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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이희정 시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 디딤돌을 놓고 건너려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디딤돌은 온데간데없고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디딤돌이다 -신대철, ‘강물이 될 때까지’전문, (‘무인도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초판 1쇄 1977) 시인은 기어이 강물이 되려는가 보다. 이 시가 수록된 신대철(1945~) 시인의 시집‘무인도를 위하여’는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일곱 번째 시집으로 1977년 초판 이후 2022년 재판 9쇄를 거듭하며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이 출판사의 시선집이 600번대 임을 보더라도, 아득하고도 유장하게 흐르는 시인의 강물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1968년에 등단한 신대철 시인은 ROTC 출신 GP장으로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며 북파 공작원들을 송환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의 군대 체험은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의 충돌을 일으키게 하는 경험이기도 했지만,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한 시대를 통과해 오면서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한발 물러서서 숲과 나무, 자연의 사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시간을 통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신대철 시인에게 작품의 진실은 이념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김현의 말대로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섭의 한 수단’이며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감염시키는 활동이라고 했다. 해서, 도입부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는 화자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내며 시작한다. 시인이 건너는 강물에서 맞닥뜨린 상황은 시공간적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사람에 대한, 흐린 물, 세상에 대한 어떤 복선도 담지 않았다. 건널 듯 말 듯 머뭇대고 두리번거리며 뒤돌아보게 하며 마침표를 찍는 순간을 미루는 듯한 이 시의‘강물’은 이상하게 먹먹하다. 흐린 길 앞에 주저하는 사람을 닮아서, 인생의 흐린 길을 닮았기에.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만난 “흐린 강물”은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는 진술처럼 화자의 내면에는“뒤들 돌아보지” 않아야 할 불안이 내연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존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흔하디흔한 인생관이지만 결국 대독할 수 있는 화자의 자격은 ‘사람’이 아닌 ‘디딤돌’이라는 익명성에서 온다. 그러니 시 속에서 시종 교차 되는 디딤돌’과 ‘사람’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빛과 그림자 같은 존재인 건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구해주는 이 언술은 결국 살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전력을 다해 깨우쳐가야 하는 절박함 일 테니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그 모든 상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람이 아닌, 디딤돌로 고쳐 살아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은 자신이 만들어낸 화자 뒤에서 관조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마치 그치지 않는 한 인생의 고난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다. 흐린 강물 앞에 마침표를 찍는 대신 어쨌든 또박또박 걸어가는 모습으로 기어이 강물이 되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강물이 될 때까지”

2025-01-12

첫 줄이 써진다면

이희정 시인 흰쌀이 익어 밥이 되는 기적을 기다린다 식기를 가지런히 엎어두고 물기가 마르길 기다리듯이 푸릇한 것들의 꼭지를 따서 찬물에 헹군다 비릿한 것들의 상처를 벌려 내장을 꺼낸다 (중략)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인다 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만이 오로지 사람다워 보인다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 아침상을 차린다 나쁜 일들을 쓰다듬어주던 크나큰 두 손이 지붕 위에서 퍼드덕거릴 때 햇살이 집안을 만건곤하게 비출 때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을 간장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돕고 있다 살점을 떼어낸 듯한 묵상이 눈물처럼 밥상에 뚝뚝 떨어진다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모은다 -김소연, ‘생일’부분,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사, 2013) 운명이 중력에 맞서는 힘겨운 날들이다. 하루키는 “역사가 인간에게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명제는‘그 당시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라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1Q84) 김소연 시인(1967년~)은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기적이라고 말하는 생일 밥상을 차려내고 있다. 시에서 화자는 눈처럼 흰 쌀밥을 지었지만, 나는 전날 밤 오래 삶아 놓은 팥에 찹쌀과 멥쌀을 반반 섞어 전기밥솥에 앉혔다. 팥은 나쁜 일을 막는 벽사진경의 염을 지녔다기에. 하지만 팬에 기름을 두르고 약한 불에서 센불로 이동하며 비릿하게 익어가는 해동 도미의 살냄새를 앓아야 했다. 거기에 푸른 잎사귀를 데쳐 조물조물 무친 나물에서 풍겨 나오는 참기름의 고소한 풍미까지. 다시 들춰 보는‘새천년 희망증서’는 오래전 즈믄둥이로 태어난 첫 아이에게 노벨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이 보낸 첫 증서였다. 함께 딸려 온 선물 모빌과 함께 출생아 조사라는 행정절차를 거치느라 늦게 당도했다. 언제나 기다리는 것들은 아직이거나, 때를 지나기 마련인가. 천장에 달린 모빌은 제때 기능하지 못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지나쳐 간 때란 누군가에는 쓸모가 되는 아이러니가 운명이고 중력이기도 해서 다음 아이에게 와서는 쓸모가 되기도 한다.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이”고“오로지 아름다워 보이”는 이 아이러니가 슬픔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시집 발문에 얹힌 황현산의“씩씩한 시인 김소연이 가장 깊은 슬픔으로 짠 시간이기에 슬프다. 슬픔만이 진정으로 씩씩한 것을 만든다는 아이러니가 슬프다”는 위무의 서신마저 애도가 된다. 세상의 멸망을 막아 보겠다는 시인의 열망이 미명의 중력을 통과할 때 붉은 해가 떠오른다. 지난해 머나먼 타국 열기구 위에서 맞은 일출의 순간, 아스라한 상공을 오르기 전 열심히 반복 학습했던 건 다름 아닌 랜딩 연습이었음을.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 그 위에 두 손 꼭 모으며 첫 줄은 써질 것이라는 희망에 간절함을 얹어 보는 것이다. “햇살이 만건곤하게 비출 때”

2025-01-05

“아름다운 아이였잖니….”

이희정 시인 아무것도 꽃과 풀 속의 영광된 시간을 되돌려 놓을 순 없지만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며,오히려 그 속에 담겨있고,언제나 있어 왔던 원초의 조화 속에 담겨있고,죽어서도 지킬 진실된 마음속에 담겨있는,주의 권능 속에서 발견하노라.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심장으로 인해,그 심장의 따뜻함과 기쁨과 두려움으로바람에 흩날리는 가장 연약한꽃 한 송이조차,너무 깊어서 눈물로도 표출할 수 없는사색을 믿게 하누나.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어린시절 회상을 통한 영원불멸의 노래(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182~190행 / 204~208행) 시가 무엇을 볼 수 있다는 믿음, 워즈워스의 시는 그렇게 재현된다. 스크린 속 강물처럼, 혹은 스크린 밖 불멸의 노래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영화,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Robert Redford)의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을 기억하는 이라면 알아차릴 것이다. 영상이 펼쳐내는 슬프고도 은유적인 정경에 잠기고 감정에 몰두하다가도 어느새 저만큼 훌쩍 흘러가고 있는 강물의 순간들을 말이다. 이제 우리가 영화 속에서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1770~1850)가 노래한 어린 시절 회상을 불러내면 어떤가. 이때 다시 마주하는 영상 혹은 시는 사뭇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영화의 공간적 주요 배경은 노먼의 전기를 다룬 고향인 몬테나주의 울창한 숲과 빅 블랙풋 강(Big Blackfoot River)이다. 매 순간 사로잡혔던 영상을 되짚으며 시와 교접하는 지점을 반추하며 마음에 번지는 의미를 사색해 보는 것이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은 아름답다. 아버지와 두 아들이 강에서 제물낚시(Fly fishing)를 하는 장면은 사실상 아들과 동생을 잃은 가족의 고통스러운 밑그림이다. 그러니 영화에서 목회자인 아버지와 아들이 낭송한 이 시구는 불멸의 영혼을 믿겠다는 의지이며 애도이다. 한 줄기 상실의 강이 아프게 흐르는 가운데 화자는 결국 영화에서 가족처럼 결국‘남겨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워즈워스의 수많은 시편이 마음의 궤적과 파장을 깊게 담아낸다. 문학가 엄용희는 “자연에 관한 사색과 찬미, 프랑스 혁명 초기를 배경으로 한 인본주의적 열정, 삶을 채워가는 고통의 면면들에 대한 숙고, 지나간 일의 새로운 이해와 감정의 고양 등 워즈워스의 시를 읽을 통로는 다양하다며 워즈워스는 시를 배우기 좋은 시인”이라고 했다. 워즈워스의 시에 자주 드러나는 죽음의 극복이라는 지향성은 영혼의 불멸을 이루려는 방편으로서의 언어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의 ‘불멸성’은 ‘죽음’을 읽는 다른 방식이 된다. 끝내 죽음으로 내던져진 아들 폴의 알코올 중독과 도박장 사건은 추악한 인간사의 표면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종일관 아름다운 숲과 흐르는 강의 풍광의 전망으로 인도하며 인간사의 내밀한 고통을 어린 날의 회상 장면으로 몰입시키는 것에 시는 구조적으로 배치되었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에 드리워진 기다란 곡선의 낚싯줄과 물결을 투과하는 빛의 환희가 한없이 고요한 워즈워스의 시를 내장함으로써 그 기품은 고조된다. 어린 시절의 회상은 타자에 관하여 신실하고도 식지 않은 심장을 가진 아들 폴의 아름다운 내면을 응축하고 있기에. 영화 속 아버지의 마지막 대사는 간접화법으로 흐른다. 마치 강물처럼, 시처럼 멈추지 않고. “아름다운 아이였잖니….”

2024-12-29

슬픔의 광야에서

이희정 시인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길 정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고정희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전문 (‘아름다운 사람 하나’, 문학동네) 역사는 반복되기도 한다. 우리는‘역사를’ 배울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배워야 한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반복될 때 생겨나는 것은 관계의 성질이다. 그러니까 복간본으로 만나는 고정희 시인의 숫자는 기수가 아니라 서수다. 반복되는 대비항들은 서로 대등하지 않다. 처음의 선행이 없었다면 복간은 개진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간이 부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고정희 시인에게서 중요한 것은 반복성인지 모른다. 반복 속에는 그리움의 내성이 있다. 이 시집의 서문에서 그리움의 마음을‘I Miss You’라고 한다면‘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라는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을 얹은 점은 이채롭다. 그렇다. 그녀에게 시는, 그 깎아지른 벼랑과 같은 생은, 무너지는 것들에 대해 혼신의 영혼을 바친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1948년 해남에서 태어나 1991년 지리산 등반 중 실족사로 43년의 생을 마감한 고정희 시인을 하나의 언어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민중 의식, 그리고 장르의 실험, 기독교 의식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시인의 장력을 가늠할 수 있다. 1980년대 시인으로 수렴되는 화자는 자신의 40대를 바라보고 있다. 더욱이 “화나고 성나는 날 / 위로받고 기대고 싶은 날 / 질겅질겅 밟히고 뺨을 딱딱 맞”는 화자는 오른뺨에서 왼뺨을 내주고 화를 내는 대신 발등을 내어준다. 시인의 종교적 죄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여기에 이유 같은 것은 틈입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중요한 질문은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정의로운가 하는 것이다. 해서 이 시에서 정의는 성서 구절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언어로 묘사된다. 시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는 분기점은 “포르말린”“옥시풀”“유한락스”라는 화학제의 기표일 것이다. 상처받은 마음을 표백제로 위장해 지워버리겠다는 위악보다는 “자신의 따뜻한 피”와“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 없다는 기의가 승하다는 사실이다. 시인에게 이 지점은 중요한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고정희의 시‘무너지는 것들 옆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로소 개진되는 이야기다. 그 선택은 최선이 아닌 최악의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동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이라는 화자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자신의 분명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면서 주체적으로 해낸 최고의 선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화자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경험 속으로 무거운 멍에를 딛고 걸음을 촉진해 보는 것이다. 인생의 거친 광야에서 “내 사지에 돌을 눌러 둘 수는 없”을 테니까.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2024-12-15

들어내지 못한 말이 있지

이희정 시인 인테리어 기본 요건은 자리를 바꾸고 요소를 덧대는 게 아니라 들어내는 것이라고, 더 좋은 관계를 바란다면 관계에서 나와야 할까 그렇다고 고라니처럼 고속도로로 뛰어들어선 안 된다 분갈이 하는 아저씨는 흙을 더 채우는 게 아니라 뿌리에 있던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숨 쉬게 한다고 했다 언니가 없으면 독방을 차지할 거라 기대했지만 나 먼저 들어낼 줄은 나도 몰랐듯이 들어내도 나가지 않는 게 있고 다 알면서 들어낼 수 없는 것도 있다 고라니가 잘못 뛰어든 곳은 고라니가 들어낸 길이었을까 들어내지 못한 길이었을까 ―이규리, ‘들어내다’전문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2014)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언어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 어떤 언어는 나를 떠나가고, 어떤 언어는 내가 놓아버리고, 어떤 언어는 내 곁에 남는다. 그것이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든 말이다. 여기 이규리 시인의 ‘들어내다’는 시의 언어를 담보로 고라니의 언어를 빌렸다. 다시 말해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것을 시(詩)라고 부를 때, 고라니가 증언해야 하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시의 미덕은 별 어려운 말도 없이, 어려운 비유도 없이,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에 있다. 시가 진행되면서 ‘들어내는 것’과 ‘들어내어지는 것’의 인식의 도약이 이루어진다. “고라니가 잘 못 뛰어든 곳”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사건이 외려 평범한 차원으로 치환되는 발견과 함께 이규리 시인의 삶의 태도 또한 최선의 언어가 된다. 때로 우리는 어떤 관계에서 나와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분갈이 하는 아저씨가 뿌리를 숨 쉬게 하기 위해 흙을 털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때일지라도 “고라니처럼 고속도로를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시인의 언어이다. 이를테면 “독방을 차지할 거란 기대와 달리 외려 자신이 들어내어 질”때 적절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들어내어진’ 고라니의 언어들이 갈 수 있는 선택지가 고속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에 있다. 가령 이규리 시인의 ‘시의 인기척(난다, 2019)’이란 산문에는 이런 정황을 예시하는 구절이 있다. “평소 순한 짐승이 난폭해지는 건 환경이 맞지 않다는 증거다. 그 난폭성을 내부로 돌리는 자학 또는 자해란 보통 선량한 사람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또 이런 대목은 어떤가. “목줄을 놓친 개 주인과 목줄을 놓아버린 개 주인은 다르다. 진실 공방은 무의미하다. 자의와 타의, 거짓과 진실은 서로 바꿔치기기가 가능하다” 다시 최선을 다해 들어내 보기로 하자면 “어떤 회복은 원상복귀가 아니라 절단과 정리”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마음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실은 냉철하고 매운 언어로 들어낼 수 있는 인테리어의 언어가 있을 법도 하다. 다독이면서 온화하고 속 깊은 성찰을 부드럽고 매운 화법 안에 담아내는 이규리 시인이라면 어떤가. “들어내도 나가지 않는 게 있고, 다 알면서 들어낼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어는 몸을 갖고 있어서 말과 행동은 유리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당신과 나에 대해 최선을 다한 시인의 언어라면, 그것은 사람을 대하는 진정 어린 삶의 태도에 있지 않을까. 마치 시인의 언어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쉬이 잘려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고 몸인 것처럼 말이다. “고라니가 잘못 뛰어든 곳은 고라니가 들어 낸 길이었을까 / 들어내지 못한 길이었을까”

2024-12-01

모과가 모개에게

이희정시인 향이 나지 않아 속이 썩은 것 같다고 해서 얻어온 모과 제 방에 들어오니 향이 살아납니다 향이 없었던 게 아니라 방이 너무 컸던 거예요 애옥살이 제 방에 오니 모과가 방만큼 커졌어요 방을 모과로 바꾸었어요 여기 잠시만 앉았다 가세요 혹시 알아요 누가 당신을 바짝 당겨 앉기라도 할지, 이게 무슨 향인가 하고요 그대 잠시 모과가 되는 거죠 살갗 위에 묻은 끈적한 진액이 당신을 붙들지도 몰라요 이런, 저도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의 즙이랍니다 오세요, 누릴 수 있는 평수가 몇 발짝 되진 못해도 죽은 향이 살아나라 웅크린 방 ―손택수,‘모과의 방’전문 (‘시와 사람’, 2021) 종종 모과를 모개라고도 한다. 못생겼다는 놀림의 비유에 애정을 담았을 때가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손택수의‘모과’는 웅크린 방에 들어선 ‘모개’처럼 따스한 감성이 빚은 소박하고도 끈적한 산물이라고. 여기서 ‘모과의 방’은 가장 좁은 공간에 안구를 밀착해서 들여다보았을 때 그 공간이 거대하게 팽창해 우주적 부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시인은 단 한 줄의 행갈이도 없이 배행을 붙여놓았다. 촘촘하게 바싹 당겨 앉힘으로써 모과의 공간에 밀착하게 한다. 언젠가 안동 가는 길에 들렀던 권정생 동화 작가의 방을 들여다본 기억도 그랬다. 관광객들이 뚫어 놓은 손가락 구멍의 렌즈에 들어찬 한 뼘 작은 방이 투명해서 외려 가늠할 수 없는 크기로 부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손택수 시인의 많은 작품들처럼 이 작품 또한 사소한 잔영이 점점 커다랗고 짙게 일렁거린다. 가령‘붉은빛’이라는 시에서 “볼이 떨어져 나갈 듯 추운 날/ 大口처럼 벌어진 진해만과 가덕만 사이 / 한류와 난류도 볼을 부비면서 살이 오르는 곳”처럼 대구라는 생선을 커다란 입으로 병치해 대구가 대구(大口)가 되는 것과 같은 문법이 되는 것이다. 화자의“애옥살이” 방에 들어온 모과는 이내 방만큼 커지니 말이다. 여기서 커지는 것이 향이건 공간이건 중요하지 않다. 사소하고 조그마한 그것도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진 낙과인 모과가 하강에서 상승하는 것처럼, 죽었다고 생각했던 향이 “몇 발짝 누릴 수 없는” 공간과 함께 살아나는 것이다. 이 훈훈한 동화적 알레고리 모과에는 하찮은 듯 쓸쓸하지만 끝내 숨겨지지 않는 향이 있고 두드러지진 않아도 억누를 수 없는 팽창의 힘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과의 발향과 관련해 특히 마음을 붙드는 것은 “누가 당신을 바짝 당겨 앉기라도 할지 / 이게 무슨 향인가 하고”“살갗 위의 끈적한 진액이 / 당신을 붙들지도” 모른다는 언술에 있다. 그 모과의 향처럼 누군가의 생을 불러내는 이 연상은 모과가 몇 평 누릴 수 없는 방을 구하고, 방이 모과의 향을 살리듯 방과 모과가 같은 동세로 “어찌할 수 없”이 타자화된‘고독의 즙’인 대상들을 자기의 방, 의식의 방으로 불러들이는 것에 있다. 때때로 우리 사회의 부패한 시스템이 오작동하거나 무신경한 상황에서 약한 것들이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더 약한 자를 보살피게 한다. 마치“향이 나지 않아 속이 썩은 것 같다고 해서 얻어온 모과”처럼 말이다. 시인 손택수 특유의 재치와 넘치지 않는 해학은 모과의 방이라는 개별 에피소드를 우화적인 묘사를 통해 비판적 메시지를 소박한 실감으로 전하며 모과와 방이 동질적으로 맞붙은 채 바짝 당겨 앉게 한다. ‘모과의 방’ 근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세상이라는 무관심을 겪은 왜소한 생애의 필사적인 공감이다. 그러니 이제 나와 당신이 바짝 당겨 앉아 모과의 향을 구해낼 차례다. 밀착은 모과와 방 그 둘만이 아니라 그 좁은 공간에 다가가 둘만의 발화에 참여함으로써 소통하는 것이다. 비록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더라도 둘은 지상의 밑바닥으로부터 구원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존재와의 공감과 소통이 서로를 보살피는 주체가 된다. 시인의 세계에서 희망은 추운 날 볼을 부비며 밀착하는 붉은빛의 고백과 같으리라. 모과의 향이 방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화자가 지속해서 고독의 살갗에 밀착해 간 것처럼. “오세요, 누릴 수 있는 평수가 몇 발짝 되진 못해도”

2024-11-17

닳아 가는 것들의 에필로그

이희정시인 가을이 닳고 있다, 바스락 바스락 몸살을 앓으며 시간이 닳고 있다 또 한 번 나이테 더하는 내 목숨도 닳고 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닳아간다 신발이며 옷이며 책상이며 자동차까지 모두가 닳아 가면서 말이 없다 생색내지 않는다 자신만을 위해 닳아온 시끄러운 나의 소리 깎을 새 없이 닳아 있던 엄마의 손톱처럼 이 가을, 누군가를 위해 말없이 닳아지기를 ― 김귀현, ‘닳아 간다는 것’ 전문 (‘너라는 화두’, 좋은생각) 기꺼이 닳아 가며 누군가를 ‘위해’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무조건적 사랑(agape)이라고 한다면 이 시가 그렇다. 시인은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닳아간다”고 했다. “가을이”“몸살을 앓으며”“닳고 있”는 “바스락”거리는 시간은 아낌없이 헌신적이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도 길들어 간다.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 “신발이며 옷이며 책상이며 자동차까지” 일상의 모든 것들이 사막의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한 말처럼 사랑도 길들어져 익숙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깎을 새 없이 닳아 있던 엄마의 손톱”처럼 말이다. 화자는 닳아 가는 가을 속에 슬그머니 “엄마의 손톱”을 부려놓고 “자신만을 위해 닳아온 시끄러운 나의 소리”를 해찰하고 있다. 시나몬 향 그윽한 가을이다. 렌즈에 담는다면 무엇을 담을 것인가. 아니 어떻게 담을 것인가. 첫 행엔 가을의 바스러지는 낙엽의 외양을 비추지만, 이후 이런 풍경들은 나이테를 더하며 닳고 있는 장엄한 목숨으로 점차 바뀌어 간다. 그 모든 슬프고 번잡한 일상으로부터 갑자기 뚝 떨어진 듯 초연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이렇게 내밀하게 들여다본 가을 풍경은 곡진하게 아름답다고 일러주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시간 속에 담긴 풍경이란 어떤가. 자신만을 위해 닳아온 시끄러운 나의 소리는 혼잡하고 시끄러운 현대의 우리들 삶 전체를 상징하는 부분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삶의 모든 시절에는 그 시절만의 치열한 문제가 있다. 세월이 흐른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문제가 달라 보이기도 한다. 오직 ‘나를 위해’라는 고유성은 결국 세월 속에서 ‘누군가’라는 익명성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마는 것. 그것이 시간이 가진 위무일까. 그렇게 줌인으로 시작된 시인의 가을은 서서히 줌아웃 되면서 화자가 바라보는 주관적 시점에서의 묘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화자는 바스러지는 낙엽의 시간 바깥에서 자신과 어머니의 헌신적 삶을 그대로 겹치면서 이 쓸쓸한 이야기는 온기 있는 이미지가 된다. 김귀현 시인이 걸어온 삶의 깊이만큼 진폭의 울림이 크다. 시인의 사유는 현역에서부터 지금까지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펴 온 개인적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그보다 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이타적인 세포가 생래적으로 내장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간 시인이 걸어온 시간이 욕망과 체념이 뒤섞인 풍경이었다면 닳아 가는 것들은 궁극의 화자가 닿으려고 한 시간 그 자체이다. 유채색 사유들이 무채색으로 등뼈 깊이 새겨진 나이테는 빛과 어둠이 그려내는 삶의 진경이 아닐까. 그 길을 향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사람의 생의 끝이 처음처럼 아름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시의 전체적 조망은 단풍 든 나무를 현상으로 인식하고 스산한 늦가을의 허전한 정취에 화자의 모습이 겹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칫 단풍이 발색으로 보이지만 기실은 탈색이다. 색이 빠지면서 비로소 안 보이던 제 색이 나오는 것이다. 생색내지 않고 닳아 가는 것들의 탈색이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고 있는 풍광, 이 또한 자연의 반복된 여정일테니까. “이 가을, 누군가를 위해 말없이 닳아지기를”

2024-11-03

여기서 마음껏 ‘아프다가’

아프다가 담 밑에서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손가락 두 마디만 한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한강,‘조용한 날들’ 전문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오늘의 첫 대출 도서는 한강의 소설 ‘흰’이다. 노벨문학상 발표 이후 서점가는 물론 도서관의 풍경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한강 작품 찾아 읽기, 혹은 다시 읽기, 더해서 한강 작품 모아 읽기 등의 태그를 달아도 될 만큼 가히 노벨상 특수라 할법하다. 한강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시인이기도 하다. 작가의 등단 시는 ‘문학과 사회’에 실려 있는데 이후 발표된 시들을 모아, 한강은 첫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2013)’를 발간한다. 소설을 쓰는 중에 시를 써왔던 것들을 모아 출판한 것으로 작가에게 시와 소설의 경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듯하다. 한강의 시와 함께 소설을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특히 한강의 시편들과 소설인 듯 시인 듯 장르의 경계가 모호한‘흰’과‘하얀 돌’의 색채 이미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실상 같은 돌이다. 마치 흰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에필로그처럼 읽히니 말이다. 이처럼 작가의 시적인 비유와 묘사의 문체, 색채 이미지는 한강 작품이 호소하는 인물들의 절망과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고유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강 작가의 문체는‘눈’같다. 작품 속에 ‘눈’의 이미지가 자주 나오는 것은 하나의 서사전략이다. 이미지는 감각에 의해 선취되는데 주로 시각 이미지에 집중되어 전개된다.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작가의 망설이는 듯한 느린 발화처럼,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조용히’그리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 결코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는 발화는 있을 수 없다. 이희정 시인 “오래전 그녀는 바닷가에서 흰 조약돌을 주웠다. 모래를 털어낸 뒤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서랍에 넣어두었다. 가끔 그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얹어보았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속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하지는 않았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소설,‘흰’에서‘흰 돌’부분) 작가는 무겁고도 아름다운 문체로 말한다. 환부에 흰 연고를 바르고 흰 거즈를 얹는다고 훼손된 부위가 복원되기는 어렵다. 복원할 수 없는 세상보다 복원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촉각이 스며 있다. 고통과 상처의 촉각, 사랑의 촉각, 찢어지는 목소리의 촉각, 소리 없는 소리의 폭력이 감추어진 폭설의 촉각처럼 말이다. “나는 조용히 있고 싶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작가의 인터뷰에서)

2024-10-20

포시랍다는 말, 내게 하지마

이희정시인 아버지의 나라에서 가장 빛나는 말 포시랍다는 말 포시랍다는 말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다보면 포슬포슬 고운 먼지가 일어날 듯하고 보드라운 솜사탕 한입 먹은 듯 몽글몽글 뭉게구름 하얗게 피어나 머리끝이 거꾸로 선다 포시랍다는 말의 온기로 그 말의 사랑으로 그 말의 넉넉함으로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고 어느 날 포시랍다는 말,에서 강제 추방당하고 나니 그 속에 든 사랑과 온기와 배려와 부드러움에게마저 추방당해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가장 포시라운 사람이 되었다 ―배영옥,‘포시랍다는 말’전문(‘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저녁이면 비스듬히 열어둔 창문 틈새로 스미는 바람이 차다. 어느새 극세사 보드라운 올들이 그리운 계절이 온 것이다. 형용사 ‘포시랍다’는 말을 손가락 끝에 올려두고 굴려본다. ‘곱게 자라 철딱서니가 없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라고 한다. 조심조심 만져야 하는 말이다. 왠지 함부로 해선 안 될 것 같은, 부서질 것만 같은, 어린 새의 깃털 같은 여린 것들이 떠오르니 말이다. 1999년 매일신문으로 등단해서 2018년 지병으로 소천한 배영옥 시인을 생각하면 포시랍다는 말이 생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용하고 수더분한 느낌에 더해 매사에 조심스러워 무슨 잔치나 행사 같은 데서 모두들 입장한 다음에 슬그머니 들어와 혼자 뒷전에 가만히 앉는 사람 같은, 아니 제일 먼저 들어왔는데도 큰 기척 없이 맨 나중에야 일어서는 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조용하지만 명랑하기도 해서 격정을 가졌으면서 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고 이영광 시인은 그이의 유고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의 발문에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포시랍다’는 말은 어쩌면 시인을 닮았으리라. 시인은 ‘포시랍다’는 말이 “아버지의 나라에선 가장 빛나는 말”이라고 했다. 스무 살에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마음의 병으로 몸의 병을 불러내어 시를 쓰면서 자신과 조금씩 화해를 하기 시작했다는 시인의 시편을 조심조심 입술로 굴려본다. 조심조심(操心操心)이라는 한자어를 풀어보면 “실수가 없도록 마음을 쓰는 모양”이다. 더하여 잡을 조(操)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목 글자 위에 입구가 셋이다. 이것은 나무 위에서 모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의 입 모양을 닮았다. 그러니 어찌 조심스럽지 않겠는가. 아기새는 꽉 쥐면 다칠 것이고, 새의 알이라면 부서지거나 조심성 없이 헐겁게 쥐면 떨어뜨리게 되기 쉬우니 말이다. 아버지의 나라에선 누구든 그랬다. “포시랍다는 말의 온기로 / 그 말의 사랑으로 /그 말의 넉넉함으로” 철이 없어도 다치지 않았고 철딱서니 없다는 이유로 해치지 않았다. 하지만 포시랍다는 말에서 강제 추방되고 보면 시인의 말처럼 “그 속에 든 사랑과 온기와 배려와 / 부드러움에게마저 추방당해 / 세상 물정 모르는 / 가장 포시라운 사람이”된다. 둥지를 잃고 빠져나온 세상이라는 곳은 녹록지 않다. 철딱서니란 둥지를 떠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포시라움인 것처럼. 그러나 생전의 시인은 혼자의 몸으로 쿠바라는 애인과 8개월 동안 열애를 한 일이 있다. 단 한 번도 한국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녀를 세상물정을 모른다며 친구들은 걱정했지만 체 게바라와 생일이 같다는 억지 이유를 들어가며 기어이 쿠바와 조우했다. ‘포시랍다’는 말만으로도 포시라워지는 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이른 나이에 찾아온 병마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끝내 황폐해지지 않은 시인에 대한 포시라움을 다루고 있다. 결국 사람은 그 자신의 운명이다. 어쩌면 ‘포시랍다’는 그렇게 말하는 시인지도 모른다. “내가 끝내 영원으로 돌아간다 한들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으리라. 훗날 네게만 말해 줄게”(2018년 작가의 말)

2024-10-06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 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 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그 여름의 끝’전문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끈질긴 여름이었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혹 72세가 된 이성복 시인이 27세 때 쓴 시를 만난다는 건 이미 27세에 72세가 들어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도 문제는 시간이다. 백일이 붉은 꽃이라 하여 백일홍이라. 이처럼 한정된 여름의 질은 사랑의 힘을 과장하고, 여름의 양은 사랑의 태도를 흔들며, 여름의 속도는 사랑의 한계를 강화한다.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무사했다”는 진술은 폭풍의 격랑 속에서 삶은 무엇이든지 할 수도 있고 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증언과도 같다. 이즈음 긴 폭염 한 가운데 서 있는 백일홍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목백일홍은 여름만큼이나 힘이 세다. 폭풍은 한 차례, 또 한 차례 반복된다. 삶의 고통 또한 늘 그렇게 반복된다. 그럼에도“나”는 쉬이 절망하지 않을뿐더러 장난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다고 했다. 이쯤에서“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라고 했던 줄리언 반스의 단 하나의 질문을 대입해 보면, 화자는 마치 폭풍 한 가운데서 “나무 백일홍”이 무사했듯“나”역시 쓰러지지 않고 견뎌내었다고 결연히 답하고 있는 듯하다. 이 시가 그렇다. 나무 백일홍이 폭풍을 견디고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피우는 것처럼 화자는 절망을 “장난처럼 붉은 꽃들”의 비유처럼 여유롭게 환치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사고와 감정을 유발하는 원동력을‘욕동’이라고 했다. 자아와 동일시된 나무 백일홍의“억센 꽃”은 폭풍에 대한 응전이며, 죽음 욕동을 극복한 삶을 욕동하는 표징이라는 독해는 강인하면서도 연약하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이 피어 있는 두어 평 좁은 마당은 퍽 몽환적이다. 치열한 싸움 끝에 피 냄새를 풍기는 살의의 풍광 속에 사랑은, 삶은 위치한다. 그곳이 화자의 고통스런 내면의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그곳이 바로 시가 틈입할 자리이지 않겠는가. 삶 속에서 갈망하는 모든 것들이 순하게 이루어진다면 시라는 공간에 들어올 여지는 없을 테니까. 기실 우리의 사랑은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성을 통해 항구성을 말하는 것, 그것을 언어화하는 것이 시가 된다. 이희정 시인 시인은 말한다. 행복 속에 불행이 은거하듯 언어는 양면테이프처럼 “이중 접착제”여서“죄가 없으면 은총도 없다.” 그 구조가 언어의 구조가 된다. 죄가 있어 은총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이의 말처럼 있음은 없음으로부터 온 것인 듯하다. 본래 없음에서 왔다는 걸 알면 쉬울 것이다. “존대받으려, 사랑받으려 하면서 홀대받을 짓만 골라 하는데 그게 바로 존대받으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도 그렇다. 욕망 혹은 그리움의 대상에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언어화하는 것이다. 충족된 것들은 언어의 옷을 입지 못한다고 했다. 이 시에서 절망의 끝은 다른 세계로의 이환을 예비한다. 왜 유보되거나 지연된 것들만 언어의 옷을 입을까. 그것이 그리움의 문법인 것이고, 사랑의 불가능과 불가피성은 시간의 유한성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도 곧 사라져 갈 테니까. 그 부재와 불구의 문법인 절망이란 단어로 물리적인 유한성조차 항구성으로 탈바꿈하는 장치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마침내“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다”는 고백은 삶이란 시간 속의 어둠을 몰아내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의 언어는 시간의 플롯에 잘 어울리는‘미완’과‘불가능’의 꼭지점에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꿈을, 삶을 쓰고 있다.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이다.”

2024-09-22

주위의 모두가 기고 있다

이희정시인 몸 다 내주고 나서 전복 껍데기는 오색빛 내뿜지. 몸 없어진 곳에 가서도 노래하시게.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순간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드러나겠지.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어디엔가 붙어 기고 떨어져서 기는 아프면 누워 기고 실수로도 기는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 마음먹고 다시 둘러보면 주위의 모두가 기고 있다. 저기 날개 새로 해 단 그도 기고 있다. 뵈든 안 뵈든 묵묵히 기는 몸 하나하나가 오색빛 새로 두르게 노래하시게. -황동규,‘오색빛으로’전문 (‘봄비를 맞다’, 문학과지성사) 일상의 모든 것들이 시가 된다. 사람들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강렬한 기적의 현실이 아니라 사실은 작고 소박한 꿈의 충족일 뿐이다. 진정성이란 일상성의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일상적 삶이야말로 구원에 전념한다”는 레비나스의 역설적 관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황동규의 시를 현시점에서 주목하는 이유다. 올봄 발간된 시인 황동규(86)의 신작 시집은 김나정이 설명한 파라 텍스트(paratexte)에 우선하게 한다. 책은 종이 뭉치를 표지로 감싼 물질이다. 내용이 몸뚱이라면, 표지는 그 몸뚱이를 감싼 외투이다. 이 외투를 ‘파라 텍스트’라고 한다. 그리스어 ‘para’는 ‘~을 넘어’, ‘반대쪽에’를 의미하는 접두사다. 그러니까 책의 본문 여기서는 시편들 이외에 책을 둘러싼 모든 정보가 파라 텍스트로 묶인다. 예를 들면 표지, 출판사, 저자 이력, 띠지, 뒤표지의 추천사 등 다양한 정보를 아우르는데 이런 파라 텍스트는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준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파라 텍스트를 ‘대기실’이라 불렀다.” 시집의 접힌 날개를 펼쳐보라. 시인의 대기실에는“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도정에도 여전히 삶과 현실의 한가운데서 세상 살기의 의미와 진실에 이르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며 여전한 시인의 여전한 안부를 전하고 있다.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왜냐면 이 시가 대상화하고 있는 사물‘전복 껍데기’이 바로 시의 화룡점정인 제목‘오색빛으로’을 연결하는 징검돌이 되기 때문이다. “몸 다 내 주고 나서 전복 껍데기는 오색빛 내뿜지.” 전복의 몸을 파낸 자리 어슴푸레 번지는 오색빛을 본 적 있는가. 물빛에 반사되어 몸을 내어 주고도 스러지지 않는 오묘한 그 빛을 말이다. 시인의 다짐만큼 누구나 열망하지만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여유와 온기를 다감한 눈빛으로 누구에게든 깊은 마음의 울림을 줄 것이기에. “몸 없어진 곳에 가서도 노래하시게.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시간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들어나겠지.” 시인의 이 예사롭지 않은 깨달음을 더듬어 보라. 기실 노년의 쉽지 않은 삶에 대한 기록임에도 그런 유형의 기록에 으레 드리워져 있을 법한 우수의 그늘도 자기 연민의 그림자도 짚이지 않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외려 환한 눈으로 속세를 응시하는 밟음과 맑음의 정신이 실감으로 전해올 뿐이니 말이다.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 시인의 몸을 빠져나오며 기어이 떠오르는 것은 오랜 시간을 경유하며 시인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을 때 시인의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라는 믿음이다. 황동규 시인은 무가치하게 산포된 일상의 파편 같은 사물‘전복 껍데기’에서 인간이라는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밝고 맑은 심연을 오래오래 응시함으로써, 그동안 여정에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다. “좋은날, 굳은 날 가리지 않고 / 저기 날개 새로 해 단 그도 기고 있다.”

2024-09-01

말 못할 첩첩은 내게도 있지

이희정시인 밤을 새워 만드는 사과파이에 첩첩이 있지수십 장 종이 같은 마음을 아주 얇게저미고 밀어 만드는 말 못할 첩첩이 있지물 마른 진흙 첩첩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들이가쁘게 서로의 몸을 휘감는 첩첩이 있고그래도 건널 수 없는 첩첩 마음이 거기 있지첩첩 모퉁이 돌아 첩첩의 고개가 있고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우리가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이지-김수환, ‘첩첩’전문 (‘사람이 간다’, 시인동네)김수환 시인의 ‘첩첩’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정교하게 축조된 구조물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 하지만 어떤 시어나 비유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딱 들어맞는다.자칫 이런 상징은 언어유희로 한정될 수도 있지만, 이런 디테일은 시의 진정성을 담보한다. 이를테면 이 시에는 덜 조여진 ‘첩첩’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 여유롭게 관조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매끄럽게 흐른다. 첩첩이 닿는 공간마다 적확하고 깊은 이 시는 말 못 할 첩첩이 제각기 한 작법으로 성취를 이뤄내고 있다.“밤을 새워 만든 사과파이”에서 시작된 첩첩은 “수십 장의 종이 같은 얇은 마음”에도 잘 드러난다. 행간에 진입할수록 수사적 진술을 무척이나 효과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테면 첩첩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종일관 간접화법으로 에둘러 가지만, 어김없이 첩첩에 적중한다. 시의 리듬을 통해 발화되는 첩첩들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거느리고 있다. 첩첩이라는 어사(語辭) 하나가 이렇듯 많은 서사를 거느릴 수 있다니 충분히 다성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저미고 밀어 만드는”첩첩은 겹겹으로는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전적 의미로 첩첩은 걱정이나 근심이 겹으로 쌓여있는 것으로 눈으로 보이는 외상의 겹겹으로 설명될 수 없는 더 깊은 정서가 내진한다.말하자면 이 시에서 첩첩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고개”와 끝끝내“건널 수 없는 마음”을 되짚어 넘어보려는 태도이며, 서로의 몸으로 가슴으로 반복해서 설명되어 온 우리가 될 수 없는‘우리’에 대한 함축을 풀어내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시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서사 구조 속에서‘관찰되는 객체’일 수밖에 없는 첩첩을 말하지만, 특유의 생동감 있는 리듬으로‘정서적인 주체’로 환원되고 있다.여기서 첩첩은 압축된 현대시조의 말 부림만으로는 환유할 수 없는 시상이 중첩되어 있다. 크루아상의 외피처럼 사실상 속은 공기로 부풀어 비어있는데, 플롯은 꽉 차 있다. 원심력만으로 평생을 끌고 가는 첩첩은 가벼운 듯하나 아픔이 깊다. 바로 이 점이 “김수환 시인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그리움과 아픔”이라는 독해에 동의하게 되는 지점이다.이 시에 드리운 첩첩의 배경을 보라. “밤을 새워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물 마른 진흙”이고,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이지 않은가. 풀리지 않는 매듭 앞에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이 시는 헤어 나오기 어려운 늪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놓였다고 해도 독자에 따라 저 깊이까지 파고들게 하는 구심점을 목도 할 수는 있겠다.막막한 내면의 벽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외양 속에 숨긴 대상의 비유도 놀랍지만, 더 감탄스러운 것은 저마다의 첩첩을 대하는 자세다. “아주 얇게”“모퉁이 돌아”“가쁘게”시인의 이 작품은 시조라는 장르가 진부하지 않을 정도로 신선하고 입체적이다.그렇다면 이 첩첩의 막막함이 주는 무기력한 안온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벼운 듯 깊은 이 시의 정조가 당신에게 어떤 방향을 작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가라앉아 가는 당신의 밤을 첩첩은 흔들어 놓을 것이다. 치료제는 없을지라도 사과파이 같은 달콤한 각성제는 들어 있기 때문이다.“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

2024-08-18

여름에게 안부를

이희정시인 여름아, 반찬이 쉽게 상하는 계절이 되었어이런 계절이 되어서야겨우 답장을 한다 종이와 펜은 넘쳐나는데 마음이 도착하지 않아서겨우의 자리에 많은 것들을 고이게 만들었어겨우의 자리는 어떤 곳일까모든 것엔 제 자리가 있고 그건 결코 슬픈 일이 아니지만어쩐지 겨우는 영원토록 제자리만 맴돌 것 같고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내가 사랑하는 부사들을 연달아 적으며그것들의 겨움을 또한 생각한다여름아, 왜 어둠을 말할 땐 내린다거나 깔린다는 표현을 쓸까어제는 야광운을 찍은 사진을 봤어야광운의 생성 조건은 운석이 부서진 가루와 초저온이래부서짐과 추위의 결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된 것그것들을 아무 죄의식 없이 아름답다고 말해도 되는 순간이 올까상한 반찬을 버리면 깨끗한 식탁을 가질 수 있을까-안희연,‘야광운’부분 (‘당근밭 걷기’, 문학동네)일기예보는 연일 폭염을 경보한다. 아이들은 연신“더워죽겠어요”라는 말을 쏟아낸다. 온몸에 흐르는 땀처럼 말이다. 해서 답해주었다,“여름이니까.” 그런데 진정 여름을 여름으로만 답할 수 있을까.안희연 시인(1986~)이 호명하는 단어들은 모두 애정어린 겨움을 지니고 있다.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 의미심장한 부사어들을 연달아 적으며 겨움의 안쓰러움을 상기한다. 시를 가만히 따라가 보면 유독 언어 표현의 세밀함에 감탄하게 되는데, 한 단어도 허투루 놓인 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시인은 여름이라는 대상을 한 존재로 대상화하고 있다. 제목으로 올린 ‘야광운’의 주제를 대수롭지 않게 멀리 두는 방식으로 본질에 밀착하는 기예의 깊이를 힘껏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녀가 한 존재, 여기서는 여름이 되겠다. 여름이라는 존재를 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세상 모든 모종을 향해 열려 있으되 충분한 교감이 전제되어야 한다.“절대로, 도무지, 결단코, 기어이, 마침내, 결국….//그런 말들은 다독여 재우고//여름아, 이제 나는 먼 것을 멀리 두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내가 나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으로”“안희연의 시는 다른 존재와 관계 맺는 순간을 통해, 삶이란 한 사람의 것이 아님을 체감하게 만들며, 그러한 연결의 감각이 서로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는 독해를 경유하며 이번에는 ‘절대로’‘도무지’‘결단코’‘기어이’‘마침내’라는 종결의미의 부사어들이 안간힘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힘을 빼고 지나온 겨움의 연약함을 결국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강한 의지가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우리의 여름은 점점 더 뜨거워질 것이다. “상한 반찬을 치운다고 우리의 식탁은 깨끗해질 수”없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으로 직감하고 있다. 보통 밤에는 구름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행성에선 밤에도 빛을 향해 하늘을 밝히는 야광운 현상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대기 오염의 결과라고 이것이 주는 불안감은 시인이 열거한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의 여름과 같은 사실로 귀납된다.여기서 여름은 점점 틈입해 들어오는 경험의 편린이 아니다. 부서지고 쪼개지는 파괴에 힘을 다해 맞서는 저항의 태도이다. 이 시에서 야광운은 공포감을 가졌지만 이어지는 단어들은 치유감을 지녔다.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며 잊지 않으려 애쓰고 또 애쓴 시어들이 결국 비극의 구멍을 메운다.먼 것은 멀리 두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시에 담긴 감동의 태반(太半)은 안간힘이라는 저항의 겨움이다.

2024-08-04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작년 어느 날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나는 깜짝 놀랐다나는 아파서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참 우습다내가 57세라니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최승자, ‘참 우습다’ 전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 지성사, 2011)최승자 시인(1952년~)은 “담배 한 대 피우며 한 십 년이 흘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후 시인의 시간은 거기에 또 한대의 담배가 얹힌 시간이 된다. 그렇게 한 세월이 있었다. 80년대에 시인이 되고자 했던 많은 시인처럼 최승자의 시들이 보여주었던 치명적이고 고질적인 꿈, 혹은 병(病)은 혹독한 고통의 시간이었다.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보존한다는 것과 보존된 과거를 상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에서 시간은 시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연된다. 그것이 바로 ‘병(病)’이다. “그냥 아파서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시에 나타난 과거적 지평은 단순히 회고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를 응시하는 시인은 퇴행적 욕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미래 지향적 욕망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를 분출하고 있다.깨어 있는 동안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현실은 삶에 달라붙는다. 시인에게 병(病)은 그러한 삶과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라캉은 죽음충동은 불쾌의 경험에서 쾌를 회복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시인은 오랫동안 투병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이는 의미와 존재의 사유를 표현하는 것에 실패했을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우회로이다. 시인은 과거를 재현하며 그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끌어당겨 현재의 ‘나’의 위치에서 언어화한다. 최승자의 시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시적 자아는 삶에 위치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오랫동안 죽음에 투신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출하듯 최승자는 최승자를 떠났다.시인 최승자는 묻고 답한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 그렇게 무수히 떠나고 무수히 되돌아오면서 많은 시간을, 주저앉아 있는 것, 정지해 있는 것, 고여 흐르지 않는 것은 시간의 누적과 더불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굳어져 버린다. 단단히 굳어져 하나의 질병”이 돼버린다. 그러니까 이건 힘겨운 삶과 사라진 사랑, 버거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최승자 시인의 시를 통해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의 그 아스라한 통증의 공허함이란. 그리고 타자들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에 의해 주도 되어오던 시인의 시간은 후반부에 이르러 시인의 시점으로 바뀐다. 그 순간 시인은 마침내 껍질을 벗고 세상으로 나올 생각을 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을 잠시 흐르다 가는 삶의 즐거움과 고통, 사랑과 죽음에 대한 방식은 이어지는 작품 ‘너에게’에서도 연역한다. 이희정시인 “네가 왔으면 좋겠다 / 나는 치명적이다 /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 황량한 쇼윈도 같은 나의 창 너머로 /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 텅 비어 있다./ 텅 텅 비어, /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그녀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의 표제를 비웃듯 1979년 등단 이후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 옮긴 책들은 투병 중의 그녀로서는 지극한 이력이다. 여전히 많은 독자가 시인의 시에 기대어 허무와 고통을 필사하는데도 불구하고, 덧붙은 이력에는 기초생활수급자, 초등생 몸무게, 정신병원 재입원 등의 키워드가 부록처럼 딸려있다. 그럼에도 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앞으로도 뒤로도.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2021년 시인의 말, 최승자)”

2024-07-21

그러니까 시가 뭐꼬?

이희정시인 논에 들에할 일도 많은데공부시간이라고일도 놓고헛둥지둥 왔는데시를 쓰라 하네시가 뭐고나는 시금치씨배추씨만 아는데..................고구마 밭에서밭을 매다가 너무 더워서집에 왔다중복이라서 닭 한 마리사다가 영감하고꽈서 먹고즐거웁게한글학교에 오니학생들이 많이 왔다더운 줄도 모르고 한글수업을 하였다―‘시가 뭐고?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삶창, 2015)그렇다, 시금치씨 배추씨도 아닌 시가 뭐냐고? 시집 ‘시가 뭐고?’는 ‘시’가 아닌 ‘씨’를 쓰는 시인들이 경작한 시집이다. 이 시는 경북 칠곡군에 사는 ‘할매’들이 문해(文解)교육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한글로 손수 쓴 시들을 모아 엮은 시집의 표제작이다.이 시집의 묘미는 살아있는 입말(口語)의 경지를 맛보는 것에 있다. 그 어떤 꾸밈도 분장도 없는 소화자 할머니 외 88명의 할매들은 대부분 ‘생애 처음’ 시를 써보았다.아무 생각 없이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들의 조합으로 시를 읽어 보면 띄어쓰기도, 맞춤법도 틀리고 죄다 경상도 사투리다. 기획자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저자 할매들은 평생을 ‘목소리에 의지하는(verbomotor)’ 문화, 구술성(orality)에 의존한 삶을 살아왔으며, 말을 통해 이해하고, 관계 맺고, 소통 해온 세계에 대한 순한 그리움과 전망이 생애 처음 문자로 새겨 놓았다는 말이 실감으로 온다.이것이 시란 말인가. 의문을 품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은 뒤, 한 행이 그대로 한 연이 된 그 줄을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동공이 습해온다. 우리의 눈과 가슴에 새겨진 그 사투리가 대책 없이 아름다워서 혹은 진저리 치게 삶을 그대로 옮겨 놓았기에. 사실 사투리는 비유나 운율 등의 시적 요소의 측면에서 볼 때 근친성을 갖기도 한다. 국어학자 이상규가 사투리(방언)를 일러 ‘오래된 역사의 주름’이라고 표현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 시들에서 사투리는 길고 질퍽한 할매들의 생활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육성이기에. 그것은 모든 관념이 지배하는 절제와 성찰을 넘어서는 우리 몸 전체에 박혀 즉각적으로 생생하게 흡수되고 이해되는 물과 같다. 물에도 밀도가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를 물의 밀도를 재어보면 필경 가장 촘촘한 온도가 될 것이다. 한겨울에도 얼지 않은 수심이 있어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아가미가 호흡하는 삶의 적소로서 말이다.이 세계는 낡은 것들로 가득하다. 두 번째 시편 ‘여름날’에는 즐거운 학교가 있고, 학생이 있어 중복 중에도 “더운 줄도 모르고” 배우는 한글이 있다. 노년은 무엇으로 사는가. 칠곡 할매들이 쓴 배움 시편들은 노년기에 경험하는 역할 상실을 극복하려는 학습의 염이 내연한다. 농촌 지역인 칠곡 할매들이 배우면서 느끼는 존재감은 도시에 사는 노년에 비해 적어도 고독할지언정 고립되지 않음을 “학생들이 많이 왔다”라는 시어를 통해 드러난다.같은 처지의 ‘곁’이 있어 인기척을 느끼며 사는 삶이란 또 얼마나 정겨운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낡은 것은 경시하기 십상인 세계이기에 시집이 환기하는 정서는 소소하지만 사소하지 않다. 그들은 문해 학교에서 글자를 넘어 키오스크를 터치해 햄버거를 주문할 수도 있고, 말로는 전하지 못한 마음을 편지글로 맺힌 한(恨)을 풀어내기도 한다.삶은 언제나 ‘무엇’보다 ‘어떻게’가 중요한 질문이 된다. 올해도 대구·경북 문해교육 현장에서 공모한 첩첩의 시편들을 알현하며 시인들에게 묻는다.“인문학, 그기 뭐꼬? 우리가 사는 모습이 인문학이지?”

2024-07-07

깨어진다는 말

파란 유리병은 ‘퍽’하며 깨어진다 한낮에 깨어진유리 조각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이다 노란 유리병은깨어질 때 ‘퍽’하는 소리를 낸다 한밤중 평상심이높은 별빛 소리를 다독이는 낮은 달빛 소리이다빨간 유리병은 ‘퍽’하는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그것은 아닌 밤중에 새벽 구병산이 벌떡 일어나 제가슴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6·25가 터지자 대포소리가 자주 구병산을 흔들곤하였다 놀란 가슴이 자주 ‘퍽’하고 깨어졌다부슬비에 부슬부슬 부서지는 모래밭저 여린 유리병 깨어지는 소리가 ‘퍽’하며 제 고향 먼 바다를 엎지르다니!―강현국,‘퍽, 하며 깨어진다’ 전문(‘구병산 저 너머’, 시와반시)‘깨어진다’를 생각한다. 깨어진다는 동사 하나로 수렴되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괴물 중 목신 판(pan)이 있다. 헤르메스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판을 올림포스산으로 데려갔고, 모든 신이 판을 환대했다. 여기서 그리스어 판에는 ‘모든’이라는 뜻이 생겨났다고 한다.판은 물의 요정 님프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판을 보자마자 도망치고 말았다. 숲에 살던 판은 기분이 나빠지면 괴성을 질렀고 이 소리를 들은 인간이나 짐승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극심한 공포’나‘ 공황 상태’를 의미하는 영어의 패닉(Panic)이 바로 판이 지른 괴성이다.강현국 시인의‘깨어진다’에는 판의 공포가 숨어 있다. ‘퍽’소리를 내며 깨어진 경험은 시인이 기억하는 모든 것의 그늘이고 구석일지도 모르겠다. 깨어지는 유리병에는 평화가, 사람이, 넘어진 무릎이, 못 지킨 의자가 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유용하거나 무용하거나 채우거나 비우거나 모두 ‘깨어진다’하나로 통성한다. 무엇보다 깨어진다는 말은 고통이 낳은 상처의 언어라는 사실이다.강현국 시인에게 깨어짐의 경험은 패닉이다. “파란 유리병이 깨어진 소리” ‘퍽’의 유리 조각은 한낮의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시인의 한낮을 뒤흔들고만‘퍽’에는 은닉된 패턴이 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하나의 습성일 수도 있고 잔인한 플롯일 수도 있다. 색을 보고 놀란 가슴은 붉은 것만 보아도 놀라고, 이름 한 글자에도 놀란다. 거기에 잔혹한 가시마저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 그 아픔은 그 일 자체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서 온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시인은 누구나 한 생을 살면서 지옥의 한 철을 만난다고 했다. 세월이 흐른다 해도 망각이란 이름으로 지워지거나 추억이란 말로 쉬이 봉합될 수 없는 아픈 상처의 한 철을 만나다고. 상처의 출처는 실존의 번뇌로부터일 수도 있고, 이념과 진영의 대립으로부터일 수도 있고, 안팎 현실과의 불화로부터일 수도 있다고. (강현국, ‘먼 곳으로부터 먼 곳까지’) 이희정 시인 그런 시인에게 올림포스산이 있다. 아홉 폭 병풍이 첩첩 에워싸인 밤이면 노란 치자꽃 향기 번지는 그리움의 거처 구병산은 늘 거기 그렇게 있다고. 어머니 매달려 석 달 열흘 기도하던. 머리 위로 포성이 지나도 은하수 흘러가고 별똥별이 져도, 어느 날 궁금해서 찾아간 뒤에도.그런 구병산에 “빨간 유리병은 ‘퍽’하는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 / 그것은 아닌 밤중에 새벽 구병산이 벌떡 일어나 제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노란 유리병은 깨어질 때‘퍽’하는 소리” “한밤중 평상심이 높은 별빛 소리를 다독이는 낮은 달빛 소리” 먼 곳은 먼 곳이어서 닿을 수 없다고 했다.해서 시인은 그리움을 노래한다. 마치 목신 판이 사랑하는 연인 갈대가 된 님프를 악기 팬플루트로 만들어 불렀듯이 말이다. 좋은 시가 그렇듯이 “부슬비에 부슬부슬 부서지는 모래밭” 시인 속에는 넘칠 듯 말 듯 조용한 그리움이 천리를 가듯 지극한 마음을 엎지르며 간다. “저 여린 유리병 깨어지는 소리가‘퍽’하며 제 고향 먼 바다를 엎지르다니!

2024-06-23

이따위, 종이쪽지에도

물이 스미지 않을 적엔 스스럼없이쉽게 떨어졌지만그 몸에 물기가 점점 번져들자 종이 두 장은마주 달라붙어, 서로를 견인하게 되었다축축해진 두 몸이 혼신으로 밀착하여한 쪽을 떼어내자면 또 다른 한 쪽이사생결단,먼저 자신을 찢어놓으라는 것이다.이따위 종이쪽지에도 이별은고통 없이는 없나 보다.- 이수익, ‘이따위, 라고 말하는 것들에게도’전문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천년의 시작) 이희정 시인 아프다, 지극히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낭만을 종이 두 장이 견인하고 있다. 이 시는 시인의 구체적 체험을 재현한 서술 한 줄 없이 흡사 뼈와 근육만으로 이뤄진 것처럼 사건의 이미지에만 힘을 주고 있다. 마치 그들이 어떻게 찢어지는가를 두 눈 똑바로 뜨고서 보라고 하는 듯하다.그러니까 이별은 사랑이라는 마술적 전제에서 비롯된다. 그 마술은 꼭 그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우연을‘물’이 스밈으로써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 하는 운명으로 바꿔버렸다. 혹은 반대의 방향으로 작용할 때 연인들은 가볍게 해체될 것이다.이 시에서 종이 두 장은 이별의 분위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오브제다. 여기에 담긴 것은, 왜 어떤 연인들이 절박한 이별에 직면하는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좋은 러브스토리는 가장 유별난 연애담을 다루는 듯 보여도 실은 지극히 사소한 장면으로 확인됨으로써 현대의 그 많은 연인의 사랑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별은 그 자체로 운명적이면서 예외 없이 허망하다.인간의 정신적 자유와 평화가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진술은 새롭지 않다. 너무도 자주 반복되었기에. 하지만 그런 삶의 지혜는 이수익 시인이 말하는‘이따위’라는 사소하고 흔한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한다.“우리 주변에서 ‘이따위 것’으로 불리는 대상은 대체로 하찮고 비루한 것들이기 십상이다. 시인이 묵도한 풍경은 하찮은 종이쪽지 두 장이 우연히 물기에 젖어 달라붙어 있는 풍경이다. 회자정리, 생자필멸이라는 삶의 기본 원리를 떠올리면 문득 경건한 마음마저 든다.”(평론가 장영우) 함부로가 넘쳐나는 세상이지 않은가. 너무 쉽게 버려지고 너무 쉽게 잊히는 풍속 가운데 시인은“이따위 종이쪽지”의 붙음과 떨어짐의 사건에서 집착과 이별이 초래하는 삶의 근원적 비애를 읽고 있다.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어떠할까. “이별에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면 뒤통수를 치고 떠나야 한다”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는 현대인의 가벼운 세태를 조롱하고 있는 듯하다. 뒤통수란 곧 어느 한쪽의 잔인한 배신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것은 실연한 사람의 기억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에 반해 이별 후에 남는 것이 뒷모습이라면 로맨스에 가까울 것이고, 결국 로맨티시즘과 리얼리즘의 줄다리기가 연인들의 영원한 숙제임을 보여준다. 결국 이 시가 다루는 것은 연애라는 알고리즘, 사랑의 생과 멸 그 자체다.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두 장의 몸은 단지 이별의 정조를 만드는 피사체로만 기능하지 않고, 몸과 몸이 이끄는 사랑의 현재 위치를 가장 적실하게 지시하는 좌표 역할을 한다. 몸과 몸이 사랑의 심리를 긴밀하고도 절박하게 교직하는 시인의 재현이 놀랍다. 계절의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시간이 끝난다고 삶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별에는 그들만의 아름다움이 있다.“마주 달라붙어, 서로를 견인하게 되었다”고, “축축해진 두 몸이 혼신으로 밀착하여” 있어 “떼어내자면 사생결단 먼저 자신을 찢어놓으라는”것이다.이따위, 라고 말하는 것들은 슬프다. 견딜 수 없이 서늘한 정도로 성숙한 존재들이다. 매우 감성적이면서도 놀랍도록 철학적이다. 만일 이 시가 아무렇지 않다면 당신은 어쩌면 진정한 러브스토리를 가져보지 못했거나 사랑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이따위 종이쪽지에도 이별은 고통 없이는 없나 보다.”

2024-06-09

나의 월든은 어디에

이희정 시인 고속도로로 가면 아주 멀진 않아.그곳의 거친 소나무들과 돌들, 맑은 물을 보고해 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야.친구들은 그러면 내가 더 현명해질 거라고 말하지.그들은 머나먼 양키의 속삭임을 듣지 않아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니다 보면 우리는 얼마나 둔해지는가!많은 사람이 떠났고, 시원한 시골에서의 하루를그리워만 하는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책에서월든에 가는 건 단순한 초록 나들이처럼 간단한 일은아니지. 그건 느리고 힘든 삶의 비결이고,자신이 있는 곳에서 월든을 발견하는 것이지.―메리 올리버, ‘월든에 가기’ 전문 (‘기러기’, 마음산책) 여기 두 개의 월든이 있다. 최초의 녹색 서적으로 일컬어지는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는 숲과 호수가, 메리 올리버 시인에게는 숲과 바다가, 그들 사이에는 “거친 소나무들과 돌들, 맑은 물”과 같은 자연의 선물이 있다. 메리 올리버 이전의 내가 아는 월든은 세련되고 까다로운 사상가 에머슨(1803년~1882)과 투박한 고집불통의 자연주의자 소로(1817~1862)의 불멸의 우정이었지만, 그들과 더불어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1935~2019)가 있다.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시인은 자연 속에서 자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의 친화적이고 동반적인 관계 형성이 가능했다. 자연 속을 산책하고, 세밀히 관찰하고 동식물과 교감하며 그 경험과 자신의 지혜를 언어로 재현하는 이른바 생태 시인이다. 그녀의 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 심지어 무생물인 돌도 살아 있다고 사유하며 소로가 다루고 있는 월든의 의미를 삶으로 체득하고 있다.지혜란 어디에서 오는가. 근원적인 아름다움이 자연에 있듯 우리가 만들지 않은 생명의 순수한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자연을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겸허하게 한다. 시적인 마음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녀의 관점은 오래 남을 자연과 인간의 공감어린 우애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시 ‘월든에 가기’에서 양키의 속삭임은 무엇이고, 월든은 어디일까?양키(Yankee)는 과거 영국인들이 미국인들을 촌뜨기로 조롱하는 표현이었지만 시인이 말하는 양키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내면의 소리, 이를테면 반짝이는 공기나 나무의 이끼 등 고요가 들려주는 깊은 속삭임일 것이다. 친구들은 고속도로를 권한다. 그들은 월든을 “초록 나들이처럼”간단히 인식하지만 숲은 그런 곳이 아니다.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기도 할테니까. 귀농하지 않아도 자연인이 되지 않아도 도시 속에서도 세상의 명령에 길들지 않을 수 있다. 단 한 평만이라도 내면의 월든을 만난다면 말이다.철학교수가 될 것인가. 철학자가 될 것인가. 많은 책에서 ‘나’라는 제일인칭은 생략하지만, 소로는 월든에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에 관해 말했다. 시인 메리 올리버 또한 ‘사람들’이란 말에 힘을 주지 않고 진정한 ‘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많은 사람이 떠났고, 시원한 시골에서의 하루를/ 그리워만 하는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 대개의 문명인들이 조롱하듯 월든에 가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단순한 초록 나들이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지.” 그것은 “느리고 힘든 삶의 비결이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월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우리 옛글에도 월든이 있다. “연못, 늪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도하는 물속의 찌꺼기를 쪼고 마름풀 속에 물고기 잡는 데만 신경을 쓰느라 깃털과 부리에까지 오물을 뒤집어 쓰고 하루종일 허둥대어도 물고기 한 마리를 잡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청장이라는 새는 맑고 시원한 연못에 서서 편한 자세로 날개를 접고 장소를 옮기지 않는다. 그 고요한 것은 노래를 듣는 듯 편하게 지내면서도 항상 배가 부르고, 도하는 수고롭지만 항상 굶주린다. 세상의 부유함과 귀함,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사람에 비유하여 청장을 신천옹이라고 불렀다.”(‘맑은 바람이 그대를 깨우거든’ 중 박지원 ‘담연정의 기문’, 이덕무 지음, 이강엽 편역)진정한 월든은 어디에 있을까. 하루종일 허둥대는 도하인가. 고요한 청장인가.“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니다 보면 우리는 얼마나 둔해지는가!”

2024-05-26

아기곰은 너무 귀여워

이희정 시인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노래를 부르며으쓱으쓱 춤을 추는 친구들우리는 엄마랑 아빠랑 따로 사는데….울먹이는 준이너 그거 알아?사실, 곰들은 따로 산대아빠 곰은 수컷끼리애기 곰은 엄마랑 잠깐만 산대엄마 곰은 혼자서 살아간대자연에서는 따로 사는 동물들이 더 많아코끼리도 호랑이도 다 그렇게 살아가거든같이 살아도, 따로 살아도 괜찮아우리도 하루의 반을어린이집에서 같이 살고 있잖아―정지윤,‘곰 세 마리의 비밀’전문 (‘전달의 기술’, 상상동시집)정지윤 시인의 동시 ‘곰 세 마리의 비밀’의 첫 행은 우리 모두 널리 알고 있는 동요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는 앙증맞은 어린이 세상 속에서 상처 입은 어린 마음의 현실을 동요와 포개어 피할 수 없는 육아 현장 속에 짠하게 담아놓았다.시인은 곰의 생활 방식을 빗대어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재현해 보인다.사실상 여러 이유로 부모가 아이를 돌볼 수 없는 현대 가족의 구조와 육아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공간적으로는 어린이집이 주요 배경이 된다. 곰의 공간이 꿈이라면 어린 아가들의 공간은 현실이다. 곰 세 마리 동요 속에는 엄마, 아빠, 아기가 한집에 산다. 동요의 이 대목에서 엄마와 아빠가 따로 사는 이혼 가정의 준이의 처지가 노출된다.하지만 마음 착한 친구들은 울먹이는 준이에게 곰들의 비밀을 들려준다.사실은, “곰은 수컷끼리 애기 곰은 엄마랑 잠깐만 산다.” 그리고 “엄마 곰은 혼자서 살아가기도 한다”며 곰이라는 동심 공간에 준이의 현실 공간을 이입해 달래 주고 있다.그런데 내부적으로는 이질적이던 친구와 준이의 가족 공간은 마지막 구절에서 동질감을 불러오는 묘한 기류가 감지된다.결국 아기곰 모두 하루의 반을 엄마나 아빠와 떨어져 사회기관인 어린이집에서 맡겨져 있다는 현실을 보인다. 주제 의식이 명확한 동시다. 동심을 소재로 한 작품임에도 그 정서가 마냥 밝지만은 않은 이유다.그나마 다행이랄까. 이 동요적 공간에서는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동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율동이나 행간 바깥에 있을지도 모른다.오래 되었어도 쉬이 떠나지 않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떠올려 보자.1988년 도쿄에서 일어난 ‘스가모 아동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에는 출생 신고도 안 된 네 명의 아이들이 오랫동안 굶주림에 방치되어 있다가 집주인에게 알려진 이야기다. 게다가 버려진 네 아이들의 아빠가 모두 달랐다는 사실과 의자에서 떨어져 죽은 막내 아이는 인근 숲속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일본 도시 사회의 무관심과 인간소외로 인한 사회문제의 비극을 드러낸 참담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출생 직후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동의 사례가 공공연한 현실인 우리나라 또한 다르지 않을 것 같다.여러 가지 장벽으로 비혼주의나 맞벌이 무자녀 가족을 일컫는 딩크족이 늘어나는‘씨 없는 사회’로 다가가고 있음은 주목해 볼 대목이다.오월의 거리는 감사의 인사로 넘실거린다. 반갑고 미안한 것들 사이 어린이집에서나 가정에서나 으쓱으쓱 자라나는 “아기곰은 너무 귀엽지” 않은가.

2024-05-12

하여간, 뭐든지 간에

이희정 시인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없고낄낄거릴 것도 없고,안다고 알았다고우주를 제 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고누구 죽일 궁리를 할 것도 없고엉엉 울 것도 없다뭐든지 간에 하여간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그게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거나풀처럼 흔들리고 있거나그 어떤 모습이거나사람으로 붐비는 앎은슬픔이니….― 정현종,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전문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1992년에 발간된 정현종 시인의 시집 ‘한 꽃송이’에 수록된 이 시는 어렵지 않게 읽힌다. 하여간 단박에 읽히는 행간은 읽을수록 점점 더 쓸쓸해지고 점점 더 냉소에 다가가고 있다. 아름답고 쓸쓸한 내면의 슬픈 고백이다. 이때 슬픔이라는 고백은 어떤 지향점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의 뒷걸음질 같은 아이러니한 행보와도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이 시는 내면의 로드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안온한 체념과 정직한 성찰의 분위기가 묘하게 공존하는 이 시는 제목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가 환기하는 정서부터 예사롭지 않다. 온통 통념에 휘둘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찰과 성찰을 대변하는 세계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시인이 던지는 질문들은 “활자의 모습”이거나 “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이거나 “풀처럼 흔들리는 / 그 어떤 모습”이건 모두 슬픔이라고 했다. 설령 그것이 어떤 대단한 명성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잠깐 머물거나 짧게 경험할 수 있을 뿐 결국은 사라져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 시의 정조는 내내 허무하고 쓸쓸하다. 실제 사람의 삶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본질이 아니라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사람을 좋아해서 어울리기를 즐겨하지만, 한편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 지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지지 않으려는 자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적은 없는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창과 방패를 도구로 공격적으로 맞설 것인가. 방어하는 자세로 지독한 디펜더가 될 것인가. 사람은 과도한 경쟁사회에 내몰리게 되면서 피할 수 없는 이 두 가지의 의식적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밖에 없다.“사람으로 붐빔 가운데의 앎”은 허명을 단 욕망이 서로 쟁투하는 공간의 그림자를 적출해 보이기도 한다.“사람과 사람이 붐비는 앎”이 주는 피로도는 높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질이 다양한 것만큼 사람을 견디는 일은 고통스럽다. 세상의 절반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며 남을 조롱하지만 실은 절반이 어리석다.사람에 관해서 때로는 모른 척하는 것이 지혜이고 미덕이라고 조언하는 처세술에 관한 책들이 넘쳐나는 현실은 지독한 블랙코미디이다.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 누군가의 사람의 치부를 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 낄낄거릴 것도” 없다. 그 상대가 경쟁자이거나 경계를 침범한 불안의 대상이라면 그 목청은 높아지기 마련일 터인데 그렇다 해도 “우주를 제 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는 것이다.시인은 자전 시론집 ‘숨과 꿈’에서 자기 자신 안에 상반되는 힘의 갈등이나 나와 타인의 갈등, 이상과 현실의 불화로 인한 갈등. 세대간 혹은 이념과 계층 사이의 갈등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여러 불화와 갈등이 사람과 사람에게 붐빈다고 했다.1965년 등단한 정현종 시인(1939)은 참혹한 이데올로기의 폭풍 속을 관통하면서도 그 한편에서 자유의지를 노래하고 철학한 시인이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어 올리려는 노력이 문학의 힘이고, 시라고 했다. 그 힘은 결국 그 자신에게 나온다고. 이 시를 여러 번 반복해 읽다 보면 니체의 ‘위버멘쉬’가 자연스레 떠오르게 되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이 시의 제목이 궁구하는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슬픔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의 그림자가 내내 일렁이는 이 시는 그러한 슬픔을 경유하는 현재를 보여주는 듯하다.“뭐든지 간에 하여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2024-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