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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작년 어느 날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나는 깜짝 놀랐다나는 아파서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참 우습다내가 57세라니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최승자, ‘참 우습다’ 전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 지성사, 2011)최승자 시인(1952년~)은 “담배 한 대 피우며 한 십 년이 흘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후 시인의 시간은 거기에 또 한대의 담배가 얹힌 시간이 된다. 그렇게 한 세월이 있었다. 80년대에 시인이 되고자 했던 많은 시인처럼 최승자의 시들이 보여주었던 치명적이고 고질적인 꿈, 혹은 병(病)은 혹독한 고통의 시간이었다.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보존한다는 것과 보존된 과거를 상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에서 시간은 시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연된다. 그것이 바로 ‘병(病)’이다. “그냥 아파서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시에 나타난 과거적 지평은 단순히 회고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를 응시하는 시인은 퇴행적 욕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미래 지향적 욕망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를 분출하고 있다.깨어 있는 동안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현실은 삶에 달라붙는다. 시인에게 병(病)은 그러한 삶과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라캉은 죽음충동은 불쾌의 경험에서 쾌를 회복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시인은 오랫동안 투병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이는 의미와 존재의 사유를 표현하는 것에 실패했을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우회로이다. 시인은 과거를 재현하며 그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끌어당겨 현재의 ‘나’의 위치에서 언어화한다. 최승자의 시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시적 자아는 삶에 위치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오랫동안 죽음에 투신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출하듯 최승자는 최승자를 떠났다.시인 최승자는 묻고 답한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 그렇게 무수히 떠나고 무수히 되돌아오면서 많은 시간을, 주저앉아 있는 것, 정지해 있는 것, 고여 흐르지 않는 것은 시간의 누적과 더불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굳어져 버린다. 단단히 굳어져 하나의 질병”이 돼버린다. 그러니까 이건 힘겨운 삶과 사라진 사랑, 버거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최승자 시인의 시를 통해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의 그 아스라한 통증의 공허함이란. 그리고 타자들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에 의해 주도 되어오던 시인의 시간은 후반부에 이르러 시인의 시점으로 바뀐다. 그 순간 시인은 마침내 껍질을 벗고 세상으로 나올 생각을 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을 잠시 흐르다 가는 삶의 즐거움과 고통, 사랑과 죽음에 대한 방식은 이어지는 작품 ‘너에게’에서도 연역한다. 이희정시인 “네가 왔으면 좋겠다 / 나는 치명적이다 /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 황량한 쇼윈도 같은 나의 창 너머로 /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 텅 비어 있다./ 텅 텅 비어, /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그녀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의 표제를 비웃듯 1979년 등단 이후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 옮긴 책들은 투병 중의 그녀로서는 지극한 이력이다. 여전히 많은 독자가 시인의 시에 기대어 허무와 고통을 필사하는데도 불구하고, 덧붙은 이력에는 기초생활수급자, 초등생 몸무게, 정신병원 재입원 등의 키워드가 부록처럼 딸려있다. 그럼에도 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앞으로도 뒤로도.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2021년 시인의 말, 최승자)”

2024-07-21

그러니까 시가 뭐꼬?

이희정시인 논에 들에할 일도 많은데공부시간이라고일도 놓고헛둥지둥 왔는데시를 쓰라 하네시가 뭐고나는 시금치씨배추씨만 아는데..................고구마 밭에서밭을 매다가 너무 더워서집에 왔다중복이라서 닭 한 마리사다가 영감하고꽈서 먹고즐거웁게한글학교에 오니학생들이 많이 왔다더운 줄도 모르고 한글수업을 하였다―‘시가 뭐고?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삶창, 2015)그렇다, 시금치씨 배추씨도 아닌 시가 뭐냐고? 시집 ‘시가 뭐고?’는 ‘시’가 아닌 ‘씨’를 쓰는 시인들이 경작한 시집이다. 이 시는 경북 칠곡군에 사는 ‘할매’들이 문해(文解)교육 현장에서 배우고 익힌 한글로 손수 쓴 시들을 모아 엮은 시집의 표제작이다.이 시집의 묘미는 살아있는 입말(口語)의 경지를 맛보는 것에 있다. 그 어떤 꾸밈도 분장도 없는 소화자 할머니 외 88명의 할매들은 대부분 ‘생애 처음’ 시를 써보았다.아무 생각 없이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들의 조합으로 시를 읽어 보면 띄어쓰기도, 맞춤법도 틀리고 죄다 경상도 사투리다. 기획자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저자 할매들은 평생을 ‘목소리에 의지하는(verbomotor)’ 문화, 구술성(orality)에 의존한 삶을 살아왔으며, 말을 통해 이해하고, 관계 맺고, 소통 해온 세계에 대한 순한 그리움과 전망이 생애 처음 문자로 새겨 놓았다는 말이 실감으로 온다.이것이 시란 말인가. 의문을 품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은 뒤, 한 행이 그대로 한 연이 된 그 줄을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동공이 습해온다. 우리의 눈과 가슴에 새겨진 그 사투리가 대책 없이 아름다워서 혹은 진저리 치게 삶을 그대로 옮겨 놓았기에. 사실 사투리는 비유나 운율 등의 시적 요소의 측면에서 볼 때 근친성을 갖기도 한다. 국어학자 이상규가 사투리(방언)를 일러 ‘오래된 역사의 주름’이라고 표현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 시들에서 사투리는 길고 질퍽한 할매들의 생활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육성이기에. 그것은 모든 관념이 지배하는 절제와 성찰을 넘어서는 우리 몸 전체에 박혀 즉각적으로 생생하게 흡수되고 이해되는 물과 같다. 물에도 밀도가 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를 물의 밀도를 재어보면 필경 가장 촘촘한 온도가 될 것이다. 한겨울에도 얼지 않은 수심이 있어 물고기들이 유영하고 아가미가 호흡하는 삶의 적소로서 말이다.이 세계는 낡은 것들로 가득하다. 두 번째 시편 ‘여름날’에는 즐거운 학교가 있고, 학생이 있어 중복 중에도 “더운 줄도 모르고” 배우는 한글이 있다. 노년은 무엇으로 사는가. 칠곡 할매들이 쓴 배움 시편들은 노년기에 경험하는 역할 상실을 극복하려는 학습의 염이 내연한다. 농촌 지역인 칠곡 할매들이 배우면서 느끼는 존재감은 도시에 사는 노년에 비해 적어도 고독할지언정 고립되지 않음을 “학생들이 많이 왔다”라는 시어를 통해 드러난다.같은 처지의 ‘곁’이 있어 인기척을 느끼며 사는 삶이란 또 얼마나 정겨운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낡은 것은 경시하기 십상인 세계이기에 시집이 환기하는 정서는 소소하지만 사소하지 않다. 그들은 문해 학교에서 글자를 넘어 키오스크를 터치해 햄버거를 주문할 수도 있고, 말로는 전하지 못한 마음을 편지글로 맺힌 한(恨)을 풀어내기도 한다.삶은 언제나 ‘무엇’보다 ‘어떻게’가 중요한 질문이 된다. 올해도 대구·경북 문해교육 현장에서 공모한 첩첩의 시편들을 알현하며 시인들에게 묻는다.“인문학, 그기 뭐꼬? 우리가 사는 모습이 인문학이지?”

2024-07-07

깨어진다는 말

파란 유리병은 ‘퍽’하며 깨어진다 한낮에 깨어진유리 조각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이다 노란 유리병은깨어질 때 ‘퍽’하는 소리를 낸다 한밤중 평상심이높은 별빛 소리를 다독이는 낮은 달빛 소리이다빨간 유리병은 ‘퍽’하는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그것은 아닌 밤중에 새벽 구병산이 벌떡 일어나 제가슴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6·25가 터지자 대포소리가 자주 구병산을 흔들곤하였다 놀란 가슴이 자주 ‘퍽’하고 깨어졌다부슬비에 부슬부슬 부서지는 모래밭저 여린 유리병 깨어지는 소리가 ‘퍽’하며 제 고향 먼 바다를 엎지르다니!―강현국,‘퍽, 하며 깨어진다’ 전문(‘구병산 저 너머’, 시와반시)‘깨어진다’를 생각한다. 깨어진다는 동사 하나로 수렴되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반인반수의 괴물 중 목신 판(pan)이 있다. 헤르메스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판을 올림포스산으로 데려갔고, 모든 신이 판을 환대했다. 여기서 그리스어 판에는 ‘모든’이라는 뜻이 생겨났다고 한다.판은 물의 요정 님프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판을 보자마자 도망치고 말았다. 숲에 살던 판은 기분이 나빠지면 괴성을 질렀고 이 소리를 들은 인간이나 짐승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극심한 공포’나‘ 공황 상태’를 의미하는 영어의 패닉(Panic)이 바로 판이 지른 괴성이다.강현국 시인의‘깨어진다’에는 판의 공포가 숨어 있다. ‘퍽’소리를 내며 깨어진 경험은 시인이 기억하는 모든 것의 그늘이고 구석일지도 모르겠다. 깨어지는 유리병에는 평화가, 사람이, 넘어진 무릎이, 못 지킨 의자가 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유용하거나 무용하거나 채우거나 비우거나 모두 ‘깨어진다’하나로 통성한다. 무엇보다 깨어진다는 말은 고통이 낳은 상처의 언어라는 사실이다.강현국 시인에게 깨어짐의 경험은 패닉이다. “파란 유리병이 깨어진 소리” ‘퍽’의 유리 조각은 한낮의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 같은 시인의 한낮을 뒤흔들고만‘퍽’에는 은닉된 패턴이 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하나의 습성일 수도 있고 잔인한 플롯일 수도 있다. 색을 보고 놀란 가슴은 붉은 것만 보아도 놀라고, 이름 한 글자에도 놀란다. 거기에 잔혹한 가시마저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 그 아픔은 그 일 자체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서 온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시인은 누구나 한 생을 살면서 지옥의 한 철을 만난다고 했다. 세월이 흐른다 해도 망각이란 이름으로 지워지거나 추억이란 말로 쉬이 봉합될 수 없는 아픈 상처의 한 철을 만나다고. 상처의 출처는 실존의 번뇌로부터일 수도 있고, 이념과 진영의 대립으로부터일 수도 있고, 안팎 현실과의 불화로부터일 수도 있다고. (강현국, ‘먼 곳으로부터 먼 곳까지’) 이희정 시인 그런 시인에게 올림포스산이 있다. 아홉 폭 병풍이 첩첩 에워싸인 밤이면 노란 치자꽃 향기 번지는 그리움의 거처 구병산은 늘 거기 그렇게 있다고. 어머니 매달려 석 달 열흘 기도하던. 머리 위로 포성이 지나도 은하수 흘러가고 별똥별이 져도, 어느 날 궁금해서 찾아간 뒤에도.그런 구병산에 “빨간 유리병은 ‘퍽’하는 소리를 내며 깨어진다 / 그것은 아닌 밤중에 새벽 구병산이 벌떡 일어나 제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노란 유리병은 깨어질 때‘퍽’하는 소리” “한밤중 평상심이 높은 별빛 소리를 다독이는 낮은 달빛 소리” 먼 곳은 먼 곳이어서 닿을 수 없다고 했다.해서 시인은 그리움을 노래한다. 마치 목신 판이 사랑하는 연인 갈대가 된 님프를 악기 팬플루트로 만들어 불렀듯이 말이다. 좋은 시가 그렇듯이 “부슬비에 부슬부슬 부서지는 모래밭” 시인 속에는 넘칠 듯 말 듯 조용한 그리움이 천리를 가듯 지극한 마음을 엎지르며 간다. “저 여린 유리병 깨어지는 소리가‘퍽’하며 제 고향 먼 바다를 엎지르다니!

2024-06-23

이따위, 종이쪽지에도

물이 스미지 않을 적엔 스스럼없이쉽게 떨어졌지만그 몸에 물기가 점점 번져들자 종이 두 장은마주 달라붙어, 서로를 견인하게 되었다축축해진 두 몸이 혼신으로 밀착하여한 쪽을 떼어내자면 또 다른 한 쪽이사생결단,먼저 자신을 찢어놓으라는 것이다.이따위 종이쪽지에도 이별은고통 없이는 없나 보다.- 이수익, ‘이따위, 라고 말하는 것들에게도’전문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천년의 시작) 이희정 시인 아프다, 지극히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낭만을 종이 두 장이 견인하고 있다. 이 시는 시인의 구체적 체험을 재현한 서술 한 줄 없이 흡사 뼈와 근육만으로 이뤄진 것처럼 사건의 이미지에만 힘을 주고 있다. 마치 그들이 어떻게 찢어지는가를 두 눈 똑바로 뜨고서 보라고 하는 듯하다.그러니까 이별은 사랑이라는 마술적 전제에서 비롯된다. 그 마술은 꼭 그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우연을‘물’이 스밈으로써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 하는 운명으로 바꿔버렸다. 혹은 반대의 방향으로 작용할 때 연인들은 가볍게 해체될 것이다.이 시에서 종이 두 장은 이별의 분위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오브제다. 여기에 담긴 것은, 왜 어떤 연인들이 절박한 이별에 직면하는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좋은 러브스토리는 가장 유별난 연애담을 다루는 듯 보여도 실은 지극히 사소한 장면으로 확인됨으로써 현대의 그 많은 연인의 사랑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별은 그 자체로 운명적이면서 예외 없이 허망하다.인간의 정신적 자유와 평화가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진술은 새롭지 않다. 너무도 자주 반복되었기에. 하지만 그런 삶의 지혜는 이수익 시인이 말하는‘이따위’라는 사소하고 흔한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한다.“우리 주변에서 ‘이따위 것’으로 불리는 대상은 대체로 하찮고 비루한 것들이기 십상이다. 시인이 묵도한 풍경은 하찮은 종이쪽지 두 장이 우연히 물기에 젖어 달라붙어 있는 풍경이다. 회자정리, 생자필멸이라는 삶의 기본 원리를 떠올리면 문득 경건한 마음마저 든다.”(평론가 장영우) 함부로가 넘쳐나는 세상이지 않은가. 너무 쉽게 버려지고 너무 쉽게 잊히는 풍속 가운데 시인은“이따위 종이쪽지”의 붙음과 떨어짐의 사건에서 집착과 이별이 초래하는 삶의 근원적 비애를 읽고 있다.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어떠할까. “이별에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면 뒤통수를 치고 떠나야 한다”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는 현대인의 가벼운 세태를 조롱하고 있는 듯하다. 뒤통수란 곧 어느 한쪽의 잔인한 배신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것은 실연한 사람의 기억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에 반해 이별 후에 남는 것이 뒷모습이라면 로맨스에 가까울 것이고, 결국 로맨티시즘과 리얼리즘의 줄다리기가 연인들의 영원한 숙제임을 보여준다. 결국 이 시가 다루는 것은 연애라는 알고리즘, 사랑의 생과 멸 그 자체다.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두 장의 몸은 단지 이별의 정조를 만드는 피사체로만 기능하지 않고, 몸과 몸이 이끄는 사랑의 현재 위치를 가장 적실하게 지시하는 좌표 역할을 한다. 몸과 몸이 사랑의 심리를 긴밀하고도 절박하게 교직하는 시인의 재현이 놀랍다. 계절의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시간이 끝난다고 삶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별에는 그들만의 아름다움이 있다.“마주 달라붙어, 서로를 견인하게 되었다”고, “축축해진 두 몸이 혼신으로 밀착하여” 있어 “떼어내자면 사생결단 먼저 자신을 찢어놓으라는”것이다.이따위, 라고 말하는 것들은 슬프다. 견딜 수 없이 서늘한 정도로 성숙한 존재들이다. 매우 감성적이면서도 놀랍도록 철학적이다. 만일 이 시가 아무렇지 않다면 당신은 어쩌면 진정한 러브스토리를 가져보지 못했거나 사랑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이따위 종이쪽지에도 이별은 고통 없이는 없나 보다.”

2024-06-09

나의 월든은 어디에

이희정 시인 고속도로로 가면 아주 멀진 않아.그곳의 거친 소나무들과 돌들, 맑은 물을 보고해 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야.친구들은 그러면 내가 더 현명해질 거라고 말하지.그들은 머나먼 양키의 속삭임을 듣지 않아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니다 보면 우리는 얼마나 둔해지는가!많은 사람이 떠났고, 시원한 시골에서의 하루를그리워만 하는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책에서월든에 가는 건 단순한 초록 나들이처럼 간단한 일은아니지. 그건 느리고 힘든 삶의 비결이고,자신이 있는 곳에서 월든을 발견하는 것이지.―메리 올리버, ‘월든에 가기’ 전문 (‘기러기’, 마음산책) 여기 두 개의 월든이 있다. 최초의 녹색 서적으로 일컬어지는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는 숲과 호수가, 메리 올리버 시인에게는 숲과 바다가, 그들 사이에는 “거친 소나무들과 돌들, 맑은 물”과 같은 자연의 선물이 있다. 메리 올리버 이전의 내가 아는 월든은 세련되고 까다로운 사상가 에머슨(1803년~1882)과 투박한 고집불통의 자연주의자 소로(1817~1862)의 불멸의 우정이었지만, 그들과 더불어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1935~2019)가 있다.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시인은 자연 속에서 자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의 친화적이고 동반적인 관계 형성이 가능했다. 자연 속을 산책하고, 세밀히 관찰하고 동식물과 교감하며 그 경험과 자신의 지혜를 언어로 재현하는 이른바 생태 시인이다. 그녀의 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 심지어 무생물인 돌도 살아 있다고 사유하며 소로가 다루고 있는 월든의 의미를 삶으로 체득하고 있다.지혜란 어디에서 오는가. 근원적인 아름다움이 자연에 있듯 우리가 만들지 않은 생명의 순수한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녀는 자연을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겸허하게 한다. 시적인 마음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녀의 관점은 오래 남을 자연과 인간의 공감어린 우애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시 ‘월든에 가기’에서 양키의 속삭임은 무엇이고, 월든은 어디일까?양키(Yankee)는 과거 영국인들이 미국인들을 촌뜨기로 조롱하는 표현이었지만 시인이 말하는 양키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내면의 소리, 이를테면 반짝이는 공기나 나무의 이끼 등 고요가 들려주는 깊은 속삭임일 것이다. 친구들은 고속도로를 권한다. 그들은 월든을 “초록 나들이처럼”간단히 인식하지만 숲은 그런 곳이 아니다.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기도 할테니까. 귀농하지 않아도 자연인이 되지 않아도 도시 속에서도 세상의 명령에 길들지 않을 수 있다. 단 한 평만이라도 내면의 월든을 만난다면 말이다.철학교수가 될 것인가. 철학자가 될 것인가. 많은 책에서 ‘나’라는 제일인칭은 생략하지만, 소로는 월든에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에 관해 말했다. 시인 메리 올리버 또한 ‘사람들’이란 말에 힘을 주지 않고 진정한 ‘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많은 사람이 떠났고, 시원한 시골에서의 하루를/ 그리워만 하는 나를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 대개의 문명인들이 조롱하듯 월든에 가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단순한 초록 나들이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지.” 그것은 “느리고 힘든 삶의 비결이고,/ 자신이 있는 곳에서 월든을 발견하는 것”이라고.우리 옛글에도 월든이 있다. “연못, 늪에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도하는 물속의 찌꺼기를 쪼고 마름풀 속에 물고기 잡는 데만 신경을 쓰느라 깃털과 부리에까지 오물을 뒤집어 쓰고 하루종일 허둥대어도 물고기 한 마리를 잡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청장이라는 새는 맑고 시원한 연못에 서서 편한 자세로 날개를 접고 장소를 옮기지 않는다. 그 고요한 것은 노래를 듣는 듯 편하게 지내면서도 항상 배가 부르고, 도하는 수고롭지만 항상 굶주린다. 세상의 부유함과 귀함,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사람에 비유하여 청장을 신천옹이라고 불렀다.”(‘맑은 바람이 그대를 깨우거든’ 중 박지원 ‘담연정의 기문’, 이덕무 지음, 이강엽 편역)진정한 월든은 어디에 있을까. 하루종일 허둥대는 도하인가. 고요한 청장인가.“여기저기 바삐 뛰어다니다 보면 우리는 얼마나 둔해지는가!”

2024-05-26

아기곰은 너무 귀여워

이희정 시인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노래를 부르며으쓱으쓱 춤을 추는 친구들우리는 엄마랑 아빠랑 따로 사는데….울먹이는 준이너 그거 알아?사실, 곰들은 따로 산대아빠 곰은 수컷끼리애기 곰은 엄마랑 잠깐만 산대엄마 곰은 혼자서 살아간대자연에서는 따로 사는 동물들이 더 많아코끼리도 호랑이도 다 그렇게 살아가거든같이 살아도, 따로 살아도 괜찮아우리도 하루의 반을어린이집에서 같이 살고 있잖아―정지윤,‘곰 세 마리의 비밀’전문 (‘전달의 기술’, 상상동시집)정지윤 시인의 동시 ‘곰 세 마리의 비밀’의 첫 행은 우리 모두 널리 알고 있는 동요로부터 시작된다. 이 시는 앙증맞은 어린이 세상 속에서 상처 입은 어린 마음의 현실을 동요와 포개어 피할 수 없는 육아 현장 속에 짠하게 담아놓았다.시인은 곰의 생활 방식을 빗대어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재현해 보인다.사실상 여러 이유로 부모가 아이를 돌볼 수 없는 현대 가족의 구조와 육아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공간적으로는 어린이집이 주요 배경이 된다. 곰의 공간이 꿈이라면 어린 아가들의 공간은 현실이다. 곰 세 마리 동요 속에는 엄마, 아빠, 아기가 한집에 산다. 동요의 이 대목에서 엄마와 아빠가 따로 사는 이혼 가정의 준이의 처지가 노출된다.하지만 마음 착한 친구들은 울먹이는 준이에게 곰들의 비밀을 들려준다.사실은, “곰은 수컷끼리 애기 곰은 엄마랑 잠깐만 산다.” 그리고 “엄마 곰은 혼자서 살아가기도 한다”며 곰이라는 동심 공간에 준이의 현실 공간을 이입해 달래 주고 있다.그런데 내부적으로는 이질적이던 친구와 준이의 가족 공간은 마지막 구절에서 동질감을 불러오는 묘한 기류가 감지된다.결국 아기곰 모두 하루의 반을 엄마나 아빠와 떨어져 사회기관인 어린이집에서 맡겨져 있다는 현실을 보인다. 주제 의식이 명확한 동시다. 동심을 소재로 한 작품임에도 그 정서가 마냥 밝지만은 않은 이유다.그나마 다행이랄까. 이 동요적 공간에서는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동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율동이나 행간 바깥에 있을지도 모른다.오래 되었어도 쉬이 떠나지 않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떠올려 보자.1988년 도쿄에서 일어난 ‘스가모 아동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에는 출생 신고도 안 된 네 명의 아이들이 오랫동안 굶주림에 방치되어 있다가 집주인에게 알려진 이야기다. 게다가 버려진 네 아이들의 아빠가 모두 달랐다는 사실과 의자에서 떨어져 죽은 막내 아이는 인근 숲속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일본 도시 사회의 무관심과 인간소외로 인한 사회문제의 비극을 드러낸 참담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출생 직후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동의 사례가 공공연한 현실인 우리나라 또한 다르지 않을 것 같다.여러 가지 장벽으로 비혼주의나 맞벌이 무자녀 가족을 일컫는 딩크족이 늘어나는‘씨 없는 사회’로 다가가고 있음은 주목해 볼 대목이다.오월의 거리는 감사의 인사로 넘실거린다. 반갑고 미안한 것들 사이 어린이집에서나 가정에서나 으쓱으쓱 자라나는 “아기곰은 너무 귀엽지” 않은가.

2024-05-12

하여간, 뭐든지 간에

이희정 시인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없고낄낄거릴 것도 없고,안다고 알았다고우주를 제 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고누구 죽일 궁리를 할 것도 없고엉엉 울 것도 없다뭐든지 간에 하여간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그게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거나풀처럼 흔들리고 있거나그 어떤 모습이거나사람으로 붐비는 앎은슬픔이니….― 정현종,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전문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1992년에 발간된 정현종 시인의 시집 ‘한 꽃송이’에 수록된 이 시는 어렵지 않게 읽힌다. 하여간 단박에 읽히는 행간은 읽을수록 점점 더 쓸쓸해지고 점점 더 냉소에 다가가고 있다. 아름답고 쓸쓸한 내면의 슬픈 고백이다. 이때 슬픔이라는 고백은 어떤 지향점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의 뒷걸음질 같은 아이러니한 행보와도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이 시는 내면의 로드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안온한 체념과 정직한 성찰의 분위기가 묘하게 공존하는 이 시는 제목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가 환기하는 정서부터 예사롭지 않다. 온통 통념에 휘둘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찰과 성찰을 대변하는 세계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시인이 던지는 질문들은 “활자의 모습”이거나 “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이거나 “풀처럼 흔들리는 / 그 어떤 모습”이건 모두 슬픔이라고 했다. 설령 그것이 어떤 대단한 명성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잠깐 머물거나 짧게 경험할 수 있을 뿐 결국은 사라져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 시의 정조는 내내 허무하고 쓸쓸하다. 실제 사람의 삶을 채우고 있는 것들은 본질이 아니라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사람을 좋아해서 어울리기를 즐겨하지만, 한편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 지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지지 않으려는 자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적은 없는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창과 방패를 도구로 공격적으로 맞설 것인가. 방어하는 자세로 지독한 디펜더가 될 것인가. 사람은 과도한 경쟁사회에 내몰리게 되면서 피할 수 없는 이 두 가지의 의식적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밖에 없다.“사람으로 붐빔 가운데의 앎”은 허명을 단 욕망이 서로 쟁투하는 공간의 그림자를 적출해 보이기도 한다.“사람과 사람이 붐비는 앎”이 주는 피로도는 높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질이 다양한 것만큼 사람을 견디는 일은 고통스럽다. 세상의 절반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며 남을 조롱하지만 실은 절반이 어리석다.사람에 관해서 때로는 모른 척하는 것이 지혜이고 미덕이라고 조언하는 처세술에 관한 책들이 넘쳐나는 현실은 지독한 블랙코미디이다.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 누군가의 사람의 치부를 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 낄낄거릴 것도” 없다. 그 상대가 경쟁자이거나 경계를 침범한 불안의 대상이라면 그 목청은 높아지기 마련일 터인데 그렇다 해도 “우주를 제 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는 것이다.시인은 자전 시론집 ‘숨과 꿈’에서 자기 자신 안에 상반되는 힘의 갈등이나 나와 타인의 갈등, 이상과 현실의 불화로 인한 갈등. 세대간 혹은 이념과 계층 사이의 갈등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여러 불화와 갈등이 사람과 사람에게 붐빈다고 했다.1965년 등단한 정현종 시인(1939)은 참혹한 이데올로기의 폭풍 속을 관통하면서도 그 한편에서 자유의지를 노래하고 철학한 시인이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어 올리려는 노력이 문학의 힘이고, 시라고 했다. 그 힘은 결국 그 자신에게 나온다고. 이 시를 여러 번 반복해 읽다 보면 니체의 ‘위버멘쉬’가 자연스레 떠오르게 되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이 시의 제목이 궁구하는 세계를 인식하게 된다. 슬픔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슬픔의 그림자가 내내 일렁이는 이 시는 그러한 슬픔을 경유하는 현재를 보여주는 듯하다.“뭐든지 간에 하여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2024-04-28

꽃은 꺾어도 봄은 온다

이희정 시인 뒤돌아서서 사진을 태워야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얼굴이 흐려질 동안두 눈에 담았던 풍경이재가 될 동안입술에 감추었던 고백과지상의 영광과 모욕이애월 봄볕이진언이 될 동안나는우리의 모든 죄를용서해 달라고등으로봄 햇살을 할퀴며표범처럼 울었다― 서안나 ‘재의 풍경’ 전문 (애월, 여우난골)아름다운 것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아픈 쪽으로 향한다. 시인은 뒤돌아서서 사진을 태운다고 했다. 시인이 태우는 얼굴은 흐려지고 재가 되어간다. 흐려져 가는 그 얼굴을 애월(涯月)이라 쓰고 애절(哀切)이라 불러봄직하다. 서안나 시인에게 봄은 달려들어 햇살을 할퀴어야 할 만큼의 아픈 봄이고, 표범처럼 울어야 할 만큼의 잔인한 봄이다.누구에게나 몸의 거주지, 마음이 거하는 본적지가 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서안나 시인의 애월은 어디로든 애월이어서 손이 시리고 마음이 시리다. 애월은 한자로 풀면 물가(涯)와 달(月)이 합쳐진 말로, 물가에 얼비친 달이다. 달빛의 젖은 풍경이 재가 되는 풍경이라니. 이 얼마나 애잔한 당신인가. 애월이 주는 정감은 언어의 음성과 잔상만으로도 그 수심이 깊다.이 시에는 제의적 고백이 담겨 있다. ‘재의 풍경’에는 T.S 엘리엇(Eliot)의 전언처럼 잔인한 4월이 서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시인이 두 눈에 담았던 풍경은 “재가 될 동안” “진언이 될 동안”의 표현처럼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태(動態)의 순간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에서 ‘재’가 주는 심상과 현재진행형으로서의‘동안’이라는 시어에 천착해 보자. 시인이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하는 다짐은 지나온 생의 풍경을 산화시킴으로써 그 선업을 잊지 않겠다는 회향의 염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태운다는 것, 회향의 행위를 살펴보면. 범어로 ‘회향’은 “우리의 모든 죄를 / 용서해 달라”는 기도의 의식과 같다. 애월의 봄볕은 “입술에 감추었던 고백과 / 지상의 영광과 모욕”을 모두 태우는 진언의 주문과 다르지 않다.우리가 아는 진언이란 상실이 다시 시작이 되고, 잃음이 새 세상의 문이 되는 간절한 기도처럼 폐허의 재 위에 한 세계가 얹어지는 모습이다. 태우는 것으로 시작한 이 시는 선근의 업을 평화롭게 나누기 위한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시인의 애월은 잃은 것을 찾고 있는 그 재의 풍경 중에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한 풍경을 잊지 않으려는 참혹한 몸짓이다.당신의 얼굴이 흐려질 동안 ‘재의 풍경’은 상실의 존재에서 빚어졌지만 더 이상 무력하지 않다. 봄이 형체가 아닌 움직이는 동체인 것은 시인의 의지를 생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재의 풍경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재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까. 시인이 마음에 담고, 눈에 담고 시에 담았던 존재들이 바로 이 고결한 진언에 닿아 있음이리라. 대개 아름다운 것들이 지극한 슬픔에서 오는 것처럼 아픈 곳에서 꽃은 핀다.“애월 봄볕이 진언이 될 동안”

2024-04-14

야누스의 눈을 가진 우리

이희정 시인 혼자서 색종이를 접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을 좋아하던 엄마가 미웠다 시샘은 발이 빨라서 따라갈 수 없었다 엄마를 접었는데 마귀할멈이 보였다마음속 독사과가 고개를 쳐들었다시샘은 천사의 날개를 잃어버린 아이였다접혀진 색종이의 뒷면이 궁금했다엄마의 뒷모습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표면은 거짓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인은주, ‘시샘의 뒷면’ 전문 (가히 창간호)사랑도 분석이 될까? 사랑에는 창조적인 모습과 파괴적인 모습이 있다. 사실 세상을 살면서 겪는 많은 일에 두 모습이 모두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가진 화살은 똑같은 화살이 아니다. 금과 납으로 만든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종류의 화살이 있다.여기 사랑 안에 상처받은 아이가 산다. 짐작건대, 내향적인 아이는 엄마를 좋아하지만, 바깥으로 바쁜 외향성의 엄마와 사랑을 갖기에 충분하지 않다. 종종 아이는 심리라는 내면의 집에 혼자 거주한다. 동물학자 로렌츠의 흰 기러기 실험에 따르면, 새끼는 어미가 일정한 크기로 보여야 안심한다. 맨 처음 자신에게 각인된 어미의 크기가 있어서, 그 크기보다 작게 보이거나 크게 보이면 새끼들은 불안해한다. 새끼 오리들이 어미 뒤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뚱거리며 따라가는 모습, 그 사소한 장면에 자연의 오묘한 법칙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펼치는 삶의 장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의 눈에 엄마는 크고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 접는 색종이의 접힌 내면으로 들어가 보자.자주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는 종이접기를 한다. 기다리는 견딤이 반복되는 아이는 화가 나기 시작한다. 욕구나 욕망은 해소되지 않으면 대상에 대한 집중이 커지고 충동성이 높아진다. 해서 공격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엄마를 접었는데 / 마귀할멈”이 보이고, “마음속 독사과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사랑과 증오는 다르지 않다. 사랑이 없으면 증오가 없고, 증오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인은주 시인의 ‘시샘의 뒷면’은 호주의 M.L. 스테드먼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The Light Between Oceans’의 한 장면을 불러오게도 한다. 영화의 주 배경인 바다가 있는 풍경의 등대는 ‘야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야누스는 로마신화에서 문의 수호신이다. 문은 생명과 계절의 시초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영어에서 1월, January가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아이를 잃은 한 모성이 보상으로 타인의 아이를 취하는 죄를 범한다. 끝과 시작의 경계에 있음을 뜻하는 ‘타인의 아이를 훔쳐 기른다’라는 행위의 양면성을 야누스의 등대를 통해 상징하고 있다.이렇듯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어머니가 있다. 자녀를 중심에 놓고 사는 어머니와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중심에 두는 어머니, 친모 같은 계모, 계모 같은 친모 등 종종 사회 일각에서 충격을 주는 신데렐라형 계모의 유형들이 있다. 아이들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 또한 등대가 비추는 측면에 왜곡해 인식하기도 한다. 인은주 시인의 시적 자아는 야누스의 등대처럼 자신의 깊은 심연과 반대쪽의 그늘까지도 비추고 있다. 우리의 눈은 밖을 향해 있다. 외부는 잘 보지만 스스로는 보지 못하기에.그녀가 접는 종이접기의 시간은 시인의 창작공간과 같은 위치임을 짐작하게 한다. 문명화된 “표면이 거짓이란 걸”을 견딜 만큼 강해질 때까지, 우리의 눈이 에덴동산에 충분히 머물도록 내버려 두면 어떨까.“시샘은 발이 빨라서 따라갈 수 없었다”

2024-01-21

고요를 마법처럼

이희정시인 노래하지 않고노래할 것을더 생각하는 빛.눈을 뜨지 않고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빛.사랑하기보다사랑을 간직하며,허물을 묻지 않고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모든 빛과 빛들이반짝이다 지치면,숨기어 편히 쉬게 하는 빛,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아픔보다도 더 아픈,빛을 넘어빛을 닿은단 하나의 빛.―김현승, ‘검은빛’ 전문 (김현승 시전집, 2005.)검정이 색이 아니라고요? 인상주의 선구자였던 르누아르는 검정은 색의 여왕이라고 반격했다. 검정은 모든 색의 부재, 그래서 색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던 때가 있었기에.겨울의 감성은 무채색에 가깝다. 한 해를 마치는 것도, 새해가 시작되는 것도 겨울이 하는 일이다. 겨울 속에는 마침과 시작, 어둠과 환희의 빛이 모두 있으므로. 모든 시가 신과 사랑, 혹은 우울을 다루듯이 검은색 또한 혼돈, 신비, 미지, 죽음, 무의식을 품고 있다.밝음을 나타내기에 검정만큼 역설적인 색이 있을까. 우리의 겨울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색으로 캄캄해서 외려 환하다.빛의 색인 무지개의 색을 모두 합하면 흰색이 나온다. 검정에는 빛이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은 검정으로 끝난다. 부패한 고기가 검게 변하고 식물이나 치아가 썩어 검게 되는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을 때가 ‘블랙아웃(blackout)’이라면, 김현승 시인(1913~1975)의 검은빛은 “모든 빛깔에 지친 통일의 빛”이다.시에서 검은빛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재생과 자성의 생명력을 내포하는 긍정적 이미지로 미지의 색이다. 시 ‘검은빛’은 시인의 세계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노래하지 않고,/노래할 것을/더 생각하는 빛”, “눈을 뜨지 않고/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빛”으로 묵상함으로써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지닌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도는 언제나 ‘무위’하면서도 하지 않는 일도 없다. 김현승은 꽃마다 색깔을 말할 수도 있고 이름을 물을 수도 있지만 하나로 수렴하여 근원적인 의미를 찾고자 한다. 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으로.김현승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을 지나며 시대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변환시킨시인이다. 검은빛은 희망으로 찬란하고 넘치도록 낡은 그림자를 밀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 이때 검정은 검은빛으로 치환된다. 무표정한 검은빛에는 마음속에서 활동하지 못하거나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치가 절하된 것들을 일으키려는 시인의 선한 의지가 잠잠히 괴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기 보다/사랑을 간직하며,/허물을 묻지 않고/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으로.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들아 모두 내게 오라는 위안의 주문처럼 시인의 검은빛이 감싸는 그늘이 평온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보이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깊은 내면이 모인 힘이라고, 그림자처럼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매우 넓고 깊은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무채색 마법은 힘이 세다. 꿈틀거리는 새해가 빛을 물고 오고 있다.“붉음보다도 더 붉고 아픔보다도 더 아픈, 빛을 넘어 빛을 닿은 단 하나의 빛”

2024-01-07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쫓아오던 햇빛인데지금 교회당 꼭대기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 ‘십자가’ 전문(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정음사) 단 한 장 남은 12월이 십자가의 그늘을 지난다. 윤동주(1917~1945)의 시를 읽고 나면 쓸쓸해진다고 했다. 비에 젖은 나무가 젖은 흙으로 뿌리를 내리듯 한 시인이 거느리는 무게감을 그저‘쓸쓸’이라는 말로 견인 할 수 있을까. 그가 떠나고 3주기 되던 해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비로소 세상의 꼭대기 첨탑에 걸리었다. 윤동주가 걸어간 자리가 그렇다.“부끄럽지 않고 슬프고도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냐”고 반문했던 시인 정지용의 서문처럼. 온 국민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그 첫 자리에 드는 시가‘서시’인 것은 ‘별 헤는 밤’‘자화상’등 그의 시편을 대할 때마다 마치 첫눈을 보는 마음처럼 순결해지는 것과 같음이리라.학기를 마무리하며‘영화가 있는 도서관’에서 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몇몇 학생은 영화의 내용이 지루하고 어렵다고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주는 고통과 절망의 낙차 때문일까. 학문과 사상의 자유, 양심과 표현의 자유 등 이미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는 오늘의 위치 때문일까. 그 무엇도 제 것을 가져보지 못한 시대, 주권 없는 그늘이 주는 상실의 폭은 멀고도 깊다. 하지만 대부분 학생은 몰입했고, 감상 후 학생들의 내면 고백은 뭉클한 여진으로 흔들렸다. 이희정 시인 가볍게 산책하려던 마음은 빗나갔다. 이 시를 쓴 때는 1941년 5월 31일이지만“종소리도 들리지 않는데”라는 문장은 11월경에 시를 수정할 때 썼던 얇은 펜으로 삽입되었다. 그 점에 주목해 보자, 시인‘동주’는 왜 이 문장을 삽입했을까. 쇠붙이를 녹여 무기를 만들려고 당시 일제는 쇠붙이란 것들은 죄다 쓸어갔다. 교회 종인들 남을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끔찍한 상황이 되고 만다. 희망이 없는 시대에 그는 종소리 대신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린다고 했다.“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처럼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기에 동주의 고뇌는 깊어갔다.언제나 흔들리는 곳에 십자가는 걸려 있다. 정황을 뒤집어 보면 “왜 흔들리는 곳에 십자가를 거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먼저와야 하지 않을까. 사실 그는 십자가를 남발하지 않았고, 종교 언어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가슴속 울분은 기척도 없이 고결하게 정제되었다. 해서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면 서럽고도 외려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거리는 빙 크로스비의 음성으로 감미롭다. 울려 퍼지는 캐롤과 성탄 트리의 빛으로 더없이 환한, 이런 때 진정으로 빛나게 하는 것은 걸어 둔 십자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아닐는지. 밖을 향한 손쉬운 단죄 대신 안을 들여다보는 깊은 자성을 택한 영혼의 힘은 여기에 있다. 종소리 없이도 더 환하게 울리는 그의 시 앞에서 시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는 한 여학생의 소감 한 줄이 첨탑을 지난다.“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2023-12-10

단정하고 아름다운 배웅

두루미 날아간다지인의 모친상에조의금 오만 원 담아 두루미 날아간다늦가을 슬픈 표정은상가에 다 모이고발인은 내일모레장지는 하늘공원목깃이 새까매진 다저녁 산마루 위울면서 조문을 가는희고 빈 봉투 하나―고영민,‘부의 봉투’(‘가히’ 가을호, 2023)여기 늦가을 슬픈 표정이 상가에 다 모여 있다. 대저 “생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가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 존재의 소멸은 참으로 사람을 유정(有情)하게 한다. 상가에 모인 조문객들의 슬픈 울음이 내 안에서도 일어나는 듯하다. 이 시가 그대로 내 가슴속에 들어와 어쩌면 내가 그 실경(實景) 속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다. 고영민(1968~) 시인의 ‘조의 봉투’가 그리는 풍경이 그렇다.이 시는 한 마리의 두루미로 시작된다. 죽음의 슬픔을 조문의 풍경으로 그려내는데 그 특정한 경험을 두루미가 견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두루미일까? 두루미는 우리나라 휴전선 언저리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다시 러시아에 있는 아무르강으로 떠나는 철새다. 죽음이 거느리는 의미의 본질을 제목인 ‘조의 봉투’가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실제 두루미의 모습은 몸뚱이가 희고 목덜미와 다리는 검고, 날개에도 검은 깃털이 있다. 시에서 “다저녁 산마루”를 “목깃이 새까매진”으로 묘사하며 사실적 이미지를 심상의 풍경으로 병치하고 있다. 여기서 ‘새까매진 목깃’이란 조문 시 매는 검은색 넥타이를 비유한다.이 시에서 ‘빈 봉투’ ‘두루미’는 같은 자격임을 알 수 있다. 제목 ‘조의 봉투’라는 한 대상이 다른 대상 ‘두루미’ ‘화자’라는 대상들과 포개지며 의미론적 자질을 성공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부고장을 받고 “조문을 가는” 두루미라는 존재는 ‘조의 봉투’이고 동시에 조문을 하는 화자 자신을 상징하기에 이 대상들이 주는 효과는 그림처럼 선명하다. 또한 “조의금 오만 원” “발인은 내일모레” “장지는 하늘공원”이 주는 구체성은 시적 은유와 현실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게 한다. 우리가 아는 고영민 시인이 주는 시의 질감이 그렇다. 일상의 진정성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는 방식은 어느 때나 편안히 등을 기댈 수 있게 한다. 이희정 시인 하지만 고영민 시인에게 이 시는 색다른 시편일 수 있겠다. ‘문학의 경계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가’라는 시험지에 응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등단 장르가 아닌 정형시의 형식에 맞추어 쓰였기 때문이다. 정형시를 전문으로 쓰지 않는 시인이 처음으로 썼다고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닐 테지만, 장르의 특성이 주는 작법은 그 방식이 사뭇 다르기도 하기에 시인에게 있어 이 작품은 조금 주의가 필요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혹자는 자유시는 펼쳐서 그리는 회화에 가깝고 정형시는 최대한 깎아내는 조각에 가깝다고도 그 차별성을 설명했다. 한 시인이 오랫동안 체화되었던 방식을 벗어나 다른 방식을 대면했을 때 오는 당혹감이 있었을 법하다. 형식 면에서도 지켜야 하는 글자 수와 제한된 보법이 있기에. 그럼에도, 시인은 출제자의 의도를 탁월한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현대정형시는 예전의 고시조와는 다르며 대부분 감상자가 느끼는 차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화와 서양화가 변주되고 있는 것처럼.요약하면, 시의 장면은 두루미로 시작해서 희고 빈 봉투로 그림처럼 마무리된다. 세상을 떠나는 망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인사가 이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가 택한 두루미는 피상적인 오만 원의 조의금을 담고 있지만, 가없이 단아한 인사로 배웅하고 있다. 그래서 한 생의 무게가 그 슬픔보다 존귀하게 느껴진다.“울면서 조문을 가는 희고 빈 봉투 하나”

2023-11-26

“종점에서 처음으로”

이희정시인 일찌감치 배추를 뽑고더는 밭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알량한 텃밭이다그래도 봄이면 쌈채 모종을 심거나 씨를 뿌리면서무슨 우주 같은 농사꾼인양 했다그리고 가을이 왔다쌈채 농사 끝나고 배추를 심어 구십일도 되기 전벌레한테 모두 먹히기 전일찌감치 뽑아내 입에도 한 잎 집어넣는 일요일 오후가을처럼 하느님이 왔다―고운기, ‘종시(終始)’전문 (고비에서, 2023)움직이지 않는 자는 다치지 않는다. 고운기(1961~)의 시편을 읽으며 상처받은 언어의 모습을 떠올린다. 시인은 최근 시집 ‘고비에서’자신의 투병에 대한 씁쓸한 고백과 담담한 상념을 총 6편의 시집과 같은 제목의 연작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병(病)중에 겪은 여러 고비에 대해 어떤 의미의 가벼움과 무거움도 가늠하지 않고 있다. 병을 앓고 난 후의 심경이 그렇다. “그 어떤 기대치의 높낮이도 자리할 수 없음은 깨달은 자의 미학적 실천에 해당한다.”는 최현식의 말처럼 한 인간이 생의 고비에서 최고점(Over the hill)을 찍고 난 후라면 시업(詩業)과 생업(生業)의 현장 정서는‘알량한 텃밭’으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그렇다, 시인에게 병을 앓기 전과 후의 대상은 다른 지평으로 놓인다. 그것이 일이든 사물이든 병을 앓기 전에 우주처럼 경작하던 모든 것들이 대수롭지 않은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는 정제된 미의식으로 삶의 의미를 꿰뚫고, 자연의 순환과 경이를 다잡는다.암 투병으로 인해 생과 사를 다투던 시인은 제목을 종시(終始)라고 달았다. 제목을 좇아보면 “종점(終点)이 시점(始点)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고 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노래했던 시인 윤동주의 산문 종시(終始)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의 1955년 오리지널 디자인을 증보한 시집(2022) 속의 산문 첫 구절이 그렇게 시작된다. 병을 앓고 난 후 다시 시업으로 돌아온 고운기 시인이 종시를 불러온 연유가 여기에 있음이리라.위 시 속의 화자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보다 높이 있는 ‘가을(하느님)’의 일부이며, 그것보다 아래에 있는 ‘배추’의 일부이다. 고운기 시인에게 ‘배추’는 거대한 몸이고 ‘밭’은 경작지이다. “일찌감치 배추를 뽑고 // 더는 밭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소위 자연의 문법이다. 자연이 크고 단순한 걸음으로 지나갈 때 그동안은 순종하는 농사꾼처럼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으며 “무슨 우주 같은 농사꾼인양 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시를 짓는 일이든 대학에서 학생을 경영하는 일이든, 밭을 경작하는 일이든 매한가지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현실은 그것 너머의 어떤 것 때문에 존재하므로,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는 결과인 현실 속에서 원인인 궁극을 읽는다. 벌레가 와서 배추를 파먹는 지극히 단순한 풍경 속에서 시인은 배추가 사라지는 “우주”를, 그 순간의 ‘초월’을 그려낸다. “가을”은 그런 초월이 성취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 제목에서도 그는 ‘종시’라고 시를 직조할 때부터 그는 저 하느님의 눈으로 저 아래 지상의 사물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다시 하늘이라는 가을로 되돌린다. 지상의 사물들은 대자연의 구현물이므로 같은 속성을 지닌다. 시인은 지상의 사물과 초월적 자연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다.의식이 자신을 비우고 겸허해질 때 화자는 전유(專有)의 위협에서 벗어난다. 화자는 공포가 사라진 순수의 공간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몸의 언어는 모든 현재를 과거로 만든다. 그것은 자신의 몸이 암이란 병에 먹힌 때처럼“쌈채 농사 끝나고 배추를 심어 구십일도 되기 전 // 벌레에게 먹히기 전”“일찌 감치 뽑아 // 내 입에도 한 잎 집어넣는”다고 했다. 그는 평화로운 안식일을 그렇게 맞고 있다. 시인에게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종점, 이미 겪어본 벌레의 역습으로 인한 투병의 경험이다. 몸의 언어는 채워지지 않는 시작점의 언어, 병마 후의 언어이므로 동시에 유토피아의 언어이다. 그렇게 시인에게 가을이 다시 왔다.“내 입에도 한 잎 집어넣는 일요일 오후, 가을처럼 하느님이 왔다”

2023-11-12

체크무늬의 기억법

평생 그 속에 갇혀 있었다잔잔한 떨림으로 번져오던 칸 칸이어지는 직선 무늬를 타고계단들이 자라 올랐고그 직선을 타고 떠나왔다 때로는찌그러지는 체크무늬를 만들고 껴입기도 하면서세상의 빈칸에 파고들곤 했다 따스하기도 하고꽉 찬 칸에서 튕겨 나세상의 끝자리에 매달려 대롱거리기도 하면서젖은 현수막으로 걸려 있기도 했다늑골에 소복한 보푸라기들을 찌르며마분지 같은 칸들이 밀려와 매달렸다 저녁 새들이 물고 오는 칸들이 있었다구름 경전이 칸 가득 쌓이기도 하고다시 그 질긴 교직(交織)에 갇히고풀리기도 하면서헐거덩거리며 왔다 ―김만수,'체크무늬’ 전문 (나의 수많은 근처들·2023) 바야흐로 체크의 계절을 맞는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디자인계의 명언이 있다. 디자인의 기능이 결과물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시각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조형은 점, 선, 면으로 치환할 수 있다. 20세기 추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이들의 특성을 활용한 조형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찍이 주목했다. 여기 1987년 등단 이후 김만수(1955~) 시인의 긴 시력이 내장된 시선집에 담긴 체크 라인을 따라 그가 직조한 삶의 무늬를 들여다보자.체크란 무엇인가? 체크가 주는 속성은 중의적이다. 직선이 주는 단호함과 따스하고 포용적인 질감이 혼재한다. 선과 면이 공존하는 네모난 공간이기에 삶의 무늬는 체크의 칸 속에 갇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하여 시인은 체크 밖에서 체크를 보는 방식으로 “평생 그 속에 갇혀 있었다”며 체크 속 지나온 여정을 기억하고 있다.우리가 “체스판 모양의 격자무늬”를 “체크무늬”라고 부르는데 “체크무늬”에서 “체크(check)”란 서양식 장기(將棋)인 “체스(chess)” 즉 왕(King)을 의미한다. 시인은 그 자신이 직조한 체스판 안에서 왕이 되었을까.체크에 내장된 시인의 시간은 횡과 열이 교직하기에 수직이거나 수평이거나 때로는 역방향이다. “직선 무늬를 타고//계단들이 자라 올랐고” 에서 상승기의 방향을 드러낸다면, “찌그러지는 체크무늬를 만들고 껴입기도 하면서//세상의 빈칸에 파고들곤 했다”는 대목에서는 삶의 한 공간에 자리 잡기 위한 치열한 분투기의 격정을 보여준다. 그렇다, 체크의 이중적 속성은 늘 교차한다. “따스하기도 하고” “세상의 끝자리에 매달려 대롱거리기도 하면서” 온기와 냉기를 벼리고 있다. 사람의 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늑골에 소복한 보푸라기들을 찌르며” 칸과 칸 사이 “마분지 같은 칸들이 밀려와 매달” 리는 삶의 진경이 체크무늬 공간과 겹치기에. 이희정 시인 어떤 공간은 잊고 있었던 현재의 공간을 통해 과거의 감수성을 불러오는 데 일조한다. 누구나 저마다의 장소애(topophilia)를 갖고 있다. 김만수 시인은 포항이라는 공간에서 나고 자랐다. 장소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가 몸, 가족, 공동체라고 한다면 시인의 체크무늬 속 공간은 포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져 있다.“저녁 새들이 물고 오는 칸”에는 “구름 경전이 가득 쌓이기도 하”듯 체크무늬 칸, 칸에는 과거와 현재의 공간이 만나 갈등하고 회상하는 장면이 그 경험을 은유하고 있다.이처럼 점으로 시작한 한 시인의 역할은 시작과 끝을 ‘선’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선은 우리의 삶의 공간인 면과 맞닿아 있다. 켜켜이 직조된 선은 종내에는 하나의 ‘면’이라는 개인의 삶의 공간을 이룬다. 그 면을 이루고 있는 선은 끝없이 변화하며 무한한 가능으로 가고 있다. 시인이 직조한 체크무늬는 시작점과 마무리 점을 잇는 체크의 선들로 사람과 사람을 이으며 평행하게 이어지고 있다.“그 질긴 교직에 갇히고 풀리기도 하면서 헐거덩기리며”

2023-10-29

“커피 나오셨습니다”

커피 한 잔 주문한다아메리카노 나오셨어요나보다 지체 높으신 커피를 마신다와플도 나오셨습니다공손한 목소리다커피숍의 원목 의자는나이테가 자란다덜 마신 커피를 놓고 품위 있게 일어서면드디어 난 화가가 된다고갱님, 감사합니다―이송희,‘현대인의 화법’전문 (이름의 고고학, 2014) 한글날에 즈음하여 이송희 시인(1976년~)의 의미심장한 시 한 편을 만난다. 제목은‘현대인의 화법’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커피가 나오실 수는 없기에 첫수부터 어법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계속 이렇게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 표현도 맞는 표현으로 용인될지 모른다. 말을 바르게 만들려면 사회 분위기와 문화를 바꿔야 한다. 언어를 탓하지 말고 우리가 사는 모습과 환경을 돌아보는 게 먼저다.”라고‘표준국어대사전 바로잡기’에 나선 박일환 시인의 인터뷰 내용(2023년10월6일자 중앙일보, 오피니언)이 겹쳐오는 순간이다.이송희 시인이 직접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2003년 등단 이후, 여전히 시조를 쓰고 있는 젊은 시인이다. 엄밀히 말하면 현대시조,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현재의 언어로 쓴다. 시조를 고지식한 편견에 가두는 독자들의 인식을 깨고 있는 실험적인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변화된 언어’란 무엇일까. 정격의 양식 안에서 새 시대의 담론을 담아내는 것이 정형시의 숙명이라면 이 시가 견지하는 것은 현대인의 화법이다. 시의 첫 구절이 그리는 풍경은 다수의 현대인의 익숙한 일상을 보여준다. 어쩌면 아침밥은 안 먹어도 커피는 마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다. 가볍게 주문한 커피는 등장부터 존엄하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어요” 눈치챘을 테지만 이 시는 어법에 맞지 않는 한국어 높임말 사용에 대해 풍자하고 있다. “나보다 지체 높으신 커피를 마신다” 커피의 지체만 높아진 것은 아니다. “와플도 나오셨습니다” 거기다 “공손한 목소리다”이송희 시인의 시대 비판적 풍자는 비단 잘못된 언어 사용만이 아니다. 물신주의가 만연한 현 세태 속 돈의 위력을 풍자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풍자의 날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명철 평론가의 표현처럼 “자기풍자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해설을 요즘 신조어인 ‘복붙임(복사해서 붙이기)’을 해보면, “돈이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사회, 돈으로 교환되는 대상은 이제 돈의 가치가 얹어지면서 돈이 활성(活性)을 띤 위력을 지닌 존경의 대상으로 둔갑한다. 심지어 “드디어 난 화가가 된다. 고갱님, 감사합니다.”처럼 “그 둔갑의 대상은 예술의 가치로 치환되는데, 즉 ‘고객(客)’+‘님’= ‘고갱(P.Gauguin, 19세기 말 프랑스 화가)’+ ‘님’으로 자음접변 음운 현상을 통해 그 실체가 보란 듯이 전도되고 있다.”한글날을 앞두고 우리 학교 학생들은 한복을 입고 등교했다. 글로벌학교의 특성상 교내에서는 영어를 사용한다. 영어와 한국어 중 어떤 언어가 편하냐는 질문에 한 학생의 말 또한 이 시만큼이나 풍자적이다. “저는 0.5개 국어를 쓰는 것 같아요, 한국어도 영어도 온전치 못한 것 같아요.” 순간 이 학생의 말이 현시대의 전체를 상징하는 부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희정 시인 사실 그것 외에 언어의 왜곡은 더 심각하다. 심지어 신조어 사전이 생길 만큼 젊은 세대들의 줄임말이나 특정한 조어법을 통한 언어가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대화 중에 여과 없이 흘러나오는 접두어 ‘개’는 맛있을 뿐만 아니라 “개 이쁨” 등 이쁘기까지 하다니. 불과 한 세대만 흘러도 어쩌면 사라지거나 변해 버린 언어로 인해 세종의‘나랏말쌈은 듕국’이 아닌 ‘지금과 달라’ 그 어원을 밝히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이송희 시인이 말하는 ‘변화된 언어’란 바로 이러한 현 세태의 안타까움을 외면하지 않고 적실히 담아낸 지금 이 자리의 뼈 아픈 사회적 언어이다. 서정시의 슬하에 풍자의 이면이 짙다.“커피숍의 원목 의자는 나이테가 자란다”

2023-10-15

희망을 보는 방식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단단한 몸통 위에,사람아, 사람아 단풍 든다.아아, 노랗게 단풍 든다. ―기형도, ‘병(病)’ 전문 (기형도 전집, 문학과 지성사)우리가 기억하는 기형도(1960~1989)의 시에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이른바 ‘신화’가 되었던 기형도의 일화는 아프다. 시인의 연보에는 “1989년 3월 7일 새벽,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음”이라고 그의 마지막을 요약하고 있다.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에 입각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단언한 김현의 언급을 시작으로, 그의 시를 새롭게 읽기 시작하려는 시도는 그가 떠난 지 30년이 지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그의 시가 추구했던 아름다움의 목표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앎’에서 비롯한다.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과정이 따른다. 이는 단순히 자기 내면을 고백하는 것과 다르다. 이것은 대상화의 과정에서 자신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는 전략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사유하는 인식의 행위에 성공할 수 있다. 소개하는 시 병(病)은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내 얼굴이 /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와 같은 표현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이를 뒤따르는 화자의 언술이다. “반 토막 영혼”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 “단단한 몸통”이라는 시구처럼 기형도의 시적 자아는 늙은 나무처럼 시간이 오래되어 그 의미가 퇴색된 이미지로 자신을 비하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생명력이나 자연의 순환 원리를 드러내는 것에 반해, 기형도의 시에 제시된 나무는 주로 썩은 나무나 버려진 나무처럼 생명력이 다한 형태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마치 시의 “주어를 잃고 헤매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처럼 주어를 잃었다는 것은 행동의 주체인 스스로를 상실했다는 것. 그리고 가지가 잘렸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움직임까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늙은 나무”는 단순히 자아 상실뿐만 아니라 무능하게 버려진 시체를 떠올리게 한다.시인의 어둡고 부정적인 자아 인식과 세계 인식의 태도가 읽는 이로 하여금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를 엿볼 때와 같은 놀라움을 준다. 우리는 그림자를 품고 살지만, 그것을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아직 젊은 시인의 태도가 너무나도 치열하고 진지하기에 마치 고뇌하는 젊은이의 대명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고뇌의 힘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 시인의 시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가슴도 까맣게 멍이 드는 것 같다. 이희정 시인 생전의 시인이 애독했던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에서 “모든 시대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동경한다. 혼란스러운 현재에 대한 절망과 우울함이 심각하면 할수록 그 동경은 더욱 강렬해진다.”고 했다. 우리는 기형도를 죽음을 노래한 부정적인 시인이라기보다는 현대의 부조리한 삶, 특히 구조적 모순이 심화 됐던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실험적인 시인이었다고 추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형도의 시는 신화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기계문명이 발전할수록 타인에게 무관심한 상태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병病’은 소통이 단절된 채 쓸쓸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결핍과 상처의 초상이다. 사회 관계망 속에서 존엄성을 찾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소외일 것이다.기형도 시인은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이렇게 적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보다 아름다운 삶을 향하여, 시인은 가을 밖 벤치에 앉아 희망을 보는 방식으로 우리를 부른다.“사람아, 사람아 단풍 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 든다”

2023-09-24

도마도마, 도마뱀

뜰을 가로지르는데 뱀 조심 뱀 조심뱀 조심 팻말이 눈에 쏙 들어와서도마뱀 도마 위에 뱀, 그런 생각했어요.투명 플라스틱 컵 들고 들어온 사서선생님여기 이것 봐요 문 틈으로 숨어들어잽싸게 잡아 왔어요, 참 귀엽지 않나요?작은 도마뱀 한 마리 몸 구부리고 엎드려컵 바닥에서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어요.가녀린 갈색 꼬리가 길어서 애처로워요.빨리 내보내 주세요, 풀밭으로 어서요.양쪽으로 볼록거리며 할닥거리는 심장도마뱀 객주문학관 도마도마 뱀 뱀 뱀― 이정환, ‘객주문학관 도마뱀’ 전문 (가히 가을호, 2023)도마뱀이란 캐릭터는 공룡을 닮은 신비롭고 귀여운 외모 덕에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동물이다. 우리가 이 행성에 살기 전의 세계가 완전히 다른 종의 것이었다면 그것은 거대한 공룡시대일 것이다. 하지만 공룡들의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공룡의 이름은 우리가 화석을 통해 알게 된 정보로 인간이 지었다.말 그대로 이름을 만들어 낸 수 천 년의 역사에 인간이 가진 호기심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도마뱀이 파충류지만, 모든 파충류가 도마뱀은 아니다. 공룡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다이너소어(Dinosaur)도 그리스어로 ‘무섭다(δεινό)’는 뜻의 데이노와 ‘도마뱀(σαυρος)’을 뜻하는 사브로스에서 유래되었다면 우리말 도마뱀은 어떤 조어법으로 탄생했는지 궁금해진다.여기 이정환 시인(1954~)이 작명한 도마뱀을 어린이들의 눈으로 탐색해 보자. 화자가 말하는 공간 객주문학관은 비교적 사람의 손때가 덜 묻어나는 청송에 있다. 이 일대는 선캄브리아시대 산악지형과 중생대 퇴적암과 공룡발자국지형 등 우리가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천혜의 자연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이곳에서 시인의 “눈에 쏙 들어 온” 것은 뱀 조심 팻말이다. 아이들을 기쁘게 할 기대감에 사서 선생님은 “잽싸게 잡아” 온 도마뱀을 투명 컵에 담아 온다. 관찰하던 아이들은 웬일인지 빨리 내보내 달라고 재촉한다. 왜 그랬을까? 물릴까 봐 무서워서일까? 아이들은 투명 컵을 통해 들여다본 도마뱀의 모습에 마음이 급했다. 이희정 시인 “몸 구부리고 엎드려” “컵 바닥에서 / 할딱할딱 / 숨을 몰아 쉬”고 있는 모습에서 도마뱀이 죽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평생을 초등 교육현장에서 어린이들과 보낸 시인은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선한 동심을 잘 읽고 있다. 시조가 가진 언어의 율동성을 다정다감한 대화체의 화법으로 “잽싸게” “할딱할딱” “볼록거리며” 등의 소리와 동작을 표현하는 말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오래전 작은 아이의 도마뱀 일화가 떠오른다. 파충류에 흥미를 보이던 아이는 도마뱀 세 마리를 집에서 키웠다. 도마뱀의 집을 꾸며 주고 매일 들여다보며 먹이를 주곤 했는데 어느 날 한 마리가 죽어버렸다. 아이는 슬픔에 빠져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았는데 무심결에 웃음을 보인 엄마에게 식탁을 두드리며 분노했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떻게 도마가 죽었는데 웃을 수 있냐”고 항변했다. 아이의 슬픈 감정을 온전히 이해 하지 못했지만, 생명을 돌보는 갸륵한 심성에 감탄했다. 이후 아이는 남은 두 마리를 숲으로 풀어주었고, 더 이상 도마뱀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도마뱀이 가장 행복한 곳은 숲이란 것을 이해하고 갖고 싶은 자신의 욕심을 놓을 줄도 알았다.찰나의 모든 순간은 예술이 된다. 그림이든 시든 무엇으로든 표현할 수 있다. 긴 여름 전시회장에서 본 카라바조의 그림 ‘도마뱀에 물린 소년’ 또한 그랬다. 얼굴표정으로 혹은 손가락으로 순간의 감정 서사를 그리듯. 이정환 시인이 운율로 감았다 풀어내는 동시조, 도마뱀 또한 재치 있게 작명한 한 폭의 기특한 풍경이다.저만치 가을이 오고 있다, 객주 문학관 풀숲에선 오늘도 “도마도마, 뱀 뱀 뱀”

2023-09-10

마침내 초대받은 연주회

우주정거장 멀리서 반짝이는 위성처럼홀로 떨고 있는 무대 위 작은 의자둔부를 껴안는 즉시 타오를 듯 팽팽하다공기를 정비하듯 잔기침들 다듬는 사이독주의 예열이듯 소름 돋는 다리 사이마지막 현을 조이는 긴 고독의 전희처럼드디어 탈주하는 무반주 활의 광휘전율을 견디느라 다리가 다 녹아나도의자는 커튼콜이 없다 열없이 사라질 뿐―정수자,‘무반주첼로 의자’전문 (파도의 일과, 2021)정수자 시인이 선곡한 무반주 첼로 연주곡을 감상해 보려고 한다. 실은 시인이 주목한 대상은 첼로도 연주자도 아닌 첼로 연주자가 앉은 의자이다. 말하자면 철저히 의자의 입장으로 듣는 첼로 연주라고 해야 할 것 같다.지금은 상상조차 힘든 일이지만 바흐 시대에는 첼로가 매우 하찮은 취급을 받았다. 독주곡을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악기로 인정받지 못했다. 수 세기 동안 이 작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일반적으로는 독주 작품이 아니라 연습용 음악 정도로 간주해 왔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첼리스트가 앉는 의자에 입각하여 “우주정거장 멀리서 반짝이는 위성”이라고 클래식의 바운더리에서 외따로 떨구어 놓고 있다. “홀로 떨고 있는 무대 위 작은”이라고 말이다. 음악은 영혼을 지탱하는 한 가지 방식이 될 수 있다. 정수자 시인이 그려내는 첼로 연주는 마치 클래식 음악의 세계가 초대받지 못한 파티 같은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느껴진다.기실 이 작품은 저명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한 바흐의 ‘첼로 모음곡 2번 d 단조’의 연주 영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즉석 연주회의 영상 속 로스트로포비치는 부서질 것 같은 낡은 의자에 앉아 연주한다. 그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한 후 모든 감정을 담은 그의 얼굴에는 아낌없이 쏟아부은 연주자의 온 영혼이 담겨있다.하여 시인은 바흐의 첼로 연주곡에 감상자인 자신을 곡에 삽입하여 마치 의자에 체감되는 첼로의 전율하는 현을 의자 자신이 온몸으로 감내하는 방식으로 연주한다. 의자는 “둔부를 껴안는 즉시 타오를 듯 팽팽”하다. 연주장의 “공기 중에” 조심스럽게 퍼지는 현을 “정비하듯”“잔기침들 다듬으며” 연주 전 한껏 긴장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주가 무르익을수록 의자의 다리에“소름”이 돋는다. 이제 의자는 첼로 현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다. 고조된“마지막 현을 조이는” “긴 고독의 전희처럼” 장벽도 연주도 탈주를 감행한다. 마침내 “탈주하는 무반주 활의 광휘”를 작은 의자는 “다리가 다 녹아나도”견디며 그 경이로운 현의 전율을 체득한다. 이희정시인 우리가 정수자 시인의 시를 현대시조나 정형시라고 부를 때 발견하게 되는 언어의 형상은 무반주 첼로의 현으로 대입해도 무방할 것이다. 가슴을 손끝으로 누르고 떨리는 혀끝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린 뒤, 가지런히 고르는 고독한 마음의 현이다.마찬가지로 시인이 매번 마음이 약동하는 순간이 아니라, 감정이 잦아드는 마지막 순간에 대해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주의 절정에서 고조되는 감동의 격정이 아닌 감정이 고요해지는 순간에 대한 이 명연주는 혼이고 영혼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연주한 의자는 첼로의 음역만큼 깊이 파고든다. 어떤 연주든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그 연주의 의미가 된다. 이 숭고한 의자의 연주는 삶을 다시 시작하는 순간, 완전한 고요와 아름다움의 순간이 될 것이기에.“드디어 탈주하는 무반주 활의 광휘, 의자는 커튼콜이 없다 열 없이 사라질 뿐”

2023-08-27

사랑, 그 지독한 멜로

이희정 시인 그가 오른손 검지로 내 왼눈을 찔렀다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그의 손가락이 후벼 파는 내 혈관의 피비린내를 음미했다어쩌다 통증 같은 것이 올라오면한밤중에 사 오던 감기약이나목도리 둘러주던 손길을 떠올리기도 했다그러다 어떤 순간엔 눈꺼풀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그의 손가락이 내 눈에서 빠져나갔을 때내 눈을 잊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나는 그의 손끝이 지나가는 길을 잊지 않으려고내 몸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잊기로 했다나는 눈이 전부인 물고기였다그가 손가락을 빼고물 없는 수조에 나를 눕혀주었을 때나는 비로소 숨쉬기를 기억해냈다그가 왜 내 눈을 찔렀는지나는 왜 물고기가 되었는지알 수 없었으므로나는 오른눈을 내 손으로 찔러보기로 했다―최라라, ‘사랑’ 전문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 2017)최라라 시인이 그려내는 ‘사랑’은 독특하고 강렬하다. 제목과 달리 이 시는 그저 달콤쌉쌀한 멜로가 아님을 첫 행부터 시종일관 보여주고 있다. 장르적 관점에서 보자면 서정적 스릴러라고 명명하고 싶을 만큼 기이하고 매혹적이다.“형식은 이데올로기의 벡터다” 에이젠시테인이 남겼던 이 말은 다른 예술처럼 시에서도 형식의 중요성을 그대로 요약한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형식의 자장 속에서 위축되지 않은 잔혹한 그로테스크(grotesque)의 미학을 유감없이 드러낸다.이 시에서 사건을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감각이다. 눈은 보는 대신 기억하고 꿈꾸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성혁의 말처럼 시인에게 사랑은 즉각적으로 고통을 주는 폭력의 의미가 아니라 ‘그’의 존재를 삶의 속살에 깊이 새기는 폭력, 그리하여 운명이 새겨지는 폭력이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새기는 일이기에 상처가 나기 마련인 사랑의 격렬함을 의미한다. 고통을 회피한다면 사랑의 극한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시인이 “그의 손가락이 후벼파는 내 혈관의 피비린내를 음미”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폭력의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그’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 속으로 격렬히 침입해 들어올 때 일어나는 피비린내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다. 이는 아마도 ‘그’에 대한 따스한 추억들, “한밤중에 사 오던 감기약이나/ 목도리를 둘러주던 손길”과 같은 추억들을 떠올리게 된다.시인이 기억하는 사랑은 소중하다. “나는 그의 손끝이 지나가는 길을 잊지 않으려고 / 내 몸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잊기로 했”던 것, 그리하여 그녀는 “눈이 전부인 물고기”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比目)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던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시인은 “그가 왜 내 눈을 찔렀는지/ 나는 왜 물고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시인은 자신의 “오른눈을 내 손으로 찔러 보”는 일을 자행한다. 자신의 눈을 찔러줄 ‘그’는 없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신의 다른 쪽 눈을 찔러봄으로써 사랑의 고통을 체험하면서 자신 안에 깊이 존재하는 그를 이해하고 자신이 물고기가 된 연유를 알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눈을 찔러보는 고통스러운 실험이 시인이 시를 쓰는 바탕이 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떠나간 ‘그’를 기억하며 자신의 눈을 찔러 눈알이 된 지느러미만 남은 물고기가 시인의 숙명임을 견지하고 있다.사랑의 방식이 서로 달라서 상처인 줄 모르고 내 방식을 고집하는 사랑이라고 말한 친구의 독해처럼 이 시는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다. 가학적인 사랑의 상처가 멈춰 선 자리에서 최라라 시인은 다소 모호하게 구두점을 찍으며, 고백의 바깥으로 배턴을 넘긴다. “그의 손가락이 내 몸을 빠져 나갔을 때”의 서술이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의 대담함이나 우울한 판타지의 대리 만족도 아니다. 이것은 헤어짐을 삶의 본질로 이해하게 되는 그에 대해 기억하는 그녀의 사랑 이야기다. 그가 떠나고, 환상이 끝나고, 꿈이 끝나야 비로소 사랑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이 시에서의 사랑이 처한 위치다.“그의 손끝이 지나간 길을 잊지 않으려고 내 몸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잊기로 했다”

2023-08-13

발이 가고 싶은 곳으로

피곤한 발을 베개에 올리고 누웠다가문득 발이 베개를 베고 누웠다고 생각해 본다가고 싶은 곳에는 경쾌하게 앞서가던 발가기 싫은 곳에는 천근만근 끌려오던 발오늘 발이 피곤한 것은 아무래도가기 싫은 곳에 끌려갔다 돌아온 탓이리라오래된 발톱 무좀도가고 싶은 곳에 못 데려갔거나가기 싫은 곳에 억지로 끌고 다닌 탓이 크리라 생각한다발에게 베개를 받쳐주고 누워머리를 발이라고 생각하며 진짜 발을 바라본다열 발가락 하나하나 꼽으며 가고 싶은 곳을 헤아려본다한 키의 간격을 두고 동거하면서도그사이 어디 있는 마음의 발을 자주 동동거리는 바람에마음의 신발을 찾지 못해 허둥대던 날들을 생각해본다더 늦지 않게 마음먹어 본다가고 싶은 곳에 앞장서 가는 발을 따라나서리라머물고 싶은 곳에 발과 함께 머물리라 마음먹어 본다발이 머리가 되고 머리가 발이 되어 생각해 본다머리가 발 같고 머리같이 살아갈 날을 생각해 본다―안상학,‘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걷는사람, 2016)’에서‘발에게 베개를’전문우리의 제한된 삶, 그 불가역의 궤적을 발에 의탁해 형상화한 시들이 꽤 많다. 발만큼 시로 쓰는 인생론에 자주 쓰이는 클리셰도 없을 것이다. 안상학(1962~) 시인의 ‘발에게 베개를’은 제목부터 해학적이다. 해학이란 무엇인가, 예술 체험의 핵심인 즐거움과 깨우침을 주는 것이다. 시의 소재는 발이다. 그런데도 이 시는 발이 머리로 읽힌다. 이유가 무엇일까. 한 치를 나아가기 위해 두 발로 바닥을 디뎌야 하는 발은 머리와 달리 지상의 바닥과 맞닿은 우리의 몸 가장 아래쪽에 있다. 시인이 가진 발에 대한 연민에는 보이는 현상보다 더 복잡다단한 미안함이 실려있다. 대개의 사람들이 시에 대하여 갖고 있는 낭만적인 정조와는 사뭇 다르게 날카로운 사실적 세계의 인식을 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희정 시인 “가고 싶은 곳에는 경쾌하게” “가기 싫은 곳에는 천근만근”이라는 표현처럼 하기 싫은 것들을 견디는 것. 하지만 발 스스로가 이끄는 삶과 끌려가는 삶은 그 무게가 다를 것이다. 발이 향하는 곳을 표현한 이 두 구절은 ‘경쾌’와 ‘천근만근’이라는 대비적인 시어로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심상을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발은 앞서가는 발과 끌려가는 발로 병치된다. 우리의 삶처럼.이 시의 클라이맥스는 “발에게 베개를 받쳐”주는 데에 있다. 마음의 발을 동동거리는 바람에” “마음의 신발을 찾지 못해 허둥대던”날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화자는 조곤조곤 발을 위무하듯 “열 발가락 하나하나 꼽으며 가고 싶은 곳을 헤아려 본다”정작 그가 가고픈 곳은 어디일까? 이 물음 앞에 우리는 그가 가자고 하는 곳은 정의와 평등 그리고 개인의 해방이 이룩된 곳일 거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시를 쓰는 까닭은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우리의 발이 견뎌내는 곳은 인간의 자유가 이룩된 세상이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비록 그런 삶을 꿈꾸며 사는 일이 힘들지라도 “더 늦지 않게” “발과 함께 머물고 싶은 곳을 머물리라”다짐한다. 때때로 나 자신이 자유할 수 있는 소유권은 얼마나 될까를 헤아려 본다. 대부분 직장이 가장 많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여분으로 각자의 역할에 맞게 할당된 크게 작게 소속된 장소에서 소유한 지분을 제외하면 오롯이 나만의 몫은 그닥 많지 않다. 그럴 때마다 안상학 시인을 따라 발에 베개를 받쳐 놓고 소리 내어 읊조려 보는 것이다.“가고 싶은 곳에 앞장 서 가는 발을 따라 나서리라”

2023-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