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첨벙첨벙, 작약은 피고

등록일 2025-08-10 18:20 게재일 2025-08-11 17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이희정 시인

첨벙첨벙

꽃이 피고

드디어 나무에는 물고기가 가득했다

꽃송이 속으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쏘다녔고

나는 물 장화를 신고 정원을 쏘다녔다

 

해당화 그늘 속으로

헤엄치는 날들이 많아졌고

여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나의 놀이는 계속되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몰라서

멈출 수 없는 놀이

매일매일 사라지고 다시 생기는 별의 일에 대하여

날마다 멀어지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라는 말에 대하여

잠든 것들의 모든 기척처럼 번지는 핏방울에 대하여

손을 숨길 주머니도 없이

벗어둔 물 장화 속에 물이 가득차서

배처럼 흔들리는 것을

모퉁이를 갖지 못한 채 살아와서라고 할 수 있을까

끝은 얼마나 아파야 제 끝을 다른 끝에게 내어줄까

쓰러져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 세계는

―이승희, ‘물속 정원’ 전문(‘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2024, 문학동네)

시인은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하다”라고 했다. 그의 말처럼 이 시는 온통 식물적 상상력으로 특징할 만하다. 시의 제목이자 배경인 ‘물속 정원’은 두 세계의 만남인 육지와 물, 생과 죽음, 현실과 환상을 암시하는 이중적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정원은 생명의 공간이지만, 그것이 물속이라는 설정은 비현실적 장소로서 기억, 무의식, 상실의 공간을 연상시키니 말이다.

이승희 시인의 앞선 시집이 ‘맨드라미’나 ‘토마토’ 같은 식물의 이미지로 집중했다면, 이번 시집은 ‘작약’,‘물고기’ 잎이 없이 뼈로만 자라는 식물인 ‘포도’ 등의 이미지를 표출하고 있다. 그가 형상화한 이미지가 무엇이건 모두 ‘여름’이라는 계절로 수렴된다. 이를테면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연작을 비롯해 “여름의 우울”에서 “또 다른 여름”에 이르기까지 온통 여름이 인과가 된다.

이때 시인의 여름은 꽃과 함께 시적 자아의 결핍과 상처를 드러내는 주요한 식물적 상상력의 동인으로 복무하고 있다. 과연 “첨벙첨벙” 피는 꽃이란 있을까. “꽃송이 속으로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쏘다녔고”에서 나무에 물고기가 산다는 기이한 상상은, 물이 정원의 세계를 범람하며 부유하듯 “모퉁이를 갖지 못한 채” 삶의 방향을 잃은 존재, 즉 정서적 중심이 없는 상태를 상징하고 있다.

“벗어둔 물 장화 속에 물이 가득차서 / 배처럼 흔들리는 것”에서 시적 자아의 내면이 정서의 물에 잠긴 상태를 보여주는 현실의 장화가 감정의 물성을 담고 흔들리는 배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모네의 그림 ‘수련’이 보여주는 경계 없는 세계와 공명하며, 시인의 ‘고정된 시선 없이 흘러가는 존재의 물성’을 공유하는 듯하다.

언젠가 도쿄에서 찍어온 모네의 말년 연작 ‘수련’을 크게 인화해서 걸어두었다. 계속 들여다보자면 어느 순간 방향을 잃고 마는데 이는 수면 아래인지, 위인지, 수련인지 그림자인지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그 불확실한 흔들림 속에서 ‘상실’의 풍경이 몽환적으로 피어나는데, 이는 화자가 장화를 신고 물속 정원을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꽃 속에 물고기가 쏘다니고, 장화 속엔 물이 차오른다. “쓰러져도 자꾸만 떠오르는 이 세계는” 끝내 가라앉지 못한 감정, 다시 떠오르는 부재의 세계를 나타낸다. 가령 모네는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내고도 수련을 그렸고, 시인은 여름이 지난 뒤에도 멈출 수 없는 놀이를 계속한다. 결국 삶의 고통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살아가게 되는 이유, 혹은 존재의 부력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몰라서 멈출 수 없는 놀이”

/이희정 시인

 

이희정의 월요일은 詩처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