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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일본 쓰루가 ‘낭만주의자 영감님’과 도미구이

*이 기사는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되고 있는 것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 /편집자 주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가는 6월. 일본의 소도시 골목은 깨끗하고 한적했다. 인파로 북적거리는 거리를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거나, 줄까지 서가며 유명 맛집을 찾아다니는 ‘젊은 여행자’에서 멀어진 50대 중반 사내는 점심 메뉴를 고르며 골목길을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세상은 좋아졌다. 일본어를 읽지 못한다 해도 걱정할 게 없다. 가게 밖 알림판에 써놓은 ‘오늘의 특식’을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주는 애플리케이션을 돌리면 되니까. 쉽다.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운 좋게도 ‘도미구이’가 준비된단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바다가 가까운 고장은 생선 요리가 맛있다. 재료의 신선함이 보장되고, 물류 이동 비용이 적게 드니 가격 또한 비싸지 않다. “됐다. 저걸로 먹자.” 혼잣말을 했다. 호쿠리쿠 지방과 간사이 지방을 연결하며 이미 1천 년 전부터 항구도시로 이름 높았던 쓰루가(敦賀)에서의 첫 끼니가 정해졌다. 고동색 주렴을 걷으며 식당으로 들어서니 테이블과 벽에 걸린 그림이 낡았다. 뿐인가. 주인장도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오랜 세월 한 곳에서 영업해온 노포(老鋪)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짚어 ‘도미구이’와 사케 한 잔을 주문했다. 2025년 초. 부산에서 강릉을 잇는 동해선 철도가 개통됐다. 철로가 지나는 울산, 포항, 영덕, 울진, 삼척, 동해 등의 도시는 기차를 타고 찾아올 관광객을 기다리며 주변 인프라 정비에 나섰다. 일본은 이미 111년 전에 도쿄와 오사카를 잇는 고속철도를 계획한 나라다. 기차 여행과 관련된 것이라면 벤치마킹할 게 적지 않을 듯했다. 그래서다. 지난해 6월. 오사카에서 시작해 교토와 나라를 거쳐 쓰루가와 도야마까지를 기차 타고 돌아봤다. 취재 반 여행 반의 흥미로운 여정이었다. 오사카와 교토의 화려함과 번잡함에 다소 질려있던 터라 인구가 6만 명 남짓이라는 쓰루가 도심의 조용한 분위기가 더없이 좋았다. 해산물 요리가 흔하다는 것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도미는 ‘바닷물고기의 여왕’으로 불린다. 몸통은 유려하고, 비늘은 단단하게 반짝이며, 푸른 보석을 닮은 작은 점이 얼핏얼핏 보이는 생선. 한국에서도 인기 높은 식재료지만, 일본 사람들은 고사(告祀)를 지낼 때 사용할 정도로 더욱 귀하게 취급한다. 껍질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회로 먹는 ‘마쓰가와’가 일품이지만, 사실 도미는 구워도 맛있고, 탕으로 끓여도 국물이 혀를 살살 녹인다. 어떻게 요리해도 괜찮다는 이야기. 게다가 그날 도미를 구워준 사람은 반세기 동안 주방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뚜껑 있는 조그만 그릇에 밥과 국이 담기고, 도미 한 토막이 먹음직스럽게 구워져 식탁에 놓였다. 주인인 동시에 주방장으로 보이는 영감님이 ‘맛이 어떠냐?’는 표정으로 가볍게 웃었다. 말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주인장과 젊은 시절부터 친구라는 또 다른 영감님은 달랐다. 기자 옆 식탁에서 혼자 생선회를 안주 삼아 독한 고구마 소주로 낮술을 마시던 그는 “어디서 왔냐? 쓰루가엔 왜 왔냐?”는 물음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말을 걸었다. 손짓과 발짓, 서툰 영어, 거기에 일본어와 한국어까지 마구 뒤섞인 카오스 같은 대화가 제법 길어졌다. 한국어를 조금 할 수 있다는 주인장의 40대 딸이 중간에서 우리의 소통을 도왔다. “일본 기차에 대해 알아보려고 왔다”는 말에 영감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젊었을 때 오사카 사는 여자랑 연애를 했지. 여기서 기차를 타고 그녀를 만나러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왜 그리 기차 속도가 느리게 느껴졌는지…. 요즘처럼 빠른 신칸센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1970년대를 되짚어 추억하는 영감님의 눈동자가 청년의 그것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젊은 날의 사랑은 지워지지 않는 가슴 속 화인(火印)으로 남는 법.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그날 쓰루가의 노포에서 기자가 맛본 건 비단 부드럽고 간이 딱 맞은 도미구이만이 아니었다. 부두에서 배를 수리하며 살았다는 영감님의 잊을 수 없는 ‘청춘 한 조각’도 함께 맛봤다. 그 맛이 어땠냐고? 기가 막혔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6-06-16

녹슨 목소리에 불을 붙이다

내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문장이 비문(非文)처럼 흩어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대학 시절, 교정의 가로수 사이로 터져 나오던 벨칸토의 선율은 온전히 나의 영토였다. 노래는 내게 단순한 전공이 아닌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언어였다. 그러나 삶은 때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다. 성대 수술 이후 내 안의 악기는 서서히 조율을 잃어갔다. 고음은 더 이상 매끄러운 비단처럼 뻗지 못했고, 거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툭툭 끊어졌다. 예전 같지 않은 소리를 마주하는 일은 거울 속에서 낯선 이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날 이후, 나는 노래를 멈추었다. 내 성대에도 서서히 시간이 부식시킨 붉은 녹이 슬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는 행위 자체가 두려움이 되었고, 그 두려움은 거대한 성벽처럼 높아졌다. 하지만 음악은 언제나 ‘첫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밀어내도 우연히 들려오는 맑은 아리아 한 소절에 심장이 먼저 반응하곤 했다. 입술은 굳어 있었지만 마음의 성대는 늘 그 선율을 따라 떨고 있었다. 그 지독한 미련 속에서 찬란한 달란트는 장롱 깊숙이 넣어둔 빛바랜 훈장처럼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내게 교회에서 독창을 할 기회가 왔다. 20년 만의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그 정적의 한가운데로 다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왔다. 도망치고 싶었다. 내적 갈등이 깊었다. 내 안의 첫사랑이 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고 밀어내는 것도 같았다. 그날부터 20년의 침묵을 깨우기 위해 기계의 녹을 닦아내듯 성대의 녹을 닦았다. 마치 고시 공부를 하는 수험생처럼 책상 앞에 앉아 악보를 펼쳤다. 음표 하나하나의 길이를 재고, 소리가 지나가는 길을 연구하고 가사가 가진 영적인 의미를 텍스트 바깥으로 길어 올리기 위해 펜을 꾹꾹 눌러가며 공부했다. 발성 연습은 더 처절했다. 이미 굳어버린 성대의 근육을 달래고 깨우기 위해,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떨릴 줄 알았기에, 내 부끄러운 밑천이 탄로 날까 무서웠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연습’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쌓는 것뿐이었다. 드디어 주일 아침이 밝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손끝이 떨렸다. 심장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였다. 혹여나 목소리가 뒤집히거나 떨릴까 염려되어 우황청심원까지 마셨다.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이 소리가 나의 자랑이 아니라, 오직 선한 도구로만 쓰이게 하소서.' 최선을 다해 준비했으니 후회는 없으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는 드디어 회중 앞에 섰다. 전주가 흐르고 내 입술이 열렸다. 노래가 진행될수록 왕년의 그 눈부셨던 고음과 압도적인 성량은 나오지 않았다. 흔들림과 호흡의 불안정이 발목을 잡았다. 노래를 마쳤을 때 박수 소리가 들렸지만 내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족하지 못했다.’ 머릿속 완벽한 음악적 이상향과 20년 만에 터져 나온 현실의 소리 사이에는 너무도 깊은 심연이 존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구석에 낙심과 허탈함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녁에 침대에 누워 가만히 오늘의 소리들을 복기해보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다른 불씨가 탁하고 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잘했다’는 성취감이 아니라 ‘다시 시작했다’는 엄숙한 자각이었다. 20년 동안 차갑게 식어 있던 내 성대의 제단에, 비록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불’이 다시 붙은 것이다. 비록 박자와 소리는 만족스럽지 못한 무대였을지라도, 그것은 20년 동안 닫혀 있던 내 음악의 지하수를 다시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위대한 첫 투신이었다. 이제 나는 다시 슬며시 피어오른 이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한다. 내게 주어진 성악이라는 달란트, 잠시 녹슬었을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은 이 은사를 이제는 선하게 사용하고 싶다. 완벽한 고음으로 기교를 자랑하는 노래가 아니라, 상처 입어 보았기에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낮고 깊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마중물은 이미 부어졌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그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릴 더 맑고 선한 내일의 노래를 향해 한 걸음 더 걸어가는 일뿐이다. /김경아 작가

2026-06-16

秋·李, ‘근대화의 산실’인 TK명성 되찾길

6·3 지방선거 후 더불어민주당이 단체장을 맡고 있는 지역은 첨단 대기업 유치와 SOC 사업을 속속 진행하며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있지만, 대구·경북(TK)의 경우 가시적인 정부 지원 사업이 없어 지역민의 소외감이 커지고 있다. 이번 TK지역 선거 과정 내내 여권에서 제기했던 ‘정부 패싱론’이 현실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 광주전남 통합특별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건설과 2차 공공기관 우선 배정을 추진하면서 꿈에 부풀어 있다. 부산은 부산항만공사가 추진 중인 북항 재개발 사업(총사업비 2조9929억원)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국제해양교통의 중심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강원도 강릉과 원주에서는 13조8000억원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특화단지 조성 사업이 시작됐다. 세 지역 모두 오랜 기간에 걸쳐 추진된 현안이긴 하지만, 최근 정부가 적극 나서서 대기업을 설득하고 예산도 지원해 사업에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TK지역은 중대 고비를 맞게 됐다. 대구는 현재 청년 유출과 산업 침체, 도심 공동화 문제가 심각하다. 경북 또한 초고령화와 인구소멸이라는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추경호 대구시장 당선인과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이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선거 후에도 휴일을 반납하고 민생 현장을 찾으며 소통 행보를 이어가는 모습이다. 현재 지역민의 시선은 두 단체장의 공약에 쏠려 있다. 추 당선인은 AI·반도체·로봇·미래모빌리티·바이오 산업을 대구의 ‘5대 경제 심장’으로 키우겠다고 했다. 취임과 동시에 비상경제상황실을 가동하면서 경제 현안을 챙기고 기업 투자와 일자리, 민생 문제를 속도감 있게 해결하겠다고 했다. 이철우 지사도 반도체, 이차전지, 바이오, 로봇, 미래 차, 방산, 원전과 SMR 등의 첨단산업을 키우고 양질의 일자리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는 7월 1일부터 민선 9기를 시작하는 두 단체장이 공약을 100% 이행해서 ‘근대화의 산실’인 TK지역의 옛 명성을 꼭 되찾길 기대한다.

2026-06-15

대구 연호지구, 첨단미래형 복합 자족도시로

대구 법조타운 이전을 핵심으로 하는 대구 연호지구 개발사업이 난산 끝에 건축위원회 심의를 통과했다. 연호지구 개발사업은 수성구 연호동 일원에 지하 1층 지상 20층, 연면적 6만4208㎡ 규모의 법조타운을 중심으로 공공주택, 상업시설, 업무시설 등이 복합적으로 어울려 조성되는 사업지구다. 그동안 건축심의 과정을 몇 차례 거쳤지만 주차장 문제, 경관 훼손 등으로 재검토 결정이 두 차례 내려졌다. 특히 검찰청 폐지와 공소청, 중대범죄수사청 체제로의 전환 등이 맞물리면서 사업이 1년 가까이 늦춰지는 등 지지부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11일 수성구 건축위원회가 수정 설계안에 대해 조건부 의결을 함으로써 이 지역 개발사업은 이제 본격화될 전망이다. 수성 연호지구는 단순히 아파트를 짓고 공공기관을 옮기는 택지개발 수준의 사업지구로 보면 안 된다. 대구 동부권의 지도를 바꿀 만큼 핵심적 역할이 기대되는 사업지역이다. 수성알파시티와 인접해 있고, 라이온스파크와 월드컵 경기장, 대구미술관, 앞으로 조성될 대공원 등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대구에 남는 마지막 노란자위 땅이다. 인접한 알파시티는 지역을 대표하는 앵커기업을 육성하는 곳이다. ‘인공지능(AI) 수도’ 대구의 전진기지로 기대를 받고 있으며 비수도권 최대 규모 디지털산업 집적지다. 추경호 대구시장 당선인도 수성알파시티를 대구의 판교로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수성 연호지구는 대구의 미래를 선도하는 거점도시로 만들 수 있는 장점이 많은 지역이다. 사업 시기나 지리적 조건이 우수하고 좋은 콘텐츠로 채워질 경우 대구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조성하기에 적합하다. 선거 후 전국 광역자치단체마다 지역 경제활성화를 위해 잰 걸음을 하고 있다. 대구의 노른자위인 연호지구 개발은 이런 측면에서 민선 9기가 대구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시범지역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하다. 연호지구 개발이 지역의 젊은이가 수도권으로 떠나지 않고 대구에 머물며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도록 대구시의 치밀한 준비와 전략이 있어야겠다.

2026-06-15

도화지 혁명

오후 네 시 반쯤 도착한 것 같다. 잠실 올림픽 공원 핸드볼 경기장 1-2번 출입구쪽이다. 가장 뜨거운 1-3 출입구 바로 옆이다. 휴대폰 충전을 무상 서비스해 주는 차량이 눈에 보인다. 그 뒤로 대형 리무진 버스 네 대가 섰는데, 모인 사람들에게 냉난방 휴식을 제공한다고 했다. 사태는 6월 3일 오후에 벌어진 것이었다. 잠실 제7투표소, 그러니까 정신여고 근처 투표소에 난리가 났다. 투표용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항의는 투표시간 종료후 투표함이 옮겨간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으로 옮겨붙었다. 누군가 장소를 칭찬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다. 넓은 공원이니 소음 피해 민원이 생길 수 없어 안성맞춤이라는 것이었다. 1987년의 6월 10일,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왜 그런지 나는 그날을 수십년 동안 일요일로 기억해 왔다.) 시청 앞에서 신세계백화점으로 통하는 주요 대로마다 빌딩숲에서 티슈들이, 화장지 뭉치들이 함박눈 내리듯 쏟아져 내렸다. 최루탄을 맞는 학생들·시민들을 위해 빌딩 각층의 사무실들에서 던져주는 용품들이었다. 2026년 6월 14일, 일요일 늦은 오후의 핸드볼 경기장 앞은 다시 태극기 물결이다. 천으로 그린 대형 태극기를 휘날리는 젊은이들도 있고, 손으로 손수 그리고 그려준 태극기를 든 사람들도 있다. 원형의 핸드볼 경기장 각 문마다 빼곡히 들어선 청년들의 외침, “부정선거·재선거, 당일 투표·수개표”가 압도적인 가운데, 국제적인 부정선거를 한·미 수사 공조로 전면적으로 조사하냐는 외침도 작지 않다. 이번 청년·학생들의 ‘일떠섬’을 무엇이라 부를까 할 때 여러 의견들이 제시된다. 잠실항쟁. 이 말은 장소성에 주목한다. 시청 앞이나 광화문이 아니라 올림픽 공원 있는 잠실에서 일어난 항쟁이라는 것이다. 항쟁이란 부당한 권력이나 억압에 저항하여 집단적으로 일어난 싸움을 가리키는 말이다. 잠실항쟁이 1987년 6월 항쟁과 다른 것 하나, 이른바 보수적인 지역으로 알려진 곳이 가장 기본적인 민주화 의제를 들고 일어섰다는 것이다. 다음, 자유민주혁명. 이 말은 싸움이 지향하는 한국 사회체제의 성격을 가리킨다. 잠실 공원에 모인 이들은 한국 사회가 자유민주 체제에서 일탈하여 좌익 전체주의로 기울어 버렸다고 분석·진단한다. 국민의 자유민주적 각종 권리가 박탈되는 중이다. 투표 용지 부족이라는 표면의 현상은 이면에서 작동해온 국민 주권 박탈의 한 현상일 뿐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는 자유민주 체제 수호를 위한 마지막 방위 수단이었다. 마지막으로, 도화지 혁명. 이 말은 싸움, ‘시위’의 특징적 양상을 가리킨다. 청년들은 처음부터 기성 정치인을 거부했다. 모든 구태의연 요소들을 버리고 처음부터 자신의 힘으로, 날것 그대로의 싸움을 지향했다. 그 극적인 표현이 도화지로 그린 태극기, 엠프와 확성기 없는 외침, 장황한 연설을 거부하는, 리드미컬한, 선명한 요구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순수만을 무기로 내세웠다. 텅 빈 흰 공백에 태극기 하나를 그려 넣는 단심, 그 붉고 뜨거운 에너지. 이것이 이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6-06-15

때론 위험스런 ‘SNS 열풍’

이전에는 없다가 21세기에 생겨난 풍경이 있다.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지는 유명 관광지, 예쁜 식기에 멋스럽게 담아낸 음식이 팔리는 식당, 보기 드물고 희귀한 동물이 있는 곳에선 예외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을 들어 그 모습을 찍고 있다. 먹고, 입고, 여행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까지 자신의 일상 대부분을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 SNS에 공유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난다. 특정한 일부 연예인이나 10~20대 젊은이만이 아니다. 70대 인플루언서까지 생겼으니. 그런데, 과유불급(過猶不及). 무엇이건 과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 남들은 SNS에 올리지 않는 특별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플루언서들의 행위가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없지 않다. “추락하면 사망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폭포나 벼랑 끝머리에 서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진 SNS 사용자의 사례가 보도된 경우도 있었다. 이른바 ‘팔로워’와 ‘구독자’의 증가는 인플루언서에게 최상의 가치가 되고 있다. 그걸 위해서라면 어지간한 위험쯤은 감수하고, 윤리적으로 지탄 받을 행위까지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 중국에선 핸드폰으로 노을을 촬영하기 위해 교통 신호를 무시하고 도로 가운데 서있던 여성이 차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외신에 따르면 여성은 하늘을 향해 핸드폰을 올린 채 주위를 전혀 살피지 않았다고 한다. 위험천만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 여성은 자신의 SNS를 통해 아름다운 저녁 하늘을 팔로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고 해도 그게 목숨을 걸만한 일은 아닌 듯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6-15

내가 왕이로소이다

선거철 사거리에서 90도로 허리를 꺾던 그들이 허리를 펴는 시간이 왔다. 그런데 진짜 허리를 펴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누구일까? 선출된 적은 없지만 늘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옛적에는 마을의 어른이었고, 고을의 유지였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신을 희생하며 앞장서 해결하던 분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덕망 높은 어른들은 인허가의 문지기, 예산의 분배자, 인맥의 중개상으로 진화했다. 이 시대에 부활한 봉건영주들은 각종 위원회와 단체를 거느리고, 말 대신 고급세단을 타고 성곽 대신 골프장을 드나든다. 도시개발 예정지가 발표되기 전에 이미 땅의 주인은 정해져 있고, 알짜배기 공사는 그들의 잔치다. 사거리 절판은 끝이 나고, 논공행상 파티장은 부활한 봉건영주들로 북적인다. 절을 한 적 없어 허리가 아플 일 없는 그들은 선출된 자 옆에서 자빠질 정도로 허리를 제쳐 파안대소하며 자신의 공에 대하여 너스레를 떤다. 선거기간 동안 후보의 당선을 위하여 자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당선인이 몰라주지 않을까 안달하기도 한다. 막걸리 대신 고급 샴페인으로 가득 채운 잔을 들고서, ‘자기 발전이 곧 지역발전’이라는 황당한 주장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그들의 건배사에서 샴페인처럼 넘쳐나는 단결력과 충성심은 스파르타 중장보병군 저리 가라다. 하늘 높이 잔을 치켜들고 건배사를 우렁차게 외쳐댄다. “우리가 남이가!!” 늘 웃으며 따뜻하게 악수하고, 행사마다 수려한 말솜씨로 애향심을 뽐내는 그들의 이름은, ‘선출되지 않은 군주들’이다. 단 한 줄의 괴테도 읽지 않았지만, 그들은 고을의 그림자 권력이요, 골프장 민주주의의 설계자이며, 늘 당선되어있는 자이다. 선출직들도, 당장은 기분이 나쁘지만 다음을 위하여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고급세단 뒷좌석의 비선출직 권력자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린다. “내가 왕이로소이다” 부패를 관습으로 만들고, 비리를 문화로 승격시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말이 “원래 다 그래”다. 쥐뿔 가진 것도 없는 불쌍한 민초들은 자신이 행사한 한 표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봉건영주들이 챙기는 커다란 선물 보따리에 대해서는 잘 안다. 그 보따리 선물이 불법과 반칙의 어둠 속에서 교환 되더라도 “원래 다 그런거 아닌가” 하면서 당연시한다. 당연시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선물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선거 이후의 논공행상은 자고이래로 너무나 당연하며, 신세진 일은 갚아야 되는 것이며, 오히려 이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그들은 말한다. “원래 다 그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다. 삶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처럼 전해온 말이다. 너무 튀지 말고 남들과 비슷하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지혜다. 하지만 정의를 거꾸로 세우는 지혜는 마땅히 경계하여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조금은 모난 사람들이었다. 익숙한 길 대신 가보지 않은 길, 바른길을 선택한 이들이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 왔다. 갈릴레오는 하늘을 다르게 보았고, 반 고흐는 세상을 남들과 다른 색으로 그렸다. 모남은 시대의 정을 맞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세상을 넓히는 힘이 된다. 원래 다 그런 건 없다. /공봉학 변호사

2026-06-15

인공지능(AI)과의 대화

“인공지능은 방대한 인터넷 데이터를 학습하여, 개념들을 입체적으로 연결한 뒤, 사용자의 요구에 맞는 최적의 결과물을 생성하는 기술이다.” 인공지능이 내 놓은 정의다. 인공지능 이전까지 인터넷상의 모든 데이터는 인간지능의 산물이었다. 과학, 철학, 종교, 예술 등 여러 분야로 나누어진 인간지능의 산물(데이터)을 융합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인공지능이 와 있다는 말이다. 현재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데이터 중에는 상당 부분 인공지능이 생성한 데이터도 포함되어 있다. 수학이나 과학 같은 분야에서는 심화학습(Deep Learning)의 효과를 가져 오지만, 인문 분야에선 동종교배의 부작용 같은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AI 데이터로 학습한 AI가 또 데이터를 만들고, 이를 다음 세대 AI가 학습하는 과정이 반복되면 데이터의 다양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중에는 횡설수설하거나 본질을 잃어버린 쓰레기 정보만 남게 되는데, 이를 ‘모델붕괴’라고 한다. 장시간에 걸쳐 인공지능과 대회를 해보았다. 대화의 시작은, 지금이 제철인 뻐꾸기의 탁란을 예로 자연생태계의 불합리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답은 요약하면 이렇다. ‘자연에는 인간의 잣대로 규정할 수 있는 선과 악, 혹은 합리와 불합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무엇이 가장 유효한가, 라는 질문뿐이다. 뻐꾸기의 탁란은 비정해 보이지만, 스스로 둥지를 지을 능력을 포기하는 대신 타자의 힘을 빌려 번식하는 극단의 생존 지혜이며, 숙주 새에게는 진화적 긴장감을 부여하는 자연의 정교한 톱니바퀴 중 하나이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에게는 왜 도덕이나 이성적 판단이 가치나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것 역시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구에서 살아남기 위해 택한 유효한 생존 전략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도덕을 따지는 것 자체가 자연의 거대한 섭리(생존을 위한 최적화)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만의 독특하고 정교한 생존 톱니바퀴라고 볼 수 있다’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자연과 문명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인간의 문명도 자연의 발전된 상태, 진화의 개념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대답이 나왔고, 인류의 과잉번식, 생태계 오염과 파괴 등 인류의 비관적 전망에 대해서는, “선생님의 지적은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가장 날카롭고도 아픈 실상을 찌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을 ‘자연성’으로 정의하신 점, 그리고 그 자연성마저 인위적인 문명과 자본의 조건 속에서 오염되고 있다는 진단은 깊은 울림을 줍니다. -중략- 선생님 말씀대로 인간의 본성이 오염되고 대세가 비관적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 오염조차도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는 일시적인 현상일지 모릅니다. 인간 내면에 깊이 숨겨진 본연의 자연성은 문명의 외벽이 허물어질 때 다시 고개를 들 것입니다. 대세는 어둡습니다. 하지만 그 어둠의 끝에서 인류가 맞이할 강제적인 각성과 대전환 역시 거부할 수 없는 지구 생태계의 거대한 대세가 될 것입니다. 인류의 미래는 아름다운 승리가 아니라, 상처투성이로 살아남아 자연 앞에 무릎 꿇는 겸손한 참회의 형태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6-06-15

李의 노골적인 ‘TK패싱’··· 정치권은 뭐하나

삼성전자·SK하이닉스 반도체 투자와 2차 공공기관 배정의 ‘호남 우선’ 이 진행되면서 대구·경북(TK)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 추경호 대구시장 당선인과 이철우 경북지사는 지난주 SNS를 통해 “명백한 지역차별”이라고 비판했다. 추 당선인은 “국가 균형발전은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했고, 이 지사는 “전남·광주는 되고 대구·경북은 안된다는 것이야말로 명백한 지역 차별”이라고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재명 대통령이 오는 29일 기업 총수 간담회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반도체 설비 투자를 호남·충청권으로 신규 확대하는 방안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지난 8일 취임 1주년 회견에서 “곧 대규모 투자 프로젝트를 공개할 것이다. 영·호남 문제에 있어선 호남에 조금 더 균형을 맞춰야겠다”며 지역차별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혔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도 지난 11일 페이스북을 통해 ‘호남 반도체 공장’ 필요성을 거론했었다. 오는 9월 확정될 2차 공공기관 추가 이전도 호남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주 호남지역을 방문한 김윤덕 국토부 장관은 “이재명 대통령의 철학에 맞게 2차 공공기관 이전의 초안을 잡았다. 늦어도 9월 안에는 전체적인 그림이 나올 것“이라면서 “이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정확히 반영된 2차 공공기관 이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호남 우선론’을 공공기관 배정에도 적용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게 이 대통령이 13일 엑스(X)에 올린 “‘우리 진영’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향한” 정치인지 묻고 싶다. 최근 이 지역민들 사이에서는 이렇게 가다가는 대구·경북이 정부지원 우선 순위에서 계속 밀리는 게 아니냐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TK지역민이 하나로 뭉쳐서 노골적인 지역 차별에 대응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앞장서서 싸워야 할 TK지역 국회의원들은 뒷짐을 지고 ‘강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하고 있으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2026-06-14

K자형 성장이 두려운 대구경북 경제

K자형 경제란 경기 회복이나 성장 국면에서 계층·산업·지역 간 격차가 커지는 현상을 말한다. 한쪽은 빠르게 좋아지고 다른 한쪽은 정체 혹은 약화되는 현상이다. 경제성장의 비대칭 구조다. 자산, 기술, 수출 등에 유리한 대기업과 관련 기업은 반등하지만 자본력이나 기술이 약한 지방 중소기업은 침체국면에 머무는 이중적 경제구조를 뜻한다. 지역별로 보면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대칭적 구조라 할 수 있다. 대구상의 설문 조사에서 대구지역 기업(445개사)의 60%가 “최근 1년간 자금사정이 악화됐다”고 답한 것은 반도체 수출의 역대급 호황이 지역중소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뜻이다. 삼성전자의 성과급 보상을 둘러싼 논란 역시 지역 간 또는 대중소기업 간 격차의 문제를 드러낸 K자형 경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5월중 고용동향에 따르면 반도체 경기 호황에 힘입어 수출이 역대급으로 치솟았지만 청년층의 고용률은 오히려 감소했다. 국내 전체 실업자 수가 87만8000명으로 전년동기보다 2만5000명이 증가했으며 특히 15-29세 청년층 실업률은 7.2%로 전년 동기보다 0.6%포인트가 상승했다. 반도체 호황과 거리가 먼 지방으로 갈수록 고용 사정은 더 좋지가 않다. 반도체 수출로 인해 경제가 놀라운 성적을 올리고 있지만 고용효과와는 연계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반도체 중심의 경제성장에 반해 전통적 제조업으로 영위하는 지방의 중소기업들은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등 3고 현상에 여전히 고전 중이라는 의미다. 반도체 중심의 경기회복이 마치 전국적 현상인 것처럼 바라보는 착시현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대구경북 경제는 아직 장기침체 속에서 머물러 있다. 오히려 K자형 경제로 지역 간 양극화가 더 커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걱정을 하는 중이다. 대기업의 반도체 지방 투자나 공공기관 지방 이전에 지자체가 목을 매달고 있는 것은 지역경제의 상대적 낙후를 우려한 때문이다. 수도권만 뜨겁고 지방은 식어가는 불균형 문제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2026-06-14

공자와 논어

‘논어’를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한 지 어언 20년이 지난다. 2006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나는 오직 ‘논어’만 주야장천(晝夜長川) 읽고 또 읽었다. 그리하여 2007년 2월 하순에는 6번 반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읽으면서 수긍이 간 대목, 낯설고 낡아진 대목, 전율을 삼킨 대목, 경이롭게 여겨진 대목 등을 에이4 용지 여섯 장 분량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개강을 코앞에 둔 시점에 아침 일찍 일어나 정리해둔 여섯 장 분량을 날마다 공책에 옮겨 쓰면서 그 의미를 뼛속까지 이해하려 노력한다. 강의 쉬는 시간에, 점심시간 이후 산책길에서, 운전하는 차 안에서 나는 6장 분량을 모든 구절을 통째로 기억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아울러 여름이 오기 전까지 ‘논어’ 완독 10회, 정리 분량 10장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논어’를 만나기 전까지 서양 학문, 그것도 러시아 문학을 연구해온 나는 공자와 그의 언행에 관한 기록에 태무심한 편이었다. 그러다가 50줄에 가까워지면서 삶의 돌파구 같은 것을 ‘논어’에서 찾은 것이다. 내가 읽은 ‘논어’ 번역본은 600쪽이 넘는다. 그런 연유로 나는 같은 책을 6000쪽 넘게 끈질기고 인내심 있게 읽고 또 읽고 나름으로 정리한 셈이다. 북송의 유학자 정자(程子)는 ‘논어’를 읽고 난 사람들의 네 가지 반응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긴다. 첫째,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 둘째 한두 구절을 얻고 기뻐하는 사람, 셋째, ‘논어’를 알게 돼서 기뻐하며 계속 배우려는 사람, 넷째, 자신도 모르게 손발을 움직여 덩실덩실 춤을 추고 마침내는 인생에 대한 태도와 자세를 바꾸는 사람이 그것이다. 나는 두 번째 부류에서 시작하여 세 번째 단계를 거쳐 네 번째 단계로 옮겨온 사람이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연각(緣覺)의 경지에 이른 상태라 할 수 있다. ‘논어’에서 시작한 동양고전 읽기는 그 후로 줄기차게 이어진다. ‘논어’와 연관된 여러 서책을 읽다가, 그렇다면 노자는 ‘도덕경’에서 장자는 ‘장자’에서 어떤 사유와 인식을 설파했는지 궁금해지는 게다. 나아가 사마천의 ‘사기’와 도가(道家)의 서책 그리고 ‘벽암록’을 비롯한 불가의 다채로운 서책을 두루 읽게 되었다. 서양 학문을 하다 보면 답답하게 여겨지는 대목이 미주알고주알 세세하게 따지고 나누고 분석하는 행위다. 그것은 자연과학에서 유용한 자세일 터, 인간 본연의 자세와 세계인식 그리고 삶에 대한 통찰을 다루는 인문학은 초월적인 관점도 중요하다. 적어도 40여 권 이상의 동양학 서책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읽으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고갱이를 곱씹어 생각하고 나의 생활철학 일부로 만들어가기에 이른다. 요즘도 ‘논어’나 ‘도덕경’, ‘장자’ 강연을 할라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러시아 문학 전공자가 웬 ‘동양학이냐?’ 하는 것이다. 교양의 헤아리기 어려운 분야와 깨달음을 생각하면 무척 뜨악한 물음이다. 요즘처럼 혼탁하고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위악(爲惡)의 시대에 동양고전은 우리가 나아갈 길과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 구실을 한다. 누구도 읽지 않는 고전을 읽음으로써 얻는 크고 작은 깨우침과 폐부를 찔러오는 통찰에 경탄하면서 환한 하루를 보낸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6-14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

최근 인사혁신처가 밝힌 육아휴직을 사용한 국가공무원 통계에 의하면 남성 공무원이 처음으로 여성 공무원보다 육아휴직을 더 많이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5년 기준, 남녀별 육아휴직 사용 비율은 남자가 56%다. 2016년 18.9%이던 것이 8년 만에 3배 가까이 증가했다. 1994년 공무원 육아제도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남성 육아휴직 사용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2014년 처음으로 30%를 돌파했지만 OECD국가와 비교하면 저조한 수준이다. 스웨덴, 포르투갈, 덴마크 등은 남성 비율이 40%를 넘는다. 정부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하면서 남성육아를 적극 권장하지만 아직은 남성육아가 선진국 수준에는 못 미친다. 자유롭게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는 기업문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육아를 여성 몫으로 생각하는 전통적 가치관 등이 남성육아 사용률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것으로 분석이 된다. 하지만 국가공무원 사회에서 남성 공무원의 육아휴직 사용이 여성보다 앞선 것은 고무적이다. 이것이 민간 영역으로 특히 중소기업 근로자들 사이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최근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논란이 됨에 따라 선관위 직원들의 육아휴직이 업무 기피용으로 악용됐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선거로 일이 많은 시기에 육아휴직을 사용한 것을 두고 한 비판이다. 법적으로 보장된 육아휴직제를 악용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남녀고용평등법 제정으로 시작된 육아휴직제는 워라밸 달성과 저출생 극복의 핵심 정책이다. 누구나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제도로 안착돼야 한다. 남성들의 적극 활용을 권장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6-14

축제는 많은데, 왜 지역은 살아나지 않는가

지난 가을, 포항 원도심에서 ‘다시 육거리’라는 행사를 진행했다. 한동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오래 비어 있던 공간을 빌려 건축 전시와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학생들이 기획과 기록의 주체로 나섰고, 지역 상인과 시민들도 적막했던 공간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언론과 기관의 주목도 받았다. 무엇보다 대학이 지역재생의 관찰자가 아니라 실행 주체로 참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프로젝트였다. 동시에 공실이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기대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난 지금, 그 공간은 다시 공실로 남아 있다. 잠시 활력을 되찾았던 거리는 다시 적막해졌다. 이 경험은 지역의 여러 축제와 이벤트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행사가 성공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언론에 몇 줄 나고 사람들이 잠시 모였다 가면 충분한가, 아니면 행사가 끝난 뒤에도 공간과 상권이 다르게 작동해야 진짜 성공인가. 전국의 지방 도시마다 축제가 있다. 포항에도 축제와 행사는 많고, 경북 전체로 보아도 적지 않다. 잘 설계된 이벤트는 지방도시에 필요하다. 조용하던 거리에 사람이 모이고, 밤에는 조명이 켜지며, 음식과 음악과 만남이 도시의 공기를 바꾼다. 행정이 예산을 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축제가 얼마나 화려했는가 보다, 지역 안에 어떤 구조를 남겼는가를 물어야 한다. 방문객이 어느 상점에 들어갔는지, 빈 공간이 다음 사용으로 이어졌는지, 청년 창업팀이 시장을 검증했는지, 상인과 주민이 다음 행사의 주체가 되었는지를 봐야 한다. 축제 예산은 지역 안에서 순환되는 투자여야 한다. 본래 이벤트의 목적은 ‘차별화’였다. 그러나 지금 많은 지역 이벤트는 서로 닮아가고 있다. 비슷한 무대, 부스, 푸드트럭, 체험 프로그램이 반복된다. 잠깐의 활력은 만들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역의 정체성이 되기 어렵다. 일시적 다름이 구조적 다름으로 바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조적 다름은 남들과 다른 행사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역의 상점, 음식, 청년, 빈 공간, 학교, 주민, 방문자가 연결되어 다른 도시가 복제할 수 없는 작동 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많은 축제는 지역의 이름과 이미지는 사용하지만, 정작 이런 생태계는 만들지 못한다. 사람은 많지만 기존 소상공인은 주변부에 머물고, 방문객은 잠시 소비하고 떠난다. 골목상권을 살리겠다는 야시장도 마찬가지다. 외부 야시장 업체가 내려와 한몫 챙기고 떠나는 구조라면 아무리 인파가 몰려도 지역 상권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야시장은 하루 장사판이 아니라, 지역의 식재료와 청년 브랜드가 시장성을 검증받는 ‘테스트베드(실험장)’가 되어야 한다. 좋은 축제는 결과물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준비 과정부터 축제여야 한다. 상인이 메뉴를 개발하고, 학생이 안내 지도를 만들고, 주민이 골목을 정리하고, 청년이 콘텐츠를 만들고, 방문자가 올 이유를 갖게 해야 한다.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남길 것인가이다. 단순 이벤트는 도시를 잠시 깨운다. 그러나 구조적 다름과 생태계를 만든 축제만이 도시를 실제로 바꾼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6-14

진짜 어른이 필요하다

넷플릭스 ‘참교육’의 교실은 무너져 있다. 수업은 조롱거리가 되고, 폭력은 자랑이 된다. 가해 학생은 든든한 뒷배를 믿고, 교사는 입을 다문다. 그 폐허 속으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온다. 그는 선생 편도, 학생 편도 아니라고 말한다. 오직 피해자의 편이라고. 통쾌하다. 그러나 통쾌함이 가시고 나면 서늘한 질문이 남는다. 왜 이 일을 가상의 조직이, 가상의 인물이 대신해야 하는가. 현실의 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사실 드라마의 악당은 그리 무섭지 않다. 정말 무서운 것은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다. 폭력을 보고도 고개를 돌리는 동료, 민원이 두려워 사건을 덮는 관리자, 내 아이만 아니면 된다는 이웃. 우리는 언제부턴가 곁눈질하는 법을 배웠다. 나서면 손해라는 것을, 침묵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몸으로 익혔다. 단테는 지옥의 문 앞, 천국도 깊은 지옥도 받아주지 않는 자리에 한 무리를 세워 두었다. 살아서 칭송도 비난도 받지 못한 자들, 끝내 어느 편도 들지 않은 자들이다. 길잡이 베르길리우스는 그들을 두고 말한다. 입에 담지 말고 그저 보고 지나가라.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잊히는 것, 그것이 방관의 값이었다. 그런데 요즘, 오래 잠잠하던 무언가가 움직인다. 6·3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가 모자라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지난 선거 직후, 올림픽공원 개표소 앞을 가득 메웠던 이들의 절반은 2030이었다. 그들은 부정선거 음모를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구호와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그 정도면 됐다’는 말이다. 한 표의 무게를, 절차의 공정을 그렇게 함부로 다뤄선 안 된다는 것이다. 헤세는 ‘데미안’에서 썼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고.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어쩌면 어른은 나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불의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하지만 어른의 자리는 비싸다. 우리 지역 대안학교 교장은 어긋난 한 학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세우려 애썼다. 돌아온 것은 몇 년째 이어지는 소송이었다. 학교는 휘청이고, 정작 그 학생도 학부모도 끝내 보호받지 못한다. 한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 대가는 엉뚱한 곳으로 번진다. 같은 교실의 다른 아이들과 부모들까지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정의로운 행동을 거듭하며 정의로워지고, 용감한 행동을 거듭하며 용감해진다고 했다. 용기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길러지는 습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용기 낸 한 사람만 대가를 치르고 나머지는 등을 돌리는 사회에서는, 그 습관을 기를 어른이 점점 사라진다. 진짜 어른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두려우면서도 끝내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진짜 어른은 용기 낸 사람을 혼자 세워 두지 않는다. 손을 든 교사 곁에, 광장에 선 청년 곁에, 소송에 휘말린 교장 곁에 한 사람이라도 더 서는 것. 그 작은 동행이 사회를 떠받친다. ‘참교육’의 통쾌함이 끝내 드라마 안에만 머문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패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니다. 곁눈질을 멈추고 피해자의 편에 서는, 평범한 어른들의 용기다. /이다영 포항시의원

2026-06-14

석계서원 모과나무

석계서원은 이예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곳이다. 넓은 들을 품어 안고 고즈넉하게 서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오래 된 모과나무이다. 족히 300년은 되었을 고목은 겹겹이 갈라지고 줄기 가운데 부분이 움푹 패어 비어있다. 그것이 오래 버텨온 나무의 시간을 말해준다. 가끔 오래 된 절이나 산에서 가운데가 뚫린 고목을 본 적이 있었지만 이 나무가 그 날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모과나무는 어릴 때에는 비교적 곧은 줄기를 가지고 있다. 세월을 겪으며 나무껍질이 조각조각 벗겨져 울퉁불퉁하게 된다. 벚꽃처럼 한 번에 활짝 피어나는 화려함과 화사함은 적지만 연분홍꽃이 피는 봄의 모과꽃은 그 자체로 충분히 단정하고 은은하며 아름답다. 원래 이 노목은 반대편에 서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 한다. 지금보다는 훨씬 매끈했을 시절에 옮겨지면서 꽤나 몸살을 앓았을 것이다. 굽어지고 가운데가 비어 있는 모습에서 골다공증으로 등이 굽은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일본에서 태어나 십 대 초반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노래를 잘 한 덕에 방과 후 자주 강당으로 불려 가 선생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외삼촌은 크면 꼭 음대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을 맞으면서 한국으로 돌아온 엄마는 바뀐 여러 가지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열 식구가 넘는 대가족이 외삼촌 단 한 사람의 수입에만 의존해야 했으니 그런 환경에서 자신의 뜻을 고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타이피스트로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을 하며 하고 싶은 공부와 꿈은 멀리 사라졌다. 접어 버린 음악에 대한 미련은 마음속에 내내 갖고 계신 듯 했다. 지금도 가끔 일본에 계속 살았으면 어땠을까 내게 묻기도 한다. 서원의 모과나무는 등이 굽고 비어있는 모습과는 반대로 무성한 잎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 사이로 꽃이 진 흔적이 보였다. 시멘트를 발라주던가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일행의 말에 서원을 관리하는 분은 꽃이 피고 모과를 맺는데 큰 문제가 없으며 아직도 가을이면 제법 많은 모과를 수확할 수 있다고 했다. 젊은 날 노래를 좋아하고 춤을 즐기던 엄마는 그 호방함도 곧았던 기품도 사라지고 골다공증으로 인해 등이 많이 굽었다. 나보다 한 뼘쯤은 더 컸던 키가 이제는 한 뼘 정도 더 작아진 아주 자그마한 구순의 노인이 되어버렸다. 몇 달에 한 번씩 서울을 방문하면 딸이 오는 시간쯤엔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손에 꼭 비가 들려 있다. 골목을 쓸고 계신 것이다. 굽은 등의 작은 몸으로 집 앞과 골목을 쓸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울컥 한다. 이제는 그런 일은 하지 말라고 해도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거라고 하신다. 골다공증으로 내려앉는 뼈가 주는 고통과 탈장으로 늘 통증을 달고 살면서도 말이다. 모과나무는 오랜 시간을 겪으며 곧게 자라지 못하고 속을 비워내며 지금의 모양에 이르렀을 것이다. 굽고 속이 텅 비어버린 것이 그간의 사정을 무언으로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비어 있다는 것은 상실이기도 하지만 버텨낸 시간의 흔적이기도 하다. 굽어 있고 거칠어져 볼품은 없어졌지만 가을이면 향기를 진하게 품어내는 열매를 아직도 맺고 있단다. 이 나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방식이다. 일본의 작은 도시에서 꿈을 키워나가던 묘목 같은 소녀는 이제 노목이 되었다. 엄마의 시간도 모과나무처럼 그렇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꿈을 접고 자신을 조금씩 덜어내는 연습을 무수히 많이 했을 것이다. 그건 엄마의 꿈을 잃어가는 상실이기도 했지만 자녀를 키우며 버텨나간 엄마만의 시간이기도 했다. 굽은 등 역시 가족과 세월의 무게를 지탱해 온 거룩한 곡선임을 믿는다. 엄마의 그 버팀으로 우리 삼남매는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가을이 되어 모과의 향기가 짙게 배어 나올 때 서원의 모과나무를 다시 보고 싶다. 멀리 계셔 자주 만나지 못하는 엄마의 향기가 거기에 머물러 있을 것 같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6-06-14

집 한 채의 가격, 이제 AI가 먼저 안다··· 건설·부동산 AI의 현재

■ 집을 짓기 전, 컴퓨터가 먼저 짓는다 사람들은 흔히 건물이 세워지는 순서를 이렇게 상상한다. 설계사가 도면을 그리고, 시공사가 땅을 파고, 인부들이 벽돌을 쌓는다. 그러나 오늘날 대형 건설 현장에서는 이 순서보다 앞서는 단계가 하나 더 생겼다. 컴퓨터가 먼저 그 건물을 짓는다. 이른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이라 불리는 기술이다. 실제 건물을 세우기 전에 컴퓨터 안에서 똑같은 건물을 가상으로 완성하고, 바람의 방향, 햇빛의 각도, 자재의 강도, 지반의 상태, 공사 일정까지 수백 번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실수는 컴퓨터 안에서만 발생하고, 현장에서는 이미 검증된 결과대로 시공이 이루어진다. 마치 비행기 조종사가 실제 비행 전에 모의비행 훈련을 거치듯, 건설 현장도 이제 디지털 예행연습을 마치고 착공한다. 현대건설은 6.4km에 달하는 남양주 왕숙 입체 지하도로 전 구간을 디지털 트윈 시스템으로 통합 모니터링하면서, 공사 중 돌발 상황에도 신속한 의사결정이 가능한 환경을 구현했다. 삼성물산 역시 중동의 대형 플랜트 프로젝트에서 디지털 트윈 기반 가상 시공 모델을 도입해 착공 전 수십 차례 시뮬레이션을 반복한 결과, 설계 변경 건수를 35% 이상 줄이는 성과를 거뒀다. ■ AI가 설계를 최적화하는 방식 AI가 건설 설계에 개입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생성형 설계(Generative Design)다. 건축가가 조건을 입력하면 AI가 수백, 수천 가지 설계안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주택 설계 전문 AI 메이켓(Maket)은 주거 평면과 3D 모델을 자동으로 생성하고 지역 건축 법규까지 검토해 규정에 맞는 설계안을 제안한다. 부지 개발에 특화된 AI 테스트핏(TestFit)은 대지 면적과 요구 조건을 입력하면 최적화된 건물 배치와 용적률 계산까지 자동으로 수행한다. Brunch 둘째는 BIM(빌딩정보모델링·Building Information Modeling)과의 결합이다. BIM은 건물의 3차원 디지털 설계도다. 평면 도면이 종이 지도라면 BIM은 내비게이션에 가깝다. 여기에 AI가 더해지면 설계 단계에서 자재 사용량, 에너지 소비량, 공사비까지 자동으로 계산되고 오류가 자동으로 탐지된다. 현대건설은 2025년 스마트건설 챌린지에서 AI 기반 자동화 기술로 BIM 분야 최우수 혁신상을 수상했다. 국내 시공 능력 평가 30위권 기업 중 86.7%가 이미 BIM을 도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토교통부는 2026년까지 3432개에 달하는 국가 건설기준 전체를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하는 사업을 완료할 예정이며, 이 데이터가 민간에 무료로 개방되면 설계 자동검토와 시방서 자동 작성 등 다양한 AI 솔루션 개발이 가능해진다. 지금까지 두꺼운 종이 문서로만 존재하던 건설 기준이 AI가 직접 읽고 판단할 수 있는 데이터로 바뀌는 것이다. ■ 부동산 가격, AI가 먼저 계산한다. 건물을 짓는 것만큼이나 우리 생활과 밀접한 문제가 있다. 내가 사려는 집이, 팔려는 땅이 과연 제값인가 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부동산 가치평가는 감정평가사가 현장을 방문하고 비교 사례를 분석하는 방식이었다. 같은 땅인데 누가 평가하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이 문제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정보의 비대칭성이 구조적으로 약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온 시장이 부동산 시장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AVM, 즉 자동가치평가모델(Automated Valuation Model)이다. 과거 거래 데이터, 주변 시세, 교통, 학군, 상권, 건물 노후도 등 수십 가지 변수를 AI가 동시에 분석해 해당 부동산의 추정 시세를 자동으로 산출하는 시스템이다. 같은 주소지라도 층수, 향, 엘리베이터 유무, 리모델링 이력까지 반영해 개별 호실의 시세를 산출한다. 국내 빅데이터 기반 부동산 플랫폼인 부동산플래닛은 2025년 상가·사무실을 대상으로 AVM 서비스를 출시했다. 22만여 건의 실거래 데이터를 학습한 결과, 서울 지역 기준 예측 오차율이 5.80%에 불과하고, 오차 10% 이내 비율이 90%를 넘었다. 한국부동산원도 AI 기반 이상거래 모니터링 시스템을 강화해 허위 거래나 투기성 매매를 자동으로 탐지하는 기능을 도입했다. ■ 정부 정책과 AI: 빛과 그림자 AI가 부동산 시장의 투명성을 높이는 사이, 정부도 이 흐름에 올라타고 있다. 정부는 출범 이후 부동산 문제를 핵심 경제 과제로 삼고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다. 긍정적인 면도 있다. 무주택자라면 소득과 자산에 관계없이 저렴한 임대료로 30년 이상 거주할 수 있는 기본주택 정책, 수도권 집값 급등에 대응한 주택담보대출 상한 규제, 공직자의 다주택 보유를 부동산 정책 입안에서 배제하는 조치 등은 투기 수요를 억제하고 주거 안정을 꾀하는 방향이다. 출범 1년이 지난 현재, 매매 시장의 폭등세가 진정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그림자도 분명하다. 금융 규제가 강화되면서 무주택 서민의 실수요 접근이 어려워졌고, 규제 풍선효과로 전세 시장이 불안정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수도권 집값 상승률이 2025년 한 해 11%를 넘어선 반면, 지방과 수도권 외곽은 여전히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고, 서울 상위 20%와 하위 20% 집값 차이는 역대 최고인 12.8배까지 벌어졌다. 정책이 수도권 투기 억제에 집중하는 사이, 지방 주택 시장의 현실은 전혀 다른 처방이 필요한 상황이 됐다. AI를 통한 수요·공급 데이터의 정밀한 분석 없이는, 정책 효과가 지역별로 엇갈리는 불균형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 포항의 역설: AI 시대의 공급 폭탄 포항의 현실은 이 역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인구 50만의 포항에서 2021~2022년에만 무려 1만5000가구 이상이 일시에 공급됐고, 2024년에는 1만1000여 세대가 추가 입주했다. 국토교통부 기준 연간 신규 주택 적정 수요의 두 배가 넘는 물량이 한꺼번에 시장에 풀린 것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남구 이동, 북구 양학동 등 대단지 아파트에서는 급매물이 속출하고, 5억 원대 분양 아파트가 4000만 원씩 빠져도 팔리지 않는다는 현장 목소리가 나왔다. 포항자이애서턴, 분양 당시 인기 단지에서도 수천만 원의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발생했으며, 분양가 5억 원대 물건이 4000만 원 넘는 손실을 보고 처분된 사례도 확인됐다. 2027년까지 추가 입주 물량이 예정돼 있어 시장 조정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만약 분양 당시 AI 기반 수요예측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어땠을까. 공급 과잉의 신호는 데이터 안에 이미 있었다. 인구 감소 추세, 세대수 변화, 주변 미분양 현황, 적정 수요 대비 공급 비율-이 모든 정보를 AI가 통합 분석했다면, 적어도 이 정도의 충격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AI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이기 이전에, 문제를 미리 보는 눈이 될 수 있다. 그 눈을 외면한 결과가 지금 포항 계약자들이 짊어진 수천만 원의 손실이다. 기술의 도입보다 기술을 활용하는 의지와 제도가 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것 그러나 기술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토데스크의 2024년 보고서에 따르면 건축·엔지니어링·건설 분야 기업의 76%가 향후 3년 내 AI 투자 확대를 계획하면서도, AI 설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건축가가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적절한 조건을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AI는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적해를 찾을 뿐이다. 어떤 삶을 위한 공간인지를 묻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집은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침에 어느 방향에서 햇빛이 들어오는지,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노는 소리가 이웃에게 얼마나 들리는지, 노부모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 얼마나 편안한지-이런 삶의 감각들은 데이터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부동산 가치 역시 마찬가지다. 바로 옆 골목에 오래된 분식집 한 채가 있어 동네의 분위기가 살아있다는 사실, 3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만들어내는 그늘의 가치는 어떤 알고리즘도 완전히 수치화할 수 없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공간의 시학’에서 집은 우리의 첫 번째 우주라고 했다. AI는 이 첫 번째 우주를 더 효율적으로 짓고 더 정확하게 값을 매기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집에 어떤 삶의 온기를 불어넣을 것인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포항의 빈 아파트들이 말없이 던지는 질문도 결국 같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어떤 집을 짓고 있는가.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6-14

SMR 국책사업 부지는 경주가 최적지다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지난 6월 11일 방사성폐기물 증가에 대비하여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검사 건물 신축을 허가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수십 년간 경주 땅을 지켜온 한 사람의 주민으로서 참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가슴 한편이 묵직해지면서도, 우리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마침내 하나의 큰 그림으로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어서다. 돌이켜보면, 2005년 중·저준위 방폐장을 우리 경주에 품기로 했던 그 뜨거웠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주민들 사이에서는 갈등도 많았고, 밤잠을 설치며 서로를 설득하던 치열한 시간들이 있었다. 국가를 위해 큰 희생과 결단을 내리면서도, ‘경주가 단순히 폐기물만 묻어두는 곳이 아니라, 대한민국 원자력 산업의 중심이자 안전 중심의 도시로 성장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 하나로 그 힘든 과정을 버텨내고 합의를 이뤄냈다. 그 뒤로 문무대왕과학연구소가 들어설 때도, 우리 주민들은 원자력 시설과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하며 적극적으로 손을 들어주었다. 경주사회가 원자력 시설을 두고 겪어온 갈등과 화합은 대한민국 원자력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다. 주민들은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을 쌓았고, 성숙한 ‘주민 수용성’은 이제 지역의 자산이 됐다. 경주시가 국책사업 SMR 유치에 나선 것은 그런 자신감이 바탕이 됐을 것이다. 개인적으론 정답은 나와 있다고 본다. SMR에서 나올 폐기물을 받아주고 안전하게 검사할 집(방폐장)까지 바로 여기 경주에 있는데, 그 SMR 초도호기를 다른 데 지을 이유가 어디 있을까? 또 발전소를 짓고 운영하는 일부터, 거기서 나오는 폐기물을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처분하는 일까지 한자리에서 물 흐르듯 해결할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에서 우리 경주가 유일하다. 과거의 방폐장 유치가 국가를 위한 경주 주민들의 과감한 ‘희생‘이었다면, 이번 i-SMR 초도호기 유치는 그 희생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자 경주가 세계적인 원자력 메카로 도약할 ‘미래‘다. 원자력 시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오랜 세월 갈등을 딛고 신뢰를 쌓아온 우리 경주. 이 정도면 정부는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다. 방폐장과 SMR 국책연구기관인 문무대왕과학연구소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현실적 이점과 세계 최고 수준의 주민 수용성을 갖춘 우리 경주에 i-SMR 초도호기 유치는 그 희생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자 경주가 세계적인 원자력 메카로 도약하기 위한 최소한의 인프라다. 이재명 정부는 실용성을 주창하고 있다. 이번 SMR 선정 과정도 정부의 그런 원칙이 적용되리라 생각한다. 어떤 경우든 정치권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배가 산으로 가게 될 것이 뻔하다. 경주는 지금 정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김종순 원자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

2026-06-14

반도체 벨트에서 밀린 TK, 특단 대책 나와야

오는 29일 열리는 이재명 대통령과 주요 그룹 총수 간담회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지방투자 계획이 발표될 것으로 보인다는 소식이다. 이미 알려진 바에 의하면 삼성전자는 광주에 첨단 패키징(후공정) 공장을 건설할 것으로 소문이 나 있고, SK하이닉스도 경기와 충북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후공정 생산기지를 호남권에 세우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측은 “모르는 일”이라며 공식 확인을 피하고 있으나 간담회 일정으로 보아 계획이 변경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도 취임 1년 기자회견에서 “수도권 집중을 타개하고 지방균형발전을 위해 지방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를 하겠다”고 밝힌 바 있어 이번 대기업의 투자도 정부 의도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같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TK의 미래를 걱정하는 글들이 벌써 쏟아지고 있다. 오랜 기간 생산 인프라를 다지며 대기업 투자를 애타게 기다려 왔던 구미시는 물론 대구경북의 입장에서는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번 투자가 단순히 공장을 지방으로 이전하는 수준이 아니고, 국가 신산업의 재편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지역민이 받는 소외감은 크다 할 수 있다. 이번 대기업의 지방투자는 전력과 용수가 고갈된 수도권을 벗어나야 하는 불가피성이 있다. 호남 투자를 결정한 배경에는 태양광·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의 잠재력이 풍부해 전력 공급망이 좋다는 장점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대구경북의 입지 조건이 호남보다 못할 것도 없다. 국내 원전의 절반이 이곳에서 가동되고 풍부한 용수, 대학을 통한 인력 배출까지 어디보다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 반도체 배치가 호남이 옳으냐 영남이 옳으냐를 두고 다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지역민의 소외감을 털어주고 이번 기회에 대구와 경북도 시대에 맞는 특단의 조치를 강구하자는 것이다. 대구시와 지역 정치권이 합심해 나아갈 방향을 잘 잡고 전략도 지혜롭게 세워야 한다.

2026-06-11

정점식의 제1과제는 ‘당 이미지’ 바꾸는 것

국민의힘 신임 원내대표로 10일 경남 출신 3선 정점식 의원이 선출됐다. 정 의원은 이번에 대구·경북 의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윤석열 정부 때 국민의힘 비대위원, 정책위의장 등을 지내다가 2024년 8월 한동훈 의원이 당 대표로 취임하자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국민의 관심은 신임 원내대표가 과연 ‘친윤’이라는 국민의힘 색깔을 바꿀 수 있는 리더십이 있느냐다. 정 원내대표 앞엔 현안이 산적해 있지만 최우선 과제는 ‘당의 얼굴’인 장동혁 대표의 거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원내대표 선거에서 낙선한 김도읍 의원은 “우리는 줄기차게 장 대표의 노선 변화를 요구했지만 당의 노선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방선거를 치른 결과 강원도지사, 인천시장, 충남도지사, 대전시장, 세종시장, 울산시장, 부산시장 등 소중한 동지들이 모두 떨어졌다”고 했다. 정 원내대표와 김 의원의 결선 표차가 7표(전체 103표)밖에 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내에서는 김 의원 주장에 동조하는 의원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 안팎에서는 ‘도로 친윤당으로 돌아갔다’는 말도 나오는 모양이다. 정 원내대표는 이에 대해 “뼈 아프게 받아들이겠다”면서도 “누차 말씀드린 것처럼 친윤이란 계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국민의 생각은 다르다. 여전히 국민의힘 주류를 친윤계로 보고 있다. 일각에선 이번 선거 결과가 오히려 장 대표 체제에 시간을 벌어준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나온다. 정상적인 정당이라면 지방선거나 총선에서 패배할 경우, 지도부가 책임지고 사퇴하는 게 당연한 이치다. 신임 원내대표 임기는 2028년 총선을 약 1년 앞둔 내년 6월까지다. 그의 앞엔 장 대표 거취 문제 말고도 숙제가 쌓여있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총선 승리를 위해 ‘친윤’이나 ‘영남당’ 이미지를 하루빨리 탈피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성과를 내기 힘든 ‘대여(與) 협상’을 핑계로 당의 살길을 찾는데 소홀히 할 경우, 국민의힘은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

2026-06-11

달아 오르는 월드컵 열기

오늘부터 제23회 FIFA 월드컵이 개막된다. 전 세계 축구팬의 시선이 공동 개최국인 미국, 캐나다, 멕시코 3개국에 쏠린다. 1930년 13개 팀으로 시작한 월드컵은 이제 전 세계 200개가 넘는 나라에서 월드컵 참가를 위해 2년 동안 치열한 예선을 치른다. 올해 본선 진출 국가만 48개국이다. 참가팀 규모에서뿐 아니라 흥행 측면에서도 초창기와는 분위기가 딴판이다. 이날 개막을 시작으로 다음 달 19일 월드컵 결승전까지 약 한달 간 모두 104개 경기가 펼쳐지며 이제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른다. 월드컵 경기를 보는 지구촌 인구는 대략 2억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유럽 국가 대부분은 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월드컵 경기를 시청했다는 통계가 있다. 월드컵의 뜨거운 흥행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선수들의 뛰어난 기량과 월드컵 스타 탄생을 보는 재미가 제일 특별하다. 올해 출전선수 중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로 3명이 꼽힌다. 프랑스 대표팀 주장 킬리안 음바페, 노르웨이 대표팀 간판 공격수 엘링 홀란드 그리고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10대 천재선수 야말 등이다. 이들의 몸값은 한 사람당 대략 약 2억 유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3143억원이다. 특히 리틀 메시라 불리는 야말의 활약에 축구팬의 관심이 뜨겁다고 한다. FIFA 월드컵의 흥행을 노린 사이버 범죄도 벌써 기승이다. 글로벌 보안기업 포티넷은 월드컵 신규 도메인으로 1만3000개가 등록했으나 그중 8.8%가 악성 또는 의심 도메인이라 했다. 팬들이 티켓을 구하거나 중계방송을 찾는 일상적 행동 전반이 사이버 범죄자의 공격 대상이 된다.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6-11

재판에 세 번 나오지 않은 변호사

변호사의 업무는 단순히 서면을 작성하고 법률 지식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의뢰인의 인생에서 가장 절박한 순간, 법정이라는 마지막 공간에서 그 목소리를 대신 전달하는 것이 변호사의 존재 이유이다. 그렇기에 변호사에게 있어 재판 출석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직무이다. 그런 점에서 ‘조국흑서’의 저자로도 유명한 권경애 변호사의 이른바 2023년 ‘재판 불출석 패소 사건’은 단순한 실수로 보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2015년 학교폭력 피해 후 극심한 고통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고(故) 박주원 양의 유족은 가해 학생과 학교 관계자들을 상대로 긴 법적 투쟁을 시작했다. 1심은 일부 학교폭력 사실은 인정했지만, 학교폭력과 피해자의 사망 사이의 법적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대부분의 청구를 기각했고, 이에 유족은 항소했다. 그러나 사건을 맡은 권경애 변호사는 항소심 변론기일에 세 차례나 출석하지 않았다. 민사소송법에 따르면 당사자가 변론기일에 두 차례 불출석한 뒤 다시 지정된 기일에도 출석하지 않으면 소를 취하한 것으로 간주한다. 권 변호사의 변론 불출석으로 항소는 취하 간주되었고, 유족들은 억울함을 풀 기회를 영영 잃게 되었다. 변론 불출석의 불이익이 이처럼 크기 때문에 통상 변호사가 재판에 나가지 않는 일은 극히 드물다. 변호사의 업무는 재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론 출석은 다른 업무보다 우선되며, 불가피하게 출석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 영상재판을 신청하거나 기일 변경을 요청하고, 다른 변호사를 대리 출석시키는 등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하지만 권 변호사는 그러한 최소한의 조치조차 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패소 결과가 나온 이후였다. 권 변호사는 항소심이 사실상 패소로 종료된 사실을 약 5개월 동안 의뢰인에게 알리지 않았고, 그 사이 상고 기간마저 지나가 버렸다. 법이 보장한 마지막 재판의 기회가 변호사의 과실로 사라진 것이었다. 이후 유족들은 권 변호사와 소속 법무법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얼마 전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었다. 법원은 권 변호사의 책임에 대해 “거의 고의에 가까울 정도로 주의를 결여한 중대한 과실”이라고 판단하며, 위자료 6500만 원과 이행약정금 9000만 원의 지급을 명했다. 재판은 판사가 하지만, 법정의 문을 열고 의뢰인의 목소리를 법정에 전달하는 사람은 변호사다. 그러나 권 변호사는 학교폭력으로 딸을 잃은 부모의 대변인이 되어주기는커녕, 이미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유족의 가슴에 또 하나의 깊은 대못을 박았다. 이 사건으로 2023년 대한변호사협회는 권 변호사에게 정직 1년의 징계를 내렸다. 아마 지금 그는 아무런 제한 없이 변호사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혹여 실수로라도 재판 시간을 놓칠까 봐 늘 긴장하며 일하는 수많은 변호사들에게도 이 사건은 큰 수치로 남았다. 변호사로서 감히 있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그 잘못의 대가가 과연 1년간의 업무정지로 충분한 것일까. 과거 특정 정치인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권경애 변호사는 이제 다른 누군가를 비판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이 변호사로서 저지른 과오의 무게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 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6-06-11

‘미래폐자원’

대구경북의 다음 광산은 먼 해외 산맥이 아니라 우리 집 서랍 속 휴대전화, 수명을 다한 전기차 배터리, 공장 안 공정 스크랩 속에 있을지 모른다. 예전에는 고장 난 전자제품과 폐배터리를 그저 처리해야 할 쓰레기로 보았다. 그러나 전기차, 풍력발전, 인공지능, 첨단 정보통신 산업이 커질수록 리튬, 니켈, 코발트, 희토류 같은 핵심광물의 가치는 더 커지고 있다. 한국은 배터리와 반도체, 자동차를 잘 만드는 나라지만 핵심광물 정·제련 제품은 해외 의존도가 높다. 공급망이 흔들리면 지역 산업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가 ‘미래폐자원’ 순환이용 강화에 나서는 이유이다. ‘미래폐자원’은 환경문제를 넘어 자원안보, 산업경쟁력, 탄소중립을 함께 다루는 새로운 지역 의제다. ‘미래폐자원’이란 첨단산업에 다시 쓸 수 있는 핵심광물을 품은 폐제품과 부산물을 말한다. 전기차 배터리에는 리튬·니켈·코발트가, 통신장비와 인쇄회로기판에는 금·구리·은·희소금속이 들어 있다. 전기차 모터와 풍력발전기의 영구자석은 네오디뮴 같은 희토류 회수의 중요한 대상이다. 이런 자원이 해외로 빠져나가거나 단순 고철로 처리되면 지역은 원료와 경제적 기회, 탄소감축 가능성을 함께 잃는다. 배터리는 안전하게 방전하고 해체한 뒤 성능을 평가하고, 습식제련이나 직접 재활용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PCB와 통신장비는 귀금속과 구리를 정밀하게 회수하는 일이 중요하다. 다만 재활용이 언제나 자동으로 탄소를 줄이는 것은 아니다. 사용하는 전기의 종류, 공정 효율, 수거체계에 따라 효과는 달라진다. 그래서 ‘미래폐자원’ 정책은 단순히 많이 모으는 일을 넘어, 안전하고 깨끗하게 다시 산업원료로 돌리는 체계가 되어야 한다. 대구경북은 이 분야에서 충분한 출발점을 갖고 있다. 대구는 미래모빌리티 부품, 인쇄회로, 제어용 케이블, 사용후 배터리 시험평가센터를 바탕으로 수거·평가·안전해체·데이터 관리 중심의 도시형 거점이 될 수 있다. 경북은 포항의 이차전지 소재산업과 구미의 전자·통신 제조기반, 시험인증 인프라를 바탕으로 회수 소재를 다시 산업에 투입하는 실증 거점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대규모 재활용공장부터 서두르는 일이 아니다. 먼저 지역에서 어떤 폐자원이 얼마나 발생하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조사해야 한다. 소형 ICT 기기와 폐가전 수거망을 넓히고, 사용후 배터리 이력관리, 안전해체·선별·전처리 거점, 재생원료 인증, 지역 기업 장기구매계약을 단계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폐자원’ 순환이 폐기물 감량, 지역 일자리 창출, 첨단산업 공급망 안정, ESG 경영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미래폐자원’은 ‘버릴 것’이 아니라 ‘다시 쓰는 산업원료’이다. 대구경북은 생활 속 소형가전부터 공장 스크랩, 사용후 배터리, 영구자석까지 지역 단위 순환체계를 촘촘히 만들어야 한다. 정부 전략과 지역 산업 기반을 연결한다면 ‘대구경북형 핵심광물 순환경제 모델’을 선도할 수 있다. 탄소중립은 에너지를 덜 쓰는 일뿐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자원을 오래 쓰고 다시 쓰는 일에서 시작된다. 대구경북의 다음 광산은 먼 해외가 아니라 우리 생활과 산업 현장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6-06-11

석인성시(惜吝成屎)

백화점 할인권의 유효기간이 지나버리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소비 기회를 잃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언젠가’를 믿으며 현재를 유보하는 삶의 태도가 응축되어 있다. 이른바 석인성시(惜吝成屎), 惜(아낄 석), 吝(아낄 린), 成(이룰 성), 屎(똥 시), 즉 우리 같은 평범한 부류들이 흔히 하는 말로 ‘아끼고 아끼다 똥 된다’라는 말이다. 아끼고 아끼다 결국 아무 쓸모 없게 된다는 자조적 표현은 더 이상 개인의 습관을 넘어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말이 되었다. 돌아가신 부모의 유품에서 발견되는 새 옷들, 중요한 날을 위해 남겨둔 술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한 채 상해버린 이야기들은 낯설지 않다. ‘좋은 날’은 늘 미래에 있었고, 그 미래는 끝내 현재로 오지 않았다. 근검 절약은 분명 미덕이다. 그러나 과도한 유보는 결국 삶 자체를 유예시키는 선택이 된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을 넘어 사회 전반에서도 반복된다. 평생을 모은 재산을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사례, 필요 이상으로 쌓아둔 물건들이 결국 쓰레기가 되는 현실은 ‘축적’에 대한 집착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준다. 문제는 그 축적이 삶의 질을 높이기보다 오히려 삶을 옥죄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보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의 불안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중복되고 과도하게 가입된 상품들은 정작 필요한 순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준비는 필요하지만, 준비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낭비로 변질되고 마는 것을 우린 자주 보게 된다. 일상의 작은 사례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적립해 둔 사진관 스티커가 정작 사진관이 사라지면서 무용지물이 되거나, 운전면허 갱신을 차일피일 미루다 기한을 넘겨 불필요한 벌금과 교육을 감수해야 하는 일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보다 더 크게 남는 것은 따로 있다. 바쁘다는 이유로 부모나 친구에게 연락을 미루고, 함께할 시간을 아껴두다 끝내 충분히 나누지 못한 기억이다. 아껴둔 것은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관계를 소모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다 보니 남는 건 후회뿐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아끼는 것’에 집착하는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결핍의 기억, 그리고 사회적으로 내면화된 절약의 윤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현재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이라면, 그 미덕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아낌과 사용, 준비와 향유 사이의 균형이 무너질 때 삶은 왜곡된다. 지금 필요한 것을 적절히 쓰고,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다. ‘아끼다 똥 된다’라는 속된 표현 속에는 의외로 날카로운 통찰이 담겨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의미를 알면서도 반복한다는 데 있다. 더 늦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아끼고 있으며, 그 대가로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이제는 주위를 돌아볼 때다. 우리가 아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아끼고 있는 것인지 그 가치를 새삼 논할 필요성을 느껴본다. /노병철 수필가

2026-06-11

‘닮은 듯 다른···’ 괴산 트리하우스와 충주 우림정원

초록의 싱그러움이 더욱 짙어지는 6월이다. 기온은 점점 올라가고 습도도 높아진다. 번잡한 일상에서 도심을 벗어나 지친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치유의 공간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은 어디며, 독특한 풍경과 테마로 지역의 감성 여행지로 자리 잡은 곳은 또 어딜까. 그러한 요건만 갖추어진다면, 그곳이 바로 우리가 찾는 진정한 힐링의 공간이 아닐까. 전국에는 내로라하는 유명 명소들이 많다. 전남 고흥의 쑥섬, 지리산 자락의 쌍산재, 칠곡의 가산수피아, 경남 고성의 만화방초, 익산의 아가페정원, 춘천의 남이섬, 제주의 동백포레스트 등이다. 그렇다면 방금 열거한 이곳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나라에 등록된 민간정원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정원의 개념이 알려지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2013년 3월부터다. 순천에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등록된 정원은 202개다. 국가정원 2개, 지방정원 16개소, 그리고 민간정원 184개소다. 그중에서도 민간정원은 법인·단체 또는 개인이 정성을 다해 가꿔온 정원을 국민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개방한 정원으로, 많은 사람들의 일상생활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많다. 그래서일까. 2024년 산림청에서는, 국민이 뽑은 ‘아름다운 민간정원 30선’을 선정해 발표하기도 했다. 이번에 소개할 여행지는 최근에 뜨고 있는 두 곳의 민간정원이다. 충북 괴산의 괴산 트리하우스와 충주의 우림정원이다. 부부가 힘을 합쳐 만든 정원이라는 공통점에다 분위기도 비슷해, 하루에 두 곳을 교차 방문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두 정원은 거리상으로 39km, 자가용을 이용하면 40분 남짓 떨어져 있다. 등록일 기준으로 괴산 트리하우스는 민간정원 제44호, 충주 우림정원은 제45호다. 괴산 트리하우스는 괴산군 불정면 한불로 1216번지에 있다. 마치 동화 속 풍경을 마주하듯 아름다운 꽃들과 초록의 수목이 어우러진 정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설립자는 임철오·홍정의 부부로, 정원을 가꾼 세월이 벌써 21년이다. 지난 2024년에는 산림청이 선정한 ‘아름다운 민간정원 30선’에도 뽑힐 정도로 그 지명도가 나날이 수직상승하고 있는 정원이다. 한 해 한 해 농사지어서 번 돈으로 묘목을 사고 땅을 샀다고 한다. 형편이 되는대로 매년 300주부터 1500주까지 묘목을 심었다고 한다. 이곳 정원을 방문해 보면 나무들의 잎과 색상이 유난히 아름답다. 정원의 대표가 은청색을 좋아해 은청가문비, 블루엔젤, 에메랄드그린, 스카이로켓, 황금누릅, 황금회화, 청단풍, 홍단풍, 괴불나무 등을 일부러 심은 결과다. 남편이 포크레인으로 직접 산을 정리하고 나무를 심으며 식물을 담당했다면, 아내는 손끝이 야물어 꼬마정원사, 원예치료사, 플로리스트 등의 자격증을 보유해 정원교육으로 지역 주민들과 소통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마음치유농장’으로도 선정돼 정서적·심리적 치유의 공간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숲의 정원을 둘러보다 보면 전망이 탁 트이는 곳이 많다. 발아래로는 황금 눈향나무가 융단을 깔고, 황금 회화나무들은 곳곳에서 노란 잎사귀들을 뽐내고 있다. 동쪽으로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 아래 충주시와 괴산군의 군계를 지나는 가섭지맥의 상봉과 고양봉, 앞산의 능선이 넘실거리며 산그리메를 그려내기도 한다. 입장료는 따로 없고 T-Garden(까페)에서 음료를 주문한 후 이용이 가능하다. 충주의 우림정원은 충북 충주시 엄정면에 자리한다. 최근 뜨고 있는 민간정원으로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아늑한 쉼터로 입소문을 타는 중이다. 정원의 명칭은, 정원을 개장한 설립자 부부의 성씨에서 따왔다. 2005년 3월에 단양 우(정희)씨와 풍천 임(문혁)씨가 귀촌하여 꿈에 그리던 정원을 가꾸고 부부의 성씨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부지의 면적은 4만3000m², 부부 두 사람이 직접 가꾸어 온 민간 정원치고는 이례적으로 넓은 규모다. 메타세쿼이아, 소나무, 불두화 등 150종의 수목과 함박꽃, 작약꽃, 마거릿 등 100종 이상의 초본류가 정원의 공간 안에 가득 심어졌다.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산책로, 돌탑, 연못, 솟대, 공연장, 예술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곳곳에 설치된 조각품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정원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장승이다. 설립자가 직접 만든 장승이 정원 곳곳에서 다양한 표정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1년 중 가장 많은 탐방객이 찾는 건 5월, 흰색∙핑크색, 붉은색 등 세 가지 색상의 작약꽃들이 빼곡하게 피어나면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장면을 연출해 내서다. 그렇지만 우림정원의 뼈대를 이루는 것은 메타세쿼이아 산책로다. 길고 높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 사이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정원 전체를 두루두루 돌아보는 데 약 1시간 가까이 걸린다. 이곳 정원 역시 방문객들은 입장료에 포함한 음료를 마시면서 두 부부가 가꾼 나무와 꽃을 즐길 수 있다. 금액은 5000원 정도이고, 4월부터 11월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한다. 300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에 명상 산책 코스, 걷기 운동 코스, 데이트 코스 등 다양한 산책 코스가 갖춰져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식물원과 수목원 위주로 관리를 했다. 그러다가 줄기가 곧고 굵은 큰 나무인 교목(喬木)에 지친 사람들이, 키가 작고 원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아 밑동에서 가지를 치는 관목(灌木)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관목과 가장 잘 어울리는 초본류가 많은 정원으로 눈길이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때맞춰 정부도 ‘수목원·정원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면서, 사유 정원을 민간정원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었다. 지극히 사적인 취미가, 정식 절차를 통해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렇다면 민간정원으로 등록하면 어떤 혜택이 있을까. 입장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입장료 수익이나 음료나 먹거리를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정원과 시설을 유지하는 것은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그러니 방문객들은 차와 음료수 금액에 너무 민감할 필요는 없다. 지친 마음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힐링의 공간을 충분히 제공받았지 않은가. 글·사진/지홍석 수필가·여행칼럼니스트

2026-06-11

또 다른 공포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되면 사망에 이를 확률이 30%를 넘어서는 치명적 바이러스 ‘에볼라’의 확산세가 심상찮다.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일이라고 마냥 안심할 상황은 아닌 듯하다. 우리 기억 속에는 아직 ‘코로나19 바이러스’에 의한 공포가 선명하다. 외신 보도에 의하면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에볼라 확진자는 현재 550명. 이중 101명이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문제는 바이러스 확산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는 것. 세계보건기구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1976년 아프리카 수단 남부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에볼라출혈열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에볼라는 발생 지역에 있는 강(江)의 명칭이기도 하다. 서울대병원은 에볼라출혈열을 ‘급성 열성감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로 감염에 의한 열성 질환은 갑작스런 두통과 근육통, 발열 후 전신 무력감과 허탈, 피부 발진, 저혈압, 그리고 전신성 출혈로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라 정의하고 있다. ‘에볼라 공포’는 콩고민주공화국 주변 국가로도 번지고 있다. 19명의 확진자가 나온 우간다는 국경을 차단하고 외부인 출입을 막는 중이다. 케냐 국민들 역시 에볼라 바이러스에 노출된 외국인을 위한 격리시설 설치를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 1~2일이면 지구 반대편 어느 곳으로건 갈 수 있는 시대다. 아프리카 역시 마찬가지. 바이러스에 의한 각종 감염병 피해를 한국도 적지 않게 겪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실수가 반복돼선 안 된다. 에볼라 확산세를 면밀히 살피며 한국으로의 유입 가능성을 사전 차단할 방안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보건 당국이 긴장할 때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6-10

영덕군산림조합의 도덕적 해이 도 넘었다

영덕군산림조합을 둘러싼 각종 비리 의혹은 한두 번 터져나온 게 아니다. 작년 10월에는 영덕군산림조합의 비리 문제가 국회 국정감사에까지 올라 쟁점으로 다뤄지기도 했다. 국회 농해수산위는 영덕군산림조합이 1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산불예방 숲가꾸기 사업을 하면서 설계나 사업 시행, 감리에 이르기까지 사업 전반이 부실하게 진행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특히 인건비를 부풀리거나 산림청 직원에 대한 접대 의혹 등 비리 문제가 지적되면서 산림청과 산림조합, 시행업체 간의 유착을 문제 삼기도 했다. 숲가꾸기 사업은 산림청의 감사에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됐다. 조합이 민간업체에게 용역을 주면서 조합장 관계인에게 준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산림 카르텔이란 산림사업의 예산 배정이나 사업 수주, 인사 등에 유착관계가 유지되면서 이익을 독점하는 구조를 말한다. 이런 독점 구조는 산림사업을 부실하게 수행하게 되면서 산사태나 대형 산불 등 산림재난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본지 취재에 의하면 최근 영덕군산림조합장이 산불 피해목 파쇄사업과 관련해 업체 관계자들과 주점에서 상식선을 넘는 접대를 받은 것이 확인됐다고 한다. 문제는 조합장의 부적절한 접대 자리 후 9일 만에 산불 피해목 파쇄사업과 관련해 향응을 제공한 업체와 공동사업 협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사업 추진의 투명성과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고 조합장이 접대를 받은 업체와 속전속결로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산립조합은 개인 기업이 아니다. 조합원의 권익을 보호하고 지역의 소중한 산림자원을 공정하게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영덕군산림조합에서 불거지는 문제를 보노라면 조합이 공공자산을 사익 추구 수단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동안 영덕군 산림조합은 각종 감사와 사정기관 수사, 시민단체 규탄 등으로 자유롭지 못한 입장에 있다. 사회적 비난과 시선을 의식, 자숙하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다. 이번 조합장의 부적절한 술집 향응은 조합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2026-06-10

李대통령이 생각하는 ‘지역균형발전’은 뭔가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9일 자신의 SNS에 이재명 대통령이 전날 밝힌 ‘임기 내 추가 행정통합 불가’ 발언에 대해 “전남·광주 행정통합은 되고 대구·경북은 안 된다는 것은 명백한 지역 차별”이라고 반발하는 글을 올렸다. 전적으로 공감 가는 말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8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추가 행정통합’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현실적으로 다음 지방선거 때까지 불가능하다”고 못박았다. “이미 국민이 뽑은 대표들이 있는데, 시의원, 도의원 다 그만두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이유를 댔다. 공기업 지방 이전과 관련한 질문에서도 “먼저 통합한 데가 아무래도 혜택을 보지 않겠느냐“고 전제하면서 “영호남 문제에 있어서 호남에 조금 더 균형을 맞춰야 하겠다. 그렇다고 영남을 버리겠다는 건 아니다. 비중을 호남에 조금 더해야겠다“고 대답했다. 누가 들어도 지역 차별성 발언이다. 이 지사는 이에 대해 “민주당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와 오중기 경북도지사 후보가 지방선거 때 행정통합의 조기 완성을 약속했고, 정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도 이야기했는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면서 “이것이 대구·경북 시도민을 대하는 집권 여당의 태도인가”라고 비판했다. 이 지사는 기초·광역의원 임기 문제와 관련해서도 “2028년 통합을 추진하면서 초대 특별시장만 2년 임기로 선출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의 전남광주특별시 우대는 민주당이 TK행정통합을 무산시킬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애초부터 전남광주처럼 TK지역에 4년 간 20조원 국비지원과 공공기관 최우선 배정 등의 특혜를 베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영남보다 호남이 훨씬 더 나쁜 상태”라고 말했는데 대구시민들 입장에서는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수도권 집중을 완화한다는 명분으로 추진하는 행정통합정책이 비수도권 내부에서 또 다른 차별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대통령이 편중된 정치 논리를 펴며 공개적으로 지역 차별을 하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2026-06-10

선거가 끝난 뒤

지방선거가 막을 내렸다. 이기고 지고 모두 끝을 보았다. 현수막도 사라지고 현란하던 율동도 보이지 않으며 확성기 소리도 멎었다. 일주일쯤 지났으니 이제는 열기가 가라앉았을까. 승리한 쪽은 기쁨의 시간을 지나 시민들을 위해 일할 준비를 하고 있을까. 패배한 쪽은 냉정한 평가와 분석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갔을까. 선거의 끝은 단지 당선자와 낙선자가 결정되었다는 것만은 아니다. 공동체가 잠시 겪었던 정치적 긴장을 풀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 부른다. 표현에는 많은 의미가 담긴다. 다양한 생각과 의견이 겨루고 다투며, 시민들이 자신의 판단을 투표로 표현하고, 그 결과를 모두가 받아들이는 과정이 민주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선거가 언제나 이상적일 수는 없다. 후보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지지자들은 때로 지나치게 흥분한다. 가짜뉴스와 과장된 주장도 등장한다. 그럼에도 선거는 우리가 가진 가장 평화로운 권력 교체 방식이다. 이번에도 여러 논란이 있었다. 특히 일부 지역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선거관리 기관은 철저한 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시민의 참정권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한 장의 투표용지라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곧바로 총체적 부정선거나 전면 재선거 주장으로 연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선거 과정의 ‘실수와 부정’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잘못이 있었다면 엄정하게 책임을 묻고 개선해야 하지만, 충분한 근거 없이 선거 전체의 정당성을 부정하면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린다. 민주주의는 완벽함 위에 서 있는 제도가 아니라, 실수를 고쳐 나가면서 유지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선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거 이후다. 당선자는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시민들까지 대표해야 한다. 낙선자는 결과를 존중하면서도 건전한 비판과 견제를 이어가야 한다. 유권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선거 기간에는 서로 다른 편에 섰더라도 선거가 끝난 뒤에는 다시 같은 마을의 주민이고 같은 도시의 시민이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가 계속되면 선거는 끝나도 갈등은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상대 진영을 향한 비난이 이어지고, 사람들은 결과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만 찾는다. 승자는 상대를 조롱하고 패자는 결과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시민들의 삶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물가는 오르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걱정하고, 지역은 인구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데도 정치적 분노와 적대감만 구름처럼 번져간다. 정치는 원래 무엇이었을까. 정치란 상대를 무너뜨리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약속을 만드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이 달라도 공동체 안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길을 찾는 일이 아니었을까. 민주주의는 상대를 없애는 제도가 아니라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선거는 끝났다. 이제는 누가 이기고 졌느냐보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당선자는 책임을 다해야 하고, 시민은 감시해야 하며, 패배한 쪽은 좋은 대안을 준비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힘은 그런 게 아닐까.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6-10

‘알수없음’이 빨간색인 이유

전국 기준 2.2% 시청률로 시작한 12부작 드라마 ‘모.자.무.싸’가 5.3%로 종영했다. 이 드라마에서 내 주의를 끈 것은 감정워치의 빨간색 ‘알수없음’이다. 사람마다 공감하는 장면은 다르겠지만, 내게는 이 빨간색 ‘알수없음’이 드라마를 이해하는 열쇠처럼 보였다. 감정워치는 사람의 감정을 읽어주는 신제품인데, 긍정적인 감정에는 푸른색, 부정적인 감정에는 붉은색이 뜬다. 그중에서도 황동만과 변은아의 ‘알수없음’이 특히 눈에 띄었다. 다른 감정은 띄어쓰기가 되어 있는데, ‘알수없음’은 ‘알 수 없음’이 아니라 ‘알수없음’으로 뜨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마치 감정이 덩어리로 응고되어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 같아서 해결 과제라는 느낌이 든다. 변은아는 엄마가 집을 나간 후부터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코피가 났다. 코피가 날 때는 온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고 한다. 이렇게 감정에 몸이 반응하는 것을 신체화라고 한다. 신체화는 감정을 충분히 인식하거나 표현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변은아처럼 코피가 나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하거나 온몸이 따갑다거나 설사를 하기도 한다.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읽을 줄 알면 그 감정이 옅어지고 그러면 그 감정에 덜 휘둘린다고 한다. 신체화 반응도 줄어든다. 황동만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모두 알게 되면 남아나는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반만 맞는 말이다. 기존의 관계가 해체되고 나면, 새로운 관계가 생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감정워치의 ‘알수없음’ 상태다. 이 시계를 개발한 회사는 이름을 정확히 붙일 수 없는 20가지 정도의 마음 상태를 ‘알수없음’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결국 사람의 해석을 기다리는 감정이다. 어쩌면 감정워치는 감정의 실체를 알려준다기보다 신체 반응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알수없음’은 해석이 꼭 필요한 아주 강한 신호일 뿐이다. 드라마에서는 같은 패턴을 보이는 사람들을 묶어서 상담해 준다. 황동만의 감정워치에도 ‘알수없음’이 뜨자 상담사는 변은아의 ‘알수없음’을 소개하며 그 의미를 질문한다. 황동만은 뜻밖에 ‘도와줘’라고 답한다. 변은아가 ‘자폭하고 싶은’이라고 표현한 것을 다르게 진술한 것인데, 이런 재진술은 황동만의 특기다. 같은 ‘알수없음’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파괴에서 연대의 언어로 바뀔 수 있다. ‘도와줘’가 공격은 아니지만, 적극적인 관계 맺기인 것은 맞다. 변은아는 황동만의 해석을 상담사에게서 전해 듣고 마음에 변화가 오고, 상사나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그 후 새로운 관계 맺기로 나아간다. 우리는 좋은 감정 상태이기를 바라지만, 푸른색이 뜨면 큰 관심이 없고 빨간색에 ‘알수없음’이 뜰 때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 황동만과 변은아는 ‘알수없음’의 실체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다만, 그 감정을 직면할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어쩌면, 감정시계는 감정을 읽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마주할 힘을 주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계가 용기를 주지는 못한다. 용기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얻어진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6-10

밤마다 화장실 때문에 깨는 이유

나이가 들면 밤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한두 번씩 잠에서 깨는 경우가 흔해진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노화 현상으로 여기거나 전립선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전립선 비대증은 야간뇨의 대표적인 원인 중 하나지만 실제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을 보면 검사상 전립선에 큰 이상이 없는데도 밤마다 여러 번 화장실을 다녀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몸은 잠이 들면 소변 생성량이 줄어들고 방광은 더 많은 양의 소변을 저장하도록 조절된다. 그래야 밤새 깨지 않고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인데 스트레스가 많거나 자율신경의 균형이 무너지면 이러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얕은 잠을 반복하게 되면 작은 방광 자극에도 쉽게 잠에서 깨게 된다. 실제로 밤에 두세 번 이상 화장실을 가는 사람들은 소변 자체의 문제보다 수면의 질 저하와 자율신경 불균형이 더 큰 원인인 경우도 많다. 실제 소변을 보면 많이 나오지 않는다. 낮엔 괜찮은데 밤이 되면 소변이 자주 마렵거나 잠들기 전에는 피곤한데 막상 누우면 잠이 잘 오지 않는 사람들은 방광만 치료할 것이 아니라 몸 전체의 긴장 상태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감신경이 과도하게 활성화된 상태에서는 몸이 충분히 휴식 모드로 전환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인은 이런 과항진된 몸을 가지고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다. 하체가 차고 손발이 시린 사람들도 야간뇨를 자주 경험한다. 몸이 차가워지면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못하고 이는 방광 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다리가 잘 붓는 사람은 낮 동안 다리에 고여 있던 수분이 밤에 누워 있는 동안 혈관으로 다시 흡수되면서 소변량이 증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야간뇨 환자를 진료할 때는 단순히 방광 상태만 볼 것이 아니라 수면, 혈액순환, 부종, 냉증 여부까지 함께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습관도 야간뇨에 영향을 미치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저녁 늦은 시간에 물을 많이 마시거나 커피, 녹차, 에너지음료를 자주 섭취하면 야간뇨가 심해질 수 있다. 술 역시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고 소변량을 늘리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반대로 규칙적인 운동은 혈액순환을 돕고 자율신경을 안정시켜 야간뇨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식사 후 가벼운 산책은 수면의 질을 높이고 전반적인 건강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한의학에서는 야간뇨를 단순히 방광만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수면 상태와 자율신경 기능, 몸의 냉증 여부, 혈액순환 상태 등을 함께 고려하여 치료를 한다. 몸이 차고 기력이 부족한 경우에는 신장과 방광의 기능을 돕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한약을 사용하고 자율신경의 균형이 무너진 경우에는 한약과 더불어 침 치료와 약침 치료를 통해 긴장을 완화하고 수면의 질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밤에 한 번 정도 화장실을 가는 것은 나이가 들면서 나타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변화다. 하지만 매일 두세 번 이상 반복적으로 잠을 깨고 다음 날까지 피곤함이 이어진다면 단순한 노화 현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말고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적절한 관리를 하면 밤에는 편안하게 잠들고 낮에는 더욱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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