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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보는 방식

등록일 2023-09-24 16:37 게재일 2023-09-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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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 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 든다.

―기형도, ‘병(病)’ 전문 (기형도 전집, 문학과 지성사)

우리가 기억하는 기형도(1960~1989)의 시에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이른바 ‘신화’가 되었던 기형도의 일화는 아프다. 시인의 연보에는 “1989년 3월 7일 새벽,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생일을 엿새 앞두고 있었음”이라고 그의 마지막을 요약하고 있다.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에 입각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으로 단언한 김현의 언급을 시작으로, 그의 시를 새롭게 읽기 시작하려는 시도는 그가 떠난 지 30년이 지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시가 추구했던 아름다움의 목표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앎’에서 비롯한다.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과정이 따른다. 이는 단순히 자기 내면을 고백하는 것과 다르다. 이것은 대상화의 과정에서 자신과의 일정한 거리를 두는 전략으로 스스로의 행동을 사유하는 인식의 행위에 성공할 수 있다. 소개하는 시 병(病)은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내 얼굴이 /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와 같은 표현을 통해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이를 뒤따르는 화자의 언술이다. “반 토막 영혼”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 “단단한 몸통”이라는 시구처럼 기형도의 시적 자아는 늙은 나무처럼 시간이 오래되어 그 의미가 퇴색된 이미지로 자신을 비하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생명력이나 자연의 순환 원리를 드러내는 것에 반해, 기형도의 시에 제시된 나무는 주로 썩은 나무나 버려진 나무처럼 생명력이 다한 형태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마치 시의 “주어를 잃고 헤매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처럼 주어를 잃었다는 것은 행동의 주체인 스스로를 상실했다는 것. 그리고 가지가 잘렸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움직임까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늙은 나무”는 단순히 자아 상실뿐만 아니라 무능하게 버려진 시체를 떠올리게 한다.

시인의 어둡고 부정적인 자아 인식과 세계 인식의 태도가 읽는 이로 하여금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를 엿볼 때와 같은 놀라움을 준다. 우리는 그림자를 품고 살지만, 그것을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아직 젊은 시인의 태도가 너무나도 치열하고 진지하기에 마치 고뇌하는 젊은이의 대명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고뇌의 힘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 시인의 시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가슴도 까맣게 멍이 드는 것 같다.

이희정 시인
이희정 시인

생전의 시인이 애독했던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에서 “모든 시대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동경한다. 혼란스러운 현재에 대한 절망과 우울함이 심각하면 할수록 그 동경은 더욱 강렬해진다.”고 했다. 우리는 기형도를 죽음을 노래한 부정적인 시인이라기보다는 현대의 부조리한 삶, 특히 구조적 모순이 심화 됐던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실험적인 시인이었다고 추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형도의 시는 신화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기계문명이 발전할수록 타인에게 무관심한 상태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병病’은 소통이 단절된 채 쓸쓸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결핍과 상처의 초상이다. 사회 관계망 속에서 존엄성을 찾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인 소외일 것이다.

기형도 시인은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이렇게 적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보다 아름다운 삶을 향하여, 시인은 가을 밖 벤치에 앉아 희망을 보는 방식으로 우리를 부른다.

“사람아, 사람아 단풍 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 든다”

이희정의 월요일은 詩처럼 기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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