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최승자, ‘참 우습다’ 전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 지성사, 2011)
최승자 시인(1952년~)은 “담배 한 대 피우며 한 십 년이 흘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후 시인의 시간은 거기에 또 한대의 담배가 얹힌 시간이 된다. 그렇게 한 세월이 있었다. 80년대에 시인이 되고자 했던 많은 시인처럼 최승자의 시들이 보여주었던 치명적이고 고질적인 꿈, 혹은 병(病)은 혹독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보존한다는 것과 보존된 과거를 상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에서 시간은 시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연된다. 그것이 바로 ‘병(病)’이다. “그냥 아파서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시에 나타난 과거적 지평은 단순히 회고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를 응시하는 시인은 퇴행적 욕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미래 지향적 욕망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를 분출하고 있다.
깨어 있는 동안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현실은 삶에 달라붙는다. 시인에게 병(病)은 그러한 삶과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라캉은 죽음충동은 불쾌의 경험에서 쾌를 회복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시인은 오랫동안 투병 속에 잠들어 있었다. 이는 의미와 존재의 사유를 표현하는 것에 실패했을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우회로이다. 시인은 과거를 재현하며 그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끌어당겨 현재의 ‘나’의 위치에서 언어화한다. 최승자의 시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 시적 자아는 삶에 위치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오랫동안 죽음에 투신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출하듯 최승자는 최승자를 떠났다.
시인 최승자는 묻고 답한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자기 자신의 현실 속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것. 그렇게 무수히 떠나고 무수히 되돌아오면서 많은 시간을, 주저앉아 있는 것, 정지해 있는 것, 고여 흐르지 않는 것은 시간의 누적과 더불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굳어져 버린다. 단단히 굳어져 하나의 질병”이 돼버린다. 그러니까 이건 힘겨운 삶과 사라진 사랑, 버거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최승자 시인의 시를 통해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의 그 아스라한 통증의 공허함이란. 그리고 타자들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에 의해 주도 되어오던 시인의 시간은 후반부에 이르러 시인의 시점으로 바뀐다. 그 순간 시인은 마침내 껍질을 벗고 세상으로 나올 생각을 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을 잠시 흐르다 가는 삶의 즐거움과 고통, 사랑과 죽음에 대한 방식은 이어지는 작품 ‘너에게’에서도 연역한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 나는 치명적이다 /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 황량한 쇼윈도 같은 나의 창 너머로 /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 텅 비어 있다./ 텅 텅 비어, /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그녀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의 표제를 비웃듯 1979년 등단 이후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 옮긴 책들은 투병 중의 그녀로서는 지극한 이력이다. 여전히 많은 독자가 시인의 시에 기대어 허무와 고통을 필사하는데도 불구하고, 덧붙은 이력에는 기초생활수급자, 초등생 몸무게, 정신병원 재입원 등의 키워드가 부록처럼 딸려있다. 그럼에도 시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앞으로도 뒤로도.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2021년 시인의 말, 최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