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은 이순신 장군 탄신일(誕辰日)이다. 충무공은 음력 1545년 3월 8일 태어났는데, 그날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해마다 4월 28일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음력 생일을 기준으로 행사를 진행하면 해마다 날짜가 바뀌기에 상당한 난관이 기다리는 까닭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 28일은 다가왔고, 충무공의 사후(死後) 기록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음력 1592년 4월 13일 시작된 임진왜란은 충무공이 관음포 앞바다에서 펼쳐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음력 1598년 11월 19일 종결된다. 15만이 넘는 왜군이 시작한 전란(戰亂)이 충무공의 죽음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는 그의 마지막 말은 오늘도 우리를 선연하게 일깨우는 우레 비처럼 다가온다.
이충무공의 죽음과 관련해서 아직도 몇 가지 설이 떠돌고 있다. 자살설과 암살설, 은둔설 그리고 전사설이 그것이다. 숙종 시절 선비 서하(西河) 이민서(1632-1688)는 ‘김덕령 전기’를 남긴 바 있다. 거기서 이민서는 충무공이 갑옷과 투구도 없이 노량해전에 임했다고 쓴다. 죽기 살기로 도주하는 왜군을 평상복 차림으로 막아선 충무공의 흉중이 자못 궁금하다.
암군(暗君) 선조는 울부짖는 백성을 버리고 도주에 도주를 거듭하면서도 민심의 향방에 예민한 촉수를 가진 자였다. 저 하나 살자고 명나라 신종(神宗)에 요동 성주 자리를 구걸했던 비루한 군주 선조. 그자는 의병장 김덕령을 반역죄로 몰아 친히 국문하고, 장(杖) 130대로 구국의 선봉장을 때려죽인다. 그 뒤에 그자의 의심을 받은 충무공은 온갖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런 까닭에 충무공은 최후의 결전에서 차라리 왜적의 손에 죽는 것이 오히려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암군의 질시(嫉視)에 가문 전체가 당할 화근을 미연(未然)에 방지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2001)는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 장편소설이다. 암살설과 은둔설은 설득력이 미약하기에 이 글에서는 제외한다.
정조는 실학자 유득공을 집필 책임자로 삼아 ‘이충무공전서’ 8권을 1795년 출간한다. ‘이충무공전서’는 이순신에 관한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기록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따르면, 충무공은 명나라 진린 제독의 거듭된 만류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노량해전에 임했다고 한다. 최후의 해전에서 적을 완전히 섬멸하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천만한 선봉을 자임했다는 것이다.
지극한 혼전(混戰) 중에 적선에서 날아온 유탄(流彈)에 충무공은 겨드랑이를 맞았다고 한다. 부하 장수 송희립이 총상을 입자 그의 상태를 확인하려 이동하던 차에 불의의 일격을 당했다고 전한다. 다시는 이 나라에 왜놈들의 사악한 발길이 닿지 못하도록 그들을 절멸하려 했던 충무공의 우국충정이 끝내 그를 사지(死地)로 내몬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불과 53년 남짓한 세월을 살면서 이토록 길고도 깊게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인물이 또 있을까, 생각한다. 조선왕조 518년을 생각하면, 세종 임금 이도(李裪)와 충무공 이순신만이 떠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따사로운 봄날 아침 잠시나마 충무공의 탄생과 최후를 생각해본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