비바람은 적대적인 존재였지만 친구이기도 했다 죽도시장의 새벽은 언제나 경건했다 저항과 연대의 교과서는 언제나 시장이라는 사실은 적확하다 거기서 생성되는 언어는 생멸의 가치를 초월하는 진리였다 하여 명분이 멸치 대가리에 불구한 훈장을 스스로 달기도 했다 부끄럽지 않으니 그것도 충분한 퍼포먼스, 쑥스럽기도 하지만, 정당하다, 참 아득하게 견딘 삶, 인생은 명예가 아니라 원죄에 가까운 작란(作亂)이었지만 충실하게 살았다는 현장검증에 부합하는 것은 대략적 진실이다 축복된 삶이라 생각하며 남루해도 차갑지 않으니 오후의 햇살이 오히려 따갑다. 오래 살았으니 참 고맙고, 따신 온기 나누었으니 더 고맙다 사파이어 바이올렛의 삶이라고 눈부시게 말하지만, 전달도 안 될 미진한 삶이라 겸손해 하시지만 그러나 끝내 누군가를 위한 삶이었네 그렇게 모진 생애의 페이지를 고이 다듬으며, 어머니 몸으로 법언(法言)을 하시네 죽도시장의 완결판 위키피디아라 할 만하네. … 죽도시장의 ‘할매죽집’의 어머니는 55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을 팥죽과 녹두죽과 호박죽으로 허기 너머의 달콤한 시간을 선물해 주셨다. 인고의 세월을 건너며 삶의 한 전형을 보여주셨다. 그 장도(壯途)는 생업을 너머 선험적인 헌신이었다. 내 친구의 어머니이므로 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호사가들의 구라에 의하면 어머니들이 신의 대리인이라 말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존재 자체다. 신의 대리인이라는 거창한 말을 들먹이는 자들에게 십구 문 짜리 기차표 찹쌀 흑고무신으로 마빡을 후려치고 싶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 불멸과 불후의 존재다. 어머니이므로.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6-02-11

머리 위에 얹었던 시간

올해는 박경리 작가 탄생 100주년이다. 그를 기리는 나만의 방식으로 예전에 읽었던 ‘토지’ 전권을 매일 한 권씩 다시 읽었다. ‘토지’는 약 26년간의 집필 기간을 거친 대하소설이지만 나에게 먼저 다가온 것은 분량보다 등장인물들의 숨결이었다. 민중의 삶들이 흙처럼 겹겹이 쌓여 하나의 역사를 이룬 듯했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나는 환경에 흔들리면서도 유장하게 삶을 이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조선인들의 생활사가 자세히 묘사된 책을 읽고 났더니 문득 국립대구박물관에 가고 싶어졌다. 주말에 일정을 조율해 대구박물관에 다녀왔다. 박물관은 언제나 시간을 잠시 멈춰 세우는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복식문화실은 유독 내 발걸음을 늦추게 했다. 복식의 변천사는 의복이 몸을 감싸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감당하는 자세의 변화처럼 보였다. 시대가 바뀔수록 옷은 가벼워졌지만 그 옷을 입고 살아낸 시간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으리라. 그곳에서 오래 시선을 붙잡은 것은 흑립이었다. 흑립은 유리 진열장 안에서 완벽하게 고요했으며 근엄했다. 말총의 촘촘한 결, 둥근 테의 균형, 빛을 삼키는 듯한 짙은 검정은 하나의 완성된 형식이었다. ‘국가무형문화재 갓일 기능보유자 입자장 박창영’ 장인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설명문 옆에서 갓은 기능과 미학의 정점으로 존재했다. 갓은 일상의 쓰임에서 벗어나 보존의 대상으로 변모하더니 어느덧 현재의 테두리 바깥에 놓여 과거의 물건이 된지 오래된 듯 보였다. 그러나 흑립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자꾸만 다른 갓과 겹쳐졌다. 유리 너머에서 정적(靜的)으로 존재하는 갓이 아니라, 바람과 햇빛을 맞으며 동적(動的)으로 살아있던 작은외할아버지의 갓이었다. 그분은 집성촌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던 훈장님으로 명절이면 한복을 차려입고 상투를 틀어 올려 갓을 쓴 채 마을길로 나섰다. 그 시절 나는 할아버지의 갓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명절이면 으레 보았던 풍경이었고 자연스러운 차림이었다. 그러나 박물관의 흑립 앞에 서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갓은 머리 위에 얹는 단순한 의미의 사물이 아니라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긴 수염을 훑으며 에헴 헛기침을 하던 순간 속에서 갓은 겉치장이 아니라 태도였다. 집안 어른들을 찾아뵙고 예의범절을 다하는 몸가짐이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아무에게나 고개를 함부로 숙이지 않게 하고 세상사에 쉽게 타협하지 않게 만드는 신념과 자존감이 갓 속에 담겨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대구박물관을 나서며 다시 한 번 흑립을 떠올렸다. 복실문화실의 흑립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물건이 되었지만 작은외할아버지의 갓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거풍되고 있었다. 박물관의 유물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고 기억 속의 갓은 현재의 내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였다. 그 차이가 박물관에서 나를 한참 동안이나 서성이게 했다. 결국 삶이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머리 위에 얹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임에랴. 생활의 속도, 시간의 효율, 타인과 주고받는 언어 또한 수시로 내 머리 위에 얹어지는 것들이다. 지금도 흑립의 이미지가 나를 떠나지 않고 여전히 머물러 있다. 글·사진/정미영 수필가

2026-02-11

K-스틸법과 철강산업의 ESG

포항은 철로 성장한 도시다. 산업화의 굴뚝 연기 속에서 이 도시는 일어섰고, 제철소의 불빛은 밤하늘을 밝히는 산업의 등대였다. 누군가에게 철강은 통계 속 수치일지 모르지만, 포항 시민에게 철강은 삶의 리듬이다. 아버지의 작업복, 어머니의 장부, 자녀의 등록금, 동네 식당의 손님 수까지 철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요즘 유행처럼 떠오른 ESG라는 말,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도 이곳에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ESG는 이제 기업 보고서의 항목이 아니라, 우리 도시의 일자리와 생존을 좌우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필자는 삶의 태도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진실함이 제일이며 다음으로는 책임감이라고 답한다. 진실함이 정의로움의 기초이고, 진실이 없는 자유·정의·진리는 허공에 뜬 구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과 과장, 구호만으로 현실을 덮으려는 태도를 경계한다. 이 생각은 산업 전환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포항이 서 있는 갈림길 앞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요구해야 할 것도 결국 진실이다. 탄소의 진실, 고용의 진실, 지역경제의 진실, 그리고 전환의 진실이다. 한때 기업의 책임은 CSR(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설명되었다. 기업이 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장학금과 봉사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이었다. 그 노력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시대는 빠르게 변했다. 기후위기와 글로벌 규제, 금융의 변화 속에서 이제는 CSR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ESG는“좋은 일을 더 하자”는 권고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구조로 바꿔라”는 요구다. 특히 철강처럼 탄소와 에너지, 노동과 공급망이 얽힌 산업에서는 ESG가 곧 생존의 문턱이 된다. 시장은 탄소를 비용으로 계산하기 시작했고, 투자자들은 장기적 위험을 따진다. 유럽의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철강은 가격과 품질뿐 아니라‘탄소를 얼마나 줄였는가’로 평가받는다. 이 지점에서 K-스틸법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K-스틸법은 단순한 산업 지원책이 아니다. 포항의 관점에서 이 법은 도시의 미래를 다시 설계할 수 있는 법적 틀이다. 중요한 것은 법이 철강을 지켜주는 방패로만 남지 않고, 철강을 바꾸는 설계도로 작동하느냐다. 지금 시대에는 철강을 바꾸는 길이 곧 철강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포항의 현실을 직시해 보자. 만약 철강의 탄소중립 전환이 지연되거나 실패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수출경쟁력이 약화되고, 생산이 축소되며, 투자 위축이 이어질 것이다. 생산이 줄면 협력업체가 먼저 흔들리고, 지역 상권이 위축되며, 청년 일자리가 줄어든다. 탄소전환 실패는 기업의 위기가 아니라 도시의 위기다. 반대로 전환에 성공하면 어떨까. 수소환원제철, 전기로 확대,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공급, 신소재와 정비·안전·데이터 산업까지 연계되면서 포항은 저탄소 제조혁신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ESG는 포항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수소환원제철은 그 상징이다. 석탄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하면 부산물은 탄소가 아니라 물이 된다. 철강의 환경 부담을 근본적으로 줄이는 기술이다. 그러나 포항 시민이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기술이 단순한 공정 개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소 생산과 저장, 운송 인프라, 재생에너지 전력망, 안전 기준, 연구개발, 인력 재훈련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이것은 제철소 내부의 변화가 아니라 도시 전체 산업 생태계의 변화다. 포항은 이 전환을 외부 정책으로 기다릴 것이 아니라, 도시 전략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ESG의 S, 즉 사회는 포항에서 더욱 절실하다. 공정이 바뀌면 직무가 바뀐다. 숙련의 내용이 달라지고, 필요한 인력이 달라진다. 전환이 일자리 감소로 이어진다면 시민의 지지는 얻기 어렵다. 그래서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 노동자 재교육과 전직 지원, 협력업체의 전환 지원, 청년을 위한 신산업 훈련과 채용 연계가 동시에 설계되어야 한다. 전환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 전환은 오래가지 못한다. 지배구조, 즉 G 역시 중요하다. 거버넌스는 기업 내부의 이사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역사회와의 소통, 정보 공개, 위험에 대한 진실한 설명, 이해관계자의 참여가 모두 거버넌스다. 전환 과정에서 시민이 배제되면 불신이 쌓이고, 불신은 갈등으로 이어진다. 포항에는 시민·노동·기업·지자체가 함께 참여하는 전환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ESG의 G는 결국“침묵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라는 요구다. 이 흐름은 유엔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도 연결된다. 양질의 일자리, 지속가능한 산업과 도시, 기후행동, 친환경·친인권 제도는 모두 포항의 과제이기도 하다. 도시가 지속가능하려면 산업이 지속가능해야 하고, 산업이 지속가능하려면 탄소를 줄여야 하며, 탄소를 줄이려면 기술 전환과 사회적 안전망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유엔의 SDGs가 방향이라면, ESG는 그 방향을 기업과 산업에 적용하는 실행 도구다. 따라서 K-스틸법이 포항에서 실질적 의미를 가지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저탄소 공정 전환이 실제로 가능하도록 수소·전력·인프라와 연구개발을 통합 지원하는 실행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노동자와 협력업체, 지역사회가 전환 비용을 일방적으로 떠안지 않도록 정의로운 전환장치를 제도화해야 한다. 셋째, 전환 과정이 투명하고 참여적으로 운영되도록 지역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빠지면 법은 선언으로 남고, 시민의 불안은 커질 것이다. 포항 시민이 원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 도시에서 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 답이다. 전환이 성공하면 포항은 세계가 주목하는 저탄소 산업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 그러나 준비 없이 시간을 보내면 경쟁력은 약화되고, 기회는 사라진다. 선택은 멀리 있지 않다. 지금 준비하느냐, 뒤늦게 따라가느냐의 문제다. 여기서 다시 진실을 생각한다. ESG는 결국 진실을 요구하는 제도다. 탄소를 숨기지 말 것, 일자리의 변화를 외면하지 말 것, 지역의 목소리를 경청할 것. 숫자와 보고서가 아니라, 진실한 실행이 필요하다. K-스틸법은 그 진실을 포항의 전략으로 바꿀 수 있는 도구다. 포항은 철로 세워진 도시다. 이제 저탄소 철로 미래를 세워야 할 갈림길에 서 있다. 이 전환이 기술만의 과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과제임을 잊지 않는다면, 포항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철강의 ESG는 기업의 숙제가 아니라 도시의 전략이며, K-스틸법은 그 전략을 현실로 만드는 첫 문장이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

2026-02-11

차례? 우린 여행 가요

2026년 설이 목전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설과 추석 명절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크게 달라졌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수준의 변화다. 지난날. 설이 가까워지면 떨어져 살던 식구들이 하나둘 고향집으로 모여들었다. 조부모와 부모, 자식들까지 3대가 모여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 후 깨끗한 옷을 입고 설날 아침 차례를 올렸다. 한국의 도로 전체가 밀려드는 차량으로 주차장을 방불했고. 21세기 들어서며 전통적인 대가족 시스템이 붕괴됐다. 부모와 자식 한두 명이 보편화된 가족 형태로 바뀌었고, 혼자 사는 1인 가구 역시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할아버지와 손자가 차례상 앞에 나란히 서는 모습을 보기 어려워졌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설을 전후해 해외와 국내로 여행을 떠난다. 달라진 설 풍경이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항공업계는 이번 설 명절 기간에도 하루 20만 명이 넘는 여행객들이 인천공항에 몰릴 것으로 예상했다. 대구와 김해 등의 공항까지 포함하면 명절에 한국을 떠나는 이들의 숫자는 더 늘어난다. 북새통 도로 위가 아닌 비행기 안에서 설을 맞이하는 것. 그렇다면 ‘차례 대신 여행’을 선택한 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여행 플랫폼 스카이스캐너가 얼마 전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설 명절 한국 여행자의 절반 이상인 51.6%가 일본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과 대만이 뒤를 이었다. 인적 드문 한적한 시골 마을. 오지 않을 자식과 손자를 기다리며 동네 입구를 망연히 내다보는 노인의 뒷모습이 더없이 쓸쓸해 보이는 풍경. 이젠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됐다.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2-11

카르마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면 온도 차이로 인해 베란다 창문에 물방울이 맺힌다. 물방울이 맺힌 걸 보고 결로를 걱정하여 창문을 연다.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켜 곰팡이가 파고들 틈을 없앤다. 그러다 찬 바람이 너무 세다고 느껴지면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다시 물방울이 맺히면…. 이 모든 일들이 연쇄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습도가 높아져 물방울이 생기는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나, 창문을 여닫는 건 나의 선택이다. 창문을 너무 오래 열어두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고, 그렇다고 열지 않고 닫아두면 곰팡이가 생길 것이다. 선택은 반드시 결과를 불러온다. 산스크리트어 KARMA에서 유래된 ‘카르마’는 ‘행위’, ‘업(業)’을 뜻하는 말이다. 선한 행동은 선한 결과를, 악한 행동은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업보’로도 읽힌다. 우리는 누군가 곤경에 빠진 것을 보면 업보를 맞았다고 이야기하고, 반대로 좋은 일이 생겼을 땐 좋은 업보가 돌아왔다고 이야기하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카르마라는 문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행하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고 한다. 무슨 일을 행한다, 무엇과 작용한다. 이 말에는 어떤 도덕적 평가도 없다. 애초에 선악의 기준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카르마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업보’의 뜻처럼, ‘무엇을 잘못해서 무슨 일을 당했는가’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선택을 했는가’를 묻는 질문인 셈이다. 여태 나는 선택 하나에 반드시 한 가지 이상의 결과가 따라붙는다고 생각했다.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날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카르마의 법칙은 내 생각과 달리 단기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이 아니었다. 카르마는 긴 시간 속에서 천천히 삶을 바꾼다.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바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악한 행동이 곧장 나쁜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이 축적되듯 쌓이고 쌓여 이윽고 거대한 삶을 만들어낸다. 최근 나는 별자리 운세를 보는 일에 꽤나 몰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오늘의 내 별자리 순위를 찾아보고, 그 옆에 달린 코멘트를 꼼꼼히 읽었다. 그날의 행운의 색과 물건이 무엇인지도 확인했다. 어제 1등이었던 내 별자리는 오늘 꼴찌가 되어 있기도 했다. 언젠가 내 별자리가 1등을 했던 날, 나는 나에게 이미 좋은 일이 생긴 것처럼 들떴다. 코멘트에는 ‘빛나는 성취가 있을 거예요’라고 적혀 있었다. 빛나는 성취라니, 듣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말이었다. 나는 행운의 색에 맞춰 옷을 입고, 물건을 챙겼다. 그리고 종일 빛나는 성취를 기다렸다. 자정을 넘긴 후에야 나는 기다리는 일을 포기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나는 성취는커녕 기분 좋은 연락 하나 없던 날이었다. 다시는 별자리 운세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침대에 누웠다가 문득 무언갈 깨달았다. 카르마. 성취란 하루아침에 오지 않는다.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달려왔던 사람에게 약간의 운까지 따라주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성취였다. 오늘 하루 나는 성취를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앉은 채로 성취가 알아서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그날 나의 카르마는 작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극적인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카르마가 작용한다고 믿지만, 실은 반복되는 삶의 태도가 카르마 그 자체인 건 아닐까?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나는 여태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떤 선택이 나를 지금의 삶으로 이끌었는가. 삶이 나를 이끌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지금의 삶을 만들어낸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이런 깨달음을 얻기에 적절한 곳이 있다. 오전 아홉 시 삼십 분, 필라테스 기구 리포머 위에 누운 내 머릿속은 온통 카르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갈비뼈를 조였다 풀고, 척추를 펼쳤다 다시 모으고, 가슴을 끌어올렸다 내리라는 선생님의 지도 목소리를 들으며 지난날의 나를 떠올렸다. 구부정한 자세로 휴대폰을 보던 나, 다리를 꼬고 몇 시간씩 앉아 있던 나, 목을 있는 힘껏 빼낸 채 컴퓨터를 하던 나. 그 모든 순간의 내가 지금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만들어냈음을 깨달으며, 온몸의 뼈와 근육을 재조립하는 ‘카르마’를 행한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더 바른 자세를 취할 것이다. 그게 옳아서가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고 싶어서. 그리하여 끝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기 위해 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험난한 동작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양수빈(소설가)

2026-02-11

적당한 만큼 ‘혼자 있기’

아침 여섯 시 반에서 일곱 시 사이에 일어난다. 아내의 출근을 배웅하고 세 살 아들 밥을 먹인다. 어린이집에 아들을 데려다주고 15분 정도 차를 달린다. 작업실에 도착해서 컴퓨터 앞에 앉으면 아홉 시 반. 그때부터 오후 세시 반까지,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는 일은 혼자일 때만 가능하다. 이 여섯 시간이 없다면 나는 시인도 될 수 없고 싱어송라이터도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게는 혼자 있는 이 여섯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 결혼 전에 나는 혼자 사는 사람이었고 프리랜서 예술인이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책을 읽고 TV를 보는 시간 뿐 만 아니라 일 하는 시간에도 대부분 혼자였으므로 ’혼자’는 내게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지고 써도 써도 줄지 않는 무한한 자원이었다. 그러다 같이 사는 사람이 생기고, 아기가 태어나며 나는 전혀 다른 삶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득 ‘혼자’는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지방처럼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영양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어느 밤, 아기가 잠든 사이 아내와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 빔 벤더스 감독)를 봤다. 도쿄에 홀로 사는 중년 남성 ‘히라야마’는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 보낸다. 그의 직업은 시부야의 공중화장실 청소부. 혼자 사는 집에서 매일 같은 시간 눈을 뜨면 작업복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차에 오르면 익숙한 손길로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올드팝을 들으며 일터로 향한다. 성실하게 화장실을 청소하다가 같은 공원 같은 자리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잠시 필름카메라로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을 찍는다. 일을 마치면 한산한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에서 가볍게 술 한 잔을 마신다. 깜깜해진 집에 돌아오면 이불을 펴고 작은 등 아래에서 오래된 소설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나날이 매일 반복된다. 그 단조롭고 고요한 일상이 우리 부부에게는 아주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왔다. “좋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영화를 보는데 히라야마의 일상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그의 조카가 기별도 없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조카는 며칠 동안 그의 집과 일터에 함께 머물며 그의 모든 일상을 함께 하다 떠난다. 혼자였지만 충만했던 그의 일상에 뜻밖의 빈자리와 어긋남이 생긴다. 다시 일상의 평온함을 되찾으며 마무리되는 이야기의 끝에는 주인공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웃음이었는지 울음이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시 혼자가 되어 원래의 단조로운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 기쁜 것이었을까 슬픈 것이었을까.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혼자’가 우리에게 필수적인 영양소라면 그것의 적당량이라는 것도 존재할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 결핍된 상태만큼이나 그것이 과잉된 상태도 해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의 적당량은 얼마 만큼일까. 아마 사람마다 다르고 그 사람이 어떤 시기를 관통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일상과 그 안에서 갖게 되는 마음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물론 그 적당량을 찾더라도 딱 그만큼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출근해서 또 거기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하루를 보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집에 돌아가서는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그들에게 ‘혼자’는 언제나 그리운 단어일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눈을 뜨고 혼자 밥을 차려 먹으며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그들의 삶을 궁금해 하거나 안부를 묻는 이가 좀처럼 없는 사람들, 적막 속에서 고독과 싸우며 매일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혼자’가 지긋지긋하고 가슴 아픈 단어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사정이 다르고 그것을 스스로의 힘만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적당량의 ‘혼자’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서로에 대한 관심과 이해다. 세상에는 사람에 치여서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도 있고 고독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가 충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너무 오래 혼자 있도록 두지 않는 것은 모두 그의 삶을 구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스스로 자주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적당한 만큼 혼자인가를 질문하며, 때로는 자신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선물하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눠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기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강백수(시인)

2026-02-11

두쫀쿠와 ‘청년정치’

친구들과 최근 유행하고 있는 두쫀쿠를 만들기 위해 모였다. 재료 담당 친구가 피스타치오는 가격이 올랐어도 구할 수 있었지만 마쉬멜로는 품절이라 구하지 못했다고 미안해했다. 유행하자 재료조차 품절이라니 혀를 차면서도 같이 만들어 먹는 즐거움은 만끽했다. 두쫀쿠는 달콤 쫀득한 식감, 인증샷 부르는 비주얼, 그리고 SNS를 통한 바이럴마케팅 덕에 최신 최고의 트렌드가 되었다. 그러나 유행은 빠르게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져 고비용저효율을 초래하는 폐해가 있다. 정치에서도 두쫀쿠의 유행과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는 문제가 있다. ‘청년’이 정치의 화두 앞자리에 오르지만, 그 관심이 두쫀쿠처럼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방선거철만 되면 정당과 정치권은 앞다투어 ‘청년’을 언급한다. 청년 공약, 청년 후보, 청년 캠프 등등···.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그 관심은 급격히 식는다. 이는 청년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선거 전략의 소재로 다루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청년 동원(youth mobilization)’이 선거 국면에서 일시적으로 강화되지만 제도적 참여로 이어지지 못할 경우 정치적 냉소가 커진다고 분석한 영미권 자료를 본 적이 있다. 해외 정당들은 청년 조직을 단순한 홍보 도구가 아니라 인재 파이프라인으로 운영한다.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은 청년당원 교육, 정책연수, 지역 의회 경험을 단계적으로 제공한다. 이는 청년이 선거용 얼굴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정치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구조다. 우리 정치도 마찬가지다. 공천 때만 청년을 찾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정책 역량과 현장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청년이 스스로 정치적 전문성을 갖출 수 있어야만 소모품이 아니라 자산이 된다. 청년이 정치에서 한 번 쓰고 버려지는 티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당 차원의 체계적 육성이 필요하다. ‘청년정치’가 희망의 정치가 되기 위해서는 비전과 정책으로 승부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금권선거 구조에서는 자본이 없는 청년이 출발선에 서기조차 어렵다. 미국과 유럽의 연구들은 선거비용 상한, 투명한 후원 공개, 공영 선거 지원이 정치 참여의 문턱을 낮춘다고 지적한다. 우리 역시 선거비용의 실질적 절감, 정치자금의 투명성 강화, 청년 후보에 대한 공적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 그래야 청년정치는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적인 경쟁이 된다. ‘청년정치’가 고비용의 두쫀쿠 같은 일시적 유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재래시장에서 파는 호떡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는 지속성을 지녀야 한다. 선거철에만 꺼내 쓰는 구호 대신 평소에도 작동하는 제도와 문화가 되어야 한다. 청년을 정치의 장식이 아니라 중심으로 세울 때, ‘청년정치’는 비로소 유행을 넘어 일상이 된다. 달콤한 한때의 관심이 아니라, 따뜻하게 오래 남는 호떡처럼 지속되는 정치가 필요하다. 청년을 전면에 내세우는 모습이 반복되지만, 실제 권한과 책임이 주어지지 않으면 일시적 유행일 뿐이다. 두쫀쿠가 잠깐의 즐거움을 주고 사라지는 것처럼, ‘청년정치’가 이벤트성으로 소비되는 현실정치가 아쉽다. /이다영 포항시의원·국민의힘 비례대표

2026-02-10

집콕 ‘은둔청년’ 54만명, 정상사회 아니다

청년 취업난 문제가 해당가족 뿐 아니라 사회전체를 짓누르고 있다. 정부 자료를 보면, 2024년말 기준 6개월이상 밖에 나오지 않고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은둔 청년’이 53만7863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전체 청년(19∼34세)의 5.2%에 해당한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이들에겐 이번 주 시작되는 설연휴가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어 마음이 무겁다. 대기업 직원들이 억대의 성과급 잔치를 벌이는 동안 취업을 못한 청년들이 집안에서 은둔의 시간을 보내며 심각한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게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지난주에는 ‘은둔 청년’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연간 5조 원을 넘는다는 분석(한국경제인협회)도 나왔다. 주목할 점은 ‘쉬었음’ 상태의 청년이 은둔으로 이행될 위험성이 크다는 점이다. 쉬었음 청년은 비경제활동인구로 분류된 사람 중 지난주 활동상태를 묻는 말에 ‘쉬었음’이라고 답한 청년을 가리킨다. 이들을 만나보면, 쉬는 이유가 ‘배부른 투정’이 아니라 취직할 곳을 찾지 못해 우울한 삶을 사는 청년이 대부분이다. 지난해 ‘쉬었음’ 청년은 71만7000명으로 2003년 통계 작성 이후 최대 수치를 기록했다. 이중 대졸 이상 고학력자 비중이 48%로 급증하는 추세다. 이로인해 청년들 사이에서는 ‘장백청’(장기 백수 청년), ‘전업 자녀’(취업하지 않고 부모와 동거하는 자녀)라는 말이 유행하는 모양이다. 70만명이 넘는 청년들이 취업을 못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 것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급여 양극화가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기업이나 금융기관의 억대연봉이나 성과급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것을 보면서, 청년들이 놀면 놀았지 최저임금 수준의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대기업들이 공채보다 수시·경력직 채용을 선호하면서 청년들의 구직 문은 더 좁아지는 추세다. 지금은 더 큰 격차가 나겠지만, 2023년 기준 대기업 근로자의 월평균 소득은 593만원으로 중소기업(298만원)의 2배 정도에 달했다. 식대·교통비·자녀 학자금 등 복리후생 부분까지 고려하면 실질 소득 격차는 통계 조사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한국경영자 총협회가 지난 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기업 대졸 초임이 일본과 대만보다도 약 40%가량 높다고 한다. 대기업의 고임금은 근속 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 인상되는 데다 강성 노조의 과격한 임금 투쟁으로 생산성을 초과한 임금 인상이 매년 지속돼 온 결과다. 이재명 정부도 최근 강조하고 있지만, 최고의 청년 대책은 역시 일자리다.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은 지역균형발전이나 사회 역동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현안이다. 정부는 어떤 수단을 쓰든 대기업과 중소기업(또는 하청기업)으로 양분되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지금처럼 강성노조가 무서워 임금체계 부조리에 입 다물고 있다가는 급여 양극화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유럽의 경우에는 중소기업 임금이 대기업보다 오히려 높은 나라도 있다. 정부가 사회통합 차원에서 임금체계에 적극 개입하기 때문이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2-10

부모세대 보다 못사는 세대

자식 세대가 부모보다 잘사는 것이 정상적 흐름이다. 자식이 부모보다 못산다면 나라의 경제 사정이 나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과 인플레이션, 고용불안 등이 이어지면서 우리나라도 부모보다 못사는 세대가 등장할 거란 예측이 나왔다. 실제로 2010년 이후 2030세대의 실질소득 성장률이 1~2%에 그쳐 부모세대 성장률 5-10%에 비해 크게 뒤져 이런 우려가 흘러나온 것.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간의 빈부 흐름을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최근 젊은세대의 취업난과 고용불안, 물가상승 그리고 집값 폭등을 보면 부모세대보다 자식세대가 더 살기 어렵다는 느낌을 가질 만하다. 특히 주거문제에서 큰 차가 난다. 부모 세대는 노력만 하면 집을 살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몇 달 월급을 모으면 전세도 구할 수 있어 지금처럼 집 문제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지 않았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주택가격을 가구소득으로 나눈 PIR을 보면 서울의 경우 13.9배(2024년)로 나타났다. 서울에 사는 이가 주택을 사려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4년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월급으로 집을 살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났다는 뜻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자신을 주거 빈곤층이라 한다. 현재의 MZ세대는 부모보다 많이 배우고 더 많은 외국 경험을 한 세대다. 역사상 가장 똑똑한 세대라는 평가도 있다. 지금 그들이 직면한 경제적 상황만으로 자식이 부모보다 못 살 거란 단정은 무리일 수 있다. 다만 지금 우리 경제가 빚 걱정 없는 중간층이 줄고 계층 간의 격차가 심각히 커지는 현상은 기분 좋지 않다. 부모보다 못사는 자식이 등장할 조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