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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가난한 사람은 지하실로 간다?

사는 집은 사람의 생활수준과 가진 돈을 우회적으로 확인하게 해준다. 이른바 서울 중심가의 아파트는 거래가격이 수십억 원에 이른다. 대구·경북에도 고가 아파트가 적지 않다. 하늘 높이 솟아 마천루를 이루는 고층 아파트를 보면서 ‘나는 언제쯤 저런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절망하는 서민들이 드물지 않게 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 형태는 어떨까? 지하 또는, 반지하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흔하다. 지하는 어둡고 갑갑하며 습기가 차는 공간이다. 그러나, ‘지상의 집’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못한다면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길에서 이불 깔고 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엔 부잣집 가정부의 남편이 오랜 세월 지하실에 갇혀 생활해온 모습이 영상으로 보여진다. 주인공 가족의 주거 형태도 유사하다. 방 안에서 거리가 올려다 보이는 반지하 집인 것. 가난한 사람들은 땅 위가 아닌 땅 아래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서글픈 현실의 영화적 형상화가 아니었을까. 비단 한국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비슷한 모양이다. 최근 대만의 언론매체 TVBS는 딱한 사연 하나를 보도했다. 한 아파트 주차장 지하실에서 3년 넘게 살아온 70대 노인이 불법 점유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아파트 입주민이었으나 문제가 생겨 자신의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가자 생활필수품만을 챙겨 지하실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고 한다. 긴 세월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주차장 지하실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잠을 자야했던 대만 노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측은지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2-15

[팔면경] 한국 박물관의 세계화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근 올들어 중앙박물관을 방문한 사람이 600만명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1945년 박물관 개관 이래 한해 누적 방문객으로서는 가장 많은 사람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것이다. 그 숫자는 동양권 국가에서 가장 많고, 세계적으로는 루브르, 바티칸, 영국박물관에 이어 네 번째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은 2024년 기준 한해 약 870만 명이 다녀갔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방문객이 늘어난 것과 관련 박물관 관계자는 한류 콘텐츠의 인기가 전통문화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으로 분석을 한다. 특히 한류 문화의 영향을 받아 외국인 관람객이 꾸준히 증가하면서 박물관이 K-컬처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영국의 킹스칼리지 런던연구팀은 이색적인 연구결과를 발표, 관심을 모았다. 연구팀은 프랑스 화가 마네, 고갱, 네덜란드 화가 고흐 등 세계적 명성의 화가가 그린 진본을 감상하면 스트레스가 줄고,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내용을 발표한 것이다. 연구팀은 50명의 사람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은 미술관에서 세계적 화가의 진짜 그림을 보게 하고, 다른 그룹은 다른 장소에서 복제된 그림을 보도록 해 신체 변화를 살폈다는 것이다. 진짜 그림을 본 그룹은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감소하고 몸속 염증 물질도 줄어든 반면 복제본을 본 그룹에서는 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것. 한나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역사와 전통, 유산 등이다. 한국의 문화가 집대성된 박물관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이 늘어나는 것은 바로 한국박물관의 세계화가 멀지 않았다는 신호다. /우정구 논설위원

2025-12-14

수사기관이 도둑의 하수인이 되려는가

“민나 도로보데스(みんな泥棒です).” ‘모두가 도둑놈이다’라는 뜻의 일본말이다. 1982년 한 TV 방송 시리즈물 ‘거부실록’에서 공주 갑부 김갑순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자유당 정권 때 유행하고, 4.19 직후 김상돈 서울시장이 취임식에서 이 말을 인용해 회자됐다고 한다. 김갑순은 주변에 자신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뿐이라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믿을 놈이 없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해먹을 궁 리뿐이다. 나라를 걱정이나 하는지 의심스럽다. 서민 입에서 ‘모두 도둑놈’이란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부인을 보호하려고 비상계엄을 발동한 윤석열 전 대통령도 어이가 없지만, 정권을 거저 얻은 이재명 정부가 입법 권력으로 장난쳐, 법치를 희화화하는 것도 기가 찬다. 유죄를 무죄로, 무죄를 유죄로 만든다. 통일교와 유착했다고 국민의힘을 해산해야 한다고 소리 지르던 민주당 인사가 정작 로비를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제 내놓고 ‘내로남불’이다. 특검 수사가 너무 편파적이다. 야당은 수사하고, 여당은 은폐한다. ‘김건희 특검’이 여권 연루 사실을 안 것은 지난 8월. 윤영호 전 통일교 세계본부장이 지난 5일 법정에서 “2017년부터 2021년까지 국민의힘보다 민주당과 가까웠다”라면서 “현 정부의 장관급 인사 등 4명과 국회의원 리스트를 (특검팀에) 말했다”라고 증언하면서 드러났다. 그제야 전재수 전 해양수산부 장관과 임종성 전 민주당 의원, 김규환 전 미래통합당 의원의 수천만 원대 금품수수 혐의를 경찰에게 넘겼다. 한겨레는 윤 전 본부장이 민주당 정치인 15명에게 돈을 줬다고 진술했다고 보도했다. 중앙일보도 통일교가 민주당 인사 중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이종석 국가정보원장, 강선우 민주당 의원 등을 직접 접촉하며 관리했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윤 전 본부장은 대선 직전 “이재명 후 보 쪽에서도 다이렉트로 어머님(한학자 총재) 뵈려고 전화가 왔다”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러나 특검은 국민의힘만 조사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특검은 전 정부와 국민의힘 인사들에 대해 최소 18명을 30차례 이상 조사했다. 민주당은 단 한 명도 수사하지 않았다. 특검 측은 민주당 관련자들이 “특검법상 수사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애초에 통일교 자금 문제로 권성동 의원을 조사한 게 별건이었다. 특검이 기소한 24명 가운데 16명은 김건희 여사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때는 특검법상 ‘수사 과정에서 인지된 관련 범죄행위’도 수사할 수 있다며 정당화했다. 수사가 아니라 야당 때려잡기라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민주당 인사들에 대한 진술은 정식 조서가 아닌 수사보고서만 만들었다. 지난 8월 윤 전 본부장의 법정 발언이 있고, 외부로 불거지자, 부랴부랴 입건 전 내사 사건 번호를 붙여 경찰에게 던져버렸다. 특검은 2023년 국민의힘 대표 선거에 개입하기 위해 통일교 신도가 집단 입당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지난 8~9월 세 번이나 국민의힘 당사 압수수색을 시 도했다. 결국 당원 명부를 확보했다. 민주당은 “종교 권력에 기생한 정치 집단의 정당 해산은 불가피하다”라는 주장까지 했다. 윤 전 본부장은 여당에도 입 당했다고 증언했다는 데도 말이다. 특검과 민주당이 짜고, 정치공세 한다고 의심받기에 꼭 알맞다. 이재명 대통령 개입은 화룡점정이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일 국무회의에서 종교의 정치 개입 사례를 지적하면서 ‘종교재단 해산 명령’ 여부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9일 이 대통령은 “(종교)법인체도 헌법과 법률에 위반되는 지탄받을 행위를 하면 해산시켜야 한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문체부는 통일부 재산 목록 제출을 요구했다. 갑자기 왜 이런 조치들이 나왔을까. 윤 전 본부장이 말을 뒤집었다. 그는 12일 “(여권 인사에게 금품을 줬다는) 그런 진술을 한 적이 없다”라고 부인했다. 이 대통령의 경고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 연루 진술이 없었다면 특검은 무엇을 경찰에게 넘긴 건가. 영화 ‘아수라’처럼 수사 기관이 도둑의 하수인, 조롱거리가 되어간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12-14

지방권 광역철도망 시대 연 대경선 개통 1년

구미에서 대구를 거쳐 경산까지 1시간 내 운행되는 대경선이 개통된 지 이 달로 1년이다. 지방권 최초의 광역철도망 시대를 연 대경선은 개통 한 달만에 승객 87만명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교통망으로 일찍 주목받은 바 있다. 철도공사에 따르면 개통 1년 동안 누적 이용객은 모두 512만 명으로 집계됐다. 하루 1만4000명이 대경선을 이용한 것이다. 특히 이 같은 대경선 수요 증가 영향으로 대구권 통근 동선과 교통 흐름에 변화를 주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대구와 대구 인근 시군을 아우르는 교통수단으로서 대경선은 이제 빠르게 자리를 잡았고 대구권 교통수단의 주요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음도 확인한 셈이다. 대경선이 이처럼 빠르게 대구권의 중심 교통수단으로 안착하게 된 배경은 경산, 대구, 칠곡, 구미 등을 한 시간 내 오갈 수 있는 교통의 편의성이 널리 알려졌고, 대구와 경북의 지자체가 동참한 광역환승 할인제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이 된다. 또 교통수단으로서 뿐 아니라 지역경제와 생활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간과해선 안될 부분이다. 대구역과 동대구역 일대 상가 방문객이 늘고, 구미는 관광객 증가로 상가 매출이 증대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앞으로 대구와 경북이 경계를 넘어 왕래하면서 광역경제권의 효과 상승도 기대된다 하겠다. 본래 광역철도망 구상은 정부의 균형발전 전략의 하나다. 지방 대도시권 내 1시간 내 이동할 수 있는 광역철도망을 만들어 수도권에 버금가는 메카시티를 조성하겠다는 것이 정부 계획이다. 대경선 하나로 메가시티를 얘기할 순 없지만 대경선과 같은 광역철도망의 추가 조성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우선은 현재 대경선이 안고 있는 숙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급하다. 늘어난 이용객 편의를 위해 열차량의 추가 배치나 배차 간격 조정도 검토하고 신설역 수요에 대한 세심한 대책도 마련돼야 한다. 대경선은 단순히 교통망을 연결했다는 교통망 구축의 의미를 넘어선다. 개통 1년의 성과를 중심으로 대구와 경북의 통합과 상생 길을 찾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2025-12-14

가르친다는 것

이번 학기에 ‘문학과 영화, 그리고 나’ 교양 수업을 진행하고 나서 느끼는 소회(所懷)가 이 글을 쓰도록 인도한다. 학생들에게 고전 문학 작품들을 읽히고, 고전에 기초한 영화를 감상하게 함으로써 문학과 영화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게 강의 요지다. 그러하되 강의의 방점은 영화가 아니라, 문학에 찍혀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나는 이른바 ‘최대강령주의자’에 속한다. 무엇을 하든 열렬하고 집요하게 대상을 파고드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강의 준비도 치밀하고 폭넓게 하고, 강의 시간도 최대한 준수하려 애쓴다. 당연히 휴강은 없다. 시인 동주는 “한 시간의 휴강은 실로 살로 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4차 산업혁명이 한창인 시점에 그런 자세는 너무 한가하다는 생각이다. 학생들과 15주 강의를 함께 만들어가면서 느낀 뼈아픈 사실은 그들 내면에 지나치게 깊이 새겨진 사회적 수동성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이번 학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동성의 깊이와 폭이 심화-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타자를 위한 배려가 실종되고, 각자의 좁은 공간에 자발적으로 유폐된 청춘들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언젠가 여기는 강의실이 아니라, 공원묘지나 무덤 속 같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졸거나 자거나 휴대전화 건드리면서 75분을 간신히 버티는 학생들의 무표정하고 생기 없는 얼굴과 눈빛을 보노라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세대차(世代差)와 ‘엄근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지만, 학과장 말에 따르면, 많은 강의실 풍경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공자는 지식인의 기본자세를 ‘묵이지지(黙而識知)’ ‘학이불염(學而不厭)’ ‘회인불권(誨人不倦)’ 셋으로 정리한다. 이 가운데 나는 회인불권, 그러니까 사람을 가르침에 지겨워해서는 안 된다는 항목을 가장 요긴한 것으로 생각한다. 회(誨)를 파자(破子)하면, 매번 말한다는 뜻이다. 무엇인가 부정적인 상황이나 언행을 보면 그것을 말로써 계도(啓導)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렇게 끈질기고도 정성스럽게 가르치는 행위가 아무 보답도 없이 시간과 더불어 스러질 경우, 완전히 속수무책이라는 데 있다. 그때 적용할 수 있는 영어 속담이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그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을 먹을지 말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최종적인 주재자는 교수나 부모가 아니라, 학생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말이 목구멍에까지 치밀어 오르지만, 꾹 눌러 참고 노자의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를 떠올린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이것이야말로 참교육을 실행하는 가장 좋은 방도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언행일치 교육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학부모는 가능하지만, 교사나 교수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거의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회적 수동성으로 무장한 대학생들을 보면서 한국 교육이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행-재정적인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교육하는 방식의 혁신적인 변화가 따르지 않으면, 인재 양성은 기대난망(期待難望)일 밖에 없을 것이다. 창밖 겨울비 촉촉하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2-14

시민불복종, 명령불복종

지난 12일, 비상계엄 가담 공직자를 조사 중인 국방부 헌법존중 정부혁신 티에프(TF)는 박정훈 대령을 중심으로 조사분석실을 신설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박정훈 대령은 2023년 채상병 사망 사건을 수사한 후 결과 임성근 사단장에게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고 보고 수사 결과를 경찰에 이첩하려던 중 보류 지시를 받았지만, 수사 결과를 경상북도경찰청에 이첩한 일로 항명죄로 기소되었다가 올 1월에 무죄 판결을 받은 군인이다. 재판부가 무죄 판결한 이유는 이첩 중단 명령이 부당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난 2월 민형배 등 10명의 국회의원은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몇 가지 내용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군인이 정당한 명령에만 복종하고, 위법 또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군형법」은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않은 군인을 항명죄로 처벌한다. 물론 군인은 직무와 관계가 없거나, 법규 및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반하는 사항, 또는 자신의 권한 밖의 사항에 관하여 명령은 하달할 수 없다. 이것은 정당하지 않은 명령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이기는 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이라는 책에서 보다시피 시민불복종은 기본권과 헌법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부당한 법이나 제도를 거부하는 행동이다. 명령불복종은 시민불복종과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지배 권력의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명령불복종은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전시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상명하달이 중요하기 때문에 엄한 벌을 받는다. 1995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 ‘크림슨 타이드’는 위기 상황에서 명령불복종을 다룬 영화로 유명하다. 러시아의 핵공격 압박 상황에서 1차 통신에 선제 핵미사일 발사 명령이 왔다가 2차 통신이 오던 중 중단되어 발사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이 되었다. 함장 램지는 1차 통신을 근거로 발사를 명령하지만, 2인자인 부장 론터는 분명하지 않다며 명령을 거부하고 함장을 감금하기까지 한다. 다시 도착한 3차 통신은 발사하지 말라는 것이어서 영화는 헌터의 편을 들어준다. 하지만 램지는 월권으로, 헌터는 항명으로 모두 해군 청문회에 소집된다. 결론은 모두 국가를 위한 충정이었다고 보고 램지 함장은 징계 없이 전역하고 헌터 부장은 승진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핵발사의 후폭풍이 너무나 크기에 신중함도 필요하지만, 헌터의 명령불복종은 위험했다. 선제적 핵발사가 꼭 필요한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와 정당과 부당이 확실한 박정훈 대령의 사례는 크게 다르다. 그럼에도 헌터의 승진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만큼 명령불복종의 명분이 정당하다면 용인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박정훈이 비상계엄 가담 공직자를 조사하는 중심인물로 복직된 것은 다행이다. 이번 기회에 법률이 일부 개정되어 기본권이 존중받는 군대가 되기를 바란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12-14

갈등보다는 통합의 정책을

정부와 민노총의 새벽 배송 금지 법안 추진을 놓고 의견이 갈린다. 하루라도 빨리 입법을 추진하려는 민노총 택배노조와 참여연대가 ‘과로사 없는 택배 만들기 시민 대행진’을 열었다. ‘속도보다 생명이다’, ‘늦어도 괜찮아 과로 없는 안전한 배송’ 구호를 외치며, 새벽 배송 최소화를 요구했다. 택배노조에 대하여 쿠팡노조는 “새벽 배송은 국민 삶에 필요불가결한 서비스이며 현실을 외면한 정책은 택배 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처사”라고 말했다. 새벽 배송을 금지하면 배송을 맡은 기사들과 관련 산업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일자리를 잃는다. 2000만 명이 넘는 이용자와 15조 원 규모의 시장을 송두리째 잃고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새벽 배송 금지는 늘어난 1인 가구와 맞벌이 가구에 필요한 생필품 구매 수단을 무너뜨림으로 새로운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산지에서 생산한 농산물 이동망의 붕괴로 농산물은 경매시장으로 몰려 가격의 하락과 생산 농가의 타격은 불가피하다. 새벽 배송은 이미 큰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정부에서 입법으로 규제하려면 국민 생활과 관련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하게 검토한 다음에 시행해야 한다. 새벽 배송이 택배 기사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시간대별로 분석하고, 택배 산업과 농산물 재배와 유통업자와 농산물 시설 관련 산업 등을 폭넓게 조사해야 한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기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며, 택배 기사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새벽에 일하는 것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법으로 금지한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음을 정부는 알아야 한다. 택배기사들이 새벽 배송을 선호하는 이유는 43%를 차지하는 ‘주간보다 교통체증이 적고 엘리베이터 이용이 편리하다’, 29%의 ‘수입이 높다’, 22%의 ‘주간에 개인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 6%를 차지하는 ‘주간 일자리가 부족하다’로 조사되었다. 결과를 보면 국민 생활패턴의 변화와 사회 여건이 새벽 택배를 하게 만드는 측면이 강하다. 섣부른 정책 시행으로 그렇지 않아도 활기 잃은 경기를 침체의 국면으로 정부가 나서서 몰아야만 하는지. 새벽 택배 관련 산업을 없앰으로써 얻는 득보다는 실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다수의 조사에서 새벽 배송을 유지해야 한다는 국민의 의사를 정부는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실업자를 양산하여 사회를 불안하게 해서는 안 된다. 관련 산업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노동자가 반대하고 국민이 반대하는 일을 굳이 할 이유가 있을까. 현실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택배기사의 건강을 정부가 챙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장기간의 철저한 조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쓸데없는 일로 국론을 분열하고 사람들을 가르는 일을 정부는 하지 말아야 한다. 갈등의 시간은 짧을수록 좋다. 국민의 삶과 무관한 정치권의 지루한 샅바싸움에 국민은 지친다. 국민이 필요하고 행복한 정책을 정치권은 고민해야 한다. 국민을 바라보는, 국민의 삶을 살피는 그런 정책을 국민은 원한다. 갈등보다는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정치권과 언론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김규인 수필가

2025-12-14

‘K-스틸법’ 시행령, 현장의견 반드시 반영을

국내 대표 철강도시인 포항·광양·당진시 단체장들이 지난 12일에도 국회를 찾아 철강업계에 긴급지원을 요구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들 3개 도시는 국내 철강 생산의 90% 이상을 담당하고 있지만, 최근 수출액이 급감하고 있다. 핵심 요구사항은 지난달 국회를 통과한 ‘K-스틸법’ 시행령에 ‘기업 전기요금 부담 완화’와 ‘탄소중립 투자 지원’을 반영해 달라는 것이다. 포스코 본사가 있는 경북도의 경우 그동안 기업들의 전기요금 부담 완화를 위해 ‘지역별 요금 차등제’ 도입을 정부에 여러 차례 건의했었다. ‘지역별 요금 차등제’는 발전소가 밀집한 지역의 전기요금을 낮춰주는 제도다. 지난 2023년 5월 ‘분산요금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법적 근거도 마련됐다. 이 법이 시행되면 경북도처럼 발전소가 몰려 있는 곳은 전기요금이 싸지고, 수도권 전기요금은 상대적으로 비싸진다. 이 제도의 원래 취지는 수도권에 집중된 기업을 지방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다.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기업의 경우 전기요금이 기업의 사활을 결정할 수 있다. 철강 대기업의 ‘탄소 중립(제로)’ 실현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하루빨리 고로를 수소환원제철 방식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국제경쟁력을 상실할 수 있다. 지금 유럽연합(EU)과 미국에서는 탄소배출 규제안을 강화하고 있어 철강 대기업이 고로를 탈피하지 못하면 결국은 수출길이 막히게 된다. 몇 년 전부터 포스코의 라이벌인 해외 철강기업들은 정부 지원을 받아 수소환원제철 기술도입에 총력을 쏟고 있다. 스웨덴의 사브(SSAB)와 독일의 잘츠기터(Salzgitter)는 천문학적인 재정지원을 받고 있으며, 일본도 철강 분야 탄소중립을 위해 10년간 3조엔을 투자하기로 했다. 산업인프라의 기반인 철강업계가 하루빨리 탄소중립을 실현하지 못하면 국내경제 전체가 큰 위기를 맞게 된다. ‘K-스틸법’이 불황을 겪는 국내 철강업계의 실효성 있는 처방전이 되려면, 시행령 제정 단계에서 지역 현장의 이러한 요구와 의견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2025-12-14

포항시립연극단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

최근 공연된 포항시립연극단의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는 노년 빈곤, 가족 해체, 세대 간 단절이라는 묵직한 사회적 문제를 블랙코미디로 풀어내며 관객 앞에 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비관에 함몰되지 않고, 생의 아이러니를 유머와 상징으로 재해석해낸 점이다. 장면의 미학과 배우의 신체 연기가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노년의 삶을 단순한 동정이나 비극이 아닌 삶의 역설적 풍경으로 그려낸다. 노년 서사를 블랙코미디로 다루는 독특한 시도는 관객이 현실을 비장함 없이 바라보도록 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웃음 강조로 인해 인물의 고통이 충분히 축적되지 못한 채 전환되는 순간이 발생한다.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연극이 흔히 빠지는 함정-메시지와 장면 리듬의 충돌-이 이 공연에서도 일정 부분 드러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노년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생활적 오브제와 신체 이미지를 활용해 상징적 층위를 쌓아 올린다. 이는 박장렬 연출이 이번 작품에서 선택한 중요한 전략이며, 그 전략은 상당 부분 유효하다. 최현아가 연기한 광주리 할머니는 작품의 중심축으로, 그녀의 신체는 과장 없는 리얼리티로 세월의 질감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는 설명적 대사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일부 장면에서 신체 이미지의 미학적 강조가 인물의 구체적 삶을 압도하며 해석의 간극을 남기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희와 윤도경이 연기한 미미와 분신의 이중 구조는 청년 세대의 불안정한 심리를 날카롭게 시각화한다. 담요에서 탈피하는 듯한 연출은 유머와 위태로움이 교차하며 강렬한 임팩트를 선사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상징적 퍼포먼스가 서사의 흐름을 압도해 인물의 내적 갈등이 희미해진다. 중년 부부와 군상 배우들은 장면의 리듬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공동체적 분위기를 구축하나, 후반부 군상 장면은 기능적 역할에 머무르며 초반의 세밀함이 퇴색된다. 미니멀한 무대는 배우의 신체성을 부각시키는 연출 의도와 조화를 이루나, 일부 장면에서 과도한 여백이 인물의 감정 집중력을 떨어뜨린다. 조명은 어둠 속의 미세한 빛으로 고독을 섬세하게 표현해냈지만, 장면 전환 시 배우 동선과 조명 타이밍의 불일치로 명료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남는다. 박장렬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 ‘몸의 언어’를 전면에 세우는 방식을 택했다. 설명을 줄이고 경험을 강조하는 이 연출 방식은 최근 한국 연극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신체 이미지는 본래 복합적인 사회 문제를 단순화할 위험도 갖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가능성과 위험을 동시에 보여준다.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는 노년을 소재로 삼았지만, 결국 세대 전체의 균열을 드러내는 사회적 진단에 가깝다. 작품은 높은 미학적 성취와 형식적 실험을 보여주면서도, 장면 간 정서의 불균형, 상징의 반복으로 인한 의미 과포화 등 몇 가지 과제가 남는다. 그럼에도 이 공연은 지역극단의 정기공연을 넘어, 동시대 한국 연극이 사회적 소재와 미학적 실험을 어떻게 병치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작품은 완성도에 더해,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색할 수 있는 비평적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백진기 문학박사·호산대학교 공연예술학부 초빙교수

2025-12-14

도심 속 까마귀

엷은 커텐 사이로 가만가만 들어온 햇살이 눈을 간지럽힌다. 빨리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라는 신호다. 아침의 행복한 순간이다. 맑은 날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은 희망적이어서 좋고, 흐린 날은 흐린 대로 마음을 안정시켜서 좋다. 바람에 밀려 모양을 바꾸며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것 또한 즐거움이다. 이런 소소한 기쁨을 깨뜨리는 존재가 나타났는데, 바로 까마귀이다. 이 새는 가볍게 짹짹 대는 참새나 까치 소리에 익숙했던 내 잔잔한 하루의 시작을 흔들고 있다. 까마귀를 처음 본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여름 방학 중 강원도에서 동아리 활동이 끝나는 날 오대산을 들렀다. 산 초입에 무리 지어 앉아 있던 새까만 새들을 보았고, 그 울음 소리를 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그 새는 몸집도 상당히 컸다. 까마귀를 흉조라 말했던 어른들의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온통 검은색인 모습은 묘하게 위협적이었다. 꽤 오랜 동안 머리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숲에서 살던 까마귀들이 도심에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결국 생존을 위해서라고 한다. 숲의 개발은 그들의 서식지를 빼앗았고 먹이를 찾아 도시로 나오게 된 것이라 했다. 열섬으로 인해 도심지의 온도가 산이나 들보다 높은 것이 그 새들이 도심지로 오는 이유라고 설명한 글도 있었다. 생태계의 변화는 까마귀의 생활방식조차 바꾸어 놓은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변화를 겪는다. 자연적인 성장으로 겪는 것도 있지만 달라지는 환경으로 오는 것도 있다. 어떤 변화는 작고 미세하여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이 있는 반면 그 흐름이 격렬해서 몸을 맡기는 것이 버거울 때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발전의 속도가 빨라서 일상적인 삶의 양상도 많이 바꾸어놓았다. 그 중에서도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발전은 가히 그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이다. 앞으로 다가올 가까운 미래에는 모든 사물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물인터넷 또한 더 급속하게 확산될 것이고, 연결된 다양한 사물들이 실시간으로 쏟아내는 데이터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 데이터들을 모아 클라우드(Cloud)에 저장하고 인공지능으로 효과적으로 학습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 흔한 일이 될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물론 젊은 사람들조차 그 빠른 속도를 맞추어 따라가느라 바쁠 것이다. 번역일을 하는 친구가 챗GPT를 사용하면서 느낀 AI의 엄청난 발전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조만간 사라질 직업군 가운데 작가도 있다는 이야기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는데 며칠 전 뉴스에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이 실시한 설문 조사가 소개되었다. 영국 소설가 10명 중 4명은 생성형 AI 등장 이후 소득이 줄었다고 했다. 또한 85%의 소설가는 생성형 AI로 인해 향후 수입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그 소설가들은 장차 직업이 사라질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으나 61%는 여전히 AI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불안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쉽게 사용을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민감한 순응은 변화에 가장 어울리는 대처법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배우기 힘들다는 이유와 첨단 기기를 많이 쓸 일이 없다는 이유로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다양한 검색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얻고, 그것을 활용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고 느꼈지만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현실을 외면하며, 이제는 나이도 들었으니 조금은 모른 척하고 살아도 되지 않았나 하는 적당히 안이한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 생활은 앞으로도 가속이 붙어 상상을 넘어서는 변화를 가지고 올 것이다. 이미 정보화시대는 빠른 발걸음으로 앞을 향해 달리고 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필요한 정보를 찾고 그것을 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더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변화에 빠르게 순응할지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배우고 익히지 않는다면 책임도 내 몫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생활터전이 위협받자 서식지를 바꾼 까마귀의 순응의 지혜가 마음에 다가왔다. 생존을 향한 열정을 보이는 모습이 처음으로 위협적이지도 무섭지도 않게 느껴졌다. 필요를 느끼면서도 게으름을 부렸던 나를 달래는 소리로 들렸다. 오랜 동안 미뤄왔던 챗GPT앱을 찾아서 비로소 휴대폰에 깔아본다. 부드러운 햇살이 창 깊이 들어와 아침을 밝혀주고 있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12-14

여권주도로 속도내는 ‘대법원 대구이전’

대구 출신 여권 의원들이 서울 서초구에 있는 대법원의 대구 이전 추진에 나섰다. 권칠승 민주당 의원과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비례대표)은 지난 10일 대법원과 부속기관을 대구시로 이전하는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경기 화성시병이 지역구인 권 의원(3선)은 경북 영천 출신이며 차 의원은 경남 합천 출신이다. 둘 다 대구에서 중·고교를 졸업해 TK 출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두 의원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개정안의 취지는 수도권 집중 문제를 완화하고 국가균형발전 촉진, 사법부 독립성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이 서울에 있어 사법기관, 법조 인력, 사법 인프라가 수도권에 과도하게 몰리는 구조가 고착됐다는 것이다. 두 의원은 “헌법재판소의 2004년 신행정수도 헌법소원 결정에 따라 사법기관 이전은 법률적·헌법적으로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대구를 최적지로 평가한 이유는, 비수도권 균형 축을 형성할 수 있는 영남권 중심도시라는 점과 대구가 과거부터 서울 다음의 법조 도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들었다. 대법원 대구 이전은 과거부터 민주당에서 제안했었다. 지난 2021년 송영길 당시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가 대구를 찾았을 때 대구에 대법원을, 광주에 헌법재판소를 이전하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대법원 유치에는 최근 세종시도 뛰어든 상태다. 그러나 대구는 이미 대법원 이전 가용부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대법원과 관련 부속기관 배치가 가능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범어동에 있는 법원과 검찰청이 2030년까지 수성구 연호지구로 이전할 경우 그 후적지를 대법원 용지로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 대법원의 대구 이전은 시민들로선 크게 환영할 일이다. 대구가 ‘사법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도시로 위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히 대법원뿐만 아니라 부속기관(윤리감사실, 법원 행정처, 사법연수원, 법원공무원교육원, 법원도서관, 사법정책연구원, 소속 위원회, 부속 병원) 이전은 대구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2025-12-11

경북형 이모작 공동영농 전국으로 확산된다

경북도가 2023년부터 중점 추진한 경북도 농업 대전환 사업이 정부 국정과제로 채택되면서 내년부터 전국으로 확산된다. 농림축산부는 경북도에서 시작한 공동영농의 사업자 공모를 벌여 이에 응모한 전국 5개 지역을 선정했다. 이번에 선정된 곳은 경북 경주시와 상주시, 강원도 황성군, 전남 영광군, 전북 김제시 등이다. 이들 지역은 국비 지원 등을 통해 앞으로 이모작 공동영농 사업을 벌이게 된다. 경북에서 시작한 공동영농사업은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야심 찬 농업 대전환사업이다. 이 지사는 “농민은 왜 땅도 있고 일도 열심하는데 도시 근로자만큼 못 사는가”하는 물음에서 농업 대전환을 시작했다. 잘 사는 농촌을 캐치프레이즈로 걸어 경북도의 준비도 단단했다. 도는 첫 번째 시범 사업지로 문경 영순 들녘을 선정했다. 영순지역은 60세 이상 고령농이 대부분으로 활기를 잃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공동영농의 핵심은 영농은 법인이 맡고, 농민은 주주로 참여하는 것이다. 영농을 맡은 법인은 벼 대신 고소득 작물을 이모작으로 재배, 소득을 올린다. 발생한 소득은 배당 형태로 농민에게 지급한다. 이 지사의 관심과 열정으로 영순지구 사업은 첫 결실부터 성공했다. 쌀 생산 때보다 농업소득은 3배, 농가 소득은 2배가 많았다. 영순지구 사업이 성공하자 타 지역의 벤치마킹이 늘어났다. 경북도도 사업대상지를 14곳으로 확대했다. 2024년 경북 공동영농 사업이 드디어 정부 시책사업으로 채택된다. 경북도가 잘사는 농업을 목표로 뛴 이모작 공동영농이 대한민국 농업 정책의 중심에 섰다는 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다. 이모작 영농은 쌀 생산을 줄이고 곡물 자급률을 높이며 농가 소득까지 올릴 수 있으니 1석 3조의 기대효과가 있다. 게다가 농촌의 인력난, 고령화, 이상기후 문제에도 대응하는 장점이 있다. 경북도 관계자는 경북에서 쏘아 올린 공동영농이 결실을 거둬 전국으로 확산됐다는 자부심을 피력했다. 정부가 인정한 경북 형 공동경영이 전국으로 퍼져가면서 제2의 농지개혁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뒀으면 한다.

2025-12-11

법정 휘젓는 AI 환각 판례

의뢰인들이 찾아 가져온 판례나 법률 정보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인 일은 이제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특히 챗지피티에 물어 얻어낸 판례는 실제로 없는 AI 환각(Hallucination) 판례인 경우가 매우 많다. AI 환각이란 인공지능이 그럴듯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사실과 다른 정보를 생성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AI는 진실을 판단하거나 검증하는 능력이 없으며, 단지 다음에 올 텍스트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그럴듯한지만 예측하여 생성하기 때문에 매끄럽고 설득력 있어 보이는 정보도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요즘 법원과 수사기관에서 변호사나 경찰이 이런 환각 판례를 그대로 법률서면에 사용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 변호사가 AI가 만든 허위 판례를 인용한 서면을 법원에 제출했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법원의 형사재판부는 이 변호사가 제출한 의견서에 인용된 판결 5개를 법원 전산망에서 조회한 결과, 해당 판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해당 변호사는 다음 기일이 열리기 전 문제가 된 판례를 철회한다는 의견서를 냈지만 법률전문가인 변호사가 AI 환각 현상이 만든 가짜 판례를 검증하지 않고 법원에 제출했다가 발각된 것이다. 경찰이 불송치 결정문에 AI 허위 판례를 인용한 사건도 있었다. 경기도의 한 경찰서에서 작성한 아동복지법 위반 사건의 불송치 결정문은 일시적이거나 단편적인 언행만으로는 아동의 정신 건강 및 발달에 해를 끼친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반복성·지속성 및 구체적인 피해 정황이 인정되어야 한다”라는 대법원과 서울북부지법 판결문을 인용했는데 고소인 측이 확인한 결과 해당 문장은 판결문에 없는 내용이었다. 행정심판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9월 부당해고를 당해 울산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낸 부당해고 사건에서 청구인은 상대방 회사 측 공인노무사가 제출한 답변서에 인용한 전체 법원 판례 10건의 원문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10건의 판례엔 존재하지 않는 판례 번호가 달려 있었다. 청구인 측이 판례의 진위를 따지자, 해당 노무사는 그제야 AI가 만들어준 판례였다고 시인했다. 노무사는 “사실관계를 조작하지 않았으니, 고의나 허위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청구인 측은 허위 판례를 인용한 노무사의 노무사법 위반 여부를 조사해달라며 고용노동부에 민원을 제기했다. 관련 분야 전문직종에서조차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으니 일반 민원인들이 내는 서류에 이런 환각판례와 허위정보가 얼마나 많을지 짐작이 된다. 법률전문가가 낸 서면에서도 환각 판례를 인용했으나 발각되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점점 사람들은 AI를 좋아하고 의존한다. 하지만 법률 분야에서의 이런 일들을 지금 적절히 규제하지 않으면 법률절차와 우리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성 자체가 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 변호사가 쓴 서면과 판사의 판결문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것 말이다. 환각판례 인용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 변호사협회에서도 변호사들이 보조도구로서만 AI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5-12-11

남아선호 사상이 문제

남녀 성비(性比)의 불균형이 생기는 결정적 이유는 남아선호 사상에 있다. 우리나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남아선호 사상이 지배한 사회다.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칠거지악이나 남존여비 사상의 발단도 근원적으로 보면 남아선호 사상에 기인한다. 남아가 우대받던 신라시대에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특이한 경우다. 당시 진골의 남자는 많았지만 성골의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혈통과 신분을 중요시하는 관습에 따라 성골의 여자를 왕위 계승자로 뽑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남아선호 사상 때문에 선덕여왕의 왕위 계승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장자 상속이나 부계 중심으로 집안이 이어졌다. 특히 유교문화 영향으로 남아선호 사상이 극심한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는 해방 후에도 지속되면서 우리나라 성비 불균형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1990년 우리나라 출생 성비는 여성 100명 당 남성 116.5명. 셋째 자녀까지 내려가면 여아 100명당 남아는 200명까지 치솟았다. 이러던 것이 2007년 107명 아래로 떨어졌고, 2022년에 와서는 정상 성비 범주에 들었다. 남아선호 사상은 전 세계 국가의 공통된 흐름이다. 중국과 인도는 남아선호 갈등 구조가 특히 심했던 나라다. 베트남은 세계 217개국 중 네 번째로 성비 불균형이 큰 나라다. 작년 베트남의 출생 성비는 111.4명. 2034년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150만명이 더 많을 거란 관측도 있다. 정부가 태아의 성별을 공개한 의사의 면허를 박탈하고, 성별 시술행위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한다. 문제는 유교 영향이 큰 베트남의 남아선호 사상부터 바뀌어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12-11

전문가다운 이야기를 듣고싶다

어떤 대담 프로에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하는데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얼핏 알겠지만,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잘 이해할 수 없다. 뭔가 번지르르한 단어와 외래어나 외국어를 섞어 이야기하는 통에 말하는 바를 평범한 사람이 주워 담기엔 역부족이다. 더 웃기는 것은 대담하는 장소에서 대담은 하지 않고 자기가 준비해 온 것만 줄곧 읽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마치 한 개인에 불과한 자신의 취향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비판이나 비난, 불평만 하는 것은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고 대다수의 바보들은 그렇게 한다’라는 것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다. 대안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요즘 방송에 전문가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전문가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관 학과 교수나 그쪽 계통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소위 ‘전문가’라고 치고 섭외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도저히 전문가 같지 않은 분이 나와서 자기 주관대로 말하는 사람이 보인다. 그런 사람을 전문가라 부르기는 무리가 따른다. 마치 뚱뚱한 사람이 다 미식가가 아닌데 그런 사람만 끌어모아 맛 탐방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전문가라고 하는 것은 그 분야에 능통함은 물론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있는 폭넓은 지식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단어가 아닌가? 사실 종편을 보면 심하게 꽉 막힌 사람들이 전문가입네 하고 나와서 온갖 말을 다 쏟아내고 있다. 사실 검증이나 제대로 거친 이야기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상관없다. 그냥 특정인의 입맛에 맞으면 그만이다. 사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마련이다.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가늠하고 이해하려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그래서 더 많고 정확한 정보에 기초해서 더 정확한 판단과 예측이 가능한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견해를 검증받고자 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요즘 ‘농업’이란 교과 과목을 학교에서 가르치는지 모르겠다만, 옛날 농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작물들의 파종 시기를 한 시간 내내 강의하시다가 마지막 한마디로 종료한다. ‘책대로 하지 말고 집에 할아버지가 씨뿌리라면 그때가 씨뿌리는 시기’라고. 연습생 시절을 거치지 않고 목청만 좋다고 다 가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많이 먹어보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음식 전문가가 될 수가 없다. 선수 시절이 없는 감독은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진리다. 그냥 책만 보고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적어도 정보 수집과 분석함에 있어서의 편견 없이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가치중립적으로 이해한 후 그 경험적 정보를 바탕으로 일반화하기에 사람들의 이해도가 높아지게 마련이다. 마치 귀신에게 홀려 설득당하는 기분까지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문가가 드물다. 그러니 몸에 와닿지 않아 실망하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선택은 내 몫이 되고 만다. 이걸 흔히 전문 용어로 ‘제자리 곰뱅이’라고 하던가? /노병철 수필가

2025-12-11

‘2035 NDC’

올해 유난히 길고 혹독했던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가며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난 11월 11일 우리 정부는 국무회의를 통해 매우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국제사회가 약속한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중간 관문으로서, ‘2035 NDC’를 최종 확정한 것이다. 전 세계가 함께 지구 온도를 낮추기 위해 치열한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 대열에서 뒤처질 수 없다는 절박한 선언이다. 그렇다면 ‘NDC’는 무엇일까? NDC는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의 약자로, 우리말로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각 나라가 “우리는 이만큼 줄이겠습니다”라고 유엔(UN)에 제출하는 ‘탄소 감축 숙제’이자 ‘국제적 공약’인 셈이다. 이번에 정부가 확정한 목표는 2018년 배출량 대비 무려 53%에서 최대 61%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기존 2030년 목표보다 훨씬 더 강력해진 이 수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우리 경제와 사회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야만 달성 가능한, 그야말로 ‘전시 체제’에 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거대한 숙제 앞에서 우리 대구와 경북은 어떤 상황일까? 우리 지역은 탄소 감축의 ‘위기’와 ‘기회’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곳이다. 대구는 건물과 자동차가 빽빽한 소비 중심 도시이고, 경북은 철강과 전자 산업이 주력인 생산 중심 지역이기 때문이다. 대구는 시민들이 생활 속에서 내뿜는 탄소를 줄여야 하고, 경북은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탄소를 줄여야 하는 서로 다른 숙제를 안고 있다. 포항의 제철소나 구미의 산업단지가 탄소 국경 장벽에 막혀 수출길이 막힌다면 지역 경제는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다. 반대로 대구의 노후화된 건물들이 에너지를 펑펑 낭비한다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시민들의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이미 유럽(EU)이나 미국 등 선진국들은 2035년까지 60% 이상의 감축을 목표로 달리며 새로운 녹색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우리도 ‘2035 NDC’를 지역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대구는 ‘걷기 좋은 도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하철과 전기·수소 버스를 중심으로 대중교통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승용차 이용을 줄이는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낡은 건물은 ‘그린 리모델링’을 통해 에너지가 새지 않는 똑똑한 건물로 바꿔야 한다. 경북 지역은 ‘녹색 혁명’의 최전선이 되어야 한다. 포항의 철강 산업은 수소로 쇠를 만드는 기술을 도입해 세계 최고의 친환경 제철소로 거듭나야 하고, 동해안은 바람과 원자력을 이용한 청정에너지의 보물창고가 되어야 한다. 농촌에서는 논물을 관리해 메탄가스를 줄이고, 가축분뇨를 에너지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 앞에는 10년이라는 ‘골든타임’이 남았다. 2035년, 대구·경북이 대한민국 탄소중립의 심장으로 힘차게 뛰고 있을지, 아니면 시대의 흐름에 뒤처져 숨을 헐떡이고 있을지는 바로 지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12-11

'TK통합 불씨'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일 대구·경북(TK) 행정 통합과 관련해 “이럴 때(대구시장 공석)가 찬스 아닙니까”라고 언급하자,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이에 화답하는 메시지를 내놨다. 이 대통령은 이날 지방시대위원회 업무보고에서 TK통합 논의가 대구시장 궐위로 지연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이럴 때 오히려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다는 역발상을 제시했다. 이 지사는 이와 관련 9일 SNS를 통해 “행정통합은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고 다극적 균형발전 모델을 만드는 국가적 과제다. 대구·경북의 생존과 미래가 걸린 일”이라면서 “성공의 열쇠는 낙후 지역 문제를 포함한 균형발전 방안을 국가가 선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정부가 행정 통합 때 TK, PK, 호남, 충청 단위로 대기업 그룹을 하나씩 옮기면 된다는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행정통합이 가능해지려면 정부 차원에서 대기업 지방이전과 같은 전향적인 유인정책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지사는 특히 ‘경북이 대구에 흡수될 것’이라며 행정통합에 부정적 여론이 높은 경북 북부지역을 언급하면서, 정부가 이 지역의 해묵은 현안인 동서5축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남북9축 고속도로 같은 핵심 SOC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이 지사는 이러한 국토 균형발전에 대한 국가적 약속이 전제된다면 TK지역은 어느 지방정부보다 먼저 통합을 추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지난해 10월 TK행정통합안에 서명한 이후 내년 7월 1일을 ‘대구경북특별시’ 출범일로 정하고 통합 논의를 진행해 왔다. 그러나 경북 북부권 주민들의 반발이 큰데다, 홍준표 전 시장이 대선 출마를 이유로 조기 사퇴해 사실상 추진 동력을 상실한 상태다. 대구시는 현재 행정통합을 장기과제로 전환했으며, 지난해 6월부터 운영해온 행정통합추진단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무산될 위기에 놓인 TK행정통합이 이 대통령의 ‘발상의 전환’과 이 지사의 화답으로 논의 불씨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기대된다.

2025-12-10

경북 1인가구 39%, 맞춤형 정책 나와야

우리나라 1인가구 수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 발표 자료에 의하면 작년 기준 우리나라 1인가구는 처음으로 800만가구를 넘어섰다. 전년 같은 기간보다 2.8%(21만6000가구) 증가했다. 전체 가구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6.1%다. 2019년 처음 30%를 돌파한 후 지속 증가세다. 연령대별로는 70세 이상이 19.8%다. 작년 기준 대구와 경북의 1인가구도 가파른 증가세다. 대구는 1인가구가 37만가구로 전체의 35.5%로 조사됐다. 1년 전보다 0.8%포인트 증가했다. 경북은 1인가구가 45만가구다. 전체의 38.9%로 전국 17개 시도 중 다섯 번째 높다. 특히 경북은 60세 이상 1인가구 비중이 46.7%로 나타나 고령층의 절반 가까운 가구가 혼자 산다. 1인가구 증가 원인은 복합적이다. 결혼을 기피하는 사회적 추세와 저출산, 경제력 부족, 사별, 이혼 등 다양하다. 문제는 1인가구가 노령층에 국한되지 않고 청년층에서도 늘어난다는 점이다. 1인가구가 사회 전반의 새로운 흐름으로 정착하고 있어 이에 대한 맞춤형 대책이 나와야 한다. 도농복합 도시인 경북은 고령층의 독거와 도시의 청년 독거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중 구조를 띈다. 노인층의 빈곤과 청년층의 취업문제 등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정밀한 대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보다 고령화가 빠른 일본의 사례를 보면 1인가구 증가는 고독사와도 직결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일본에서는 매년 수만명이 고독사하고, 세상을 떠난 뒤 한달이상 지나서야 자택에서 발견되는 고독사도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국가데이터처 조사에서 우리나라 1인가구의 절반은 “외롭다”는 응답을 했다. 경제적 이유로 주말에도 혼자 놀며, 여가활동으로 동영상 콘텐츠 시청을 가장 많이 한다고 했다. 1인가구가 뉴노멀로 자리를 잡아가는 시대다. 복지체제 전반의 재설계가 필요하다. 주거, 복지, 세제 등 많은 분야에서 1인가구와 사회가 연결되는 사회안전망 형성에 노력해야 한다. 지자체 차원에서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2025-12-10

법관의 양심, 믿을 수 있나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적는다. 사법독립의 원칙처럼 보이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의문이 생긴다. ‘헌법과 법률’은 공개된 객관적 기준이 맞지만, ‘양심’은 개인의 내면이 아닌가. 법적 판단에 주관적 요소가 개입할 위험성을 헌법 조문이 버젓이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사회에서 사법불신은 반복되어 왔다. 정치사건, 재벌관련 사건, 권력형 비리에서 ‘판사의 양심’이 과연 공정했는가 싶은 의심이 따라붙었다. 판사도 인간이다. 학연, 지연, 이념과 무관할 수 없다. 개인의 경험과 가치가 판단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면, 그 주관성을 어떻게 통제하고 공개하며 객관화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양심’ 개념에는 이를 견제할 장치가 없다. 판결에는 법리만 남고, 뒤에서 작동한 양심과 가치판단에 관한 설명은 사라진다. 양심은 기록되지 않으며 검증할 방법도 없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미국은 헌법 어디에도 ‘양심’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 판례(precedent)와 정당한 절차(due process)가 핵심이다. 판사의 판단이 개인의 내면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공개된 판례 체계와 충돌하지 않도록 구조적 제약을 둔다. 영국은 판사의 주관 대신 합리성(reasonableness)을 외부 기준으로 요구하고, 이해관계 신고와 회피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용한다. 독일 역시 판사교육과 법리체계에서 ‘양심’을 강조하지 않고, 비례성, 기본권, 법치의 원리 등 실증적 원칙을 적용한다. 개인적 도덕감정보다 공개가능한 법리기준이 중심이 된다. 주요 법치국가들은 이렇게 ‘양심’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공개된 원칙과 구체적 절차로 사법신뢰를 확보한다. 우리 헌법 제103조의 ‘양심에 따라’는 법적인 검증 또는 견제장치가 없는 불확정적인 개념이다. 양심이라는 이상을 강조하기 전에, 그 이상을 객관적으로 보증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사법독립을 말하면서도 국민이 법원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다. 양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주장과 강변만 남지 않을까. 헌법의 해당 문구를 다시 살펴야 한다. 법관의 독립은 객관적 기준과 실증적 절차로 보장할 일일 뿐 내면적 자의적 양심으로 보장할 일이 아니다. 판결의 공개성과 예측 가능성도 확보해야 한다. 주요 판결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시민이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판사의 이해관계 공개와 시민참여 감시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판사가 공적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라면, 양심을 감시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AI판사 도입논의가 등장한 것도 결국 같은 문제에서 비롯된다. 양심이라는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무엇을 제거하고 일관적이며 통제 가능한 수단을 확보하자는 요구다. 인공지능이 모든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최종적으로 사람의 ‘양심을 믿어달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는 시대는 마감해야 한다. 양심은 개인의 내면이고, 법은 사회적 약속이다. 사법의 신뢰는 고상한 단어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며 확인이 가능한 제도에서 나와야 한다. ‘법관의 양심’이라는 표현을 신화적 기대에서 구체적 현실로 끌어내는 작업이야말로 대한민국 사법개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2-10

멸치육젓

소금꽃 환한 염전에서 눈 부신 햇살 누리는 것 내 뜻대로 가능할까, 불가능이 가능한 곳에서 맑은 하늘을 본다 포항 어느 식당에서 멸치육젓을 만나 나는 환호하며 몸을 떨었다, 그 집을 평생 신뢰한다 맛있게 먹었다고 아첨하지 않으며 발효라 치장하며 시간을 옹호하지는 않겠다 시간을 쟁여 응축된 저 묵은 시간 그윽하게 젓가락으로 침범하는 발랄한 도발 은둔(隱遁)의 지존(至尊)은 강호(江湖)에 즐비하다 텔레비전에 나와 요리하는 것들 혹은 미슐랭, 천한 허영의 표본들은 껍죽거리지 마라 장독에 유배되어 그늘 아래 묵혀둔 시간이 암흑에 가까운 시절이었지만 봉숭아가 이웃이 되어 좀 좋았지 잘 견디어, 불현듯 당신과 조우(遭遇)하여 약간의 양념, 가령 고춧가루와 잘게 썬 고추와 다진 마늘의 데코레이션으로 완성된 멸치육젓은, 그러나 아내는 딸의 임신 중에도 하지 않은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나 나는 행복했고 아내는 지극히 불행한 상황을 눈썹 세우고 지켜 본다 남편은 돌연변이이자 몬도가네라 한다 그런 극단적으로 상반된 풍경이 못내 즐겁다 저건 사람의 음식이 아니야, 거칠게 반항하는 아내에게 곱창 먹는 너보다 낫다고, 항변한다 공감하지 못해도 이해는 필요하다 서민의 음식이라 일차원적으로 평가하고 폄하하는 주둥아리에는 똥 한 바가지가 딱이다 이런 비유가 서글픈 일이지만, 일상을 지탱하고 뛰어넘는 하나의 축(軸)이 있어, 시대를 초월하는 이음새의 장치를 마련하고 싶어서 섬세하게 대가리를 자르고 뼈를 발라내며, 세로로 길게 찢어 숭고하게 먹는 멸치육젓, 그 시간에 감사한다. ….. 멸치육젓을 꺼내면 보통의 사람들은 썩었다고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 깊은 발효에 내재된 시간의 융숭함을 짐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짜기도 하다. 그 먼 시간을 이기려면 그 정도의 소금은 필수다. 생멸치가 얼마나 부드러운 생선인지 만져보지 않으면 모른다. 마른 멸치만 아는 것은 땅만 알고 바다를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탓할 수 없다. 아무려면 어떠랴. 나에게는 최고의 밥반찬이다. 밥 익을 때 데친 양배추를 함께 먹는다면 참 달고 깊다. 거칠고 소박함이 우리에게는 옳다. 본질에서 멀어지지 않으므로 장식된 삶을 최소한 살지 않는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12-10

부석사

들어간 병실에는 그녀를 덮고 있던 이불의 끝자락이 그녀의 흐느낌만큼이나 들썩였다. 그녀의 병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는 약봉지가 그녀처럼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일어나 앉은 그녀의 부은 얼굴은 몇 년 전 행복해하던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게끔 하였다. 남편의 폭력과 유산. 부석사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실컷 울었다는 듯이 이불을 밀치고 일어나 푸석한 얼굴로 부석사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젊은 그녀가 이렇게 털고 일어나 준 것이 고마워 아무 말 없이 길동무로 따라나섰다. 오르는 길목엔 젖은 연초록의 잎들이 비에 젖어 싱싱해 보였고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사과들이 빗속에서도 달짝지근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내린 비로 사과밭 앞에는 작은 도랑이 생겨 물은 무심히 흐르고 있었고 빗물은 흘러갈 뿐 본래의 것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와 내가 우산을 쓴 채 오르막을 거쳐 천왕문을 지났다. 천천히 걸어도 그녀는 힘들어 보인다. 삶의 모든 희망을 상실한 채 모든 것을 두 손에서 내려놓은 것처럼 텅 비어 버린 표정이다. 지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다고 그녀는 느낌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지, 그로 인한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 때문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는데 돌아온 것은 고통뿐인 지금,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지금 그녀가 그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 을 느낀다면 그녀는 성불(成佛)할 지도 모를 일이다. 타인에게 마음을 다 주지도 못하고, 이해타산(利害打算)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부석사를 오르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자문자답하다 긴 계단 앞에 서서 숨을 고른다. “선묘가 의상을 위해 목숨을 바쳐 용이 되었다면 의상 대사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사랑하지 않았을까?” 뜬금없는 소리에 그녀를 바라본다. 아마도 이해(理解)를 바라지 않고 한 남자에게 목숨 걸고 사랑한 것이 스스로 선묘와 자신이 비슷하다고 생각한 것처럼 느껴졌다. 선묘와 의상조사와의 사랑 이야기는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부석사에 남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사랑하는 이의 안전을 염려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선묘의 행동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어리석은 이를 일깨우고자 하더라도 긴 세월 속에 묻혀 사라진 것에 로맨틱한 이야기 한 토막을 덧붙인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자신을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누군가에게 몽땅 주기만 한 것이 사랑이라면 받는 누군가는 얼마나 부담스러울 것인가.’ 혼자 생각에 젖어 계단을 오르자 목어와 북이 소리 내어 울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생겨나서 괴롭고, 존재해서 괴롭고, 존재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괴로우며, 사라지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데 나는 저 목어와 북을 쳐서 모든 것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 아니 나 자신만이라도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기를 바라며 내 속의 북을 울리고 싶다. 내린 비로 웅덩이 가득 물이 차인 곳에 연꽃이 환하게 피어 있다. 연꽃 가까이 손을 가져가던 그녀가 무슨 생각에서일까. “기다려 볼래. 그러다 보면 그의 마음이 다시 나에게 돌아올지도 몰라.” 가늘디가는 바람 소리같이 그녀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의상을 사랑했던 선묘가 용으로 변해 사모하는 임을 위해 드러누워 있다는 대웅전 계단 어느 곳에도 그들은 존재하지 않고, 멈추었던 비는 다시 내려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무량수전 기와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큰 강을 이룰 것처럼 느껴졌다. 대웅전 뒤 곁엔 땅에조차 내려앉지 못하는 큰 바위가 있으니 선묘의 사랑이 의상조사의 가슴을 사랑으로 감화시키지 못하여 아직도 좌불안석(坐不安席)인가?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혼잣소리로 중얼거린다. “사는 것이 부석(浮石)인 것을.” /배문경 수필가

2025-12-10

이문열의 ‘시인’을 다시 읽다

서가에 박경리, 박완서, 양귀자, 강석경, 김형경, 권지예 등의 소설책은 따로 분류되어 있었다. 젊은 날 가난한 주머니 사정으로 200원 짜리 삼중당문고 소설로 허기를 달랬다. 그 후 소설책 정도는 내 맘대로 살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워졌을 때, 마치 젊은 날의 그 허기와 갈증을 달래는 의식처럼 매달 한두 권씩 소설책을 샀다. 공부하다 머리가 지끈거리면 맛난 음식 몰래 탐식하듯 소설을 읽었다. 이 책들은 과거 연구실에 전공 관련한 책들이 빼곡한 서가에서는 한켠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서재에서도 가장 눈에 잘 띄는 쪽에 문 앞에 배치해 두었다. 작년에 오랜만에 산 한강의 소설들도 함께 있었다. 공부 압박감이 없으니 이젠 내 마음대로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으니 참 좋다. 이미 읽었던 것들이지만 뭐든 한 권을 뽑아 머리맡에 던져두고 잠들기 전, 또는 아침에 눈뜨자마자 몇 장씩 읽는다. 대부분의 소설은 몇 장씩이 아니라 거의 밤샘용이다. 마치 몰래 먹는 단맛의 유혹 같은 소설이기에 한 번 입속에 넣었다 하면 멈추기가 어렵다. 소설책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눈에 띄는 이문열의 ‘시인’이었다. 내가 주로 사 읽었던 소설이 여성소설가의 것이었는데 이문열이라? 꺼내 펼쳤더니 그의 친필 사인이 있었다. 맞다. 2009년 가을 영양 두들마을 그의 광산서사를 찾았다가 너른 서재에서 두어 시간 귀한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소설의 주인공인 김삿갓의 시집도 서가를 뒤져 찾았다. 김삿갓의 시편들은 가끔씩 강의용으로 사용한 적이 있어 함께 읽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예전 읽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이문열의 문장은 참으로 찬탄하게 만든다. 곱씹고 줄치고 싶을 만큼 웅장한 문장들이었다. 허구와 사실이 뒤섞인 김삿갓의 파란만장한 서사를 ‘허구적 평전’으로 재구해낸 것은 바로 그의 필력이라는 확정을 새삼 하게 됐다. “세상에 대놓고 그 이유까지를 드러낼 수 없으되, 그는 또 자신에게 세상을 원망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꾸짖고 욕할 권리가 있으며 조롱하고 이유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자 그 믿음은 절로 그를 부패한 지배 계층이나 그 보조 계급보다는 자신과 같이 소외당한 계층 쪽으로 다가가게 했다. 거기 따라 그의 시도 당연히 변했다. 문예의 형식도 제도의 일부로 본 그는 먼저 형식 면에서 대담한 파격과 변조를 시작했다.” 이렇게 단 몇 개의 문장으로 김삿갓, 아니 희대의 천재시인 김병연을 요약해 버릴 정도로 이문열의 통찰은 잘 벼린 칼날 같았다. 실제 나도 김삿갓의 천재적 희시(戱詩) 속에 번뜩이는 익살과 풍자와 장난이 좋아 읽는데, 이렇게 단칼로 정리해 두는 이문열이었다. 이번에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된 것, 그리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든 건, 이 소설이 김병연의 ‘허구적 평전’일 뿐 아니라 이문열의 ‘위장된 자서(自敍)’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좌익사상과 행보로 연좌제에 묶여 사범대학을 졸업했어도 교사가 될 수 없기에 중퇴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좌절했던 젊은 날의 이문열이 김병연과 많이 겹쳤다. 조선의 시인으로 현대의 소설가로 우뚝한 둘이기에 더욱 닮았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12-10

겨울이 되면 통증이 더 심해지는 이유

겨울이 되면 평소보다 통증을 더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기온이 떨어지면 목이 뻣뻣해지고 어깨가 단단하게 굳으며 허리, 무릎, 손목 같은 관절까지도 예민해지는데 이를 단순히 날씨 탓이라고만 넘기기에는 그 안에 많은 생리학적 기전이 숨어 있다. 핵심적인 요소는 혈류와 근막이다. 우리 몸은 추위에 노출되면 체온 유지를 위해 말초 혈관부터 빠르게 수축시키는데 이 과정에서 근육과 관절 주변으로 공급되는 혈액량이 줄어들고 산소 공급이 떨어지며 노폐물 배출도 지연된다.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으면 근육은 빠르게 굳는다. 굳은 근육은 스스로 풀리지 못해 더 단단해지고 그 긴장 자체가 통증 수용체를 자극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평소 같으면 별문제 없이 지나가던 작은 자극도 겨울에는 훨씬 크게 느껴지는 이유다. 근막의 변화는 더욱더 상황을 악화시킨다. 근막은 근육을 싸고 있는 얇은 막이 아니라 온몸을 하나의 네트워크처럼 연결하는 연부조직이다. 근막은 온도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기온이 떨어지면 섬유가 수축하면서 그 안에 있던 작은 긴장이 전체 근육군으로 확대된다. 결국 움직임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근육의 미세한 긴장까지도 증폭되어 통증으로 이어진다. 특히 목과 어깨 등은 근막이 넓고 민감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온도 변화에 따른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다. 겨울에 목과 어깨 통증이 증가하는 이유가 바로 근막의 온도 반응 때문이다. 자율신경계의 변화도 통증을 증가시킨다. 추위는 교감신경을 자동으로 활성화시킨다. 교감신경이 항진하면 혈관이 더 수축하고 근육 긴장은 더 높아진다. 혈류는 줄어들고 조직의 움직임은 더 제한되고 통증 수용체는 예민해진다. 추위가 교감신경을 항진시키고 이로 인해 혈관 수축, 근육과 근막 긴장으로 인해 통증 증가라는 악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겨울 통증 치료의 핵심은 단순하다. 굳은 조직을 풀고 막힌 곳의 혈액순환을 잘되게 하고 항진된 자율신경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근육층이나 힘줄을 정확히 찾아 침과 부항 약침으로 치료하면 즉시 혈류가 회복되고 근육의 긴장이 빠르게 풀린다. 매선은 수축된 근막을 직접적으로 이완시키며 반복된 긴장으로 틀어진 정렬까지도 잡아줄 수 있어 겨울철 통증 환자에게 특히 효과적이다. 어느 한 부위를 풀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근막 네트워크 전체가 유연성을 되찾으면서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다. 치료 후 환자들이 몸이 따뜻해졌다거나 가벼워졌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체온 때문이 아니라 조직의 기능이 회복된 결과다. 샤워 후 찬 공기 맞으며 오래 서 있는 행동은 혈관이 수축되어 통증이 악화된다. 장시간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면 근막이 긴장되므로 주기적으로 목 어깨를 가볍게 움직여 주는 것이 좋다. 하루에 1~2분만 움직여도 혈류가 크게 개선되는 경우가 많다. 겨울에 통증이 심해지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아니고 몸이 갑자기 나빠져서도 아니다. 우리 몸이 추위에 반응하는 아주 정상적인 생리 과정이다. 이 원리를 이해하면 겨울철 통증 관리가 훨씬 명확해진다. 결국 겨울 통증은 기온 변화 → 혈류 감소 → 근막 수축 → 자율신경 항진이라는 연결 고리에서 시작되고 이를 반대로 풀어주면 치료가 된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12-10

조진웅·박나래·조세호…쓸데없는 연예인 걱정

TV나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익숙한 유명 연예인 몇 명이 곤혹스런 상황에 빠졌다. 어린 시절 저지른 범죄가 드러나거나, 자신의 매니저에게 갑질을 하거나, 조직폭력배와 어울렸다는 이유에서다. 조진웅은 한 언론매체에 의해 소년범 전력이 알려져 배우 생활을 그만두게 생겼다. 그 여파가 심상찮다. 조씨를 두둔하는 이들은 “한 때의 실수가 인간의 미래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고 하고, 반대측에 선 사람들은 “지금이라면 징역 5년 이상을 받았을 악질 범죄자가 공인으로 활동하면 되겠는가”라고 비난한다. 조씨의 범죄 사실을 최초 보도한 매체는 고발까지 당했다. 박나래의 경우도 마찬가지. 박씨의 행위가 경솔하며 악의적이라고 지적하는 시청자가 있는가 하면, 매니저의 폭로에 어떤 의도가 있는 듯하니 사실 관계를 잘 살펴봐야 한다며 박씨를 옹호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폭력배로 의심되는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인해 데뷔 이후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조세호는 현재 출연하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사실이 아닌 부분은 바로 잡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는 국제 정세, 끊임없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여야 정치권, 회복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서민들의 어려운 경제생활 등 내외적인 문제가 가득한 2025년 한국의 겨울. 지금 나라가 처한 입장이 첩첩산중에 설상가상인데, 이제 배우와 개그맨이 얽힌 사건·사고를 두고 국민이 서로 다투는 일까지 겪어야 하나? 누군가 그랬다. “세상 쓸데없는 게 떼돈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연예인 걱정”이라고. 어쨌건 이래저래 참으로 심란한 시절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12-10

한 엄마의 절규 ‘국가는 왜 청년을 지켜주지 못했는가’

대한민국은 국방의 의무를 헌법적 가치로 말하고, 그 가치는 병역이라는 형태로 청년들의 삶 속을 구속한다. 그러나 정작 그 의무를 수행하는 청년들에게 국가는 무엇을 돌려주고 있는가. 필자는 지난 2년 동안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도 매우 불편한 방식으로. 큰아이는 군 복무 중 오른손을 다쳤다. 체력단련 중 손목이 비정상적으로 꺾였고, 극심한 통증과 부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군의관은 X-ray만 찍고 “단순 염좌”라는 추정진단을 내렸다. 정형외과 전문의도 아닌, 마취통증의학과 전공의였다. 그 진단은 전역할 때까지 재검토되지 않았고, 아이는 손이 뒤로 젖혀지지 않는 명백한 기능 이상을 안고도 군 생활을 버티며 만기 전역했다. 이것은 의료 실수이자 군 조직의 구조적 한계가 한 청년의 신체를 파괴한 사건이다. 도서 지역 부대에는 정형외과 전문의도 없고, CT·MRI도 없다. 진단이 불확실하면 외진을 보내는 것이 상식이지만, 군의관은 그 기본조차 지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원망해 무엇하랴.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전역 후 손 기능은 더 나빠졌고, 그 사실을 부모인 내가 알 때까지 2년이 걸렸다. 민간병원 정밀검사에서 드러난 것은 오래된 골절 불유합, 골괴사, 결국 ‘자가 뼈이식 수술’을 받아야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태였다. 주치의는 영구 장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말이 나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러나 더 큰 충격은 국가보훈처였다. 대구지방보훈청에 국가보훈대상자(재해부상군경) 신청을 했지만, 그들은 군의 오진인 ‘단순염좌’ 추정진단 기록을 그대로 믿으며 1년 만에 ‘기각’을 통보했다. 정밀검사도 없이 미세 골절이 없었다는 사실을 보훈청 스스로 입증할 수 없음에도, 그 책임을 청년에게 돌렸다. 필자는 부모로서 군의관의 오진을 증명해야 했다. 당시 중대장, 소대장, 행정관, 함께 복무했던 동료 사병들의 진술서를 6장 받았다. 제대하고 2년 만에 상급자 동료들의 연락처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아들의 뼈이식 수술을 집도한 정형외과 전문의의 소견서 및 각종 영상 검사 판독 결과지를 첨부하여 대구지방보훈청장을 피의자로 하여 이의신청과 행정심판을 동시에 제기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또다시 억장이 무너졌다. 행정심판에서 다시 기각 처분을 내렸고,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청문회를 단 일주일 앞두고, 군 내부 문서인 ‘공모상병 인증 기록’, ‘부대장 면담기록’ 등을 청구인이 직접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군 문서는 민간인이 발급받을 수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외면한 것이다. 담당 사무관은 “우리는 이런 서류를 안내할 의무가 없는 부서입니다. 부대에 요청했는데 아무것도 오지 않았습니다.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안내하지 않아도 되지만 호의로 말씀드린 거예요.” 행정절차법 제8조는 “행정청은 민원인이 절차에 필요한 사항을 알 수 있도록 충분히 안내해야 한다.” 라고 규정한다. 법이 정한 ‘의무’를 공무원이 ‘호의’로 격하시키는 순간,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개인의 기분에 맡긴 것이 된다. 필자는 직접 국방부와 해병대에 연락하며 정신없이 뛰어야 했다. 결국 필요한 기록 없이 청문에 임해야 했고, 청문 하루 지난 날 해병대 관계자는 “필요한 모든 군 자료를 이미 중앙행정심판위원회에 보냈다”고 했다. 즉, 군부대에서 보낸 자료를 담당 사무관이 놓친 것이다. 그렇게 청문회가 열리고 1달 반이 지났다. 그리고 드디어 대구지방보훈청에서 한통의 통지서가 왔다. “직무 수행이나 교육훈련과 관련한 상이로 인정하여 국가보훈보상대상자(재해부상군경)로 결정한다”고. 행정심판은 기각이었지만 이의신청에서는 중앙심판위원회가 아이의 부상을 재해부상군경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 결정은 하나의 사실을 증명한다. 초기 ‘기각’부터 잘못된 것이다. 대구지방보훈청은 끝까지 자신의 ‘기각’ 판단을 고수했지만, 결국 상급기관인 중앙심판위원회의 판단은 그 결정이 허술했음을 드러냈다. 이 사건은 아들 한 명의 문제가 아니다. 군 의료와 보훈 행정이 얼마나 부실하고 거만한지를 그대로 노출한 사례다. 국가는 말한다. “국가유공자 예우는 국가의 책무다.” 그러나 정작 ‘유공자’의 문 앞에 서기까지 국가는 끝없이 요구한다. 증명하라. 증명하라. 또 증명하라. 그러지 못하면 끝까지 네 책임이다. 묻고 싶다. 국가는 젊은이들에게 국가를 위해 국방의 의무 운운하며 희생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 군인의 건강한 신체는 개인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의무다. 이제 그 의무를 이행할 차례는 국가다.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작가

2025-12-10

호박전

어떤 기억은 시도 때도 없이 삶의 틈으로 스며들어 내가 오래전 잊었다고 믿었던 자리에 조용히 자리를 펴고 앉는다. 나에게 호박전은 그런 기억의 문을 여는 열쇠와도 같다. 사소하고 투박한 음식에 불과하지만 그 음식이 지닌 따뜻함만큼은 내 생애를 따라 부유하며 계절의 냄새처럼 되살아난다. 결혼하기 전, 아버지는 해마다 초가을이 기울어질 때쯤이면 누런 늙은 호박을 하나씩 들고 들어오셨다. 마당에서 호박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다독이는 듯했다. 아버지가 호박을 가를 때마다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어쩐지 집 안의 고요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장독대의 숨결처럼 어디 선가부터 천천히 일어나는 생명의 소리 같았다. 아버지는 늘 같은 방식으로 호박의 속살을 퍼냈다. 숟가락을 깊이 밀어 넣은 뒤 흩어지지 않도록 살짝 비틀고 그러고는 한 줌씩 그릇에 고이 담았다. 그 단순한 동작에 담긴 인내와 다정함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부엌으로 들어가면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후라이팬 위에서 호박전이 반질한 표면을 드러낼 때 집은 한순간에 축제 같은 온기를 머금었다. 아버지는 완성된 호박전을 내 앞에 놓으며 항상 같은 말을 덧붙였다. “뜨거우니 조심해서 먹어라.” 그 말은 사실 ‘너를 위해 만들었다’는 아버지의 또 다른 말이라는 것을 나는 어른이 되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결혼 후 집을 떠난 뒤, 호박전은 내 삶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누구도 내게 해주지 않았고, 스스로 찾아서 해 먹을 마음도 없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아니면 그 시절의 냄새를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호박전을 잊으려 했다. 마치 그 맛을 잊어버리면 그 시절도 사라질 거라 착각하듯.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둔 친구가 내게 호박전을 해 주었다. 어설픈 모양이었지만 젓가락을 들려는 순간 밀려드는 감정에 숨이 멎을 듯했다. 기름 냄새와 부드러운 감촉, 달큼한 향이 한꺼번에 스며들었다. 호박전을 한 입 베어 넣는 순간 아버지가 호박을 긁던 모습, 그릇을 기울여 반죽의 농도를 맞추던 손끝, ‘뜨거우니 조심해’라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던 얼굴이 겹겹이 떠올랐다. 그 기억의 정경이 너무도 선명하여 마치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가슴이 찌르르 저려왔다. 음식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하다. 말보다 앞서 마음을 건드리고 논리보다 먼저 어떤 진실을 들춰낸다. 한 접시의 음식에는 누군가의 손길과 시간, 그가 품고 있던 생각들, 꾹 눌러 담은 마음의 결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리움도, 체념도, 오래된 사랑도, 때로는 잃어버린 것들의 그림자까지도 그 속에 담겨 있다. 사람의 삶이란 결국 수많은 맛과 향을 통과하며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식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먹고, 서로의 마음을 삼키고, 서로의 과거를 나누며 살아간다. 아버지의 호박전도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한 끼의 음식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에게 건넨 가장 온순한 형태의 사랑이었다.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 어설프게 감추어 둔 애정, 부드럽게 감싸려 했던 마음이 모두 그 한 장의 노란 전 속에 스며 있었다. 내가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을 건너오는 동안 아버지는 너무 많이 늙어 있었다. 이제는 아버지의 호박전을 맛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음식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손길과 숨결, 눈빛을 함께 떠올린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장면들은 여전히 따뜻하게 익어가며 때로는 내 삶의 한 귀퉁이를 밝혀준다. 인생의 어느 날, 내가 누군가를 위해 호박전을 부치게 된다면 아버지가 내게 건넸던 그 마음의 결을 조금은 닮아 있기를 바란다. 음식은 결국 이야기다. 음식을 만든 사람의 역사와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순한 언어다. 호박전의 노란 빛이 내게 그러했듯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삶에서 건너온 이야기를 먹고 자라며 다시 누군가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조용히 건네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누런 호박을 가르던 아버지의 손등 위에 떨어지던 햇빛처럼, 그 모든 이야기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사르르 익어가고 있다. /김경아 작가

2025-12-09

건강도시 랭크된 수성구

대구 수성구는 비수도권 최고 학군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2024년의 경우, 수성구로 순 유입된 초등학생 수가 서울 강남구에 이어 전국 2위를 마크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 입학 시즌이 되면 많은 학부모들이 수성구 쪽으로 이사를 계획한다. 교육열이 높은 학군지로 정평이 나 있다. 학원가가 대거 밀집해 있어 ‘대구의 대치동’이란 별명도 붙었다. 우수한 교육 기반 등 도시 인프라가 좋은데다 전국 유일하게 4대 특구(기회, 교육발전, 교육국제, 문화)로 지정이 된 곳이다. 대구지역의 부동산 경기 침체에도 유일하게 가격 상승세를 유지하는 지역이다. 당연히 집값도 가장 비싸다. 조선일보와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이 전국 252개 기초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주민 건강을 조사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대구에서는 수성구가 유일하게 건강도시 전국 순위 11위에 포함됐다. 1위는 과천시, 2위 서울 강남구, 3위 서울 서초구 등으로 밝혀졌다. 건강도시 상위 30군 데 중 서울 6군데, 경기도 6군데, 비수도권에서는 경남이 7군데가 포함됐다. 또 비수도권 중에는 부산 2군데, 대구·경북·대전·광주·전남·충남 등은 모두 1군데만 포함됐다. 경북에서는 포항시 북구가 유일하게 포함됐는데, 순위는 30위다. 이번 조사에서 눈길을 끈 대목은 건강은 외적 요소인 자연 환경보다 생활습관과 건강 인프라 기반이 좋은 지역이 유리하다는 것이 확인됐다는 점이다. 대구 수성구는 전국 순위로 11번째지만 비수도권에서는 창원 성산구와 부산의 강서구, 동래구에 이어 4위로 조사됐다. 수성구는 교육도시이자 문화예술도시, 부촌도시 등의 이미지에 건강도시란 또 다른 명성을 얻은 셈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12-09

신서혁신도시, 언제 대구의 성장동력 될까

국가 공공기관 10곳이 입주해 있는 대구시 동구 신서 혁신도시가 조성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교육 인프라 부족 등으로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2015년 혁신도시가 완성될 당시에는 상주인구 2만2000명이 목표였지만, 현재(6월말) 인구는 1만6818명에 그치고 있다. 혁신도시 거주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지다 보니, 이사 오는 시민들이 갈수록 줄어드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본지 기자가 혁신도시 중심가에 있는 상가들을 취재한 결과, 평일 점심시간에는 공공기관 직원들로 인해 다소 붐비는 곳이 있지만 저녁과 주말에는 대부분 상가가 손님이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혁신도시 내 상가를 둘러보면 먼지가 쌓여 있는 빈 점포가 즐비하다. 한국부동산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대구혁신도시의 상가 공실률은 35.3%에 이른다. 상권 침체는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 혁신도시들이 모두 겪는 현상이다. 김천과 나주 혁신도시의 상가 공실률은 40%를 넘는다. 대구시민들이 혁신도시 거주를 꺼리는 것은 우선 일반계 고등학교가 없고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혁신도시에는 1만4000㎡의 학교부지가 있지만 10년째 빈터로 남아있다. 현행법은 학교 설립 시 ‘학령인구’를 반영해 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학령인구가 계속 줄어드는 대구의 경우 고등학교를 더 이상 지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대구시교육청이 혁신도시와 가까이 있는 정동고등학교 이전을 추진하고 있지만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현 정동고 부지 매각이 난항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혁신도시 입주 주민들은 일반계 고교가 없으니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면 이사 갈 생각을 한다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비수도권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2차 공공기관 이전에 속도를 내겠다고 밝히고 있다. 2차 공공기관 이전 때에는 꼭 현재의 혁신도시 실태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공공기관 이전이 해당 지역의 성장동력이 되려면 교육·의료·문화 등 각 분야별 생활 인프라가 반드시 갖춰져야 한다.

2025-12-09

대기업 1400조 투자, 5극 3특의 마중물로

김경수 지방시대위원장은 지난 8일 열린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한미관세 협상 후 대기업이 국내에 투자키로 한 1400조원은 5극 3특의 마중물이 돼야 할 것이란 취지의 보고를 했다. 김 위원장은 “정부가 균형발전을 목표로 추진하는 5극 3특의 가장 핵심과제는 지역경제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달려 있다”며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권역별 대기업 투자를 통해 전략산업과 성장엔진을 육성하는 것”이라 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균형발전은 국가적 생존전략”이라고 말할 정도로 수도권 집중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이날 이 대통령도 “수도권 집중이 이어지면 향후 엄청난 비효율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언급도 했다. 국토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 이상 살고 있고 100대 기업의 80% 이상, R&D 투자의 70% 이상이 수도권에 쏠려 있는 한 국가 균형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현 정부뿐 아니라 역대 정부가 균형발전을 내걸고 각종 정책을 펼쳤으나 수도권 일극 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이재명 정부 역시 과거와 다른 패러다임을 불러오지 않으면 역대 정부의 실패를 따라갈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김 위원장의 대기업 1400조 지방투자는 획기적 발상이다. 대기업의 투자가 지방으로 향하도록 유도하는 데는 그만한 유인책이 필요하다. 기업이 원하는 입지를 제공하고, 주택과 교육 등 정주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특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대기업의 투자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1400조원의 지방투자가 균형발전을 시동 걸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5극 3특은 전국을 5대 초광역권과 3개 특별자치도로 나눠 지방정부가 독자적으로 균형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선 지방정부에 대한 재정 및 권한 확대는 필수다. 동시에 경제 효과를 높일 대기업의 지방투자를 적극 유인해야 한다. 현 정부 균형발전의 모델이 될 5극 3특의 성공은 과감한 패러다임 대전환에 있다. 대기업의 집중 투자가 해답일 수 있다.

2025-12-09

한계에 부딪힌 ‘장동혁 리더십’

사분오열된 국민의힘 내에서 장동혁 대표의 리더십과 거취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강성지지층에 기댄 그의 행보로 당 지지율이 20%대에서 정체되자 불만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당장 보수 안방인 대구·경북(TK) 최다선(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이 지난 8일 대구 언론인 모임에서 장 대표를 겨냥해 “지금처럼 윤 어게인 냄새가 나는 그런 방향은 맞지 않다”고 직격했다.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TK 중진까지 장 대표의 노선 전환을 압박한 것이다. 지난 3일에는 원내사령탑인 송언석(김천) 의원도 원내부대표들과 함께 “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통감하고 있다”며 장 대표와 엇갈린 메시지를 냈다. 소장파가 중심이 된 40여 명의 의원들도 송 원내대표와 같이 반성 메시지를 냈다. 반면, 장 대표는 의원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비상계엄은 민주당의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며 계엄에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원조 친윤으로 불리는 윤한홍 의원(3선)조차 지난 5일 장 대표가 주재하는 당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판한다“면서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인연,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의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말했다. 당내 일각에선 장 대표의 거취 문제를 압박하는 기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당의 경쟁력 지표는 당연히 지지율이다. 현재 국민의힘 지지율은 TK지역을 제외하고 전 지역에서 큰 차이로 민주당에 뒤지고 있다. 당이 윤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계엄의 늪’에 갇히면서 민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게 주된 이유다. 이에 대해 주 부의장은 “정치의 방향은 민심인데 자기편을 단결하는 과정에서 중도가 도망간다면 그것은 잘못된 방법”이라고 장 대표를 비판했다. 장 대표가 취임한지는 벌써 100일이 넘었다. 본인 스스로 그동안 이반된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장 대표는 취임 이후 윤 전 대통령 면회에 이어 “우리가 황교안이다”는 등의 주장을 펴며 제1야당을 스스로 고립시켜왔다. 민주당의 입법폭주가 도(度)를 넘고 있음에도, 대다수 국민이 야당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는 것은 장 대표의 이런 태도 탓이 크다. 국민의힘의 내분과 무기력증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러한 제1야당의 상황은 여권의 노골적인 삼권분립 위협과 입법폭주에 오히려 동력이 되는 형국이다. 정국이 이런 식으로 흐르면 국민의힘을 내란정당으로 규정해 당을 해산시키겠다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말이 실제상황이 될 수도 있다. 국민의힘 일부의원들이 최근 장 대표에게 ‘내년 2월 설 명절 전’이란 데드라인까지 제시하며 노선 변화를 주문했다는 소리가 들린다. 늦어도 설 명절 전까지는 당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야 중도층 민심을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공감가는 말이다. 국민의힘이 제1야당에 걸맞은 지지율을 확보하려면 하루빨리 다른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 우선 107명 의원 모두가 한목소리로 국민에게 계엄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당 혁신비전을 제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