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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엔, 돼지들이 자라나고

등록일 2026-05-17 16:23 게재일 2026-05-1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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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 시인

돼지가 생각나는 봄밤이다
돼지감자가 땅속에서 굵어가는 봄밤이다
시커먼 돼지들이 벚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는
봄밤이다 하이힐을 신은 돼지
뻣뻣한 털로 나무 밑동을 자꾸 비벼대는 봄밤이다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천 마리 만 마리 돼지들이 골목을 쑤시다가
캄캄한 하수구로 흘러드는 봄밤
풀어놓은 돼지들을 모두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 싶은
봄밤이다
             ―장옥관, ‘봄밤이다 1’ 전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긁어도 다시 긁어도, 가려운 봄밤이 있다. 사물은 그것이 놓이는 시공간에 따라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장옥관 시인의 이 시는 봄의 강력한 자장을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는데, 인용 시에서 “돼지”는 “봄밤”을 활성화하는 동적인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이다.

봄밤에 돼지라니, 시인의 상상력이 펼쳐내는 면적이 크다. 그럼에도 멀어지기는커녕 외려 좁아지는 골목처럼 밀착해 온다. 흡사 마술봉이 곳곳을 쑤시고 다니며 꽃길을 내고 폭죽을 쏘며 땅속을 파고 있는 것 같다.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벚나무 아래”를 “하이힐을 신고” 돌아다니는 “시커먼 돼지들은” “천 마리 만 마리”로 팽창한다. 달은 또 어떤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푸는 화자의 봄밤은 강력한 자장을 지닌 커다란 ‘몸’이 된다.  
인용되지 않는 같은 제목의 또 한 편을 보자면, 봄밤은 “긁어도 다시 긁어도/ 가려움 가시지 않는 몸”이라고 했다. 이때 “가려움”이란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그리움의 대상일 텐데, 가령 “서른두 살에 혼자가 된 어머니 보름달”은 “달아오르는 요강처럼 뜨고, 오줌이 뜨거운 어머니”처럼 화자의 가려움은 식지도, 좀처럼 사라지지도 않는다.

두 편의 봄밤은 같은 시공간일지라도 사뭇 다른 정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시에 드러난 활기와 비애의 ‘몸’이라는 장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리되지 않는 미학의 동일한 영토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초월과 일상이 상응하는 상상의 공간이란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닌, 몸에 의한, 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캄캄한 하수구” 같은 곳곳의 골목을 신나는 공연장으로 만드는 환상적인 장면이 지나간 후, 다른 봄밤에선 “내가 내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를 해다오”라는 전형적인 로맨스가 펼쳐진다. “이해하나마나 달은 뜨고 바닷물이 끓어넘치고/ 고양이는 밤새/ 붉은 꽃잎 점점이 뿌리며 울며불며 다니는” 밤이다. 빠진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꿈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꿈과 사랑의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환상의 날개를 떼고 현실로 내려와 발을 내딛는 순간 몸과 유리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화자의 봄밤은 시인의 상상력이 제공하는 부재의 환상에 젖줄을 대고 있는 듯하다. 시에 드러난 활기와 비애를 걷어내고 현실과 환상의 허들을 넘을 수 있는 것은 기실 “봄밤”이라는 몽상적인 시간대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여린 꽃잎들이 돼지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침을 퉤퉤 뱉는”봄의 생명력으로 넘친다. 결구에 닿았을 때 “캄캄한 하수구처럼 흘러드는 봄밤”은 사뭇 달라질 법한데, 끝끝내 화자는 천 마리 만 마리 풀어놓았던 돼지들을 거둘 생각이 없다.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픈 봄밤”

 


/이희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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