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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계엄 이후의 민주주의

어두운 시절의 철 지난 유품처럼 여겨졌던 계엄을 목도한 지도 벌써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문학으로 비유하자면 삼류 소설이자 흔한 졸작조차 되지 못할 어설픈 국가 폭력의 시도를 떠올리면 지금도 어안이 벙벙하다. 내란 종식에는 한 치의 타협도 있을 수 없건만 별의별 사족들이 왜 그렇게 달리는지 모르겠다.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 아닌가. 계엄을 선포한 자나 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이들의 위증을 지켜봐야 하는 일도 고되다. 조속히 응분의 대가를 받길 바랄 뿐이다. 요즘 들어 출근길 지하철 역사의 안내방송이 눈에 밟힌다. “특정 장애인 단체의 불법 시위로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식의 내용이다. 불법이라는 이름으로 장애인 농성의 의미를 축약할 수 있을까. 법대로 소수자들의 권리가 쟁취되는 꼴을 여태껏 보고 들은 경험이 없다. 직장이나 학교에 조금 늦는 일도 각자의 일상에서 작지 않은 손실일 수 있겠지만, 남은 생애를 바쳐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에도 귀를 좀 열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쿠팡 새벽 배송에 관한 논란들은 어떤가. 야간 근무에 시달리다 사망한 노동자의 죽음을 뒤로하고, 나름 배웠다는 정치인도 그들의 선택이었음을 강조한다. 노동권의 자발적 행사였으면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건가. 그런 논리면 자살 방지 대책 같은 것들도 쓸모없는 일이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자들을 정부나 지자체에서 왜 챙기려 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계엄 이후의 민주주의는 불법이라 호명되는 소수자들의 행진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수호되는 노동자의 죽음에 천착하는 태도로부터 비롯되지 않을까 한다. 민주주의란 본래 소란을 의미한다. 질서의 반의어라는 말이다. 계엄 이전에도 윤석열 정권은 ‘입틀막’으로 버티고 있었다. 독재는 고요한 법이다. 권력에 반하는 무수한 말들을 억누르는 힘의 강제야말로 전횡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주의란 사회에서 자신의 몫이 없다고 간주되던 자들이 여기저기서 자기의 권리를 주창하고 나서는 사태를 의미한다. 숨죽이며 지내던 이들의 목소리로 세상이 분란할 때야말로 민주주의를 실감할 수 있는 적기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어떤 이들의 목소리와 행동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연히 퀴어 축제나 장애인 시위, 노동자 파업이 불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굳이 자신들의 주장을 왜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며 해야 하느냐는 성토도 이해 못 할 건 아니란 거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불편 따위가 무슨 큰 대수인가 싶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바쳐 행해야만 하는 과제가, 다른 누군가에겐 그저 ‘남의 일’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용인하면 되겠나. 사회란 그렇게 굴러가서는 파멸할 뿐이다. 따라서 계엄 이후의 민주주의는 어쩌면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는 일로부터 쟁취될 수 있는 것 아닐까. 학창 시절에는 지겹게 듣던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표어가 여전히 유효한지 모르겠다. 분명 우리의 곁에는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비)존재들이 있다. 이들의 삶과 죽음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을 때, 계엄을 해제하며 소망하던 그런 민주주의가 비로소 당도하지 않겠는가 싶다. /허민 문학연구자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2-04

재벌의 언어

요즘 들어 주식 시장의 변동만큼이나 재벌들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 타결 이후, 이재명 대통령을 향한 기업 총수들의 찬사에서 주목된 건 그 내용보다는 그들의 언어 그 자체 아니었을까? 그만큼 대중의 귀에 재벌의 언어와 소리가 가닿는다는 사실은 여전히 이채로운 일로 여겨지곤 한다. 가령 서울 한복판에서 재벌들이 치킨을 먹었다는 사실만큼 놀라운 건 그들의 ‘먹방’ 소식을 듣고 모여든 수많은 인파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나타나자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했다. 마치 대선 유력 후보의 연설 현장 같기도 했다. 물론 이런 열광은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다. 글로벌 기업을 이끄는 리더이자 세계 최고의 부자들 아닌가. 저들이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너를 향한 대중의 선망하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것도 없다. 안타까운 현상일지라도 말이다. 다른 한편 재벌의 삶만큼 철저하게 미지의 세계가 있을까 싶다. 이재용 회장은 자신의 모습을 담으려는 대중을 향해 “아이폰이 너무 많다”며 너스레를 놓기도 했다. 아마 대다수는 재벌 총수의 농담을 처음 들어봤을 거다. 그만큼 재벌의 언어는 알려진 바가 없다. 지난 ‘치맥 회동’이 색다르게 느껴졌다면 재벌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것을 먹고 마시며 지낸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게다. 당연한 일일 텐데도 우리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 거라고 상상해 온 건 아니었나 싶다. 당연히 이런 상상에는 출처가 있다. 매체에서 재현되는 재벌 일가의 행태가 대체로 그렇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는 재벌들의 ‘속사정’에 대한 ‘지레짐작’에서 비롯된 양식이다. 재벌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화된 이미지들만 넘칠 뿐 실제 그들의 말과 언어를 들을 기회는 없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들의 일상을 다룬 소설에 비해 재벌의 세계를 다룬 작품은 거의 없다는 것도 이해 가능하다. 작가들 역시 재벌의 생활을 알 도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난쏘공)’은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다. ‘난쏘공’ 연작은 주로 도시 빈민이나 노동의 측면에서만 다뤄졌으나, 사실 이 작품에는 재벌의 세계가 중요하게 담겨 있다. 한국소설에서 재벌이나 사장은 탐욕의 화신으로 전형화되어 왔는데, ‘난쏘공’에서는 재벌 2세의 불안정한 사생활과 그로 인한 방황과 회의 등의 정서가 핍진하게 그려진 것이다. 이는 1970년대 한국 자본주의가 강남 개발과 부동산 투기, 관치금융 등을 통해 ‘토건’과 재벌 중심의 경제로 재편된 현실과도 상통하는 서사였다. 무엇보다 ‘난쏘공’은 ‘노동자의 눈에 비친 재벌’과 ‘재벌의 눈에 비친 노동자’의 교차를 통해 각자의 관점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 작품이 재벌 2세를 살핀 이유도 여기 있다. 생활세계에서 쉽게 식별할 수 없는 재벌의 존재를 후경화하면서도, 그들의 후계자를 내세움으로써 재벌에 대한 이해의 재구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맥 회동’을 계기로 재벌에 대한 인식의 차원이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삶에 대해 궁금하다면 우선 ‘난쏘공’을 권하고 싶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11-20

문학의 불편

대학에서 문학 수업을 하다 보면 작품이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을 만날 때가 꽤 있다. “주인공이 부도덕한 것 같아요.”, “이건 패륜 아닌가요?”, “너무 암울해요.” 등등. 가령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대표작 ‘채식주의자’만 해도, 명성에 비해 막상 읽어보니 심히 충격적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그럴 때마다 수강생들에게 “작품을 볼 때 마치 재판관이 된 듯 보지 좀 말라”라고 말을 하곤 하는데, 납득시키기까지 매해 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문학을 읽는다는 행위는 근본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살면서 형성해 온 나름의 가치관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며, ‘세계 내 존재’인 자기의 한계를 마주하는 경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사회에 강한 규정력을 행사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반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한계를 지시하며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대체로 읽고 싶은 것만 읽는다. 물론 이는 요즘의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것’과 상통하는 행위이다. 보기 싫은 것은 그저 못 본 척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는 지적 태만에 다름 아니다. 알고리즘과 추천 시스템에 익숙해져 버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복컨대 문학을 읽는다는 건 읽을 생각이 없었던 내용과의 조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内田樹) 역시 텍스트 읽기의 본연을 여기서 찾은 바 있다. 즉 진정으로 읽는다는 건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가 아닌 ‘무엇을 보고 있지 않은가’ 혹은 ‘무엇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지’를 전경화하는 실천일 수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에서 ‘읽으려고 하는 것’과 애써 ‘읽지 않으려는 것’ 사이의 긴장과 알력을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텍스트 독해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주체적 읽기를 수행하면 텍스트는 ‘자기 일탈’을 한다고 한다. 이때 텍스트의 자기 일탈이란 마치 독자가 독서를 통해 ‘읽을 생각이 없었던 말’과 만나듯이 텍스트는 ‘말할 생각이 없었던 말’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독자가 읽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 텍스트에 노출되고 텍스트가 말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 독자에게 감지된다. 이런 만남의 방식으로 텍스트의 자기 일탈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물론 텍스트의 자기 일탈이란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굳이 모험적인 읽기를 시도하는 독자로부터 말 걸기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텍스트의 자기 일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문학 읽기에 관한 신비로운 해석이 아니다. 우리는 똑같은 작품을 보아도 똑같이 보지 않는다. 이런 편차는 왜 발생하나? 당연히 배경지식의 농도에 따라 감상이 다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텍스트를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에 따라 상이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 같다. 따라서 가끔은 ‘불편한 문학’을 주체적으로 읽으며,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이념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길 권한다. 이런 성찰이야말로 요즘 들어 더 필요해진 ‘능력’ 아닌가 싶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10-23

해킹과 개인정보

바야흐로 해킹의 시대이다. 통신사와 카드사는 물론 국가 기관조차 해킹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듯싶다. 기술의 진보에는 사고가 수반되기 마련이라지만 해킹은 개인정보를 노리는 의도적인 범죄 행위이기 때문에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정보화 사회의 그늘’쯤으로 여기면 안 된다는 뜻이다. 사실 해킹 피해 관련 보도는 쏟아지면서도 정작 누가 이런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 것 같다. 글로벌한 해커 집단이 지목되기도 하지만 쉽게 특정하기 어려운 사정도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그만큼 가해의 회로가 복잡하기 때문일까? 해킹의 구조와 해커에 대해서도 더 대중적인 앎과 지식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해커에 대해 논하기 전에 개인정보의 빅데이터화에 대해서는 짚어둘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여러 플랫폼 사이트를 통해 개인 메일이나 클라우드 서버 등을 무상으로 제공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구글로 대표되는 빅테크 기업에서는 개인정보 제공 동의를 사실상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개인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온라인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 정보화되고 그러한 정보의 독과점에 모두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 자의와 타의를 구분키 어려운 지점에서 개인정보의 빅데이터화는 이루어진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세드릭 뒤랑은 오늘날 디지털 생산의 기초가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대해 독점적인 통제를 행사하는 구조가 있고, 여기에 개인과 조직이 어떻게 의존케 되는지를 논하면서 ‘기술봉건주의’라는 시대 규정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대형 디지털 서비스는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영지’이고, 하위 주체에겐 그러한 ‘디지털 토지’에의 ‘의탁’이 강제되어 있다. 지배 세력이 경제 잉여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결정하기에, 빅테크 기업을 중심으로 의존성과 잉여의 통제가 함께 이루어지는 ‘포식의 모델’이 구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자본 수익의 극대화는 생산의 극대화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통제의 극대화에 의존하게 되었다. 기술봉건주의 시대의 문제는 개인의 주체성이 말소된다는 데 있다. 플랫폼 사이트에 가입하면서 제공하는 개인정보는 ‘위치 정보’와 ‘검색 이력’ 정도이기에 개별 단위로 보면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러한 사소한 정보가 수천만, 수억 개가 모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수히 모인 정보들, 즉 ‘행동 잉여’가 이용자의 행동 예측을 광고주에게 팔 수 있는 형태로 정리되어, 예측 상품 생산에 동원되기 때문이다. 구글로 대표되는 빅테크 기업의 입장에서 이용자 개인은 고객이 아니다. 그들에겐 광고주가 고객이고 온라인 서비스를 이용하는 우리는 원재료를 제공한 다음 몰수되는 물건에 불과하다. 즉 개인은 생산자(노동자)도 소비자(고객)도 아니고, 제공하는 개인정보조차 개별 단위로는 너무 사사로워 ‘상품’조차 되지 못한다. 이런 기술봉건주의의 현실에서 개인의 주체적 위치는 어떻게 마련될 수 있을까? 가장 긴급한 현대사회의 과제가 여기 있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10-09

PC방이란 무엇인가?

약속 시간에 이르게 도착한 김에 정말 오랜만에 PC방에 들어가 봤다. 족히 십 년은 아니, 이십 년은 넘었을 것 같은 세월 동안 너무도 많이 변해있었다. 백화점 식당 코너를 방불하는 메뉴 구성에 안마 의자인가 싶은 시트, 모니터도 40인치는 넘어 보였다. 그야말로 최첨단의 전자 놀이터구나 싶었다. 한때는 매일 살다시피 지내던 공간이었는데, PC방에서 ‘격세지감’을 느낄 줄이야. 문득 PC방의 추억(?)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알려진 대로 PC방이 한국사회에 안착한 것은 1997년을 전후한 시점이었다. 이때는 ‘IMF 사태’의 여파로 ‘명퇴’한 직장인들이 거리를 배회하던 때이며,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아이들이 집에 혼자 남겨진 시기이기도 했다. PC방은 퇴직자들에겐 소규모 투자로 창업이 가능한 아이템이었고, 아이들에겐 외로운 시간을 달랠 수 있는 위로의 공간이었다. 그러다 1998년에 이르면 PC방을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스타크래프트’가 발매된다. 미국 블리자드사에서 개발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인 ‘스타’는 PC방을 새로운 시장의 블루오션으로 떠오르게 만든다. ‘스타’ 이후, 점차 게임산업이 활성화되면서 그에 맞는 고사양의 컴퓨터가 필요해졌고, 온라인시장이 확장되면서 초고속 통신망이 설치되어야 했다. PC방은 저렴한 값으로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장소로 떠올랐다.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오락실이나 당구장 대신 PC방을 찾았고, 전국의 PC방 관련 사업자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PC방은 온/오프라인의 접경지역이자 ‘사이(間)’ 공간이다. 교실의 패거리들은 온라인 세계에 함께 접속하기 위해 물리적인 장소에 공존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감각을 형성하고 있었다. 온라인게임에서 자신의 아바타가 위기에 처하면, 육성으로 “헬프(HELP)!”를 외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이는 오프라인에서의 인적 관계망이 온라인상의 네트워크로 이행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자, 현실적인 정체성을 게임 아바타에 쉽게 이입해버리게 하는 결과를 야기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와 드넓은 통신망을 갖추었으면서도 바로 그러한 온라인서비스를 소비하는 관행에는 현실 세계의 규칙이 별다른 고민 없이 개입 돼버리곤 했던 것이다. 물론 현실과는 너무 다른 온라인 인격이 따로 형성되는 일도 빈번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온/오프라인의 접경지대로서의 PC방이 지니는 한국적 특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즉 한편으로는 온라인서비스를 소비하는 집단적인 차원의 관행이 현실의 패거리 문화와 쉽게 접속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점차 개인화 성향이 만연해진 사회적 분위기로 말미암아 온라인 세계를 ‘현실로부터 유폐되어 있는 공간’으로 상상하게 되는 인식의 전도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PC방은 온/오프라인의 분할에 대한 감각을 매개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한국적 맥락을 보관하고 있는 ‘반(半/反)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C방에 대한 젠더화 된 경험에 천착해 보면 오늘날 남성 청년들의 보수화를 살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9-18

장기 후일담의 시대

후일담 문학이란 장르 개념이 있다. 후일담이란 말 그대로 어떤 시기가 지났다는 사후(事後)의 의식을 전제로 성립하기 때문에, 시대의 이행과 전환을 사고하려는 시도로부터 반복적으로 출몰하거나 호명되는 서사 양식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국근현대문학사에서 후일담 문학은 1980년대의 변혁운동에 관한 기억을 담은 1990년대의 문학군을 주로 통칭해 왔다. 즉 1990년대의 후일담은 1980년대, 정확히는 운동권의 경험과 실천, 논리가 함의하고 있던 정치 지평이 이제 만료해 버렸다는 다분히 의식적인 판단의 산물로 여겨져 왔다는 것이다. 후일담을 새삼 떠올린 건 지난 주말에 우연히 보게 된 MBC 예능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덕분이었다. ‘80s 서울가요제’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내용이었다. 80년대 가요를 요즘 가수들이 부른다는 콘셉트가 조금 식상하지 않나 싶었는데, 막상 노래를 들으니 나쁘지 않았다. 다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지지부진하던 시청률도 많이 올라 토요일 예능 부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사실 후일담 문학이란 작가 자신이 내세우는 개념은 아니었다. 후일담은 대체로 평단의 다소 부정적 어감을 함의한 평가 규준에 가깝다. 변혁운동으로부터 이제는 한발 물러난 운동권 출신의 허무주의와 패배 의식, 회환과 죄책감의 토로에 함몰된 장르로 평가절하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후일담에 가까운 회고의 양식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찾아오는 것 같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는 오늘날까지도 적지 않은 규정력을 발휘하는 ‘과거’의 지속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이때 그 ‘과거’란 때론 ‘87년 체제’라 불리며 정치경제적 레짐이나 실정적인 힘으로 작동하기도 하며, 때론 ‘386’ 혹은 ‘586’이라는 세대/계층 의식과 그 헤게모니에 입각한 사회사적인 의제를 형성키도 한다. 또한 ‘뉴트로’라 불리는 사회적인 현상의 배후에서 정치와 일상을 매개하는 문화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대의 오늘을 ‘장기 후일담의 시대’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1980~90년대의 정치경제적 의제는 물론 그 사회문화적 함의에까지 여전히 긴박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제는 1980년대의 변혁운동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당시의 문화적 열기에 대한 회고와 향수가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와 ‘토토가’를 비롯한 1980~90년대의 문화를 추억하거나 해당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상물들이 범람한 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는 한편으론 유튜브로 대표되는 미디어 플랫폼으로 과거 문화를 동시대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기술적 조건이 구비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정치 변혁에 대한 전망의 상실로부터 미래를 모색하지 못하고 과거의 문화적 활기를 희구하며 현재의 비참을 상상적으로 회복하려는 사회적 무의식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절에 대한 향수, 그러니까 ‘아네모이아(Anemoia)’가 상품으로 소비되는 사회에서 1980~90년대의 성취와 좌절을 어떻게 적확하고도 정당하게 마주할 수 있을지 더욱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9-04

‘윤 어게인’의 이유? - 추종의 원리

헌정사상 최초로 전직 대통령 부부가 구속됐다. 12·3 비상계엄 이래 한국 사회가 받아들여야 했던 거대한 손실을 생각하면 통쾌해야 마땅하겠으나 외려 수치심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윤 어게인’ 따위를 외치며 극우적인 행태를 보이는 자들이 제1야당을 점령하고 있는 꼴을 봐야 한다는 게 괴롭기도 하다. 한국 보수 정치의 수준이 이토록 처참했나 싶다. 대체 저이들은 어떤 이유로 구치소에 갇힌 대통령 내외를 여전히 지지하는 것일까? 무엇을 근거로 ‘윤건희’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런 광경이 처음은 아니다.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도 ‘박사모’나 ‘태극기 부대’, ‘어버이 연합’ 등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나라를 팔아먹어도 오직 한 정당만을 혹은 특정한 권력자만을 바라보겠다는 ‘어용 국민의 탄생’에 관해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를 다시금 실감하고 있다. 거의 신앙에 가까운 반지성적 추종의 원리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관해 연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지도자가 대중들의 민족 감정에 조응하여 실제로 민족의 화신이 될 때 대중들은 지도자와 개인적 유대를 생성한다고 한다. 그 지도자는 대중 개개인에게 정서적인 가족적 유대를 형성하면서 엄격하지만 보호를 제공하는 아버지상을 구현한다. 독재자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보호를 받으려는 대중의 이러한 태도와 지도자에 대한 신뢰감이라는 것이다. 이때 문제는 대중들 개개인이 ‘지도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데 있다. 보호에 대한 아이와도 같은 욕구는 지도자와 하나가 된다는 감정의 형태로 더욱 위장된다. 이런 동일시 경향이 민족적 나르시시즘, 즉 개인들이 ‘민족의 위대함’에서 빌려온 자존심의 심리적 토대가 형성된다. 이제 대중은 지도자와 권위주의적 국가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동일시에 기반하여 그는 자신이 ‘민족성’과 ‘민족’의 방어자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어버이들’ 역시 대체로 산업화의 주역으로서 자기에 대한 자부심을 ‘제왕적 카리스마’를 내세운 통치권자에 대한 순종적 존경으로 이행시키곤 한다. 나아가 바로 그렇게 형성된 지지의 확장을 역으로 자신들의 권위로 인식하는 전도된 상상에 의존하며 남은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 어게인’을 외치는 오늘날의 (특히 남성) 청년들의 정신 구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최근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공정 담론의 보수적 귀착이 문제일 수도 있겠다. 공정이란 경쟁을 사회 발전의 자명한 이치로 받아들여야만 작동하는 가치형태이다. 경쟁의 조건은 갈수록 열악해지는데, 다툼의 시장엔 상대가 너무 많다. 여성 혹은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소수자들의 사회적 지분이 과거에 비해 너무 커진 것 아니겠나. 진보 진영은 전통적으로 이런 현상을 부추길 뿐이니 가장 보수적인 세력에 대한 ‘쏠림’이 증가한다. 물론 그 보수화가 극우로 나아간다는 것은 다른 층위의 문제기도 하다. ‘윤 어게인’을 외치는 사람들의 정신구조는 학술적 의제로 다뤄져야 한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8-21

반려(伴侶)의 의미

우리 집 고양이들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다. 첫째 ‘마루’는 어느 식당에 출몰한 쥐잡이용으로 용인5일장에서 삼천 원에 팔려 왔고, 둘째 ‘보리’는 꼬리가 잘려 피투성이가 된 채 길 한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셋째’ 용이는 내가 다니던 문학관 주변을 맴돌며 방문객들의 손길과 발길질을 번갈아 맞고 있었고, 넷째 ‘송이’는 구내염에 시달리며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막내 ‘핑코’는 자기가 골목대장인 줄 알았지만 산책 나온 개들에게 종종 쫓겨 다니곤 했다. 마루, 보리, 용이, 송이, 핑코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나의 소중한 가족들이다. 나도 내가 고양이 다섯의 ‘집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도 가끔은 믿기지가 않는다. 사실 나는 동물을 좋아해 본 적도 없다. 그럼에도 이 아이들은 우연히 내게 찾아왔고, 각자를 마주한 순간들이 너무 절박했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첫째가 온 지 9년, 막내가 온 지도 벌써 4년이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나는 반려의 의미에 대해 알게 됐다. 미국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도나 해러웨이는 개를 키운 경험을 바탕으로 ‘반려종 선언(2003)’을 제시한 바 있다. 대체로 “우리는 서로를 위태롭게 만들고 남의 살점으로 존재하며 서로 먹고 먹히고 소화불량에 걸리며 살다 죽는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종이 서로 반려가 되어 살아가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창발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반려종’은 당연히 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려종이 존재하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개의 종이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반려종은 관계가 존재론의 최소 단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해러웨이는 자신과 반려견 사이의 대화와 훈련 경험을 통해 소통과 조율을 오가며 ‘서로 만들어가는 존재’가 됐다고 말한다. 개와 인간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타자로 존재할 수 있는 윤리를 알게 됐다는 것이고 이는 단순한 애정 관계가 아닌 정치적이고 철학적으로 사유되는 관계라고 말한다. 결국 ‘반려종 선언’은 인류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 간의 관계를 재구성할 것을 요청하는 의제라 할 수 있다. ‘필멸’이라는 우리 삶의 조건에서는 ‘생명 우선’이 아닌 ‘지속 우선’의 태도가 수립돼야 하며, 다른 종 간의 상호의존적 관계 맺기 만이 기후 위기와 생태적 재난 시대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죽여도 되는 종’을 끊임없이 지정해 왔다. 가령 ‘침략종’이 그렇다. 이들은 서식처나 생태 복원을 구실로 죽여도 되는 존재로 숨어 살게 된다. 이는 “특정 생명체를 위한 결정이지만 다른 생명체를 위한 것은 아니고 어떤 사람들을 위한 결정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리는 것은 아닌” 결정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생명정치가 살 가치가 있는 종과 그 외부의 타자를 구분하는 사고에 기초한다면, 그리하여 그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나치의 ‘인종청소’가 시행된 것이라면, 특정한 국면에서는 우리 자신조차 ‘죽여도 되는 종’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반려란 지속가능한 생태를 함께 이루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해러웨이만큼이나 우리집 다섯 고양이가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줬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8-07

가짜에 내기를 거는 사람들

일본의 문예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촉시적 평면에 대하여” 논한 바 있다. 여기서 ‘촉시적’이란 ‘촉각’과 ‘시각’이 결합된 복합적 감각을 의미하고, ‘촉시적 평면’은 터치패널을 뜻한다. 세계의 변화는 미디어의 변화로 감지되는데, 현대 사회는 바야흐로 터치패널의 시대라는 것이다. 컴퓨터 모니터와 TV, 영화와 같은 과거의 스크린은 출력 전용이라 만질 수 없고 만져도 내용이 변하지 않으나, 터치패널은 표시와 입력의 두 기능이 모두 가능하여, 접촉을 통해 대상을 조작할 수 있다. 즉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 것이 만연했던 시기를 지나, 이제 보이면서 만질 수도 있는 것에 익숙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이 차이에 천착한다. 스크린에서 터치패널로의 이행은 사회의 구체적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사회의 문제나 현안을 지각하는 방식이 바뀌어버렸다고 말한다. 가령 스크린의 시대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것(화면)에만 매몰될 게 아니라, 그 배후의 보이지 않는 힘(감독)을 파악하지 않으면 대상(작품)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의식이 있었지만, 터치패널의 시대에는 그 관계가 변했다는 것이다. 즉 ‘표층’의 배후에 ‘심층’이 있다거나, ‘가짜’ 너머에 ‘진짜’가 있다는 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가짜’를 ‘가짜’인 채로 만지고 조작하고 가공하여 그 조작 자체에서 쾌를 느끼는 시대이고, 심지어 ‘가짜’를 계속 만지다보면 언젠가 ‘진짜’에 도달한다고 믿는 시대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는 트럼프 현상을 예로 든다. 지식인들은 트럼프의 ‘가짜’ 이미지에 속지 말고 그 뒤편의 추악한 ‘진짜’ 욕망을 봐야한다고 했으나 이런 호소는 반대로 ‘가짜’면 어떠냐는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가짜’와 ‘진짜’의 관계가 뒤틀린, 탈진실(Post-truth) 현상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어려운 현실로 ‘부정선거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선거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선관위의 설명이나 사법부의 판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작은 의혹에 매달려 부풀리고, 사회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내걸면서 이를 받아주지 않는 현실을 자기 믿음의 근거로 다시 동원한다. 이들에게 진실이란 밝혀지거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부정선거론’의 실체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를 밑천으로 자기의 세(勢)를 키우려는 정치 모리배들과 마치 ‘부정선거론’이 사회의 중요한 의제인 양 그들의 주장을 받아써 주는 언론이 문제라 보인다. 이들은 부정선거 운운이 가짜인 것을 알지만 모른 척 계속 만지고 다루고 접촉한다. 그 가공의 결과가 미칠 사회적 악영향에 대해서는 무심한 채 정적 제거에만 혈안이다. 혹은 부정선거가 담론화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혼란으로부터 취할 정치적 이득이 있다고 믿는다. 가짜를 가짜인 채 계속 만지다 보면 거기서 일말의 진실에 도달할 거라는 사이비 소망의 출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왜 이들은 사회를, 법을, 합리를, 정치를, 사람을 믿지 못하나? 이런 현상의 배후에 터치패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짜에 내기를 거는 사람들에 관해서는 더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 같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7-24

민주적 배제와 협력적 살해

‘숨바꼭질’과 ‘줄넘기’, ‘달고나’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 열광하는 전 세계인들의 모습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인기가 한창이다. 마지막 시즌이 공개된 지 단 3일 만에 글로벌 TOP10 시리즈 비영어 부문 1위는 물론, 공개 첫 주에 93개국 차트를 석권했다. 이는 넷플릭스 사상 최초의 TOP10을 집계하는 모든 국가에서의 ‘올킬’이라고 한다. ‘오징어게임’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초상을 담았다는 평을 들어왔다. 코인 투자에 실패한 유튜버, 딸의 치료비를 구하는 화가, 성전환 수술 비용이 없는 트랜스젠더, 100억 빚의 기업가와 도박꾼 등은 각자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것 같아도 이들 대다수는 주어진 현실에 목숨을 건 요행으로 맞서야 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즉 그들은 사회의 단순한 ‘루저’가 아니라 일한 만큼 벌어서는 현재의 고난을 극복할 수 없다는 ‘흔한’ 좌절을 안고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이 한국적인(?) 오락거리를 기묘하게 펼쳐놓았으면서도 전 세계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요인도 여기 있어 보인다. 노동이 계층 상승에 대한 보편적 욕구를 충족할 수 없을 때, 혹은 복지라는 사회적 안전망이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때, 개인이 기댈 곳이라고는 도박과도 같은 요행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굴복시켜야만 하는 피말리는 경쟁 속에서 살고 있다는 동질감이 ‘오징어게임’의 글로벌 흥행 이유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마지막 시즌에는 목숨을 건 생존 게임에 합리와 공정, 토의와 민주적 절차라는 외양을 갖춘 집단적 폭력을 다루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존자가 줄어들수록 탈락자를 고르는 기준을 둘러싼 협의가 시작된다. 그들 나름대로는 민주적인 절차에 입각하여 죽여도 되는 사람을 신중하게 선별해 가는 것이다. 이때 그 선별 기준은 복잡하지 않다. 그저 남들보다 나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된다. ‘동정심’이나 ‘인간애’따위는 타인에게 만만해 보일 수 있어 저어될 뿐이다. 그야말로 ‘민주적 배제’와 ‘협력적 살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현실사회의 적확한 유비이다.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 누군가를 사회적으로 배제하자는 천박한 구호에 별의별 구실이 동원된다. 사회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성적·사회적 소수자들의 권리는 희생되어도 무방하며, 출근길을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이 부정되기도 한다. ‘갈라치기’ 정치가 혐오스러운 건, 인간의 나약한 이기주의에 편승하는 행위에 불과하면서도, 합리적이고 공정한 척하는 그 위선에서 비롯된다. 늙고 병들어서, 장애가 있어서, 국적과 민족이 달라서, 가난해서, ‘퀴어’라서 사회 제 영역에서의 경쟁에 조차 참여할 수 없는 소외된 자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은 그저 남의 사정이 될 수 없다. 그 누구라도 특정한 국면에서는 언제든 사회에서 배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생존 법칙을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오산이 ‘오징어게임’의 비참을 추동한다. 이 시리즈의 성공에는 열패 의식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7-10

‘IMF외환위기’의 문화사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이래, 한국의 경제 상황을 ‘제2의 IMF’로 수식하는 일이 빈번해진 것 같다. 국정기획위 경제1분과 첫 업무보고에서도 현재의 심각성을 ‘제2의 IMF’로 여겨달라는 주문이 있었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IMF외환위기(1997~2001)는 국가 부도에 처한 한국이 IMF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한 외환유동성 위기를 뜻한다. 당시에는 ‘IMF사태’나, ‘IMF구제금융요청’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세계적으로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로 지칭되기도 했다. IMF외환위기는 체제 논쟁을 야기할 정도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 전반의 전환을 추동한 한국현대사의 거대한 사건이었다. IMF외환위기는 이른바 ‘97년 체제’를 논의케 한 기점이 된 것이다. ‘87년 체제’가 직선제로 대표되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적 정착이라는 정치체제의 전환을 의미한다면 ‘97년 체제’는 그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발전국가를 완전히 해체하고 영미식 신자유주의를 전면화한, 전혀 새로운 경제체제라는 것이다. ‘97년 체제’는 정치학과 경제학, 사회학 등에 두루 걸친 학자들에 의해 한때 열띤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반면 IMF외환위기에 대한 문화론적 접근은 물론, 한국문학과 예술 전반이나 개인의 구체적 삶의 양태에 끼친 효과에 대해서는 잘 논해지지 않은 것 같다. 이는 IMF외환위기를 전후하여 변화한 대중의 감정·감성 구조와 일상성, 정치적 주체성과 그 양식, 윤리와 미학에 관해서 학술적으로 전혀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하지만 IMF외환위기는 한국사회의 ‘상식’과 ‘정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시민들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며 금모으기 운동에 참여했고, ‘절약’과 ‘근면’이라는 덕목을 재소환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동참하도록 요청받았다. 이 내면화된 윤리는 곧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담론과 접속하며, 개개인의 실패를 ‘노력 부족’으로 환원시키는 새로운 규율 체계로 기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실업, 빈곤, 사회적 배제와 같은 구조적 위기는 개인의 무능과 열등감으로 전유되었고, 좌절과 자책은 점차 정신질환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를 전면적으로 서사화한 장르는 단연 문학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발표된 다수의 한국소설들은 IMF 위기 이후 등장한 새로운 주체 형상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그것을 다양한 서사 형식으로 재현해왔다. 이 시기 문학은 리얼리즘이나 노동자-민중 서사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고립과 분열, 우울과 강박, 자폐적 존재감각을 중심으로 한 내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내면이란 단순히 문학의 관심이 민족이나 민중에서 개인의 문제로 이행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일상과 마음 그 자체가 정치의 장소가 되고 있는 시대 전환의 감각이 소설적으로 포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IMF 외환위기는 정치경제적 함의만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 개인의 일상과 감정·감각 등의 전환을 야기한 사건이었다. IMF 외환위기의 문화사는 더 고찰될 필요가 있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6-29

감정의 공공성

21대 대선이 이재명 정부의 탄생을 알리며 마무리됐다. 지난 선거 과정을 복기할 필요가 있을 텐데,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통계 지표가 있어 짧게 다뤄보고자 한다. 한국갤럽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을 뽑은 유권자 다수는 ‘계엄심판/내란종식’(27%)과 ‘직무/행정 능력’(17%)을 투표 이유로 꼽은 반면, 김문수 후보를 택한 사람들은 ‘도덕성/청렴’(33%)과 ‘이재명이 싫어서’(30%)였다고 한다. 비상계엄과 탄핵 이후에 이루어진 대선이었음에도, 보수 유권자들 상당수는 상대 후보에 대한 반감만으로 투표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악감정에 편승하는 정치가 출현한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언제까지 이런 혐오 사회를 방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새 정부 출범에 발맞추어, 모두가 자기감정을 돌아볼 시간을 가져봤으면 한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오쓰카 에이지는 이성과 합리가 아니라 감정의 교환이 사회를 움직이는 유일한 엔진이 되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감정 이외의 커뮤니케이션을 기피하게 되는 상태의 지속을 “감정화하는 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즉 사람들의 자기 표출이 감정의 형태로만 드러나고, 바로 그러한 감정을 기반으로 해서만 유일한 관계성이 통용되는 사회가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타인의 행위와 감정에 대한 공감이 사회 구성의 근간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세상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것보다는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나 의견을 더 많이 마주하며 살아야 한다. 감정적인 공감만으로는 제대로 된 사회가 형성될 수 없는 것이다. 분명 인간은 공감을 통해 연결된다. 그러나 공감할 수 없는 감정과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를 묻는 단계를 건너뛰고 공감이 커다란 감정으로 직결되는 것은 위험하다.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자세를 자명하게 수용하고 자기와 의견이나 생각이 ‘다른’ 차원의 지평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멀리하는 것이 사회적 태도로 성립해버리면 정치 그 자체가 실종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쓰카 에이지는 아담스미스가 말한 “도덕감정론”에서의 자기 내면의 ‘중립적 관찰자’를 강조하고 있다. 나의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직접 공명시키는 게 아니라 자기 내면에 중립적 관찰자를 두고 그것이 자신과 타인의 감정 및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고 반성적으로 돌아봐야한다는 제안이기도 하다. 사실 이 자체는 너무 당연한 삶의 자세 아닌가? 자기가 너무 ‘감정적’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두가 매번 점검하며 살고 있지 않나? 이 당연한 태도가 왜 매번 정치의 영역에서는 소실되는지도 다시금 성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을 오직 불쾌하다고만 받아들이고, 정작 그러한 불쾌함의 성격을 판단하거나 관찰해줄 중립적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분석보다는 단번에 감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만을 선호하는 정신을 우리는 ‘반지성주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 바깥에 설 필요가 있다. 자기감정을 공공화하는 일은 여기서부터 가능하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6-12

정치와 막말

“과거 ‘여자는 밤에만 쓰는 것’, ‘주막집 주모’ 등 발언한 적 있느냐” “대통령 앞에서 깐죽거리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나” 도대체 듣고 있기가 쉽지 않다. 대선 국면에서 쏟아지는 막말들 말이다. ‘춘향이’ 운운한 어떤 발언은 입에 담기도 어려워 여기 적을 수조차 없다. 내란 정국 때는 ‘계몽’과 ‘요원’이란 단어가 히트(?)더니, 근래엔 ‘깐족’과 ‘아부’, ‘키높이 구두’와 ‘눈썹 문신’이란 말이 유행인가보다. 기억에 남는 정책이나 국정철학은 없고 오로지 ‘비아냥’과 ‘조롱’만 남은 모 정당의 토론회를 보고 있자니, 저들에겐 과연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책임감 따위는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대통령 파면으로 시행되는 엄중한 대선인데, ‘비상계엄’과 ‘탄핵’마저 희화화되고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공론장에서의 말(Lexis)과 행위(Praxis)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말과 행위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의 발언은 그 수행적인 힘을 대의하는 자리에서 발화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언어의 생산과 교환은 일정한 언어 자본을 갖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징적 권력 관계 속에 자리 잡는다고 논한 바 있다. 언어 교환의 권력 관계는 제도적이든 아니든 그들이 집단으로부터 받고 있는 인정에 따라 상이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구든 말할 수 있고, 명령의 의미를 발화할 수 있지만, 필요한 권위가 결여되어 있는 자에게 그것은 ‘행위’가 될 수 없으며, 단지 ‘말’로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의 말은 수행적인 힘을 갖는다고 여길 수 있다. 그만큼 책임이 동반되는 행위라는 거다. 말하는 자는 자신의 발화가 ‘언어의 장’에서 어떻게 수용될지에 대해 나름의 예측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담론은 언제나 ‘완곡어법’이자 ‘타협’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잘 말하려는’, ‘적절하게 말하려는’ 전략적 수정의 결과이기에 ‘완곡어법’이며, ‘말해야 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화 형태가 결정되기에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의식적인 계산으로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언어적 아비투스(habitus)의 영역이라 수용가능성에 대한 감각,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언어생산물의 잠재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능한다. 이점을 비춰볼 때 막말을 해대는 정치인의 언어 감수성이 어느 레벨에서 작동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선 토론을 겨우 ‘말싸움’ 정도로 여기는 천박한 권위 의식과 경쟁심이 결합 된 언어적 결과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예전의 보수는 나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위선이라도 부렸다. 위선이란 적어도 세간의 이미지를 의식하고 남들 눈치 정도는 보기 때문에 가능한 가식이다. 그럼에도 즉물적 감정에만 휩싸여 위선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 오만한 권력이 언제까지 연명할 수 있을까? 토론 자리를 상대 ‘망신주기’의 기회 정도로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막말이 계속되는 한, ‘천박한 정치’에 대한 ‘고상한 대중’의 심판도 오래고 지속될 것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6-01

정치와 막말

“과거 ‘여자는 밤에만 쓰는 것’, ‘주막집 주모’ 등 발언한 적 있느냐” “대통령 앞에서 깐죽거리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나” 도대체 듣고 있기가 쉽지 않다. 대선 국면에서 쏟아지는 막말들 말이다. ‘춘향이’ 운운한 어떤 발언은 입에 담기도 어려워 여기 적을 수조차 없다. 내란 정국 때는 ‘계몽’과 ‘요원’이란 단어가 히트(?)더니, 근래엔 ‘깐족’과 ‘아부’, ‘키높이 구두’와 ‘눈썹 문신’이란 말이 유행인가보다. 기억에 남는 정책이나 국정철학은 없고 오로지 ‘비아냥’과 ‘조롱’만 남은 모 정당의 토론회를 보고 있자니, 저들에겐 과연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책임감 따위는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대통령 파면으로 시행되는 엄중한 대선인데, ‘비상계엄’과 ‘탄핵’마저 희화화되고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공론장에서의 말(Lexis)과 행위(Praxis)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말과 행위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의 발언은 그 수행적인 힘을 대의하는 자리에서 발화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언어의 생산과 교환은 일정한 언어 자본을 갖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징적 권력 관계 속에 자리 잡는다고 논한 바 있다. 언어 교환의 권력 관계는 제도적이든 아니든 그들이 집단으로부터 받고 있는 인정에 따라 상이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구든 말할 수 있고, 명령의 의미를 발화할 수 있지만, 필요한 권위가 결여되어 있는 자에게 그것은 ‘행위’가 될 수 없으며, 단지 ‘말’로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의 말은 수행적인 힘을 갖는다고 여길 수 있다. 그만큼 책임이 동반되는 행위라는 거다. 말하는 자는 자신의 발화가 ‘언어의 장’에서 어떻게 수용될지에 대해 나름의 예측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담론은 언제나 ‘완곡어법’이자 ‘타협’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잘 말하려는’, ‘적절하게 말하려는’ 전략적 수정의 결과이기에 ‘완곡어법’이며, ‘말해야 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화 형태가 결정되기에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의식적인 계산으로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언어적 아비투스(habitus)의 영역이라 수용가능성에 대한 감각,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언어생산물의 잠재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능한다. 이점을 비춰볼 때 막말을 해대는 정치인의 언어 감수성이 어느 레벨에서 작동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선 토론을 겨우 ‘말싸움’ 정도로 여기는 천박한 권위 의식과 경쟁심이 결합 된 언어적 결과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예전의 보수는 나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위선이라도 부렸다. 위선이란 적어도 세간의 이미지를 의식하고 남들 눈치 정도는 보기 때문에 가능한 가식이다. 그럼에도 즉물적 감정에만 휩싸여 위선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 오만한 권력이 언제까지 연명할 수 있을까? 토론 자리를 상대 ‘망신주기’의 기회 정도로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막말이 계속되는 한, ‘천박한 정치’에 대한 ‘고상한 대중’의 심판도 오래고 지속될 것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5-01

문학과 법: 헌재 판결을 보고

문학의 언어와 법의 언어는 조금 다르다. 문학이 사건이나 현상, 개인의 마음 따위를 반영하거나 재현할 수 있다는 신뢰에 기초한 언어의 투명성에 의존한다면, 법은 발화되는 순간 관철되는 언어의 수행적 힘에 입각해 있다. 문학의 언어가 허구와 모방, 내면성을 특질로 한다면 법의 언어는 사실과 실현, 공공성이란 축을 통해 구성된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에 이르게 한 이번의 헌재 판결문은 나에겐 문학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 있다.   “한편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는 피청구인의 법 위반에 대한 중대성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헌법에 의하여 부여받은 것입니다.”   위헌적인 비상계엄이 해제된 건 대통령의 의지가 아니라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다. 군경이 소극적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들이 성숙한 ‘시민다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헌재는 역사의 주체로 시민을 인준했으며,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권리가 헌법 정신의 기초라는 사실을 다시금 판결했다.   법질서란 사람들이 그것을 준수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거해서만 성립한다. 대통령의 권한도 헌법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단순히 대통령 권한의 남용이 아니라 법에 대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탄핵에 찬성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집단적 의지는 법을 어긴 통치권자에 대한 처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민주공화국 주권자의 실력 행사라 할 수 있다.   법의 언어가 아무리 수행적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그러한 힘이 법의 어떠한 정신과 내면에 기초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항구적인 심문이 필요하다. 법이 법으로 존재하거나 기능할 수 있는 내력을 살피는 작업은 분명 문학적인 관점을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학은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보다는 역사의 심연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인용한 헌재 판결의 취지는 헌법 정신의 발현은 시민들의 저항권에 기초해있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근래 뜯어고치자고 제안되는 87년 체제 헌법조차 시민들이 6월 항쟁을 통해 가까스로 쟁취한 결실 아니었나. 개헌을 겨우 내란 정국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처럼 운위하는 행위 그 자체야말로 헌정질서 문란에 해당한다.   우리는 법기술자들의 법리 운용만이 아니라 그들이 법의 정신을 어떻게 표상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의 이름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시해야 한다. 법을 문학적으로 파악한다는 건 정확히 이런 의미다.

2025-04-17

파면을 기다리며

허민 문학연구자 2024년 12월 3일 밤을 기억한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그 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묵혀뒀던 ‘흑백요리사’ 다섯 편을 몰아보고 있었다. 새벽 2시 즈음 이제 잠이나 자볼까 하고 핸드폰을 보고 나서야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톡창에 떠 있는 백여 개의 메시지들, 앞다퉈 발표되는 뉴스 속보, 담을 넘는 국회의원, 국회의 유리창을 깨는 군인과 이를 저지하려는 시민들. 순간 나는 내가 다른 시간대로 혹은 다른 세계관으로 ‘워프’된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공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 당신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나는 한국근현대문학을 공부했고, 식민 지배와 군사독재에 맞서 싸운 민중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계엄령이 인지됐을 때 내 몸은 얼어붙었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야 할지, 친구들의 안위를 물어야 할지, 어딘가로 대피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쥐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어야 할지 분명한 판단을 하지 못했다. 나름 연구자라며 그렇게 많이 읽고 쓰곤 했는데 저항에 관한 서사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보았다. 총기를 무장한 채 동원된 군인들과 맞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대체 저들의 용기는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국회를 향해 어떻게 자기 몸을 이끌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장갑차를 온몸으로 막은 저 청년은 대체 누구일 수 있는 걸까. TV를 보고 마냥 놀라고만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운 만큼, 계엄군을 마주하며 인간 바리케이트를 형성하고 있는 저들이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날 우리는 모두 들었다. ‘종북’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여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대통령의 목소리를. 저이가 말하는 ‘종북’과 ‘반국가세력’은 야당을 뜻했던 것일까? 그래도 대략 국민의 절반 정도가 지지하는 정당일 텐데, 설마 국군통수권자가 군사력을 동원해서 잡아들이려고 할 수 있는 건가. 여전히 믿기지가 않지만, 믿고 싶지 않은 장면과 소리를 이미 너무나 많이 보고 들어버린 것 같다. 탄핵이 기각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일단 모두가 2차 계엄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혹자는 현실적으로 2차 계엄이 발동될 리 없다고 말한다. 군인과 경찰들이 더이상 부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들이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은 건 옳지 않은 일에 대한 정의감과 두려움, 자기 판단에 대한 신뢰 덕분이었을거다. 하지만 헌재에서 비상계엄이 중대하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대체 군인들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항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누군가 죽지만 않는다면 이 정도는 괜찮다는 건가? 국회를 군인들이 봉쇄해도 문제없다는 건가? 계엄 정도는 그냥 넘어가지는 건가? 대통령 권한의 악의적 남용에 눈 감고 대체 어떤 미래를 모색하자는 건가?

2025-03-31

내란 정국의 역사 기술과 ‘전환기’라는 시대 의식

허민문학연구자 훗날, 오늘의 내란 정국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까? 국회와 선관위를 급습한 12·3 비상계엄의 발동, K-극우의 준동과 유튜브 수익 경쟁, 집권 여당의 부화뇌동, ‘야당 독재’라는 가짜 프레임과 다수 언론의 기계적 중립, ‘키세스 시위대’와 남태령의 트랙터, 아이돌 응원봉과 ‘다만세’ 제창, 내란성 불면과 우울증의 사회적 확산, 개헌 논의의 필요와 반동성 등, 분명 이 연쇄된 사건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과 성취,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고 대립·갈등하는 정치사의 주요 국면으로 기술될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에 남게 될 역사서술의 향방이 가장 궁금한 건 ‘내란 우두머리’ 혐의자에 대한 구속 취소와 검찰의 ‘즉시항고’ 포기에 있다. 경호처 영장 반려에서부터 예견된 이 기괴한 판결과 의도된 무력한 수용에 대해 역사의 페이지에는 어떤 방식으로 작성해야 하나? 그야말로 남들 보기에 창피한, 특별한 교훈(?)이나 철 지난 의미조차 없는 이 사태를 그 자체로 남길 수 있는 방법이 새삼 걱정된다. 물론 누가 작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언제나 중요하다. 반일종족주의나 뉴라이트 역사관을 봐도 그렇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비유한 ‘역사의 천사’는 역사의 진보를 믿기보다는 과거의 잔해 속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시간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으며 파열과 중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때론 작가 한강의 말처럼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도,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도 있다. 파당 정치나 계급투쟁, 진영 대결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의 법정을 바로 세우는 길에 관한 과업이며, 그 문턱에서 말소되어선 안 될 진실한 기억에 대한 사수를 호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당치 않은 비상계엄의 정당성이 운위되는 작금의 사회적 대혼란이 누구에 의해 어떤 관점으로 역사에 남겨지게 될까. 그런 의미에서 탄핵 심판은 역사의 갈림길이다. 어쨌든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일종의 ‘전환기’를 맞이할 거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흔히 ‘이행기’나 ‘전환기’라고 불리는 특정한 역사의 국면에는 과도기적인 현상이 관찰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그 전후 시기의 단절과 연속, 상실과 회복의 교차를 비롯해 ‘과거의 잔여’와 ‘미래의 현현’이 ‘현재의 쟁점’ 속에서 충돌하거나 병행하는 복잡성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역사 인식의 방법이 필요하다. 이때 그 방법이란 역사학자들의 학문적인 고심으로부터 확보될 수도 있겠지만, 그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대로 정치적 획책으로 도모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기 때문이다. 과연 내란 이후의 한국 사회는 글로벌한 규모에서 횡행하는 우익 포퓰리즘의 바람에 말려 들어갈지 아니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가 아래로부터 다시 논의될 수 있는 극적 발판이 마련될지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역사의 운명이 소수의 법비들에게 달려 있는듯한 요즘의 형국이 심히 불안하고 불쾌할 따름이다. 전환이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일과 가능한 데 불가능했던 일들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세상이 일거에 바뀔 수는 없다. 조금 지쳐도 더 나은 세계와 사회를 만들어가는 고달픈 경로라 생각하고 모두 힘을 냈으면 좋겠다.

2025-03-17

계몽이란 무엇인가?

허민문학연구자 “제가 임신과 출산과 육아를 하느라 몰랐던 민주당이 저지른 패악을 일당 독재의 파쇼 행위를 확인하고 아이와 함께 하려고 비워둔 시간을 나누어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저는 계몽되었습니다.” 윤 대통령 측 변호사의 최종변론이다. 성스러운 비상계엄으로 ‘야당의 독재 파쇼 행위’라는 성립 불가능한 상황을 인지하고 계몽되었단다. ‘윤통’의 은혜에 감복한 간증처럼 들리기도 했고, 일제 말 대동아전쟁을 거룩한 ‘성전(聖戰)’으로 선전하던 ‘총독의 소리’가 연상되기도 했다. 자기의 무지에 관해 회의할 수는 있겠지만, 왜 가만있는 대중의 지성을 시험하려는지 모르겠다. 선민의식과 노예근성, 엘리트주의와 독선이 ‘짬뽕’ 된 변종의 어용적 세계관이라 하겠다. 내란 정국에서 별의별 궤변과 요설과 망언 때문에 고달팠고, 그 과정에서 소용된 말들의 오염과 오용도 참기 어려웠는데, 그 대미를 장식해준 것 같다. 이를 기리며(?) 별안간 ‘핫’해진 ‘계몽’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몇 자 적어두고자 한다. 칸트는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한 바 있다. 이때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면서 “이 미성년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은, 이 미성년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을 경우”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미성숙이란 다만 지성의 부재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미성숙의 상태에서 성숙으로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봤다. 물론 칸트는 자신이 속한 시대를 ‘계몽된 시대’가 아니라, ‘계몽의 시대(=프리드리히 왕의 세기)’로 파악함으로써 계몽의 주체로서 이성의 공적 사용을 보증할 수 있는 힘은 왕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도움 없이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는 ‘계몽된 시대’의 도래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써, 인간에 고유한 지성의 능력을 미래로부터 확보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칸트에게 계몽은 누구에게나 잠재된, 보편적인 능력으로서 공정하게 열려있는 유예된 성장의 기회를 의미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는 칸트의 계몽에 관한 바로 이 노트로부터, 인간 지성에 내재된 평등의 원리를 식별해 낸 바 있다. “무언가를 혼자 힘으로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 배워보지 못한 사람은 지구상에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무능력이란 가르치려는 자의 가치관이 지어낸 허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나는 인간이다, 고로 생각한다”라는 인식으로 뒤집은 것이다. 이런 역전이야말로 지적 능력의 본성상 평등을 의식하는 해방이라 할 수 있겠다. 12·3 비상계엄으로 계몽된 사실이 있다면, 이는 5년 단임 선출직 공무원의 몽니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한 데 있을 뿐이다. 철학의 빈곤이 야기한 허언 속에서 집단지성의 위력에 대한 대통령의 무지가 드러났다.

2025-03-03

요즘 풍경

허민문학연구자 동네 카페에서 주문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기다리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초등학생들의 대화가 들렸다. “야, 너희 계속 내 말 안 들으면 계엄 선포한다!”, “그래 맘대로 해봐라, 바로 탄핵할 테니까.” 내가 저 또래였을 때, ‘계엄’이나 ‘탄핵’이라는 단어를 알았는지 모르겠다. 아니 ‘선포’라는 말도 몰랐을 거다. 이렇게 빨리 알아야 될 말들인가 싶어서 괜히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세상의 변화는 일상의 언어로부터 감지되기 마련이다. 어른들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요즘처럼 법률용어가 친숙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인용’과 ‘기각’, ‘가처분’과 ‘적부심’, ‘공소장’과 ‘증인심문’, ‘평의’와 ‘변론 기일’, ‘피청구인’과 ‘방어권’ 등등, 전에는 알지도 못할 낱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이 ‘형사재판’과 ‘헌법재판’의 차이 정도는 마치 상식처럼 알고 있을 거다. 세상이 법의 언어와 사고에 지배되고 있는 형국인데, 이건 모두에게 긍정적인 현상은 아닐 거다. 법이 잊힌 상태가 가장 평화로운 법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학술대회 때 일이다. 발표를 맡은 선생들 다수가 ‘내란성 우울증’으로 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나도 각종 ‘내란성 질환’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터였다. 아마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1차 체포영장 집행이 무산된 직후부터였을 거다. ‘2차 체포영장은 언제쯤 발부될지’, ‘이번에 발부된 영장은 대체 어떻게 집행할지’ 등,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속보를 확인했던 것 같다. ‘내란성 불면증’으로 잠을 뒤척이다가도 체포 여부부터 확인했으니, 피로하지 않은 온전한 하루를 갖기가 어려웠다. 요즘은 탄핵 심판 중계로 ‘내란성 위염’이 다시 도졌다고들 했다. “계엄령이 아니라 계몽령이다”, “의원이 아니라 요원을 빼내라는 거였다”, “계엄의 형식을 갖춘 경고였다”, “탄핵공작이다” …. 언제까지 이런 궤변과 망언이 실시간으로 중계돼야 하는 걸까? “내란성” 신종 질환의 발견은 ‘비상계엄’이라는 사회적 트라우마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지시하기 위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의 상처를 익살스럽게 상대화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의 방어 전략으로 봐야 한다. “내란성○○”을 함께 앓으며 서로를 위무하고 버티는 거다. 버스가 끊겨 택시를 타던 날 기사님이 말을 걸었다. “오늘 손님이 다섯 번째네요. 찾는 사람이 없으니 알아서 셈이 됩니다. 제가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인데, 요즘은 누가 타든 하소연하게 되네요.” 그렇게 말이 없다던 기사님은 내가 내릴 때까지 말을 했다. 손님이 없을수록 말을 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택시 운전 20년 만에 이런 불황은 없었다는 호소를 듣다 보니 언제부턴가 한산해진 지하철의 광고판이 생각나기도 했다. 차에서 내리기 직전 마지막으로 들은 발언은 이러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으니 제발 탄핵 국면만 지나가길” 이게 요즘 풍경이다. 지난 일주일간 겪은 일을 적은 것만 해도 이렇다. 윤석열 대통령은 탄핵 심판 중 “아무일도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체포가 없었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12·3 비상계엄은 아이들의 말과 우리들의 마음을 오염시켰다. 작지만 이미 커다란 일이다.

2025-02-17

정치와 어떤 감정들

허민문학연구자 설 연휴에 정치 토론 프로를 우연히 봤다. 마침 공방이 격화되는 시점이었나보다. 한 토론자가 열변을 토했는데 상대 패널은 감정적이라고 일축했다. 논리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들리진 않았는데 반론하기 어려웠나 싶었다. ‘감정적’이라는 언사는 이처럼 ‘논리’와는 반대되는 뜻으로 동원되곤 한다. 하지만 감정과 논리는 그렇게 구별되는 개념이 아니다. 정치의 영역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어떤 정책도 대중의 감정에 우선 어필하지 않으면 실정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다. 현실정치의 이권은 감정과 논리를 매개하는 설득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의 확산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정치가 인간의 어떠한 마음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악감정에 의거한 정치’의 출현을 문제 삼은 적이 있다. 인간에겐 누군가를 돕거나 아껴주고 싶은 좋은 마음이 있는 반면, 타인을 질시하거나 미워하는 나쁜 감정도 있기 마련이다. 이때 좋은 마음의 확산을 지지하고 나쁜 감정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보통의 상식일 텐데, 이와는 반대로 흐르는 경향이 사회를 지배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서는 자기의 피폐한 처지를 납득하기 위해 원망할 상대를 찾아 나설 뿐이다. 공감하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입장을 자명하게 수용하고, 의견이나 생각이 다른 차원의 지평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멀리하는 태도가 팽배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꼭 그런 것 같다. 가령 여성가족부를 폐지하자는 의견이 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언제든 쉽게 볼 수 있는 주장이다. 양성평등을 추구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명목이지만 내용의 실상은 다르다. 구체적인 분석에 입각해 있기보다는 그저 청년 남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사회의 몫이 여성가족부에 의해 빼앗기고 있다는 추상적인 피해의식의 확산일 뿐이다. 물론 국가 기구나 정부 부처 등의 형평성을 따질 수는 있다. 그러나 형평에 맞지 않아 보인다고 해서, 없애버리면 된다는 식의 해결이 전부일 순 없다. 적어도 제대로 된 정치라면 무언가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처지를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파악하고, 이를 살피기 위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란 무언가를 빼앗을 수도 무언가를 나눌 수도 있게 한다. 과연 오늘의 정치는 어떤 감정에 의거하고 있나?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계급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의 폐단을 우리는 오래도록 지켜봐 왔다. 그러다 이제는 세대로, 성별로 갈라치기 하는 정치가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 권력 쟁취와 유지를 위해 사람들의 악감정에 어디까지 편승해갈지 모르겠다. 이번 서부지법 폭동 사태도 우연이 아니다. 사법 체계와 헌정질서의 근간을 위협하는 집단적 폭력행사에 엄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도 부족할 판에 그들의 삐뚤어진 감정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라. 시라이 사토시는 ‘악감정에 의거한 정치’란 ‘파시즘’에 다름 아니라고 정의했다. 정확한 진단이라 생각한다. 역사의 문전 앞에 당도한 파시즘에 저항해야 한다. 부디 혼란스러운 최근의 정세를 계기로 한국의 정치가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나약한 본성’으로부터 빠져나오길 기원해 본다.

2025-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