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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교양은 혈통·학문 아닌 올바른 품성의 고결함”

교양이란 무엇일까. ‘대추 한 알’로 유명한 장석주(70) 시인은 최근 펴낸 에세이 ‘교양의 쓸모’(풍월당)애서 교양을 “본성이나 혈통이 아닌 올바른 품성의 고결함”으로 정의하며, 삶의 경험과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기품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AI와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교양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탐구하며, 독자들에게 삶의 밀도를 높이는 방법을 제시한다. 장석주는 교양을 거창한 학문이나 화려한 지식이 아닌 몸으로 익힌 감각으로 규정한다. 그가 말하는 교양은 들길을 걷고, 밥을 짓고,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 마주한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순간들에서 비롯된다. 그는 “교양은 용기를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일상을 기계적으로 소비하는 대신, 삶의 경유지에서 부딪히고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마음에 남는다는 점에서다. 이는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교양의 핵심임을 시사한다. 책은 속도전과 파편화된 사회에서 인간적 품위로서의 교양을 역설한다. 장석주는 밥을 ‘생존을 넘어 삶을 대하는 태도’, 노동을 ‘정신을 붙드는 힘’, 꿈을 ‘내일을 향한 불씨’로 해석하며, 이들이 교양의 근간이 됨을 밝힌다. 청년기의 가난과 흔들림조차 교양의 재료가 된다는 그의 고백은 삶의 무게를 정직하게 견뎌낸 자만이 발산하는 빛을 보여준다. 저자는 속도전을 잠시 멈추라고 말한다. 밖으로만 향하는 시선을 안으로 돌리라고 권한다. 주의를 기울이고, 몸의 감각을 세심하게 깨우라고도 한다. “교양의 소멸은 인간다운 주체의 소멸”이라는 경고는 날카롭다. 그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 빈곤이 심화되는 현실을 지적하며, 밥상머리에서 시작된 인간적 품격이야말로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라고 주장한다. 현대 사회의 ‘어른 부재’ 현상을 교양 부족으로 진단한 시인은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를 참된 어른의 조건으로 꼽는다. 교양이란 “말을 아끼고 귀 기울이며 다정함을 잃지 않으려는 작은 의지”라며 관계가 쉽게 깨지는 시대에 교양이 상처를 막는 보이지 않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어른이란 타인을 쉽게 상처 내지 않는 태도로 완성된다’는 문장은 SNS 시대의 단절된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교양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공감과 사려 깊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술인 셈이다. 독서와 사유의 과정을 통해 교양이 내면화됨을 보여주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장석주는 헤세, 카뮈, 월컷 등 문학·철학자들의 문장을 삶의 순간과 연결하며, 읽기가 곧 자신을 다시 쓰는 행위라고 말한다. “문장은 저자를 닮는다”는 말처럼, 평생 쌓아온 독서 경험이 그의 내면을 빚어냈음을 책은 증명한다. 이는 교양이 자기 삶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됨을 의미한다. 기술이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듯한 오늘날, 장석주는 교양을 체험과 성찰의 여정으로 재정의한다. AI가 결과만을 빠르게 산출하는 반면, 교양은 들길 산책, 책 읽기, 노동의 과정에서 얻는 느린 배움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는 “나를 지켜낸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삶에 밴 교양이었다”며 지식의 양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30

그늘진 삶의 슬픔을 품는 성찰과 위로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이으며 시의 지평을 넓혀온 이상국(76) 시인이 열번째 시집 ‘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창비)를 펴냈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시 쓰기’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 사유를 담아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시력 반세기의 시론과 인생론을 펼쳐 지나온 삶을 조용히 되돌아보며 삶의 비의와 존재의 근원을 탐색한다. 민족예술상, 백석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이 시인은 이번 작품에서 단아한 시어와 진솔한 언어로 삶의 그늘진 구석까지 포용하는 서정을 펼친다. “사람이 살려고/ 너무 애쓰는 일을 재앙”(‘핑계’)으로 규정하며, 가난 속에서도 삶의 소박한 가치를 발견하는 시인의 혜안이 이채롭다. “가난하면 사랑하는 자식들이 다툴 일이 없고/ 세상 떠날 때도 소풍 가듯 가벼워서 좋다”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그는 고단한 현실을 초월한 듯한 여유와 체념 사이의 균형을 동시에 전한다. 또한 ‘저녁의 위로’에서는 “인간이라는 게 죽을힘을 다해 세상에 나와/ 어떤 사람은 평생 고기를 잡고/ 어떤 사람은 벽돌만 쌓다 간다”며 생의 덧없음과 유한함을 담담히 풀어낸다. 특히 “네게 내 인생의 대부분을 쓰고도/ 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는 고백은 평생 시인으로 살아온 그의 내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나의 시는 늘지 않는다// 인생이 늘지 않는다”(‘나의 시’)라며 시와 삶을 하나의 몸처럼 연결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시를 쓰면서도/ 시 같은 건 대단찮게 여기기도” 했으나, 끝내 “가진 게 시밖에 없”다는 자각에 이른 그의 모습은 예술가의 숙명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시집의 화두는 ‘슬픔’과 ‘위로’다. “저녁이다 슬픔들아/ 어둠의 등에 업혀 집으로 가자”(‘저녁의 위로’)라는 구절은 고단한 하루를 보낸 이들에게 전하는 은유적 위안이다. 시인은 “누가 울고 싶어 울겠으며/ 아프고 싶어 아프겠는가”라며 모든 존재의 고통을 공감하면서도, “어쩌다 온 세상에서/ 우리는 어떡해서든 살아야 한다”며 순응적 태도를 권유한다. 이는 “아무리 조그맣게 살아도 산다는 건/ 그 모든 걸 가슴에 묻는 일이고/ 남몰래 꺼내 보는 일”(‘어른은 울지 않는다’)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장석남 시인은 추천사에서 “오래 묵은 흙냄새와 살림살이의 낮은 물결 자국들이 스민 작품”이라고 평하며, “삶이 가벼울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말”이라고 덧붙였다. 유성호 문학평론가는 “시적 우보(牛步)의 고유한 위의(威儀)를 지닌 시집”이라며 “웅숭깊은 서정의 힘으로 작고 소박한 것들이 함께하는 사람살이의 본래면목을 노래한다”고 해석했다. 이상국 시인은 강원도 양양 출생으로 1972년 강원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을 하고, 1976년 ‘심상’으로 문단 데뷔했다. 한국 전통 서정시의 맥을 잇는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의 시는 화려함 대신 투박함과 진정성으로 승부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30

‘모든 것들의 민영화’ ··· 미국의 공공과 민주주의 조명

‘공공재를 잃는 순간, 우리의 삶은 비싸지고 불안해진다. 민영화가 일상을 바꾸고 시민의 손에서 통제권을 빼앗을 때,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으로 후퇴하는가?’ 최근 출간된 책 ‘모든 것들의 민영화’(북인어박스)는 1950~60년대 번영의 기반이었던 미국의 공공재가 1980년 레이건 정부 이후 민영화되면서 민주주의 구조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날카롭게 조명한다. 상수도부터 교육, 보건, 사법 시스템까지 공공부문이 민간으로 넘어가며 시민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불평등이 심화된 과정을 분석한 이 책은, “민영화는 시장 효율성 실험이 아닌 권력 재편의 정치적 과정”이라고 지적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의료·교육·교통 등에서 민영화 흐름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 책은 공공성 회복이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임을 경고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2015년 가뭄으로 물 사용 제한 정책을 시행했을 때, 공영화된 지역에선 사용량 감소에 따라 요금이 인하됐다. 그러나 민영화된 지역에서는 오히려 요금이 인상됐다. 민간 기업은 수익 하락을 메우기 위해 단위당 가격을 올린 것이다. 수도 요금 결정권이 시장에서 기업 이익 논리에 종속되면서, 공공의 감시 체계는 무력화됐고 주민들은 더 비싼 비용을 치르며 더 적은 서비스를 받게 됐다. 미국 사법 시스템의 민영화는 더욱 충격적이다. 지오 그룹(GEO Group)과 같은 민간 교도소 기업은 수감자 증가와 장기 복역을 통해 이익을 추구한다. 이들은 보호관찰 비용, 마약 검사 수수료 등을 추가해 원래 벌금보다 더 큰 부담을 개인에게 전가한다. 특히 의무적 최소형량제와 같은 법안은 사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설계돼, 교화와 재사회화라는 사법제도의 본질을 훼손한다. 민영화된 교정시설은 인권 침해와 불평등의 온상이 되고 있다. 19개 주에서 민간 통신사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지방정부가 자체 공공망을 구축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소외 지역은 기술 발전에서 배제됐다. 이는 결국 기술 혁신이 아닌 시장 논리가 지역 발전을 좌우하는 역설을 낳았다. 차터 스쿨(독립형 공립학교)과 영리 대학의 확산은 교육의 계층화를 가속화했다. 차터 스쿨은 저소득층 학생을 배제하고, 공립학교에 남은 학생들은 자원 부족에 시달린다. 영리 대학은 ‘정원 판매’로 수익을 올려 학생들에게 막대한 학자금 빚을 안겨준다. 이로 인해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아닌 족쇄로 변질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민영화된 의료 시스템은 보험료 부담으로 저소득층 접근을 차단해 건강 격차를 심화시킨다. 학교 선택제는 인종 분리 정책을 부활시키는 도구로 악용되며, 통합 교육 시스템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공공도서관은 예산 삭감으로 서비스가 축소돼 지역사회의 지식 공유 플랫폼이 사라지고 있다. 대학의 상업화는 지식 생산의 공공성을 훼손한다. 저자들은 민영화의 대안으로 시민의 적극적 참여와 공적 통제권의 회복을 제시한다. 공공재는 시장의 실험이 아닌 민주주의의 핵심 기능이므로, 시민이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개입해 공공성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민영화와 공공서비스 해체 문제를 다루는 정책연구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도널드 코언과 작가인 앨런 미케일리언 두 저자는 “공공재는 시민의 권리이자 민주주의의 기반”이라며 “시민의 참여와 감시가 없다면 공공성은 시장 논리에 잠식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30

인간은 파멸로부터 구원받을까

우리는 왜 인류 역사상 가장 똑똑한 시대에 살면서도,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할까?’ 옥스퍼드대 인류학과 교수 하비 화이트하우스가 신간 ‘인간 본성의 역습’(위즈덤하우스)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과학적 사실을 외면한 채 음모론에 휘둘리며 사회적 갈등은 깊어만 간다. 기후 위기의 심각성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플라스틱 사용을 멈추지 않고 불필요한 소비를 계속한다. 그는 현대 문명의 위기를 ‘인류 본성과 현대 사회의 괴리’에서 찾으며,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세 가지 인간 본성-순응주의, 종교성, 부족주의-을 해부한다. 저자는 이 모든 위기의 뿌리를 ‘오늘날 세계가 망가진 이유는 인류 본성과 현대 문명 간의 격차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현대 문명이 순응주의(집단을 따라가는 성향), 종교성(초월적 존재를 믿고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성향), 부족주의(집단에 충성하는 성향)라는 세 가지 본성에 기대어 성장했다고 분석한다. 집단 학습과 모방은 수렵채집 시대 생존의 열쇠였지만, 오늘날에는 ‘모두가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집단적 태만’으로 이어진다. 기후 위기를 인지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현대인의 모순이 대표적이다. 초월적 존재를 향한 믿음은 농경사회에서 제도화된 종교로 진화했으나, 이제는 민족·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와 결합해 내부 결속과 외부 배척을 동시에 강화한다. 소집단 간 충돌과 정복 전쟁은 고대 문명의 확장을 이끌었지만, 현대에는 정치적 양극화와 극단주의로 나타나 사회 분열을 심화시킨다. “과거에는 생존의 도구였던 본성이 현대에는 위기의 근원이 됐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책은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시간 순으로 전개된다. 1부에서는 세 가지 인간 본성을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2부에서는 각 본성이 인류 문명을 어떻게 확장시켰는지 알아보고, 3부에서는 본성이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변천됐는지 설명한다. 특히 3장(사회적 접착제)과 6장(부족과 전쟁)에서는 부족주의의 기원과 문명 팽창 과정이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묘사된다. 선사시대 작은 집단에서 시작된 ‘우리 vs 적’의 본능은 문명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현대에는 민족, 국가, 정당으로 재편되며 분열을 촉발한다. 저자는 문제의 해법으로 제도 설계를 통한 본성 활용을 제안한다. 예컨대 ‘마이어스(MyEarth)’ 앱은 사용자의 탄소 발자국을 추적해 집단 규범에 민감한 순응주의적 본성을 자극함으로써 환경 보호 행동을 유도한다. 저자는 이러한 방식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제도 설계를 통해 본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법들을 하나씩 짚어낸다. 인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미 갖고 있는 본성을 활용해 ‘더 협력적인 미래’로 이끄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비 화이트하우스는 ‘세계 최대의 인류 역사 데이터뱅크’ ‘세샤트(Seshat)’의 공동 설립자로, 전 세계 방대한 역사 자료를 계량적으로 분석하는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한 인류학자다. 40년에 걸친 그의 학문적 업적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첫 대중서가 바로 이 책 ‘인간 본성의 역습’이다. 이 책은 화이트하우스 자신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결정판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공과 실패를 통찰력 있고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라는 유발 하라리의 찬사와 “수십 년간 쌓아온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담은 야심 찬 역작”이라는 ‘가디언’의 평은 이 책이 가진 학문적 깊이와 대중적 설득력을 동시에 보여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25

아이가 넘어질 권리를 주다···성공 부르는 ‘가족문화의 힘’

가족은 단순한 혈연 공동체가 아니다. 한 개인의 사고방식, 꿈, 성취까지 좌우하는 보이지 않는 힘의 원천이다. 신간 ‘성공하는 가족의 저녁 식탁’(어크로스)은 퓰리처상 수상 저널리스트이자 예일대 교수인 수전 도미너스가 10년간 6개 가문의 삶을 추적하며 밝혀낸 ‘가족문화의 힘’을 집약한 책이다. 이 책은 의사 집안에서 의사가, 예술가 집안에서 예술가가 나오는 이유부터 형제자매의 경쟁이 재능을 꽃피우는 메커니즘까지, 성공의 유전자를 정리한다. 책은 미국 법조계·정치계를 이끈 무르기아 가족,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융합)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워치츠키 가족, 올림픽 선수와 소설가를 키운 그로프 가족 등 6가족의 사례를 통해 ‘성공의 패턴’을 분석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녀의 실패를 허용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유전적 잠재력을 깨우는 ‘문화적 토양’을 가꾼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 가정에선 몇몇 공통점이 발견됐는데,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건 “대담함의 문화”다. 이들 가족은 “자신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거나,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거나, 세계 기록을 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워치츠키 가족의 어머니 에스터는 딸의 과제 리포트에 “다시 써라”는 말 대신 “B를 받을 수 있겠다”는 피드백으로 스스로 개선하도록 유도했다. 세라 그로프가 14km 호수를 수영으로 건널 때 아버지는 안전을 걱정하기보다 보트로 동행하며 도전을 지지했다. 이들은 아이가 넘어질 권리를 빼앗지 않았다. 발달심리학 연구는 부모의 과도한 개입이 아이의 동기를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면, 아이들은 부모의 열정과 성장을 보며 자신만의 목표를 세운다. 워튼스쿨 조나 버거 교수는 “형제자매 중 동생이 운동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손위 형제를 뛰어넘기 위한 전략”이라며 경쟁이 재능 개발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미국 여자축구 대표팀의 75%가 동생이었으며, 맏이가 명문대에 진학하면 동생도 같은 길을 따르는 경향이 나타났다.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실험은 유전자가 환경에 따라 발현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유전적으로 동일한 쥐라도 자극에 따라 학습 능력이 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재능도 유전적 소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저자가 인터뷰한 부모들은 자녀의 유전적 특성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허용했다. 예를 들어, 무르기아 형제는 서로의 성취를 발판 삼아 동반 성장했다. 형은 동생의 보호자였고, 동생은 형의 기대에 부응하며 학생회장까지 올랐다. 그러나 성공은 공짜가 아니다. 책의 마지막 장은 “위대함에는 희생이 따른다”고 경고한다. 뛰어난 성취를 이룬 가족들은 마음의 평화, 사랑, 여유, 혹은 가족 간의 온전한 시간 같은 것을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이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했다. 단순히 직업적 성공을 넘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도록 이끈 것이다. ‘성공하는 가족의 저녁 식탁’은 자녀 교육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가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로 펼치도록 환경을 조성하라”고 조언한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유전적 잠재력이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도록 돕는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25

미시마 유키오의 다면적 내면세계·시대적 맥락 동시 조망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평전 ‘미시마 유키오, 죽음의 충동과 허무의 미학’(교양인)이 출간됐다. 미시마 유키오는 단순한 작가를 넘어선 사상가로, 탐미적이고 외설적인 경지를 넘어선 인물이다. 그의 삶과 사상은 복잡한 다면체로 비유되며, 이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적 인간 시리즈’의 제16권으로 출간된 이 평전은 근대적 주체성을 삶의 형식 안에서 극대치로 전개한 인물을 재발견하는 작업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배경은 그의 몽상과 상상력의 원천이 됐고, 12세부터 시 창작에 몰두하며 문학적 재능을 드러냈다. 1941년 단편소설 ‘꽃이 한창인 숲’으로 문단에 데뷔한 그는 전쟁과 패전의 시기에 활동하며 죽음, 몰락, 허무 등의 주제를 천착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자전적 고백을 담은 ‘가면의 고백’(1949), 교토 금각사 방화 사건을 소재로 한 ‘금각사’(1956) 등이 있다. 1950~60년대에는 소설, 희곡, 비평뿐만 아니라 영화, 연극, 사진 작업에도 참여하며 대중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보디빌딩과 검도를 통해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수련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정치적 발언과 행동을 시작한 미시마는 자위대 체험 입대를 통해 민간 방위 조직을 구상하고, ‘방패회’를 결성해 헌법 개정과 천황제 수호를 주장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네 권으로 구성된 대작 ‘풍요의 바다’로, 시대의 허무를 주제로 삼았다. 1970년, 그는 작품을 출판사에 넘기고 자위대 총감부를 점거한 후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과 논쟁을 남겼다. 이 평전은 미시마 유키오 연구 1인자인 문학평론가 이노우에 다카시가 집필했으며, 방대한 1차 자료와 새로 발굴한 자료를 철저히 고증해 미시마의 생애를 객관적 사실과 심리적 분석 위에 재구성했다. 2021년 제72회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으로 미시마의 복잡하고 다면적인 내면 세계와 시대적 맥락을 동시에 조망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25

박수철 화가 첫 산문집 ‘오늘도 나는 이젤 앞에서 서성입니다’ 출간

포항 출신의 독학 화가 박수철(75)의 첫 산문집 ‘오늘도 나는 이젤 앞에서 서성입니다’가 출간됐다. 포항지역 출판사인 도서출판 득수가 펴낸 이 책은 박 작가가 1969년부터 2022년까지 55년간 써 내려간 일기와 편지를 엮은 기록으로, 평생 붓을 놓지 못한 채 작업실에 머물렀던 한 예술가의 내밀한 삶의 여정을 담았다. 1950년 포항에서 태어난 박수철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낮에는 직장에 다녔고, 밤에는 캔버스를 마주했던 그는 “작업실은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지만, 스스로를 예술가라 칭하기엔 늘 부족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번 산문집은 성공담이 아닌 실패와 회의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투쟁적 창작기’다. “그림은 내게 구원도, 영광도 아니었다. 다만 숨 쉬듯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는 그의 문장은 예술가의 숙명을 넘어 인간적 고뇌를 드러낸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며, 각 부마다 상징적인 색상을 배치해 작가의 내면을 시각화했다. 1부 ‘엘로우 오커(Yellow Ochre)’는 1969년부터 1995년까지의 청년기 가난과 무명의 시절을 기록한 초창기의 모습이다. 2부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는 1996년부터 2012년까지 지역 예술계와의 교류 속에서 모색한 정체성을 담았다. 3부 ‘크림슨 레이크(Crimson Lake)’는2013년부터 2022년까지 노년의 열정과 회한이 교차하는 시기를 표현했다. 4부 ‘에메랄드 그린(Emerald Green)’은 1977년부터 2018년까지 40년간의 스케치 원본을 수록해 미완의 순간들까지 포착했다. 특히 4부의 스케치는 완성작 이전에 드러나는 흔들림과 망설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출판사는 책 말미에 삽입된 QR코드를 통해 독자가 박수철의 주요 작품을 온라인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박수철은 “이 작업실에서 나는 또 하나의 정물”이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그림 그리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세월 앞에 놓인 객체로서의 고백은 예술가의 신비화를 거부한다. ‘캔버스 앞의 나는 고독했지만, 그 고독이 나를 살렸다’는 문장처럼, 책은 예술적 성취보다 삶을 버텨내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전한다. 박수철은 2005년 포항문화예술회관 기획 초대전을 시작으로 2025년 포항시립미술관의 원로작가전 ‘박수철, 오래된 꿈’까지 10여 회의 개인·단체전에 참여했다. 특히 2024년 ‘정물 풍경’ 전과 2023년 ‘The cross 40전’은 그의 독특한 ‘정물적 풍경’ 미학을 집약한 작품들로 주목받았다. 김강 도서출판 득수 대표는 “박수철 화백의 작품과 기록에는 붓을 놓지 않으려는 집념, 삶의 고뇌를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몸부림이 고스란히 담겨있다”며 “이 책이 ‘예술가의 신앙’이 아닌, 끊임없이 고민했던 ‘예술가의 흔적’으로 닿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22

‘권리’ 너머의 인권, 성리학에서 길을 찾다

동양사상의 핵심인 성리학을 현대 인권 담론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문제작이 출간됐다. 채형복(현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신간 ‘금동이의 술은 백성의 피―성리학과 인권’(학이사)은 유학을 과거의 도덕 교본이 아닌, 오늘날 인권의 철학적 토대로 다시 불러내는 학문적 시도로 평가 된다. 저자는 근대 이후 인권이 서양 정치철학을 기반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내면적 존엄과 윤리적 성찰이 소홀해졌다고 진단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성리학이 강조해 온 인(仁)·의(義)·성(性)·리(理)의 개념을 통해 ‘권리 중심 인권론’을 넘어선 ‘도덕적 인권론’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성리학이 말하는 인간은 외부 제도에 의해 존엄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본성 안에 이미 선(善)을 지향하는 도덕적 주체라는 점에서 근대 인권사상의 선언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특히 주희의 ‘성은 곧 리’라는 명제는 인간의 존엄을 제도 이전의 철학적 토대 위에 놓는다. 성리학적 자율은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서구적 개인주의와 달리, 타자(他者)와의 조화 속에서 자신을 완성하는 관계적 자율이다. 저자는 이를 ‘공동체적 인간주의’로 규정하며, 인권을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배려할 수 있는 윤리적 능력으로 확장한다.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후기 고전소설을 분석 텍스트로 적극 활용한 점이다. ‘홍길동전’, ‘흥부전’, ‘춘향전’ 등 대중에게 익숙한 작품을 통해 성리학이 지배하던 사회의 모순과 인간 군상(群像)을 읽어내고, 이를 현대 인권의 문제의식과 연결한다. 이는 성리학을 추상적 이념이 아닌 살아 있는 삶의 철학으로 되살리는 방법론적 성과로 평가된다. 저자는 본문에서 “위계 질서와 남성 중심성 등 성리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도, 그 내부에서 인간의 도덕적 자율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강조했다. 인권의 위기가 제도의 부족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의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저자의 문제 제기는 오늘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전통의 언어로 인권의 미래를 다시 묻는 이 책은 동양 인문정신의 현대적 의미를 새롭게 환기(換氣)시키는 문화적 성과로 읽힌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5-12-22

내년 트럼프는?···'2026 세계대전망’

영국의 국제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창간 40주년을 맞아 기획한 ‘2026 세계대전망’ 한국어판(한국경제신문)이 출간됐다. 전 세계 25개 언어로 동시 발간된 이번 특별판은 2026년 국제 정치·경제·비즈니스·금융·과학·문화 분야의 핵심 이슈를 심층 분석하며, 예측 불가능한 시대 속 ‘최적의 나침반’을 제시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등장으로 촉발된 지정학적 혼란과 AI·기후 위기 등 복합적 도전 속에서 각국 정부와 기업의 대응 전략을 집중 조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재선으로 복귀한 이후 ‘본능에 기댄 거래형 외교’를 고수하며 전통적 국제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하더라도 그의 강압적 관세 정책과 보호무역주의 기조는 유지될 전망이다. 이로 인해 미국·중국·러시아 3국이 영향권을 나눠 갖는 ‘세력권 세계’로의 전환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교체 역시 금융시장 변동성을 키울 변수로 주목받는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중국의 ‘글로벌 사우스’ 협력 강화와 첨단기술 분야 타협(틱톡·반도체 등)을 유도하며 역설적 기회를 창출하고 있지만, 동시에 무역 분쟁 심화와 공급망 재편을 초래하고 있다. △지정학적 불안 최고조···‘21세기 들어 전쟁 사망자 최다 기록’ 예상 2026년은 ‘21세기 들어 전쟁 사망자 최다 기록’이 예상될 만큼 갈등이 격화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수단·미얀마의 내전은 장기화되고, 러시아와 중국은 북유럽·남중국해에서 서방의 방어 의지를 시험할 예정이다. 하마스와 일시적 휴전 상태인 이스라엘은 내부 갈등으로 ‘내부 결속’ 문제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관세 충격 vs AI 투자 붐···양극화된 리스크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새로운 무역 협정 경쟁’을 촉발하며 글로벌 공급망을 재편 중이다. 2026년 선진국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110% 초과할 것으로 예측되며, 인플레이션 재확산 우려도 있다. AI 인프라 과잉 투자가 금융시장 과열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 한편, AI 발전이 고학력 일자리 감소와 ‘경력 사다리 붕괴’를 가속화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기후 위기:1.5℃ 억제 목표 좌절···새로운 해법 모색 산업화 대비 지구 온도 1.5℃ 억제 목표는 사실상 실패했지만, 탄소 배출 정점 통과와 지열 에너지 부상이 대안으로 떠오른다. 재생에너지 투자 확대가 각국의 핵심 과제로 부상할 전망이다. △스포츠·문화:도핑 허용 경기 논란과 월드컵 위기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인핸스드 게임(도핑 허용 경기)’이 약물 사용의 윤리적 논란을 촉발할 전망이다. 미국·캐나다·멕시코 공동 개최 FIFA 월드컵은 세 나라의 정치적 갈등으로 성공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GLP-1 기반 체중감량제 확산으로 ‘오젬픽 게임’과 같은 사회적 현상도 예상된다. 트럼프 재선이 초래한 ‘예측 불가의 시대’는 2026년에도 지속될 전망이다. 이코노미스트 편집진은 “복잡한 글로벌 이슈를 데이터 기반으로 분석해 독자들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며 ‘Mapping 2026’ 섹션을 통해 분쟁 예상 지역, 경제 지표, 기술 혁신 현장을 시각화했다고 설명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18

글로벌 경제 위기 ‘문명전환기’의 서막

전 세계가 부채 위기와 자산 버블 속에서 신음하는 지금,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닌 중대한 ‘문명 전환기’가 시작됐다는 진단이 나왔다. 신간 ‘슈퍼 체인지-리플혁명과 약탈경제 그리고 대공황의 닻’(도서출판 BMK)은 달러 중심의 국제 통화 체제 종말과 암호화폐 리플(XRP)의 부상, 그리고 ‘모던 II’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며 글로벌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을 파헤쳤다. 저자 화이트독은 150년간 지속된 세계 금융 시스템의 약탈적 구조가 한계점에 도달했으며, 블록체인·AI·기후 변화·패권 전환이 얽힌 복합적 위기가 ‘파이널 슈퍼 체인지’로 이어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유동성이 빚으로 커질수록 현금 확보와 부채 축적이 생존 전략”이라며 코로나 이후 형성된 버블이 ‘슈퍼 대공황’으로 폭발할 가능성을 지적했다. 책은 리플이 단순한 암호화폐를 넘어 국제 결제망의 핵심 인프라로 진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피도르 은행의 초기 참여, 비자의 어스포트 인수, 웨스턴유니언·머니그램과의 협업 등은 ‘감자 줄기 네트워크’처럼 연결된 금융 확장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리플의 진정한 경쟁자는 비트코인이 아니라 달러”라며, 디지털 연방준비제도 개념까지 제시하며 암호화폐·CBDC·스테이블 코인이 통합된 새로운 금융 체계의 등장을 예고했다. 이와 함께 국제결제은행(BIS)을 “법적 강제력 없이 세계 금융 규칙을 통제하는 ‘보이지 않는 마피아’”로 규정하며, CBDC 규격부터 금융 실험까지 BIS 주도로 이뤄지는 현실을 비판했다. IMF와 각국 중앙은행의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리플 기술과 연계되는 점도 주목할 부분으로 꼽았다. 저자는 ‘모던 I’(산업 확장기) 시대가 끝나고 ‘모던 II’(산업 수렴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AI 기술의 확산, 인구 감소, 태양 활동 증가로 인한 기후 변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생산과 소비 구조가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특히 솔라 플레어(태양 흑점 폭발)가 전력망과 통신 인프라를 마비시켜 ‘전기 문명의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산업 구조의 급격한 재편을 경고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미국 중심의 금융 패권이 약화되고,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가 새로운 경제 주도권을 쥘 가능성도 제기됐다. 중국의 정치 변화, 한반도 통일 시나리오, 부산의 초거대 물류기지화 등이 위기 속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책은 19세기부터 이어진 금융 세력의 약탈적 패턴을 집중 조명한다. 자산 버블을 인위적으로 조성한 뒤 대중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펌앤덤클럽’ 메커니즘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좀비 경제’(수입으로 이자도 감당 못 하는 구조)가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투자 수익보다 자산 보호가 우선”이라며, 개인·기업·국가 모두가 부채 의존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슈퍼 대공황’ 시나리오에서는 달러 가치가 일시적 폭등 후 소멸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현금 확보와 불필요한 자산 정리를 권고했다. ‘슈퍼 체인지’는 리플 혁명과 달러 패권 붕괴, 산업 구조 재편 등을 통해 ‘금융·기술·기후가 동시에 변하는 시대’를 경고한다. 저자는 “과거 위기 패턴을 보면 이번 조정은 단순한 조정이 아닌 체제 전환의 서막”이라며 글로벌 경제의 복합 신경망을 해독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18

디지털 시 형식 중심 실험적 시도 ‘눈길’

포항지역 문단을 대표하는 시동인 '푸른시'(회장 김선옥)는 최근 스물네 번째 동인지 ‘푸른시 2025 제24호'를 출간했다. 이번 호는 디지털 시 형식인 ‘디카시(Dica Poetry)’를 중심으로 한 실험적 시도를 선보여 눈길을 끈다. 회원 9명은 디카시 1편과 개인 시 8편씩 총 91편을 수록했으며, 디카시의 시각적 이미지와 간결한 언어가 조화를 이뤄 포항의 자연·도시·인간 내면을 파노라마처럼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푸른색 타이포그래피와 미니멀한 디자인의 표지는 현대적 감각을 강조하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푸른시’ 동인은 포항문인협회에서 활동하는 젊은 시인들이 지역 문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활발한 창작 활동을 목표로 1999년 결성됐다. 현재 활동 회원은 손창기, 김말화, 김선옥, 김성찬, 김동헌, 조혜경, 조현명, 이주형, 오호영 9명이다. 이들은 매월 1회 합평회를 통해 창작 의지를 다지며, '시는 세상의 푸르름'이라는 슬로건 아래 공동체의 가치를 시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번 동인지에는 김선옥 시인의 ‘찰나를 건너온 말들의 온기’라는 발간사로 문을 열었으며, 김왕노 시인의 디카시 평론 ‘푸른시 동인이 펼치는 디카시 파노라마를 보며’ 가 수록됐다. 김왕노 시인은 짧은 문장 안에 담긴 세계와 삶의 울림을 깊이 있게 분석하며 디카시의 예술적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또한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라음’ 문학동인 10명의 작품을 초대해 지역 간 문학적 교류를 도모했다. 동인들의 신작 시 72편과 함께 임지훈 평론가의 ‘하나의 마음과 각자의 악력’ 이라는 동인시 해설도 실렸다. 해설에서는 공동체적 지향점과 개별 시인의 언어적 개성이 조화를 이루며 작품 속 정서와 확장 방향을 세심하게 조명했다. 김선옥 회장은 “‘푸른시’는 지역 문학의 경계를 넘어, 젊은 시인들과 함께 세상의 푸르름을 만들어갈 동반자를 기다린다”고 전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16

미국 패권 이후 ‘중·러’가 이끄는 글로벌 사우스

내외적으로 쇠퇴하는 미국, 점차 세력을 확장해온 다극적 세계 체제가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다극화 진영 최고 저널리스트, 브라질 출신 지정학 분석가 페페 에스코바의 책 ‘다극세계가 온다’(돌베개)가 국내 번역 출간됐다. 페페 에스코바는 미국의 패권이 약화된 새로운 국제 질서가 어떻게 구축돼 왔는지, 탈패권주의적 시각으로 2020년대의 최신 역사를 분석해냈다. 저자는 지난 20년 동안 미국 패권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중국·러시아 등이 이끄는 글로벌 사우스의 세계정세를 치열하게 탐구하며 생동감 넘치는 분석으로 명성을 쌓아 왔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 달러 패권 이후, ‘브릭스’(BRICS)의 확장판인 브릭스 플러스(BRICS+)와 상하이협력기구(SCO), 국제 경제 회랑 대결, 중국·러시아·조선(북한) 협력, 팔레스타인 독립 등 우리 시대 세계정세의 가장 첨예한 문제들을 유라시아 대륙과 전 세계를 직접 누비며 보고 듣고 분석했다. 에스코바는 “미국이 군사적·경제적으로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2023년 PPP 기준으로 브릭스 5개국이 G7을 경제적으로 추월했으며, 2025년에는 격차가 더 벌어졌다. 저자는 “달러를 무기화한 미국의 정책이 오히려 탈달러 거버넌스 구축을 가속화했다”며 브릭스 국가들이 R5(런민비·루블·루피·헤알·란드)를 활용한 자체 결제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극세계의 핵심 축은 BRICS+와 SCO, 일대일로다. 이들은 정치·경제·군사·문화 전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 중이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과 상하이협력기구(SCO)는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유럽까지 연결되는 ‘국제남북운송회랑(INSTC)’을 구축하며 서방의 ‘분할’ 전략에 맞서고 있다. 저자는 “중앙아시아는 다시 ‘심장지대’로 부상하고 있다”며, “파이프라인을 둘러싼 각축전이 새로운 지정학적 경쟁의 핵심”이라 강조했다. 브릭스 국가들은 자국 통화로 교역을 확대하며 달러 의존도를 낮추는 1단계 전략을 추진 중이다. 2단계로는 달러를 참조하지 않는 새 가격 형성 체계, 3단계로는 금과 핵심 자원에 기반한 ‘준비통화’ 창설을 목표로 한다. 저자는 “다극세계의 경제 성장은 실물 중심 체제에 기반해 서방보다 효율적”이라며 이를 “미국이 공황 상태에 빠진 이유”라고 주장했다. 에스코바는 “한국이 미국의 ‘동맹 수탈’ 정책에 휘말려 주변국과 갈등을 키우는 것은 매국”이라며 “다극세계로의 전환”을 촉구한다. 그는 “한국이 집단서방과 거리를 두고 유라시아 경제권에 동참한다면 새로운 기회를 얻을 것”이라 조언했다. 에스코바는 “미국의 재정 적자와 군사적 실패가 누적되는 지금, 다극세계의 승리는 시간문제”라며 “2030년 헤게모니의 안락사가 올 것”이라 단언했다. 프레드 짐머맨은 추천사에서 “미국 중심의 세계관이 편향을 낳는다”며 “다극세계의 논리를 직시해야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에스코바는 “지금이라도 유라시아와 손잡고 다극세계의 흐름을 타야 한다”고 주문한다. 미국 패권의 붕괴는 역사적 필연이지만, 한국이 그 과도기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릴 것이라는 경고다. “달러 이후의 세계, 군사적 대립이 아닌 무역을 통한 번영”이라는 그의 메시지는 한국 사회에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11

도무지 모를 中 시진핑 체제 속 ‘저항의 메시지’

2022년 5월, 오미크론 확산으로 상하이 2500만 명이 고강도 봉쇄에 갇혔을 때, 절망 속에서 탄생한 팟캐스트 ‘부밍바이(不明白·도무지 모르겠다)’가 2년 만에 책 ‘저항의 수다’(글항아리)로 재탄생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위안 리가 기획한 이 프로젝트는 중국 정부의 ‘제로 코로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체제 저항 운동의 중심이 됐다. 180회에 이르는 방송 중 핵심 인터뷰 25편을 엮은 책은 중국 내부의 암울한 현실과 저항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부밍바이’는 감염자 0을 목표로 한 봉쇄 정책으로 일상이 무너진 시민들의 “도대체 중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느냐”는 절박한 질문에서 시작했다. 건물에 갇혀 굶주리는 사람들, 경기 침체로 무너진 서민 경제, 건강 코드로 추적당하는 개인의 자유-이 모든 것이 ‘부밍바이’의 소재였다. 정치학자 페이민신, 경제학자 쉬청강 등이 출연해 “제로 코로나는 1958년 대약진운동 같은 미친 정책”이라 비판했고, 영세업자와 농민공들은 복지 사각지대의 고통을 고발했다. 또 “시진핑은 어떠한 균형도 필요 없고, 자기 비서만으로 상무위원회를 만들겠다는 뜻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면서 시진핑 중국 주석을 직격하기도 한다. 방송은 2회 만에 중국 내 청취가 금지됐지만, 해외 스트리밍을 통해 중국어로 송출되며 ‘읽는’ 문화로 저항을 이어갔다. 책은 중국 경제의 위기를 부동산 거품, 실업률 상승, 악성 부채 등 구조적 문제로 진단한다. 쉬청강은 “부분적 시장경제를 도입해도 권력 집중화로 자체 개혁이 불가능하다”며 구소련 몰락을 떠올렸고, 우궈광은 “혁명은 필연적이며 개혁은 그 길을 터줄 뿐”이라 말했다. 2022년 봉쇄된 건물에서 화재로 수십 명이 사망한 사건은 ‘백지운동’으로 번졌다. 시민들은 백지를 들고 “비극마저 선전으로 둔갑시키는 정부에 맞서자”고 외쳤고, 한 참여자는 “우리가 마지막 세대”라며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비관 속에서도 저항 의지를 드러냈다. 중국 바깥에선 공산주의 체제 아래 국민을 ‘어쩔 수 없는 존재’로 보지만, 저널리스트 장제핑은 “무릎 꿇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과 서서 저항하는 것 사이에서 일상이 투쟁”이라고 말한다. 정부의 탄압에 맞서 창작과 토론 플랫폼으로 탈집중화를 시도하는 언론인들, 해외 이주를 고민하면서도 현장에 남는 활동가들의 선택은 “완전하지 않은 자유라도 복종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책은 “체제에 답이 없다면 우리가 답을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마무리된다. 한 청년은 “현실 세계가 우릴 버려도 새로운 작은 세계를 창조하자”고 외치며, 무력감에 맞서는 연대의 힘을 강조한다. 위안 리는 “이 책은 절망했지만 각성한 이들의 용기를 외면하지 않는다”며 “무의미한 단편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계기가 될 것”이라 덧붙였다. ‘부밍바이’는 검열에 맞서 해외에서, 책은 타이완에서 중국어로 출간되며 체제 비판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중국 내부의 저항은 한국 촛불집회처럼 익숙한 얼굴이지만, 공산주의 국가라는 프레임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분명하다. “혁명은 필연적이지만, 그 전에 작은 행동이 역사를 바꾼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11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 서울···도심 랜드마크 탄생의 여정

서울이라는 도시는 알고 보면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손길로 빚어진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다.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을 넘어선다. 매일같이 지나치는 서점, 박물관, 미술관, 공연장, 쇼핑몰 등은 사실 그 자체로 건축 예술의 산물이며, 이는 서울의 문화적 풍경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서울 곳곳에는 프랭크 게리, 렌조 피아노, 안도 다다오, 자하 하디드와 같은 건축계의 거장들이 설계한 건축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을 포함해 총 22명의 건축가로, 그들의 작품은 단순한 건물을 넘어 도시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자산이 됐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서울을 세계적인 예술 도시로 변모시키는 데 기여했다. 건축가 공주석은 그의 저서 ‘서울, 작품이 되다’(청아출판사)에서 이러한 건축물들을 소개하며, 건축가들이 한국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를 건축에 녹여냈는지를 상세히 설명한다. 이 책은 서울의 건축 문화를 재발견하고, 그 가치를 재평가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 책은 강북과 강남으로 나뉘어 각 지역의 주요 건축물을 소개한다. 강북에서는 장 누벨의 리움미술관 M2,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아모레퍼시픽 사옥, 자하 하디드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이 눈길을 끈다. 강남에서는 프랭크 게리의 루이비통 메종 서울,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의 송은 아트스페이스, 안도 다다오의 LG아트센터 서울 등이 소개된다. 각 건축물의 설계 과정과 배경, 그리고 시공 중의 에피소드까지 다루며, 건축물이 지닌 상징성과 도시와의 관계 변화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또한, 이 책은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저자는 건축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건축물의 디테일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며 독자들이 일상 속 건축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은 각 건축물의 설계 과정과 배경, 시공 중의 에피소드를 통해 건축물의 상징성과 도시와의 관계 변화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또한, 지역 특징, 방문 동선, 건축물 개요 등 실용적인 정보와 다양한 부록을 수록해 정보성을 높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11

강성태 시조시인 첫 시조집·시가 있는 칼럼집 동시 발간

“세월의 더께 속엔/켜켜이 지층 같은//시간이 박제되고 사연이 스며들어/한줄기 바람결조차/소리 되어 머무네//고색(古色)이 창연(蒼然)할수록/ 숨 막히는 아련함//심원의 절규인가/메아리쳐 맴도는데//무연(憮然)히 사그라드는/천만 갈피 실마리” - 강성태 시조 ‘옛것에 대하여’ 전문 포항의 중진 강성태 시조시인(62·사진)이 등단 31년 만에 첫 시조집 ‘그리움의 날갯짓’과 칼럼집 ‘스침과 스밈’(도서출판 신진)을 동시에 출간, 진솔하고 진중한 삶의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 강성태 시인의 첫 시조집 ‘그리움의 날갯짓’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성찰한 80여 편을 담았다. 시인의 시간 인식은 과거와 현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서 비롯된다. ‘옛것에 대하여’에서는 시간의 퇴적 이미지를 통해 역사의 층위를 읽어낸다. 여기서 시간은 박제된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또한 ‘유년의 꿈’에서는 “석양이 얼비치는 유년의 길섶”에서 피어나는 추억을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시인의 시간 인식은 또한 일상의 긍정성과 타자와의 공존으로 이어진다. ‘새소리로 여는 아침’은 “깃 터는 아침이 선물처럼 다가오는” 순간을 포착하며, 새소리의 청량함을 통해 생동하는 하루의 가능성을 노래한다. 한편 ‘동행’은 “낮은 데로 스며들어 파인 곳을 채우듯”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마음을 “물 같은 흐름, 바람 같은 소통”에 빗댄다. 이는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사상을 연상시키며, 경쟁적 이기주의를 넘어선 연대의 가치를 강조한다. 시인은 자연과 예술을 통해 시간의 이치를 배우기도 한다. ‘필화(筆花)’에서는 “뿌리로 물을 긷는 쉼 없는 작용”으로 성장하는 나무에서 생명의 순환을 읽어내고, “점과 획을 넘나드는 붓과 먹의 거친 맥박”을 통해 예술적 완성의 과정을 성찰한다. 맹문재 문학평론가는 강성태 시조의 세계를 “시간 인식의 현상학”으로 규정하며,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시인의 체험적 사유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가치를 조명한다고 분석했다. 시인은 시간의 연속성과 그로 인한 기억, 꿈, 상생 등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며 독자에게 내밀한 성찰을 요구한다. 함께 발간된 ‘스침과 스밈’(도서출판 신진) 칼럼집은 저자가 20여 년간 경북매일신문에 기고한 칼럼 300여 편 중 본문 중에 자작 시조나 인용 시가 포함된 칼럼 61편을 주제와 상황에 따라 시점 분류해 5부로 엮었다. 1부 ‘새날, 새로운 시작’ 2부 ‘시간의 결, 마음의 결’ 3부 ‘발길 닿는 대로’ 4부 ‘자연과 더불어’ 5부 ‘아름다운 매듭’ 등으로 구성하고, 말미에 칼럼집 단평을 싣기도 했다. 강성태 시인은 “43년에 이르는 기나긴 직장생활의 여정과 궤를 같이하는 문학과 예술 활동의 산실을 올 연말 포스코 정년퇴직을 기념하여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 권의 책을 펴냈다”고 밝혔다. 수필가이자 맥시조 동인인 김병래 시조시인은 “강 시인의 칼럼집을 일관하는 특징의 하나는 계절의 흐름을 시적 감성으로 열고,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을 전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강 시인은 지난 11월 30일 출간기념회를 가졌으며, 11월 27~30일에는 첫 시조집에 수록된 평시조·연시조·사설시조 등 30여 편을 골라 작가가 직접 붓으로 쓰고 시화작품을 포항시산림조합 숲갤러리에서 전시했다. 발간 기념 감사 이벤트로 11월 28일 갤러리 입구에서 가훈 및 덕담 붓글씨 써주기 나눔 활동도 열었다. 포항에서 40여 년간 시조와 서예 창작, 저널 활동을 해온 그는 1994년 계간 현대시조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 시조분과위원장과 맥시조문학회 회장·포항문인협회 회원·포항서예가협회 회장 등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07

미래를 알려면 과거를 돌아봐라

우리는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영국 역사학자 E.H.카의 말처럼,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중요한 도구로 여겨진다. 최근 출간된 영국의 사회철학자이자 로먼 크르즈나릭의 신간 ‘내일을 위한 역사’(더 퀘스트)는 이러한 관점에서 응용역사의 접근법을 통해 인류가 직면한 21세기의 주요 도전 과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을 탐색한다. 크르즈나릭은 기후위기, 불평등 심화, 민주주의 위기, 기술 독점 등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난제들에 대한 해답을 지나간 문명의 지혜 속에서 찾는다. 그는 “역사는 우리에게 과거의 위기가 어땠는지 상기시키고, 하마터면 잊힐 뻔한 다양한 사회 조직 방식을 전수하고, 현재의 불의와 권력관계의 뿌리를 드러내고, 생존과 번영을 위한 변화를 이끌 단서를 제공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민이 촉발하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세 스페인의 알안달루스 왕국에서 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이 평화롭게 공존했던 ‘콘비벤시아’ 문화를 사례로 든다. 이는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갔던 역사적 교훈을 현대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제공한다. 또한, 현대의 무한 소비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일본 에도시대의 순환 경제 모델을 제시한다. 이는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재활용을 통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방법을 보여준다. 소셜미디어가 빚어낸 정치적 양극화와 가짜 뉴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18세기 런던의 커피하우스 문화를 떠올리며, 평등하고 숙의적인 공론장을 형성했던 과거의 경험을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설계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크르즈나릭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집단 연대와 변혁적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과거의 지혜를 AI 플랫폼 협동조합 같은 오늘의 혁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 문명이 위기 앞에서 ‘부러지지 않고’ ‘구부러질 수 있는’ 회복력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과거의 성공 사례를 현재의 기술과 결합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저자는 ‘점진주의’로는 시급하고 복합적인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화석연료 중독을 끊기 위한 ‘멸종반란’ 운동 같은 급진적 저항 운동의 잠재력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은 중세 에스파냐의 알안달루스에서 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이 평화롭게 공존했던 ‘콘비벤시아’ 문화를 소개하며, 사회적 관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또한, 일본 에도시대의 순환 경제 모델을 통해 무한 소비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18세기 런던의 커피하우스 문화를 통해 정치적 양극화와 가짜 뉴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디지털 공론장의 재설계를 제안한다. 극우 정권의 대두와 엘리트 정치에 대한 신뢰 상실 앞에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저자는 라에티아 자유국과 쿠르드족의 로자바 자치정부를 소개하며 시민의회(숙의민주주의) 도입을 촉구한다. 이는 권력을 민중에게 돌려주고, 보다 참여적이고 포용적인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크르즈나릭은 ‘파괴적 변화의 연결고리(Disruption Nexus)’라는 독자적인 모델을 제시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조건을 설명한다. 그는 기후위기와 인구 절벽 같은 위기와 촛불 집회와 환경단체 활동 같은 사회운동, 그리고 탈성장 경제와 공동체 민주주의 같은 새로운 사상이 결합될 때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저자는 ‘위기’, ‘운동’, ‘사상’이라는 세 요소의 상호작용이 정치적 의지를 자극하고, 사회 전체가 중대한 결정의 시점에서 새로운 길을 선택하도록 만든다고 설명한다. 이는 인류의 회복력을 구축하고 대격변을 막아내는 근본적인 기둥으로 작용하며, 우리에게 근본적인 희망을 제시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04

경영의 신이 말하는 인생철학

1968년 첫 출간 이후 60여 년간 꾸준히 사랑받아온 ‘마쓰시타 고노스케 길을 열다’(원제: 道をひらく·21세기북스)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원전 완역본으로 선보인다. 이 책은 일본에서만 287판 이상을 거듭하며 누적 570만 부가 판매된 불멸의 스테디셀러로, 출간 이래 일본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2014년에는 누계 511만 부를 돌파하며 전후(戰後) 베스트셀러 단행본·신서 부문의 2위에 오른 바 있다. 이 책은 일본 전자 기업 파나소닉 창업자이며 정치·경제 지도자 양성 학원인 마쓰시타정경숙(松下政經塾)을 설립한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1894∼1989)가 경영 일선에서 직접 기록한 121편의 짧은 수필을 엮은 것으로, 일상 속 태도와 마음가짐을 강조한다. 그는 “삶의 본질은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매일의 성실한 걸음에 있다”라고 말하며, 위기와 좌절을 극복하는 힘, 사람과 신뢰를 지키는 용기,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철학을 전한다. 대공황, 전후 패전, 오일쇼크 등 격랑의 시대에도 단 한 명의 해고 없이 회사를 지켜낸 일화는 이 책이 단순한 자기계발서가 아닌 삶과 경영의 교과서로 읽히는 이유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존 코터 교수는 마쓰시타를 두고 “천 년에 한 번 나올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철학은 단순한 기업가의 유산을 넘어, 오늘날 혼돈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원칙으로 살아 있다.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가난한 소년이 전기기구 제작소를 창업해 오늘날 글로벌 기업 파나소닉으로 성장시킨 여정은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라 경영과 삶의 본질을 드러내는 생생한 증언이다. “기업은 사람을 만드는 곳”이라 천명한 그의 철학은 기업을 단순히 이윤 추구의 장이 아니라 사회와 함께 번영하는 공동체로 바라보는 독창적 관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대표작이자 그의 철학과 사상의 원전으로 손꼽힌다. 그의 문장에는 삶을 헤쳐 온 생생한 체험이 배어 있으며, 실패와 좌절, 인간관계의 갈등, 조직을 운영하며 느낀 책임감과 무게를 꾸밈없이 담아냈다. 이 책의 제목에는 저자의 평생 철학이 압축돼 있다. 길을 여는 것은 외부 환경 탓을 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태도와 마음가짐을 다잡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수십 년 동안 사랑받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접근성이다. 마쓰시타 특유의 말하듯 전달하는 글쓰기로 몇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수필을 엮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덕분에 바쁜 직장인이나 학생도 잠깐의 시간을 내어 읽을 수 있고, 필요할 때 원하는 부분만 펼쳐봐도 충분한 울림을 얻는다. 이 책은 경영자부터 사회 초년생, 가정주부,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주제를 다룬다. 그래서 이 책은 일본에서 국민적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한국에서도 리더들에게 삶의 바이블로 여겨지고 있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삶과 경영, 개인과 공동체를 아우르는 지침이다. 다시금 기본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힘을 제공한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냉혹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만큼 특히 프로라는 자각을 지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어떤 직업이든 그 방면의 일을 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람은 프로다. 진정으로 프로의 값어치를 하지 못하면 고객은 쉽게 지갑을 열지 않는다. 고객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04

낙원에 대한 갈망이 ‘대항해 시대’ 열었다

중세 이후 서양 기독교 문명의 공포와 죄의식을 연구해온 프랑스 역사학자 장 들뤼모가 낙원 개념의 역사적 변천을 추적한 책 ‘낙원의 역사’(앨피)가 번역 출간됐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출발한 낙원은 수메르·그리스 신화와 결합해 ‘지상 정원’으로 구체화됐고, 이 탐색 열망이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를 촉발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중세 학자들은 낙원을 아르메니아나 메소포타미아 등으로 지도화해 콜럼버스·마젤란의 탐험을 이끌었다. 당시 성직자들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논증하며 금단의 땅에 대한 집착을 부추겼고, 16~17세기 학자들은 과학적 증거로 낙원의 실재를 입증하려 했다. 그러나 화석 발굴과 다윈의 진화론은 지리적 낙원 신화를 붕괴시켰다. 저자는 “과학적 패배 후 유토피아 사상과 예술적 상상력이 그 자리를 채웠다”며 낙원 상실 서사가 서구인의 죄의식과 멜랑콜리를 심화시켜 루소의 ‘자연 상태’나 칸트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낙원 3부작의 첫 권인 이 책에서 저자는 “서양 문명은 금지된 행복과 잃어버린 낙원을 찾는 순례”였다고 결론짓는다. 단순한 종교적 도피처가 아닌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는 인간 정신의 투영으로서 낙원의 의미를 재조명한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2-04

“고향서 마주한 삶의 풍경과 사색 고스란히 담아”

경북 예천 출신의 안도현(64) 시인이 5년 만에 열두 번째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문학동네)를 출간했다. 1981년 등단해 시력 45년을 바라보는 그는 동시, 동화, 산문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시집은 2020년 고향 예천으로 귀향한 후 쓴 작품들을 묶은 것으로, 타향살이를 마치고 고향 땅에서 마주한 삶의 풍경과 사색이 고스란히 담겼다. 안 시인은 2020년 4월 전주 생활을 접고 고향 예천으로 돌아왔다. 마당, 텃밭, 연못이 있는 집에서의 일상은 이전과 다른 시적 영감을 선사했다. 그는 “아파트 허공의 둥지에서 살다가 땅에 착지한 느낌”이라며 “새소리, 풀 뽑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시가 되어 다가왔다”고 말한다. 시집에는 닭 키우기, 풀 뽑기, 장에서 열무씨 사기 등 소박한 농촌 생활이 녹아있다. 예를 들어 ‘풀 뽑는 사람’에서는 “책에 밑줄 긋는 일보다 풀 뽑는 일이 천배 만배 성스럽다”며 자연 속 노동의 가치를 되새긴다. ‘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에서는 친구가 “시인은 원래 이렇게 쓸데없는 일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시인이 추구하는 ‘쓸모없음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집 제목부터가 그렇다. ‘쓸데없다’는 부정적 의미를 ‘눈부시다’는 긍정적 표현과 병치시켜, 하찮아 보이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안 시인은 “유용성과 경제적 가치만을 좇는 사회에서, 정작 소중한 것은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라 말한다. 그는 “무의미한 것 속에도 의미는 존재한다”며 시를 통해 일상 속 사소한 순간들을 재발견하려 했다. 특히 팬데믹 기간 요양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며 쓴 ‘유리 상자’는 이별의 아픔과 동시에 “죽음이 세상을 털어내는 시원함”일 수 있다는 역설적 통찰을 담았다. 어머니의 부재 이후 “글과 행동이 더 자유로워졌다”는 시인의 말에서, 상실 뒤에 찾아온 창작의 여유가 엿보인다. 안 시인은 이번 시집 작업에 대해 “의도나 결론을 밀어두고 언어 자체를 따라가려 했다”고 설명했다. 과거 사회적 메시지에 무게를 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말의 빛깔과 물기를 자유롭게 마주하는 데 집중했다”는 것. 그는 “시인은 말을 앞질러 가면 실패한다”며 “언어가 이끄는 대로 흘러가게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안 시인은 후배들에게 “남의 시를 분석하지 말고 언어 자체의 차이를 느껴보라”고 조언한다. 그는 “시인을 의식하거나 메시지를 찾지 말고, 시어가 가진 독특한 색채를 즐기라”고 강조한다. 또한 “시적 대상이 사라질수록 더 선명해진다”며 고향의 옛 역 ‘고평역’이나 어린 시절 기억을 소재로 삼은 시편들을 소개했다. 문학관에 대해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학은 무용하기에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는 김현 문학평론가의 말을 인용하며, “무의미와 유의미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라 설명했다. 올해 초 단국대 교수직을 퇴임한 안 시인은 텃밭 가꾸기와 글쓰기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는 “내년에 동시집을 출간할 예정”이라며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1996년 베스트셀러 ‘연어’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그는 “한 작가가 한 장르만 고집해야 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27

“사랑,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파울로 코엘료(78)가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 에세이 ‘최고의 선물’(북다)을 출간했다. 이번 작품은 그가 평생 천착해온 ‘사랑’이라는 주제를 집약적으로 풀어내며, 현대 사회에서 점차 희미해지는 사랑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코엘료는 19세기 영국 종교 사상가 헨리 드러먼드의 저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에서 영감을 받아 이 에세이를 썼다고 한다. 원문에 따르면 당시 한 유명 설교자가 피로에 지쳐 연설하지 못하자 젊은 선교사가 대신 강단에 올라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성경 구절을 설파했다고 전해진다. 코엘료는 이 일화를 통해 “사랑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유일한 세계어이자 침묵 속에서도 울림을 전하는 말 없는 웅변”이라 강조한다. 책은 사랑을 추상적 개념이 아닌 “매일의 평범한 말과 행동에서 피어나는 구체적 실천”로 정의한다. 코엘료가 제시하는 사랑의 구성 요소는 인내, 온유, 관대, 겸손, 예의, 이타, 좋은 성품, 정직, 진실 등 아홉 가지다. 이는 마치 빛이 프리즘을 통과해 다채로운 색으로 굴절되듯, 사랑이 삶 속에서 구현되는 다양한 모습을 상징한다. 그는 “이 단순한 미덕들이 모여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며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행위 자체에서 완성된다”고 말한다. 코엘료는 사랑을 “저절로 주어지는 감정이 아닌 영혼의 꾸준한 단련”이라 규정한다. 예술가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수천 번 붓을 들듯, 사랑도 의도적 훈련과 실천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나 작가가 되기 위해 연습이 필요하듯, 사랑 역시 반복된 노력을 통해 진실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그의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일상 속 작은 사랑의 실천을 촉구한다. 특히 코엘료는 사랑을 “생명의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원천”으로 본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할 때 비로소 내일을 향한 긍정적 기대가 생긴다”는 그는 “화폐 가치가 사라져도 사랑은 우주에서 유일하게 통용되는 화폐”라 단언한다. 이번 에세이에는 코엘료 특유의 시적인 문장과 함께 김이랑 작가의 ‘사계절 꽃의 정원’ 삽화가 수록돼 시각적 아름다움을 더했다. ‘연금술사’부터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까지, 코엘료의 작품은 늘 인간 내면의 여정을 탐구해왔다. ‘최고의 선물’은 그 여정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당신이 남긴 것은 결국 사랑뿐이다”라는 메시지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독자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가 사랑임을 호소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27

“정주학적 기론 기반한 상상력의 소유자”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은 오랫동안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로 불리며 근대 과학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 명예교수가 16년간의 연구를 집약한 ‘홍대용 평전’(푸른역사)은 이러한 통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홍대용의 대표 저서 ‘의산문답’과 ‘임하경륜’, 청나라 지식인들과의 서신, 수학·과학 저작 등을 분석한 이 책은 그를 “과학적 사고보다는 정주학적 기론(氣論)에 기반한 상상력의 소유자”로 재해석하며 역사적 신화에 균열을 낸다. 강 교수는 홍대용이 주장한 지구 자전설과 우주 무한론이 관측과 수학에 근거한 근대 과학이 아니라 정주학의 사유 체계에서 비롯된 한계적 이론이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홍대용은 지구 자전은 주장했지만 공전에 대해서는 침묵했으며, 혼천의는 관측 도구가 아닌 천체 모형으로 제작됐다. 더욱이 ‘의산문답’은 인쇄되지 않아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했고, 그의 우주론은 도교의 수련론이나 재래식 동기감응설에 기대어 구축됐다고 분석한다. “코페르니쿠스와 달리 지구중심설을 탈피하지 못한 채 ‘선언적 상상력’에 머물렀다”는 평가가 이를 뒷받침한다. 홍대용이 신분제를 비판한 사회사상가라는 기존 평가에 대해서도 강 교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홍대용이 노비를 소유한 지주였고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을 들어, 그의 ‘평등론’은 “실제 행동과 괴리된 실천성 없는 수사”에 불과했다고 해석한다. ‘임하경륜’에서 ‘놀고먹는 사족’을 비난한 부분은 신분제 철폐 주장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실제로는 재능 있는 농민·상인의 자식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이상을 피력하면서도 “토지 분배나 거주 이전 자유를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통제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영천 군수 시절 진휼곡 착복 사건을 보면 “민생을 돌보기는커녕 수탈 구조에 편승했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론의 한계가 드러난다고 강 교수는 지적한다. 홍대용이 청나라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명분론적 ‘화이론’(華夷論)을 허구로 규정한 배경에도 개인적 갈등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주목된다. 강 교수에 따르면, 귀국 후 김종후가 그와 교류한 청나라 인사 엄성·반정균을 “명나라에 충성하지 않는 오랑캐 추종자”로 매도하자, 홍대용은 이에 반발해 “지구처럼 세상도 둥글어 중국은 중심이 아니다”라는 지원설(地圓說)을 내세우며 화이론 자체를 부정했다. 이는 단순한 민족 주체성 발현이 아니라 “개인적 관계와 학문적 자존심이 얽힌 복합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1400쪽에 달하는 이 평전은 홍대용을 둘러싼 신화를 해체하며 “20세기 이후 한국인들이 염원한 ‘자생적 근대화’의 환상이 투영된 결과”라고 결론짓는다. 강 교수는 “홍대용은 주자학을 부정하지 않은 실천적 정주학자였으며, 그의 사상은 근대적 사유의 맹아가 아니라 당대 현실 문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27

“고전을 통해 현재의 문제를 풀기 위한 지혜 얻길”

고전은 시간을 초월한 교훈을 전하지만, 원문의 난해함과 방대한 분량은 현대인에게 부담스럽다. 경북 영주 출신의 한문학자 김재욱(고려대 한문학과 강사)이 출간한 ‘사서 심경(四書 心鏡·스토리두잉)’은 이러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책이다. 유교의 핵심 경전인 논어·맹자·대학·중용에서 현대인이 새겨야 할 명문장을 추려내고, 자신의 해석을 덧입혀 쉽게 풀어냈다. 제목의 ‘심경(心鏡)’은 “고전의 지혜를 마음의 거울에 비춘다”는 의미로 고전을 통해 자기 성찰의 기회를 얻도록 이끈다는 의미다. 김 교수는 앞서 ‘삼국지 인물전’을 통해 삼국지의 영웅들과 현대 정치인·언론인을 비교 분석하며 화제를 모았다. 조조와 이재명, 유비와 문재인 등 역사적 인물과 현실의 인물을 대비시켜 리더십의 본질을 탐구한 이 작업은 SNS에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는 “고전이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비추는 창”이라고 말한다. 이번 신작에서도 그 연장선상에서, 수천 년 전 경전이 오늘날 개인의 성장과 사회 문제 해결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하는지 탐구한다. ‘사서 심경’은 각 경전의 핵심 메시지를 4개 장으로 나눠 소개한다. △논어: 관계의 기술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록인 ‘논어’는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을 다룬다.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벗어나야 인정받는다”, “무슨 일이든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 등의 구절은 타인과의 경계 설정과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다. 김 교수는 “공자의 말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신뢰를 얻는 전략”이라 설명한다. △맹자: 정의로운 리더십 맹자의 사상은 “백성과 함께 소유하기”, “지도자는 백성의 즐거움과 걱정을 함께해야 한다”는 말로 집약된다. 특히 “어진 정치를 베풀면 백성은 나라에 충성을 다한다”는 구절은 공정과 소통의 리더십을 역설한다. 김 교수는 “맹자의 정치관은 현대 민주주의와도 맞닿아 있다”며, “권력은 국민의 동의에서 나온다는 점이 닮았다”고 덧붙였다. △대학: 자기 계발의 원리 “세상 돌아가는 원리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한 대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핵심으로 한다. “나부터 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문장은 개인의 성장이 사회적 영향력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김 교수는 “대학은 자기계발서의 원조”라며, “목표를 세우고 단계적으로 실천하는 방식이 현대적 자기관리법과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중용: 균형 잡힌 삶의 철학 “마음의 중심을 잡고 남과 조화를 이루는 일”을 강조한 ‘중용’은 극단을 피하는 중용의 미덕을 설파한다. 특히 “남이 나보다 뛰어나서 한 번만에 잘하게 되었다면 나는 백번을 노력해야 한다”는 구절은 김 교수가 학창 시절 한문 학습에 어려움을 겪을 때 용기를 얻은 문장으로, 좌절을 극복하는 마음가짐을 전한다. 김 교수는 “사서는 수천 년 전 책이지만, 오늘날에도 유효한 삶의 기술서”라 말한다. 예를 들어 맹자의 “정직해야 큰 용기를 지닐 수 있다”는 구절은 SNS 시대에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상황에서 더욱 절실하다고 덧붙인다. 또한 “갈등 해결 방식과 마음 다스림”까지 다루기에, 직장인과 청년층에게도 실용적이라는 평가다. 그는 “고전을 읽는 것은 과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풀기 위한 지혜를 얻는 과정”이라며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고전을 ‘옛날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로 받아들이길 바란다”고 전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25

후회하면서 또 같은 실수···뇌의 작동원리는?

인간은 왜 후회할 줄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갈등에 빠지거나, 과거의 부끄러움은 선명히 기억하면서도 눈앞의 열쇠 위치는 잊어버리는 모순적인 순간들. 사랑에 빠져 집착하거나 특정 집단을 배척하는 심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최근 출간된 책 ‘내가 궁금할 땐 뇌과학’(알에이치코리아)은 이러한 인간 행동의 미스터리를 신경과학으로 해부하며, 뇌가 만들어내는 감정과 선택의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에서 연구해 온 저자 로봇공학자 호르헤 챔과 신경과학자 드웨인 고드윈은 분노, 혐오, 자유의지 등 11가지 주제를 통해 뇌의 작동 원리를 분석한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분노와 혐오의 생물학적 기반이다. 인간의 분노는 단순히 ‘마음의 문제’가 아니다.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위협 상황에서 분비되는 테스토스테론이 편도체를 자극해 전두엽 기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킨다. 이로 인해 ‘투쟁-도피 반응’이 활성화되며, 평소라면 자제했을 공격적 행동이 표출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분노 상태에서 내뱉은 말은 편도체의 명령이지 전두엽의 판단이 아니다”라며 “충동적 행동이 반복될수록 뇌의 보상 체계가 강화돼 분노가 습관화된다”고 경고한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혐오가 중독성 강한 쾌락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실험쥐 연구에서 다른 개체를 공격할 때마다 복측피개영역(VTA)이 활성화되며 도파민이 분비되는 현상이 확인됐다. 인간 사회에서도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타인종을 배제할 때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증언한 사례는 혐오가 사회적 우월감과 결합해 뇌에 보상 신호를 생성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저자들은 혐오가 과거에는 생존을 위한 진화적 산물이었지만, 현재는 집단 갈등을 증폭시키는 독소로 작용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SNS 중독처럼 분노와 혐오도 반복될수록 뇌에 각인되어 쉽게 폭발한다는 점에서 위험성을 경고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전두엽 기능 강화 훈련(분노 조절 장애 치료)이나 교육으로 편도체 과잉 반응 억제(혐오 발언 방지) 등을 제시한다. 이 책은 뇌과학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자기 성찰의 도구로 제안한다. 예를 들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편도체가 활성화됐다”고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동을 제어할 첫걸음이 된다. 뇌과학에 관심은 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 책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20만 명이 넘는 수강생을 보유한 과학 멘토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는 엑소쌤(이선호)은 “이 책을 읽고 나면 뇌의 구조와 기본적인 작동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 향상법, 행복한 삶에 이르는 비결 등 일상을 윤택하게 해주는 실용적인 지식도 얻을 수 있다”면서 “사랑, 행복, 죽음과 같은 주제를 깊이 탐구하다 보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자신을 이해하고, 성찰하며, 더 나은 변화를 모색하도록 이끄는 여정으로 안내해줄 것”이라고 평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20

세계 ‘최고령 저자’, 철학적 사색 한층 깊게 풀어내

105세의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신간 ‘김형석, 백년의 유산’(21세기북스)을 펴냈다. 지난해 9월, 103세 251일의 나이로 기네스 세계 기록 ‘최고령 저자’로 공식 인증받은 김 교수는 이번 책으로 평생 탐구해온 철학적 사색을 한층 깊게 풀어냈다. 책은 1부에서 105년의 인생을 통해 체득한 통찰을, 2부에서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철학자의 시각으로 진단하며, 3부에서는 다음 세대를 향한 진솔한 조언을 담았다. 특히 그는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성숙이 인간다운 삶의 완성”이라며 휴머니즘을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 김 교수는 “돈이나 명예가 아닌 감사와 사랑을 남기는 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라고 강조하며, “정치·종교·교육이 본연의 역할을 다할 때 사회가 건강해진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던 그는 어머니의 “스무 살까지만이라도 살아달라”는 기도 속에서 생의 의지를 다졌고, 그 결실은 100세를 넘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왕성한 저술과 강연으로 증명되고 있다. 건강 비결을 묻는 질문에 그는 “일은 건강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건강 자체가 일을 위한 도구여야 한다”며 ‘정서적 안정’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또한 “남을 헐뜯지 않고 분노를 다스리는 것”을 장수의 비결로 전하며, 100세를 넘긴 친구 7명의 공통점을 예로 들었다. 최근 한국 사회의 분열과 갈등에 대해 “희망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당부한 그는, 스피노자의 사과나무(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와 타르코프스키 영화 ‘희생’(핵전쟁 앞에서도 나무를 심는 의지)을 언급하며 어려운 환경에서도 미래를 위한 실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청년 세대를 향해서는 “진정한 행복은 소유가 아닌 사랑에서 온다”고 조언했다. 김 교수는 최근 고등학생 대상 강연에서 “연애는 스무 살 넘어서 해야 한다”는 유머러스한 조언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는 “소통할 때마다 젊어지는 기분”이라며 젊은 층과의 교류를 건강 유지법으로 꼽았다. 이번 신간 ‘백년의 유산’은 50대를 대상으로 쓴 전작 ‘백년의 지혜’보다 더 젊은 독자를 겨냥해 집필됐다. “출판사 측에서 30대 독자들도 내 책을 읽는다고 알려줬다. 좀 더 쓸 수 있으면 써야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김 교수는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자유가 보장된 사회가 결국 승리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다만 “자유 방임이 아닌 경제적 평등과 빈곤 퇴치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K-컬처의 시대에도 국가 운영은 인간애에 기반해야 한다”며 정치권의 각성을 요구했다. 김 교수는 “죽음은 삶의 완성이자 새로운 시작”이며, “고독은 깊은 사유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사랑·양심·자유·감사는 단순한 덕목이 아닌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끝으로 그는 “후배와 제자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라며 “교육이야말로 희망의 씨앗”이라 강조했다. “휴머니즘이 모든 물질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는 그의 철학은, 효율과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 ‘인간답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시대의 선언문으로 남을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20

지난 100여 년간 전 세계 연구소가 과학 발전과 국가 운명에 미친 영향

신간 ‘연구소의 승리’(계단)는 지난 100여 년 동안 전 세계 연구소가 과학 발전과 국가 운명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며, 연구소가 단순한 실험실 집합이 아닌 국가 전략의 핵심 제도로 자리 잡은 과정을 조명한다. 기초과학연구원(IBS)에 근무하는 과학자인 저자 배대웅씨는 연구소가 국가가 직면한 약점을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사회적 장치이자 제도적 발명품이라 설명한다. 독일은 1887년 정밀 측정과 기술 표준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제국물리기술연구소를 설립했고, 일본은 1910년대 서구 모방을 벗어나기 위해 국민과학연구소를 만들었다. 한국도 1959년 한국원자력연구소 설립을 통해 국가 R&D 프로젝트를 본격화했다. 특히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은 1966년 설립 이후 해외 기술을 국내 산업에 접목해 중화학공업 기반을 마련했으며, 이는 한국의 산업화 전략을 체계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또한 현대 연구소는 국가 단위를 넘어 글로벌 협력의 장으로 진화했다. 팬데믹 시기 백신 개발 속도 향상, 우주 탐사 공동 프로젝트,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국제 데이터 네트워크 등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통해 연구소가 기술적 성과를 넘어 “미래를 설계하는 사회적 장치”로 기능한다고 강조합니다. 지역 간 경쟁, 정치적 논란 속에서도 연구소가 장기적 혁신의 출발점임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입증하며, 과학기술뿐 아니라 제도·정치·경제적 선택이 결합될 때 새로운 경로가 열린다고 덧붙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20

침략으로 얼룩진 중앙유럽의 2000년 역사

마틴 래디의 ‘중앙유럽 왕국사’는 다양한 민족과 제국의 교차를 통해 형성된 중앙유럽의 복합적 정체성과 역사적 변화, 그리고 이 지역의 유럽 평화에 미친 결정적 역할을 분석한 역작이다.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자리한 중앙유럽의 2000년 역사를 통찰력 있게 조명한 역작 마틴 래디의 신간 ‘중앙유럽 왕국사’(까치)가 출간됐다. 이 책은 침략과 정복의 피상적 서술이 아니라, 다양한 민족과 제국이 교차하며 형성된 복합적 공간으로서의 중앙유럽이 어떻게 변화와 통합을 주도해왔는지 규명한 역작이다. 저자는 중앙유럽을 지리적 명칭이 아닌 ‘민족 상호작용의 현장’으로 재정의하며, 고대 로마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천하는 정치적·군사적 경계 속에서 이 지역의 독특한 정체성을 추적한다. 중앙유럽의 역사는 고트족, 훈족, 아바르족, 슬라브족, 몽골족, 오스만족 등 수많은 민족의 유입과 융합으로 직조됐다. 4세기부터 시작된 이민족의 침공은 신성 로마 제국의 분열을 초래했고, 1000개가 넘는 소국가들이 각자의 자치를 누리는 다원적 체제를 낳았다. 특히 헝가리와 폴란드는 몽골 침략 이후 독일계 이주민을 적극 수용하며 새로운 질서를 구축했다. 이주민들에게 부여된 자치의 권리는 마을 단위부터 왕국에 이르기까지 의회 형성의 토대가 됐으며, 중세 중앙유럽은 “공동체 정부와 공화주의적 실험의 본산”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강력한 왕조가 등장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정치는 점차 위로부터의 통치로 대체됐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로마법을 활용해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통치 체계를 확립했으며, 17세기 관방학의 발전은 국가의 국민 통제력을 강화했다. 이는 이후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중앙유럽은 종교개혁과 민족주의, 클래식 음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다양한 종파가 공존하는 관용적 분위기가 조성됐고, 그림 형제 같은 학자들은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며 정체성 형성에 기여했다. 한편 빈과 헝가리에서는 음악가가 단순한 배경음악 연주자가 아닌 청중의 경배를 받는 예술가로 격상되며 교향곡의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제1·2차 세계대전은 이 지역의 다문화적 공존을 파괴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탄생한 신생국들은 단일 민족주의를 추구하며 소수 민족을 억압했고, 20세기 중반 소련 점령기에는 민주화 열망과 정치적 혼란이 교차했다. 오늘날에도 중앙유럽은 정치적 부패와 외부 세력의 위협에 직면해 있지만, 저자는 이 지역이 유럽 전체의 평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슬라브 동유럽학과 교수인 저자 마틴 래디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헝가리·루마니아 역사에 대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중앙유럽사 전문가다. 그는 이 책에서 폴란드, 체코, 우크라이나, 스위스 등 과거 중앙유럽 왕국들의 공통점인 민주주의 전통과 귀족 문화뿐 아니라 인종 청소, 스탈린주의 등 어두운 역사까지 균형 있게 다룬다. 특히 “중앙유럽은 단순히 지리적이 아니라 정치·문화적으로 유럽의 중심”이라며 전 세계의 이해관계가 얽힌 현대 사회에서 이 지역의 안정이 갖는 의미를 역설한다. 해외에서 출간 직후 월 스트리트 저널은 “마틴 래디는 길고 복잡한 과거의 가닥을 능숙하게 풀어내 끔찍한 전쟁터이자 서구 민주주의의 요람으로서의 중앙유럽을 조명한다”고 평했고, ‘파이낸셜타임스’는 “대중성과 학문적 성취를 갖춘 최고의 책“이라 극찬했다. 다만 방대한 시대를 아우르는 만큼, 독자에 따라 일부 장은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책 말미에 약어와 인명 색인이 상세히 수록돼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빠르게 확인하며 읽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또한 각 장마다 핵심 주제를 명확히 분리해 독자가 내용을 단계별로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기에 용이하게 구성돼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13

내리막에 들어선 기축통화의 미래···최후의 승자는

미국 하버드대 국제경제학 교수이자 국제통화기금(IMF) 전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케네스 로고프는 신간 ‘달러 이후의 질서’(윌북)를 통해 달러의 위상과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미래를 심층 분석했다. 2008년 금융위기와 유럽 부채위기 등을 예측한 경제 석학으로서, 그는 이번 책에서 “달러 패권은 이미 정점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단언하며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의 도래를 예고한다. 로고프 교수는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달러가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과정을 추적한다. 현재 달러는 글로벌 외환 거래의 90%, 원유 결제의 80%를 차지하며 압도적 지위를 유지 중이다. 그러나 저자는 “2015년을 정점으로 달러의 독점적 영향력이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근거로는 미국 GDP 대비 글로벌 경제 비중 감소, 천문학적인 국가부채(5경 원 이상), 트럼프 재선으로 인한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을 제시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속한 경제 연합체 브릭스(BRICS)의 위안화 결제 확대, 페트로위안화 시도 등 중국의 도전이 본격화되고 있다. 로고프는 “트럼프 2기 정부가 관세 장벽을 높이면 오히려 달러 이탈 속도를 가속화할 것”이라 경고한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자본이득세 인상(최대 20%)은 글로벌 자본 유출입을 위축시킬 위험 요소로 지적된다. 그는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가 달러를 대체할 가능성은 낮다고 평가한다. “법정통화와 민간 통화의 경쟁은 정부가 규칙을 정하는 게임”이라며 규제 권한이 없는 암호화폐가 장기적으로 승리하기 어렵다고 분석한다. 다만 스테이블코인 등 새로운 결제 수단은 지하 경제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연간 1조 달러에 달하는 국가부채 이자 부담과 정치적 극단주의는 달러 신뢰도를 갉아먹는 내부 요인으로 작용 중이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동맹국과의 균열을 초래하며 달러 블록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로고프 교수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을 “달러 이후 질서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로 꼽았다. 트럼프 정부가 한국 조선업에 관세 폭탄을 예고한 것에 대해 “한국은 조선업 선도국인데 왜 협력 대신 징벌적 조치를 취하느냐”며 비판했다. 한국 경제가 암호화폐 기반 결제 시스템에 과도하게 노출될 경우 금융 안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몰락과 달리 한국이 혁신과 개방경제로 선진국 반열에 오른 점을 높이 평가하며, 향후 미중 갈등 속에서 균형 잡힌 전략을 주문했다. 로고프는 달러가 단기적으로 급격히 추락하지는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러나 “과거 70년의 특권적 지위는 점차 축소될 것”이라며 다극화된 통화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피할 수 없다고 예측한다. 이에 따라 각국은 달러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낮추면서도, 미국과의 관계 재정립을 고민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고 지적한다. 로고프는 “달러 이후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미국은 동맹국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동시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새로운 금융 질서에서 독자적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함을 역설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13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국립세종수목원 전시원 실장이자 국내외 유수의 정원을 설계해온 조경가 박원순씨가 신간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은행나무)를 출간했다. 이 책은 그가 국내 일간지에 연재한 칼럼 ‘박원순의 도시의 정원사’를 재구성한 것으로, 정원이 인류 역사 속에서 권력·미학·철학과 어떻게 교류해왔는지, 현대 사회에서 도시와 환경 문제에 어떤 해법을 제시하는지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박 작가는 정원을 “땅을 캔버스로 삼은 예술이자 수학·과학·건축이 융합된 문명의 집결체”로 정의한다. 단순히 식물을 모아놓은 공간이 아니라, 인류가 이상향을 구현해온 상징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에덴동산, 무릉도원, 타지마할, 베르사유 정원 등 역사 속 정원은 권력의 표현이자 철학적 사유의 장으로 활용됐다. 르네상스 정원의 대칭적 구조나 영국 풍경식 정원의 유기적 배치는 미적 감각과 과학적 계산의 결합으로 탄생했으며, 식물 배치를 통한 생태계 관리 등 실용적 지혜도 담겼다. 현대 정원은 도시민을 위한 휴식처로 진화했다. 뉴욕 센트럴파크,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정원 등이 대표적이며, 최근에는 커뮤니티 가든, 스마트 정원으로 확장돼 사회적 약자 포용과 도시 열섬 현상 완화에 기여한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의 샹젤리제 녹지화 프로젝트처럼 글로벌 차원에서도 탄소 중립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정원은 생태적 대안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끼, 고사리 등 원시 식물은 공기 정화와 정신 건강 개선 효과가 입증되었으며, 생물다양성 보존과 트라우마 치유에도 도움을 준다. 박 작가는 “정원은 인간성 회복과 생태계 복원의 출발점”이라며 “비록 작은 공간이라도 정원을 가꾸는 일은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의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13

자연과 인생을 시로 엮다… 김선암 시인 첫 시집 출간

2017년 계간 ‘한국문학작가’로 등단한 김선암(62) 시인의 첫 시집 ‘역사가 걸어가네’(시산맥)‘가 나왔다. “어느 날 문득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니 아득하게 멀리도 왔다. 지나간 일들이 떠오른다”는 ‘시인의 말’처럼 이 시집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성찰적 시선들로 꽉 차 있다. 시집은 ‘역사가 걸어가네’, ‘홍매’, ‘물의 정신’, ‘초가’, ‘나무’ 등 총 5부로 구성되며, ‘돌아올 수 없는 여행’부터 ‘나무의 삶’까지 60여 편의 작품이 실렸다. 저기 한 할머니/쉼표를 짚고 걸어가시네/한평생 연인같이 지내 온/논밭 길을 옆에 두고 백조처럼/지나가시네 우아하게//저기 한 할아버지/물음표를 들고 지나가시네/한평생을 친구같이 지내 온/한 많은 지게를 벗어 놓고 학처럼/걸어가시네/고고하게//매끈하던 이마에는/지난 세월의 흔적들을/주상절리처럼 곱게 새기시고/거북이 마실 가듯/지나가시네/쉬엄쉬엄“(‘역사가 걸어가네’ 전문) 시집 첫머리 시 ‘역사가 걸어가네’는 흙길을 걷는 노인의 모습에서 개인의 역사가 공동체의 기억으로 확장됨을 은유한다. 할머니의 ‘쉼표’와 할아버지의 ‘물음표’는 삶의 완결과 미완을 상징하며, 백조와 학의 걸음은 논밭과 지게를 내려놓은 노년의 품격을 드러낸다.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이마와 느린 걸음은 역사의 점진적 흐름을, 주상절리를 빌려오는 행위는 공동체적 연대를 떠올리게 한다. 김선암의 시 세계는 자연경관, 가족 관계, 불교적 사유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시인은 연꽃, 단풍, 억새 등 자연의 풍경을 감각적 이미지로 묘사하면서도, 이를 인간 내면의 풍경이나 사회적 맥락과 연결짓는다. ‘침수정’에서는 고향 영덕의 정자 주변 풍경을, ‘숲의 고민’에서는 숲 속 생태계를 인간 사회에 빗대어 표현한다. 또한 ‘불 꺼진 방앗간’에서 유년 시절의 추억을, 참기름 기계에서 떨어지는 “엄마의 동동구리무 냄새”로 환기시키는 등, 일상의 사물을 통해 시간의 층위를 겹쳐 놓는다. 시집 곳곳에는 불교적 세계관이 짙게 깔려 있다. 시인은 ‘현재’, ‘과거’, ‘미래’, ‘천년’을 넘나드는 시간 개념을 활용해 생명의 지속성과 자연의 순환을 탐구한다. 동시에 ‘하염없이 가던 길을 간다’는 ‘시인의 말’에서는 삶의 여정에 대한 묵묵한 수용이 읽힌다. 공광규 시인은 해설에서 “김선암의 언어는 화려함 대신 침묵의 여운을, 직설적 표현 대신 이미지의 중첩을 선택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각자의 답을 찾도록 이끈다”며 "그의 시가 전하는 것은 결국 ‘걸어가네’라는 현재 진행형의 동사처럼, 끊임없이 나아가는 생의 리듬일 것“이라고 평했다. 경북 영덕군 달산면 출신인 김선암 시인은 부산에서 학업을 마친 후 삼성전자와 한국후지제록스에서 근무하다 현재 대구에서 사무기기 업체 ㈜대경사무기를 운영하며 문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2년 팔거백일장 운문 부문 우수상, 2024년 곰솔문학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제41회 영남서예대전 특선을 받는 등 전통 서예 분야에서도 예술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토벽문학회, 대한수묵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1-02

21C 미국의 패권은 지속될 것인가

영국 역사학계 거장 앤서니 G. 홉킨스(케임브리지대 명예교수)의 미국 역사 궤적을 새롭게 해석한 ‘미 제국 연구(American Empire: A Global History·너머북스)’가 출간됐다. 145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과 치밀한 분석을 통해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신화를 체계적으로 해체하고, 미국을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나란히 놓으며 세계사적 맥락에서 재조명한 이 책은 미국사의 기존 통념을 뒤흔드는 획기적인 저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존 미국사 서술은 유럽의 군주제·신분제·제국주의와 대비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앞세운 ‘독립 정신’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홉킨스는 미국이 영국 등 유럽 열강과 유사한 제국적 경로를 밟았음을 논증한다. 1783년 독립 이후에도 미국은 영국과 경제적·정치적 유대 관계를 유지했으며, 남북전쟁 무렵까지 실질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종속 상태였다고 분석한다. 특히 19세기 말에야 산업화와 내전 경험을 통해 영국으로부터 경제적 독립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미국은 ‘근대 시기 최초의 주요 탈식민 국가’로 재정의된다. 홉킨스는 18~20세기 세계화를 초기 세계화(18세기 말), 근대 세계화(19세기 말), 탈식민 세계화(20세기 중반)라는 세 단계로 구분하며, 각 시기마다 제국이 세계화의 핵심 주체였음을 강조한다. 초기 세계화는 18세기 말 유럽 열강의 군비 경쟁과 재정 위기가 식민지로 확산되며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 근대 세계화는 19세기 산업화와 국민국가 형성기에 영국 중심의 자유무역 체제가 확장되며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이 본격화됐다. 탈식민 세계화는 2차 대전 이후 민족자결 운동과 다민족적 세계화가 부상하며 영토적 제국 모델이 붕괴되고, 미국은 군사기지 설치와 소프트 파워를 통한 ‘비전통적 제국’으로 전환했다. 홉킨스는 이 책에서 단순한 정치·경제적 분석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과 지성사적 접근을 통해 미국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탐구한다. 월트 휘트먼, 마크 트웨인, 에밀리 디킨슨 등의 작품을 분석하며, “남부의 면화는 비아프라에 미친 석유의 영향과 같다”, “알제리는 워싱턴의 하와이였다”와 같은 비교사적 통찰을 제시한다. 이는 제국의 형성이 단순히 물리적 지배가 아닌 문화적 동화와 착취의 복합적 과정임을 드러낸다. 홉킨스에 따르면, 미국의 패권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약 25년간에 불과했다고 구분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지배적 패권을 누렸고, 냉전 시기 미국은 소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일시적 단극 체제를 구축했으나,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서의 개입 정책(베트남 전쟁, 이라크 침공 등)은 대부분 실패로 귀결됐다. 특히 “미국의 권력은 유럽 제국들의 긴 역사와 비교할 때 단기적이었으며, 타국에 대한 통제력도 제한적이었다”는 분석은 미국을 ‘새로운 로마’나 ‘새로운 영국’이 아닌, 탈식민 세계에서 한계를 맞은 제국으로 규정한다. 저자는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를 “영토 제국 건설과는 다른, 공세적 경제 제국주의의 한 예”로 평가하며, 국제적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미국이 스스로 발에 총을 쏜 셈”이라며 장기화된 무역 전쟁과 국제적 긴장이 초래할 위험을 경고한다. 탈식민 세계화 이후 형성된 초국가적 질서 속에서, 미국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적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협력과 타협만이 평화적 공존을 위한 길임을 역설한다. ‘미 제국 연구’는 미국사를 국가 내부의 서사가 아닌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재구성한 역작이다. 미국 독립전쟁부터 이라크 전쟁에 이르는 3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제국의 흥망성쇠가 세계화와 동전의 양면임을 입증한다. 저자는 불행히도 미국이 타협보다는 대결을 선호하는 전통이 있다고 지적한다. 2025년 트럼프의 당선으로 촉발된 국제 무역에 대한 급진적 도전은 현재 장기화된 무역 전쟁과 높아지는 국제적 긴장으로 이어지는 ‘긴 겨울’의 시작점이라고 그는 말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25-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