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본과 화분이 약속한다
간이 의자와 테이블이 포옹한다
단골손님과 주인으로 만나 혼인 신고를
마친 보르헤스 전집과 3단 책장
새로 산 우산이 겨울비를 맞는다
계단이 물 자국을 빨아들인다
투명한 창문에 입김을 불어 글씨를 쓴다
오래오래 잘 사세요
부러진 밥상과
스프링이 빠진 볼펜
사람은 고쳐 쓰지 말랬지만
사물은 몇 번이나 고쳐 쓸 수 있고
머리부터 집어넣는 티셔츠의 세계
몸통이 구멍인 빨대의 세계
뜨거워져야 움직이는 엔진의 세계
달력이 1월을 사랑해서 새해가 온다
바퀴가 동그라미를 따라 해서 자전거가 움직인다
컵과 얼음이 만나서 완성되는 여름
구멍 난 장갑이 눈사람의
차지가 되는 겨울
창문에 쓴 글자가 남아 있다
오래오래
―임지은, ‘사물들’ 전문 (시집,‘이 시는 누워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 민음사)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변덕을 가진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 뿐”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시인은 “오래오래”라는 주문과 함께 1월의 신세계를 열어젖힌다. 1월의 메타포는 ‘처음’과 다름 아니다. 가족의 처음이 혼인이라면 “단골손님과 주인으로 만나” “혼인 신고”를 마친 것으로, 공동체의 최소 단위는 시작된다.
보편적인 인식에서 보자면 “보르헤스 전집”과 “3단 책장”과의 혼인은 제법 어울리는 결합이다. 모든 사물은 저마다의 이름을 가진다. 임지은의 이 시에는 그러한 기표와 기의의 자의성을 재기발랄하게 은유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리본과 화분의 약속”이라니. 리본이니 화분이니 하는 사물의 이름은 아담의 언어로, 우리가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한 이름들이다.
무엇보다 이 시에는 어울릴 법한 사물과 사물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보여준다. 가령 “리본과 화분이” “약속”하고, “간이 의자와 테이블”이 “포옹”하고, “우산”이 “겨울비”를 맞고 “계단”이 “물자국”을 빨아들이는 식이다. 이들 관계성에는 이질감이나 이물감이 묻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시가 가진 언어의 질감이고, 마법이다. 하마터면 시인의 능청에 속을 뻔하지 않았는가.
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시의 제목 ‘사물들’이라는 무생물성에 있다. 여기에 열거된 사물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의 사물들이다. 그런데 왜 관계성의 언어로 사물들을 선택했을까. 예컨대 화자는 “부러진 밥상과 스프링이 빠진 볼펜”을 불러 답한다. “사람은 고쳐 쓰지 말랬지만, 사물은 몇 번이나 고쳐 쓸 수 있”다고 말이다.
언어는 마음을 표현하는 가장 손쉬운 재료이면서, 반면 가장 불완전한 재료이다. 이 세계는 온통 쓸모로 가득하다. “몸통이 구멍인 빨대의 세계”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은 이 세계의 비인간성에 대해 시인은 “사물들”의 입지를 빌어 알레고리의 방식으로 역설하고 있다.
결국 사랑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인가. 시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뜨거워져야 움직이는 엔진의 세계”처럼 둥글게 굴러가는 세계를 소망하는 것. 마치“바퀴가 동그라미를 따라 해서 자전거가 움직”이듯 말이다. 우리는 시인의 “오래오래”의 주문을 “달력이 1월을 사랑해서 새해가 온다”라는 믿음에 첫 마음을 얹어보는 것이다.
“창문에 쓴 글자가 남아 있다, 오래오래”
/이희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