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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밤엔 명작을 쓰지

등록일 2025-02-02 18:07 게재일 2025-02-03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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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시인
이희정 시인

기도하다가 기도가 막혀 죽은 사람은 없겠지만

할머니가 절에 가서 기도하고 받아 온 떡을 내가 먹다가

질식사할 뻔하지 않았다면 나는 영영 헨리 하임리히 씨를

몰랐겠지

모르고 살아도 좋을 이름들

사랑하는 이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 알츠하이머가 독일의

정신과 의사 이름이란 걸 알게 된 것처럼

계기가 운명의 계량법은 아니겠지만

(중략)

어떤 바람은 병증처럼 전조 증상도 없이 후유증을 남기며

시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다

다짐은 무슨 힘으로 단단해지나

시를 배우겠다는 노인이 내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실금이 갔고 따뜻했다

―김이듬,‘하인리히, 하임리히’ 부분,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타이피스트, 2024)

책방 수북에 김이듬 시인이 왔다. 선뜻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머뭇거리기를 한참이었다고. 스스로 북토크를 하겠다는 시인에게 무뚝뚝한 성격의 책방 직원은 “누구시냐”고 반문했고, 외근 중인 편집장의 놀란 목소리가 전화기를 푹 뚫고 나왔다.

“누, 누구라고요? 김이듬?” 도처에서 초대하려는 시인인데 ‘굳이’ 서울에서 이곳을 자청해 왔다.

일산에서 ‘이듬 책방’을 운영한 이력이 있는 그녀였다. 높은 임대료와 운영비에 비해 팔리는 책은 고작 하루 서너 권이었다고, 대학 강사 수입까지 탈탈 털어 버티다 장렬하게 닫았다고 했다. 작은 책방에 대한 각별함도 있었겠지만, 수도권에서 보자면 변방이지만 책을 중심으로 작가와 독자를 잇는 책방지기 김강 소설가의 맹렬한 분투가 익히 알려져 발걸음을 이끌었다고.

진주에서 태어난 김이듬 시인의 사투리 억양은 친밀했다. 그녀의 시집을 스무 명 남짓 모인 이들이 함께 돌아가며 낭독했는데 마이크 없이 가공되지 않은 목소리의 시어들이, 담백한 구름처럼 소담한 책방 행간을 떠다녔다.

이른바 전문 낭송가들의 기성화된 독해의 가공 없이 낭독하는 독자들이 나름의 호흡으로 조근조근 풀어내는 시편은 진정성어린 울림이 더 했다.

말하자면 옷에 몸을 맞추는 독법이 아닌 몸에 옷을 맞추는 수제 맞춤복 같은 몸에 착착 감기는 발화법일 것이다. 소탈하고 낮게 번지는 소리의 밤, 시집에 그들의 이름을 사인하고 ‘굳이’ 메모지에 새겨 담아가는 모습에 마냥 “실금이 갔고 따뜻했다”

그녀의 또 다른 시편 “톱자국 지니고 성장한”“도끼 자국과 함께 커가는”“천둥 벼락 맞고도 무성해진 숲”같은 벽조목이 인장으로 오는 밤,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라는 시인의 말이 실감으로 오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독일 유학 시절 빠져들었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에 담긴 두 개의 얼굴은 그녀 시의 메타포와 다름이 아닐 것이다. 시인 김이듬은 내면에 패인 도끼 자국과 천둥 벼락을 숨기지 않는다. 자기 삶을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을뿐더러 패인 삶이 그대로 시가 되는 ‘벼락 맞은 대추나무’의 행운목을 주문처럼 나누는 그녀였다.

다소 센 듯한 외양과 달리 누구보다 겸손하고 다정해서 방청석엔 바다 마을 주민들이 흐뭇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곧 시인이 간헐적으로 와 있는 집필 공간으로 태워 갈 것이라고. 더구나 시인에게 손을 포갠 이들은 생업으로 바쁜 시간대 가게 문까지 닫고서 달려온 동네 이모, 동네 언니들이란 이름들이었음을.

“한순간 빛났던 한 구절 때문에 한평생 다정하게 기다리는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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