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도 태초에는
울음을 물고 나왔나
햇살이 얼비치는, 비릿한 소리의 핏줄
바람이 너무 흔들어 지느러미를 키웠나
빗물을 타고 올라 천둥 파고를 넘고
허공 저 건너편, 울음을 벗으러 갔나
청동빛, 절 한 채 짓고
추녀 끝을 쳐들고
하늘 수초 무성한 곳, 녹을 닦는 어느 가을
고통과 한 몸 되어 울음의 껍질 벗겼나
찢겨진 지느러미가
풍경 소리를 문다
―손수성, ‘한 잎의 지느러미’ 전문 (‘피자를 주문하는 저녁’, ‘책 만드는 집’)
풍경은 멈춰 있지 않다. 그 이미지야말로 움직이는 감정 그 자체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때 실제로 보이는 것은 껍질에 불과할지 모른다. 누구든 무엇으로든 어떤 풍경을 그릴 수 있다. 손수성 시인이 그리는 나뭇잎은 지느러미를 가졌다고 했다. 아니, 키운다고 했다.
이때 나뭇잎을 흔드는 것이 바람일지 모르지만, 지느러미를 키운 건 나뭇잎 그 자신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그만의 리듬이 있다. 시인에게 바스라진 나뭇잎의 리듬은 찢겨진 울음이고, 눈빛을 흔드는 것은 이 세계의 보이지 않는 불안이다.
그 눈빛에 동요하는 것이 영화라면 어떤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과 초록뱀 미디어상을 수상한 독립영화 ‘수연의 선율’이라면 말이다. 옛 대구 동성아트홀 팬카페의 영화제작 소모임에서 출발한 최종룡 감독의 첫 작품이다. 시를 전공한 감독은 이 영화 역시 아일랜드의 시인 셰이머스 히니 (Seamus Heney)의 ‘철길 가의 아이들(The Railway chidren)’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말(語)들이 반짝이는 빗방울 행낭에 담겨 전선을 타고 여행한다고 생각했다. We thought words travelled the wires In the shiny pouches of raindrops.”(여국현, 역)
2013년에 작고한 셰이머스 히니는 199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시인이다. 이 시의 제목은 에디스 네스빗(Edith Nesbit)의 1905년 소설 ‘철도 아이들’을 인용했다. 1825년 엔지니어 조지 스티븐슨(Feorge Stephenson)의 증기 기관차 ‘로코모션(Locomotion)’이 철도 위를 처음으로 달렸다. 이는 철도를 이용한 최초의 여객 운행이었다. 지식이라는 것과 풍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지만, 전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단어들을 상상할 때 시인은 황홀하다고 말한다.
‘철길 가의 아이들’에서 다시 앵글을 돌려 보면, 홀로 할머니 장례식장을 지키는 13살 수연의 모습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수연은 완벽한 가족이 부럽다. 입양을 목적으로 선율에게 다가간 수연은 점차 학대받는 선율을 아끼게 된다.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카메라는 두 아이를 떠나지 않는다. 단 한 순간도 시야에서 아이들을 놓지 않는 것, 이것이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찍는 감독의 태도였다.
자, 이제 손수성 시인의 선율로 되감아 보자. “나뭇잎도 태초에는 울음 물고 나왔나”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한 잎’은 영화 수연과 선율의 모습과 겹쳐진다. “햇살이 얼비치는, 비릿한 소리의 핏줄”이 완벽한 가족 속에서 사랑받고 싶은 두 아이의 이야기 속에서 지느러미를 키워가고 있다. “빗물을 타고 올라 천둥 파고를 넘고” 수연과 선율의 마지막 장면은 서로를 마주 보지 않은 채 교차 된다.
“허공 저, 건너편, 울음을 벗으러 갔나, In the shiny pouches of raindrops”
/이희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