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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81회 식목일

산림청은 올해를 ‘범국민 나무심기 원년’으로 정했다. 산림청은 범국민적 나무심기 식목일 행사를 지난 3월 제주에서부터 시작했으며 5월까지 정부 부처와 기업,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나무심기 캠페인를 벌인다. 나무심기를 통해 신규 탄소흡수원을 확충하고, 기후위기 대응과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이행을 실천하겠다는 것이 캠페인의 취지다. 국립산림과학원은 2년 전 우리나라 산림의 공익적 가치를 수량화해 발표한 적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산림의 공익적 가치는 모두 259조원으로 평가됐다. 당시 국내 총생산의 13.3%에 해당한다. 기능별로는 온실가스 흡수 저장기능이 97조원, 산림경관 제공기능 32조원, 산림휴양 기능 28조원 등이다. 산림의 공익적 가치를 국민에게 돌아오는 혜택으로 환산하면 1인당 499만원에 이른다고 했다. 아마존 열대우림을 우리는 지구의 허파라 부른다. 전 세계 산소의 20%를 생산한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아마존 우림지대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함으로써 지구온난화를 늦추고, 기후변화를 완화해주는 특별한 역할에 우리가 더 주목을 해야 한다. 숲은 동식물의 서식지로 생물의 다양성을 제공할 뿐더러 생태계 균형을 유지시켜 준다. 물 순환과 토양 보존을 통해 수자원과 환경을 보호하는 등 지구와 인간 삶에 있어 유익한 필수 환경이다. 어쩌면 숲의 이런 기능이 인류에게 매일 건강한 하루를 제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식목일은 단순히 나무만 심는 날이 아니다. 심어진 나무를 아끼고 잘 가꾸어 보다 많은 건강한 숲을 조성해야 한다. 나무를 심는 것이야말로 지구와 인류를 위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4-02

이란사태로 중요해진 원전, 지역 유치에 힘을

신규 대형원전 2기와 소형모듈원전(SMR) 1기 유치를 위한 지자체 간 대진표가 지난달 확정됐다. 한국수력원지력에 의하면 지난달 마감한 신규원전 후보지 공모에는 경북 영덕군과 울산 울주군 그리고 경주시와 부산시 기장군이 각각 신청서를 제출했다. 영덕군과 울주군은 대형원전을, 경주시와 기장군은 SMR 유치를 희망했다. 한수원은 오는 6월까지 기본조사와 현장 실사를 마치고 부지선정평가위원회의 평가를 토대로 최종 후보지를 결정한다. 원전 최종 후보지에 선정되면 해당 지자체는 특별법에 따라 정부로부터 받는 지원금과 발전량을 기준으로 60년간 매년 기본지원금을 받는다. 또 지방세법에 따라 발전소가 해당 지역에 내는 지역자원 시설세도 받아 지역의 도로 등 인프라와 장학금, 의료, 문화관련 시설 투자에 쓸 수 있다. 이번에 원전 유치를 신청한 4개 지자체는 이미 원전을 운영 중이거나 원전 공모에 도전해 본 경험이 있는 곳이다. 또 원전 유치를 통해 지역발전을 도모하고자 지역주민의 여론을 엎고 도전장을 냈다. 영덕군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확보된 부지가 백지화된 뼈아픈 경험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확보해놓은 부지가 오히려 가장 큰 장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영덕군은 이런 경험 때문에 주민 지지여론이 86%에 이르고, 군의회에서 전원 찬성으로 원전 유치안을 결의했다. 경주시는 한수원 본사를 비롯 원자력 연구·운영시설과 산업기반이 한데 모여 있는 국내 대표 원전도시다. 무엇보다 SMR 기술개발 이후 실증과 산업화까지 이어지는 골든타임을 선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곳이다. 울주군과 기장군도 원전과 깊은 인연이 있어 여러 장점이 있다.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하다. 원전은 중동전쟁 발발 후 세계적으로 그 중요성이 더 인정되는 분위기다. 우리도 에너지 안보 위기 속에 원전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국내 원전의 절반을 보유한 경북의 신규원전 유치는 국내 최대 원전산업 중추 지역으로 도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지역사회의 관심이 큰 힘이 되는 것이다.

2026-04-02

국힘, 대구시장 공천파동 수습할 수 있을까

국민의힘 대구시당은 지난 1일 대구시장 경선 후보자 6명과 지역 국회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정경선 협약식’을 가졌다. 대구시장 공천 과정에서 분열된 당을 추스르고, 민주당 김부겸 후보와의 승부전에 당력을 집중시키자는 취지의 행사다. 참석자들은 이날 ‘경선 결과에 승복하고 원팀으로 본선거를 치르자’는데 뜻을 같이 했다. 국민의힘 대구시장 공천파동은 법적인 문제까지 얽혀 혼란을 단시간에 수습하기는 힘들겠지만, 이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후보들이 한자리에 모여 소통하는 모습은 바람직하다. 무기력한 상황이 계속되면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역대 대구시장 선거 중 보수정당이 이번만큼 어려운 때가 없었다. 대구가 ‘보수 안방’인데도 불구하고, 민주당 기세는 지금 최고조다. 민주당 김부겸 후보는 현재 캠프 구성을 거의 완료하고 바닥 민심을 다지고 있다. 김 후보는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홍준표 전 시장과 만나 대구 현안에 대해 논의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대구의 현안 해결을 위해 전임 야당 시장과도 만나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여야를 넘나드는 리더십을 과시하는 모습으로도 비친다. 2일에는 홍 전 시장도 김 후보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최근 발표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TK에서도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특히 이번 대구·포항시장 공천 과정에서 드러난 국민의힘 공관위의 태도는 예비후보들 뿐만 아니라 유권자의 자질까지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충청 출신 박덕흠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새 공관위가 출범하는 만큼, 공천갈등을 조기 수습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국민의힘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대구시장 자리마저 민주당에 내 주면 당이 해체될 위기까지 갈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박덕흠 공관위’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대구시장 후보 공천파동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힘은 들겠지만, 예비후보들도 기본적으로 보수정당을 지켜야 한다는 대승적인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2026-04-02

촉법소년 연령 하향, 해답이 아니라 시작이다

중학생이던 아들이 초등학생인 여동생이 서랍 깊숙이 숨겨놓은 일기를 훔쳐보다가 걸렸다. 아들에게 “너 동생 일기 몰래 보면 안 돼. 비밀침해죄라는 게 있다”라는 변호사 엄마다운 잔소리를 하니 아들은 이렇게 답했다. “어차피 난 촉법소년이라 상관없어.” 요즘 아이들이 이렇다. ‘촉법소년 =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 것이다. 촉법소년의 촉(觸)은 ‘닿을 촉’이다. 촉법소년이란 법에 닿았으나 처벌되지 않는 소년을 의미한다. 형법 제9조는 촉법소년을 형사미성년자라고 하면서 14세가 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14세 미만의 소년에 대해 아무런 처분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소년법에 따라 범죄행위를 한 10세 이상 14세 미만인 아이들에겐 소년법상 보호처분을 내릴 수 있다. 소년법상 보호처분은 교육 수강 명령이나 사회봉사명령부터 소년원 송치까지 가능한 결코 가볍지 않은 처분이다. 결론적으로 14세 미만인 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어떤 처분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10세 이상이라면 소년보호처분을 통해 범법행위를 교정하고 교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만 10세 미만이라면 살인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은 물론 어떠한 보호처분도 내릴 수 없다. 얼마 전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촉법소년 연령을 13세 미만으로 낮추는 방안을 지시한 이후 정부 주도로 촉법소년 연령 개정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14세 미만을 13세 미만으로 바꾸는 방안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지금의 14세 미만 기준은 1953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마트폰과 AI, 인터넷을 사용하며 7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보를 접하고 있고, 정신적·육체적 성숙도 상당히 이루어진 지금의 청소년들을 70년 전과 똑같이 볼 수는 없다. 이제는 촉법소년 연령을 낮출 때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13세 이상은 모두 형사처벌하자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지금도 13세, 14세의 범죄는 대부분 소년보호처분으로 처리되고 있기 때문에 촉법소년 연령이 한 살 낮아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중학교 2, 3학년들도 “난 촉법이라 괜찮아”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요즘,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는 것은 소년의 형사책임에 대한 국가의 태도와 사회 인식이 변화했다는 상징적 메시지가 될 것이다. 또한 가해자 보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기존 촉법소년 제도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므로, 소년범죄 피해자의 보호와 권리 회복을 더 고려하겠다는 사회적 선언이 될 수 있다. 촉법 연령을 낮추는 것을 해답으로 끝내선 안 된다. 연령 기준만 낮추고 소년범죄의 분석과 예방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13세 미만으로 조정된 촉법소년의 문제는 도돌이표일 것이다. 촉법소년 범죄들의 원인을 분석하고 적절한 교육과 보호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국가적 인력과 인프라 확보에 힘써야 한다. 소년보호처분을 조금 더 세분화하고 개선해야 하며, 이미 존재하는 소년보호처분도 적극 활용해 아이들이 다시 범법의 경계에 가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 처벌의 문턱을 낮출수록, 그 보호의 책임은 더 무거워지는 법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 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6-04-02

노인의 앞날

행정복지센터에서의 일이다.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고성이 들렸다. 사연인즉, 노인 한 분이 대중교통비 환급 문제로 직원과 대화를 나누다, 옆에서 기다리던 청년과 시비가 붙었나 보다. 어르신이 너무 큰 소리로 외쳐서 듣고 있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분은 자신의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목소리가 커진 것일 뿐, 화를 낸 건 아니라고 외쳤지만, 좀처럼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청년 곁에 있던 주변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씩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다음 주 어느 날이었다.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위해 면허시험장에 방문했는데, 맨 끝 창구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또 뭐지 싶어서 가봤더니 이번엔 노부부가 직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어떤 어르신이 운전면허증 재발급에 필요한 사진을 너무 옛것으로 가져온 탓이었다. 규정상 6개월 이내의 사진이 필요했다. 담당 직원은 최근 사진으로 다시 가져오시라 안내했고, 어르신은 이것도 분명 내 사진이니 그냥 처리해달라는 실랑이가 오고 갔다. 사실 현장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했다. 하지만 어르신은 자신과 같은 노인에게 신분증 사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면서, 이발도 못한 이런 행색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맞섰다. 난감해하는 담당자의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힘들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직원 여럿이 노인 분을 안쪽 어딘가로 안내하는 모습을 뒤로 한 채 그곳을 서둘러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항의하던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장면을 두 번이나 목격한 셈이었다. 한 분은 귀가 안 들렸을 뿐이고, 다른 한 분은 행정에 관한 시비였지만 대단히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규정과 방침을 지키지 않거나 못한 어르신의 항의를 묵살하기 어려운 ‘노인의 사정’이라는 게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저 어르신들은 마치 선량한 직원을 괴롭히고 시민들에 불편을 끼친 훼방꾼처럼 취급됐다. 문득 세월이 흐른다는 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늙는다는 건 우선 후천적 장애를 겪게 된다는 것 같다. 들리던 게 안 들리고, 보이던 게 안 보이거나 거동이 힘들어지는 것으로, 즉 몸의 불편으로 우선 감지되는 것 아니겠나. 또한 늙는다는 건 행정이나 키오스크와 같은 사회 시스템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 같다. 아마 노인들을 위한 행정 서비스조차 어르신들은 절차를 따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노인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일상 상당 부분을 의탁해야만 하는 의존적인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 의존한다. 나만 해도 부모덕에 공부했고, 지금은 아내 덕에 직장을 다닌다. 인간이란 본래 취약한 존재이다. 그 취약함은 단순한 약점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호 의존과 돌봄의 조건이 된다. 관계가 존재론의 최소 단위이다. 인간이란 나 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살만큼 살았다고 오인되는, 마치 세상의 짐처럼 여겨지는 노인들의 앞날에도 사회의 많은 관심이 모아져야겠다. 노인의 모습이야말로 모두의 근미래일테니 말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6-04-02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팔과 다리에 쥐가 자주 나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해결책이 영양제다. 약국에서 권하는 마그네슘 제제를 사서 복용하는 일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됐다. 실제로 마그네슘은 근육 경련 완화에 도움이 되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정확한 진단과 상관없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몸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은 채 “좋다더라”라는 말만 믿고 약을 먹는 습관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일상화된 모습이다. 최근 주변을 둘러보면 약을 챙겨 먹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비타민은 기본이고 각종 건강기능식품, 심지어 특정 질환을 예방하거나 기능을 강화한다는 약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실제로 보건복지부의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약 90%가 3개월 이상 처방 약을 먹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혈압, 당뇨, 관절염, 심혈관 질환 등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질환을 생각하면 약물 복용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약을 ‘필요해서’ 먹는 것과 ‘막연한 기대’로 먹는 것 사이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우려스러운 현상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건강 정보가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병원 치료보다 자연 요법이나 약초를 더 신뢰하며 검증되지 않은 방법에 의존하기도 한다. 중병을 앓다가 산속에서 약초를 먹고 완치됐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반복됐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대부분 개인의 경험담일 뿐 의학적 근거로 보기 어렵다. 현대 의학이 축적해 온 치료 방법과 약물의 역할을 무시한 채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기대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의 기능이 약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젊을 때 아무리 강인했던 신체라도 세월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병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환상보다는 증상을 관리하고 삶의 질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진단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의사의 처방에 따른 약물 복용과 정기적인 검사, 생활 습관 관리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정작 필요한 관리보다 편의와 습관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건강검진이나 진료는 미루면서 영양제나 건강식품에는 쉽게 손이 간다. 또래 친구들과 모여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는 약부터 찾는 모습 역시 낯설지 않다. 몸은 분명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생활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지금, 약과 건강에 대한 태도 역시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약은 분명 많은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정확한 이해 없이 남용되거나 근거 없는 정보에 흔들린다면 약은 치료가 아니라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다. 결국 건강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순하다. 자기 몸 상태를 정확히 알고,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다. 약을 둘러싼 우리의 태도 역시 이제는 경험담이 아니라 근거와 책임 위에서 다시 정리되어야 할 때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방송에서 한때 글루타치온이 유행이더니 요즘은 ‘알부민’이 뜬다. /노병철 수필가

2026-04-02

천주교 순례성지 괴산 연풍순교성지와 수옥폭포

과하지 않을 정도의 서늘함은 어떤 것일까. 장식처럼 보이는 돌 하나에도 그렇게 많은 슬픔과 비애, 역사적 기록과 사연들이 존재함이란 그리 쉽지 않다. 연일 부딪치는 이기에 찬 과욕과 욕심에, 잠시라도 편할 날이 없는 일상이 자리하는 요즘이고 보면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여행지는 과연 어딜까. 그 해답에 근접하는 장소 하나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눈물의 여왕’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시청률을 담보로 대중에게 각인된 드라마 중 하나로, 바로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자리한 “연풍순교성지”도 그중 하나의 촬영지였다. 그러나 세월을 거슬러 오르면, 우리나라 천주교 박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아픈 역사를 떠올리는 영성의 장소기도 하다. 그곳의 경관 속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세파에 찌들어 몸속에 내재던 숱한 원망과 미움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버리게 된다. 연풍순교성지에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을 때, 아이와 함께 역사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 좋은 곳을 찾는다면 이곳은 그 해답이 될 수도 있다. 그저 드넓은 잔디밭과 소나무와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순교지 둘레길을 느긋하게 자연스럽게 걸으면 될 듯하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역사와 자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힐링 여행지는 바로 이곳이구나 하고 저절로 실감하게 된다는 의미다. 연풍성지의 공간 구성은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이다. 첫인상을 있는 그대로 피력하자면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구성으로 꾸며진 거대한 유럽풍의 정원 같다고나 할까. 찾아든 방문객들을 자연스럽게 순교의 성지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장점이 있다. 처음 연풍성지에 들어서면 드넓은 마당과 정제된 듯한 정갈한 풍경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연풍순교성지 안내도’에는 연풍대성당과 순교터를 지나 십자가의 길과 형구틀을 차례로 지난 다음, 향청이 있는 옛 공소를 돌아보는 8자 동선이 추천되어 있다. 적벽색의 벽돌로 이뤄진 대성당은 딱 봐도 이국적이다. 거기에 가미된 엄숙함과 주변의 정갈함이 기품으로 승화가 되는 아름다움이 그대로 발산된다. 성당 뒤로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조령산(1026m)과 백화산(1063.5m)이 그려내는 굽이치는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거대한 산수화 병풍 하나를 만들어 낸다. 옛 연풍향청의 건물과 높이 9.5m의 십자가상, 우리나라 최초의 대주교 노기남 바오로의 입상과 루카 황석두의 묘소를 차례로 돌아볼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형구돌’이다. 일명 ‘형구틀’이라고도 불리는 반석 같은 커다란 돌이다. 조선시대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고안된 사형 도구로, 돌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져 있다.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천주교 신자들을 구멍 앞에 세운 후 목에 밧줄을 걸고 반대편 구멍에서 이를 잡아당겨 죽이는 잔혹한 교수형 형구였다. 조선 정조 15년(1791) 신해교난 이후 연풍 땅에 은거하여 신앙을 지켜가던 교인 추순옥, 이윤일, 김병숙, 김말당, 김마루 등이 순조 1년(1801) 신유교난 때 이곳 연풍성지에서 처형당했다. 그래서 이곳을 발굴하고 정리 작업을 하던 중 박해 때 이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 3개가 발견이 되었던 것이다. 1963년 천주교회가 연풍공소의 예배소로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시대의 향청 건물을 사들였는데, 그 전에 헌병주재소, 경찰서 등으로도 사용된 건물이었다. 1968년 한국천주교 103 성인에 속한 황석두의 고향도 이곳 연풍으로 드러나면서, 지금의 연풍순교성지가 본격적으로 개발이 된 계기였다. 한국천주교 103 성인의 한 사람인 루까 황석두는 순조 13년(1813) 연풍현 병방골에서 태어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일생을 종교에 헌신하다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 회장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인물이다. 성지의 왼쪽에는 순교현양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앞에는 지금 형구돌을 유물로 전시해 그 의미를 더한다. 천주교 박해에 관련된 배경 설명, 연풍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안내는 연풍성지의 이해를 돕고, 짧은 방문에도 의미 있는 탐방의 목적을 배가시킨다. 단체 순례뿐 아니라 혼자 찾는 방문객에게도 부담 없는 동선과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조용히 머물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요즘의 트렌드인 빠르게 소비되는 관광지와 달리, 이곳은 오래도록 천천히 걷고 멈추며 생각하게 만드는 공간이라고나 할까. 계절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봄과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지고 연분홍 영산홍과 철쭉들이 피어나 생동감을 듬뿍 선사해, 지금 계절에 꼭 추천해 드리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다. 충북 괴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연풍성지는 일상의 소음을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충분한 여백을 제공한다. 역사적 의미와 정서적 울림을 동시에 지닌 천주교 순례지라, 순례자에게는 신앙의 뿌리를, 여행자에게는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물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성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떠하듯 오래도록 잔잔한 여운의 기품으로 남아 있을 곳이다. 예로부터 괴산은 수려한 자연과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연풍성지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에는 수옥폭포가 있다. 연풍순교성지와 연계할 수 있는 가장 추천할 만한 수려한 자연 그대로의 경관지로, 조령 제3관문에서 소조령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류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이루어진 폭포다. 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졌는데, 고려 말기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여 초가를 지어 행궁을 삼고, 조그만 절을 지어 불자를 삼아 폭포 아래 작은 정자를 지어 비통함을 잊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 벚꽃이 만개할 때 이곳을 방문한다면 산책길은 환상적인 꽃길이 될 것이다. 연풍순교성지의 위치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 중앙로 홍문2길 14이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 30~오후5시 30분으로 무료 주차가 가능하다. 수옥폭포는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다. 참고 하기 바란다. /지홍석 수필가·여행 칼럼니스트

2026-04-02

폭등하는 유류할증료

항공사와 해운사가 유가가 오를 때 이에 따른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비행기와 선박 운임에 부과하는 걸 유류할증료라 부른다. 유류할증료는 싱가포르 현물시장의 2개월치 항공유 평균가격에 따라 바뀐다. 단계별 조정액이 있다. 짐작하다시피 유가가 오르면 할증액도 상승한다. 반대로 기름값이 내리면 인하되는 방식. 미국·이스라엘의 침공과 폭격에 대항해 이란이 중동산 원유를 실은 배가 오가는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서 국제 유가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는 더 오를 것이란 어두운 전망도 나온다. 덩달아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려는 이들이 지불해야 할 유류할증료도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항공권 가격의 10~20% 정도를 차지하는 유류할증료가 부담스러운 수준이 되고 있는 상황. 최근 항공업계는 오는 5월 국제선 유류할증료가 현행 최고 수준인 33단계로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4월 유류할증료보다 15단계가 높아지는 것이다. 재론할 것 없이 폭등이다. 대한항공은 4월부터 중국과 일본 지역의 유류할증료를 2만1000원에서 5만7000원으로 올린다. 미국 서부와 파리 등 유럽은 7만9500원에서 27만6000원으로 인상된다. 운행거리가 긴 미국 동부 도시의 경우엔 9만9000원이던 유류할증료가 30만3000원으로 조정됐다. 지난달보다 최소 2배에서 3배가 오른 가격이다. 유류비는 항공기 운영비의 30%를 차지한다. 높은 유가가 지속되면 항공사 경영에도 빨간불이 켜질 게 명약관화다. 전쟁으로 인해 높아진 기름값이 여행자와 항공사를 동시에 위협 중이다. 갖가지 곤혹스러움과 어려움을 부르는 전쟁의 끝이 아직 보이지 않으니 더 큰 문제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4-01

공약은 후보자가 유권자에게 내놓는 가장 중요한 ESG 보고서

최근 중동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권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시선이 6·3 지방선거 공천 과정에 쏠려 있다. 전국민적 관심사인 지방선거 이슈를 ESG(환경·사회·거버넌스)의 시각에서 분석해 보면, 이번 공천 정국은 단순한 후보 선출을 넘어 ‘정치적 ESG 거버넌스’가 시험대에 오른 매우 중요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 공천과 공약을 ESG 프레임으로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환경(Environment)의 관점에서 기후 위기 대응이‘표’가 되는 선거이다. 이제 지방자치단체장은 행정가를 넘어 지역의 ESG 경영자(CEO)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기후 위기 대응 능력이 결여된 후보는 지역의 미래 경쟁력을 훼손하는‘리스크’가 될 수 있다. 두 번째, 사회(Social)의 관점에서 정당의 후보자 공천과정의 ‘사회적 책임’과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성·청년 할당제 준수 여부와 전과 및 도덕성 검증이 형식적 기준 준수가 아닌 논란이 되는 부적격 후보는 기업의 공급망 실사처럼 엄격하게 배제해야 한다. 세 번째, 거버넌스(Governance)의 관점에서 “밀실 공천인가, 데이터 기반의 투명 공천인가”가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다. 기업이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 투명한 절차를 거치듯, 정당 또한 공천 기준(KPI)을 사전에 공개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정치적 거버넌스’ 확립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묻지마 투표’를 방지하기 위한 정당의 공시 의무가 중요하다. 이 같은 관점에서 포항시장 후보자 공천을 분석해 보면, 최근 국민의힘 공천 과정에서 불거진 ‘사전 유출 의혹’이나 ‘대리전 논란’은 전형적인 거버넌스 리스크이다. 포항은 인구 50만 이상의 특례시로서 중앙당이 직접 공천을 관리하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절차적 정당성’이 중요하다.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이 지역구 국회의원과의 관계(Internal Governance)에 의존하는지, 아니면 시민이라는 주주(Shareholder)의 목소리에 집중하는지를 매섭게 지켜보고 있다. 국민의힘은 이번 공천 과정에서 투명성과 공정성, 포항의 신뢰 자본 훼손이라는 상당한 거버넌스 리스크를 발생시켰다. 포항의 대전환을 이끌 동력은 결국 거버넌스(Governance)에서 나온다. 관료적 타성에 젖은 행정으로는 초불확실성의 시대를 돌파할 수 없다. 개별 후보자 공약을 통해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시정이 얼마나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될 것인가를 살펴보면, 안승대 후보는 30년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한 ‘리스크 관리형 거버넌스’를, 문충운 후보는 시장 직속 혁신 기구를 통한‘데이터 기반 디지털 거버넌스’를 강조한다. 박용선 후보는 경북도의회 부의장 출신의 소통력을 바탕으로 한‘협치 거버넌스’를, 박대기 후보는 공천 과정부터 강조해 온‘도덕적 청렴 거버넌스’를 강조하며, 박희정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오랜 시의원 경험을 바탕으로 ‘투명한 행정 절차’를 전면에 내세운‘시민 참여형 거버넌스’를 제시한다. ESG의 ‘S’관점에서 후보들 모두 경제 활성화를 외치고 있지만‘포용적 성장’이 핵심으로 읽힌다. 박대기 후보의 ‘영일만회의’같은 시민 참여 플랫폼이나, 문충운·안승대·박용선 후보가 제시하는 각기 다른 지역 발전 모델들이 과연 포항의 고질적인 남·북구 간 격차를 해소하고, 청년들이 머물고 싶은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무엇보다 인구 감소와 남·북구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가치 창출 역량이 중요해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국민의힘 후보자들 공약에선 ESG가 요구하는 사회적 가치가 보이지 않지만, 민주당 박희정 후보의 가세로 ‘S’ 분야의 논의가 ‘인프라 구축’에서‘사람과 안전’으로 확장되고 있다. 철강산업의 위기가 노동자의 숙련도 저하나 일자리 상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에 방점을 둔 것으로 근본적인 노동·안전 중심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한다. 포항에 있어 ESG의 ‘E’는 선택이 아닌 생존이다. 탄소국경세(CBAM) 등 글로벌 규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포스코를 비롯한 철강산업의 수소환원제철 전환과 이차전지·SMR(소형모듈원전) 등 신산업 밸류체인을 누가 더 전문성 있게 이끌어갈 수 있는가가 최우선 검증 대상이다. 특히 박대기 후보가 언급한 SMR 소부장 허브 조성과 문충운 후보의 이차전지 글로벌 데이터 플랫폼과 수소환원제철 전환 인프라 구축의 구체적인 기후 기술(Climate Tech) 공약은 포항의 미래 먹거리와 직결되므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박용선 후보는‘시민 체감형 녹색 복지’를 내세우며 기존 ‘포항 그린웨이’를 고도화하고 산단 주변에 대규모 녹지벨트를 조성하는 ‘그린시티 포항’을 강조한다. 기업 규제 대응보다는 시민의 삶의 질과 직결된 환경 개선에 방점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안승대 후보는 산업 유치와 도시재생 과정에서의 환경 정비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어, 구체적인 탄소중립 로드맵 보강이 필요해 보인다. 또한 박희정 후보는 기존 후보들이 산업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탄소중립을 언급한데 비해, ‘국가적 과제와 지역 생존의 결합’으로 정의한다.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을 단순한 공법 변경이 아닌 ‘산업 전환의 모범 사례’로 만들겠다는 ESG 전략으로 분석된다. 포항은 지금 ‘세계적 철강 도시‘라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ESG 선도 도시‘라는 새로운 미래로 도약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번 포항시장 후보의 공약은 각기 다른 색채를 띠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포항의 지속가능성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야 한다. 이제 포항 시민들은 질문해야 한다. “누가 포스코의 용광로를 가장 친환경적으로 바꾸면서도(E),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지키고(S), 그 과정의 이익을 시민들에게 가장 투명하게 돌려줄 것인가(G)?” 이 질문에 답하는 후보가 포항의 100년 미래를 책임질 ’ESG 경영 시장‘이 될 것이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4-01

국힘 새 공관위, 대구시장 경선구도 바꿀까

국민의힘 대구시장 공천과정에서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시킨 ‘이정현 공관위’가 지난 31일 전원 사퇴했다. 국민의힘은 1일 새 공관위원장에 충청출신 4선 박덕흠 의원을 내정했다. 공관위 일괄 사퇴에는 당 지도부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정현 위원장은 “당 지도부가 사퇴해달라는 의사를 전해왔다”고 했다. 이 위원장 사퇴 이유는 차고 넘친다. 그간 대구시장, 충북지사, 포항시장 공천 과정에서 ‘특정 후보 내정설’ 논란으로 “공관위가 오히려 민주당 선거를 돕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권영진(대구 달서병) 의원은 “이정현 위원장과 국민의힘이 바보짓을 하는 바람에 김부겸 전 국무총리를 불러낸 민주당에 대구시장까지 내줄 위기상황”이라고 했다. 당연직 공관위 부위원장인 정희용(고령·성주·칠곡) 사무총장은 공관위가 대구시장 후보경선에서 주호영 의원과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컷오프한 이후 회의 참석도 보이콧했다. ‘박덕흠 공관위’는 아직 공천방식을 정하지 못한 시·도지사 후보를 공천해야 하고, ‘미니 총선’으로 불리는 국회의원 보궐선거 공천 작업도 해야 한다. 특히 법원이 31일 김영환 충북지사에 대한 공관위의 컷오프에 대해 제동을 건 것은 최대의 악재다. 법원은 김 지사가 국민의힘을 상대로 낸 공천배제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면서 “당규위반”이라고 판단했다. 특정후보를 컷오프 한 후 당규에 따라 3일 이상 추가모집을 해야 하는데, 공관위가 하루 만에 접수를 끝냈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법원 결정이 대구시장·포항시장 공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변수는 새로 구성될 공관위의 판단이다. 국민의힘은 법원의 충북지사 공천제동에 대해 “법원이 정치에 개입하려는 것”이라며 즉시 항고하겠다고 했다. 장동혁 대표는 “2차 시험공고가 잘못됐으니까 1차 시험 불합격자를 합격시키라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법원판결에 대해 새 공관위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주목된다. 새 공관위 멤버 구성은 장 대표의 의중이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2026-04-01

공공기관 채용 설명회에 대거 몰린 지역인재

지난 31일 경북대에서 열린 대구경북 공공기관 지역인재 채용 설명회에는 졸업을 앞둔 대학생, 취업준비생 심지어 고등학교 학생까지 몰려 대혼잡을 빚었다고 한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공동 주관한 이번 행사에는 한국가스공사, 한국부동산원, 한국도로공사 등 지역에 이전한 25개 공공기관과 iM뱅크 등 26개 기관이 참여해 지역인재 진로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제공했다. 지역으로 이전한 공공기관이 취업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지역인재 채용 기회를 확대하고, 청년취업률을 촉진하고자 실시하는 이 행사는 취업을 준비하는 지역대학생 등에는 많은 도움이 된다. 가능하면 이와 같은 취업정보 박람회가 많이 개최돼 취업난에 허덕이는 지역청년의 진로에 희망의 불빛이 되었으면 한다. 알다시피 글로벌 경제난으로 우리나라 청년 취업률은 최악이다.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2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15세 이상 취업자 수는 2841만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23만명 증가했다. 그러나 15~29세 청년취업자 수는 오히려 14만6000명이 줄어들었다. 특히 20~29세 청년 취업자 수는 16만3000명이 감소, 청년실업률은 2021년 이후 가장 높은 7.7%로 조사됐다. 청년층에 취업난이 집중된 것은 제조, 건설 등 주력 산업의 회복세가 더디고 신규 채용이 준 때문으로 풀이 된다. 또 취업시장이 경력직 중심으로 바뀌는 것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통계에 의하면 올 1월 현재 청년층의 쉬었음 인구는 46만9000명이다. 5년 만에 최대다. 그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서”(34%)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국가 전체로 본 청년들의 실상이지만 지역으로 좁히면 지역 청년들의 취업난은 더 심각하다. 다양한 산업군이 포진한 수도권에 비해 지역의 일자리는 매우 빈약한 때문이다. 청년들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는 것은 단순한 인구유출의 문제가 아니고 지역산업 구조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경북대에서 열린 채용 설명회에 몰린 지역 젊은이의 모습은 한 단면에 불과하다. 지역 청년의 취업을 도울 특단의 대책들이 쏟아져야 한다.

2026-04-01

청렴하지 않은 공직자는 도둑이다

선거철 후보들의 화려한 공약이 쏟아진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 도시를 바꾸겠다는 비전, 시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선언이 이어진다. 그런데, 유권자가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이 사람은 청렴한가'.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이렇게 적었다. ’백성의 삶을 책임진 자가 청렴하지 않으면, 그는 곧 백성의 도둑이다(牧民之官 不廉 卽民之盜).‘ 문장은 도덕적 훈계를 넘어 권력을 위임받은 자가 권한을 사사로이 사용하면, 그는 ’나쁜 사람‘을 넘어 ’도둑‘이라 경고한 것이다. 공직자는 자신의 재산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시민의 삶을 위임받은 사람이다. 세금은 시민이 땀흘려 살아가는 일상에서 나오고 정책과 행정은 시민의 삶을 바꾼다. 권한을 사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비리나 일탈일 뿐 아니라 시민의 재산을 훔치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은 청렴을 미덕 정도가 아니라 공직의 존재 조건으로 본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그 오래된 경고를 다시 떠올린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 후보가 수사대상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법원의 판단이 내려진 것은 아니라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공직을 맡겠다는 사람이 공식적으로 혐의의 대상이 된 상태에서, 과연 공동체의 신뢰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공직은 생계를 직업에 머물지 않는다. 유권자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권한이며, 그 권한을 행사하는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평가를 전제로 한다. 공직자의 청렴은 ‘선택적 미덕’이 아니라 ‘필수적 조건’이다. 좌와 우의 문제도 아니다. 정치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라, 공적권력을 다루는 최소한의 기준이어야 한다. 지방자치의 영역에서는 도덕기준이 한층 더 엄격해야 한다. 중앙권력과 달리, 지방의 권력은 시민일상의 구체적인 영역에 직접 닿아있다. 각종 인허가, 개발필요와 예산배분 등 시민의 하루하루와 맞닿은 결정들이 지역 권력자의 손을 거친다. 집행과정에서 청렴성에 대한 의심이 개입되는 순간, 공동체 전체가 흔들린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을 혼동한다는 데 있다. 법원은 법에 따라 유죄와 무죄를 가린다. 그러나 유권자는 그보다 더 넓은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공직을 맡길 만큼 신뢰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지방 선거는 선택을 넘어 지역 공동체가 기준을 선언하는 행위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권력을 맡길 것인가, 어느 정도의 도덕성과 책임감을 요구할 것인가를 투표를 통해 드러낸다. 의혹이 제기된 상태에서도 문제의식 없이 공직을 맡긴다면, 공동체 스스로 기준을 낮추는 일이 되지 않을까. 다산의 경고는 오늘도 유효하다. 공직자가 청렴하지 않다면, 그는 단지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극심한 손해를 끼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도둑’인 것이다. 공적권한을 사적으로 훼손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시민의 이익을 훔친다. 선거의 계절에 다시 묻는다. 누구에게 이 도시의 내일을 맡겨야 하나. 그 질문의 출발점과 종착역은 결국 하나다. ‘그는 청렴한가'.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4-01

퀄리아를 배우다

‘퀄리아’라니, 무슨 꽃 이름 같기도 하고, 나무 이름 같기도 한 이 이름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의식이다. 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느낌을 갖거나 심지어 엉뚱한 다른 물건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은 이 ‘퀄리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퀄리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며칠 전 읽은 뇌과학 교양서, ‘인간을 읽어내는 뇌과학’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에서는 뇌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할 만한 주제를 골고루 설명하고 있다. 퀄리아도 그 중 하나다. 정신이나 의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현대 뇌과학 분야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자르려야 자를 수 없는 ‘퀄리아’에 대한 연구 성과가 꽤 쌓여있다고 한다. 퀄리아 자체는 관찰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의 행동만으로도 그 존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세상과 접촉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감정을 갖는 모든 것이 퀄리아를 형성한다. 색깔은 물질의 속성이 아니라 뇌가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으로 주관적 느낌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같은 빨간 사과를 보지만 빨강은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사과의 맛 역시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한다. 퀄리아는 감각마다 존재하는데, 시각 퀄리아, 후각 퀄리아, 청각 퀄리아, 미각 퀄리아, 촉각 퀄리아 등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은 실체가 아니라 나의 주관이 만들어낸 환상인 셈이다. 그렇다고 퀄리아를 없애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퀄리아라는 것이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잘 감각하기 위해 좀 더 느리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학부 전공은 심리학이니 빼고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대학원 진학부터 따지면 인문학에 종사한 지 40년이 지났다. 한 번도 휴학한 적 없고 다른 일에 전업으로 종사한 적이 없으니 아무리 게을렀다고 해도 이만하면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고전 평론가가 6, 70대에 들어서서 공허에서 벗어나려면 인문학 공부로 지혜와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던 일이 생각난다. 예를 들어 ‘논어’를 읽을 때는 유학이 세상 최고이고, ‘도덕경’을 읽을 때는 도가 사상이 최선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중인격적인 혼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런 지식이 그 사람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하게 해줄까 하는 의문이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감각하는 모든 것, 모든 느낌과 생각이 퀄리아라는 주관적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라니, 그렇다면 고통이나 통증 역시 퀄리아일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객관적 실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을 알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지고 세상의 갈등이 줄어들 것이다. 이런 퀄리아 이야기를 듣자노라니, 삶의 공허를 조금이라도 넘어서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문제의 답까지 얻은 기분이 든다. 그것도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덤으로 말이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4-01

살이 찐게 아니고 붓는 것입니다

체중이 늘었다고 해서 모두 살이 찐 것은 아니다. 진료실에서 “요즘 살이 갑자기 쪘다”고 말하는 환자들 중 일부는 살이 찐 게 아니라 부종인 경우가 많다. 특히 몇 주 사이 2~3kg 이상 급격히 체중이 늘었거나 아침·저녁 몸무게와 부기 차이가 크다면 단순 비만이 아닌 순환 장애로 인한 부종을 의심해야 한다. 지방·근육은 단기간에 증가하기 어렵지만, 체액 정체는 순환이 무너지면 빠르게 몸에 쌓여 체중 변화가 두드러진다. 부종이 의심되는 경우, 손으로 정강이 아랫부분을 눌렀을 때 피부가 천천히 돌아오거나 양말 자국이 오래 남으며, 체중 증가에도 몸이 단단해지기보다 무겁고 퍼지는 느낌이 든다. 또한 기상 시 부기가 심해지고, 피로감과 함께 비 오는 날 몸이 더욱 무거워지며, 얼굴 윤곽(눈두덩이, 턱선)이 흐릿해지는 증상이 동반된다. 식사량 변화가 없는데 체중이 늘었다면 순환 문제 가능성이 높다. 부종은 단순히 물이 많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분이 제대로 이동하지 못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정체되면서 발생한다. 이 과정에는 혈액순환과 림프순환 그리고 자율신경의 조절이 관여한다. 스트레스, 수면 부족, 불규칙한 식단등이 종합되어 지속되면 자율신경 균형이 깨지고 혈관의 수축과 이완 조절이 둔해진다. 여기에 운동 부족이나 근육량 감소가 겹치면 혈액을 심장으로 밀어 올리는 펌프 기능도 떨어지면서 체액 정체가 더 심해진다. 그 결과 체액이 말초에 머물고 잘 빠지지 않으면서 붓기가 반복된다. 이 상태를 방치하면 단순한 외형 변화에서 끝나지 않는다. 순환이 떨어지면 근육과 관절에 피로가 쌓이고 목과 어깨 통증이나 허리 불편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두통, 어지럼, 소화불량, 수족냉증과 피로 같은 전신 증상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검사상 큰 이상이 없는데도 몸이 계속 무겁고 피곤하다면 순환과 자율신경 문제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해결 역시 단순히 체중을 줄이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효과가 떨어진다. 식사를 줄이거나 운동만 늘리면 일시적으로 체중은 줄 수 있지만 순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시 붓고 다시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과도한 다이어트는 근육량을 감소시켜 오히려 순환을 더 떨어뜨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몸이 스스로 순환을 회복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치료는 막힌 순환을 풀고 자율신경 균형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약을 통해 전신적인 순환 기능을 보강하고 정체된 수분이 빠져나갈 수 있는 창출이나 방기 마황과 같은 약제를 이용해 수분의 배출을 도와준다. 부분적인 부종이면 순환이 저하된 부위를 정확히 찾아 침과 약침 등으로 치료를 할 수 있다. 순환이 회복되면 붓기가 빠지면서 몸이 가벼워지는 변화를 비교적 빠르게 느낄 수 있다. 몸이 자주 붓고 무겁게 느껴진다면 단순히 살이 쪘다고 단정짓기 보다 현재의 순환 상태를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붓기는 몸의 흐름이 막혀 있다는 신호다. 이 흐름이 회복되면 체중 변화와 상관없이 몸은 훨씬 가볍고 편안해진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4-01

봄을 깨우는 물소리

3월의 숨결을 온전히 느끼는 날이었다. 햇살이 머무는 자리는 따뜻하고 바람이 스치는 자리는 아직 겨울의 서늘함을 놓지 않았다. 계절은 그렇게 두 겹의 온도로 흔들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꽃소식이 날아들었다. 상춘객도 많겠지만 나는 물소리를 찾아 계곡으로 향했다. 내연산 품에 안겨 있는 계곡 주변 너럭바위에 걸터앉았다. 돌에 닿는 물소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듯 차가운 물인데도, 물소리에는 분명 초록 봄을 부르는 싱그러움이 담겨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산 아래 개울로 내려갔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았던 외가를 조금 벗어나면 오솔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가만가만 내려가면 물소리가 나를 따라왔다. 그때 산골짜기를 흘러내렸던 물은 지금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아니, 어쩌면 내가 어렸기에 물소리가 엄청 크게 다가왔던 것이리라. 물줄기가 바위를 두드리며 내는 소리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었다. 조금씩 다른 높이와 깊이로 울리며, 서로 다른 음을 겹쳐 하나의 긴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노래는 산 위에서 시작되어 마을로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소리에 집중했다. 온몸의 세포를 활짝 열었다. 겨울 동안 닫혀 있던 내 몸의 무딘 감각들이 깨어날 수 있도록 귀로만 듣기보다 온몸에 스며들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그랬더니 바위에 닿은 물방울이 튀어 올라 손등에 떨어질 때마다, 정말로 굳어 있던 감각들이 하나씩 풀려나는 것 같았다. 물은 차가운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서서히 따뜻해졌다. 내연산 바람이 갑자기 불어왔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바람 속에는 분명히 다른 숨결이 섞여 있었다. 겨울의 바람이 직선으로 지나간다면 봄의 바람은 어딘가 부드럽게 굽어 흐르는 느낌이었다.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서로 부딪히자 또 다른 소리가 만들어졌다. 물소리 위에 얹히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 자연은 그렇게 여러 겹의 화음으로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산길에는 아직 잎이 나지 않은 나무가 서 있었다. 앙상한 가지는 마치 겨울의 기억을 붙들고 있는 손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더니 나뭇가지 끝에는 분명히 작은 변화가 있었다. 아주 여린 빛깔의 싹이 보였다. 나의 눈을 가까이 가져가야만 겨우 보일 만큼 미세하게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벌써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나는 손끝을 물에 살짝 담가 보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곧바로 차가움이 익숙해졌기에 두 손을 물에 담갔다. 내가 흐름을 방해해도 물 은 계속 흐르고 흘렀다. 그 흐름 속에는 멈춤이 없었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결국은 봄에 의해 흘러가 버리듯이 사람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에게만 유독 얼어붙어 있다고 믿었던 고통의 순간이나 멈춘 것처럼 느껴지던 시련의 순간도, 사실은 아주 느리게 흘러서 나를 비켜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봄을 깨우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비로소 알아차렸다.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깨어나는 것이라고. /정미영 수필가

2026-04-01

삶을 꾸리는 계획

나는 원래 계획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계획을 세우는 행위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계획 싫어주의자’였다. 계획이라는 건 왠지 모르게 완벽해야 할 것 같았고, 괜히 하나하나 다 따져야 할 것 같았다. 여행 계획이라면 오랜 시간을 들여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완벽한 동선을 짜고, 혹시 모를 변수까지 고려해야 하는 난해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지나치게 생각해야 한다면 차라리 아무 계획 없이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늘 마음 가는 대로 즉흥적으로 살았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움직이고, 하고 싶은 것을 그때그때 선택하며 우연과 운명에 기대는 방식. 그게 더 자유로운 삶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됐다. 준비를 하지 않아서 생기는 사소한 손해들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하며 후회가 짙게 남았다. 특히 여행에서 그 차이는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막상 도착해서야 알게 되는 정보들이나 이미 지나쳐버린 기회들, 미리 알았더라면 훨씬 더 즐길 수 있었을 순간들 등. “아, 여기 이거 꼭 해볼 걸.”,“왜 이걸 미리 안 찾아봤지?” 같은 후회가 반복됐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자 점점 ‘조금만 미리 준비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행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거나 대비를 하지 않아서 생기는 손해 보는 일들이 늘어날수록 아쉬움은 커져만 갔고, 그 이후로 아주 작은 것부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거창하거나 완벽한 계획이라기보단 하루에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적어보며 무언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해야 할 목록을 작게 하나씩 적어가다 보니, 성취의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고 점점 내게 잘 맞는 기록 방식과 계획 방법을 터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계획을 세우면 대비된 상태가 된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덜 흔들리고, 시간의 흐름에 끌려가기보다 내가 시간을 주도하여 끌고 간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내가 계획한 일을 실제로 해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이었다. 그 성취감은 단순히 할 일을 끝냈다는 정도의 기분이 아니라, 나의 시간을 제대로 사용했다는 만족감에 가까웠다. 그렇게 내게 시간을 기록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지금은 하루를 계획하고, 일주일을 정리하고, 한 달의 흐름을 미리 그려본다. 시간을 나눠서 바라보기 시작하니, 이전에는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거대한 시간이라는 대상이 점점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가 쌓여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모여 한 달이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한 달이 결국 나의 1년이 된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1년이라는 시간마저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조율의 영역처럼 느껴졌다.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면서 맞이한 또 다른 변화는 쉬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소파에 무기력하게 누워 시간을 보내는 것을 휴식이라 여겼지만, 어떻게 잘 쉬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늘 남았다. 이제는 쉬는 날이면 밀린 집안일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평일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계획해 시간을 보낸다. 새로운 원두로 드립 커피를 내리거나, 보드게임을 하거나, 밀린 콘텐츠를 보고, 가볍게 운동을 하는 식으로. 이렇게 시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만족스러운 휴식으로 이어진다.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시간의 흐름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일정을 기획하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도 있다. 계획을 세우다보니 알게 된 새로운 점은, 계획은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얼만큼 알아보고 준비를 하고 대비를 세우던, 완벽한 계획은 없다. 중요한 건 계획의 완성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그러니 어쩌면 계획이라는 건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내 시간을 내가 선택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마음가짐. 그 하나만으로도 삶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윤여진(시인)

2026-04-01

빈티지

구제 가죽 재킷을 입고 나타난 내게 친구는 말했다. “새 옷 좀 사. 소매가 다 뜯어졌잖아.” 나는 그게 바로 멋이라고 했다.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일렉 기타에 레릭(오래 사용되어 수십 년 연주한 것처럼 일부러 낡은 외관을 만드는 것)이란 걸 만들기도 해. 그게 그냥 깨끗한 상태의 기타보다 비싸.” 얼굴에 불신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인터넷에서 검색한 다음 이미지와 가격을 보여주었다. 친구가 연신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얘기했다. “그게 멋이야.” 이렇게 보면 내가 굉장히 힙하게 입고 다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멋이라는 걸 정말 모른다. 누가 쓰던 것을 가져와 다시 쓰는 일을 딱히 선호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남들보다도 유별나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 흔한 중고 거래를 가볍게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직도 나의 스마트폰에는 당근 앱 같은 것이 깔려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런 면이 옷에 있어서는 제법 관대해졌다. 몇 년 전에 승용, 혜경, 다영이라는 친구들과 부산으로 여행을 다녀온 다음부터였다. 지금도 패션에 조예가 얕다 못해 습자지 수준이지만 부산 여행 전에는 더 심했다. 검은 티셔츠, 검은 바지, 검거나 흰 신발. 주위에서 다들 ‘흑백영화냐’며 핀잔을 줘도 나는 꿋꿋했다. 심지어 겨울이 오면 모자, 목도리, 패딩까지 온몸을 검은색으로 꽁꽁 싸맸다. 교실 앞문을 열며 담임 선생님이 툭툭 내뱉던 어둠의 자식이 바로 나였다. 다만 조금 기준이 있는 어둠의 자식이었다. 회색에 가까운 것이 아는 완연한 검은색이어야 함. 새 옷이어야 함. 그림이 프린팅되어 있거나 로고가 전면에 크게 새겨져 있으면 안 됨. 특별한 무늬가 없는 깔끔한 블랙이어야 함. 티셔츠든 바지든 펑퍼짐하면 안 됨. 그런 나를 여행 메이트들이, 특히 승용은 용납하지 못했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우리가 갈 곳이 있다고 했다. 국제시장의 한 구제샵이었다. 간판도 세월을 피해 가지 못한 듯 보이는 그 가게에 승용과 혜경은 와본 적이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코디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다 해주시니 그에 맞춰서 구매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대체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가늠할 수도 없는 시스템이었다. 무엇보다 구제샵을 제대로 들어가 본 게 처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일단 구경부터 해볼게.” 내가 말하자 승용과 혜경 그리고 다영이 동시에 답했다. “아냐.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해. 넌 자아를 갖지 마.” 구제샵에는 온갖 종류의 옷들이 가득 차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옷으로 뒤덮인 채였다. 오래된 옷으로 이루어진 무덤 같았다. 손을 넣으면 바로 거기에 빨려 들어가 안에 갇혀 질식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둘러보고 있는 사이 사장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승용은 망설임 없이 사장님께 나의 옷을 봐달라고 했다. 사장님이 처음 꺼내든 옷은 아주 펑퍼짐한 바지와 하얀 티셔츠였다. 살면서 한번도 입어본 적 없는 스타일이었다. “통이 너무 크지 않아?” 나의 말에 승용은 요즘 다 이렇게 입는다며 나의 감각이 너무 올드하다고 했다. “아니 내가 올드해? 오히려 이런 펑퍼짐한 게 90년대 패션 아니야…?” 승용은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한심하다는 투로 언제 적 슬랙스를 입고 있냐며 빨리 갈아입으라고 부추겼다. 처음 입어본 구제 옷은 너무 낯설었다. 바지 품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했고 티셔츠는 곧 흘러내릴 기세였다. 그 위에 걸친 청재킷 또한 거인이 입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헐렁거렸다. 아무래도 전체가 다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사장님은 또 다른 바지를 입어보라 권했고 그건 내겐 한 벌도 존재하지 않는 하얀 바지였다.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마지못해 입고 거울 앞에 선 순간 거기 지금까지와는 낯설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은 내가 있었다. 연한 갈색 블레이저를 함께 입으니 그 또한 제법 어울렸다. 무릎 쪽이 헤지고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만 보였다. 그렇게 몇 벌을 더 입어보고 느꼈다. 오래된 옷은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것을. 파도를 맞으면 맞을수록 안온해지는 백사장의 모래처럼. 추천받은 옷들을 전부 구매하고 다시 입고 왔던 슬랙스로 갈아입으니 몸이 뻣뻣해진 기분이었다. 완전히 이해하진 못해도 빈티지의 매력을 조금은 엿보게 되었다. 오래된 것이라고 그저 낡은 것이 아니다. 오래된 것은 지난 시간을 잊지 않는다. 오래된 것은 상처가 많아서 나를 다정하게 안아준다. /구현우(시인)

2026-04-01

대구시장 선거, 이젠 국힘 ‘독무대’가 아니다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국민의힘 대구시장 경선 일정이 본격 시작됐다. 예비후보 6명의 역량을 평가하는 1차 토론회도 그저께(30일) TBC 대구방송에서 열렸다. 마침 이날은 민주당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한 날이어서, 대구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김 전 총리와 국민의힘 예비후보들의 역량을 비교하면서 토론회를 지켜봤을 것이다. 토론회에서 6명의 후보들은 한목소리로 “위기의 대구경제를 살리겠다”면서 다양한 공약을 쏟아냈다. 하지만 대부분 공약이 이미 여러 차례 거론됐거나, 대구시 재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유권자들은 실현 가능성을 자세히 따져보면서 지지 후보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2차 토론회는 오는 13일 열린다. 토론회에서 각 후보가 지적했다시피, 현재 대구가 처한 정치·경제적 현실은 어둡기 짝이 없다. 대구경제는 3년 연속 전국 최하위권에 머물며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이러니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김부겸 전 총리는 30일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하면서 “대구가 점점 더 나빠지는 이유는 대구의 정치 때문”이라고 했다. 정치인들이 일을 하지 않아도 유권자가 표를 찍어 주니까 경제가 엉망이라는 소리다. 아마 공감하는 대구시민이 많을 것이다. 이번 대구시장 공천과정에서도 드러났듯이 국민의힘 지도부는 아직도 대구는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지역인 줄 알고 있다. 대구 민심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다. 공직자윤리위원회에 공개된 대구지역 국회의원들의 재산 신고 내역을 보고, 일각에서는 ‘국민의힘이냐 서울 강남의 힘이냐’는 비아냥도 나온다. 대구는 지금 이재명 정부가 집권한 이후 주요 현안이 대부분 스톱된 상태다. 행정통합은 호남만 됐고, TK신공항 건설은 재원이 없어 하염없이 표류하고 있다. 2차 공공기관이전도 행정통합이 된 호남지역에 우선 배정될 것이 확실시된다. 대구시민들의 식수원인 낙동강 물은 언제 또 오염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민주당의 경우, 중량감 있는 김 전 총리가 대구시장 후보로 나서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여당 프리미엄’을 활용하고 있다. 김 전 총리는 핵심 공약으로 대구·경북 행정통합 재추진, 민군 통합공항 이전 완수, 2차 공공기관 유치(IBK기업은행 등) 등을 제시하며, “제가 책임지고 완수하겠다. 당 대표도 약속했다”고 했다. 앞서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김 전 총리를 만나 “‘무엇이든 다해드림’ 센터장이 되겠다”고 했다. 조승래 민주당 사무총장도 얼마 전 GRDP(지역내 총생산) 최하위권인 대구 경제를 거론하며 “공항·공공기관 이전과 같은 현안 해결을 위해 대통령, 중앙정부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김 전 총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당 지도부가 노골적으로 대구현안을 해결하려면 ‘김부겸 카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유권자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이러한 ‘여당 프리미엄’에 대응해 민심을 얻으려면 예비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대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대구 현안과 관련한 설득력 있는 해법을 내놓지 못하면 시민들은 새로운 정치세력을 찾을 수밖에 없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3-31

영농철 영농 준비 멈추게 하는 나프타 쇼크

쓰레기 봉투 대란으로 시작된 나프타 쇼크가 일파만파다.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로 비롯한 나프타 쇼크는 원료수급 중단에 가격 폭등까지 겹치면서 산업 전반에 파장을 키우고 있다. 나프타는 원유를 정유할 때 나오는 물질이다. 플라스틱, 고무, 합성섬유, 반도체 등 주요 산업 소재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필수 원료다. 사용 범위가 넓어 산업의 쌀이라 부른다. 우리나라는 나프타 수요의 45%를 수입에 의존한다. 이중 77%가 중동산이다. 중동전쟁 이후 가격이 폭등했다. 1월 초 배럴당 50달러이던 나프타가 이달 중순에는 120달러를 돌파했다. 최근 국내 수급부족 상황이 발생하자 정부가 나서 수출을 통제하고, 내수 우선 배분체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수출을 막는다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나프타 분해시설을 운영하는 주요 석유화학업체들은 공장 가동률을 종전의 절반 수준으로 낮췄다. 원유공급이 이뤄지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별로 없는 게 문제다. 쓰레기 봉투 대란처럼 페트병, 포장지, 라면봉지, 각종 식품용기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한 제품들이 시중에서 부족하거나 품귀를 빚을까 봐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영농철을 앞두고 있는 농가에서는 농업용 비닐, 부직포, 플라스틱 육모 상자 등 농업용 자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고 한다. 매년 작목반을 통해 공동 구매하던 비닐이 올해는 물량부족으로 개별 구매에 나서야 하나 도매상에조차 물건이 없어 속이 타들어 간다고 한다. 나프타 수급 사정이 해소되지 못하면 올해 농사는 망칠 수 있다는 비관적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중동사태로 인한 에너지 수급위기가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언급했다. 시중에도 에너지 위기로 인한 4월 위기설이 나돌고 있다. 정부의 실효적인 대책이 나와야 하나 중동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묘안을 찾기가 어렵다. 전쟁이 끝나도 기름값이 당장 안정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매점매석 자제, 대체제개발 등 소비절약을 생활화하는 소비자들의 행동양식이 필요한 때다.

2026-03-31

'공천파동'으로 맥빠진 국힘 대구시장 토론회

국민의힘 대구시장 경선에 나선 유영하·윤재옥·이재만·추경호·최은석·홍석준(가나다순) 후보가 30일 TBC 대구방송에서 첫 번째 토론회를 열었다. 2차 토론회는 오는 13일 열리며, 이후 당원 투표(70%), 일반국민 여론조사(30%) 결과를 합산해 본경선 진출 후보자 2명을 압축한다. 최종 후보는 토론회(19일)를 한 번 더 거친 뒤 당원 투표(50%)·일반국민 여론조사(50%)로 선출(26일)한다. 첫 토론회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대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이냐는 질문에 최은석 후보는 “CJ 제일제당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이뤄온 경영 DNA를 시정에 접목하겠다”고 했고, 홍석준 후보는 “대기업을 유치하겠다”고 했다. 유영하 후보는 “삼성 반도체 팹 2기 유치”를, 이재만 후보는 “라스베이거스 공연장인 ‘스피어’를 유치하겠다”고 공약했다. 추경호 후보는 “대구를 첨단산업 1등 도시로 만들겠다”고 했고, 윤재옥 후보는 “대구산업 구조를 대전환하겠다”고 했다. 이어진 주도권 토론에서는 후보 간 공방이 격화되기도 했다.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추경호 후보에게 공격이 집중되는 모습이었다. 각 후보들은 토론회에서 공약 발표와 함께, 날카롭게 서로를 검증하는 시간도 가져 비교적 성숙한 토론문화를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최근 발표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힘에 대한 대구 민심이 예전 같지 않다. 정당지지율이 민주당과 오차범위 내 접전을 벌이는 경우도 더러 나온다. 당내 극우세력 목소리가 너무 거칠고, 장동혁 대표가 당권장악을 위해 오히려 이들 편에 서기 때문에 합리적 보수 민심이 등을 돌리는 것이다. 특히 대구시장 공천 과정에서 당 공관위가 자의적으로 주호영 의원과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컷오프시킨 것은 악재 중의 악재다. 주 의원과 이 전 위원장 모두 법원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한 상태라 지금 진행되는 예비경선이 일정대로 진행될지도 불투명하다. 아마 토론회에 참가하는 후보들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 같다.

2026-03-31

노킹스 시위

작년 6월 14일 미국 워싱턴에서는 유례없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진행돼 국민들 간에 논란이 벌어졌다. 이날 군사 퍼레이드에 동원된 병력만 6600명에 달했고, 전차부대, 블랙호크 헬기, 자주포 등 최신 군사장비와 폭격기 등이 등장했다. 전례가 없던 행사가 치러진 배경은 미육군 창설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날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79번째 생일과 겹쳐 행사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반대측은 북한식 군사 과시, 권위주의 상징, 트럼프의 생일파티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미국의 반트럼프 정치단체인 50501은 이날 전국에 걸쳐 트럼프의 권위적 행동을 비판하는 시위를 펼쳤다. 50501은 50개 주에서 50개 시위를 하는 하나의 운동이란 뜻을 담고 있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노킹스(N0 Kings)다. “왕이 없다”는 뜻이다. 미국이 군주제 국가가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미국은 건국 당시 영국 왕정에 맞서 독립한 공화국으로 구호 자체가 역사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작년 10월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트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의 모형을 선물했다. 이를 두고 반트럼프 시위대는 “왕이 되고 싶어 하는 트럼프에게 진짜 왕관을 주면 어쩌나” 하며 볼멘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동전쟁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 전역에서 또다시 대규모 노킹스 시위가 벌어졌다. 주최측은 3300여 곳에서 800만명 이상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라 했다. 지지율 36%로 떨어진 트럼프가 최악의 궁지로 몰리는 것은 아닐까. 이후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31

어린 왕들과 왕관의 무게

역사는 종종 왕의 이름이 아니라, 그가 쓰기에는 너무 버거웠던 왕관의 무게를 기억한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고려 말 비운의 군주 창왕(昌王)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비극의 대명사로 각인된 조선 제6대 왕 단종과 비교되면서, ‘단종보다 더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 어린 왕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창왕은 고려 제33대 국왕으로, 우왕이 위화도 회군 직후 폐위된 뒤 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이 내세운 ‘폐가입진(廢假立眞)’ 논리에 휘말리며 명나라의 공식 승인을 받지 못한 채 재위 1년 만에 폐위되는 운명을 맞았다. 사망 당시 단종은 16세로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고등학교 1학년 또래였다. 창왕은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나이인 9세에 생을 마감했다. 두 왕 모두 왕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두 어린 왕의 비극은 그들이 죽음에 이를 만한 실책이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재위 기간 역시 단종은 약 3년, 창왕은 1년에 불과했다.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거나 국정을 어지럽힐 물리적 시간조차 사실상 없었던 셈이다. 창왕 역시 고려 말 격변기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했다. 아버지 우왕이 강제 폐위된 뒤 신진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왕실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정치적 공격 속에서 결국 아버지와 함께 강화도에서 참수됐다. 어리고 정치적 기반이 약한 단종이나 창왕보다, 강력한 권력과 개혁 의지를 가진 수양대군이나 이성계가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더 적합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서양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어린 군주들의 비극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존 1세(1316년)는 태어나자마자 국왕이 되었지만 불과 4일 만에 사망했다. 역사상 가장 짧은 재위 기간으로 기록된다. 영국에서는 이른바 ‘탑 속의 왕자(Princes in the Tower)’ 사건(1483년)이 대표적이다. 에드워드 5세는 12세에 즉위했지만 숙부 리처드 3세에게 권력을 빼앗긴 뒤 동생과 함께 런던탑에 갇혔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숙부가 왕권 안정을 위해 조카들을 제거했다는 가설이 지배적이지만, 후대 왕인 헨리 7세의 배후설 등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며 지금까지도 영국사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왕자들 역시 15세기 영국 왕실의 권력 암투 속에서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희생된 사례다. 이처럼 단명한 어린 국왕들의 죽음은 개인의 자질이나 과오와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 투쟁이 격화될수록 정통성은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고, 보호자나 후견 세력이 없는 어린 왕은 가장 먼저 무너지는 취약한 고리가 되기 쉽다. 하이에나는 무리에서 벗어난 사자, 호랑이 새끼를 가차 없이 물어 죽인다. 자연계의 이런 모습은 ‘힘의 논리 앞에서 정통성과 정의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냉혹하게 보여준다. 보호막이 걷힌 사자 새끼들이 들개의 먹잇감이 되듯, 정치적 풍랑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존재 역시 결국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너무 어렸던 어린 왕들이었다. /한상갑 경북부 에디터

2026-03-31

제조업의 미래와 Cell 리더십

제조업의 경쟁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많은 기업이 자동화 설비, 스마트 공장, 데이터, 시스템에 막대한 투자를 한다. 물론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현장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진짜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사람’, 그 중에서도 ‘리더’임을 알 수 있다. 제조업은 다른 산업과 다르게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만든다. 작업자의 작은 실수 하나, 설비의 미세한 이상 하나가 곧바로 품질 불량과 원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작은 조직(Cell)의 리더 역할은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라, 현장을 이해하고 문제를 즉시 해결하는 ‘실행 책임자’에 가깝다. 현장에는 늘 답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개념이 바로 ‘겐바(現場)’다. 일본 제조 혁신의 핵심 철학으로 알려진 이 개념은 ‘문제는 현장에 있고, 해답도 현장에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장을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만 진짜 문제가 드러난다. Cell 리더는 ‘현장의 CEO’ 역할이고 의사결정, 개선, 성과 책임을 스스로 수행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표준’이다. 제조업은 표준 위에서 움직이는 산업이다. 표준이 무너지면 품질은 흔들리고, 품질이 흔들리면 고객은 떠난다. 리더는 표준을 만드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켜지도록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표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능력 또한 필수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지속적 개선’이다. 흔히 말하는 PDCA 사이클은 계획(Plan), 실행(Do), 점검(Check), 조치(Action)의 반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문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개선은 일부 전문가의 몫이 아니라, 현장 구성원 모두가 참여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결국 제조업 리더십의 핵심은 사람이다. 설비는 투자로 확보할 수 있지만, 사람의 참여와 몰입은 리더십만으로 만들어 진다. 현장의 작업자가 문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스스로 개선에 나서는 라인과 공정 조직 단위의 Cell 리더십은 강한 현장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반대로 문제를 감추고 지시만 기다리는 조직은 아무리 좋은 설비를 갖추어도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는 ‘현장중심’과 ‘지속적 개선’을 기반으로 최고 수준의 품질을 유지해왔다. 그들의 경쟁력은 설비가 아니라, 현장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개선하는 문화에 있다. 이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리더들이 오랜 시간 쌓아온 결과다. 혁신의 정체를 경험하고 있는 기업은 공장의 라인 단위 리더와 리더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산 라인, 공정 단위 지시와 통제보다 자율과 책임의 현장을 보고, 생산, 품질, 원가 등 문제를 들어내고, 사람을 참여시키는 Cell 리더십이 혁신의 출발점이다. 제조업의 미래는 거창한 전략이 아니라, 오늘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달려 있다. 그 중에는 언제나 리더가 있다. 결국 좋은 설비가 아니라, Cell의 현장 리더가 기업 경쟁력을 만든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3-31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③유고슬라비즘의 확산

1848년 파리혁명의 영향으로 독일혁명이 연이어 일어나자 중부유럽과 발칸반도 내 민족들의 홀로서기 위한 몸부림이 본격화된다. 이때 헝가리에서 반 합스부르크제국에 대항하는 대규모 무력시위가 발생한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크로아티아를 부추겨 헝가리를 치도록 치밀한 계획을 짰다. 크로아티아에 슬라보니아와 달마티아는 물론 자그레브까지 헝가리로부터 독립을 미끼로 군사를 동원해 헝가리를 치도록 종용했다. 크로아티아로선 목이 빠지도록 바라던 바였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합스부르크제국 육군대령 요시프 옐라취치를 크로아티아 왕인 반에 올려 계획을 실행하고자 했다. 이때 세르비아인들까지 합세하면서 두 정치지도자가 처음으로 함께 군사행동을 개시하게 된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1848년 7월 옐라취치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진격했다. 이때 세르비아 군대가 후방에서 크로아티아를 지원하면서 헝가리를 압박했다. 러시아마저 제국 내 중소 민족의 반란을 우려해 오스트리아를 돕겠다고 나서면서 졸지에 헝가리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결국 1849년 5월 헝가리의 이유 있는 반항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강대국과의 약속은 휴지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크로아티아의 소신 있는 노력에도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헝가리 지배에서는 벗어났다곤 하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 속국으로 존재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배신감을 느끼기도 전에 당장 민족의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이센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등장하면서 1862년에는 독일제국은 게르만민족만의 단합을 부르짖는다. 동시에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토 일부 공국들을 흡수해버린다. 오스트리아의 항전도 독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터키와 함께 점차 제국의 기력을 잃어갔다. 오스트리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러시아의 도전을 받아 또 망신창이가 되면서 긴 세월 동안 유럽을 호령하면서 해가지지 않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19세기 후반,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헝가리로서도 만만하게 변해버린 오스트리아에 도전장을 내밀고 왕실은 하나로 하되, 공동의 군대와 평등한 외교와 경제정책에 합의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중제국이 탄생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독립의 꿈에 부풀어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또 다시 해안도시와 내륙이 갈라지는 아픔을 겪으며 이들의 지배 속으로 들고 말았다. 지겹도록 피지배자의 역사가 이어졌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편입된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를 제외하고 크로아티아와 보이보디나는 헝가리에 끈질기게 괴롭힘 당했다. 이때 강력한 리더십으로 대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주창한 안테 스타르췌비치가 크로아티아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극우 ‘권리당’을 창당해 스스로 당수에 오른다. 그리고 훗날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의 ‘우스타샤’(크로아티아어로 반란이란 뜻의 ‘우스타샤’란 단체가 자주 등장한다)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크로아티아민족주의는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즘까지 확산하면서 세르비아는 물론, 심지어 역사적으로 늘 치고 박았던 불가리아 청년들까지 합세했다.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려 만만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넘보았다.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곳은 모두 세르비아국가라는 대세르비아주의처럼, 이곳 보스니아에 가톨릭인구 18%를 크로아티아 사람으로 분류하면서 이미 오스만트루크 이전 크로아티아 중세왕국이 차지했던 보스니아 브르바스강 서남지역을 장악했던 사실을 상기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도 상황이 바뀌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주의 열정은 탄력받았다. 헝가리는 크로아티아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재정 독립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헝가리는 두 민족을 갈라놓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짰다. 그해 10월 가장 염려하던 보스니아지역을 오스트리아가 완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집어삼키면서 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서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선택은 소수민족의 탄압, 즉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에 대한 압제였다. 이는 두 민족 사이에 차별화를 가함으로써 갈라놓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헝가리는 이들에게 독립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연합정당 내의 세르비아인 지도자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이때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였으니, 밖에서 보았을 때 크로아티아인은 방관자로 낙인 찍혀 누명을 쓰게 된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최일선 방어선(세르비아인들이 자치행정을 구성하면서 자신들 의지로 살아가던) 보이나 그라니짜 지역을 크로아티아 행정구역으로 넘기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정착한 세르비아인 반감이 극에 달했다. 헝가리 계획대로 두 민족 간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면서 20세기 민족 간 폭력에 당위성이 쌓여가고 있었다. 훗날 또 한 편의 가공할 폭력의 새판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3-31

중년의 안녕

생의 정오를 지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 세상은 더 이상 ‘채움‘의 공간이 아니라 정갈한 ‘비움’의 전시장으로 변모한다. 그간 내 삶을 지탱해 온 무수한 탐닉과 안일, 그리고 소중했던 인연들이 하나둘씩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비로소 ‘안녕’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다시 읽는다. 한때 나의 밤을 위로했던 것은 자극적인 음식들이었다. 늦은 밤 수업을 마치고 마주하던 라면의 매콤한 증기, 바삭한 튀김 옷 속에 숨겨진 고소한 육즙, 치즈의 녹진함이 주는 안온함. 그것들은 고단한 나의 하루를 보상받고자 했던 치기 어린 보상 심리였다. 그러나 이제 내 몸은 정직한 가계부처럼 쌓아온 세월의 청구서를 내민다. 혈관 속을 흐르는 엄중한 경고등 앞에서 나는 이 매혹적인 ‘독’들과 작별을 선포한다. 혀끝의 찰나적 쾌락을 위해 생의 총량을 갉아먹던 미련함을 거두고 이제는 덤덤한 채소의 식감과 맑은 물의 투명함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것은 금욕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빈둥거리며 소파에 파묻혀 책장을 넘기거나 스크린의 잔상에 몰입하던 시간은 달콤한 늪이었다. 게으름은 영혼의 휴식이라는 미명 하에 나를 침잠시켰고 움직이지 않는 육체는 서서히 활력을 잃어갔다. 그 활력의 부재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내 몸의 영토를 잠식해 온 소리 없는 퇴조였다. 거울 앞에 서면 낯선 중년의 여인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때는 가볍고 활기찬 보폭을 자랑했던 육신은 중력의 법칙을 이겨내지 못하고 처져 있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리는 관절은 세월의 마모를 하소연했다. 내면의 의지는 육체의 한계에 굴복해 가는 타협이 필요한 시기라 절실히 말하고 있다. 내 몸이 보내는 비명을‘편안함’이라는 기만적인 단어로 덮어두고 있었음을 이제야 시인한다. 나를 지탱하던 기둥들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찰나, 내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함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엘리베이터의 편리함 대신 계단의 가파른 정직함을 택했다. 한 계단씩 발을 내디딜 때마다 차오르는 숨 가쁨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원초적인 박동이다. 식후의 나른함을 뿌리치고 길 위로 나서는 행위는 관성대로 살아가던 어제의 나를 부정하고 매일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수행이기도 하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흐를 때마다 나는 내 몸 안에 고여있던 나태의 앙금들을 씻어낸다. 가장 아픈 안녕은 사람에게서 온다. 내 생의 전부였던 아이들은 어느새 제 깃털을 고르고 스스로의 하늘을 찾아 비상한다. 아이들이 떠난 빈방에 고이는 적막은 처음엔 서늘한 통증이었으나 이제는 그 고요를, 나와 아이들을 향한 성장의 향기로 읽어내려 노력한다. 또한, 삶의 한 페이지를 함께 써 내려갔던 아버지의 예고 없는 작별을 경험하며 나는 만남보다 이별이 더 본질적인 삶의 태도임을 깨닫는다. 떠나보내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아버지가 내 삶에 남긴 무늬를 오롯이 간직하겠다는 다짐이다. 이제 나는 부재의 시간 속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걸어온 긴 궤적을 삶을 지탱하는 옹이로 바꾸어 나가는 중이다. 안녕은 본래 ‘안부’를 묻는 인사이자 ‘평안’을 기원하는 기도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 사랑하는 이들이 남기고 간 여백은 처음엔 메울 길 없는 허공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깨닫는다. 그 빈자리가 있기에 비로소 바람이 통하고 빛이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빽빽하게 들어찬 인연의 숲에서는 보이지 않던 나 자신의 민낯이 관계의 낙엽이 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중년의 안녕은 결핍이 아니라 정교한 조각이다. 불필요한 인연의 잔가지들을 쳐내고 남은 옹이 진 나무처럼, 나는 이제 홀로 서는 법을 배우며 그 고독의 여백 속에 나만의 사유를 채워 넣는다. /김경아 작가

2026-03-31

공황발작은 병이 아니라 경보다

공황장애라는 말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러나 공황, 공황발작, 공황장애를 정확히 구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순간, 막연한 두려움은 구체적인 이해로 바뀌고 치료의 출발점이 만들어진다. 먼저 공황은 정상적인 반응이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급성 공포와 불안의 반응이다. 밤길을 혼자 걷다가 갑자기 맹수를 마주쳤다고 상상해 보자. 심장이 거칠게 뛰고 숨이 가빠지며 진땀이 흐른다. 순간적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강한 공포가 밀려온다. 이 반응은 병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정상적인 작동이다. 불안은 우리를 무너뜨리는 감정이 아니라 지키는 감정이다. 반면 공황발작은 실제 위험이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반응이 과도하게 나타나는 경우다. 불이 나지 않았는데도 경보기가 울리는 것과 같다. 이때 ‘발작’은 증상이 갑자기 나타났다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진다는 뜻이다. 공황발작은 지속되지 않는다. 밀려오지만 결국 지나간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공포는 줄어든다. 흥미로운 점은 공황발작의 증상이 ‘죽을 것 같다’는 생각 같은 마음의 반응보다,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가쁘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등 몸의 증상으로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처음에는 심장이나 폐의 문제로 생각하고 병원을 찾는다. 때로는 응급실까지 가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환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장면이 있다. 병원에 도착해 안정을 취하는 순간, 그토록 심하던 증상이 거짓말처럼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다. 몸이 갑자기 좋아져서가 아니다. ‘이제 괜찮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신경계를 잠시 진정시키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공황의 본질이 신체의 이상이 아니라, 과도하게 활성화된 경보 반응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공황발작이 한 번 있었다고 모두 공황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이후다. “또 오면 어쩌지”라는 예기불안이 생기고, 몸의 감각을 위험 신호로 해석하며, 상황을 피하기 시작할 때 공황발작은 반복되고 굳어진다. 증상 자체보다 두려움의 해석과 회피가 이어질 때 공황발작은 공황장애가 된다. 결국 공황장애를 키우는 것은 공황발작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공황장애에서 말하는 disorder(장애)는 신체나 정신 기능에 지속적인 결함이 있어 일상 기능으로의 회복이 어려운 상태를 뜻하는 disability(장애)와 다르다. disorder(장애)는 질서가 잠시 흐트러진 상태를 뜻한다. 균형이 깨졌다는 의미이지, 기능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즉, 핵심은 기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균형이 흔들린 상태다. 치료는 증상을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흔들린 균형을 다시 세우는 과정이다. 공황장애를 정확히 이해하면 공황발작은 더 이상 재앙이 아니다. 그것은 뇌의 경보 체계가 과도하게 작동한 결과다. 경보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읽어야 할 신호다. 신호는 삶을 망가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상태를 돌아보게 만드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 당신의 마음에 울리고 있는 경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 신호를 억누르기보다 차분히 이해하려는 순간, 두려움은 줄어들고 삶은 다시 넓어진다. 공황장애는 끝이 아니라, 삶을 다시 세우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사공정규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학박사 …………………… 사공정규 33년 차 공황·불안 전문의이자 ‘힐링닥터’로 알려진 그는 증상 호전을 넘어 삶의 근본적 회복을 위한 치료에 주력한다. 동국대 의대에서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진료·연구·교육에 힘썼고,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 메사추세츠 종합병원(MGH)에서 방문교수와 임상연구원으로 활동했다.

2026-03-31

흔들리는 세계의 닻, SDGs와 지정학적 격랑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보름째 계속되고 있다. 압도적 무력을 내세운 미국과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 당초의 예상과 달리 장기전으로 확전될 기세이다. 단순한 지역 분쟁을 넘어 지구촌 전체의 안보와 경제 지형을 흔들고 있다. 역사상 모든 전쟁이 그렇듯 전쟁은 언제나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에서 시작되지만 전쟁의 당사국뿐 아니라 인접국과 여러 나라들에도 전쟁의 영향이 미치게 된다. 이 전쟁 또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본토 공격이라는 국경에서 시작되었지만 전쟁의 대가는 결국 세계 전체가 치르게 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함께 시작된‘예측불허’와‘일방주의’로 대표되는 트럼피즘에 따른 이란에 대한 전쟁은 인류가 합의한 미래의 이정표인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지금 전례 없는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우리에게 SDGs는 단순히 환경 보호나 사회적 책임을 넘어, 국가와 기업이 생존을 위해 공유해야 할 ‘세계 질서의 닻’이었다. 그러나 최근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격랑과 그 배후에서 힘을 얻고 있는 ‘트럼피즘(Trumpism)’이라는 거대한 파도는 이 닻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현재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은 단순히 특정 지역의 국지전을 넘어섰다. 세계 경제의 핵심 에너지원인 석유 유통을 옥죄는 전략적 선택으로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현실화하고 있다. 오늘날의 세계는 단순히 국경선으로 나뉘지 않는다. 경제 블록의 재편, 기후 위기라는 공동의 숙제, 그리고 급변하는 기술 패권 경쟁까지 마치 거대한 체스판처럼 모든 행보가 서로 얽혀 있다. 즉, 특정 국가 또는 지역에서의 분쟁이 그 국가와 지역의 국경을 넘어 연쇄적으로 여러 나라들에 미치고 세계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제유가는 이스라엘의 이란 핵시설 공격 이후 이미 10% 넘게 급등했는데, 호르무즈 해협의 유조선 항로 차단이 현실이 될 경우 유가가 더욱 가파르게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는 세계 경제 전체에 엄청난 악재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와 이로 인한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마비는 세계 경제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가혹한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다. 에너지 안보는 국가 생존의 문제이며, 당장 눈앞의 유가 급등과 물류 대란 앞에 ‘기후 위기 대응’이나 ‘탄소 중립’이라는 거창한 담론은 사치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핵심은 ‘예측 가능성’에 기반한 장기 투자다. 하지만 지금의 지정학적 불안은 모든 예측 모델을 무력화하고 있다. 자원 민족주의가 득세하고, 안보가 경제를 집어삼키는 상황에서 국가와 기업들은 ESG 투자보다는 당장의 생존을 위한 ‘전시 경영’ 체제로 회귀하고 있다.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우리가 쌓아온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탑이 전쟁이라는 현실의 화염 앞에서 얼마나 취약한지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 기조는 단순히 자국 우선주의를 넘어, 전후 세계 질서를 유지해 온 다자주의와 국제 규범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로 나타나고 있다. 전쟁의 명분조차 모호한 이란에 대한 전쟁의 시작은 미국 우선주의와 자국 우월주의 ‘트럼피즘(Trumpism)’의 결과일 뿐이다. 국제기구에 대한 자금 지원 중단, 파리기후협약 탈퇴 시도, SDGs 이행을 위한 데이터 수집의 중단, 그리고 힘에 의한 일방주의적 이란 침공은 글로벌 거버넌스의 붕괴를 예고한다. 트럼피즘의 본질은 ‘글로벌 공공재(Global Public Goods)’에 대한 투자 비용을 기회비용으로 간주하고, 이를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ESG가 기업의 선택을 넘어 시장의 규범으로 자리 잡던 흐름에 강력한 제동을 걸고 있다. “가치보다 이익”이라는 전쟁의 메시지는 규제와 제도를 통해 사회적 책임을 이끌어내려던 기존의 ESG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평화라는 함대를 이끌던 ‘규범의 닻’이 뽑히는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격적인 이란 침공(Operation Epic Fury)과 거침없이 몰아치는 ‘트럼피즘’의 광풍은 국제사회가 지난 수십 년간 쌓아 올린 ‘규범 기반의 질서(Rule-based Order)’라는 닻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작금의 사태는 우리에게 냉혹한 질문을 던진다. “규범이 사라진 정글에서 우리는 안전할 수 있는가?” 세계 질서의 닻이 흔들리면 가장 먼저 침몰하는 것은 한국과 같은 대외 의존형 중견 국가들이다. 우리는 전쟁의 위기 속에서 무너지고 있는 인류 공통의 규범인 SDGs를 다시 세우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지속가능성’이라는 규범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해야 한다. 지금의 혼란은 낡은 질서가 저물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진통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진통의 끝이 황폐화가 될지, 아니면 더 견고한 질서의 재편이 될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닻이 흔들린다고 배를 버릴 수는 없다. 폭풍우가 거셀수록 우리는 더 깊이 닻을 내려야 한다. ESG는 여전히 인류가 가야 할 유일한 생존의 좌표이기 때문이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3-31

TK까지 넘보는 민주당, ‘東進 전략’ 성공할까

민주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부산·울산·경남(PK)을 넘어 대구·경북(TK)까지 공략하는 ‘동진(東進)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다. 30일에는 그동안 영호남 지역주의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해온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하면서 민주당의 ‘동진 전략’ 성공 여부가 전국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김 전 총리는 이날 국회 소통관에 이어 대구 2·28 기념 공원에서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했다. 2·28 기념 공원은 1960년 2월 28일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대구시내 8개 고교생들이 일으킨 ‘민주운동’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그가 이곳에서 출사표를 던진 것은 대구시민의 ‘민주정신’을 일깨우면서 ‘지역주의 타파’ 메시지를 함께 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2·28 민주운동은 김 전 총리가 행정안전부 장관 재임 시절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그는 지난 2016년 제20대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당선되며 지역주의를 깬 상징적인 인물로 꼽힌다. 민주당은 김 전 총리를 당선시키기 위해 ‘대구 맞춤형’ 정책을 지원하는 등 당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정청래 대표는 최근 서울에서 김 전 총리를 만난 뒤 “대구에 필요한 것, 총리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제가 ‘무엇이든 다해드림’ 센터장이 되고 싶은 심정”이라면서 로봇 수도 조성과 신공항 추진 등 이 지역 현안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선거 때마다 민주당이 가장 어려움을 겪은 곳은 TK지역이다. 이로인해 지금까지 이 지역 대부분 선거를 사실상 ‘무전략 기조’로 치렀다. 당연히 결과는 초라했다. 민주당은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 ‘동진정책’이라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다. 이 전략의 핵심은 PK와 TK지역 현안을 해결하며 지역주의 벽을 허물겠다는 것이다. 최근엔 TK지역 민주당 지지율은 국민의힘과 동률을 기록할 정도로 정치지형이 급변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TK지역 경제발전에 올인할 경우 의외의 선거 결과가 나올 수 있다.

2026-03-30

중동사태 장기화 징후, 비상한 대책 준비해야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전쟁이 한 달을 넘겼다. 이란 수뇌부 제거 등 강력한 진압으로 조기에 종전을 이끌겠다던 트럼프 미 대통령의 공언과는 달리 전쟁은 혼미상태다. 28일 예멘의 친이란 이슬람 무장단체인 후티가 이스라엘을 공습하고, 이란전쟁에 참전을 선언해 전쟁의 조기 종식 가능성은 점차 멀어지는 분위기다. 전문가들도 전쟁 당사국 간 입장 차이가 너무 커 종전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을 한다. 특히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길어지면서 국제유가는 이미 100달러선을 훨씬 넘어섰다. 게다가 후티가 홍해와 아델만을 연결하는 중동의 원유 수송로 바브엘만데브 해협 봉쇄를 검토 중이라는 얘기가 나돌면서 세계 경제가 긴장하고 있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세계 해상 원유물동량의 10%가 통과하는 지역이다. 호르무즈에 이어 바브엘만데브마저 봉쇄된다면 원유 수송을 비롯해 글로벌 공급망 전반에 재앙적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번 중동사태는 1970년대 오일쇼크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합친 것보다 더 충격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중동전쟁이 장기화한다면 원유 수입의 60% 이상을 중동지역에 의존하는 우리나라가 받을 충격은 상상 이상이 될 수 있다. 국제유가 폭등에 따라 정부는 석유최고가격제를 도입했으며 최근에는 공공기관 차량 5부제도 시행에 들어갔다. 원유 수입이 막히면서 석유화학계의 나프타 부족으로 식품포장재, 쓰레기 봉투, 비닐, 의료용 플라스틱 등 소비재 시장 전반에 불안 조짐이 감돌고 있다. 4월 위기설 속에 일부 지역서는 종량제 봉투 품귀현상도 보인다고 한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방송에 나와 국제유가가 배럴당 120~130달러선으로 오를 경우 차량 5부제를 민간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했다. 자동차 운행을 제한하는 차량 5부제는 1991년 걸프전 이후 한 번도 국민이 경험해보지 못한 제도다. 전쟁의 장기전이 불러올 국민 불편과 시장의 불안감을 최소화할 정부의 치밀한 비상 대책이 필요하다. 에너지 절약에 동참할 국민의 협조는 필수다.

2026-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