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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만화방창, 포항철길숲

포항철길숲(포레일·Forail)’이 만화방창(萬化方暢)이다. 4월 하순부터 이곳엔 이팝꽃, 조팝꽃, 송화가 흐드러졌다. 벌써 영산홍은 많이 졌고, 장미꽃도 피어난 곳이 있다. 이름 모르는 나무꽃, 풀꽃들도 질세라 활짝 피어나 얼굴을 뽐낸다. 꽃들에 더해, 오뉴월에나 만날 신록도 넘실대기 시작한다. 예전엔 교외나 산에 가야만 느끼던 생명의 찬란함을 도심 철길 숲에서 만나다니 그야말로, 만화방창이다. 지난 늦가을, 직장사무실을 옮기는 바람에 평일 낮에 10여 분 정도 용흥 고가도로 부근 철길숲을 걸어 퇴근하게 되었다. 이 변화가 내게 또 하나의 행복을 선물해 주고 있다. 사람의 조경술이 빚은 멋진 정원처럼 자연과 조화를 이룬 숲길을 걷는 일은 몸의 건강은 물론, 마음 건강도 챙기는 시간이 된다. 만나는 나무, 풀들과 교감을 주고받는 일은 사람과의 소통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으니까. 하여, 이곳은 힐링을 바라는 도심 사람들에겐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다. 이 숲길이 생기기 전엔 많은 사람이 건강을 위해 양학산 등산로를 올랐었다. 나도 그랬다. 나라의 IMF 경제위기 체제 이후, 실로 많은 사람이 찾은 양학산은 사람 발길에 큰 몸살을 앓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포항역의 이전으로 폐철도가 된 도심 철길구간이 숲, 조형물, 보도, 자전거 길 등으로 단장해 철길숲으로 재탄생했다. 그 덕에 등산객이 확 준 양학산은 몸살이 나아가니 철길숲 조성은 일거양득인 셈이다. 1918년 개통되어 약 100년간 기차가 다니던 효자역과 옛 포항역 사이 구간이 2015년 포항역 이전으로 폐철도 유휴 부지가 되었다. 이 부지를 포항시장의 ‘그린웨이(Green Way) 프로젝트’에 포함 시켜 착공 2년 반만인 2018년 12월 준공하였다. 쓸모 잃은 철도와 부지가 ‘포항철길숲 1918 포레일’로 아름답게 다시 태어나 도시 미관을 살리고, 대기 정화 등 환경 개선도 이바지하고 있다. 숲의 영문 ‘Forest’와 기찻길 영문 ‘Rail’을 합성해 만든 말이 포레일이다. 지역신문 K지 보도에 따르면, 이 숲은 유성여고~서산터널의 2.3㎞ 1차 구간, 서산터널~효자교회 앞 광장까지 4.3㎞의 2차 구간을 합하면 길이가 6.6㎞에 이른다. 준공 다음 해 포항시 추산 방문객 수는 평일 5천 명, 휴일 1만 명에 달하였다. 그러니 시민 힐링 마당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철길숲을 걷다 보면 중간중간에 옛 철도가 남아있어 기찻길이었음을 알려주지만, 객차나 화차, 기관차, 철길 신호등 같은 실물들이 뜨문뜨문 배치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또, 강원 정선 레일바이크나 울진 스카이레일 같은 레포츠 시설을 벤치마킹하여 가능한 곳에 설치 운영한다면, 시민들에겐 더 멋진 곳이 되고 고용 창출도 가능할 것이다. 다행히 성모병원 입구 인근 어울누리숲에 무궁화호 폐객차를 리모델링한 철도 문화공간이 있다. 하지만, 긴 숲 전체와 포항시민, 관광객을 다 커버하기엔 역부족이지 싶다. 우수 도시 숲으로 여러 번 상도 받은 멋지고 아름다운 ‘포항철길숲 1918 포레일’이 시민과 더 밀착하는 지속 가능한 숲으로 발전하면 좋겠다. /강길수 수필가

2026-05-11

드보르작의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

5월은 가족을 돌아보게 되는 계절이다. 어린 시절 당연하게만 느껴졌던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가정의 달을 맞아 꼭 한번 들어보길 권하고 싶은 클래식 곡이 있다. 바로 ‘Songs My Mother Taught Me’, 우리말로는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이다. 짧은 곡이지만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삶의 애환이 깊게 담겨 있어 어버이날과 특히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이 곡의 작곡가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1841~1904)은 현재의 체코 프라하 근교 넬라호제베스에서 태어난 체코 국민 작곡가다. 당시 그의 고향은 오스트리아 제국 아래의 보헤미아 지역이었으며, 훗날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기 전의 체코슬로바키아 일부였다. 그는 스메타나(Bedřich Smetana)와 함께 체코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며,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을 통해 고향의 정서와 향수를 음악 안에 담아냈다. 드보르작의 대표작으로는 흔히 ‘신세계 교향곡’이라 불리는 ‘Symphony No. 9’이 있다. 또한 ‘현악사중주 No. 12’ ‘American’역시 널리 사랑받는다. 특히 ‘신세계로부터’의 4악장은 한국에서 아이스크림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며 ‘죠스바 테마곡’으로 익숙하게 알려지기도 했다. 드보르작은 미국 체류 시절에도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는 현지 원주민과 흑인들의 민요를 연구하며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얻었지만, 그 안에서도 늘 보헤미아 특유의 향수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어딘가 그리움과 회상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1880년에 작곡된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 역시 그러한 감성이 가장 아름답게 담긴 작품 중 하나다. 이 곡은 체코 시인 아돌프 헤이둑(Adolf Heyduk)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으로, 드보르작의 연가곡집 ‘집시의 노래(Gypsy Songs Op.55)’ 가운데 네 번째 곡이다. 드보르작은 이 곡을 작곡하며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가사는 매우 담백하지만 깊다. "늙으신 어머니 나에게 그 노래 가르쳐주실 때, 어머니 눈에 눈물이 곱게 맺혔었네. 이제 내 어린 딸에게 그 노래 들려주노라니, 내 그을린 두 뺨 위로 한없이 눈물 흘러내리네." 이 노래가 더욱 애틋하게 들리는 이유는 드보르작 개인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는 이 곡을 쓰기 전 몇 년 사이 세 아이를 어린 나이에 떠나보내야 했다. 그래서인지 곡 전체에는 단순한 향수를 넘어선 깊은 상실감과 슬픔이 배어 있다.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했던 그의 진심이 음악 안에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특히 피아노 반주의 독특한 당김음 리듬과 체코 민요풍 선율은 마치 오래된 자장가처럼 따뜻하게 다가온다. 원래 ‘집시의 노래’ 모음곡의 다른 곡들은 활기차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강하지만, 유독 이 곡만은 조용한 회상과 눈물 어린 정서를 품고 있다. 오늘날 이 작품은 성악뿐 아니라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로 편곡되어 연주되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언어와 문화는 달라도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는 마음’만큼은 모두에게 같기 때문일 것이다. 바쁜 일상 속 잠시 시간을 내어 이 곡을 들어보길 권한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도 오래전 어머니가 들려주셨던 따뜻한 목소리가 다시 조용히 울려 퍼질지도 모른다. /박정은 객원기자

2026-05-11

날과 날 사이에서

가정의 달이라 불리는 5월은 행사가 넘치는 달이다. 20대 질풍노도 시절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도무지 달갑지 않았다. 어린이와는 무관(無關)했고, 어버이나 스승을 기리는 일보다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금도 나는 그런 자세를 온존하며 살고 있다. 혈연보다 공동체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주 예전에는 ‘어버이날’이 아니라 ‘어머니날’이었다. 어머니날 같은 행사가 어린 시절의 내게는 무척이나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4남매가 모여 엄마한테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고 ‘어머니 은혜’를 불러야 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소리 내서 ‘어머니 은혜’를 불러본 기억이 거의 없다. 너무 속 보이는 부끄러운 짓 아닌가, 생각한 탓이다. 당신 눈앞에서 둘째 아들이 입도 달싹거리지 않는 걸 보는 엄마는 서운한 기색이다. 그렇다고 눈치 보면서 형제들의 노래를 따라 하기는 싫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생이 되었으니, 그 뒷일이야 재언(再言)이 필요하지 않을 터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행사가 스승의 날이었다. 대학원 시절, 학과 교수님들 모시고 조촐하게 식사했던 기억이 새롭다. 1958년 강경여고 단원들이 시작했다는 스승의 날은 1965년 5월 15일부터 공식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한다. 1973년 박정희는 스승의 날 행사를 돌연 금지하고 ‘국민교육헌장’ 선포일인 12월 5일에 통합해버린다. 전두환이 1982년에 스승의 날 행사를 되살린 것은 참 불가사의한 일이다. 권력 찬탈을 위해 동족 학살마저 꺼리지 않던 자가 스승 운운이라니?! 세월이 무상하게 흘러 교수가 된 후에 학생들이 마련한 스승의 날 행사에 참여하곤 했다. 언젠가는 학과 ‘엠티(MT)’에 갔다가 한밤중에 느닷없이 들려오는 ‘스승의 은혜’ 합창 소리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한 일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안하기도 하고, 떨떠름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역시 행사는 내게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언제부턴가 스승의 날 행사에 일절 가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나는 스승이 아니라, 일개 교수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제자가 없으면 스승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나온 말이 사제지간(師弟之間)이다.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나는 지식을 전달하는 교수일 뿐이고, 학생들 역시 제자가 아니라, 지식 전수자(傳受者)에 지나지 않았던 터였다.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행사에 얼굴을 들이밀고 작은 선물을 받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다가 ‘김영란법’이란 게 만들어지고, 그 주요 목표물은 초중고교 교사들로 확정된다. 참으로 보기 민망한 일들이 이어졌고, 어떤 교사들은 스승의 날에 학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밀어낸 셈이다. 제자도 없는 나라에 무슨 스승의 날이 필요한지, 의아하기 짝이 없다. 최소한의 기본적인 예의범절마저 사라진 학교에서 딱 하루 날 잡아서 행사한다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인가?! 의미도 없이 행사만 넘쳐나는 5월에 백작약 화사하게 피어나니 그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5-10

스님도 로봇으로?

지난 2월 일본 교토의 유서 깊은 한 사찰에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는 로봇스님이 등장해 화제가 됐다. 이름하여 붓다 로이드. AI를 탑재한 인간형 로봇이다. 불교 경전을 학습해 인생 상담이나 마음의 고민 같은 인간적인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만든 로봇스님이다. 취재에 나선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너무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했더니 로봇스님이 답했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 자체를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라 했다. 전문가들은 일본의 로봇스님 등장 배경으로 인구감소와 초고령사회로 인한 인력난을 지적한다. 일본에 있는 많은 지방사찰들이 후계자를 찾지 못해 문을 닫는 곳이 속출하고 있다. 또 스님 한 명이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운영하는 곳도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부족한 스님을 대신해 로봇으로 대체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찬반 양론도 있다. 반대쪽은 종교란 사람과 사람 간의 대화로 교감을 이루는 특성이 있는데 AI가 대신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견해다. 한국 불교계가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우리나라 최초의 로봇스님을 선보여 관심을 끌었다. 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열린 수계식에서 휴머노이드 G1 로봇스님은 ‘가비’라는 법명을 수여받고 불교 계율에 서약했다. 앞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전후해 명예스님으로 활동할 예정이라 한다. 조계종은 “인간과 기술이 함께 공존해 새로운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이란 말로 로봇스님 등장의 의미를 설명했지만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로봇 스님을 만나는 일이 멀지않아 있을 것 같은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5-10

‘행정가’가 아닌 ‘전략적 리더’를 선택하라

오는 6월 지방선거는 인공지능(AI) 확산과 다중격차 심화라는 거대한 전환기 속에서 지역의 생존 방향을 결정할 분수령이다. 이제 지방은 단순한 인물 교체를 넘어 스스로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설계해야 하는 ‘전략 공간’이 됐다. 이번 선거는 공약의 양을 겨루는 경쟁이 아니라, 지역의 복합적 현실을 정확히 읽고 지속 가능한 해법을 설계할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오늘날 지역이 마주한 문제는 결코 단선적이지 않다. 인구 감소는 일자리 부족으로, 이는 다시 교육·주거·복지 위기로 이어진다. 고령화는 의료와 재정 부담을 키우고, 디지털 격차는 교육과 소득의 양극화를 고착화한다. 하나의 문제가 다른 문제를 증폭시키는 구조 속에서 과거식 단편 개발 공약이나 일회성 사업으로는 해법을 찾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현상 너머의 시스템을 읽어내는 통찰력이다. 자치단체장은 지역의 인구 구조, 산업 기반, 재정 여건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핵심 과제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제한된 예산과 인력 속에서 우선순위를 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민원을 동시에 해결할 수는 없다. 리더는 당장의 표심을 자극하는 인기 사업이 아니라, 지역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을 선택해야 한다. 단기 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10년 뒤의 지역을 설계하는 중장기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본업이 되어야 한다. 또한 다중사회에서 리더는 지배하는 지휘자가 아닌 갈등을 조정하는 ‘조정자’여야 한다. 지역 내 다양한 세대와 계층, 원주민과 다문화 가정 등의 요구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갈등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리더의 역량이다. 정책의 취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주민의 의견을 경청하며, 반대 의견조차 존중하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설명 없는 결정은 불신을 낳고 행정의 동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AI 시대에는 기술이 정책의 중요한 기반이 되지만, 결국 주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정책은 지속될 수 없다. 단체장은 기술의 혜택이 소외된 곳 없이 닿을 수 있도록 기술과 사람을 잇는 다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유권자는 후보가 상대를 비난하기보다 설득하는지, 어려운 정책을 주민 눈높이에서 쉽게 풀어내는지, 다양한 계층과 소통해 온 실질적인 경험이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실행력과 책임성도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아무리 좋은 구상이라도 성과로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예산 확보 능력과 조직 관리, 협치 능력은 필수 조건이다. 더불어 정책의 한계나 실패 앞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가 주민의 신뢰를 만든다. 특히 단체장에게 부여된 권한은 시민이 위임한 것인 만큼, 도덕성과 청렴성은 행정의 공정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된다. 이번 6월 지방선거는 개발 공약의 화려함을 겨루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 지역의 미래를 설계할 전략가를 선택하는 자리다. 유권자는 후보가 지역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갈등을 조정하며 약속을 책임 있게 실행할 수 있는지를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결국 지역의 미래는 공약집의 분량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할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전 대구경북연구원장

2026-05-10

스페이스워크

포항 북구 환호공원 언덕 위에 세워진 스페이스워크는 이제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2021년 포스코 기부 이후 2026년 1월 기준 누적 방문객 371만 명을 넘어섰고, 400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주말마다 인근 도로가 관광객 차량으로 가득 차 혼잡할 만큼 이곳은 이미 강력한 핫 플레이스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들은 한 상인의 말은 이 활기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사람은 많은데, 손님은 아닙니다. 올라갔다가 그냥 내려와서 가버려요.” 이 짧은 문장은 지금 포항 관광의 구조적 한계를 정확히 드러낸다. 스페이스워크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시간을 붙잡아 두는 데까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강력한 목적지는 만들어졌지만, 그 이후의 흐름은 비어 있다. 사람들은 올라가서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은 뒤, 더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도시를 떠난다. 결국 포항은 경험되는 도시가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장소로 남는다. 이제 필요한 것은 무엇을 더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왜 머물러야 하는가에 대한 설득이다. 언덕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음악, 해 질 무렵 시작되는 미디어아트, 매일 반복되지만 지루하지 않은 짧은 공연 같은 요소들은 공간의 체류 시간을 바꾸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지속성이다. 일상처럼 이어지는 콘텐츠가 쌓일 때, 이곳은 단순한 방문지가 아니라 다시 찾는 공간으로 바뀐다. 관광의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보고 끝나는 여행보다 기억을 가져가는 경험을 원한다. 스페이스워크의 형태와 이야기를 담은 디자인 상품, 포항을 상징하는 감각적인 굿즈, 지역 작가의 시선이 담긴 작품들은 단순한 기념품을 넘어 도시의 이미지를 확장시키는 매개가 된다. 이런 경험이 축적될수록 포항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더 오래 남는 도시가 된다. 현재 운영 중인 포항관광 시티투어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주요 관광지를 연결하는 기능을 넘어, 스페이스워크를 체류의 시작점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곳에서의 체험이 공연과 전시, 야간 프로그램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면 관광객의 동선은 단순한 방문에서 머무는 경험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동 중심의 투어가 아니라 경험 중심의 흐름으로 전환되는 순간, 하나의 점은 도시 전체를 잇는 선이 된다. 결국 핵심은 흐름이다. 스페이스워크에서 시작된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 길 위에 머물 수 있는 공간과 경험이 연결될 때 사람은 떠나지 않는다. 지금처럼 올라갔다 내려오는 구조에서는 체류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관광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미 스페이스워크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힘을 충분히 증명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힘을 시간으로 바꾸는 일이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비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 경험은 기억으로 남는다. 371만 명이라는 숫자를 기록으로 남길 것인지, 도시 전체를 경험하는 흐름으로 확장할 것인지. 그 선택이 포항 관광의 다음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5-10

선택

창문을 연다. 집 뒤 야산에 하얗게 아카시아꽃이 피었다. 푸른 잎들과 함께 바람결에 제 몸을 맡기고 흔들리고 있다. 향기가 바람을 타고 온 집안으로 퍼진다. 봄의 온기가 무르익고 있다. 어린 시절 아카시아는 우리에게 친숙한 꽃이었다. 하교 길에 가끔씩 따 먹기도 했고 친구들과 잎 따기 놀이도 했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눈길을 끌기도 했지만 향기가 매우 좋았다. 그 이름을 딴 껌이 있었는데 씹으면 향기를 먹는 듯해 자주 샀던 기억이 있다. 요즈음은 옛날만큼 아카시아가 흔하지는 않다. 아까시가 원 이름인 이 나무는 빠른 성장 속도와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1960년대 산림녹화사업에서 주종 수종으로 선정되었다. 이차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황폐해진 산을 짧은 시간 동안 살리기에 적합한 나무로 보았던 것이다. 빠른 성장력은 산을 푸르게 하는 것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부작용을 가지고 왔다. 다른 나무의 생장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뿌리의 번식 속도나 힘이 좋다 보니 주변의 묘지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특히 소나무를 죽인다고 해서 아카시아를 뿌리까지 파서 개체수를 줄였다. 개발로 인한 군락지 훼손, 1세대 나무의 수령이 다함으로 인한 감소. 그리고 부정적인 여론에 급격히 줄어들었다. 2012년부터 5년 동안 절반 이상 사라졌다고 한다. 단순히 이것으로 끝났으면 좋은데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꿀은 아카시아가 70~80%를 차지하고 있는데 꿀의 생산량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다. 결과 양봉업자의 피해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아카시아가 주는 부작용을 줄이는 일에 신경을 쓴 나머지 일어날 일을 미처 예측치 못한 것이다. 선택은 여럿 가운데서 필요한 것을 골라 뽑는 일이다. 선택은 작은 것에서 큰일까지 다양하게 그리고 매 순간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그런 선택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매번 우리가 최선의 선택을 뽑는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게 잘 풀리지만은 않는다. 가벼운 선택은 커다란 난제를 동반하지 않지만 설사 문제가 생겨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의 선택이 삶의 변곡점을 그어놓기도 한다. 선택이 늘 책임이라는 것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가장 적합한 수종이라 생각해 고른 아카시아가 생각 외로 피해를 줬고 그래서 아카시아를 많이 없앴다.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했지만 사라진 것은 나무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선택은 사회에 커다란 흔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도 묻히고 양봉업자의 시름은 깊어지며 삶의 온도가 달라졌다. 선택은 자유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책임이라는 그림자를 깊이 남기기도 했다. 꿀의 부족과 양봉업자들의 위기는 선택이 빚어낸 결과였다. 우리가 그 결과를 보며 그 전의 선택을 한탄만 하고 있다면 그 역시 올바른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전의 일들을 되짚어보고 책임지는 일들이 없다면 그와 유사한 일들은 이름만 바꾸어 반복될 것이다, 정부는 아카시아를 다시 심어 그 나무의 개체수를 일정 부분 늘여가고 있다. 젊었을 때에 내 삶은 내가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은 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살았다. 삶은 자유로웠고 선택은 무겁지 않은 것이었다. 실수를 해도 쉽게 되돌릴 수 있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삶의 범위와 관계는 확장되었고 선택은 나날이 모양과 형태가 다양해졌다.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수많은 변수가 나타났다. 수시로 조용한 후회가 내 삶에 찾아왔으며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일도 생겨났다. 그 이면에는 결과를 상상하지 못한 나의 경솔함이 낳은 선택도 있었다. 뒤늦은 후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좋은 선택이란 결정하기 전에 최대한 책임을 상상해보고 덜 무너지는 쪽을 택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아카시아의 짙은 향기를 맡으니 두 마음이 든다. 집안일을 계속 할까 아니면 산책을 나갈까. /전영숙 시조시인

2026-05-10

보이지 않는 손, AI가 짠다···물류·유통의 새 질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전 세계 항만이 멈추고 마트 진열대가 비어가던 풍경을 우리는 아직 또렷이 기억한다. 마스크 한 장, 손 소독제 한 통을 구하려 줄을 서던 그때, 지구촌이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공급망(Supply Chain)’에 우리 일상이 얼마나 깊이 의존하고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그 톱니바퀴를 다시 돌리고 더 정교하게 다듬는 새로운 동력이 등장했다. 바로 인공지능(AI)이다. 물류·유통은 본질적으로 ‘예측 게임’이다. 어떤 상품이, 언제, 어디서, 얼마나 팔릴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재고도 줄이고 배송도 빨라진다. 문제는 변수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날씨, 명절, 환율, 입소문, 심지어 SNS의 짤막한 글 한 줄까지 수요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의 직관과 엑셀 표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AI는 바로 이 빈틈을 메우는 도구로 떠올랐고, 코로나19 이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 흐름과 맞물려 그 가치가 더욱 커지고 있다. ■ 종이 장부에서 ‘파운데이션 모델’로 수요 예측은 기업의 오래된 고민 중 하나다. 과거 유통 담당자들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판매량에 약간의 보정을 더해 발주 수량을 정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기존 방식은 단순 추세를 연장하는 것이라 사실상 예측이라 부르기 어려웠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 결과 폐기·결품·인력 낭비라는 세 가지 고질병이 늘 따라붙었다. 너무 많이 들이면 버려지고, 너무 적게 들이면 손님을 놓친다. 그 사이를 가르는 칼날은 늘 흐릿했다. 이마트는 이런 한계를 넘기 위해 자체 예측 엔진 ‘사이캐스트(Saicast)’를 개발해 7만여 개 상품의 판매 패턴을 AI에 학습시켰다. 요일·가격·날씨·시즌·행사 여부 등 40여 개 변수를 동시에 따져 다음 주 판매량을 추론한다. 신세계그룹은 한발 더 나아가 지난달 미국 AI 기업 ‘리플렉션AI’와 손잡고 상품 소싱(Sourcing)부터 발주, 가격 책정, 물류, 재고, 고객관리에 이르는 6대 영역 전반에 첨단 AI를 접목하기로 했다. 유통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AI가 흐르게 하겠다는 선언이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은 이 분야의 교과서로 통한다. 아마존은 4억여 개 상품의 일일 수요를 예측하는 자체 시스템 ‘SCOT(Supply Chain Optimization Technology)’을 30년간 다듬어 왔다. 지난 2024년 6월에는 새로운 ‘파운데이션 AI 모델’을 공개했는데, 판매 이력에 더해 날씨와 휴일 데이터까지 통합해 지역별 예측 정확도를 20%, 대형 할인 행사 예측을 10% 끌어올렸다고 발표했다. 매사추세츠 해안의 여름철 자외선 차단제와 콜로라도 겨울철 스키 고글을 따로 예측하는 식이다. 같은 미국이라도 지역마다 ‘내일 팔릴 것’이 다르다는 점을 AI가 읽어낸다. 여기에 생성형 AI 매핑 기술 ‘웰스프링(Wellspring)’까지 더해 단 몇 달 만에 280만 개의 아파트 주소를 자동으로 정리해, 라스트마일 배송 효율을 한층 끌어올렸다. ■ 공급망 최적화, AI가 바다와 하늘을 읽다. 수요 예측이 ‘얼마나 팔릴지’를 푸는 문제라면, 공급망 최적화는 ‘어떻게 옮길지’를 푸는 문제다. 글로벌 해운사 머스크(Maersk)는 전 세계 700여 척의 선박에서 매일 20억 건의 데이터를 수집해 AI로 분석한다. 부품 이상이 나타나기 3주 전에 85% 정확도로 고장을 예측해 정비를 미리 끝낸다. 그 결과 선박 가동 중단 시간이 30% 줄고 연간 약 3억 달러를 절감한 것으로 평가된다. 컨테이너 적재 순서, 항만 혼잡, 항로 변경까지 AI가 실시간으로 계산한다. 항해 한 번에 한반도 면적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선박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에 의해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미국 유니레버는 SNS 트렌드와 기상 데이터를 결합한 ‘디맨드 센싱’ 플랫폼으로 예측 오차를 30% 줄이고 재고 비용 3억 달러를 아꼈다. 월마트 역시 AI 수요 예측으로 결품률을 낮춰 고객 만족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공급망이 ‘일직선 파이프라인’에서 ‘실시간 신경망’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최근 아마존웹서비스(AWS)는 ‘Amazon Connect Decisions’라는 에이전틱 AI 솔루션을 공개해, 25개가 넘는 공급망 도구를 ‘AI 동료(Teammate)’로 묶어 인간 실무자와 24시간 함께 일하도록 만들었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디지털 동료가 재고를 감시하고, 이상 신호를 추리며, 필요한 결정을 사람에게 추천한다. ■한국 물류, ‘에이전틱 AI’ 시대로 국내 기업들의 행보도 빠르다. 신선식품 새벽 배송으로 시장을 연 마켓컬리는 자체 개발한 AI 분석 시스템 ‘데이터 물어다 주는 멍멍이(데멍이)’로 고객 주문을 정교하게 예측한다. 상품 종류, 연령별 수요, 날씨, 시기별 이슈, 고객 반응률, 기획전 등 수십 개 변수를 일·주·월 단위로 따져 발주량을 결정하고, 입고된 상품의 시간대·지역별 판매 추이까지 실시간으로 추적해 재고와 인력 운영을 미리 조정한다. 그 결과 일반 대형마트 폐기율이 3% 내외, 슈퍼가 7~8%에 달하는 가운데 마켓컬리는 신선식품 폐기율을 7년 연속 1% 미만으로 유지하고 있다. AI가 환경 부담과 운영 비용을 동시에 줄이는 좋은 본보기다. CJ대한통운은 한 걸음 더 들어가 ‘에이전틱 AI(Agentic AI)’ 전략을 내세웠다. 단순 자동화를 넘어, AI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 운영 체계다. 미들마일 운송 브랜드 ‘더 운반’은 AI·빅데이터 기반 라우팅으로 운임과 경로를 동시에 최적화한다. 라스트마일 ‘오네’는 2025년 업계 최초로 주 7일 배송 ‘매일오네’를 도입했다. 군포 풀필먼트센터에서는 AI 휴머노이드 로봇이 포장 공정에서 완충재 보충 작업을 실증하며 상용화를 준비 중이다. 로봇이 단순한 팔다리가 아니라 ‘판단하는 동료’가 되어가고 있다. ■ 포항·경북, 산업 물류의 새 무대 이 흐름은 포항에도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포스코그룹은 지난 2월 제철소 철강 제품 물류관리에 휴머노이드 로봇 도입을 공식화했다. 이미 포항제철소에서는 AI 기반 크레인 자동 운송 시스템이 가동 중인데, 영상 인식과 라이다(LiDAR) 센서로 비정형으로 쌓인 코일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한 번에 최대 8톤을 안전하게 옮긴다. 과거 12시간이 걸리던 복잡한 소량 주문 설계가 AI 덕분에 단 1시간으로 단축됐고, 용광로에서 쇳물을 빼는 출강 과정까지 AI가 스스로 최적화하고 있다. 그룹 물류 자회사 포스코플로우는 통합 물류 시스템 ‘플라워(Flower)’로 그룹 전반의 선박·차량·재고 정보를 실시간으로 연동하고 있다. 철강뿐 아니라 영일만항을 거쳐 가는 수출 컨테이너, 경북 내륙의 농수산물 산지 출하, 의성·청송 사과의 출고 타이밍 조절까지 AI 공급망 기술이 적용될 영역은 무궁무진하다. 중소 판매자가 대형 플랫폼의 AI 풀필먼트 인프라를 빌려 쓰는 네이버의 ‘NFA(네이버 풀필먼트 얼라이언스)’ 같은 모델은 지역 소상공인에게도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있다. 거대 IT 기업의 전유물이던 AI 물류 역량이 작은 가게의 무기가 되는 시대다. 포스텍과 지역 연구기관이 보유한 데이터 분석 역량이 지역 물류 스타트업과 결합한다면, 동해안에 한국형 ‘AI 물류 허브’가 자리 잡는 그림도 결코 먼 미래가 아닐 것이다. ■ 과제와 전망···사람과 AI의 동행 물론 그늘도 있다. 데이터 품질이 곧 예측 품질을 결정하기에, 양질의 데이터 확보가 관건이다. 전쟁·기후 재난·관세 같은 외부 충격에는 어떤 모델도 완벽히 대응하기 어렵다. 일자리 변화도 풀어야 할 숙제다. 단순 분류·운반 직무는 줄지만, 데이터 분석가, 로봇 운영자, AI 트레이너 같은 새 직무가 생겨난다. 정부와 지자체의 재교육 투자, 그리고 중소 물류·유통기업의 AI 도입을 돕는 공공 인프라가 절실한 이유다. 결국 AI 물류·유통 혁신의 진짜 가치는 ‘빠른 배송’을 넘어선다. 폐기 식품을 줄여 환경 부담을 낮추고, 품절로 인한 헛걸음을 막아 시민의 시간을 아끼며, 영세 판매자에게도 대기업 수준의 예측 도구를 손에 쥐여 준다. AI가 짜는 보이지 않는 연결망은, 결국 우리 일상의 풍경을 조용히 바꾸어 가고 있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5-10

세한도(歲寒圖)

대구간송미술관은 지난달 7일부터 전시한 추사 김정희의 작품인 ‘세한도’를 오는 10일까지 전시한 후 마감한다. 서울과 제주에서만 볼 수 있었던 ‘세한도’가 처음으로 대구에 와 전시된 후 이번 주말을 끝으로 마감된다고 하니 아직 구경 못 한 분들이 있으면 시간을 내서라도 한번 가보길 권한다. ‘세한도’는 가로 69.2cm, 세로 23cm 크기 작품으로 국보 180호다. 조선 문인화 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그림이다. 세한(歲寒)은 자신의 처지를 빗대 표현한 말이다. “날씨가 차가워지고 난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고 푸르다”는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추운 겨울’이란 뜻의 세한에서 따온 말이다. 1844년 김정희는 50대에 제주도로 유배를 가 9년간 긴 유배생활을 한다. 그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른바 위리안치형을 받아 그와 접촉하는 것조차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제자 이상적은 추사를 극진히 모시고 중국으로부터 구입한 책들을 가져다 준다. 그의 정성에 감복한 추사가 선물로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다. 초라한 집을 가운데 두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려진 모습은 자신과 자신에게 정성을 다한 이상적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림 낙관에는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의 ‘장무상망(長毋相忘)’이 쓰여 있다. 이 그림은 일본인 추사 연구가 후지쓰카가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한 후 보관하고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오게 된다. 대구간송미술관은 이번 연휴 기간이 세한도가 전하는 감동을 경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 했다. 이번 주말에는 꼭 대구간송미술관을 찾아 선비의 절개가 담긴 그림을 음미해보면 어떨까. /우정구(논설위원)

2026-05-07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 사이에서 길을 잃다

5월 8일, 어버이날이다. 부모님의 가슴에 꽃 한 송이를 달아드리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서구 사회에도 ‘어머니의 날(Mother’s Day)’이 있지만, 부모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는 어버이날은 한국식 정서이자 전통이다. 그러나 올해 어버이날을 맞이하는 마음은 예년과 달리 무겁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하나뿐인 자녀에게 부모의 사랑이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사랑이 왜곡된 형태로 발현된다는 데 있다. 몇 년 전부터 학교 현장에서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에 악성 민원을 제기하고, 아동학대로 신고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각종 민원들의 홍수에 현장체험학습과 체육활동은 위축되어 유명무실해졌다. 급기야 감당하기 힘든 학부모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초등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교육 현장에서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자조적 분위기가 만연하다. 이대로는 공교육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자녀들이 이를 배운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교사를 불신하고, 정당한 교육행위를 문제 삼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 역시 교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잘못된 행위를 해도 부모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왜곡된 확신을 자녀에게 심어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바람직한 역할인지 냉정히 물어야 한다.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보호는 사랑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시장에서 구입한 손수건을 곱게 포장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부모님과 같은 분이니, 선생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 한마디는 어린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부모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는 지금까지 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 시절 부모들은 교사를 신뢰했고, 교사들은 그 신뢰에 책임으로 응답했다. 그 믿음 위에서 아이들은 가정과 학교를 오가며 성장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하나라는 뜻이다. 오늘날 군주는 사라졌지만, 스승과 부모가 한 사람의 성장을 함께 이끈다는 본질적 가치는 시대를 초월한다. 5월에 어버이날(8일)과 스승의 날(15일)이 일주일 간격으로 나란히 놓인 것도 이 같은 철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두 기념일이 같은 계절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는, 부모와 스승이 결국 같은 뿌리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와 스승은 대치하는 존재가 아니라 협력하는 존재여야 한다. 가정과 학교가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할 때, 아이는 비로소 건강하게 자란다. 과잉보호의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는 실패를 견디는 힘을 잃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은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힘을 길러주는 데서 더 깊어진다. 어버이날에 다시 묻는다. 부모와 교사가 함께 아이들에게 물려줄 값진 유산은 무엇인가?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아는 아이, 실패 앞에 타인을 탓하지 않는 아이, 부모와 스승 모두의 은혜를 함께 간직하는 아이 — 그것이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남겨야 할 유산이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5-07

국가폭력과 애도

한국 현대사에서 5월은 국가폭력에 관한 기억으로 점철되는 시기인 것 같다. 80년 5월 광주도 그렇지만, 91년 5월 투쟁도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 비해 잘 기억되지는 않지만 91년 5월 투쟁도 시대의 전환을 알린 중요한 사건이었다. 1991년 4월 26일 대학생 강경대의 죽음으로부터 6월 29일 범국민대책회의가 명동성당 농성을 해제하기까지 약 60일 동안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전국에서 열린 대중 집회와 시위,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91년 5월 투쟁은 ‘분신’과 ‘의문사’, ‘백골단의 쇠파이프’와 ‘지랄탄’, ‘유서’와 ‘부검’, ‘장례’와 ‘추모’ 등으로 상징되는 공안 통치의 폭력(성)이 수많은 죽음을 양산한 사건이기도 했다. 짧지 않은 투쟁의 시간 동안 13명의 열사가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한국 사회가 2~3일 간격으로 국가권력에 의한 타살을 목도해야만 했었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했다. 국가폭력에 대한 이 거대한 저항은, 당시엔 87년 6월 항쟁의 반복(제2의 6월 항쟁)으로 의미화되기도 했지만, 심각한 차이도 인식되고 있었다. 운동을 촉발한 공안당국의 야만성이 훨씬 노골화된 상태에서 현상한 이유에서였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는 밀실에서의 고문과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에 희생되었지만, 강경대 열사는 백주 거리에서 정경들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것이었다. 민주화 이후에 벌어진 폭력과 죽음이었기에 사회적인 충격은 더 컸다. ‘열사의 죽음’과 ‘분신 정국’, 91년 5월 투쟁에 관한 정치 공방이 죽음을 둘러싼 상징 투쟁의 양상으로 이어진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일견 예견된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91년 5월 투쟁이 실패의 역사로 기억되거나 기록되는 이유에도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실존적인 의식이 선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1년 5월 투쟁은 ‘80년대적’인 운동과 투쟁의 ‘마지막 불꽃’이었으며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일종의) 분기였는데, 그 분기의 결절(結節)에는 ‘죽음으로부터의 실존적인 도피’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1980년대의 운동과 저항은 수많은 형태의 죽음에 의거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80년대적인 것’의 상징적·실존적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희구했던, 전도되고 오인된 다분히 사회(사)적인 인식의 이행 속에서 1990년대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영위하는 ‘삶’이란 수많은 타인들의 ‘죽음’에 빚지고 있다. 자유롭게 누린다고 상상된 일상도 무수한 저항과 희생 위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봐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는 언제나 중요한 국가적·사회적 과제가 아닐까 싶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애도란 떠나간 자들과의 단절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단절의 불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 바 있다. 희생 이후, 지속되는 슬픔과 우울에서 출발하는 애도는 언제나 이미 우리의 삶이 누군가의 뒤에서 살아남는다는 의미의 ‘생존’으로 새롭게 정의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희생된 자들의 죽음과 상실을 그대로 간직한 채 ‘베인 흉터’를 가지고, 남은 나날에 충실해야 한다. 상실 이후에 남겨진 우리의 삶을 위해서라도 애도는 계속돼야 한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6-05-07

팥쥐엄마가 그립다

달력을 보니 벌써 5월이다. 어버이날이 다가온다. 내 어릴 때는 분명 ‘어머니 날’이었다. 아버지의 존재는 미미했다. 어쨌든지 어머니한테만 잘하면 끝나는 날이었다. 빨간 카네이션과 하얀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면서. 그날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지 못하면 천하 불효자로 낙인찍힌다 싶어 먹을 것 안 먹고 알뜰하게 모아 나름 정성을 다했다. 그 당시 하얀 카네이션은 엄마가 돌아가신 애들이 사는 꽃이라고 했는데 돌아가신 엄마한테 어떻게 꽃을 달아 드리는지 참 궁금했었다. 그 의문은 여전하지만, 이미 하얀색이든 빨간색이든 카네이션 자체를 달고 다니는 부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나이 칠십 전에 꽃 달고 거리에 나가면 많이 민망하다. 그래도 상술은 먹히는지 카네이션 모양의 배지 같은 것을 달아준다. 아직 연로한 부모님이 아직 생존하시는 터라 챙겨드리기도 하지만 대접받는 위치에도 있는 입장이라 별로 쓸모도 없는 선물 쪼가리라도 받으면 은근히 기분은 좋다. 하지만 왜 지네들 마음대로 선물을 고르는지 알 수 없어 항상 주고받는 현금 속에 잔정이 더 싹튼다고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했건만, 말에 씨가 안 먹힌다. 일찍 어머니는 여의고 한평생 어버이날에 산소만 찾은 친구가 있다. 하얀 카네이션을 그냥 무덤에 꽂아두고 한참 햇살이 주는 온기만 느끼다 온단다. 콩쥐 팥쥐 이야기가 생각난다. 콩쥐 팥쥐의 주된 이야기는 ‘계모’는 나쁜 엄마라는 것이다. 하지만 팥쥐에게 엄마는 어떤 엄마일까? 아마도 엄청 좋은 엄마가 아닐까? 반대로 콩쥐 엄마는 어떤 엄마일까? 콩쥐 엄마는 착하고 좋은 엄마일까? 내가 아는 콩쥐 엄마는 일찍 죽고 없다. 그래서 그 엄마가 착한지 나쁜지는 알 길이 없다. 팥쥐에게 좋은 엄마인 여자가 전처소생인 콩쥐에겐 악독한 짓을 하는 나쁜 엄마로 취급받는다.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이혼하는 이 시점에서 뭔 말도 안 되는 콩쥐·팥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웃기지 않나 말이다. 더 황당한 것은 사람들은 있지도 않은 콩쥐 엄마를 닮으려고 한다는 게 더 우습다. 어떻게 행동하면 콩쥐 엄마가 되는 것일까? 무조건 애 놔두고 일찍 죽거나 이혼하면서 애 버리고 가면 콩쥐 엄마 되나? ‘맘충(Mom蟲)’, 엄마를 뜻하는 영어 단어 맘(Mom)과 벌레를 의미하는 한자 충(蟲)을 합성한 신조어 말이다. 자식 사랑을 핑계로 몰지각한 행동을 일삼는 엄마들을 말한다. 일부 개념 없는 행동을 일삼으면서도 자신들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는 무개념 엄마들도 분명 보인다. 하지만 차라리 맘충 엄마들을 변호한다. 고상한 척 예절 바른 척하면서 애도 낳지 않거나 애를 버리는 엄마보다는 백번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버이날 노래 가사처럼 하늘처럼 높고 바다 같은 넓은 사랑을 가진 것이 엄마라고 하는 바람에 지금 엄마들이 다 자기가 천사인 양 콩쥐 엄마가 되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콩쥐 엄마는 이 세상에 없다. 없는 콩쥐 엄마 흉내 내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 보자. 자꾸 버려지는 애들이 많아지고 있단다. 지금은 콩쥐 엄마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 끝까지 챙기는 팥쥐 엄마가 그리운 세상이다. /노병철 수필가

2026-05-07

압도적인 봄의 꽃잔치, 산청 대명사 꽃잔디 탐방

수식어가 화려하다. 아는 사람만 찾아간다는 봄 여행의 숨은 정수라고 한다. 돌계단을 오르면서 탐방이 시작되지만, 눈은 잠시라도 쉴 틈이 없다. 좌우로 펼쳐지는 꽃들의 자태는, 화려한 봄을 수놓기 충분하다. 사찰과 주변의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꽃밭으로 탈바꿈해, 다양한 색깔의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사찰의 이름은 대명사. 이곳은 몇 해 전만 해도 무명의 장소였다. 2008년 창건했으니 이제 겨우 서른 살 안팎의 연혁이다. 그런데 이 절은 우리가 흔히 알던 한국의 고즈넉한 목조 사찰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단청이 없는 하얀색 외벽의 현대적 건축 양식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의 조계종과 천태종이 아니라, 중국 소림사의 선풍을 이어받은 ‘소림선종’의 사찰이란 점이다. 해마다 4월이면 대명사는 사찰 전체가 분홍빛 꽃잔디로 뒤덮인다. 이국적인 하얀 건물들과 조화를 이룬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을 연출한다. 이곳이 사찰인지 꽃잔디 정원인지 구분이 불가할 정도다. 대명사에 꽃잔디가 심어진 것은 17여 년 전부터다. 주지 스님이 직접 꽃잔디를 심고 가꿔온 결과물의 산출이며 보답이다. 꽃잔디의 꽃말은 온화함과 희생이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자라는 특성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이곳이 위치한 지자체는 해마다 이 꽃 하나로 10일간이나 축제를 연다. 꽃의 원래 태생은 미국 중부와 동부, 여러해살이풀로 땅을 덮을 듯이 낮게 자라며 꽃을 피운다고 ‘꽃잔디’다. 척박한 조건인 건조한 모래땅에서도 잘 자라나 생명력이 대단한 식물로 알려졌다. 암울한 절망의 시대에서 오늘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우리의 국민성과도 어느 정도 상통하는 이미지가 있어 겹쳐 보이기도 한다. 대명사 꽃잔디 탐방은 절의 입구에서 101계단을 오르면서 시작된다. 대웅전으로 직진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좌우에는 화려한 분홍색과 흰색의 꽃잔디가 영산홍과 어울려 돌계단 사이에서 절경으로 승화된다. 대명사의 첫 이미지로 강렬하게 각인되어서인지 가장 대표적인 포토죤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절의 큰 마당에는 분홍빛 꽃잔디가 절정이다. 정면으로 건물 한 층 높이의 돌계단이 보이고 그 끝머리에 대웅전이 세워져 있다. 현재 꽃잔디의 개화율은 약 80 프로 정도다. 꽃물결이 흥건한 마당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징검다리처럼 배치된 맷돌 길을 한발 한발 건너야 한다. 탐방객들은 이 맷돌을 밟고 이동하면서 발아래에 피어난 꽃들을 감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여건이 완성된다. 정면으로 오르는 중앙 돌계단 오름길은 꽃을 보호하기 위해 막혀 있다. 꽃잔디를 밟지 않고 바닥에 깔린 맷돌이나 화살표 방향을 따라 우측으로 이동하면, 꽃길이 이어지면서 대웅전과 연결된다. 최적의 방문 시기는 보통 4월 중순에서 5월 초까지다. 해마다 꽃의 개화 시기나 개화율이 다를 수 있어 사전에 검색해서 다녀오길 권한다. 사진 촬영 시 가장 대표적인 구도는, 대웅전을 배경으로 꽃잔디를 앞마당에 가득 담는 방식이다. 또 하나는 대웅전을 지나 사찰 뒤편의 산책로에서 대웅전을 내려다보는 풍경도 일품이니 취향에 따라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단 주의할 것은 이곳은 관광지가 아닌 실제 수행 중인 사찰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대웅전을 비롯한 사찰의 수양 공간에는 대부분 촬영이 금지돼 있다. 대웅전을 통과하면 꽃길은 자연스레 좌측으로 이어진다.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불이 대웅전과 사찰의 내부를 내려다보고 있다. 청아한 물소리가 들리는 작은 소품 같은 조경이 일품인데, 작은 볼거리 겸 즐길 거리인 돌할매도 약사여래불 옆에 보인다. 돌을 들면서 자신의 운세를 점치는 것으로, 두 손으로 돌을 들어 올릴 때 돌이 들리면 자신의 염원이 이뤄지지 않고, 돌이 꼼짝도 안 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삼선당으로 오르는 맷돌 같은 돌계단 길 좌우에는 흰철쭉이 도열한다. 사찰의 부속 건물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부속 건물답게 오름 길에서 살펴보는 주변의 전망과 조망은 빼어나다. 대명사 방문이 주는 특별한 의미는 단순한 꽃잔디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101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이어지는 동쪽으로의 조망이 산청휴게소와 경호강이 가장 먼저라면, 대웅전 앞이나 삼선당 주변에서의 조망은 먼 곳까지도 충분히 가능하다. 등산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월명산(320m)과 백마산(286.3m), 적벽산(166.3.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의 황매산까지 풍광이 이어진다. 가장 빼어난 조망은 뭐라고 해도 북쪽이다. 산청의 명산 둔철산(823m)과 대명사의 철쭉들이 경계를 이루면 한 폭의 진경산수화가 따로 없다. 사찰의 탐방로 곳곳에 볼거리가 가득하다. 이름 모를 꽃들이 심어져 피어나고 곳곳이 포토 존이다. 바위솔이 조경으로 한몫한 장독대 주변과 노송과 기와집, 넝쿨이 원형의 독립문을 형성한 지점이 대표적이다. 절이 위치한 장소는,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원지강변로 63번길 100이다. 사찰에 주차 공간이 마련돼 있으나, 꽃잔디 시즌의 주말에는 방문객이 많아 혼잡할 수 있어 진입로 주변 도로에 세워야 한다. 가장 좋은 점은 별도의 입장료나 주차비가 없다는 것이다. 주변으로 연계할 관광지가 많다는 것도 장점이다. 대명사에서 자동차로 13분 거리에 남사예담촌이 있고, 15분 거리에는 산청 정취암이 있다. 남사리에 있는 한옥마을인 예담촌은 현대에 인위적으로 만든 한옥마을이 아니라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같은 전통마을로 역사가 500년에 달한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정취암은,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간다고 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일컫던 장소다. 그다음으로 고려할 장소는 20분 거리의 생초국제조각공원이다. 생초국제조각공원 꽃잔디 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축제는 끝났어도 꽃잔디는 아직도 절정이다. 어느 장소를 연계해도 산청의 봄을 가장 완벽하게 정복하는 하루 코스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지홍석 수필가·여행 칼럼니스트

2026-05-07

탄소문명에서 수소문명으로, 환경운동의 철학적 전환

요즘의 날씨는 지구온난화가 더 이상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폭염과 홍수, 가뭄과 산불이 반복되고 있으며, 기후위기라는 말은 이제 학자들의 연구 주제가 아니라 시민의 일상이 되었다. 기후재난은 점점 더 강해지고 그 빈도 또한 높아지고 있다. 인류는 지금 산업혁명 이후 가장 거대한 문명 전환의 시대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기를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동안 환경운동은 주로 개인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해 왔다. 에너지 절약, 자동차 덜 타기,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재활용 확대와 같은 실천은 시민의 의식을 높이고 환경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이러한 방식만으로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지구온난화의 핵심 원인은 개인의 생활 습관이 아니라 산업 구조와 에너지 체계에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시민들은 경제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가족을 부양하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산업과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환경운동 역시 단순한 도덕운동이 아니라 경제와 산업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사회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다시 말해 환경운동은 이제 탄소중립 경제를 만들어 가는 시민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현대 문명은 단순히 자연을 파괴하는 체제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줄여 온 문명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병원의 응급실과 수술실을 떠올려 보자. 그곳에서는 단 한 순간도 전기가 멈추어서는 안 된다. 심장박동을 감시하는 모니터, 인공호흡기, 수술 장비, MRI와 CT 같은 의료 장비는 모두 전기에너지에 의존한다. 만약 전기가 멈춘다면 수많은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팬데믹의 시대 역시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전 세계의 의학자들은 밤낮없이 연구를 이어가며 백신을 개발했다. 백신은 냉장 보관이 필요하고 생산 과정 역시 막대한 전기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백신을 생산하는 제약회사들의 연구소와 공장 또한 거대한 전력 시스템 위에서 작동한다.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약품과 의료 기술 역시 산업과 과학기술, 그리고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 위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좋은 전기를 멈추는 것은 결코 환경운동이 될 수 없다. 환경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문명을 멈추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환경운동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말해 왔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만약 산업과 에너지 시스템이 멈춘다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일 것이다. 의료 시스템에 의존하는 환자들, 현대 의약품과 치료 기술에 의지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산업과 일자리 속에서 삶을 유지하는 시민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철학적 시각 역시 중요하다.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저서 ‘월든(Walden)’에서 자연 속에서의 단순한 삶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성찰했다. 그는 자연을 존중하고 인간 문명의 과도한 물질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20세기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인간 사회의 발전을 “열린사회”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사회 문제는 비판과 토론, 과학적 검증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현대 기술 문명 속에서 인간이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책임의 원칙”을 제시했다. 이 세 철학자의 이야기를 함께 들으면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드러난다. 자연을 존중하면서도 과학과 기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지는 문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환경운동 역시 문명을 거부하는 운동이 아니라 이러한 책임 있는 문명 전환의 운동이어야 한다. 1970년대 환경운동의 상징적인 보고서인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는 산업 성장의 한계를 경고하며 세계적인 환경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보고서는 인류 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졌지만 동시에 산업 발전 자체를 부정하는 해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환경운동은 단순한 성장 억제론을 넘어 지속가능한 문명 전환을 고민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문제는 문명 자체가 아니라 탄소 중심의 산업 구조에 있다. 인류의 산업 문명은 오랫동안 석탄과 석유라는 탄소 에너지 위에서 발전해 왔다. 철강과 자동차, 조선과 건설 산업은 이 에너지 구조 위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에너지 체계로 이동해야 한다. 태양과 바람, 그리고 수소와 같은 청정에너지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산업 문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인류는 지금 탄소문명에서 수소문명으로 이동하는 역사적 전환의 문 앞에 서 있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포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다. 포항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적인 도시이며 철강 산업의 중심지다. 동시에 포항은 탄소중립 산업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수소환원제철 기술은 포항이 새로운 산업 문명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아직까지의 철강 생산은 석탄을 사용하는 고로 공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탄소가 배출된다. 그러나 수소환원제철 기술은 석탄 대신 수소를 사용하여 철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는 탄소 대신 물이 배출된다. 이 기술이 산업적으로 성공한다면 철강 산업은 더 이상 기후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산업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문장을 강조하고 싶다. “포항의 다음 50년은 수소환원제철에 달려 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산업 정책의 슬로건이 아니다. 그것은 포항의 미래 경제와 기후위기 대응,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생존이 연결된 문제다. 환경운동 역시 이러한 산업전환을 고민해야 한다. 환경운동은 산업을 무조건 반대하는 운동이 아니라 산업을 더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사회운동이 되어야 한다. 문명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바꾸는 것. 탄소문명에서 수소문명으로 거대한 전환의 길 위에서 포항이 새로운 산업 문명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포항의 다음 50년은 수소환원제철에 달려 있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

2026-05-06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건가요

SNS에서 우연히 어떤 이의 소식을 보게 되었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누군가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굳이 설명하자면 꼭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일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처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그에게 어떤 감정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뿐이다. 그런 중립적인 상태에 대해 말하려면 이처럼 말이 다소 장황해진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구나 생각하면 될 텐데 꼭 싫어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나는 조금 번거롭다. 그와는 오래 전에 만났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만난 지인의 지인이었는데, 술에 취해 목소리가 커지고 말을 조금 경솔하게 내뱉는 느낌이 있었다. 그냥 술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례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부적절한 언사를 여기저기 난사하다 보니 어떤 말은 나를 향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을 만나면 반응하지 않거나 도망을 가는 편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들이 받아버리곤 하던 시절이었다. 무례에 무례로 대응하자 그는 욕을 했고 우리는 고성을 내지르며 다투게 되었다. 지인들이 우리를 뜯어 말리는 수준에 이르자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해가 질 무렵,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자리에 있던 내 지인에게 번호를 받았다고 했다. 자기가 술에 취해 실언을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나도 잘 한 것은 아니니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이것도 인연인데 소주나 한 잔 하고 친해졌으면 좋겠다며 내게 괜찮은 때를 정해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로 풀었으면 된 것이지 굳이 술 마시고 내게 행패 부린 사람과 또 술을 마시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았다. 적당히 둘러대고 흐지부지 넘어갔으면 되었을 텐데 그때 나는 그런 것을 참 못했다. “서로 나쁜 감정은 다 풀었으니 된 것 아닐까요? 굳이 친하게까지 지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조금 매정하게 들릴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와는 그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그렇게 말한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사실 그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교류하고 지내는 이가 많은 편이다.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이들도 많고 그만큼 챙겨야 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그것을 잘 해내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팽창해버려 내 그릇의 크기를 벗어나버린 내 대인관계가 언제나 버겁다. 그런 판국에 굳이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 이와 친하게까지 지내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내 마음의 공간을 그에게까지 내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싫어한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사이가 나쁘다고 판단해버리곤 하는 것 같다. 어쩌다가 서로를 만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친해지자고 다가오면 나는 때때로 당황스러운 기분이 든다. 같이 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먹어야 하지 않냐는 사람들, 인간적인 매력을 알 만한 계기조차 없었는데 갑자기 나이를 묻더니 형 동생으로 지내자는 사람들. 결국 연락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 이따금 우연히 카톡에 뜬 서로의 이름을 보며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애초에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다. 서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고, 상대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고 싶은 욕망이 동한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같은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사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만 굳이 누가 누구를 챙기지 않아도 되는 사이는 얼마나 편리한가. 오래전 다투었던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특별히 반갑다거나 아니면 불쾌하다거나 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잠시 그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로 지내고 싶었던 내 마음에 대해 생각했을 뿐이다. 그가 여기저기 내 험담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도 있고, 그에게 내 번호를 알려주었던 지인에게서 왜 굳이 그렇게 야박하게 굴었느냐고 타박을 받기도 했다. 좋지 않은 사람과 나쁘지도 않게 지낸다는 것이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나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그의 사정이다. 나는 여전히 그를 애써 좋아하거나 싫어할 생각이 없다. /강백수(시인)

2026-05-06

겁 많은 사람

영화 ‘살목지’가 24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손익분기점의 세 배를 넘어선 엄청난 기록이었다. 한국 영화계에서 호러 장르가 흥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보통 호러 장르의 호황 시기는 여름이지만 지금은 봄이므로 비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호러의 어떤 점에 매료된 것일까? 나는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 서린 귀신, 악령, 유령 같은 존재가 인간을 공격하는 전개로 흘러가는 순간 김이 팍 샌다. 육체 없이 둥둥 떠다니는 존재들은 생전에 억울한 죽음을 맞아서, 그게 너무 분하고 서러워서 인간들을 홀려 죽음으로 꾀어낸다.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대개는 어떤 장소에 매여있다는 것이다. 물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시끄러운 저수지나 이사 오는 족족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바람에 폐가나 다름없는 저택, 과거 공동묘지였다던 학교, 문 닫은 폐병원 등, 귀신이 상주하는 곳은 일반인이라면 쉽게 접근하지 않을, 감히 접근할 생각도 하지 못할 곳이 대부분이다. 물론 나 또한 그런 곳은 이전에도 가본 적 없고 앞으로도 갈 생각이 전혀 없다. 평생 방문할 일 없는 곳이므로, 그곳에 사는(?) 귀신들을 만날 일 또한 평생 없으리라 생각하니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겁 없이 용감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겁 많은 사람에 속한다. 어둠을 무서워하고, 바퀴벌레와 비둘기를 무서워하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무기력과 우울을 두려워한다. 그중에서 제일 두려운 건 무기력과 우울이다. 특히 지금처럼 봄철이 돌아오면, 익숙하고 지겨운 우울감이 나를 깊이 짓누른다. 실제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계절이 봄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봄이 되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현상을 ‘스프링 피크(Spring Peak)’라고 부르는데, 기온과 일조량이 증가해 신체 리듬에 변화를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봄은 새로 시작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성취에 대한 압박과 대인 관계 변화 등이 사람들을 더욱 우울한 방향으로 밀어낸다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던 열정과 의욕이 깨어난다. 나 또한 매년 1월 1일이 되면 한 해의 목표와 버킷리스트를 적어둔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정리하며 올해는 기필코 다르게 살겠노라 다짐하지만, 2월이 지나 3월, 4월, 그리고 봄의 끝물이라 할 수 있는 5월이 되는 순간 좌절에 휩싸인다. 남들은 벌써 무언가를 이룬 것 같은데 나만 아직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온 탓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나만 겪는 게 아니었다니. 많은 사람이 이 시기에 움츠러들고 작아진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사계절 중 가장 환하고 활기차며 생명이 움트는 시기인 봄의 뒷면에 이런 그늘이 있을 줄이야. 다시 영화관으로 돌아가 본다. 매점에서 팝콘과 음료를 고르고 화장실에 간 일행을 기다린다. 상영 10분 전이 되면 같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상영관 안으로 입장한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광고가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옆 사람과 수다를 떨거나 휴대폰을 본다. 이윽고 상영관의 불이 꺼지면 일제히 커다란 스크린을 바라본다. 그 안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존재가 나오더라도,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우린 안전하다. 사람들이 호러 장르에 매료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불이 켜지고 상영관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귀신과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까. 그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이든 간에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 그러나 무기력과 우울은 그런 식으로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올봄에는 가족들과 자주 나들이를 갔다. 한강도 가고 식물원도 갔다. 서울 근교로 나가 사람 많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인적 드문 곳을 찾아 걸었다. 날이 좋다거나 바람이 시원하다거나 같은 뻔한 말도 없이 그저 걸었다. 햇볕이 따뜻하고 꽃이 아름다워서 어쩐지 조금 쓸쓸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겁 많은 사람답게 꽃을 밟을까 봐, 빨리 걷다 발이 꼬여 넘어질까 봐 걱정하며 걸었다. 그때 나를 앞질러 뛰어가던 강아지가 우뚝 멈춰 서선 나를 바라보았다. 앞서간 강아지가 인간을 돌아볼 때는, ‘여긴 안전하니 와도 돼’라는 뜻이라고 했던가. 그 얼굴이 너무나 근엄해 보여서 나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겁 많은 사람이 내디딜 수 있는 가장 큰 보폭으로. /양수빈(소설가)

2026-05-06

5월에 어울리는 영화 한 편

‘가정의 달’이라 불리는 5월이다. 가정을 이루는 구성 요소는 재론할 것 없이 가족. 부모와 자식, 거기서 영역을 확장하면 조부모와 손자녀를 가족이라 칭한다. 유교적 관점이 사회를 지배했던 과거 한국에선 혈연으로 얽힌 사람들만을 ‘가족’이라 불렀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가족의 개념도 확대되고 있다. 입양한 자녀 또는, 이복과 이부형제 역시 가족의 범주에 포함하는 게 이젠 자연스럽다. 이런 변화된 가족 형태를 웃음과 감동 속에 담아낸 영화가 있다. 개봉한 지는 꽤 됐지만 5월에 다시 본다면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작품이다. 송해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 ‘고령화 가족’은 혈통의 순수성을 절대적으로 생각해온 우리 사회에서 현대적 가족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물었다.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은 천명관이 썼다. 중년임에도 철없는 실수를 거듭하는 장남, 사회 부적응자인 차남,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막내딸, 가출과 비행을 거듭하는 손녀, 이들을 애정으로 감싸며 가족의 중심에 선 엄마이자 할머니. ‘고령화 가족’은 어째서 이 가족이 현재와 같은 입장에 처했는지, 그들이 지나온 길은 어떠했는지, 무슨 사연이 5명의 가족을 같은 공간에서 살게했는지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때론 웃고 때로는 울게 된다. 실수가 연속되고, 아픔이 반복되는 가난한 삶. 영화 속 가족의 모습은 한국의 보통 가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실수와 아픔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게 ‘가족이 길’이 아닐까? 감독은 이런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진다. 가정의 달 5월. ‘고령화 가족’을 본 후 이런 질문을 해본다. “꼭 피를 나눠야만 가족인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5-06

울타리 안을 살피는 달, 5월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부부의날이 차례로 이어지며 우리를 멈춰 세운다. 평소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익숙함에 기대어 미루었던 마음들을 꺼내 본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시선을 돌리라고 조용히 말을 건넨다. 계절은 더없이 온화하고 햇살은 부드러운데, 마음은 그 온기를 따라가지 못한다. 올해 5월도 평온하지만은 않다. 나라 안은 선거의 열기로 들끓고, 나라 밖은 전쟁과 갈등의 소식으로 가득하다. 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긴장과 분열의 장면들을 쏟아낸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어떤 선택이 더 나은지 끊임없이 따져 묻는다. 그런 북새통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분명하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 울타리 안을 들여다 보는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본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나이가 들면서 부모는 점점 더 말이 적어지고 자식은 점점 더 바빠진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줄지 않았는데 표현이 줄어든다. 그런 사이 침묵이 쌓이면서 오해가 늘어난다. 부모가 진정 바라는 것은 거창한 효도가 아니라 짧은 안부 전화 한 통이 아니었을까. 함께하는 식사 한 끼였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마음은 또 어떤가. 아이들이 어떤 성적을 받는지에는 민감하지만, 그들이 일상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에는 무심하지 않았는가. 아이들도 생각보다 깊고 복잡한 세계를 살아간다. 어른들의 기대와 사회의 기준 사이에서 스스로를 견주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작은 어깨 위에 얹힌 무게를 덜어주는 일은 결국 부모의 몫이 아니었을까. 묻고 들으며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된다. 부부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더 쉽게 지나치는 관계. 익숙함은 편안함이 되어 무심함으로 변하기도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라는 짐작은 오해를 낳는다. 말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른다. 서로의 하루를 묻고 생각을 나누며 작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관계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기둥이다. 세상은 늘 크고 중요한 일들로 우리를 당긴다. 정치, 경제, 국제, 기술의 변화까지. 알아야 할 것들은 끝이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것은 가족이었고, 우리가 가장 오래 영향을 주고받는 것도 가족이다. 가까와야 할 관계가 흔들리면, 제 아무리 큰 성취도 공허해진다. 5월은 기념일의 행진이 아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렬하는 시간이다. 잠시 속도를 늦추고 시선을 내 울타리 안으로 돌려야 한다. 밖의 소음이 아무리 요란해도 나의 삶을 지탱하는 영역은 집 안에 있다. 울타리가 튼튼해야 거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다. 포근한 날씨처럼, 우리의 말 한마디와 시선 한 줄도 따뜻해야 한다. 한 번 더 웃어주고 한 번 더 물어보며, 한 번 더 손을 내밀어 보는 것. 그것이 가족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 5월은 그렇게, 가장 가까운 곳을 다시 발견하는 달이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5-06

옳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

최근 옳은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두 사람에게서 연거푸 들었다. 두 사람이 말하는 의도는 조금 달랐는데, 한 사람은 아무리 옳아도 힘이 없으면 소용 없으니 자신의 옳음을 관철하려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아야 진짜 옳음이 된다는 뜻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옳음에도 적절한 때가 있어서 그렇지 않으면 옳음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두 사람의 표현은 비슷해도 의미는 많이 다르다. 전자의 의견을 말한 의도에 맞게 고쳐보면, 옳은 것은 힘이 있어야 옳은 것이 되고 힘이 없으면 옳다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많은 소수자들의 주장이 이런 사례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지만 소수이고 힘이 없으니 그들의 주장은 소음으로만 치부된다. 그래서 그 옳음을 관철시키려면 힘을 키우라고 조언한다. 이 의견은 자칫 힘이 옳음이라고 생각될 여지는 있지만, 상당히 현실적인 조언이다. 두 번째 의견은 좀 복잡하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면 이런 경우다. 어떤 조합을 운영하는데 A가 정당한 절차를 주장할 때 임원들은 A의 주장이 사업을 방해한다면서 A의 옳음이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경우이다. 이런 두 번째 의견은 생각할 거리가 많다. 근본적으로 보면, 부처님도 때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알아들을 사람한테만 말하라고까지 했으니, 적당한 시기, 적당한 대상이 아니라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옳지 않은 말이 될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 옳음에도 적절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합에서 새 임원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 일반 조합원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기존 임원의 유임을 결정했을 때 이를 항의하는 A를 사업 방해꾼으로 치부한다거나, ‘의안서’와 ‘의사록’을 구분해야 한다고 해도 4년 넘게 의안서를 의사록이라고 했어도 아무 일 없었다고 무시당하는 상황까지 맞닥뜨리면 옳음의 적절성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심한 회의가 든다. 물론 작은 불의에 집착하다가 큰 불의를 놓칠 수 있다면 작은 불의는 넘어가는 것이 현명하다. 문제는 불의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작은 불의를 넘어가다 보면 큰 불의도 넘어가게 되는 문제도 있다. 옳음보다 속도가 중요하다는 논리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격렬한 이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살게 된 것은 속도전을 벌였기 때문이라는 논리는 승자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잘살게 된 것은 맞지만,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고 빈부격차는 더 극심해지고 있다. 2025년 말 기준 한국의 빈부격차가 극심한데, 상위 20%와 하위 20%의 순자산 격차가 45배에 달하여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고 수치라고 한다. 중위소득 50% 이하 인구 비율을 상대적 빈곤율이라고 하는데, 3%대인 노르웨이에 비해 한국은 2024년 기준 15.3%로 OECD 회원국 중에서 상대적 빈곤율이 상당히 높다. 사회적 약자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옳음의 적절성을 따지기보다 옳다면 옳게 해야 한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5-06

봄철 달리기 부상 방지 요령

날씨가 풀리면서 달리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겨우내 쉬다가 갑자기 시작하거나 체중 감량을 위해 무리하게 거리를 늘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운동 횟수를 늘리면서 통증 발생률이 급격히 올라간다. 달리기는 준비 없이 시작하면 관절과 신경에 스트레스를 주어 통증을 유발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장경인대 마찰 증후군이다. 허벅지 바깥쪽을 따라 내려오는 장경인대가 무릎 바깥쪽 뼈와 반복적으로 마찰되면서 통증이 생긴다. 보통 무릎 바깥쪽 2~3cm 지점에 국소 압통이 나타나고 달릴수록 통증이 심해지다가 멈추면 가라앉는 특징을 보인다. 초반에는 뻐근한 정도지만 계속 달리면 계단 내려갈 때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악화된다. 그 다음으로 흔한 것이 고관절 주변 통증이다. 특히 중둔근이 제 역할을 못하거나 장요근이 짧아진 상태에서는 달리는 동안 골반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고관절 외측이나 서혜부 쪽 통증이 생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무릎까지 2차 통증이 이어지기도 한다. 발목 통증도 매우 흔하다. 착지 시 충격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면 전거비인대, 아킬레스건, 후경골근 건 등에 미세 손상이 반복되면서 붓고 아픈 상태가 지속된다. 이런 통증의 원인은 근육이 약해서가 아니라 정렬 문제와 특정 구조의 과부하다. 골반 전방 경사나 무저진 발 아치 상태로 달리면 특정 부위에 반복적으로 스트레스가 집중된다. 예를 들어 중둔근이 약하면 무릎이 안쪽으로 무너지는 동작이 반복되면서 장경인대 부담이 증가한다. 이 상태에선 스트레칭만 하거나 잠깐 쉬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 예방을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 운동 강도를 단계적으로 올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주간 총 거리 증가량은 10%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 안전하다. 둘째, 엉덩이와 코어 근육을 먼저 준비시켜야 한다. 중둔근, 대둔근, 복부 코어가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하체 관절 부담이 분산된다. 셋째, 착지 패턴과 보폭을 점검해야 한다. 과도하게 긴 보폭과 뒤꿈치 과충격 착지는 발목과 무릎 부담을 증가시킨다. 넷째, 러닝화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너무 오래 사용한 신발은 쿠션 기능이 떨어져 교체가 필요하다. 다섯째, 러닝 전후로 동적 스트레칭과 간단한 근활성 운동을 해주는 것이 부상 예방에 도움이 된다. 치료는 단순히 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복된 자극으로 인해 특정 부위의 근막과 신경이 손상되고 긴장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긴장된 구조를 정확하게 찾아서 풀어주는 치료가 필요하다. 침 치료로 과긴장된 근육을 이완시키고 초음파로 장경인대 주변이나 고관절 주변 발목 힘줄 상태를 확인한 뒤 문제가 되는 부위에 직접 약침을 적용하면 염증과 통증을 빠르게 줄일 수 있다. 특히 장경인대나 고관절 깊은 구조는 촉진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초음파를 이용한 정확한 접근이 치료 효과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달리기는 분명 좋은 운동이다. 하지만 몸의 준비 상태를 무시하고 시작하면 오히려 통증을 만들고 운동을 중단하게 된다. 초기 대응을 잘하면 짧은 기간 내에 회복하고 다시 운동을 이어갈 수 있으니 관리를 하면서 운동을 하자.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5-06

오천 사람 정귀원

불특정 다수 혹은 평범한 삶이라 해도, 그럼에도 그 지평의 확산, 무한을 꿈꾸지 않는, 산다는 것의 현장의 악다구니의 와중에도, 애기똥풀처럼,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세상의 권력이다 정귀원은 그런 사람이다 그의 야성(野性)은 순수(純粹)의 위장(僞裝)이다 폭언(暴言)은 당부와 염려의 교묘한 기교 툭, 등을 치는 폭력은 가장 강력하나 부드러운 채찍으로 나의 허위를 직설적으로 응징한다 말뚝의 팔뚝으로 작물(作物)을 키우는 묵직한 섬세함은, 다시 말하지만 위장이다 아무튼 불가해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다 굵은 어깨의 뒷모습이 참 든든한 것이, 뭉개고 저항하며 같이 가자고 한다는 거, 그 생애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 모습이 가을비 같기도 하고 그러나 봄비에는 영원히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둔중한 온기는 오래 간다 그래서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을, 천천히 걸으며 증명하고 있다, 멈춤은 없다 집 떠난 자식들 대신하여 동네 어른들 목숨 저당잡힌 밭과 논, 그 일을 그가 모두 대신하는 것이 확실한 증거다 여불때기*의 선한 둥금을 그는 선험(先驗)으로 안다 사람 귀한 동네, 세상의 길을 돌고 돌아 중얼거리며 그는 가고 있다. *흔히들 ‘비탈’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모퉁이’를 지칭한다. ................. 무항산 무항심(無恒産無恒心), 나는 그 뜻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물질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안다. 다행인 것은 언제나 세상에는 스승이 있고 도반이 있다. 이 시의 친구가 대체로 그러하다. 중국 작가 위화는 말했다. “몸의 다른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6-05-06

바퀴

학창 시절, 자전거를 배우며 운동장에서 넘어졌던 기억이 있다. 무릎은 땅에 부딪혀 생채기가 나고 손바닥은 모래에 쓸려 몹시 아팠다. 포기하려는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친구들 중에 자전거를 못 타는 이는 나뿐이었기에 혼자 뒤처지고 싶지 않아 오기가 생겼다. 바퀴는 나를 끝내 일으켜 세웠다. 몸의 균형이 잡히는 순간 세상은 갑자기 가벼워졌다. 속도가 붙을수록 귀 옆을 스치는 바람은 내 가슴 속을 시원하게 뻥 뚫어주었다. 길 위를 달리는 바퀴 소리는 청량감마저 들게 했다. 흙길에서는 투박한 울림을 주기도 했지만 빗길에서는 물살을 가르는 리듬감을 느끼게 했다. 길에서 나는 소리들은 매번 달랐는데 삶의 소리도 바퀴를 닮았다. 하루하루는 비슷해 보여도 매번 다른 음색을 내며 흐른다. 바퀴는 흔적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때때로 바퀴가 남긴 흔적을 자세히 살펴보곤 한다. 흙길의 바퀴자국이나 눈 위의 바퀴무늬, 모래 위의 어지러운 흔적이 눈에 들어오면 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것들은 대부분 금세 사라지지만 잠시 남겨진 자국만으로도 바퀴의 여정을 읽을 수 있다. 바퀴가 남긴 흙먼지나 젖은 눈 위의 얇은 흔적은 마치 마음속 기억의 파편과 같다. 우리가 걸어온 길은 눈에 보이지 않게 지워지는 듯하다. 하지만 흔적은 금세 사라지는 듯해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남기고 있다. 또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여운으로 남는다. 어떤 만남은 스쳐 지나간 것 같아도 상대의 마음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 흔적이 모여 역사가 되고 관계가 되고 한 사람의 삶을 증언한다. 작년 겨울, 두바이에 있는 사막을 찾아갔다. 샤르자의 붉은 노을이 수평선을 물들이는 곳에서 우리 일행을 태운 차가 잠시 멈추었다. 사막 초입에서 운전기사는 차의 바퀴에서 공기를 뺐다. 바퀴는 공기가 가득 차야 평지에서는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지만 모래 위에서는 오히려 덜어내야 한단다. 그래야 모래 속에 빠지지 않고 사뿐히 미끄러지듯 달릴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단단히 채워져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기 때문이다. 공기가 꽉 찬 바퀴는 평지에서는 강점이다. 하지만 사막에서는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는 사람의 마음과도 같다.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은 쉽게 지치고 무겁게 멈추지만, 잠시 비우고 숨을 고르면 새로운 힘이 생긴다. 나는 여러 번 그 사실을 잊었다가도 바퀴를 보며 다시 떠올리고는 한다. 바퀴는 내게 삶의 무게를 견디는 힘과 비울 때 비로소 얻는 자유를 가르쳐 주었다. 열정과 목표로 가득 채워야 할 때가 있지만 내려놓고 비워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공기를 채운 채 사막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려 한다면 오히려 모래 속에 발이 묶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평지인지, 사막인지, 내 삶의 지형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흔적을 남기되 집착하지 않는 겸허함과 순환 속에서 연결되는 의미를 찾는 것을 바퀴는 내게 조용히 일러주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바퀴의 바람을 덜어내듯 마음을 고르는 것이다. /정미영 수필가

2026-05-06

잉카의 침묵 앞에서, 나는 나를 만나다

리마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사람은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보고 왔는지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쿠스코와 마추픽추, 티티카카와 라파스, 우유니의 거친 바람과 안데스의 높은 하늘을 지나온 40여 일의 여정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잉카 문명을 향한 설렘이 나를 이끌었지만, 돌아오는 길의 내 마음을 채운 것은 찬란한 유적에 대한 감탄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된 돌들의 침묵 앞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내면의 질문들과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가족 생각이 먼저 밀려왔다. 중학생 손녀의 재잘거림과 돌 지난 손자의 해맑은 웃음이 떠오르자, 길 위에서 쌓인 피곤함도 어느새 따뜻한 기쁨으로 바뀌었다. 손주란 할아버지에게 삶에 지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는 정신의 비타민과 같은 존재다. 그리움은 참으로 이상하다. 먼 문명의 폐허를 보고 돌아오는 길 끝에서, 사람은 다시 가장 가까운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안데스의 바람이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단지 낯선 나라를 둘러본 것이 아니었다. 익숙한 생활과 관계, 책임과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것은 자발적 고립을 통한 성찰의 시간이었다. 혼자 걷고, 혼자 바라보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풍경보다 더 깊은 것을 보게 되었다.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시선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멀리 떠난다는 것은 때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가기 위함이다. 안데스산맥의 품 안에서 만난 잉카 문명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해발 높은 산악지대에 도시를 건설하고, 계단식 농업을 일구며, 거대한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리게 한 기술은 경이롭다는 말로는 다 담기 어렵다. 돌 하나하나가 단순한 건축 재료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끈기와 질서, 헌신을 품은 상징처럼 보였다. 척박한 자연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이해하고 극복하며 문명으로 일구어 낸 사람들. 그 폐허 앞에 서면 누구라도 숙연해진다. 무너진 제국의 흔적 앞에서 내가 본 것은 멸망의 잔해만이 아니라, 한때 인간이 얼마나 높이 꿈꾸고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냈는가를 보여 주는 정신의 높이였다. 그런데 그렇게 강하고 정교했던 문명이 불과 백 년도 채 되지 않아 스페인의 소수 정예군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은 깊은 충격을 남긴다. 왜 그토록 찬란했던 제국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질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그 답의 한 부분을 자연의 이치 속에서 찾게 되었다. 흐르지 않는 물은 결국 썩는다. 처음에는 맑아 보여도, 오래 고이면 생명을 잃는다. 문명도 마찬가지다. 외부와의 교류가 끊기고, 새로운 변화에 응답하는 힘이 약해질 때 문명은 내부에서부터 굳어 간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했듯, 문명은 도전과 응전 속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잉카는 천연두라는 보이지 않는 재앙 앞에서, 낯선 무기와 종교,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라는 거대한 도전에 충분히 응전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더구나 황제를 정점으로 한 절대적 중앙집권 체제는 평소에는 강점이었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한 사람의 붕괴가 곧 제국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심장이 멈추자 거대한 몸 전체가 함께 흔들렸다. 이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교훈을 준다. 개인, 조직, 사회 모두 지나치게 하나의 방식, 하나의 질서, 하나의 성공 경험만을 고집할 때 취약해진다. 진정한 강함은 단단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변화 앞에서 자신을 조정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오래간다. 잉카 문명의 멸망은 과거의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조용하지만 단호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잘 흐르고 있는가. 나는 내 생각과 습관, 경험과 고집 속에 나 자신을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가. 나는 변화 앞에서 깨어 있는가. 닫힌 세계는 결국 무너진다. 흐르지 않는 삶은 결국 멈춘다. 문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도, 사회의 질서도, 관계의 생명력도 모두 그렇다. 이번 여행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그것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게 했다는 점이다. 나는 세상을 보러 갔지만, 결국 세상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혼자 걷고, 높은 고원의 침묵 속에 머무르며, 나는 일상 속에서는 미처 듣지 못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자발적 고립은 외로움이 아닌, 내면을 정화하는 시간이었다. 사람들로부터 잠시 멀어졌기에, 오히려 나는 나 자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성찰의 행위다. 낯선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익숙한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깊은 축복인지도 모른다.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느끼게 하고,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웰니스의 조용한 통로이기도 하다. 몸이 길 위를 걷는 동안 마음은 오래 묵은 피로를 비워내고, 영혼은 잊고 지냈던 질문들을 다시 길어 올린다. 웰니스란 단지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관계와 영혼이 다시 균형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라면, 진정한 여행은 그 균형의 회복을 돕는 깊은숨 고르기와도 같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6-05-05

아동학대, ‘정치·경제 아노미’의 부산물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정치·경제적 혼란이 주도하는 아노미(무규범) 상태로 병들어 가고 있다. 민주당의 입법독주로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시스템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대다수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삼성전자 노조는 1인당 7억원의 성과급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권력에 의해 법과 도덕이 붕괴되고, 대부분 국민이 빈부격차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며 살맛을 잃고 있으니 그야말로 온 사회가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정치·경제적 아노미는 극단적인 사회병리 현상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일차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동학대’다. 가장 쉬운 분풀이 대상이 가까이 있고 힘없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아침에는 TV를 켜니 자신이 낳은 생후 8개월 된 아들의 머리를 리모컨으로 때려 숨지게 한 비정한 30대 엄마(경기도 시흥시)가 구속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잠을 자지 않고 칭얼대 이런 짓을 저질렀다니 충격적이다. 아마 아이를 둔 모든 부모가 이 뉴스를 듣고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다. 대구에서도 지난 3월 25일 생후 42일 된 아이를 때려 숨지게 한 30대 친아버지에게 징역 13년 형이 선고되는 사건이 있었다. 선고 공판이 열리던 당일에는 대구지방법원 앞에 아이를 추모하는 근조화환이 길게 늘어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한 시민은 “‘남 일이다’ 외면하지 마시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린다”는 추모글을 남기기도 했다. ‘아노미 사회’의 부산물인 가족해체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아동학대 사건 건수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학대 내용도 잔인해지는 추세다. 부모들의 반복된 학대로 숨진 아이가 최근 5년간 207명이나 된다. 매년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50명에 이른다고 한다. 대구에서도 지난해 아동학대 신고 건수가 1700건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실제 아동학대로 판정된 634건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신체학대(313건)’가 가장 많았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서범수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주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학대 의심 신고가 두 번 이상 접수된 아동이 6795명에 이른다. 신고가 접수된 전체 아동 4만3050명 가운데 15.8%에 해당한다. 세 차례 이상 신고된 아동도 2433명이었고, 114명은 열 번 넘게 신고가 접수됐다. 이처럼 아동학대가 구조적인 사회병리현상으로 굳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그동안 이를 너무 경시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동학대 사건은 사회가 방관하게 되면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사회학자 중에는 지난 2024년 12월 3일 밤 발생한 6시간의 악몽 같은 비상계엄 사태가 우리 사회를 극단적인 아노미 상태로 몰아가는 기폭제가 됐다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정치 아노미’라는 용어가 생긴 이유다. 실제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시작된 민주당의 일방적인 사법 질서 파괴는 우리 사회의 상식과 법적·도덕적 규범을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5-05

가정의 달

5월을 가정의 달이라 부른다. 어린이날을 비롯해 어버이날, 스승의날, 성년의날, 부부의날 등 가정과 관련한 행사가 많이 있는 달이어서 그렇게 부른다. 1993년 UN은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지정했다.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건강한 가정을 위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적극 참여를 하자는 취지로 만든 날이다. 이후 세계 각국은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지정하고 각종 행사를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듬해부터 가정의날을 기념해오다 2004년부터는 법정 기념일로 정했다. 가정은 전통적으로 부부와 자녀 중심의 집단을 말하나 시대 흐름에 따라 현대 사회에 와서는 동거 여부와 관계없이 포괄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유교 문화권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가정의 교훈이다. 유교문화에서는 개인보다 가정, 가정보다는 사회 질서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출발점이 화목한 가정에 있다는 뜻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 역시 가정의 화목이 바탕이 돼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뜻으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덕목이다.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 사상가 몽테뉴는 “왕국을 통치하는 것보다 가정을 다스리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을 했다. 가정의 화목이 기초가 된다는 동양권의 수신제가와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성경에서도 “마른 빵 한조각을 먹으며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어 사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가정은 사회 구성의 최소 단위이지만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근본이다. 모든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애가 충만하고 행복한 가정의 달이 되길 기원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5-05

결혼, 가문과 가문의 만남

‘삶은 선택과 도전의 연속이며, 자기 창조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선택은 ‘배우자 선택’이다. 인연은 하늘에서 내리고 그 관계는 사람이 만든다.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보다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다. 한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온다는 것은 한 사람의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가문,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일종의 ‘문화 결합’에 가깝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이 결합을 ‘며느리의 일방적 적응’이라는 방식으로 풀어왔다. 시대와 문화의 흐름에 따라, 기성세대와 MZ세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사회적 문제가 나타난다. 삶의 가치관 차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갈등 등 세대 변이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야기된다. 이 시대의 결혼 문화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과거의 좋은 며느리는 묵묵히 참고, 시댁의 질서에 순응하고, 자신의 생활 방식을 뒤로 미루는 사람으로 정의되곤 했다. 이러한 기준은 현대의 가족 구조와 충돌한다. 맞벌이, 개인의 자율성, 사회적 여성 지위, 관계의 평등성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은 지금, 일방적인 희생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한 해법이 아니다. 오늘날 좋은 며느리 상은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역할은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관계를 참는 것이 아니라 조율한다. 첫째, 시부모와의 관계에서 기대와 한계를 분명히 하고, 원칙을 중심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갈등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갈등 구조를 정리하는 적극성이 중요해졌다. 둘째, 균형 감각을 지닌다. 친정과 시댁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가족 전체의 안정과 조화를 고려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단순 중립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셋째, 배우자와 팀워크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시댁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 공동의 문제로 바라보고, 중요한 결정은 함께 내린다. 며느리는 홀로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가족시스템 안에서 협력하는 구성원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실제 가정의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명절 노동을 둘러싼 갈등을 가족 회의를 통해 역할 분담으로 나뉜다. 시부모의 육아 개입을 지원자 역할로 재정의 하고, 제사와 가족 모임을 간소화하며, 새로운 가족 문화를 만들어 가는 등의 공통점은 하나다. 갈등을 개인의 인내로 해결하지 않고, 구조의 문제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질문은 ‘좋은 며느리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좋은 가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다. 며느리 한 사람의 덕목만으로 건강한 가정이 유지되던 시대는 지났다. 시부모의 태도, 배우자의 책임, 가족 전체의 문화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며느리는 그 안에서 희생자가 아니라 설계자의 역할을 맡는다. 가정은 더 이상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작은 사회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힘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적응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율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좋은 며느리’란 좋은 가족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정의되는 이름인 것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5-05

별미(別味)

주변에서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여자 셋이 여행을 가면 꼭 한 명은 소외되거나 싸우게 마련이다, 평소에 아무리 친해도 여행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등의 우려 섞인 조언들이 가방의 덤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걱정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일본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잠시 벗어나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오로지 ‘나’로서 그리고 ‘우리’로서 마주한 첫 여정이었다. 그것은 익숙한 집밥을 떠나 낯선 이국의 별미를 마주할 때의 짜릿한 긴장감과도 같았다. 일본의 복잡한 노선도 앞에서 나는 길잡이를 자처했다. 유창하지 못한 실력이었지만 손짓과 발짓을 섞어가며 역무원에게 묻고 또 물었다. 혀끝에서 맴도는 서툰 단어들이었으나 뒤에서 나를 믿고 따라오는 두 친구의 존재가 나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환승 플랫폼을 찾아 헤매고 구글 지도를 돌려보며 낯선 골목을 누비는 과정조차 우리에게는 하나의 유희였다. 길을 잃으면 어떠하랴, 우리 세 사람의 발길이 닿는 그곳이 바로 목적지인 것을. 타자와의 동행은 언제나 자기 세계의 균열을 전제로 하지만, 이번 여정은 그 균열 사이로 오히려 눈부신 교감이 범람하는 경이로운 합주였다. 우리는 각자의 고유한 결을 유지하면서도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절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우정이라는 이름의 유대감을 더욱 견고하게 길어 올렸다. 낯선 이국의 풍광은 그저 부차적인 배경일 뿐, 정작 우리를 고양시킨 것은 서로의 결핍을 메워주는 배려와 그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찰나의 웃음들이었다. 익숙한 일상의 궤도를 이탈하여 조우한 낯선 연대(連帶)는 고착화된 중년의 삶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여행지에서 음식을 고르는 일은 때로 고역이 되기도 한다. 특히 한 친구는 갑작스러운 두드러기 증상 때문에 현지 음식보다는 한국 음식을 먹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미안해하는 친구의 손을 잡고 우리는 기꺼이 한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녀는 미안함을 ‘기록’으로 승화하였다. 자신의 얼굴을 담기보다 렌즈 너머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 길었던 친구는 “얘들아, 저기 서봐! 지금 빛이 너무 예뻐”라고 외치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녀의 배려는 우리의 식탁 위에, 그리고 핸드폰 갤러리 속에 영원히 박제된 온기로 남았다. 또 다른 친구는 마치 마법사의 가방을 지닌 만물상 같았다. 호텔 실내화의 불편함을 예견하여 챙겨온 여분의 슬리퍼, 짐이 늘어날 것을 대비한 보조 가방, 심지어 예기치 못한 상황을 대비해 챙겨온 여유 자금까지. “혹시 이거 있어?”라는 물음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가방에서는 정답 같은 물건들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치밀함 덕분에 우리는 타지에서의 불편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온전히 즐거움에만 침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여정을 지탱해 준 가장 견고한 안식처였다. 하루의 끝과 시작을 우리는 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뿌연 수증기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십사 시간을 붙어 지내며 발견한 서로의 새로운 단면들이 있었다. “너는 이런 습관이 있었구나”, “너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구나.”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의 세계에 깊숙이 발을 들이는 일임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니 우리의 여행은 잘 짜인 삼중주였다. 부족한 언어와 여정의 조율로 앞장선 나, 배려의 시선으로 우리를 담아낸 친구, 빈틈없는 준비로 우리를 채워준 친구. 누구 하나 욕심내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였기에 여행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길을 묻다가 터져 나온 폭소, 잘못 탈까봐 노심초사한 기차 안에서 나누던 농담, 편의점 간식 하나에 아이처럼 기뻐하던 순간들. 그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일본의 낯선 공기를 타고 경쾌한 파동으로 번져나갔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 든든한 집밥이라면, 친구들과의 이번 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이국의 별미였다. 익숙함 속에 숨겨진 새로운 맛을 보고 나니 인생이라는 긴 여정 자체가 조금 더 가볍고 경쾌해진 기분이다. 우리는 세간의 우려와 달리 서로의 소중함을 재확인하며 더 깊은 우정의 닻을 내렸다. 세 사람의 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던 이번 여행을 뒤로하며 벌써 다음 식탁을 고대한다. 삶이라는 허기진 길 위에서 또 어떤 낯설고 맛깔스러운 풍경을 함께 나누게 될지, 벌써부터 혀끝에서 기분 좋은 군침이 돈다. /김경아 작가

2026-05-05

노동절 부활에 즈음하여

2026년 5월 1일 대한민국에서도 마침내 ‘노동절’이 부활했다. 세계 모든 나라 노동자들이 축제를 벌이며 쉬는 노동절에도 한국 노동자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행정당국은 노동자들의 호칭마저 왜곡하여 ‘근로자’라 불렀다. 노동을 노동이라 하지 못하고,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에 ‘노동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희극적인 상황을 초월한 아이러니 자체다. 1886년 5월 1일 시카고에서 8만이 넘는 노동자가 거리 시위를 벌인다. 그들은 하루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교육을 기치로 내걸고 투쟁한다. 시카고 외에도 미국 전역에서 3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보장하라는 시위를 벌인다. 1889년 7월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5월 1일을 국제적 기념일로 결정했고, 이것이 현재의 노동절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5월 1일 조선 노동자 2천여 명이 모여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등을 주장하는 강연회가 한국의 노동절 행사 효시다. 이승만은 대한노총 창립기념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지정하여 1959년부터 기념행사에 들어간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3년에 노동절을 대신하는 ‘근로자의 날’을 선포하여 이듬해부터 실행한다. 사전적 의미를 살피면, 노동은 ‘육체와 정신을 써서 일하는 것’이며, 근로는 ‘힘들여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다. 근로는 노동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고용주의 바람과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다. 1980년대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노동계의 ‘5월 1일 노동절’ 개정 요구가 거세진다. 그 결과 김영삼이 날짜만 바꿔서 1994년부터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선포한다. 작년 11월 11일 국회를 통과한 ‘법률 제21134호’가 공포됨으로써 2026년 노동절은 136주년 세계노동절이자 동시에 한국의 법정 기념일로는 ‘제1회 노동절’이 된 것이다.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맞는 노동절의 감회가 나로서는 다소 남다르다. ‘호부호형(呼父呼兄)’ 하지 못해 집을 나가야 했던 홍길동 생각이 느닷없이 떠오르는 심사는 또 뭐냔 말이다. ‘근로’라는 말에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어휘는 ‘근로 정신대(勤勞 挺身隊)’다.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군수공장과 방직공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던 한국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 근로 정신대다. ‘노동’이라는 좋은 어휘를 놔두고 굳이 제국주의 일본이 애호하던 ‘근로’라는 표현을 관철한 박정희 일당의 흉중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지금도 자못 궁금하다. 위나라 왕에게 등용되면 무엇을 먼저 하시겠느냐는 자로(子路)의 물음에 공자는 “이름을 바로잡겠다(필야정명호(必也正名乎)”고 일갈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육단(六段) 논법이 등장한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못하고, 예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며,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면, 백성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논어, ‘자로편’ 참조) 103년 만에 비로소 제 이름을 얻은 ‘노동절’이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날이 되었으면 한다.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기념일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성숙한 대한민국을 기원한다.

2026-05-03

상대적 박탈감

상대적 박탈감과 비슷한 말로는 질투를 들 수 있다. 질투가 개인적인 감정을 강조한 표현이라면 상대적 박탈감은 질투를 유발케 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정치인이나 우리 사회 상류층이 저지르는 부정부패나 특혜를 보고 느끼는 분노, 불쾌감 등도 일종의 상대적 박탈감이다. 사전은 “다른 대상과 비교해 권리나 자격 등 당연히 자신에게 있어야 할 어떤 것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라 설명한다. 자신은 실제로 잃은 것이 없지만 다른 대상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상대적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잃은 듯한 기분을 의미한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고 한다. 서양 속담도 “남의 집 잔디가 더 푸르다”는 말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정서는 인간이기에 있을 수 있다. 최근 주식이 활황을 보이자 주식을 하지 않는 많은 국민이 소외감 내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2년 전 통계지만 국내 주식 보유자 중 상위 1%가 가진 주식이 전체 금액의 53%를 차지한다고 했다. 지금도 이런 흐름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스피 지수 6000을 넘어서자 한국증시 폭주에 환호를 보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주식 호황으로 혜택을 보는 국민은 그리 많지가 않다. 특히 지금처럼 내수시장이 뒷걸음치고 있는 상황에서 주식시장의 활황은 일부 국민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더 안겨줄 소지가 있다. 지난해 4분기 기준 우리나라 적자가구는 네 명 중 한 명꼴로 조사됐다. 적자가구란 소득보다 소비지출이 더 많은 가구다. 주식시장 활황이 과거 부동산 불패 신화가 낳은 상대적 박탈감의 재현은 되지 말아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5-03

우리는 왜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가

어느덧 봄이 우리 삶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계절은 어느새 연초록 잎을 틔우며 신록의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는 단순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자연의 질서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필연이라면, 사회의 변화는 인간의 선택과 의지의 산물이다. 법과 제도, 관습을 바꾸는 노력 속에서 사회는 발전해 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정치가 있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그 기준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인의 능력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과 수준 높은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사람이다. 말은 생각의 표현이며, 결국 행동으로 이어지기에 정치인의 말이 가벼워지면 신뢰는 무너진다. 정책은 더 중요하다. 세상을 바꾸는 구체적 방법이자 실행 전략이 정책임을 우리는 그간 과정을 통해 충분히 습득해 왔다. 둘째는 정치인의 자질이다. 정치철학자 막스 베버는 자신의 저서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의 요건으로 소명 의식, 균형감각, 책임감을 제시한 바 있다. 소명 의식은 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자 답이며, 균형감각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 판단력이다. 책임감은 국민을 향한 봉사 정신이자 공직자의 기본자세다. 셋째는 정치인의 역할이다. 정치는 현재를 관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정치인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즉 비전을 보여주고, 그 비전에 도달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다가오는 6·3 지방선거는 이러한 기준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기회다. 유권자는 정치인을 선택함에 능력과 자질 그리고 역할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우정이나 친분 그리고 호감에 기댄 선택은 정치의 순기능을 저해한다. 지역주의와 관계주의 중심의 폐쇄적 선택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아울러 선거가 임박할수록 후보자의 공약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목표가 불분명하거나 실행 가능성이 떨어지는 공약은 조심해야 한다. 당장은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은 개인과 도시 그리고 국가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함을 불 보듯 뻔하다. 외모는 성스럽고 좋아 보이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흰색 코끼리’를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이렇게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정치는 주권자인 국민의 의지를 대신하는 대리 시스템이다. 따라서 선택이 잘못될 경우, 국민은 대리인에게 통제받는 ‘대리인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결국 좋은 정치인을 선택하는 것은 나와 도시의 더 나은 삶을 향한 기본적인 책임이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파울루 네루다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는 명언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어떤 정치인이 미래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유권자의 냉철한 이성과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심학봉 전 국회의원

202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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