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일단 도착하면
나는 그곳과 너무 가까운 사람이었다
먼 곳은 먼 곳으로 남겨 두기 위하여
나는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먼 곳이 너무 싫어서 먼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
파티마병원에 어머니는 누워 계셨다
빗자루에 환자복을 입혀 놓은 것처럼 바싹 말라서
아직 살아 계셨다 내 손을 잡고 울다가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그러다 조금 뒤면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내가 하나도
밉지 않은 듯이, 어제도 날 본 사람처럼 웃었다
다음 생에는 안 싸우고 안 아픈 곳에서 함께 있자고
이제 당신이 내 자식으로 태어나라고 내가 당하겠다고
당신도 당해 보라고
눈물이 끝 모르고 흘렀다 눈물 흘릴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마치 자식 된 사람인 것처럼……그 시각 모든 일이 먼 곳에서
(…)
―조성래,‘창원’부분 (‘천국어 사전’, 2024. 타이피스트)
읽던 시집에 얼룩이 번졌다. 단 한 방울이었는데 시집 한 권을 망치기에 충분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시집이라 변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시집을 덮으며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조성래 시인의 이번 시집은 죄다 침수되었다고, 해서 시집이 소진되었다고. 가령 인용되지 않은 이런 구절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한 인간이 하루 동안 생산해 내는 환상의 양은 옥상의 푸른 물탱크 하나만큼”이었다고 말이다.
또 이런 시편은 어떤가.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견딜 수 없는 여자의 물탱크는 두 개, 그 어떤 누구의 미래와 희망, 천국도 결국은 물탱크 속에 갇힌 햇빛”, “그러나 어머니의 빈 탱크, 나 온통 젖은 몸으로, 타향으로 떠날 때, 어찌나 기뻤던지, 나의 자유가 어머니의 자유에 반하는 숙적이라는 사실을 무참히 깨달으며, 나는 사탕 빠는 고아처럼 잠시나마 기뻤”다는 내면의 고백말이다.
그것은“먼 곳이 너무 싫어서 먼 곳을 견딜 수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는 언술처럼 비록 가까울지라도 먼 곳에 있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대한 참담한 독해와 같을 것이다. 해서 시인을 통해 우리는 어떤 부끄러움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자식은 죄책감이 들 때에서야 부모에게 전화를 한다”는 사사키 이타루의 말은 조성래 시인이 말한 세계와 밀접하게 접촉하는 것이 시라는 화법과 유사하다. 흡사 이런 완전한 밀착의 순간에 와서야 사람의 영혼은 어떤 비밀을 깨닫게 되니까.
물론 그것으로 충분할 리가 없다. 그래도“모든 이야기는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이 관통하는 지점은 분명한 듯하다. 지극히 보편적인‘죽음’이라는 의식을 전제하지 않는 한 세상의 어떤 이야기도 태어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우리가 이 세계를 다 믿지 못할지라도, 우리에게 어머니란 기표는 신앙이며 동시에‘천국어’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극도의 아름다움이 참담하게 슬픈 이야기를 태어나게 한다.
“이제 당신이 내 자식으로 태어나라고 내가 당하겠다고, 당신도 당해 보라고”
/이희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