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나는 세상의 무엇보다도
아버지 없는 아이가 참으로 부러웠다
안팎이 그저 고요한 사사로운 나날들이
노름판의 아버지를 찾아다니지 않고
근심으로 잠 못 드는 어매도 없고
맥없이 서성이기만 하는 할배도 없는
그토록 사소하게 지나가는 나날들이
소원이었다고, 팔순이 목전인 오라비는
아버지 산소 뒤에서 때늦은 고백을 했다
평생 지나간 일을 내어 말한 적 없는
그 뜻밖의 사건은 이를테면 누수였는데
그때는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권규미, ‘누수’ 전문 (시조21, 2025, 가을호)
권규미 시인의 ‘누수’는 그림으로 보자면 사실화이면서 내면화된 울림 또한 깊다. 담담하게 고백되는 과거의 기억은 겉만 보아서는 한없이 고요하게 서술되는 것 같지만, 내부에는 격렬한 감정의 급류가 있다.
이때 기억에 대한 모든 언술은 결국 시간에 대한 언술일 것이다. 기억이란 흘러간 시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경험이든 순간에 깊이 파인 후 시간의 흐름 속으로 말려 들어간다. 그러니 경험을 소환해 기억하려는 자는 곧 시간과 맞서는 자일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운명이다.
가족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운명의 공동체다. 같은 맥락에서 한 작가는 “사랑은 폭력과 동의어”라고 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언술에 대입해 보지 않더라도 ‘가족’이란 기표는 가장 내밀한 관계어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감싸는 껍질이 된다. 시인과 가족들에게는 ‘누수’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 시절’이 있었다.
가령 “노름판의 아버지”가 있는 유년의 장소에는 드러내 놓지 못할 비밀이 함께 산다. 그 비밀은 평화롭지도 고요하지도 않은 경험으로 기억된다. 시인은 그 시절을 “아버지 없는 아이가 참으로 부러웠”고 “근심으로 잠 못 드는 어매도”“맥없이 서성이기만 하는 할배도 없는” 공간이 부러웠다고 서술한다.
시인의 파편적인 시점으로 가족을 기억하는 데 있어 “팔순이 목전인 오라비”의 “때늦은 고백”의 접목은 이러한 기억의 서사를 극화한다. 시인이 누수라고 정의한 이 “뜻밖의 사건”은 “아버지 산소 뒤”에서 일어나는데 “평생 지나간 일을 내어 말한 적 없는” 오라비의 고백은 누수로 인식된다. 이때 사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아버지의 산소는 팔순이 목전인 오라비의 시간을 병치하며 단절되었던 그간의 시간을 복원한다. 그들에게 아버지와 함께한 날들은 장대한 시간을 경유한 불안한 경험이다. 그 시절 조각난 기억은 파편처럼 가족의 집은 실로 위태하게 직조된다.
발터 벤야민은 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삶에서의 실제 체험이 아니라, 그런 체험의 기억을 짜는 일이라고 했으며, 낮 동안 짠 실을 밤이면 풀어헤치는 텍스트라는 개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 작가는 프루스트였다고 했다. 바로 그 기억의 서사가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면 권규미의 시편 또한 그 지점에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시인의 시집 ‘누가 나를 놓쳤을까’(가히, 2025)에는 체화된 기억이 순장된 신화적 공간과 접목하는 정황이 두루 포착된다.
기억은 사랑이었든 폭력이었든 돌이킬 수 없다. 이때 그들이 바라는 건 ‘대화’다. 그것이 뜻밖의 누수이었건 고백이었건 말이다. 시인이 기억을 시로 복기하기 위해 선택한 오라비의 나이는 팔순이 목전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아버지와 오라비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난 때늦은 고백은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끝내 멈추어 설 것 같지 않다. “그때는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럴 때 기억은 어떻게 깃드는 것일까.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과 가장 비극적인 순간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고를 것인가. 이것이 시인의 선택이었다.
“그토록 사소하게 지나가는 나날들이 소원이었다고”
/이희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