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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당신도 당해 보라고”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일단 도착하면 나는 그곳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다 먼 곳은 먼 곳으로 남겨 두기 위하여 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먼 곳이 너무 싫어서 먼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 파티마병원에 어머니는 누워 계셨다 빗자루에 환자복을 입혀 놓은 것처럼 바싹 말라서 아직 살아 계셨다 내 손을 잡고 울다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그러다 조금 뒤면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내가 하나도 밉지 않은 듯이, 어제도 날 본 사람처럼 웃었다 다음 생에는 안 싸우고 안 아픈 곳에서 함께 있자고 이제 당신이 내 자식으로 태어나라고 내가 당하겠다고 당신도 당해 보라고 눈물이 끝 모르고 흘렀다 눈물 흘릴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식 된 사람인 것처럼……그 시각 모든 일이 먼 곳에서 (…) ―조성래,‘창원’부분 (‘천국어 사전’, 2024. 타이피스트) 읽던 시집에 얼룩이 번졌다. 단 한 방울이었는데 시집 한 권을 망치기에 충분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시집이라 변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시집을 덮으며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조성래 시인의 이번 시집은 죄다 침수되었다고, 해서 시집이 소진되었다고. 가령 인용되지 않은 이런 구절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한 인간이 하루 동안 생산해 내는 환상의 양은 옥상의 푸른 물탱크 하나만큼”이었다고 말이다. 또 이런 시편은 어떤가.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여자의 물탱크는 두 개, 그 어떤 누구의 미래와 희망, 천국도 결국은 물탱크 속에 갇힌 햇빛”, “그러나 어머니의 빈 탱크, 나 온통 젖은 몸으로, 타향으로 떠날 때, 어찌나 기뻤던지, 나의 자유가 어머니의 자유에 반하는 숙적이라는 사실을 무참히 깨달으며, 나는 사탕 빠는 고아처럼 잠시나마 기뻤”다는 내면의 고백말이다. 그것은“먼 곳이 너무 싫어서 먼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는 언술처럼 비록 가까울지라도 먼 곳에 있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대한 참담한 독해와 같을 것이다. 해서 시인을 통해 우리는 어떤 부끄러움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자식은 죄책감이 들 때에서야 부모에게 전화를 한다”는 사사키 이타루의 말은 조성래 시인이 말한 세계와 밀접하게 접촉하는 것이 시라는 화법과 유사하다. 흡사 이런 완전한 밀착의 순간에 와서야 사람의 영혼은 어떤 비밀을 깨닫게 되니까. 물론 그것으로 충분할 리가 없다. 그래도“모든 이야기는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이 관통하는 지점은 분명한 듯하다. 지극히 보편적인‘죽음’이라는 의식을 전제하지 않는 한 세상의 어떤 이야기도 태어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다 믿지 못할지라도, 우리에게 어머니란 기표는 신앙이며 동시에‘천국어’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극도의 아름다움이 참담하게 슬픈 이야기를 태어나게 한다. “이제 당신이 내 자식으로 태어나라고 내가 당하겠다고, 당신도 당해 보라고” /이희정 시인

2025-05-11

​“공이 뭐라고”

분명한 마음이 있었는데요 사라졌습니다 고장 난 사람처럼 야구만 보았습니다 공이 뭐라고 공은 분명한데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니까 개의 마음을 알 것 같고 공의 궤적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야구를 보는 동안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공을 보는 개의 마음은 알아도 나를 보는 아픈 사람들의 마음은 모르겠는데 엄마는 내가 멀쩡해 보여요? 아름다움처럼 모르겠는데 나 없이 내게로 오는 그 마음들은 (…) 온 힘을 다하여 야구를 보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공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사라질 때까지 매일 죄송하다고 말해야 했던 전화기를 잊을 때까지 (….) 내가 어리석었던 것 같습니다 어리석지 않으려면 어디에 서 있어야 할까요 포지션이 없으면 게임이 안 되고 응원하는 팀이 없으면 야구가 재미없습니다 (….) 야구가 끝나면 아픈 사람에게 병원에 가야 한다고 답장합니다 사회보장제도를 알아보자고 말합니다 의사가 알려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에 따라서 (….) 맥주가 지겨워요 사라진 마음이 지겹습니다 공은 왜 자꾸 돌아와? ―남현지,‘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부분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2024. 창비) 고장 난 사람처럼 공만 바라보고 있다. 공이 계절을 물고 몇 바퀴를 돌고 도는 동안. 인용 시의 중략 부분처럼 보다가 잠시 멈추는 식으로 내내 반복된다. 그것은 관람객만의 문법이 아닐 것이다. 감독에 가까운 투수였던가 포지션은 중요치 않다. 프랜차이즈 스타도 아니었는데 늘 이해하는 팬의 입장처럼 말이다. 남현지 시인은 부조리한 어떤 풍토나 공간, 시스템 혹은 대상에 대해 무감한 듯 반응한다. 시집 전체에 두루 포진해 있는 화자들은 “어딘 가의 직원” “일행” “관람객” “모르는 사람” “관리인”의 포지션으로 일관된 보법을 보인다. 한 시인은“당근 거래를 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라고. 가장 짧은 대면의 순간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무례하지 않으면서 거래 후 그 즉시 “몰랐던 사람”으로 총총 사라져야 하는 것. 자본주의적 인간과 인간이 대면 하는 방식이다. 최근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을 일컫는‘자낳괴’라는 신조어가 낯설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남현지 시에는 구조적으로 불화가 내장되어 있지만, 그는 첫 번째 시부터 마지막 시까지 시종일관 개입하지 않는다. 이러한 거리두기 혹은 객관화의 방식이 외려 독자를 부조리한 공간에 밀착하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래서인지 시집 해설에서 전승민은 “시가 우리를 위무하는 방식이 아닌 외려 “우리가 시를 위로할 수 있지도 않을까?”를 타전하고 있다. 가령 “그가 자신의 숨은 마음을 열어두는 행위는 고작 누설에 그치고 마는데, 그의 들끓는 마음은 모든 시의 상연이 끝난 뒤에도 안전하게 밀봉되어 있을 따름”이며,“그 감금이 발휘하는 거대한 고독을 감지할 때 우리는 화자가 제발‘덜’건강해지기를, 나아가 급진적으로 아픔을 호소하기를, 시가 불손해지기를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인용되지 않은 시 “행복의 문턱”에서의 다음 구절처럼. “개나리를 터뜨린다, 내가 개의 목줄을 밟고 지나간다, 그대의 개가 짖는다”

2025-04-20

“그런 날들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이희정시인 작고 예뻐서 데려온 애가 남천이었어요. 어디서나 잘 자란다고 하고. 한동네 살다가 이사간 금천이라는 애도 생각나고. 그래서 잘 키워보고 싶었죠. 생각날 때마다 창문 열어 주면서 물 주면서 그랬는데 시들해요. 일조량이 부족했을까요. 금천이가 중학생이 되어 놀러왔을 때 엄마 뒤로 숨던 일이 생각납니다. 동네에 그애가 있다 생각하면 신나면서도 그랬어요. 그런 날들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물건을 돌려주러 가는 길에 그애가 자란다면 딱 이렇겠구나 싶게 엄청 크고 무성한 남천을 봤어요. 이 집에서는 밖에 내놓고 기르는 모양이더라고요. 남천을 잘 키우면 이렇게 되는구나. 정신이 번쩍 드는 겁니다. 키우던 애가 커서 키우는 마음이 뭔지 아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왜 자꾸 잊을까요. 얼른 가서 남천을 봐야겠어요. -임승유,‘중요한 역할’전문 (‘생명력 전개’, 문학동네) 흔하디 흔한 남천(havenly bamboo)이라는 식물이 있다. 영하 17도의 추위를 견디며 꽃과 열매, 잎이 모두 사계절을 살아낸다. 점입가경, 전화위복 등의 꽃말로 가을에 성숙해져서 겨울로 갈수록 더욱 붉어진다. 오가는 거리 건물 앞이나, 갓길 화단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다. 임승유 시인의 시선은 흔한 것에서 낯섦의 형식으로 나아간다. 시집 해설을 변용해 이렇게 달리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 되기 위해 필요한 나와 그러나 그 나란 그 자체로 온전한 나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기억, 무의식적인 행동, 그것에 대한 시선들이 얽혀 있는 나 그리고 알파라는 형식 말이다. 어떤 요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재료가 당연히 필요하듯, ‘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나’의 시선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시선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이 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식물과 공생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시간이 아닌 식물의 시간으로 삶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보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낯선 시선으로 나를, 일상을,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삶을 헤쳐나가는 방법 하나쯤은 강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동네에 가끔 들리는 카페가 있다. 카페 이름이 좋아서, 혹은 카페 주인이 금천이와 같은 친구여서. 다 떠나서, 그 작은 카페 통창 밖으로 작은 화단이 있다. 담장에 우드 울타리를 타고 남천이 자라는데 생명력이 남다르다. 화자가 말하는 것처럼 “엄청 크고 무성한 남천” 이를테면 식물의 상태가 언제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한다. 얼마 전 작은 화분에 옮겨와 서재에 두고 보는데 시들하다. “생각날 때마다 창문 열어 주면서 물 주면서” 돌보는 데도 마음만큼 좋지 않다. 처진 생명을 보는 일은 슬프다. 지난 계절 시린 영혼을 보는 것처럼 덩달아 아프다. 시인의 시에서 남천이라는 이름을 만나고, 키우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남들이 다 가고 없는 겨울 화단, 늦은 계절 점입가경의 염을 담아 남천이라는 이름을 올린 태초의 사람, 키우는 자의 마음에 대해. 식물이든 사람이든 생명을 만지는 일은 어렵다. 제 살던 곳에서 조금만 환경이 바뀌어도 낯설어도 다치기도 쉽고 상하기도 쉬운 언어여서 말이다. 이만큼의 봄이 왔다, 순서대로 피고 또 질 것이다. 해마다 교정의 벚꽃 터널에서 단체 사진을 찍으며, 같은 듯 보여도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달라지는 구성원들을 발견한다. 생명의 연이란 그래서 귀하다. 얼른 가서 서재에 두고 온 남천을 돌봐야겠다.

2025-04-06

다음이라는 미래에 눈이,

이희정시인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꾸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 장석남 ,‘맨발로 걷기’ 부분(‘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사, 1991) ‘맨발로 걷기’는 1987년 경향일보로 등단한 장석남 시인의 첫 시집에 실려 있는 등단작으로 그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잘 보여준다. “생각난 듯이 눈이 내”리듯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 자연 현상과 만나고, 이는 단순한 외부의 일시적인 변화로만 보지 않는다. 시인이 풍경을 보는 방식은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갈등 속에서 외부의 큰 흐름에 휘말려 있음과 동시에 그 혼란이 내면의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포착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 이루”듯 장석남 시인의 시선을 따라 내려가던 풍경은 저도 모르게 꽤나 먼 풍경에 이르게 되는데. 가령 2024년에 발표된 양안다 시인의 ‘다음 미래’속에 묘사된 이런 풍경이 그렇다. “나는 네가 쏘아 올린 눈보라 속에 있다. 그것은 지구 최초의 인간이 사랑한 풍경이거나 지구 최후의 인간이 마주할 풍경이다. 내가 아름답게 바라본 형상들이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모순 속에서. 지구 최후의 풍경은 인간이 아니지만 지구 최후의 풍경은 인간이 될 것이다. 뙤약볕도 없이 눈보라가 그치고 물이 되어 흐른다. 네가 두 팔 벌린 물보라 속에 내가 잠긴다. ” 묘하게도 그 예전 젊고 푸른 장석남 시인의 첫눈에 담긴 그 먼 풍경이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듯 양안다 시인의 “네가 쏘아 올린 눈보라 속”처럼 포개어지는 오늘이 있어, 기실 우리의 시간은 과거로부터가 아닌 미래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꾸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라는 감수성으로부터 어떤 감각은 오래도록 시리게 한다. 마치 장석남의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는 고백이 다음의 양안나 시인에게 닿는 것처럼. “끝나지 않는 마음의 동정”이 “어른이 아이를 망치자 아이는 복수를 학습”하게 하고 “어른이 된 아이가 아이를 망치자 망각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예의 먼 맨발 걷기의 감수성으로부터 회복의 가능성을 타전해 보게 한다. 우리가 문학을 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의 미래를 믿는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최초로부터 혹은 최후로부터 두 시인은 인간의 지속적인 고통을‘눈’이라는 시린 형상을 통해 보는 것에서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으로 조우한다. ‘발이 시리다’는 감각의 표현은 기억 속에서 생겨나는 세계의 불화와 내면의 고통이 물리적 경험으로 나타나는 섬세한 묘사일 것이다. “네가 아름답게 바라본 형상들이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모순”

2025-03-23

기대고 싶은 것들, 여기에

이희정시인 기대고 싶은 것들 전봇대 아래 모였다 이 빠진 그릇이며 다리 빠진 의자며 쓸모에 목숨 바친 뒤 여기 죄다 나앉았다 한철 영화 무색하게 주눅이 폭삭 들어 내일 없는 얼굴들 통성명 필요할까 묶인 몸 달그락거리니 길짐승들 킁킁댄다 찌그러진 몸 위로 햇살들 놀다 가고 휘청대던 취객이 피로를 내던지는 이별이 왁자한 이곳에 배경이 시들고 있다 ― 홍외숙, ‘여긴 이별이 와글대요’ 전문 (‘제 19회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작) 시인의 다짐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아파하고 있는 것들, 버림을 당한 것들, 도와 달라고 내미는 손들에게 마음이 가는 계절, 지켜봐 주는 모든 평범함에게 감사와 사랑을 나눠야겠다”는. 그런 시인의 눈길이 닿은 곳은 흔하디흔한 일상의 풍경이다. 정작 보고도 모른 척, 설령 눈빛이 머물라치면 외면하기 십상인 불편한 모습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공간에 머문 시인의 눈빛을 그들은 다시 호출한다. 이제 그렇게 호출된 것들이 다시 우리를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이 시는 재현된다. 도입부 “기대고 싶은 것들 전봇대 아래 모두 모였다”는 첫수의 진술은 사뭇 눈길을 끈다. 지나치기 쉬운 누추한 풍광을 ‘전봇대’라는 완충재가 견인하며 제목 ‘여긴 이별이 와글대요’의 정황을 내밀한 서경으로 떠받치고 있기에. 이 시를 지탱하는 핵심 관계는 전봇대에 기댄 “이 빠진 그릇”이며 “다리 빠진 의자” 따위의 ‘쓸모를 다한’ 것으로 이제 더 이상 꼿꼿하게 자력으로 설 수 없는 것들과의 연민이며 연대이다. 이들의 씁쓸한 외경을 시인은 절묘하게 내면의 정경에 대입해서 풀어내고 있다. 결국 “쓸모에 목숨 바친” 캐릭터들이 지닌 특별한 힘은 존재의 ‘버려짐’에서 발원하고, 그들 사이의 연대는 동병상련의 상처로 조우 하는 것에 있다. 해서, 이 시가 거둔 성과는 만만치 않다. 헐한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상태를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시가 지닌 고유의 역할을 담담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런 때 ‘문학이 하는 일’에서 김영찬식으로 말하자면, “이즈음 예술인들이 대체적으로 공유하는 문학 혹은 글쓰기는 현실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否認)이며, 현실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태도에 있다. 그러니까 이 시를 높이 평가했던 지점은 더럽고 보기 힘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가 의식의 ‘건강함’과 리얼리즘적 기율에 대한 충실함일 것이다. 그것으로 환기와 제언의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기에. 사람은 누구든 언제가 되었든, 결국은 파기될 운명 앞에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실존적 상처를 내장하고 있다. 종내 이 씁쓸한 내면 풍경을 “길짐승마저 킁킁댄다”는 더할 나위 없이 사실적인 이 묘사적 상황 앞에 우리의 감정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환멸에 치닫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마저 다소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이는 시조의 율격이 주는 율동성에서 기인한다. 이렇듯 시인은 아픔을 아프게, 상처를 상처답게, 무심한 듯 유정하게 기댈 수 있는 전봇대라는 기율에 기대어 상처들이 상처들의 주체가 되어 서로를 보듬고 있다. “이별이 왁자한 이곳에”

2025-03-09

다행인 상처가 있어

이희정 시인 러시아 인형처럼 외부의 모양과 내부의 모양이 똑같다면,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부서지고 깨어진 상처는 우리 가 세상에 포함될 때, 그 속박에 굴복하지 않고 벗어나려는 몸 부림이다. 그래서 나는 상처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다. 상처받는 것은 세상의 모양과 나의 모양이 끝없이 부 딪쳐 모서리가 부서지고 깨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마침내 상처는 우 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것이 봄꽃과 가을 단풍과 저 석양이 자신의 상처로 물드 는 이유이고, 한 생명의 탄생이 다른 생명을 찢고 나오는 이유 이며, 시인들이 자신의 상처로 시를 쓰는 이유이다. ―신용목,‘다행인 상처’부분 (‘당신을 잊은 사람처럼’, 난다, 2024) 울음소리가 깊었다. 긴 울음 끝 양쪽 눈은 비대칭이 되고 마는 것. 아닌 게 아니라, 이제 짓이겨지고 깨어진 한쪽 눈은 완벽한 상처다. 상처도 힘이 된다면 소리 내어 울어 볼 일이다. 바닥에서부터 울어 본 적 있는가. 호피족 잠언을 빌리자면“우는 걸 두려워 마라. 울음은 당신 마음을 슬픈 생각에서 해방시킬 것이니, 소리 내어 진정으로 울 줄 아는 자는 진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자, 이제부터 탈출기를 쓸 것이다. 마음의 유린도 반복되면 폭력이 된다. 마음은 몸을 상하게 하기에. “세상의 모양과 나의 모양이 끝없이 부딪쳐 모서리가 부서지고 깨진” 생명체의 안쪽이 되지 못한, 바깥은 그들에 의하면 흘리는 눈물조차도‘아무것도 아닌 일’에 불과할지 모른다. 눈물이, 슬픔이 무기가 될 수는 없다. 그저 진심을 말하려는 것일 뿐. 약한 자는 울음으로 가해하지 않는다. 다스리려는 자는 상대를 아끼지 않는 자이다. 그들의 언어는 가변적이고 비겁하기 일쑤여서 여러 차례 변주되었던 언어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비열한 웅변을 토해낸다. 대체로 그들의 종결법은 상대의 상처를 제 것으로 전복하려는 제언처럼 여겨진다. 이제까지 지탱해 온 외피를 안에서부터 송두리째 흔들어버린다. 이럴 때 진실은‘쓸모’가 끝난 후에야 발견된다. 대개 약한 자들은 이 상처에서 침묵으로 진실을 가리기 쉬울뿐더러 그것이 슬픔의 궁극적 이유다. 하지만 시인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마침내 상처는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통성으로 부르짖는 울음이 상처를 찢고 나오는 詩의 이유, 이유의 이유가 되는 것이라고. 이것이 신용목(1975~) 시인의 산문집‘당신을 잊은 사람처럼’이 2016년 초판 이후 재발행된 이유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새처럼 소리를 잘 내는 자, 잘 울게 하는 자. 기실 시인은 선명자(善鳴者)라고 했다. 언젠가 시인이 육성으로 낭독해 주던 긴 시편을 내 한쪽 눈은 기억하고 있다. 그것이 그가 약한 이들을 돌보는 애도의 한 방식이란 것을. 기어이 꽃샘의 상처를 이기고,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니. “자신의 상처로 물드는”, “한 생명의 탄생이 다른 생명을 찢고 나오는”것처럼 “시인들이 자신의 상처로 시를 쓰는 이유” 그러니, 이제 나와 당신들의 상처가 탈출기가 될 것이라는 독해에 부서진 눈을 얹어 보는 것이다.

2025-02-16

‘누구나’밤엔 명작을 쓰지

이희정 시인 기도하다가 기도가 막혀 죽은 사람은 없겠지만 할머니가 절에 가서 기도하고 받아 온 떡을 내가 먹다가 질식사할 뻔하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헨리 하임리히 씨를 몰랐겠지 모르고 살아도 좋을 이름들 사랑하는 이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 알츠하이머가 독일의 정신과 의사 이름이란 걸 알게 된 것처럼 계기가 운명의 계량법은 아니겠지만 (중략) 어떤 바람은 병증처럼 전조 증상도 없이 후유증을 남기며 시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다 다짐은 무슨 힘으로 단단해지나 시를 배우겠다는 노인이 내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실금이 갔고 따뜻했다 ―김이듬,‘하인리히, 하임리히’ 부분,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타이피스트, 2024) 책방 수북에 김이듬 시인이 왔다. 선뜻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머뭇거리기를 한참이었다고. 스스로 북토크를 하겠다는 시인에게 무뚝뚝한 성격의 책방 직원은 “누구시냐”고 반문했고, 외근 중인 편집장의 놀란 목소리가 전화기를 푹 뚫고 나왔다. “누, 누구라고요? 김이듬?” 도처에서 초대하려는 시인인데 ‘굳이’ 서울에서 이곳을 자청해 왔다. 일산에서 ‘이듬 책방’을 운영한 이력이 있는 그녀였다. 높은 임대료와 운영비에 비해 팔리는 책은 고작 하루 서너 권이었다고, 대학 강사 수입까지 탈탈 털어 버티다 장렬하게 닫았다고 했다. 작은 책방에 대한 각별함도 있었겠지만, 수도권에서 보자면 변방이지만 책을 중심으로 작가와 독자를 잇는 책방지기 김강 소설가의 맹렬한 분투가 익히 알려져 발걸음을 이끌었다고. 진주에서 태어난 김이듬 시인의 사투리 억양은 친밀했다. 그녀의 시집을 스무 명 남짓 모인 이들이 함께 돌아가며 낭독했는데 마이크 없이 가공되지 않은 목소리의 시어들이, 담백한 구름처럼 소담한 책방 행간을 떠다녔다. 이른바 전문 낭송가들의 기성화된 독해의 가공 없이 낭독하는 독자들이 나름의 호흡으로 조근조근 풀어내는 시편은 진정성어린 울림이 더 했다. 말하자면 옷에 몸을 맞추는 독법이 아닌 몸에 옷을 맞추는 수제 맞춤복 같은 몸에 착착 감기는 발화법일 것이다. 소탈하고 낮게 번지는 소리의 밤, 시집에 그들의 이름을 사인하고 ‘굳이’ 메모지에 새겨 담아가는 모습에 마냥 “실금이 갔고 따뜻했다” 그녀의 또 다른 시편 “톱자국 지니고 성장한”“도끼 자국과 함께 커가는”“천둥 벼락 맞고도 무성해진 숲”같은 벽조목이 인장으로 오는 밤,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라는 시인의 말이 실감으로 오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독일 유학 시절 빠져들었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에 담긴 두 개의 얼굴은 그녀 시의 메타포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시인 김이듬은 내면에 패인 도끼 자국과 천둥 벼락을 숨기지 않는다. 자기 삶을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을뿐더러 패인 삶이 그대로 시가 되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의 행운목을 주문처럼 나누는 그녀였다. 다소 센 듯한 외양과 달리 누구보다 겸손하고 다정해서 방청석엔 바다 마을 주민들이 흐뭇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곧 시인이 간헐적으로 와 있는 집필 공간으로 태워 갈 것이라고. 더구나 시인에게 손을 포갠 이들은 생업으로 바쁜 시간대 가게 문까지 닫고서 달려온 동네 이모, 동네 언니들이란 이름들이었음을. “한순간 빛났던 한 구절 때문에 한평생 다정하게 기다리는 이름들”.

2025-02-02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이희정 시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 디딤돌을 놓고 건너려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디딤돌은 온데간데없고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디딤돌이다 -신대철, ‘강물이 될 때까지’전문, (‘무인도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초판 1쇄 1977) 시인은 기어이 강물이 되려는가 보다. 이 시가 수록된 신대철(1945~) 시인의 시집‘무인도를 위하여’는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일곱 번째 시집으로 1977년 초판 이후 2022년 재판 9쇄를 거듭하며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이 출판사의 시선집이 600번대 임을 보더라도, 아득하고도 유장하게 흐르는 시인의 강물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1968년에 등단한 신대철 시인은 ROTC 출신 GP장으로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며 북파 공작원들을 송환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의 군대 체험은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의 충돌을 일으키게 하는 경험이기도 했지만,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한 시대를 통과해 오면서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한발 물러서서 숲과 나무, 자연의 사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시간을 통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신대철 시인에게 작품의 진실은 이념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김현의 말대로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섭의 한 수단’이며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감염시키는 활동이라고 했다. 해서, 도입부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는 화자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내며 시작한다. 시인이 건너는 강물에서 맞닥뜨린 상황은 시공간적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사람에 대한, 흐린 물, 세상에 대한 어떤 복선도 담지 않았다. 건널 듯 말 듯 머뭇대고 두리번거리며 뒤돌아보게 하며 마침표를 찍는 순간을 미루는 듯한 이 시의‘강물’은 이상하게 먹먹하다. 흐린 길 앞에 주저하는 사람을 닮아서, 인생의 흐린 길을 닮았기에.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만난 “흐린 강물”은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는 진술처럼 화자의 내면에는“뒤들 돌아보지” 않아야 할 불안이 내연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존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흔하디흔한 인생관이지만 결국 대독할 수 있는 화자의 자격은 ‘사람’이 아닌 ‘디딤돌’이라는 익명성에서 온다. 그러니 시 속에서 시종 교차 되는 디딤돌’과 ‘사람’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빛과 그림자 같은 존재인 건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구해주는 이 언술은 결국 살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전력을 다해 깨우쳐가야 하는 절박함 일 테니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그 모든 상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람이 아닌, 디딤돌로 고쳐 살아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은 자신이 만들어낸 화자 뒤에서 관조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마치 그치지 않는 한 인생의 고난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다. 흐린 강물 앞에 마침표를 찍는 대신 어쨌든 또박또박 걸어가는 모습으로 기어이 강물이 되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강물이 될 때까지”

2025-01-12

첫 줄이 써진다면

이희정 시인 흰쌀이 익어 밥이 되는 기적을 기다린다 식기를 가지런히 엎어두고 물기가 마르길 기다리듯이 푸릇한 것들의 꼭지를 따서 찬물에 헹군다 비릿한 것들의 상처를 벌려 내장을 꺼낸다 (중략)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인다 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만이 오로지 사람다워 보인다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 아침상을 차린다 나쁜 일들을 쓰다듬어주던 크나큰 두 손이 지붕 위에서 퍼드덕거릴 때 햇살이 집안을 만건곤하게 비출 때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을 간장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돕고 있다 살점을 떼어낸 듯한 묵상이 눈물처럼 밥상에 뚝뚝 떨어진다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모은다 -김소연, ‘생일’부분,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운명이 중력에 맞서는 힘겨운 날들이다. 하루키는 “역사가 인간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명제는‘그 당시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1Q84) 김소연 시인(1967년~)은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기적이라고 말하는 생일 밥상을 차려내고 있다. 시에서 화자는 눈처럼 흰 쌀밥을 지었지만, 나는 전날 밤 오래 삶아 놓은 팥에 찹쌀과 멥쌀을 반반 섞어 전기밥솥에 앉혔다. 팥은 나쁜 일을 막는 벽사진경의 염을 지녔다기에. 하지만 팬에 기름을 두르고 약한 불에서 센불로 이동하며 비릿하게 익어가는 해동 도미의 살냄새를 앓아야 했다. 거기에 푸른 잎사귀를 데쳐 조물조물 무친 나물에서 풍겨 나오는 참기름의 고소한 풍미까지. 다시 들춰 보는‘새천년 희망증서’는 오래전 즈믄둥이로 태어난 첫 아이에게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 보낸 첫 증서였다. 함께 딸려 온 선물 모빌과 함께 출생아 조사라는 행정절차를 거치느라 늦게 당도했다. 언제나 기다리는 것들은 아직이거나, 때를 지나기 마련인가. 천장에 달린 모빌은 제때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지나쳐 간 때란 누군가에는 쓸모가 되는 아이러니가 운명이고 중력이기도 해서 다음 아이에게 와서는 쓸모가 되기도 한다.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이”고“오로지 아름다워 보이”는 이 아이러니가 슬픔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시집 발문에 얹힌 황현산의“씩씩한 시인 김소연이 가장 깊은 슬픔으로 짠 시간이기에 슬프다. 슬픔만이 진정으로 씩씩한 것을 만든다는 아이러니가 슬프다”는 위무의 서신마저 애도가 된다. 세상의 멸망을 막아 보겠다는 시인의 열망이 미명의 중력을 통과할 때 붉은 해가 떠오른다. 지난해 머나먼 타국 열기구 위에서 맞은 일출의 순간, 아스라한 상공을 오르기 전 열심히 반복 학습했던 건 다름 아닌 랜딩 연습이었음을.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 그 위에 두 손 꼭 모으며 첫 줄은 써질 것이라는 희망에 간절함을 얹어 보는 것이다. “햇살이 만건곤하게 비출 때”

2025-01-05

“아름다운 아이였잖니….”

이희정 시인 아무것도 꽃과 풀 속의 영광된 시간을 되돌려 놓을 순 없지만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며,오히려 그 속에 담겨있고,언제나 있어 왔던 원초의 조화 속에 담겨있고,죽어서도 지킬 진실된 마음속에 담겨있는,주의 권능 속에서 발견하노라.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심장으로 인해,그 심장의 따뜻함과 기쁨과 두려움으로바람에 흩날리는 가장 연약한꽃 한 송이조차,너무 깊어서 눈물로도 표출할 수 없는사색을 믿게 하누나.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어린시절 회상을 통한 영원불멸의 노래(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182~190행 / 204~208행) 시가 무엇을 볼 수 있다는 믿음, 워즈워스의 시는 그렇게 재현된다. 스크린 속 강물처럼, 혹은 스크린 밖 불멸의 노래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Robert Redford)의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을 기억하는 이라면 알아차릴 것이다. 영상이 펼쳐내는 슬프고도 은유적인 정경에 잠기고 감정에 몰두하다가도 어느새 저만큼 훌쩍 흘러가고 있는 강물의 순간들을 말이다. 이제 우리가 영화 속에서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1770~1850)가 노래한 어린 시절 회상을 불러내면 어떤가. 이때 다시 마주하는 영상 혹은 시는 사뭇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영화의 공간적 주요 배경은 노먼의 전기를 다룬 고향인 몬테나주의 울창한 숲과 빅 블랙풋 강(Big Blackfoot River)이다. 매 순간 사로잡혔던 영상을 되짚으며 시와 교접하는 지점을 반추하며 마음에 번지는 의미를 사색해 보는 것이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은 아름답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강에서 제물낚시(Fly fishing)를 하는 장면은 사실상 아들과 동생을 잃은 가족의 고통스러운 밑그림이다. 그러니 영화에서 목회자인 아버지와 아들이 낭송한 이 시구는 불멸의 영혼을 믿겠다는 의지이며 애도이다. 한 줄기 상실의 강이 아프게 흐르는 가운데 화자는 결국 영화에서 가족처럼 결국‘남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워즈워스의 수많은 시편이 마음의 궤적과 파장을 깊게 담아낸다. 문학가 엄용희는 “자연에 관한 사색과 찬미, 프랑스 혁명 초기를 배경으로 한 인본주의적 열정, 삶을 채워가는 고통의 면면들에 대한 숙고, 지나간 일의 새로운 이해와 감정의 고양 등 워즈워스의 시를 읽을 통로는 다양하다며 워즈워스는 시를 배우기 좋은 시인”이라고 했다. 워즈워스의 시에 자주 드러나는 죽음의 극복이라는 지향성은 영혼의 불멸을 이루려는 방편으로서의 언어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의 ‘불멸성’은 ‘죽음’을 읽는 다른 방식이 된다. 끝내 죽음으로 내던져진 아들 폴의 알코올 중독과 도박장 사건은 추악한 인간사의 표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종일관 아름다운 숲과 흐르는 강의 풍광의 전망으로 인도하며 인간사의 내밀한 고통을 어린 날의 회상 장면으로 몰입시키는 것에 시는 구조적으로 배치되었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에 드리워진 기다란 곡선의 낚싯줄과 물결을 투과하는 빛의 환희가 한없이 고요한 워즈워스의 시를 내장함으로써 그 기품은 고조된다. 어린 시절의 회상은 타자에 관하여 신실하고도 식지 않은 심장을 가진 아들 폴의 아름다운 내면을 응축하고 있기에. 영화 속 아버지의 마지막 대사는 간접화법으로 흐른다. 마치 강물처럼, 시처럼 멈추지 않고. “아름다운 아이였잖니….”

2024-12-29

슬픔의 광야에서

이희정 시인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길 정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고정희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전문 (‘아름다운 사람 하나’, 문학동네) 역사는 반복되기도 한다. 우리는‘역사를’ 배울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배워야 한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반복될 때 생겨나는 것은 관계의 성질이다. 그러니까 복간본으로 만나는 고정희 시인의 숫자는 기수가 아니라 서수다. 반복되는 대비항들은 서로 대등하지 않다. 처음의 선행이 없었다면 복간은 개진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간이 부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고정희 시인에게서 중요한 것은 반복성인지 모른다. 반복 속에는 그리움의 내성이 있다. 이 시집의 서문에서 그리움의 마음을‘I Miss You’라고 한다면‘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라는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을 얹은 점은 이채롭다. 그렇다. 그녀에게 시는, 그 깎아지른 벼랑과 같은 생은, 무너지는 것들에 대해 혼신의 영혼을 바친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1948년 해남에서 태어나 1991년 지리산 등반 중 실족사로 43년의 생을 마감한 고정희 시인을 하나의 언어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민중 의식, 그리고 장르의 실험, 기독교 의식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시인의 장력을 가늠할 수 있다. 1980년대 시인으로 수렴되는 화자는 자신의 40대를 바라보고 있다. 더욱이 “화나고 성나는 날 / 위로받고 기대고 싶은 날 / 질겅질겅 밟히고 뺨을 딱딱 맞”는 화자는 오른뺨에서 왼뺨을 내주고 화를 내는 대신 발등을 내어준다. 시인의 종교적 죄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여기에 이유 같은 것은 틈입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중요한 질문은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정의로운가 하는 것이다. 해서 이 시에서 정의는 성서 구절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언어로 묘사된다. 시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는 분기점은 “포르말린”“옥시풀”“유한락스”라는 화학제의 기표일 것이다. 상처받은 마음을 표백제로 위장해 지워버리겠다는 위악보다는 “자신의 따뜻한 피”와“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 없다는 기의가 승하다는 사실이다. 시인에게 이 지점은 중요한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고정희의 시‘무너지는 것들 옆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로소 개진되는 이야기다. 그 선택은 최선이 아닌 최악의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동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이라는 화자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자신의 분명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면서 주체적으로 해낸 최고의 선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화자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경험 속으로 무거운 멍에를 딛고 걸음을 촉진해 보는 것이다. 인생의 거친 광야에서 “내 사지에 돌을 눌러 둘 수는 없”을 테니까.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2024-12-15

들어내지 못한 말이 있지

이희정 시인 인테리어 기본 요건은 자리를 바꾸고 요소를 덧대는 게 아니라 들어내는 것이라고, 더 좋은 관계를 바란다면 관계에서 나와야 할까 그렇다고 고라니처럼 고속도로로 뛰어들어선 안 된다 분갈이 하는 아저씨는 흙을 더 채우는 게 아니라 뿌리에 있던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숨 쉬게 한다고 했다 언니가 없으면 독방을 차지할 거라 기대했지만 나 먼저 들어낼 줄은 나도 몰랐듯이 들어내도 나가지 않는 게 있고 다 알면서 들어낼 수 없는 것도 있다 고라니가 잘못 뛰어든 곳은 고라니가 들어낸 길이었을까 들어내지 못한 길이었을까 ―이규리, ‘들어내다’전문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2014)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언어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 어떤 언어는 나를 떠나가고, 어떤 언어는 내가 놓아버리고, 어떤 언어는 내 곁에 남는다. 그것이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든 말이다. 여기 이규리 시인의 ‘들어내다’는 시의 언어를 담보로 고라니의 언어를 빌렸다. 다시 말해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것을 시(詩)라고 부를 때, 고라니가 증언해야 하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시의 미덕은 별 어려운 말도 없이, 어려운 비유도 없이,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에 있다. 시가 진행되면서 ‘들어내는 것’과 ‘들어내어지는 것’의 인식의 도약이 이루어진다. “고라니가 잘 못 뛰어든 곳”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사건이 외려 평범한 차원으로 치환되는 발견과 함께 이규리 시인의 삶의 태도 또한 최선의 언어가 된다. 때로 우리는 어떤 관계에서 나와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분갈이 하는 아저씨가 뿌리를 숨 쉬게 하기 위해 흙을 털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때일지라도 “고라니처럼 고속도로를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시인의 언어이다. 이를테면 “독방을 차지할 거란 기대와 달리 외려 자신이 들어내어 질”때 적절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들어내어진’ 고라니의 언어들이 갈 수 있는 선택지가 고속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에 있다. 가령 이규리 시인의 ‘시의 인기척(난다, 2019)’이란 산문에는 이런 정황을 예시하는 구절이 있다. “평소 순한 짐승이 난폭해지는 건 환경이 맞지 않다는 증거다. 그 난폭성을 내부로 돌리는 자학 또는 자해란 보통 선량한 사람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또 이런 대목은 어떤가. “목줄을 놓친 개 주인과 목줄을 놓아버린 개 주인은 다르다. 진실 공방은 무의미하다. 자의와 타의, 거짓과 진실은 서로 바꿔치기기가 가능하다” 다시 최선을 다해 들어내 보기로 하자면 “어떤 회복은 원상복귀가 아니라 절단과 정리”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마음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실은 냉철하고 매운 언어로 들어낼 수 있는 인테리어의 언어가 있을 법도 하다. 다독이면서 온화하고 속 깊은 성찰을 부드럽고 매운 화법 안에 담아내는 이규리 시인이라면 어떤가. “들어내도 나가지 않는 게 있고, 다 알면서 들어낼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어는 몸을 갖고 있어서 말과 행동은 유리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당신과 나에 대해 최선을 다한 시인의 언어라면, 그것은 사람을 대하는 진정 어린 삶의 태도에 있지 않을까. 마치 시인의 언어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쉬이 잘려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고 몸인 것처럼 말이다. “고라니가 잘못 뛰어든 곳은 고라니가 들어 낸 길이었을까 / 들어내지 못한 길이었을까”

2024-12-01

모과가 모개에게

이희정시인 향이 나지 않아 속이 썩은 것 같다고 해서 얻어온 모과 제 방에 들어오니 향이 살아납니다 향이 없었던 게 아니라 방이 너무 컸던 거예요 애옥살이 제 방에 오니 모과가 방만큼 커졌어요 방을 모과로 바꾸었어요 여기 잠시만 앉았다 가세요 혹시 알아요 누가 당신을 바짝 당겨 앉기라도 할지, 이게 무슨 향인가 하고요 그대 잠시 모과가 되는 거죠 살갗 위에 묻은 끈적한 진액이 당신을 붙들지도 몰라요 이런, 저도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의 즙이랍니다 오세요, 누릴 수 있는 평수가 몇 발짝 되진 못해도 죽은 향이 살아나라 웅크린 방 ―손택수,‘모과의 방’전문 (‘시와 사람’, 2021) 종종 모과를 모개라고도 한다. 못생겼다는 놀림의 비유에 애정을 담았을 때가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손택수의‘모과’는 웅크린 방에 들어선 ‘모개’처럼 따스한 감성이 빚은 소박하고도 끈적한 산물이라고. 여기서 ‘모과의 방’은 가장 좁은 공간에 안구를 밀착해서 들여다보았을 때 그 공간이 거대하게 팽창해 우주적 부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시인은 단 한 줄의 행갈이도 없이 배행을 붙여놓았다. 촘촘하게 바싹 당겨 앉힘으로써 모과의 공간에 밀착하게 한다. 언젠가 안동 가는 길에 들렀던 권정생 동화 작가의 방을 들여다본 기억도 그랬다. 관광객들이 뚫어 놓은 손가락 구멍의 렌즈에 들어찬 한 뼘 작은 방이 투명해서 외려 가늠할 수 없는 크기로 부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손택수 시인의 많은 작품들처럼 이 작품 또한 사소한 잔영이 점점 커다랗고 짙게 일렁거린다. 가령‘붉은빛’이라는 시에서 “볼이 떨어져 나갈 듯 추운 날/ 大口처럼 벌어진 진해만과 가덕만 사이 / 한류와 난류도 볼을 부비면서 살이 오르는 곳”처럼 대구라는 생선을 커다란 입으로 병치해 대구가 대구(大口)가 되는 것과 같은 문법이 되는 것이다. 화자의“애옥살이” 방에 들어온 모과는 이내 방만큼 커지니 말이다. 여기서 커지는 것이 향이건 공간이건 중요하지 않다. 사소하고 조그마한 그것도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진 낙과인 모과가 하강에서 상승하는 것처럼, 죽었다고 생각했던 향이 “몇 발짝 누릴 수 없는” 공간과 함께 살아나는 것이다. 이 훈훈한 동화적 알레고리 모과에는 하찮은 듯 쓸쓸하지만 끝내 숨겨지지 않는 향이 있고 두드러지진 않아도 억누를 수 없는 팽창의 힘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과의 발향과 관련해 특히 마음을 붙드는 것은 “누가 당신을 바짝 당겨 앉기라도 할지 / 이게 무슨 향인가 하고”“살갗 위의 끈적한 진액이 / 당신을 붙들지도” 모른다는 언술에 있다. 그 모과의 향처럼 누군가의 생을 불러내는 이 연상은 모과가 몇 평 누릴 수 없는 방을 구하고, 방이 모과의 향을 살리듯 방과 모과가 같은 동세로 “어찌할 수 없”이 타자화된‘고독의 즙’인 대상들을 자기의 방, 의식의 방으로 불러들이는 것에 있다. 때때로 우리 사회의 부패한 시스템이 오작동하거나 무신경한 상황에서 약한 것들이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더 약한 자를 보살피게 한다. 마치“향이 나지 않아 속이 썩은 것 같다고 해서 얻어온 모과”처럼 말이다. 시인 손택수 특유의 재치와 넘치지 않는 해학은 모과의 방이라는 개별 에피소드를 우화적인 묘사를 통해 비판적 메시지를 소박한 실감으로 전하며 모과와 방이 동질적으로 맞붙은 채 바짝 당겨 앉게 한다. ‘모과의 방’ 근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세상이라는 무관심을 겪은 왜소한 생애의 필사적인 공감이다. 그러니 이제 나와 당신이 바짝 당겨 앉아 모과의 향을 구해낼 차례다. 밀착은 모과와 방 그 둘만이 아니라 그 좁은 공간에 다가가 둘만의 발화에 참여함으로써 소통하는 것이다. 비록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더라도 둘은 지상의 밑바닥으로부터 구원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존재와의 공감과 소통이 서로를 보살피는 주체가 된다. 시인의 세계에서 희망은 추운 날 볼을 부비며 밀착하는 붉은빛의 고백과 같으리라. 모과의 향이 방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화자가 지속해서 고독의 살갗에 밀착해 간 것처럼. “오세요, 누릴 수 있는 평수가 몇 발짝 되진 못해도”

2024-11-17

닳아 가는 것들의 에필로그

이희정시인 가을이 닳고 있다, 바스락 바스락 몸살을 앓으며 시간이 닳고 있다 또 한 번 나이테 더하는 내 목숨도 닳고 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닳아간다 신발이며 옷이며 책상이며 자동차까지 모두가 닳아 가면서 말이 없다 생색내지 않는다 자신만을 위해 닳아온 시끄러운 나의 소리 깎을 새 없이 닳아 있던 엄마의 손톱처럼 이 가을, 누군가를 위해 말없이 닳아지기를 ― 김귀현, ‘닳아 간다는 것’ 전문 (‘너라는 화두’, 좋은생각) 기꺼이 닳아 가며 누군가를 ‘위해’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무조건적 사랑(agape)이라고 한다면 이 시가 그렇다. 시인은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닳아간다”고 했다. “가을이”“몸살을 앓으며”“닳고 있”는 “바스락”거리는 시간은 아낌없이 헌신적이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도 길들어 간다.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 “신발이며 옷이며 책상이며 자동차까지” 일상의 모든 것들이 사막의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한 말처럼 사랑도 길들어져 익숙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깎을 새 없이 닳아 있던 엄마의 손톱”처럼 말이다. 화자는 닳아 가는 가을 속에 슬그머니 “엄마의 손톱”을 부려놓고 “자신만을 위해 닳아온 시끄러운 나의 소리”를 해찰하고 있다. 시나몬 향 그윽한 가을이다. 렌즈에 담는다면 무엇을 담을 것인가. 아니 어떻게 담을 것인가. 첫 행엔 가을의 바스러지는 낙엽의 외양을 비추지만, 이후 이런 풍경들은 나이테를 더하며 닳고 있는 장엄한 목숨으로 점차 바뀌어 간다. 그 모든 슬프고 번잡한 일상으로부터 갑자기 뚝 떨어진 듯 초연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이렇게 내밀하게 들여다본 가을 풍경은 곡진하게 아름답다고 일러주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시간 속에 담긴 풍경이란 어떤가. 자신만을 위해 닳아온 시끄러운 나의 소리는 혼잡하고 시끄러운 현대의 우리들 삶 전체를 상징하는 부분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삶의 모든 시절에는 그 시절만의 치열한 문제가 있다. 세월이 흐른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문제가 달라 보이기도 한다. 오직 ‘나를 위해’라는 고유성은 결국 세월 속에서 ‘누군가’라는 익명성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마는 것. 그것이 시간이 가진 위무일까. 그렇게 줌인으로 시작된 시인의 가을은 서서히 줌아웃 되면서 화자가 바라보는 주관적 시점에서의 묘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화자는 바스러지는 낙엽의 시간 바깥에서 자신과 어머니의 헌신적 삶을 그대로 겹치면서 이 쓸쓸한 이야기는 온기 있는 이미지가 된다. 김귀현 시인이 걸어온 삶의 깊이만큼 진폭의 울림이 크다. 시인의 사유는 현역에서부터 지금까지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펴 온 개인적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그보다 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이타적인 세포가 생래적으로 내장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간 시인이 걸어온 시간이 욕망과 체념이 뒤섞인 풍경이었다면 닳아 가는 것들은 궁극의 화자가 닿으려고 한 시간 그 자체이다. 유채색 사유들이 무채색으로 등뼈 깊이 새겨진 나이테는 빛과 어둠이 그려내는 삶의 진경이 아닐까. 그 길을 향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사람의 생의 끝이 처음처럼 아름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시의 전체적 조망은 단풍 든 나무를 현상으로 인식하고 스산한 늦가을의 허전한 정취에 화자의 모습이 겹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칫 단풍이 발색으로 보이지만 기실은 탈색이다. 색이 빠지면서 비로소 안 보이던 제 색이 나오는 것이다. 생색내지 않고 닳아 가는 것들의 탈색이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고 있는 풍광, 이 또한 자연의 반복된 여정일테니까. “이 가을, 누군가를 위해 말없이 닳아지기를”

2024-11-03

여기서 마음껏 ‘아프다가’

아프다가 담 밑에서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손가락 두 마디만 한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한강,‘조용한 날들’ 전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오늘의 첫 대출 도서는 한강의 소설 ‘흰’이다.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 서점가는 물론 도서관의 풍경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한강 작품 찾아 읽기, 혹은 다시 읽기, 더해서 한강 작품 모아 읽기 등의 태그를 달아도 될 만큼 가히 노벨상 특수라 할법하다. 한강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시인이기도 하다. 작가의 등단 시는 ‘문학과 사회’에 실려 있는데 이후 발표된 시들을 모아, 한강은 첫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2013)’를 발간한다. 소설을 쓰는 중에 시를 써왔던 것들을 모아 출판한 것으로 작가에게 시와 소설의 경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듯하다. 한강의 시와 함께 소설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특히 한강의 시편들과 소설인 듯 시인 듯 장르의 경계가 모호한‘흰’과‘하얀 돌’의 색채 이미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실상 같은 돌이다. 마치 흰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에필로그처럼 읽히니 말이다. 이처럼 작가의 시적인 비유와 묘사의 문체, 색채 이미지는 한강 작품이 호소하는 인물들의 절망과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고유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강 작가의 문체는‘눈’같다. 작품 속에 ‘눈’의 이미지가 자주 나오는 것은 하나의 서사전략이다. 이미지는 감각에 의해 선취되는데 주로 시각 이미지에 집중되어 전개된다.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작가의 망설이는 듯한 느린 발화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조용히’그리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 결코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는 발화는 있을 수 없다. 이희정 시인 “오래전 그녀는 바닷가에서 흰 조약돌을 주웠다. 모래를 털어낸 뒤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서랍에 넣어두었다. 가끔 그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얹어보았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속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하지는 않았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소설,‘흰’에서‘흰 돌’부분) 작가는 무겁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말한다. 환부에 흰 연고를 바르고 흰 거즈를 얹는다고 훼손된 부위가 복원되기는 어렵다. 복원할 수 없는 세상보다 복원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촉각이 스며 있다. 고통과 상처의 촉각, 사랑의 촉각, 찢어지는 목소리의 촉각, 소리 없는 소리의 폭력이 감추어진 폭설의 촉각처럼 말이다. “나는 조용히 있고 싶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작가의 인터뷰에서)

2024-10-20

포시랍다는 말, 내게 하지마

이희정시인 아버지의 나라에서 가장 빛나는 말 포시랍다는 말 포시랍다는 말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다보면 포슬포슬 고운 먼지가 일어날 듯하고 보드라운 솜사탕 한입 먹은 듯 몽글몽글 뭉게구름 하얗게 피어나 머리끝이 거꾸로 선다 포시랍다는 말의 온기로 그 말의 사랑으로 그 말의 넉넉함으로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고 어느 날 포시랍다는 말,에서 강제 추방당하고 나니 그 속에 든 사랑과 온기와 배려와 부드러움에게마저 추방당해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가장 포시라운 사람이 되었다 ―배영옥,‘포시랍다는 말’전문(‘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저녁이면 비스듬히 열어둔 창문 틈새로 스미는 바람이 차다. 어느새 극세사 보드라운 올들이 그리운 계절이 온 것이다. 형용사 ‘포시랍다’는 말을 손가락 끝에 올려두고 굴려본다. ‘곱게 자라 철딱서니가 없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 조심조심 만져야 하는 말이다. 왠지 함부로 해선 안 될 것 같은, 부서질 것만 같은, 어린 새의 깃털 같은 여린 것들이 떠오르니 말이다. 1999년 매일신문으로 등단해서 2018년 지병으로 소천한 배영옥 시인을 생각하면 포시랍다는 말이 생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용하고 수더분한 느낌에 더해 매사에 조심스러워 무슨 잔치나 행사 같은 데서 모두들 입장한 다음에 슬그머니 들어와 혼자 뒷전에 가만히 앉는 사람 같은, 아니 제일 먼저 들어왔는데도 큰 기척 없이 맨 나중에야 일어서는 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조용하지만 명랑하기도 해서 격정을 가졌으면서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이영광 시인은 그이의 유고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의 발문에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포시랍다’는 말은 어쩌면 시인을 닮았으리라. 시인은 ‘포시랍다’는 말이 “아버지의 나라에선 가장 빛나는 말”이라고 했다. 스무 살에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마음의 병으로 몸의 병을 불러내어 시를 쓰면서 자신과 조금씩 화해를 하기 시작했다는 시인의 시편을 조심조심 입술로 굴려본다. 조심조심(操心操心)이라는 한자어를 풀어보면 “실수가 없도록 마음을 쓰는 모양”이다. 더하여 잡을 조(操)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목 글자 위에 입구가 셋이다. 이것은 나무 위에서 모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의 입 모양을 닮았다. 그러니 어찌 조심스럽지 않겠는가. 아기새는 꽉 쥐면 다칠 것이고, 새의 알이라면 부서지거나 조심성 없이 헐겁게 쥐면 떨어뜨리게 되기 쉬우니 말이다. 아버지의 나라에선 누구든 그랬다. “포시랍다는 말의 온기로 / 그 말의 사랑으로 /그 말의 넉넉함으로” 철이 없어도 다치지 않았고 철딱서니 없다는 이유로 해치지 않았다. 하지만 포시랍다는 말에서 강제 추방되고 보면 시인의 말처럼 “그 속에 든 사랑과 온기와 배려와 / 부드러움에게마저 추방당해 / 세상 물정 모르는 / 가장 포시라운 사람이”된다. 둥지를 잃고 빠져나온 세상이라는 곳은 녹록지 않다. 철딱서니란 둥지를 떠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포시라움인 것처럼. 그러나 생전의 시인은 혼자의 몸으로 쿠바라는 애인과 8개월 동안 열애를 한 일이 있다. 단 한 번도 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녀를 세상물정을 모른다며 친구들은 걱정했지만 체 게바라와 생일이 같다는 억지 이유를 들어가며 기어이 쿠바와 조우했다. ‘포시랍다’는 말만으로도 포시라워지는 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이른 나이에 찾아온 병마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끝내 황폐해지지 않은 시인에 대한 포시라움을 다루고 있다. 결국 사람은 그 자신의 운명이다. 어쩌면 ‘포시랍다’는 그렇게 말하는 시인지도 모른다. “내가 끝내 영원으로 돌아간다 한들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으리라. 훗날 네게만 말해 줄게”(2018년 작가의 말)

2024-10-06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 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 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그 여름의 끝’전문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끈질긴 여름이었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혹 72세가 된 이성복 시인이 27세 때 쓴 시를 만난다는 건 이미 27세에 72세가 들어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도 문제는 시간이다. 백일이 붉은 꽃이라 하여 백일홍이라. 이처럼 한정된 여름의 질은 사랑의 힘을 과장하고, 여름의 양은 사랑의 태도를 흔들며, 여름의 속도는 사랑의 한계를 강화한다.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무사했다”는 진술은 폭풍의 격랑 속에서 삶은 무엇이든지 할 수도 있고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증언과도 같다. 이즈음 긴 폭염 한 가운데 서 있는 백일홍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목백일홍은 여름만큼이나 힘이 세다. 폭풍은 한 차례, 또 한 차례 반복된다. 삶의 고통 또한 늘 그렇게 반복된다. 그럼에도“나”는 쉬이 절망하지 않을뿐더러 장난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다고 했다. 이쯤에서“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라고 했던 줄리언 반스의 단 하나의 질문을 대입해 보면, 화자는 마치 폭풍 한 가운데서 “나무 백일홍”이 무사했듯“나”역시 쓰러지지 않고 견뎌내었다고 결연히 답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가 그렇다. 나무 백일홍이 폭풍을 견디고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피우는 것처럼 화자는 절망을 “장난처럼 붉은 꽃들”의 비유처럼 여유롭게 환치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사고와 감정을 유발하는 원동력을‘욕동’이라고 했다. 자아와 동일시된 나무 백일홍의“억센 꽃”은 폭풍에 대한 응전이며, 죽음 욕동을 극복한 삶을 욕동하는 표징이라는 독해는 강인하면서도 연약하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이 피어 있는 두어 평 좁은 마당은 퍽 몽환적이다. 치열한 싸움 끝에 피 냄새를 풍기는 살의의 풍광 속에 사랑은, 삶은 위치한다. 그곳이 화자의 고통스런 내면의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이 바로 시가 틈입할 자리이지 않겠는가. 삶 속에서 갈망하는 모든 것들이 순하게 이루어진다면 시라는 공간에 들어올 여지는 없을 테니까. 기실 우리의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성을 통해 항구성을 말하는 것,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이 시가 된다. 이희정 시인 시인은 말한다. 행복 속에 불행이 은거하듯 언어는 양면테이프처럼 “이중 접착제”여서“죄가 없으면 은총도 없다.” 그 구조가 언어의 구조가 된다. 죄가 있어 은총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이의 말처럼 있음은 없음으로부터 온 것인 듯하다. 본래 없음에서 왔다는 걸 알면 쉬울 것이다. “존대받으려, 사랑받으려 하면서 홀대받을 짓만 골라 하는데 그게 바로 존대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도 그렇다. 욕망 혹은 그리움의 대상에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언어화하는 것이다. 충족된 것들은 언어의 옷을 입지 못한다고 했다. 이 시에서 절망의 끝은 다른 세계로의 이환을 예비한다. 왜 유보되거나 지연된 것들만 언어의 옷을 입을까. 그것이 그리움의 문법인 것이고, 사랑의 불가능과 불가피성은 시간의 유한성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도 곧 사라져 갈 테니까. 그 부재와 불구의 문법인 절망이란 단어로 물리적인 유한성조차 항구성으로 탈바꿈하는 장치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마침내“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다”는 고백은 삶이란 시간 속의 어둠을 몰아내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의 언어는 시간의 플롯에 잘 어울리는‘미완’과‘불가능’의 꼭지점에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꿈을, 삶을 쓰고 있다.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2024-09-22

주위의 모두가 기고 있다

이희정시인 몸 다 내주고 나서 전복 껍데기는 오색빛 내뿜지. 몸 없어진 곳에 가서도 노래하시게.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순간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드러나겠지.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어디엔가 붙어 기고 떨어져서 기는 아프면 누워 기고 실수로도 기는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 마음먹고 다시 둘러보면 주위의 모두가 기고 있다. 저기 날개 새로 해 단 그도 기고 있다. 뵈든 안 뵈든 묵묵히 기는 몸 하나하나가 오색빛 새로 두르게 노래하시게. -황동규,‘오색빛으로’전문 (‘봄비를 맞다’, 문학과지성사) 일상의 모든 것들이 시가 된다. 사람들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강렬한 기적의 현실이 아니라 사실은 작고 소박한 꿈의 충족일 뿐이다. 진정성이란 일상성의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일상적 삶이야말로 구원에 전념한다”는 레비나스의 역설적 관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황동규의 시를 현시점에서 주목하는 이유다. 올봄 발간된 시인 황동규(86)의 신작 시집은 김나정이 설명한 파라 텍스트(paratexte)에 우선하게 한다. 책은 종이 뭉치를 표지로 감싼 물질이다. 내용이 몸뚱이라면, 표지는 그 몸뚱이를 감싼 외투이다. 이 외투를 ‘파라 텍스트’라고 한다. 그리스어 ‘para’는 ‘~을 넘어’, ‘반대쪽에’를 의미하는 접두사다. 그러니까 책의 본문 여기서는 시편들 이외에 책을 둘러싼 모든 정보가 파라 텍스트로 묶인다. 예를 들면 표지, 출판사, 저자 이력, 띠지, 뒤표지의 추천사 등 다양한 정보를 아우르는데 이런 파라 텍스트는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준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파라 텍스트를 ‘대기실’이라 불렀다.” 시집의 접힌 날개를 펼쳐보라. 시인의 대기실에는“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도정에도 여전히 삶과 현실의 한가운데서 세상 살기의 의미와 진실에 이르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며 여전한 시인의 여전한 안부를 전하고 있다.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왜냐면 이 시가 대상화하고 있는 사물‘전복 껍데기’이 바로 시의 화룡점정인 제목‘오색빛으로’을 연결하는 징검돌이 되기 때문이다. “몸 다 내 주고 나서 전복 껍데기는 오색빛 내뿜지.” 전복의 몸을 파낸 자리 어슴푸레 번지는 오색빛을 본 적 있는가. 물빛에 반사되어 몸을 내어 주고도 스러지지 않는 오묘한 그 빛을 말이다. 시인의 다짐만큼 누구나 열망하지만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여유와 온기를 다감한 눈빛으로 누구에게든 깊은 마음의 울림을 줄 것이기에. “몸 없어진 곳에 가서도 노래하시게.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시간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들어나겠지.” 시인의 이 예사롭지 않은 깨달음을 더듬어 보라. 기실 노년의 쉽지 않은 삶에 대한 기록임에도 그런 유형의 기록에 으레 드리워져 있을 법한 우수의 그늘도 자기 연민의 그림자도 짚이지 않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외려 환한 눈으로 속세를 응시하는 밟음과 맑음의 정신이 실감으로 전해올 뿐이니 말이다.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 시인의 몸을 빠져나오며 기어이 떠오르는 것은 오랜 시간을 경유하며 시인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을 때 시인의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라는 믿음이다. 황동규 시인은 무가치하게 산포된 일상의 파편 같은 사물‘전복 껍데기’에서 인간이라는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밝고 맑은 심연을 오래오래 응시함으로써, 그동안 여정에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다. “좋은날, 굳은 날 가리지 않고 / 저기 날개 새로 해 단 그도 기고 있다.”

2024-09-01

말 못할 첩첩은 내게도 있지

이희정시인 밤을 새워 만드는 사과파이에 첩첩이 있지수십 장 종이 같은 마음을 아주 얇게저미고 밀어 만드는 말 못할 첩첩이 있지물 마른 진흙 첩첩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들이가쁘게 서로의 몸을 휘감는 첩첩이 있고그래도 건널 수 없는 첩첩 마음이 거기 있지첩첩 모퉁이 돌아 첩첩의 고개가 있고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우리가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이지-김수환, ‘첩첩’전문 (‘사람이 간다’, 시인동네)김수환 시인의 ‘첩첩’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정교하게 축조된 구조물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 하지만 어떤 시어나 비유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딱 들어맞는다.자칫 이런 상징은 언어유희로 한정될 수도 있지만, 이런 디테일은 시의 진정성을 담보한다. 이를테면 이 시에는 덜 조여진 ‘첩첩’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 여유롭게 관조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매끄럽게 흐른다. 첩첩이 닿는 공간마다 적확하고 깊은 이 시는 말 못 할 첩첩이 제각기 한 작법으로 성취를 이뤄내고 있다.“밤을 새워 만든 사과파이”에서 시작된 첩첩은 “수십 장의 종이 같은 얇은 마음”에도 잘 드러난다. 행간에 진입할수록 수사적 진술을 무척이나 효과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테면 첩첩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종일관 간접화법으로 에둘러 가지만, 어김없이 첩첩에 적중한다. 시의 리듬을 통해 발화되는 첩첩들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거느리고 있다. 첩첩이라는 어사(語辭) 하나가 이렇듯 많은 서사를 거느릴 수 있다니 충분히 다성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저미고 밀어 만드는”첩첩은 겹겹으로는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전적 의미로 첩첩은 걱정이나 근심이 겹으로 쌓여있는 것으로 눈으로 보이는 외상의 겹겹으로 설명될 수 없는 더 깊은 정서가 내진한다.말하자면 이 시에서 첩첩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고개”와 끝끝내“건널 수 없는 마음”을 되짚어 넘어보려는 태도이며, 서로의 몸으로 가슴으로 반복해서 설명되어 온 우리가 될 수 없는‘우리’에 대한 함축을 풀어내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시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서사 구조 속에서‘관찰되는 객체’일 수밖에 없는 첩첩을 말하지만, 특유의 생동감 있는 리듬으로‘정서적인 주체’로 환원되고 있다.여기서 첩첩은 압축된 현대시조의 말 부림만으로는 환유할 수 없는 시상이 중첩되어 있다. 크루아상의 외피처럼 사실상 속은 공기로 부풀어 비어있는데, 플롯은 꽉 차 있다. 원심력만으로 평생을 끌고 가는 첩첩은 가벼운 듯하나 아픔이 깊다. 바로 이 점이 “김수환 시인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그리움과 아픔”이라는 독해에 동의하게 되는 지점이다.이 시에 드리운 첩첩의 배경을 보라. “밤을 새워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물 마른 진흙”이고,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이지 않은가. 풀리지 않는 매듭 앞에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이 시는 헤어 나오기 어려운 늪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놓였다고 해도 독자에 따라 저 깊이까지 파고들게 하는 구심점을 목도 할 수는 있겠다.막막한 내면의 벽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외양 속에 숨긴 대상의 비유도 놀랍지만, 더 감탄스러운 것은 저마다의 첩첩을 대하는 자세다. “아주 얇게”“모퉁이 돌아”“가쁘게”시인의 이 작품은 시조라는 장르가 진부하지 않을 정도로 신선하고 입체적이다.그렇다면 이 첩첩의 막막함이 주는 무기력한 안온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벼운 듯 깊은 이 시의 정조가 당신에게 어떤 방향을 작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가라앉아 가는 당신의 밤을 첩첩은 흔들어 놓을 것이다. 치료제는 없을지라도 사과파이 같은 달콤한 각성제는 들어 있기 때문이다.“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

2024-08-18

여름에게 안부를

이희정시인 여름아, 반찬이 쉽게 상하는 계절이 되었어이런 계절이 되어서야겨우 답장을 한다 종이와 펜은 넘쳐나는데 마음이 도착하지 않아서겨우의 자리에 많은 것들을 고이게 만들었어겨우의 자리는 어떤 곳일까모든 것엔 제 자리가 있고 그건 결코 슬픈 일이 아니지만어쩐지 겨우는 영원토록 제자리만 맴돌 것 같고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내가 사랑하는 부사들을 연달아 적으며그것들의 겨움을 또한 생각한다여름아, 왜 어둠을 말할 땐 내린다거나 깔린다는 표현을 쓸까어제는 야광운을 찍은 사진을 봤어야광운의 생성 조건은 운석이 부서진 가루와 초저온이래부서짐과 추위의 결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된 것그것들을 아무 죄의식 없이 아름답다고 말해도 되는 순간이 올까상한 반찬을 버리면 깨끗한 식탁을 가질 수 있을까-안희연,‘야광운’부분 (‘당근밭 걷기’, 문학동네)일기예보는 연일 폭염을 경보한다. 아이들은 연신“더워죽겠어요”라는 말을 쏟아낸다. 온몸에 흐르는 땀처럼 말이다. 해서 답해주었다,“여름이니까.” 그런데 진정 여름을 여름으로만 답할 수 있을까.안희연 시인(1986~)이 호명하는 단어들은 모두 애정어린 겨움을 지니고 있다.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 의미심장한 부사어들을 연달아 적으며 겨움의 안쓰러움을 상기한다. 시를 가만히 따라가 보면 유독 언어 표현의 세밀함에 감탄하게 되는데, 한 단어도 허투루 놓인 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시인은 여름이라는 대상을 한 존재로 대상화하고 있다. 제목으로 올린 ‘야광운’의 주제를 대수롭지 않게 멀리 두는 방식으로 본질에 밀착하는 기예의 깊이를 힘껏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녀가 한 존재, 여기서는 여름이 되겠다. 여름이라는 존재를 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세상 모든 모종을 향해 열려 있으되 충분한 교감이 전제되어야 한다.“절대로, 도무지, 결단코, 기어이, 마침내, 결국….//그런 말들은 다독여 재우고//여름아, 이제 나는 먼 것을 멀리 두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으로”“안희연의 시는 다른 존재와 관계 맺는 순간을 통해, 삶이란 한 사람의 것이 아님을 체감하게 만들며, 그러한 연결의 감각이 서로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는 독해를 경유하며 이번에는 ‘절대로’‘도무지’‘결단코’‘기어이’‘마침내’라는 종결의미의 부사어들이 안간힘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힘을 빼고 지나온 겨움의 연약함을 결국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강한 의지가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우리의 여름은 점점 더 뜨거워질 것이다. “상한 반찬을 치운다고 우리의 식탁은 깨끗해질 수”없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으로 직감하고 있다. 보통 밤에는 구름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행성에선 밤에도 빛을 향해 하늘을 밝히는 야광운 현상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대기 오염의 결과라고 이것이 주는 불안감은 시인이 열거한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의 여름과 같은 사실로 귀납된다.여기서 여름은 점점 틈입해 들어오는 경험의 편린이 아니다. 부서지고 쪼개지는 파괴에 힘을 다해 맞서는 저항의 태도이다. 이 시에서 야광운은 공포감을 가졌지만 이어지는 단어들은 치유감을 지녔다.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잊지 않으려 애쓰고 또 애쓴 시어들이 결국 비극의 구멍을 메운다.먼 것은 멀리 두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시에 담긴 감동의 태반(太半)은 안간힘이라는 저항의 겨움이다.

2024-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