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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등록일 2025-12-07 19:16 게재일 2025-12-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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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 시인

눈을 치우는 사람과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가

한 골목에 나란히 있다

 

그해 겨울엔 검은 눈이 내렸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내렸다

 

눈송이를 돌려주기 위해서

그들은 빛보다 먼저 내려앉아 눈을 거들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다행이라는 물방울 속에 적설량을 감춰왔나

사람들의 눈금을 지우며

쌓여가는 검은 눈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들에게 소원을 빌었다

하얀 입김이 빚는 검은 눈사람의 형태를

 

눈이 녹아가는 거리

그들은 이제 모두 같은 골목을 걸어간다

검은 눈은 세상의 하얀 것을 데려간다

 

없었던 일은 될 수 없겠지만

해프닝으로 남겨지기 위해

 

머리를 찾는 눈사람이 굴러간다

검은 눈은 사람들을 목격자로 만들어놓고선

이제 아무 때나 오지 않고

―서윤후, ‘흑설(黑雪)’전문 (‘나쁘게 눈부시기’, 문학과지성사)

골목에는 두 개의 장면이 나란히 포착된다. “눈을 치우는 사람”과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장면은 파편적인 이미지로 펼쳐져 있을 뿐 구체적인 서사가 없다. “눈”과 “눈사람”은 “치우는 사람”으로, “만드는 아이”로 진행 중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보이는 그대로 선하거나 정직하지도 않다.

화자가 기억하는 “그해 겨울”은 “검은 눈이 내렸다”라는 언술에서 감지되듯 이 세계는 드러나지 않는 부정과 불신이 검은 유령처럼 숨어 있다. 하지만 시종일관 검은 것과 흰 것의 대비로 끌고 가며 불안한 정황을 환기하고 있을 뿐이다. 언뜻 보기에 “눈”에 기댄 우회적인 묘사는 밝을 법하지만 외려 어둡다. ‘우리’라는 공동체에 드리운 짙은 음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령 “믿을 수 없겠지만”이라는 전제는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의 심각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어 “우리는 얼마나 많이 다행이라는 물방울 속에 적설량을 감춰 왔나”는 물음을 통해 줄곧 화자가 나와 타자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를 호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현지의 해설에서, “서윤후는 일반적으로 나와 타자를 묶어 가리키는 ‘우리’라는 말을, 타자와 다름없어진 어제의 나, 지금의 나를, 그리고 여러 ‘나’들을 아우르는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이러한 개념이 역설적으로 시간의 존재로 살아가는 한 아무도 그런 ‘우리’를 가질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한 글자 사전에서 김소연은 인간의 눈에 대해 “보이는 것만 잘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에 우리는 여전히 무지하다고 했다. 서윤후 시인이 응시하는 세계는 가시적인 공간 그 너머에 있다. 골목이라는 공동체에서 ‘우리’가 감각을 통해 보는 것은 흰 눈과 검은 눈이라는 양가적 윤리성에 있다. 예컨대 “하얀 입김이 빚는 검은 눈사람의 형태”처럼 말이다.

이 무력한 점층법 “사람들의 눈금을 지우며 가는 쌓여가는 검은 눈”처럼 비록 “없었던 일은 될 수 없겠지만” “세상의 흰 것”의 믿음을 끌어안고 가 보려는 노력은 될 것이다.

“머리를 찾는 눈사람이 굴러간다”

/이희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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