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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 홀로 크리스마스

모든 처녀들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자신의 뱃속에서 방아쇠를 당긴다 한 발에 한 명의 천사가 아이로 태어난다 내 운명은 사선에서 불발탄이 터진 것 두 명의 형제가 한 몸으로 불붙었다 다행히 그 폭발음을 신이 먼저 들었다 이십만에 하나라는 비극적 표적에서 내 머리에 동생 발이 축복처럼 붙었다 하나를 부욱 찢어서 쌍동을 만들었다 어머니 천사들은 샴쌍둥이로 명명됐다 탄환과 탄피는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탄흔의 내 깊은 상처에 초연이 자욱하다 먹어도 허기지는 슬픈 불량품은 은하수 다 퍼 와서 밥해 먹고 싶지만 그 별에 내 피 찍어서 명줄 같은 시를 쓴다 ―김샴, ‘샴을 위한 변명’전문 (‘샴을 위한 변명’, 가히, 2025) 시인 김샴(1993~)은 썀쌍둥이의 둘째로 태어났다. 정일근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부분 인생을 한 사람, 한 음절로 시작하지만, 시인은 운명적으로 삼 음절로 태어났다. 그 삼 음절이 샴과 시조를 만나게 했고, 샴으로 태어날 확률이 이십만분의 일이었다면, 샴이 시를 쓰는 확률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샴과 삼행의 정형을 갖춘 시조의 만남 또한 운명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샴을 위한 변명’은 존재에 대한 자전적 메타시다. “모든 처녀들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 자신의 뱃속에서 방아쇠를 당기”는데 “한 발에 한 명의 천사가 아이로 태어난다// 내 운명은 사선에서 불발탄이 터진 것”이라고 했다. 신은 “하나를 부욱 찢어서 쌍동”을 만들었다. 이때 어머니 천사들은 썀쌍둥이로 명명됐지만 이제 한 몸으로 불붙은 두 명의 형제는 홀로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새로운 리얼리즘에 대해 정의하면서 ‘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세계’를 말하며 그 자체로 있는 모든 것을 세계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나타난 것과 그 자체로 있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존재한다는 가정부터가 잘못이다. 그 자체로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려면 인식 과정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의미)을 빼버려야만 한다.”(‘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김샴 시인의 시에 나타난 세계는 수많은 대상 공간들이 존재한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식으로 말하자면 서로 격리된 작은 세상들이다. 예컨대 인용되지 않은 시 ‘이세계 아이돌’과 병치해서 보자면, “푹신한 함박눈이 겨울을 알리는 날” “컴퓨터 화면 속에” 있는 ‘나’와 “메타버스 가로지른 새로운 행복 속에” 있는 ‘나’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수많은 작은 세계들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실은 이런 작은 세계들인 “전기 망토 뒤집어쓴 // 복화인형 노래”하는 영역은 화자의 컴퓨터 화면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대 아이돌로 존재한다. 시에서 화자를 관통하는 건 세계(전체)의 나란 무엇이냐는 물음과 같다. 가령 소크라테스 문답에서 “지구는 어디에 있지?/ 우주에” “그럼 우주는 어디에 있어?/ 그 자체 안에” “그 자체라는 건 어디에 있어? / 내 의식 속에” 가 된다. 이것을 샴의 문답에 대입해 보면, “탄환과 탄피는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 탄혼의 내 깊은 상처에 초연이 자욱하다”가 되는 것이다. 하여 “먹어도 허기지는 슬픈 불량품”처럼 분리된 시인의 세계(우주)는 공허하다. 이때 “피로 쓰는 시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라고 말한 이송희 시인의 독해는 타당하다. 샴 시인은 현대시조의 아이돌로 읽어 봄 직하다. “기계음 응원 소리가 깊어지는 밤, 그 별에 내 피 찍어서 명줄 같은 시를 쓴다” /이희정 시인

2025-11-23

숲과 공존하는 울진 농업, 세계에 인정받다!

‘가장 울진다운 것이 가장 막강한 경쟁력’ 이다. 울진 군정을 이끌면서 늘 마음에 새겨운 이 말이, 올해 더욱 깊은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울진이 지켜온 전통과 자연 그리고 울진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세계로부터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 받은 뜻깊은 한 해이기 때문이다. 지난 7월, 600년을 넘게 이어져 온 울진군의 전통 농업 시스템이 유엔 식량농업기구 (FAO)로부터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에 등재되었다. 이로써 제주 밭담 농업, 청산도 구들장 논 농업, 하동 전통차 농업, 금산 전통 인삼 농업, 담양 대나무밭 농업시스템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6번째로 세계중요농업유산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이는 울진의 삶과 자연, 전통이 오랜 세월 조화롭게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세계가 인정한 결과이기에 더욱 뜻깊은 성과이다. 울진 금강송 산지농업시스템은 단순한 농경 방식이 아니라 금강소나무 숲을 보전해온 전통 산림관리와 산지 농업이 함께 이루어진 울진만의 전통적인 농업방식이다. 울진 금강송 산지농업시스템의 핵심은 산림과 농업의 조화로운 공존이다. 우리 선조들은 숲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맞춰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왔다. 이런 전통에는 자연을 해치지 않고 공존하며 살아온 울진 사람들의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이번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등재는 이러한 선조들의 삶의 방식이 세계적으로도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결과이다. 울진 금강송 산지농업시스템의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는 단순한 명예에 그치지 않는다. 울진군의 경제와 관광에도 새로운 변화를 불러올 중요한 계기이다. 우선 울진군은 세계중요농업유산을 지역 브랜드화하여 농산물의 가치를 높이고 전통 농업과 금강송 숲 생태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지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한 울진군은 2026년 울진 세계중요농업유산 축제를 개최하고 이를 정례화하여 울진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축제로 육성할 계획이다. 축제를 통해 울진의 자연과 전통 그리고 주민 공동체의 역량을 널리 알림으로써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세계중요농업유산 탐방(FAO 실사)코스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해 전통 농업과 울진의 자연환경 그리고 지역공동체를 하나로 잇는 지속 가능한 관광 모델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이는 울진의 자연과 문화, 역사를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관광 방식이 될 것이다.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재는 울진의 전통이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가치가 있음을 인식하는 기회 이자 울진만의 방식이 세계로부터 주목받고 지역 발전을 위한 경쟁력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울진의 경쟁력은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미래산업의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원자력전기라는 울진만이 가진 경쟁력을 기반으로 원자력수소 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추진하며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 산업지도를 새롭게 그리고 있다. 울진군이 추진하고 있는 원자력수소 국가산업단지는 무탄소 원자력전기를 활용한 수소의 생산, 저장, 운송, 활용의 전주기가 이루어지는 수소 클러스터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고 탄소중립 시대 핵심 산업으로 울진의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세계가 인정한 울진 금강송 산지농업시스템이 600년의 세월 속에 쌓여온 전통이 만든 힘이라면, 원자력수소 국가산업단지는 앞으로의 100년을 준비하는 미래의 힘이다. 한쪽은 숲이 주는 혜택을 지켜온 전통의 지혜이고, 다른 한쪽은 청정수소를 통해 국가의 미래를 밝히는 첨단 산업이다. 두 길은 다른 것 같지만 그 뿌리는 같다. 바로 울진 고유의 환경친화적 자원과 울진 사람들의 강인한 정신이다. 숲을 지켜온 농업은 울진의 근본이며, 미래를 지키는 수소 산업은 울진의 날개이다. 울진에서만, 울진이기에 가능한 이 두 가지의 울진다움이 오늘의 울진을 만들고 있으며, 앞으로 울진을 세계 속의 경쟁력이 있는 지역으로 성장시키는 든든한 기반이 될 것이다. 지금 울진은 전통과 미래, 자연과 산업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기점에 서 있다. 울진이기에 가능한 방식, 울진만의 속도, 울진다운 철학으로 더 큰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2025-11-23

너무 많은 2등급, 농민들 한숨도 깊어진다

‘추곡수매’라 불리던 벼 수매 명칭은 비록 ‘공공비축미 매입’으로 바뀌었지만, 농민들의 한 해 결실을 확인하는 현장의 의미는 여전하다. 예천군은 올해 2025년산 공공비축미 건조벼 매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군은 이달 14일부터 12월5일까지 용궁면과 개포면을 시작으로 12개 읍면에서 공공비축미 건조벼를 순차적으로 매입한다. 매입은 관내 30개 수매장에서 진행되며 건조벼 5065t, 가루쌀 241t, 산물벼 1021t 등 총 6327t을 확보할 계획이다. 이는 전년 대비 약 90% 수준(공공비축미곡 기준)이다. 매입 품종은 미소진품과 영호진미 두 가지다. 그러나 현장 분위기는 밝지 않다. 올 한 해 예천지역은 폭염·집중호우·깨씨무늬병 확산 등으로 영농 환경이 악화됐고, 수확기 잦은 비까지 겹쳐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가운데 벼 등급 판정까지 엄격해져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예년이라면 거의 없던 2등급 판정이 올해는 전체의 3분의1 수준까지 늘었다. 공무원들에 따르면 1등급과 2등급 간 가격 차이는 톤백(800kg) 기준 5만 원 이상으로, 농가 부담이 적지 않다. 예천읍 왕신리에 사는 농민 A씨(70)는 “힘들게 농사지었는 데 2등급 판정을 받으니 앞으로 농사를 계속 지을 자신이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수매 현장에는 안도와 실망, 기대와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1등급 판정을 받은 농가들은 한 해 농사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을 드러냈지만, 2등급 판정을 받은 농민들의 표정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추곡수매 현장은 단순한 곡물 거래의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우리 농업의 현실을 보여주고 미래를 고민하게 하는 상징적인 자리다. 농부들의 정직한 땀과 노력이 우리의 식탁을 지켜왔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농업은 생명의 근본이자 국가의 기반이다. 묵묵히 땅을 지키며 귀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의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하며, 이들의 열정이 희망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과 응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ajjung@kbmaeil.com

2025-11-23

11월은 불조심 강조의 달, 함께 지키는 따뜻한 안전

11월에 들어서면 본격적으로 기온이 하강하고 건조한 날씨와 함께 각 세대 및 사업장에서의 전기와 가스 사용량이 급증하며, 여러 요인에 의해 화재 위험이 커진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준비하면 근심이 없다는 뜻처럼 11월은 화재 위험에 대비해 사전 점검과 예방 활동을 강화해야 할 시기이다.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불조심 강조의 달’은 올해로 76회째를 맞이하며, 매년 겨울철 화재 예방을 위해 소방에서는 전국적으로 화재 예방 대책 홍보와 안전 교육을 하고 있다. 최근 5년간 전국 화재 통계에 따르면,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전기적 요인과 가스 누출로 인한 화재가 전체의 40%를 차지했으며, 포항 북부지역에서도 매년 겨울철 전기적 요인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빈번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화재는 예고 없이 찾아오지만, 철저한 준비와 작은 관심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화재 예방을 위한 3가지 핵심 전략을 제시한다. 첫째, 위험 요인을 사전에 차단하자(미연방지). 가정 내 화재 예방 수칙으로는 난방기기 사용 시 과부하를 방지하고, 가스레인지 사용 후 밸브 잠금 확인이 필수적이다. 또한 산업 현장에서는 용적 작업 시 불연성 물질과 소화기를 비치하고, 기계설비와 작업 도구의 정기적인 점검 등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둘째, 작은 부주의가 큰 피해로 이어진다(소탐대실)는 점을 기억하자. 가정과 각 사업장에서의 노후 멀티탭과 문어발식 콘센트 사용을 중단하고, 전기 배선을 정기적으로 점검 관리하자. 농촌지역에서는 논·밭두렁 소각을 자제해야 하며, 등산 시 흡연과 취사 금지를 철저히 지켜 산불을 예방해야 한다. 셋째, 함께 안전을 지켜나가자(동주공제). 화재 발생 시 초기 진화가 어려운 경우 즉시 대피를 우선시하고, 주변 이웃에 상황을 신속하게 전파해 인명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또, 공동체 의식을 강화해 나와 이웃의 비상구 점검 등 위험 요소를 상시 확인하고, 어린이·노약자에게 반복적인 안전 교육을 해야 한다. 11월은 한 해 마무리를 준비하는 시기이지만, 화재 위험은 오히려 증가하기 때문에 평온한 일상 속에서도 잠재적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오늘부터라도 집 안의 낡은 전선을 점검하고 가족, 이웃들과 함께 비상구를 확인하는 작은 실천을 시작해 보자. 미리 준비한 만큼 안전은 커진다. 우리의 관심과 협조가 모여 안전한 지역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최은우 포항북부소방서 예방안전과장

2025-11-20

혐오 표현이 용납되는 사회

한 정당의 대변인이 유튜브 방송에서 시각장애인 국회의원인 김예지 의원을 겨냥해 장애인을 비하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 “장애인을 너무 많이 할당해 문제라고 본다, 왜 국민의 힘에서 공천 달라고 구걸을 하냐, 민주당에 널리고 널린 게 김예지과라 민주당 가면 공천 안 줄 것 같으니까”라고 하더니,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주체성을 가지는 게 아니라 배려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친 것”이라고도 했다. 제1 야당의 대변인이 현직 국회의원을 향해 공개적으로 혐오 발언을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만 해당 발언을 한 대변인은 김 의원에게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그 정당의 원내대표도 “왜 굳이 자그마한 일을 가지고 기사화하려고 하느냐”라며 이를 ‘자그마한 일’로 치부하고 도리어 기자들 탓을 했다. 혐오 표현이란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바탕으로 경멸, 비하, 모욕, 위협 등을 담는 언어적, 비언어적 행위를 말한다. 이런 혐오 표현은 오랜 기간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주로 이루어진다. ‘병신’, ‘장애인처럼’, ‘저능아’ 와 같은 단어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표현들은 장애인을 하자 있는 존재로 보는 그릇된 인식을 생산하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강력한 장애인 혐오로 작용한다. 이런 직접적 비하 표현이 아니더라도 장애인을 불쌍히 여기거나 부당하게 혜택받는 집단으로 치부하는 표현 또한 혐오 표현에 해당한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야당의 대변인이 한 말이 전형적이 예이다.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단 세 명에 불과한 장애인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대해 그는 역량과 자격도 안되는데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국회의원 자리를 구걸해 받았다 식으로 말했다. “눈 빼면 기득권”이라는 막말을 하고도 반성과 사과가 없다. 이런 장애인 혐오 표현은 장애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데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런 표현들을 제재 없이 용납하는 사회는 장애인들이 겪는 차별을 심화시키고 그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와 기회를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이런 혐오 발언에 대해선 지금의 법상으로는 처벌 방법이 없다.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있지만 혐오 발언 자체를 처벌하는 것은 아니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조치에 대해 처벌할 뿐이다. 혐오 발언으로 피해를 입어도 모욕죄나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수밖에 없다. 나치 과거에 의한 뿌리 깊은 반성 의식을 갖고 있는 독일은 사회 통합을 방해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매우 엄격히 처벌한다. 플랫폼 사업자는 혐오 발언이 들어간 콘텐츠를 24시간 이내에 삭제할 의무가 있고 혐오 발언은 그 자체만으로 형법상 징역형이나 벌금형으로 처벌된다. 우리는 어떠한가. 관광지에서 ‘중국인 out’이라는 팻말과 욕설이 가득한 거리 시위가 버젓이 이루어지고, 제1 야당의 대변인이라는 자가 공공연하게 장애인 혐오 발언을 한다. 내면의 증오와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고 싶다는 이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소수자들의 인권보호와 사회적 통합이라는 법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가?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1-20

정년연장 선별 재고용이 대세···흐름 반영돼야

중소기업중앙회가 정년 퇴직제를 적용하는 30인 이상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고용연장 관련 중소기업 의견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86.2%가 정년 퇴직자에 대한 고용 연장방식으로 선별 재고용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선별 재고용은 직무·성과·건강상태 등에 따라 고용 연장 대상자를 결정하고, 재고용시 새 근로계약을 통해 고용기간과 임금 조정이 가능한 방식이다. 특히 응답 기업의 67%는 고용연장제도를 현재 시행 중에 있고 이들 중 79%는 직무·성과·건강상태 등을 고려해 고용연장 여부를 결정한다 한다. 또 고용 연장 후 근로자 임금은 75%가 정년 시점과 비슷하며 23%는 감액했다고 했다. 노동계 주장을 시작으로 정년연장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의 주장과 재계의 입장이 서로 달라 사회적 합의 도출은 쉽지 않아 보인다. 노동계는 법적 정년을 65세로 연장하고 임금을 그대로 올리자는 주장이다. 반면 재계는 이럴 경우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 신규 인력을 대폭 감축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기업의 신규인력 감축은 청년 고용률 감소로 이어져 고용의 불균형과 세대 간 갈등을 유발할 우려가 크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2016년 60세 정년연장 후 정년연장으로 고용이 1명 늘 때 청년고용은 0.4-1.5명 줄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고령화가 빠른 일본은 65세 고용보장 조치를 취하고 13년 동안 기업이 제도에 적응할 시간을 주어 고용연장에 대한 사회적 충격을 줄였다고 한다. 65세 정년 연장의 필요성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기업은 숙련된 인력을 활용하고 고령자의 경제난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정년연장이 청년의 취업을 막고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폭증시킨다면 고용 연장방식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중소기업 실태조사에서 대다수 기업이 이미 선별적 재고용 방식으로 정년 연장을 시행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법제화에 이런 현실이 무시돼선 안 된다. 경제의 흐름을 살리고 사회적 충격을 줄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 필요하다.

2025-11-20

K-스틸법, 산자소위 통과···立法 속도내길

국내 철강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K-스틸법'이 지난 19일 국회 산자위 소위원회 문턱을 넘었다. 지난 9월 초 소위에 상정된 지 약 두 달 만에 통과된 것이다. 이 법안은 그동안 ‘대장동 항소 포기‘ 논란 등 여야 간 정쟁이 격화하면서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 때문에 철강업계와 국내 3대 철강도시인 포항·광양·당진시가 긴급영상회의를 여는 등 속을 태웠다. K-스틸법은 21일 산자위 전체회의에 상정된다. 여야 모두 철강 업계 회생의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만큼, 큰 변수가 없으면 오는 27일 본회의에서 법안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K-스틸법은 미국의 50% 고율 관세로 어려움을 겪는 철강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여야 국회의원 106명이 초당적으로 발의에 참여했다. 국회 철강포럼 공동대표인 포항 출신 이상휘 국민의힘 의원과 충남 당진 출신 어기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동으로 대표 발의했다. 지난 8월 K-스틸법을 발의하면서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철강산업은 제조업의 근간이자 국가 경제의 버팀목”이라고 했고,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도 “철강산업의 연구개발과 생산설비 확충에 따른 부담을 경감하겠다”고 약속했다. K-스틸법은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5년 단위의 기본 계획과 실행계획(매년)을 수립하는 것이 핵심이다. 수소환원제철과 같은 탈탄소 철강기술을 ‘녹색철강기술‘로 지정하고, 기술 개발·투자에 대한 보조금·융자·세금감면·생산비용 지원 등을 명문화 했다. 철강기업의 산업 재편과 철강의 수급조절이 불가능할 땐 정부가 세제 및 재정 지원을 통해 사업 재편과 수급조절을 유도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세계 주요국은 지금 철강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포괄적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철강업계 자체적인 구조조정을 요구하면서 업계 지원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회와 정부는 철강산업이 무너지면 국가 경제도 위험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하루빨리 K-스틸법이 산업현장에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2025-11-20

수능보다 아빠

1993년부터 대학수능시험이 시작됐다. 올해로 32번째다. 수능을 치르는 고3에게 수능은 마치 인생에 있어 새롭고 거대한 문을 여는 것처럼 엄숙한 순간이다. 30년 넘게 수능이 치러졌지만 수능을 바라보는 우리 주변의 눈길은 달라진 게 별로 없다. 특히 자식의 수능시험을 지켜보는 부모들은 자식보다 더 긴장된 마음으로 수능의 결과를 기다린다. 수능의 결과가 좋은 대학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자식 인생 항로의 중대 고비가 된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집중한다. 수능은 말 그대로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을 검정하는 테스트다. 수십년 간 똑같은 방법으로 시험을 봤지만 사회적 반론이 별로 없다.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회의론이 없지는 않을 것 같다. 듣기 좋은 말로 수능을 인생의 한 과정이라지만 학생이 받아들이는 압박감은 크다. 수능 한번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재단해 버린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충격이다. 12년 공부한 결과를 받아보고 교실 안에서 울고 웃는 수험생의 모습을 보면 과연 수능이 만능일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올 수능이 실시되고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수능을 망친 수험생 딸에게 아빠가 보낸 글이 화제다. 불수능에 좌절한 딸에게 아빠는 “소중한 막내딸 성적 잘 안 나왔다고 좌절하고 그러지 마, 아빠가 돈 버는 이유는 너 때문인데 아빠 능력이 아직도 짱짱해”라고 했다. 그는 딸에게 500만원 주고 “하고 싶은 거 다 도전해도 좋다”고 했다. 이 글을 본 네티즌은 “수능 만점보다 이런 아빠가 더 좋다”는 뜨거운 반응을 쏟아냈다. 모두가 걱정하는 수능을 통쾌하게 한 방 먹인 아빠의 응원, 꽃보다 할배라더니 수능보다 아빠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11-20

재벌의 언어

요즘 들어 주식 시장의 변동만큼이나 재벌들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진 것 같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 타결 이후, 이재명 대통령을 향한 기업 총수들의 찬사에서 주목된 건 그 내용보다는 그들의 언어 그 자체 아니었을까? 그만큼 대중의 귀에 재벌의 언어와 소리가 가닿는다는 사실은 여전히 이채로운 일로 여겨지곤 한다. 가령 서울 한복판에서 재벌들이 치킨을 먹었다는 사실만큼 놀라운 건 그들의 ‘먹방’ 소식을 듣고 모여든 수많은 인파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나타나자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했다. 마치 대선 유력 후보의 연설 현장 같기도 했다. 물론 이런 열광은 이해 못 할 일이 아니다. 글로벌 기업을 이끄는 리더이자 세계 최고의 부자들 아닌가. 저들이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너를 향한 대중의 선망하는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것도 없다. 안타까운 현상일지라도 말이다. 다른 한편 재벌의 삶만큼 철저하게 미지의 세계가 있을까 싶다. 이재용 회장은 자신의 모습을 담으려는 대중을 향해 “아이폰이 너무 많다”며 너스레를 놓기도 했다. 아마 대다수는 재벌 총수의 농담을 처음 들어봤을 거다. 그만큼 재벌의 언어는 알려진 바가 없다. 지난 ‘치맥 회동’이 색다르게 느껴졌다면 재벌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것을 먹고 마시며 지낸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게다. 당연한 일일 텐데도 우리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 거라고 상상해 온 건 아니었나 싶다. 당연히 이런 상상에는 출처가 있다. 매체에서 재현되는 재벌 일가의 행태가 대체로 그렇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는 재벌들의 ‘속사정’에 대한 ‘지레짐작’에서 비롯된 양식이다. 재벌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화된 이미지들만 넘칠 뿐 실제 그들의 말과 언어를 들을 기회는 없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들의 일상을 다룬 소설에 비해 재벌의 세계를 다룬 작품은 거의 없다는 것도 이해 가능하다. 작가들 역시 재벌의 생활을 알 도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난쏘공)’은 기념비적이라 할 수 있다. ‘난쏘공’ 연작은 주로 도시 빈민이나 노동의 측면에서만 다뤄졌으나, 사실 이 작품에는 재벌의 세계가 중요하게 담겨 있다. 한국소설에서 재벌이나 사장은 탐욕의 화신으로 전형화되어 왔는데, ‘난쏘공’에서는 재벌 2세의 불안정한 사생활과 그로 인한 방황과 회의 등의 정서가 핍진하게 그려진 것이다. 이는 1970년대 한국 자본주의가 강남 개발과 부동산 투기, 관치금융 등을 통해 ‘토건’과 재벌 중심의 경제로 재편된 현실과도 상통하는 서사였다. 무엇보다 ‘난쏘공’은 ‘노동자의 눈에 비친 재벌’과 ‘재벌의 눈에 비친 노동자’의 교차를 통해 각자의 관점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 작품이 재벌 2세를 살핀 이유도 여기 있다. 생활세계에서 쉽게 식별할 수 없는 재벌의 존재를 후경화하면서도, 그들의 후계자를 내세움으로써 재벌에 대한 이해의 재구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치맥 회동’을 계기로 재벌에 대한 인식의 차원이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삶에 대해 궁금하다면 우선 ‘난쏘공’을 권하고 싶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11-20

사람 사귀기가 쉽나

사진을 배울 때다. 선생님이 질문했다. “사진을 가장 잘 찍는 첫 번째 비법은 무엇인가?”라고 묻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빛에 따라 조리개를 잘 조절해야 한다.” “조금의 흔들림도 주의해야 한다.” 등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답을 질러본다. 선생님은 웃으며 “렌즈를 먼저 닦는다.”라는 답을 한다. 그 순간 수강생들의 반응은 헛웃음이었다. 뭔가 잔뜩 기대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론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사진 찍을 때마다 렌즈부터 닦는 습관이 들었다. 그 어떤 스킬도 그다음이었다. 오래 건강하게 살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병원 자주 가서 건강 체크를 하는 것도 중요하고 고급 영양제 달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말동무가 있는 것이란다. 시시껄렁한 야담을 늘어놓아도 전혀 거리낌 없는 친구가 주변에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 지수는 높아져 가고 이에 편성해 장수 인자가 몸에 자리 잡게 된다는 이론이다. 아주 손쉽고 간단한 방법이 정답으로 다가올 때 살짝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친구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주위에 아는 사람이 하나둘 나의 곁을 떠날 땐 분명 자신에게 큰 문제점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데 늘 상대방 탓을 한다. 우린 보인다. 그들이 왜 떠나는지를. 사실 이 사람의 인간성을 볼 땐 우리도 별로 다가서고 싶지는 않지만, 모임 속 일원이라 이야기 정도는 받아주고 있다는 것을 당사자는 모른다. 자기는 착한데 떠나가는 남들은 전부 나쁜 인간들로 치부해 버린다. 나를 찾는 이가 없으면 남에게 베풀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든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친구를 만드는 데도 노력과 희생도 필요하며 절대 이기적으로 굴어서는 친구를 만들 수 없고 나 좋을 때만 연락해도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허구한 날 얻어먹는 인간에겐 사주기가 싫다. 모임 회비는 늘 늦게 내면서 챙기는 것은 일등으로 챙기려 들고 남 찬조 안 한다고 뒷말하고 다니면 좋아할 사람 없다. 이기적인 티가 팍팍 나는데 남들은 모른 줄 안다. 염치를 모르고 사는 전형적인 인간형이다. 혼자서만 똑똑하다. 세상 아는 척은 혼자 한다. “저 인간은 주는 것 없이 미워.” 이 말은 절대 본인은 들을 수 없다. 마치 자신의 입에서 나는 심한 구취를 본인만 모르고 주변 사람들은 다 알듯이 죽을 때까지 안 보고 살 자신이 있지 않은 한, 대놓고 말하기는 많이 힘든 말이기 때문이다. “난 천성이 혼자 있는 것이 좋아.” 이런 말을 하면서 혼자서 여행가고, 홀로 영화 보면서 고상 떠는 한 지인이 있었다. 그도 생일날 혼자 밥 먹으니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나더란다. 사람이 살면서 주는 것 없이 미운 인간형으로 낙인찍혀 사는 것만큼 창피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내 가족부터 먼저 챙기는 것이다.” 가족이 제일 먼저 안다. 내 가족 간에 대화 없이 산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쓸데없는 유튜브만 쳐다보지 말고 가족과 지인에게 전화 돌릴 때다. “지금 뭐해? 같이 밥이나 먹을까?” /노병철 수필가

2025-11-20

MZ세대의 결혼과 출산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 출생한 ‘MZ세대’는 많은 부분에서 이전 세대와는 구별되는 특징을 가졌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인간과 사물에 대한 철학과 관점이 기성세대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형태를 보이는 것. 결혼과 출산 문제에 관해 보여주는 태도 역시 그렇다. ‘적당한 나이가 되면 짝을 이뤄 결혼을 하고, 결혼 이후엔 당연한 순서처럼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전통적인 결혼관은 그들에겐 낡고 답답한 공식일 뿐이다. “경제적으로 독립이 가능하다면 혼자 사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하다”고 느끼는 MZ세대가 적지 않다. 20세기 스타일의 결혼과 출산 패턴에 억지로 맞춰가려는 사람들이 드물어지고 있다. 사회 흐름의 변화를 추적하는 각종 기관에서 최근 조사한 결과를 종합하면 ‘결혼과 출산은 필수’라 생각하는 MZ세대 여성은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나머지는 결혼과 출산을 개인 선택의 문제로 인식한다. 이와 함께 ‘부모는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는 이들이 20%에 불과하고, 동시에 ‘늙으면 자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도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넘쳐나는 정보와 개인을 존중하는 자유스러움 속에서 성장한 MZ세대는 너나없이 사고의 다양성을 가졌다. 그렇기에 “결혼은 하지 않아도 자식은 가지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결혼은 하더라도 아이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하나의 고리로 묶을 수 없는 세대인 것이다. 어쨌건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고, 그 변화하는 세상을 살게 될 주류 세대도 바뀌고 있다. 그러니, 현대사회란 당장 내일을 예측하기도 쉽지 않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1-19

철강업계위기,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포항시가 지난 18일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신규 지정됐다. 고용노동부는 이날 포항의 주력산업인 철강이 최근 통상환경 불확실성 증가, 내수 부진 등으로 고용이 둔화하는 상황이어서 긴급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이 제도 시행이 철강업계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은 되지 않지만, 정부가 심각한 포항지역 고용 상황에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 제도는 기존 고용정책의 한계를 선제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지난 7월 신설됐다. 지정 기간은 최대 6개월이다. 이 제도 시행으로 실업자의 경우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국민취업지원 제도에 참여할 수 있고, 사업주는 고용유지지원금을 받는 등의 혜택이 주어진다. 포항시는 지난 3일 국내 3대 철강도시인 광양시, 당진시와 함께 긴급 단체장 영상회의를 가진 직후 정부에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의 신속한 지정을 건의했었다. 현재 철강산업이 당면하고 있는 혹독한 외부환경은 기업이나 지자체 힘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포항시에 의하면, 지난해 포스코 2공장 2곳이 문을 닫고 현대제철 2공장이 가동을 중단하면서 철강공단 근로자 수가 1000명 정도 줄었다. 대기업이 문을 닫으니 하도급 업체는 더 버티기가 힘들다. 자연적 포항 시내 골목상권도 붕괴하면서 빈 점포가 날마다 늘고 있다. 철강업계는 최근 발표된 한미 관세협상 공동설명 자료(팩트시트)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으나 철강은 논의에서 아예 배제되며, 고율 관세를 그대로 맞게 됐다. 철강업계의 숨통을 틔워줄 것으로 기대했던 K-스틸법(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법률)도 지난 13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반도체특별법과 함께 제외됐다. 철강산업의 위기는 철강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제 전반의 침체를 불러올 수 있다. 모든 산업의 뼈대이기 때문에 한 번 무너지면 복구도 어렵다. 철강업계도 자발적 구조조정에 힘써야 하겠지만, 정치권과 정부는 K-스틸법을 비롯해 철강업계 지원을 위한 긴급처방에 나서야 한다.

2025-11-19

기로에 선 TK 신공항 여당이 먼저 해법 내야

지난달 대구 타운홀미팅에 참석한 이재명 대통령은 “TK 신공항 건설 비용은 정책적 결단과 재정여력의 문제”라며 “실현 가능하도록 충분히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또 “군 공항 이전은 국가사무인 만큼 국방 차원에서 검토하겠다”는 말도 했다. 이 대통령의 이 발언은 TK 신공항 사업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 가능성을 처음 언급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교착 상태에 빠진 TK 신공항 사업이 대통령의 언급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인지 여부에 지역민의 관심이 모아졌다. 대구경북 신공항은 재원조달의 문제로 사실상 봉착 상태다. 공자기금 지원이 불가능하고 기부대양여 방식에 대한 한계도 드러났다. 지금은 공영개발 방식보다 정부 주도 사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주류다. 불과 목표 개항까지 5년을 남겨두고 개발방식 문제와 정부 협조 불투명 등으로 사업추진이 제대로 될는지 걱정을 하는 이가 많다. 최근 대구시는 국회 내년도 예산안 심의과정에 신공항팀을 상주시키며 총력 대응을 하고 있다. 특히 TK 신공항 예산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시가 신공항 사업과 관련해 요청한 정부 기금운영계획안에서 전액 삭감된 예산의 일부라도 되살려 보겠다는 것이다. 신공항 예산의 최소한 확보는 사업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예산이 반영되지 않을 경우 당장 사업이 1년 연장되고 나아가 사업의 불확실성마저 키울 수 있다. 또 토지 보상을 기다리는 주민들의 반발도 무마하기가 쉽지 않다. 김정기 시장 직무대행이 “국가 재정지원이 가능한 구조를 만들고 중앙정부와의 공동사업으로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현재 TK 신공항 사업이 처한 구조를 잘 대변하는 말이다. 정부와 여당의 확고한 지원 의지가 필수다. 이 대통령의 말대로 가능하도록 정부 차원에서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역을 방문한 정청래 민주당 대표도 막연하게 지원한다는 말보다 말에 대한 책임과 약속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지역 민심도 눈을 돌릴 것이다.

2025-11-19

수능 후기

수능이 끝났다. 해마다 이맘때면 한국 사회는 긴장과 과열의 공기를 안고 그 하루를 통째로 맞는다. 지구상 그 어느 나라도 수능 날 하루만큼 이렇게 나라 전체가 흔들리지는 않는다. 고사장의 주변을 통제하고, 항공기의 이륙과 착륙 시간을 조정하며, 심지어 증권시장도 한 시간 늦게 문을 연다. 국가 전체가 ‘입시공화국’의 구성원임을 새삼 확인한다. 대학이 인생의 모든 걸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대입 중심주의를 넘어 대입편집광적 구조에 들어섰다. 청춘의 출발선에서부터 ‘대학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암묵적 강박에 시달리고, 학부모는 ‘좋은 부모’ 자격증을 오직 입시준비를 얼마나 잘 해주느냐로 획득한다. 학교, 학원, 지역사회, 언론, 교육당국, 정책 모두가 대입 압박의 공동기획자다. 서울시의회는 사교육의 대명사인 학원의 강습시간을 자정까지 연장하는 조례안을 상정했다. 표면적으로는 ‘학습권 보장’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웠지만, 실은 사교육 시장의 영업권 확대라는 본질을 숨기지 못한다. 학교에서 배움이 충분하다면 왜 밤 12시까지 학원에 있어야 하는가. 공교육의 무력화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지만, 자정 수업 허용 논의는 공교육의 존재 이유마저 흐릿하게 만든다. 더욱 큰 문제는, 이 논의가 ‘아이들의 시간’을 누가 어떻게 사용할 권리를 갖고 있는가라는 근본 질문을 비껴간다는 데 있다. 한국의 고등학생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부하는 집단이다. 한참 성장기이지만 수면시간은 가장 짧다. 결국 아이들의 삶을 깎아내 학원의 상업적 성취를 돕겠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는다. 입시전쟁은 가족의 시간도 허물어 버린다. 가족이란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하루를 물으며 포근함을 나누는 공동체여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 가족의 시간은 사라진 지 오래다. 아니, 가족이 사라졌다. 부모는 끝없는 경쟁에 내몰리고 아이들은 입시압박 속에서 가정의 품을 쉬어가는 곳이 아닌 또 또 다른 긴장공간으로 여긴다. ‘가족이 가족다우려면 무엇부터 챙겨야 할까’라는 질문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수능을 마친 학생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보다 그들은 잠을 자야 하고 걸어야 하며,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친구와 이야기해야 한다. 시험 때문에 지워졌던 일상성을 되찾고 가족을 회복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 입시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자기 삶의 방향과 속도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경험을 가져야 한다. 한국 사회가 입시 과열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내년에도 우리는 같은 긴장 속에서 수능을 맞을 것이다. 하지만 변화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학원 강습 시간을 자정까지 늘일 게 아니라, 아이들이 집으로 더 일찍 돌아가 가족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공교육이 역할을 다하는 구조를 세우고, 입시의 비중을 낮추는 방향으로 사회적 합의를 모아야 한다. 수능은 하루로 지나갔지만, 일상은 그 이후에도 이어진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어떤 대학에 가는가’가 아니라,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이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공부가 아니라, 더 많은 삶이다. 수능 지나간 자리에, 사회가 그동안 잊었던 ‘정상성’을 되찾도록 돌아보아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1-19

영천 기행

우리 중학 동창 다섯은 매년 만난다. 서울, 부산, 공주, 대구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아도 최소 일 년에 한 번은 보기로 한 지 20여 년이 넘었다. 작년 가을 전주에서 만나 올해 여행지를 해외로 정했는데 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장소가 뭐가 중해, 만나 얼굴 보는 게 중하지 모두들 동의해 주어 내가 사는 대구에서 가까운 영천으로 급변경했다. 영천을 관광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검색하여 일정표를 짜고, 영천 기행을 시작했다. 임고서원에 잠시 들러 수령 500살인 은행나무를 경외롭게 우러러봤다. 보현산 아래 화북면 자천리에는 역사 깊은 교회와 성당이 있다. 자천교회는 1903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120년이 더 된 오래된 유산이다. ‘야소교예배당’ 간판과 자천교회 간판이 정갈하다. 잘 정돈된 잔디마당을 지나면 일자형의 한옥, 옛 자천교회였던 예배당이 나온다. 내부에는 남녀석을 분리해서 칸막이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안을 들여다볼 수 없어 아쉬웠다. 세월을 이고 근엄하게 서있는 나무 종탑도 멋지다. 교회 옆 골목을 들어가면 영천성당 자천공소 안내표지가 나온다. 오래되어 쓰지 않은 건물에 ‘바오로정미소’ 나무 간판이 세월의 먼지 속에 희미하다. 성당에서 운영하였나 아니면 세례명이 바오로인 충실한 성당 신도가 운영하였나 넘겨짚어 본다. ’은혜의 모후‘ 성모상이 반기는 뒤편에 아마도 후대에 지어졌을 분홍색 성당이 현재의 자천공소이고 입구 오른쪽에 세월을 알게 해주는 커다란 소나무 아래 한옥이 옛 자천성당인 듯했다. 1927년에 지은 초가집으로 성당이 시작되었다니 내년이면 100년이 되는 셈이다. 우리나라 기독교와 천주교사에 남을 만한 역사적 건물이 이렇게 있을 정도면 자천이 예전엔 꽤나 번화한 마을이었나 싶다. 자천 입구 길 따라 길게 펼쳐진 오리장림도 웅장하다. 1500년대에 조성된 마을숲이었다는데 수령이 족히 수백 년은 돼 보이는 나무들이 가을 풍치를 제대로 보여준다. 자천은 나의 원 고향이었다. 종고모와 종숙이 살던 집은 어딘지 잊었으나 어린 시절 오리장림에서 놀던 기억은 또렷한데 이렇게 오래된 교회와 성당이 있는 줄은 몰랐다. 오후엔 은해사와 거조암엘 갔다. 타지에서 온 친구들에겐 은해사는 생소한 절인 듯했다. 은해사냐? 은혜사냐? 은해사구나. 평탄한 길을 산책하듯 가다보면 다리 건너 절이 보인다. 초파일 등을 아직 거두지 않은 절 마당에 수령 450년이나 된 향나무가 우뚝하다. 은해사에선 우엉차와 무말랭이차, 갓 내린 커피를 대접받았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은혜다. 은해사에서 20여 분 오르면 팔공산을 동서로 가른 계곡 자락에 거조암이 있다. 매년 정초 거조암에 올라 오백나한 앞에 100원짜리 보시를 올리는 나였다. 이름과 표정이 제각각인 나한상은 볼 때마다 경이롭고도 재밌다. 친구들은 종교가 제각각이다. 한 친구는 성당에서 세례받은 신자요, 둘은 교회의 권사이며, 날 포함한 둘은 수계관정 받은 불자다. 어쩌다 보니 이번 영천 여행은 종교가 제각각인 우리에게 마침맞은 성지순례가 되었다. 한 친구가 범종교 여행이라고 했는데 절묘한 말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11-19

통증은 거기서 오지 않는다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들 아픈 부위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어깨가 아프면 어깨가, 허리가 아프면 허리에 문제가 있다고 단순하게 연결 짓는다. 그런데 실제로 초음파로 근육과 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온다. 통증 부위는 신호가 집결된 위치일 뿐, 실제 문제는 먼 곳에 있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 회전근개 통증 환자의 어깨를 초음파로 보면 건이 약간 두꺼워져 있거나 미세하게 찢어진 흔적이 나온다. 하지만 정작 원인은 어깨 바로 옆이 아니다. 날개뼈를 잡아주는 근육이 약해져 있거나 목 주변 근막이 굳어 있어서, 그 여파가 어깨에 쏟아지는 식이다. 환자들은 어깨만 아픈데 왜 목이나 견갑골을 치료하느냐고 묻지, 초음파로 구조를 보여주면 그제야 이해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곳에 실제로는 지방이 스며든 듯 흐릿하게 변한 근육이 보이거나, 건의 모양이 분명하지 않게 일그러져 있는 모습이 잡힌다. 이런 변화들은 MRI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초음파만으로 충분히 확인할 수 있고 통증의 진짜 뿌리를 찾아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환자가 통증을 느끼는 곳보다 더 아픈 곳이 초음파에서 잡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만성 허리 통증 환자는 본인은 허리가 아프다고 하지만 초음파를 보면 둔근이나 측면의 장요근 라인에 더 심한 문제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허리 주변의 건들이 이미 두꺼워지고 활액막이 부어 있는데도 환자는 그곳이 아프다고 느끼지 않는다. 실제 통증은 허리에서 느끼지만 문제를 유발하는 힘의 불균형은 완전히 다른 구조에서 출발한다. 이런 원리 때문에 단순히 아픈 곳만 침 맞고 약침만 맞으면 좋아지는 기간이 짧고, 근본적으로는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구조의 원인을 정확히 보지 않으면 통증은 반복된다는 뜻이다. 초음파 진단이 좋은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환자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의사가 아무리 설명해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이해시키기가 어렵다. 그런데 초음파에서 건이 두꺼워진 모습, 미세 파열처럼 검게 갈라진 부분 지방이 껴서 흐릿하게 보이는 근육을 직접 보여주면 환자 입장에서는 말이 필요 없다. 통증의 원인을 본인이 직접 보고 나면 치료에 대한 신뢰도가 훨씬 높아지고 생활관리도 더 잘 따른다. 통증은 결국 기능의 문제이고 기능은 구조가 만든다. 구조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왜 전신 치료와 근막 라인 치료가 필요한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그래서 나는 요즘 통증 환자에게 초음파를 거의 기본처럼 사용한다. 단순히 염증이 있네 없네를 보는 게 아니라 근막의 방향성 건의 탄성 근육의 밀도 그리고 힘이 전달되는 체인의 불균형을 잡아낸다. 이후 치료는 아픈 곳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만드는 곳까지 포함해 약침을 가이딩으로 정확히 넣고 필요하면 추나로 구조를 맞추고 매선으로 약해진 조직을 단단하게 받쳐준다. 이런 식으로 통증을 부위별 치료가 아니라 구조 단위 치료로 접근해야 진짜 효과가 난다. 통증은 늘 구조의 결과로 나타난다. 아픈 곳만을 보지 말고 몸 전체의 흐름을 보는 것이 진짜 치료의 시작이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11-19

내안의 잎이 시들기 전에

초등학교2학년인 지율이는 나에게 꼬마박사로 불린다. 나는 최근 들어 이 아이만큼 나를 붙잡고 자신이 아는 지식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해 주는 학생을 만난 적이 없다. 오늘도 나를 보자마자 벌레잡이식물인 파리지옥에 대해 뜻밖의 질문을 건넸다. “선생님, 파리지옥은 파리 세 마리를 먹으면 죽는 거 알아요?” 내가 알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며,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진지해 보여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전혀 몰랐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지율이는 입을 크게 벌리더니 마치 세상의 비밀을 막 풀어낸 사람처럼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예요. 욕심을 너무 부려서 죽는대요.” 나는 그 말투가 어찌나 도덕책 같던지 웃음이 났다. 그러나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순간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찔렸다. 욕심을 부리다 죽는다니. 어쩐지 나의 이야기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몇 년 전, 나는 빈혈 수치가 높아서 고생했다. 아침과 점심을 습관처럼 자주 거르는 날이 많았고, 저녁마저 밤늦게 빵 한 조각과 커피로 때우기 일쑤였다. 잠을 자는 시간도 불규칙적이었다. 강의준비와, 읽어야 될 책, 맡은 일들이 온몸의 세포를 부유하며 나를 끊임없이 앞으로 밀어냈다. 밤이면해야 할 일들의 그림자가 자꾸만 늘어나 새벽이 깊도록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그 말은 어느새 내 안에 뿌리내린 주문처럼 나를 지배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버티다가 언제부터인가 어지럼증이 무시로 일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몸이 예전처럼 가볍지 않고 무거웠다. 하루를 힘없이 시작하기 일쑤였다. 나는 참을 만큼 참다가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진단은 빈혈이었다. 몸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의사는 나에게 체력이 바닥났으니 휴식이 필요하단다. 나는 의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빙글빙글 끝없이 맴돌았다. ‘조금만 더, 하루만 더’라는 주문은 나를 갉아먹는 덫이 되어 있었다. 몸은 멈춰 섰는데, 마음은 멈추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바로 나였다. 지율이가 말해준 파리지옥이 떠올랐다. 파리 한 마리가 잎에 닿을 때마다 파리지옥은 한 번의 소화를 위해 온 에너지를 쓴다. 몇 번을 반복하면 그 잎은 기능을 상실해 더는 버티지 못해 시든다. 잎을 열어야 먹이가 들어올 텐데, 힘이 없어 더 열지 못한다. 그러나 식물 전체가 죽는 것은 아니다. 시든 잎 아래에서 새로운 잎이 조용히 돋아난다. 그렇다면 닫는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내려놓음의 표시가 아닐까. 파리지옥은 스스로의 한계를 아는 것이다. 에너지가 고갈되었음을 알아차리고 먹이를 더 이상 소화시킬 힘이 없을 때 잎을 다문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때 스스로 입을 닫는 것과 같다. 그 단순한 움직임은 생존의 방식이다. 돌이켜보면나는 그 지혜를 알지 못했다. 끝없이 삼키려고 욕심을 부렸다. 또한 파리지옥처럼 살아남기 위해 잎을 닫는 것이 아니라, 버티기 위해 ‘닫음’을 되풀이했다. 일에 치여 감정을 닫고관계 속에서 상처받기 두려워 마음을 닫았다. 속을 털어놓으면 약해질까 봐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그런데 닫음이 쌓일수록내 안의 잎이 하나둘씩 조용히 시들고 있었다. 시드는 순간은 언제나 소리가 없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파리지옥으로부터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내가 품을 수 있는 만큼만 품고그 이상은 놓아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짜 생의 균형을 회복하는 첫 걸음일 것이다. 앞으로는 아무 감정이나 억지로 삼키지 말고일에도 욕심을 덜어내기로 했다. 이제 나는 일과 사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조금씩 여백을 주기로 했다. 일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창문을 연다. 내 안의 잎이 시들기 전에 불어오는 바람과 햇살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멈춤의 시간 속에서내 안의 새로운 잎이 자라는 것을 느낀다. 그 잎은 더 단단하고, 더 푸르다. /정미영 수필가

2025-11-19

(11.20)이우근 시인과 박계현 화백의 포항 메타포

감은사지 2 당신이 애인이 있다면 당장 감은사지에 가라 둘 다 서로 잊혀질 것이다 가장 강렬해서 소원하고 멀어도 가깝다고 하나는 적절하게 외롭고 둘은 이미 다소 귀찮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당신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덤덤하게 말한다, 사랑은 늘 어렵다고 두 개의 탑 사이를 오가며 잡풀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바다를 기웃거리는 삶, 설렁설렁 잘 놀다 간다 순간을 영원으로 착각하지 말아야지 그것의 무난한 진리를 깨물며 씹었다 그러나 부처라 해도 문무대왕이라도 해도 안간힘으로 한판 패대기치면 간단한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사랑이 그런 것을. …. 요란하지 않아도 즐겁고 따스한 곳이 있다. 감은사지 터가 그렇다. 그냥 다섯 시간을 앉아 있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다. 사람과의 만남은 상수이자 변수이므로 대충 뭉개면 된다. 단지 아프게 뭉개야 한다. 그래야 흔적이 남지 않는다. 아픔은 그대의 운명이다. 극명하다. 최고의 성실은 최대의 게으름이다. 저 두 개의 탑이 증명하고 있다. 세월은 배신과 반전이다. 당신의 퇴적층을 만들라! 반성의 빌미로 새로운 명제를 만들 것이다. 쇠락이 진전이 된다. 사람의 시작이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11-19

[김한섭 전 포항북부경찰서장 기고] 산업 근로자, 현장 안전이 최우선 가치 돼야

우리는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서 교통사고를 포함한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각종 사건 사고와 관련된 뉴스가 쏟아지는 것은 그 단적인 예다. 필자는 38년간 경찰관으로 근무하면서 경찰서장을 마지막 보직으로 정년퇴직하고 지금은 KT 협력업체인 (주)우주씨앤티의 청도지역 경영과 안전을 책임지는 일을 하고 있다. 가끔씩 경찰관일 때와 기업 활동하는 현재가 오버랩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장에서의 안전이다. 실제, 아무리 준비와 결과가 좋더라도 안전 문제가 꼬이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된다. 그런 점에서 어떤 분야든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점은 확실하다. 물론 안팎에서 경험해 본 두 직업의 안전에 대한 내용이나 우선순위에서는 여러 차이가 있다. 하지만 나와 주변의 안전을 확보함으로써 일상의 평온함을 목표로 한다는 큰 틀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경찰관은 직업상 현장에서 나 자신의 안전보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주민의 안전이 우선되어야 하고 이런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나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거나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특성이 있다. 반면 기업에서는 자신과 주변 동료들의 안전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될 수밖에 없다.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안전 우선이라는 점에서는 지향하는 바가 같다. 필자 또한 경찰관 재직 시에는 공공의 안전이 최우선이었으나 정년퇴직을 하고 사기업에서 종사하고 있는 지금은 근로자 안전을 가장 먼저에 두고 있다. 기업이 작업자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직에 있을 때는 솔직히 잘은 몰랐다.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기업들의 안전 대응은 생각 이상이었다. 안전사고는 소속 기업에도 엄청난 손실을 끼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지만 대표자나 경영인들의 안전에 대한 대응과 계획은 기대를 웃돌았다. 필자가 근무하는 사무실에는 “우리 현장은 다치면서까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라는 KT의 표어가 걸려있다. 문구를 보고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업들이 저마다 안전에 대하는 일종의 이념과 가치, 룰을 갖고 있음을 알았고 그러면서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실제, KT에서는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로 현장 안전관리를 위한 노력과 시스템이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KT 협력업체에서 안전관리 업무에 담당하는 필자로서는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다. 누구나 주변의 위험요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조심하고 살펴야 하겠지만 특히 산업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제복 입은 공무원들께는 현장의 안전을 가장 먼저 고려하고 안전수칙을 준수함으로써 자신과 주변의 안전을 지키고 우리 사회의 안정과 발전의 초석을 만드는 데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공무원들이나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자 모두가 사회에서 존중받으며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2025-11-19

6·3 地選, ‘TK폐쇄성’ 극복하는 계기되길

여야가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천룰 확정 작업에 분주한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최근 당 행사에서 “국회의원이 입김을 행사할 수 없는 룰을 만들겠다”고 밝혀 주목을 받았다. 권리당원이 100% 공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과거처럼 국회의원이 후보를 내리꽂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국민의힘도 지방선거 때마다 현직 국회의원(당원협의회 위원장)의 공천전횡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직전(2022년) 지방선거 때도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는 각 시·도당에 국회의원의 ‘내리꽂기 공천’ 잡음이 발생할 경우 다음 총선 공천에서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언했었다. 여야의 이러한 방침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이 ‘자기사람’을 공천하는 관행은 거의 일반화돼 있다. 국민의힘 텃밭으로 불리는 대구·경북(TK) 지역은 특히 지방선거 때마다 현역 의원의 공천개입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2022년 지방선거 때는 경북도당 공관위가 ‘교체지수’라는 낯선 여론조사 방식을 통해 3선 도전 단체장(포항·영주·군위)들을 경선에서 탈락시켰다가 번복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컷오프 과정에서 해당 지역 국회의원들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국민의힘은 내년 지방선거 공천에서도 ‘기초단체장 평가제’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일각에선 차기 총선 경쟁자 싹을 자르려는 ‘제2의 교체지수’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TK지역의 경우 특히 현역 의원의 입김이 강하다. 이 때문에 기초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이 국회의원 ‘가방모찌’라는 자조적인 말도 나온다. 사실 현역 의원이 지역구 공천 작업을 주도하겠다고 나서면 당 지도부에서도 이를 말릴 명분이 별로 없다. 지방선거 결과는 지역구 의원이 책임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기 총선 공천주체는 먼 훗날에 결정되기 때문에 현 공관위의 압박에 긴장하는 의원도 많지 않다. 결국 비상식적 공천에 대해서는 유권자가 심판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TK지역에서는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들이 학맥, 인맥으로 카르텔을 형성해 ‘끼리끼리’ 먹고 사는 도시를 만들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대구의 GRDP가 전국에서 꼴찌고, 시민소득이 울산의 3분의 1에 그칠 정도로 쇠락한 것도 TK지역의 이러한 정치적 폐쇄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TK지역은 국채보상운동이나 1960년대 민주화운동, 1970년대 산업화의 주역도시다. 우리 자녀들이 살아가는 이 지역 환경을 변화시키는 역할은 단체장이나 지방의원이 중심이 돼서 해야 한다. 극단적인 비교일지 모르겠지만 실리콘밸리에서 사는 아이와 폐쇄적 도시에서 사는 아이가 한평생 누리는 행복수준은 같을 수가 없다. ‘한국의 시간’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김태유 박사는 “자라는 아이에게 새총을 주면 산에 가서 참새를 많이 잡는 꿈을 꿀 것이고, 엽총을 주면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를 사냥하는 꿈을 꾼다”고 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TK지역 아이들에게 큰 꿈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리더들이 많이 출마하길 기대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11-18

빨라진 독감유행···“꼭 예방접종하세요”

최근 유아·초등학생을 중심으로 독감(인플루엔자) 환자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 걱정이다. 질병관리청의 인플루엔자 표본감시 결과에 따르면, 최근 4주간 독감 환자 발생이 계속 늘면서 11월 첫주 기준 1000명당 50.7명을 기록했다. 전주(22.8명) 대비 환자가 배로 늘었다. 작년 이맘때(4.0명)와 비교하면 12배를 초과하는 수치다. 연령층별로 보면 7∼12세(138.1명), 1∼6세(82.1명), 13∼18세(75.6명) 순으로 많아 유아와 학생들 중심으로 확산세가 두드러지고 있다. 질병청은 “인플루엔자 감염을 줄이고 중증화 위험을 낮추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예방접종‘”이라며 시민들의 적극적인 접종을 권고하고 있다. 문제는 독감 진단에 쓰이는 인플루엔자 A·B 항원 검사나 수액 주사제 등이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되지 않아 병원마다 가격 차이도 크다는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자료에 따르면 독감 검사비는 최소 5000원부터 최대 10만원까지 차이를 보였다. 심평원이 제공하는 지역별 비급여 진료비용 자료를 보면 독감 검사비 전국 평균은 2만7455원이다. 의료기관별 독감 검사비는 심평원 누리집 또는 모바일 앱 ‘건강e음’에서 확인 가능하다. 대구·경북지역은 지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 지역민 모두가 엄청난 고통을 겪은 아픈 경험이 있다. 수많은 시민이 코로나 사태로 생명을 잃거나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특정 지역이나 정치권은 마치 코로나를 대구·경북지역이 유행시킨 것처럼 조롱과 비난을 하기도 있다. 전염병은 이만큼 무서운 것이다. 독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전염병이 아니다. 갑작스런 고열과 두통, 근육통은 전신 무기력증을 동반하기 때문에 어린이와 임산부, 노약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정부가 임산부나 노약자에게 무료 접종을 시행하고 있는 것도 독감의 유행성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철저한 개인위생과 접종은 자신과 주변을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의무적 행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2025-11-18

외국인 계절근로자 무단이탈 해결할 수 없나

농번기 등에 투입되는 외국인 계절 근로자의 무단이탈이 매년 되풀이 되고 있으나 당국의 대책은 겉돌고 있다. 국민의힘 정희용 의원이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최대 8개월간 일할 수 있는 E-8비자로 입국한 외국인 계절 근로자는 매년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2023년 4만647명이던 것이 올 7월까지 9만5700명으로 급증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무단이탈자도 해마다 수백 명씩 발생해 일부 농가는 무단이탈로 인한 손실이 불가피하게 발생하고 있다. 농어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해 정부가 합법적으로 인력을 도입했지만 이를 믿고 농번기 작업을 준비한 농가들이 예기치 못한 일로 매번 손실을 입고 있는 건 사실이다. 최근 3년간 무단이탈한 외국인 계절 근로자 수는 2023년 925명, 2024년 915명, 올 7월까지 108명을 포함해 1944명에 이른다. 경북에서도 3년간 211명이 무단이탈했다. 외국인 근로자의 무단이탈이 발생하는 배경은 복합적이다. 현지 브로커의 개입과 보증금 관리 미흡, 복잡한 행정절차 등이 얽혀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것으로 풀이가 된다. 이런 문제를 해소키 위해 계절근로자에 대한 표준계약서 도입, 보험 의무화, 공공사업장 지정, 브로커 처벌 조항 등이 담긴 특별법을 만들었으나 근로자의 무단이탈을 막기엔 여전히 역부족이다. 전문가들은 공공형 농장 확대, 근로자 정착 지원 프로그램 강화, 브로커 개입 차단을 위한 국제협력, 농가 대상 교육 등 다양한 형태의 변화를 요구한다. 특히 우리 농어촌지역 사정을 보면 앞으로 외국인 계절 근로자의 인력 투입은 더 많아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청년들이 떠나고 농어촌의 고령화로 외국인 근로자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질 거란 뜻이다. 외국인 근로자를 수용하는 따뜻한 공동체 문화 형성이 필요하다. 외국인 근로자가 인구소멸지역 등에서 일하며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음도 잘 인식해야 한다.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포용적 자세가 무단이탈 문제에 반드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2025-11-18

부동산 계급론

서울 전체 아파트 가격에서 서울의 요지로 손꼽히는 강남 3구(강남, 서초, 송파구)의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43%에 달한다고 한다. 서울 전체 25개 기초자치단체 중 강남 3구의 가치가 거의 절반에 가깝다. 놀라운 편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부동산 조사기관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올 6월 현재 기준으로 강남 3구의 아파트 시가 총액은 744조원이다. 서울의 부자는 강남 3구에 다 몰려 살고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파트 매매가격이 평당 1억원을 호가하는 우리나라 최고가 아파트가 집중된 곳이다. 그래서 한번 강남 3구로 이사 가면 나오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얼마 전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 서울 강남지역 고교 졸업생의 서울대 입학을 제한하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 적이 있다. 실제로 서울대 합격생의 거주지를 살펴보니 아파트 가격이 비싼 순으로 합격자가 많았다고 한다. 최근 서울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자 부모들이 자식에게 아파트를 물려주는 증여가 크게 늘고 있다. 강남 3구에서 올해 증여한 부동산만 1452건에 달한다. 남 줄 것 없이 자식에게 물려주는 부모 찬스의 케이스다. 최근 서울의 고급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입주민 간 결혼 주선이 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부동산 계급론이 회자되고 있다. “새로운 귀족계층의 형성이다” “아파트로 신분 등급을 매긴다”는 등의 비판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한편에선 신원이 확실하고 자산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날 수 있는 장점도 있다는 긍정론도 있다. 어쨌거나 부동산을 신분으로 보는 인식이 커져가는 세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11-18

심상(心像)요리사와 마음경영

기업의 성과는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많은 조직은 설비, 공정, 데이터는 관리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의 마음은 방치한다.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고, 숫자로 측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조직이 멈추는 대부분의 순간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식고, 불안이 쌓이고, 동기가 꺼질 때 찾아온다. 이 마음을 읽고 요리하듯 다루는 리더를 우리는 심상(心像)요리사라 부른다. 현장의 사람들은 늘 다양한 감정을 품고 출근한다. 불안, 분노, 억울함, 기대, 희망, 무기력 등 이 감정들은 공정 품질, 안전사고, 협업, 개선 활동의 결과를 좌우하는 요소다. 리더는 단순한 관리자나 지시자가 아니라 감정의 온도를 조절하는 요리사여야 한다. 마음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하면 불량은 급증하고 소통은 막히며, 혁신은 사라진다. 마음을 잘 다루는 리더가 등장하면 생산라인은 놀라울 만큼 살아난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는 심상‘을 요리하듯 다루어 긍정적, 창조적 상태로 변화시키는 리더가 심상요리사인 것이다. 구성원의 감성, 심리, 동기를 경영자원으로 보고 이를 정성스러운 요리처럼 관리, 조율하는 리더십 방식이다. 마음의 재료(감정·욕구·불안·열망)를 읽고 다루는 리더이다. 개인과 조직이 보고 싶은 미래를 보이게 만드는 역할, 강압이 아닌 마음의 상태를 터치하여 구성원의 행동을 바꾸는 리더이다. 마음 경영은 구성원의 심리, 감정, 관계, 동기 등을 경영의 핵심 요소로 보고,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성과를 연결하는 경영방식이다. 심상요리사와 마음경영을 잘하기 위해서는 첫째, 리더 개인의 조건이다. 구성원이 다가갈 수 있는 ‘심리적 난로‘처럼 온화한 정서, 지적하기 전에 먼저 정서적 지지가 필요하다. 말 뒤에 숨어있는 감정과 바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심리적 경청 능력과 분노, 불안, 갈등을 익혀서 생산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감정 요리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조직 상황의 조건이다. 의견을 말해도 공격받지 않는 심리 안전성의 환경이 필요하다. 실수는 숨기는 것이 아니라 학습의 재료로 삼는 조직문화이다. 신뢰 없는 마음경영은 형식적 이벤트로 전략한다. 리더와 직원 간 신뢰 구축이 필수요건이다. ‘작은 개선, 빠른 인정‘ 문화를 형성하도록 현장 중심 피드백 시스템과 태도, 협력, 소통을 성과에 반영하는 조직 분위기가 필요하다. 마음경영을 잘하여 일류기업으로 가고 있는 사례는 많다. 도요타는 문제를 지적하기 보다 감정의 긴장 완화, 개선 활동 활성화라는 원리를 사용한다. 팀장들은 ‘마음 요리사‘ 역할을 하고, 작업자와 매일 감정 체크 대화를 한다. 그 결과 불량률 27% 감소, 개선 제안 2배 증가, 라인 사고 40% 감소 등 감정이 안정되면 손/머리/협업이 자연스럽게 정교해지는 속성이 있다. 사람 마음의 상태, 감정을 요리하듯 다루는 리더, 감정, 심적 동기를 경영 핵심 자원으로 관리하는 마음경영을 통해서 신뢰를 잇는 공동 발전의 디딤돌을 만들어 긍정조직 기반으로 훌륭한 기업문화로 나아갈 수 있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11-18

인공지능과 인간의 마음

인공지능(AI)은 이제 우리의 생활 곳곳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복잡한 데이터 분석, 방대한 정보 처리, 패턴 인식 등 여러 측면에서 인간의 인지능력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압도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AI가 그려내는 그림이나 작곡하는 음악, 심지어 논리적으로 구성된 글쓰기 능력은 이미 인간 지능의 모방을 넘어선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놀라운 기능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에게 결여된 요소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가진 마음(Consciousness·Mind)이다. 우리가 AI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지능(Intelligence)‘은 주로 문제 해결 능력, 학습 능력, 논리적 추론 능력 등 이성적인 기능을 의미한다. AI는 알고리즘과 데이터라는 연료를 통해 이 지능을 극대화한다. AI의 작동 원리는 본질적으로 계산(Computation)이며, 이는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정해진 규칙과 입력값에 따른 출력값으로 귀결된다. 반면, 인간의 마음은 단순히 계산 가능한 능력의 집합이 아니다. 마음은 주관적인 경험, 감정, 자아 의식, 도덕적 판단, 그리고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의미 부여를 포함한다. 인공지능이 비록 훌륭한 시를 쓴다고 할지라도, 그 시를 읽고 진정한 슬픔이나 환희를 느낄 수는 없다. AI는 수많은 고통의 데이터를 분석할 수는 있지만, 그 고통이 나의 일인 것처럼 아픔을 경험하지는 못 한다. 이것이 바로 계산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주관적 경험의 영역이다. AI가 인간 지능의 많은 부분을 대체할수록, 인간은 AI가 할 수 없는 것에 집중하여 우리의 정체성과 가치를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우선으로는 공감(Empathy)과 관계를 들 수 있다. 마음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나의 것처럼 느끼고, 이를 바탕으로 신뢰와 유대를 형성하는 능력의 원천이다. AI가 인간의 대화를 분석하여 적절한 반응을 보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감정적 교류는 마음이 있는 인간만의 영역인 것이다. 다음으로는 진정한 창조성(True Creativity)이다. AI는 기존 데이터의 패턴을 조합하여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소위 ‘모방적 창조‘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성은 예상치 못한 통찰, 고통스러운 경험의 승화, 그리고 존재론적 질문에서 비롯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을 가진다. 이는 감정적 동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셋째는 윤리적, 존재론적 성찰이다. AI는 프로그래밍 된 윤리규칙을 따를 뿐이지만, 인간은 왜 이 규칙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되묻는다. 이러한 성찰이야말로 인간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힘이다. AI는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인간 삶의 도구이자 동반자다. 우리의 지적 능력을 확장하고 삶을 편리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지,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마음을 가진 인간의 몫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데이터와 논리를 넘어선 마음에 대한 교육과 성찰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11-18

스팸문자

아침이라는 말은 언제나 새롭고 부드럽지만 완전히 나에게 결속되지는 않는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희끄무레한 빛은 또 하루의 시작을 알리지만 그보다 내게 먼저 도착한 것은 금속이 주는 진동이다. 침대맡에 놓아둔 전화기가 잠결에 취한 자아를 흔드는 떨림, 발신자가 불투명한 문자다. 읽어보기도 전에 나는 그것이 스팸이라는 것을 짐작한다. 이제는 번호도 낯설지가 않다. 발신인은 무의미하고 문장 구성은 비슷비슷하며 메시지가 담고 있는 내용은 늘 내가 알고 쉽지 않은 정보들이다. 나를 전혀 모르는 이가 나를 향해 보낸 것도 아닌 허공의 잔해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기어이 내 하루의 초입을 건드린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작은 균열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한 번 차단하면 끝날 것 같은데 스팸은 이상할 정도로 끈질기다. 오늘 막아낸 번호는 내일 새로운 번호로 다시 찾아오고, 그 다음 날에는 전화번호 뒤의 한 자리만 바꿔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들이 왜 ‘스팸문자’를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받아들이는지 좀 알 것 같다. 차단이 완성이 아니라 막아도 또 다른 모양으로 다시 온다는 사실을 체감하니까 그런듯 하다. 오늘은 이 스팸문자가 우리의 인생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일상의 틈새마다 우리는 계획에 없던 염려를 한다. 마음속 깊이 저장하고 싶지 않은 걱정들, 원치 않는 근심들, 때로는 스스로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발신된 불안의 파편들. 그것들은 우리가 허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조용히 침입한다. 어디에도 원치 않는 감정들이 있다. 잠잠하다고 느낀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정체 모를 불안감이 메시지처럼 도착한다. 오늘은 아무런 위협도 없었고 별다른 사건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유 없는 가속이, 심장을 자극한다. 마음은 물결처럼 잔잔해지는 듯싶다가도 바람 없는 날에 갑자기 일어나는 파도처럼 스스로를 흔들어 놓는다. 가끔 나에게 묻는다. “이제는 좀 평안해져도 되지 않나?” 그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평안을 방해하는 건 외부의 어떤 거대한 힘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 있는 스스로 발신한 스팸문자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무자비한 발신인이 된다. 이미 끝난 과거의 실수를 싸늘한 문장으로 다시 출력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재난을 마치 공지사항처럼 보내고, 타인의 말 한 조각을 확대 해석한 뒤 그것을 불필요하게 꾸며서 새 메시지를 만들어 마음의 우편함에 꽂아 넣는다. 우리는 마음속 편지함을 불필요한 감정들로 가득 채운다. 삭제하지도 못한 채, 또 차단하지도 못한 채 묵혀둔다. 그리고 어느 날, 마음은 견디기 어려운 무게로 가득차 오른다. 그럼에도 희한하게 그 메시지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에는 오래 침묵한다. 불안의 정체가 스스로 만든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소한 흔들림에 마음이 지배되는 순간들을 반복하면서도 스스로가 발신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마지막에야 깨닫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스팸문자 차단의 권한은 우리의 손 안에 있다.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밤들이 있다. 모든 일이 너무 무겁고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불안은 고장난 메시지 발신기처럼 계속 울린다. 그 불안을 열어볼 것인지, 바로 지울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 하루의 향을 결정한다. 예고 없이 종종 찾아오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의 자리가 넓어졌다면 불안에게 내어줄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중년을 맞으며 조금씩 배워간다. 텅 빈 시간 속에 간헐적으로 날아드는 알 수 없는 진동들, 이전처럼 급히 열어보지 않으려 한다. 삶은 끝없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어떤 것들은 분명 소중하지만 어떤 것들은 분명 스팸처럼 자리만 차지하며 나를 소란스럽게 만든다. ‘삭제’ 버튼을 누르고 그것이 실제 위협인지 혹은 마음의 기만인지 구별하는 일은 나의 몫이다. 몇 번이고 스팸문자를 보내온다 해도 언제든, 또다시 차단할 수 있기에 이제는 괜찮다. 그 반복 속에서 평안의 깊은 자리는 더 가까워질 것이다. /김경아 작가

2025-11-18

가브릴로와 블랙핸드 몰락

세르비아 비밀조직(기실 비밀도 아니었지만) ‘블랙핸드’가 추진했던 대세르비아주의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살해하면서 1차 세계대전의 빌미가 된다. 배후에는 세르비아 블랜핸드가 있었다. 블랙핸드 소속 탄코시치 소령은 가브릴로 일행에게 세르비아 산 수제폭탄 여섯 발, 브라우닝 리볼버 권총 네 자루를 건넨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오스트리아에 경종을 울려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대세르비아주의 기상을 드높여 잠든 세르비아민족을 깨우기 위한 목표였다. 보스니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계 가브릴로는 가난한 고향을 떠나 형이 사는 도시 사라예보로 왔다. 상업학교에 다니던 가브릴로는 우연한 기회에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무정부주의자들 시위를 구경하게 된다. 이때 가슴에는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조국이라는 원대한 이상이 요동쳤다. 블랙핸드에 몸을 담으며 본격적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폭탄 발포와 사격술을 연마한 그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옮겨 생활한다. 한편 강성일로를 걷는 블랙핸드는 세르비아 정부와도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던 터였다. 이때 세르비아는 페타르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둘째 아들 알렉산다르가 이어받았다. 대세르비아주의의 실현을 위해 블랙핸드는 오스트리아 요인 암살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하지만 어수룩한 계획, 미숙한 폭탄 투척과 총질로 매번 실패로 끝났다. 가브릴로가 시도했던 일곱 번째 암살 시도 역시 어수룩하기 짝이 없었다. 1914년 6월 28일 때마침 세르비아의 수호신이자 성자 성 비투스의 날,(525년 전 1389년 6월 28일 세르비아가 코소보 ‘검은 새의 들녘’에서 오스만터키제국에게 최후의 일인까지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같은 날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암살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오스트리아는 국경수비를 강화하면서 검문검색을 시도했다. 그러나 블랙핸드는 국경수비대 소속 장교와 세관원을 매수해 가브릴로 암살단 일행을 사라예보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가브릴로 일행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기차역에 도착했다. 가브릴로의 동료 네델코가 던진 폭탄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타고 있던 차량 밑에 떨어지면서 경호원을 포함해 오스트리아인 16명이 중상을 입었지만, 황태자 부부는 멀쩡했다. 도망친 가브릴로는 사라예보 시내를 흐르는 밀랴츠카강의 라틴 브리지 인근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운명은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돌연 예정된 길을 벗어나 중경상을 입은 호위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가브릴로가 황태자가 탄 차량을 발견하고 뛰쳐나가 총을 쏘았다. 부부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이를 확인한 가브릴로는 사이안화물 성분의 캡슐을 삼켜 자살을 시도했으나, 캡슐마저도 불량품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결박당한 가브릴로는 미성년자란 이유로 사형은 면했으나, 법원은 20년 형을 선고한다. 일이 이렇게 커질지 어찌 알았을까. 감옥에서 자신이 벌린 일로 인해 세계대전이 일어난 사실에 무척 괴로워했다. 결국 가브릴로는 감옥에서 결핵을 앓던 중 25세의 나이로 죽는다. 영원할 것 같았던 블랙핸드, 즉 검은손 조직도 위기를 맞는다. 세르비아 왕 알렉산다르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블랙핸드와 갈등 관계를 이어갔다. 알렉산다르는 반전을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먼저 국민 여론을 자신 편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블랙핸드 폭정에 언젠가 세르비아가 국제사회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변할 것이라며 여론을 환기했다. 당장 세계대전이 블랙핸드에 의해 발발하자 그의 설득력에 힘이 실렸다. 블랙핸드와 맞설 대안으로 친위대 ‘화이트핸드’를 창설한다. 우리말로 ‘흰손’, 혹은 ‘백수단’ 쯤 되겠다만, 어쨌거나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의 강경노선은 군부 내 반대파를 양산했고, 진급이나 요직에서 소외된 군인들이 공공연히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알렉산다르는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이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면서 조직을 탄탄히 했고, 또한 대령이 수장인 블랙핸드는 언젠가 왕의 친위대인 화이트핸드에게 밀릴 것이라며 ‘왕정 대세론’을 퍼트렸다. 세계 1차 대전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1917년 초,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군부 내 일부 세력들은 화이트핸드로 갈아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왕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배후에 블랙핸드가 있다는 빌미를 씌워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을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을 중심으로 블랙핸드 핵심인물 공개재판이 1917년 4월 초순부터 두 달간 열렸다. 핵심은 민족 반역자 처단이었다. 알랙산다르는 오스트리아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 암살은 이들이 배후에 있다고 만천하에 알렸다. 6월 26일, 디미트리예비치가 죽으면서 외친 말은 여전히 세르비아인의 가슴에 살아서 요동쳤다. “대세르비아여 영원하라!”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11-18

중국 관광객의 빛과 그림자

서울은 물론 경주와 부산, 제주도까지 한국 어디를 가더라도 중국인 관광객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시대다. 특히, 이름난 명소나 인기 좋은 여행지 식당에선 들려오는 중국어를 피해 가기 어려울 정도. 늘어나는 중국 관광객 숫자는 통계로도 증명된다. 한국관광공사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이후인 2022년부터 폭증하기 시작한 중국인 관광객은 지난해 460만 명에 이르렀다. 이는 2023년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지난 9월부터 시작된 중국 단체관광객 무비자 입국제도 시행 이후엔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중국인이 더 많아졌다. 서울을 포함한 다양한 관광지를 돌아본 중국 젊은이들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서도 한국 여행에서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세칭 ‘한국병’을 앓는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중국의 미래세대가 한국을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우리의 문화와 생활패턴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건 나쁘지 않은 신호다. 하지만, 한국인들 사이에선 아직 중국 여행객을 마냥 우호적인 눈길로만 바라보지는 않는 시각이 분명 존재한다. ‘시끄럽고 질서와 매너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로 중국인을 낮춰 보는 것이다. 관광지 금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 용변을 보는 등 중국 관광객들의 추태는 잊을 만하면 방송이나 신문 지면을 장식한다. 그런 까닭에 중국인이 방문하는 걸 달갑지 않게 여기는 카페나 식당도 있다고 한다. 세상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늘어나는 중국인 관광객 문제도 마찬가지. 여행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를 어디서건 명심해야 혐중(嫌中)이라는 그림자가 걷히지 않을까 싶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1-18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

아제르바이잔 대사님,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디아스포라청 지원재단의 집행 이사 아크람 압둘라예프, 이만희 한-아제르바이잔 의원 친선협회장, 그리고 서울대와 연세대의 아제르바이잔 유학생들, 또 많은 분들이 오셨다. 사회자 임성희 연구소장이 묻는다. “아제르바이잔은 아직 한국에서 잘 알려진 나라가 아닙니다. 아제르바이잔 문학을 한국의 독자들과 대중에게 어떻게 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한국은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세계 문학의 일원으로 합류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지요. 그러나 오랫동안 한국 문학을 해외에 알리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시인 베흐티야르 와합자대의 퀼리스탄의 시, 또 니자미 간자비의 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 해체 이전 ‘검은 1월’ 사태 등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지닌 나라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담은 문학 작품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인의 삶과 현실적 고민을 전한다면, 한국 독자들에게 큰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아제르바이잔과 한국 간의 학술 및 문화 교류의 미래 전망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답. “저는 아제르바이잔에 두 번 가보았습니다. 두 번 모두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국제학술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 학자분들이 다른 나라 학자들의 논문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하는 것이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반은 농담이지만, 제가 ‘아제르바이잔 식 토론’이라고 이름 붙인 토론 방식이었습니다. 발표자의 발표 내용에 대해서 단순히 소감을 말하거나 질문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풍부하게 개진하고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내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온 학자들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하고 또 흥겹게 노래 부르는 것을 보면서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국제적인 문화 유대를 가진 나라임을 실감했습니다. 한국도 그 유대관계 속에 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유라시아 네트워크를 통해서 새로운 문화의 미래가 열릴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마심리 레일라와 유수진 시인이 함께 번역한 서사시 책에는 우리의 ‘나뭇꾼과 선녀’ 같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아제르바이잔은 투르크 계열의 민족. 초승달과 샛별이 국기에 그려진 나라는 우리와 오랜 연원을 같이 하는 민족이다. 그러고 보니 이 아세르바이잔 같던 때가 1년이 조금 못 되던 때다. 어수선한 나라를 뒤로 먼 나라에를 비행기를 갈아타고 갔었다. 고독은 깊을수록 좋다. 그것이 삶을 새롭게 생성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돌아왔는데 이 ‘고르구드 아버지의 영웅서사시’ 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만 아니고 지난 1년은 극심한 통증 속에서 모든 일을 정신없이 처리해야 했다. 정신을 비워두지도 못한 채 밀려오는 일들에 시달리며 고통을 건너뛰려 했다. 두 사람이 어찌나 ‘닥달질’을 하는지 삼 년쯤 감수했다고나 할까? 이제 책이 나오고 이렇게 출판기념회까지 하게 되니, 새삼 사연 많은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어려운 때는 뭔가 잘 보이지 않지만,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11-17

국회 예결소위 가동···‘TK 국비’ 이상없나

국회가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증·감액 심사를 본격화하면서 각 지자체의 ‘국비확보 전쟁’이 가열되고 있다. 국회 예결특위는 18일부터 예결소위를 가동해 세부 사업별 증·감액 심사에 들어간다. 예결소위는 사업별 예산을 꼼꼼하게 따져 감액·증액 규모를 결정하기 때문에 국회 예산심사의 ‘최종 관문’으로 불린다. 예결소위 의결안이 나오면 종합심사와 본회의를 거쳐 내년 예산이 확정된다. 15명의 예결소위 위원 중 대구·경북(TK) 출신은 민주당 임미애 의원(비례대표), 국민의힘 박형수(의성·청송·영덕·울진)·김기웅(대구 중·남) 의원이 합류했다. 이들 의원들은 TK지역 국비 파이를 키우기 위한 최전선에 서게 됐으며, 여야가 ‘원팀‘으로 예산확보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지난 3일 경북도청에서 열린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예산정책협의회에서 내년도 국비 확보 목표액 달성을 위해 정부 예산안에 미반영 됐거나 추가지원이 필요한 국비 증액을 요청했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이날 제시한 현안 예산들은 하나같이 중요하다. 대구시는 850억원 이상 국비 증액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공지능 전환 혁신 거점 조성 지원과 산업 인공지능 전환 연구원 설립, 동대구벤처밸리 인공지능 산업 구축 등이 대표적이다. 재원 조달에 난항을 겪고 있는 TK신공항 건설사업도 내년 예산에 토지 보상비 등 국비 2795억원을 확보하지 못하면 당장 사업 착수가 불가능하다. 경북도는 포스트 APEC 사업과 산불 피해지역 구제, 신공항·영일만항 2포트 프로젝트 예산을 증액시키거나 현 수준으로 지켜내야 한다. TK지역 국비확보에는 여야의 대치 국면과 다른 지자체의 견제, 재정건전성 기조에 따른 평가 강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예결소위 가동 기간 지역 국회의원은 물론, 지자체들도 일심동체가 돼 예산 확보에 총력을 쏟아야 한다. 특히 시·도 공직자들은 사업의 당위성과 시급성을 담은 치밀한 자료를 준비해서 소위위원들과 정부 관계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2025-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