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맑은 콩나물국에 비친 무른 콩나물

등록일 2025-09-21 19:41 게재일 2025-09-22 17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이희정시인

여행에서 돌아오니 냉장고의 콩나물이 물러 있다

무른 콩나물은 버리고 먹을 만한 콩나물은 골라 그릇에 담는다

버려야 할 것들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새벽의 노동 속에서도 계절이 흐르고 나는 가족을 이루었구나

 

좁고 기다란 식탁에는 김이 나는 콩나물국

고춧가루도 치지 않아 얼굴이 비치는 어느 아침

한 식구는 건더기를 모두 남기고

한 식구는 국의 절반을 버리고

국이 식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식구도 있는데

맑은 국물 위의 떠도는 얼굴들은 모두

매운 점심을 지나 어느 무른 저녁으로 갈 터이니

 

버리려던 콩나물의 절반을 얻은 것이 기쁘고

오늘은 가족이 모두 콩나물국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서 있던 그 새벽의 고요가 기뻤으므로

손에 가득한 콩 비린내로 얼굴을 쓸며

해가 어디쯤에 가고 있는지 창밖을 내다본다

 

―심재휘, ‘맑은 콩나물국’ 전문 ‘두부와 달걀과 보이저’(2025, 문학과지성사)

 

심재휘 시인이 그려내는 새벽 풍경에는 콩나물과 식구라는 두 가지의 언어가 있다. 기실 콩나물과 식구는 두 개의 기표이면서 하나로 수렴된다고 하겠다. 여행에서 돌아온 화자가 냉장고에서 발견한 콩나물은 “물러 있다” 여기에서부터 화자의 새벽 노동은 시작된다.

이때 새벽이라는 물리적 시간과 식탁이라는 장소성은 ‘식구’라는 기표와 등가성을 가진다. 이들은 한 식탁에 동참하거나 늦잠으로 불참하며 화자가 골라내는 “먹을 만한 콩나물”과 “무른 콩나물”로 병치 된다. 또한 “버려야 할 것들까지 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화자의 태도에서 가족을 챙기며 돌보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한국인의 밥상에 자주 오르는 콩나물은 김치만큼이나 밥과 근친하는 식재료일 것이다. 여기서 콩나물은 밥처럼 자주 먹어도 물리지 않는 일상어가 된다. 말하자면 콩나물국은 매일 봐도 물리지 않는 식구와 같다.

이른 아침 화자의 콩나물국은 “고춧가루도 치지 않아 얼굴이 비치는” 맑은 이미지를 표상한다. 화자의 식구들이 콩나물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여느 가족의 일상적인 아침 풍경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

가령 “한 식구는 건더기를 모두 남기고” “한 식구는 국의 절반을 버리고” 심지어 “국이 식도록 방에서 나오지 않는 식구도 있는데”처럼 식구들이 여럿인 가족의 일상은 이 풍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화자가 궁구한 새벽 노동의 극진함과 달리 가족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아침 식탁을 맞는다. 이럴 때 ‘맑은’ 콩나물국은 생활인으로서의 일과 속 지난함과 곤함을 되비추는 거울과 같다. 화자의 말처럼 콩나물국에 비친 얼굴들은 “매운 점심을 지나 어느 무른 저녁으로 갈 터”이니까. 화자가 그토록 버리지 않으려고 애쓴 ‘무른 콩나물’과 식구들의 ‘무른 저녁’ 역시 등가이다.

결국 제목 ‘맑은 콩나물국’의 외현적 형식은 ‘무른 콩나물’이 표상하는 심상을 수반하고 있다. 이를테면 “어디쯤에 가고 있는지 창밖을 내다보는” 화자의 시선이 좇는 ‘해’ 역시 일과를 따라 움직이는 ‘식구’와 다름이 아니니 말이다. “새벽의 노동 속에서도 계절이 흐르고 나는 가족을 이루었구나”라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 앞서 서술된 콩나물과 같은 값의 기표들은 유기적인 성격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어쨌든 화자는 “버리려던 콩나물의 절반을 얻은 것이 기쁘고” 무엇보다 “오늘은 가족이 모두 콩나물국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흡족하다. 하여 “생각하며 서 있던 그 새벽의 고요가 기뻤”다고 고백한다.

“손에 가득한 콩 비린내로 얼굴을 쓸며”

/이희정 시인

 

 

이희정의 월요일은 詩처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