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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이라는 미래에 눈이,

등록일 2025-03-23 18:09 게재일 2025-03-2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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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시인
이희정시인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꾸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 장석남 ,‘맨발로 걷기’ 부분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문학과지성사, 1991)

‘맨발로 걷기’는 1987년 경향일보로 등단한 장석남 시인의 첫 시집에 실려 있는 등단작으로 그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잘 보여준다. “생각난 듯이 눈이 내”리듯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 자연 현상과 만나고, 이는 단순한 외부의 일시적인 변화로만 보지 않는다.

시인이 풍경을 보는 방식은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갈등 속에서 외부의 큰 흐름에 휘말려 있음과 동시에 그 혼란이 내면의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포착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 이루”듯 장석남 시인의 시선을 따라 내려가던 풍경은 저도 모르게 꽤나 먼 풍경에 이르게 되는데. 가령 2024년에 발표된 양안다 시인의 ‘다음 미래’속에 묘사된 이런 풍경이 그렇다.

“나는 네가 쏘아 올린 눈보라 속에 있다. 그것은 지구 최초의 인간이 사랑한 풍경이거나 지구 최후의 인간이 마주할 풍경이다. 내가 아름답게 바라본 형상들이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모순 속에서. 지구 최후의 풍경은 인간이 아니지만 지구 최후의 풍경은 인간이 될 것이다. 뙤약볕도 없이 눈보라가 그치고 물이 되어 흐른다. 네가 두 팔 벌린 물보라 속에 내가 잠긴다. ”

묘하게도 그 예전 젊고 푸른 장석남 시인의 첫눈에 담긴 그 먼 풍경이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듯 양안다 시인의 “네가 쏘아 올린 눈보라 속”처럼 포개어지는 오늘이 있어, 기실 우리의 시간은 과거로부터가 아닌 미래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꾸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라는 감수성으로부터 어떤 감각은 오래도록 시리게 한다. 마치 장석남의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는 고백이 다음의 양안나 시인에게 닿는 것처럼. “끝나지 않는 마음의 동정”이 “어른이 아이를 망치자 아이는 복수를 학습”하게 하고 “어른이 된 아이가 아이를 망치자 망각이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예의 먼 맨발 걷기의 감수성으로부터 회복의 가능성을 타전해 보게 한다.

우리가 문학을 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인간의 미래를 믿는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최초로부터 혹은 최후로부터 두 시인은 인간의 지속적인 고통을‘눈’이라는 시린 형상을 통해 보는 것에서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으로 조우한다. ‘발이 시리다’는 감각의 표현은 기억 속에서 생겨나는 세계의 불화와 내면의 고통이 물리적 경험으로 나타나는 섬세한 묘사일 것이다.

“네가 아름답게 바라본 형상들이 나를 아름답게 만드는 모순”

이희정의 월요일은 詩처럼 기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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