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5월은 국가폭력에 관한 기억으로 점철되는 시기인 것 같다. 80년 5월 광주도 그렇지만, 91년 5월 투쟁도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 비해 잘 기억되지는 않지만 91년 5월 투쟁도 시대의 전환을 알린 중요한 사건이었다. 1991년 4월 26일 대학생 강경대의 죽음으로부터 6월 29일 범국민대책회의가 명동성당 농성을 해제하기까지 약 60일 동안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전국에서 열린 대중 집회와 시위,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91년 5월 투쟁은 ‘분신’과 ‘의문사’, ‘백골단의 쇠파이프’와 ‘지랄탄’, ‘유서’와 ‘부검’, ‘장례’와 ‘추모’ 등으로 상징되는 공안 통치의 폭력(성)이 수많은 죽음을 양산한 사건이기도 했다. 짧지 않은 투쟁의 시간 동안 13명의 열사가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한국 사회가 2~3일 간격으로 국가권력에 의한 타살을 목도해야만 했었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했다.
국가폭력에 대한 이 거대한 저항은, 당시엔 87년 6월 항쟁의 반복(제2의 6월 항쟁)으로 의미화되기도 했지만, 심각한 차이도 인식되고 있었다. 운동을 촉발한 공안당국의 야만성이 훨씬 노골화된 상태에서 현상한 이유에서였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는 밀실에서의 고문과 시위대를 향해 쏜 최루탄에 희생되었지만, 강경대 열사는 백주 거리에서 정경들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것이었다. 민주화 이후에 벌어진 폭력과 죽음이었기에 사회적인 충격은 더 컸다.
‘열사의 죽음’과 ‘분신 정국’, 91년 5월 투쟁에 관한 정치 공방이 죽음을 둘러싼 상징 투쟁의 양상으로 이어진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일견 예견된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91년 5월 투쟁이 실패의 역사로 기억되거나 기록되는 이유에도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실존적인 의식이 선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1년 5월 투쟁은 ‘80년대적’인 운동과 투쟁의 ‘마지막 불꽃’이었으며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일종의) 분기였는데, 그 분기의 결절(結節)에는 ‘죽음으로부터의 실존적인 도피’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1980년대의 운동과 저항은 수많은 형태의 죽음에 의거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80년대적인 것’의 상징적·실존적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을 희구했던, 전도되고 오인된 다분히 사회(사)적인 인식의 이행 속에서 1990년대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영위하는 ‘삶’이란 수많은 타인들의 ‘죽음’에 빚지고 있다. 자유롭게 누린다고 상상된 일상도 무수한 저항과 희생 위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봐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애도’는 언제나 중요한 국가적·사회적 과제가 아닐까 싶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애도란 떠나간 자들과의 단절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단절의 불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 바 있다.
희생 이후, 지속되는 슬픔과 우울에서 출발하는 애도는 언제나 이미 우리의 삶이 누군가의 뒤에서 살아남는다는 의미의 ‘생존’으로 새롭게 정의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희생된 자들의 죽음과 상실을 그대로 간직한 채 ‘베인 흉터’를 가지고, 남은 나날에 충실해야 한다. 상실 이후에 남겨진 우리의 삶을 위해서라도 애도는 계속돼야 한다.
/허민 문학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