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
디딤돌을 놓고 건너려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디딤돌은 온데간데없고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디딤돌이다
-신대철, ‘강물이 될 때까지’전문, (‘무인도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초판 1쇄 1977)
시인은 기어이 강물이 되려는가 보다.
이 시가 수록된 신대철(1945~) 시인의 시집‘무인도를 위하여’는 ‘문학과 지성사’ 시인선 일곱 번째 시집으로 1977년 초판 이후 2022년 재판 9쇄를 거듭하며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이 출판사의 시선집이 600번대 임을 보더라도, 아득하고도 유장하게 흐르는 시인의 강물을 가늠할 수 있으리라.
1968년에 등단한 신대철 시인은 ROTC 출신 GP장으로 비무장지대에서 근무하며 북파 공작원들을 송환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때의 군대 체험은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의 충돌을 일으키게 하는 경험이기도 했지만,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한 시대를 통과해 오면서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한발 물러서서 숲과 나무, 자연의 사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시간을 통과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신대철 시인에게 작품의 진실은 이념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김현의 말대로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섭의 한 수단’이며 자신의 감정을 타인에게 감염시키는 활동이라고 했다. 해서, 도입부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는 화자의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내며 시작한다.
시인이 건너는 강물에서 맞닥뜨린 상황은 시공간적 조건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사람에 대한, 흐린 물, 세상에 대한 어떤 복선도 담지 않았다. 건널 듯 말 듯 머뭇대고 두리번거리며 뒤돌아보게 하며 마침표를 찍는 순간을 미루는 듯한 이 시의‘강물’은 이상하게 먹먹하다. 흐린 길 앞에 주저하는 사람을 닮아서, 인생의 흐린 길을 닮았기에.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만난 “흐린 강물”은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는 진술처럼 화자의 내면에는“뒤들 돌아보지” 않아야 할 불안이 내연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존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흔하디흔한 인생관이지만 결국 대독할 수 있는 화자의 자격은 ‘사람’이 아닌 ‘디딤돌’이라는 익명성에서 온다.
그러니 시 속에서 시종 교차 되는 디딤돌’과 ‘사람’의 관계처럼 서로에게 빛과 그림자 같은 존재인 건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구해주는 이 언술은 결국 살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전력을 다해 깨우쳐가야 하는 절박함 일 테니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그 모든 상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람이 아닌, 디딤돌로 고쳐 살아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은 자신이 만들어낸 화자 뒤에서 관조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마치 그치지 않는 한 인생의 고난을 감싸고 있는 것만 같다.
흐린 강물 앞에 마침표를 찍는 대신 어쨌든 또박또박 걸어가는 모습으로 기어이 강물이 되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강물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