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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울퉁불퉁한 길 만들기

경주 APEC이 2박 3일의 여정을 마치고 11월 1일 끝났다. 이재명 정부가 6월 4일 출범했으니 준비 기간이 5개월도 안 된 상태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여기저기서 호평이 많다. 그중에서도 젠슨 황이 GPU 26만 장을 한국에 우선 판매하겠다는 약속은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모두 기뻐할 만한 깜짝 소식이었다. 이런 발표가 있기 하루 전날 젠슨 황은 삼성 이재용, 현대 정의선 두 회장과 삼성동 깐부치킨에서 치맥 회동으로 뉴스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CPU는 알지만 GPU는 금시초문인 데다, 무료로 주는 것도 아니고 14조 원이나 되는 돈을 주고 사는 건데 왜 우리가 이토록 감사해야 하는지 어리둥절하여 여기저기 검색하고 강의도 찾아 들었다. AI가 미래 산업에서 엄청나게 중요한데, 이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GPU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도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서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다고 한다. 현재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GPU는 6만 5천 장인데 26만 장을 더 들여오면 30만 장이 넘어 세계 3위 보유국이 된다. 이것은 2천만 장을 보유하여 전 세계 보유율 40%를 차지하고 있는 1위 미국이나 25%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에 비하면 엄청난 격차지만 30여 만장으로 3위가 된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앞서간다는 뜻이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렇게 환호하는 분위기 일색에서 GPU 30만 장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소 하나가 필요하다고 염려하면 눈치 챙기라는 지청구만 들을 가능성이 백 퍼센트다. 이제 AI는 우리 실생활에 파고들어 없어서는 안 될 도구로 자리잡고 있으니 거부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전 역사를 돌아보면, 기술은 음과 양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발전해왔다. 농업의 발전은 물론이고 산업 혁명, 정보 혁명 등 모든 기술 혁명에는 그림자와 부작용이 뒤따랐다. 지금 디지털 세상도 능력에 따른 빈부격차의 극심화나 인간 소외 등 부작용이 있다. 이에 AI가 발전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 등에서 신규 채용은 제로가 되었고, 대량 해고도 잇따르고 있다. 어느 소설가는 현실은 울퉁불퉁한데 휴대폰 세상은 너무나 매끄럽기 때문에 도파민이 분비되어 중독되는 것이라 한다. 이런 논리를 AI에 적용하면, AI야말로 매끄러움의 끝판왕이다. 챗지피티에 어떤 자료를 넣어도 완벽한 결과물을 척척 내놓는다. 이제 인간 세상의 울퉁불퉁함과 어설픔, 시행착오는 악덕이 되어 가고 있다. 그렇다고 휴대폰에 인간 세상의 울퉁불퉁함을 이식하여 속도를 늦추자는 그 소설가의 제안은 실현 불가능하다. AI의 발전도 막을 수 없다. AI는 계속 발전하는 대신, 개인과 지역 차원에서는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조금이라도 확보하면 좋겠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에서 프로스트가 폴을 치유해주는 장면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마담 프로스트 같은 일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갖게 되었다.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 같은 비포장도로가 있는 집을 여전히 꿈꾸고 있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11-09

유권자들의 눈은 언제나 당신을 향하고 있다

내년 6·4 지방 선거가 7개월 정도 앞두고 전국 각 시·군이 벌써부터 선거의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설렘과 희망찬 기대로 가득해야 할 이 소중한 시기에, 때로는 ‘내가 앉은 이 자리가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일부 현직 후보자들의 모습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비단 특정 자치단체 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국민의 봉사자로서 부여받은 소중하고 막중한 책무를 잠시 잊은 이들에게, 우리는 이 엄중한 시기에 그들이 마땅히 기억해야 할 본연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주고자 한다. 우리 속담에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처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진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는 권력이나 부, 명예 등 모든 일시적인 것들에 적용되는 흔들림 없는 진리이며, 모든 공직 또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자치단체장이라는 자리 역시, 한 개인이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전유물이 아니라 오직 유권자들이 잠시 부여한 소중한 권한이자 동시에 엄중한 책임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각 시·군 자체단체의 경우, 재선·3선에 도전을 공론화 하며 오랜 시간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자치단체장의 노고는 분명 우리 모두의 뜨거운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때때로 ‘현직’이라는 이름 아래, 유권자들의 진솔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자신의 존재감만을 과시하려 하거나 오직 다음 선거만을 위한 근시안적인 행정에 몰두하는 모습은 유권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따뜻하고 유능한 리더의 모습이 아닐 것이다. ‘자리는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겸손하고 낮은 마음을 잊을 때, 리더십의 빛은 서서히 바래고 군민과의 소중한 신뢰는 조용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공직은 본질적으로 ‘봉사’를 위해 존재하는 자리다.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우리 공동체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사회의 그늘진 곳에 소외되는 이웃 없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야말로 자치단체장에게 주어진 가장 참된 역할이자 사명이다. 처음 그 자리에 오르겠다고 뜨겁게 다짐했던, 열정과 순수함이 가득했던 초심을 되새겨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유권자들은 지금, 그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예리한 눈으로 당신의 모든 언행과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 형식적인 의례와 상투적인 발언, 혹은 일방적인 독백으로 귀한 시간을 채우기보다는, 진심으로 유권자들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그들의 삶에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선거는 지난 날의 공적을 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앞으로 지역을 어떻게 더 밝고 행복하게 이끌어갈 것인지 그 비전을 유권자들과 투명하게 공유하고, 그들의 현명한 선택을 겸허히 구하는 진정한 소통과 약속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천군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자치단체가 미래를 향한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이 중대한 시기, 자치단체장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권세를 뽐내고 자랑하는 오만한 태도가 아닌, 오직 유권자들의 삶을 최우선에 두는 확고한 철학과 굳건한 신념이다. ‘내 자리’가 아닌 ‘우리의 지역’, ‘나의 영광’이 아닌 ‘모두의 행복’을 향한 나침반이 흔들림 없이 가리킬 때, 비로소 군민의 깊은 신뢰를 얻고 지역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을 진정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유권자들의 표심은 언제나 냉정하며, 동시에 지역의 밝은 미래를 향한 따뜻한 기대감을 담고 있다. ‘영원한 자리’는 이 세상에 없지만, ‘영원히 기억될 봉사’는 분명 존재한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모든 후보자들이 겸허하고 겸손한 자세로 유권자들을 마주하고, 지역의 밝고 희망찬 미래를 위한 진솔한 노력과 진정한 리더십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정안진기자 ajjung@kbmaeil.com

2025-11-09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명예훼손

버추얼 아이돌은 ‘가상 아이돌’ 혹은 ‘사이버 가수’이다. 컴퓨터 그래픽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캐릭터로 활동하며 팬들과 소통하는 아이돌로, 아바타로 활동하기 때문에 외모와 이름 등 모든 것이 가상이다. 하지만 버추얼 아이돌도 목소리만큼은 실제 사람의 목소리다. 활동하는 캐릭터 뒤에서 실제 노래하는 본체 가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버추얼 아이돌은 이제 지상파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고 콘서트 티켓 수만 장이 오픈하자마자 매진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버추얼 아이돌은 모든 공개적 활동이 가상 캐릭터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사생활 침해 피해나 멤버의 건강 이슈가 없어 활동이 안정적이다. 하지만 이런 특성 때문에 버츄얼 멤버에 대해 지어낸 사실을 퍼뜨리고 모욕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버추얼 아이돌을 향한 악플은 명예훼손이나 모욕죄가 될 수 있을까? 형사 범죄의 피해자는 자연인과 법인만이 가능하다. 누군가 고양이에 대해 허위사실을 퍼뜨리고, 지나가는 사람이 내 반려견을 모욕한다고 해도 피해자가 없는 행위이므로 명예훼손죄나 모욕죄로 고소할 수 없다. 버츄얼 아이돌도 마찬가지이다. 플레이브의 멤버 누군가에 대해 키가 작다, 예전에 누구와 동거했다더라와 같은 내용의 댓글을 달고 욕설을 해도 명예훼손죄나 모욕죄가 성립할 수 없다. 버츄얼 아이돌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가상의 존재여서 법률적 권리의 주체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민사적 배상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포된 사실의 내용이 가상 멤버 뒤에 있는 본체 가수, 혹은 소속사인 회사에 대한 연결로 인정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헌트릭스 멤버 루미의 목소리가 고음 처리한 기계음이라더라는 사실을 유포한다면 이야기를 한다면 이는 실제 그 목소리를 노래한 가수 이재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가 될 수 있고, 루미 목소리를 그런 식으로 방출시킨 바 없는 제작사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얼마 전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모욕행위를 본체 가수에 대한 것으로 보아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하급심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A씨는 SNS에 버추얼 아이돌그룹 멤버들의 외모를 비하하고, 이들을 연기하는 실제 인물들을 조롱하는 글을 여러 차례 게시했다. 이에 본체 가수 B씨 등은 A씨를 상대로 피해에 대해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 과정에서 A씨는 “실제 인물이 아닌 가상의 캐릭터이고, 신상이 비공개여서 가상 캐릭터와 원고 사이에 동일성이 인정될 수 없다”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법원은 “메타버스 시대에 아바타는 단순한 가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사용자의 자기표현, 정체성, 사회적 소통 수단”이라며 “아바타에 대한 모욕 행위 역시 실제 사용자에 대한 외부적 명예를 침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라고 하며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버추얼 가수의 활동은 앞으로 더 활발해질 것이다. 악플 피해에 있어서는 권리 주체서에 관한 판단을 너무 엄격히 보지 말고 이번 법원의 판결처럼 피해의 범위를 넓게 보는 것이 필요하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1-06

야당 대표 덕담이 정쟁거리 된다니 안타깝다

경주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주체가 누구냐를 두고 정청래 민주당 대표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따지는 장면이 연출됐다. 지난 3일 경북도청에서 열린 ‘국민의힘·대구시·경북도 예산정책협의회’에서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경주 에이펙 성공은 ‘APEC 정상회의 특별법’, ‘APEC 성공개최 국회 결의’ 등 국민의힘과 국회의 전폭적인 지지와 146만 명 시도민의 서명운동 덕분”이라며 인사말을 했다. 장동혁 대표는 이에 화답하는 차원에서 “경주 APEC을 성공적으로 이끄는데 수고가 많았다. 경주 에이펙의 성공 경험이 국가적 유산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당이 잘 뒷받침 하겠다”고 말한 게 이날 두 사람의 인사말 주요 내용이다. 이를 두고 정청래 대표가 5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참 실소를 자아낸다”며 발언 내용을 문제 삼았다. 정 대표는 “(장 대표가) 이철우 지사가 경주 에이펙 성공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정상회담장에 들어가지도 않은 도지사 덕분에 에이펙이 성공했다니 참 실소를 자아낸다”며 비웃었다. 다만 정 대표는 “(장 대표가) 에이펙이 ‘실패했다’고 말하진 않은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로 마무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이 이번 대구시·경북도와의 정책협의회 자리는 중앙당 차원에서 했지만, 지방정부와 여야 시·도당간의 정책협의회는 예산정국을 앞두고 늘 있어왔던 관례적인 행사다. 경북도는 이날 지난 주 막을 내린 경주 APEC 정상회의 안건 외에도 다양한 현안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국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당부했다. 특히 이철우 지사는 “신공항 이전과 북극항로 개척에 대비한 영일만항 확장, 철강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산불 피해지역 지원과 지역 재건을 위한 시행령 제정을 꼭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아마 집권당인 민주당에도 정책협의회 자리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당 대표가 지방정부와 야당과의 정책협의회 자리마저 정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2025-11-06

불붙은 공공기관 유치전···도시 명운이 걸렸다

내년부터 2차 공공기관 이전계획이 개시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지자체별 유치전이 달아오르고 있다. 대구시도 공공기관 2차이전 유치위원회를 5일 공식 출범시켰다. 이날 회의에서는 IBK기업은행 등 30군데 공공기관을 중점 유치대상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유치활동에 나서기로 했다. 특히 IBK기업은행은 중소기업 비중이 전국 최고인 대구의 산업구조를 감안하고 1차 이전기관으로 대구에 온 신용보증기금과의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명분 아래 최우선 유치대상으로 삼았다. 그 밖에도 데이터산업진흥원, 한국산업기술진흥원,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등 대구 미래신산업과 연관된 공공기관들도 유치대상에 포함했다. 공공기관 이전은 수도권의 비대화를 막고 국토의 균형발전을 목적으로 시작한 정부 사업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처음 시작했으나 지자체 간 이해관계에 매여 20년 가까이 추가 이전을 못하다가 현 정부가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시키면서 본격 논의에 들어가 있다. 정부는 내년도에 로드맵을 확정하고 다음 해 실행에 들어갈 계획이라 한다. 공공기관이 유치되면 청년들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생기고 공공기관이 가진 경제적 파급력이 지역경제의 성장을 돕게 된다. 양질의 일자리가 생김으로써 청년이 머물고 도시는 다시 활력을 되찾을 수 있으니 지자체의 유치전은 뜨거울 수 밖에 없다. 부산, 광주 등 전국 지자체들은 공공기관유치 전담팀을 만들고 시민단체나 출향 인사까지 동원하며 경제 파급력이 큰 공공기관 유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대구시가 이제 공식기구를 출범시킨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유치전 경쟁 속에 주도권부터 잡아야 한다. 정부를 설득할 치밀한 전략과 논리도 잘 개발해야 한다. IBK기업은행은 오래전부터 지역이 유치를 희망한 기관이다. 1만명이 넘는 종업원과 32조 매출을 올리는 상장기업이다. 중소기업과 상공인이 많은 지역경제에 꼭 필요한 기관이다. 반드시 유치에 성공해야 한다. 대구시와 경제계, 지역정치권은 합심하여 대구의 명운이 걸린 공공기관 유치에 총력을 쏟아야 한다.

2025-11-06

성공한 축제를 위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삼바 축제는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세계에서 가장 큰 축제다. 이곳에 뿌려지는 돈만 무려 1조3000억원이라 한다. 무엇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킬까. 리오 카니벌의 최고 매력은 화려한 퍼레이드와 축제를 위해 준비한 춤과 의상이다. 축제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화려한 의상과 춤 그리고 이곳 시민들의 삼바에 대한 열정이 행사를 성공으로 이끌고 가고 있는 것이다. 리오축제는 브라질 사람의 삶의 기쁨이다. 독일 뮌헨에서 개최되는 맥주 축제 옥토버 페스트는 전통 의식에서 비롯된 축제다. 1810년 바이에른 왕국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100년 이상의 축제로 이어지고 있다. 전통의상과 다양한 독일 요리, 각양각색의 맥주가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옥토버 페스트를 본 뜬 축제만 지구촌에 3000개 있다고 한다. 대단한 위용이 아닌가. 이 축제도 숙박, 교통, 쇼핑 등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1조원을 넘는다. 우리나라에도 한해 1000개가 넘는 축제가 열린다. 그 중에는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이름만 올렸다가 사라지는 것도 수두룩하다. 축제란 지역 전통의 문화를 승화시키고 그 정신을 이어가는 일종의 공동체 문화행사다. 지금은 공동체 문화와 더불어 경제적 효과도 축제를 여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최근 경북 김천에서 열린 김밥 축제와 이번 주 구미에서 시작하는 라면축제가 젊은층을 중심으로 전국적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평범한 아이템에서 축제의 본질을 발견한 축제로 발전했으니 축하할 만하다. 고객 감동의 축제로 쭉 뻗어나길 바란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11-06

울릉도오징어, 이제는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돼야

울릉도의 바다는 한때 ‘오징어 황금어장’으로 불렸다. 울릉도 주민들의 생계, 울릉도의 경제, 그리고 한 세기 넘는 섬의 근현대사가 오징어와 함께 흘러왔다. 그러나 지금, 그 산업은 붕괴 직전의 위기에 놓여 있다. 2000년 1만1000여t에 달하던 오징어 어획량은 최근 4년 평균 447t에 불과하다. 사실상 산업 기반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어(郡魚)’로 지정된 오징어는 한때 울릉도의 수산물 판매액 중 96%를 차지하기도 할만큼 독보적 존재였으나 이제는 지역 경제를 지탱하기는 커녕 어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왜 이렇게 절대 산업에서 사양 산업으로 바뀌었을까? 김윤배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대장의 분석은 명확하다. 첫째, 동해 표층수온의 급격한 상승이다. 9월에도 27~28도를 오르내리는 수온은 오징어가 머물 수 없는 환경이다. 표층과 중층의 온도 차가 커지며 영양염의 순환이 약화되고, 결국 먹이망 자체가 붕괴됐다. 둘째, 남획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연간 1만 톤을 유지하던 오징어 위판량은, 북한 수역에 중국어선 2천 척 이상이 들어와 싹쓸이 조업을 시작한 2004년 절반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북한 수역과 맞달아 있는 울릉도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이제는 ‘감척’과 ‘문화자산화’라는 해법을 찾아야한다. 오징어 자원 감소를 막기 위해선 어선 감척 지원과 어업인 소득 보전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대안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징어 어업을 역사·문화 콘텐츠로 승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저동항의 ‘펭귄 얼음공급 구조물’ 보존 논의는 상징적이다. 오징어와 함께 울고 웃어온 주민들의 삶을 기록하고 전시하는 오징어역사문화홍보관은 이제 선택이 아닌 시급한 과제다. 울릉도의 오징어는 단순한 수산물이 아니다. 1910년대 일본인의 이주, 1970~80년대 인구 5만 명에 달했던 호황, 그리고 지금의 몰락까지, 울릉도의 모든 굴곡은 오징어의 흥망과 맞닿아 있다. 이제 오징어 어업은 기후 위기 시대를 버텨낸 지역 어업 기술이자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돼야 할 시점이다. 산업으로서의 회복은 요원할지라도, 문화와 역사의 자산으로 보전할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울릉군민의 상징, 군어(郡魚) 오징어가 다시 날개를 펼 수 있을지는 알수가 없다. 하지만, 문화유산으로서의 보전은 지금 우리가 어떤 결단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다. /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25-11-06

‘꼬리’ 물지 마세요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매너는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나쁘지 않아졌다. 줄을 서서 차례대로 탑승하는 건 물론, 승강장이 아닌 곳에서 버스를 세워달라고 억지 부리는 이들도 거의 없다. 하지만, 자신이 운전자가 되는 경우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사람의 성격은 운전할 때 모습으로 판단하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평소엔 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를 잡으면 종종 거칠고 무질서한 면을 드러내는 경우가 흔하다. ‘꼬리물기’란 낯설지 않은 단어가 있다. 출퇴근 시간 막히는 도로에 차량이 가득하다. 신호가 바뀌기 전에 교차로를 통과할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제 차만 진입시켜 다음 신호에 진입하려는 차량들의 통행을 방해하는 행위를 뜻한다. 자신만 편하자고 다수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 없는 짓이다. 꼬리물기는 운전자들 사이에서 다툼을 부른다. 욕설과 함께 심하면 주먹다짐까지 오가는 걸 볼 때도 있다. 출근길 스트레스를 부르는 급작스런 클랙슨 소리도 야기하는 게 꼬리물기. 그럼에도 근절되지 않는 나쁜 운전습관이다. 최근 서울 경찰은 출근길에서 꼬리물기 집중 단속을 벌였다. 단 1시간 만에 200명이 넘는 운전자가 적발됐다고 한다. “너무 바빴다” “남들도 다 하는데 왜 나만 잡는가”라는 변명과 불만이 쏟아진 현장은 아직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한 한국 운전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꼬리물기 관행이 비단 서울에만 있겠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경북을 포함한 전국 도로 어느 곳에도 얌체 운전자는 존재한다. 꼬리물기로 인한 사고의 위험성을 낮추고, 원활한 교통 흐름을 위해서라도 지금보다 더 강화된 단속이 필요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1-06

해와 달의 길-장기 일출암(日出岩)

산다는 거, 가만히 응시하면 그래, 주관은 없어, 객관의 일직선을 증명하는 것 장기천을 걸으며 느꼈네 그 끝과 시작에 일출암이 있네 그냥 바위지만 큰 법당이네 달이 지고 해가 뜨는 순간을 의무적으로 지탱하고 있네 지나치는 길이라 눈여겨 보지 못할 변방이라 해도 차라리 그곳이 구룡포의 배꼽 가만히 바라보면 삶이 무력하고 고달파도, 바다를 바라보는 것 선험(先驗)이 그런 것이라고 넌지시 옆구리를 파고 든다 가치를 모르는 삶이 너무 많기에 하찮은 존재들이 오히려 나를 구축한다 나로서는 그리 생각하면 안 되지만 고마운 일이었다 대충 잘 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라고 일출암은 지적한다. ….. 일출암을 기준으로 해와 달의 길을 되짚어본다. 장기천은 그 좁은 수량에 감당하지 못할 역할을 거뜬히 수행하는데, 의미는 부여함으로 가치를 획득한다. 늘 갈숲 바람이 적당하다. 일출암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고고해서 스스로 빛난다. 육당 최남선이 동해십경의 하나로 명명한 것은 탁월한 식견의 결과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인생은 관광이 아니라 여행이 되어야 한다. 한때 불려지고 마는 유행가가 되면 안 된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11-05

감천마을, 읽다

부산을 찾았다. 부산문인협회가 주관한 시화전에 전국의 문인협회에서 작품을 보내고 참석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경주문협에서 보낸 시화가 전시실 입구에 걸려있었다. 늘 보던 사람들처럼 친근하게 다가온 부산 문협사람들의 감성에 마음 또한 달달해졌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시화전 공간은 가득 찼고 식순이 끝났다. 부산문협이 계획한 부산투어가 시작되었다. 오년 전 소문으로 찾았던 감천마을이 스케줄에 있어서 변화를 볼 좋은 기회를 갖게 되어 마음이 들떴다. 감천 문화 마을의 동남쪽에는 천마산이 있고, 북동쪽에는 아미산과 연결되는 아미 고개가 있다고 한다. 아미 고개를 지나면 화장골로 유명했던 아미동 골짜기로 이어진다는 설명을 들었다. 남쪽에는 감천항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 구덕산이 솟아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지형이 그렇듯 산을 배경으로 도시가 형성되는데 감천마을은 어찌보면 산을 개간해 산의 아래에서 위로 아니면 위에서 아래로 마을이 수평과 수직을 이룬 큰 마을이다. 감천 문화 마을은 산기슭을 따라 밀집한 슬라브의 작은 집과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저소득층 밀집 지역이다. 2009년 예술 창작 단체인 ‘아트팩토리인다 대포’ 주도로 문화체육관광부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로 마을 곳곳에 조형물 10여 점을 설치하였다. 그들이 참여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마을 곳곳에 공공 미술 프로젝트로 인해 미관 개선 사업이 이루어졌으며 ‘부산의 마추픽추’로 이탈리아의 ‘친퀘테레’를 닮은 마을, 또는 성냥갑 같은 집들이 레고를 쌓은 것 같다하여 ‘레고 마을’이라고도 불리고 있다니 사람의 힘이, 노력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또한 문화체육관광부의 ‘2010 콘텐츠 융합형 관광 협력 사업’에 선정돼 문화 예술촌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고 여러 곳이 새로운 색으로 의미를 둔 계획이 변화를 주었다. 마을의 빈집을 예술 창작실 혹은 갤러리로 개조하거나 북카페, 식당, 민박집 등으로 만들고, 마을 공터와 옥상을 생태 정원으로 바꾸는 등 주민 생활환경 개선 사업이 추진되었다. 현재 이 지역에도 기존의 동네 사람들이 살고 있어 편의시설과 일상이 이루어진다. 낯선 사람들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는 일도 있을 것이고 이익을 추구하며 그것이 번잡한 일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련만 찾아온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고 기웃거린다. 들어가 만지고 사기도 한다. 지역민에게 이익이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집 아래 집이 있고 또 그 아래 집이 있는 달동네라고 불리던 곳이지만 현재 보이는 대부분의 공간은 판매소가 되었다. 무엇인지를 꺼내놓고 상업을 시작한 곳이 살림살이만 하는 집들에 비해 무지 많다는 것이고 사람들의 눈길에 붙잡힌 곳은 사람들로 붐빈다. 색색의 건물과 지붕이 사람과 무관하게 커다란 도화지에 유채색을 입힌 화려한 인상을 주는 공간이 언제부터인가 기존의 사람들을 살리는 공간이 되었다. 감천마을은 1950년대 6·25 전쟁 피난민과 태극도 신도들이 모여 산비탈에 집단으로 형성된 마을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태극도 마을’로 불렸으나 2009년과 2010년 미로미로 골목길 프로젝트와 같은 공공 미술 사업을 통해 현재와 같은 ‘감천 문화마을’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계단식으로 이어진 집들과 미로 같은 골목길이 특징이며, 작은 소품 하나에도 색다르게 인식하게 되는 사람들로 인해 사람이 범람하는 공간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사람의 물결 속에서 함께 섞여 앞으로 나아갔다. 오년은 사람과 배경을 바꿔놓기에 충분하다. 어린 왕자 캐릭터가 귀엽다. 그곁에서 인증 샷을 찍기 위해 즐비하게 줄을 선 젊은이들을 본다. 한 장의 추억사진을 찍는 포토 존이 되었고 지붕은 컬러로 덧칠되어 있고 곳곳이 간식거리로 가득하다.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온 곳이라고 적힌 작은 가게가 보이고 외국인이 좋아할 음식들이 가득하다. 구 할이 외국인이다. 넘실되는 이방인 속에 나도 이방인처럼 걸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 사람이고 사람이 만든 새로운 공간이 또한 사람으로 가득하다. 단체 사진을 몇 컷 찍고 돌아서 나오며 그곳에 꽃이 피어 있듯이 낡은 건물들이 덧칠을 하고 다시 사람 사는 공간이 되어 우뚝 솟아 있었다. 추억 사진 한 장이 웃는다. /배문경 수필가

2025-11-05

공존인가 공멸인가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상호확증파괴), GPU(Graphics Processing Unit·그래픽처리장치), AV(Auronomous Vehicles·자율주행자동차). 서로 다른 표현이지만, 이들 셋은 오늘 인류가 서 있는 좌표를 가리킨다. 상호확증파괴는 냉전이 자칫 서로 확실히 멸망시킬 수 있음을 뜻했고, 그래픽처리장치는 인공지능 혁명의 심장을 움직이는 반도체를 지칭하며, 자율주행은 인공지능이 물리적 이동 세계에 스스로 개입하는 첫 신호다. 셋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간 문명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실행하고 움직이는 기계’와 공존해야 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인공지능 AI의 시대가 열렸다. NVIDIA 창립자 젠슨황은 최근 ‘대한민국이 AI시대를 열어갈 나라’라고 치켜세웠다. 그 시선에는 두 가지 시사점이 있다. 첫째, 한국은 초고속 네트워크와 반도체 인프라, 그리고 교육열이 결합된 기술기반 성장생태계를 갖고 있다. 둘째, AI를 둘러싼 사회적 흥미와 논쟁, 관심 수준과 유발 동기가 활발하다는 점이다. 과학과 기술뿐 아니라 철학과 윤리의 언어로 AI를 적극적으로 논하는 토양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국을 ‘AI 사용자’를 넘어 ‘AI문명의 설계자’로 여긴다는 의미다. 기술의 지평은 늘 그림자를 동반한다. 계산하고 사고하는 속도는 인간의 능력을 수천수만 배 앞지르겠지만, 빠름이 곧 출중한 지혜와 궁극의 효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AI는 논리적이고 효율적이며 냉정하다. 효율의 논리는 인간의 감정과 공감적 배려를 배제한다. 전쟁터에서 효율은 곧 ‘선제 공격’의 합리성이다. 냉전의 상호확증파괴가 핵무기 억제를 통한 공포의 균형을 유지했다면, AI시대의 MAD는 알고리즘이 서로를 감시하며 자동보복할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전 세계 군사 강국들은 인공지능이 탑재된 방어시스템을 실전배치 중이다. 레이더 감지, 목표식별, 요격경로 계산까지 대부분이 자율적 루틴으로 돌아간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의 사고와 판단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입력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곧 존재 이유인 AI에게 ‘멈춤’이라는 개념은 없다. 두 AI 체계들이 서로를 위협으로 인식하면서 반응한다면, 인간의 의도나 공존의지와는 무관한 ‘기계 간 상호확증파괴’로 번질 수 밖에 없다. 기술은 ‘결정의 속도’를 다툰다. 자율주행자동차가 신호등의 오작동을 0.01초만 늦게 인식해도 참사가 벌어지듯, AI의 순간적 오판은 핵 버튼보다 빠르게 인류의 안전망을 무너뜨릴 터이다. AI의 자율성은 편리함의 상징이지만, 자율이 윤리성을 대체하고 나면 모두는 ‘공포의 균형’ 속으로 빠져든다. 젠슨황이 기대한 ‘AI 여명의 국가’라는 표현은 한국이 기술적 능력뿐 아니라 인류적 성찰의 책임과 윤리성을 함께 짊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AI는 현대인간이 만든 거울이다. 거울 속에 탐욕과 경쟁을 투사하면, AI는 냉정한 방식으로 이들을 증폭시킬 것이다. 공존과 평화의 알고리즘을 심는다면, AI는 인류의 새로운 동반자가 되지 않겠나. 인류는 이미 MAD의 공포를 이겨낸 기억이 있다.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윤리의 진화를 장착해야 한다. 인류는 AI가 공멸이 아닌 공존을 가져오도록 기대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1-05

정부와 국회는 철강산업 지원에 총력 쏟아라

철강산업이 생존 위기에 직면하자 국내 3대 철강도시와 국회, 노동계, 업계 전반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정부가 4일 철강 수출기업 금융지원(5700억원 규모)을 포함한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을 발표했지만, 공급축소 등 업계의 구조조정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동안 철강업계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산업용 전기요금 인하조치도 빠졌다. 국내 조강 생산의 93%를 차지하는 3대(포항, 광양, 당진) 도시는 지난 3일 단체장 긴급 영상 회의를 열고 범정부 차원의 즉각적인 지원조치를 요구하는 건의문을 발표했다. 이강덕 포항시장을 비롯한 단체장들은 한·미 간 관세 협상이 타결됐지만 한국산 철강은 여전히 50%의 고율 관세가 유지되는 상황에 강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 협상과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 ‘K-스틸법’ 조속 제정 등을 건의했다. 민주당 어기구(당진) 의원과 국민의힘 이상휘(포항남·울릉)·김정재(포항 북)의원, 한국노총, 포스코그룹 노조연대, 전국금속노련도 4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K-스틸법의 조속한 입법을 촉구했다. K-스틸법은 철강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탄소중립 전환과 공급망 재편에 따른 산업 경쟁력 강화를 지원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철강업계의 최대 현안은 관세인하다. 우리나라 철강업계는 지난 6월 미국 안보의 핵심 품목으로 묶여 50%의 고관세율이 적용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대 수출국인 유럽연합(EU)도 역내 철강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두 배 인상했다. 이로 인해 우리 철강업계는 고율의 관세에다 구조적 수요 부진, 중국산 저가 수입재 범람, 탄소중립 압력 등으로 전방위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 이러한 위기에도 정부 대응은 소극적이다. 유력한 돌파구 중 하나가 K-스틸법인데 국회마저 이 법안처리를 뭉개고 있다. 국가 산업경쟁력의 토대를 이루는 철강산업 지원에 정부와 국회가 왜 이처럼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지 납득할 수 없다.

2025-11-05

李 대통령 지방우대···실효적 성과로 이어져야

역대 정부마다 균형발전을 국정과제로 삼았지만 성과는 제로다. 이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인구 구성비 과정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수도권 면적은 국토 면적의 12%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수도권 인구는 1960년 경제 성장기부터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다. 2000년을 고비로 인구의 50%가 넘는 사람들이 수도권에 산다. 국가 국토균형발전 정책의 사실상 실패를 뜻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6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수도권 집중 완화와 균형발전을 위해 지방우대 재정원칙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수도권에서 거리가 멀수록 더 두텁게 지원한다는 원칙에 따라 아동 수당 등 7개 재정사업을 비수도권 지역에서 더 많이 지원받을 수 있도록 설계하겠다고 했다. 또 “앞으로 재정이 수반되는 국가사업에는 지방 우대정책을 지속 확대할 것”도 약속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국가 균형발전과 관련한 언급을 자주했다. “균형발전은 국가 생존전략”이며 “지방은 배려가 아닌 필수”라는 표현을 썼다. 이번 지방우대 재정원칙도 지난 8월 전국시도지사 간담회서 밝힌 내용을 시정연설에서 다시 확인한 것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간의 격차가 커진 우리나라는 지금 과밀과 소멸이란 상반된 과제를 두고 고민에 빠져 있다. 수도권에는 인구가 집중 쏠리면서 집값 폭등, 교통 혼잡, 공해 등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반면 지방은 청년들이 떠나면서 노령화가 확대되고 텅텅 비어가는 도시 슬럼화를 걱정한다. 한국고용정보원에 의하면 전국 시군구 가운데 100군데가 넘는 곳이 인구소멸지역으로 조사됐고, 그 중 90%이상이 지방소재 시군구다. 이들 도시는 젊은층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면서 초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된 나라는 없다. OECD 국가 중 인구밀도 1위다. 이 대통령의 지방우대 재정원칙이 수도권 일극체제 완화와 지방소멸을 막는 국가균형발전 정책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대통령의 강한 의지를 실어 실효적 성과를 내길 바란다.

2025-11-05

‘선 넘지 말기’

몇 년째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이 제법 있다. 처음 유튜브에 눈 떴을 때는 지식과 역사 채널을 골라 봤다. 너무 현학적이거나 편파적이고 흥미 본위의 채널이 성향상 맞지 않아 두어 채널만 남기고 빠져나왔다. 대신 어쩌다 보게 되면서 하나둘 늘어난 것이 국제결혼 가족들의 일상 채널이었다. 미국 남성과 한국 여성이 결혼하여 미국 텍사스의 삶을 보여 주는 ‘올리버쌤’은 구독자가 226만이나 되는 참 건강한 채널이다. 미국과 한국의 문화나 제도, 교육방식 등을 비교하기도 한다. 두 딸을 키우면서 집에서는 한국어만 쓰는 부부는 종종 한국에 와서 처가식구들과 한달살이를 한다. 그들은 강아지도 진돗개를 키운다. ‘소피아패밀리’는 그리스 여성과 한국 남성이 결혼하여 한국에서 사람 사는 냄새 풍기며 알콩달콩 사는 일상을 유쾌하게 보여준다. 한국 남편은 커다란 웃음소리가 정겹고, 아름다운 아내는 제법 한국식 농담을 받아넘긴다. 딸 하나에 두 아들이 있는데, 최근 넷째 아이를 가져 구독자들에게서 애국자로 칭송받고 있다. ‘한국 사는 따냐’는 우크라이나 여성이 착한 남편, 너그럽고 이해심 많고 유복한 시댁 식구들의 지지로 아들 하나 낳아 키우며, 신나는 한국살이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처음 구독 시작했을 때는 채 5만이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40만 가까이 구독자가 늘었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쌍둥이 언니가 종종 실감나는 전쟁 상황을 보여 주기도 한다. 지금은 갓 돌 지난 아들 키우는 재미와 우크라이나에서 온 친정엄마와 대부의 먹방 영상이 많다. 몇 개월 전부터 구독 시작한 ‘태국박서방 TV’는 태국 부인과 결혼한 한국 남성의 태국살이 채널이다. 처음 접했을 땐 3만 정도였던 구독자가 그새 10만이 넘어 실버버튼을 받더니 지금은 15만이 훌쩍 넘었다. 태국의 시골에 살면서 허름했던 처갓집을 새로 짓고 가전제품을 하나씩 들여주는 영상이 몇 달 계속되는 사이에 폭발적으로 구독자가 많이 는 것 같았다. 최근에는 인근의 초등학교에 에어컨을 기증하고 설치하여 주는 영상을 보내주더니, 지난주에는 이웃과 함께 김장을 하고 수육을 삶아 나누어 먹으며 훈훈하고 따뜻한 한국 문화를 전파하기도 했다. 일상 유튜브 채널이라도 민낯의 일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진 않는다. 컨셉을 정해 편집을 거쳐 정제되어 나온 콘텐츠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영상 이면의 삶이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이 들어 신뢰가 간다. 그러므로 부담없이, 미소지으며 보게 되는 것이다. 문득 ‘선 넘지 말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선 넘지 말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넘지 말아야 할 물리적 심리적 경계를 지키는 것으로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상대가 불편해하는 행동은 자제하는 매우 이성적이되 이상적인 태도이자 특히 부부와 같은 친밀한 관계일수록 더욱 요구되는 태도가 되겠다. 국제 커플들은 문화와 언어 차이 덕분에 오히려 ‘선 넘지 말기’가 가능하게 되었고, 이들 부부와 그 주변의 가족들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11-05

몸의 구조가 무너지면 몸 전체가 아프다

사람의 몸은 뼈와 근육이 단순히 연결된 형태가 아니라 정교하게 짜인 균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균형은 마치 건물의 기둥과 같아서 어느 한쪽이라도 기울면 다른 부위까지 영향을 주며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허리가 틀어지면 어깨가 뻣뻣해지고 골반이 기울면 무릎이 아프며 목의 긴장이 심해지면 두통이나 어지럼 불면이 따라온다. 결국 통증이란 아픈 곳의 문제가 아니라 몸 전체 구조의 불균형이 만든 결과물이다. 현대인은 대부분 하루 종일 앉아서 생활한다. 컴퓨터, 스마트폰, 운전 등의 구부정한 자세가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생활패턴은 근육의 균형을 깨뜨리고 특정 근육은 계속 긴장된 채로 굳어버리며 반대로 다른 근육은 점점 약해져 제 기능을 잃는다. 시간이 지나면 뼈의 정렬이 틀어지고 관절은 비정상적인 압력을 받아 근막이 서로 끌어당겨 몸이 틀어지고 전신의 통증이 시작된다. 특히 목·어깨·허리·골반은 몸의 중심축으로 이 네 부위가 무너지면 나머지 근육들이 보상작용을 하며 몸 전체가 뒤틀린다. 통증의 원인은 약해진 근육과 과도하게 긴장된 근육이 공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허리가 아픈 사람은 허리 근육이 강해서가 아니라 복부나 엉덩이 근육이 약해 허리만 혼자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허리를 아무리 마사지하거나 약을 먹어도 구조가 바르지 않으면 근본적인 회복은 어렵다. 몸을 바로 세우려면 단순히 근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근육의 길이와 긴장도를 함께 조절하는 운동과 스트레칭이 병행되어야 한다. 근육이 뭉치면 기혈이 통하지 못하고 통하지 않으면 통증이 생긴다. 침 치료나 약침 추나치료는 바로 이 막힌 길을 뚫어 기혈 순환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매선요법은 근막층에 특수실을 넣어 약해진 근육을 지속적으로 자극해 시간이 지나면서 근육의 긴장과 구조를 보강해준다. 초음파 가이딩 약침은 손상된 조직 부위에 정확히 약침을 주입하여 염증을 가라앉히고 회복과 재생을 촉진한다. 이런 치료들은 단순히 통증 완화에 그치지 않고 몸의 구조적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몸의 구조가 바로 서면 통증은 저절로 줄어든다. 하지만 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상 속의 습관 교정이 필수적이다. 의자에 앉을 때 허리를 곧게 세우고 스마트폰은 눈높이에 맞추며 30분 이상 같은 자세로 있지 않는다. 하루 중 짧은 시간이라도 어깨, 허리, 골반을 늘려주는 스트레칭을 하면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혈류가 개선된다. 근육 강화 운동은 주 2~3회 꾸준히 특히 복부·허리·엉덩이의 코어 근육을 중심으로 하면 몸의 안정성이 크게 향상된다. 이와 함께 충분한 수면과 안정된 호흡도 중요하다. 몸의 구조가 틀어지면 자율신경 역시 불안정해지고 그 결과 피로, 불면, 불안, 소화장애 등이 따라온다. 통증을 줄이는 것은 곧 자율신경의 균형을 회복하는 일과도 같다. 한방치료는 근육·혈류·신경의 흐름을 함께 조절하기 때문에 구조적 안정과 심리적 안정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결국 통증은 단순히 근육이 아픈 게 아니라 몸 전체가 보내는 구조의 경고음이다. 구조를 바로 세우면 통증은 줄어들고 기혈이 순환되고 몸은 본래의 리듬과 에너지를 되찾는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11-05

‘영일만대로, 이제 고속국도로 격상돼야 할 시점이 됐다‘

오는 11월 7일 포항~영덕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포항의 교통 지도가 새롭게 그려진다. 부산·울산·대구 등 남부 산업벨트의 교통망이 포항을 거쳐 영덕, 강릉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동해안을 따라 U자형으로 연결되는 구조인 국가 도로망도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접어드는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영일만대교다. 하지만 이 사업은 현재 노선조차 확정치 못해 언제 완공될지도 불투명하다. 그때까지는 영일만대교의 역할을 ‘영일만대로’가 해야 한다. 포항 동해면에서 영일만항까지 가로지르는 이 도로는 울산과 부산·영덕 방향으로 가거나 대구 방향으로 진출입할 때 이용해야 해 U자형 도로 체계에서는 중심축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지금까지 고속도로 수준의 차량 흐름을 감당해 왔다. 그러나 영일만대로의 관리 체계와 시설 수준은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동떨어져 있다. 아직 일반국지도와 시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영덕~포항 간 고속도로 개통 이후 영일만대로에는 교통량과 물류 수요의 폭증이 예상되나 과연 이를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벌써부터 나온다. 교통분야 전문가들은 이제 영일만대로는 ‘고속국도’로 승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더 이상 논의가 아닌 실행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고속도로 처럼 사용되면서도 관리체계는 시·도 수준에 묶어 놓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포항시는 그동안 여러 차례 이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영일만대로의 고속국도 승격을 정부에 꾸준히 요청하며 협의했음에도 아직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런 관계로 교통안전, 도로 포장, 조명, 방음벽, 제설 등 유지관리 전반에서 한계가 있다고 토로한다. 영일만대로의 모순은 이원화된 관리 체계에서도 드러난다. 이 도로는 동해면에서 흥해읍 소티재까지는 국토교통부 산하 국토관리청이, 소티재에서 영일만항 구간은 포항시가 각각 관리하고 있다. 도로 하나에 두 기관이 걸쳐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예산 배정부터 공사 발주, 시설물 교체에 이르기까지 행정 절차는 복잡하고 민원 처리 속도는 느리다. 실제로 일부 구간의 도로 포장 불균형과 방음벽 미설치는 ‘관리청 간의 협의 부재’라는 이유로 수년째 방치돼 있다. 도로가 하나의 체계로 운영되지 않은 결과는 책임 불분명과도 연결되고 이용자들은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단일 관리기관을 통한 통합 운영이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일만대로가 한국도로공사에서 관리하는 고속국도로 전환돼 통합관리 될 경우 예산확보 등이 원활해져 교통 체계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유지보수 기준은 고속도로 수준으로 상향되고, 사고 대응은 물론 도로정보 서비스 등이 통합되면서 대시민 서비스 개선이 예상된다. 나아가 도심과 항만, 공단을 잇는 물류 흐름이 빨라져 포항 산업단지의 경쟁력을 확보 할 수 있다. 또 영일만항을 기점으로 해상 물류와 육상 운송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포항이 환동해 물류 중심지로의 기능과 역할을 더 다질 수도 있다. 포항은 포항~영덕 간 고속도로 개통이라는 환경 변화가 생긴 만큼 교통체계를 다시 다듬을 때가 됐다. 특히 일반국지도인 영일만대로의 고속국도 승격은 매우 시급하다. 영일만대교의 역할을 영일만대로가 할 것이기 때문에 논리도 충분하다. 포항시와 지역 국회의원, 지방의회가 한목소리로 영일만대로의 고속국도 승격과 관리 일원화를 정부에 강력히 요청해야 한다. 정부도 이 사안이 단순히 지방도로의 국도 승격 문제가 아니라 환동해 경제권 확장과 국토 균형발전 전략의 핵심 인프라 구축 문제로 봐야 한다. /임창희 선임기자 lch8601@kbmaeil.com

2025-11-05

한반도 호랑이 형상론과 포항 호미곶

포항관광 1번지, 호미곶의 호미(虎尾)는 ‘호랑이 꼬리’라는 뜻으로 한반도 지도가 호랑이 형상이며,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 부분에 해당한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한반도 지도의 형상과 관련된 논의가 시작된 것은 구한말 한일강제병합을 앞둔 시기이다. 일제는 국권 침탈을 앞두고 한반도에 관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는데,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1900년대 초, 한반도의 지형을 연구하여 한반도가 토끼 형상이라고 주장했다. 토끼 형상론은 우리 민족의 나약함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일제의 식민정책과 어울리며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토끼 모양이라 할 경우 지금의 호미곶은 ‘토끼 꼬리’가 되고 만다. 한반도가 호랑이를 닮았다는 호랑이 형상론은 육당 최남선이 토끼 형상론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한 것이다. 1908년 11월, 최남선이 만든 ‘소년’지 창간호에 등장하는 삽화가 바로 한반도 호랑이 지도인데, 최남선은 ;대한의 외위형체(外圍形體)'란 글을 통해 “맹호가 발을 들고 대륙을 향하여 할퀴며 달려드는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호랑이 형상론은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고,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像圖)’ 등 한반도 지도가 다양한 형태의 호랑이 모습으로 그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포항 사람들이 지금의 호미곶 일대를 한반도 지도상 ‘호랑이 꼬리’와 연관 짓게 된 계기는 바로 이 ‘근역강산맹호기상도’와 관계가 깊다. 이 그림을 보면 지금의 호미곶 부근에서 시작된 호랑이의 꼬리가 남해안을 휘감은 뒤 끝부분이 서해안에 닿아 있다. 이 그림을 통해 포항 지역민들은 이곳이 ‘토끼 꼬리’가 아닌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근역강산맹호기상도’(고려대 소장)는 외견상 꼬리가 시작되는 영일만 일대가 밋밋하게 처리되었고, 꼬리의 끝부분이 서해안 변산반도에 위치함으로써 호미곶이 ‘호랑이의 꼬리’라는 이미지가 약해 보이는 문제가 있었다. 호랑이의 꼬리가 호미곶에서 시작되고, 끝 부분도 호미곶에 놓이는 모양의 지도라야 ‘호랑이 꼬리’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생길 것 같았다. 이런 고민을 하고 해결방안을 찾아 실행에 옮긴 사람이 바로 서상은 전 영일군수였다. 호미곶이 고향인 서상은은 1988년에 성기열 화백에게 호랑이 꼬리 끝부분이 장기갑(지금의 호미곶)에 오도록 그려 달라고 주문했다. 서상은의 주문대로 성기열은 ‘근역강산맹호기상도’라는 제목의 한반도 호랑이 지도 그림 두 점을 그렸다. 서상은은 이 그림을 받아 한 점은 장기갑등대박물관(현 국립등대박물관)에, 다른 한 점은 대보면사무소(현 호미곶면행정복지센터)에 기증했다. 이 두 그림은 꼬리가 호미곶에서 출발하여 남해안을 휘감고, 전라도로 올라와서는 다시 경상도 쪽으로 꺾여 끝부분이 호미곶에 놓이는, 그러기에 꼬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갖게 됨으로써 호미곶은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이 그림을 앞세워 관광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포항시에서는 성기열 화백의 ‘근역강산맹호기상도’ 중 등대박물관 소장 그림을 호미곶 관광지를 홍보하는 자료로 활용해 왔다. 2000년대 들어 호미곶광장 바다 쪽에 세워진 한반도 호랑이 형상 조형물, 호미곶광장 가로등 장식, 새천년기념관 내의 ‘호미곶 지명 유래’ 설명판, 호미곶 관광 안내 리플릿이 대표적인 사례다. 1990년대 들어와 서상은은 호미곶이 우리 뇌리 속에 박혀 있는 ‘토끼 꼬리’가 아닌 ‘호랑이 꼬리’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몇 가지 사업을 전개했는데, 나무가 없는 호미곶에 나무를 심자는 호미수(虎尾樹) 운동, 호미예술제 개최, 호미곶 지명석 건립 등이 그 핵심이다. 서상은의 이러한 노력은 20년 만에 결실을 맺어 2002년에 장기곶이 호미곶으로, 장기곶등대가 호미곶등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명 변경의 마지막 퍼즐인 ‘대보면→호미곶면’은 2010년에 이루어졌다. 호미(虎尾)라는 지명은 호미곶 가까이에 위치한 범 모양의 산등성이인 ‘범디미’를 한자식으로 표기한 말이다. ‘범디미’가 ‘호미등’으로 바뀐 데는 한말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생긴 민족의식과 관련이 깊다. 즉 20세기에 들어와 최남선의 ‘한반도 호랑이 형상론’ 영향을 받아 지역민들에게 이곳이 ‘호랑이 꼬리’부분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그러면서 기존의 지명인 범디미를 한자식으로 표기하여 호미등(虎尾嶝)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호미곶은 호미등에서 유래한 말이다. 20세기 초 일본의 한반도 침탈이 본격화될 무렵, 한반도 지도 모양이 토끼 형상이냐 호랑이 형상이냐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100년이 지난 21세기에 와서야 일단락되었다. 이로써 우리의 뇌리 속에서 한반도는 호랑이 형상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고,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虎尾)로 각인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지금 호미곶은 포항 12경의 제1경(호미곶 일출)으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포항의 ‘핫 플레이스’가 된 것이다. /박창원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5-11-04

관계의 결을 돌아보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결이 있다. 그것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만들어진다. 어떤 관계의 결은 매끄럽고 단단하게 이어지지만 어떤 결은 쉽게 틀어지고 거칠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 결의 질감을 세심히 느끼며 살아왔다. 마음의 거리를 재고 온도를 가늠하며 서로의 결이 상하지 않도록 손끝으로 어루만지듯 관계를 다듬어왔다. 나에게 관계란 늘 섬세한 조율의 예술이었다. 그런데 최근, 그 섬세한 균형이 무너졌다. 내가 서로를 알게 한 두 사람이 있었다. 나는 각각과 다른 방식으로 신뢰를 쌓아왔고 우리 세 사람의 관계가 유연하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느 날 그 중 한 사람이 나와 의논 없이 다른 한 사람에게 과도한 선물을 건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일 아닌 듯 넘기려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알 수 없는 피로감에 잠식되었다. 마치 조용히 흘러가던 물 위에 돌멩이가 던져진 듯 파문이 일어났고 그 진동은 결국 나의 마음에까지 닿았다. 나는 언제나 ‘관계의 균형’을 지키는 사람이라 자부했다. 주어야 할 만큼 주고 감사를 표현해야 할 만큼 하며 감정의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규율이 통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돌출된 행동과 미성숙한 흐름이 관계의 결을 어긋나게 만들었고 나는 그 틈을 매만지려 애쓰다가 점점 지쳐갔다. 마치 세 사람의 관계를 억지로 맞추려는 장인처럼 나는 관계의 결 사이를 계속 문질렀다. 그러나 아무리 다듬어도 이미 나버린 미세한 금은 메우기가 어려웠다.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조율자’의 위치보다는 나의 기준을 자꾸 흐리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만의 잣대가 있는데도 상대의 방식을 맞춰주려 했다. 무게가 기울면 내가 더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하면 관계가 원만해질 줄 알았지만 그것은 조율이 아니라 나의 기준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그 흔들림은 관계를 정리하고 싶은 욕구로 자꾸 흘러갔다. 관계는 늘 주고받음의 균형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 균형이 무너질 때 우리는 종종 자신을 잃는다.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상황이 어긋나지 않게, 모든 흐름이 부드럽게 이어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작 나는 자 자신에게 불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 감정의 결은 뒤로 밀려나고 타인의 기준이 나를 차지했다. 겉으로는 평화로웠지만 마음 한켠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피로가 쌓여갔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라기보다는 나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피로였다. 관계의 온도를 맞춘다는 것은 어쩌면 오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의 체온을 가지 존재이고 그 온도를 완전히 같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온도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 채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일일 것이다. 단순한 진리를 최근에야 되새기게 된다. 가까워질수록 명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리가 자신을 지키는 최소한의 경계라는 것을. 이제 나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맞출까’보다 ‘어디까지 지킬까’를 먼저 생각해본다. 관계의 평온을 위해 무리하게 마음을 맞추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의 호의나 방식이 내 기준과 다르다면 그것을 불편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흔한 말이긴 하지만 다름으로 인정하려 한다. 관계의 진정한 성숙은 조율이 아니라 기준을 지키며 타인을 존중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밀착된 관계는 숨통을 죄고 너무 멀어진 관계는 온기를 잃는다. 그 중간 어딘가 결이 맞되 엇갈리지 않는 그 지점을 찾는 일, 그것이 성숙한 관계의 기술일 것이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인간관계는 난로 같은 거리가 가장 알맞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거리를 두는 용기가 이 가을, 나에게는 필요해 보인다. 삶은 여전히 관계의 결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결들을 억지로 다듬지 않는다. 어긋난 결은 어긋난 대로 두고 그 틈새에 바람이 스며드는 것을 허락한다. 그 바람 속에서 나는 더 단단해지고 더 나다워진다. 관계의 피로는 결국 나 자신에게 돌아오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내 결을 다시 세워가는 일이 남은 인생의 길을 걸어가기 전, 관계의 결을 다시 배워야 하는 삶의 태도일 것이다. /김경아 작가

2025-11-04

대세르비아주의 전사 블랙핸드

19세기 말, 세르비아의 왕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는 콜걸 출신과 결혼하면서, 이제 왕비의 친인척까지 왕궁을 들쑤시고 다녔다. 이를 보고만 있을 세르비아인들이 아니었다. 1903년 청년 장교와 군인 120여 명이 왕궁으로 몰려가 왕비와 그 일족들은 물론 왕까지 잡아 죽이고 말았다. 왕 알렉산다르와 왕비 드라가를 5층 건물 창문 밖으로 던져 살해한 후, 오브레노비치 왕가 일가친척을 도륙했다. 이로서 오브레노비치 왕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열세 살 철없던 시절에 왕위에 올랐던 알렉산다르는 어머니의 간섭과 늙은 아내의 철없는 행동으로 서둘러 지옥행 마차를 타고 만 것이다. 뜻밖에 세르비아 국민이 환호하면서 어떤 시각에서 보면 군부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는 상황이 벌어졌다. 밀로시 왕가 몰락은 블랙조지, 즉 카라조르지예 가문의 등장을 뜻했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인물이 블랙조지의 손자이자, 카라조르지예 셋째 아들 페타르 카라조르지예(재임 1903~1918)다. 그는 프랑스에서 긴 세월 망명생활을 하였으며, 1870년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농민항쟁 때 참여해 산전수전을 겪기도 했다. 세르비아인 가슴에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추앙받고 있던 그였지만, 60세 가까이 돼서야 세르비아 땅으로 돌아와 45년 만에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1, 2차 발칸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영토 확장에 이어, 대세르비아주의가 기지개를 펼 수 있는 판을 깔았다. 20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일어났던 두 차례 발칸전쟁으로 세르비아 국토가 넓어지게 되면서 자신감이 붙는다. 급하게 삼킨 음식이 탈나는 법, 입헌국주국 민간정치기구가 급조되면서 급진당이 의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그 중 지도자로 급부상한 인물이 니콜라스 파시치다. 훗날 세르비아 현대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대세르비아주의를 주입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세르비아인 가슴을 요동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블랙조지 가문을 중심으로 세르비아가 새롭게 일어서야 한다며, 당시 발칸반도에 대세로 급부상하던 유고슬라비즘에서 대세르비아주의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블랙조지가문이란 기실 오스만터키제국에 투쟁할 당시 농민군 지도자가 세르비아 왕족으로 순식간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는 것은 오랜 세월 억압된 삶을 살았던 민족의 가문과 인력부재라는 슬픈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왕위에 오른 페타르는 이미 늙어버렸다. 페타르 1세와는 반대로 쿠데타의 주역 군인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거듭났다. 왕궁으로 난입한 군부 중 지도자격인 인물이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이었다. 그는 1901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기습점령 한 것에 대해 불만이었다. 대세르비아주의 완성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빠트리고는 완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닫힌 민족주의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차곡차곡 실행에 옮겼다. 민병대를 조직해 무기를 쥐어주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파견했다. 주요 목표는 오스트리아 고위관료 암살과 테러였다. 충성을 다하는 예하 장교들을 포섭해 정부 위에 군림하는 군부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군부에 의해 들어선 민간정부의 힘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오스트리아에 굴욕적인 행태인 정부를 향한 세르비아인 불만이 증폭했다. 드디어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은 세르비아에 조직적 폭력군단 ‘블랙 핸드(Black Hand)’를 창시한다. 우리나라말로 직역하면 ‘검은손’이며, 한자로는 ‘흑수단(黑手團)’이다. 즉 대세르비아주의를 지상과제로 내건 군부 내 극우민족주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모든 땅은 통일.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이 둘을 합치면 ‘세르비아인들이 살아가는 그 어떤 땅이라도 죽음을 불사하고 손아귀에 넣어라’란 뜻이다. 블랙핸드 ‘크루나 루카!(Crna Ruka)’의 살기 띤 구호가 세르비아인 가슴에 요동쳤다. 세르비아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내 땅에서 우리끼리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에 누가 반대를 할까만, 다른 나라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세르비아인들에게 무기를 쥐어주며 폭력을 부추기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혁명적 행동을 강행하되 자신들을 반대하는 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적으로 간주하며 제거 대상이 되었다. ‘개인의 욕심은 버려라, 어긴 자는 죽음으로 대가를 치른다’ 등 행동강령도 만들었다. 군인뿐만이 아니라 정치인, 변호사, 외교관을 비롯해 민간인까지 가세해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국민을 대상으로 대세르비아주의를 설파했고, 당위성에 거품을 물었다. 더구나 디미트리예비치가 군부 내 정보를 총괄하는 보안대장으로 영전하면서 날개를 단다. 밀수를 동원한 자금조달로 요인 암살이 본격화되고, 세르비아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으로 거듭 태어났다. 신문까지 발간하면서 세르비아민족주의가 백주대낮에 공개된다. 무엇이든 처음은 미미한 법, 세계가 전운에 휩싸이게 되는 판이 깔리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11-04

인상주의 음악의 거장과 그의 걸작을 감상하는 방법

클로드 아실 드뷔시는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다. 그의 대표곡 ‘Clair de Lune’(달빛)은 이탈리아 베르가모 지방의 춤곡에서 영감을 받아 1890년, 28세의 나이에 작곡된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세 번째 곡으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이 곡의 제목은 프랑스어로 ‘밝은 달’을 뜻하는 ‘Clair’(광명)과 ‘Lune’(달)의 조합에서 비롯되었다. 서정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로 음악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매료되는 이 작품은, 원래 폴 베를렌의 시 ‘달빛’에서 제목을 따온 ‘Promenade Sentimentale’(감성적 산책)이었으나 최종적으로 현재의 이름으로 확정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놀라운 조화를 이룬다. 고흐가 1889년 정신병원에서 창밖 풍경을 3일 만에 완성한 이 작품은 강렬한 붓터치로 고독과 희망을 동시에 담아내며, 소용돌이치는 하늘과 별빛은 드뷔시 곡의 은근한 슬픔과 묘하게 어우러진다. 두 작품은 “아름다움 속에 숨겨진 쓸쓸함”이라는 공통된 정서를 전달한다. 많은 사람들이 드뷔시의 ‘Clair de Lune’을 그저 아름답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곡에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와 같은 슬프고 쓸쓸한 구석이 있다. ‘Clair de Lune’이라는 제목과 곡조 역시 폴 베를렌의 시 ‘달빛’에서 영감을 받았다. 드뷔시는 후기 낭만파에서 인상파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활동하며 인상주의 음악의 시조가 되었다. 인상주의 음악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반발해 전통 화성을 배제하고 자유로운 기법과 형식으로 색채감 있는 모호함을 표현한다. 이는 마치 프랑스 미술을 귀로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고흐는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된다. 그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드뷔시의 ‘Clair de Lune’보다 1년 먼저 제작되었다. 인상주의 미술은 순간적 인상을 중시하며 전통적 형식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한다. 드뷔시는 후기 낭만 작곡가이자 초기 인상주의 음악의 거장으로, 두 예술가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감성을 공유한다. 그런 인상주의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작품으로 평가받는 곡으로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이 있다. 이 곡은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 ‘목신의 오후’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으며, 인상주의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목신’은 그리스 신화의 목축신 판(파우누스)을 가리킨다. 드뷔시는 목신의 욕망과 꿈을 여름 오후의 열기가 떠도는 공기처럼 표현했으며, 전통적 기법을 넘어 온음음계와 5음계를 써 독창적 관현악법으로 색채감 있는 몽환적 분위기를 창출했다. 그는 음악을 오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표현해 청중에게 감각적·시적 경험을 선사했다. 처음에는 드뷔시가 말라르메의 시를 허락 없이 사용한 것에 대해 시인이 불만을 표시했으나, 음악을 직접 들은 후 드뷔시에게 찬사를 보냈다는 일화는 이 곡의 강렬하고 감동적인 매력을 잘 보여준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드뷔시의 혁신적인 음악 세계를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드뷔시의 두 대표작과 고흐의 작품은 서로 다른 매체로 내면세계를 표현하며 상호작용해 깊은 감동을 준다. 이들의 작품을 함께 감상하길 추천한다. /박정은 객원기자

2025-11-04

한국외교의 ‘성공무대’로 부상한 경주박물관

경주 APEC 정상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그리고 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의 한중 정상회담이 열린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다. 해외 정상이 이곳을 방문한 건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처음이다. 이 대통령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 이후 50년 만에 공식적으로 경주박물관을 찾은 한국 수반이 됐다. 경주박물관은 그야말로 ‘신라의 정수’를 간직한 곳이다. 박물관 입구 마당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비롯해 천마총 금관, 가야 기마인물형토기 등 국보만 15점에 이른다. 보물 43점을 포함해 소장 유물이 30만1087점이다. 관람객 수도 올 들어 지난해 전체(135만7552명)를 이미 넘어섰다. 박물관 내 ‘천년미소관’으로 이름 지어진 회담장은 APEC을 맞아 올해 새롭게 지어졌다. 이번에 이곳에서 한미·한중 정상회담이 잇달아 열려 세계 각국의 시청자들은 TV를 통해 원목 느낌을 최대한 살린 천년미소관 내부를 보고 감탄했을 것이다. 천년미소관과 마주 한 자리에는 ‘신라역사관’이 있다. 이곳에선 APEC 정상회의를 기념하는 ‘신라 금관, 권력과 위신’이라는 주제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특별전은 12월 14일까지 열리니만큼 이번 기회에 우리 국민도 교동 금관(5세기 전반)부터 황남대총 북분 금관(5세기 중반), 금관총 금관(5세기 후반), 서봉총·금령총·천마총 금관(이상 6세기 전반)까지 신라 금관 6점을 관람해보길 권한다. 경주박물관을 정상회의 장소로 추천한 분은 이철우 경북도지사다. 이 지사는 “경주박물관은 신라 유물뿐 아니라 당과 서역의 교류 유물까지 전시돼 있어 역사적 상징성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주요국 정상 회담의 최적지로 판단한다”면서 정부에 여러 차례 건의했다. 미중 정상회담은 양 정상의 스케줄 때문에 김해공항에서 열리게 됐지만, 한미·한중 정상회담이 경주박물관에서 개최됨으로써 경북도는 신라천년의 문화를 세계에 홍보하겠다는 당초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됐다. 한미·한중 정상회담은 난항을 겪던 한미 관세협상과 미중 갈등 등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성이 커지던 상황에서 열렸다. 하지만 한미정상회담에서는 극적으로 관세협상에 합의하면서 오래된 숙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했다. 미국과의 ‘안보 패키지’ 합의 역시 곧 문서화가 이뤄질 것으로 보이는 만큼, 한미동맹이 제 궤도에 올랐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동안 중국의 서해 불법 구조물 문제와 한한령 등으로 갈등을 겪었던 중국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도 우리 국민은 조심스럽게 지켜봤다. 다행스럽게도 두 정상은 안정적으로 양국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자는데 공감대를 이뤄 그동안의 알력을 해소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으로선 경주박물관이 한미·한중 정상외교의 획기적인 성과를 이룬 장소로 남게 됐다. 한국의 국격과 문화, 외교 면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한·미·중 정상들의 협상 스토리까지 간직하게 된 경주박물관이 앞으로 국내외 관광객의 필수 방문지가 되길 기대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11-04

TK 공직자, 국비확보 전쟁 준비하고 있나

국회가 내년도 예산안 심사에 착수하면서 대구시와 경북도도 국비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5일 열리는 예결특위의 예산안 공청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부처별 예산심사가 진행된다. 법정 처리 시한인 12월 2일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도 안된다. 이 골든타임에 핵심 예산을 얼마만큼 확보하느냐에 따라 대구·경북(TK) 지역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지난 3일 경북도청에서 열린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예산정책협의회에서 내년도 국비 확보 목표액 달성을 위해 정부 예산안에 미반영 됐거나 추가지원이 필요한 국비 증액을 요청했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이날 제시한 현안 예산들은 하나같이 중요하다. 대구시는 TK신공항 건설의 안정적 추진을 위한 금융비용 국비 보조와 취수원 이전, AI로봇 수도 조성 등을, 경북도는 포스트 APEC 사업과 산불 피해지역 구제, 신공항·영일만항 2포트 프로젝트 등을 건의했다. 이러한 예산을 확보하려면 시·도 공직자들이 사업의 당위성과 시급성을 담은 치밀한 논리로 무장해 예결위원들과 기재부 관계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물론 지역 국회의원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전제돼야 한다. 현재 호남지역 지자체에서는 예산 심사 일정이 확정되자 TF(태스크포스)팀을 서울에 상주시키고 상임위별 예산 확보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995년 지방자치제가 전면 시행되면서 무소속으로 대구시장에 당선된 문희갑 전 시장은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으로 근무할 당시 호남지역 단체장이나 대학총장들이 국비확보를 위해 자신의 집 대문 밖에서 담요 덮어쓰고 밤을 세우며 ‘예산전쟁’을 벌인 얘기를 자주하곤 했다. 예산확보에 치열하지 못한 대구시 공직자들을 겨냥한 내용이었다. 그 당시나 30년이 더 지난 지금이나 이 지역 공직자들의 자세는 크게 바뀐 것 같지 않다. 무슨 현안이든 학연과 지연을 통해 해결하려는 보수적인 ‘꼰대문화’가 잔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TK지역 공직자들이 지금 국비확보를 위해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2025-11-04

미군부대 부지가 시민의 품으로 돌아 왔다

대구시 남구는 캠프헨리, 캠프조지, 캠프워크 등 3개의 미군부대가 도심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면적이 남구 전체 면적의 6.2%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3군데 미군부대 부지가 도심을 점령한 때문에 도시개발이 안 되고 주민들은 재산권을 제한 받아왔다. 대구에서 가장 발전이 더딘 지역으로 낙인이 되기도 했다. 이곳 주민들은 헬기 소음과 환경오염, 교통 불편을 감수하면서 미군부대와 불가피하게 지금도 생활을 같이한다. 물론 미군부대 이전에 대한 주민들의 민원도 많았지만 주한미군, 국방부와 협의해야 하는 등 국가 안보 차원의 절차가 복합적으로 얽혀 민원 수용이 쉽지 않다. 조재구 남구청장이 자신의 임기 중 가장 큰 성과를 꼽으라 하면 미군부대 캠프워크 부지의 일부 토지반환을 말한다. 그만큼 미군부대 이전은 지역주민의 오래된 숙원이다. 조 청장이 말한 캠프워크 일부 반환부지에 대구를 대표하는 도서관이 설립됐다. 대구시의 54번째 공공도서관이지만 시 직영 첫 시립도서관으로 지역 도서관 정책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한다. 연면적 1만5075㎡에 지하1층, 지상 4층 규모 건물이다. 대구학 자료실, 디지털 자료실, 청소년 공간 등 6개 자료실이 구비돼 있고, 전국 최초 광역상호대차 서비스, 북 드라이브 스루 등의 시설도 갖춰져 있다. 대구도서관이 들어선 자리는 캠프워크 동편 활주로와 헬기장 부지의 일부다. 100년만에 캠프워크 담장이 허물어지고 남구 주민이 그토록 기다렸던 장소에 문화 공간이 만들어졌다. 또 미군부대 부지에 막혀 있던 대구 3차 순환도로가 이를 계기로 완전 개통됐다. 미군부대 일부 부지의 반환이지만 대구 시민과 남구 주민이 받는 감개는 무량하다. 도서관이 들어선 부지 옆에 공원까지 만들어지면서 이 일대의 도시 얼굴이 확 달라지게 됐다. 미군부대 주둔이 국가 안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지만 달라진 시대 상황을 반영한 미군부지 활용 방안을 강구해 보는 것도 좋다. 대구도서관은 미군부대 부지를 시민 품으로 되돌린 상징의 건물로 기록될 것이다.

2025-11-04

부끄러운 줄 알아야

국감이 끝나고 또다시 국감 무용론이 고개를 들었다. 지난달 13일부터 시작한 국감은 국민 기억엔 정쟁과 막말, 욕설로 얼룩진 국감이다. 행정부를 견제 감시하는 공적인 기능은 고사하고 싸움으로 일관한 모습들만 기억에 가득히 남았다. 여당을 견제해야 할 야당의 한방도 나오지 않았다. 과거 흔히 발표한 고발성 내용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증인 채택도 여당 입맛대로다. 도대체 국감장인지 나를 위한 정쟁의 장인지 분간키 어려운 장면만이 주권자인 국민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다. 심지어 딸의 결혼식을 국감 기간에 국회에서 치르게 하는 기상천외한 일까지 벌어졌으니 국민들은 아예 안중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3불 3무의 국감이라 부른다. 정책, 예의, 스타 없는 3무와 불통, 불신, 불만으로 가득한 3불 국감이란 말이다. 20여 일 동안 300명의 국회의원들이 국감장을 휘젓고 다니며 요란을 떨었지만 과거 흔하게 등장했던 국감 스타 하나 만들지 못했다. 시민단체는 22대 국감을 역대 최악이라 평가를 했다. 당연하다. 문제는 국감 무용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에도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공자는 진정한 선비가 뭐냐는 제자의 물음에 답했다. “내 행동의 부끄러움을 알고 일을 맡았을 때 군주를 욕되지 않게 하면 진정한 선비”라고 했다. 선비란 지금의 지식인이다. 정치인 스스로가 지식인이라 자부하면 부끄러움부터 알아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3대 국회에서 균형 있고 날카로운 질문으로 국감 스타에 올랐다. 그를 기억한 국민은 15년 뒤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잘못한 것을 반성하며 부끄러움부터 배우는 정치인이 돼야 하지 않을까. /우정구(논설위원)

2025-11-04

정중지와(井中之蛙)가 주는 의미

정중지와(井中之蛙)는 장자(莊子)의 추수(秋水)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물 속에 개구리는 바다를 말할 수 없다. 그는 자기 공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다 본 듯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물벽이 만든 작은 하늘만 보고 사는 존재다. 정중지와는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조직이 혁신을 멈출 때 빠지는 공간, 시간, 지식의 세가지 함정을 보여준다. 첫째는 공간의 한계다. 개구리는 우물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본다. 그에게 하늘은 우물 입구만큼 작다. 우리의 조직도 다르지 않다. 한 공장, 한 부서, 한 시장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순간 변화의 신호가 보이지 않고 시야는 닫힌다. ‘이게 우리 방식이야’라는 말은 곧 우물의 벽이다. 외부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곧 우물의 벽이 된다. 혁신은 그 벽을 넘어 타인의 현장과 세계의 흐름을 직접 보는 데서 시작된다. 둘째는 시간의 한계다. 개구리는 우물 속 현재에 갇혀 산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자신의 경험 속 현재에 갇혀 있다. 과거를 되돌아볼 여유도, 미래를 내다볼 눈도 없다. ‘우리는 예전 방식이 통했으니 지금도 괜찮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변화하는 시대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시간 틀 속에서 멈춰 있는 사고를 상징한다. 하지만 혁신은 과거의 성공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AI시대인 지금, 변화의 속도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새로운 시장과 사회에 한 발 늦으면 멈춤이 있을 뿐이고, 정체는 곧 퇴보한다. 셋째는 지식의 한계다. 개구리가 본 하늘이 전부라 믿듯이,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이 충분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내 지식의 경계 밖에서 움직인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개념, 새로운 사고를 배우려는 자세가 없다면 개인과 조직의 지식은 곧 낡은 벽돌이 된다. 일부 지식, 기술, 혹은 관점을 절대화하는 사람이나 조직은 경쟁 사회에서 멀어져 퇴보한다. 더 넓은 지식과 관점을 배우려 하지 않는 인지적 폐쇄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멈춤이 있을 뿐이다. 정중지와(井中之蛙)는 ‘좁은 시야’를 뜻하지 않는다. ‘공간의 갇힘, 시간의 멈춤, 지식의 닫힘’이라는 한계를 상징한다. 공간(시야의 한계), 시간(변화의 한계), 지식(사고의 한계)이 결합된 닫힌 세계관의 상징이다. 이 세 가지 벽을 넘을 때 조직은 다시 살아 움직인다. 우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개구리만이 하늘의 넓음을 알 듯, 세상의 변화 속으로 들어간 조직만이 진정한 혁신을 이룬다. 우물 밖으로 뛰어 오른 개구리가 되려면, 문제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며, 배움의 기회로 삼는다. ‘왜?’ 보다 ‘어떻게 개선할까?’ 중심의 학습문화가 중요하다. 실패의 문화를 장려하고, 실험을 시스템화 하며, PAC(Problem Analysis Cycle), Lean 등 개선 도구로 실행중심의 도전문화가 필요하다. 부서, 고객, 협력사, 기술 네트워크가 연결되는 구조, ‘전체 가치흐름(VSM)’의 사고 전환과 연결문화가 되어야 한다. 정중지와는 공간, 시간, 지식을 멈추게 하는 우물벽이다.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우물의 벽을 허물고, 밖의 넓은 하늘을 보아야 한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11-04

시조창의 곡조

가로수며 산자락에는 잎새들이 아직 청청하기만 한데, 벌써 옷깃을 여미게 하는 쌀쌀함으로 정말 가을이 실종된 듯하다. 갈수록 뚝 떨어지는 기온에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해 단풍은 고사하고 잎새들은 파리한 행색으로 팔랑거리다가 그냥 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이 아니더라도 들녘의 국화는 이미 군데군데 피어 있으니, 기후의 변화는 이처럼 자연의 현상이나 생태마저 바뀌게 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 동풍 다 지내고/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는다/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이정보 시조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처럼 계절의 변화나 산수, 강호 등의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예찬하거나 심경을 토로한 시조를 읊어왔다. 이른바 강호가도(江湖歌道)라 일컬어지는 시조는 조선시대 문학에서 유랑과 자연, 인간의 정서를 주제로 하는 음풍농월(吟風弄月) 성격의 시적 표현방식이라 할 수 있다. 즉, 강과 호수 같은 한적한 자연환경 속에서의 삶과 자연과의 교감을 노래하는 시조로 자연 풍경과 속세를 떠난 은둔의 삶을 이상화하며, 인간의 감정을 자연과 결부시키거나 조화시켜 표현하고 비유하기도 했다. 이들은 복잡한 현실이나 시끄러운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산속이나 물가에 거처하면서 밤낮으로 자연에 마음을 팔고, 때로는 맑은 시냇가에서 짐짓 어부인 체하며 하루를 보내는 한가로운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가 벗을 만나면 술병을 열어 놓고 시를 읊어 밤이 깊어 가는 것도 모르게 태평시대의 여유로움으로 풍류를 즐겼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읊고 지어진 시에 장단을 붙이고 가락을 더해 소리 내 읊조리면 그 감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오래 갔으리라. 어쩌면 그러한 연유에서 시조창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시조창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時調)시에 운율을 올려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문학과 전통소리인 창(唱)이 어우러져 독특한 가락과 창법으로 선조들의 풍류와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격조 있는 문화유산이다.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시조창은 민족의 정서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삶의 여백이 배어 있는 독창성과 예술성이 돋보여 가곡·가사와 함께 우리의 전통국악인 노래로서의 정악(正樂), 정가(正歌)에 속한다. 즉 시조창은 시조시의 아름다움을 창법에 따라 고저장단으로 마음껏 표현할 수가 있어서 옛 선비들이 즐겨 부르던 전통 대중음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조창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현대적으로 계승하고 보존과 발전을 위해 각 지역마다 전국 시조창 경연대회를 열어 장려하고 지원하고 있다. 시조 한 편 외워서 발표하기도 힘든데 시조창을 배우고 연습하여 경연대회까지 출전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찮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발성법을 익히고 애써 시조창을 즐겨 부르는 이유는 시조창 특유의 창법과 흐름, 음조 등의 매력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흥겨운 듯 차분하게 장단을 맞춰 목소리를 풀면서 가냘프고 구슬픈 음조로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폭포수처럼 힘차게 용솟음치는가 하면 절제와 여운으로 마무리되는 시조 창법에서, 마치 삶의 애환과 고비를 지나온 듯한 스릴과 긴장감, 안도의 희열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11-04

재벌도 좋아하는 한국 치킨

“기름에 튀기면 구두도 맛있어진다”는 농담이 있다. 실제로 구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식재료는 끓는 기름에 넣어 일정 시간 튀겨내면 어느 것 할 것 없이 맛있다. 채소와 육류가 다 그렇다. 하지만, 기름에 튀긴 음식이 건강에 좋을 가능성은 낮다. 식재료가 높은 온도에서 튀겨질 때 칼로리가 대폭 상승하고, 트랜스지방이 높아져 심혈관 계통의 질환 위험성이 생긴다는 건 의학계가 이미 검증을 마친 사실. 그런 이유로 자신의 건강을 챙기려 노력하는 이들은 가능하면 튀긴 음식을 멀리하려 한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K-푸드 가운데 하나가 ‘한국식 치킨’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맛있다고 하지만, 치킨은 결국 기름에 튀긴 닭. 건강식품이라 부르기엔 어색하다. 그래서일까? 한 음식평론가는 “부자들은 치킨을 먹지 않는다. 치킨은 서민과 노동자의 음식”이라 말한 바 있다. 이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래 그럴 거야”라며 공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지난달 30일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치킨을 안주로 소맥을 마시며 회동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시끌벅적 알려졌다. 셋 모두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소유한 세상이 알아주는 부자다. 그럼에도 기름에 튀긴 닭을 손에 들고 맛있게 먹었다. 세 사람이 방문했던 특정 치킨업체는 밀려드는 손님과 폭증하는 주문 탓에 임시 휴업을 했다는 뉴스도 들려왔다. 재벌들까지 매혹한 한국 치킨의 매력은 대체 뭘까? 얼마나 맛있는 걸까? 그 이유가 궁금한 이들은 또 치킨집을 찾을 듯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1-04

APEC 이후 경주는 어떻게 달라질까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 2일 경주 APEC 정상회의가 끝난 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APEC 정상회의는 지방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외교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물론 APEC 정상회의는 정부 차원에서 준비됐지만, 핵심 인프라와 교통·숙박·관광 서비스는 경북도와 경주시 주도로 이뤄졌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이번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국제행사 개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짐과 동시에, 세계로 향하는 플랫폼을 구축할 수 있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APEC 기간 동안 경북도와 경주시는 1000개의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매일 현장점검을 했고, 9월부터는 이철우 지사가 경주 현장에 머물며 숙박, 교통, 관광 등 모든 서비스 분야를 직접 챙겼다. APEC 21개국 정상들과 고위급 인사들이 경주를 ‘가장 한국적인 도시’라고 평가할 정도로 경주의 매력에 빠진 것은 경북도와 경주시의 이러한 세심한 준비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외신들도 APEC 정상회의 기간 내내 경주의 문화적 위상을 조명하는 데 집중했다. 경북도는 이번 정상회의 기간에 구글과의 업무협약 후속 논의, 지멘스 헬시니어스와의 210억 원 규모 투자 MOU 후속 조치 협의, 몽골과의 탄소배출권 협약, 캐나다 퀘벡주와의 AI 협력 등 실질적인 성과도 거뒀다. 경북도는 정상회의가 끝나자마자 경주를 세계 10대 문화관광도시로 육성하기 위한 ‘포스트 APEC’ 사업에 들어갔다. 눈에 띄는 아이템은 ‘세계 경주포럼’이다. 다보스포럼이 ‘세계 경제 발전’을 상징하듯이, 경주포럼을 ‘글로벌 문화정책 플랫폼’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이밖에 ‘글로벌 CEO 서밋’ 상설화, 모노레일과 자율주행자 등이 도입된 보문단지 대개조 사업 등도 구상하고 있다. 경주를 ‘한반도의 미래도시’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것이다. 경북도의 이러한 전략이 잘 추진돼서 경주시가 ‘세계 외교와 관광의 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25-11-03

억울한 일, 억울한 사람

만해 한용운 쓰신 작품 가운데 장편소설 ‘박명’이 있다. 조선일보에 1938년 5월 18일부터 1939년 3월 12일까지 연재했다. ‘박명’이라 함은 팔자가 기구하다, 복이 적다, 요절할 운명이다 같은 뜻을 갖는다. 이광수 소설 ‘재생’의 주인공 이름과 이 소설 주인공 이름이 같다. 순영이다. 저 강원도 인제 가평 사람이다. 어려서 어머니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고생하며 큰다. 은인을 만난 줄 알았더니 서울 사람 송 씨는 기생도 아니 만들고 인천 색주가에 순영을 팔아넘긴다. 옛날식 주인공이어서 순영은 아름답고 지순한 여성이다. 색주가라 해도 함부로 처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사이에 순영은 ‘꽃샘’에 걸렸다고들 한다. 이름하여 매독이다. 손바닥에 엿이 묻었다고들 한다. 손님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낸다는 것이다. 이 둘이면 벌써 순영은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다. 이 인천 색주가는 세상의 축도다. 세상은 사람들 모여 사는 곳이다. 옛날 어렸을 적에는 이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을 가진 줄로만 알았다. 이것을 가리켜 ‘내 맘 같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가며 그렇지 않은 줄 알게 되니, 이것을 가리켜 ‘내 맘 같지 않다’고 한다. 세상에는 이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 일들이 많다. 세상은 또 서로 돕고 수긍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살아보면 그렇지 않은 일이 많다. 그래서 너나없이 좋은 세상 만들자는 염원을 갖지만 정작 그것이 내 일이 되고 보면 어떻게든 자기 이익과 목숨을 위해 사생결단이라도 낸다. 살아야 하기에, 더 낫게 살려고, 편을 짓고 일을 도모하다 못해 없는 일까지 지어내는 일도 많다. 옛날부터 소설에 그렇게 억울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도 현실의 일로 깨닫지 못하고 내 일 아니라 생각을 했건만 리얼리즘을 믿으면서도 정작 소설이 현실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었다. 여럿이 작당을 해서 있는 일을 없다 하고 없는 일을 있다 하는 일이 그렇게도 많다. 자신들이 옳다고 여겨서 그러기도 하지만 옳지 않은 줄 알고 느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일을 벌인다. 그런 때에야말로 그네들의 수법은 교묘하거나 그악스럽고 악착스럽게 된다. 소설에서 순영은 억울하게도 누명을 쓴 것이었다. 새로 들어온 순영의 생김새며 마음씀이 먼저 있던 이들의 시샘을 산 것이었다. 말은 지어내기도 쉽고, 여러 사람이 다 그렇다 하면 꼼짝없이 몰리고 마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 함이 딱 그럴 것이다. 순영은 끝내 억울함을 안고 차라리 죽어버리려 한다. 하지만 작가는 순영을 살려 그 억울함은 풀지만 또 다른 시련에 휘말리도록 한다. 어째서 만해는 이렇듯 순영으로 하여금 박명(薄命)한 삶을 살게 한 것일까? 먼 이후의 일들도 미리 짚어본 것일까?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의 일을 놓고 한쪽으로 몰아간다. 그런 ‘흉책’은 분명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도 살았다. 더 무서운 일들도 있었겠다. 그렇게 위안을 삼으려 해도 세상이 지금 끔찍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래도 버팅키고 살아가야 하겠다. 우리 모두.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11-03

iM뱅크 45조 지원···지역경제 활력소 되길

정부의 생산적 금융대전환 정책에 맞춰 iM뱅크가 향후 5년간 총 45조 원을 들여 중소·혁신기업 및 지역전략산업 육성 등에 집중 투자한다고 밝혔다. 총 투자액 중 38조5000억 원은 중소·혁신기업과 전략산업에, 6조5000억원은 금융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포용금융에 투입할 계획이라 한다. 특히 대구시와 경북도가 중점 추진 중인 미래모빌리티, 로봇, 헬스케어, 반도체, ABB 등 5대 신산업과 이차전지, 소부장, 에너지, 바이오 등 전략산업 분야에 집중지원하겠다고 했다. 정부의 생산적 금융대전환 정책은 부동산 등 비생산적 영역으로 흐르는 금융자금을 첨단·혁신기업 등 생산적 영역으로 흐름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국내 금융기관이 생산적 금융대전환에 대거 동참하게 되면 국가산업을 활력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생산적 금융대전환 정책의 방향은 매우 바람직하다. 금융당국이 지난 9월 생산적 금융대전환을 발표하면서 지방우대 금융정책을 펴기로 한 것은 눈길이 가는 대목이다. 현재 40%인 정책금융의 지방공급 비중을 2028년까지 45%로 높이고, 지방공급액도 120조 원까지 늘리겠다는 것이 요지다. 비수도권의 인구나 GRDP 비중에 비해 금융지원 비중이 수도권에 비해 현저히 낮은 지방에 대한 배려다. 정부 정책대로 진행이 된다면 지역균형발전 촉진과 기업의 지방 이전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iM뱅크의 생산적 금융지원에 지역이 특별히 기대를 거는 것은 iM뱅크가 전국은행으로 승격은 했지만 본점이 대구에 있고 지역을 배경으로 성장한 금융기관이란 점이다. 그동안 iM뱅크는 지역기업에 대한 밀착 지원으로 지역경제와 기업 성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번 금융 지원도 지역경제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적어도 장래가 유망한 기업이 자금이 없어 기업을 이끌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금융 서비스도 시대에 맞게 더 세련되고 치밀해져야 한다. iM금융 황병우 회장의 말대로 이번 지원이 지역과 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

2025-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