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꽃은 꺾어도 봄은 온다

이희정 시인 뒤돌아서서 사진을 태워야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했다얼굴이 흐려질 동안두 눈에 담았던 풍경이재가 될 동안입술에 감추었던 고백과지상의 영광과 모욕이애월 봄볕이진언이 될 동안나는우리의 모든 죄를용서해 달라고등으로봄 햇살을 할퀴며표범처럼 울었다― 서안나 ‘재의 풍경’ 전문 (애월, 여우난골)아름다운 것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아픈 쪽으로 향한다. 시인은 뒤돌아서서 사진을 태운다고 했다. 시인이 태우는 얼굴은 흐려지고 재가 되어간다. 흐려져 가는 그 얼굴을 애월(涯月)이라 쓰고 애절(哀切)이라 불러봄직하다. 서안나 시인에게 봄은 달려들어 햇살을 할퀴어야 할 만큼의 아픈 봄이고, 표범처럼 울어야 할 만큼의 잔인한 봄이다.누구에게나 몸의 거주지, 마음이 거하는 본적지가 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서안나 시인의 애월은 어디로든 애월이어서 손이 시리고 마음이 시리다. 애월은 한자로 풀면 물가(涯)와 달(月)이 합쳐진 말로, 물가에 얼비친 달이다. 달빛의 젖은 풍경이 재가 되는 풍경이라니. 이 얼마나 애잔한 당신인가. 애월이 주는 정감은 언어의 음성과 잔상만으로도 그 수심이 깊다.이 시에는 제의적 고백이 담겨 있다. ‘재의 풍경’에는 T.S 엘리엇(Eliot)의 전언처럼 잔인한 4월이 서려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시인이 두 눈에 담았던 풍경은 “재가 될 동안” “진언이 될 동안”의 표현처럼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태(動態)의 순간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에서 ‘재’가 주는 심상과 현재진행형으로서의‘동안’이라는 시어에 천착해 보자. 시인이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하는 다짐은 지나온 생의 풍경을 산화시킴으로써 그 선업을 잊지 않겠다는 회향의 염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태운다는 것, 회향의 행위를 살펴보면. 범어로 ‘회향’은 “우리의 모든 죄를 / 용서해 달라”는 기도의 의식과 같다. 애월의 봄볕은 “입술에 감추었던 고백과 / 지상의 영광과 모욕”을 모두 태우는 진언의 주문과 다르지 않다.우리가 아는 진언이란 상실이 다시 시작이 되고, 잃음이 새 세상의 문이 되는 간절한 기도처럼 폐허의 재 위에 한 세계가 얹어지는 모습이다. 태우는 것으로 시작한 이 시는 선근의 업을 평화롭게 나누기 위한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시인의 애월은 잃은 것을 찾고 있는 그 재의 풍경 중에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한 풍경을 잊지 않으려는 참혹한 몸짓이다.당신의 얼굴이 흐려질 동안 ‘재의 풍경’은 상실의 존재에서 빚어졌지만 더 이상 무력하지 않다. 봄이 형체가 아닌 움직이는 동체인 것은 시인의 의지를 생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재의 풍경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재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까. 시인이 마음에 담고, 눈에 담고 시에 담았던 존재들이 바로 이 고결한 진언에 닿아 있음이리라. 대개 아름다운 것들이 지극한 슬픔에서 오는 것처럼 아픈 곳에서 꽃은 핀다.“애월 봄볕이 진언이 될 동안”

2024-04-14

야누스의 눈을 가진 우리

이희정 시인 혼자서 색종이를 접는 날이 많아졌다 세상을 좋아하던 엄마가 미웠다 시샘은 발이 빨라서 따라갈 수 없었다 엄마를 접었는데 마귀할멈이 보였다마음속 독사과가 고개를 쳐들었다시샘은 천사의 날개를 잃어버린 아이였다접혀진 색종이의 뒷면이 궁금했다엄마의 뒷모습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표면은 거짓이란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인은주, ‘시샘의 뒷면’ 전문 (가히 창간호)사랑도 분석이 될까? 사랑에는 창조적인 모습과 파괴적인 모습이 있다. 사실 세상을 살면서 겪는 많은 일에 두 모습이 모두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가진 화살은 똑같은 화살이 아니다. 금과 납으로 만든 사랑과 미움이라는 두 종류의 화살이 있다.여기 사랑 안에 상처받은 아이가 산다. 짐작건대, 내향적인 아이는 엄마를 좋아하지만, 바깥으로 바쁜 외향성의 엄마와 사랑을 갖기에 충분하지 않다. 종종 아이는 심리라는 내면의 집에 혼자 거주한다. 동물학자 로렌츠의 흰 기러기 실험에 따르면, 새끼는 어미가 일정한 크기로 보여야 안심한다. 맨 처음 자신에게 각인된 어미의 크기가 있어서, 그 크기보다 작게 보이거나 크게 보이면 새끼들은 불안해한다. 새끼 오리들이 어미 뒤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뚱거리며 따라가는 모습, 그 사소한 장면에 자연의 오묘한 법칙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펼치는 삶의 장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의 눈에 엄마는 크고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 접는 색종이의 접힌 내면으로 들어가 보자.자주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는 종이접기를 한다. 기다리는 견딤이 반복되는 아이는 화가 나기 시작한다. 욕구나 욕망은 해소되지 않으면 대상에 대한 집중이 커지고 충동성이 높아진다. 해서 공격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엄마를 접었는데 / 마귀할멈”이 보이고, “마음속 독사과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사랑과 증오는 다르지 않다. 사랑이 없으면 증오가 없고, 증오가 없으면 사랑도 없다.인은주 시인의 ‘시샘의 뒷면’은 호주의 M.L. 스테드먼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The Light Between Oceans’의 한 장면을 불러오게도 한다. 영화의 주 배경인 바다가 있는 풍경의 등대는 ‘야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야누스는 로마신화에서 문의 수호신이다. 문은 생명과 계절의 시초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영어에서 1월, January가 ‘야누스의 달’을 뜻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아이를 잃은 한 모성이 보상으로 타인의 아이를 취하는 죄를 범한다. 끝과 시작의 경계에 있음을 뜻하는 ‘타인의 아이를 훔쳐 기른다’라는 행위의 양면성을 야누스의 등대를 통해 상징하고 있다.이렇듯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어머니가 있다. 자녀를 중심에 놓고 사는 어머니와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중심에 두는 어머니, 친모 같은 계모, 계모 같은 친모 등 종종 사회 일각에서 충격을 주는 신데렐라형 계모의 유형들이 있다. 아이들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 또한 등대가 비추는 측면에 왜곡해 인식하기도 한다. 인은주 시인의 시적 자아는 야누스의 등대처럼 자신의 깊은 심연과 반대쪽의 그늘까지도 비추고 있다. 우리의 눈은 밖을 향해 있다. 외부는 잘 보지만 스스로는 보지 못하기에.그녀가 접는 종이접기의 시간은 시인의 창작공간과 같은 위치임을 짐작하게 한다. 문명화된 “표면이 거짓이란 걸”을 견딜 만큼 강해질 때까지, 우리의 눈이 에덴동산에 충분히 머물도록 내버려 두면 어떨까.“시샘은 발이 빨라서 따라갈 수 없었다”

2024-01-21

고요를 마법처럼

이희정시인 노래하지 않고노래할 것을더 생각하는 빛.눈을 뜨지 않고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빛.사랑하기보다사랑을 간직하며,허물을 묻지 않고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모든 빛과 빛들이반짝이다 지치면,숨기어 편히 쉬게 하는 빛,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아픔보다도 더 아픈,빛을 넘어빛을 닿은단 하나의 빛.―김현승, ‘검은빛’ 전문 (김현승 시전집, 2005.)검정이 색이 아니라고요? 인상주의 선구자였던 르누아르는 검정은 색의 여왕이라고 반격했다. 검정은 모든 색의 부재, 그래서 색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던 때가 있었기에.겨울의 감성은 무채색에 가깝다. 한 해를 마치는 것도, 새해가 시작되는 것도 겨울이 하는 일이다. 겨울 속에는 마침과 시작, 어둠과 환희의 빛이 모두 있으므로. 모든 시가 신과 사랑, 혹은 우울을 다루듯이 검은색 또한 혼돈, 신비, 미지, 죽음, 무의식을 품고 있다.밝음을 나타내기에 검정만큼 역설적인 색이 있을까. 우리의 겨울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색으로 캄캄해서 외려 환하다.빛의 색인 무지개의 색을 모두 합하면 흰색이 나온다. 검정에는 빛이 전혀 없으며 모든 것은 검정으로 끝난다. 부패한 고기가 검게 변하고 식물이나 치아가 썩어 검게 되는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을 때가 ‘블랙아웃(blackout)’이라면, 김현승 시인(1913~1975)의 검은빛은 “모든 빛깔에 지친 통일의 빛”이다.시에서 검은빛은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재생과 자성의 생명력을 내포하는 긍정적 이미지로 미지의 색이다. 시 ‘검은빛’은 시인의 세계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노래하지 않고,/노래할 것을/더 생각하는 빛”, “눈을 뜨지 않고/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빛”으로 묵상함으로써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지닌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도는 언제나 ‘무위’하면서도 하지 않는 일도 없다. 김현승은 꽃마다 색깔을 말할 수도 있고 이름을 물을 수도 있지만 하나로 수렴하여 근원적인 의미를 찾고자 한다. 빛을 넘어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으로.김현승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을 지나며 시대적 현실을 긍정적으로 변환시킨시인이다. 검은빛은 희망으로 찬란하고 넘치도록 낡은 그림자를 밀어 올리는 역할을 한다. 이때 검정은 검은빛으로 치환된다. 무표정한 검은빛에는 마음속에서 활동하지 못하거나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치가 절하된 것들을 일으키려는 시인의 선한 의지가 잠잠히 괴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기 보다/사랑을 간직하며,/허물을 묻지 않고/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으로.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들아 모두 내게 오라는 위안의 주문처럼 시인의 검은빛이 감싸는 그늘이 평온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보이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깊은 내면이 모인 힘이라고, 그림자처럼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매우 넓고 깊은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무채색 마법은 힘이 세다. 꿈틀거리는 새해가 빛을 물고 오고 있다.“붉음보다도 더 붉고 아픔보다도 더 아픈, 빛을 넘어 빛을 닿은 단 하나의 빛”

2024-01-07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쫓아오던 햇빛인데지금 교회당 꼭대기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윤동주, ‘십자가’ 전문(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정음사) 단 한 장 남은 12월이 십자가의 그늘을 지난다. 윤동주(1917~1945)의 시를 읽고 나면 쓸쓸해진다고 했다. 비에 젖은 나무가 젖은 흙으로 뿌리를 내리듯 한 시인이 거느리는 무게감을 그저‘쓸쓸’이라는 말로 견인 할 수 있을까. 그가 떠나고 3주기 되던 해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비로소 세상의 꼭대기 첨탑에 걸리었다. 윤동주가 걸어간 자리가 그렇다.“부끄럽지 않고 슬프고도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냐”고 반문했던 시인 정지용의 서문처럼. 온 국민이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그 첫 자리에 드는 시가‘서시’인 것은 ‘별 헤는 밤’‘자화상’등 그의 시편을 대할 때마다 마치 첫눈을 보는 마음처럼 순결해지는 것과 같음이리라.학기를 마무리하며‘영화가 있는 도서관’에서 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몇몇 학생은 영화의 내용이 지루하고 어렵다고 했다. 상상할 수 없는 시대가 주는 고통과 절망의 낙차 때문일까. 학문과 사상의 자유, 양심과 표현의 자유 등 이미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는 오늘의 위치 때문일까. 그 무엇도 제 것을 가져보지 못한 시대, 주권 없는 그늘이 주는 상실의 폭은 멀고도 깊다. 하지만 대부분 학생은 몰입했고, 감상 후 학생들의 내면 고백은 뭉클한 여진으로 흔들렸다. 이희정 시인 가볍게 산책하려던 마음은 빗나갔다. 이 시를 쓴 때는 1941년 5월 31일이지만“종소리도 들리지 않는데”라는 문장은 11월경에 시를 수정할 때 썼던 얇은 펜으로 삽입되었다. 그 점에 주목해 보자, 시인‘동주’는 왜 이 문장을 삽입했을까. 쇠붙이를 녹여 무기를 만들려고 당시 일제는 쇠붙이란 것들은 죄다 쓸어갔다. 교회 종인들 남을 리가 있겠는가. 당연히“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끔찍한 상황이 되고 만다. 희망이 없는 시대에 그는 종소리 대신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린다고 했다.“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처럼 세상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기에 동주의 고뇌는 깊어갔다.언제나 흔들리는 곳에 십자가는 걸려 있다. 정황을 뒤집어 보면 “왜 흔들리는 곳에 십자가를 거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먼저와야 하지 않을까. 사실 그는 십자가를 남발하지 않았고, 종교 언어도 함부로 쓰지 않았다. 가슴속 울분은 기척도 없이 고결하게 정제되었다. 해서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면 서럽고도 외려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거리는 빙 크로스비의 음성으로 감미롭다. 울려 퍼지는 캐롤과 성탄 트리의 빛으로 더없이 환한, 이런 때 진정으로 빛나게 하는 것은 걸어 둔 십자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아닐는지. 밖을 향한 손쉬운 단죄 대신 안을 들여다보는 깊은 자성을 택한 영혼의 힘은 여기에 있다. 종소리 없이도 더 환하게 울리는 그의 시 앞에서 시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는 한 여학생의 소감 한 줄이 첨탑을 지난다.“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2023-12-10

단정하고 아름다운 배웅

두루미 날아간다지인의 모친상에조의금 오만 원 담아 두루미 날아간다늦가을 슬픈 표정은상가에 다 모이고발인은 내일모레장지는 하늘공원목깃이 새까매진 다저녁 산마루 위울면서 조문을 가는희고 빈 봉투 하나―고영민,‘부의 봉투’(‘가히’ 가을호, 2023)여기 늦가을 슬픈 표정이 상가에 다 모여 있다. 대저 “생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가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 존재의 소멸은 참으로 사람을 유정(有情)하게 한다. 상가에 모인 조문객들의 슬픈 울음이 내 안에서도 일어나는 듯하다. 이 시가 그대로 내 가슴속에 들어와 어쩌면 내가 그 실경(實景) 속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다. 고영민(1968~) 시인의 ‘조의 봉투’가 그리는 풍경이 그렇다.이 시는 한 마리의 두루미로 시작된다. 죽음의 슬픔을 조문의 풍경으로 그려내는데 그 특정한 경험을 두루미가 견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두루미일까? 두루미는 우리나라 휴전선 언저리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다시 러시아에 있는 아무르강으로 떠나는 철새다. 죽음이 거느리는 의미의 본질을 제목인 ‘조의 봉투’가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실제 두루미의 모습은 몸뚱이가 희고 목덜미와 다리는 검고, 날개에도 검은 깃털이 있다. 시에서 “다저녁 산마루”를 “목깃이 새까매진”으로 묘사하며 사실적 이미지를 심상의 풍경으로 병치하고 있다. 여기서 ‘새까매진 목깃’이란 조문 시 매는 검은색 넥타이를 비유한다.이 시에서 ‘빈 봉투’ ‘두루미’는 같은 자격임을 알 수 있다. 제목 ‘조의 봉투’라는 한 대상이 다른 대상 ‘두루미’ ‘화자’라는 대상들과 포개지며 의미론적 자질을 성공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부고장을 받고 “조문을 가는” 두루미라는 존재는 ‘조의 봉투’이고 동시에 조문을 하는 화자 자신을 상징하기에 이 대상들이 주는 효과는 그림처럼 선명하다. 또한 “조의금 오만 원” “발인은 내일모레” “장지는 하늘공원”이 주는 구체성은 시적 은유와 현실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게 한다. 우리가 아는 고영민 시인이 주는 시의 질감이 그렇다. 일상의 진정성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는 방식은 어느 때나 편안히 등을 기댈 수 있게 한다. 이희정 시인 하지만 고영민 시인에게 이 시는 색다른 시편일 수 있겠다. ‘문학의 경계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가’라는 시험지에 응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등단 장르가 아닌 정형시의 형식에 맞추어 쓰였기 때문이다. 정형시를 전문으로 쓰지 않는 시인이 처음으로 썼다고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닐 테지만, 장르의 특성이 주는 작법은 그 방식이 사뭇 다르기도 하기에 시인에게 있어 이 작품은 조금 주의가 필요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혹자는 자유시는 펼쳐서 그리는 회화에 가깝고 정형시는 최대한 깎아내는 조각에 가깝다고도 그 차별성을 설명했다. 한 시인이 오랫동안 체화되었던 방식을 벗어나 다른 방식을 대면했을 때 오는 당혹감이 있었을 법하다. 형식 면에서도 지켜야 하는 글자 수와 제한된 보법이 있기에. 그럼에도, 시인은 출제자의 의도를 탁월한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현대정형시는 예전의 고시조와는 다르며 대부분 감상자가 느끼는 차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화와 서양화가 변주되고 있는 것처럼.요약하면, 시의 장면은 두루미로 시작해서 희고 빈 봉투로 그림처럼 마무리된다. 세상을 떠나는 망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인사가 이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가 택한 두루미는 피상적인 오만 원의 조의금을 담고 있지만, 가없이 단아한 인사로 배웅하고 있다. 그래서 한 생의 무게가 그 슬픔보다 존귀하게 느껴진다.“울면서 조문을 가는 희고 빈 봉투 하나”

2023-11-26

“종점에서 처음으로”

이희정시인 일찌감치 배추를 뽑고더는 밭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알량한 텃밭이다그래도 봄이면 쌈채 모종을 심거나 씨를 뿌리면서무슨 우주 같은 농사꾼인양 했다그리고 가을이 왔다쌈채 농사 끝나고 배추를 심어 구십일도 되기 전벌레한테 모두 먹히기 전일찌감치 뽑아내 입에도 한 잎 집어넣는 일요일 오후가을처럼 하느님이 왔다―고운기, ‘종시(終始)’전문 (고비에서, 2023)움직이지 않는 자는 다치지 않는다. 고운기(1961~)의 시편을 읽으며 상처받은 언어의 모습을 떠올린다. 시인은 최근 시집 ‘고비에서’자신의 투병에 대한 씁쓸한 고백과 담담한 상념을 총 6편의 시집과 같은 제목의 연작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시인은 병(病)중에 겪은 여러 고비에 대해 어떤 의미의 가벼움과 무거움도 가늠하지 않고 있다. 병을 앓고 난 후의 심경이 그렇다. “그 어떤 기대치의 높낮이도 자리할 수 없음은 깨달은 자의 미학적 실천에 해당한다.”는 최현식의 말처럼 한 인간이 생의 고비에서 최고점(Over the hill)을 찍고 난 후라면 시업(詩業)과 생업(生業)의 현장 정서는‘알량한 텃밭’으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그렇다, 시인에게 병을 앓기 전과 후의 대상은 다른 지평으로 놓인다. 그것이 일이든 사물이든 병을 앓기 전에 우주처럼 경작하던 모든 것들이 대수롭지 않은 대상으로 인식된다. 그는 정제된 미의식으로 삶의 의미를 꿰뚫고, 자연의 순환과 경이를 다잡는다.암 투병으로 인해 생과 사를 다투던 시인은 제목을 종시(終始)라고 달았다. 제목을 좇아보면 “종점(終点)이 시점(始点)이 된다. 다시 시점이 종점이 된다”고 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노래했던 시인 윤동주의 산문 종시(終始)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의 1955년 오리지널 디자인을 증보한 시집(2022) 속의 산문 첫 구절이 그렇게 시작된다. 병을 앓고 난 후 다시 시업으로 돌아온 고운기 시인이 종시를 불러온 연유가 여기에 있음이리라.위 시 속의 화자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보다 높이 있는 ‘가을(하느님)’의 일부이며, 그것보다 아래에 있는 ‘배추’의 일부이다. 고운기 시인에게 ‘배추’는 거대한 몸이고 ‘밭’은 경작지이다. “일찌감치 배추를 뽑고 // 더는 밭에 나가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소위 자연의 문법이다. 자연이 크고 단순한 걸음으로 지나갈 때 그동안은 순종하는 농사꾼처럼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으며 “무슨 우주 같은 농사꾼인양 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시를 짓는 일이든 대학에서 학생을 경영하는 일이든, 밭을 경작하는 일이든 매한가지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현실은 그것 너머의 어떤 것 때문에 존재하므로,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는 결과인 현실 속에서 원인인 궁극을 읽는다. 벌레가 와서 배추를 파먹는 지극히 단순한 풍경 속에서 시인은 배추가 사라지는 “우주”를, 그 순간의 ‘초월’을 그려낸다. “가을”은 그런 초월이 성취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 제목에서도 그는 ‘종시’라고 시를 직조할 때부터 그는 저 하느님의 눈으로 저 아래 지상의 사물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다시 하늘이라는 가을로 되돌린다. 지상의 사물들은 대자연의 구현물이므로 같은 속성을 지닌다. 시인은 지상의 사물과 초월적 자연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다.의식이 자신을 비우고 겸허해질 때 화자는 전유(專有)의 위협에서 벗어난다. 화자는 공포가 사라진 순수의 공간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몸의 언어는 모든 현재를 과거로 만든다. 그것은 자신의 몸이 암이란 병에 먹힌 때처럼“쌈채 농사 끝나고 배추를 심어 구십일도 되기 전 // 벌레에게 먹히기 전”“일찌 감치 뽑아 // 내 입에도 한 잎 집어넣는”다고 했다. 그는 평화로운 안식일을 그렇게 맞고 있다. 시인에게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종점, 이미 겪어본 벌레의 역습으로 인한 투병의 경험이다. 몸의 언어는 채워지지 않는 시작점의 언어, 병마 후의 언어이므로 동시에 유토피아의 언어이다. 그렇게 시인에게 가을이 다시 왔다.“내 입에도 한 잎 집어넣는 일요일 오후, 가을처럼 하느님이 왔다”

2023-11-12

체크무늬의 기억법

평생 그 속에 갇혀 있었다잔잔한 떨림으로 번져오던 칸 칸이어지는 직선 무늬를 타고계단들이 자라 올랐고그 직선을 타고 떠나왔다 때로는찌그러지는 체크무늬를 만들고 껴입기도 하면서세상의 빈칸에 파고들곤 했다 따스하기도 하고꽉 찬 칸에서 튕겨 나세상의 끝자리에 매달려 대롱거리기도 하면서젖은 현수막으로 걸려 있기도 했다늑골에 소복한 보푸라기들을 찌르며마분지 같은 칸들이 밀려와 매달렸다 저녁 새들이 물고 오는 칸들이 있었다구름 경전이 칸 가득 쌓이기도 하고다시 그 질긴 교직(交織)에 갇히고풀리기도 하면서헐거덩거리며 왔다 ―김만수,'체크무늬’ 전문 (나의 수많은 근처들·2023) 바야흐로 체크의 계절을 맞는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디자인계의 명언이 있다. 디자인의 기능이 결과물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시각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조형은 점, 선, 면으로 치환할 수 있다. 20세기 추상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이들의 특성을 활용한 조형의 무한한 가능성을 일찍이 주목했다. 여기 1987년 등단 이후 김만수(1955~) 시인의 긴 시력이 내장된 시선집에 담긴 체크 라인을 따라 그가 직조한 삶의 무늬를 들여다보자.체크란 무엇인가? 체크가 주는 속성은 중의적이다. 직선이 주는 단호함과 따스하고 포용적인 질감이 혼재한다. 선과 면이 공존하는 네모난 공간이기에 삶의 무늬는 체크의 칸 속에 갇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하여 시인은 체크 밖에서 체크를 보는 방식으로 “평생 그 속에 갇혀 있었다”며 체크 속 지나온 여정을 기억하고 있다.우리가 “체스판 모양의 격자무늬”를 “체크무늬”라고 부르는데 “체크무늬”에서 “체크(check)”란 서양식 장기(將棋)인 “체스(chess)” 즉 왕(King)을 의미한다. 시인은 그 자신이 직조한 체스판 안에서 왕이 되었을까.체크에 내장된 시인의 시간은 횡과 열이 교직하기에 수직이거나 수평이거나 때로는 역방향이다. “직선 무늬를 타고//계단들이 자라 올랐고” 에서 상승기의 방향을 드러낸다면, “찌그러지는 체크무늬를 만들고 껴입기도 하면서//세상의 빈칸에 파고들곤 했다”는 대목에서는 삶의 한 공간에 자리 잡기 위한 치열한 분투기의 격정을 보여준다. 그렇다, 체크의 이중적 속성은 늘 교차한다. “따스하기도 하고” “세상의 끝자리에 매달려 대롱거리기도 하면서” 온기와 냉기를 벼리고 있다. 사람의 생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늑골에 소복한 보푸라기들을 찌르며” 칸과 칸 사이 “마분지 같은 칸들이 밀려와 매달” 리는 삶의 진경이 체크무늬 공간과 겹치기에. 이희정 시인 어떤 공간은 잊고 있었던 현재의 공간을 통해 과거의 감수성을 불러오는 데 일조한다. 누구나 저마다의 장소애(topophilia)를 갖고 있다. 김만수 시인은 포항이라는 공간에서 나고 자랐다. 장소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가 몸, 가족, 공동체라고 한다면 시인의 체크무늬 속 공간은 포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져 있다.“저녁 새들이 물고 오는 칸”에는 “구름 경전이 가득 쌓이기도 하”듯 체크무늬 칸, 칸에는 과거와 현재의 공간이 만나 갈등하고 회상하는 장면이 그 경험을 은유하고 있다.이처럼 점으로 시작한 한 시인의 역할은 시작과 끝을 ‘선’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선은 우리의 삶의 공간인 면과 맞닿아 있다. 켜켜이 직조된 선은 종내에는 하나의 ‘면’이라는 개인의 삶의 공간을 이룬다. 그 면을 이루고 있는 선은 끝없이 변화하며 무한한 가능으로 가고 있다. 시인이 직조한 체크무늬는 시작점과 마무리 점을 잇는 체크의 선들로 사람과 사람을 이으며 평행하게 이어지고 있다.“그 질긴 교직에 갇히고 풀리기도 하면서 헐거덩기리며”

2023-10-29

“커피 나오셨습니다”

커피 한 잔 주문한다아메리카노 나오셨어요나보다 지체 높으신 커피를 마신다와플도 나오셨습니다공손한 목소리다커피숍의 원목 의자는나이테가 자란다덜 마신 커피를 놓고 품위 있게 일어서면드디어 난 화가가 된다고갱님, 감사합니다―이송희,‘현대인의 화법’전문 (이름의 고고학, 2014) 한글날에 즈음하여 이송희 시인(1976년~)의 의미심장한 시 한 편을 만난다. 제목은‘현대인의 화법’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커피가 나오실 수는 없기에 첫수부터 어법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계속 이렇게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 표현도 맞는 표현으로 용인될지 모른다. 말을 바르게 만들려면 사회 분위기와 문화를 바꿔야 한다. 언어를 탓하지 말고 우리가 사는 모습과 환경을 돌아보는 게 먼저다.”라고‘표준국어대사전 바로잡기’에 나선 박일환 시인의 인터뷰 내용(2023년10월6일자 중앙일보, 오피니언)이 겹쳐오는 순간이다.이송희 시인이 직접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2003년 등단 이후, 여전히 시조를 쓰고 있는 젊은 시인이다. 엄밀히 말하면 현대시조,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현재의 언어로 쓴다. 시조를 고지식한 편견에 가두는 독자들의 인식을 깨고 있는 실험적인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변화된 언어’란 무엇일까. 정격의 양식 안에서 새 시대의 담론을 담아내는 것이 정형시의 숙명이라면 이 시가 견지하는 것은 현대인의 화법이다. 시의 첫 구절이 그리는 풍경은 다수의 현대인의 익숙한 일상을 보여준다. 어쩌면 아침밥은 안 먹어도 커피는 마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다. 가볍게 주문한 커피는 등장부터 존엄하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어요” 눈치챘을 테지만 이 시는 어법에 맞지 않는 한국어 높임말 사용에 대해 풍자하고 있다. “나보다 지체 높으신 커피를 마신다” 커피의 지체만 높아진 것은 아니다. “와플도 나오셨습니다” 거기다 “공손한 목소리다”이송희 시인의 시대 비판적 풍자는 비단 잘못된 언어 사용만이 아니다. 물신주의가 만연한 현 세태 속 돈의 위력을 풍자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풍자의 날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명철 평론가의 표현처럼 “자기풍자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해설을 요즘 신조어인 ‘복붙임(복사해서 붙이기)’을 해보면, “돈이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사회, 돈으로 교환되는 대상은 이제 돈의 가치가 얹어지면서 돈이 활성(活性)을 띤 위력을 지닌 존경의 대상으로 둔갑한다. 심지어 “드디어 난 화가가 된다. 고갱님, 감사합니다.”처럼 “그 둔갑의 대상은 예술의 가치로 치환되는데, 즉 ‘고객(客)’+‘님’= ‘고갱(P.Gauguin, 19세기 말 프랑스 화가)’+ ‘님’으로 자음접변 음운 현상을 통해 그 실체가 보란 듯이 전도되고 있다.”한글날을 앞두고 우리 학교 학생들은 한복을 입고 등교했다. 글로벌학교의 특성상 교내에서는 영어를 사용한다. 영어와 한국어 중 어떤 언어가 편하냐는 질문에 한 학생의 말 또한 이 시만큼이나 풍자적이다. “저는 0.5개 국어를 쓰는 것 같아요, 한국어도 영어도 온전치 못한 것 같아요.” 순간 이 학생의 말이 현시대의 전체를 상징하는 부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희정 시인 사실 그것 외에 언어의 왜곡은 더 심각하다. 심지어 신조어 사전이 생길 만큼 젊은 세대들의 줄임말이나 특정한 조어법을 통한 언어가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대화 중에 여과 없이 흘러나오는 접두어 ‘개’는 맛있을 뿐만 아니라 “개 이쁨” 등 이쁘기까지 하다니. 불과 한 세대만 흘러도 어쩌면 사라지거나 변해 버린 언어로 인해 세종의‘나랏말쌈은 듕국’이 아닌 ‘지금과 달라’ 그 어원을 밝히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이송희 시인이 말하는 ‘변화된 언어’란 바로 이러한 현 세태의 안타까움을 외면하지 않고 적실히 담아낸 지금 이 자리의 뼈 아픈 사회적 언어이다. 서정시의 슬하에 풍자의 이면이 짙다.“커피숍의 원목 의자는 나이테가 자란다”

2023-10-15

희망을 보는 방식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단단한 몸통 위에,사람아, 사람아 단풍 든다.아아, 노랗게 단풍 든다. ―기형도, ‘병(病)’ 전문 (기형도 전집, 문학과 지성사)우리가 기억하는 기형도(1960~1989)의 시에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이른바 ‘신화’가 되었던 기형도의 일화는 아프다. 시인의 연보에는 “1989년 3월 7일 새벽,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음”이라고 그의 마지막을 요약하고 있다.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에 입각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단언한 김현의 언급을 시작으로, 그의 시를 새롭게 읽기 시작하려는 시도는 그가 떠난 지 30년이 지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그의 시가 추구했던 아름다움의 목표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앎’에서 비롯한다.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과정이 따른다. 이는 단순히 자기 내면을 고백하는 것과 다르다. 이것은 대상화의 과정에서 자신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는 전략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사유하는 인식의 행위에 성공할 수 있다. 소개하는 시 병(病)은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내 얼굴이 /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와 같은 표현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이를 뒤따르는 화자의 언술이다. “반 토막 영혼”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 “단단한 몸통”이라는 시구처럼 기형도의 시적 자아는 늙은 나무처럼 시간이 오래되어 그 의미가 퇴색된 이미지로 자신을 비하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생명력이나 자연의 순환 원리를 드러내는 것에 반해, 기형도의 시에 제시된 나무는 주로 썩은 나무나 버려진 나무처럼 생명력이 다한 형태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마치 시의 “주어를 잃고 헤매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처럼 주어를 잃었다는 것은 행동의 주체인 스스로를 상실했다는 것. 그리고 가지가 잘렸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움직임까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늙은 나무”는 단순히 자아 상실뿐만 아니라 무능하게 버려진 시체를 떠올리게 한다.시인의 어둡고 부정적인 자아 인식과 세계 인식의 태도가 읽는 이로 하여금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를 엿볼 때와 같은 놀라움을 준다. 우리는 그림자를 품고 살지만, 그것을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아직 젊은 시인의 태도가 너무나도 치열하고 진지하기에 마치 고뇌하는 젊은이의 대명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고뇌의 힘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 시인의 시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가슴도 까맣게 멍이 드는 것 같다. 이희정 시인 생전의 시인이 애독했던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에서 “모든 시대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동경한다. 혼란스러운 현재에 대한 절망과 우울함이 심각하면 할수록 그 동경은 더욱 강렬해진다.”고 했다. 우리는 기형도를 죽음을 노래한 부정적인 시인이라기보다는 현대의 부조리한 삶, 특히 구조적 모순이 심화 됐던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실험적인 시인이었다고 추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형도의 시는 신화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기계문명이 발전할수록 타인에게 무관심한 상태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병病’은 소통이 단절된 채 쓸쓸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결핍과 상처의 초상이다. 사회 관계망 속에서 존엄성을 찾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소외일 것이다.기형도 시인은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이렇게 적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보다 아름다운 삶을 향하여, 시인은 가을 밖 벤치에 앉아 희망을 보는 방식으로 우리를 부른다.“사람아, 사람아 단풍 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 든다”

2023-09-24

도마도마, 도마뱀

뜰을 가로지르는데 뱀 조심 뱀 조심뱀 조심 팻말이 눈에 쏙 들어와서도마뱀 도마 위에 뱀, 그런 생각했어요.투명 플라스틱 컵 들고 들어온 사서선생님여기 이것 봐요 문 틈으로 숨어들어잽싸게 잡아 왔어요, 참 귀엽지 않나요?작은 도마뱀 한 마리 몸 구부리고 엎드려컵 바닥에서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어요.가녀린 갈색 꼬리가 길어서 애처로워요.빨리 내보내 주세요, 풀밭으로 어서요.양쪽으로 볼록거리며 할닥거리는 심장도마뱀 객주문학관 도마도마 뱀 뱀 뱀― 이정환, ‘객주문학관 도마뱀’ 전문 (가히 가을호, 2023)도마뱀이란 캐릭터는 공룡을 닮은 신비롭고 귀여운 외모 덕에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동물이다. 우리가 이 행성에 살기 전의 세계가 완전히 다른 종의 것이었다면 그것은 거대한 공룡시대일 것이다. 하지만 공룡들의 이름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공룡의 이름은 우리가 화석을 통해 알게 된 정보로 인간이 지었다.말 그대로 이름을 만들어 낸 수 천 년의 역사에 인간이 가진 호기심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도마뱀이 파충류지만, 모든 파충류가 도마뱀은 아니다. 공룡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다이너소어(Dinosaur)도 그리스어로 ‘무섭다(δεινό)’는 뜻의 데이노와 ‘도마뱀(σαυρος)’을 뜻하는 사브로스에서 유래되었다면 우리말 도마뱀은 어떤 조어법으로 탄생했는지 궁금해진다.여기 이정환 시인(1954~)이 작명한 도마뱀을 어린이들의 눈으로 탐색해 보자. 화자가 말하는 공간 객주문학관은 비교적 사람의 손때가 덜 묻어나는 청송에 있다. 이 일대는 선캄브리아시대 산악지형과 중생대 퇴적암과 공룡발자국지형 등 우리가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천혜의 자연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이곳에서 시인의 “눈에 쏙 들어 온” 것은 뱀 조심 팻말이다. 아이들을 기쁘게 할 기대감에 사서 선생님은 “잽싸게 잡아” 온 도마뱀을 투명 컵에 담아 온다. 관찰하던 아이들은 웬일인지 빨리 내보내 달라고 재촉한다. 왜 그랬을까? 물릴까 봐 무서워서일까? 아이들은 투명 컵을 통해 들여다본 도마뱀의 모습에 마음이 급했다. 이희정 시인 “몸 구부리고 엎드려” “컵 바닥에서 / 할딱할딱 / 숨을 몰아 쉬”고 있는 모습에서 도마뱀이 죽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평생을 초등 교육현장에서 어린이들과 보낸 시인은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선한 동심을 잘 읽고 있다. 시조가 가진 언어의 율동성을 다정다감한 대화체의 화법으로 “잽싸게” “할딱할딱” “볼록거리며” 등의 소리와 동작을 표현하는 말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오래전 작은 아이의 도마뱀 일화가 떠오른다. 파충류에 흥미를 보이던 아이는 도마뱀 세 마리를 집에서 키웠다. 도마뱀의 집을 꾸며 주고 매일 들여다보며 먹이를 주곤 했는데 어느 날 한 마리가 죽어버렸다. 아이는 슬픔에 빠져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았는데 무심결에 웃음을 보인 엄마에게 식탁을 두드리며 분노했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떻게 도마가 죽었는데 웃을 수 있냐”고 항변했다. 아이의 슬픈 감정을 온전히 이해 하지 못했지만, 생명을 돌보는 갸륵한 심성에 감탄했다. 이후 아이는 남은 두 마리를 숲으로 풀어주었고, 더 이상 도마뱀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도마뱀이 가장 행복한 곳은 숲이란 것을 이해하고 갖고 싶은 자신의 욕심을 놓을 줄도 알았다.찰나의 모든 순간은 예술이 된다. 그림이든 시든 무엇으로든 표현할 수 있다. 긴 여름 전시회장에서 본 카라바조의 그림 ‘도마뱀에 물린 소년’ 또한 그랬다. 얼굴표정으로 혹은 손가락으로 순간의 감정 서사를 그리듯. 이정환 시인이 운율로 감았다 풀어내는 동시조, 도마뱀 또한 재치 있게 작명한 한 폭의 기특한 풍경이다.저만치 가을이 오고 있다, 객주 문학관 풀숲에선 오늘도 “도마도마, 뱀 뱀 뱀”

2023-09-10

마침내 초대받은 연주회

우주정거장 멀리서 반짝이는 위성처럼홀로 떨고 있는 무대 위 작은 의자둔부를 껴안는 즉시 타오를 듯 팽팽하다공기를 정비하듯 잔기침들 다듬는 사이독주의 예열이듯 소름 돋는 다리 사이마지막 현을 조이는 긴 고독의 전희처럼드디어 탈주하는 무반주 활의 광휘전율을 견디느라 다리가 다 녹아나도의자는 커튼콜이 없다 열없이 사라질 뿐―정수자,‘무반주첼로 의자’전문 (파도의 일과, 2021)정수자 시인이 선곡한 무반주 첼로 연주곡을 감상해 보려고 한다. 실은 시인이 주목한 대상은 첼로도 연주자도 아닌 첼로 연주자가 앉은 의자이다. 말하자면 철저히 의자의 입장으로 듣는 첼로 연주라고 해야 할 것 같다.지금은 상상조차 힘든 일이지만 바흐 시대에는 첼로가 매우 하찮은 취급을 받았다. 독주곡을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악기로 인정받지 못했다. 수 세기 동안 이 작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일반적으로는 독주 작품이 아니라 연습용 음악 정도로 간주해 왔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첼리스트가 앉는 의자에 입각하여 “우주정거장 멀리서 반짝이는 위성”이라고 클래식의 바운더리에서 외따로 떨구어 놓고 있다. “홀로 떨고 있는 무대 위 작은”이라고 말이다. 음악은 영혼을 지탱하는 한 가지 방식이 될 수 있다. 정수자 시인이 그려내는 첼로 연주는 마치 클래식 음악의 세계가 초대받지 못한 파티 같은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느껴진다.기실 이 작품은 저명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연주한 바흐의 ‘첼로 모음곡 2번 d 단조’의 연주 영상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즉석 연주회의 영상 속 로스트로포비치는 부서질 것 같은 낡은 의자에 앉아 연주한다. 그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한 후 모든 감정을 담은 그의 얼굴에는 아낌없이 쏟아부은 연주자의 온 영혼이 담겨있다.하여 시인은 바흐의 첼로 연주곡에 감상자인 자신을 곡에 삽입하여 마치 의자에 체감되는 첼로의 전율하는 현을 의자 자신이 온몸으로 감내하는 방식으로 연주한다. 의자는 “둔부를 껴안는 즉시 타오를 듯 팽팽”하다. 연주장의 “공기 중에” 조심스럽게 퍼지는 현을 “정비하듯”“잔기침들 다듬으며” 연주 전 한껏 긴장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주가 무르익을수록 의자의 다리에“소름”이 돋는다. 이제 의자는 첼로 현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다. 고조된“마지막 현을 조이는” “긴 고독의 전희처럼” 장벽도 연주도 탈주를 감행한다. 마침내 “탈주하는 무반주 활의 광휘”를 작은 의자는 “다리가 다 녹아나도”견디며 그 경이로운 현의 전율을 체득한다. 이희정시인 우리가 정수자 시인의 시를 현대시조나 정형시라고 부를 때 발견하게 되는 언어의 형상은 무반주 첼로의 현으로 대입해도 무방할 것이다. 가슴을 손끝으로 누르고 떨리는 혀끝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린 뒤, 가지런히 고르는 고독한 마음의 현이다.마찬가지로 시인이 매번 마음이 약동하는 순간이 아니라, 감정이 잦아드는 마지막 순간에 대해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연주의 절정에서 고조되는 감동의 격정이 아닌 감정이 고요해지는 순간에 대한 이 명연주는 혼이고 영혼이다. 그렇기에 시인이 연주한 의자는 첼로의 음역만큼 깊이 파고든다. 어떤 연주든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이 바로 그 연주의 의미가 된다. 이 숭고한 의자의 연주는 삶을 다시 시작하는 순간, 완전한 고요와 아름다움의 순간이 될 것이기에.“드디어 탈주하는 무반주 활의 광휘, 의자는 커튼콜이 없다 열 없이 사라질 뿐”

2023-08-27

사랑, 그 지독한 멜로

이희정 시인 그가 오른손 검지로 내 왼눈을 찔렀다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그의 손가락이 후벼 파는 내 혈관의 피비린내를 음미했다어쩌다 통증 같은 것이 올라오면한밤중에 사 오던 감기약이나목도리 둘러주던 손길을 떠올리기도 했다그러다 어떤 순간엔 눈꺼풀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그의 손가락이 내 눈에서 빠져나갔을 때내 눈을 잊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나는 그의 손끝이 지나가는 길을 잊지 않으려고내 몸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잊기로 했다나는 눈이 전부인 물고기였다그가 손가락을 빼고물 없는 수조에 나를 눕혀주었을 때나는 비로소 숨쉬기를 기억해냈다그가 왜 내 눈을 찔렀는지나는 왜 물고기가 되었는지알 수 없었으므로나는 오른눈을 내 손으로 찔러보기로 했다―최라라, ‘사랑’ 전문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 2017)최라라 시인이 그려내는 ‘사랑’은 독특하고 강렬하다. 제목과 달리 이 시는 그저 달콤쌉쌀한 멜로가 아님을 첫 행부터 시종일관 보여주고 있다. 장르적 관점에서 보자면 서정적 스릴러라고 명명하고 싶을 만큼 기이하고 매혹적이다.“형식은 이데올로기의 벡터다” 에이젠시테인이 남겼던 이 말은 다른 예술처럼 시에서도 형식의 중요성을 그대로 요약한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형식의 자장 속에서 위축되지 않은 잔혹한 그로테스크(grotesque)의 미학을 유감없이 드러낸다.이 시에서 사건을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감각이다. 눈은 보는 대신 기억하고 꿈꾸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성혁의 말처럼 시인에게 사랑은 즉각적으로 고통을 주는 폭력의 의미가 아니라 ‘그’의 존재를 삶의 속살에 깊이 새기는 폭력, 그리하여 운명이 새겨지는 폭력이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새기는 일이기에 상처가 나기 마련인 사랑의 격렬함을 의미한다. 고통을 회피한다면 사랑의 극한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시인이 “그의 손가락이 후벼파는 내 혈관의 피비린내를 음미”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폭력의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그’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 속으로 격렬히 침입해 들어올 때 일어나는 피비린내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다. 이는 아마도 ‘그’에 대한 따스한 추억들, “한밤중에 사 오던 감기약이나/ 목도리를 둘러주던 손길”과 같은 추억들을 떠올리게 된다.시인이 기억하는 사랑은 소중하다. “나는 그의 손끝이 지나가는 길을 잊지 않으려고 / 내 몸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잊기로 했”던 것, 그리하여 그녀는 “눈이 전부인 물고기”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比目)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던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시인은 “그가 왜 내 눈을 찔렀는지/ 나는 왜 물고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시인은 자신의 “오른눈을 내 손으로 찔러 보”는 일을 자행한다. 자신의 눈을 찔러줄 ‘그’는 없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신의 다른 쪽 눈을 찔러봄으로써 사랑의 고통을 체험하면서 자신 안에 깊이 존재하는 그를 이해하고 자신이 물고기가 된 연유를 알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눈을 찔러보는 고통스러운 실험이 시인이 시를 쓰는 바탕이 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떠나간 ‘그’를 기억하며 자신의 눈을 찔러 눈알이 된 지느러미만 남은 물고기가 시인의 숙명임을 견지하고 있다.사랑의 방식이 서로 달라서 상처인 줄 모르고 내 방식을 고집하는 사랑이라고 말한 친구의 독해처럼 이 시는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다. 가학적인 사랑의 상처가 멈춰 선 자리에서 최라라 시인은 다소 모호하게 구두점을 찍으며, 고백의 바깥으로 배턴을 넘긴다. “그의 손가락이 내 몸을 빠져 나갔을 때”의 서술이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의 대담함이나 우울한 판타지의 대리 만족도 아니다. 이것은 헤어짐을 삶의 본질로 이해하게 되는 그에 대해 기억하는 그녀의 사랑 이야기다. 그가 떠나고, 환상이 끝나고, 꿈이 끝나야 비로소 사랑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이 시에서의 사랑이 처한 위치다.“그의 손끝이 지나간 길을 잊지 않으려고 내 몸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잊기로 했다”

2023-08-13

발이 가고 싶은 곳으로

피곤한 발을 베개에 올리고 누웠다가문득 발이 베개를 베고 누웠다고 생각해 본다가고 싶은 곳에는 경쾌하게 앞서가던 발가기 싫은 곳에는 천근만근 끌려오던 발오늘 발이 피곤한 것은 아무래도가기 싫은 곳에 끌려갔다 돌아온 탓이리라오래된 발톱 무좀도가고 싶은 곳에 못 데려갔거나가기 싫은 곳에 억지로 끌고 다닌 탓이 크리라 생각한다발에게 베개를 받쳐주고 누워머리를 발이라고 생각하며 진짜 발을 바라본다열 발가락 하나하나 꼽으며 가고 싶은 곳을 헤아려본다한 키의 간격을 두고 동거하면서도그사이 어디 있는 마음의 발을 자주 동동거리는 바람에마음의 신발을 찾지 못해 허둥대던 날들을 생각해본다더 늦지 않게 마음먹어 본다가고 싶은 곳에 앞장서 가는 발을 따라나서리라머물고 싶은 곳에 발과 함께 머물리라 마음먹어 본다발이 머리가 되고 머리가 발이 되어 생각해 본다머리가 발 같고 머리같이 살아갈 날을 생각해 본다―안상학,‘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걷는사람, 2016)’에서‘발에게 베개를’전문우리의 제한된 삶, 그 불가역의 궤적을 발에 의탁해 형상화한 시들이 꽤 많다. 발만큼 시로 쓰는 인생론에 자주 쓰이는 클리셰도 없을 것이다. 안상학(1962~) 시인의 ‘발에게 베개를’은 제목부터 해학적이다. 해학이란 무엇인가, 예술 체험의 핵심인 즐거움과 깨우침을 주는 것이다. 시의 소재는 발이다. 그런데도 이 시는 발이 머리로 읽힌다. 이유가 무엇일까. 한 치를 나아가기 위해 두 발로 바닥을 디뎌야 하는 발은 머리와 달리 지상의 바닥과 맞닿은 우리의 몸 가장 아래쪽에 있다. 시인이 가진 발에 대한 연민에는 보이는 현상보다 더 복잡다단한 미안함이 실려있다. 대개의 사람들이 시에 대하여 갖고 있는 낭만적인 정조와는 사뭇 다르게 날카로운 사실적 세계의 인식을 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희정 시인 “가고 싶은 곳에는 경쾌하게” “가기 싫은 곳에는 천근만근”이라는 표현처럼 하기 싫은 것들을 견디는 것. 하지만 발 스스로가 이끄는 삶과 끌려가는 삶은 그 무게가 다를 것이다. 발이 향하는 곳을 표현한 이 두 구절은 ‘경쾌’와 ‘천근만근’이라는 대비적인 시어로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심상을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발은 앞서가는 발과 끌려가는 발로 병치된다. 우리의 삶처럼.이 시의 클라이맥스는 “발에게 베개를 받쳐”주는 데에 있다. 마음의 발을 동동거리는 바람에” “마음의 신발을 찾지 못해 허둥대던”날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화자는 조곤조곤 발을 위무하듯 “열 발가락 하나하나 꼽으며 가고 싶은 곳을 헤아려 본다”정작 그가 가고픈 곳은 어디일까? 이 물음 앞에 우리는 그가 가자고 하는 곳은 정의와 평등 그리고 개인의 해방이 이룩된 곳일 거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시를 쓰는 까닭은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우리의 발이 견뎌내는 곳은 인간의 자유가 이룩된 세상이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비록 그런 삶을 꿈꾸며 사는 일이 힘들지라도 “더 늦지 않게” “발과 함께 머물고 싶은 곳을 머물리라”다짐한다. 때때로 나 자신이 자유할 수 있는 소유권은 얼마나 될까를 헤아려 본다. 대부분 직장이 가장 많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여분으로 각자의 역할에 맞게 할당된 크게 작게 소속된 장소에서 소유한 지분을 제외하면 오롯이 나만의 몫은 그닥 많지 않다. 그럴 때마다 안상학 시인을 따라 발에 베개를 받쳐 놓고 소리 내어 읊조려 보는 것이다.“가고 싶은 곳에 앞장 서 가는 발을 따라 나서리라”

2023-07-30

풀벌레가 가르쳐 준 우정

이희정 시인 풀벌레들 소리만으로 세상 울린다그 울림 속에 내가 서 있다울음소리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나는 지금 득음하고 싶은 것이다전 생애로 절명하듯 울어대는 벌레 소리들언제 내 속에 들어왔는지 나는 모른다네가 내 지음(知音)이다네 소리가 나를 부린 지 오래되었다시의 판소리여이제 온전히 소리판이니누구든 듣고 가라소리를 듣듯이 울음도 그렇게 듣는 것이다저 벌레 소리 받아 적으면 반성문 될까부르고 싶은 절창의 한 소절 될까소절 소절 내 속에서 울리고 있다모든 울리는 것들은 여운을 남긴다―천양희,‘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 지성사, 2017)’ 중 ‘여운’ 전문칠월의 풀숲에는 여름이 부푸는 소리 한창이다. 이른 아침 천양희 시인(1942~)의 시집 한 권을 에코백에 담아 들고 나선 산책길, 이슬 젖은 흙을 밟으며 걷노라니 미성(美聲)의 안개가 나란히 보폭을 맞추며 따라온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쳐다보다 접힌 모서리를 펼쳐보니 제목이 ‘여운’이다. 온전히 초록과 풀벌레 소리만으로 가득한 이곳에 여운 아닌 것이 있을까. 세상의 어지러운 소음이 거세된 울울창창한 녹음 안에 시인은 있다. 시인은 풀벌레 소리가 세상을 울린다고 했다. 울린다는 게 뭘까. 울림 소리가 숲을 흔들고 마음을 흔드니 그 울림은 세상을 흔드는 소리지 흐느끼는 울음은 아닌가 보다. 시인은 “울음소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득음을 하고 싶은” 거라고 속내를 털어낸다. 부풀 대로 부푼 여름이 마침내 터지는 소리, 득음(得音)이다. 천양희 시인은 벌레를 빌어 시인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짜 시인은 언제나 타자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만 진짜 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때도 타자와 함께 말한다”는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시인은 “네 소리가 나를 부린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한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운명을 거는 것과 같다고, 운명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토록 고통스러운 혼신을 바칠 수 있으며, 돈도 밥도 안 되는 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릴케의 말을 디딤돌 삼아 시인이 되었다는 그녀의 준엄한 고백을 듣는다.“전 생애로 절명하듯 울어대는 벌레 소리들”은 기실 시인 자신과 포개어져 있다. “언제 내 속에 들어 왔는지”모를 시가 그녀를 끌고 가고, 그런 시가 없었더라면 따라가는 그녀도 없었을 것이기에 “네가 내 지음(知音)이다”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의 고사에서 비롯된 지음(知音)은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뜻한다.세상에 진정으로 나를 알아주는 이가 몇이나 될까. 시인은 “누구든 듣고 가라”고 권한다. “소리를 그렇게 듣듯 울음도 그렇게 듣는 것이라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고독에 바치는 것이 시라는 것은 요즘엔 쉬이 공감되지 않는 아픔일 수도 있다. 복잡한 곳을 기웃거리는 일상에 내쳐지는 일이 다반사이고 보면 또 그만큼 가슴을 조여올 때도 없다. 고독을 잃어버리면 시의 고갈이 오기에 고독을 잃어버릴 때가 시인에게는 가장 위험한 때다. 요즘 시인들은 고독을 잃어버리고 시에 운명을 걸지도 순정을 바치지도 않으니까 절창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 한 어느 평론가의 쓴소리에 몇 번이나 속으로 “저 벌레 소리 받아 적으면 반성문이 될까”라며 반성문을 쓰는 시인.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진짜 힘은 자신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누구든 “부르고 싶은 절창 한 소절”이 있기 마련이다. “소절 소절 내 속에서 울리는 소리”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시인이 시 쓰기의 어려움을 고독 속에서 극복한 것처럼 고독의 터널 속에 잠시나마 거해 보자. 사람을 해치지 않는 유일한 것, 아름다움이 자란다면 풀잎에서부터일 것이다. 우정은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 스며드는 풀벌레 소리와 같다. 음원이 동작을 멈추어도 여음으로 인해 혹은 반사로 인해 그 음은 더욱 진향으로 울릴 것이기에.지음(知音)을 듣는 시간, “모든 울리는 것들은 여운을 남긴다.”

2023-07-16

햄버거와 젓가락

사료와 음식의 차이는무엇일까.먹이는 것과 먹는 것 혹은만들어져 있는 것과 자신이 만드는 것.사람은제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가축은싫든 좋든 이미 배합된 재료의 음식만을먹어야 한다.김치와 두부와 멸치와 장조림과….한 상 가득 차려놓고이것저것 골라 자신이 만들어 먹는 음식.그러나 나는 지금햄과 치즈와 토막난 토마토와 빵과 방부제가 일률적으로 배합된아메리카의 사료를 먹고 있다.재료를 넣고 뺄 수도,젓가락을 댈 수도,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맨손으로 한 입 덥썩 물어야 하는 저음식의 독재.자본의 길들이기.자유는 아득한 기억의 입맛으로만남아 있을 뿐이다.-오세영, ‘햄버거를 먹으며’(정효구, 시 읽는 기쁨, 문지사)‘인간은 그가 무엇을 먹는가가 결정한다’ 는 독일의 격언이 있다. 학자이자 시인인 오세영의 오래된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이 작품은 시인의 ‘아메리카 시편(1997)’에 수록된 많은 작품 중 단연 독특한 시편이다. 작품의 미학적 수준을 따지자면 더 나은 작품이 있겠지만 미국 주도의 현대 자본주의 문명사회가 지닌 모순을 예리하게 들춰내고 있기에 한 음식을 통해 인간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불러내 봄 직하다.오세영 시인은 1990년대 중반,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캠퍼스 동아시아학과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한 경험이 있다. 그 무렵의 체험이 이 시를 쓰게 했다. 그렇다면 ‘사료와 음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인은 첫 행부터 대뜸 충격적인 질문을 한다. 우리는 사료는 가축의 먹이이고 음식은 사람의 먹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료는 단순한 먹이이고 음식은 먹이 이상의 문화적 존재라고 하면 어떨까.시인이 이와 같은 저돌적인 질문을 던진 후, 스스로 음식과 사료의 차이점에 대해 말한 다음 행으로 눈길을 옮겨보자. “사람은 // 제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 가축은 싫든 좋든 이미 배합된 재료의 음식만을 // 먹어야 한다.” 라고 사람과 가축을, 음식과 사료를 대비시킨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과 음식을, 가축과 사료를 서로 짝지어 놓고 있다. 이러한 대비 구조 속에는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행위라면, 가축이 사료를 먹는 것은 수동적이고 획일적이고 몰취향적인 행위라고 말하고 싶은 속뜻이 들어 있다. 이희정 시인 시인은 여기서 한 행 더 나아가 한국의 밥상과 미국의 햄버거 덩이를 대비시키고 있다. “재료를 넣고 뺄 수도,// 젓가락을 댈 수도, //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 맨손으로 한 입 덥썩 물어야 하는 저// 음식의 독재,” 시인은 스스로 “아메리카의 사료”라고 부른 햄버거 덩이 앞에서 젓가락의 문화적 행위가 그리웠던 것, 자신의 문화적 욕구가 무참히 부서지는 심정에 빠졌던 것으로 짐작된다.하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햄버거를 사랑한다. 아니, 어쩌면 햄버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햄버거를 사랑하는 것처럼 길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햄버거가 아니더라도 시인 오세영의 방식을 빌리자면 젓가락은 “아득한 기억”의 한 장면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햄버거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사회의 본질을 알려주는 하나의 상징체다. 미국인이 지닌 총기만큼이나 위력적이다. 여기서 앞선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떠올리며 그 이면을 읽는 방식으로 오세영 시인이 언급한 ‘젓가락’에 주목해 본다.젓가락은 하나가 아닌 한 벌로 쓸 수 있는 도구다. 흥미롭게도 중국 뱃사람들이 빠른 항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젓가락을 콰이즈라고 불렀을 때, 그들은 아마 ‘콰이(快乐)’라는 말이 ‘르(子)’와 합쳐져서 ‘행복’을 의미하는 ‘콰이르’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차려낸 밥상에 얹힌 마르지 않는 찬들의 촉촉한 정성처럼 젓가락은 하나가 아닌 한 벌로 이루는 공손하고 상서롭게 존재하는 문화적 도구임을.

2023-07-02

오래된 처음처럼 울었다

저 나정 우물가 빛을 불러온 날 이후포박된 어둠 속의 아름다운 목청들은천리 밖 꿈결에까지 말굽 치며 울었을까돌아오지 않는 것은 밤하늘로 날아가수억 광년 전에 죽은 빛을 품고 있었을까무성한 노여움들은 뗏장으로 덮이고혼령 같은 초승달 선문을 열고 나와어둠을 품고 빛나는 푸른 알의 눈물들을은장도 벼린 칼날로 곱게 깎아 놓는다―박권숙, ‘홀씨들의 먼 길(고요아침, 2005)’에서 ‘천마총·5’ 전문.신라 향가에는 “천지 귀신을 감동케 하는 힘”이 있다. 이 천지를 움직이는 서정의 힘을 박권숙 시인의 시조를 숙독하며 만난다. 시조의 발생 연원을 따질 때 한시, 고려 속요와 더불어 10구체 향가를 들고 있는 점에 주목해 감상해 보자. 노래로 불렸으니 그 곡을 알지 못하는 오늘이지만 향가의 가장 정교한 형태인 10구체 향가 사뇌가(詞腦歌) 중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비는 노래인 ‘제망매가(祭亡妹歌)’로 그 감응을 유추한다. “그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홀연히 바람이 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과장이 아니었음을 시인의 작품을 통해 실감할 수 있으리라.박권숙(1962~2021) 시인의 작품집에는 연작 시조가 많다. 연작작품만 모아도 100편에 이른다. 특히 ‘아버지의 밭, 천마총, 청사포’는 15편씩으로 방대하고 유장하다. 현실적 대상에 대한 주관적 체험을 운율에 담아내는 서정 양식에서, 한 편의 작품만으로는 그 내적 체험을 다 읽어낼 수 없는 경우에 집중적으로 그 심층을 파헤쳐 보고자 하는 노력이 연작으로 표현된다. 천마총 연작은 죽음과 구원이라는 테마로 건너온 천년의 신화와 맞닥뜨린 순간이라고, 아니 찰나와 영원, 삶과 죽음, 어둠과 빛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초월의 공간에서 느끼는 전율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단 한 편의 시조로만 표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던 시인을 우리는 기억한다.시인은 “포박된 어둠 속”에서도 “아름다운 목청”을 잃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것은 밤하늘로 날아가” “수억 광년 전에 죽은 빛을 품고” 있다. 하여 시인은 의연하게도 “침엽의 정신들“로 그 푸른 가시를 세워 우리를 슬픔에서 몰아내려 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연속되더라도 이를 초연하게 극복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듯 “빛나는 푸른 알의 눈물들”을 “은장도 벼린 칼날”로 곱게 깎아 내고 있다. 오늘도 저 청고한 하늘 위에서 견고한 서정의 광휘를 뿜어내며. 이희정 시인 1991년 등단 시기부터 죽음과 삶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던 당시 시인이 그려낸 고독한 자화상, 첫 시집 ‘겨울 묵시록’부터 마지막 시집 ‘뜨거운 묘비’까지 투병과 창작을 병행하며 붙들어낸 치열한 삶과의 분투였음을 감히 짐작한다. “난삽하지 않고 격정적이고 또 명징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박권숙 시인을 생각할 때마다 척박한 90년대의 시조 들판을 객토하기 위해 태어난 시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라고 이우걸 시인은 추억했다. 더하여 이지엽 시인의 바람처럼 가없이 푸르른 초록 “침엽의 정신”이 “깨끗한 눈물”로 빛나는 절정이 후대에까지 이어지리란 염원을 뜨겁게 품어본다.삶과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 여전히 모를 일이다. 다만 선인들의 삶에 비추어 볼 따름이다. 올해로 천마총 발굴 50년을 맞은 경주 대릉원의 밤은 찬란하다. 저 먼 신라인들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성한 동물로 여긴 천마(天馬)가 국립경주박물관 한복판에서 우리를 맞고 있다. 예술과 뉴미디어의 협업으로 황남대총 두 봉우리에 신라의 혼이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며 마침내 하늘로 비상하는 하얀 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국보 천마도가 다시 수장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전시회장 ‘장니(障泥 : 말다래)’에 부기 된 감상문과 더불어 시인의 노래 한 줄이 심금을 울린다.“방금 막 화공이 붓을 놓은 듯, 천리 밖 꿈결에까지 말굽 치며 울었을까”

2023-06-18

산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자란다

이희정시인 산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자란다.그 자줏빛 모습은시도도, 피로도 없이,도움도, 또한 박수갈채도 없이 일어선다.그 영원한 얼굴 속에서태양은 크나큰 기쁨으로바라본다―오래―오래―금빛에 물들 때까지,밤의 친교를 위해.The Mountains grow Unnoticed,Their purple Figures riseWithout attempt, exhaustion,Assistance or applause.In their eternal facesThe sun ―with broad delightLooks long ―and last ―and golden,For fellowship―at night.―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강은교 옮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에서 ‘산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자란다(The Mountains grow Unnoticed)’ 전문.1830년은 영문학 시사(詩史)에서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별을 탄생시킨 해이다. 지성과 영원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나는 그녀를 영화 ‘조용한 열정’으로 먼저 만났다. 벨기에와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는 실은 영상시집에 가깝다. 롱테이크 화면 가득 디킨슨의 시편으로 흐르는 절제된 대사는 예술의 슬픈 미학을 느리지만 뜨겁게 담아내고 있다.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시인”이라고 했다. 사랑에 실패한 후 디킨슨은 현실에 대한 문을 완전히 닫았다. 결혼도 물론 거부되었다. 디킨슨의 은둔은 피투성(내던져있음)의 은둔이 아닌 기투성(스스로내던짐)의 은둔이다. “영혼은 선택해서 사귀지, 그리고 닫아버리지” 그녀에게 있어 남성은 성스러운 세계,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영원한 세계 속의 우주’로 대체되었다. 디킨슨은 매일 흰옷을 차려입고 6년 동안 일천여 편의 시를 지었다. 그녀가 평생 쓴 작품 수의 반 이상을 넘는 숫자였고, 1862년 한 해에만 366편의 시를 썼다. 그 비극의 기간은 신생 미국의 역사를 결정짓는 한 격동기였던 남북전쟁(1861~1865)의 시기와도 일치한다. 또한 프래그머티즘과 경이적인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에밀리 디킨슨의 내부에서도 단단한 과거가 부서지고 위대한 미래가 태어나려는 과도기가 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킨슨은 휩쓸리지 않았다. 새로운 미를 추구했으며, 그 어느 것에도 자기를 예속시키지 않고 독자성을 지켰다. 시인 강은교의 해설처럼 “그의 시는 완전히, 홀로, 어떤 ‘이즘(ism)’의 감염도 없이 순수하게, 그만의 양식으로 순화되었다.”생전에 그녀는 단 7편의 시만 발표했다. 당시 여성은 사회 속에서 기능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시(dash)와 대문자의 사용, 행과 연의 특이한 구분 등의 디킨슨의 독특한 작법 스타일이 문제시되어 출판은 어려웠다. 하여 그녀의 고결한 시는 산처럼 “눈치채지 못하게 자랐다” 완전히 가려진 채 시인의 고독 속에서 은밀히 창조되었다. 세상을 향한 그 어떤 “시도도, 박수갈채도 없이 일어선다” 사후 69년이 되는 해 평생을 은둔했던 그녀의 방에선 파시클(fasicle, 손제본) 형태의 1800편에 가까운 시가 발견되었다. 그해 비로소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발간되어 세상에 나왔다. 디킨슨의 시는 사랑과 불멸, 자연과 신 등 여러 주제로 분류될 수 있으나, 무엇보다 동양의 죽음에 가까운 ‘고독’과 ‘자연에 대한 이해’는 내면의 깊은 심리를 담고 있다. 시어 “밤의 밀교”는 곧 시적인 순간과의 은밀한 친교를 말한다. 고도로 응축된 이미지로 그려진 ‘고독’은 우주로부터 화해하는 몰입의 순간이다. 그녀의 맑은 영혼은 조용하고도 폭발적인 열정의 시를 낳았다. 유월로 들어선 길은 영원의 깊고도 푸른 생명을 노래한다. 해파랑길 18코스 포항 오도(烏島)리 사방기념공원의 긴 수평선과 신록의 봉우리에 눈이 시리다. 커피향 한 올 피워물고 격자로 난 창가에 앉아 기다림을 키우는 대신 ‘고요’를 키워보기로 한다.“태양은 크나큰 기쁨으로, 바라본다―오래―오래―금빛에 물들 때까지”

2023-06-04

그리움으로 읽는 책

이희정 시인 아버지, 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어머니, 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그 밖의 많은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지, 라는 책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목차마저 희미해진 어머니, 라는 책거덜난 책들을 따라 소금쩍이 일었다밑줄 친 곳일수록 목숨의 때는 남아보풀이 일 만큼은 일다가 잦아지고허기진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박기섭, ‘달의 門下(작가, 2010)’ 중 ‘책’ 전문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책이 있다. 애잔하고 미안한 것들로는 에두를 수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 라는 책이다. 가족 서사로 빼곡한 오월의 서가에서 시인은 가장 깊이 있고 끈질긴 질문의 책과 조우한다.박기섭 시인(1954~)이 기억하는 두 책은 외피부터 대조적이다. “아버지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는 비유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 그들 ‘다움’의 모습을 품고 있다. 아버지는 ‘표지’이고, 어머니는 ‘갈피’라는 인식의 시어는 잔상을 드리운다. 시인은 “그 밖의 많은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며 이 모든 우주의 중심 서가에 두 책을 놓고 있다.시인이 읽는 책의 서사에 주목해 보자. “건성으로 읽었던가 //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생을 재독하고 있다. 이처럼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는 존재로서 집 밖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으로 인식했다. 이에 반해 자식에게 헌신적이고 포용적인 어머니라는 책은 그것을 만지는 시인의 갈피에도 습기가 묻어난다. “면지가 찢긴” “목차마저 희미해진” “거덜난 책”이란 비유에서 보듯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온통 눈물의 소금밭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삶은 “목숨의 때”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이라는 밑줄 아래 연민이 곡진하게 스민다. 이 대목은 어머니다움의 본질이다.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항상 궁금하고 모를 듯한 삶을 살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르는 궁극의 주제다. 어머니는 어떠한가. 현대사회의 확장된 어머니의 역할과는 다르게 과거 어머니의 삶이 있기나 했을까. 우리는 왜 뒤늦게 그리움과 영원의 주제로 항상 눈물과 가슴앓이를 했을 어머니와 주목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서사 도정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것인가.책은 역사와 서사의 저장고다. 시인은 퇴색한 과거에 미래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한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주제인 부모를 갸륵하게 기억할 뿐만 아니라 생의 진정성에 대한 의미 있는 탐색이기도 하다.은자의 미덕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그럼에도 박기섭 시인은 비슬산 한 자락에서 수북하게 쌓인 철 지난 책이나 고미술품과 함께 있다. 그의 삶이 소중한 것은 사라져가는 옛것을 수집하고 지키는 일상 가운데 발견이 발명하는 한결같은 시인의 자리에 흔들림 없이 거하기 때문이리라.오래전 인터넷 헌책방을 샅샅이 훑은 적이 있다. 당시 찾던 책은 ‘신학국문학전집, 세로쓰기, 어문각, 1974년판’이었다. 아버님께 빌려온 몇 권의 책을 남편이 분리배출을 해버렸는데 김동인 외 무슨 책 몇 권 인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오래된 책은 더군다나 세로쓰기 책은 가치 상실 도서라고 홀대했던 발언에 마음이 상하신 듯 반납을 명하셨다. 어렵던 시절 그분들의 할부 책의 역사를 간과(看過)했다. 이제 고인이 되신 아버지라는 책을 그리움으로 다시 읽는다.오월의 목차에는, 실밥이 다 터진 애잔한 그리움의 책,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2023-05-14

중얼거리는 사람, 부유하는 말들

이희정 시인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말을 많이 한 날은 마음이 켕긴다후환이라는 말 참 두렵다 말이 없는 사람은분노를 감춘 사람말을 쟁여두면 병이 온다기괴와 기형으로 달변은 앙금을 남기지거짓말을 복용한 날은 손톱을 깎는다안경을 닦고 책갈피를 문지른다 나를 베어 문 웃음이일생의 말들을 훑으며 지나간다뻥 뚫린 폐점처럼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중독자의 눈빛으로 말은 병든 난간에 앉아지나가는 얼굴들을 쬔다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아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쓴다 ―정병근, ‘중얼거리는 사람(여우난골, 2023)’ 중 ‘말의 신사’ 전문 시인만큼 언어에 대해 민감한 촉수를 가진 이가 있을까. 정병근 시인의 신작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닿지 못해 제 몸속을 떠돌아다니며 부유(浮游)하는 말들을 담고 있다. 시인은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 // 말을 많이 한 날은 마음이 켕긴다.”며 자문자답의 방식으로 중얼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모으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말이 없는 사람은 / 분노를 감춘 사람”이라고. 말은 마음을 품고 있다. 하여 “말을 쟁여두면 병이 온다 // 기괴와 기형으로”. 또한 말은 대단히 모순적이다. “달변은 앙금을 남기지”, “나를 베어 문 웃음이 // 일생의 말들을 훑으며 지나간다 // 뻥 뚫린 폐점처럼” 달변이 거짓에 가까운 것이라면 차라리 말문을 닫아야 할까.육체노동이 줄어든 자리를 감정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메우고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은 시들고 아플 때가 많다. 최근 미디어 속 유명인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이 공황장애, 우울장애 등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언어는 공명하지 못한 채 떠다닌다. 시인은 “병든 난간”에 앉아 지나가는 얼굴들, 즉 말(言)들을 쬐고 있다. “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올 것 같”다면서 “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쓰”는 것으로 말로 말 많은 세태를 적시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말은 죄악의 원흉이 되기 쉽다. 우리는 ‘차단’이라는 단호한 말을 쓰지 않고도 ‘신사적’인 침묵으로 타인을 외면하기도 한다. 이렇듯 해도 탈, 하지 않아도 탈인 말은 이율배반적이다. 말하기의 5원소 중에 ‘침묵’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자책한다. 한순간의 말실수로 모든 것이 날아가는 일은 허다하여 ‘세치 혀에 재갈 물리라’는 금언도 있지 않은가. 사람에 따라 말보다 글을, 글보다 말을 더 잘하는 식의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결국 모든 것은 말로 시작된다. 구어든 문어든 발화하는 순간 말도 글처럼 발표(publish)되는 것이다. 시인의 말, 신문의 말, 드라마 속 배우의 말, 잡지의 말, 논문의 말, 유튜브의 말이 모두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기능과 취향만의 문제일까.오래전 작은 아이가 막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중사공이 뭐예요?” 거대한 풍력 발전기 진입로에 세워진 안내 문구 ‘공사 중’을 그렇게 읽은 것이다. 당시에는 아이가 글을 역방향으로 읽은 사실보다 홀로 글을 깨쳤다는 사실에만 환호했었다. ‘공사 중’이든 ‘중사공’이든 때때로 우리는 말이나 행동에 자기검열의 팻말을 걸어 두고 싶을 때가 있다. 슬며시 몸속 깊이 묻어둔 침묵이라는 원소를 불러내 ‘공사 중’의 잠행 시간을 가져보아야 할까.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회이든 생각하는 마음 없이 말과 글이 생겨날 순 없으니 ‘중얼거림’은 기저음(基底音)처럼 시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입은 상처는 병을 물고 생을 흘리듯 말을 훑으며 떠다닌다. 누군가에게 ‘차단’된 혀들은 이렇듯 실소를 물고 부유(浮游)한다. 언어라는 기호는 마음을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연장이면서도 가장 불안전한 수단이기도 하다. 정병근 시인에게 언어의 재현은 사상의 배포가 아니라 사유에 대한 의심이기에 말의 신사는 없다.“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아 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쓴다.”

2023-04-30

흔들리는 봄, 마음의 꽃갈피

이희정 시인 옛말에 꽃싸움에서는 이길 자 없다 했으니그런 눈부신 꽃을 만나면 멀리 피해 가라 했다언덕 너머 복숭아밭께를 지날 때였다갑자기 울긋불긋 복면을 한나무들이 나타나앞을 가로막았다바람이 한 번 불자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흐드득,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나는 저 앞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럴 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복사꽃’ 전문시집의 서문 격인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작품을 정리하다 보니 꽃을 소재로 한 시가 여러 편이다. 고운 봄날 이 거친 시집을 꽃 피는 시집으로 잘못 알고 찾아오는 나비에게 오래 머물다 가진 마시라고 해야겠다.” 나비처럼 꽃에 관한 시를 뒤적이다 덩달아 마음이 흔들렸다. 나비에게는 꽃이, 꽃에게는 나비가 욕망처럼 무섭게 당기는 힘, 그것을 색(色)이라 한다.신의 창조물 가운데 최고의 걸작은 꽃일 것이다. 예부터 ‘미’의 상징이 되어왔던 꽃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대명사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는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되면 너무 좋아 정신이 몽롱해지네”라는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꽃에 매료되는 것은 현대인도 마찬가지이다. 송찬호 시인은 “꽃싸움에서는 이길 자 없다 했으니”, “멀리 피해 가라 했다”며 짐짓 미혹될까 두려워하는 포즈로 춘심을 드러낸다.우리의 문학작품에서는 미인을 꽃에 비유한 예를 허다하게 볼 수 있다. 위 시에서도 복사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여인을 의미한다. 1918년에 발행한 ‘조선미인보감’에는 당시 서울의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름에 꽃이 들어간 기생의 수는 절반을 넘었다.시인의 비유처럼 문을 열기 무섭게 “울긋불긋 복면을 한” 화인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야말로 ‘화신(花信)이 곧 춘신이고, 춘신(春信)이 곧 화신’이라는 봄의 정령들이 시인을 에워싸고 있다. 꽃은 그 아름다운 색과 자태, 그리고 그윽한 향기로 인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기 충분하다. 특히 복사꽃은 그 요염한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염부(艶婦)’를 상징하기도 한다.그 열매와 관련해서는 벽사력(僻邪力)을 지녔다고 믿었고, 열매의 씨앗이 일반적으로 다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시인이 마지막 연에서 돌연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 한 연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곡우는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 봄의 마지막 절기가 아닌가. 그런데 눈부시게 무장한 무사들이 떡하니 막고 있어 다음 행보를 예비하는 데 조바심이 이는 것이 기우는 아닐 것이다. 해서 시인은 그것에 더해 비책을 제시한다.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한다며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라고. 결국 시인의 장기인 노래(詩)를 바치는 것으로 꽃의 무사들로부터 풀려난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헌화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생명체로서 꽃은 개화하여 번화하고는 시들어서 떨어지는 생리적 구조로 되어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인간의 삶과 유사하나 꽃은 사람과 달리 다시 개화하는 재생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고전문학 세상과 만나다’의 저자 이강엽은 “꽃은 흔히 절정의 한순간으로 꽃다운 청춘이라고 할 때 꽃은 최고의 호시절을 의미하며, 꽃이 피면 마음이 밝아지고 자연스레 흥이 분출하는데 꽃노래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다시 기운을 얻어 재창조할 힘을 주는 리크리에이션(recreation)이다.”라고 했다. 독서 시간 청춘들과 일탈을 감행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교정을 거닐며 난분분 날리는 여린 꽃잎을 취했다. 이어 ‘모비딕’ 같은 두껍고 무거운 책 속에 한 잎, 한 잎 마음 다해 심었다. 다음 생에는 어여쁜 꽃갈피로 재탄생한 그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바람이 한 번 불자,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후드득,”

2023-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