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문학과 법: 헌재 판결을 보고

허민 문학연구자
등록일 2025-04-17 19:08 게재일 2025-04-18 18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허민 문학연구자

문학의 언어와 법의 언어는 조금 다르다. 문학이 사건이나 현상, 개인의 마음 따위를 반영하거나 재현할 수 있다는 신뢰에 기초한 언어의 투명성에 의존한다면, 법은 발화되는 순간 관철되는 언어의 수행적 힘에 입각해 있다. 

문학의 언어가 허구와 모방, 내면성을 특질로 한다면 법의 언어는 사실과 실현, 공공성이란 축을 통해 구성된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에 이르게 한 이번의 헌재 판결문은 나에겐 문학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가령 이런 문장들이 있다.

 

“한편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는 피청구인의 법 위반에 대한 중대성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은 어디까지나 헌법에 의하여 부여받은 것입니다.”

 

위헌적인 비상계엄이 해제된 건 대통령의 의지가 아니라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다. 군경이 소극적일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들이 성숙한 ‘시민다움’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헌재는 역사의 주체로 시민을 인준했으며, 부당한 권력에 저항할 권리가 헌법 정신의 기초라는 사실을 다시금 판결했다. 

 

법질서란 사람들이 그것을 준수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거해서만 성립한다. 대통령의 권한도 헌법에 의해 부여받은 것이다. 따라서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단순히 대통령 권한의 남용이 아니라 법에 대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탄핵에 찬성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집단적 의지는 법을 어긴 통치권자에 대한 처벌을 구하는 게 아니라 민주공화국 주권자의 실력 행사라 할 수 있다. 

 

법의 언어가 아무리 수행적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그러한 힘이 법의 어떠한 정신과 내면에 기초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항구적인 심문이 필요하다. 법이 법으로 존재하거나 기능할 수 있는 내력을 살피는 작업은 분명 문학적인 관점을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학은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보다는 역사의 심연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인용한 헌재 판결의 취지는 헌법 정신의 발현은 시민들의 저항권에 기초해있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근래 뜯어고치자고 제안되는 87년 체제 헌법조차 시민들이 6월 항쟁을 통해 가까스로 쟁취한 결실 아니었나. 개헌을 겨우 내란 정국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처럼 운위하는 행위 그 자체야말로 헌정질서 문란에 해당한다. 

 

우리는 법기술자들의 법리 운용만이 아니라 그들이 법의 정신을 어떻게 표상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의 이름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감시해야 한다. 법을 문학적으로 파악한다는 건 정확히 이런 의미다. 

 

 

 

플랜B의 철학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