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고 싶은 것들 전봇대 아래 모였다
이 빠진 그릇이며
다리 빠진 의자며
쓸모에 목숨 바친 뒤 여기 죄다 나앉았다
한철 영화 무색하게 주눅이 폭삭 들어
내일 없는 얼굴들 통성명 필요할까
묶인 몸 달그락거리니
길짐승들 킁킁댄다
찌그러진 몸 위로 햇살들 놀다 가고
휘청대던 취객이 피로를 내던지는
이별이 왁자한 이곳에
배경이 시들고 있다
― 홍외숙, ‘여긴 이별이 와글대요’ 전문
(‘제 19회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작)
시인의 다짐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아파하고 있는 것들, 버림을 당한 것들, 도와 달라고 내미는 손들에게 마음이 가는 계절, 지켜봐 주는 모든 평범함에게 감사와 사랑을 나눠야겠다”는.
그런 시인의 눈길이 닿은 곳은 흔하디흔한 일상의 풍경이다. 정작 보고도 모른 척, 설령 눈빛이 머물라치면 외면하기 십상인 불편한 모습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공간에 머문 시인의 눈빛을 그들은 다시 호출한다. 이제 그렇게 호출된 것들이 다시 우리를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이 시는 재현된다.
도입부 “기대고 싶은 것들 전봇대 아래 모두 모였다”는 첫수의 진술은 사뭇 눈길을 끈다. 지나치기 쉬운 누추한 풍광을 ‘전봇대’라는 완충재가 견인하며 제목 ‘여긴 이별이 와글대요’의 정황을 내밀한 서경으로 떠받치고 있기에.
이 시를 지탱하는 핵심 관계는 전봇대에 기댄 “이 빠진 그릇”이며 “다리 빠진 의자” 따위의 ‘쓸모를 다한’ 것으로 이제 더 이상 꼿꼿하게 자력으로 설 수 없는 것들과의 연민이며 연대이다. 이들의 씁쓸한 외경을 시인은 절묘하게 내면의 정경에 대입해서 풀어내고 있다. 결국 “쓸모에 목숨 바친” 캐릭터들이 지닌 특별한 힘은 존재의 ‘버려짐’에서 발원하고, 그들 사이의 연대는 동병상련의 상처로 조우 하는 것에 있다.
해서, 이 시가 거둔 성과는 만만치 않다. 헐한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상태를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시가 지닌 고유의 역할을 담담하게 수행하고 있다. 이런 때 ‘문학이 하는 일’에서 김영찬식으로 말하자면, “이즈음 예술인들이 대체적으로 공유하는 문학 혹은 글쓰기는 현실에 대한 물신주의적 부인(否認)이며, 현실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같은 태도에 있다.
그러니까 이 시를 높이 평가했던 지점은 더럽고 보기 힘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가 의식의 ‘건강함’과 리얼리즘적 기율에 대한 충실함일 것이다. 그것으로 환기와 제언의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기에.
사람은 누구든 언제가 되었든, 결국은 파기될 운명 앞에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실존적 상처를 내장하고 있다. 종내 이 씁쓸한 내면 풍경을 “길짐승마저 킁킁댄다”는 더할 나위 없이 사실적인 이 묘사적 상황 앞에 우리의 감정은 다시 걷잡을 수 없는 환멸에 치닫게 된다.
시인은 이러한 상황마저 다소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는데 이는 시조의 율격이 주는 율동성에서 기인한다. 이렇듯 시인은 아픔을 아프게, 상처를 상처답게, 무심한 듯 유정하게 기댈 수 있는 전봇대라는 기율에 기대어 상처들이 상처들의 주체가 되어 서로를 보듬고 있다.
“이별이 왁자한 이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