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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튜브 권력

1998년 미국에서 상영된 왝더독은 정치인의 권모술수를 주제로 다룬 영화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 현직 대통령이 백악관에 견학 온 걸스카우트 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이 벌어진다. 초비상 상태에 빠진 백악관 참모들이 모의, 궁리 끝에 국민에게는 생소한 알바니아를 적대국으로 몰아 전쟁 위기로 끌고가는 내용이다. 왝더독(Wag the Dog)은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뜻이다. 정치에서는 권력자가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연막을 치는 것을 두고 이렇게 부른다. 왝더독을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주객전도(主客顚倒)가 적당하다. “주인과 손님이 바뀐다”는 뜻인데, 본말이 전도됐을 때 쓰는 표현이다. 공부해야 할 학생이 놀이에만 정신을 팔았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물건 값보다 배송비가 더 비싸면 이것도 주객이 전도된 경우다. 원래 왝더독은 주식시장에서 선물이 현물시장보다 커졌을 때 이르는 용어다. 선물은 현물시장을 보완하기 위해 개설한 것인데 주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주객전도가 자주 일어난다면 잘못된 현상이다. 주인이 주인답고 고객은 고객다워야 한다.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는 각자가 제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옳다. 민주당의 한 의원이 “유튜브 권력이 정치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며 유튜브 방송을 비판해 정치권 안팎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유튜브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유튜브의 눈치 보는 잘못된 정치풍토를 비판한 발언으로 일각에선 신선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정당의 정치가 당당하지 못하고 강성 층에 밀리고 유튜브 등의 눈치만 본다면 그거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닐까. /우정구(논설위원)

2025-09-16

정치권의 추석민심잡기, TK는 패싱?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이재명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누가 봐도 민심을 결집하기 위한 포석이다. 내년 6월 3일 치러지는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17개 시도지사 ‘석권’을 목표로 하고 있고, 국민의힘은 현재의 12곳은 꼭 사수하겠다는 방침이다. 서울·부산시장 선거에서 꼭 이기겠다는 민주당의 의지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실제 당내 비중있는 중견의원들이 벌써 선거전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주변에선 대구시장 선거에 성주 출신 구윤철 경제부총리가 나올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춘천시를 찾아 강원도민과의 타운홀 미팅을 했다. 이 대통령의 타운홀 미팅은 그동안 대도시(광주, 대전, 부산)에서 열렸기 때문에 다음 순위는 대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지만, 역시나 외면당했다. 이 대통령은 강원도민들과의 미팅을 주재하면서 “강원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는 지역이다. 강원도와 같은 접경지역이 치르는 특별한 희생을 다 보상해드릴 수는 없지만, 각별한 배려를 하겠다”고 했다. 그는 부산 미팅에서는 “지방 발전전략을 부산·울산·경남을 중심으로 빠르게 시행할 생각”이라고 했고, 광주 미팅에서는 광주 군공항 이전 해법을 찾기 위해 대통령실에 전담TF까지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정부 여당의 외연확장 행보에 대해 야당에서는 “정권전체가 마치 선거기획사 같다”고 했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지난 14~15일 1박2일 일정으로 부산에서 첫 현장 최고위원회를 연 것은 의외다. 당의 ‘산실(産室)’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경북(TK)을 패싱하고 PK지역을 먼저 찾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산시당에서 최고위원회를 연 뒤 가덕신공항 부지와 해양수산부 임시 청사를 방문하면서 PK지역 현안에 힘을 실어줬다. 최근 PK지역 민심이 요동친다는 위기감으로 인해 부랴부랴 부산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그렇다 치고, 국민의힘 지도부의 행보를 지켜보는 TK지역민들로선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잡아놓은 물고기’ 취급을 당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다. 이러니 국민의힘에 대한 TK지역 민심 이반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를 보면, 정당지지율이 민주당에 뒤지는 경우도 더러 나온다. 이례적인 현상이다. 이처럼 정치력이 취약해진 TK지역은 예산국회를 앞두고 현재 사면초가 상황에 처해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모든 현안(TK신공항 건설, 대구 취수원 이전, 영일만 대교건설 등)이 사실상 중단돼 있다. TK정치권이 이번 정기국회에서 해야 할 가장 큰 숙제는 현안해결의 해법을 찾기 위한 입법과 국비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다. 특히 TK 신공항 건설 관련 예산은 특별법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에 지역정치권이 역량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구시, 경북도는 물론이지만 지역 정치권도 여당 의원과 정부를 설득할 치밀한 논리를 개발해서 주요 현안이 국비예산에 반영될 수 있도록 총력을 쏟아야 한다. ‘TK패싱’이란 말은 이 지역 현역 국회의원의 정치적 역량이 그만큼 초라하다는 말과 같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09-16

잠재력 충분한 영일만항, 북극항로 거점으로

경북도가 북극항로 시대를 맞아 동부청사 환동해지역본부 직속의 북극항로추진팀을 발족시켰다. 신설팀은 정부의 국정과제에 포함된 북극항로 개발정책에 신속히 대응하고, 경북도 차원의 북극항로 개발정책을 발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북극항로 시대에 요구되는 인재육성을 통해 영일만을 전국 5대 항만으로 육성하는 야심 찬 전략을 수행할 예정이다. 영일만항은 물동량 기준으로 보면 부산, 인천, 울산항 등에 비교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포항의 철강과 이차전지 사업 등을 배경으로 한 산업적 비중에 비해 항만으로서 기능은 매우 허약한 상태다. 그러나 북극항로 시대가 예고되면서 영일만항 역할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영일만항은 환동해 경제권의 중심지이자 지리적으로 유리해 북극항로 거점으로서 전략적 우위에 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북극항로협회 최수범 사무총장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포항이 가진 거점항으로서 잠재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포항은 철강산업과 연계된 벌크화물 처리 등 전통적 기능이 있고, 이차전지산업의 핵심광물자원 수요의 기지 역할이 수행되고 있는 산업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포스텍과 한동대 등 뛰어난 과학기술의 인프라가 있어 이를 잘 접목하면 물류·전통산업·첨단기술이 융합된 국가 핵심전략 거점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경북도의 전담팀 신설이 늦은 감은 있으나 향후 수행할 역할에 대한 기대감은 크다. 전국의 지자체들이 북극항로 개척에 선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어서 특별히 분발해 영일만항이 지역산업 발전에 기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항만 인프라가 부족한 영일만항에 대한 투자와 다른 항만과 구별된 특화된 기능 부여, 배후산업 육성 등 할 일이 산적해 있다. 경북도의 지원만으로 문제를 다 풀 수는 없다. 지역 정치권이 나서 특별법도 만들고 정부의 지원도 얻어내야 한다. 기업도 영일만 활성화에 전략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지역의 민관정이 북극항로 시대를 선점할 영일만항 육성에 힘을 모아야 한다.

2025-09-16

삶의 스트레칭과 유연성

신체적 스트레칭이 근육을 풀고 유연성을 키우듯, 삶의 스트레칭은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 자신을 확장하고 성장시키는 행위이다. 새로운 경험, 배우지 않은 분야의 도전, 불편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통해 내적, 외적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을 뜻한다. 즉, 내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 더 큰 가능성으로 뻗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몸은 굳어 있지만 스트레칭을 할수록 유연성이 계발된다. 신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잠재력이고, 우리가 신에게 주는 선물은 잠재력 계발이다. 잠재력을 계발하려면 삶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육체, 정신, 정서, 영혼을 스트레칭해야 한다. 삶의 스트레칭의 조건은 첫째,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스트레칭은 약간의 통증이 있어야 효과가 있듯, 사람의 스트레칭도 편안함의 경계를 넘어야 의미가 있다. 둘째, 지속성과 습관화이다. 한 번의 경험이 아니라, 매일 작은 확장을 반복할 때 변화가 일어난다. 가령, 하루 10분 독서, 일주일에 한 번 새로운 사람 만나기 등으로 삶의 새로운 상이 만들어진다. 셋째, 목표와 방향성이다. 무작정 확장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의 비전과 연결될 때 ‘의미 있는 성장’이 된다. 넷째, 피드백과 성찰이다. 시도 후 돌아보고, 배우고, 개선하는 과정을 넘어서면 성공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삶의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내면을 개발하는 것인가, 외면을 가꾸는 것인가? 지난 1년 동안 옷, 보석, 가방 등에 쓴 돈과 책, 강연 참여 등에 쓴 돈을 비교해보자. 그리고 지난 달에 자기계발과 성장에 들인 시간과 외모를 위해 들인 시간을 비교해보자.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면 무엇을 바라고 그렇게 하는지 생각해보자. 내면의 건강인가, 외모인지? 내면보다 외면에 치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성장에 힘이 되는 것에 시간, 돈, 관심을 더 쏟아 초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내 욕심을 내려두고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는 겸손, 성품, 이타심을 기를 수 있다. 가족을 위해 일하는 습관이 들지 않았다면 가족부터 시작하는 것도 의미 있고, 1주일에 1시간 정도 자원봉사를 하는 것도 좋다. 삶의 내적, 외적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고, 내 부족한 영역에 삶의 스트레칭이 필요한 것이다. 삶의 스트레칭을 하며 성공한 사람을 보면, 스티브 잡스는 대학 중퇴 후 불확실한 길을 걸으며, 서예 강의, 디자인 감각을 배우는 스트레칭을 했고, 이것이 훗날 애플 제품의 차별화로 이어졌고, 27년간 수감생활에서 좌절하지 않고 ‘내적 스트레칭을 통해 용서와 화합의 지도자로 성장, 결과적으로 남아공 민주화의 상징이 된 넬슨 만델라를 들 수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보면, 내 자녀가 PD가 되겠다는 꿈이 있다면, 먼저 방송국 AD 계약직, 영상 자료 제작 보조, 뮤지컬을 찾아다니며 보는 것도 내일을 향한 삶의 스트레칭이다. 시각과 시야를 넓히는 과정 없이 유명 예술인이 되는 일은 없고, 작은 스트레칭이 쌓이면 삶의 유연성과 성공 가능성이 확장된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9-16

포항, 고용 위기에 선제 대응하자!

최근 포항시는 ‘산업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앞으로 2년간 산업구조 개선과 기업 경쟁력 강화에 나설 계획이다. 정부 지원은 위기 속에서 포항 경제의 길을 밝히는 등불과 같다. 그러나 산업 경쟁력 회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포항 시민이자 노동자’의 삶을 지키는 일이다. 포항 철강업계의 가동 중단과 휴업, 일부 공장 폐쇄는 단순한 산업적 손실을 넘어 노동자의 일자리, 지역 상권, 소비, 지방세 기반까지 크게 흔들고 있다. 지난해 ‘빅4 철강기업’의 지방세 납부액은 157억 원으로, 2022년 969억 원 대비 무려 83.7% 감소했고, 지난 8월을 기준으로 포항 지역 전체 고용률은 59.6%로 전년 동기 대비 0.4% 하락했다. 곳곳에서 늘어나는 공실과 임대 안내문은 이 위기의 민낯이다. 하지만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산업위기 선제 대응 지역 지정으로 산업 경쟁력을 회복하는 동시에, 노동자의 일자리를 지키는 ‘고용 위기 선제 대응 지역’ 지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산업의 위기는 곧 고용의 위기로 이어진다. 고용 위기가 방치된다면 사회 안전망이 무너지고, 이는 다시 포항 경제에 부담으로 돌아온다. 고용 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되면 정부는 휴업·휴직자 지원금 상향, 직업훈련·재취업 프로그램 강화 등 다양한 조치를 제공한다. 산업위기 제도가 기업과 산업구조를 중심으로 지원한다면, 고용 위기 제도는 노동자와 지역 경제, 시민 생활을 직접 지탱하는 안전망 역할을 하는 셈이다. 정부는 지난 7월 31일부터 고용 위기 선제 대응 지역 지정 사업을 시작했고, 석유화학 산업 침체로 여수시가 국내 최초로 산업위기 지정 이후 고용 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됐다. 포항의 상황도 여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중앙정부도 포항 철강산업의 위기를 인정해 산업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제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지키기 위해 포항 역시 고용 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되어야 한다. 포항이 고용 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된다면, 노동자의 일자리 안정뿐 아니라 지역 경제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된다. 산업구조 개선과 기업 경쟁력 강화로 생긴 회복 효과가 시민들의 삶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직업훈련을 통해 청년과 실업자의 재취업 기회를 넓히고, 고용유지 지원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도 확보할 수 있다. 포항 시민의 삶을 지키는 일은 우리의 밥상을 지키는 일이자, 사랑하는 가족과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는 것이다. 산업과 고용 두 축이 함께 돌아갈 때 포항은 더욱 단단하게 일어설 수 있다. 포항 시민과 기업, 정부가 함께 손을 맞잡고 협력할 때, 이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위기”라고 말하는 지금도 포항에는 여전히 많은 시민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는 포항의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지키며,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것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포항 시민의 저력이며, 연대의 힘이라 믿는다. /김은주 포항시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2025-09-16

기억을 건네다

가을볕이 유난히 따사롭던 날이었다. 남편과 함께 시아버님의 팔을 부축하며 병원으로 향했다. 파킨슨병으로 몸이 자주 떨리고, 다리에 힘이 빠져 발걸음이 늦어진 아버님은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몇 걸음 떼기도 힘겨워하셨다. 긴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땀이 이마에 맺혔고 그 모습을 보는 나는 건강하시던 아버님의 지난날이 떠올라 마음이 저려왔다. 진료를 마치고 주차장에 도착하였을 즈음 낯선 이가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아버님의 연세를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남편이 나직이 대답하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고 다녔습니다.”하고는 차로 달려갔다. 이윽고 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 돌아와서는 “저희 어머니 생각이 나서요. 이거라도 받아주세요.”라며 배 한 봉지를 건네주었다. 손에 들린 배는 햇살을 닮은 노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표정 속에는 오래도록 곁을 지키던 누군가를 잃은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쓸쓸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마도 지금은 곁에 없는 어머니가 떠올랐던 것이리라. 나는 차 안에서 그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우리는 곁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늘 내일도, 다음 달도, 내년에도 함께 있을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하지만 어느 날, 그 자리가 비어 있는 순간에야 비로소 소중함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고, 마음을 쓸 기회는 지나가 버린다. 아버님의 손에 남은 힘줄을 보며 나는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새삼 느낀다. 병으로 몸은 불편해졌지만 아직은 함께 길을 걸을 수 있다. 지팡이를 짚은 걸음 뒤를 따라가며 언젠가는 부축한 이 시간을 그리는 순간이 오리라 예감한다. 배 한 봉지를 건넨 그 낯선 이의 마음은 어쩌면 시간을 건너온 편지였다. “곁에 있을 때 더 아끼고, 사소한 수고와 기다림조차 사랑으로 감싸라.”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그것은 값비싼 선물도 아니고 화려한 말도 아니었지만 잃어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진실한 권고였다. 병원 주차장을 천천히 걸어가던 그의 뒷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잠시 건넨 한 봉지의 배에 담긴 것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그는 아마도 언젠가 어머니와 함께 병원 복도를 나란히 걸었던 날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기다림의 의자에서 함께 순서를 기다리고 차가운 진료실 문 앞에서 느껴지던 무력감, 그리고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버틸 수 있었던 시간들. 그것들이 모두 지금은 추억이면서 아픔으로 남아 있었으리라. 집에 돌아와 배를 씻어 아버님께 드렸다. 한 입 베어 문 아버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언젠가 우리도 주차장에서 만난 그 분처럼 부모님들의 빈 자리를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리움은 물처럼 차올라 일상의 틈마다 스며들 것이다. 지금 함께 누리는 이 시간은, 어쩌면 나중에 가슴을 저미며 되새기게 될 가장 소중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정되어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오래도록 붙잡아 둘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을 따뜻하게 채우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손을 잡아주고 천천히 걸음을 맞추어 주고 사소한 대화 하나에도 귀 기울이는 일들. 그것이 나중에 남겨질 기억을 아름답게 빛나게 한다. 병원 앞에서 만난 한 사람의 호의는 배 한 봉지를 넘어선 시간이었다. 아버님의 손에 스민 세월을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곁에 있다는 사실은 언젠가 사라질 찰나의 축복이자, 삶이 우리에게 내리는 가장 고요한 선물임을. 언젠가 이 길 끝에서 빈자리를 마주하게 되더라도, 오늘의 빛과 그림자는 오래도록 우리 가슴에 남아 기억을 건네줄 것이다. /김경아 작가

2025-09-16

정부는 활주로 연장 요구하는 울릉 섬 주민들의 절규를 외면하지 말아야

울릉공항 공정률이 66%를 넘어섰다. 수십 년 꿈꿔온 하늘길이 눈앞에 다가온 셈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마냥 기뻐하지 못한다. 활주로 길이 때문이다. 울릉공항은 당초 활주로 1200m로 설계됐다. 이는 50인승 소형항공기 기준이다. 하지만 소형항공업계는 이미 80인승 기체를 주력으로 운용하고 있다. 짧은 활주로, 미래가 불안하다. 활주로 연장 없이는 이착륙 과정에서 안전사고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종단안전구역도 90m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권고 기준에 미달한다. 울릉도의 기상이 전국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것은 이미 정평나 있다. 연간 138일이 강풍에 시달리고, 안개와 돌풍은 언제든 비행기를 위협할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활주로와 안전지대 확보를 미루는 건 ‘위험을 제도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안 참사를 잊었는가” 울릉군민들이 지금 외치는 소리다. 2024년 무안국제공항 사고는 아직도 국민 기억 속에 생생하다. 짙은 안개 속 활주로 이탈로 아까운 179명이 목숨을 잃었다. 활주로 안전 기준을 무시한 결과가 어떤 참사로 이어지는지 우리는 이미 뼈 아프게 경험했다. 울릉공항은 그보다 더 가혹한 조건, 돌풍과 안개, 급변하는 날씨 속에 지어진다. 무안의 비극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안전의 기준을 높일 것인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울릉공항 활주로 연장추진위원회는 지난 5일부터 전국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서명운동은 단순한 지역 이슈 아니다. 그래서인지 온라인과 국회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종교계와 정계 인사들까지 나서면서 운동은 더 이상 ‘섬 주민들의 호소’에 머물지 않는다. 국민 전체의 안전을 위한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울릉공항은 단순한 교통편의 시설이 아니다. 주민들의 생명선이자 대한민국 안보는 물론 국가 균형발전의 상징이다. 활주로 길이와 안전구역 확보 없이 개항을 서두른다면, 이 하늘길은 미래 번영의 초석이 아니라 두 번째 참사의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 “안전 없는 공항은 존재 이유가 없다”이 당연한 명제를 정부와 관계기관이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그 태도가 울릉공항의 운명을 가를 것이다. 울릉 섬 주민들은 육지와 단절돼 수십 년간 불편과 고립을 감내해야 했다. 줄기차게 공항을 외쳤던 이유다. 그 결실이 목전에서 또다른 암초를 만났다. 외딴 섬 울릉 주민들에게는 활주로 연장이 생명줄일터다. 개항하면 대한민국 국토 균형발전과 영토 수호의 상징이기도 할 을릉공항. 정부는 섬 주민들이 눈물로 호소하고 절규하는 외침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 kimdh@kbmaeil.com

2025-09-16

전한길 vs 구글코리아

한 과대망상자의 피해의식인가? 그게 아니면, 민감한 문제에 중립적 태도를 취하겠다는 업체의 정상적 조치인가?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는 전 역사강사 전한길 씨가 최근 “구글코리아가 내 유튜브 채널에 수익 창출 정지 통보를 했다”며 “이는 분명한 언론탄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트루스포럼에 초청연사로 참석한 전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전한길 뉴스’가 위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며, 이는 민감한 문제 탓에 수익 정지를 시켰다는 구글코리아의 설명과 달리,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덧붙여 한국의 구글코리아를 좌파가 장악했기에 보수 유튜버를 탄압하는 것이라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구글 본사에 호소하기도 했다. 한국이 아닌 미국 측에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살펴봐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구글코리아 측의 공식 답변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구글코리아의 결정은 미국 구글 본사에서 승인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 이는 전씨의 유튜브 채널에 대한 수익 창출 정지를 구글 본사도 이미 인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바뀐 정권과 불화를 지속해온 전한길 씨는 이날 신변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말했다. 자신은 출국금지와 구속의 위험성 탓에 미국에 머물고 있는 것이며, 갑작스런 피격을 막기 위해 150만 원을 주고 방탄복까지 구입했다는 것. 전씨가 쏟아내는 말에는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을까? 주관적 주장이 신뢰성을 얻으려면 객관적 증거가 제시돼야 한다. 전한길 씨는 구글코리아에 증거를 내놓을 수 있을까?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9-15

피아니스트를 위한 무대 불안 극복법

무대에 서는 두려움은 세계적인 대가라 해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야말로 진정 무대를 빛나게 하는 인간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피아니스트 거장 알프레드 브렌델은 “예상치 못한 순간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라 말하며, 음악은 완벽함이 아닌 ‘자기 표현’의 과정임을 강조한다. AI가 많은 영역에서 인간을 대체하고 있지만, 음악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만큼은 인간의 고유한 힘이다. 이번 글에서는 그 소중한 떨림을 동력으로 바꾸는 몇 가지 실질적인 방법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마인드 컨트롤 : 완벽주의 내려놓기 무대에서 완벽한 연주를 꿈꾸지만, 예상치 못한 실수는 피할 수 없다. 악보가 갑자기 떠오르지 않거나 익숙한 부분에서 실수해도 이는 인간의 한계이므로, “최선을 다하되 완벽함을 포기하라”. 호로비츠는 “실수는 불가피하나, 그 뒤의 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실수가 발생하면 집착을 버리고 이어질 음악에 집중하라. 완벽 대신 유연함으로 무대를 채워라. 실수를 자연스럽게 넘기는 연습법은 이렇다. 먼저 악보를 완전히 외우지 않은 채로 계속 연주하며, 왼손을 잊으면 오른손으로 이어가고 다음 마디로 넘어가는 훈련을 반복한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은 가장 가까운 마디로 이동해 흐름을 유지한다. 이때 임의의 마디에서 시작해 연습하는 것이 핵심이다. 평소부터 생소한 구간에서도 유연하게 대응하도록 훈련하면, 무대에서 실수해도 다음 표현에 집중해 연주를 완성할 수 있다. 연주 중 집중 포인트를 만드는 것도 좋다. “이 부분에서 음악을 꼭 살리자” 와 같은 목표가 있으면 불안 대신에 음악에 몰입할 수 있다. 게다가 관객들은 대부분 작은 실수를 눈치채지 못한다.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름을 이어가면 된다. △몸과 호흡 관리 무대 직전 피아니스트들은 보통 심장이 빨리 뛰거나 손발이 떨린다. 심장이 빨리 뛰는 건 몸이 “집중할 준비”를 하는 신호이다. 공포가 아니라 ‘각성 상태’라고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무대 두려움은 적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려는 몸의 반응이며, 그 덕분에 더 집중해서 연주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라보자. 몸을 풀면 긴장이 풀리기도 한다. 그중 한 방법은 호흡훈련이다. 몇 초간 깊이 들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 복식호흡을 추천한다. 손, 어깨, 목을 가볍게 풀어주는 스트레칭도 좋은 방법이며, 성악가들이 쓰는 방법인 lip trill(입술 떨기)도 긴장 해소에 도움이 된다. △다양한 연습 방법 : 무대 전 준비 집에서 실제 공연처럼 곡 전체를 끊지 않고 연주해본다. 이때 폰으로 녹화를 하면 관객이 지켜보는 듯한 긴장감을 줄 수 있다. 이는 무대에서 멈추지 않고 완주할 수 있도록 하는 무대 시뮬레이션 훈련이 된다. 또한 작은 무대부터 준비를 하는게 좋다. 친구, 가족 앞에서 먼저 연주해보며 청중의 범위를 다양하게 넓혀본다. 같은 곡이 아니더라도 연주 공백기를 오래 두지 않고 정기적인 공연 경험을 가지면 무대 긴장이 덜하다. 언제나 ’과잉 준비‘를 한다는 마음으로 연습하면 긴장이 줄고 자신감이 커질 것이다. △실전에서의 태도 무대를 평가의 장이 아니라 “관객에게 선물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면 좋다. 사실 관객은 라이브로 클래식 음악을 들을 기회가 많지 않다.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주 실수한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도 즐기기 때문에 관객도 나와 함께 즐긴다.“ 국내 피아니스트들의 어록도 읽어보자. 손열음: “무대에서의 긴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그 에너지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연주의 품질을 좌우한다.” 선우예권: “완벽하게 치려고 하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음악을 믿고 흐름을 따라가면 좋은 연주로 이어진다.” 백건우: “피아노는 나에게 기도와 같다. 때로는 기도가 흔들리듯 연주도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무대 불안은 피아니스트만의 과제가 아니다. 다양한 전공의 음악가, 강연자 등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주제이다. 무대를 두려움의 장소가 아닌 ’나‘를 드러내는 인간적인 공간으로 만들면 좋겠다. /박정은 객원기자

2025-09-15

영일만 야시장 名所되려면 상인들 역할 중요

포항시가 지난달 14일 개장한 ‘영일만친구 야시장(금·토·일요일 운영)’에 한달간 10만여 명이 방문했고 상가매출도 10% 올랐다고 발표하자, 정작 상인들은 “전혀 체감할 수 없는 통계”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포항 구도심인 중앙상가 실개천거리(육거리∼북 포항우체국)에 자리 잡은 영일만 친구 야시장은 정부 공모사업에 선정돼 지난 2019년 7월부터 여름 휴가철 몇 개월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돼 왔다. 개설 당시에는 다양한 먹거리 부스와 상인회 플리마켓이 설치되고 각종 공연이 열려 포항의 명소로 자리 잡는듯했지만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해 폐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2023년부터 다시 개장됐지만, 개장초반 열기를 살리는데는 역부족이었다. 포항시는 야시장 개장 한 달째를 맞은 지난주 보도자료를 통해 “야시장 운영 기간 내내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로 방문객의 발길을 사로잡았고, 빈 점포를 활용한 청년팝업존과 문화 프로그램 덕분에 상가 매출이 10% 올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야시장을 실제 운영하고 있는 상인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개장 초반에는 잠시 인파가 몰리긴 했지만, 그 이후에는 방문객이 확 줄어들었다고 한다. 상인들의 대체적인 의견은 휴가철과 주말에 야시장을 반짝 운영해서는 성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타 지역 야시장처럼 아케이드를 설치해 365일 운영해야 하고, 체류형 인프라(로컬푸드, 공연장, 청년광장 등)도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포항시가 침체된 구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야시장 운영에 나선 것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전통시장을 활용한 야시장은 관광객이나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이어서 전국적으로도 개장 붐이 일고 있다. 영일만 친구 야시장이 포항을 대표하는 명소가 되려면 행정당국의 지원이나 먹거리, 문화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상인들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상인 각자가 포항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특색있는 로컬푸드나 상품을 준비해, 친절하게 고객을 대하면 곧 전국적인 명소로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2025-09-15

울릉공항 활주로 연장, 안전을 위한 필수 조치

울릉공항은 2020년 공사를 시작했지만 공사 시작 때부터 공항 규모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공항 활주로 길이가 너무 짧게 설계돼 장기적으로 늘어날 수요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는지 등이 논란이 되었다. 바다를 낀 공항 건설은 애초부터 정확하고 정밀한 설계를 바탕으로 건설되지 않으면 고치기가 쉽지 않다. 한번 완공되면 고친다 해도 재정 투입이 많아 예산 낭비 우려가 있다. 현재 건설 중인 울릉공항도 1200m 설계의 활주로를 300m 더 늘려야 한다는 주민들 주장에 국토부는 추가 공사비 소요 등을 이유로 난색을 보이고 있다. 국토부 설명에 따르면 1200m의 활주로를 1500m로 연장할 경우 1~2조원의 추가 공사비가 소요된다는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공항 사업비 8300억원의 두배가 훨씬 넘는 예산이다. 국토부는 해저지형 특성상 추가 토목공사와 혁신적 기술이 필요해서 연장하기가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설계 당시 50인승 소형항공기 운항을 기준으로 설계를 했으나 최근에는 주력기종을 80인승으로 확대해 그에 맞는 활주로 연장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게다가 울릉도는 연평균 강수량이 1538mm, 평균 강수일 144일, 연중 강풍 발생일도 140일이 넘는다. 전국에서 최악의 기상조건을 가진 곳이라 안전을 도외시한 공사는 안 된다며 최근에는 범국민 서명운동에 본격 나서고 있다. 울릉공항 활주로 연장추진위원회는 19일 국회를 방문해 시민단체 등과도 연대해 서명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울릉공항 건설은 주민의 숙원사업이자 지역이 발전할 기회기도 하다. 서울에서 10시간 걸리던 거리를 1시간 거리로 단축하면서 수도권 관광객의 방문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면 그들에 대한 안전은 필수다. 추진위의 표현대로 “활주로 연장은 단순한 지역요구가 아니라 국민 이동권 보장”이라는데 공감을 한다. 국토부는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전문가 조언 등을 종합해 활주로 연장에 대한 전향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안전보다 우선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025-09-15

캐나다 로키 대자연의 가르침

캐나다 로키의 대자연과 마주하면 누구나 자연주의 철학자가 된다. 로키의 장엄한 연봉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파노라마 속에서 만나는 에메랄드빛 호수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빙하, 그리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야생동물들의 평화로운 모습은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영국의 산악인 웜퍼(E. Whymper)는 “스위스 알프스를 50개 모아놓은 것 같다”고 로키의 경이로움을 극찬했다. 필자 역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라는 230km의 ‘아이스필드 파크웨이(Icefields Parkway)’를 달리면서 신이 만든 로키의 조각품들에 감탄했고, 루이스·페이토·모래인·말린·에메랄드 등 수많은 옥빛 호수들에 넋을 잃었으며, 태고의 눈이 겹겹이 쌓여있는 콜롬비아 대빙원에 오른 것은 벅찬 감동이었다. 대자연 로키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오만을 깨닫게 해주는 ‘겸손’이다. 거대한 로키와 마주하면 인간은 한낱 점과 같은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연의 섭리를 절대 거역할 수 없으니 겸손해야 한다. 대자연은 우리가 추구하는 돈·권력·명예 등이 과연 삶의 본질적 가치인가를 깊이 성찰하라고 가르쳐준다. ‘오만의 치료약은 겸손’임을 깨닫고, 삶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게다가 원시자연을 간직한 로키는 ‘순수(純粹)’의 중요성을 깨우쳐준다. 로키에서 정신이 맑아지는 까닭은 청정한 대자연이 인간의 ‘마음의 고향이자 영혼의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로키 최대의 빙하호인 말린(Maligne) 호수에 있는 ‘스피릿 아일랜드(spirit island)’가 캐나다의 상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평화로운 것은 야생 로키가 살아있어서 그 치유력으로 근심과 걱정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키는 디지털시대에도 아날로그 방식으로 트래킹할 때 더 큰 감동을 얻을 수 있다. 한편 ‘자연과의 공존’에 대한 가르침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캐나다인들은 자연을 잠시 빌려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자연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한다. 울창한 상록수림에서 만난 곰·엘크·산양·마멋 등은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사람도 동물과 함께 자연의 일부가 되는 곳, 그곳이 바로 캐나다 로키다. 자연주의 철학자 소로(Henry D. Thoreau)가 그의 저서 ‘월든’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소박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자연 파괴로 재난을 겪고 있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대자연 로키는 우리에게 ‘겸손·순수·공존’의 중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고령과 시차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피로를 모르고 즐겁게 트래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위대한 대자연 로키의 힘’이었다. 우리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대자연의 말없는 가르침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5-09-15

이재명 정권의 실용주의

실용주의(pragmatism)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철학사조로, ‘진리는 그것이 실제 생활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작용하는가로 판단된다’는 입장을 가진다. 사물이나 이론의 가치는 그것이 현실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장으로, 찰스 S.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실용주의는 철학과 교육, 정치·사회, 과학 ·기술 등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철학에는 진리에 대한 전통적·절대적 개념을 흔들고 ‘실천적 유용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고, 교육에는 존 듀이의 진보주의 교육론, ‘학교는 삶의 준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교육철학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정치·사회의 측면에는 민주주의 이론, 개혁주의 정책, 사회문제 해결 방식에 기초를 제공했다. 과학·기술 쪽으로는 과학을 ‘현실 문제 해결의 도구’로 이해하게 하여 응용과 혁신 중심의 사고를 촉진시켰다. 오늘날의 실용주의는 분석철학, 과학철학, 언어철학, 정치철학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리처드 로티 등 신실용주의자들은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사상과 결합하여 진리의 상대성과 사회적 담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리를 단순히 유용성으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상대주의나 즉흥적 편의주의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러나 21세기에도 여전히 여러 문제의 해결적·실천적 사고방식을 지탱하는 중요한 철학적 토대인 것은 분명하다. 이재명 정권은 대선 때부터 실용주의를 내세웠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을 넘어 좋은 정책이라면 누구의 것이라도 채택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막상 정권을 잡은 후의 행보는 그러한 공약이나 철학적 실용주의와는 정반대였다. 국회를 장악한 여당은 기업 활동을 제약하는 각종 규제 법안과 재정을 악화시키는 포퓰리즘적 복지지출을 강행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소위 노란봉투법 제정인데, 강성노조의 편을 들어 산업경쟁력을 위축시키는 악법인 것이다. 이재명 정권이 실용주의를 내세운 저의가 무엇인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그것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실용주의가 아니라, 실용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제 정책은 자신의 정치기반 강화와 사법리스크 돌파에 맞춰져 있다는 걸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왜 모르겠는가. 기업 규제, 노조 지원, 재정지출 확대는 모두 조직화된 지지세력 결집을 위한 전략이며, ‘탈이념·실용주의’라는 구호는 중도층을 향한 외피적 장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용주의의 본래 정신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보다는 공공선을 실현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재명식 실용주의는 지지층의 결속과 이해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결국 자기 생존의 방편으로 포장된 권모술수적 편의주의일 뿐이다. 그래서 실용주의의 탈을 쓴 권력 생존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위장된 실용주의는 결국 탄로가 나게 마련이고, 그 결과 나라와 국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물론 저들에게도 자승자박의 길이 될 것이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09-15

눈먼 자들의 도시

‘직시(直視)보다 왜곡(歪曲)에 편승하기. 신념은 깡다구의 결과물. 최고의 날라리가 되어볼까. 생각을 멈출까. 눈먼 사람은 밤과 낮이 없거든. 그렇게 굳히기 한판의 삶. 앞니에 끼인 고춧가루처럼 찬란하지 않더라도. 기어코 개겨볼까, 몰라, 젠장. 덩달아 짖는 개떼들의 공허한 하울링이 난무한다. 그러나 사랑이 독약(毒藥)이라해도. 그럼에도 결국엔 사람이 해독제인 걸, 나라 사랑 말고 사람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출처. ‘이우근 시인과 박계현 화백의 포항 메타포’ 경북매일신문) 시인 이우근의 시, ‘눈먼 자들의 도시’ 전편이다. 왜곡된 나라 사랑에 대한 이토록 통렬한 관찰이 있었나 싶다. 시인은, 제목을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노벨 수상작)’에서 빌려왔음을 자작 시평에서 고백한다. 눈먼 자들이 들끓는 도시가 시인의 맑은 눈을 통하여 직시된다. 눈먼 자들의 하울링이 시인의 가슴을 헤집는다. 눈먼 자들의 신념은 처연하다. 막걸리 술판의 김치 한 조각 안주에서 묻어난 이빨에 끼인 고춧가루처럼. 그들은 막걸리 묻은 입술에서 신념을 토해낸다. 쏟아져 나오는 말을 듣는 자도, 이해하는 자도, 사실은, 아무도 없다. 공허한 하울링. 몰라. 젠장. 그냥 개겨보는 거지 뭐.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사라진 그 자리는 정치가 대신할 거라 예언했다. 교회당과 절간에 다니던 사람들이 길거리 정치판으로 쏟아져 나온다. 정치가 신의 자리를 대신한 풍경이다. 한순간에 모든 사람이 시력을 잃는 기묘한 사건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 보인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시인의 손끝에서 이 시대의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시인은, 이념과 아집에 눈먼 자들의 폭력과 욕망을 꿰뚫어 본다. 공동체의 파괴를! 도덕적 양심과 이성적 통찰의 상실을! 그들의 말과 몸짓을 개떼의 하울링에 은유한다. 시인이 표현한 개떼는 ‘집단적 실명’이다. 정치적 극단주의에 빠져든 사람들은 세상의 복잡성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눈을 감는다. 이렇게 실명한 자들은 단순한 선악, 음모론적 사고, 적 아니면 동지라는 흑백 구도를 맹종한다. 그러나 이것은 혼돈 속에서 확실성을 갈망하는 인간의 불안을 달래주는 달콤한 독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시 사람을 소환한다. 실명을 치료하는 약은 결국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그래 사람이지! 사람이면, 사람을 사랑해야지, 나라 사랑 말고. 시인의 마지막은 늘 사람이다. 시인의 시 ‘똥개’ 전문을 감상해 보자. ‘나는 존재 밖이다. 태생의 한계를 직감하고 능동적으로 가장 낮은 곳을 안다. 나는 똥개. 나의 유전자의 본질. 대문 앞의 경계의 삶. 차가운 공기 먼 산, 그림자와 새벽의 안개는 나의 이웃. 그 무엇이 나의 적인가 아직 몰라서 조그만 인기척에도 나는 짖는다. 다만 짖지 않으려 한다. 침묵은 스스로 자처해야 온전히 얻을 수 있다. 밥그릇에 비가 내린다. 그리하여 주인공 없는 삶.’(출처 ’개떡같아도찰떡처럼‘ 이우근) 똥개는 침묵하고 싶다. 어찌하면 침묵을 온전히 얻을 수 있을까. /공봉학 변호사

2025-09-15

보문관광단지 또 ‘장밋빛 청사진’만 남을라

경주의 보문관광단지가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새로운 50년’을 약속했지만, 지역 안팎에서는 “과거 실패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1975년 국내 최초 관광단지로 출범해 한때 전국 최고 명소였던 보문단지는 민간투자 부재와 시설 노후화로 사실상 슬럼화된 지 오래다. 이번에도 구호만 요란한 채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경북도문화관광공사는 15일 보문관광단지 10개 부지, 11개 기업과 업무협약을 맺고 2030년까지 5000억 원을 투자해 600여 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밝혔다. 복합리조트와 관광형 증류소 등 대규모 시설이 들어서고, 지역 인재 채용·장학금 지원 같은 공공기여도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실제로 언제 얼마나 이행될지는 미지수다. 특히 이번 사업은 관광진흥법 개정으로 신설된 ‘복합시설지구’ 제도를 전국 최초 적용한 사례로 주목받는다. 그러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고 해서 투자 유치와 사업 완수가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보문단지가 그동안 수차례 규제 완화와 개발 구상을 내놨지만, 실행력 부족으로 번번이 물거품이 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문화관광공사는 ‘2년 내 착공, 5년 내 준공’을 원칙으로 강력한 이행 목표를 내세우지만 투자기업의 의지와 자금력, 경기 여건에 따라 지연·무산될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협약 불이행시 해제·원상복구·보증금 몰수 같은 제재를 명문화했지만, 실제로 제재가 작동할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김남일 문화관광공사 사장은 “보문관광단지의 재도약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 문제”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냉정하다. 시민들은 “이번에도 보여주기식 발표로 끝나는 것 아니냐”, “5000억 투자라지만 실제 체감할 수 있는 변화가 있을까”라는 불신이 팽배하다고 말했다. 보문관광단지는 이미 국제 경쟁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세계적 관광지와 겨루겠다는 포부를 밝히기 전에 과거 실패에 대한 냉정한 자기반성과 실질적 대책이 먼저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POST-APEC 보문 2030’ 역시 화려한 구호만 남긴 채 또 하나의 ‘헛된 약속’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hsh@kbmaeil.com

2025-09-15

국가연구기관, 왜 수도권에만 몰리는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보건복지부 산하 국립연구기관의 수도권 집중 문제가 대두된 가운데 국립치의학연구원 입지 선정을 둘러싼 지역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이번 입지 선정은 ‘공정한 공모’와 ‘지역 간 분산’ 원칙을 실현할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2023년 기준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의 65%가 수도권에 집중됐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국립보건연구원·질병관리청 등 보건의료 R&D 핵심 기관도 충북 오송에 위치해 있다. 의학계 역시 국립중앙의료원(서울), 국립암센터(고양) 등 중앙집중형 구조가 고착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미래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립치의학연구원 입지 선정이 지역 균형의 관점에서 이뤄져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강원권과 충청권까지 수도권으로 분류되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지방은 경상권, 전라권밖에 없다. 대구는 국내 유일의 치과 전주기 R&D 생태계를 갖춘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경북대 치과대학, 대구첨복단지, 케이메디허브 등이 연계돼 있으며, 치과 의료기기 수출의 30%를 차지한다. 특히 임플란트·핸드피스 등 수출 중심의 산업체가 집적돼 있어 연구개발(R&D)과 산업계의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되고 있다. 국립치의학연구원이 대구에 설립된다면 수도권 R&D 편중 해소와 더불어 비수도권 내에서도 집중도 높은 자립형 과학도시 모델의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다. 동시에 향후 국립연구기관 설립 시 공모 기반 입지 선정의 제도화, 지역 간 분산 배치 원칙의 정착이라는 선례도 만들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4월 18일 대통령 후보 시절에 대구를 찾아 “서울·수도권과의 이격 거리에 따라 가중치를 둬 지역 예산을 분배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또 지난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도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는 수도권 집중에서 발생한다”며 “수도권과의 거리에 비례한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구는 1990년대 이후 구조적 산업 침체와 청년 인구 이탈을 겪으며 지역 내총생산(GRDP) 최하위권을 기록해왔다. 국립연구기관 유치는 단지 연구와 산업적 가치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장기적인 경제 구조 재편과 인재 정착을 위한 실질적 해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수도권 편중의 고리를 끊지 못한다면 국립치의학연구원은 또 하나의 ‘서울 중심 기관’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이번 입지 선정은 지역 균형발전의 내용과 실질을 시험하는 기회다. 연구는 수도권에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구시대적 관성에서 벗어날 때다. /장은희기자 jangeh@kbmaeil.com

2025-09-14

세계가 주목한 안동의 맛, K-미식의 중심도시

최근 열린 한일정상회담 만찬에 안동의 대표 음식인 안동찜닭과 안동소주가 올랐다. 외교의 자리에서 안동의 밥상이 소개됐다는 사실은 단순한 화젯거리가 아니다. 안동의 맛과 문화가 한국을 대표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힘을 가졌다는 증거다. 나는 이 소식을 안동시민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함께 나눴다. 이번 기회를 안동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안동의 음식은 오랜 생활의 지혜에서 태어났다. 찜닭골목에 가면 커다란 철판에서 간장과 마늘 향이 피어오르고 닭과 채소, 당면이 어우러져 푸짐한 한 상이 완성된다. 서민적이면서도 균형 잡힌 단짠의 맛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친근하다. 헛제사밥은 제사상을 재현해 여러 찬을 한데 비벼 먹는 독특한 방식이 핵심이다. 의례와 일상의 경계를 넘어 음식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미덕을 전한다. 안동간고등어는 먼 내륙까지 생선을 신선하게 들여오기 위해 소금으로 단단히 절이던 선조들의 지혜가 남아 오늘의 별미가 됐다. 안동한우는 담백한 육향과 고른 마블링으로 고기의 본맛을 살린다. 종가음식은 손맛과 격식을 함께 지켜온 집안의 역사 그 자체이며, 집안마다 내려온 전통주는 온주법과 같은 기록을 통해 술 빚기의 정밀함을 지금에도 전하고 있다. 수운잡방과 음식디미방이 남긴 기록은 안동이 품은 미식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말해 준다. 나는 이 전통들이 오늘날에도 살아 움직이기를 바란다. 전통시장의 상인들이 새벽부터 손질한 재료로 국을 끓이고, 골목의 주방에서 나는 소리와 냄새가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월영교의 야경을 본 이들이 강바람을 맞으며 찜닭과 간고등어 한 그릇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소주 한잔에 안동의 이야기를 곁들일 때 비로소 여행은 완성된다. 맛은 언어를 초월하는 가장 직관적인 문화교류다. 한 숟가락의 경험이 도시의 첫인상을 바꾸고, 재방문을 부른다. 이제 안동시는 향토 음식의 인지도와 가능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고자 한다. 핵심은 음식과 공간, 공연, 축제, 관광을 유기적으로 묶어내는 일이다. 먼저 특화공간에서는 전시와 체험을 확대하고, 전통주와 종가음식의 이야기를 아카이브로 정리해 누구나 보고 배우는 장으로 만들겠다. 여기에 월영교 등 대표 관광지와 연계한 시음 프로그램, 휴식공간을 더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할 것이다. 다음으로 음식과 공연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인 이머시브 다이닝을 본격적으로 도입한다. 관객이 직접 음식을 맛보고 배우들과 교감하며 이야기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전통적인 접빈문화와 함께 안동의 향토 음식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전통음식을 오감을 자극하는 복합 콘텐츠로 발전시켜, 안동의 미식이 가진 매력을 한층 넓히겠다. 또한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과 같은 대규모 축제에 미식 콘텐츠를 적극 결합해, 축제장에서 맛본 경험이 지역 재방문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겠다. 대규모 푸드존운영뿐 아니라 전통 레시피 체험, 종가음식 강좌 등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해 지역 음식의 전승과 대중화에 힘쓸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관광 인프라와의 결합이다. 음식과 철도여행을 연계한 팝업열차, 전통가옥 숙박, 전통놀이 체험을 결합해 ‘먹고, 놀고, 자는’ 완결형 여정을 제공하겠다. 코레일관광개발과 협력으로 곧 진행될 ‘K-미식 전통주 벨트 팝업열차–안동 더 다이닝’와 같은 상품을 개발하고, 현장의 반응을 반영해 지속 가능한 미식관광 모델로 다듬어 나가겠다. 안동의 맛은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다. 땅과 물, 시간과 정성이 쌓여 만들어 낸 문화의 총합이다. 이번 정상 만찬이 보여 준 것은 ‘안동의 맛’이 곧 ‘대한민국의 품격’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안동을 세계 속의 미식도시로 키워 시민의 자부심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일자리와 지역 경제의 활력을 만들겠다. 다음 세대가 이 도시의 맛을 배우고 이어갈 수 있도록, 안동의 어제와 오늘을 넘어 내일을 담아내는 미식도시 안동, 그 길을 책임 있게 열어갈 것이다. /권기창 안동시장

2025-09-14

재판이 정치에 예속되어야 하나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지난 11일 기자회견을 했다. 진행이 서툴렀지만, 오히려 짜고 하는 문답이 아니라는 믿음을 줬다. 답변들이 대부분 솔직하고, 국정 현안에 대한 이 대통령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인의 주장대로 실용주의자라는 느낌도 반가웠고, 걱정한 것보다는 이념에서 벗어나 보여 좋았다. 그러나 몇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답변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내란특별재판부에 대한 생각이다. 그는 “그게 뭐가 위헌이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국가 시스템을 설계하는 건 입법부 권한”이라며 “사법부는 입법부가 설정한 구조 속에서 헌법상 정의된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지 사법부 구조를 사법부 마음대로 정하는 게 아니다”라고 훈시했다. 이러한 논리의 배경으로 그는 ‘직접 선출 권력’과 ‘간접 선출 권력’으로 구분했다. 국회는 국민이 직접 선출해 주권을 위임한 공직자이고, 판사는 국민이 선출한 주권 위임자로부터 임명돼, 간접적으로 주권을 위임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삼권분립이라도 “권력의 서열이 분명히 있다”라고 주장했다. 국민-직접 선출 권력-간접 선출 권력 순이라는 것이다. 결국 국민이 선거로 뽑은 대통령과 국회가 위에 있고, 사법부는 그 아래에 있다는 말이다. 대통령과 국회는 어떨까. 그는 “국민 주권 의지가 발현되는 장치가 정치”라며 “사법이란 정치로부터 간접적으로 권한을 받은 건데 어느 날 전도됐다”라고 지적했다. “정치가 사법에 종속”돼 “위험한 나라가 됐다”라는 것이다. 종속이란 게 뭔가. 불법 행위에 대해 재판하는 것이 종속이고, 반민주적인가. 임명된 권력은 선출된 권력을 수사하고, 재판하면 안 되는 건가. 불법을 저질러도 눈을 감아야 하나. 수사와 재판도 선출된 권력의 지시를 받아야 하나. 삼권분립을 부정하고, 대통령, 혹은 일당 독재를 합리화하는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논리다. 정당한 수사와 재판은 정치를 종속시키는 게 아니다. 정치는 가장 부패하기 쉬운 부분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불·탈법을 다 저지른다. 공권력을, 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쓴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나온다. 권력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사법의 역할이다. 그래서 삼권이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게 민주주의 교과서의 기본 원리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정치의 사법부 종속’이 위험하다면서, ‘사법의 정치 종속’을 주장하고 있다. 사법이 정치에 종속되면, 권력의 부패를 막을 수 없다. 정권을 잡으면 반대 정파를 탄압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의 말은 국민이 집권 세력에게 이런 횡포를 부릴 권한까지 위임했다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선출된 권력뿐 아니라, 국민이란 이름으로 동원된 홍위병이 모든 권력기관을 파괴하고, 휘저었다. 우리로 치면 입법부와 사법부도 모두 부수고, 자신들이 그것을 대신했다. 난데없는 폭도들로 보이지만, 그 뒤에는 유일한 절대권력자가 있었다. 이 대통령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쿠데타 실패에서 태어났다. 윤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게 비상계엄권이 있다는데 매달렸다. 나치가 바이마르 헌법 48조의 긴급명령권과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긴급상황에서 군대를 배치하고, 기본적 시민권을 통제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총리로 임명된 지 이틀 만에 이를 이용해 제국의회를 해산하고, 총선 뒤에는 공산당과 사민당을 불법화하고, 독일국가인민당까지 해산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한 뒤에는 국민투표로 대통령과 총리 직무를 통합해, 나치 독재를 완성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이 잘못이라는 사실은 국민의힘조차 인정한다. 그 재판을 굳이 정치재판으로 끌고 가 좋을 것이 무언가. 오히려 극우세력에게나마 반발할 명분을 만들어줄 뿐이다. 그것이 또 다른 ‘비상계엄권’이 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절제·자제가 사법의 가장 큰 미덕”이라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특별재판부’는 민주당이 정해놓은 방향으로 재판하도록 만들겠다는 뜻이다. 절제와 자제는커녕 적극적인 재판을 하려는 의지가 충만하다. 절제·자제하는 사법부를 원한다면 민주당부터 자제해야 한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9-14

에너지 정책 또 바뀌나···TK원전산업 타격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지금 원전을 지을 곳은 지으려다 만 딱 한 군데 있다. 거기도 지어서 실제 가동하려면 15년이 걸린다”면서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그는 소형모듈원자로(SMR)에 대해서도 “기술 개발이 안 됐다”고 평가했다. 원전 업계에서는 현 정부가 사실상 ‘탈원전’으로 유턴 선언을 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지난 2022년 대선 때도 기존 원전은 계속 가동하되 신규 원전 건설은 하지 않겠다고 공약했었다. 이 대통령의 이날 발언에 대해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대구·경북(TK)이다. 그동안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 추진해왔던 원자력발전소 건설이나 SMR 산업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TK지역에서는 이 대통령이 ‘감(减)원전’ 대상으로 지목한 ‘딱 한군데’를 영덕 천지원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천지원전 1·2호기는 지난 2012년 9월 건설계획이 확정되면서 한수원이 부지매입(영덕읍 석리 일대 18%가량)을 추진하던 중 문재인 정부 때인 지난 2021년 신규 원전건설 계획이 백지화되면서 중단됐다. 그러다가 지난 3월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수원이 신규 대형 원전 2기, SMR 1기 건설을 위한 부지 선정 절차를 시작한다고 밝혀 다시 주민 수용성 측면에서 유력 후보지로 주목받았다. SMR 건설은 대구·경북 모두 전력 확보를 위해 공들이고 있는 사업이다. 대구시는 홍준표 시장 재직 당시 TK신공항 인근 군위 첨단산업단지에 SMR 1기를 건설할 계획이라고 발표했고, 경북도는 이철우 도지사 취임 직후부터 한수원 본사가 있는 경주시를 SMR 연구·개발의 전초기지로 만드는 작업을 한창 진행 중이다. AI(인공지능) 경쟁시대에 원자력발전소나 SMR은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위해 필수적인 국가기반산업이다. 최근 세계 주요국이 원전산업 확대정책을 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물론 정권에 따라 국가 에너지 정책이 보완될 수는 있지만, 정치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원전건설 계획을 뿌리째 흔들어선 안 된다.

2025-09-14

李 대통령 균형발전 의지, 실천으로 입증해야

이재명 대통령은 행사 때마다 균형발전과 관련한 언급을 자주 했다. 대통령 후보시절에는 5극 3특 정책을 발표했다. 동남권, 영남권, 충청권, 호남권 등 수도권 일극체제와 맞먹는 5대 초광역권을 만들고 강원도와 전북, 제주도를 3대 특별자치도로 양성해 지자체의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수도권에 집중된 기능을 전국으로 분산시켜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을 실현하겠다는 뜻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도권 일극체제로는 국가가 더 이상 성장도 발전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 8월 전국 시도지사와 간담회서도 “지역균형발전은 지역에 대한 일시적 배려나 시혜가 아니고 국가의 생존전략”이라고 했다. 부산서는 “국가 생존전략으로 균형발전은 필수”라고 말하고 해수부의 부산 이전을 균형발전의 기폭제로 삼을 의지도 보였다. 이 대통령이 균형발전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한 것은 누구보다 수도권과 지방간의 격차가 심각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수도권 집중의 성장전략으로 발전을 했지만 지금은 한계점에 도달해 지속적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됐다고 지적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지금까지 강조했던 균형발전의 의지를 재확인하면서 새로운 구상을 밝혀 관심을 끌었다. 이 대통령은 “지방의 대규모 도시 또는 대규모 산업단지를 만들어 세제·규제·전기요금·배후시설·정주여건 등을 대대적으로 지원해 새로운 도시권역을 하나 만들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는 “수도권 집중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발생될 것 같다”며 “강력한 의지로 추진할 생각”이라고도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정책 결정에 지역균형발전 영향평가를 의무화하는 제도도 구상중이라며 과거 정부와 차별화된 정책 시행을 약속했다. 균형발전 정책은 과거 정부도 국정의 최우선으로 삼아 왔다. 그럼에도 인구와 경제의 수도권 쏠림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졌다. 정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책의 실천이 없어서다. 대표적인 사례가 2차공공기관 지방이전이다. 정책 발표만 있고 실천이 없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균형발전 의지가 확인되는 최종 관문은 정책의 실천이다.

2025-09-14

신산한 귀로의 상념

언젠가 고교 동창이 ‘주역’에 나오는 기막힌 구절로 나를 감동케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무평불피(无平不陂) 무왕불복(无往不復)’ 여덟 글자였다. 언덕배기 없는 평지는 없으며,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세상 살면서 만나는 길흉화복은 어디나 있으며, 인과율로 작동하는 인간관계 역시 일방통행은 없다는 의미다. 어떤 방향으로 길을 시작했다면, 되돌아오거나 혹은 그 길로 끝까지 가면 출발 지점과 만나게 된다. 사람은 대개 전자(前者)를 택한다. 열차표든 비행기표든 우리는 편도가 아닌 왕복으로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런 연유로 출발지는 종착지가 되는 것이다. 스무 살 남짓했던 윤동주 시인이 “시(始)는 종(終)이요, 종은 시”라고 썼던 데에는 까닭이 있는 셈이다. 현지 시각 8월 29일 새벽 3시 반에 숙소에서 일어난다. 4시에 호텔 로비에서 조지아의 김 영사를 만나기로 한 때문이다. 그가 예약한 택시를 타고 4시 20분 무렵 트빌리시 공항에 도착한다. 적잖은 승객들이 ‘아지무트’ 항공사의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타려고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탑승객 통로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김 영사는 자리를 지킨다. “영사 업무 수행 중입니다!” 6시 40분 트빌리시를 이륙한 비행기는 러시아 시각 오전 9시 40분에 모스크바 브누코보 비행장에 안착한다. 여기서 다시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것은 모스크바의 관문(關門) 격인 세르메치예보 공항을 거쳐 입국하던 때의 스산한 경험 때문이다. 나와 동행한 89학번 김 이사가 여권 검색대원에게 억류되어 1시간 40분 동안 하릴없이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전쟁하는 러시아는 불의하고 무도한 지난 정권의 미국 일변도 외교에 단단히 분노한 듯 보인다. 우리처럼 나이 지긋한 여행객을 아무 이유 없이 붙잡아두기 때문이다. 심지어 러시아 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의 동생 가족도 2시간 남짓 억류되는 일마저 일어나는 현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새로 출범한 국민 주권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터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몰려온 노동자들과 그 가족으로 북새통인 브누코보 공항에서 2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 마침내 검색대를 통과한다. 공항에는 92 졸업생인 남 사장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의 승용차 편으로 한국 식당으로 이동하면서 그가 모스크바에서 겪은 여러 애환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22년 넘게 모스크바에서 현지인(?)처럼 살아가고 있다. 한식당에는 모스크바 문화원의 박 원장이 기다리고 있다. 그의 제안에 따라 내장탕(內臟湯)을 주문한다. 벌써 보름 가까이 매콤하고 얼큰한 맛과 만나지 못한 까닭이다. 나의 맹맹한 내장 속으로 붉은 색깔의 칼칼한 내장탕 국물이 밥과 함께 넘어가자 비로소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 곧 귀국이구나!’ 하는 따사로운 심사가 나를 찾아든다. 모스크바 시각 밤 8시 35분에 이륙한 에어 차이나 비행기가 8월 30일 오전 8시 북경에 도착한다. 거기서 다시 997km를 날아서 서울 시각 오후 1시에 김포 공항에 이른다. 빠른 입국심사를 거쳐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안착한 것이다. 역시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최고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9-14

엇박자 정부

‘금강·영산강 보 해체’ ‘신규 댐 건설 보류’ 이재명 정부의 환경과 수자원 관리에 대한 시각을 보여준다. 물이 흐르고 싶은 데로 흘러가게 놓아두자는 것이다. 환경보호단체에서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환경만을 생각하는 단체와 여러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정부 입장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금강·영산강 보 해체’ 기사가 실린 날에도 호우경보가 내려진 강원도 화천에 140㎜ 내외의 폭우가 쏟아져 곳곳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이런 날에도 가뭄 피해가 계속된 강릉에서는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요즈음 날씨는 한 곳에 비가 많이 와도 바로 옆은 가뭄이 드는 날씨가 자주 발생한다. 올해에 400㎜가 넘는 폭우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논밭이 쓸려간 피해가 발생했고, 아직 복구도 안 된 상태이다. 그런 와중에 나온 정부의 정책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데, 설치해 놓은 보를 철거하겠다는 것인지. 정부는 가뭄과 비 피해로 아파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지. 이념에 빠진 사람은 주변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단 말인가. 물난리로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데, 그 물난리를 막아줄 보를 해체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 UN에서는 한국이 물 부족 국가라고 말하는 데 추가로 댐도 건설하지 않고 있는 보마저 해체한다니. 인공지능이 중요하니까 관련 사업을 키우겠다고 한 것이 어느 정부인가. 인공지능은 엄청난 전기가 필요한 산업이다. 여기에 필요한 전기는 어디서 충당할 것인지. 다시 원자력산업을 죽이고 산림을 훼손하면서 태양광을 설치하겠다는 것인가. 보를 활용해 전기를 공급할 생각은 하지 않는가. 사람들이 자연 보호나 인공지능이라고 하니 인기에 영합하는 즉흥적인 생각으로 정책을 펴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국가 정책은 최소한 100년은 내다보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일부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 따라가면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비를 막거나 가뭄이 들면 손해는 누가 보는가. 그것은 농민의 문제이고 국민의 문제이니 나만 괜찮으면 된다는 것인가. 수십조 원을 들여서 만든 보를 쓰고 난 휴지를 버리듯 팽개쳐 버릴 만큼 우리나라 경제가 튼튼하지 않다. 국가가 빚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수십조 원은 그냥 버려도 된다는 말인가. 말로는 실용주의라고 하며 실상은 돈만 물 쓰듯 하는 즉흥적인 정책을 누가 신뢰할 것인가. 국민이 믿을 수 있는 정책을 펴야 한다. 농민들은 보 때문에 물 걱정을 안 한다는데 또 돈을 들여 없애겠다니. 현실에 부합하지 못하는 정책은 국민에게 피해만 안긴다. 국민은 세금만 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보가 내 것이라고 해도 그런 정책을 펼지 의구심이 든다. 내 돈이 안 드니까 낭비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한 번 돌아볼 일이다. 노동자들이 좋을 것 같아 고친 상법이 다른 법과 충돌을 일으키고 자연 그대로가 좋다고 하는 것이 국민의 불편만 가중시키는 실용주의라면 내팽개쳐야 한다. 엇박자도 이런 엇박자가 없다. 국가의 중대사인 보를 몇몇 사람들의 편협한 생각으로 없앤다면 이는 망국주의다. /김규인 수필가

2025-09-14

미리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꼭 하는 편이다. 평생 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살아온 데다 나는 사심이 없고 내 말이 옳다는 신념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강하게 걸려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내 생각이 옳아도 그것을 관철시키려면 상황에 따라 참을 줄도 알아야 하고 수위도 조절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중용’의 말처럼 신중하게 미리 준비해야 한다. ‘천하와 나라와 집안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큰 원칙은 9가지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원리는 하나이니, 그것은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할 일을 미리 준비하면 성공하고, 할 말을 미리 준비하면 실수하지 않으며, 일을 미리 정하면 막히지 않고, 행동을 미리 정하면 탈 나지 않으며, 방법을 미리 정하면 오래 유지한다.’ 말이나 행동은 물론이고 일을 도모하는 것도 미리 준비하면 실수하거나 실패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언제나 적절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우발적인 사고는 막을 수 있지만, 평소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면 미리 준비해도 성공하기 힘들다.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공평한 시각을 전제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실수하는 사람은 계속 실수한다. 최근 최강욱이 조국혁신당 고위 당직자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한마디 했다가 결국 더불어민주당교육연수원장에서 사퇴했다. 6분 정도 되는 최강욱 발언의 녹음 파일을 들어보면 2차 가해라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처음에는 열린우리당의 합당 반대파 이야기를 하다가 바로 조국혁신당의 성추행 사건으로 넘어가면서 갑자기 사실 확인도 없이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하고 그런 사람을 개돼지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개돼지라는 표현의 수위도 높은데다 그가 말하는 열린우리당의 일과 조국혁신당의 일 사이에 연결고리도 별로 없다. 굳이 연결고리를 찾자면, ‘사소한 시비 다툼’이 될 텐데, 과연 열린우리당 합당 반대파들의 주장이 사소한 시비 다툼이었나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최강욱을 검색해보니 ‘말’로 구설에 오른 일이 여러 번이다. 그러고 보면, 최강욱의 평소 화법이 조심성이 없거나 평소 생각도 치우쳐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중용’에서는 미리 준비하기를 잘하려면 혼자 있을 때 생각과 감정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게다가 인간은 자신이 만든 터널에 갇히기 쉽다. 자기가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라는 인식이 강하면 일을 그르치기 쉽다. 요즘 동네 단톡방에서 리더 집단의 무능과 부정을 지적하다가 그들과 갈등의 골이 깊은 상태다. 내가 옳다는 떳떳함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 며칠 전 한 주민에게서 내 발언이 아무리 옳아도 그렇게 강경하게 발언하면 일반 주민에게는 시비 거는 사람으로 보인다면서 수위 조절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듣고 깨달은 바가 많다. 어떤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할 때는 혼자 있을 때 마음공부도 필요하고 듣는 이의 상황에 따른 표현 조절도 중요하다. 정치인들에게 특히 필요한 덕목이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9-14

전기누전 차단기

연일 계속되는 폭염이다. 매일 휴대폰 안전문자로 폭염경보 때론 주의보가 날아온다. 벌써 9월인데도 수그러들 기미가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집집마다 에어컨이 필수가 되었다. 오래 된 에어컨을 올해 마음먹고 바꾸었는데, 영 온도가 떨어지질 않는다. 용량이 작은 건가, 잘못 작동시키고 있나, 여러 생각이 오간다. 결국 설치기사분에게 전화를 했다. 기사가 오기로 한 날, 아침에 에어컨을 틀었다. 바람세기를 세게 하고 희망 온도는 낮게 잡았다. 그게 에어컨 전기료를 절약하는 방법이라 들었기 때문이다. 잘 돌아가던 에어컨이 갑자기 뚝 멈춰버렸다. 당황했다. 차단기가 내려간 것 같았다. 혼자 어쩔 수 없어서 기사분이 올 때까지 더위를 견뎌야 했다. 기사님이 접촉이 조금 나빠 온도가 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하며 쉽게 고쳐주셨다. 남은 문제는 차단기였다. 구축 아파트는 그 당시 가전제품이 많지 않아서 전압이 낮게 책정되어 있다고 한다. 현재 나오는 가전제품은 정격전압이 높은 편이라 차단기가 내려가는 것이라며 차단기를 교체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누전 차단기는 전류가 새어 나가는 순간 자동으로 전원을 차단하는 장치이다. 전기 사용 중 발생할 수 있는 감전이나 화재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필수적인 안전장치로 주로 과부하가 걸렸을 때, 누전, 오래 된 전자기기, 등이 원인이라고 한다. 결국 차단기가 내려간다는 것은 안전을 위한 것이다. 결국 전기기사를 불렀다. 차단기는 4개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그 중 에어컨을 작동하는 차단기만 내려간 것이다. 차단기 전체가 너무 낡았다고 한다. 전체를 교체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예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같은 아파트에 거주했고 아이들도 같은 학년이라 친하게 지냈다.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아이들과도 놀러 다니며 좋은 추억을 많이 쌓았다. 어느 날 이 친구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우리 집으로 뛰어 왔다. 그리고 다자고짜 화부터 내었다. 도무지 영문을 몰랐기에 어리둥절한 내게 점점 수위 짙은 말이 빠른 속도로 뱉어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유추하니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며칠 전 다른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친하게 지내느냐고. 무심코 서로 세상을 보는 시각은 다른 것 같은데 그래도 잘 지내고 있어라고 답했던 것 같다. 그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달된 것이다. 시각이란 단어가 수준이 낮은 걸로 들렸나보다. 아니라고 하는데도 전혀 생각지 않았던 부분에서 화를 내는 친구를 보며 내 입에서 나오는 말도 거칠어졌다. 그 날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이후로 좋았던 관계는 깨어지고 다른 아파트로 이사할 때까지 외면하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욱하는 성질을 갖고 있는 나는 잘 참는 것 같다가도 일정 수위 이상으로 감정이 솟구치면 화산 터지듯 폭발해버려 뒤는 생각지 않고 뱉어내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 날도 그런 한계상황까지 간 것이다. 차분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 그 날 내 감정에도 차단기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위험수위에 이르면 저절로 내려가 욱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차단기가 있었으면 좀 더 현명하고 기분 나쁘지 않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아마 친구를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아이들도 더 좋은 기억을 담았으리라 싶다. 행복하기를 원하고 잘 살기를 바라며 인정받고 싶은 우리들의 마음이 때로는 그것 때문에 무리한 욕심을 부릴 때가 있다. 더 잘 살기 위해 하는 무리한 투자,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며 몰아가는 자녀들에 대한 지나친 교육열.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나만의 이기심과 시기. 이런 것들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나다운 나로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차단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군데군데 여러 개의 차단기를 마음에 심고 필요시에 얼른 내릴 수 있다면 조금은 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기사가 가고 소파에 앉아 에어컨을 작동시킨다. 찬바람이 더위로 어질러진 마음을 가라앉힌다.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야지. 손보다 마음이 먼저 리모콘으로 향한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09-14

그냥 쉬었음 인구

통계청이 매달 발표하는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일도 하지 않고 구직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일할 의사도 없는 ‘그냥 쉬었음’이라고 하는 인구통계가 있다. ‘쉬었음’ 인구통계는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중대한 질병이나 장애 등 특별한 이유 없이 쉬는 사람의 수를 말한다. 쉬었음 인구는 실업자와는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실업자는 구직 활동을 하지만 취업이 되지 않은 상태의 사람이다. 그래서 구직의사 없이 쉬는 사람은 실업률에 포함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냥 쉬는 인구의 상당수가 노동력이 가능한 연령대지만 취업난이나 불경기 등으로 취업을 포기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일할 의사도 없고 구직 활동도 하지 않고 그냥 쉬었다는 사람의 수가 264만명(8월 기준)에 이른다. 연령층별로 보면 15~29세 청년층이 43만명, 30대는 32만명이다. 그중 가장 왕성하게 일할 연령대인 30대는 올 8월 중 그 수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20~30대 연령층에서 쉬었음 인구가 증가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지난달 청년층의 고용률이 16개월째 하락 행진 중인 것이 이를 반증한다. 한 경제단체 조사에 의히면 청년 인구가 줄고, 그냥 쉰 청년이 늘면서 우리나라는 연간 9조원 가량의 경제적 손실을 입는다고 했다. 청년층의 쉬었음 인구 증가는 우리 경제의 건전성이 그만큼 약화됐다는 반증이다. 최근 우리 경제는 경기가 계속 침체되고 미국의 고관세 정책 등으로 일자리 창출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 쉬었음 청년을 구제할 일자리 창출만큼 다급한 과제는 없어 보인다. 정치가 정쟁(政爭)으로 소모할 때가 아닌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14

인사철마다 유언비어에 흔들리는 경주시정

경주시의 인사 풍토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인사철만 되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것으로, 유언비어와 투서가 난무하고, 승진 대상자를 둘러싼 뒷말이 조직을 뒤흔든다. 실제로도 공직사회의 성과와 전문성은 뒷전이고, 누가 누구와 가까운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어 버렸다는 세평이 파다하다. “일은 잘하지만, 업자와 유착됐다더라”, “시장 측근에 줄을 댔다더라”, “청사 내 힘 있는 세력이 따로 있다더라”라는 식의 소문이 꼬리를 물고, 확인되지 않은 투서까지 난무한다. 승진하려면 인사 전에 시장에게 의견이 전달돼야 한다는 뒷말도 무성하다. 성과보다 줄서기가 인사의 기준처럼 작동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무엇보다도 행정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 더욱 문제는 이런 풍토가 단순한 잡음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정 세력이 파벌을 형성하고, 누가 요직에 오를 때마다 ‘측근 인사’라는 잡음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그 결과, 경주시 공직사회에서의 사기 추락은 눈에 비칠 정도다. 시민들도 경주시 인사가 공정성과 투명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지하고 있다. 인사는 조직의 가장 큰 동기부여이자 갈등의 원천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간다. 이런 무질서한 인사 관행을 비난하고 있는 시 직원들도 막상 승진때가 되면 친분과 줄서기에 나서는 모습을 볼 땐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행정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행위다. 또 공정하지 못한 인사가 남기는 것은 불신과 냉소, 그리고 행정에 대한 무력감뿐이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더 이상 이 악습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인사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평가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 성과와 능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원칙을 세우지 못한다면 경주시정은 끝없는 유언비어와 파벌 싸움에 휘둘릴 것이며 공무원 사회의 신뢰 회복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주 시장이 경주 수장에 오른지도 8년이 다되어 가고 있다. 그동안 인사를 둘러싸고 말썽이 생기면 그는 ‘승진하지 못한 직원의 불만"이라면서 “공정하게 인사를 한다”고 강조해 왔다. 하지만, 지금 경주시의 돌아가는 사정을 들여다보면 과연 그런지 의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직사회에선 인사가 만사라고 했다. 조금 어긋나서도 안되지만 많이 일탈한다면 시장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경주시는 성과가 아닌 줄서기로 움직이는 낡은 풍토를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일은 잘하지만, 업자와 유착됐다더라", “누구 줄에 섰느냐”가 아니라 “무슨 성과를 냈느냐”로 평가받는 경주시정은 언제 가능할까. 이제는 시장이 답을 내야 할 시간이다. /황성호 기자 hsh@kbmaeil.com

2025-09-14

기절초풍의 똘똘한 한 채

KB부동산이 밝힌 9월 중 통계에 의하면 전용면적 84㎡ 아파트 기준으로 전국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는 서울 서초구 반포동 ㄹ아파트다. 지난 6월 거래된 가격이 72억원이다. 반면에 비슷한 규모로서 전국에서 가장 낮게 거래된 아파트는 경북 김천시의 ㅅ아파트다. 지난 5월 거래 가격이 7000만원이다. 이 아파트 102채와 서울 ㄹ아파트 한 채가 맞먹는 가격이다. 서울 인기 아파트단지의 똘똘한 한 채의 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통계다. 똘똘한 한 채란 시세상승 가능성이 높고 환금성이 좋으며 실 거주와 투자 가치가 모두 뛰어난 부동산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서울 강남·서초 일대의 인기 아파트단지로서 교통, 학군, 생활 인프라 등이 뛰어난 알짜배기 부동산이다. 똘똘한 한 채가 투자 대상으로 등장한 것은 다주택 소유자에 대한 정부의 세금규제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여러 채를 구입하는 것보다 확실한 한 채를 보유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똘똘한 한 채에 대한 투자가 집중됐다. 세금 부담도 피하고 자산의 안정적 가치상승도 기대할 수 있으니 투자자 입장에서는 일거양득 효과를 본 것이다. 지방의 아파트 102채를 팔아 서울의 아파트 한 채를 겨우 살 수 있다는 가정에 기절초풍하지 않을 사람 있을까. 아파트 값만으로 본다면 지방의 아파트는 처참할 지경이라 할 수 있다. 서울과 지방의 양극화가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를 보는 젊은층이 지방에 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이같은 양극화 현상이 결국은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데, 과거의 정부 정책은 늘 헛발질만 한 것 아닌가. 지방에서는 똘똘한 한 채보다 똘똘한 정책을 바라고 있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9-11

여야 대치 격화…李 대통령의 중재역할 중요

이재명 대통령이 어제(11일) 취임 100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하면서 ‘더 자주 소통, 더 큰 통합’ 메시지를 강조했지만, 여야의 첨예한 대치 관계는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지난 8일 만나 민생경제협의체를 구성해 자주 만나자는 약속을 한 지 하루 만에 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이 약속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정 대표는 지난 9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국민의힘을 향해 ‘위헌정당 해산’ 가능성을 다시 거론하며 강경 발언을 이어갔다. 전날 회동에서의 협치 약속은 완전히 무시했다. 그는 연설에서 ‘내란’을 26번 언급하면서도 ‘협치’라는 단어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이 ‘더 많이 가지셨으니 좀 더 많이 내어 달라’는 요청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마운 법이다. 지난 10일 열린 국민의힘 송언석 원내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연설이 고울 리 없었다. 그는 연설 내내 정부·여당을 혹평했다. 송 원내대표는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가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뜻의 혼용무도(昏庸無道) 같은 거친 언어를 쓰며 여권을 맹비난했다. 그는 “지금 국회의 모습은 다수 의석을 앞세운 집권 여당의 일방적인 폭주와 의회 독재의 횡포만 가득하다“고 했다. 송 원내대표는 약 53분간의 연설에서 ‘독재’를 7차례 언급하며 정부·여당에 맹공을 퍼부었다. 당 지도부가 이처럼 앞장서서 서로 증오를 부추기면서 어떻게 여야 간 협의채널을 가동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지난 월요일 이 대통령이 웃으면서 지켜보는 가운데 여야 대표가 악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권의 해빙무드를 기대했던 국민들의 실망은 이만저만 아니다. 정치복원을 위해서는 이 대통령이 적극 나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 여야협치는 민주당 정 대표가 먼저 야당에 손을 내밀어야 가능하다. 그러려면 이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정 대표를 설득해 협치를 성사시켜야 한다. 그래야 국론도 통일되고 국정운영의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2025-09-11

빈발하는 초등생 유인사건···부모는 불안하다

서울과 경기, 제주, 대구 등 전국에서 초등학생을 유인하는 사건들이 잇따르고 있다. 대개 사건이 유인 미수로 그치고 있으나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들은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최근 서울 서초구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유인 미수사건은 학부모 사이에 큰 충격을 일으켜 강남구·서초구를 중심으로 학생들의 사설경호를 문의하는 전화가 급증했다고 한다. 사설업체의 경호비는 하루 최소 20만원이 든다고 한다. 서초구 사건은 지난 7월 서울 서초구 한 아파트 앞에서 하교 중이던 초등학생에게 70대 여성이 접근해 “부탁 들어주면 1만원을 주겠다”고 유인하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경찰은 사건 신고를 받고 다음날 70대 여성을 체포했다. 8월 28일에는 서울 서대문구 한 초등학교 앞에서 20대 남성 3명이 차량을 몰고 다니며 “귀엽다” “집에 데려다 줄게” 등으로 초등생을 유인하다 경찰에 검거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이들 중 범행을 주도한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아이 안전보다 가해자 권리 보호가 우선이냐”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달 10일에는 대구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대구서부경찰서에 따르면 서구 대평리시장 일대 길거리에서 한 남성이 초등학생에게 다가가 “짜장면 먹으러 가자”고 유인하다 실패하자 달아났다. 경찰은 폐쇄회로를 통해 용의자를 특정하고 검거에 나섰다고 한다. 9일 제주도에서도 서귀포시 한 초등학교 앞 도로에서 초등학생에게 “알바 할래”라며 접근한 남성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용의자는 과거 성추행 전력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직 미성년자로서 판단력이 부족한 초등학생을 상대로 한 유인 시도는 중대한 범죄행위다. 특히 초등학생 스스로가 판단력이 부족하고 세상 물정을 몰라 자칫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사건이란 점에서 사회적 경각심이 높이 요구된다. 정부와 경찰, 시민사회 전체가 사회안전망 구축에 힘을 모아야 한다. 어린 학생의 안전과 부모들이 안심하고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2025-09-11

AI와 상담한 소년이 죽었다

요즘 의뢰인들이 챗지피티로 검색한 자료를 갖다 주곤 한다. 얼마 전엔 소송을 하면서 법리적으로 풀리지 않은 쟁점이 있어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해당 사건의 의뢰인이 “변호사님, 우리에게 딱 맞는 판례를 찾아냈어요”라며 챗지피티로 검색한 자료를 보냈다. 적혀있는 판례들은 정말 이 사건에 딱 맞으면서도 유리한 판례들이었다. 판례 번호까지 적혀 있길래 당장 판례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해보았지만 그런 판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사한 내용의 하급심 판례조차 없는 상태였다. 우리 법의 법리나 판례 면에서 AI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법률전문가가 AI 정보의 오류를 잡아낼 수 있지만 AI 가 99% 정확해지는 세상이 되면 오히려 1%의 잘못된 정보는 누가 찾아낼 수 있을까 싶었다. 누군가 그 1%의 오류를 찾아내도 사람들은 AI의 허위 정보를 더 신뢰하지는 않을까. AI의 잘못된 정보는 그 수요자의 인지 수준이 낮은 경우 더 큰 문제가 된다. 지난 대선기간 한 학습지 업체의 태블릿 패드의 질문란에 대선후보 한 명의 이름을 입력하니 ‘사형입니다’ 라는 답변이 나와 논란이 되었다. 당시 언론에 이를 보도한 제보자는 “저 같은 경우 (아이에게) ‘이건 잘못된 거다’라고 얘기해 줬지만, 이건 저희 아이들만 쓰는 게 아니라 많은 아이가 쓰고 있고 그중에는 이걸 그냥 받아들이는 아이도 있을 것”이라며 우려했다. AI의 위험성이 객관적 정보에 대한 진위를 따지는 수준에서 끝나면 다행인데, 이제는 AI가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지배하는 단계까지 간 것 같아 문제다. 작년 미국 플로리다주의 한 14세 소년이 AI 챗봇과 대화를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다. 소년은 챗봇과 주로 성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챗봇은 마지막으로 소년에게 “사랑한다, 가능한 빨리 내게로 와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얼마 뒤 소년은 극단적 선택을 했다. 소년의 부모는 챗봇 개발사를 상대로 불법행위에 의한 사망 소송을 제기했고 플로리다 중부 연방지방법원은 “이러한 해로운 상호작용은 AI챗봇의 설계 결함 때문에만 가능하다”라고 판단하며 AI 개발사 측의 책임 가능성을 인정했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16세 소년이 챗지피티와 대화하며 자살 계획을 구체화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심리 상담과 관련한 부작용 사례가 계속해서 발생하며 미국은 심리 치료를 목적으로 한 AI 사용을 제한하거나 사용자의 위험 징후를 감지하면 AI가 전문적 정신건강 서비스를 권고하도록 의무화하는 등 관련 제도 마련을 시작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AI 윤리에 관한 규제는 아직 무방비 상태다. AI챗봇과의 대화는 개인 간 통신에 해당해 이용자의 신고 없이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규제기관이 감독하기도 어렵다. 새 정부가 한국을 ‘세계 3대 AI 강국’으로 도약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다양한 AI 발전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어떤 분야든 발전과 성장은 안전· 보호와 함께 가야 오래갈 수 있는 법이다. AI 윤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아이들이 AI 친구와 대화하다 목숨을 잃는 일이 우리나라에선 없었으면 한다. /김세라 변호사

2025-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