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새워 만드는 사과파이에 첩첩이 있지
수십 장 종이 같은 마음을 아주 얇게
저미고 밀어 만드는 말 못할 첩첩이 있지
물 마른 진흙 첩첩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들이
가쁘게 서로의 몸을 휘감는 첩첩이 있고
그래도 건널 수 없는 첩첩 마음이 거기 있지
첩첩 모퉁이 돌아 첩첩의 고개가 있고
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
우리가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이지
-김수환, ‘첩첩’전문 (‘사람이 간다’, 시인동네)
김수환 시인의 ‘첩첩’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정교하게 축조된 구조물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 하지만 어떤 시어나 비유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딱 들어맞는다.
자칫 이런 상징은 언어유희로 한정될 수도 있지만, 이런 디테일은 시의 진정성을 담보한다. 이를테면 이 시에는 덜 조여진 ‘첩첩’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 여유롭게 관조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매끄럽게 흐른다. 첩첩이 닿는 공간마다 적확하고 깊은 이 시는 말 못 할 첩첩이 제각기 한 작법으로 성취를 이뤄내고 있다.
“밤을 새워 만든 사과파이”에서 시작된 첩첩은 “수십 장의 종이 같은 얇은 마음”에도 잘 드러난다. 행간에 진입할수록 수사적 진술을 무척이나 효과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테면 첩첩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종일관 간접화법으로 에둘러 가지만, 어김없이 첩첩에 적중한다. 시의 리듬을 통해 발화되는 첩첩들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거느리고 있다. 첩첩이라는 어사(語辭) 하나가 이렇듯 많은 서사를 거느릴 수 있다니 충분히 다성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저미고 밀어 만드는”첩첩은 겹겹으로는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전적 의미로 첩첩은 걱정이나 근심이 겹으로 쌓여있는 것으로 눈으로 보이는 외상의 겹겹으로 설명될 수 없는 더 깊은 정서가 내진한다.
말하자면 이 시에서 첩첩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고개”와 끝끝내“건널 수 없는 마음”을 되짚어 넘어보려는 태도이며, 서로의 몸으로 가슴으로 반복해서 설명되어 온 우리가 될 수 없는‘우리’에 대한 함축을 풀어내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서사 구조 속에서‘관찰되는 객체’일 수밖에 없는 첩첩을 말하지만, 특유의 생동감 있는 리듬으로‘정서적인 주체’로 환원되고 있다.
여기서 첩첩은 압축된 현대시조의 말 부림만으로는 환유할 수 없는 시상이 중첩되어 있다. 크루아상의 외피처럼 사실상 속은 공기로 부풀어 비어있는데, 플롯은 꽉 차 있다. 원심력만으로 평생을 끌고 가는 첩첩은 가벼운 듯하나 아픔이 깊다. 바로 이 점이 “김수환 시인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그리움과 아픔”이라는 독해에 동의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 시에 드리운 첩첩의 배경을 보라. “밤을 새워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물 마른 진흙”이고,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이지 않은가. 풀리지 않는 매듭 앞에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이 시는 헤어 나오기 어려운 늪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놓였다고 해도 독자에 따라 저 깊이까지 파고들게 하는 구심점을 목도 할 수는 있겠다.
막막한 내면의 벽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외양 속에 숨긴 대상의 비유도 놀랍지만, 더 감탄스러운 것은 저마다의 첩첩을 대하는 자세다. “아주 얇게”“모퉁이 돌아”“가쁘게”시인의 이 작품은 시조라는 장르가 진부하지 않을 정도로 신선하고 입체적이다.
그렇다면 이 첩첩의 막막함이 주는 무기력한 안온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벼운 듯 깊은 이 시의 정조가 당신에게 어떤 방향을 작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가라앉아 가는 당신의 밤을 첩첩은 흔들어 놓을 것이다. 치료제는 없을지라도 사과파이 같은 달콤한 각성제는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