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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침략으로 얼룩진 중앙유럽의 2000년 역사

마틴 래디의 ‘중앙유럽 왕국사’는 다양한 민족과 제국의 교차를 통해 형성된 중앙유럽의 복합적 정체성과 역사적 변화, 그리고 이 지역의 유럽 평화에 미친 결정적 역할을 분석한 역작이다.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자리한 중앙유럽의 2000년 역사를 통찰력 있게 조명한 역작 마틴 래디의 신간 ‘중앙유럽 왕국사’(까치)가 출간됐다. 이 책은 침략과 정복의 피상적 서술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과 제국이 교차하며 형성된 복합적 공간으로서의 중앙유럽이 어떻게 변화와 통합을 주도해왔는지 규명한 역작이다. 저자는 중앙유럽을 지리적 명칭이 아닌 ‘민족 상호작용의 현장’으로 재정의하며, 고대 로마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천하는 정치적·군사적 경계 속에서 이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을 추적한다. 중앙유럽의 역사는 고트족, 훈족, 아바르족, 슬라브족, 몽골족, 오스만족 등 수많은 민족의 유입과 융합으로 직조됐다. 4세기부터 시작된 이민족의 침공은 신성 로마 제국의 분열을 초래했고, 1000개가 넘는 소국가들이 각자의 자치를 누리는 다원적 체제를 낳았다. 특히 헝가리와 폴란드는 몽골 침략 이후 독일계 이주민을 적극 수용하며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다. 이주민들에게 부여된 자치의 권리는 마을 단위부터 왕국에 이르기까지 의회 형성의 토대가 됐으며, 중세 중앙유럽은 “공동체 정부와 공화주의적 실험의 본산”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강력한 왕조가 등장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정치는 점차 위로부터의 통치로 대체됐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로마법을 활용해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통치 체계를 확립했으며, 17세기 관방학의 발전은 국가의 국민 통제력을 강화했다. 이는 이후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중앙유럽은 종교개혁과 민족주의, 클래식 음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다양한 종파가 공존하는 관용적 분위기가 조성됐고, 그림 형제 같은 학자들은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며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한편 빈과 헝가리에서는 음악가가 단순한 배경음악 연주자가 아닌 청중의 경배를 받는 예술가로 격상되며 교향곡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제1·2차 세계대전은 이 지역의 다문화적 공존을 파괴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탄생한 신생국들은 단일 민족주의를 추구하며 소수 민족을 억압했고, 20세기 중반 소련 점령기에는 민주화 열망과 정치적 혼란이 교차했다. 오늘날에도 중앙유럽은 정치적 부패와 외부 세력의 위협에 직면해 있지만, 저자는 이 지역이 유럽 전체의 평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슬라브 동유럽학과 교수인 저자 마틴 래디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헝가리·루마니아 역사에 대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중앙유럽사 전문가다. 그는 이 책에서 폴란드, 체코, 우크라이나, 스위스 등 과거 중앙유럽 왕국들의 공통점인 민주주의 전통과 귀족 문화뿐 아니라 인종 청소, 스탈린주의 등 어두운 역사까지 균형 있게 다룬다. 특히 “중앙유럽은 단순히 지리적이 아니라 정치·문화적으로 유럽의 중심”이라며 전 세계의 이해관계가 얽힌 현대 사회에서 이 지역의 안정이 갖는 의미를 역설한다. 해외에서 출간 직후 월 스트리트 저널은 “마틴 래디는 길고 복잡한 과거의 가닥을 능숙하게 풀어내 끔찍한 전쟁터이자 서구 민주주의의 요람으로서의 중앙유럽을 조명한다”고 평했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대중성과 학문적 성취를 갖춘 최고의 책“이라 극찬했다. 다만 방대한 시대를 아우르는 만큼, 독자에 따라 일부 장은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책 말미에 약어와 인명 색인이 상세히 수록돼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빠르게 확인하며 읽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또한 각 장마다 핵심 주제를 명확히 분리해 독자가 내용을 단계별로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기에 용이하게 구성돼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13

내리막에 들어선 기축통화의 미래···최후의 승자는

미국 하버드대 국제경제학 교수이자 국제통화기금(IMF)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케네스 로고프는 신간 ‘달러 이후의 질서’(윌북)를 통해 달러의 위상과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미래를 심층 분석했다. 2008년 금융위기와 유럽 부채위기 등을 예측한 경제 석학으로서, 그는 이번 책에서 “달러 패권은 이미 정점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단언하며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의 도래를 예고한다. 로고프 교수는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달러가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과정을 추적한다. 현재 달러는 글로벌 외환 거래의 90%, 원유 결제의 80%를 차지하며 압도적 지위를 유지 중이다. 그러나 저자는 “2015년을 정점으로 달러의 독점적 영향력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근거로는 미국 GDP 대비 글로벌 경제 비중 감소, 천문학적인 국가부채(5경 원 이상), 트럼프 재선으로 인한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을 제시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속한 경제 연합체 브릭스(BRICS)의 위안화 결제 확대, 페트로위안화 시도 등 중국의 도전이 본격화되고 있다. 로고프는 “트럼프 2기 정부가 관세 장벽을 높이면 오히려 달러 이탈 속도를 가속화할 것”이라 경고한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자본이득세 인상(최대 20%)은 글로벌 자본 유출입을 위축시킬 위험 요소로 지적된다. 그는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가 달러를 대체할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한다. “법정통화와 민간 통화의 경쟁은 정부가 규칙을 정하는 게임”이라며 규제 권한이 없는 암호화폐가 장기적으로 승리하기 어렵다고 분석한다. 다만 스테이블코인 등 새로운 결제 수단은 지하 경제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연간 1조 달러에 달하는 국가부채 이자 부담과 정치적 극단주의는 달러 신뢰도를 갉아먹는 내부 요인으로 작용 중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동맹국과의 균열을 초래하며 달러 블록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로고프 교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을 “달러 이후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로 꼽았다. 트럼프 정부가 한국 조선업에 관세 폭탄을 예고한 것에 대해 “한국은 조선업 선도국인데 왜 협력 대신 징벌적 조치를 취하느냐”며 비판했다. 한국 경제가 암호화폐 기반 결제 시스템에 과도하게 노출될 경우 금융 안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몰락과 달리 한국이 혁신과 개방경제로 선진국 반열에 오른 점을 높이 평가하며, 향후 미중 갈등 속에서 균형 잡힌 전략을 주문했다. 로고프는 달러가 단기적으로 급격히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러나 “과거 70년의 특권적 지위는 점차 축소될 것”이라며 다극화된 통화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피할 수 없다고 예측한다. 이에 따라 각국은 달러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낮추면서도, 미국과의 관계 재정립을 고민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고 지적한다. 로고프는 “달러 이후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은 동맹국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동시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새로운 금융 질서에서 독자적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함을 역설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13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국립세종수목원 전시원 실장이자 국내외 유수의 정원을 설계해온 조경가 박원순씨가 신간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은행나무)를 출간했다. 이 책은 그가 국내 일간지에 연재한 칼럼 ‘박원순의 도시의 정원사’를 재구성한 것으로, 정원이 인류 역사 속에서 권력·미학·철학과 어떻게 교류해왔는지, 현대 사회에서 도시와 환경 문제에 어떤 해법을 제시하는지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박 작가는 정원을 “땅을 캔버스로 삼은 예술이자 수학·과학·건축이 융합된 문명의 집결체”로 정의한다. 단순히 식물을 모아놓은 공간이 아니라, 인류가 이상향을 구현해온 상징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에덴동산, 무릉도원, 타지마할, 베르사유 정원 등 역사 속 정원은 권력의 표현이자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활용됐다. 르네상스 정원의 대칭적 구조나 영국 풍경식 정원의 유기적 배치는 미적 감각과 과학적 계산의 결합으로 탄생했으며, 식물 배치를 통한 생태계 관리 등 실용적 지혜도 담겼다. 현대 정원은 도시민을 위한 휴식처로 진화했다. 뉴욕 센트럴파크,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정원 등이 대표적이며, 최근에는 커뮤니티 가든, 스마트 정원으로 확장돼 사회적 약자 포용과 도시 열섬 현상 완화에 기여한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의 샹젤리제 녹지화 프로젝트처럼 글로벌 차원에서도 탄소 중립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정원은 생태적 대안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끼, 고사리 등 원시 식물은 공기 정화와 정신 건강 개선 효과가 입증되었으며, 생물다양성 보존과 트라우마 치유에도 도움을 준다. 박 작가는 “정원은 인간성 회복과 생태계 복원의 출발점”이라며 “비록 작은 공간이라도 정원을 가꾸는 일은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의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13

자연과 인생을 시로 엮다… 김선암 시인 첫 시집 출간

2017년 계간 ‘한국문학작가’로 등단한 김선암(62) 시인의 첫 시집 ‘역사가 걸어가네’(시산맥)‘가 나왔다. “어느 날 문득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니 아득하게 멀리도 왔다. 지나간 일들이 떠오른다”는 ‘시인의 말’처럼 이 시집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성찰적 시선들로 꽉 차 있다. 시집은 ‘역사가 걸어가네’, ‘홍매’, ‘물의 정신’, ‘초가’, ‘나무’ 등 총 5부로 구성되며, ‘돌아올 수 없는 여행’부터 ‘나무의 삶’까지 60여 편의 작품이 실렸다. 저기 한 할머니/쉼표를 짚고 걸어가시네/한평생 연인같이 지내 온/논밭 길을 옆에 두고 백조처럼/지나가시네 우아하게//저기 한 할아버지/물음표를 들고 지나가시네/한평생을 친구같이 지내 온/한 많은 지게를 벗어 놓고 학처럼/걸어가시네/고고하게//매끈하던 이마에는/지난 세월의 흔적들을/주상절리처럼 곱게 새기시고/거북이 마실 가듯/지나가시네/쉬엄쉬엄“(‘역사가 걸어가네’ 전문) 시집 첫머리 시 ‘역사가 걸어가네’는 흙길을 걷는 노인의 모습에서 개인의 역사가 공동체의 기억으로 확장됨을 은유한다. 할머니의 ‘쉼표’와 할아버지의 ‘물음표’는 삶의 완결과 미완을 상징하며, 백조와 학의 걸음은 논밭과 지게를 내려놓은 노년의 품격을 드러낸다.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이마와 느린 걸음은 역사의 점진적 흐름을, 주상절리를 빌려오는 행위는 공동체적 연대를 떠올리게 한다. 김선암의 시 세계는 자연경관, 가족 관계, 불교적 사유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시인은 연꽃, 단풍, 억새 등 자연의 풍경을 감각적 이미지로 묘사하면서도, 이를 인간 내면의 풍경이나 사회적 맥락과 연결짓는다. ‘침수정’에서는 고향 영덕의 정자 주변 풍경을, ‘숲의 고민’에서는 숲 속 생태계를 인간 사회에 빗대어 표현한다. 또한 ‘불 꺼진 방앗간’에서 유년 시절의 추억을, 참기름 기계에서 떨어지는 “엄마의 동동구리무 냄새”로 환기시키는 등, 일상의 사물을 통해 시간의 층위를 겹쳐 놓는다. 시집 곳곳에는 불교적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다. 시인은 ‘현재’, ‘과거’, ‘미래’, ‘천년’을 넘나드는 시간 개념을 활용해 생명의 지속성과 자연의 순환을 탐구한다. 동시에 ‘하염없이 가던 길을 간다’는 ‘시인의 말’에서는 삶의 여정에 대한 묵묵한 수용이 읽힌다. 공광규 시인은 해설에서 “김선암의 언어는 화려함 대신 침묵의 여운을, 직설적 표현 대신 이미지의 중첩을 선택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각자의 답을 찾도록 이끈다”며 "그의 시가 전하는 것은 결국 ‘걸어가네’라는 현재 진행형의 동사처럼, 끊임없이 나아가는 생의 리듬일 것“이라고 평했다. 경북 영덕군 달산면 출신인 김선암 시인은 부산에서 학업을 마친 후 삼성전자와 한국후지제록스에서 근무하다 현재 대구에서 사무기기 업체 ㈜대경사무기를 운영하며 문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2년 팔거백일장 운문 부문 우수상, 2024년 곰솔문학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제41회 영남서예대전 특선을 받는 등 전통 서예 분야에서도 예술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토벽문학회, 대한수묵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02

21C 미국의 패권은 지속될 것인가

영국 역사학계 거장 앤서니 G. 홉킨스(케임브리지대 명예교수)의 미국 역사 궤적을 새롭게 해석한 ‘미 제국 연구(American Empire: A Global History·너머북스)’가 출간됐다. 145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치밀한 분석을 통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신화를 체계적으로 해체하고, 미국을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나란히 놓으며 세계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한 이 책은 미국사의 기존 통념을 뒤흔드는 획기적인 저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존 미국사 서술은 유럽의 군주제·신분제·제국주의와 대비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앞세운 ‘독립 정신’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홉킨스는 미국이 영국 등 유럽 열강과 유사한 제국적 경로를 밟았음을 논증한다. 1783년 독립 이후에도 미국은 영국과 경제적·정치적 유대 관계를 유지했으며, 남북전쟁 무렵까지 실질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종속 상태였다고 분석한다. 특히 19세기 말에야 산업화와 내전 경험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미국은 ‘근대 시기 최초의 주요 탈식민 국가’로 재정의된다. 홉킨스는 18~20세기 세계화를 초기 세계화(18세기 말), 근대 세계화(19세기 말), 탈식민 세계화(20세기 중반)라는 세 단계로 구분하며, 각 시기마다 제국이 세계화의 핵심 주체였음을 강조한다. 초기 세계화는 18세기 말 유럽 열강의 군비 경쟁과 재정 위기가 식민지로 확산되며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근대 세계화는 19세기 산업화와 국민국가 형성기에 영국 중심의 자유무역 체제가 확장되며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본격화됐다. 탈식민 세계화는 2차 대전 이후 민족자결 운동과 다민족적 세계화가 부상하며 영토적 제국 모델이 붕괴되고, 미국은 군사기지 설치와 소프트 파워를 통한 ‘비전통적 제국’으로 전환했다. 홉킨스는 이 책에서 단순한 정치·경제적 분석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과 지성사적 접근을 통해 미국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탐구한다. 월트 휘트먼, 마크 트웨인, 에밀리 디킨슨 등의 작품을 분석하며, “남부의 면화는 비아프라에 미친 석유의 영향과 같다”, “알제리는 워싱턴의 하와이였다”와 같은 비교사적 통찰을 제시한다. 이는 제국의 형성이 단순히 물리적 지배가 아닌 문화적 동화와 착취의 복합적 과정임을 드러낸다. 홉킨스에 따르면, 미국의 패권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25년간에 불과했다고 구분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지배적 패권을 누렸고, 냉전 시기 미국은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일시적 단극 체제를 구축했으나,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의 개입 정책(베트남 전쟁, 이라크 침공 등)은 대부분 실패로 귀결됐다. 특히 “미국의 권력은 유럽 제국들의 긴 역사와 비교할 때 단기적이었으며, 타국에 대한 통제력도 제한적이었다”는 분석은 미국을 ‘새로운 로마’나 ‘새로운 영국’이 아닌, 탈식민 세계에서 한계를 맞은 제국으로 규정한다. 저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를 “영토 제국 건설과는 다른, 공세적 경제 제국주의의 한 예”로 평가하며, 국제적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미국이 스스로 발에 총을 쏜 셈”이라며 장기화된 무역 전쟁과 국제적 긴장이 초래할 위험을 경고한다. 탈식민 세계화 이후 형성된 초국가적 질서 속에서, 미국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적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협력과 타협만이 평화적 공존을 위한 길임을 역설한다. ‘미 제국 연구’는 미국사를 국가 내부의 서사가 아닌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재구성한 역작이다. 미국 독립전쟁부터 이라크 전쟁에 이르는 3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제국의 흥망성쇠가 세계화와 동전의 양면임을 입증한다. 저자는 불행히도 미국이 타협보다는 대결을 선호하는 전통이 있다고 지적한다. 2025년 트럼프의 당선으로 촉발된 국제 무역에 대한 급진적 도전은 현재 장기화된 무역 전쟁과 높아지는 국제적 긴장으로 이어지는 ‘긴 겨울’의 시작점이라고 그는 말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30

美·中 경제 착취 수법 해부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착취 수법을 내부자의 관점에서 낱낱이 밝혀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긴 책 ‘경제 저격수의 고백(20주년 완전판)’(민음인)이 새롭게 출간됐다. 2004년 초판 이후 전 세계 38개 국어로 번역돼 200만 부 이상 판매되고 73주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이 책은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현 시점에서 국제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분석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번 개정판에는 최근의 지정학적 변화를 반영한 12개 장이 추가됐으며, 기존 내용도 현실 정세에 맞춰 전면적으로 보완됐다. 1970년대 미국 대형 컨설팅사의 수석 경제 전문가였던 저자 존 퍼킨스는 에콰도르,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경제 저격수(Economic Hit Man)’로 활동했다. 경제 저격수란 개발도상국에 과도한 부채를 쌓아 경제·정치적 종속을 유도하는 전문가를 의미한다. 그는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군사적 압박 대신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을 앞세워 신흥국에 부채 덫을 놓은 전략(제1의 물결)부터, 2001년 선진국까지 확장된 금융 조작(제2의 물결), 그리고 중국이 이를 역이용해 신실크로드로 맞서게 된 과정(제3의 물결)까지, 50년간 지속된 착취 시스템의 본질을 내부자의 시각으로 명쾌하게 파헤쳤다. 퍼킨스에 따르면 경제 저격수 전략은 ‘부채’, ‘공포’, ‘불안감’, ‘분열과 정복’이라는 네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제1의 물결(1970년대~1990년대)은 베트남 전쟁 패배 후 미국은 군사적 위협 대신 WB·IMF를 통해 개도국에 대규모 차관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요해 자원 통제권과 정치 개입권을 확보하는 수단이 됐다. 제2의 물결(2001년~)은 9·11 테러 이후 금융 시스템을 무기로 선진국까지 포섭하며 달러 패권을 강화했다. 제3의 물결(2010년대~)은 중국이 인프라 투자와 대출을 통해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를 포섭하며 ‘내정 불간섭’ 원칙과 신실크로드 비전으로 미국의 헤게모니에 도전한다. 개정판은 최신 사례를 통해 전략의 파괴적 결과를 조명한다. 스리랑카는 중국으로부터 빌린 막대한 부채로 인해 함반토타 항구 운영권을 넘겨주며 전략적 요충지를 상실했다. 베트남·인도네시아에서 추진된 인프라 프로젝트는 부실 시공으로 사회적 혼란을 초래했다. 세르비아가 중국 자본으로 건설한 발전소와 제철소는 환경 오염과 지역 갈등을 유발했다. 퍼킨스는 “빚으로 종속된 국가들은 결국 특정 국가의 외교적 입장을 강요받는다”며 이것이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닌 정치적 예속으로 이어진다고 경고한다. 그는 경제 저격수 전략을 “소수 엘리트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시스템”이라고 규정한다. 부채 확장과 자원 착취가 초래한 환경 파괴, 불평등 심화, 전쟁 위험은 현대 사회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죽음의 경제’라고 비판한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 정책과 중국의 경제적 부상은 이러한 착취 구조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출판사 민음인은 “‘경제 저격수의 고백’은 글로벌 경제질서를 움직이는 착취 메커니즘을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개정판에 추가된 최신 분석은 경제 권력의 작동 방식을 직시해야만 착취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경고를 선명하게 전달한다”고 평가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30

인류 번영은 멸종의 씨앗이 되었나

영국왕립학회 과학도서상 수상자인 영국의 저명한 고생물학자 헨리 지는 신간 ‘인간제국 쇠망사’(까치)에서 인류의 흥망성쇠를 거시적 시각으로 조망한 역작을 통해 “인류는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도발적 주장을 펼치며 이를 체계적으로 논증한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종(種)으로서 번영의 정점을 찍었지만, 로마 제국이 그랬듯 화려한 성공이 오히려 쇠퇴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책은 ‘로마 제국 쇠망사’를 집필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의 통찰을 인류사에 적용해 “한 종이 멸종하는 시점은 정점에 올랐을 때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는 충격적 메시지를 전한다. △제1부: 인류의 부상-정점으로 향하는 질주 저자는 약 5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인간 종들과 경쟁하던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직립보행과 도구 사용, 사회적 협력 능력으로 무장한 인류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를 비롯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유일한 인간 종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농업혁명(약 1만 년 전)은 인구 폭발과 문명 발전의 기폭제가 됐다. 식량 생산이 안정화되면서 인구는 급증했고, 기술과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성취가 ‘생태계에 대한 과도한 착취’의 시작이었음을 지적한다. 농업은 토양 침식과 생물 다양성 감소뿐 아니라 질병의 온상이 되었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제2부: 쇠락의 징후-번영의 대가를 치르다 인류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저자는 기후 위기, 자원 고갈, 감염병 확산을 현대 문명의 3대 위기로 규정한다. 저자는 1만 년 만에 처음으로 둔화된 인구증가율을 예로 들며, 우리가 몰락의 길 어디쯤에 와 있는지 파악하려면 번영의 절정 직후부터 나타난 균열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농업혁명이 풍요와 인구증가를 이끌었지만 동시에 건강 문제, 사회적 불평등, 작물 종 다양성 감소 등 예상치 못한 희생을 강요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출생률 감소, 정자 수 감소, 기후변화와 자원 고갈 등 복합적 위기들이 사회 구조 전반을 뒤흔드는 경고 신호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이미 시작된 인구증가율 하락세가 금세기 말까지 인구 급감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이러한 추락이 현실화되면 인류는 절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농업의 역설과 인구 감소, 환경 파괴의 악순환이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농업은 풍요를 가져왔으나 정착 생활로 인해 질병이 만연해졌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출산율이 급감하며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마을이 필요하지만, 노벨상 수상자나 혁신가를 배출하려면 수십억 인구의 문명이 필요하다”는 말로 문명 쇠퇴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화석 연료 의존과 탄소 배출이 지구 온난화를 가속화하며, 이는 극단적 기상 재해와 생태계 붕괴로 이어진다. 저자는 “자연에 이토록 광범위한 위협을 가한 종은 인류뿐”이라며 “멸종의 낫질이 더 빨라질 것”이라 강조했다. △제3부: 탈출구 모색-우주에서 미래를 찾다 헨리 지는 인류가 멸망을 피하려면 새로운 진화적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구 내에서 종 다양화를 이루기에는 이미 호모 사피엔스가 단일 개체군으로 고착화된 상태다. 그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우주 진출이다. 저자는 “우주 식민지 개척을 1~2세기 안에 준비해야 한다”며 “달이나 화성 등 다른 행성에 고립된 개체군을 형성해 새로운 종으로 분화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 강조한다. 이는 SF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의 역사가 위기 속에서 길을 찾아온 기록”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이라고 덧붙인다. 다만 이 과정은 막대한 기술적 도전과 사회적 결단을 필요로 한다. “우주 개척은 말처럼 쉽지 않다. 아직 태동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신기술과 인간이 가진 남다른 상상력과 생명력만이 그 돌파구를 열어줄 수 있다. 생명의 역사는 곧 위기 속에서 길을 찾아온 기록이며, 우리 눈앞에 펼쳐진 상황도 그러한 위기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23

“복지와 돌봄은 시민의 권리” 한국 경제의 판을 새로 짜다

지금 대한민국은 저성장과 양극화가 구조화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신뢰의 해체와 공동체 붕괴, 기후 위기와 생태적 파국의 위기 앞에 놓여 있다.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시장경제 체제와 질주하는 과학기술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결과, 주거와 일자리, 교육과 의료, 먹거리와 돌봄, 신뢰와 공동체, 소득과 미래 설계의 기회 등 당연하고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이 더 이상 보장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신간 ‘기본경제 기본사회’(다할미디어)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저성장, 양극화, 공동체 붕괴 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혁신적 사회경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인 경기연구원 기본소득연구단장 출신으로 청년기본소득 정책 설계에 참여한 유영성 박사는 이 책에서 “시장경제의 한계를 넘어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재정립하자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유 박사는 프롤로그에서 “효율과 성장만을 추구해온 신자유주의적 질주가 주거, 일자리, 교육, 의료 등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파괴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OECD 최고 수준인 43.2%(2022년 기준)에 달하며, 청년들은 주거비와 학자금 대출에 시달리고 중년은 돌봄과 노후 준비의 이중 부담을 떠안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은 ‘기본경제’와 ‘기본사회’라는 두 개념을 제시한다. 기본경제는 주거, 식량, 의료, 교육, 돌봄, 에너지 등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인 영역을 공공적이고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재설계하자는 제안이다. 단순히 복지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구조 자체를 전환해 시장 실패 영역을 보완하겠다는 것이다. 기본사회는 신뢰, 연대, 존엄을 핵심 가치로 삼아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기본경제를 토대로 한 사회 구조로서,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의 연대를 조화시키는 것이 목표다. 이 두 개념을 실현하기 위해 책은 6가지 실천 전략을 제시한다. 기본소득은 모든 시민에게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현금을 지급해 삶의 안전망을 구축한다. 기본자산은 생애 초기 단계에서 교육, 주거, 창업 등에 필요한 자산을 제공해 자립 기반을 마련한다. 기본금융은 사회대출, 신용회복지원 등으로 금융 소외계층을 포용한다. 기본서비스는 교육, 돌봄, 건강 등 공공인프라를 보편적으로 제공한다. 사회적경제는 협동조합, 지역기업 등을 통해 공동체 중심의 경제활동을 촉진한다. 지역화폐는 지역 내 소비 순환을 강화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한다.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 ‘기본경제:삶의 기반을 다시 짜다’에서는 시장경제의 한계와 기본경제의 필요성을 분석한다. 제2장 ‘기본사회: 관계의 구조를 다시 세우다’에서는 공동체적 가치 회복을 위한 사회 모델의 방향을 제시한다. 제3장 ‘통합: 기본경제와 기본사회, 하나의 구조’에서는 두 개념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한다. 제4장 ‘실천: 기본경제와 기본사회의 구체적 실현’에서는 앞서 언급한 6가지 전략을 세부적으로 다룬다. 유영성 박사는 “기본경제와 기본사회는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사회 계약”이라고 말한다. 그는 “주거, 교육, 돌봄 등 삶의 필수 요소가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아닌 모두의 권리로 인식되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정책 설계부터 시민 참여까지 다층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23

400년 세계사 속 혁명과 반동의 변증법

최근 기술 발전과 글로벌 팬데믹, 정치적 극단화로 인해 ‘역사의 진보’에 대한 회의론이 확산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미국 CNN 간판 국제 정세 프로그램 ‘파리드 자카리아 GPS’의 진행자이자 미국 대표 국제정치학자 파리드 자카리아가 출간한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부키)는 근대 400년의 세계사를 혁명적 변화와 그에 따른 반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현대 사회의 난제를 풀어낸다. 이 책은 네덜란드 혁명부터 현대의 정체성 혁명까지, 인류가 마주한 진보와 후퇴의 패턴을 분석함으로써 ‘혼돈 속에서도 역사는 전진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16세기 네덜란드 혁명은 종교개혁과 금융 혁신, 해상 무역의 결합으로 자유주의 실험의 원형이 됐다. 그러나 종교 갈등과 대외 전쟁이라는 역풍에 부딪혀 좌초됐다. 하지만 지역 자치와 기술 혁신의 성과는 영국으로 이전되어 명예혁명과 산업혁명의 토대가 됐다. 1688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왕정 입헌제를 수립한 명예혁명은 정치적 안정을 통해 영국을 실용적 국가로 변모시켰다. 이는 네덜란드의 제도와 사상을 수용한 결과였으며, 자본주의 세계화의 출발점이 됐다.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프랑스 혁명은 급진주의와 공포 정치, 나폴레옹 제국으로 귀결되며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유산은 미국에 영향을 미쳐 독립전쟁 승리와 민주공화국 모델 수립으로 이어졌다. 기계화와 도시화로 생활 혁명을 이끈 산업혁명은 노동 착취와 계급 갈등을 심화시켰다. 영국은 곡물법 폐지와 자유방임 정책으로 이를 극복하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자본·상품·아이디어의 국경 초월은 한국을 선진국으로 올렸지만, 외환위기와 양극화라는 역풍을 초래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경제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인터넷과 SNS는 지식과 참여를 민주화했으나, 음모론과 혐오 확산으로 사회적 분열을 가속화했다. 미국 사례에서 보듯, 온라인 연결이 오히려 개인을 ‘고독한 왕’으로 만들고 있다. 민권·여성·성소수자 운동은 진보를 이끌었지만, 젠더 갈등과 문화 전쟁을 촉발했다. 저자는 유럽의 세속화 물결과 미국의 정치적 부족주의를 예로 들며 정체성 정치의 양면성을 분석한다. 냉전 붕괴 후 중국·러시아의 부상으로 다극 체제가 재편되며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패권 경쟁이 발생했다. 저자는 한국을 “혁명과 역풍이 가장 압축적으로 교차하는 사회”로 규정한다. 세계화와 정보화의 최대 수혜국이지만 외환위기, 청년 실업, 온라인 혐오, 미·중 갈등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든 혁명은 진보와 반동의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말한다. 기술 발전이 정체성 변화를 일으키고, 이는 다시 사회 혁신을 요구하지만, 변화에 뒤처진 이들의 반발(백래시)이 반드시 따라온다. 따라서 역사적 교훈은 “변화 속도를 조절하고 역풍을 관리하는 것”이다. 자유방임적 세계화나 기술 신봉은 위험하지만, 폐쇄적 퇴행 역시 답이 아니다. 사회적 안전망 강화, 민주주의 제도 존중, 균형 잡힌 외교가 필수적이다. 이 책은 미국 출간 직후 아마존 역사, 정치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강력한 역사적 통찰’, ‘왜 어떤 나라는 성공하고 어떤 나라는 실패하는지 알려 주는 사상가’라는 극찬을 받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16

인간의 심리적 약점 교묘히 이용한 나치

30여 년간 나치 역사를 집요하게 추적해온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제작자 로런스 리스가 역사와 심리학을 결합해 나치와 인간의 어두운 심연을 파헤치는 신간 ‘나치 마인드-역사가 주는 12가지’(책과함께)를 펴냈다. 이 책은 나치의 부상에서 몰락까지를 심리학적 분석과 역사적 기록으로 재구성하며, 히틀러와 나치가 민주주의를 붕괴시킨 12가지 전략을 낱낱이 분석한다. 저자는 최신 신경과학 연구와 전범들의 증언을 통해 ‘나치의 범죄가 역사적 조건과 인간 심리의 취약성이 결합된 결과’임을 밝히며 나치즘이 남긴 잔재가 오늘날에도 위협으로 남아 있음을 경고한다. 리드는 나치가 세력을 확장하며 사용한 전략을 음모론 유포, 집단 갈라치기, 청년 세뇌, 공포 조장 등으로 정리한다. 특히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독일 국민의 굴욕감을 이용해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이데올로기를 구축했다. ‘등에 칼을 맞았다’는 피해의식을 부추기며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를 희생양으로 삼아 내부 결속을 다진 것이다. 나치의 권력 장악 과정은 치밀했다. 1933년 총리로 임명된 히틀러는 수권법을 통해 입법부를 무력화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저자는 ‘민주주의 절차가 어떻게 악용되었는지’ 보여주며, 권위적 리더십이 어떻게 대중의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켰는지 분석한다. 책은 나치 체제가 인간의 심리적 약점을 교묘히 이용했음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히틀러 유겐트와 독일소녀연맹은 뇌 발달 단계(전두피질 미성숙)를 악용해 충성도 높은 추종자를 양성했다. 또한 가스실 설계나 먼 거리에서 사격하도록 한 전술은 살인의 정서적 부담을 줄이는 심리적 트릭이었다. 폴란드 유대인에게 길바닥 청소를 강요한 굴욕적 행위는 ‘인지부조화’를 유발해 피해자를 무력화시키는 전략이었다. 저자는 이처럼 나치가 종족주의와 유사다윈주의를 앞세워 ‘강한 민족만이 살아남는다’는 이데올로기로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했다고 설명한다. 30년간 수집한 나치 전범들의 증언은 이 책의 핵심 자료다. 친위대원이었던 베른트 린은 “나치 시절이 독일에는 좋은 시대였다”고 주장했고, 돌격대원 볼프강 토이베르트는 홀로코스트 피해 규모를 축소하며 “부정적인 면보다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증언은 나치즘이 단순한 악행이 아니라 자기합리화와 책임 전가로 지속됐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비슷한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을 새로운 성찰로 이끈다. 나치는 패망했지만, 증오, 희생양 찾기, 극단적 민족주의 등 나치즘의 본질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리스는 “역사는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지만, 그 징후는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트럼피즘, 포퓰리즘, 소수자 혐오 등 오늘날의 갈등 구조에서 나치의 심리 전략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SNS를 통한 음모론 확산과 공포 정치는 나치가 사용했던 수법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16

팬데믹 후 심화된 글로벌 무질서의 기원

최근 몇 년간 세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패권 경쟁, 인플레이션과 공급망 붕괴 등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단순히 개별적 사건이 아니라, 에너지, 금융, 민주정치라는 세 가지 역사적 흐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책이 출간됐다. 케임브리지대 정치경제학 교수 헬렌 톰슨의 신작 ‘질서 없음-격동의 세계를 이해하는 세 가지 프레임’(윌북)은 120년 현대사 패턴을 관통하며 현재의 위기를 진단한다. 책의 1부 ‘지정학’은 석유 시대의 도래와 함께 미국이 패권국으로 부상한 과정, 자원 부족에 시달린 유럽 열강들이 중동을 각축장으로 삼은 역사를 추적한다. 특히 1956년 수에즈 위기 이후 독일이 러시아산 에너지에 의존하게 된 것이 NATO 내 분열을 초래했고, 이는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폭발했다는 분석을 제시한다. 저자는 “석유의 정치적 도구화는 현대 지정학의 출발점”이라며 에너지 수급 구조가 국가 간 갈등의 씨앗이 됐음을 강조한다. 2부 ‘경제’에서는 1970년대 오일 쇼크와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가 달러 중심의 불안정한 금융 시스템을 낳았고, 이로 인해 유로화 도입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발생했다고 설명한다. 또한 중국 경제의 부상, 미국의 견제 정책이 현재의 미·중 관세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2008년 금융 위기와 같은 반복적 위기가 금융 시스템의 근본적 결함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 이동이 ‘메이드 인 차이나’ 시대를 열었지만, 동시에 탈국가적 위기를 촉발했다”고 말한다. 3부 ‘민주정치’에서는 에너지·금융 변동이 국가의 과세 능력을 약화시켜 ‘경제적 국가공동체주의’를 붕괴시켰다고 분석한다. 시민의 경제적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이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극단 세력 지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왕정·귀족정·민주정 등 여섯 가지 정치 형태가 일정한 순서로 반복된다는 이론)’을 차용해, “현대 정치 체제도 성장과 쇠퇴를 반복한다”며 지정학·금융·민주정치 간의 피드백 루프가 위기를 증폭시킨다고 경고한다. ‘질서 없음’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다. 저자는 “현재의 위기는 수십 년 전부터 누적된 구조적 선택의 결과”라며, 단기적 사건보다 장기적 흐름을 읽는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과거 에너지 의존 구조가 폭발한 사례”로 해석하며, 독자들에게 미래 위기에 대비할 수 있는 지침을 제시한다. 출간 직후 라이오넬 겔버상과 파이낸셜 타임스 ‘올해의 책’ 후보에 오른 이 책은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복잡한 현대사를 명쾌하게 해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헬렌 톰슨은 영국 정치 팟캐스트 ‘토킹 폴리틱스’ 고정 패널이자 ‘가디언’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며 대중과의 소통에도 주력해왔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16

생명 진화서 AI 예측까지 미래를 설계하다

세계적인 화제작 ‘빅 히스토리(Big History)’ 창시자인 데이비드 크리스천이 신작 ‘빅 퓨처’(북라이프)에서 인류의 미래 예측 메커니즘을 집중 조명한다. 호주 매쿼리대 명예교수인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빅 히스토리’에서 우주론, 생물학, 역사학 등을 통합해 빅뱅부터 현재까지의 138억 년의 시간을 분석했었다. 그는 새 책에서 접근법을 확장해 이번에는 생명의 진화 전략에서 AI 예측까지 다양한 미래 사고법을 제시한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은 21세기 새로운 세계사로 불리는 지구사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그가 창시한 빅 히스토리는 우주론, 지구물리학, 생물학, 역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통합해 빅뱅(약 138억 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프레임워크다. 이번 신작에서는 이를 확장해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크리스천은 ‘빅 퓨처’에서 시간의 본질을 과학적·철학적 차원에서 재정의한다. 엔트로피(무질서도) 증가와 같은 물리적 법칙을 통해 ‘시간의 화살’ 개념을 설명하며,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시각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는 환경 변화에 즉각 반응하는 신호전달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식물은 확률적 전략을 통해 생존을 도모한다. 이러한 자연계의 메커니즘은 인류가 지속가능성을 모색할 때 참조할 수 있는 ‘자연의 미래 관리 시스템’으로 해석된다. 그는 또한 생명체의 진화적 적응 방식을 분석한다. 대장균은 유당 부족 시 효소 생산을 중단하고, 파리지옥은 단기 기억으로 먹이 포획 여부를 판단하며, 애기장대는 장기 기억으로 계절 변화를 인지해 개화 시기를 조절한다. 크리스천은 이와 같은 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인간의 예측 도구(점술, 통계, 과학적 모델링)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크리스천은 30~40억 년 후 태양의 밝기 증가로 지구 생명체가 멸종할 것이라는 천문학적 예측을 제시하며, 일론 머스크의 화성 식민지 계획을 성간 이동의 초기 단계로 해석한다. NASA와 스페이스X의 탐사 기술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생존 전략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크리스천은 시간과 미래에 대해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부터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와 신학자, 인류학자와 과학자들이 고심해낸 가설과 이론을 소개한 뒤, 이를 바탕으로 미래에 관해 생각하는 법, 이른바 ‘미래 사고(future thinking)’에 적용되는 근본 원리의 도출을 시도한다. 제1부 ‘미래를 생각하는 법’에서는 시간의 본질부터 파고든다. 제1장 ‘미래란 무엇인가?’는 결정론과 인과관계를 넘어 시간의 화살(엔트로피 증가 등)을 과학적·철학적 관점에서 재정의한다. 이어 제2장 ‘미래를 예측하다’에서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차용해 가상의 미래 지형도를 그리며, 예측의 한계와 가능성을 탐구한다. 제2부 ‘미래를 관리하는 법’은 생명체의 진화적 전략을 분석한다. 미생물부터 다세포 생물까지, 생명이 환경 변화에 대응해온 메커니즘(예: 대장균의 신호전달 체계, 식물의 확률 기반 생존 전략)을 통해 ‘자연의 미래 관리 시스템’을 조명한다. 이는 인간 사회가 지속가능성을 모색할 때 생물학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제3부 ‘미래를 대비하는 법’에서는 인류의 지적 도구가 미래를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추적한다. 언어를 통한 집단 학습, 기술의 발전, 통계적 사고의 등장 등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미래 예측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는지 살펴본다. 특히 점술에서 과학적 모델링으로 전환된 과정을 통해 현대 사회의 ‘미래학’이 가진 실용적 가치를 강조한다. 제4부 ‘미래를 상상하는 법’은 가장 도전적인 섹션이다. 기후 위기, 인공지능, 우주 확장 등을 종합해 2040~2100년의 시나리오, 1000년 뒤 인류의 진화, 우주 종말론까지 세 가지 시간 축에서 미래를 상상한다. “향후 수 세기 동안 태양계의 여러 위성과 행성, 소행성은 물론, 소행성이나 작은 행성만 한 특수 목적 우주선에도 식민지가 세워질 것이다. 아직 지구에 거주하는 인류를 위한 제조업도 그 근거지를 대거 우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351쪽)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09

15~17세기 동남아시아는 독자적 문화·경제 체계 가진 역동적 공간

‘대항해시대’를 논할 때 흔히 유럽 중심의 시각에 가려졌던 동남아시아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는 책 ‘대항해시대의 동남아시아’(글항아리)가 출간됐다. 20년 넘게 동남아시아를 연구한 석학인 저자 앤서니 리드(UCLA 동남아시아센터 초대 소장)는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사관의 왜곡을 넘어 15~17세기 동남아시아가 단순한 교역의 경유지가 아닌 독자적 문화와 경제 체계를 가진 역동적 공간이었음을 밝힌다. 그는 ‘대항해시대’ 대신 ‘교역의 시대’라는 용어를 제안하며, 이 지역이 세계사와 상호작용하며 구축한 통합적 역사를 재구성한다. 동남아시아는 지리적·문화적으로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다.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해안선, 울창한 열대림, 풍부한 수자원은 이 지역의 삶의 기반을 이뤘다. 육로 접근은 어려웠으나 해양 교통은 발달해, 계절풍을 활용한 안전한 항해가 가능했다. 이러한 환경은 지역 내 교역의 활성화로 이어졌다. 말레이어는 당시 영어처럼 무역 언어로 사용됐으며, 자바인·중국인·인도인 등 다양한 민족이 참여했다. 문화적 공통점도 뚜렷하다. 대다수 언어는 오스트로네시아족에서 비롯됐으며, 쌀·생선·야자를 주식으로 삼고 나무 기둥 위에 지어진 주상 가옥에서 생활했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두드러졌는데, 결혼과 이혼이 자유로웠고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다. 교역 중심 국가에선 여성 통치자도 등장했으며, 유럽 기록에 따르면 ‘남성들이 여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성기에 방울을 달 정도’로 남녀 관계가 평등했다. 이는 유교적 억압을 받은 동아시아 여성과는 대조적이다. 15~17세기 동남아시아는 세계 교역의 중심지였다. 말루쿠산 향료, 후추 등 고급 자원을 실은 중국·유럽 상선의 유입으로 번영을 누렸다. 1620년대 유럽의 연간 향료 수입량은 정향 300톤, 육두구 200톤에 달했고, 이윤율은 100%를 넘었다. 현지 상인들은 거대한 정크선을 운용하며 해상 무역을 주도했고, 도시들은 활기를 띠었다. 버마의 한 도시는 ‘열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도로’를 갖췄으며, 금화·엽전 형태의 ‘피치스’ 등 다양한 화폐가 유통되었다. 상업 계층인 ‘오랑카야’는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며 토착 귀족과 경쟁했다. 그러나 17세기 말 이 화려한 시대는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는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독점, 기후 변화로 인한 작황 악화, 글로벌 경제 위기 등이 겹치며 교역은 쇠퇴했다. 동남아시아는 ‘훔치는 것 외에는 생계 수단이 없는’ 빈곤 지역으로 전락했고, 서구 열강의 착취 구조 속에서 저발전의 낙인이 찍혔다. 서구 기록은 종종 동남아시아를 ‘미개한 땅’으로 묘사했지만, 이는 식민주의적 편견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지역은 창조적 적응력과 개방성으로 변화를 수용했다. 예를 들어, 말레이어는 무역 언어로 확산되며 다문화 교류의 매개체가 됐고, 현지 상인들은 유럽 기술과 자원을 활용해 이익을 극대화했다. 그러나 서구 종교(이슬람교·기독교)의 유입은 여성 문화를 파괴했다. 남성 중심의 경전 종교가 정착되며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배제됐고,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복식으로 전환됐다. 이는 오늘날 ‘동남아시아 여성 인권이 낮았던 것을 서구가 개선시켰다’는 잘못된 인식의 뿌리가 됐다. 리드는 이 책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실패한 과거’가 아닌 역사의 자산으로서 교역의 시대를 재평가한다. 그는 ‘동남아시아인들은 변화에 창조적으로 대응하며 번영을 일궜다’고 강조한다. 다만 그 성과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짓밟힌 점을 지적하며, 현재의 빈곤을 지역 탓으로 돌리는 시각을 비판한다. 17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은 20년 넘는 연구를 집약했다. 저자는 프랑스어·영어·말레이어 자료를 섭렵하며 파편화된 사료를 통합했고, 국립국어원의 표기 기준이 없는 지명과 용어는 현지 연구자의 자문을 받아 번역했다. 이처럼 철저한 고증은 동남아시아의 복합적 실체를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 후쿠오카아시아문화상을 받은 학술서로, 발간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한 명성을 자랑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09

6000만 년 걸친 인류와 나무의 공생 관계를 탐구

“작은 영장류의 후손인 인류는 대체 어떻게 직립보행에 성공하고 최상위 포식자가 돼 세계를 호령하며 살게 됐을까? 인류는 어떻게 문명을 일으켜 세계 경제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최근 출간된 ‘나무의 시대’(더숲)는 목재가 인류 역사의 숨은 주역이었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영국 헐 대학 생물학과 객원교수이자 식물학·생체역학 전문가인 롤랜드 에노스는 6000만 년에 걸친 인류와 나무의 공생 관계를 탐구하며, 돌·청동·철 중심의 전통적 역사관에서 벗어나 목재가 문명 발전에 미친 결정적 영향을 조명한다. 저자는 목재가 인류의 진화, 기술, 사회, 건축, 환경에 미친 영향을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산업혁명 이후 목재는 점차 화석연료와 대체 자재에 자리를 내줬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이제 다시 ‘나무’로 돌아가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는 나무가 어떻게 인간의 진화·기술·사회·건축·환경을 이끌어왔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면서, ‘목재로서 나무’의 독특한 성질을 활용할 줄 아는 우리의 능력이 어떻게 우리의 몸과 마음, 사회와 삶을 근본적으로 빚어냈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땅으로 내려와 살기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목재는 분명 중심적인 재료였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를 나무에서 내려오게 한 열쇠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운 좋게도 목재의 유용한 성질 가운데 두 가지를 활용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그 첫 단계로 초기 인류는 목재가 마르면서 단단해진다는 성질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땅을 파는 데 사용할 막대기를 만들어 새로운 식량원을 획득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Homo) 속에 속하는 초기 구성원들은 마른 목재가 불에 잘 탄다는 성질을 활용했다. 덕분에 불을 피워 포식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음식을 요리해 먹을 수 있게 됐다. 결국 나무에서 나는 재료인 목재와의 관계가 급성장한 것이 역설적으로 우리가 나무를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 것이다. 나무와 목재가 전 세계에서 이뤄낸 문명의 장대한 이야기는 인간 문명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동남아시아와 서아프리카에서는 나무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형 유인원의 뇌를 자극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600년 이상 끄떡없는 세계 최대 규모의 궁궐인 자금성과 서기 600년경 세워진 호류지 5층탑이 빈번한 대형 지진을 견디어 왔고, 유럽에서는 목재를 변형해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만들고 책과 신문을 만들 종이를 공급했다. 영국은 목조선으로 제국을 건설했으며, 19세기 아메리카의 신생국가는 거대한 산림에 의존하여, 주택·철도·가축우리·다리를 지었다. 목재의 역할이 단지 긍정적인 면에서만 작용한 것은 아니다. 목재로 만든 무기의 발달이 우리를 최상위 포식자로 만들었고, 그 결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대량 멸종을 불러오기도 했다. 우리는 농경을 통해 환경을 바꾸는 기술을 익히기도 전에, 나무 도구를 이용하여 거대한 짐승들을 죽여 없앴다. 유럽에서는 매머드와 털 코뿔소, 메갈로케로스(거대 순록), 아시아에서는 거대 오랑우탄, 북아메리카에서는 마스토돈과 말, 테이퍼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이뿐만 아니다. 나무로 만든 활의 극치라 할 수 있는 주목나무로 만든 장궁(큰활)이 대표하듯이, 목재로 만든 활이야말로 15세기까지 명실상부 세상에서 가장 효과적인 대량살상 무기였다. 영장류학·인류학·고고학·역사학·건축학·공학·목공학 등 폭넓은 분야에 대한 지식과 최근 연구 결과를 정교하게 엮어냄으로써 이야기의 스케일은 장대하고, 그 속을 채우는 지식과 통찰은 깊다.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깊이 있는 지식의 확장과 과학적 근거와 인문적 서사의 완벽한 조화에 있다. 여기에 저자의 흡입력 있는 문장과 치밀한 구성은,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결코 가독성을 해치지 않는다. 독자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단편적 정보가 아닌, 서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지식의 네트워크를 경험하게 된다. 본문 중에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컬러 화보 23컷이 실려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25

‘혁신을 문화로 정착시키는 구체적 방법론’을 체계화한 실전 지침서

기업의 생존 키워드로 떠오른 ‘혁신’, 그러나 많은 기업이 도입만 하고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가 신간 ‘혁신과 성장 그리고 미래’(드로드출판사)를 출간했다. 포스코 혁신 기획 6년, 17년간의 글로벌 컨설팅 경험을 바탕으로 ‘혁신을 문화로 정착시키는 구체적 방법론’을 체계화한 실전 지침서다. 저자는 포스코 혁신 컨설팅과 MB 정부 동반성장 정책 아래 30여 중소기업을 강소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조직에 혁신이 스며들면 건강한 조직, 경쟁력 있는 기업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혁신은 복합적 조건의 총합”이라며 “단편적 도구 적용이나 일시적 캠페인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리더십의 일관성과 현장 중심의 실행력이 결합돼야만 진정한 혁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혁신을 멈추면 기업도 멈춘다”고 강조한다. “기업은 생물과 같아 끊임없이 진화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대기업도 한순간에 쇠퇴한다. 생존과 지속 가능 경영을 위해 혁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모든 기업이 혁신을 도입하지만 성공한 기업은 드물고, 부분적으로 성공하는 수준에 머문다. 왜일까? 혁신을 제대로 실행하여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고급 낭비가 된다”고 지적한다. 모든 조직은 생물로, 진화하지 않으면 쇠퇴한다고 경고하면서 최근 화두인 ESG 경영과 연계해 사회적 책임과 경쟁력 강화 방안을 모색한 점도 주목된다. 책은 “혁신은 기술이 아닌 조직과 사람의 문제”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제2장에서는 ‘IIAC(도입-모방-응용-창조) 진화 모형’을 통해 경영 비전부터 회의체까지 5가지 핵심 요소를 문화로 정착시키는 방법을 설명한다. 제3장에서는 TPS·6시그마·TOC 등 12가지 혁신 기법을 업종별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노하우를 공개한다. 특히 ‘Clean 작업장 문화’나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시스템’처럼 현장 친화적인 접근법이 돋보인다. 혁신 실패 원인을 분석한 제4장에서는 ‘조직의 행동 변화와 균형 있는 혁신’을 강조한다. 제5·6장에서는 ESG 경영과 MZ 세대 관리법 등 현대 기업이 직면한 과제를 혁신과 연결시켰다. 제6장에서는 ‘미에루카 경영’(예측형 데이터 경영)과 ‘지식경영’을 통해 AI 시대에 맞는 혁신 방향을 제시하며, ‘소통과 공감’이 조직 성과의 핵심임을 재확인시킨다. 제7장은 철강·에너지·2차전지 등 10개 업종별 혁신 성공 사례를, 제9장은 중국·일본·말레이시아 등 6개 국가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한 혁신 전략을 소개한다. 제8장에서는 중소기업의 혁신 성공 사례를 통해 ‘작은 기업도 체계적 접근으로 강소기업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제10장은 ‘챗GPT에서 스마트 제철소까지’, 기술 변화에 대응하는 혁신 전략을 집약했다. 저자 정상철 대표는 “AI 시대는 예측과 협업이 혁신의 열쇠”라며 “문화적 토대 없이는 첨단 기술도 무용지물”이라 경고한다. 또 “이 책이 기업의 ‘멈춤’을 ‘도약’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혁신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문화와 사람에 있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25

잊고 지낸 ‘편지의 감성’ 다시 일깨운다

신간 ‘하루 한 문장, 내일이 달라지는 마음습관’(도서출판 서로)은 우리가 잊고 지낸 ‘편지의 감성’을 다시 일깨운다. 한때는 손편지로 안부를 전하고 마음을 나누던 시대가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빠른 속도와 디지털 메시지에 익숙해져버렸다. 이 책은 그러한 시대 속에서도 ‘짧은 한 문장’이 마음을 두드린다는 것을 증명한다. 명사들의 언어, 고사성어, 일상의 깨달음이 조화를 이룬 문장들은 마치 아침마다 건네받은 손편지처럼, 하루의 시작에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최규운 작가의 신간은 그가 10여 년간 매일 지인들에게 보낸 ‘아침편지’를 엮은 산문집이다. 단순한 개인의 기록이 아닌 주변인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응원을 받아 탄생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몇 사람만 읽기엔 너무 아깝다”는 지인들의 제안이 모여, 혼자가 아닌 ‘함께 만든 책’이 됐다는 것이 출간 배경의 핵심이다. 책은 마음가짐, 자기성찰, 성장과 변화, 관계와 소통, 행복과 감사, 삶의 지혜와 리더십이라는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각 장은 짧지만 깊이 있는 문장들로 채워져 있어, 독자가 하루를 돌아보고 새로운 내일을 설계할 수 있도록 이끈다. 예를 들어, "이름 없는 들풀일지라도 햇살을 향해 곧게 서 있다면 잡초가 아니라 존재의 빛이 된다”('잡초, 혹은 산삼')라는 문장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사유의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는 특히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삶의 연속된 모습”이라 말한다. “구름, 햇살, 꽃향기, 숲길의 공기, 사랑, 우정, 의리, 신뢰 같은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시간과 마음으로 얻는 것”이라며 “진정한 부자는 이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 강조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25

우리는 공범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지난해 12·3 비상계엄 당일, 상부 명령에 따라 국회의사당에 진입한 장병들은 책임을 져야 할까? 기업에는 도움이 되지만 사회에는 해로울 수 있는 경영 전략을 제시한 컨설팅 회사나,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인 목표치를 제시해 직원들의 불법행위를 조장한 경영진을 어떻게 봐야 할까? 성범죄나 조직 내 비리를 고발하는 내부의 목소리를 묵인한 사람들은?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이자 행동경제학자 맥스 베이저먼의 신간 ‘우리는 어떻게 공범이 되는가’(민음사)는 조직과 사회를 병들게 하는 ‘공모(共謀)’의 구조적 문제를 파헤친다. 그는 침묵과 방조가 어떻게 집단적 악으로 이어지는지 날카롭게 분석한다. 베이저먼은 다년간의 연구 및 컨설팅 경험과 함께 자신이 부정행위에 연루된 사례까지 낱낱이 밝히며 평범한 우리 누구나 공모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명백한 공모’와 ‘일상적 공모’의 일곱 유형을 통해 비즈니스, 조직, 정치, 사회에서 나타나는 공범죄에 정면으로 맞서는 방법들과 잘못된 행동을 무시하거나 묵인하거나 지지하게 될 수 있는 심리적 함정들을 살피고 피할 전략을 제시한다. ◇공모의 덫을 방치하면 기업도 조직도 사회도 퇴보한다 ‘우리는 어떻게 공범이 되는가’는 사회적 스캔들의 배후에 숨은 공모자들의 역할을 조명한다. 미국 체조 국가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의 성폭력에 눈감은 체조협회와 올림픽위원회처럼, 가해자에 맞서야 할 리더들이 사실을 외면한 사례를 들며 공모자의 행위에 주목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자들의 책임이 덜하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사회에 해악을 미치는 사람들은 언제나 공범이 돼 주는 평범한 사람들이 필요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공모를 통해 악행을 조장하거나 방조한다면 같은 사람들이 행동을 달리함으로써 악행을 저지할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누구나 빠질 수 있는 공모의 함정 사람들은 왜 타인의 부정행위에 동참할까? 예를 들어, 동료가 리베이트를 받는다는 의혹이 있어도 “증거가 없고 회사에 도움된다”는 이유로 묵인할 수 있다. 공모는 악의적 동조뿐 아니라 분위기 순응, 권위 복종, 관행 묵인, 구조적 특권 인식 부족 등 다양한 심리로 발생한다. 행동윤리학을 비롯해 여러 분야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복잡한 사건을 단순화해 주범에만 집중하고 공모자를 간과하며, 간접적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또한 특정 목표에 매몰되면 윤리적 판단이 흐려지고, 불확실할 땐 행동보다 방조를 선택한다. 이처럼 누구나 무의식중에 공모에 휘말릴 수 있다. ◇공모의 위험에 정면으로 맞서는 법 공모자가 되지 않으려면 공모의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물론 이를 예방하기 위해 사전에 명확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인간은 미래의 행동을 계획할 때는 도덕적인 선택을 더 많이 하지만, 실제로 행동을 해야 하는 순간에는 자신에게 이로운 선택을 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직 내 비윤리에 대응하기 위한 실천적 조언을 제시한다. △공개적 비판에 대한 위험 부담을 줄인다 조직 내 영향력을 키워 처벌 위험을 줄이고, 결정적 순간에 목소리를 낸다. 동료와 연대해 비윤리 개선에 힘쓴다. △도덕적 가치 사전 숙고 핵심 가치를 미리 정립하면 비윤리적 선택을 거부하기 쉬워진다. △맹점 인지 단일 원인 오류, 부작위 편향, 간접적 해악 심리 등을 경계해 타인의 행동을 신중히 평가한다. △관계 확장 소속 집단에만 매몰되지 않고 외부와 연결될 때 공동선에 가까운 결정을 내리기 쉽다. △집단행동 촉진 트럼프 정부 시기 법무부 간부들이 집단 저항으로 장관 해임 시도를 막았고, 인구조사국 연구원들도 데이터 오용을 거부했다. 밋 롬니와 시몬 바일스 역시 권력형 범죄와 시스템적 문제에 맞섰다. 저자는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공모자가 되는 일을 전적으로 피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기대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공모의 위험성을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을 돌아봄으로써 앞으로 잘못을 조장할 가능성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악인의 행동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평범한 이들이 알게 모르게 연루되는 공모를 경계하고 거리를 둔다면 사회에 막대한 해악을 미치는 사람들에게 제동을 걸 수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18

“탄소는 범죄자가 아니다” 폴 호컨 ‘탄소라는 세계’ 출간

최근 수십 년간 탄소는 지구의 적이었다. 정부와 기업은 ‘탄소 중립’을 외치며 화석 연료와의 전쟁을 선언했고, 대중은 탄소 배출을 죄악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적인 환경운동가 폴 호컨은 신간 ‘탄소라는 세계’(웅진지식하우스)에서 이러한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그는 “탄소는 생명의 모든 자취에 활기를 불어넣는 공학자이자 제작자”라며 탄소가 단순한 오염원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기원임을 강조한다. 지난 60년간 환경운동 최전선에서 활동해온 ‘녹색 구루(guru)' 호컨은 2019년 ‘플랜 드로다운’, 2022년 ‘한 세대 안에 기후위기 끝내기’에 이어 국내 출간된 이 책에서 탄소가 어떻게 죽은 암석 덩어리였던 지구를 생명이 넘치는 행성으로 변모시켰는지를 서사시처럼 풀어낸다. 기후위기 시대에 탄소를 ‘범죄자’가 아닌 ‘새로운 세계의 안내자’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독자들에게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한 깨달음을 선사한다. 책은 총 15장으로 구성된다. 첫 장 ‘생명의 춤: 탄소에 대한 오래된 오해’에서 호컨은 인간이 지구를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망상이라고 지적한다. 이어 ‘탄소는 흐른다’에서는 생명체의 탄생과 죽음, 재생 과정에서 탄소가 어떻게 순환하는지 생물학적·역사적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특히 ‘별빛을 먹다’와 ‘유사 식품’ 장에서는 현대 식품 산업의 문제점을 파헤친다. 가공식품과 초가공식품이 인류를 병들게 하는 현실을 경고하며, “개보다 뛰어난 인간의 후각”을 잃어가는 세태를 비판한다. 한편 「나노 기술의 시대」에서는 탄소 나노튜브와 같은 혁신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전망하면서도 윤리적 고민을 제기한다. 생태계의 숨은 주인공들도 조명받는다. ‘곰팡이 왕국’에서는 균류가 탄소 포집과 분해에 기여하는 역할을, ‘곤충의 붕괴’에서는 작은 생명체가 생태계 균형을 지탱하는 중요성을 역설한다. 호컨은 “곤충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진다”며 아마추어가 주도하는 생태 보호 운동의 가치를 강조한다. 호컨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탄소는 생명의 재료이자 문명의 토대이므로, 이를 적대시하는 것은 자기 부정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는 “녹색혁명으로 대표되는 산업화된 농업이 토양을 죽였다”며 “엉망진창인 농업 시스템 대신 미생물의 회복력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식의 전환’ 장에서는 “지구가 스스로를 구할 것”이라며 일곱 세대 뒤를 생각하는 원주민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촉구한다. 저자는 나비 효과, 미세 조정 이론, 야마나어 멸종 등 다양한 사례를 엮어 탄소가 인류사와 어떻게 교차하는지 철학적으로 성찰한다. 특히 “우리는 죽은 별들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우주적 차원에서 탄소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탄소라는 세계’는 환경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탄소를 ‘적’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함을 일깨운다. 호컨은 “탄소 중립 정책이 산업계에 면죄부를 주는 도구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며, 진정한 해결책은 자연의 재생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것(자연의 순환 리듬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숲을 ‘탄소 저장고’로 보는 시각 대신 “생태 다양성의 보고”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인류는 탄소와 싸워야 할까, 함께 춤춰야 할까?” 기후위기 대응을 둘러싼 논쟁이 뜨거운 지금, 호컨의 도전적인 통찰은 우리에게 새로운 상상력의 지평을 열어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18

"일상의 미세한 울림을 담다" ···포항 정미영 수필가 두 번째 수필집 ‘소리의 서막’ 출간

포항에서 활동하는 정미영(53) 수필가가 두 번째 수필집 ‘소리의 서막’(아르코 )을 출간했다. 이번 책은 고요한 순간 속에서 발견되는 삶의 소리, 말 이전의 숨결, 기억 속 침묵까지 일상의 미세한 진동을 54편의 글에 담아냈다. 2025년 경북문화재단 예술작품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간된 이 작품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을 위한 자리”라는 저자의 말처럼 독자들에게 은은한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책의 표제인 ‘소리의 서막’은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에서 따왔다. 정 수필가는 “사이렌 소리처럼 생명을 구하는 소리는 진중한 밀도로 다가오듯, 모든 소리가 희망으로 귀결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러한 독특한 시선은 2024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수필 부문 선정으로 이어지며 작품의 깊이를 증명했다. 수필집은 제1부 ‘내 영혼을 매혹하는 수필 향기’부터 제5부 ‘나의 소소한 여행’까지 총 5부로 구성된다. 제1부는 오래된 슬픔과 찰나의 기쁨을 교차시키며, ‘달빛이 환한 밤’ ‘벚꽃, 그리움’ 등 추억과 상실의 감정을 풀어낸다. 제2부에서는 문장과 책, 여행이 교차한다. ‘소나무 향 따라 맨발로 걷는 북천수’ ‘우물쭈물하면 좀 어때’처럼 사소한 순간에서 발견한 삶의 통찰이 돋보인다. 제3부 ‘영수 회담: 영화, 수필을 만나다’는 ‘장밋빛 인생’ ‘번데기, 아버지의 시간을 풀다’ 등 영화적 상상력과 수필적 사유를 결합했다. 제4부는 ‘소리의 서막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를 비롯한 10편의 수상작이 수록됐다. 내면의 고요함과 치유를 탐구하는 작품들로 채워졌다. 제5부는 ‘아를, 고흐의 그림 속을 걷다’, ‘알람브라 궁전, 시간의 문을 열고’ 등 유럽 여행기를 서정적으로 기록하며 공간과 시간의 교차를 그려냈다. 정미영 수필가는 “가장 깊은 말은 침묵 속에서 피어난다”고 말한다. 15년간 인문학 강사로 활동하며 쌓아온 통찰을 바탕으로, 그는 이번 책에서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포착해 거대한 서사로 확장시켰다. 특히 ‘영수 회담’ 시리즈는 영화 속 장면과 현실의 감정을 연결하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선사한다. 2005년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한 정미영 작가는 2020년부터 경북매일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며 지역 사회에 문학적 감수성을 전파해왔다. 첫 산문집 ‘사계’(2023)에 이어 이번 신작에서도 삶과 소리, 기억의 교차점을 탐구하며 독자들과 소통한다. 그는 “오래된 슬픔에서 태어난 글도, 지나가는 바람 같은 기쁨에서 탄생한 글도 모두 나를 쓰다듬었다”며 “이 책이 독자들에게도 은은한 치유의 서막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14

역사를 통해 바라본 현대 국가와 정치 권력

영국 케임브리지대 정치학과 교수 데이비드 런시먼의 신간 ‘국가 권력에 관한 담대한 질문들’(아날로그)은 홉스에서 후쿠야마까지 12명의 사상가를 통해 국가, 권력, 정치를 재해석한다. 이 책은 고전적 저작을 단순히 해설하는 대신, 현재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역사상 주요 사상가들의 통찰을 불러내어 오늘날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경험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성찰을 토대로 현대적 쟁점에 초점을 맞췄다. 이 책은 17세기 중반부터 20세기 말까지 정치사상사의 핵심 저작 중, 오늘날의 관점에서 재조명할 가치가 있는 작품 12편을 선정해 현대 정치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가와 그들의 사상을 국가, 권력, 정치라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와 연결해 체계적으로 탐구한다. 내용은 홉스-국가관, 울스턴크래프트-성정치학, 콩스탕-자유, 토크빌-민주주의, 마르크스·엥겔스-혁명, 간디-자치, 베버-리더십, 하이에크-시장, 아렌트-행동, 파농-폭력, 맥키넌-성적 억압, 후쿠야마-역사의 12장으로 구성돼 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주제는 1장에서 다루는 ‘홉스와 국가관’이다. 성경 속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을 절대 권력을 지닌 주권자로 비유한 홉스의 사상은 현대 국가의 근간을 설명한다. 런시먼은 “정부가 국민 덕분에 권력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국민이 정부의 지배를 받는다”는 현대적 개념의 기원을 추적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대적 권위가 필요하지만, 그 권력이 평화를 위협할 때 발생하는 딜레마를 강조하며, “우리를 정치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정치 자체이며, 이는 우리가 결코 정치에서 구원받지 못함을 의미한다”(57쪽)고 역설한다. 2장 ‘울스턴크래프트와 성 정치학’에서 다루는 ‘여성의 권리 옹호’(1792)와 11장 ‘맥키넌과 성적 억압’에서 다루는 ‘페미니스트 국가 이론을 향하여’(1989) 사이에는 200여 년의 시간이 존재한다.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여성의 이성적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남성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만큼 허무맹랑하다”(73쪽)며 교육권과 시민 참여를 주장했다. 200년 뒤 맥키넌은 ‘페미니스트 국가 이론을 향하여’에서 국가와 법이 남성 권력을 재생산하며 여성 억압을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런시먼은 두 저작이 던지는 문제의식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그 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통해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다운 삶은 가능한가?”를 묻고, 간디는 ‘힌두 스와라지’에서 “진정한 독립과 자유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베버는 1919년 독일 패전 직후 베를린대학교에서 진행한 강연을 정리한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진정한 정치가는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는가?”에 대해 신념과 책임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사람만이 정치가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답한다. 1958년에 이미 기계 기술 시대에 축소되는 인간과 기계가 지배하게 될 세상을 경고한 ‘인간의 조건’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문구에 갇혀 있던 해나 아렌트의 새로운 정치철학적 시각을 보여준다. 런시먼은 고전 사상가의 사유를 단순히 복원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팬데믹이 드러낸 국가의 이중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국가가 잘 작동한다면 우리는 정치를 잊게 되지만, 그러기 위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홉스의 역설처럼, 이 책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로 하여금 현대 정치의 본질을 성찰하게 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11

홍석현 회장이 전하는 책임 있는 삶과 리더십의 통찰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얻은 통찰을 담은 에세이 ‘인생이 내게 가르쳐 준 것들’(중앙북스)을 출간했다. 중앙일보·JTBC 등 중앙미디어그룹을 이끌며 한국 언론·미디어 산업의 변화를 주도해온 그는 이번 책에서 글로벌 리더로서의 경험과 내면의 성찰을 솔직하게 풀어내며 독자들에게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홍 회장은 “삶을 돌아보는 것이 곧 삶을 돌보는 일”이라는 신념 아래, 개인의 성장부터 사회적 책임, 영적 성숙까지 세 가지 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특히 언론사 경영자로서의 철학을 강조하며, “핵심 인사에 대한 인사권은 갖되 제작 독립성은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을 밝히며 언론의 공정성과 자율성 확보를 위한 고민을 드러냈다. 중앙일보, JTBC 등 중앙미디어그룹을 이끌며 국내 미디어 산업의 발전과 개혁을 이끌어온 그는 해방 후 대한민국 국적으로 태어나 해외 유학에 오른 1세대 글로벌 리더이기도 하다. 이 책은 거창한 담론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체험에서 길어낸 진솔한 고백과 성찰을 통해 독자들에게 지혜, 리더십, 영성을 전하는 출판물이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 그동안의 삶의 긴 여정을 되돌아보며, “삶을 돌아보는 것은 곧 삶을 돌보는 일”이라 강조하며, 개인의 성장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영성의 회복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현재의 자신과 독자들에게 울림 있는 메시지를 전한다. 책은 ‘성장’, ‘품격’, ‘영성’ 세 장으로 구성됐다. ‘성장’ 부문에서는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 삼성 이건희 회장 등과의 만남을 통해 체득한 리더십과 도전 정신이 담겼다. ‘품격’에서는 인간관계와 대화 태도 등 내면적 자질의 중요성을, ‘영성’에서는 ‘왜 사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나눔과 중도의 가치를 역설한다. 그는 “비평가가 아닌 주인으로 살라”, “조건 없는 행복만이 진짜 행복”이라며 외적 성취보다 자기 삶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또한 매형인 이건희 회장에 대해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친 특별한 존재”라고 회고하며 가족과의 관계에서 얻은 교훈도 전했다. 홍 회장은 중앙일보 사장 취임 후 진보 지식인 필진을 초빙해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신문으로 변화시킨 경험을 소개하며, 언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조직에서 직위가 높을수록 ‘듣는 귀’를 열어야 한다”며 쓴소리를 경청하는 자세를 사회 지도층에 권고하기도 했다. 이번 책은 화려한 경력 뒤에 숨은 개인적 고뇌와 종교적 성찰까지 담아내며, “더 나은 어른으로 살아가기 위한 기록”이라고 말한다. 홍 회장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갈등과 혼란 속에서 독자들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책이 “리더들의 성공담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공감을 이끄는 이야기”임을 강조했다. 홍석현은 1977년부터 7년간 세계은행(IBRD) 이코노미스트로 일하다 귀국해 1983~85년 재무부와 청와대에서 근무했고, 삼성을 거쳐 1994년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중앙일보·JTBC 회장, 세계신문협회(WAN)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현대사의 흐름과 삶을 함께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11

신경과학자의 ‘100% 뇌 활용법’ 요시 할라미시, 뇌 코드 활용 전략 소개

신경과학자 요시 할라미시의 신간 ‘100% 뇌 활용법’(심심)은 뇌를 ‘생존을 최적화하는 기계’로 해석하며, 기억·학습·감정 조절 등 뇌 기능의 진화적 기원을 탐구한다. 책은 뇌의 작동 원리를 이해해 일상적 문제를 해결하는 실용적 방법을 제시하며, ‘뇌의 코드’를 활용하는 전략을 전수한다 책은 인간의 뇌가 ‘잊어버리는 능력’을 가진 이유를 ‘선택과 집중’의 결과로 설명한다. 뇌가 모든 정보를 저장하려 한다면 생존에 필수적인 정보 처리에 에너지가 분산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대추야자 경작’에 비유한다. 불필요한 잎을 제거해 열매 성장을 촉진하듯, 뇌도 불필요한 기억을 버리며 중요한 정보에 집중한다는 주장이다. 뇌가 감정을 조절하는 방식에도 진화적 목적이 깃들어 있다. 예를 들어 ‘기쁨’과 ‘질투’는 뇌 활동 활성화 측면에서 유사하다. 두 감정 모두 신체 반응을 촉진해 위기 시 즉각적 행동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반면 ‘만족감’이나 ‘슬픔’은 뇌를 ‘수동 모드’로 전환시켜 외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정신적 면역체계’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뇌의 생존 지향적 메커니즘은 때로는 부작용을 낳는다. 저자는 ‘에너지 축적 욕구’가 과식으로 이어져 비만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지적하며 “폭식 후 절식은 오히려 뇌 건강에 도움된다”고 조언한다. 또한 임상 우울증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는 ‘뇌의 방어 기제’로 해석하며, 약물 치료 외에 사회적 안전망 강화(가족 관계 복원, 직장 휴가 제도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책은 뇌의 메커니즘을 활용한 실용적 팁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창문을 잠갔는지 헷갈릴 때는 “손으로 닫으며 ‘닫았다’고 소리 내고, 사탕을 씹으며 주변 풍경을 응시하라”고 권한다. 시각·청각·미각을 동시에 자극하면 뇌가 정보를 생존과 연결해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뇌의 작동 원리를 역이용해 일상적 실수를 줄이고 학습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할라미시는 “과도한 생존 본능을 통제하려면 인간만의 이성적 판단이 필수적”이라 강조한다. 뇌의 기본 설정을 의식적으로 조정함으로써 집중력 저하, 감정 기복, 기억력 감퇴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뇌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역발상’을 적용하는 것이 진정한 뇌 활용법임을 밝힌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11

‘딥 스테이트’와 ‘단일 행정부’···美 정치의 두 얼굴

파괴된 민주주의와 곤경에 처한 체제를 되살리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신간 ‘두 유령‘(이매진)이 나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사례로 삼아 미국 민주주의의 현재와 과거를 깊이 있게 분석하는 이 책은 ‘딥 스테이트’와 ‘단일 행정부’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미국 정치의 현실을 조명한다. 저자들인 세계적인 대통령학 권위자 스티븐 스코로넥(예일 대학교 정치학·사회과학 석좌 교수), 존 디어본(밴더빌트 대학교 정치학과 조교수), 데스먼드 킹(옥스퍼드 대학교 너필드 칼리지 연구 교수 겸 미국정부학 석좌 교수)은 “대통령 직위를 둘러싼 제도 배치가 민주주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라며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직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단순히 돌출된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 대통령직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하고 있다. ‘심층 국가’로도 번역될 수 있는 ‘딥 스테이트’는 원래 튀르키예나 이집트 등에서 정치를 통제하는 군부 세력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행정부 내에서 대통령과 대립하는 비밀 네트워크로 확장해 해석했다. 반면, ‘단일 행정부’ 이론은 대통령과 행정부가 하나의 단위로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저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극단적 양극화와 파당 정치를 배경으로 대통령이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체제가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강조했다고 설명한다. 정당과 대통령 행정부를 초월하는 밀집된 행정 기구에 기반한 ‘딥 스테이트 음모론’과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강조하는 ‘단일 행정부 이론’은 ‘민주적 책임성(accountability)’을 매개로 연결된다. 저자들은 이런 논의를 배경으로 2부 ‘풀려난 유령들’에서 단일 행정부와 딥 스테이트 사이에 벌어진 대결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5장 ‘참모진의 심층’에서는 공화당 기득권 세력과 포퓰리스트 반란 세력이 맞붙은 백악관 참모진을 돌아본다. 딥 스테이트는 무역 협정 초안을 훔치고 충성파가 보낸 서한을 중간에 막아선다. 6장 ‘규범의 심층’은 대통령이 내린 지시와 정부 기관이 수행하는 행동이 충돌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대통령은 러시아가 대선에 개입한 문제와 힐러리 클린턴을 기소하는 사안을 두고 연방수사국하고 충돌하는데, 트럼프가 볼 때 자기 뜻을 거스르는 이들은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미국을 망치는 딥 스테이트 도당일 따름이었다. 7장 ‘지식의 심층’에서는 단일 행정부와 과학이 부딪친다. 트럼프는 정치에 상관없이 중립 지대에서 존중받아야 하는 과학에 개입한다. 자기가 선호하는 정책에 안 맞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농무부 산하 국립식량농업연구소와 경제연구소를 워싱턴에서 캔자스시티로 쫓아낸다. 대통령이 보유한 임면권을 둘러싼 갈등은 8장 ‘임명의 심층’에서 조명한다. 트럼프는 ‘대행이 좋다’는 말까지 하면서 전문성, 경력, 독립성이 아니라 충성도를 기준으로 사법부와 정보기관을 비롯한 여러 국가 기관을 좌지우지한다. 9장 ‘감독의 심층’에서 단일 행정부는 의회를 상대로 싸운다. 의회가 주도한 탄핵 과정에서 많은 하위 공무원이 증언에 나서자 트럼프는 딥 스테이트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내고 선거로 당선한 대통령을 쫓아내려 마녀사냥을 벌인다며 여론전을 펼친다. 저자들은 헌법에 집착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정치적 해결책이 고갈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단일 행정부와 딥 스테이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제도적 배치와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04

플래닛랩스·넷플릭스 일군 엉뚱한 호기심·통찰력

앤드루 맥아피의 신간 ‘긱 웨이:초격차를 만드는 괴짜들의 마인드셋’(청림출판)은 세계적 혁신기업인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기술보다 조직문화 혁신을 통해 초격차를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MIT 슬론경영대학원 부교수와 디지털비즈니스센터 수석연구원으로 활동 중인 저자는 “실리콘밸리의 진정한 발명품은 조직문화”라며 아마존·넷플릭스·구글 등 혁신 기업들의 사례를 통해 ‘긱(Geek·괴짜)’ 문화의 핵심 가치를 조명한다. 맥아피가 정의한 ‘긱’은 호기심으로 문제를 탐구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데이터 기반의 열린 사고를 지향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엉뚱한 질문에서 출발해 창의적 해결책을 도출한다. 플래닛랩스는 “우주선 비용이 왜 5억 달러인가?”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해 NASA의 1/1000 비용으로 위성을 발사하는 혁신을 이뤄냈다. 리드 헤이스팅스(넷플릭스 창업자)는 DVD 배송 시스템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의 전환을 주도하며 영화 산업을 재정의했다. 맥아피는 혁신 기업들이 과학, 주인의식, 속도, 개방성이라는 네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문화를 구축했다고 강조한다. 구글은 디자인 결정 시 전문가 의견보다 A/B 테스트와 데이터 분석을 우선시한다. 넷플릭스는 ‘컬처덱’을 통해 직원에게 자율성과 책임을 부여해 생산성을 극대화한다. 아마존은 ‘워킹 백워드’ 방식으로 고객 니즈에 맞춰 빠르게 제품을 개발한다. 허브스팟의 CEO 브라이언 핼리건은 신입사원의 반대 의견에도 귀 기울이며 열린 소통 문화를 정착시켰다. 플래닛랩스는 NASA의 1/1000 비용으로 위성을 발사하며 ‘빠른 반복’을 실현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보고 대신 토론을 통해 오류를 즉시 수정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이 문화가 활기를 띠는 기업들은 2000년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승승장구해왔다. 우리가 흔히 실리콘밸리 기업이라고 부르는 회사들이 바로 그 예다. 이 책은 넷플릭스, 아마존, 구글 등 혁신을 이룬 실리콘밸리의 긱들이 과학, 주인의식, 속도, 개방성이라는 네 규범을 토대로 어떻게 새로운 문화를 구축해왔는지 보여준다. 긱 방식은 처음 접하면 이상해 보인다. 전문가, 계획과 절차 중시, 실수 걱정, ‘승리’ 집착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개념은 몬테소리 교습을 받은 아이가 자라서 창의적 사상가가 되는 이유부터 새로 산업에 진출한 이들이 어떻게 잇달아 기존 산업을 파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현상이 이제 겨우 시작됐을 뿐이라는 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설명한다. 네 가지 규범이 모두 기업에 자리를 잡을 때, 자유분방하고 빨리 움직이고 평등하고 증거 중심이고 토론을 장려하고, 자율적인 문화가 출현한다. 긱 방식이 왜 그렇게 잘 작동할까? 저자는 독창적인 답을 내놓는다. 그 방식이 인간의 초능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집중적으로 협력하고 빨리 학습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잘못된 조건에서 적용한다면, 관료주의, 만성 지연, 침묵의 문화, 등 산업 시대의 전형적인 기능 이상들을 빚어낼 것이라고 경고한다. 맥아피는 “긱 문화가 인간의 초능력인 협력적 학습을 이끌어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잘못된 조건에서는 관료주의와 침묵의 문화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결국, 호기심→실험→학습→혁신의 사이클을 지속하는 조직만이 급변하는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04

홍명순 동시집 ‘그게 무슨 말이야’ 출간

아이와 어른, 모두의 마음을 두드리는 동시집 ‘그게 무슨 말이야’(학이사)가 세상에 나왔다. 엉뚱하고 궁금증 많은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홍명순 시인은 따뜻한 시선과 유쾌한 언어로 펼쳐 보인다. 총 75편의 동시는 1부 ‘무슨 말인지 알지?’, 2부 ‘언제쯤 용기가 생길까?’, 3부 ‘햇볕 맛 아니?’로 나뉘어, 류상애 수녀의 그림과 어우러져 눈과 마음을 함께 즐겁게 한다. ‘이해하지’에서는 “소파에 곰팡이처럼/ 피고 싶은 날이 있지”라며 솔직한 속마음을 보여주고, ‘방울토마토’에서는 “탱글탱글/ 햇볕 맛 아니?”라며 소소하지만 반짝이는 일상의 순간을 포착한다. ‘준비됐어’ 속 “이제 말해 줄래? / 내 귀가 / 너에게 열려 있어”라는 구절처럼, 아이와 어른이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홍명순 시인은 2017년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후 다수의 동시집과 글쓰기 관련 저서를 출간했고, 대구가톨릭대학교 강의와 전통 이야기 전승 활동 등을 통해 삶의 지혜와 이야기를 전해왔다. 이번 동시집은 아이와 어른이 질문을 던지고, 서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며, 함께 웃고 생각하는 따뜻한 순간을 선물할 것이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5-09-02

분단 조국 80년··· 격랑의 한반도 살아낸 허씨 삼형제의 대서사시

‘한반도의 살벌한 격랑을 헤쳐 나간 허 씨 삼형제의 대서사시. 분단 조국을 품고 순정한 신념으로 삶을 견뎌낸 청춘들의 사상 여정.’ 광복 80년이 곧 분단 80년을 기록한 지금, 포항 출신 삼형제가 젊은 날 걸어간 실화를 바탕으로 한 포항 출신의 중진 이대환(67) 작가의 장편소설 ‘붉은 고래’(아시아)가 출간됐다. 760쪽의 두꺼운 책에는 ‘1945년 해방 후, 이 땅 모든 청춘의 사상 여정’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140개의 소제목으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마치 기나긴 에세이를 쓰듯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첫째(허경민)는 가족을 북녘으로 보낸 조총련 간부, 둘째(허경윤)는 1980년대 초반 남한의 막강 권력자, 막내(허경욱)는 일본으로 밀항해 큰형을 만난 뒤 동해를 종단하다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붉은 고래’의 첫 장면은 공민권을 회복한 허경욱이 21세기 초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작은형 허경윤의 아들 허시우(영문학 전공 유학생)와 조우해 ‘마르크스 묘소’를 찾는 모습이다. 이후 두 사람은 달포에 걸쳐 유럽 대륙을 거의 한 바퀴 돌며, 허경욱이 조카 허시우에게 삼형제의 젊은 날과 가족사를 차근차근 들려준다. 종착지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그곳에서 허경욱은 큰형 허경민의 아들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교관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겠다는 불확실한 약속을 기다린다. 유럽 여행을 마친 허경욱이 자신의 아들과 딸을 미래의 독자로 상정해 노트에 적어 내려간 이 소설은 날줄과 씨줄을 선명히 드러낸다. 날줄은 일제 말기부터 21세기 초까지 포항, 서울, 일본, 북한 등을 오가며 분단과 이념의 격랑 속에서 살아간 삼형제의 실화다. 씨줄은 허경욱과 허시우가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나누는 대화로, 허경욱의 예리한 시선이 21세기 유럽의 풍경과 인간 군상을 포착해 자신의 사상에 투영하고 해석하는 과정이다. 실존 인물 허경민은 오래전 북한에서 사망했고, 허경욱은 고향에서 눈을 감았으며, 허경윤은 인생의 황혼에서 고독하게 정치판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다. 세월이 묻어버린 그들의 실제 발자국은 소설 곳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작가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허경욱을 역사의 법정에서 불러내듯 생생하게 재현했다. 분단과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실의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십수 년간 감옥 생활을 견딘 뒤 가석방으로 풀려난 허경욱. 그의 최후 진술과 최후 판결문을 경청한 후에도 작가는 그가 치열하게 추구했던 ‘완전한 세상’과 인간적인 또 다른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 집요하게 파고든다. 소설은 후반부에서 허경욱의 ‘오래된 비밀’들을 하나씩 풀어내며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2004년 전 3권으로 처음 출간된 뒤 2023년 가을 ‘문학뉴스’에서 재연재되며 20년 만에 독자와 다시 만난 이 소설을, 작가는 이번 개정 증보판으로 새롭게 묶었다. 이대환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햇빛이 어둠을 걷어내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지만, 광복의 햇빛이 만든 분단의 어둠은 여전히 한반도를 덮고 있다. 남북을 종단하느라 멍투성이가 된 ‘붉은 고래’의 영혼에 이 책을 바치며, 경계가 사라진 자유로운 바다에서 찬란히 유영할 그 날을 기원한다”고 적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9-02

“통화 최후 승자는 결국 달러”

현재 세계 경제는 강달러 복귀, 브릭스 탈달러화, 비트코인 신고가, 트럼프 행정부의 스테이블코인 지원, 중국 CBDC(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등 복합적 요인이 혼재된 ‘통화 대전환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달러 패권은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출간된 신간 ‘킹 달러’(인플루엔셜)는 달러가 100년간 구축한 글로벌 경제 지배력의 비밀을 파헤치며, 암호화폐와 CBDC의 부상 속에서도 달러가 여전히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40여 년간 경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경제 안보와 기술 패권 동향 분석을 담당하는 저자 폴 블루스타인은 기축 통화인 달러의 독보적인 위상과 지배력이 앞으로도 유지될 수 있을지를 고찰한다. 세계 경제와 정세를 아우르는 폭넓은 시선으로 달러 패권의 전모를 비춘다. 달러 패권을 지탱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위안화와 엔, 유로의 탈달러화 시도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 CBDC는 달러의 대항마인가, 시녀인가? 달러는 세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책은 통화 질서의 핵심을 찌르는 이 물음들에 답을 찾아가며, ‘단기 약세’를 띠더라도, ‘장기 강세’로 수렴하는 달러 패권의 반복되는 사이클을 밝혀낸다. 저자는 백악관·연준·월가 내부를 관찰하며 달러의 독보적 지위를 뒷받침하는 세 가지 축-CHIPS(청산은행간결제시스템), 페트로달러 협약, 연준의 유동성 관리-을 조명한다. 책에 따르면 CHIPS는 은행을 포함한 금융회사 간의 달러 거래를 중개하는데, 신용카드를 활용한 일상적인 결제부터 다국적기업 간의 대규모 송금까지 모두 이곳에서 처리된다. 오늘날 달러로 이뤄지는 국제 거래의 90퍼센트 이상이 이곳을 거치는 만큼, CHIPS는 달러 패권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페트로달러’를 달러 패권의 또 다른 축으로 꼽는다. 세계 경제가 오일쇼크의 충격으로 휘청이던 1970년대 중반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모종의 거래를 진행해, 정권을 항구적으로 보장해주는 대가로, 석유는 달러로만 거래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 거래로 더 많은 나라가 더 많은 달러를 쓸 수밖에 없게 됐으니, 이로써 달러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달러 패권의 마지막 보루로서 연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전통적으로 연준은 인플레이션에 맞서 싸우며 달러의 가치를 지켜내는 기관이었다. 2007~2008년의 세계금융위기 당시 연준은 월가의 대형 금융회사들이 무너지고, 각국의 대형 은행들이 흔들리자, ‘최종 대부자’ 역할을 떠맡으며 유동성을 공급했다. 이를 통해 미국발 금융위기에서조차 달러는 생명줄이 돼준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달러는 현재 전 세계 외화보유고의 60%, 국제 무역의 90%를 차지하며, 금융위기 시에도 안정적인 유동성을 제공한다. 이는 CHIPS라는 민간 결제 네트워크를 통해 가능해졌다. CHIPS는 매일 4조 달러 규모의 국제 거래를 처리하며, 달러의 글로벌 유통망을 완성시켰다. 책은 엔화, 위안화, 유로화 등 기축 통화로서 잠재력을 주목받았던 다른 화폐나, 기존 화폐에 가치가 연동되는 암호 자산인 스테이블 코인, CBDC 등이 저마다의 이유로 달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유럽 내 무역이 유로화로 처리되는 것과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최근 수년간 국제 무역 대금의 75% 이상은 달러로 청구됐다. 특히 서반구 국가들의 거래에서는 달러를 주고받는 비율이 96%에 달했다. 유로는 2010년 유럽 재정위기에서 보듯, 유로존의 구조적 취약성으로 인해 오히려 달러 의존도가 심화됐다. 위안화는 중국의 법치 약화와 권위주의 정책이 외국인 투자자의 신뢰를 떨어뜨린다. 엔화는 국경 간 이동 제한으로 국제적 역할이 축소됐다. 반면, 암호화폐는 치명적 한계가 있다. 비트코인은 발행량 제한으로 경기 탄력성을 상실하기 쉽고, 스테이블코인은 ‘디페깅(depegging·가치유치실패)’ 위험에 노출돼 있다. 실제로 USDT와 USDC는 2022~2023년에만 각각 700회 이상의 가치 붕괴를 겪었다. 저자는 스테이블코인이 오히려 미국 국채 수요 확대를 통해 달러 유동성을 강화하는 도구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킹 달러’는 달러 패권이 단순한 경제적 우위가 아닌 정치·역사·기술적 복합체임을 보여준다. 저자는 달러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접어두는 것이 좋다고 단언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8-29

시력 60년···존재의 본질과 고독을 노래하다

“고통이 바뀌면/축복이 된다기에/그 축복 받으려고/내가 평생이 되었습니다/···. 외면할 수 없는 삶/그게 바로 축복이었습니다” -천양희 ‘축복’ 중에서 한국 시단의 거목 천양희(85) 시인이 시력 60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시선집 ‘너에게 쓴다’(창비)를 출간했다. 1965년 등단한 시인은 존재의 본질과 고독을 찬란한 슬픔의 언어로 노래하며 삶의 의미를 생생하게 담아낸 시로 오랜 세월 사랑받아온 원로다. 이번 시선집은 방대한 시인의 저작 중 공초문학상 수상작 ‘너무 많은 입’, 만해문학상 수상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청마문학상 수상작 ‘새벽에 생각하다’ 등 여덟 권의 시집에서 시인이 직접 ‘짧은 시’ 61편을 엄선했다. 일부 작품은 시구를 간결하게 다듬고 의미를 더욱 함축해 2025년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전하도록 새롭게 퇴고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시편들의 행간과 여백을 음미하면, 삶이 시가 되는 고단한 길을 걸어온 시인의 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절망과 고독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시들은 묵직한 울림으로 가슴에 스며들고, 삶에 대한 통찰과 예지가 담긴 아포리즘은 눈부시게 반짝인다. 천양희 시세계의 요체를 제련하고 연마한 이 선집은 ‘말하지 않은 말, 침묵의 말’ 속에 담긴 풍부한 이야기를 읽으며, 짧은 시가 어떻게 큰 시가 되는지 체험하게 한다.(김기택, 발문)” ‘짧은 시’의 정수를 담은 이 시선집은 절망의 바닥에서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고독한 영혼의 비망록이자, 눈물 머금은 침묵의 언어로 써 내려간 독백의 자서전이다. 시인의 삶의 궤적과 시적 고뇌가 “짧은 시의 침묵과 여백” 속에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너에게 쓴 마음이/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는 구절에서 시력 60년의 세월을 오직 시로 살아낸 시인의 결의를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의 눈길은 늘 ‘뒤편’을 향한다. “성당의 종소리” 뒤편에 박힌 “무수한 기도문”, “마네킹 앞모습” 뒤편에 꽂힌 “무수한 시침”(‘뒤편’)을 꿰뚫어 본다. 겉모습 너머를 응시하며 존재의 내력과 삶의 진실을 탐구한다. 나아가 “바람 소리 더 잘 들으려고 눈을 감고/어둠 속을 더 잘 보려고 눈을 감는다”(‘눈’)라며, 오히려 눈을 감아 본질을 감각하려 한다. 불화와 갈등의 절망 앞에서 시인은 “궁지에 몰린 마음”(‘밥’)을 다독이며, “우울을 우물처럼 마시고 불안을 벗 삼아” 살아온 인생의 황혼녘에 이른다.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완창’)는 깨달음은 눈물겨운 통찰이다. “외면할 수 없는 삶/그게 바로 축복”(‘축복’)이라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에는 자연스레 숙연한 마음이 깃든다. 고통과 좌절 속에서 시 쓰기로 완성된 내밀한 고백록인 이 시선집은 “어둠으로 빚은 빛”(발문)으로 가득하다. 표제작 ‘너에게 쓴다’는 1998년 출간된 절판 시집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에 수록된 작품으로, 2020년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빌딩 광화문글판에 일부가 게시되며 재조명받았다. 2연 10행으로 구성된 이 시는 ‘너’를 향한 변함없는 마음을 간결하게 표현한다. 천양희 시인은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이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등 다수의 시집을 발표하며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청마문학상, 만해문예대상 등을 수상했다. 탁월한 시로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8-29

초보 농사꾼의 ‘고군분투-좌충우돌’ 영농기 책으로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한가로운 시골 생활. ‘시골에서는 고기 살 돈만 있으면 된다면서요?’라는 흔한 오해를 정직하게 깨부수는 산문집이 출간되어 화제다. 농부의 딸로 태어나 고향 산골로 돌아온 김영화 작가의 ‘시골에서는 고기 살 돈만 있으면 된다면서요’가 그 주인공이다. 이 책은 겉으로만 보이는 낭만이 아닌, ‘살아내는 시골’의 리얼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실제 농촌의 삶은 도시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식주는 물론, 씨앗값, 농약비, 농기계 유지비, 연료비, 인건비까지, 농사는 오히려 많은 자본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고된 직업이다. 저자는 이러한 농사의 본질을 유쾌하면서도 따뜻하게 독자에게 전한다. 충북 영동의 깊은 산골에서 감, 호두, 쌀 등 온갖 잡곡 농사를 짓는 ‘억척스러운 아가씨 농부’의 우당탕탕 영농 기록은 때로는 폭소를, 때로는 짠한 공감을 자아낸다. 책 속에는 감나무 가지치기 중 콧구멍을 찔려 응급실에 가고, 농약 살포기 고장으로 직접 해충약을 뒤집어쓰고, 밤중에 감을 수확하다 도둑으로 오해받는 황당한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또한 애써 지은 농작물을 멧돼지가 망가뜨리고, 닭장에 침입한 매 때문에 119를 부르는 좌충우돌 시골살이는 독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농협과 면사무소, 농업기술센터를 드나들며 기술을 익히고, 예초기가 무서워 헬멧을 쓰고 작업하는 저자를 ‘흰색 하이바’라고 사랑으로 부르는 마을 어르신들과의 정은 시골 삶의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이 책은 단순히 귀농 체험기를 넘어, 도시와 농촌, 부모와 자식, 자연과 사람 사이에서 길을 묻고 답을 찾아가는 한 여성 농부의 인생기이자, 계절 따라 마음이 여물어가는 과정을 담은 산문집이다. 김 작가는 책을 통해 “시골에서도 돈은 듭니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쉽게 가질 수 없는 단단한 마음과 계절의 손길, 그리고 살아 있음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전하며, 땅에서 먹거리를 만들고 정직한 노동으로 삶을 채우는 것의 의미를 묻는다.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현실적인 길잡이를,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는 삶의 본질을 되새기는 조용한 메시지를 건넨다. 김영화 작가는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서 감, 호두, 벼농사를 짓는 ‘아가씨 농사꾼’으로, 땅의 언어를 글로 옮기는 일을 기쁘게 여기는 수필가이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5-08-26

공직 30년 넘어 시인으로···신경섭 첫 시집 ‘생각의 풍경’ 출간

대구시와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등에서 고위직 관료로 오랜 공직생활을 지낸 신경섭(61) 시인이 첫 시집 ‘생각의 풍경’(문학공간)을 출간했다. 신 시인은 고령에서 태어나 연세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미국 시라큐스 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남대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34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내무부, 대구시 수성구 부구청장, 대구시 녹색환경국장, 일자리경제본부장, 대구시의회 사무처장 등을 역임했다. 2013년 ‘대구문학’으로 등단해, 시인시대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이상화기념사업회 이사로도 활약 중이다. 평소 시적 감수성과 열정을 숨기지 못했던 그는 틈틈이 시 창작 활동을 이어왔으며, 이번 시집에는 대표시 ‘그림자’를 비롯해 총 90여 편의 작품을 수록했다. 해설을 맡은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는 “신경섭 시인의 시선은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 모서리, 가장자리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지닌다. 공직 생활로 중심부에 머물렀던 그의 문학적 시선은 오히려 주변부의 순수함을 포착한다”며 “‘생각의 풍경’이라는 제목처럼 사물 자체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되, 시인으로서의 강한 주체 의식을 견지한다”고 평가했다. 또한 “사회적 고통의 원인인 고정관념과 집착을 시로써 해소하려는 의지가 작품 곳곳에 스며 있으며, 시를 통해 추구하는 평온과 자유는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함을 일깨워준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그의 시에는 화려한 공직 경력과 달리 낮은 곳과 소외된 것에 대한 애정이 두드러진다. 신 시인은 “긴 공직 생활을 마친 지금에서야 비로소 삶의 희로애락을 시로 풀어낼 수 있었다. 시는 시간을 초월해 영원히 남을 것이며, 시 속에서라면 역류하는 강물처럼 과거와 마주할 수 있음을 믿는다”고 전했다. “마음 깊이 흐르는 강/ 풀어 놓으면 어디로 갈까?/한 때 슬픔이 파고 든 곳./멈춤이 곧 기쁨이었던 곳./세월의 숲에서 무수히 뿌려진 마음 파편들./불멸의 강가에 서서/꽃잎 하나 시에 실어 흘려보낸다./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면,/역류의 물줄기 일어 다시 마주칠 수 있다면.” -신경섭 ‘그림자’ 전문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