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아직 여름길은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오이넝쿨의 손은 하늘을 더듬더라
그때 노란 꽃이 후두둑 피기 시작하더라
아직 여름길은 나지 않았는데
바다로 산책을 나간 새들은
오이 향을 데리고 저녁이 닫히기 전 마을로 돌아 오더라
오이꽃에서는 바다의 향기가 나더라
바다에 빠진 태양빛 같은 새들의 수다 속에서
꽃은 지고 오이 멍울이 화반에서 돋아나더라
여름길이 열리고 그 노란 꽃 가녘에
흰 나비는 스르르 속옷을 열더니 쪼그리고 앉더라
먼 사랑처럼 기어이 휘어지면서 오이가 열리든 말든
―허수경,‘오이’ 전문(‘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언젠가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을 잊지 않았다.” 허수경 시인의 시에서 시간은 결코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먼 사랑처럼 기어이 휘어지면서” 결코 잊히거나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오래 남아 무겁고 아름다운 감정을 고요히 쌓아 올리고 있다. 2018년 독일에서 지병으로 조용히 세상을 떠난 그녀는“슬픔의 시간”을 가장 깊이 들여다본 시인이었다. 그녀의 시에는 늘 사라져가는 존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멀어져가는 시간이 함께한다. 그 시간은 단지 과거로 흘러간 것이 아니라, 현재와 뒤섞이며 미완의 시간 감각으로 현전한다.
이를테면 “아직 여름길은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라는 기표는 시인이 평생을 두고 붙들었던 변전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에게 시간은 결코 질서정연하게 흐르지 않을뿐더러 계절은 순서대로 오지 않는다. 사랑은 예고 없이 저물며, 죽음은 삶의 맨 앞에 서기도 하는 그녀의 시간은 늘 어긋나 있다. 그러나 그 어긋남의 틈을 통해 우리는 어떤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다. 가령 “여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 오이넝쿨의 손이 하늘을 더듬”고 “그때 노란 꽃이 후두둑 피기 시작하더라”는 언술이 그렇다.
그녀에게 바다는 멀리 있지만, “오이꽃에서는 바다의 향기”가 나고, “태양빛 같은 새들의 수다”가 저녁을 덮기 직전까지 계절을 흔든다. 시인의 발화법으로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은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먼저 깃들고, 오이꽃에서 바다향이 나듯, 삶의 어느 부분은 미래보다 앞서 살아지게도 한다고. 해서 이미 진 꽃에서 오이가 열리기도 한다고 말이다.
이때 시인의 몸을 통해 “나비는 조용히 속옷을 벗고, 쪼그려 앉는다.” 생명의 열매는 그저 피고 지고, 사랑은 “열리든 말든” 휘어진다. 태어나고 사라는 모든 과정에서 개입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며 “나는 사라지는 것들 앞에서 시를 쓴다”고 했던, 어쩌면 이 부분이 가장 허수경적인 태도일지 모른다.
1990년대 후반 독일로 건너가 말 없는 고국을 떠나 먼 나라의 언어 속에서 생을 견뎠고, 2018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녀의 시는 아직도 여름처럼 푸르다. 그녀에게 ‘여름’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이 가장 짙게 고여 있는 감각의 시간이다. ‘혼자 가는 먼 집’에서 그녀는 여름을 “사라지는 존재들을 가만히 붙들고 있는 계절”이라 했고,‘나는 발굴지에 있었다’에서는 여름을 지나간 신들의 시간과 사람의 잊힌 시간과 다름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오이는 허수경의 다른 시 수박’이나‘레몬‘자두’처럼 그녀가 애써 피워 올리던 몸시의 형상으로 읽을 수 있다.
결국 오이넝쿨의 얽힘, 꽃의 노란색, 멍울 맺힌 생명의 시작, 향기로 스미는 바다의 기억, 이 모든 것은 생명과 죽음, 탄생과 퇴락, 감각과 소멸과 다름이 아니다. 그녀의 시 속에서 여성은 늘 혼자서 피고 지며, 존재의 흔적을 조용히 남긴다. 시인은 여성적 존재를 섬세한 식물처럼 그려내고, 그 안에 언어 이전의 감정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숨긴다. 시인 허수경에게 시는 ‘말해지지 않는 것’을 끝내 붙잡는 일이 아니었을까.
무언가를 자라게 하는 시간, 그리고 멀어지는 존재를 떠나보내는 그 시간까지 모두 품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종종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말이 사라진 자리에 감정과 감각의 몸을 생명으로 남겨 두었다. 이것이 바로 허수경의 여름이고, 오이꽃이며, 향기로 스미는 바다일 것이다.
“꽃은 지고 오이 멍울이 화반에서 돋아나더라"
/이희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