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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구소멸위기…다양한 해법 찾는 지자체들

봉화군이 ‘봉트남’이라고 불리는 베트남 테마 마을을 만들어 관광객 유치에 나선다. 봉성면 창평마을에 있는 베트남 유적지인 충효당을 테마로 주변에 관광지를 조성해서 베트남 이민가족과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전략이다. 5년간 소요되는 사업비 120억원은 정부가 지원해 준다. 인구정책 패러다임을 외국인 이민자·관광객 유치 쪽으로 전환한 봉화군의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창평마을 충효당은 베트남 역사상 최초로 장기 집권한 리 왕조 후손이 정착한 곳으로, 국내 베트남 이민자와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성지’로 통한다. 봉트남에는 베트남 테마 마을인 ‘THE 봉트남’과 관광객 커뮤니티 공간인 ‘작은 대사관’, 그리고 ‘K-호안끼엠 호수’가 들어서며, 해마다 베트남 축제도 열린다. 봉화군뿐만 아니라 변변한 기업을 찾아보기 힘든 경북도내 대부분 농어촌 지자체는 최근 인구소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영양군은 지난 3월부터 미얀마 난민가족을 유치하기 위해 정부와 협의하고 있다. 영양군은 섬 지자체(울릉군)를 제외하고 전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곳이다. 지난달 기준 영양군 인구는 1만5281명이다. 현재 4개의 교정시설이 있는 청송군은 여성교도소 유치에 행정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최근 여성 전용 교정시설의 확충 필요성이 대두되자, 윤경희 청송군수가 발벗고 나서 법무부 장관과 교정본부장에게 군민들의 교도소 유치의사를 전달했었다. 봉화·영양·청송 모두 인구소멸이 가시권 내로 들어온 지역이다. 4월말 현재 봉화군 인구는 2만8588명, 청송군 인구는 2만3615명이다.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으로 농어촌 인구 감소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유입인구가 거의 없다보니 자고 일어나면 사람이 줄어든다. 청년인구를 유입시킬 수 있는 일자리가 없는데다 문화·의료 등 기반 시설이 열악한 것도 한몫한다. 지방소멸 어젠다는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국정과제 1순위로 삼아야 한다. 국토균형발전과 지방소멸 문제를 간과한 채 어디서 국가경쟁력을 찾겠다는 것인가.

2025-05-07

대통령의 자격

대한민국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정권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 갈등의 골은 깊고 세계질서는 급변하며 기후 위기와 인구구조의 변화는 복합적인 과제를 던지고 있다. 전환기적 시대에 국민이 요구하는 대통령은 행정가나 정치인을 넘어,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두 번씩이나 대통령을 탄핵했던 불행한 역사를 쓰라린 배경으로 하면서 적어도 이번에는 선택의 결과에 후회하지 않는 투표의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내일의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첫째 덕목은 ‘청렴성과 도덕성이어야 한다. 권력의 중심에 설수록 유혹은 커지고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할 욕심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대통령은 법적 기준을 넘어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국민이 신뢰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국정을 원만하게 이끌 수 없으며 권위는 명령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에서 나온다. 둘째는 공감 능력과 소통하는 태도다. 한국 사회는 지역과 세대, 성별과 사회계층 간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다양한 목소리와 입장을 조율하여 대변하는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소통하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비판에 열린 자세로 응답하는 지도자만이 국민통합을 이끌어 낼 터이다. 셋째, 미래지향적 비전과 정책역량은 대통령이 현상을 유지하는 관리자나 조정자 역할을 넘어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로서 반드시 긴요한 자질이다. 기후변화와 기술 발전, 안보 위협과 국익 확보 등 복합적인 글로벌과제에 대응하려면 단기적 안목보다 긴 호흡의 관점에서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표를 얻기 위한 공약 나열이 아니라 실행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자세가 요구된다. 대통령은 국제감각과 외교적 역량도 갖추어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날로 복잡해져 가며, 미중 갈등, 북핵 문제,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등은 대한민국의 미래와 직결된다. 국제사회에서 국익을 지키고 주도적 역할을 하려면 세상의 흐름을 읽는 통찰과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펼칠 리더십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 나아가려는 겸손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며 국정운영의 궁극적 목적은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다. 실패를 인정하고 교훈을 얻는 리더, 자신이 아닌 나라의 발전을 우위에 놓는 리더야말로 진정한 대통령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그 꽃을 제대로 피우기 위해 유권자의 안목과 결기가 중요하다. 대통령 후보의 말솜씨나 이미지에 휘둘리기 보다 어떤 가치와 철학을 가졌는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지도자인지를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선거 일정 동안 불꽃 같은 눈초리로 가늠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역사와 민족 앞에 드러낼 중차대한 의미를 깨우쳐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다리를 성공적으로 건너온 대한국민의 앞길이 평탄하기 위하여 자질과 역량을 갖춘 리더를 선택해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5-07

출산 후 몸과 마음의 회복

출산이 끝났다고 해서 몸과 마음이 곧바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서구 정신의학계는 이 거대한 전환기를 사춘기에 견줄 ‘마트레센스(matrescence)’라 부르며 산후 변화를 단순한 회복이 아닌 성장 단계로 재정의한다. 분만 직후 여성의 몸은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급격히 떨어지며 냉증, 관절통, 과한 발한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난다. 한의학은 이를 혈허와 어혈이 겹친 상태로 설명하면서 어혈을 풀고 양기를 돋우는 생화탕, 오로탕류를 산후 첫 두 주에 집중 투여해 왔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산후풍의 증상이 심하면 계지가황기탕이나 황기계지오물탕의 가미등으로 치료가 가능하다. 심리적 변화는 더 미묘하다. 산모의 절반가량이 ‘베이비 블루스’를 경험하고 15% 정도는 산후우울로 이어진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최근 뇌 영상 연구들은 이 시기의 회로 재편이 장기적으로는 회복탄력성을 높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때 관리를 잘하면 다시 건강상태를 회복하고 좀 더 나은 정신적 성숙을 경험할 수 있다. 한의학은 혈허·담음을 배경으로 불면과 정신영역을 설명하며 귀비탕·가미온담탕으로 심장과 비장을 보하고 담울을 풀어 왔다. 백회·신문·삼음교에 침을 놓아 자율신경을 조절하면 심박변이도가 의미 있게 개선된다는 국내 데이터도 있다. 회복 과정은 시기별로 겹쳐 흘러간다. 분만 직후 나흘간은 체온 유지와 어혈 배출이 핵심이기에 따뜻한 미음과 계지탕의 어혈방을 사용하고 유즙 분비를 돕는 가벼운 흉부 마사지가 권장된다. 이어지는 한 달은 인대와 근막이 늘어나 관절통이 잦으므로 황기계통으로 몸의 기력을 보해주는 처방을 사용한다. 출산 후 여섯 달쯤 되면 수유, 수면 리듬이 가장 불안정한 정점에 이르는데 귀비탕 계열 한약으로 기억력과 수면 깊이를 보강할 수 있다. 식생활은 기혈을 보하면서 소화가 편한 오리고기와 붉은 살 생선 장-뇌 축을 안정시키는 발효 곡물·콩이 핵심이다. 2023년 국내 조사에서 산후 여성의 70% 가까이가 비타민D 부족 상태였는데 하루 30분 햇빛 노출이 세로토닌과 골밀도를 동시에 높여 주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배우자 역시 옥시토신과 테스토스테론이 변하며 양육 스트레스에 취약해지는데 부부가 함께 호흡 명상이나 가벼운 산책 루틴을 만들면 관계 만족도와 공감 지수가 유의하게 높아진다. 이는 궁극적으로 산모의 회복 속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현재 국내 산후조리원은 편의 서비스에 머물러 치료 연속성이 약한 편이다. 특히 환자가 아프거나 산후풍과 같은 병이 있는 경우엔 그 병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라 근처 병원이나 한의원에 찾는 것이 우선이다. 산모는 모유수유도 해야 하기 때문에 효과가 좋고 안정성이 입증된 한방 치료를 받은 것이 나은 선택이다. 본인 몸에 맞는 치료로 몸이 건강해지면 마음과 정신이 같이 건강해진다. 결국 출산은 원래 모습으로 복귀하는 관문이 아니라 새로운 자아를 빚어 가는 길의 시작이다. 어혈, 혈허, 담음 이론과 뜸, 한약 같은 생활 요법이 호르몬, 뇌 신경 과학과 손을 맞잡을 때 한방 산후 케어는 모성과 삶 전반을 새롭게 조직하는 통합적 성장 기술이 될 것이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5-07

山門이 열리다

희양산 이마가 잔설처럼 하얗다. 바위가 거대한 성(城)처럼 보여 그 풍경이 시원하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참나무들이 자리를 잡았고 구부러진 소나무가 휘영청 밝은 달빛 받아 수묵화에서 걸어 나온 듯 담담하다. 그 곁에 봉암사가 봄빛을 받아 햇살에 노곤하다.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산문폐쇄를 하여 수도정진만을 하는 처소이기에 검문초소의 통과의례를 거치고서야 봉인을 푼 산사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길 따라 흐르는 계곡에는 겨울이 녹아내려 시냇물 소리며 맑은 기운이 청아하기까지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곱게 단장된 기와지붕이 열두 폭 치마를 펼쳐 둔 듯이 이어진다. 일 년에 아흐레만 산문을 연다는 봉암사. 해방 이후 불교계에서는 일대 선풍(仙風)이 불기 시작했다. 봉암사에서는 결사(結社)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결사는 불가의 스님들이 뜻을 모아 불교 내부의 잘못과 타락을 개혁하려는 종교개혁운동을 말한다. 천태종의 백련결사,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 당대의 고승들이 모여 한 봉암결사가 그것이다. 백련과 정혜는 고려 때의 일이지만 봉암결사는 해방 후 두 해가 지난 후의 일이다. 그해 시월, 봉암사에서 성철 스님과 지운, 보문, 우봉 스님이 ‘부처님의 법대로 살아보자는 뜻을 세웠다. 그로부터 3년간 결사에 참여한 오십여 명의 스님들은 가부좌를 틀고 뼈를 깎는 수행에 들어갔다. 밭을 매고 나무를 하고 동냥하며 수행하기를 반복했다. 어느 하나라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고 소홀하면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과 일본의 탄압을 넘어서는 불교 근간을 세우리라는 한국불교의 혁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봉암 결사가 불교계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발우공양이며 금강경, 반야심경의 독송 의식도 결사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절에서나 이루어지는 절차들이 결국 이곳에서 시발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희양산의 희끗한 봉황의 머리를 둔다면 구왕봉과 곰틀봉이 좌우의 날개가 된, 이 자리가 당대 고승들의 수행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산사의 지붕은 결 따라 곱다. 처마 끝 풍탁은 높이 매달려 지나가는 바람을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홀로 그 속을 채워나가는 일이다. 숱한 밤을 지새우며 경전을 읽고 염불을 외며 하나의 길을 뚫고자 했을 승려들이 그려진다. 하나가 된 승려들도 창호지로 배어들 봄꽃의 향기에 취하고 벌과 나비가 희롱하는 여름 꽃에 시선을 빼앗길 만도 할 터인데, 저벅저벅 고무신 코만 보며 걷지 않았을까. 가슴속에 이는 숱한 불꽃과 바람을 잠재우며 단단히 쪼고 매었을 마음 자락이 오늘은 바람에 덩그렁 덩그렁 울리는 풍탁의 흔들림조차 산사를 향한 노래가 된다. 철없는 아낙의 불심이야 경전 한 장만 못 하겠지만, 불전에 두 손 모아 가족을 향한 끝없는 염원을 내려다보신 부처님께선 그래도 안쓰러운 마음에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주시지 않았을까. 한발 한 발 내딛는 발자국마다 살아온 나날이 물집을 남긴다. 좋은 일이건 슬픈 일이건 노엽고 괴로운 일이든 쌓이고 쌓여 인생이다. 그 인생길에 한 겹씩 쌓아 올린 업보라는 것이 저 얼음장처럼 차고 단단해 봄비에도 녹지 않겠다. 그래도 아침이면 조금씩 조금씩 깎아보려고 업장 녹이는 일에 정진한다. 때론 새들의 노랫소리가 천당인 듯하고 맑은 정화수 한 사발이 무거운 욕심을 씻어내니 네 귀퉁이 사자조차 정겹다. 나무 사이로 일어나는 햇살에 전신이 나긋해지며 여기까지 온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희양산 자락의 품은 신묘하다. 저곳에서 내려오는 정기야말로 희고 고와 세상을 깨끗하게 덮을 만하다. 그 앞에 서 있자니 세상을 지나며 잡힌 물집이, 겹겹이 쌓인 업보가 조금씩 허물어진다. 허물어지고 부서진 자리로 청아한 바람 한 점으로 풍탁이 안부를 묻는다. 오늘의 염려를 여기 내려놓고 가라고. 나는 소복이 내렸을 법한 그 기를 홀로 느끼며 대웅전의 부처님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그윽하다. 제 몸을 태워 피워 올리는 향(香)내여. /배문경 수필가

2025-05-07

어느 봄날 - 기계면 도원정사

배롱나무 꽃 피는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낮잠을 못 자겠다 배롱나무 꽃 돋는 소리가 얼마나 켜켜이 쌓이는지 술을 못 미루겠다 봄날은, 마음의 멍울이 망울로 돋고 비와 바람에 꽃이 피고 져서 아지랑이도 서로 비비고 꼬이면서 온도를 재촉하며 순서도 명분도 없이 무분별하나 조용한 소요를 양분 삼아 투명하게 바쁘게 서두르고 있다 그 욕심의 작은 서막(序幕) 혹은 사람의 길은 아닐지 다행인 것은 외롭고 가난해도 왠지 더 윤택해지는 봄날의 느낌 햇살 한 조각 허투루 낭비 않는, 가만히 있어도 촘촘하게 흐르는, 그 봄날의 역학(力學)을 도원정사에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 한 사람이 있었다.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고 싶었다. 등대처럼 끊임없이 수신호를 보내는 사람이고 싶었다. 배경이 되고 노을이 되고 싶었다. 혼자면서도 더불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어머니는 시집을 간다고 한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5-07

격동의 계절 그리스 근현대 ①발칸전쟁과 1차 세계대전

발칸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로서는 러시아의 발칸침략에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국에서 배타적 민족주의, 광신적 애국을 주창하는 징고이즘(JINGOISM)이 분위기를 타면서 러시아 타도 운동이 불길처럼 번졌다. 기세에 눌린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가 요구하는 대로 협상 테이블에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고, 산스테파노조약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유럽 정세는 또 다시 먹구름 속에 들었다. 그리스 독립정부도 시류에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예견했듯 초대국왕 오토가 그리스 국민 정변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뒤이어 강대국에 의해 떠밀리다시피 왕위를 이어받은 덴마크 출신의 게오르기오스 1세가 입헌군주정과 흡사한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게오르기오스 1세는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려 대그리스주의라는 향수에 젖은 국민 신뢰를 얻는다. 1897년 국민 지지 속에 오스만터키와의 전쟁을 불렀다. 게오르기오스 1세는 아들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군대를 주어 출전시켰다. 그러나 의기만 충만했지 전쟁준비는 부족했다. 1897년 4월 그리스는 터키에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터진 후에야 패배를 인정했다. 크레타를 국제자치령으로 인정해야 했고, 영토 일부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00만 터키 파운드를 전쟁 배상금으로 물어야 했다. 그리스 본토는 온전했으니 그만하길 다행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오스트리아가 신생강국 도이칠란트의 뒷배를 믿고 발칸반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이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발칸의 나라들, 즉 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등은 1912년 힘을 합치기 위해 발칸동맹을 맺으면서 터키와 오스트리아 이 둘을 동시에 견제했다. 드디어 발칸동맹과 터키와의 한 판 승부, 1차 발칸전쟁이 벌어졌다. 처음 터키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나라는 스스로 전사의 나라 몬테네그로였다. 이에 발칸동맹국이 하나 둘씩 합세하자 예상을 뒤엎다. 대제국 오스만터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유럽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기실 터키 주력부대가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 한 판 전투가 벌어지던 중이라 잔여 병력을 상대로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터키로서는 뼈아픈 패전이었다. 이로 인해 현재 터키 국경이 된 이스탄불을 비롯해 인근지역만 남기고 500년을 호령했던 대제국은 영광의 이름만 남게 된다. 제2차 발칸전쟁은 욕심이 부른 난타전이었다. 1913년 6월 29일 불가리아는 발칸의 맹주라는 장대한 꿈을 품고 전쟁을 일으킨다. 불가리아는 기습적으로 마케도니아를 선점해 넓은 영토를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 불가리아와 경쟁관계에 있던 루마니아도 관망 자세에서 승리가 빤해 보이는 곳을 숟가락을 걸쳤다. 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의 영원한 맞수로 생각했던 터키까지 발칸 동맹군에 가담했고, 전사군단 몬테네그로도 빠질세라 거들었다. 그러자 사면초가에 몰린 불가리아는 개전 두 달 만에 두 손발 다 들고 말았다. 말 그대로 엄청난 상처만 남긴 전쟁이었다. 그리스를 비롯해 세르비아 등 승전국은 다투어 전리품을 챙겼다. 덕분에 불가리아 영토만 쪼그라들었다. 그리스 게오르기오스 1세가 불가리아 비밀조직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때를 같이하여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출신 19세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한 발의 총성이 유럽 전역을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넣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이 철없는 청년이 쏜 총에 희생되었다. 대세르비아주의는 보스니아를 합병함으로써 가능하지만, 점령국 오스트리아가 걸림돌이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차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로선 발칸반도를 지배의 구실로선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열아홉 살 청년에 의해 시작된 전쟁에서 그리스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는 응당 발칸반도였다. 그리스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세르비아 등 연합군에 가담해 루마니아와 손잡고 불가리아를 공격해 승전국이 된다. 불가리아는 오스트리아와 도이치제국으로 줄을 잘못 선 탓에 또다시 패전국 신세로 전락하면서 발칸반도 승전국, 특히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에 땅덩어리를 내주어야 했다. 오스트리아도 역사에서 제국이란 깃발을 내려야 했다. 러시아 또한 볼셰비키혁명으로 공산화가 되면서 전쟁에서 발을 빼게 된다. 다행일까. 그리스는 승전국이 되면서 기세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세를 몰아 대그리스주의 꿈을 앞당기려 했다. 하지만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웠다. 세계대전의 포화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1919년 그리스는 또다시 터키제국을 막무가내로 공격했다. 아무리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종이호랑이라 할지라도 제국의 에너지를 얕보았다. 1922년에 끝난 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대패하면서 드디어 대그리스주의는 꼬리를 감추어야 했다. 능력의 한계를 절감했던 것이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5-05-06

붙임줄

붙임줄은 악보에서 음과 음을 이어주는 곡선이다. 떨어져 있는 두 음을 부드럽게 잇는 이 작은 선은 잠시의 단절마저 노래로 묶는다. 음악을 그만둔 지 오래지만 나는 여전히 이 말이 좋다. 무엇을 이어 주는 마음 같아서. 3일의 여행 일정 중 첫째 날 일본의 오사카 도톤보리강 크루즈 위에서 나는 ‘붙임줄’을 떠올렸다. 반짝이는 간판들 사이를 거북목을 하며 헤매다 표를 끊었다. 어둠이 살며시 내려앉은 강 위로 크루즈가 오가며 환호와 함께 저마다 다른 언어들로 손을 흔들며 서로를 아는 척을 했다. 그 광경에 매료되어 남편과 함께 노란 배 위를 올랐다. 여기저기 익숙한 한국어가 들려왔다. 한국에서 단체로 관광을 온 여행객들 사이에 우리 부부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승객은 모두 한국인. 낯선 건 오히려 유일한 안내자였다. 마이크를 든 일본 소녀 한 명은 나이도 많아야 스무 살 남짓, 노란 모자를 쓰고 눈웃음과 입웃음을 잃지 않는 너무도 해맑은 일본 소녀였다. “곤니치와” 또렷한 인사와 함께 그녀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물론 일본어였다. 아무도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별로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았고 표정이 바뀌지도 않았다. 손짓을 섞어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했고 큰 소리로 박수를 유도하고 웃음으로 몸 언어로 반응을 끌어냈다. 마치 혼자서 공연을 하기라도 하는 듯 배 위는 점점 밝아졌다.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안에 담긴 표정과 억양은 분명했다. 설명이 아니라 그녀의 정서가 전해져 왔던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분위기였다. 그녀가 웃으면 우리도 따라 웃었고, 그녀가 손을 흔들면 모두 따라 흔들었다. 통역은 없었지만 서로의 마음에는 무언가가 연결되었다. 나는 그 가느다란 연결감을 ‘붙임줄’이라 부르고 싶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같은 배를 타고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웃고 있던 시간, 어떤 연결은 말이 없어도 이루어진다. 꼭 알아듣지 않아도 좋았다. 감정은 언어보다 오래 머물러 있기에 그녀의 감정은 배를 탄 사람을 넘어 다리 위를 걷는 사람, 거리를 걷는 사람, 소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이에게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이음을 만들었다. 배는 도톤보리의 물길을 따라 조용히 흘렀고 사람들 얼굴엔 하나씩 미소가 피어 있었다. 일본 소녀는 마지막까지 인사를 잊지 않았다.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을 맞추며 내리는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의 진심은 그 순간 누구에게나 닿았을 것이다. 우리가 보내준 박수와 환호 또한 말보다도 더 많고 깊은 것으로 그녀에게 전달되었으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소녀의 미소가 떠올랐다.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도, 수많은 인파들 속에 섞여 있던 소음도, 강 위를 미끄러지던 배의 진동도 아니었다. 나의 기억을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은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이어졌던 그 시간이었다. 스쳐가는 만남이었지만 그 안에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낯선 이들의 진심과 웃음이 있었고 얼마든지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삶의 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여행이 내게 준 큰 선물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후 버스에서 옆 사람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괜히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닌 그 장면에서 도톤보리강의 밤이 떠올랐다. 말없이 마음이 닿는 순간들, 그저 스쳐가는 인연도 조용한 선율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여행에서 배웠다. 마음을 열면 언어가 아니어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붙임줄은 단지 음과 음을 잇는 기호가 아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는 그 크루즈에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언어와 언어를 잇는 부드러운 곡선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 다정한 연결, 마음이 먼저 닿는 길이었다. 마치 붙임줄처럼 다르고 낯설었던 존재들이 순간적으로 한 장의 악보가 되어 내 삶 속에서 잔잔한 멜로디로 흘러 이어질 것이다. 오래도록. / 김경아 작가

2025-05-06

국힘 단일화 갈등…당의 리더십 확보가 과제

4주 채 남지 않은 이번 조기 대선은 막판까지 ‘이재명이냐 아니냐’의 전선으로 형성되는 추세다. 국민의힘 후보가 결정되고 한덕수 전 총리가 무소속으로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주요 여론조사에서는 여전히 이재명 대세론이 흔들리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은 지난 주말 김문수 전 노동부장관을 최종 대선후보로 선출했지만, 컨벤션 효과는 고사하고 한덕수 전 총리와의 단일화 문제로 내부 갈등이 심각하다. 국민의힘 지도부는 지난 5일 범보수 진영의 빅텐트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김 후보를 향해 단일화 결단을 촉구했지만 김 후보 측 반응은 미온적이다. 김 후보는 5·3 전당대회 이후 소속 의원들과의 첫 상견례 자리인 의원총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김 후보는 “단일화 논의는 후보의 당무 우선권 하에 진행돼야 한다”며 당 지도부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김 후보는 당내에서 단일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제(6일)는 포항과 경주를 방문했다가 갑자기 일정을 중단하고 상경하기도 했다. 그는 경주방문 도중 기자들에게 "당이 대선후보에 대한 지원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 기습적으로 전국위와 전당대회도 소집했다. 이것은 당 지도부가 저를 강제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라고 생각한다“며 분노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후보단일화 진통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은 후보 등록일인 10∼11일 전당대회 소집 공고를 냈다. 이날까지 후보 단일화를 거쳐 국민의힘 최종 대선 후보를 선출하겠다는 것이다. 사실상의 단일화 시한을 못 박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민의힘으로선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 새미래민주당 이낙연 상임고문 등과의 빅텐트를 추진하려면, 먼저 김·한 두 후보의 단일화가 필수적이다. 대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감정싸움을 벌이고 있는 국민의힘 지도부와 김 후보 측을 지켜보는 유권자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당 지도부가 김 후보 요구사항을 대부분 수용하기로 했지만, 아직 근본적인 인식 차이가 남아 있어 단일화가 원만하게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당의 리더십 확보가 국민의힘 코앞에 닥친 최대과제인 것 같다.

2025-05-06

이제 대법원까지 손보겠다는 민주당

지난주 경북매일신문과 인터뷰를 한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김영수 교수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삼권분립이 위기에 처한다고 경고했다. 유력일간지 칼럼 등을 통해 이번 대선정국을 깊이있게 분석해온 김 교수는 “최근 끝난 민주당 경선결과(이재명 후보 89.77% 득표율)는 민주주의 경선으로 보기 어렵다. 제왕적 총재로 불린 김대중 전 대통령도 78.04%의 득표율에 그쳤다. 이 후보가 대통령이라는 절대 반지를 끼면 삼권분립이 위기에 처한다”고 했다. 공감이 가는 진단이다. 제22대 국회들어 192석을 차지한 야권은 입법권은 물론 공직자 탄핵이라는 수단을 통해 행정부까지 장악하면서 국정이 마비된 지는 오래됐다. 그런데 이제 대법원까지 겁박하며 사법부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흔들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4일 대법원이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것과 관련해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한 청문회와 국정조사, 특검추진까지 거론했다. 민주당은 앞서 형사 피고인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와 관련된 형사재판을 중단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재명 후보가 당선 무효형(벌금 100만원 이상)이 확정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민주당은 대법관 수를 현행 14명에서 30명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도 발의했다. 친민주당 성향 대법관을 다수 임명해 대법원을 장악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민주당은 국회·대통령·대법원장이 각각 3명씩 선출하고 대통령이 최종 임명하게 돼 있는 헌법재판관에 대한 최종 승인권을 국회가 행사하겠다는 대선공약도 검토하고 있다. 이러니 “히틀러와 김정은 보다도 더 심각한, 집단광기 수준의 사법부 압박”이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민주당의 이러한 시도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동안 민주당이 수많은 법안을 강행 처리했지만, 대통령이 재의 요구권(거부권)을 가지고 있어서 부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민주당이 일방 처리한 법안에 제동을 걸 수단이 없어진다. 대통령을 제외한 공직자에 대한 탄핵소추도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151명 이상) 찬성으로 가능해 민주당(170석) 단독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민주당은 그동안 자제해 왔던 국무위원 줄탄핵도 재개했다. 지난 1일 심야에는 민주당이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을 추진하자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가 전격사퇴했다. 이로인해 대행 3순위인 이주호 사회부총리가 대선 관리와 경제·외교·안보를 도맡게 됐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행의 대행의 대행’ 체제가 된 것이다. 민주당은 그동안 입법권만으로도 사실상 국정을 마비시켰다. 30번의 탄핵안과 33번의 특검법을 남발했다. 이재명 후보가 대법원의 파기환송 결정에 “국민 뜻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듯이, 결국 유권자가 6·3대선에서 현명한 판단을 하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만약 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민주당은 국민이 입법·사법·행정 3부 장악을 허용했다고 간주하고 지금처럼 독주를 계속할 것이다. /심충택 논설위원

2025-05-06

포항경주공항, APEC을 공항 활성화 동력 삼자

경북도가 포항경주공항 국제선 부정기편을 운항할 사업자를 찾고 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방문단의 안전하고 원활한 입국지원과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다. 경북도가 지난달 발표한 2025년 포항경주공항 국제선 부정기편 운항사업자 공모에 의하면 부정기 국제선 운항 시기는 7월~10월 15일까지다. 개설 노선은 1~2개며, 주 왕복 6회 운항한다고 했다. 대상국은 일본, 대만, 홍콩, 베트남, 중국, 필리핀 등을 꼽고 있다. 경북도는 포항경주공항 활성화를 위해 중국 남방항공과 국제선 개설을 위한 업무 협약을 맺는 등 그동안 다각적 노력을 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APEC 유치가 성공하고, 포항경주공항의 국제선 비정기노선 개설이 현실화되자 지금을 공항 활성화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포항경주공항은 현재 국내선인 제주와 김포만을 운항한다. 그나마 활성화도 더디다. 그렇지만 미국 등 세계 21개국 정상과 약 2만여 명이 방문할 것으로 알려진 APEC의 원활한 개최를 위해선 규모는 작지만 포항경주공항의 역할이 필요한 때가 됐다. 경북도가 부정기 국제선 노선을 운항할 사업자를 공모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부정기적이지만 이곳에 국제선이 개설되면 세관 업무 등 국제선 개설에 따른 인프라가 구축돼 공항 활성화에 도움이 될 모티브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2028년 개항 목표인 울릉공항과 연계할 통합교통서비스 플랫폼 구축에도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 미래세대는 도시 간을 연결하는 항공기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등장한다. 10월 말 예정인 경주 APEC 개최를 포항경주공항 활성화 전기로 삼는 노력이 지금 필요하다. 포항은 세계적인 철강업과 이차전지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APEC이 아니더리도 산업적 측면에서 국제선 공항이 필요하다. 또 포항경주공항에서 차량으로 30분 거리에 우리나라 최고의 관광도시 경주가 자리하고 있다. APEC을 앞두고 시도하는 포항경주공항의 국제선 운항이 가지는 의미는 그래서 특별하다.

2025-05-06

관봉권

조선시대에도 뇌물이 성행했던 모양이다. 왕조실록에도 지방의 수령이 백성으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조정의 대신에게 뇌물로 주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지금처럼 화폐 유통이 원활하지 않아 뇌물로는 귀금속이나 포목 그리고 지역 특산물 등이 주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해 관계가 얽힌 사람이 사는 사회에 뇌물이라는 부정한 거래는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든 있었던 악습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전직 대통령 영부인의 옷 구입비에 관봉권이 사용됐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관봉권에 대해 궁금해 하는 국민이 많다. 일반인에게는 낯설게 들리는 관봉권은 말 그대로 “관에서 봉인한 지폐”다. 금융권에서는 “조폐공사가 한국은행에 신권을 보낼 때 액수와 화폐 상태에 이상이 없음을 보증하는 의미로 십자 형태의 띠를 두르고 비닐로 싸서 보내는 지폐”라고 설명한다. 이런 관봉권은 은행이 개인에게 인출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VIP고객이나 대기업이 명절 때 임직원에 지급할 목적으로 은행에 요구하면 지출되는 사례는 종종 있었다고 한다. 또 과거에는 청와대가 관봉권의 유통 경로였다는 얘기도 들린다. 5만원권 5000만원 뭉치의 크기는 각티슈 정도라고 한다. 5만원권이 처음 발행될 때 일각에서는 뇌물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는 만원권에 비해 부피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청와대 시절 지불한 옷값이 4억원에 달한다는 경찰 조사가 있었다. 옷값으로 결제된 현금이 관봉권이라 한다. 개인이 소지하기 어렵다는 관봉권이 옷값으로 사용된 경위를 경찰이 조사한다는데, 그 결과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06

여성 없는 21대 대선, 이대로는 안된다

이번 6·3 조기 대선은 단순한 대통령 교체가 아니라 정치적 혼란 이후 국민이 어떤 리더십을 원하는가를 가늠하는 시험대다. 대선 후보들은 최근 잇따라 정치·경제·사회 분야 공약들을 발표하면서도 ‘여성의 삶과 경험’을 의제화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윤석열 정부 집권 1년여 만에 우리나라 ‘국가성평등지수’는 2010년 이후 처음으로 하락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달 17일 2023년 우리 국가성평등지수가 65.4점으로 전년(66.2점)보다 낮아졌다는 통계를 발표했다. 특히 감소 폭이 가장 큰 지표는 ‘가족 내 성별 역할 고정관념’ 인식 수준(60.1점→43.7점)이었다. ‘경제적 부양 및 가족의 의사결정은 남성이 하고 가사·가족 돌봄은 여성이 해야 한다’는 성별 고정관념에 동의하는 비율이 늘어난 것이다. 이 문제는 국가의 인구 정책, 노동시장 구조, 경제성장 전략과도 직결된 요소라 할 수 있다.   지난 4월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주최로 열린 ‘모두의 성평등 다시 만난 세계’ 간담회에선 많은 불만이 터져 나왔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은 “집담회의 부제이기도 한 ‘여성 없는 21대 대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정치 현실에 대한 여성들의 절박한 외침”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계엄 사태 이후 지난 몇 달간 광장과 거리의 중심엔 청년 여성들이 있었다”면서 “이번 조기 대선에 임하는 정당이나 후보들은 그들의 목소리와 의제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했다. 여성 의제들은 저출생·노동시장·고령화 사회 돌봄 이슈 등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에도, 대선 후보들은 최근 잇따라 다양한 공약들을 발표하면서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여성 의제에 침묵하면 여성 유권자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여성가족부는 2008년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성부를 폐지하고 가족 관련 사무를 보건복지가족부로 이관했다가 이후 2010년 3월에 다시 개편된 역사를 갖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양성평등 실현, 청소년 및 가족 지원, 다문화 및 한부모 가족 지원, 여성 폭력 예방 및 지원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역할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의 공약에는 여성의 권리와 가족의 복지를 향상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부족하고, 성평등 정책을 축소하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이런 흐름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가족의 복지를 위협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여성과 가족의 복지 향상은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제다. 이를 위해 정부와 정치권은 성평등과 가족 복지를 위한 정책을 강화하고, 국민은 이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높여야 한다. 가정의 달 5월에 여성들은 여성, 젠더, 성평등, 가족, 질적인 여가부 기능을 확대하고, 그에 따른 예산 수립에 힘써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대통령 후보들은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윤희정 편집부국장 대우

2025-05-06

산불피해 복구, 희망과 베풂의 씨앗

극명한 대조였다. 밭두렁이나 길, 개울이나 둔덕, 골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토록 판이한 양상이 나타나다니, 참으로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하게 희비가 엇갈리는 현실이 비탄스럽게만 여겨졌다. 대지는 파릇파릇 생기를 더해가며 무채색의 황량함을 초록으로 채워가는데, 지척의 산야에서는 불에 탄 흔적이 검버섯처럼 칙칙하고 시커멓게 멍들어가며 신음하는 듯하니 3월에서 4월, 불과 한 달새 이다지도 잔인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순식간에 들이닥친 초대형 산불로 경북 북동부지역이 초토화되면서 사상 최악의 피해가 속출했다. 일상을 삼켜버린 화마에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을 하루 아침에 잃고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재민들이 3000명을 넘는다 하니, 막막하고 암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실의에 찬 이재민들을 위한 온정의 마음과 피해복구의 손길들이 각계각층에서 더해지고 있어서 그나마 안도스럽지만, 피해지역이 워낙 광범위하고 상흔이 깊어서 일상회복과 정상복구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하다. 작은 관심이 큰 희망이 되듯,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고 위로하는(患難相恤) 상부상조의 양속이 예나 지금이나 주변을 밝고 따스하게 비추며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것 같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산불피해성금을 전달하는 어린이나 기업체 등의 기부, 자원봉사자들의 한결 같은 복구활동 참여, 지자체 공무원들의 발 빠르고 체계적인 복구계획 시행·지원 등으로 피해복구에 다소 속도를 내고 이재민들의 임시거처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거기에 휴일까지 반납하고 복구작업에 적은 일손이나마 보태며 피해 당사자들을 위로해주는 미담이 전해져서 훈훈하게만 여겨진다. 휴일 아침 일찍 영덕군 지품면 수암리의 한 과수원엘 가서 불에 탄 사과나무와 복숭아나무, 감나무 등을 베어내고, 소실물 잔해 정리작업에 팔을 걷은 이들은 포스코 포항제철소 사진ㆍ붓글씨봉사단원들이다. 주로 사진촬영과 붓글씨 나눔활동을 실시해온 재능봉사단원들이 이날만큼은 카메라와 붓 대신 톱과 낫을 들고 산불피해가 심각한 과수농가에서 복구작업을 펼친 것이다. 봉사단원들은 과수원 주인의 안내와 요청에 따라 불에 탄 사과나무 등의 피해목 30여 그루를 전동톱으로 베어내고 잔가지를 정리, 포터차량에 실어 폐목 임시보관장소로 운반하는 등의 작업을 실시했다. 또한 농가 2채와 농막, 저온창고, 차량 2대가 전소된 건조물 바닥의 소실물을 정리하고, 일부 불에 타고 찢어져 썰렁하게 일렁이는 그물망을 제거하는 작업도 단계적으로 실시했다. 과수 정리작업을 마치고는 한 봉사단원이 사비로 마련한 양말, 수건 등의 생필품을 과수원 주인에게 전달하면서 산불피해의 아픔을 달래 드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복구작업은, 포스코 1%나눔재단에서 최근 산불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의 조속한 피해복구를 위해 ‘Change My Town’ 지원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자발적인 봉사활동이다. 기부자인 임직원이 지역사회의 개선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봉사활동까지 직접 실행하는 참여형 ‘체인지 마이 타운’ 나눔 사업은 2019년부터 시행돼 수혜처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는 포스코의 상생협력 나눔활동이 희망과 베풂의 씨앗이 되길 기대해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06

정치와 막말

“과거 ‘여자는 밤에만 쓰는 것’, ‘주막집 주모’ 등 발언한 적 있느냐” “대통령 앞에서 깐죽거리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나” 도대체 듣고 있기가 쉽지 않다. 대선 국면에서 쏟아지는 막말들 말이다. ‘춘향이’ 운운한 어떤 발언은 입에 담기도 어려워 여기 적을 수조차 없다. 내란 정국 때는 ‘계몽’과 ‘요원’이란 단어가 히트(?)더니, 근래엔 ‘깐족’과 ‘아부’, ‘키높이 구두’와 ‘눈썹 문신’이란 말이 유행인가보다. 기억에 남는 정책이나 국정철학은 없고 오로지 ‘비아냥’과 ‘조롱’만 남은 모 정당의 토론회를 보고 있자니, 저들에겐 과연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책임감 따위는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대통령 파면으로 시행되는 엄중한 대선인데, ‘비상계엄’과 ‘탄핵’마저 희화화되고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공론장에서의 말(Lexis)과 행위(Praxis)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말과 행위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의 발언은 그 수행적인 힘을 대의하는 자리에서 발화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언어의 생산과 교환은 일정한 언어 자본을 갖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징적 권력 관계 속에 자리 잡는다고 논한 바 있다. 언어 교환의 권력 관계는 제도적이든 아니든 그들이 집단으로부터 받고 있는 인정에 따라 상이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구든 말할 수 있고, 명령의 의미를 발화할 수 있지만, 필요한 권위가 결여되어 있는 자에게 그것은 ‘행위’가 될 수 없으며, 단지 ‘말’로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의 말은 수행적인 힘을 갖는다고 여길 수 있다. 그만큼 책임이 동반되는 행위라는 거다. 말하는 자는 자신의 발화가 ‘언어의 장’에서 어떻게 수용될지에 대해 나름의 예측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담론은 언제나 ‘완곡어법’이자 ‘타협’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잘 말하려는’, ‘적절하게 말하려는’ 전략적 수정의 결과이기에 ‘완곡어법’이며, ‘말해야 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화 형태가 결정되기에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의식적인 계산으로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언어적 아비투스(habitus)의 영역이라 수용가능성에 대한 감각,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언어생산물의 잠재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능한다. 이점을 비춰볼 때 막말을 해대는 정치인의 언어 감수성이 어느 레벨에서 작동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선 토론을 겨우 ‘말싸움’ 정도로 여기는 천박한 권위 의식과 경쟁심이 결합 된 언어적 결과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예전의 보수는 나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위선이라도 부렸다. 위선이란 적어도 세간의 이미지를 의식하고 남들 눈치 정도는 보기 때문에 가능한 가식이다. 그럼에도 즉물적 감정에만 휩싸여 위선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 오만한 권력이 언제까지 연명할 수 있을까? 토론 자리를 상대 ‘망신주기’의 기회 정도로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막말이 계속되는 한, ‘천박한 정치’에 대한 ‘고상한 대중’의 심판도 오래고 지속될 것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5-01

관식이 타령

집안에 음기가 너무 세게 흐른다. 집안에 남자라곤 나 혼자이다. 첫애가 딸이라고 했을 땐 그래도 둘째는 아들이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에 불과했다. 삼신할머니에게 그만큼 빌고 빌었건만 둘째도 달지 않고 나왔다. 딸 둘에서 멈췄다. 딸 셋이 되면 내가 집을 나갈 것 같아서다. 삼 형제를 두신 우리 아버지의 업적에 큰 누를 끼치고 말았다. 집안의 대가 끊어졌다. 여자들의 세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네들의 세상은 여태 내가 겪지 못한 사건의 연속이었고 그 모든 것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다 안다고 하기엔 많이 역부족이다. 여자들의 심리는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 혹은 ‘본부장’이란 타이틀은 대체로 재벌가 아들이 걸치는 직책이다. 얼굴도 잘생기고 키도 크다. 아는 것도 많고 매너나 에티켓도 좋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구석은 다 갖춰져 있다. 이렇게 설정해 놓고 가난한 여자를 좋아하게 만들면 그 드라마는 대박이 난다.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랑의 구도이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는 모든 여자는 가난한 여자가 되어 꿈속에서 헤매게 된다. 이수일과 심순애 이야기가 언제 적 이야기인가. 일제 강점기 때 조종환의 ‘장한몽’에 나오는 이야기 아니던가. 이런 이야기가 AI 시대에도 먹히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김중배의 다이아에 심순애는 이수일을 차버리지 않는가. 결국 돈 앞에는 사랑이고 뭐고 없다. 냉혹한 돈의 현실만 있을 뿐이다. 난 여태 돈 많은 남자 싫어하는 여자는 잘 보지 못했다. 우리 집 여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졸지에 돈을 잘 벌어오지 못하는 나는 평생을 죄인처럼 눈치만 보면서 살았다. 오랫동안 실장이나 본부장에게 몰입되어 있던 여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이란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지고지순’이란 단어를 남자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양관식. 거의 외계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현실 세계에선 극히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이다. 대부분 부상길, 아니 ‘학 씨 아저씨’란 인물이 현실 속 전형적인 한국 남성 모습이 아닐까 싶다. 졸지에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 관식이 때문에 참 피곤하다. 오직 한 여자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는 한 남자의 순애보는 모든 여자의 로망이 되었다. 덕분에 나 같이 여자가 많은 집에선 전부 양관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심지어 곁눈질로 나를 보면서 ‘학 씨 아저씨’보다 더 한 꼰대 인간 취급을 한다. 세상이 개벽했다. 여자들의 생각이 하루아침에 이 정도로 변화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돈 없는 관식이가 돈 많은 본부장을 밀어내고 말았다. 걱정은 둘째 딸이다.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데 아직 관식이를 찾고 있다. 세상에 관식 같은 남자는 없다. 대부분이 학 씨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고 귀에 따까리가 앉도록 말했건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관식이 타령이 끝이 없다. 제발 정신을 차리고 현실을 직시해 줬으면 싶은데, 그 드라마 한 편이 정신을 흐려놓았다. 그 전에 자기 남편감은 경제력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돈 많은 양관식.” 이다. ‘히떡’ 자빠질 뻔했다. 이번 생애에 둘째 사위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노병철 수필가

2025-05-01

스페인 대정전

블랙아웃(Black Out)은 앞이 캄캄해진다는 뜻이다. 발전 용어로는 모든 전력공급이 중단된 최악의 정전사태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 국어 순화사전에는 이를 대정전이라고 부른다. 특정 지역 혹은 특정 도시가 불랙아웃되는 일은 가끔 있었으나 한 나라가 통째로 블랙아웃되는 일은 세계적으로 극히 드물다. 지난달 28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동시에 블랙아웃 현상이 벌어졌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리스본 등 대도시 곳곳에서 관광객과 시민들이 기차와 지하철,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대소동이 벌어졌다. 문제는 국가적 대정전에도 아직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력 복구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알아야 할 정전 원인은 오리무중이라 한다. 때문에 정전 원인에 대한 각종 관측이 난무한다고 한다. 사이버 테러 등도 거론이 되나 현재로선 재생에너지원의 과부하가 가장 유력한 원인일 것으로 관측이 되고 있다. 스페인은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의존도가 유럽에선 독일 다음으로 높은 나라다. 날씨 변화에 따라 전력 생산이 급격히 변동될 수 있는 전력 환경이다. 이번 사태도 불안정한 전력 공급이 전력 시스템에 부담을 주어 대규모 정전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으로 외신은 전한다. 아직도 정확한 정전의 원인은 알려진 바 없다. 그러나 재생에너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위험하다는 교훈은 주목할만한 평가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전력 사용을 위해 지금의 전력 생산 패러다임도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세계가 반면 교사할 블랙아웃 사태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01

가정의 달 의미 새기며 어려운 이웃도 함께

1일 근로자의 날을 시작으로 5일 어린이날, 8일 어버이날, 15일 스승의 날, 19일 성인의 날, 21일 부부의 날 등 5월은 가족과 함께하는 행사가 많아 가정의 달이라 부른다. 바쁜 일상을 이유로 등한시했던 가족과의 시간을 이런 기념일로 하여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가정의 달 제정의 의미를 살리는 좋은 기회가 된다. 유엔은 1993년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해 가정을 위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적극 참여하자는 취지로 5월 15일을 세계 가정의 날로 정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지금은 전 세계가 5월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가정의 달로 많은 행사로 분주하다. 가정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 단위다. 가족의 건강한 마음과 정신이 바탕이 된 가정 위에 국가도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 건강한 가정은 가족 구성원 간의 건전한 의사소통이 이뤄지고, 상호간 신뢰와 존중이 존재해야 한다. 또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가정으로 나아갈 때 건강한 가정도 성립이 된다. 그러나 급변하는 세상 속에 시간에 쫓기고 개인주의가 발달하면서 화목한 가정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1인 가구가 급증하고 홀로 사는 노인들이 증가하는 이유는 세상이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인가구 1000만명 시대란 것은 가족관계 측면에서 보면 가정해체 현상의 한 단면이라 할 수도 있다. 경제적 이유로 또 취업난을 이유로 사회와 단절하고 사는 그들의 아픔을 되돌아 보는 것이 우리 사회가 할 일이다. 이달을 가정의 달로 제정한 취지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 노인인구 중 22%는 홀로 사는 독거노인이다. 함께 사는 가족이 없어 외로움이나 우울감을 많이 느껴 독거노인의 자살률이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다. 올해 맞는 가정의 달은 산불로 피해를 입은 경북도내 많은 이웃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진다면 더 소중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산불 피해지역으로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다.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다. 모든 사람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몸으로 체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

2025-05-01

이준석의 ‘정치적 산실’은 어쨌든 보수진영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후보에 대한 보수진영의 단일화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이번 대선을 보수·진보 대립 구도로 치르려면 보수진영 후보 단일화가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후보를 향한 보수진영의 러브콜은 서로를 향한 불신과 감정적 골이 생각보다 크고 깊다는 사실만 확인시킨 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후보는 지난달 30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토론회에서도 “요즘 제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빅텐트 단일화에 참여할 뜻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서 그럴 일은 전혀 없다”고 쐐기를 박는 발언을 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단일화와 ‘빅텐트’라는 단어가 40여 차례 등장했다. 이 후보는 대구·경북(TK) 지역을 방문할 때 특히 보수진영 후보단일화와 관련된 질문을 많이 받았다. 보수텃밭인 TK지역에서는 ‘반(反)이재명 빅텐트’에 이 후보가 들어와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돼 있다. 이 후보는 현재 청년세대 공약을 무기로 제3지대를 형성해 대선을 완주한다는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 제22대 총선 때 경기 화성을 지역구에서 민주당·국민의힘 후보와 3파전을 벌여 극적인 승리를 한 경험이 있다. 이 후보는 당시 1위인 민주당 공영운 후보와 30%포인트대로 벌어졌던 초반 격차를 뒤엎고 당선됐다. 이 후보가 국민의힘 후보와의 단일화에 손사래를 치는 상황은 이해가 간다. 국민의힘 친윤(윤석열)계가 그를 당에서 몰아낸 당시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화가 치밀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 대세론에 맞서 보수진영이 대역전 드라마를 만들어 내려면 후보 단일화는 반드시 성사돼야 한다. 이번 대선이 이재명·이준석 후보와 국민의힘 후보 3파전으로 치러지게 되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이 후보가 보수진영 후보 단일화를 위한 빅텐트에 들어와 4년 전 국민의힘 대표에 선출될 당시처럼 새바람을 몰고 오길 기대한다. 지금의 낡고 고루한 보수정당을 혁신하려면 이 후보처럼 젊음과 열린 사고를 가진 정치인이 꼭 필요하다.

2025-05-01

새로 생긴 공중협박죄와 공공흉기휴대죄

2023년 7월 온라인상에 길이 30센티가 넘는 칼을 구입한 구매 내역과 함께 “수요일에 신림역에서 여성 20명을 죽이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신림역 흉기 난동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신림역 인근 주민은 물론 전 사회가 공포에 떨었다. 글을 올린 용의자가 긴급체포되어 구속기소 되었지만 올해 1월 대법원에서는 최종적으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형이 확정되었다. 기소된 정보통신망법 위반죄와 협박죄 일부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하는 문언을 반복적으로 도달하게 하면 성립하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죄와 피해자에게 해악을 고지함으로써 공포감을 일으키게 하여 성립하는 협박죄는 피해자별로 성립하는 범죄인데 ‘신림역 인근 상인들 및 주민들‘이 피해자라고 하기엔 너무 범위가 넓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게 법원 판단이었다. 한국인 여성을 대상으로 혐오와 증오를 표출하는 글을 1700여 건 작성한 것도 ‘한국인 여성’의 범위가 넓어 피해자가 특정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 다만 해당 날짜 신림역 인근을 방문하거나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20~30대 여성들을 살해할 목적과 특정성은 인정되어 이들에 대한 협박 및 살인예비 혐의만이 유죄로 인정되었다. 어쨌든 피고인은 실형을 면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온라인상에는 이런 범죄를 예고하는 글들이 일 년에도 수백 건 이상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협박이나 범죄 예고를 해도 피해자가 특정되어야 하는 기존 범죄들의 구성요건적 한계 때문에 처벌이 어려운 면이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흉기를 소지하거나 드러내어도 경범죄 처벌법으로 밖에 처벌하지 못해 법정형이 벌금 10만원 이하로 처벌 수위가 낮고 현행범 체포나 긴급체포 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도 있었다. 이에 최근 형법에 공중협박죄와 공공장소 흉기휴대죄가 신설되어 지난달부터 시행되고 있다. 신설된 형법 제116조의2 공중협박죄는 불특정 또는 다수의 사람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가할 것을 내용으로 공연히 공중을 협박한 사람에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처하는 죄이다. 실제 지난달 라이브 방송 중이던 유튜버가 “누구 한 명 죽이고 싶네”라고 말했다가 이 공중협박죄로 입건되었다. 형법 제116조의 3의 공공장소 흉기소지죄는 정당한 이유 없이 도로·공원 등 불특정 또는 다수의 사람이 이용하거나 통행할 수 있는 공공장소에서 사람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흉기를 소지하고 이를 드러내 공중에게 불안감 또는 공포심을 일으킨 사람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죄이다. 이 죄 시행 첫날 서울에서 행인을 향해 흉기를 꺼내 든 중국인이 검거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설 범죄들이 생긴 이상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묻지마 범죄와 모방범죄를 사전에 차단하는 효과가 있겠지만, 수사기관도 적용 대상과 한계를 명확히 하는 적절한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불의의 피해와 혼선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세라 변호사 .………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5-05-01

수리온 헬기 야간 투입이 산불 조기진화 주효

지난달 경북 의성에서 시작한 산불로 도내 5개 시군의 산림이 초토화되는 과정을 우리는 목격했다. 매년 발생하는 산불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인명은 물론 막대한 재산 피해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경북 북부지역 산불이 도내 5개 시군으로 퍼져 대형화된 데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강한 바람이 불고 건조한 날씨가 산불을 키웠다는 기상 조건도 해당되고, 임도 부족, 소방 장비 부족 등도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 중 산불을 조기에 진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헬기 교체 문제가 늘 가장 큰 이슈였다. 산불이 더 커지기 전에 기동력 좋은 헬기를 바로 투입해야 하나 헬기 노후와 용량 부족, 야간 투입 불가 등의 조건으로 조기 진화에 장애가 됐다는 것이다. 특히 야간 진화작업에 헬기를 동원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금상첨화인데도 이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경북 북부지방 산불 진화에도 헬기의 야간 투입은 물론 없었다. 날이 새고 나면 진화율이 다시 올라가는 비효율적 상황이 반복되는데도 안전 등을 이유로 헬기 활용을 못한 것이다. 그 사이 피해가 커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대구시 북구 함지산 산불이 23시간 만에 주불을 진화했다. 축구장 364개 면적을 불태웠지만 인명과 재산 피해없이 빠른 시간 안에 수습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함지산 산불 조기 진화의 주인공으로 수리온 헬기가 주목받고 있다. 수리온 헬기는 우리 군이 보유한 노후 헬기를 대체하기 위해 국내서 만든 다목적용 신형 헬기다. 함지산 산불에 산림청은 두 대의 수리온을 처음으로 야간 투입키로 하고 임무를 부여했다. 두 대는 밤사이 3만6000L 상당의 물을 투하하면서 전날 밤 8시 19%이던 진화율을 다음날 오전 6시 65%까지 끌어 올리는 성과를 냈다. 산림청도 “수리온 헬기의 야간 투입으로 큰 성과를 봤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산불이 연중화·대형화되고 있다고 한다. 노후 소방헬기 교체가 가장 시급하다. 당국은 수리온 헬기의 야간 투입으로 확인된 효과를 바탕으로 신형헬기 도입에 나서야 한다.

2025-04-30

국힘, 3차 경선은 ‘비전제시’로 승부 겨뤄라

국민의힘이 29일 발표한 대선후보 2차 경선 결과, 김문수·한동훈 후보가 3차 경선에 진출했다. 탄핵 반대파인 김 후보와 탄핵 찬성파인 한 후보 간 1대1 맞대결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김 후보에겐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한 강성 당원들의 표가 결집했을 것이고, 한 후보에겐 탄핵에 찬성하는 당원과 중도층 표심이 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두 후보는 그간 토론에서 탄핵 찬반을 두고 난타전을 벌였지만, 결선 진출 후에는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탄핵 문제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똑같이 했을 것이다. 2차 경선 후 김 후보는 “우리는 뭉쳐야 이긴다. 누구라도 손잡고 반드시 이재명 독재를 막아내겠다”고 했고, 한 후보는 “저와 김문수 후보는 조금 다르지만, 2인 3각으로 이재명에 맞서야 한다”고 했다. 보수 진영이 탄핵 찬반으로 분열된 채로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두 후보가 절실하게 인식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국민의힘은 5월 1, 2일 이틀간 당원과 국민을 대상으로 투표를 진행해 3일 대선 후보를 선출한다. 3차 경선 투표는 2차 경선과 마찬가지로 당원 선거인단 투표(50%)와 국민 여론조사(50%) 합산 방식으로 진행된다. 지금까지 투표 결과를 보면, 3차 경선 선거인단도 아마 ‘누가 이재명 후보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를 잣대로 투표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 후보는 남은 기간 보수 진영을 통합하면서 중수청(중도층·수도권·청년) 외연 확장을 할 수 있는 미래 청사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김 후보는 집권비전을 제시하면서 ‘윤석열 아바타’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하고, 한 후보는 젊은 정치인답게 새로운 보수의 가치와 정책을 통해 당원과 중도층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만약 두 후보가 최종결선에서도 2차 경선 때처럼 탄핵 찬반을 두고 정면충돌할 경우, 국민의힘에 대한 중도층 민심은 더욱 멀어지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뽑힌 최종후보가 한덕수 대통령 대행과 후보단일화를 한들, 위력적인 효과를 내기는 어렵다.

2025-04-30

어린이를 생각한 사람, 오늘 우리가 할 일

5월 5일, 우리는 ‘어린이날’을 맞는다. 아이들을 위해 행사를 벌이고 선물을 주며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간다. 이 날은 단지 어린이를 위한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그 날이 담고 있는 정신이 온 사회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방정환 선생을 새롭게 떠올리게 된다.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문학의 선구자 또는 아동 인권 운동가라는 타이틀을 넘어,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1923년 5월 1일이었다. 일제의 서슬 시퍼런 억압이 거셌지만, 3·1운동 이후 우리 사회에는 잠시나마 ‘문화정치’라는 명목으로 자치와 표현에 작은 여유가 생겼다.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가 독립을 도모하던 때에 청년 방정환은 ‘나라를 되찾은 다음은 누구의 날들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했고, 그 답으로 ‘어린이’를 들어 올렸다. 어린이를 단지 보호받아야 할 존재를 넘어, 어린이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율성과 존엄성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했다. 이 땅에 되찾을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주인은 다음 세대 ‘어린이’라 믿었다. 어린이가 주눅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진정한 해방과 독립의 열매는 어린이들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나 ‘아이’ 같은 단어 대신 ‘어린이’라는 낱말을 지어내었다. 아주 작은 차이였겠지만 ‘어린이’에는 깊은 소신과 철학을 담았다.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하며 목소리를 키우고자 했다.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쳤다. 어른 중심의 세상에 어린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새기려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며 파격적인 시도였다. 우리는 방정환 선생이 바라던 미래를 살고 있다. 해방을 맞았고 민주주의를 실현했으며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법적으로 보호받는다. 참으로 그가 꿈꾸던 ‘어린이가 주눅들지 않는 세상’이 실현되었는지는 아직도 질문으로 남는다. 경쟁과 입시, 차별과 폭력 속에서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얼마나 안전하고 존엄하게 자라고 있을까. 새 정부가 들어선다. 정권이 바뀌고 시대의 문이 또 한번 열린다. 청년 방정환의 생각을 되새길 때다. 어린이는 가르침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어른들의 생각을 이끄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사회는 어린이의 일상을 중심에 두고 설계되어야 하며 정책과 제도의 뿌리에는 언제나 ‘어린이를 생각하는 세상’이 자리잡아야 한다. ‘어린이날’을 하루 기념일로만 여길 게 아니라, 일 년 365일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영그는 날들로 만들어야 한다. 100년 전 방정환이 하루라도 어린이를 귀하게 생각하자 떠올렸다면, 오늘 우리는 어린이는 날마다 소망과 기대가 열리는 꿈나무로 여겨야 한다. ‘어린이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어느 청년의 꿈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으로 어린이를 키워야 한다. 당장 투표하지 않아도 내일 나라를 이끌 기둥 ‘어린이’를 나라살림의 한 가운데에 두어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4-30

스님의 소고기

좀처럼 속내를 내비치지 않는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를 얘기했다. 나는 문제를 풀어 볼 요량으로 남편 입장에 서서 그녀가 해 주었으면 좋을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는 이미 다 해 보았다고 토로하는 그녀의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났다. 친구를 위해 한 말이 괜한 화를 불렀다. 입을 다문 그녀의 표정에 예전의 내가 보였다. 서른 즈음, 다섯 살인 딸애와 갓 두 돌 지난 아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나날이었다. 유모차를 끌고 대문을 나서면, 골목 마루에 앉아 담소 중이던 아주머니들이 오늘도 시댁에 가느냐고 묻곤 했다. 나의 일상은 집과 시장을 맴돌이 하는 것과 시댁에 가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내게 폭탄이 터졌다. 남편의 공장이 부도가 났다. 예상치 못한 연쇄부도에 그는 우왕좌왕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화난 거래처의 전화를 받는 것뿐이었다. 밀린 자재 값이 무엇인지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또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댁과의 작은 오해가 부도보다 더 크게 나를 휘몰아쳤다. 풀려고 해도 꼬인 매듭의 끄트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댈 남편마저 채권자를 피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모든 잘못은 이미 내 것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아이들을 친정엄마께 맡기러 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엄마는 내일 밭에 일할 사람들을 불러놨으니 아침 일찍 와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대답도 없이 대문을 나섰다. 엄마의 불안한 눈빛이 골목으로 따라 나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팔공산은 어스름 날이 저물고 있었다. 이십대에 자주 갔던 곳을 찾아가는 발길이 자꾸만 허방을 짚었다. 작은 절은 여느 때와는 달리 불빛 하나 없었다. 아무도 없어서 좋았다. 요사채 마루에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았다. 친정에 두고 온 아이들도 내 머리 속에는 없었다. 풀벌레 소리조차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 돌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발견한 스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묻지 앉았다. 그를 보자 눈물이 먼저 말했다. 나는 두서없는 말들을 쏟아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내게 그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다 내 업이라고. 그 말에 가슴이 시렸다. 억울했다. 내가 뭘 어쨌는데 다 내 탓이란 말인가. 내겐 혈육과 상관없이 오빠처럼 지낸 스님이었다. 딸과 아들도 외삼촌이라 부르는 그가 하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전혀 엉뚱하게 법문처럼 들렸다. 절에는 스님만 있을 뿐 오빠는 없었다. 그 밤이 오래오래 지나갔다. 나는 여명 사이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처럼 산을 내려왔다. 내 하소연이 원하는 것은 ‘너,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한마디였다.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내 생각의 서랍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먼 길을 찾아 갔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산을 내려오는 내내 나는 혼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길가에 앉아 집으로 가는 첫차를 한참 기다렸다.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 점점 잊어가던 어느 날,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과 나는 약속 장소로 갔다. 뜬금없는 소고기 식당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약속 장소가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이 먼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우리는 엉거주춤 따라 들어갔다. 스님과 소고기는 뭇사람의 눈길을 받기에 충분했다. 고기를 굽는 그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고기가 익기 바쁘게 남편과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 ‘어서 먹어라’는 채근에 마지못한 듯 젓가락을 들었다. 소고기가 입에 살살 녹는 듯 했다. 접시는 빠르게 비었고, 또 채워졌다. 목에 찰 때까지 먹고 나서야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 우리는 얇은 스님의 주머니를 바닥냈다. 그가 말했다. ‘힘내야지’라고. 나는 그제야 스님이 상추쌈만 몇 점 드셨다는 것을 기억했다. 내 인생에서 잘라버리고 싶었던 그 시절의 기억이 싱싱하게 떠올랐다.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친구에게 했다. 너만큼 하기 쉽지 않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친구는 내 추임새에 한참을 더 속을 풀어냈다. 나는 빈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워주었다. 친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2025-04-30

무창포 ‘신비의 바닷길’

밀물이나 썰물, 조수간만의 차라는 단어는 머릿속 지식수준이요, 지구와 달의 인력에 의해 생긴다는 상식으로만 알 뿐이다. 그러다 보니 바다가 갈라지고 육지와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긴다는 뉴스는 저세상 이야기인 듯 그저 신기해할 따름이었다. 우리나라 서해안과 남해안은 유독 수심이 낮은 바다란다. 수심이 얕은 바닷속 지형이 썰물 때 해수면 위로 드러나면 육지와 섬 또는 섬과 섬 사이에 바닷길이 생겨 마치 바다를 양쪽으로 갈라놓은 것처럼 보이는 바다 갈라짐 현상이 많다고 했다. 이를 ‘신비의 바닷길’이니 ‘모세의 기적’이니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운데로 떼지어 들어가는 뉴스 속 영상은 정말 신이했다. 평소 사람 많은 축제장에 휩쓸리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내 평생 한 번쯤은 나도 저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는데 며칠 전 이뤘다. 언젠가 이화회 모임에서 그곳을 가고 싶다는 얘기를 비쳤다. 엘라 할머니께서 간 적이 있다고 하셨고 우리 언제 한 번 가요 입을 맞췄다. 바닷길이 열리는 날이 정해져 있다며 숙소까지 예약하셔서 4월의 말 이화회 세 명은 무창포 여행을 감행했다. 무창포는 충남 보령의 바닷가였다. 해변에서 눈앞에 보이는 석대도까지 1.5km 바다 갈라짐 현상이 나타나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하다고 했다. 대구에서 세 시간도 넘어 걸리는 다소 먼 길이었지만 설레며 나선 길이라 내내 신났고 들떴다. 바닷가 바로 앞 숙소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파도 넘실대고 있었다. 서해니까 얕은 바다겠지 짐작할 뿐 물색으로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잘디잔 모래와 작고 둥근 색색의 자갈이 뒤섞여 있는 해안은 길었고 꽤 아름다웠다. 해안에서 머잖은 곳에 작은 섬 몇 개가 떠 있었다. 그 중 한 섬으로 바닷길이 생기고 내일 아침이면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그 열린 바닷길을 걸어 저 섬으로 걸어갈 수 있다니 반신반의할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숙소 베란다에서 바다를 살폈더니 모래밭이 더 넓어지고 어젯밤엔 보이지 않던 암초 같은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간대별로 비교해 보고자 사진을 찍는데, 해안가에서 섬 쪽으로 기다란 띠 같은 길이 어슴푸레 보였고 흥분이 밀려들었다. 과연 물때가 되자 해안가로부터 길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엎드려 조개 잡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도 작은 바구니도 하나 들고 그들에 합류했다. 바닷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위엔 연초록의 해초가 미끌거렸고, 돌 위엔 작은 고둥 같은 것이 붙어있었다. 사람들은 물 빠진 바다 위에서 돌을 헤집고 모래를 파며 제법 조개 따위를 찾아내느라 열심이었다. 올리브 할머니와 나는 지금 우리 바다 속에 있는 거 맞죠 연신 확인하며 흥분해했다. 조심히 딛는 발 아래 돌에 붙어있는 따개비 따위가 보였고, 떼어 바구니에 담기도 했지만 바닷길을 걷고 있다는 신기한 마음에 그저 섬으로 섬으로 걸어들어 갈 뿐이었다. 물결무늬가 선명한 모래 위를 디디면 단단해서 발자국도 남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 동안의 경험은 기이했다. 해변 가득 품어 안았던 저 바닷물은 어디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걸까. 물결무늬 선명하게 남긴 채 빠졌다 어디서 다시 들어오나.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시 솟아오르나. 의문은 신비로 남을 뿐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4-30

한약의 과학적 효능, 어디까지 밝혀졌을까?

한약은 수천 년간 동아시아인들의 건강을 지켜온 전통의학의 핵심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는 그 효능과 안전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얼마나 검증되었는가’라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전통 지식이 현대 과학의 언어로 얼마만큼 설명될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최근 한약의 과학적 연구로 그 효과가 객관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황기(Astragalus membranaceus)는 대표적인 예로 한의학적으로 기를 보강하고 면역을 높이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현대 연구에 따르면 황기에는 폴리사카라이드, 사포닌, 플라보노이드 등의 활성 성분이 함유되어 있으며 이들이 면역세포인 대식세포나 자연살해세포의 활성을 촉진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부 연구는 암 환자의 보조 치료제로 황기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 작약(Paeonia lactiflora)은 진통 및 진정 효과로 널리 쓰여왔으며 근래에는 그 안의 파에오니플로린 성분이 항염증 및 신경 보호 작용을 한다는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 이는 류마티스 관절염, 생리통, 신경통 등의 질환에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작약의 효능을 현대적으로 설명해주는 근거가 된다. 감초는 거의 모든 한약 처방에 등장하는 약재다. 감초의 글리시리진 성분은 항염, 항바이러스 작용뿐 아니라 간 보호 효과까지 보고된 바 있다. 흥미로운 점은 코로나 팬데믹 초기에 일부 연구자들이 글리시리진이 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실험실 단계의 결과이며 임상적으로 안전하고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검증이 필요하다. 이 외에도 유명한 약재들인 천궁, 당귀, 인삼, 오미자 등 다수의 약재들이 혈액순환, 항산화, 스트레스 조절, 간 기능 개선 등 다양한 생리 작용과 관련해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검증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곧바로 임상에서 적용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약은 단일 약재보다는 복합 처방을 중심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개별 약재 간의 상호작용이나 복합적 효능을 분리해서 연구하는 데에는 여전히 한계가 존재한다. 같은 약재라도 산지나 채취 시기 가공 방법 등에 따라 성분과 효과가 달라질 수 있어 표준화된 품질 관리를 위한 연구도 병행되어야 한다. 최근 주목할 점은 최근 연구들이 단순히 개별 약효를 밝히는 것을 넘어서 약리 작용 메커니즘을 분자 수준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경험과 관찰에 기반 했던 한의학의 이론이 현대 과학과 접목되어 구체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동물실험, 세포실험, 임상시험 등을 통해 한약재의 효과가 재확인되면서 의학적 신뢰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한약의 과학적 효능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본격적인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전통의 지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인류의 지식 자산이며 이를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고 구조화하는 과정은 앞으로도 큰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한약은 단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대 의학과 건강 산업의 미래를 풍요롭게 할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4-30

정치 무대에서 내려선 홍준표

1954년생. 올해 일흔한 살이니 ‘노정객’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이를 악물고 사법 시험에 도전해 검사가 됐다. 강력부 현역 검사 시절엔 거물 조직폭력배와 무소불위의 권력자를 줄줄이 구속시켜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았고, 그걸 발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1996년 그의 나이 마흔둘에 치러진 15대 총선 당선을 시작으로 국회의원만 5번을 했고, 경남도지사와 대구시장을 지냈으며,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원내대표와 당 대표를 맡았고, 비록 패했지만 2017년엔 대통령선거에도 나왔다. 정치인으로선 안 해 본 게 거의 없는 셈이다. 이쯤 되면 드라마틱한 한 편의 소설이나 흥미진진한 영화 같은 삶이 아니었을까? 위엔 언급한 요약·설명을 읽었다면 많은 이들이 자연스레 그의 이름을 떠올릴 게 분명하다. 맞다 홍준표다. 2025년 4월 29일 홍준표가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이제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편하게 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패배한 직후였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직설화법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직진하는 특유의 저돌적 스타일로 인해 때론 곤경에 빠졌고, 여러 차례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던 홍준표.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누구보다 솔직담백했던 정치인으로 홍준표를 기억할 듯하다. 어쨌건 이제 홍준표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치’라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범부(凡夫)로 귀환한 그가 30여 년간 겪었던 한국 정치판의 혼란과 불화를 다 잊고 자신의 바람처럼 ‘평범한 시민’으로 유유자적하기를 바란다. 누구라 특정할 것도 없다. 고희(古稀) 넘긴 사내에겐 풍파 없는 평화로운 삶이 어울린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4-30

에도의 출판왕, 츠타야 쥬자부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일본 만화는 전세계에서 1년 동안 대략 10억 부가 출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만화 이외에도 일본은 ‘출판 대국’이자 ‘독서 대국’으로 불릴 만큼 책으로 유명한데요. 지하철 안의 모든 이가 책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지만, 여전히 출판 문화가 발달하고 독서 인구가 많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책과 친한 일본 문화를 낳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이로 ‘에도 시대(1603-1867) 출판왕’ 츠타야 쥬자부로(蔦屋 重三郎, 1750-1797)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NHK에서 2025년 대하역사드라마로 츠타야 쥬자부로의 일생을 다룬 ‘べらぼう-蔦重栄華乃夢噺(베라보-츠타쥬의 파란만장한 꿈 이야기)’를 방영하면서, 작년 연말부터 도쿄 시내 곳곳에는 츠타야 쥬자부로 관련 문화 행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츠타야 쥬자부로와 관련된 우키요에나 주변 인물들에 대한 행사가 열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들이 빠짐없이 츠타야 쥬자부로에 대한 책을 출판해 놓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는 자료를 찾으러 간 일본국회도서관에서도 츠타야 쥬자부로에 대한 전시를 하고 있을 정도였는데요. 4월 22일부터 6월 15일에는 일본 최대의 박물관인 도쿄국립박물관에서도 츠타야 쥬자부로(줄여서 츠타쥬)가 유통시켰던 우키요에를 대거 전시하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에도 막부의 유일한 공인 유곽인 요시와라에서 태어나 자란 츠타쥬는 일곱 살에 부모의 이혼을 경험하고, 아무런 배경도, 재산도 없이 오직 타고난 독창성과 감각만으로 ‘에도의 출판왕’이 된 인물입니다. 에도 막부에 밉보여서 재산의 절반을 압수당하는 처분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원하고 꿈꾼 문화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어간 츠타쥬는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베라보’였던 것입니다. 츠타쥬가 활약한 18세기 후반에는 목판인쇄로 책들이 출판되었으며, 그 책들에는 대부분 그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의 콘텐츠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작가, 화가, 조각가, 판화가가 협업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를 전체적으로 기획하고 제작하여 출판 및 판매하는 역할이 필요했으며, 이러한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한 이가 바로 츠타쥬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18세기 말 에도(江戸, 도쿄의 옛날 이름)는 인구 백만의 세계 최대 도시였습니다. 우에노 국립박물관 전시 포스터에는 “잠재고객은 에도사람 100만인(潜在顧客は、江戸の衆、百万人.”이라는 문구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요. 츠타쥬는 날카로운 감각과 창의적 안목으로 대중들의 욕망을 읽어내고, 그에 바탕해 수많은 문화 콘텐츠들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츠타쥬는 1773년에 요시와라 정문 앞에 고쇼도(耕書堂)라는 서점(本屋)을 내고 처음에는 책 대여를 했지만, 곧 본격적인 출판에 나섭니다. 그는 거의 모든 문화 콘텐츠를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요시와라 안내서, 쿄카에혼(狂歌絵本), 기뵤시(黄表紙), 우키요에(浮世絵)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대중이 읽고 싶은 책과 보고 싶은 그림을 대중보다 먼저 알아채고서는 이를 콘텐츠로 구체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츠타쥬는 최고의 연출자처럼 당대 최고의 재능들을 조합하여 멋진 무대를 만들어 냈던 것인데요. 츠타쥬의 손발이 되었던 천재들로는 산토 교덴, 기타가와 우타마로, 가쓰시카 호쿠사이, 도슈사이 샤라쿠, 교쿠테이 바킨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츠타야는 단순히 책만 편집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재능을 편집하여 최고의 콘텐츠와 시대를 창조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츠타쥬가 새로운 예술가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창조적 재능을 장려하고, 그들의 후원자 및 멘토 역할을 하였다는 점입니다. 미인화의 대가 기타가와 우타마로, 일본 역사에 남는 인기작인 ‘南総里見八犬伝’을 남긴 교쿠테이 바킨, 골계본이라는 장르를 낳은 ‘五十三次膝栗毛’의 짓펜샤 잇쿠처럼 무명의 재능을 발견하여 일본 문화의 상징으로 우뚝 일으켜 세우기도 했습니다. 츠타쥬는 그들에게 의식주를 보장해주었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감사의 표시로 선물과 접대 정도가 전부였던 시대에, 원고료를 지불한 것도 츠타쥬가 처음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명작은 물론이고 새로운 장르와 미디어를 낳은 츠타쥬는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고 시대와 문화를 선도해나갔습니다. 이러한 츠타쥬의 활약이 오늘날 세계에서 인정받는 일본 망가나 출판의 기본적인 밑거름이 되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츠타야 쥬자부로는 채 오십이 되지 않은 1797년 5월 6일 저녁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합니다. 한 인간의 본질은 삶의 마지막 순간이나 유언에 압축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요. 츠타쥬는 연극이 끝났음을 알리는 박자목(拍子木) 소리를 기다리며 죽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가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연기로 보며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자신을 활발하게 창조하고 또 창조하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며, 자기 삶을 대상으로 한 예술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츠타쥬는 수많은 명작과 예술가들을 낳았지만, 그가 창조한 최고의 콘텐츠는 아마도 츠타야 쥬자부로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4-29

보호자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멈칫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내 유년의 집은 늘 어두웠고 나는 늘 혼자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불 꺼진 거실과 차가운 공기만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그 집의 문을 여는 게 두려웠다. 마치 어두움 속에 함께 동거하는 무언가가 나를 짓누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바빴다. 사는 일이 바빴고 생계를 지키는 일이 하루를 삼켜버렸다. 붙들어야 했던 삶의 동아줄을 잡고 버티느라 내 곁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 분주함과 비워진 시간의 계절은 어린 나에게 ‘부재’로 느껴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 어두운 집에 혼자 앉아 텅 빈 소리와 싸웠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히 내 마음 한 구석을 적신다. 나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숙제를 하고 혼자 TV를 보았다. 누군가 내 옆에서 밥 먹어라, 숙제해라, 드라마 보자 등등의 말을 걸어주며 함께 있어 주기를 바랐다.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내 가슴의 작은 불마저 식으며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옆 집에 환하게 불을 켜고 숙제를 하는 친구가 부러웠고 그 시끌벅적함이 나도 갖고 싶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어린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부모님의 부재가 아니라 현실이었음을. 그럼에도 나는 나를 지켜줄 보호자가 필요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나를 보살펴 주고, 이끌어 주고, 내 이름을 불러줄 보호자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아무 것도 변하게 하지 않았다. 불안은 습관처럼 내 안에 자리 잡았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일이 어른이 되는 과정인 줄 알았다. 누구에게도 무게를 기대지 않고 천천히 아주 느린 속도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아프지 않게, 다치지 않게, 눈물을 잘 삼키는 연습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쪽에서는 늘 작은 빛 하나 반짝이는 희망 하나를 품었다. 언젠가는 부모님의 삶의 동아줄이 더 견고하고 단단해지는 날 내 이름을 다정히 불러줄 거리고.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사람은 남편이었다. 가끔 일이 늦어져 늦게 오는 날이면 아파트의 불을 환히 밝혀 나를 맞아 주었다. 큰 수술을 몇 번이나 할 때마다 주저없이 남편의 이름을 보호자 란에 적었다. 어린 시절 내겐 늘 보호자가 있었지만 보호받지 못했던 공허함이 자리잡았지만 남편으로 인해 마음 속 빈 의자 하나가 조용히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처럼 내 안의 결핍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주 오래된 바람 하나를 접어 작은 종이배로 띄운 것처럼 마음의 틈이 매워졌다. 휘청거리던 내 안의 외로움도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것 같던 그리움도 서서히 시간의 질서와 함께 잔잔한 물살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과거의 결핍을 탓하지 않고 사랑으로 채워가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고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도 하며 나 역시도 오래도록 기다렸던 보호자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부모님에게 내 이름은 보호자로 저장되어 있다. 지금, 나는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내 곁을 지켜주지 못했던 그 시간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는 부모님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었다. 때로는 병원 복도에서, 때로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또 낯선 서류 앞에서. 나는 묵묵히 ‘보호자’라는 이름을 지켜나간다. 살아간다는 건, 어릴적 바라던 것들이 결국 삶의 무대가 되어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하지만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불빛 하나를 지피며 살아간다. 삶은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보호의 노래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삶이 내게 말한다. “누군가의 기다리던 사람이 되어주라고”. 내 유년의 윗목은 먼 시간 끝에서 지금의 내 마음을 데워주는 아랫목이 되었다. /김경아작가

2025-04-29

포항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나라의 꿈

우리는 지금, 격동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험난한 국면을 넘어 조기 대선이라는 전례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혼란의 와중에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치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정치는 국민을 편 가르지 않고 하나로 묶어야 하며, 권력을 쟁취하는 수단이 아니라 국가를 튼튼히 세우는 도구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치 현실은 어떠했나? 당리당략에 갇혀 민심을 외면하고, 국가의 미래보다 정파적 이익을 좇은 결과, 대한민국은 분열과 갈등, 불신의 늪에 빠졌다. 이제 우리는 이 흐름을 바로잡아야 한다.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고, 오직 국민과 국가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필자는 그 출발점을 포항에서 찾고자 한다. 포항은 고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자신의 힘으로 일어선 도시이다.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끈 포항의 정신에서 오늘 우리가 다시 일어서야 할 이유와 방법을 엿볼 수 있다. 포항은 위기의 순간마다 스스로 길을 만들어 온 도시이다. 아무것도 없던 벌판에 제철소를 세우고, 세계적 산업도시로 성장시킨 포항의 역사야말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포항의 정신이다.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이 스스로 성장하고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포항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졌던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지역이 주체적으로 설 수 있을 때, 나라 전체가 튼튼해질 수 있다. 수도권 일극 체제는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사람이 떠나는 농어촌, 고령화로 활력을 잃어가는 중소도시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신음하고 있다. 포항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때는 산업화의 상징이었지만, 이제는 미래를 다시 고민해야 하는 도시가 되었다. 그렇기에 포항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중앙의 틀에 갇히지 않고, 지역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 지방은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다. 사람들의 삶터이며, 꿈과 희망이 싹트는 터전이다. 교육이 살아야 하고, 경제가 돌아야 하며, 문화가 숨 쉬어야 한다. 그래야 젊은이가 돌아오고, 아이들이 웃으며 자랄 수 있다. 그러면 포항이 살아나고, 경북이 살아나고, 대한민국이 새로워질 것이다. 화려한 구호나 거창한 약속은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작은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지역 주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포항에서부터 시작하자! 작은 변화부터 만들어 가자! 지역의 자존심을 세우고, 시민이 주인이 되는 지방자치를 실질적으로 실현해 보자! 절대 쉽지 않겠지만, 꼭 걸어야 한다.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포항이, 그리고 모든 지역이 스스로 빛나는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지방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이 믿음을 지키며, 오늘도 묵묵히 나아간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