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이 나지 않아 속이 썩은 것 같다고 해서 얻어온 모과
제 방에 들어오니 향이 살아납니다
향이 없었던 게 아니라 방이 너무 컸던 거예요
애옥살이 제 방에 오니 모과가 방만큼 커졌어요
방을 모과로 바꾸었어요
여기 잠시만 앉았다 가세요 혹시 알아요
누가 당신을 바짝 당겨 앉기라도 할지,
이게 무슨 향인가 하고요
그대 잠시 모과가 되는 거죠
살갗 위에 묻은 끈적한 진액이
당신을 붙들지도 몰라요
이런, 저도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의 즙이랍니다
오세요, 누릴 수 있는 평수가 몇 발짝 되진 못해도
죽은 향이 살아나라 웅크린 방
―손택수,‘모과의 방’전문 (‘시와 사람’, 2021)
종종 모과를 모개라고도 한다. 못생겼다는 놀림의 비유에 애정을 담았을 때가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손택수의‘모과’는 웅크린 방에 들어선 ‘모개’처럼 따스한 감성이 빚은 소박하고도 끈적한 산물이라고. 여기서 ‘모과의 방’은 가장 좁은 공간에 안구를 밀착해서 들여다보았을 때 그 공간이 거대하게 팽창해 우주적 부력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시인은 단 한 줄의 행갈이도 없이 배행을 붙여놓았다. 촘촘하게 바싹 당겨 앉힘으로써 모과의 공간에 밀착하게 한다. 언젠가 안동 가는 길에 들렀던 권정생 동화 작가의 방을 들여다본 기억도 그랬다. 관광객들이 뚫어 놓은 손가락 구멍의 렌즈에 들어찬 한 뼘 작은 방이 투명해서 외려 가늠할 수 없는 크기로 부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손택수 시인의 많은 작품들처럼 이 작품 또한 사소한 잔영이 점점 커다랗고 짙게 일렁거린다. 가령‘붉은빛’이라는 시에서 “볼이 떨어져 나갈 듯 추운 날/ 大口처럼 벌어진 진해만과 가덕만 사이 / 한류와 난류도 볼을 부비면서 살이 오르는 곳”처럼 대구라는 생선을 커다란 입으로 병치해 대구가 대구(大口)가 되는 것과 같은 문법이 되는 것이다. 화자의“애옥살이” 방에 들어온 모과는 이내 방만큼 커지니 말이다. 여기서 커지는 것이 향이건 공간이건 중요하지 않다. 사소하고 조그마한 그것도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진 낙과인 모과가 하강에서 상승하는 것처럼, 죽었다고 생각했던 향이 “몇 발짝 누릴 수 없는” 공간과 함께 살아나는 것이다. 이 훈훈한 동화적 알레고리 모과에는 하찮은 듯 쓸쓸하지만 끝내 숨겨지지 않는 향이 있고 두드러지진 않아도 억누를 수 없는 팽창의 힘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과의 발향과 관련해 특히 마음을 붙드는 것은 “누가 당신을 바짝 당겨 앉기라도 할지 / 이게 무슨 향인가 하고”“살갗 위의 끈적한 진액이 / 당신을 붙들지도” 모른다는 언술에 있다. 그 모과의 향처럼 누군가의 생을 불러내는 이 연상은 모과가 몇 평 누릴 수 없는 방을 구하고, 방이 모과의 향을 살리듯 방과 모과가 같은 동세로 “어찌할 수 없”이 타자화된‘고독의 즙’인 대상들을 자기의 방, 의식의 방으로 불러들이는 것에 있다.
때때로 우리 사회의 부패한 시스템이 오작동하거나 무신경한 상황에서 약한 것들이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은 더 약한 자를 보살피게 한다. 마치“향이 나지 않아 속이 썩은 것 같다고 해서 얻어온 모과”처럼 말이다. 시인 손택수 특유의 재치와 넘치지 않는 해학은 모과의 방이라는 개별 에피소드를 우화적인 묘사를 통해 비판적 메시지를 소박한 실감으로 전하며 모과와 방이 동질적으로 맞붙은 채 바짝 당겨 앉게 한다.
‘모과의 방’ 근저에 흐르고 있는 것은 세상이라는 무관심을 겪은 왜소한 생애의 필사적인 공감이다. 그러니 이제 나와 당신이 바짝 당겨 앉아 모과의 향을 구해낼 차례다. 밀착은 모과와 방 그 둘만이 아니라 그 좁은 공간에 다가가 둘만의 발화에 참여함으로써 소통하는 것이다. 비록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더라도 둘은 지상의 밑바닥으로부터 구원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존재와의 공감과 소통이 서로를 보살피는 주체가 된다. 시인의 세계에서 희망은 추운 날 볼을 부비며 밀착하는 붉은빛의 고백과 같으리라. 모과의 향이 방만큼 커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화자가 지속해서 고독의 살갗에 밀착해 간 것처럼.
“오세요, 누릴 수 있는 평수가 몇 발짝 되진 못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