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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봄의 빛깔

봄날의 하루는 여유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마음을 다지는 책으로 30분간의 가벼운 독서를 한다. 한 잔의 차와 한 줄의 글이 주는 마음의 여유가 봄바람과 함께 창문으로 들어온다. 인터넷 카페를 둘러보며 한가로운 시간을 가진다. 따사로운 봄바람과 함께 봄의 빛깔이 사무실로 들어온다. 연한 분홍빛을 머금은 벚꽃이 활짝 피어오른다. 꽃봉오리가 맺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집 주위가 환하게 핀다. 햇빛은 꽃잎에 반사된다. 꽃잎을 머금은 빛에 눈을 뜰 수가 없다. 꽃잎 속을 돌아다니는 마음은 풍선에 매달린 듯 떠다닌다. 벚꽃이 품는 잔잔한 향기에 코는 연신 벌렁거리고 춤을 추는 꽃 무리에 눈은 연신 두리번거린다. 봄이 준 선물에 몸은 중력을 무시한 채 하늘을 난다. 순천만에 가고 싶다는 아내와 봄을 맞으러 나선다. 가는 길가에 늘어선 봄의 빛깔을 본다. 이제 세상에 나오는 때 묻지 않은 연한 빛깔에서 봄을 느낀다. 연둣빛이 마음 깊은 곳에 은밀히 숨겨둔 감성을 자극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 것은 저렇듯 귀엽다. 해맑게 웃는 아기의 모습이, 엄마 젖을 빠는 강아지가 그러하고, 이제 막 싹을 틔우는 식물의 어린싹이 그러하다. 이렇게 봄은 어린아이의 해맑은 빛으로 다가온다. 잎이 때로는 꽃보다 더 예쁘다. 순천만의 정원에서 연한 분홍이 눈길을 잡아끄는 삼색 버들의 아름다움은 잎이 꽃보다 예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버들은 고고히 봄빛을 머금은 채 제 색깔을 낸다. 이름 모를 풀잎들이 자신만의 빛으로 존재감을 나타낸다. 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시다. 잎은 꽃보다 생명이 길다. 황홀함을 유지하기에는 꽃보다 잎이라는 식물들의 놀라운 진화를 경험한다. 벌의 치근댐을 싫어하는 꽃의 변신이다. 원래 꽃이 아니고서야 이렇듯 순수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봄은 이렇게 연한 빛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면서도 화려하게 다가온다. 파스텔 색조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마음을 움직인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봄을 맞는다. 봄의 빛깔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은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벚꽃과 복숭아꽃의 연한 빛깔은 성장하기 전 어린 빛깔이다. 짙은 색깔로 자신을 감추지 않은 순진한 아이의 색이다. 개나리꽃의 하늘거리는 노랑에 마음을 빼앗기는 어린아이의 빛깔이다. 오늘 하루,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 유년의 빛깔로 하루를 산다. 순수함은 이렇게 때론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 은은함 속에 온전히 내맡겨진 나를 본다. 운전하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창문 너머로 출렁이는 라일락 향기에 빠져 차를 세운다. 코를 간질이며 파고드는 향기에 한참을 머문다. 콧구멍은 향기를 쫓느라 킁킁거리고 시간은 저 홀로 간다. 향기와 연한 빛이 만드는 동화 속으로 빠져든다. 어느새 나의 빛깔도 묵은때를 벗고 연한 빛으로 바뀐다. 봄의 빛깔이 나를 감싼다. 자신이 가진 순수한 빛깔로 마음을 움직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겨울을 이기고 자신을 단단히 다스린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민낯을 그대로 보여 주고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처럼 새로운 생각으로 곡을 해석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경지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많아진다. 단지 연한 빛깔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은 아니리라. 따사로운 햇살에 최선을 다해 물을 끌어 올리며 반짝이며 살아가는 모습에 내 마음이 움직인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반짝이며 살아가기에 나도 덩달아 마음을 연 것이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그 순간에도 자기다움을 유지하는 어린잎을 보며 봄의 흥취에 빠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순간에 최선을 다한다. 그 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칠십을 바라보는 나는 어떤 색을 띠고 있을까. 어쩌면 빛을 잃고 있는 건 아닌지. 시간의 흐름에 달라지는 자연의 색상에도 불구하고 맑은 빛깔만은 유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김규인 수필가

2026-04-29

포스코의 HyREX,‘그린 철강’의 꿈과 에너지 믹스의 현실

글로벌 수요 둔화와 에너지 비용 상승이라는 구조적 어려움 속에서 대한민국 철강 산업의 심장 포스코가 탈탄소 전환을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석탄 대신 수소를 활용해 쇳물을 뽑아내는 수소환원제철(HyREX) 기술이라는 탄소중립 시대의 마침표가 될 꿈의 공법으로 전환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포스코는 전기로와 수소환원제철을 축으로 한 ‘투 트랙’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전기로를 브리지 기술로 활용해 탄소 배출을 줄이고, 장기적으로는 HyREX 상용화를 통해 저탄소 생산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같은 전략에 따라 광양제철소에는 기존 고로 대비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연산 250만 톤 규모의 전기로가 올해 가동을 목표로 건설되고 있으며, 포항제철소에서는 해안매립을 통한 HyREX 데모플랜트 구축과 함께 스크랩과 열간성형환원철(HBI) 등 저탄소 제철 원료의 안정적인 조달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문제는 최근 포스코가 이 거대한 전환을 위해 LNG(천연가스) 발전과 SMR(소형모듈원전)에 의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글로벌 시장의 엄격한 잣대인 RE100 달성 가능성에 의문부호가 붙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웃 나라 중국의 행보다. 중국의 최대 철강사 바오우(Baowu)는 이미 태양광, 풍력을 넘어 원자력 기반의 ‘핑크수소(Pink Hydrogen)’라는 치트키를 꺼내 들며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이 같은 포스코가 직면한 에너지 딜레마와 구조적 모순을 ESG 관점에서 분석해 보려고 한다. △환경(E)의 역설:수소로 탄소를 지웠으나 에너지는 ‘회색’ 수소환원제철은 고로에서 유연탄을 태워 산소를 제거하는 대신 수소를 사용해 물(H2O)만을 배출하는 혁신 공법이지만 문제는 ‘그 수소를 만드는 전기의 출처’다. 포스코가 수소 생산 및 전기로 가동을 위해 LNG 발전을 중간 가교(Bridge)로 활용하려는 계획은 단기적인 탄소저감 효과는 있을지언정 진정한 ‘넷제로(Net-Zero)’와는 거리가 먼 ‘회색 에너지’이다. LNG 역시 연소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화석 연료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이를 탈탄소가 아닌‘전환기의 지연’으로 해석할 위험이 아주 크다. 이에 반해 중국 바오우의 잔장제철소는 이미 수소환원제철 설비 가동을 시작했다. 초기엔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썼으나 원가와 간헐성 문제가 발생하자, 내년부터 인근 대형 원전에서 전기를 공급받아 수소를 생산하는 ‘하이브리드 탈탄소’ 전략으로 선회했다. 이는 RE100 기준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실무적 규제 장벽을 가장 빠르게 돌파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 탈탄소 전략’이다. △지배구조(G)와 사회(S)의 리스크: 원전과 RE100 사이의 외줄 타기 ESG의 ‘S’와 ‘G’ 측면에서 볼 때, 포스코의 현재 에너지 전략은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고립이라는 지배구조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 포스코가 기대를 거는 SMR은 탄소 배출이 없지만, 현재의 RE100 규정상 원자력은 재생에너지에 포함되지 않는 ‘CF100(무탄소 에너지)’이다. 애플, 구글 등 글로벌 고객사들이 요구하는 것은 ‘CF100’이 아닌 ‘RE100’인 경우가 압도적이다. 즉, SMR이나 LNG로 생산한 쇳물은 RE100 인증을 통과하지 못해 수출 경쟁력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중국의 바오우는 1.3GW급 대형 원전 인프라를 국가 주도로 즉각 활용하는 반면, 포스코는 미완의 기술인 SMR 실증에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는 기업의 의사결정(G)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 에너지 믹스라는 국가적 한계에 부딪힌 모습이다. 성공적인 탈탄소 전환을 통한 청정제조업 생태계 조성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는 지역 사회(S)의 불안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ESG 결론:‘Bridge’ 전략의 위험성을 넘어 ‘Full Green’으로의 결단 저탄소 철강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하이렉스(HyREX) 상용화 전까지의 기술적 공백기를 메울 정교한 로드맵으로 포스코의 LNG와 SMR 의존의 ‘Bridge’ 전략은 국내 에너지 수급 환경을 반영한 고육지책일 수 있다. 하지만 ESG는 포스코의 어려운 현실을 변명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시장은 결과로 말하며, 중국은 이미 실질적인 탄소 저감 성과를 내며 앞서가고 있다. 포스코가 진정한 ESG 선도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Full Green’으로 전환이 필수적이다. LNG발전 비중을 줄이기 위해 국가 차원의 대형원전 무탄소 전력 공급망 확보나 자체적 재생에너지 인프라 조기 구축을 통한 에너지 믹스의 대담한 재설계가 필요하다. 원전을 활용하되, 이를 통해 생산된 철강이 국제 시장에서 어떻게 ‘친환경’으로 인정받을지에 대해 중국의 핑크수소에 대응하는 전략적 글로벌 표준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 LNG와 SMR이 한시적인 역할임을 명확히 하고, 최종적인 100% 재생에너지 도달 시점을 명시하는 투명한 로드맵 공표로 투자자의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한다. 철강은 국가의 기간산업이다. 포스코가 ‘탄소 배출 1위’라는 불명예를 벗고 지속가능한 ‘그린 스틸’의 승자로 남을 수 있을지는, 지금 그들이 선택하는 에너지의 빛깔에 달려 있다. 중국 바오우가 핑크수소로 앞서가는 지금, 포스코는 LNG라는 회색빛 안개를 뚫고 푸른 재생에너지와 무탄소 에너지의 결합이라는 담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ESG 경영은 명분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다.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이 포항의 바닷가에만 머무는 메아리가 되지 않으려면, 대한민국 에너지 거버넌스의 대혁신과 기업의 공격적인 투자가 맞물려야 한다. 글로벌 철강의 주도권은 ‘누가 더 깨끗한 에너지를 더 싸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소리 없이 재편되고 있다.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HyREX) 기술이 중국의 핑크수소를 넘어 전 세계 그린 스틸의 표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4-29

수난 겪는 외국인 노동자

한국 도처에 산재한 중소기업은 물론이거니와 크고 작은 도시의 식당과 주점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는 게 어렵지 않은 시절을 살고 있다. ‘단일 민족’이란 단어는 이제 사어(死語)에 가깝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세계는 인종과 종교,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으로 빠르게 변해간다. 누구도 이런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고, 언어가 서툴러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무시하거나 물리적 폭력을 가한다면 이는 명백한 범죄다. 게다가 휴머니즘에 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최근 많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은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금속세척업체을 운영하는 사업주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산업용 에어건을 쏴 장기가 파열되는 상해를 입힌 것이다. 사업주는 “장난이었다”고 말했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특정 부위에 입은 상처가 크고 오랜 시간 치료를 받아야하는 사정을 감안하면 그 변명은 궁색하다. 사업주 나이가 60대라는데 그런 위험한 행위를 장난으로 봤다면 이른바 나잇값을 못한 것이다. 결국 사업주는 수원지법의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구속됐다. 구속 사유는 증거 인멸과 도주의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육체적 고통을 준 사람은 구속됐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받은 정신적 상처와 충격은 온전히 치유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연민과 긍휼을 가지지 않았다면 인간이라 부르기 어렵다. 우리 주위에도 수난과 억울한 일을 겪는 외국인 노동자가 없는지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들을 돕는 게 인간의 도리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4-29

인생은 한 턴씩, 보드게임처럼

보드게임은 요즘 가장 즐겁게 빠져 있는 취미다. 처음에는 단순히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가벼운 놀이로 시작했으나, 한두 번 하다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단순히 이기고 지는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몰입감,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순간들이 꽤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제는 여유 시간이 생기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소중한 취미가 되었다. 보드게임은 종류가 정말 다양하다는 점에서 큰 매력이 있다. 보드게임의 꽃이라 불리는 전략 게임은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고, 자원을 관리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규칙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조금씩 흐름이 보이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나만의 방식이 생긴다. 어떤 선택이 더 유리한지, 언제 기다리고 언제 과감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판단하게 되면서 내가 세운 전략이 예상대로 맞아떨어졌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과 만족감은 꽤 크다. 추리 게임은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장르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내거나, 어딘가에 갇힌 상황에서 단서를 모아 방을 탈출해야 하는 이야기들은 늘 흥미롭다. 처음에는 아무 의미 없어 보였던 조각들이 하나씩 연결되면서 전체 그림이 보이는 순간의 짜릿함이란. 또, 방탈출형 스토리 게임은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 하나의 이야기를 직접 완성해간다는 점에서 더 큰 몰입감을 준다. 보드게임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생각보다 운이 크게 작용하는 게임들도 많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원하는 카드가 나오지 않을 때가 있고, 예상하지 못한 주사위 결과 하나로 게임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반대로 큰 기대 없이 던진 한 번의 선택이 뜻밖의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래서 보드게임은 늘 계획과 우연이 함께 움직이는 느낌이 있다. 우리네 인생도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는 늘 최선을 다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지만 모든 결과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좋은 타이밍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 앞에 멈추기도 한다. 노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보드게임은 가끔 모든 것을 다 내 뜻대로 할 수 없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려준다. 모바일 게임과 비교했을 때 보드게임이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직접 손으로 만지고, 상대방과 마주 앉아 함께 한다는 점이다. 카드를 넘기고 말을 옮기고, 상대의 표정과 반응을 읽으며 진행되는 과정은 훨씬 더 생생하다. 보고, 듣고, 만지고, 이야기하는 모든 감각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몰입도도 높아진다. 그래서 더 진심으로 참여하게 되고, 그 순간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보드게임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대와 가까워진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색했던 사람도, 같은 규칙 안에서 웃고 고민하고 작은 실수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대화가 이어진다.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위기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이기고 질 때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를 보며 그 사람을 조금 더 알게 된다. 평소의 대화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던 성격이나 취향이 게임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한 판을 마치고 나면, 그 시간만큼 서로의 거리가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요즘 보드게임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잘해야 한다’보다 ‘끝까지 생각하고 참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걸 배우고 있다. 처음에는 이기고 지는 결과에 더 집중했지만, 여러 번 게임을 하다 보니 결국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흐름을 읽고 최선을 다해 참여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불리한 상황처럼 보여도 한 번의 선택으로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고, 예상하지 못한 기회가 찾아오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문제들도 결국 비슷하다. 당장 눈앞의 어려움 때문에 답답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계속 부딪히고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이기도 한다. 내가 가진 조건 안에서 더 나은 선택을 찾을 수도 있고, 때로는 과감하게 새로운 방향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완벽한 상황을 기다리기보다는 지금 주어진 순간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삶의 문제 앞에서 너무 조급해하거나 결과만 바라보며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에 집중하고 그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완벽하게 해냈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서 얼마나 진심으로 참여하고 스스로의 답을 찾아갔는지이기 때문이다. 한 턴씩 차근차근 자신의 속도로 인생이라는 게임을 즐기다 보면, 결국 내 삶이라는 게임에도 더 큰 애정이 생기지 않을까. /윤여진(시인)

2026-04-29

밤을 쓰고 싶지 않아

대부분 나의 작업은 해가 진 이후에 이뤄진다. 어둠 속에서 조명을 켜고 모니터의 빛과 함께 밤을 이겨내곤 한다. 어떻게든 마감을 끝낸 뒤 창밖을 보면 먼동이 트며 세상이 눈을 뜨고 있다. 모두가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 나는 잠에 든다. 내가 밤에 일한다고 하면 대개 사람들은 “역시 새벽 감성으로 쓰나 봐!”한다. 어떤 의미로는 보편적인 작가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나도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 정말로 나는 밤에 일하고 싶지 않다. 피곤하기도 하고, 새벽 감성 또는 밤이 주는 영감이란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뇌도 일하기 싫은 시간일 텐데 머리도 안 돌아가는 상황에서 갑자기 번쩍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건 높은 확률로 내가 헛것을 본 거다. 밤에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로 단순하다. 낮에 시작하더라도 해가 지기 전까지 끝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은 할 수 없어도 정해진 패턴이 있어야 할 텐데. 나는 오랫동안 그 패턴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작품 하나를 쓰고 나서도 부족한 면이 자꾸 보여서 붙잡고 있기 일쑤다. 나를 옭아매는 지독한 강박으로부터 나는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그런 밤 생활의 영향이 몸으로 오는 것 같다. 피부에 자꾸 트러블이 난다.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 머리가 무겁다. 물리적인 피해가 커지기 시작하자 내 안에서 비상 신호가 울렸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이렇게 살다간 골로 갈 거야. 더군다나 몸이 아프니 마음까지 아프다. 마감 하나를 끝내도 내부에 쌓인 우울감과 피로감이 사라지지를 않는다. 정말 이대로는 곤란하다. 가벼운 것부터 실천해 보기로 한다. 해가 중천에 떠 있기 전에 눈을 뜨는 것. 그리고 암막 커튼을 걷는 것.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빛을 차단해 왔다면 이제는 빛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때다. 다음은 씻고 컴퓨터 앞에 앉지 말고 바로 나갈 것. 이른 시간에 카페든 도서관이든 작업실이든 향해야 한다. 나의 방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방에 있는 동안에는 시간 감각을 제법 잃어버린다. 오후 두 시든 새벽 두 시든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내가 움직이는 것에 따라 시간이 흐를 따름이다. 그걸 바꾸려면 방법은 하나다. 빛이 있는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실용적인 일이 바로 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빛 사이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꽤 중요하다고 느낀다. 당장 뭐가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스스로 환기가 되는 기분이다. 밤에는 잠들어야 하니 커피 대신 따뜻한 카모마일 차를 마신다. 그리고 오늘 할 일을 정리한다. 문서로 한 번 정리하고 나면 하루의 윤곽이 조금은 보인다. 다음날의 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오늘치 일을 빨리 끝낸다고 해서 다음날 일을 미리 건드리는 건 에너지의 과용이 될 수 있다. 내일도 같은 에너지로 해낼 수 있단 보장이 없으니 할 수 있는 만큼, 가능한 만큼만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쓰기 시작한다. 이때 쓰는 것은 작품이 아니다. 일종의 가벼운 스케치 혹은 크로키에 불과하다. 문장을 정돈하지 않는다. 단어를 고르지 않는다. 그랬다간 생각이 감속하고 만다. 거의 무용한 것들로 페이지가 채워지더라도 그렇게 한다. 폴 발레리의 말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작품을 결코 완성할 수는 없다. 단지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는 것뿐이다.” 그 말대로 나는 포기하는 법을 익히기로 한다. 이게 더 좋은 대안은 아니었을까? 이런 고민은 내일로 미룬다. 생각이 많아지면 다시 잠들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작품은, 최선을 다한다 해도 오늘 완성될 운명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포기한다. 펜을 내려놓고 모니터를 꺼야 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의 노력은 일주일도 가지 못했다. 여러 마감이 하루에 겹친 탓이다. 낮에 시작했지만 저녁에 전부 끝낼 수는 없었고 다음 낮을 보고서야 마감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도 변명이다. 미리 시간 배분을 해서 우선순위대로 착착 처리하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낮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났어. 나 자신에게 이런 변명만 하고 있다. 밤의 생활이 계속된다는 게 무섭다. 무섭게도 이 칼럼 또한 밤에 쓰고 있다. 칼럼을 끝낸 후에는 바로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다. 자고 일어나서 하고 싶지만 마감이… 마감이 아침까지다. 지금 잠들면 그 일을 해낼 수가 없다. 내일까지만 이렇게 하고 모레에는 다시 낮에 일해야지. 아마도 이 계획은 또 금방 실패할 것이다. 작심삼일이어도 좋다. 밤과 내가 친해지지 않을 때까지 이 시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낮의 빛이 언젠가 나를 지켜줄 거라 믿으면서.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6-04-29

달성군 보궐선거···‘이진숙 카드’ 대세론 되나

국민의힘 대구시장 예비후보인 추경호 의원이 29일 국회의원직을 사퇴한다고 밝힘에 따라, 그의 지역구인 달성군에서는 6·3 지방선거와 함께 국회의원 보궐선거(보선)도 함께 치러지게 됐다. 추 의원은 20대 국회 때부터 고향인 달성군에서 연이어 3선 의원을 지냈다. 추 의원 이전에는 1998년 보궐선거를 통해 15대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곳에서 연속 4선을 했다. 달성군 보선 후보 공천에 대해 박덕흠 국민의힘 공관위원장이 “전략공천보다도 경선을 원칙으로 한다“고 했지만, 정치권에서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 전 위원장이 대구시장 무소속 불출마를 밝힌 25일 장동혁 대표는 페이스북에 “이 전 위원장은 우리 당의 훌륭한 정치적 자산이다. 국민의힘과 함께 대구를 지켜달라“는 글을 올려, 보선 공천에 힘을 실었다. 박성훈 당 수석대변인도 전략공천 가능성에 대해 “평가가 긍정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이 전 위원장은 보선 출마와 관련해 “대구를 자유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 지키겠다는 그 마음밖에 없다“며 말을 아꼈지만, 주변에선 출마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이 전 위원장은 지난달 22일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경선에서 주호영 의원과 함께 컷오프(경선 배제)됐고, “여론조사 1·2위 후보를 컷오프 하는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반발하며 무소속 출마를 시사해 왔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이 전 위원장의 보선 공천에 대해 우호적인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그가 대구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한 이후 대구시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는데다, 공천파동 과정에서도 인지도가 올라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추경호 후보는 대구시장 후보 확정 후 가진 기자회견 자리에서 “공천은 당의 공식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것이고, 달성 군민들의 판단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밝혔었다. 이 전 위원장은 강한 보수정체성을 가진 데다 민주당 정권에 맞서 싸운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현재로선 그가 출마를 공식화하면 단수공천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026-04-28

중동전쟁 장기화, 지역기업 경영부담 커졌다

대구지역에 불황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지고 있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등 3고 현상으로 소규모 자영업에서 기업에 이르기까지 경영에 심각한 타격이 우려된다. 특히 올들어 시작한 중동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기업의 경영 부담도 날로 커지는 양상이다. 대구상공회의소가 관내 445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중동전쟁에 따른 유가상승 영향조사 결과’에 의하면 응답기업의 97.9%가 “유가상승이 기업경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대답을 했고, 그 중 46.2%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답변을 했다. 또 유가상승에 의한 비용이 증가하고 있으나 59%가 이를 “비용에 반영하지 못한다”고 밝히면서 가격 인상이 매출감소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서라고 했다.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가 조사한 4월중 대구경북 소비자 동향조사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4월중 소비자심리지수(CSI)는 100.4로 전월보다 5.1포인트 하락했으며, 경제상황에 대한 인식도 전월대비 모두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기업들이 체감하는 가장 큰 경영애로는 원자재 가격 인상을 지적해 중동전쟁의 여파가 지역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확인됐다. 대구의 대표적인 산업의 하나인 섬유업종의 경우 중동전쟁 이후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중동지역 수출기업은 생산을 멈추고 있거나 공장 가동률을 줄이고 있어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구에서 중동으로 수출비중이 50% 이상인 섬유업체만 30여군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색업계도 비슷하다. 나프타 원료수급 불안으로 상당수 기업들이 주3일 이내 가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업계는 고용유지지원금 제도 활용이나 위기선제 대응지역 지정을 바라고 있다. 대구시는 전쟁으로 인한 지역기업의 애로사항을 면밀히 살피고 민첩한 대응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현재 중동사태가 얼마나 오래갈지 예측이 어렵고 설사 전쟁이 멈춘다 해도 구조적으로 비용 증가분이 고착화할 우려가 있다. 당국의 정밀한 선제대응이 지금 필요한 때다.

2026-04-28

국민의힘은 ‘장동혁 소유물’이 아니다

지난주 국민의힘 지지율이 15%까지 떨어진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장동혁 대표의 리더십 위기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지방선거 판세에 적신호가 켜진 주요 후보들이 노골적으로 “장 대표 체제로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말이 나오는 단계에 이르렀다. 서울을 비롯해 상당수 광역단체장 후보들은 “장 대표가 가만있어 주는 게 선거를 도와주는 유일한 길”이라며 중앙당 선거 지원을 거절하는 분위기다. 중도층 외연 확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광역단체장 후보들의 이런 움직임에도 장 대표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마이웨이’를 고수하고 있다. 그가 ‘도피성 외유’ 논란을 일으킨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내린 첫 지시는 한동훈 전 대표 부산 보궐선거를 돕는 진종오 의원에 대한 진상 조사였다. 그는 지난 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는 “기강이 무너진 군대로는 전투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면서 “해당 행위를 하는 후보자의 경우 즉시 교체하겠다“는 경고를 하기도 했다. 장 대표가 자신의 입지에 대한 위기 속에서도 강경 발언을 쏟아낼 수 있는 것은 당 지도부 대부분이 측근들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장 대표가 당을 사유화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현재 장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당권파의 논리는 ‘강력한 보수결집이 선행돼야 당의 외연확장이 가능하다’는 식이다. 주요 당직 인사 때마다 ‘윤 어게인’을 외치는 인물들이 임명되는 것도 이러한 비상식적인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장 대표가 지난해 8월 26일 당 대표로 선출된 후 한 수락 연설을 보면, 그의 ‘극우 정치철학’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는 당시 “모든 우파 시민과 연대해 이재명 정권 끌어내리는 데 제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전제하면서, 당내 탄핵 찬성파를 콕 집어 “당을 분열로 몰고 가는 분들에 대해선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외부에서 보면 대구·경북 지역이 국민의힘에 대한 극우 지지자들의 온상처럼 비칠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젊은 층이 아니더라도 50~60대 장·노년층에서도 이 지역의 정치적 후진성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주변을 돌아보면 “국민의힘이 당의 영역을 넓히고, 국가적 현안에 대한 해결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당 지도부가 하루빨리 극우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람이 많다. 당 지지율 15%는 국민의힘이 벼랑 끝 위기에 몰렸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지방 선거는 유권자들이 4대 선거(기초·광역의원, 기초·광역단체장)를 연계해서 투표하기 때문에 당 지지도 만으로는 선거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의 외연 확장을 위해서는 정당 정체성을 극우 방향이 아니라 중도 쪽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국민이 바라는 보수의 가치는 민생을 책임지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보수’이지, 특정 강성 세력에 휘둘리는 ‘폐쇄적 보수’가 아니다. 장 대표가 지금처럼 책임당원을 중심으로 한 극우세력만 바라보고 정치를 한다면, 국민의힘은 다수의 국민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은 절대 장 대표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4-28

마라톤 왕국 케냐

케냐가 마라톤 러너의 성지라거나 마라톤 왕국이란 별명이 붙는 배경은 뭘까. 이에 많은 전문가들이 내놓는 분석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케냐 선수들은 대개 해발2000~2500m 고지대에서 자라거나 생활해온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곳은 산소 농도가 낮아 자연스럽게 적혈구 수치와 헤모글로빈 농도가 높아지게 된다. 이는 산소를 몸 구석구석까지 운반하는데 큰 도움을 주며 평지에서 뛸 때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산소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케냐의 어린이는 어릴 때부터 하루 수십km를 맨발로 다닌다. 비포장 도로를 걷거나 달리면 하체근육의 지구력과 평형감각, 발바닥이 강한 자극을 받게 된다. 마라톤 하기에 신체가 구조적으로 최적화되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케냐에서 마라톤은 단순한 스포츠 개념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마라톤을 공동체의 생계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알고 자란다. 세계적 마라토너가 되면 수천만 원, 수억 원의 상금을 손에 쥐게되므로 세계적 마라토너가 되는 것이 어릴 때부터 꿈이다. 케냐 선수는 신체 조건이나 환경, 훈련, 사회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세계적 선수로 성장한다는 것이 케냐가 마라톤 강국이 될 수 있는 이유라는 것이다. 국제육상경기연맹에 의하면 남자 마라톤 공인 기록의 100위 이내에 케냐 선수가 58명이 된다. 이 사실만으로 케냐는 분명 마라톤의 왕국이다. 인류가 절대 깰 수 없다던 마라톤 2시간대 벽이 깨졌다. 세계를 놀라게 한 인류 최초의 신기록 수립도 케냐 선수가 해냈다. 사바스타인 사웨의 기록은 1시간59분30초. 마라톤의 신기록 도전이 점점 더 흥미로워진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4-28

제조업의 안전활동 원리

제조기업에서 안전은 흔히 ‘관리의 대상’으로 다뤄진다. 보호구 착용, 안전 교육, 규정 및 점검 강화 활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만으로 사고를 근본적으로 줄이기는 어렵다. 안전은 규정 준수의 문제가 아니라, 공정과 시스템 수준, 스스로 위험요인을 개선하는 자율 안전이 만들어내는 ‘결과’이다. 규정, 통제로 하는 안전관리는 한계에 부딪친다. 월드 클래스 수준의 선진 기업은 안전관리시스템과 직원들의 안전 요인을 보는 눈, 스스로 탐색하고 위험 요인을 제거하는 자율 안전과 병행하는 체계다. 현장의 안전사고를 들여다보면 공통된 특징이 있다. 설비가 고장이 나고, 작업이 자주 멈추며, 품질이 불안정한 환경에서 사고가 반복된다. 작업자는 비정상 상황을 복구하기 위해 무리한 개입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위험이 발생한다. 또한 하루 전 D-회의, 작업 위험 수준에 따라 S·A·B급 업무 분류와 안전관리자, 안전활동 범위 설정, 안전작업허가서, TBM(Tool Box Meeting), 전원·에너지 차단 및 잠금의 ILS(Isolation & Lockout System), 안전보호구 착용, 작업위험도 평가 등 안전운영관리와 통제로 안전사고를 다 막지 못한다. 결국 사고의 본질은 ‘사람의 부주의’ 보다 ‘생산시스템의 불안정’에 있다. 안전을 근원적으로 개선하려면 접근의 순서를 바꿔야 한다. 첫째, 설비의 안정화이다. 고장, 진동, 누유, 오작동을 제거하고 예방보전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고장이 반복되는 설비에서는 안전을 기대할 수 없다. 둘째, 생산 장애 개선이다. 공정의 끊김과 막힘, 비정상 작업을 제거해야 한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고는 정상이 아닌 상황, 돌발작업이나 임시조치 과정에서 발생한다. 셋째, 품질 불량개선이다. 품질이 불안정하면 재작업과 수정작업이 증가하고, 작업자는 시간 압박 속에서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된다. 넷째, 작업 환경 개선이다. 정리정돈, 동선, 조명, 소음, 작업 공간과 같은 요소는 작업자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기반이 갖춰진 이후에야 비로소 안전 시설물 개선이 의미를 갖는다. 방호장치, Interlock, 센서 등은 안전관리의 마지막 단계다. 많은 기업이 이 순서를 거꾸로 적용하면서 실질적 개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안전은 따로 존재하는 관리 영역이 아니다. 설비, 공정, 품질, 환경이 안정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다. 또한 안전의 토양은 기업문화이고, 일하는 사고와 방식이 안전관리 활동으로 연동된다. 규정, 통제, 문서 위주의 관행적 안전관리 활동은 사고를 예방하지 못한다. 안전 수준은 그 기업의 일하는 문화를 바탕으로 개선 활동이 보여주는 지표다. 이제 제조 기업은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안전을 관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산시스템을 안정화 하고, 일하는 문화를 바꿀 것인가’로 접근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안전은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된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4-28

전봇대를 묻는 도시 경쟁력

요즘 일본이 다시 ‘전봇대’를 없애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전선과 전주를 지하로 묻는 ‘무전주화(無電柱化)’ 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재가동했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이 사업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속도는 기대에 못 미쳤다. 현재도 약 3600만개의 전주가 남아 있고, 오히려 증가 추세다. 그런 일본이 다시 이 정책을 내세운 이유는 분명하다. 더 이상 ‘미관 개선’ 수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핵심은 재난 대응이다. 최근 일본은 태풍과 집중호우, 그리고 대지진까지 겹치며 전주 붕괴로 인한 도로 마비와 장기 정전 사태를 반복 경험했다. 특히 노토반도(能登半島) 지진에서는 전주가 3480개나 쓰러져 구조와 복구 자체가 지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일본은 결론을 내렸다. “전봇대는 도시 인프라가 아니라 재난 리스크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제3차 무전주화 추진계획’을 통해 정책을 전면 재정비했다. 어떤 시설을 설치하는 단일 사업으로 보지 않고 이를 국가 인프라 전략으로 격상한 것이다. 이번 정책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선택과 집중이다. 모든 도로가 아니라 고속도로 IC와 주요 거점을 잇는 ‘긴급 수송도로’를 중심으로 우선 정비한다. 재난 시 도로가 막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둘째, 속도보다 실행력이다. 기존처럼 ‘착공률’이 아니라 ‘완공률’을 기준으로 정책 목표를 설정했다.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실제 효과 중심으로 전환한 셈이다. 셋째, 현실적 접근이다.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전선 공동구뿐 아니라 측구 활용, 건물 벽면 배선 등 다양한 저비용 방식까지 허용했다. 완벽한 지중화보다 “현실 가능한 지중화”를 택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관광과 도시 이미지 개선도 중요한 목표다. 전봇대가 사라진 도시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훨씬 ‘정돈된 국가’로 보인다. 일본이 관광대국을 지향하는 상황에서, 전주 정리는 곧 국가 브랜드 전략이기도 하다. 물론 단점도 분명하다. 막대한 비용과 공사 기간, 주민 불편, 그리고 지방 재정 부담은 여전히 큰 장벽이다. 그래서 일본 역시 전면 시행이 아닌 ‘우선순위 전략’을 택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할까. 우리 역시 무전주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속도는 더디고 기준은 모호하다. 특히 지방 도시에서는 관광·경관·보행 안전 측면에서 체계적인 접근이 부족하다. 철강 산업도시 포항은 다양한 각도로 미래 전환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도심 곳곳을 가로지르는 전봇대와 전선은 여전히 ‘과거의 산업도시 이미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전봇대를 없애는 일을 미관 정비라는 좁은 시야로 보면 오산이다. 재난을 줄이고,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관광과 정주 환경을 바꾸는 도시 구조 개혁이다. 일본이 전봇대를 묻기 시작한 것도 이제는 ‘보이는 인프라’로 경쟁하는 시대에 들어섰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도시 포항도 이제는 선택해야만 한다. 도시 경쟁력은 공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걷기 좋은 도시, 보기 좋은 도시, 안전한 도시가 곧 경쟁력이다. 도시전역에 들쑥날쑥 솟아있는 전봇대를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도시의 미래를 다시 설계할 것인가.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4-28

조각보의 나라 유고슬라비아 탄생 ②동상이몽이 낳은 폭력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유고슬라브 민족 간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발칸반도 각국 망명정부가 속속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와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그리고 슬로베니아가 바쁘게 움직였다. 발칸반도에서 주도권을 잡거나 먹이사슬에서 여차하면 약자로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이처럼 발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세르비아 대표단과 협상테이블에 앉은 크로아티아 대표단은 하나의 통합안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는 카라조르지예의 왕가의 지도 아래 한 살림을 꾸리기로 했다며 발표했다. 블랙조지 카라조르지예가 누군가? 19세기 오스만제국 에니체리 폭정에 맞선 농민 출신 지도자가 졸지에 발칸반도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진골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한 지붕 아래에 여러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세계만방에 힘을 과시하면서 스스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원대한 꿈을 꾼다. 슬라브민족 최초의 통일국가, 즉 민족적 이질성만 두드러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 조각보 나라 집합체 ‘유고슬라비아’란 나라가 탄생한다. 이제 발칸반도에는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고 유고란 국가로 정착된다. 유고슬라비아 왕을 비롯해 총리까지 세르비아인이 차지하면서 겨우 부총리와 외무장관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몫으로 돌아가자 무게의 중심 추는 시작하기도 전에 기울었다. 더구나 왕권과 군권까지 장악한 알렉산다르는 무소불위의 힘을 구축했다. 민주정인 이상 견제세력인 야당도 존재했다. 그러나 제1야당인 크로아티아 농민당이 링에 오르기도 전에 알렉산다르는 농민당을 해산해버린다. 한발 더 나아가 당수인 라디치에게 자객을 보내 저승행 열차에 태워버리면서 주변정리를 깔끔(?)하게 마무리 했다. 라디치가 볼셰비키의 불순한 사상에 물들었다는 여론을 조작하면서 암살사건은 유야무야 된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유고슬라브민족 통일국가 꿈이 워낙 장밋빛이다 보니 대세르비아주의 욕망은 아지랑이에 가려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힘 있는 자리에는 세르비아인의 관료로 채워지는 것을 세르비아는 당연시 했다. 누가 보더라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자연스럽게 세르비아에 흡수합병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크로아티아인 입장에서는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반란의 기운이 소물소물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때마침 라디치가 불의의 객이 되면서 본격화된다. 그러나 이는 대세르비아주의 실현이라는 목표가 눈앞에 왔다고 판단한 알렉산다르가 기다리던 바였다. 거칠 것이 없었던 왕으로서는 소요진압에 목검이 아니라 핏빛을 머금은 광휘의 진검을 뽑았다. 1929년 1월 새해, 신년벽두가 밝아오자 알렉산다르는 헌법을 폐지하면서 독재정을 펼치기 시작했다. 세 나라의 통치권자, 군 통수권자, 고위관리 임명권자인 알렉산다르는 정당까지 모조리 해산시켜버렸다. 이처럼 불합리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지방 자치권은커녕 새롭게 헌법을 개정하고, 누가 보더라도 엄명한 독재정을 확정지으면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인 왕국’에서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라는 국명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해진 순서인 양 반정부인사에 대한 탄압이 막이 올랐다. 세르비아인 식민백성으로 전락한 사람들은 탄압을 피해 망명의 길을 올랐고, 서러운 눈물을 빨면서 복수의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를 갈아야 했다. 1933년 농민당을 암암리에 이끌던 블라드코 마체크가 그해 4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구금당했다. 이를 시작으로 구금과 통제는 통일왕국 최초 부총리와 외무장관을 지낸 인사들조차 예외일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유고슬라비아 땅에 살아가는 소수민족에 대한 비극적 사건은 일일이 거론할 수조차 없었다.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은 그야말로 하층민으로 추락했다. 더구나 크로아티아에서 유고슬라비즘의 주역 ‘프레차니’의 대표자격인 세르비아인 프리비세치마저도 투옥된다.(전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알렉산다르 밀명을 받은 시모비치 중령에게 설득당해 세르비아 왕을 위해 자중지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훗날 체코로 도망치다 시피 해서 살다가 1936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타국에서 세르비아인으로 살아가는 프레차니들은 늘 살해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그럴수록 자신들끼리 더욱 똘똘 뭉쳐 베오그라드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때 알렉산다르의 폭정을 피해 이탈리아로 망명길에 오른 인물 중 파벨리치가 있었다. 그는 크로아티아 극우보수정당 민권당의 당수로서 대크로아티아민족주의를 주창한 안테 스타르췌비치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망명지인 이탈리아에서 극우민족주의 단체인(세르비아의 시각에서는 반란단체지만) ‘우스타샤’를 조직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4-28

고택의 빈 나무

울산의 봄볕은 담장이 낮은 고택의 마당 위로 유난히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조선의 외교관으로서 수많은 이들을 사지에서 구해냈던 충숙공 이예 선생님의 자취가 서린 학성 이씨 근재공 고택. 그곳에 들어서면 정갈하게 얹힌 기와 아래로 시간의 결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그날 내 발길을 오래도록 붙잡은 것은 정교한 가옥의 구조도, 고귀한 가문의 내력도 아니었다. 마당 한쪽, 낮은 돌담을 등지고 선 늙은 모과나무 한 그루였다. 처음 그 나무를 보았을 때 위태로워 보였다. 나무의 몸통은 마치 누군가 예리한 칼로 도려낸 듯, 혹은 세월이라는 거대한 벌레가 파먹은 듯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껍데기만이 얇은 막처럼 남아 간신히 나무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너머로 반대편 풍경이 휑하니 보일 정도였다. 저토록 처절하게 제 몸을 비워낸 나무가 어떻게 여태껏 쓰러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지, 자연의 신비보다는 차라리 어떤 지독한 의지 같은 것이 느껴져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런데 더욱 경이로운 것은 그 빈 몸체 위로 뻗어나간 가지들이었다. 생명의 기운이라곤 전혀 남지 않았을 것 같은 마른 껍데기 위로 연두색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고, 해마다 가지에 모과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다고 했다. 속은 비어버린 채 껍데기만 남은 나무가 제 몸보다 무거워 보이는 열매들을 자식처럼 보듬고 있는 그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역설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나무 아래 서서 한참을 응시했다. 텅 빈 나무의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 비어 있는 공간은 단순히 사라진 목질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내어준 ‘헌신’의 흔적처럼 보였다. 그것은 영락없이 우리네 부모님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부모라는 이름의 거목 아래서 그들이 피워낸 달콤한 과실을 먹고 자란다. 부모는 자식이라는 열매를 맺기 위해 자신의 수분을 내어주고, 영양분을 나누며, 급기야는 자신의 뼈와 살인 속살까지도 아낌없이 갉아 내어준다. 자식이 세상 밖으로 나가 단단한 씨앗을 품은 어엿한 결실이 될 때까지 부모는 제 안이 비어가는 줄도 모르고 오로지 가지 끝에 달린 열매의 무게만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의 등이 넓고 단단한 줄만 알았다. 늘 그 뒤에 숨으면 세상의 어떤 풍파도 비껴갈 것 같았고, 부모님은 언제까지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나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어 직접 열매를 맺어보니 그 단단해 보였던 등 뒤에는 자식을 키우느라 문드러지고 비어버린 고독한 세월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속은 텅 비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껍데기만으로 버티며 여전히 가지를 뻗어 올리는 모과나무의 처절한 생명력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일치한다. 나무는 제 몸 안에 가득 찼던 모든 것을 자식에게 다 주고 나서야 비로소 가장 향기로운 모과를 완성해낸다. 부모 또한 자신의 꿈과 청춘, 그리고 육체적인 강건함을 자식이라는 열매 속에 오롯이 담아 보내고는 본인은 거친 주름만 남은 껍질이 되어버렸다. 이예 선생님의 고택에서 만난 이 모과나무는 나에게 묻는 듯했다. “너라는 열매는 과연 어떤 향기를 품고 있느냐”고, “그 향기가 누구의 희생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것인지 잊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고택의 돌담 아래 쌓인 햇살 속에서 모과나무는 여전히 당당했다. 비록 속은 비었을지언정 그가 매달고 있는 열매들은 누구보다 건강하고 풍요로웠다. 그것은 패배한 삶의 흔적이 아니라 완성된 사랑의 훈장이었다. 부모라는 이름의 나무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제 몸을 다 내어주고 껍데기만 남았을지라도 자식의 삶 속에서 주렁주렁 맺히는 열매들을 바라보며 그들은 다시금 살아갈 이유를 찾기 때문이다. 고택을 나서는 길,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텅 빈 속을 감추지 않고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길러내는 저 늙은 나무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눈물겹도록 고귀해 보였다. 나 또한 누군가의 열매로서 그들이 내어준 빈자리만큼이나 깊고 진한 향기를 내뿜으며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그 숭고한 껍데기의 의지 위에서 말이다. /김경아 작가

2026-04-28

나는 과메기로소이다

나는 본래 꽁치였다. 넓고 깊은 푸른 바다에서 나름 삶을 살고 있었다. 물 밖의 세상은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이끌려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차가운 고체 덩어리 속에서 나의 육체가 굳기 전까지 아주 잠시 공기와 햇빛이라는 지옥을 경험했다. 나는 얼음덩어리들 속에서 잠들었다. 그때 내가 죽었었다는 것, 그 죽음이 냉동 상태였다는 것은 바닷가의 어느 위판장 바닥에 내가 내동댕이쳐졌을 때 비로소 알았다. 공기와 빛의 세상, 땅이라 불리는 그 견딜 수 없는 지독한 세계에 나는 툭 던져졌다. 늙은 어부의 손수레에 실리기 전까지는, 내가 사람이란 종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것과 장차 대단한 신분의 소유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바닷가 어느 초라한 집 마당 한 구석에 도착하였다. 소금기 가득 머금은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닥치는 곳이었다. 기다란 막대 위에 나의 종족들은 나란히 걸렸다. 바닷속의 적당한 수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한의 냉기 속에서 차갑게 굳어져 갔다. 어부는, 해풍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우리들의 몸을 가끔 어루만지면서 장차 오게 될 ‘부활’을 미리 축복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과메기로 거듭 태어났다. 어둠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동료들과 함께 이름 모를 소주방 탁자 위에 통째로 올려졌다. 배추와 미역, 약간의 마늘과 쪽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몸을 붉게 치장할 초장과 함께. 내가 올려진 탁자에 세 남자가 둘러앉았다. 있어 보이는 한 남자가 이슬이 2병을 주문한 뒤, ‘과메기는 통째로 먹어야 제맛이지’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소주방 주인이 아첨하는 말을 들어보면,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이 지역의 중요한 임무를 맡을 후보를 점지하기 위하여 큰 도시에서 내려온 거물이다. 나의 동료들은 주인의 가위질에 두 동강이 나고, 있어 보이는 한 남자의 억센 손아귀에서 갈기갈기 찢어졌다. 심장의 피와 같은 붉은 색의 시큼한 초장에 버무려져 속절없이 세 남자의 검은 입속에서 소주와 함께 섞였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을 때, 소주잔을 들던 셋 중 가장 높은 남자가 갑자기 결심한 듯 이렇게 외쳤다. “그래! 후보는 바로 너야!” 주인의 가위질이 멈추고, 나는 식탁에서 해방되었다. 큰 남자가 나를 추천한 이후로 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 중에도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 지저분한 기름기, 역겨운 비린내는 고급 로션과 향수로 도배되고, 맛이 간 눈동자는 외제 선글라스 뒤쪽으로 갈무리되었다. 높은 남자는 나에게 말했다.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저것들이 뭐 아는 게 있나. 너는 향수 뿌리고 선글래스 끼고 유세장을 돌면서 주먹으로 허공을 향해 어퍼컷만 날려!” 인간들이 지도자를 뽑는 방식은 가관이었다. 꽁치 세계에서는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한판의 개그. 높은 분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일부 제정신을 가진 자들이 과메기를 지도자로 선출할 수 없다고 목에 핏대를 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당선되었고, 높은 분으로부터 칭찬도 받았다. 앞으로의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지만, 높은 분은 대답이 없었다. 인간들은 나에게 표를 던졌을 뿐 아니라 아첨까지 하였다. 그들에게는 내가 사람인지 과메기인지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 /공봉학 변호사

2026-04-27

지식과 지성, 그리고 지성인

대한민국 국민의 학력은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85세 이상은 절반이 무학인데 비해, 25세에서 35세 사이 연령층은 전문대 이상의 학력이 70%를 넘는다. 이는 OECD 국가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단시일에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던 기반 중 하나는 국민들의 높은 교육열이었다. 고학력자들이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산업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학력이나 학벌을 인재등용의 최우선 조건으로 삼는다. 그러다보니 경쟁위주의 과도한 교육열이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시험을 위한 주입식 · 암기식 교육이 창의성이나 논리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떨어뜨리고, 무엇보다 인성교육을 등한시하는 폐단이 있다. 오로지 지식 습득에만 전념하는 교육으로는 인격도야를 겸한 전인교육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기형적 교육현상은 사회적 병폐로 이어지기 쉽다. 부모가 대학교수인데도 자식의 대외활동 스펙을 위조해서 부정입학 시킨 경우도 그런 예이다. 지식은 칼과 같다. 잘 쓰면 문명의 이기가 되고 함부로 휘두르거나 악용하면 사회악을 자행하는 흉기가 될 수 있다. 특히나 지금은 인공지능이 무제한 제공하는 각종 지식에 누구나 손쉽게 접속할 수가 있다. 지식의 오남용으로 인한 위험 요소가 그만큼 가중되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지식을 누구나 손쉽게 습득할 수 있는 만큼 그것을 지성으로 숙성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이 더 요구된다. 나아가 그 지식이 공동체에 미칠 영향까지 성찰하는 책임의식이 필요하다. 그 책임은 결국 개인의 윤리와도 직결된다. 지성(Intellect)은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지식의 양보다 그것을 다루는 태도와 책임이 더 본질적이다. 지성인은 우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다. 주어진 정보나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근거를 따져 묻고 스스로 판단한다. 이는 철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사유의 기본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지성인은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오류를 인정하며 수정할 줄 안다. 이런 태도는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자각처럼 ‘나는 모른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셋째로 지성인은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개인의 명예나 이권에 머물지 않고 공공선을 지향한다. 사회와 국가, 나아가서는 세계 보편의 가치를 구현하려는 것이 지성인의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지성인은 균형감각을 지닌 사람이다. 감정과 이성,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특정 이념이나 집단에 매몰되지 않고, 복잡한 현실을 다면적으로 보고 성찰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총체적인 위기상황이다.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도 모자라, 남한에서도 좌우로 갈라 피터지게 싸우고 있다. 법치와 삼권분립은 파괴되고, 국방과 외교는 위태롭고, 자유시장경제도 심각하게 훼손되는 등 국가의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사법부가 권력의 주구가 되고, 언론이 정권의 나팔수가 되고, 지식인들까지 시류에 휩쓸려 곡학아세로 권력의 부역자가 되면 나라는 결국 망국의 독재로 치닫게 된다. 지성의 결핍이 초래하는 결과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6-04-27

다른 사고방식은 이길 수가 없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다. 그 두 주 전이이었던가 석 주 전이었던가 이란에서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그때 이란 정권인지 혁명수비대의 소행인지 몰라도, 3만 명에서 4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시민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때 미국·이란 전쟁이 촉발된 것이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전쟁 시작 단 하루 만에 이란 군대를 거의 완전히 무력화시켰는데, 이날 미국·이란 전쟁의 결과는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자 왜 남의 나라 내정에 간섭하느냐, 약소국가 자주권을 유린한 것이라는 일부 ‘여론’이 흘러다녔다. 세상을 보는, 다른 사고방식의 소산이었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치는 것을 두고, 또 그보다 먼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하마스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도 자못 거셌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할 수 없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한국의 일부 지식계는 일방적으로 팔레스파인 편을 든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유린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식인들의 선호는 오래되었다. 1980년대 전반기에 ‘제3세계연구’라는 게 두 권 나왔는데, 팔레스타인을 한국과 같은 제3세계로 보는 상상력의 소산이었다. 지금 이 제3세계론은 어떻게 되었나? 적어도 우리 학생들에게 한국은 제3세계냐고 물어보면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는다. 제3세계론은 ‘정태론’적이다. 제국과 식민지·신식민지의 중심·주변 관계가 불변한다고 보는 종속이론에 결부된다. 세계가 이렇듯 움직이지 않는다면 역사 전개라는 것도 없어야 할 것이다. 이란이 약소국이냐 했을 때, 나는 쿠르드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란 북부 지역에 살고 있는 아제리인들을 생각한다. 한국이 1945년 해방되었을 때, 소련과 이란 사이에 아제르바이잔 사태가 있ᅌᅥᆻ다. 이란은 유엔에 강대국 소련이 이란의 영토를 탐낸다고 호소했다. 페르시아적 사고다. 페르시아 제국은 많은 약소민족을 자기 내부에 거느렸다. 그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 이란에게는 탐탁치 않았겠다. 팔레스타인 하마스는 이란의 신정일치 이념만큼이나 위험해 보인다. 그들이 과연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있나? 해방을 위한 통치고 신의 섭리라지만 극도로 무자비하기는 이란 신정일치 정권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이란 국민의 피맺힌 자유의 요구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까? 왜 이스라엘의 무자비함만이 보이고 가자 정권의 위험성을 보이지 않을까? 베르트랑 웨스트팔의 ‘지리비평’을 읽다가 깜짝 놀란 것이 있다. 담론은 담론 자체의 내적 요구 때문에 세계를 절대로 그대로 반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말 같은데, 곱씹을수록 무서운 말이었다. 어떤 담론에 길들여지면 다른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자꾸 공부해서 그 속으로 들어가면 그른 것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 확신하게 된다. 그러면 마치 자신이 진리를 말하는 양 이스라엘은 나쁘다, 미국은 나쁘다 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꾸 회의하게 된다. 아무래도 데카르트가, 파스칼이 좋아 보이나 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6-04-27

TK신공항, 선거의 정략적 도구돼선 안 된다

지방선거의 대구시장 여야 후보가 확정되면서 지역 최대 이슈인 대구경북 민군통합공항(TK신공항)을 둘러싼 해법을 두고 여야 후보 간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 김부겸 후보는 TK신공항 사업과 관련, 공공자금관리기금에서 5000억원 융자, 정부 특별지원명목 5000억원 등 총 1조원 재원을 모아 사업을 빠르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신공항 이전부지 토지보상금 규모가 약 4700억원에 이르니 1조원 재원이 마련된다면 신공항사업은 빠르게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TK신공항 관련한 공자기금 융자는 작년 대구시가 2700억원 규모로 정부에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재정당국은 타 사업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거절해 김 후보의 구상대로 5000억원의 공자기금융자가 실제로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국민의힘 추경호 후보는 TK신공항 사업과 관련해 22일 페이스북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대구경북신공항사업의 국가사업 전환을 요구했다. 대구경북 미래가 걸린 중대한 사업인 만큼 국가가 주도적으로 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추 후보는 김 후보에게도 TK신공항 사업에 대한 진정성이 있다면 신공항 사업을 국가사업으로 전환하는데 함께 힘쓰자고 제안했다. 대구정책연구원은 26일 정책브리프를 통해 민군통합공항 건설에 대한 정책분석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신공항의 국가적 편익성을 높이 평가했다. 신공항은 국방안보상 전략적 편익 증대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는 5극3특 국가균형성장의 모범 모델로 수조원에 달하는 경제유발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했다. 또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적 파급효과가 크고 국가 물류네트워크의 안정성도 확보할 수 있어 국가차원의 편익이 극대화될 수 있다는 분석을 했다. 신공항 사업의 본질은 대구경북의 미래를 바꾸고 이 사업이 국가균형발전에도 기여토록 하자는데 있다. 신공항이 선거때 단골로 등장하는 정치적 수사로 이용돼선 안 된다. 여야 후보는 선거 결과를 떠나 교착상태에 빠진 신공항 사업이 재기 길을 열수 있도록 실리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2026-04-27

與野 지도부 리더십, 달라도 너무 다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가 확정되면서 대구지역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민주당에선 국무총리와 행정안전부 장관을 지낸 김부겸 후보가, 국민의힘에선 경제부총리와 당 원내대표를 지낸 추경호 후보가 진보·보수 진영의 명운을 건 승부전에 나섰다. 민주당은 선거 초반부터 대구에 화력을 집중해 보수진영을 뒤흔드는 전략을 펴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민선 대구시장을 배출해 진정한 전국정당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26일) 열린 ‘김부겸 희망 캠프’ 선거사무소 개소식에는 당 중진과 전 현직 의원들이 총출동했다. 정청래 대표는 이날 대구·경북(TK)지역 최대현안인 행정통합과 신공항 건설 지원을 약속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도 영상 메시지를 보내며 숟가락을 얹었다. 국민의힘은 같은 날 대구시장 후보로 3선 중진이며, 엘리트 관료 출신인 추경호 전 부총리를 발탁했다. 경선 과정에서 극심한 내홍을 겪었지만 이날 주호영 국회부의장에 이어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도 무소속 불출마를 선언하며 ‘보수 단일대오’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아마 선거가 본격화되면 추 후보 지지율도 급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극명하게 차이 나는 여야 지도부의 리더십이다. 민주당 정 대표는 김부겸 희망 캠프 개소식 날에도 “김부겸을 삼고초려를 해 후보로 모셨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앞으로 대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해드림 센터장‘이 되겠다“고 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오히려 후보에게 부담이 되고 있다. 방미 논란과 당 지지율 하락, 공천 갈등 여진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지방선거 주요 후보들은 장 대표와의 거리두기에 나섰다. 이철우 경북도지사 후보는 중앙당을 배제한 ‘TK 공동선대위’ 구성을 제안했었고, 추경호 후보도 26일 “과거부터 대구 선거는 대구시장 후보자와 시당, 국회의원, 당원 동지들이 중심이 돼 치렀다”고 했다. 후보들로선 당 지도부가 선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2026-04-27

피격 당한 미국 대통령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시 한 번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지난 25일 워싱턴 힐튼호텔에서 열린 백악관 출입기자협회 만찬. 행사장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구는 트럼프를 겨냥하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날 트럼프 대통령과 아내인 멜라니아, JD 밴스 부통령 등이 자리한 헤드테이블 지척에서 산탄총과 권총 등으로 무장한 총격범 콜 토머스 앨런이 대통령 경호국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만찬장에 있던 수백 명의 기자와 주요 참석자들은 총성에 크게 놀랐지만,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다. 총에 맞은 경호 요원도 방탄조끼를 입고 있어 화를 피했다. 당시 트럼프는 재빨리 행사장 뒤편으로 피신했다고 알려졌다. 트럼프의 피격 위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대선 후보로 펜실베이니아 유세장에 등장했던 2024년 7월엔 총탄이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사건을 겪었고, 그로부터 2개월 뒤에는 플로리다 골프장에 숨어 트럼프에게 총을 쏠 기회를 노리던 용의자가 체포되기도 했다. 역사를 돌아보면 ‘대통령 피격 사건’은 미국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발생했다. 1865년엔 에이브러햄 링컨이 존 윌크스 부스가 쏜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 1963년 존 F. 케네디가 리 하비 오스월드에게 피격 당해 목숨을 잃은 사건도 유명하다. 1981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이 있었다. 레이건은 이때 생명이 오가는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권력자에겐 친구도 많지만 적 또한 적지 않다. 지향하는 이념과 추진하는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은 언제 어디서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대통령이 마냥 좋은 직업만은 아닌 것 같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4-27

6·3 지방선거, 시민의 선택

지방선거일이 다가오고 있다. 후보들도 바빠졌다. 덩달아 지역은 새 지도자 선출에 대한 기대와 냉소가 교차하고 있다. 원래 선거는 시민들의 꿈이 격돌하는 무대이다. 자신의 시민적 삶과 미래가 투표함에서 열릴 것이라는 꿈, 그것이 민주주의의 이상이다. 그러나 지금 대구·경북의 현실은 그 이상과 한참 멀어 보인다. 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구 감소와 경제 침체, 청년 유출이라는 복합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해법을 찾아야 할 지방선거가 정작 지역 유권자는 안중에도 없다. 동네 살림꾼을 뽑는 선거가 중앙선거로 변질된 지 오래되었다. 지역의 유력 정당은 오로지 공천권을 쥔 당 지도부만 바라보고, 결과는 이미 정해진 듯 당색(黨色)이 모든 것을 덮는다. 선거를 왜 하는지 회의감이 든다. 그러니 지역의 현안 문제나 공적 담론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역 유권자들이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는 것은 시민적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하늘에서 영웅적 지도자가 나타나지도 않거니와, 기다릴 시간도 없다. 그렇다면 시민 스스로가 움직여야 한다. 소수 세력이 독점해 온 지역의 민주적 제도와 공간을 시민들이 되찾아야 한다. 시민은 들러리가 아니다. 침묵하거나 누군가의 결정에 그저 순응하면 시민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역의 공적 공간에 시민이 직접 참여하여 실질적 권한을 행사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의 구경꾼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시민을 진정으로 주인 자리에 돌려놓을 자, 그 사람이 지역의 참 일꾼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후보를 선택해야 할까. 첫째는 한 시민으로서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이다. 평소 지역주민의 삶과 현실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헌신해 왔는지가 그 척도다. 선거철에 하는 말이 아니라 평소의 삶이 그 사람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역의 해묵은 현안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결 역량이다.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 지역에 필요한 현실적 해법을 제시하고 진짜로 문제 해결을 위해 움직일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실현 불가능한 공약은 지역의 낭비이자 기만이다. 셋째는 후보가 속한 정당의 궤적이다. 지역 현안에 침묵했거나 중앙의 논리만 대변해 온 정당이라면, 아무리 공약과 정책이 그럴듯해도 그 결과는 뻔하다. 끝으로 결과에 책임지는 태도, 즉 막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責任倫理)다. 표를 달라는 후보를 만날 때마다 나는 묻는다. 당신은 지역 공동체에 진정 무엇을 남기려 이 자리에 나왔는가? 결국 이번 선거의 본질은 단순히 좋은 후보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다. 오랫동안 중앙 정치에 종속되어 온 지역 민주주의를 시민의 손으로 되살리는 일이다. 그것은 시민의 권리이자, 동시에 시민의 책임이다. 헤겔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야 날개를 편다”고 했다. 역사는 사건이 끝난 뒤에야 그 실상이 제대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지방자치 40년, 이제는 지역 민주주의가 제 모습을 찾을 때다. 6월 3일, 투표소로 향하는 그 한 걸음에서 시민의 위대한 권리가 시작될 것이다. /서병철 대구YMCA 사무총장

2026-04-27

오래된 기억에 숨 불어넣기

빈 상가가 늘고 발길이 줄어든 포항 원도심을 보면 우리는 습관처럼 ‘쇠퇴’라는 말을 꺼낸다. 하지만 나는 그 표현이 이 공간을 너무 쉽게 규정한다고 느낀다. 원도심은 사라진 곳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곳에 가깝다. 이곳은 단순한 상업 지구가 아니다. 항구에서 시작된 삶이 있고, 산업화의 시간 속에서 쌓인 노동의 흔적이 있으며, 시장 골목마다 사람들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시간은 지금도 이곳에 존재한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지금의 감각으로 읽어내는 데 서툴렀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살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다시 읽어낼 것인가”로. 이미 비슷한 길을 걸었던 도시들이 있다. 일본의 일부 원도심은 한때 공동화를 겪었지만, 서브컬처(Subculture·단순한 취향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주류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발전하는 하위 문화)라는 흐름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 과거를 지우는 대신 그 위에 새로운 취향과 작은 공간들을 쌓아 올렸다. 도쿄의 미야시타 파크 역시 그런 방식으로 변화했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위해 찾아왔다. 그렇게 일상과 비일상이 섞이며 새로운 도시의 리듬이 만들어졌다. 이런 변화의 기류는 포항에서도 조금씩 감지된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이 원도심을 이야기하고 다양한 공약을 내놓고 있다. 빈 상가 활용, 청년 창업, 문화예술 기반 재생 등 방향도 다양하다. 원도심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라는 데에는 공감대가 형성된 듯하다.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이 ‘개발’에서 ‘삶’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한 가지가 걸린다. 이 공약들이 과연 이 공간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원도심 재생은 새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다. 이곳에 쌓인 시간과 기억을 지금의 방식으로 다시 쓰는 일이다. 포항의 원도심은 부족해서 멈춘 것이 아니다. 아직 쓰이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오래된 여관이 작업실이 되고, 빈 상가가 공연장이나 전시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 사람들은 다시 그곳으로 모여든다. 공간은 지어질 때가 아니라, 사용될 때 살아난다. 이 변화는 결코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자체는 제도와 기반을 만들고, 건물주는 공간을 길게 바라봐야 하며, 문화 기획자는 그 안의 이야기를 읽어 사람을 불러들이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서로 다른 역할이지만, 그것들이 맞물릴 때 비로소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나는 가끔 “시내 우체국 앞에서 보자”라는 말이 자연스럽던 시절을 떠올린다. 그 말은 단순한 약속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고 머물던 시간의 기억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결국 그런 공간 아닐까. 이유 없이도 가고 싶고, 자연스럽게 머물게 되는 곳. 원도심의 미래는 거창한 개발 계획이 아니라, 다시 사람이 모이는 장면을 만들어 내는 데서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4-27

충무공을 생각하며

4월 28일은 이순신 장군 탄신일(誕辰日)이다. 충무공은 음력 1545년 3월 8일 태어났는데, 그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해마다 4월 28일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음력 생일을 기준으로 행사를 진행하면 해마다 날짜가 바뀌기에 상당한 난관이 기다리는 까닭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 28일은 다가왔고, 충무공의 사후(死後) 기록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음력 1592년 4월 13일 시작된 임진왜란은 충무공이 관음포 앞바다에서 펼쳐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음력 1598년 11월 19일 종결된다. 15만이 넘는 왜군이 시작한 전란(戰亂)이 충무공의 죽음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오늘도 우리를 선연하게 일깨우는 우레 비처럼 다가온다. 이충무공의 죽음과 관련해서 아직도 몇 가지 설이 떠돌고 있다. 자살설과 암살설, 은둔설 그리고 전사설이 그것이다. 숙종 시절 선비 서하(西河) 이민서(1632-1688)는 ‘김덕령 전기’를 남긴 바 있다. 거기서 이민서는 충무공이 갑옷과 투구도 없이 노량해전에 임했다고 쓴다. 죽기 살기로 도주하는 왜군을 평상복 차림으로 막아선 충무공의 흉중이 자못 궁금하다. 암군(暗君) 선조는 울부짖는 백성을 버리고 도주에 도주를 거듭하면서도 민심의 향방에 예민한 촉수를 가진 자였다. 저 하나 살자고 명나라 신종(神宗)에 요동 성주 자리를 구걸했던 비루한 군주 선조. 그자는 의병장 김덕령을 반역죄로 몰아 친히 국문하고, 장(杖) 130대로 구국의 선봉장을 때려죽인다. 그 뒤에 그자의 의심을 받은 충무공은 온갖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런 까닭에 충무공은 최후의 결전에서 차라리 왜적의 손에 죽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암군의 질시(嫉視)에 가문 전체가 당할 화근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2001)는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 장편소설이다. 암살설과 은둔설은 설득력이 미약하기에 이 글에서는 제외한다. 정조는 실학자 유득공을 집필 책임자로 삼아 ‘이충무공전서’ 8권을 1795년 출간한다. ‘이충무공전서’는 이순신에 관한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기록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따르면, 충무공은 명나라 진린 제독의 거듭된 만류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노량해전에 임했다고 한다. 최후의 해전에서 적을 완전히 섬멸하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천만한 선봉을 자임했다는 것이다. 지극한 혼전(混戰) 중에 적선에서 날아온 유탄(流彈)에 충무공은 겨드랑이를 맞았다고 한다. 부하 장수 송희립이 총상을 입자 그의 상태를 확인하려 이동하던 차에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고 전한다. 다시는 이 나라에 왜놈들의 사악한 발길이 닿지 못하도록 그들을 절멸하려 했던 충무공의 우국충정이 끝내 그를 사지(死地)로 내몬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불과 53년 남짓한 세월을 살면서 이토록 길고도 깊게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인물이 또 있을까, 생각한다. 조선왕조 518년을 생각하면, 세종 임금 이도(李裪)와 충무공 이순신만이 떠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따사로운 봄날 아침 잠시나마 충무공의 탄생과 최후를 생각해본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4-27

황금알 낳는 반도체

도덕과 처세훈을 풍자적으로 그린 이숍우화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가난한 농부 농장에 거위가 들어오자 농부는 그 거위를 요리해 먹을 생각에 집 기둥에 묶는다. 다음날 거위한테 가보니 황금알을 낳았더라는 것이다. 거위 덕분에 농부는 큰 부자가 된다. 어느날 욕심이 생긴 농부는 거위의 배를 가르면 훨씬 많은 황금알이 나올 것 같아 거위의 배를 가르나 배 속은 보통 거위와 다를 바 없어 거위만 잃고 만다.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교훈의 이 우화는 다른 버전으로도 양산돼 유행한다. 버전1)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소유한 아주머니는 모이를 많이 주면 더 많은 황금알이 나올거 같아 잔뜩 먹이를 주었더니 거위가 살이 너무 쩌 알을 낳지 못하게 됐다. 버전2) 돈을 토해내는 거위 이야기다. 거위 주인은 거위가 빨리 돈을 토해 내도록 하고파 욕심을 부리다가 거위가 그만 질식사하고 만다는 내용. 버전3) 긍정 버전이다. 거위가 매일 황금알을 낳아 부자가 된 한 농부는 어느날 수척해진 거위를 발견하고 거위를 숲속으로 보내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돌아온 거위가 알을 놓기 시작하는데, 종전보다 더 크고 순도가 높은 알을 낳더라는 것. 황금알을 낳는 거위 우화는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가공돼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고음을 준다. 삼성전자 노조의 역대급 성과급 요구를 바라보는 다수의 국민 눈에는 노조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우를 범할까 걱정을 한다. 내 눈앞의 이익 때문에 기업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는 소탐대실의 결과가 되지 않을까 우려해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4-27

최대 격전지가 된 대구시장 선거

국민의힘 대구시장 최종후보로 추경호 의원이 선출됨으로써, 대구시장 선거는 민주당 김부겸 후보와 추 후보 간 양강 대결 구도로 압축됐다. 대구시장 후보 경선을 둘러싼 당내 내홍이 시작된 지 35일 만이다. 추 후보는 지난 24일부터 이틀간 책임당원 투표(50%)와 일반시민 여론조사(50%)로 진행된 최종경선에서 유영하(달서갑) 의원을 눌렀다. 추 의원이 후보로 정해지면서 그의 지역구인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공천될지가 주목된다. 그동안 국민의힘 대구시장 경선에서 공천배제된 뒤 무소속 출마를 시사했던 이 전 위원장은 주호영 의원에 이어 25일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써 국민의힘 대구시장 선거는 ‘무소속 변수’가 깨끗하게 교통정리 된 상태다. 이 전 위원장은 이날 국민의힘 대구시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가 선출되면 그분이 민주당 후보를 이길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 대구를 무도한 민주당 정권으로부터 지켜내겠다”며 무소속 불출마를 선언했었다. 이 전 위원장은 “최근 장동혁 대표와 만나 대구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또 공감대가 있었다”고 밝혔다. 아마 두 사람이 만나 보궐선거 공천 문제도 논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써 추경호 후보는 ‘보수 안방’인 대구에서 민주당과 1 대 1 대결 구도로 승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국민의힘은 최종후보 확정으로 보수결집 흐름이 형성되면서 대구에서 확고한 우세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이제 대구시장 선거는 전국 최대 격전지로 부상했다. 26일 열린 김부겸 민주당 대구시장 후보의 캠프 개소식에는 정청래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현역의원이 30명 넘게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대구시장 선거에 총력전을 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김부겸 후보가 국민의힘 후보들에 비해 우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제 국민의힘 최종주자가 결정됨으로써 본선 레이스는 지금부터 스타트하게 됐다.

2026-04-27

치의학연구원 대구 유치, 선거공약에 담아야

지난주 대구시는 김정기 대구시장 권한대행 주재로 국립치의학연구원 유치추진단 회의를 개최했다. 입지선정을 위한 복지부의 공모 절차가 조만간 개시될 것에 대비한 막바지 전략고도화 회의다. 이날 대구시는 그간 추진상황 점검과 함께 타 지자체와의 경쟁에서 차별화된 전략을 구체화하는 등 유치전략 마련에 총력을 쏟았다고 한다. 국립치의학연구원은 2024년 설립 근거법안이 마련된 이후 많은 지자체들이 적지라는 이유로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최근까지 유치전에 집중하고 있는 지역은 대구를 비롯해 부산, 광주, 충남 4곳이다. 각 지역마다 자신들의 강점을 극대화한 전략과 홍보전으로 정부를 설득하지만 현재로선 입지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최근 정부는 치의학 연구원 설립 타당성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용역을 마무리하면서 상반기 중 공식사업 공고 및 공모절차 개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 하반기에는 신청지역을 대상으로 서류심사와 현장실사 등도 벌인다고 한다. 대구가 국립치의학연구원 유치에 특별히 열을 올리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치과 관련 인프라가 지방도시 중 가장 풍부한 때문이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대구시와 치과의사회가 중심이 돼 치의학연구원의 대구설립을 주장한 바 있다. 대구는 치과산업 제조업체와 종사자 수가 서울·경기 다음으로 많다. 지방에 설립될 거라면 대구가 가장 적지라는 뜻이다. 대구경북 의료산업의 40%가 치과산업이다. 의과대학 등도 많아 확장성도 우수하다. 또 오랫동안 유치 노력을 기울여 지자체와 치과계, 산업계, 학계가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잘 된 도시다. 정부의 공모절차에 따라 입지가 정해지겠지만 대구의 장점과 당위성을 홍보하는 데는 정치권이 앞장서는 것이 좋다. 특히 대구의 우수한 치과기반을 알리고 이것이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정부 상대로 설득해야 한다. 대구시장 후보들도 여야를 떠나 국립치의학연구원의 대구 유치에 관심을 갖고 이를 실천할 공약으로 삼는 것도 필요하다.

2026-04-27

여권을 만들며

봄맞이로 서랍을 정리하다 여권이 만료된 것을 알았다. 새로 발급을 받기로 했다. 집안일을 미루고 사진을 찍고 구청으로 갔다. 점심시간이라 40여 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구청 안 카페에서 음료수 한잔을 시키고 휴대폰을 열었다. 어디선가 한국인이 유독 여행을 좋아한다는 기사를 읽은 것 같아 검색을 해 보았다. 한국은 대도시 중심의 생활, 빠른 정보소비, 업무의 고강도, 경쟁의 압박 등으로 새로운 자극을 찾는 경향이 여행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확실히 다른 세계’를 체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경험의 밀도를 높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정해진 루틴을 따라 사는 것을 나는 선호한다. 모르는 길보단 아는 길을 가는 것이 좋고 해오던 방법을 사용하며 사는 것에서 안정을 느낀다. 자주 보는 사람들을 만나면 쉽게 마음을 열고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어색해서 만남이 쉽지 않다. 그래도 가끔은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움을 느끼고 싶을 때 여행을 생각한다. 내게 여행은 두 마음을 품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낯섦이 주는 두려움과 설레임. 출발하기 전 갈 곳의 자료를 통해 볼 곳과 먹을 것을 찾아보면서 설레임을 느낀다. 새로운 장소를 거닐며 만날 뜻밖의 풍경과 나와 같은 듯 다른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 상상만으로도 설레임은 증폭된다. 낯섦 속에서 시작된 설레임은 여행을 하면서 때로 두려움으로 그 얼굴을 바꾼다. 모르는 길을 여러 번 묻거나 지도를 보며 찾아가는 과정은 불안함을 키우며 나를 작아지게 만든다. 무능을 느끼게도 한다. 가끔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도 한다. 지인들과 처음 패키지로 해외여행을 했을 때의 일이었다. 유난히 더운 날이었고 국경일이라 광장엔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룹 별로 자유롭게 구경하다 모이기로 한 장소에 갔는데 너무 더웠다. 가이드가 다른 쪽 그늘에서 만나자고 해서 우리는 장소를 옮겼다.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아픈 다리를 쉴 겸 한 걸음 정도 앞에 앉았다. 약속된 시간에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일행이 없었다. 우리를 두고 가 버린 것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갔다. 가이드 뒤를 병아리처럼 쫓아만 다녀 숙소 이름을 기억하지도 적어놓지도 않았었다. 여권도 가이드가 다 가지고 있었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미아가 된 것이다. 지금이야 폰이 있으니 어떻게라도 연락이 되었겠지만 그 당시는 휴대폰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두 친구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어쩔 줄을 몰랐다. 반은 울며 발을 동동 구르는 친구들을 보면서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가야 할지 두려움이 앞섰다. 결국 우리 셋은 무작정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거의 한 시간쯤 뒤 가이드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저쪽에서 달려왔다. 당연히 있는 줄 알고 인원 점검을 안 했다며 사과를 했다. 그 날 가이드가 일찍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두고두고 생각해도 아찔한 경험이었다. 그 날 이후 여행 시에는 여권을 복사해두고 숙소 이름과 전화번호 영사관이나 대사관의 전화번호를 적어두게 되었다. 미아가 되었던 여행의 두려움은 초조해하기만 할 뿐 문제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했다. 모든 것이 익숙했던 평상시의 삶에서는 몰랐던 모습이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낯섦 가운데에서 생동감을 얻는다. 설레임과 두려움은 여행이 진행되면서 설레임이 커지기도 하고 두려움이 커지기도 하면서 소중했던 시간으로 추억으로 내 기억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다. 결국 여행은 그런 과정을 통해 내 안의 나를 발견하며 지경을 넓혀가는 일인 것 같다.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며 새로움을 익혀가는 일. 나와 다른 사람들이지만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내 삶을 더 치열하게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는 일. 그것이 내가 여행을 하고 여행을 하고 싶은 의미인 것 같다. 일주일 후 여권을 찾기로 하고 나서는 길에 보이는 봄꽃들이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화려한 유혹의 계절이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6-04-26

고장 나기 전에 알려주는 공장··· 제조업 ‘AX 시대’ 열렸다

오전 6시, 경북의 한 자동차 부품 중견기업 가공 공장. 야간 근무를 마친 정비팀장이 모니터 앞에서 커피잔을 든다. 수십 개의 설비 그래프가 잔잔히 흐르던 화면 한 귀퉁이가 노란색으로 바뀐다. 사흘 뒤 이상이 예상되는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컴퓨터 수치 제어) 장비의 주축 모터다. AI가 사람 귀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미세한 진동의 변화를 잡아내는 것이다. 이때, 정비팀이 출동하고 야간 점검 시간을 활용해 베어링을 교체한다. 따라서 제품생산 라인은 멈추지 않는다. 과거라면 갑작스런 설비 정지로 수천만 원의 손실이 났을 상황이 조용히 지나간다. 요즘 한국 제조업 현장에서 한창 회자되는 ‘AX(AI Transformation·인공지능 전환)’의 한 장면이다. DX는 ‘내비게이션’, AX는 ‘자율주행’ 지난 몇 년간 우리는 ‘DX(Digital Transformation·디지털 전환)’라는 말에 익숙해졌다. 종이 서류를 디지털화하고, 공장에 센서를 달아 데이터를 모으고, MES(생산관리시스템)로 공정을 관리하는 일들이 모두 DX였다. DX가 “데이터를 모으고 자동화하는” 단계였다면, AX는 “그 데이터로 AI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단계로의 도약이다. 쉽게 비유하자면 DX는 자동차에 내비게이션을 단 것이고, AX는 자동차가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길을 찾아가는 것에 가깝다. 운전자를 ‘보조’하는 수준에서 운전을 ‘대신’하는 수준으로 진화하듯, 공장도 그 길을 가고 있다. 예지 정비···고장 나기 전에 AI가 알려준다 제조업 AX의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예지 정비(Predictive Maintenance)’다. 기존 정비는 두 갈래 방식이었다. ‘고장 나면 고치는 사후정비’, ‘일정 주기로 점검하는 예방정비’가 그것이다. 사후정비는 갑작스런 제품생산 라인 정지로 손실이 크고, 예방정비는 멀쩡한 부품도 미리 교체해야 하는 낭비가 있다. 예지 정비는 두 단점을 모두 해결한다. 설비에 부착된 진동·온도·소음·전류 센서가 24시간 데이터를 보내면, AI가 학습한 ‘정상 패턴’과 비교해 미묘한 어긋남을 포착한다. “이 패턴이 3주 후 베어링 마모로 이어진다”고 예측해 정비 시점까지 알려준다. 그 효과는 이미 수치로 입증되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사 딜로이트(Deloitte)의 예지 정비 연구에 따르면, AI 기반 예지 정비 도입 기업은 설비 다운타임을 20~50% 줄이고, 전체 유지보수 비용을 최대 25%까지 절감하며, 설비 가동시간(uptime)을 10~20% 끌어올리고 있다. 부품 수명 역시 20~25% 연장된다는 보고가 이어진다. 이는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선다. 국내 제조업은 숙련 기술자의 고령화와 은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30년 경력의 정비 명장이 퇴직하면 ‘소리만 듣고도 어느 부품이 이상한지 아는’ 그의 머릿속 경험지식인 노하우가 함께 사라진다. AI 예지 정비 시스템은 바로 이 암묵지(暗默知)를 데이터로 변환해 저장한다. 숙련공의 경험을 다음 세대가 이어 쓸 수 있는 자산으로 바꾸는 셈이다. AI의 ‘눈’이 사람의 눈을 대체한다 품질관리 영역의 변화도 거대하다. 핵심은 ‘머신비전(Machine Vision)’ 기술이다. 카메라로 제품을 촬영하고 AI가 이미지를 분석해 불량을 판별한다. 사람 검사원은 8시간 일하면 피로해진다. 야간엔 집중력이 떨어지고, 작은 흠집은 놓치기 쉽다. 그러나 AI 비전 시스템은 24시간 같은 정확도를 유지한다. 1초에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 1마이크로미터 단위 결함까지 잡아낸다. 이 기술의 도입은 빠르게 글로벌 표준이 되고 있다. 산업용 머신비전 분야 글로벌기업 코그넥스(Cognex)가 북미·유럽·아시아 제조업체와 시스템 통합업체 500여 곳을 대상으로 2026년 발표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7%가 이미 머신비전 운영 환경에 AI를 도입했고, 30%가 단기간 내 도입을 계획 중이라고 답했다. 국내 머신비전 검사 시스템 시장 역시 2021년 1조2000억 원에서 2026년 1조6000억 원 이상으로 성장할 전망이다(프로스트앤드설리번 인용). 이차전지가 성장의 견인차다. 배터리 안정성 요구가 엄격해지면서 셀 업체뿐 아니라 부품 협력사까지 AI 비전 도입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국내 중소 제조기업의 현실은 다르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국내 중소 제조기업의 AI 도입률은 1% 안팎에 머문다. 필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2025년 10월 스마트공장을 구축한 중소제조업체 502개 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기업의 47.4%가 “제조 공정에 AI 도입이 필요하다”고 답했고, ‘보통’ 응답까지 포함하면 그 비율이 78.5%에 달했다. 필요한 분야로는 품질관리(33.9%), 생산 최적화(32.3%), 공정 자동화(31.9%)가 꼽혔다. 인식과 현실의 간극의 차이, 이것이 바로 한국 제조업 AX의 숙제다. 정부도 움직였다··· ‘M.AX 얼라이언스’ 출범 정부 차원의 행보도 본격화됐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5년 9월 ‘M.AX(Manufacturing AI Transformation) 얼라이언스’를 출범시켰다. 제조업 앵커 기업과 AI 벤처·로봇기업·연구기관을 연결하는 협력 플랫폼으로, 출범 당시 1000곳이던 참여기관이 3개월 만에 1300곳으로 늘었다(산업부, 2025년 12월). 2026년 M.AX 얼라이언스 예산은 7000억 원 규모다. 여기에 더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산업통상자원부·중소벤처기업부 3개 부처가 2026년 3월 합동 공고한 AX 통합사업 예산이 4230억 원이다. △AI 응용 제품 신속 상용화 1300억 원 △제조업 특화 스마트공장 구축 800억 원 △AI 통합 바우처 718억 원 등이다. 중소·중견기업이 핵심 수혜 대상이다.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의 2026년 AI 바우처는 기업당 최대 2억 원까지 지원되며, 중기부의 ICT 융합 스마트공장 보급·확산 예산도 전년 대비 크게 늘어 1695억 원이 편성됐다. 그러나··· “AI를 도입했는데 왜 그대로일까?” 화려한 통계 뒤에는 그늘도 있다. 현장 관리자들 사이에는 “AI를 도입했는데 수율은 기대만큼 오르지 않고 엔지니어 업무량도 줄지 않는다”는 푸념이 적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AI 모델은 학습 시점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작동한다. 장비를 교체하거나 원자재가 바뀌면 환경이 변하고, AI의 정확도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조용히 떨어진다. 이를 ‘모델 드리프트(Model Drift)’라 부른다. 도입은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AI 모델의 성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데이터가 달라지면 자동으로 재학습시키는 운영 체계, 즉 ‘MLOps(Machine Learning Operations)’가 주목받고 있다. 제조업의 AX는 기술 도입 프로젝트가 아니라 조직과 일하는 방식의 변혁이다. 경북, 중견 제조업의 ‘AX 골든 타임’ 마지막으로 우리 지역을 살펴보자. 구미의 전자·부품, 경주의 자동차 부품, 영천·영주의 기계금속, 안동·예천의 식품 가공, 그리고 포항·경산의 철강·금속 산업, 경북은 한국 제조업의 핵심 거점이지만, 인구 감소와 숙련공 고령화라는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중견기업의 민첩성이 AI 시대에 오히려 강점이 된다는 점이다. 2025년 8월 발표된 MIT NANDA 연구소의 ‘The GenAI Divide: State of AI in Business 2025’ 보고서에 따르면, 전문 공급업체와 파트너십을 맺고 AI를 도입한 기업의 성공률은 67%로, 자체 구축을 시도한 기업(성공률 약 3분의 1)의 두 배를 웃돌았다. 의사결정이 빠르고, 자원이 한정되어 오히려 ‘가장 아픈 한 곳’에 집중하기 좋은 중견기업일수록 이 모델에 적합하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시스템을 한 번에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픈 공정 한 곳에서 작은 성과를 만들고 그 성과를 다음 공정으로 확장해가는 것’이다. 정부 지원사업도 이러한 단계적 접근을 염두에 두고 설계돼 있다. ‘AI를 활용하고 지배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이 연재 첫 회의 메시지는 이제 우리 지역 공장 현장에서 가장 절실한 화두가 되고 있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4-26

대통령도 권력을 사사로이 쓸 수는 없다

어린아이에게는 위험한 물건을 맡기지 않는다. 요즘은 모든 게 미쳐 돌아간다. 거대한 정치권력들이 기본이 안 된 어린애들에게 맡겨진 느낌이다. 민주주의의 모형이 된 아테네 정치도 몰락하고, 가장 민주적으로 설계됐다는 바이마르 체제도 나치의 등장으로 스스로 무너졌다.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도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한 권력자의 결심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에서, 이란에서. 세계 무역 질서가 무너졌다. 수십 년간 쌓은 약속과 계약이 휴지가 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핵무기를 손에 든 위험한 독재자다. 하지만 그는 세습했다. 문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의 폭주다. 하버드대 교수들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연작에서 그런 사례들을 보여줬다. 당장 국민의힘은 장동혁 대표의 폭주를 막지 못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난 총선에서 악재만 쏟아냈다. 오늘의 민주당 폭주를 낳은 장본인이다. 하지만,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재명 정부 지지율이 고공행진 한다. 잘해서 얻은 박수인가. 윤석열 정부 실패의 반사이익,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는 국민의힘에 대한 거부감 덕분 아닌가. 그 수치만 믿고 스티븐 레비츠키가 설명한 길을 가고 있다. 정치적 경쟁자를 부정하고-사법부를 장악하고-언론의 입을 틀어막는 과정이다. 이재명 정부는 국회를 장악했다. 이전에도 대부분의 국회는 과반 다수당이 차지했다. 그럼에도 권위주의 시절 집권당도 이처럼 철저히 야당을 무시하지 않았다. 사법 체제도 손아귀에 넣었다. 검찰을 아예 없애고, 대법관의 과반수를 자기 손으로 임명하려고 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그래도 선의의 개혁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이재명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중단된 재판 문제임을 확인해준다. 이 대통령은 24일 X에 지난 2023년 ‘대장동 그분’ 보도로 한국신문상을 수상한 동아일보에 대해, “이제라도 수상을 취소 반납하고, 사과 및 보도 정정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요?”라고 올렸다. 현직 대통령의 말이다. 엄청난 압박이다. 특검과 사법 체제에 대한 일련의 조치들이 과잉 충성이 아니라, 대통령의 의지인 셈이다. 검찰의 공소를 취소해 없었던 일로 만들려는 기초 작업이다. 동아일보의 2021년 10월 9일 보도는 뭔가. ‘정영학 녹취록’에 대장동 사건의 주역인 김만배 씨가 “천화동인 1호가 내 것이 아닌 것을 잘 알지 않느냐”, “그(천화동인 1호 배당금) 절반은 ‘그분’ 것이다. 너희도 알지 않느냐”라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김 씨가 뇌물로 쓸 150억 원을 요구하자, 정영학·남욱 씨가 천하동인 1호의 배당금 1208억 원에서 쓰면 되지 않느냐고 반발했다. 김 씨의 역할이 로비이고, 뇌물로 쓰려고 배당한 돈이란 의미다. 그러자 김 씨가 그 돈을 쓸 수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보도 며칠 뒤 이정수 당시 중앙지검장도 국회에서 “정치인 그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라면서도 “녹취록에도 ‘그분’이라는 표현이 한 군데 있기는 있다”라고 인정했다. 김만배 씨는 “내 쪽으로 구사업자 갈등이 번지지 않게 하려는 차원에서 말한 것”이라며 이 발언을 인정했다가,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다”라고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이 대통령은 “팩트 발굴이 아니라 엄청난 조작을 한 것”이라고 직격했다.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한 것은 ‘그분 것’이라는 표현이다. 거기에 대장동 일당 중 가장 연장자인 김만배 씨가 ‘그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이는 허가권자인 이재명 당시 경기지사뿐이라고 분석을 더 했다. ‘그분=이재명’이라고 보도하지는 않았다. ‘그분 것’이란 표현이 없었다면, 당연히 동아일보는 물론 당시 이를 보도한 모든 신문이 정정해야 한다. 한국신문상도 취소해야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절차가 있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중단된 대장동 사건 재판을 재개해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국회에 관련자들을 불러 의견을 듣는 것이다. 왜 그 이야기는 듣지 않는가. 권력을 쥐었다고, 힘으로 밀어붙이면 또 다른 왜곡이 된다. 그런다고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6-04-26

거지방과 거지맵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3고시대를 맞아 젊은 세대들 사이에 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이려하는 절약문화가 확산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온라인 상의 ‘거지방’과 ‘거지맵’이다. 거지처럼 절약하자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온라인 상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내용들은 매우 건전하며 유익하다. 거지방은 카카오톡이나 오픈채팅 등에서 운영되는 절약 공유 커뮤니티다. 절약과 관련한 생활습관이나 정보로 가득하다. 기발한 절약방법을 공유하면서 서로가 격려와 칭찬도 주고 받는다. 거지맵은 최대한 돈을 아끼면서 먹을 수 있는 장소를 지도에 표시해 놓는 사이트다. 누군가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용자가 경험한 저가식당과 메뉴들을 소개하며 정보를 공유한다. 메뉴 가격은 대체로 1만원 미만이다. 두 사람이 같이 먹어도 1만원 정도 되는 수준이다. 중국집 메뉴인 자장면은 3000원, 찜뽕은 4000원 하는 곳이 더러 눈에 띈다. 서울을 비롯해 대구와 부산에서도 거지맵이 등장했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거지맵의 하루 방문자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도 있다고 하니 고물가 시대에 대응하는 MZ세대의 생존전략이 유난히 독특해 보이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예전에는 1만 원이면 한 끼 식사비로 충분했다. 하지만 요즘은 1만 원으로는 변변한 밥 한끼 먹기가 쉽지 않다. 중동전쟁의 여파로 국내 물가가 또 한 번 거센 인상 압박을 받고 있는 시점이다. 당국의 물가안정 대책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물가는 한번 오르면 잘 떨어지지 않는 속성이 있다. 굳이 거지라는 표현을 쓰면서 고물가와 싸우는 젊은 세대의 고육책의 배경에는 우리 경제의 어두운 단면이 숨어있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