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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압도적인 봄의 꽃잔치, 산청 대명사 꽃잔디 탐방

수식어가 화려하다. 아는 사람만 찾아간다는 봄 여행의 숨은 정수라고 한다. 돌계단을 오르면서 탐방이 시작되지만, 눈은 잠시라도 쉴 틈이 없다. 좌우로 펼쳐지는 꽃들의 자태는, 화려한 봄을 수놓기 충분하다. 사찰과 주변의 모두가 하나의 거대한 꽃밭으로 탈바꿈해, 다양한 색깔의 카펫을 깔아놓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사찰의 이름은 대명사. 이곳은 몇 해 전만 해도 무명의 장소였다. 2008년 창건했으니 이제 겨우 서른 살 안팎의 연혁이다. 그런데 이 절은 우리가 흔히 알던 한국의 고즈넉한 목조 사찰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단청이 없는 하얀색 외벽의 현대적 건축 양식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의 조계종과 천태종이 아니라, 중국 소림사의 선풍을 이어받은 ‘소림선종’의 사찰이란 점이다. 해마다 4월이면 대명사는 사찰 전체가 분홍빛 꽃잔디로 뒤덮인다. 이국적인 하얀 건물들과 조화를 이룬 전체적인 분위기가,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을 연출한다. 이곳이 사찰인지 꽃잔디 정원인지 구분이 불가할 정도다. 대명사에 꽃잔디가 심어진 것은 17여 년 전부터다. 주지 스님이 직접 꽃잔디를 심고 가꿔온 결과물의 산출이며 보답이다. 꽃잔디의 꽃말은 온화함과 희생이다. 빈틈없이 빽빽하게 자라는 특성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이곳이 위치한 지자체는 해마다 이 꽃 하나로 10일간이나 축제를 연다. 꽃의 원래 태생은 미국 중부와 동부, 여러해살이풀로 땅을 덮을 듯이 낮게 자라며 꽃을 피운다고 ‘꽃잔디’다. 척박한 조건인 건조한 모래땅에서도 잘 자라나 생명력이 대단한 식물로 알려졌다. 암울한 절망의 시대에서 오늘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우리의 국민성과도 어느 정도 상통하는 이미지가 있어 겹쳐 보이기도 한다. 대명사 꽃잔디 탐방은 절의 입구에서 101계단을 오르면서 시작된다. 대웅전으로 직진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좌우에는 화려한 분홍색과 흰색의 꽃잔디가 영산홍과 어울려 돌계단 사이에서 절경으로 승화된다. 대명사의 첫 이미지로 강렬하게 각인되어서인지 가장 대표적인 포토죤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절의 큰 마당에는 분홍빛 꽃잔디가 절정이다. 정면으로 건물 한 층 높이의 돌계단이 보이고 그 끝머리에 대웅전이 세워져 있다. 현재 꽃잔디의 개화율은 약 80 프로 정도다. 꽃물결이 흥건한 마당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징검다리처럼 배치된 맷돌 길을 한발 한발 건너야 한다. 탐방객들은 이 맷돌을 밟고 이동하면서 발아래에 피어난 꽃들을 감상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여건이 완성된다. 정면으로 오르는 중앙 돌계단 오름길은 꽃을 보호하기 위해 막혀 있다. 꽃잔디를 밟지 않고 바닥에 깔린 맷돌이나 화살표 방향을 따라 우측으로 이동하면, 꽃길이 이어지면서 대웅전과 연결된다. 최적의 방문 시기는 보통 4월 중순에서 5월 초까지다. 해마다 꽃의 개화 시기나 개화율이 다를 수 있어 사전에 검색해서 다녀오길 권한다. 사진 촬영 시 가장 대표적인 구도는, 대웅전을 배경으로 꽃잔디를 앞마당에 가득 담는 방식이다. 또 하나는 대웅전을 지나 사찰 뒤편의 산책로에서 대웅전을 내려다보는 풍경도 일품이니 취향에 따라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단 주의할 것은 이곳은 관광지가 아닌 실제 수행 중인 사찰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대웅전을 비롯한 사찰의 수양 공간에는 대부분 촬영이 금지돼 있다. 대웅전을 통과하면 꽃길은 자연스레 좌측으로 이어진다.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불이 대웅전과 사찰의 내부를 내려다보고 있다. 청아한 물소리가 들리는 작은 소품 같은 조경이 일품인데, 작은 볼거리 겸 즐길 거리인 돌할매도 약사여래불 옆에 보인다. 돌을 들면서 자신의 운세를 점치는 것으로, 두 손으로 돌을 들어 올릴 때 돌이 들리면 자신의 염원이 이뤄지지 않고, 돌이 꼼짝도 안 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한다. 삼선당으로 오르는 맷돌 같은 돌계단 길 좌우에는 흰철쭉이 도열한다. 사찰의 부속 건물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부속 건물답게 오름 길에서 살펴보는 주변의 전망과 조망은 빼어나다. 대명사 방문이 주는 특별한 의미는 단순한 꽃잔디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101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이어지는 동쪽으로의 조망이 산청휴게소와 경호강이 가장 먼저라면, 대웅전 앞이나 삼선당 주변에서의 조망은 먼 곳까지도 충분히 가능하다. 등산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월명산(320m)과 백마산(286.3m), 적벽산(166.3.m)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의 황매산까지 풍광이 이어진다. 가장 빼어난 조망은 뭐라고 해도 북쪽이다. 산청의 명산 둔철산(823m)과 대명사의 철쭉들이 경계를 이루면 한 폭의 진경산수화가 따로 없다. 사찰의 탐방로 곳곳에 볼거리가 가득하다. 이름 모를 꽃들이 심어져 피어나고 곳곳이 포토 존이다. 바위솔이 조경으로 한몫한 장독대 주변과 노송과 기와집, 넝쿨이 원형의 독립문을 형성한 지점이 대표적이다. 절이 위치한 장소는,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원지강변로 63번길 100이다. 사찰에 주차 공간이 마련돼 있으나, 꽃잔디 시즌의 주말에는 방문객이 많아 혼잡할 수 있어 진입로 주변 도로에 세워야 한다. 가장 좋은 점은 별도의 입장료나 주차비가 없다는 것이다. 주변으로 연계할 관광지가 많다는 것도 장점이다. 대명사에서 자동차로 13분 거리에 남사예담촌이 있고, 15분 거리에는 산청 정취암이 있다. 남사리에 있는 한옥마을인 예담촌은 현대에 인위적으로 만든 한옥마을이 아니라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같은 전통마을로 역사가 500년에 달한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정취암은, 상서로운 기운이 가히 금강에 버금간다고 하여 예로부터 소금강이라 일컫던 장소다. 그다음으로 고려할 장소는 20분 거리의 생초국제조각공원이다. 생초국제조각공원 꽃잔디 축제가 열리는 장소로, 축제는 끝났어도 꽃잔디는 아직도 절정이다. 어느 장소를 연계해도 산청의 봄을 가장 완벽하게 정복하는 하루 코스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지홍석 수필가·여행 칼럼니스트

2026-05-07

탄소문명에서 수소문명으로, 환경운동의 철학적 전환

요즘의 날씨는 지구온난화가 더 이상 먼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폭염과 홍수, 가뭄과 산불이 반복되고 있으며, 기후위기라는 말은 이제 학자들의 연구 주제가 아니라 시민의 일상이 되었다. 기후재난은 점점 더 강해지고 그 빈도 또한 높아지고 있다. 인류는 지금 산업혁명 이후 가장 거대한 문명 전환의 시대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기를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동안 환경운동은 주로 개인의 도덕적 실천을 강조해 왔다. 에너지 절약, 자동차 덜 타기,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재활용 확대와 같은 실천은 시민의 의식을 높이고 환경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이러한 방식만으로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지구온난화의 핵심 원인은 개인의 생활 습관이 아니라 산업 구조와 에너지 체계에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시민들은 경제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가족을 부양하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산업과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환경운동 역시 단순한 도덕운동이 아니라 경제와 산업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사회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다시 말해 환경운동은 이제 탄소중립 경제를 만들어 가는 시민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현대 문명은 단순히 자연을 파괴하는 체제가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줄여 온 문명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병원의 응급실과 수술실을 떠올려 보자. 그곳에서는 단 한 순간도 전기가 멈추어서는 안 된다. 심장박동을 감시하는 모니터, 인공호흡기, 수술 장비, MRI와 CT 같은 의료 장비는 모두 전기에너지에 의존한다. 만약 전기가 멈춘다면 수많은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팬데믹의 시대 역시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전 세계의 의학자들은 밤낮없이 연구를 이어가며 백신을 개발했다. 백신은 냉장 보관이 필요하고 생산 과정 역시 막대한 전기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백신을 생산하는 제약회사들의 연구소와 공장 또한 거대한 전력 시스템 위에서 작동한다.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약품과 의료 기술 역시 산업과 과학기술, 그리고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 위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좋은 전기를 멈추는 것은 결코 환경운동이 될 수 없다. 환경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문명을 멈추는 것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환경운동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말해 왔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만약 산업과 에너지 시스템이 멈춘다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일 것이다. 의료 시스템에 의존하는 환자들, 현대 의약품과 치료 기술에 의지하는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산업과 일자리 속에서 삶을 유지하는 시민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철학적 시각 역시 중요하다.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저서 ‘월든(Walden)’에서 자연 속에서의 단순한 삶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성찰했다. 그는 자연을 존중하고 인간 문명의 과도한 물질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20세기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인간 사회의 발전을 “열린사회”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사회 문제는 비판과 토론, 과학적 검증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현대 기술 문명 속에서 인간이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책임의 원칙”을 제시했다. 이 세 철학자의 이야기를 함께 들으면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드러난다. 자연을 존중하면서도 과학과 기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지는 문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환경운동 역시 문명을 거부하는 운동이 아니라 이러한 책임 있는 문명 전환의 운동이어야 한다. 1970년대 환경운동의 상징적인 보고서인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는 산업 성장의 한계를 경고하며 세계적인 환경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보고서는 인류 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졌지만 동시에 산업 발전 자체를 부정하는 해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환경운동은 단순한 성장 억제론을 넘어 지속가능한 문명 전환을 고민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문제는 문명 자체가 아니라 탄소 중심의 산업 구조에 있다. 인류의 산업 문명은 오랫동안 석탄과 석유라는 탄소 에너지 위에서 발전해 왔다. 철강과 자동차, 조선과 건설 산업은 이 에너지 구조 위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로운 에너지 체계로 이동해야 한다. 태양과 바람, 그리고 수소와 같은 청정에너지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산업 문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인류는 지금 탄소문명에서 수소문명으로 이동하는 역사적 전환의 문 앞에 서 있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포항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다. 포항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적인 도시이며 철강 산업의 중심지다. 동시에 포항은 탄소중립 산업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수소환원제철 기술은 포항이 새로운 산업 문명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아직까지의 철강 생산은 석탄을 사용하는 고로 공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탄소가 배출된다. 그러나 수소환원제철 기술은 석탄 대신 수소를 사용하여 철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는 탄소 대신 물이 배출된다. 이 기술이 산업적으로 성공한다면 철강 산업은 더 이상 기후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산업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문장을 강조하고 싶다. “포항의 다음 50년은 수소환원제철에 달려 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산업 정책의 슬로건이 아니다. 그것은 포항의 미래 경제와 기후위기 대응,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생존이 연결된 문제다. 환경운동 역시 이러한 산업전환을 고민해야 한다. 환경운동은 산업을 무조건 반대하는 운동이 아니라 산업을 더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사회운동이 되어야 한다. 문명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바꾸는 것. 탄소문명에서 수소문명으로 거대한 전환의 길 위에서 포항이 새로운 산업 문명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포항의 다음 50년은 수소환원제철에 달려 있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

2026-05-06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건가요

SNS에서 우연히 어떤 이의 소식을 보게 되었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누군가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굳이 설명하자면 꼭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일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처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그에게 어떤 감정적인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이야기한 것뿐이다. 그런 중립적인 상태에 대해 말하려면 이처럼 말이 다소 장황해진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는구나 생각하면 될 텐데 꼭 싫어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나는 조금 번거롭다. 그와는 오래 전에 만났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만난 지인의 지인이었는데, 술에 취해 목소리가 커지고 말을 조금 경솔하게 내뱉는 느낌이 있었다. 그냥 술자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례한 종류의 사람이었다. 부적절한 언사를 여기저기 난사하다 보니 어떤 말은 나를 향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을 만나면 반응하지 않거나 도망을 가는 편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들이 받아버리곤 하던 시절이었다. 무례에 무례로 대응하자 그는 욕을 했고 우리는 고성을 내지르며 다투게 되었다. 지인들이 우리를 뜯어 말리는 수준에 이르자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해가 질 무렵,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자리에 있던 내 지인에게 번호를 받았다고 했다. 자기가 술에 취해 실언을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나도 잘 한 것은 아니니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이것도 인연인데 소주나 한 잔 하고 친해졌으면 좋겠다며 내게 괜찮은 때를 정해달라고 말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로 풀었으면 된 것이지 굳이 술 마시고 내게 행패 부린 사람과 또 술을 마시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았다. 적당히 둘러대고 흐지부지 넘어갔으면 되었을 텐데 그때 나는 그런 것을 참 못했다. “서로 나쁜 감정은 다 풀었으니 된 것 아닐까요? 굳이 친하게까지 지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조금 매정하게 들릴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고, 그와는 그 이후로 만난 적이 없다. 그렇게 말한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사실 그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교류하고 지내는 이가 많은 편이다.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이들도 많고 그만큼 챙겨야 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그것을 잘 해내며 살아가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팽창해버려 내 그릇의 크기를 벗어나버린 내 대인관계가 언제나 버겁다. 그런 판국에 굳이 첫인상이 좋지 않았던 이와 친하게까지 지내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내 마음의 공간을 그에게까지 내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싫어한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처럼, 어떤 이들은 친하게 지내지 않으면 사이가 나쁘다고 판단해버리곤 하는 것 같다. 어쩌다가 서로를 만나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굳이 친해지자고 다가오면 나는 때때로 당황스러운 기분이 든다. 같이 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밥도 같이 먹고 술도 같이 먹어야 하지 않냐는 사람들, 인간적인 매력을 알 만한 계기조차 없었는데 갑자기 나이를 묻더니 형 동생으로 지내자는 사람들. 결국 연락도 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 이따금 우연히 카톡에 뜬 서로의 이름을 보며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애초에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이다. 서로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고,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고, 상대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고 싶은 욕망이 동한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같은 공간에 잠시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친해지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사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만 굳이 누가 누구를 챙기지 않아도 되는 사이는 얼마나 편리한가. 오래전 다투었던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특별히 반갑다거나 아니면 불쾌하다거나 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잠시 그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이로 지내고 싶었던 내 마음에 대해 생각했을 뿐이다. 그가 여기저기 내 험담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도 있고, 그에게 내 번호를 알려주었던 지인에게서 왜 굳이 그렇게 야박하게 굴었느냐고 타박을 받기도 했다. 좋지 않은 사람과 나쁘지도 않게 지낸다는 것이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나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그의 사정이다. 나는 여전히 그를 애써 좋아하거나 싫어할 생각이 없다. /강백수(시인)

2026-05-06

겁 많은 사람

영화 ‘살목지’가 24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손익분기점의 세 배를 넘어선 엄청난 기록이었다. 한국 영화계에서 호러 장르가 흥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보통 호러 장르의 호황 시기는 여름이지만 지금은 봄이므로 비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호러의 어떤 점에 매료된 것일까? 나는 귀신이 등장하는 공포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한 서린 귀신, 악령, 유령 같은 존재가 인간을 공격하는 전개로 흘러가는 순간 김이 팍 샌다. 육체 없이 둥둥 떠다니는 존재들은 생전에 억울한 죽음을 맞아서, 그게 너무 분하고 서러워서 인간들을 홀려 죽음으로 꾀어낸다.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대개는 어떤 장소에 매여있다는 것이다. 물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시끄러운 저수지나 이사 오는 족족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바람에 폐가나 다름없는 저택, 과거 공동묘지였다던 학교, 문 닫은 폐병원 등, 귀신이 상주하는 곳은 일반인이라면 쉽게 접근하지 않을, 감히 접근할 생각도 하지 못할 곳이 대부분이다. 물론 나 또한 그런 곳은 이전에도 가본 적 없고 앞으로도 갈 생각이 전혀 없다. 평생 방문할 일 없는 곳이므로, 그곳에 사는(?) 귀신들을 만날 일 또한 평생 없으리라 생각하니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겁 없이 용감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겁 많은 사람에 속한다. 어둠을 무서워하고, 바퀴벌레와 비둘기를 무서워하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무기력과 우울을 두려워한다. 그중에서 제일 두려운 건 무기력과 우울이다. 특히 지금처럼 봄철이 돌아오면, 익숙하고 지겨운 우울감이 나를 깊이 짓누른다. 실제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계절이 봄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봄이 되면 우울증이 증가하는 현상을 ‘스프링 피크(Spring Peak)’라고 부르는데, 기온과 일조량이 증가해 신체 리듬에 변화를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봄은 새로 시작하는 계절이기 때문에, 성취에 대한 압박과 대인 관계 변화 등이 사람들을 더욱 우울한 방향으로 밀어낸다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던 열정과 의욕이 깨어난다. 나 또한 매년 1월 1일이 되면 한 해의 목표와 버킷리스트를 적어둔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정리하며 올해는 기필코 다르게 살겠노라 다짐하지만, 2월이 지나 3월, 4월, 그리고 봄의 끝물이라 할 수 있는 5월이 되는 순간 좌절에 휩싸인다. 남들은 벌써 무언가를 이룬 것 같은데 나만 아직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온 탓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을 나만 겪는 게 아니었다니. 많은 사람이 이 시기에 움츠러들고 작아진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사계절 중 가장 환하고 활기차며 생명이 움트는 시기인 봄의 뒷면에 이런 그늘이 있을 줄이야. 다시 영화관으로 돌아가 본다. 매점에서 팝콘과 음료를 고르고 화장실에 간 일행을 기다린다. 상영 10분 전이 되면 같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상영관 안으로 입장한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광고가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옆 사람과 수다를 떨거나 휴대폰을 본다. 이윽고 상영관의 불이 꺼지면 일제히 커다란 스크린을 바라본다. 그 안에서 어떤 무시무시한 존재가 나오더라도,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우린 안전하다. 사람들이 호러 장르에 매료된 건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불이 켜지고 상영관 밖으로 나오는 순간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귀신과 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까. 그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이든 간에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아니까. 그러나 무기력과 우울은 그런 식으로 우리 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올봄에는 가족들과 자주 나들이를 갔다. 한강도 가고 식물원도 갔다. 서울 근교로 나가 사람 많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인적 드문 곳을 찾아 걸었다. 날이 좋다거나 바람이 시원하다거나 같은 뻔한 말도 없이 그저 걸었다. 햇볕이 따뜻하고 꽃이 아름다워서 어쩐지 조금 쓸쓸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겁 많은 사람답게 꽃을 밟을까 봐, 빨리 걷다 발이 꼬여 넘어질까 봐 걱정하며 걸었다. 그때 나를 앞질러 뛰어가던 강아지가 우뚝 멈춰 서선 나를 바라보았다. 앞서간 강아지가 인간을 돌아볼 때는, ‘여긴 안전하니 와도 돼’라는 뜻이라고 했던가. 그 얼굴이 너무나 근엄해 보여서 나는 조금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겁 많은 사람이 내디딜 수 있는 가장 큰 보폭으로. /양수빈(소설가)

2026-05-06

5월에 어울리는 영화 한 편

‘가정의 달’이라 불리는 5월이다. 가정을 이루는 구성 요소는 재론할 것 없이 가족. 부모와 자식, 거기서 영역을 확장하면 조부모와 손자녀를 가족이라 칭한다. 유교적 관점이 사회를 지배했던 과거 한국에선 혈연으로 얽힌 사람들만을 ‘가족’이라 불렀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었다. 가족의 개념도 확대되고 있다. 입양한 자녀 또는, 이복과 이부형제 역시 가족의 범주에 포함하는 게 이젠 자연스럽다. 이런 변화된 가족 형태를 웃음과 감동 속에 담아낸 영화가 있다. 개봉한 지는 꽤 됐지만 5월에 다시 본다면 그 의미가 작지 않은 작품이다. 송해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 ‘고령화 가족’은 혈통의 순수성을 절대적으로 생각해온 우리 사회에서 현대적 가족의 의미를 관객들에게 물었다.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은 천명관이 썼다. 중년임에도 철없는 실수를 거듭하는 장남, 사회 부적응자인 차남,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막내딸, 가출과 비행을 거듭하는 손녀, 이들을 애정으로 감싸며 가족의 중심에 선 엄마이자 할머니. ‘고령화 가족’은 어째서 이 가족이 현재와 같은 입장에 처했는지, 그들이 지나온 길은 어떠했는지, 무슨 사연이 5명의 가족을 같은 공간에서 살게했는지 서두르지 않고 찬찬히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때론 웃고 때로는 울게 된다. 실수가 연속되고, 아픔이 반복되는 가난한 삶. 영화 속 가족의 모습은 한국의 보통 가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실수와 아픔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게 ‘가족이 길’이 아닐까? 감독은 이런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진다. 가정의 달 5월. ‘고령화 가족’을 본 후 이런 질문을 해본다. “꼭 피를 나눠야만 가족인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5-06

지방선거 최대변수된 ‘조작기소 특검법’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조작기소 특검법’이 선거판을 뒤흔드는 쟁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국민의힘 대구·경북(TK), 부산·울산·경남(PK) 시·도지사 후보들은 6일 울산시청에서 조작기소 특검법 규탄을 위한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추경호 대구시장·이철우 경북도지사 후보를 비롯한 국민의힘 5개 시·도 광역단체장 후보들은 이날 “민주당은 특검에 공소 취소 권한을 부여해 재판까지 가지도 않고 이재명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주려한다”며 비판했다. 서울·경기·인천·강원·충북·전북·세종 등에 출마한 국민의힘 광역단체장 후보 7명도 지난 5일 특검법과 관련해 “민주당은 즉각 ‘이재명 셀프 면죄·반헌법 공소 취소’를 위한 특검법 발의를 전면 중단하고, 이미 발의된 법안은 즉시 철회하라”는 결의문을 냈다. 이에 앞서 개혁신당 조응천 경기도지사 후보는 특검법 저지를 위한 모든 정당 후보 연석회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법조계에서는 조작기소 특검법엔 사법시스템을 붕괴시키는 심각한 내용이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특검법이 제정되면 이 대통령이 재판받는 대장동·위례·백현동 개발 비리 의혹, 성남FC 후원금 의혹,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등의 사건을 특검이 검찰로부터 강제로 넘겨받은 뒤 ‘공소취소’로 없애버릴 수 있다. 이 법을 두고 ‘사법 내란’, ‘대통령 방탄용’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이 법안이 이슈로 부상하면서 영남권 국민의힘 후보들로선 호재를 만난 셈이다. 실제로 이 법안에 대한 거부감으로 TK·PK 지역 보수민심이 하나로 뭉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는 5일 당 지도부를 향해 “여기서 고생하면서 뛰고 있는 동지들을 버릴 셈이 아니라면 법안 처리에 신중해 달라”고 호소했다. 민주당이 이번 지방선거를 망칠 생각이 없다면 특검법을 하루라도 빨리 철회하는 게 맞다. 최근 국회 법사위가 쌍방울 대북송금 피의자들을 대상으로 연 국정조사에서도 검찰의 조작·회유 실체가 드러난 게 없지 않은가.

2026-05-06

로봇도시 입지 다진 대구 로봇인증센터 유치

휴머노이드 로봇의 안전성을 공인하는 국가 차원의 인증센터가 국내 최초로 대구에 들어서게 된다. 대구시는 산업통상부 주관 공모사업인 휴머노이드 로봇안전인증센터 구축사업과 제조 AI데이터 밸류체인 구축사업에 최종 선정됐다고 5일 밝혔다. 시는 향후 5년간 국비 247억원을 포함해 총사업비 412억원을 투입해 로봇과 제조현장의 지능화에 총력을 쏟아 대구가 AI·로봇산업 중심도시로 도약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인간처럼 생기고 걷고 말하는 로봇을 말한다. 얼마 전 중국서는 마라톤 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등장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인간처럼 걷는 로봇시장은 2028년까지 연평균 54% 이상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업계는 예상한다. 우리나라 산업계서도 휴머노이드 로봇의 생산현장 투입은 빠르면 올 하반기 중 투입될 것으로 보고 있다. 대구시의 국내 첫 휴머노이드 로봇안전인증센터 유치는 대구가 로봇을 만드는 도시를 넘어 로봇의 표준과 안전을 책임지는 국가적 거점으로 도약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대구는 전국 유일하게 국가로봇테스트필드를 보유하고 있고, 여기에 안전인증센터까지 더해지면 설계-실증-평가-인증에 이르는 명실상부한 로봇산업 전주기를 지원하는 전국 유일의 도시가 된다. 대한민국 AI로봇 수도로서 입지를 굳히는 절호의 기회다. 또 안전인증센터와 함께 제조 AI데이터 밸류체인 구축사업이 병행됨으로써 대구의 전통적인 제조공정에 로봇과 AI가 결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지역산업의 체질을 첨단산업으로 바꾸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다만 AI로봇 분야 실무인력 양성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숙제다. 인재들이 대구를 떠나지 않도록 높은 수준의 연봉과 정주여건을 잘 만들어야 한다. 대구는 5대 미래신산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하고 있다. 이번 로봇안전인증센터 대구설립은 대구시가 추진하는 미래전략산업의 고도화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로봇도시로서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로봇인증센터 대구 유치가 대구산업 혁신의 물꼬가 되길 기대한다.

2026-05-06

울타리 안을 살피는 달, 5월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부부의날이 차례로 이어지며 우리를 멈춰 세운다. 평소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익숙함에 기대어 미루었던 마음들을 꺼내 본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시선을 돌리라고 조용히 말을 건넨다. 계절은 더없이 온화하고 햇살은 부드러운데, 마음은 그 온기를 따라가지 못한다. 올해 5월도 평온하지만은 않다. 나라 안은 선거의 열기로 들끓고, 나라 밖은 전쟁과 갈등의 소식으로 가득하다. 뉴스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긴장과 분열의 장면들을 쏟아낸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어떤 선택이 더 나은지 끊임없이 따져 묻는다. 그런 북새통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분명하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 울타리 안을 들여다 보는가.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본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나이가 들면서 부모는 점점 더 말이 적어지고 자식은 점점 더 바빠진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줄지 않았는데 표현이 줄어든다. 그런 사이 침묵이 쌓이면서 오해가 늘어난다. 부모가 진정 바라는 것은 거창한 효도가 아니라 짧은 안부 전화 한 통이 아니었을까. 함께하는 식사 한 끼였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마음은 또 어떤가. 아이들이 어떤 성적을 받는지에는 민감하지만, 그들이 일상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에는 무심하지 않았는가. 아이들도 생각보다 깊고 복잡한 세계를 살아간다. 어른들의 기대와 사회의 기준 사이에서 스스로를 견주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작은 어깨 위에 얹힌 무게를 덜어주는 일은 결국 부모의 몫이 아니었을까. 묻고 들으며 기다려 주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된다. 부부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가장 가깝지만 그래서 더 쉽게 지나치는 관계. 익숙함은 편안함이 되어 무심함으로 변하기도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라는 짐작은 오해를 낳는다. 말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른다. 서로의 하루를 묻고 생각을 나누며 작은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관계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기둥이다. 세상은 늘 크고 중요한 일들로 우리를 당긴다. 정치, 경제, 국제, 기술의 변화까지. 알아야 할 것들은 끝이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날마다 마주하는 것은 가족이었고, 우리가 가장 오래 영향을 주고받는 것도 가족이다. 가까와야 할 관계가 흔들리면, 제 아무리 큰 성취도 공허해진다. 5월은 기념일의 행진이 아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렬하는 시간이다. 잠시 속도를 늦추고 시선을 내 울타리 안으로 돌려야 한다. 밖의 소음이 아무리 요란해도 나의 삶을 지탱하는 영역은 집 안에 있다. 울타리가 튼튼해야 거친 바람에도 견딜 수 있다. 포근한 날씨처럼, 우리의 말 한마디와 시선 한 줄도 따뜻해야 한다. 한 번 더 웃어주고 한 번 더 물어보며, 한 번 더 손을 내밀어 보는 것. 그것이 가족을 다시 살아나게 한다. 5월은 그렇게, 가장 가까운 곳을 다시 발견하는 달이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5-06

옳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

최근 옳은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두 사람에게서 연거푸 들었다. 두 사람이 말하는 의도는 조금 달랐는데, 한 사람은 아무리 옳아도 힘이 없으면 소용 없으니 자신의 옳음을 관철하려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아야 진짜 옳음이 된다는 뜻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옳음에도 적절한 때가 있어서 그렇지 않으면 옳음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두 사람의 표현은 비슷해도 의미는 많이 다르다. 전자의 의견을 말한 의도에 맞게 고쳐보면, 옳은 것은 힘이 있어야 옳은 것이 되고 힘이 없으면 옳다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많은 소수자들의 주장이 이런 사례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지만 소수이고 힘이 없으니 그들의 주장은 소음으로만 치부된다. 그래서 그 옳음을 관철시키려면 힘을 키우라고 조언한다. 이 의견은 자칫 힘이 옳음이라고 생각될 여지는 있지만, 상당히 현실적인 조언이다. 두 번째 의견은 좀 복잡하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면 이런 경우다. 어떤 조합을 운영하는데 A가 정당한 절차를 주장할 때 임원들은 A의 주장이 사업을 방해한다면서 A의 옳음이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경우이다. 이런 두 번째 의견은 생각할 거리가 많다. 근본적으로 보면, 부처님도 때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알아들을 사람한테만 말하라고까지 했으니, 적당한 시기, 적당한 대상이 아니라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옳지 않은 말이 될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 옳음에도 적절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합에서 새 임원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 일반 조합원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기존 임원의 유임을 결정했을 때 이를 항의하는 A를 사업 방해꾼으로 치부한다거나, ‘의안서’와 ‘의사록’을 구분해야 한다고 해도 4년 넘게 의안서를 의사록이라고 했어도 아무 일 없었다고 무시당하는 상황까지 맞닥뜨리면 옳음의 적절성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심한 회의가 든다. 물론 작은 불의에 집착하다가 큰 불의를 놓칠 수 있다면 작은 불의는 넘어가는 것이 현명하다. 문제는 불의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작은 불의를 넘어가다 보면 큰 불의도 넘어가게 되는 문제도 있다. 옳음보다 속도가 중요하다는 논리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격렬한 이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살게 된 것은 속도전을 벌였기 때문이라는 논리는 승자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잘살게 된 것은 맞지만,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고 빈부격차는 더 극심해지고 있다. 2025년 말 기준 한국의 빈부격차가 극심한데, 상위 20%와 하위 20%의 순자산 격차가 45배에 달하여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고 수치라고 한다. 중위소득 50% 이하 인구 비율을 상대적 빈곤율이라고 하는데, 3%대인 노르웨이에 비해 한국은 2024년 기준 15.3%로 OECD 회원국 중에서 상대적 빈곤율이 상당히 높다. 사회적 약자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옳음의 적절성을 따지기보다 옳다면 옳게 해야 한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5-06

봄철 달리기 부상 방지 요령

날씨가 풀리면서 달리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겨우내 쉬다가 갑자기 시작하거나 체중 감량을 위해 무리하게 거리를 늘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운동 횟수를 늘리면서 통증 발생률이 급격히 올라간다. 달리기는 준비 없이 시작하면 관절과 신경에 스트레스를 주어 통증을 유발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장경인대 마찰 증후군이다. 허벅지 바깥쪽을 따라 내려오는 장경인대가 무릎 바깥쪽 뼈와 반복적으로 마찰되면서 통증이 생긴다. 보통 무릎 바깥쪽 2~3cm 지점에 국소 압통이 나타나고 달릴수록 통증이 심해지다가 멈추면 가라앉는 특징을 보인다. 초반에는 뻐근한 정도지만 계속 달리면 계단 내려갈 때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악화된다. 그 다음으로 흔한 것이 고관절 주변 통증이다. 특히 중둔근이 제 역할을 못하거나 장요근이 짧아진 상태에서는 달리는 동안 골반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고관절 외측이나 서혜부 쪽 통증이 생긴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무릎까지 2차 통증이 이어지기도 한다. 발목 통증도 매우 흔하다. 착지 시 충격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면 전거비인대, 아킬레스건, 후경골근 건 등에 미세 손상이 반복되면서 붓고 아픈 상태가 지속된다. 이런 통증의 원인은 근육이 약해서가 아니라 정렬 문제와 특정 구조의 과부하다. 골반 전방 경사나 무저진 발 아치 상태로 달리면 특정 부위에 반복적으로 스트레스가 집중된다. 예를 들어 중둔근이 약하면 무릎이 안쪽으로 무너지는 동작이 반복되면서 장경인대 부담이 증가한다. 이 상태에선 스트레칭만 하거나 잠깐 쉬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 예방을 위해서는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 운동 강도를 단계적으로 올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주간 총 거리 증가량은 10% 이내로 제한하는 것이 안전하다. 둘째, 엉덩이와 코어 근육을 먼저 준비시켜야 한다. 중둔근, 대둔근, 복부 코어가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하체 관절 부담이 분산된다. 셋째, 착지 패턴과 보폭을 점검해야 한다. 과도하게 긴 보폭과 뒤꿈치 과충격 착지는 발목과 무릎 부담을 증가시킨다. 넷째, 러닝화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너무 오래 사용한 신발은 쿠션 기능이 떨어져 교체가 필요하다. 다섯째, 러닝 전후로 동적 스트레칭과 간단한 근활성 운동을 해주는 것이 부상 예방에 도움이 된다. 치료는 단순히 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복된 자극으로 인해 특정 부위의 근막과 신경이 손상되고 긴장된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긴장된 구조를 정확하게 찾아서 풀어주는 치료가 필요하다. 침 치료로 과긴장된 근육을 이완시키고 초음파로 장경인대 주변이나 고관절 주변 발목 힘줄 상태를 확인한 뒤 문제가 되는 부위에 직접 약침을 적용하면 염증과 통증을 빠르게 줄일 수 있다. 특히 장경인대나 고관절 깊은 구조는 촉진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초음파를 이용한 정확한 접근이 치료 효과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달리기는 분명 좋은 운동이다. 하지만 몸의 준비 상태를 무시하고 시작하면 오히려 통증을 만들고 운동을 중단하게 된다. 초기 대응을 잘하면 짧은 기간 내에 회복하고 다시 운동을 이어갈 수 있으니 관리를 하면서 운동을 하자.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5-06

오천 사람 정귀원

불특정 다수 혹은 평범한 삶이라 해도, 그럼에도 그 지평의 확산, 무한을 꿈꾸지 않는, 산다는 것의 현장의 악다구니의 와중에도, 애기똥풀처럼,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이 세상의 권력이다 정귀원은 그런 사람이다 그의 야성(野性)은 순수(純粹)의 위장(僞裝)이다 폭언(暴言)은 당부와 염려의 교묘한 기교 툭, 등을 치는 폭력은 가장 강력하나 부드러운 채찍으로 나의 허위를 직설적으로 응징한다 말뚝의 팔뚝으로 작물(作物)을 키우는 묵직한 섬세함은, 다시 말하지만 위장이다 아무튼 불가해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없다 굵은 어깨의 뒷모습이 참 든든한 것이, 뭉개고 저항하며 같이 가자고 한다는 거, 그 생애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 모습이 가을비 같기도 하고 그러나 봄비에는 영원히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둔중한 온기는 오래 간다 그래서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을, 천천히 걸으며 증명하고 있다, 멈춤은 없다 집 떠난 자식들 대신하여 동네 어른들 목숨 저당잡힌 밭과 논, 그 일을 그가 모두 대신하는 것이 확실한 증거다 여불때기*의 선한 둥금을 그는 선험(先驗)으로 안다 사람 귀한 동네, 세상의 길을 돌고 돌아 중얼거리며 그는 가고 있다. *흔히들 ‘비탈’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모퉁이’를 지칭한다. ................. 무항산 무항심(無恒産無恒心), 나는 그 뜻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물질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안다. 다행인 것은 언제나 세상에는 스승이 있고 도반이 있다. 이 시의 친구가 대체로 그러하다. 중국 작가 위화는 말했다. “몸의 다른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6-05-06

바퀴

학창 시절, 자전거를 배우며 운동장에서 넘어졌던 기억이 있다. 무릎은 땅에 부딪혀 생채기가 나고 손바닥은 모래에 쓸려 몹시 아팠다. 포기하려는 마음이 슬금슬금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친구들 중에 자전거를 못 타는 이는 나뿐이었기에 혼자 뒤처지고 싶지 않아 오기가 생겼다. 바퀴는 나를 끝내 일으켜 세웠다. 몸의 균형이 잡히는 순간 세상은 갑자기 가벼워졌다. 속도가 붙을수록 귀 옆을 스치는 바람은 내 가슴 속을 시원하게 뻥 뚫어주었다. 길 위를 달리는 바퀴 소리는 청량감마저 들게 했다. 흙길에서는 투박한 울림을 주기도 했지만 빗길에서는 물살을 가르는 리듬감을 느끼게 했다. 길에서 나는 소리들은 매번 달랐는데 삶의 소리도 바퀴를 닮았다. 하루하루는 비슷해 보여도 매번 다른 음색을 내며 흐른다. 바퀴는 흔적을 남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때때로 바퀴가 남긴 흔적을 자세히 살펴보곤 한다. 흙길의 바퀴자국이나 눈 위의 바퀴무늬, 모래 위의 어지러운 흔적이 눈에 들어오면 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것들은 대부분 금세 사라지지만 잠시 남겨진 자국만으로도 바퀴의 여정을 읽을 수 있다. 바퀴가 남긴 흙먼지나 젖은 눈 위의 얇은 흔적은 마치 마음속 기억의 파편과 같다. 우리가 걸어온 길은 눈에 보이지 않게 지워지는 듯하다. 하지만 흔적은 금세 사라지는 듯해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무언가를 남기고 있다. 또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여운으로 남는다. 어떤 만남은 스쳐 지나간 것 같아도 상대의 마음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 흔적이 모여 역사가 되고 관계가 되고 한 사람의 삶을 증언한다. 작년 겨울, 두바이에 있는 사막을 찾아갔다. 샤르자의 붉은 노을이 수평선을 물들이는 곳에서 우리 일행을 태운 차가 잠시 멈추었다. 사막 초입에서 운전기사는 차의 바퀴에서 공기를 뺐다. 바퀴는 공기가 가득 차야 평지에서는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지만 모래 위에서는 오히려 덜어내야 한단다. 그래야 모래 속에 빠지지 않고 사뿐히 미끄러지듯 달릴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단단히 채워져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기 때문이다. 공기가 꽉 찬 바퀴는 평지에서는 강점이다. 하지만 사막에서는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는 사람의 마음과도 같다.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은 쉽게 지치고 무겁게 멈추지만, 잠시 비우고 숨을 고르면 새로운 힘이 생긴다. 나는 여러 번 그 사실을 잊었다가도 바퀴를 보며 다시 떠올리고는 한다. 바퀴는 내게 삶의 무게를 견디는 힘과 비울 때 비로소 얻는 자유를 가르쳐 주었다. 열정과 목표로 가득 채워야 할 때가 있지만 내려놓고 비워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공기를 채운 채 사막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려 한다면 오히려 모래 속에 발이 묶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평지인지, 사막인지, 내 삶의 지형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흔적을 남기되 집착하지 않는 겸허함과 순환 속에서 연결되는 의미를 찾는 것을 바퀴는 내게 조용히 일러주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바퀴의 바람을 덜어내듯 마음을 고르는 것이다. /정미영 수필가

2026-05-06

잉카의 침묵 앞에서, 나는 나를 만나다

리마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사람은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보고 왔는지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쿠스코와 마추픽추, 티티카카와 라파스, 우유니의 거친 바람과 안데스의 높은 하늘을 지나온 40여 일의 여정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잉카 문명을 향한 설렘이 나를 이끌었지만, 돌아오는 길의 내 마음을 채운 것은 찬란한 유적에 대한 감탄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된 돌들의 침묵 앞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내면의 질문들과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가족 생각이 먼저 밀려왔다. 중학생 손녀의 재잘거림과 돌 지난 손자의 해맑은 웃음이 떠오르자, 길 위에서 쌓인 피곤함도 어느새 따뜻한 기쁨으로 바뀌었다. 손주란 할아버지에게 삶에 지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는 정신의 비타민과 같은 존재다. 그리움은 참으로 이상하다. 먼 문명의 폐허를 보고 돌아오는 길 끝에서, 사람은 다시 가장 가까운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안데스의 바람이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단지 낯선 나라를 둘러본 것이 아니었다. 익숙한 생활과 관계, 책임과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그것은 자발적 고립을 통한 성찰의 시간이었다. 혼자 걷고, 혼자 바라보고, 혼자 생각하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풍경보다 더 깊은 것을 보게 되었다.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 시선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멀리 떠난다는 것은 때로 세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안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가기 위함이다. 안데스산맥의 품 안에서 만난 잉카 문명은 참으로 경이로웠다. 해발 높은 산악지대에 도시를 건설하고, 계단식 농업을 일구며, 거대한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리게 한 기술은 경이롭다는 말로는 다 담기 어렵다. 돌 하나하나가 단순한 건축 재료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끈기와 질서, 헌신을 품은 상징처럼 보였다. 척박한 자연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이해하고 극복하며 문명으로 일구어 낸 사람들. 그 폐허 앞에 서면 누구라도 숙연해진다. 무너진 제국의 흔적 앞에서 내가 본 것은 멸망의 잔해만이 아니라, 한때 인간이 얼마나 높이 꿈꾸고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냈는가를 보여 주는 정신의 높이였다. 그런데 그렇게 강하고 정교했던 문명이 불과 백 년도 채 되지 않아 스페인의 소수 정예군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은 깊은 충격을 남긴다. 왜 그토록 찬란했던 제국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사라질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그 답의 한 부분을 자연의 이치 속에서 찾게 되었다. 흐르지 않는 물은 결국 썩는다. 처음에는 맑아 보여도, 오래 고이면 생명을 잃는다. 문명도 마찬가지다. 외부와의 교류가 끊기고, 새로운 변화에 응답하는 힘이 약해질 때 문명은 내부에서부터 굳어 간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했듯, 문명은 도전과 응전 속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잉카는 천연두라는 보이지 않는 재앙 앞에서, 낯선 무기와 종교,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라는 거대한 도전에 충분히 응전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더구나 황제를 정점으로 한 절대적 중앙집권 체제는 평소에는 강점이었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한 사람의 붕괴가 곧 제국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심장이 멈추자 거대한 몸 전체가 함께 흔들렸다. 이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교훈을 준다. 개인, 조직, 사회 모두 지나치게 하나의 방식, 하나의 질서, 하나의 성공 경험만을 고집할 때 취약해진다. 진정한 강함은 단단함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변화 앞에서 자신을 조정할 수 있는 유연함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오래간다. 잉카 문명의 멸망은 과거의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조용하지만 단호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잘 흐르고 있는가. 나는 내 생각과 습관, 경험과 고집 속에 나 자신을 가두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가. 나는 변화 앞에서 깨어 있는가. 닫힌 세계는 결국 무너진다. 흐르지 않는 삶은 결국 멈춘다. 문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도, 사회의 질서도, 관계의 생명력도 모두 그렇다. 이번 여행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그것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게 했다는 점이다. 나는 세상을 보러 갔지만, 결국 세상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혼자 걷고, 높은 고원의 침묵 속에 머무르며, 나는 일상 속에서는 미처 듣지 못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자발적 고립은 외로움이 아닌, 내면을 정화하는 시간이었다. 사람들로부터 잠시 멀어졌기에, 오히려 나는 나 자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성찰의 행위다. 낯선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익숙한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어쩌면 이것이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깊은 축복인지도 모른다.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느끼게 하고,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웰니스의 조용한 통로이기도 하다. 몸이 길 위를 걷는 동안 마음은 오래 묵은 피로를 비워내고, 영혼은 잊고 지냈던 질문들을 다시 길어 올린다. 웰니스란 단지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몸과 마음과 관계와 영혼이 다시 균형을 되찾아 가는 과정이라면, 진정한 여행은 그 균형의 회복을 돕는 깊은숨 고르기와도 같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6-05-05

박근혜 ‘사저정치’, TK 민심 결집시킬까

지방선거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지난 4일 국민의힘 추경호 대구시장·이철우 경북도지사 후보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저(달성군 유가읍)를 방문했다. 대구시장 여야 판세가 박빙구도로 흐르면서 보수세력이 총결집에 나선 것이다. 지난 1일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가를 함께 방문했던 추경호·이철우 후보는 3일 열린 추 후보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도 공동 비전을 선포하며, ‘원팀’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사저 방문에는 박 전 대통령의 4년 9개월 수감생활을 뒷바라지했던 유영하 의원과 대구시당위원장 이인선 의원, 경북도당위원장 구자근 의원도 배석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외부로 나오진 않았지만, 사저 앞에는 많은 지지자가 몰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여전함을 드러냈다. 박 전 대통령과 50여 분간 만난 후 사저를 나온 두 후보는 취재진에게 “대구·경북 국민의힘 최종 후보가 확정되고 본선이 시작됐기 때문에 우리 당 전직 대통령이며 보수의 큰 어른인 박 전 대통령이 달성에 머물고 계셔서 인사를 드리는 게 도리라서 찾아 뵀다“고 했다. 추 후보는 박근혜 정부 당시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핵심 경제 관료 출신이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이 4선 국회의원을 연임한 달성군을 지역구로 물려받아 3선 고지에 오른 남다른 인연이 있다. 여야 정치권에서는 이날 TK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세 사람의 회동에서 어떤 내용의 메시지가 오가고, 향후 TK 민심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됐다. 박 전 대통령은 달성사저에 머물면서 그동안 정치적 행보를 자제해 왔지만, 지난 1월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이재명 정권의 폭정에 항의하며 단식농성을 하던 국회를 찾아 단식중단을 권유하기도 했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장 대표에게 “정부·여당이 야당 대표의 단식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은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정치권에서 논란이 됐었다. 추경호·이철우 두 후보의 달성사저 방문이 6·3 지방선거에서 TK민심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2026-05-05

봉화 K-베트남 밸리, 한·베트남 교류 거점되나

봉화군이 추진하는 K-베트남 밸리 조성사업이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공식 언급되면서 국가추진 프로젝트로 급부상할지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지난달 28일 열린 제18회 국무회의 겸 제6차 비상경제 점검회의에서 조현 외교부장관은 “대통령이 말씀하신 봉화 베트남 마을을 문체부와 협력해 관광명소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봉화군 봉성면 일원에 조성중인 K-베트남 밸리 사업이 지자체 차원의 프로젝트를 넘어 국가 차원의 전략사업으로 급부상할지 모두가 주목한다는 것. 봉화군 주도로 추진해 왔던 K-베트남 밸리 사업은 800년 전 베트남 리왕조 후손이 봉화에 정착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군 기획으로 준비한 사업이다. 베트남 특구를 설치해 한·베트남 교류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동시에 지방인구 소멸 극복의 새로운 대안으로 삼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 지자체 사업으로 콘텐츠가 우수하고 글로벌 다문화 혁신거점이나 관광·교육·산업과 연계한 신규사업 발굴 가능성 등이 높아 전국 지자체가 관심 갖고 지켜보는 사업이다. 특히 봉화와 베트남의 역사적 인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사업의 성공 가능성이 높은 것도 장점이다. 13세기 리 왕조의 왕자 이용상이 고려에 귀화해 화산이씨의 시조가 됐고, 그 후손이 아직 봉화에 거주하고 있다. 충효당 등 리 왕조 후손의 역사적 유산이 남아있는 것은 봉화군만이 가진 독보적 문화자산이라 할 수 있다. 베트남은 한국의 3대 교역국이자 핵심 경제협력국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을 계기로 한·베트남 간의 문화·경제적 교류의 필요성이 더 높아진 가운데 베트남 밸리 조성은 양국 교류의 외교적 상징성으로서도 가치가 충분하다. 정부의 전략적 사업으로 지원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봉화군은 2033년까지 K-베트남 밸리 사업에 34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나 지방재정 여건상 쉽지 않다. 재정적 혹은 행정적 한계를 극복하는데 국가의 지원은 필수다. 정부 차원의 지원을 통해 사업의 완성도를 높여 이곳을 한·베트남 교류의 허브로 키우는 것이 좋다.

2026-05-05

아동학대, ‘정치·경제 아노미’의 부산물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정치·경제적 혼란이 주도하는 아노미(무규범) 상태로 병들어 가고 있다. 민주당의 입법독주로 법치주의와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시스템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대다수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삼성전자 노조는 1인당 7억원의 성과급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권력에 의해 법과 도덕이 붕괴되고, 대부분 국민이 빈부격차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며 살맛을 잃고 있으니 그야말로 온 사회가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정치·경제적 아노미는 극단적인 사회병리 현상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일차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동학대’다. 가장 쉬운 분풀이 대상이 가까이 있고 힘없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아침에는 TV를 켜니 자신이 낳은 생후 8개월 된 아들의 머리를 리모컨으로 때려 숨지게 한 비정한 30대 엄마(경기도 시흥시)가 구속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잠을 자지 않고 칭얼대 이런 짓을 저질렀다니 충격적이다. 아마 아이를 둔 모든 부모가 이 뉴스를 듣고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다. 대구에서도 지난 3월 25일 생후 42일 된 아이를 때려 숨지게 한 30대 친아버지에게 징역 13년 형이 선고되는 사건이 있었다. 선고 공판이 열리던 당일에는 대구지방법원 앞에 아이를 추모하는 근조화환이 길게 늘어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한 시민은 “‘남 일이다’ 외면하지 마시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만들어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린다”는 추모글을 남기기도 했다. ‘아노미 사회’의 부산물인 가족해체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아동학대 사건 건수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학대 내용도 잔인해지는 추세다. 부모들의 반복된 학대로 숨진 아이가 최근 5년간 207명이나 된다. 매년 적게는 30명에서 많게는 50명에 이른다고 한다. 대구에서도 지난해 아동학대 신고 건수가 1700건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실제 아동학대로 판정된 634건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신체학대(313건)’가 가장 많았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서범수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주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학대 의심 신고가 두 번 이상 접수된 아동이 6795명에 이른다. 신고가 접수된 전체 아동 4만3050명 가운데 15.8%에 해당한다. 세 차례 이상 신고된 아동도 2433명이었고, 114명은 열 번 넘게 신고가 접수됐다. 이처럼 아동학대가 구조적인 사회병리현상으로 굳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그동안 이를 너무 경시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동학대 사건은 사회가 방관하게 되면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사회학자 중에는 지난 2024년 12월 3일 밤 발생한 6시간의 악몽 같은 비상계엄 사태가 우리 사회를 극단적인 아노미 상태로 몰아가는 기폭제가 됐다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정치 아노미’라는 용어가 생긴 이유다. 실제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시작된 민주당의 일방적인 사법 질서 파괴는 우리 사회의 상식과 법적·도덕적 규범을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5-05

가정의 달

5월을 가정의 달이라 부른다. 어린이날을 비롯해 어버이날, 스승의날, 성년의날, 부부의날 등 가정과 관련한 행사가 많이 있는 달이어서 그렇게 부른다. 1993년 UN은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지정했다.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건강한 가정을 위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적극 참여를 하자는 취지로 만든 날이다. 이후 세계 각국은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지정하고 각종 행사를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듬해부터 가정의날을 기념해오다 2004년부터는 법정 기념일로 정했다. 가정은 전통적으로 부부와 자녀 중심의 집단을 말하나 시대 흐름에 따라 현대 사회에 와서는 동거 여부와 관계없이 포괄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이뤄진다”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유교 문화권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가정의 교훈이다. 유교문화에서는 개인보다 가정, 가정보다는 사회 질서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 출발점이 화목한 가정에 있다는 뜻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 역시 가정의 화목이 바탕이 돼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뜻으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덕목이다.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 사상가 몽테뉴는 “왕국을 통치하는 것보다 가정을 다스리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을 했다. 가정의 화목이 기초가 된다는 동양권의 수신제가와 의미가 일맥상통한다. 성경에서도 “마른 빵 한조각을 먹으며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어 사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가정은 사회 구성의 최소 단위이지만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근본이다. 모든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애가 충만하고 행복한 가정의 달이 되길 기원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5-05

결혼, 가문과 가문의 만남

‘삶은 선택과 도전의 연속이며, 자기 창조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선택은 ‘배우자 선택’이다. 인연은 하늘에서 내리고 그 관계는 사람이 만든다. 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보다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다. 한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온다는 것은 한 사람의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가문, 서로 다른 문화,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일종의 ‘문화 결합’에 가깝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이 결합을 ‘며느리의 일방적 적응’이라는 방식으로 풀어왔다. 시대와 문화의 흐름에 따라, 기성세대와 MZ세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사회적 문제가 나타난다. 삶의 가치관 차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갈등 등 세대 변이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야기된다. 이 시대의 결혼 문화는 어떻게 되어야 할까. 과거의 좋은 며느리는 묵묵히 참고, 시댁의 질서에 순응하고, 자신의 생활 방식을 뒤로 미루는 사람으로 정의되곤 했다. 이러한 기준은 현대의 가족 구조와 충돌한다. 맞벌이, 개인의 자율성, 사회적 여성 지위, 관계의 평등성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은 지금, 일방적인 희생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한 해법이 아니다. 오늘날 좋은 며느리 상은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역할은 달라지고 있다. 이제는 관계를 참는 것이 아니라 조율한다. 첫째, 시부모와의 관계에서 기대와 한계를 분명히 하고, 원칙을 중심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갈등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갈등 구조를 정리하는 적극성이 중요해졌다. 둘째, 균형 감각을 지닌다. 친정과 시댁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 가족 전체의 안정과 조화를 고려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단순 중립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셋째, 배우자와 팀워크를 기반으로 움직인다. 시댁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 공동의 문제로 바라보고, 중요한 결정은 함께 내린다. 며느리는 홀로 버티는 존재가 아니라, 가족시스템 안에서 협력하는 구성원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실제 가정의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명절 노동을 둘러싼 갈등을 가족 회의를 통해 역할 분담으로 나뉜다. 시부모의 육아 개입을 지원자 역할로 재정의 하고, 제사와 가족 모임을 간소화하며, 새로운 가족 문화를 만들어 가는 등의 공통점은 하나다. 갈등을 개인의 인내로 해결하지 않고, 구조의 문제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질문은 ‘좋은 며느리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좋은 가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이다. 며느리 한 사람의 덕목만으로 건강한 가정이 유지되던 시대는 지났다. 시부모의 태도, 배우자의 책임, 가족 전체의 문화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며느리는 그 안에서 희생자가 아니라 설계자의 역할을 맡는다. 가정은 더 이상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작은 사회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힘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적응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율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좋은 며느리’란 좋은 가족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정의되는 이름인 것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5-05

별미(別味)

주변에서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여자 셋이 여행을 가면 꼭 한 명은 소외되거나 싸우게 마련이다, 평소에 아무리 친해도 여행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등의 우려 섞인 조언들이 가방의 덤처럼 따라붙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걱정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일본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잠시 벗어나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오로지 ‘나’로서 그리고 ‘우리’로서 마주한 첫 여정이었다. 그것은 익숙한 집밥을 떠나 낯선 이국의 별미를 마주할 때의 짜릿한 긴장감과도 같았다. 일본의 복잡한 노선도 앞에서 나는 길잡이를 자처했다. 유창하지 못한 실력이었지만 손짓과 발짓을 섞어가며 역무원에게 묻고 또 물었다. 혀끝에서 맴도는 서툰 단어들이었으나 뒤에서 나를 믿고 따라오는 두 친구의 존재가 나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환승 플랫폼을 찾아 헤매고 구글 지도를 돌려보며 낯선 골목을 누비는 과정조차 우리에게는 하나의 유희였다. 길을 잃으면 어떠하랴, 우리 세 사람의 발길이 닿는 그곳이 바로 목적지인 것을. 타자와의 동행은 언제나 자기 세계의 균열을 전제로 하지만, 이번 여정은 그 균열 사이로 오히려 눈부신 교감이 범람하는 경이로운 합주였다. 우리는 각자의 고유한 결을 유지하면서도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절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우정이라는 이름의 유대감을 더욱 견고하게 길어 올렸다. 낯선 이국의 풍광은 그저 부차적인 배경일 뿐, 정작 우리를 고양시킨 것은 서로의 결핍을 메워주는 배려와 그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찰나의 웃음들이었다. 익숙한 일상의 궤도를 이탈하여 조우한 낯선 연대(連帶)는 고착화된 중년의 삶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여행지에서 음식을 고르는 일은 때로 고역이 되기도 한다. 특히 한 친구는 갑작스러운 두드러기 증상 때문에 현지 음식보다는 한국 음식을 먹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미안해하는 친구의 손을 잡고 우리는 기꺼이 한식당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녀는 미안함을 ‘기록’으로 승화하였다. 자신의 얼굴을 담기보다 렌즈 너머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 길었던 친구는 “얘들아, 저기 서봐! 지금 빛이 너무 예뻐”라고 외치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녀의 배려는 우리의 식탁 위에, 그리고 핸드폰 갤러리 속에 영원히 박제된 온기로 남았다. 또 다른 친구는 마치 마법사의 가방을 지닌 만물상 같았다. 호텔 실내화의 불편함을 예견하여 챙겨온 여분의 슬리퍼, 짐이 늘어날 것을 대비한 보조 가방, 심지어 예기치 못한 상황을 대비해 챙겨온 여유 자금까지. “혹시 이거 있어?”라는 물음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가방에서는 정답 같은 물건들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치밀함 덕분에 우리는 타지에서의 불편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온전히 즐거움에만 침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여정을 지탱해 준 가장 견고한 안식처였다. 하루의 끝과 시작을 우리는 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뿌연 수증기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십사 시간을 붙어 지내며 발견한 서로의 새로운 단면들이 있었다. “너는 이런 습관이 있었구나”, “너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구나.”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의 세계에 깊숙이 발을 들이는 일임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니 우리의 여행은 잘 짜인 삼중주였다. 부족한 언어와 여정의 조율로 앞장선 나, 배려의 시선으로 우리를 담아낸 친구, 빈틈없는 준비로 우리를 채워준 친구. 누구 하나 욕심내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였기에 여행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길을 묻다가 터져 나온 폭소, 잘못 탈까봐 노심초사한 기차 안에서 나누던 농담, 편의점 간식 하나에 아이처럼 기뻐하던 순간들. 그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일본의 낯선 공기를 타고 경쾌한 파동으로 번져나갔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 든든한 집밥이라면, 친구들과의 이번 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이국의 별미였다. 익숙함 속에 숨겨진 새로운 맛을 보고 나니 인생이라는 긴 여정 자체가 조금 더 가볍고 경쾌해진 기분이다. 우리는 세간의 우려와 달리 서로의 소중함을 재확인하며 더 깊은 우정의 닻을 내렸다. 세 사람의 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던 이번 여행을 뒤로하며 벌써 다음 식탁을 고대한다. 삶이라는 허기진 길 위에서 또 어떤 낯설고 맛깔스러운 풍경을 함께 나누게 될지, 벌써부터 혀끝에서 기분 좋은 군침이 돈다. /김경아 작가

2026-05-05

선거 한달 전···'김부겸·추경호 판세' 예측불허

지방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대구시장 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보수정당 경선이 사실상 ‘본선’이었던 과거 대구시장 선거와는 달리 이번 선거에서는 여야 후보 판세가 ‘호각지세’를 이루면서 긴장상태로 진행되고 있다. 공천파동을 겪으며 지난달 26일 최종후보로 확정된 국민의힘 추경호 후보는 바쁘게 선거캠프를 꾸리며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추 후보는 3일 선거사무소(수성구 삼성증권빌딩 1층) 개소식을 열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이날 개소식에는 국민의힘 지도부와 지역 의원들, 추 후보 명예선대위원장으로 위촉된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당 원로 등 보수진영 주요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추 후보는 “보수의 심장 대구를 굳건히 지키고 이 힘으로 보수 정당의 힘을 키우겠다. 그래서 다음 총선, 대선 승리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했다. 출마를 선언한 지 한 달이 지난 민주당 김부겸 후보는 그동안 대구지역 각종 협회 간담회와 단체 모임 참석, 청년·대학생들과의 타운홀 미팅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는 연휴였던 지난 2일 대구 수성못에서 ‘출마 선언 이후 한 달 동안 느낀 대구 민심이 어땠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한 마디로 절박함이었다”면서 “대구는 지금 물에 빠진 사람처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진짜 돌파구를 열지 않으면 큰일 나게 생겼다”고 말했다. 대구시장 선거 대진표가 확정된 이후 실시된 각 언론사 여론조사를 보면, 두 후보의 지지율은 혼전 상태다. 조사기관에 따라 1, 2위가 다를 정도로 두 후보가 예측불허의 승부전을 펼치고 있다. 국민의힘 최종후보가 확정되기 전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김 후보와 국민의힘 예비후보들이 오차범위 밖에서 큰 격차를 보이던 것과 비교하면, 지지율이 빠르게 좁혀지는 흐름이다. 국민의힘에 대한 대구지역 민심 기류가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크게 출렁이는 것이다. 이제 여야 후보에 대한 지지층 결집이 어느 정도 이뤄진 만큼, 향후 판세는 누가 중도층의 마음을 사로잡느냐에 달려 있다.

2026-05-03

전기차 수요는 느는데 충전기 관리 뒷전

이란전쟁 후 기름값이 폭등하면서 전기차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이나, 전기차 충전기의 보급과 관리부실로 전기차 운전자들의 불평이 폭발 직전이라 한다. 지난달 14일 포항의 권모씨는 전기차 충전을 위해 포항 우체국을 찾았으나 충전기가 꺼져 있어 낭패를 당했다. 명색이 공공기관 주차장에 설치된 충전기가 전기료를 내지 못해 전기가 끊겨 충전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장거리 주행 중 배터리 잔량이 부족해 간신히 급속충전기를 찾아갔지만 점검 중이거나 고장이라 하면 사용자가 느끼는 절망감은 분노에 가깝다. 현재 국내에 설치된 전기차 충전기는 50만대를 넘고 있지만 약 10%가량은 이런저런 이유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그 이유는 정부가 전기차 충전기 보급에 급급한 나머지 사후관리를 등한시한 결과라는 것. 설치업체들은 설치 보조금에만 매몰돼 사후 관리는 뒷전으로 미뤘고 정부 또한 이를 방치한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전체 충전기 중 급속충전기의 보급률이 12%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아파트에 사는 주민은 완속이라도 밤새 꽂아두면 되지만 고속도로나 관광지를 찾는 시민의 입장은 다르다. 꼭 필요한 곳에 급속충전기가 설치돼 있는지 이미 설치된 충전기가 적합한 곳인지 등도 점검해 충전기의 효용성을 높여야 한다. 특히 충전기 정책을 설치보다 관리로 바꾸어 소비자의 불편 해소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란전쟁 후 유럽의 자동차 시장은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치솟는 휘발유 값을 감당하지 못한 소비자들이 앞다투어 전기차로 갈아타는 바람에 한 달 만에 등록 대수가 전달보다 51%가 증가했다고 한다. 국내도 비슷한 상황이 올 수 있다. 전쟁이 끝난다 해도 당분간 기름값이 안정되기는 어려워 국내서도 전기차 수요가 급격히 늘 수 있다는 것이다. 친환경차 전환이라는 면에서 바람직하지만 충전소 관리가 지금처럼 된다면 대혼란이 우려된다. 전기차 수요에 대비한 완벽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2026-05-03

노동절 부활에 즈음하여

2026년 5월 1일 대한민국에서도 마침내 ‘노동절’이 부활했다. 세계 모든 나라 노동자들이 축제를 벌이며 쉬는 노동절에도 한국 노동자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행정당국은 노동자들의 호칭마저 왜곡하여 ‘근로자’라 불렀다. 노동을 노동이라 하지 못하고,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에 ‘노동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희극적인 상황을 초월한 아이러니 자체다. 1886년 5월 1일 시카고에서 8만이 넘는 노동자가 거리 시위를 벌인다. 그들은 하루 8시간 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교육을 기치로 내걸고 투쟁한다. 시카고 외에도 미국 전역에서 3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을 보장하라는 시위를 벌인다. 1889년 7월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5월 1일을 국제적 기념일로 결정했고, 이것이 현재의 노동절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 5월 1일 조선 노동자 2천여 명이 모여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등을 주장하는 강연회가 한국의 노동절 행사 효시다. 이승만은 대한노총 창립기념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지정하여 1959년부터 기념행사에 들어간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3년에 노동절을 대신하는 ‘근로자의 날’을 선포하여 이듬해부터 실행한다. 사전적 의미를 살피면, 노동은 ‘육체와 정신을 써서 일하는 것’이며, 근로는 ‘힘들여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다. 근로는 노동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고용주의 바람과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다. 1980년대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노동계의 ‘5월 1일 노동절’ 개정 요구가 거세진다. 그 결과 김영삼이 날짜만 바꿔서 1994년부터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선포한다. 작년 11월 11일 국회를 통과한 ‘법률 제21134호’가 공포됨으로써 2026년 노동절은 136주년 세계노동절이자 동시에 한국의 법정 기념일로는 ‘제1회 노동절’이 된 것이다.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맞는 노동절의 감회가 나로서는 다소 남다르다. ‘호부호형(呼父呼兄)’ 하지 못해 집을 나가야 했던 홍길동 생각이 느닷없이 떠오르는 심사는 또 뭐냔 말이다. ‘근로’라는 말에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어휘는 ‘근로 정신대(勤勞 挺身隊)’다.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군수공장과 방직공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던 한국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 근로 정신대다. ‘노동’이라는 좋은 어휘를 놔두고 굳이 제국주의 일본이 애호하던 ‘근로’라는 표현을 관철한 박정희 일당의 흉중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지금도 자못 궁금하다. 위나라 왕에게 등용되면 무엇을 먼저 하시겠느냐는 자로(子路)의 물음에 공자는 “이름을 바로잡겠다(필야정명호(必也正名乎)”고 일갈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육단(六段) 논법이 등장한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흥하지 못하고, 예악이 흥하지 못하면,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며,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면, 백성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논어, ‘자로편’ 참조) 103년 만에 비로소 제 이름을 얻은 ‘노동절’이 노동자와 가족들을 위한 날이 되었으면 한다.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기념일의 본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성숙한 대한민국을 기원한다.

2026-05-03

상대적 박탈감

상대적 박탈감과 비슷한 말로는 질투를 들 수 있다. 질투가 개인적인 감정을 강조한 표현이라면 상대적 박탈감은 질투를 유발케 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정치인이나 우리 사회 상류층이 저지르는 부정부패나 특혜를 보고 느끼는 분노, 불쾌감 등도 일종의 상대적 박탈감이다. 사전은 “다른 대상과 비교해 권리나 자격 등 당연히 자신에게 있어야 할 어떤 것을 빼앗긴 듯한 느낌”이라 설명한다. 자신은 실제로 잃은 것이 없지만 다른 대상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상대적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잃은 듯한 기분을 의미한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프다”고 한다. 서양 속담도 “남의 집 잔디가 더 푸르다”는 말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정서는 인간이기에 있을 수 있다. 최근 주식이 활황을 보이자 주식을 하지 않는 많은 국민이 소외감 내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2년 전 통계지만 국내 주식 보유자 중 상위 1%가 가진 주식이 전체 금액의 53%를 차지한다고 했다. 지금도 이런 흐름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스피 지수 6000을 넘어서자 한국증시 폭주에 환호를 보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주식 호황으로 혜택을 보는 국민은 그리 많지가 않다. 특히 지금처럼 내수시장이 뒷걸음치고 있는 상황에서 주식시장의 활황은 일부 국민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더 안겨줄 소지가 있다. 지난해 4분기 기준 우리나라 적자가구는 네 명 중 한 명꼴로 조사됐다. 적자가구란 소득보다 소비지출이 더 많은 가구다. 주식시장 활황이 과거 부동산 불패 신화가 낳은 상대적 박탈감의 재현은 되지 말아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5-03

우리는 왜 세상의 변화를 꿈꾸는가

어느덧 봄이 우리 삶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계절은 어느새 연초록 잎을 틔우며 신록의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는 단순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자연의 질서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필연이라면, 사회의 변화는 인간의 선택과 의지의 산물이다. 법과 제도, 관습을 바꾸는 노력 속에서 사회는 발전해 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정치가 있다.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정치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그 기준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정치인의 능력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과 수준 높은 정책을 제시하는 것은 사람이다. 말은 생각의 표현이며, 결국 행동으로 이어지기에 정치인의 말이 가벼워지면 신뢰는 무너진다. 정책은 더 중요하다. 세상을 바꾸는 구체적 방법이자 실행 전략이 정책임을 우리는 그간 과정을 통해 충분히 습득해 왔다. 둘째는 정치인의 자질이다. 정치철학자 막스 베버는 자신의 저서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의 요건으로 소명 의식, 균형감각, 책임감을 제시한 바 있다. 소명 의식은 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자 답이며, 균형감각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 판단력이다. 책임감은 국민을 향한 봉사 정신이자 공직자의 기본자세다. 셋째는 정치인의 역할이다. 정치는 현재를 관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정치인은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즉 비전을 보여주고, 그 비전에 도달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다가오는 6·3 지방선거는 이러한 기준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기회다. 유권자는 정치인을 선택함에 능력과 자질 그리고 역할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우정이나 친분 그리고 호감에 기댄 선택은 정치의 순기능을 저해한다. 지역주의와 관계주의 중심의 폐쇄적 선택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이다. 아울러 선거가 임박할수록 후보자의 공약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목표가 불분명하거나 실행 가능성이 떨어지는 공약은 조심해야 한다. 당장은 화려해 보이지만 결국은 개인과 도시 그리고 국가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함을 불 보듯 뻔하다. 외모는 성스럽고 좋아 보이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흰색 코끼리’를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이렇게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정치는 주권자인 국민의 의지를 대신하는 대리 시스템이다. 따라서 선택이 잘못될 경우, 국민은 대리인에게 통제받는 ‘대리인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결국 좋은 정치인을 선택하는 것은 나와 도시의 더 나은 삶을 향한 기본적인 책임이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파울루 네루다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는 명언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어떤 정치인이 미래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유권자의 냉철한 이성과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심학봉 전 국회의원

2026-05-03

나는 어떤 존재인가?

지구는 약 45억 년 전에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불덩어리 행성으로 탄생했다, 이후 차츰 식으면서 바다가 형성되었고, 약 38억 년 전쯤 원시적인 생명체가 등장했다. 이 생명의 출현을 설명하는 대표적 개념이 ‘화학진화’다. 무기물이 점차 복잡한 유기분자로, 다시 자기복제 능력을 가진 체계로 발전했다는 가설이다. 초기 생명체는 단순한 세포의 수준이었지만, 약 24억 년 전부터 광합성을 하는 생물이 등장한다. 광합성 생물의 등장은 대기 중 산소 농도를 높여 복잡한 다세포 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이후 진화를 통해 다세포 생물, 식물, 동물, 그리고 복잡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생태계는 단순한 개체의 집합이 아니라, 에너지 흐름과 물질 순환이 정교하게 얽힌 하나의 ‘자기 유지 시스템’이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지구 생태계는 단순한 생명의 집합이 아니라 ‘물질이 스스로를 인식하기 시작한 단계’라고 한다.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원소들이 행성을 이루고, 그 위에서 생명이 탄생하며, 결국 의식과 사유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구 생태계는 우주 진화의 한 단계이며, ‘우주가 스스로를 알기 위한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인류는 지구 생태계의 한 종이지만, 몇 가지 특성으로 구별이 된다. 첫째는 자기인식 능력이다. 인간은 단순히 환경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를 묻는 존재다. 둘째는 상징과 언어능력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경험을 축적하고, 세대를 넘어 지식을 전달한다. 이는 문화와 문명을 형성하게 한다. 셋째로는 자연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인간은 생태계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변형하는 존재다. 농업, 산업, 과학기술은 모두 자연의 흐름을 재구성하는 행위다. 이 세 가지가 결합되면서 인간은 단순한 생물학적 종을 넘어 ‘의미를 만들어내는 존재’가 된다. 자연과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우주의 한 과정일 뿐, 특별한 목적이 주어졌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적·실존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의미를 묻고 창조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결국 인간의 삶은 주어진 의미를 발견하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존재다. 이 점에서 인간은 ‘우주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우주를 해석하는 주체’다. 그러나 생태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구성원이다. 생태계는 완성형이 아니라 끊임없는 조정과 순환으로 유지된다. 인간들이 이를 과도하게 교란하면 그 폐해를 결국 자신이 돌려받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오만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체와 연결된 망(Web of Life) 속의 한 가닥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종의 생존이 곧 나의 생존임을 깨닫는 ‘생태적 감수성’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자세다. 우주적 시각에서 인간은 내가 행하는 선의와 사랑이 우주의 엔트로피에 맞서는 소중한 질서임을 기억해야 한다. 들길의 풀 한 포기에서 우주의 신비를 읽어내고, 타자와 생명에 대해 경외심을 갖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일 터이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6-05-03

“그쪽으로 누군가가”

대구서 상공을 가로지르는 날개가 큰, 까치 같고 여치 같은 검은 새 한 마리 대구은행 옥상에나 동아백화점의 맨 끝 층 계단에 앉으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것들 위에 새의 그림자가 찍히고 그때 빌딩들은 뼈마디 쑤시는 소리를 낸다. 창에는 사람 그림자들이 어른거리고. 나의 길은 도시에서 도시로 이어지지만 저 새의 길은 숲에서 숲으로 이어진다. 하늘이 조금 비친 빌딩의 위쪽으로는 파란색이 창백하게 그물에 걸린 새처럼 퍼덕이고, 그쪽으로 누군가가 가슴에 통증을 느낀다. 물론, 내게도 가슴에 새가 지나간 자국이 만져진다. ―이하석, ‘상처1’ 전문 (‘우리 낯선 사람들’, 문학동네) 지역과 지방 사이, 언제부터인가 온라인상에서는 “고담 대구”처럼 도시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밈이 유행처럼 번졌다. 지역을 비하한다는 의견과 흥미롭다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이하석의 이 시는 ‘대구’라는 시공간에 대한 인식 없이 화자의 통증을 온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구는 중층적인 역사와 사회적 상처를 안고 있는 공간이다. 이 지역 시인들에게 장소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 억압된 기억이 분출하고 애도와 저항이 교차하는 공간일 테니까. 시는 “대구라는 상공을 가로지르는” 날개가 크고 검은 새로 시작해 결국 거스를 수 없는 저류를 만들어내며 시간을 이동하는 풍경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를테면 “대구은행 옥상”이나 “동아백화점의 맨 끝 층 계단”에 내려앉은 “까치 같고 여치” 같은 이 새는 외계로부터 침윤된 사건이며 대상이다. 제한된 공간 속 “새의 그림자가 찍히”는 이미지와 “빌딩들은 뼈마디 쑤시는 소리를 내”는 언술의 배치는 숨겨진 맥락이나 현실적인 문제들이다. 그런데 불안과 통증은 거기서만 오는 게 아닌 것 같다. 어딘가에서 재현되지 못한 채 빌딩 창에 “그림자들이 어른 거리”며 걸려있다. 이때 “그물에 걸린 새처럼 퍼덕이는” 파란 하늘의 “창백”함이란 계속해서 복제되는 그림자이다. ‘기억과 서사’에서 오카 마리는 “리얼리즘의 욕망”이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 그 때문에 재현 불가능한 현실이나 사건의 잉여, 타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와 결부되어 있다”라고 했다. 희망은 작은 기억의 연쇄에서 시작된다. 역사의 줄기도 그럴 것이다. 이 시인에게 대구라는 장소는 곧 그 사람이며 몸이 될 테니까. 이미지는 기억과 고통을 사이에 두고 나와 새의 길은 아프게 공명하며, 길은 나뉜다. “도시에서 도시로” “숲에서 숲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점에서 노출된 도시인과 새의 시선은 의무를 나눠 가지며 공동체성을 환기한다. “누군가 가슴의 통증”은 이하석 시인의 다른 작품들 예컨대 “가창댐”을 비롯해 그동안 유사하게 소비해 온 역사적 트라우마가 누적된 감정일 것이다. 이 시의 전반부가 불편한 고통을 바라보게 했다면, 후반부에서는 이 고통에 참여하게 한다. 간결한 이미지와 언술의 배치만으로도 깊숙이 개입하는 화자의 심정은 곧 시대의 고통이고, 고통을 느끼면서도 이동하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수많은 익명의 마음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는 온전하게 제 길을 향하는 시인과 새가 남긴 지나간 자국을 또렷하게 기억으로 남긴다. “물론 내 가슴에 새가 지나간 자국이 만져진다” /이희정 시인

2026-05-03

농업과 AI···스마트팜, 작황 예측·정밀 농업의 실제

의료 AI에서 출발해 법률·금융·제조의 현장을 거쳐 온 산업별 AI 혁신 시리즈가 이번 주 농업에 닿았다. 첨단 기술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분야야말로 AI 도입의 절박함과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무대다. 통계청의 ‘2024년 농림어업조사 결과’에 따르면 농가 경영주의 절반 이상(50.8%)이 70세를 넘었고, 농가 인구의 65세 이상 고령자 비율은 55.8%로 전국 평균(19.2%)의 약 2.9배에 달한다. 같은 시기 2023년 봄철 저온 피해와 여름철 집중호우·고온, 수확기 탄저병이 겹치면서 통계청 집계 사과 생산량은 56만6000 톤(2022년)에서 39만4000 톤(2023년)으로 30.3% 급감했다. 노동력은 빠지고 기후는 흔들리며 식량 안보는 국가 의제로 떠올랐다. 이 세 가지 압박이 동시에 작용하는 산업에서, AI는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라 생존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 데이터를 아는 사과나무 경북 안동시 임하면에는 노지형 사과 스마트팜 시범단지가 조성돼 있다. 토양 수분 센서가 적정 관수량을 결정하고, 나무에 부착된 센서는 생육 상태를 실시간 데이터로 만든다. AI 카메라가 병해충 발생을 조기에 포착하면 운영자는 휴대전화 한 대로 어디서든 과원을 관리한다. 안동시 발표에 따르면 2023년 이상기후로 전국 사과 생산량이 30%대 급감하던 해, 시범단지의 생산량은 오히려 소폭 늘었다. 한국미래농업연구원의 IT 트랩 기반 예찰 서비스를 적용한 결과 해충 피해율은 2021년 16%에서 2025년 1.6%로 10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고, 같은 해 폭염 속에서도 시범단지 농가 상품과율은 81.2%를 유지했다. 경북도는 이 모델을 확장해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 일원에 4.3헥타르 규모의 사과 노지 스마트농업 체험·교육장을 2027년까지 조성할 계획이다. 입문·보급·고급 3단계 실습 과원으로 운영되며, 묘목 정식부터 데이터 기반 정밀 관수·관비 시스템까지 단계별로 익히도록 설계됐다. 전국 사과 생산량의 62.2%가 경북에서 나오는 만큼, 이 모델은 지역 농업의 미래와 직결된다. ◆ 빌딩 안으로 들어간 농장 시설 농업의 변화는 더 극적이다. 국내 수직농장 기업 엔씽은 2026년 3월 빌딩형 수직농장 ‘아이엠팜 타워’에 158억 원 규모의 AI 농업 플랫폼 ‘N.FARM.AI’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삼성벤처투자로부터 전략적 투자를 유치했다. 경기도 여주에 들어설 이 8개 층, 약 4040평 규모의 수직농장은 2027년 완공 시 연간 1000톤의 작물을 생산하게 된다. AI가 온도·습도·광량·양분을 실시간 조절하고, 생육 모니터링과 수확량 예측, 매출과 비용까지 통합 관리한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은 일반 노지나 하우스의 40배에 이르고, 이미 이마트와 배달의민족 비마트, 삼성웰스토리, 오뚜기 등에 신선 채소를 공급하고 있다. 또 다른 강자 그린플러스는 2025년 매출 1057억 원을 기록하며 스마트팜 부문이 41% 성장했고, 아랍에미리트를 거점으로 중동 시장에 적외선 차단 피복제 기술을 적용한 실증을 시작했다. 식량 안보가 국가 전략 의제로 떠오른 중동·동남아시아에서 한국형 스마트팜은 이미 수출 상품이 됐다. ◆ 농기계가 데이터 구독 서비스로 바뀌다 해외로 시선을 돌리면 규모가 다르다. 미국 존디어가 2025년 1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See & Spray’ 기술은 그해 한 해에만 500만 에이커, 약 2만 제곱킬로미터에 적용됐다. 트랙터 붐대에 장착된 카메라가 시속 24킬로미터로 달리며 초당 232제곱미터를 스캔해 잡초만 식별하고, 해당 지점에만 제초제를 살포한다. 결과는 제초제 사용량 평균 50% 감소, 약 3100만 갤런 절감, 그리고 대두 수확량 에이커당 평균 2부셸 증가로 나타났다. 일부 농가에서는 4.8부셸까지 늘었다. 존디어는 이를 발판으로 2030년까지 완전 자율 농장을 목표로 잡았고, 농기계를 일회성 자산이 아닌 데이터 구독 서비스로 재정의하고 있다. 농업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AI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을 사고파는 방식으로 바뀌는 셈이다. 우리 기업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기업 대동은 GPS 기반 자율주행 트랙터와 토양·생육 데이터를 결합한 정밀농업 솔루션을 상용화했고, 드론을 활용한 방제·작황 예측 서비스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 위성과 드론이 만드는 작황 예측 작황 예측은 이제 농민의 직관에만 기대지 않는다. 위성영상과 기상 데이터, 토양 수분, 생육 단계 정보를 AI가 결합해 지역·필지 단위의 수확량을 미리 추정한다. 농촌진흥청은 30~270미터 격자 단위로 기상·재해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농업기상재해 조기경보 서비스의 정확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노지·시설 작물 생육 진단 자동화를 위한 AI 작물 모니터링·진단 플랫폼 개발에는 2026년 78억 원이 신규 투입됐다. 드론으로 촬영한 정사 영상에 식생지수(NDVI)를 입혀 분석하면, 같은 논·밭 안에서도 생육이 부진한 구역만 골라 비료를 더 주는 ‘가변 시비’가 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비료와 농약은 줄고 수확량은 늘며, 그 한 해의 데이터는 그대로 다음 해 학습 자료가 된다. ‘AI가 함께 배우며 짓는 한 해 농사’라는 새로운 순환이 만들어진다. ◆ 정부가 그리는 큰 그림 정부 정책도 빠르게 움직인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26년 신규 사업으로 ‘국가 농업 AX 플랫폼’ 구축에 705억 원을 배정했고, 노지 스마트농업 ICT 융복합 확산에도 103억 원을 새로 투입한다. 농촌진흥청도 2026년 총예산 1조1325억 원 가운데 AI 기반 스마트농업과 그린바이오 분야에 1595억 원을 편성했다. 큰 틀은 ‘제1차 스마트농업 육성 기본계획(2025~2029)’이 정해 두었다. 전국 온실의 35%를 스마트팜으로 전환하고, 매출 100억 원 규모의 스마트농업 선도기업 120곳을 키우며, 스마트팜 수출 9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목표다. 김제·상주·고흥·밀양 네 곳의 스마트팜 혁신밸리 구축이 마무리됐고, 지역특화 임대형 스마트팜과 스마트농업 육성지구도 2029년까지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아프리카 등에 공급할 K-라이스벨트 우량 벼 종자는 2026년 6330톤이 생산된다. 단순한 보조금 살포가 아니라 ‘데이터-인프라-인력-수출’을 한 묶음으로 끌고 가는 산업 정책이라는 점이 이전과 다르다. ◆ ‘기술’보다 ‘사람’이 더 어렵다 그러나 현장의 평가는 신중하다. 농식품부 ‘스마트농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스마트팜 도입률은 전체 시설원예 농가 면적의 약 14% 수준이지만, AI 등 고도화된 기술의 농가 실질 활용률은 여전히 10% 미만으로 추산된다. 도입 비용 부담, 디지털 역량 부족, 교육·컨설팅 인프라의 미비가 가장 큰 장벽이다. 70대 농업인이 AI 카메라 영상을 들여다보며 의사결정을 내리려면 기술 그 자체보다 ‘함께 해석해 줄 사람’이 더 절실하다. 정부는 스마트농업 전문교육기관을 확대하고 ‘스마트농업관리사’ 자격제도를 도입했다. 농업교육포털을 통한 AI 분야 실시간 화상교육과 청년농 사관학교 같은 장기 보육 프로그램도 가동 중이다. 민간에서도 농업인을 대상으로 한 AI 리터러시 팟캐스트와 온라인 강좌가 늘고 있는데, 짧은 출퇴근길에 한 편씩 듣는 식의 가벼운 학습이 보급률을 끌어올리는 사례가 적지 않다. 결국 농촌의 디지털 전환은 사람과 데이터, 정책이 함께 굴러가야 비로소 작동하는 세 바퀴 자전거다. 한 바퀴라도 작아지면 전체가 기울어진다. 포항을 비롯한 경북은 사과와 마늘, 그리고 만감류·바나나·애플망고 같은 아열대 과수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시험대다. 포항시는 2026년 농촌지도·기술 보급 시범사업에 61억 원을 투입하고, 그중 11억 원을 아열대 과수 스마트팜과 들녘 특구 조성에 집중한다. 기후가 바뀌면 작물이 바뀌고, 작물이 바뀌면 데이터도 새로 쌓여야 한다. AI는 그 새로운 데이터의 가장 빠른 학습자다. 우리가 농업에 AI를 도입하는 진짜 이유는 결국 한 가지로 모인다. 사람이 줄어드는 들판에서, 사람의 경험을 기계가 이어 받아야 식탁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5-03

우주에서, 생명은 예외다

광대하고 막막한 우주를 떠올릴 때마다 한 가지 불편한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생명’이 사실은 우주의 기본값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 이 푸른 행성이 오히려 예외이며 우주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죽음의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멀고 멀며 우주 공간은 절대영도에 가까운 냉기와 치명적인 방사선으로 가득하다는 게 아닌가. 산소도, 물도, 생명을 유지할 그 어떤 조건도 없다. 광막한 공간인 우주를 기준으로 보면, 지구 위에서 숨 쉬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는 통계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건이다. 생명은 자연스럽고 편만한 결과가 아니라, 지극히 드물고 이상하며 예외적인 사건이다. 생명의 탄생과 진화가 얼마나 복잡하고 우연적인 조건에 의존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우주 공간에서 목격되는 항성 간의 거리, 안정된 공전궤도와 자전궤적, 거대한 행성의 움직임, 자기장과 판구조 운동까지, 경이롭고 불가사이한 현상들이 모두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벌어진다. 셀 수 없는 조건들이 동시에 맞아떨어져야만 생명은 겨우 존재한다.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생명은 급전직하 침묵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무엇을 오해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일상 가운데 ‘생명이 퍼져 있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지 않았을까. 차갑게 우주를 바라보면, 생명은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립되어 있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지구 위의 생명은 철저히 외로운 존재다. 끝모를 우주 공간에 오직 지구에만 존재하는 온갖 생명들이 사실은 그만큼 고독하며 고립된 처지인 셈이다. 지구와 생명은, 그만큼 외롭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을까. 여기 존재하는 생명들 가운데 특히 인간은 더욱 독특하다. 우주를 경이롭게 바라본다면, 인간은 겸허해 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 그러나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물론이고 지구 전체가 하나의 미세한 예외일 뿐이다. 그런 예외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의미를 만들고, 다투고 갈등하고, 때로는 서로를 미워하고 파괴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기적에 가까운 조건 속에서 탄생하고 살아있는 존재들이 그 특별함의 가치를 제대로 새기고 이해하지 못한 채 소모되고 스러져 간다. 질문은 다시 되돌아온다. 이처럼 먹먹해 지도록 드문 조건 속에서 존재하는 생명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살아남는 것을 넘어, 그 희귀성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책임이 아닐까. 생명은 흔한 것이 아니라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우주 가운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다. 우주는 침묵하고 있다. 침묵 속에서 오직 지구에서만 소란하다. 영겁의 시간에 비하면, 사람이 살고 가는 시간은 너무나 짧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 견주면, 지구는 얼마나 작은 곳인가. 우주의 침묵과 암흑 가운데, 처절하도록 외로운 지구는 오늘도 살아 소란스럽다. 전쟁과 살육, 차별과 혐오, 가난과 질병, 갈등과 폭력으로 특별하고 외로운 이 시간과 공간을 허비하고 있다. 지구와 인간의 이토록 특별한 조건을 인식하면서, 우리만이라도 일상과 주변을 조화롭게 만들어 보았으면 싶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4-29

[사설]철강업계 숨통 틔울 전기료 의무 감면법

더불어민주당 민병덕 의원 등 16명의 국회의원이 철강산업용 전기요금을 의무적으로 인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발의해 그 결과에 관심이 쏠린다. 철강산업에 대한 전기료 인하는 위기에 봉착한 철강산업의 숨통을 틔울 유일한 대안으로 업계가 자주 호소해왔던 사안이다. 따라서 이 법 통과에 거는 포항 철강업계의 기대 또한 적지 않다 하겠다. 이 법은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된 곳의 철강산업에 대해 전기요금 감면을 법적으로 의무화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산업통산부 장관이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개정안은 공포 후 3개월 시행을 목적으로 함으로써 현장의 속도감을 높인 게 특징이다. 포항은 태풍 힌남노 피해와 철강업의 지속된 부진으로 작년 8월 산업위기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돼 이번 개정안의 직접 대상이 되는 곳이다. 포항제철을 중심으로 한 포항지역 철강업계는 세계적 공급과잉과 중국의 저가공세, 미국의 무역장벽 등 겹치는 악재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포항제철은 45년 만에 1선재 공장을 폐쇄했나 하면 현대제철도 일부 공정을 중단하고 구조조정 작업을 벌이고 있다. 포항지역 철강업계는 계속된 불황을 견디지 못해 국내 생산시설을 하나둘 정리하는 분위기다. 국내 산업의 주력인 철강산업의 위기를 맞아 정부가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및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법(K-스틸법)을 제정했지만 전기료 감면에 대한 후속조치가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자주 받아왔다. 특히 탈탄소 정책에 맞춰 업계가 전기료 공정 도입과 수소환원제철 기술개발에 나서고 있지만 산업용 전기요금의 부담이 사업 추진의 걸림돌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철강사의 매출에서 전기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20~25%다. 전기료 감면이나 인하는 철강업 경쟁력 강화의 필요불가결한 조치다. 지난 3년 산업용 전기료는 기업의 어려움에도 불구, 60%나 인상된 바 있다. 이번 전기료 감면법의 국회 통과에 거는 철강업계의 기대는 그래서 생존권 방어적 의미로 볼수 있는 것이다.

2026-04-29

대구 ‘2·28 정신’도 헌법 전문에 명시돼야

대구시장 선거에서 ‘2·2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시해야 한다는 이슈가 전면에 부상했다. ‘5·18정신 헌법전문 수록’ 개헌 작업이 진행 중인 가운데, 실제 독재에 맞선 대한민국 민주 운동의 효시가 ‘대구 2·28 정신’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는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 이 전문에 2·28 정신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2·28 민주운동은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교생들이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 일으킨 시위사건으로 3·15 부마의거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2·28 시위에 참여했던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원로자문위원들은 28일 사업회를 방문한 국민의힘 추경호 대구시장 후보에게 “2·28 민주운동이 헌법 개정 논의에서 빠진 게 납득하기 어렵다”며 헌법 전문 명시를 강하게 요구했다. 이에 추 후보는 “2·28 정신은 국가 정체성을 담는 헌법 전문에 반드시 반영돼야 한다”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현재 5·18 민주화운동과 3·15 의거를 헌법 전문에 수록하기 위한 개헌작업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28일에는 국회에서 ‘부마항쟁 및 5·18정신 헌법전문 수록 개헌촉구 결의대회‘도 열렸다. 2·28 민주운동은 헌법전문 수록 대상에서 쏙 빠져 있다. 그동안 2·28 기념사업회는 2·28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을 위해 국회와 각 정당에 건의문과 성명서를 전달하는 등 다각도로 노력해왔다. 대구시와 대구시의회도 성명을 여러 차례 내고 결의문을 채택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여왔다. 대구시는 해마다 2월이면 2·28 민주운동이 일어난 28일까지 1주일간을 대구시민주간으로 정해 대구 고교생들의 민주운동 정신을 기리고 있다. 국회가 부마항쟁과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하면서 4·19의 도화선이 된 2·28 정신을 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026-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