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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가고 싶은 곳으로

등록일 2023-07-30 17:46 게재일 2023-07-3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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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발을 베개에 올리고 누웠다가

문득 발이 베개를 베고 누웠다고 생각해 본다

가고 싶은 곳에는 경쾌하게 앞서가던 발

가기 싫은 곳에는 천근만근 끌려오던 발

오늘 발이 피곤한 것은 아무래도

가기 싫은 곳에 끌려갔다 돌아온 탓이리라

오래된 발톱 무좀도

가고 싶은 곳에 못 데려갔거나

가기 싫은 곳에 억지로 끌고 다닌 탓이 크리라 생각한다

발에게 베개를 받쳐주고 누워

머리를 발이라고 생각하며 진짜 발을 바라본다

열 발가락 하나하나 꼽으며 가고 싶은 곳을 헤아려본다

한 키의 간격을 두고 동거하면서도

그사이 어디 있는 마음의 발을 자주 동동거리는 바람에

마음의 신발을 찾지 못해 허둥대던 날들을 생각해본다

더 늦지 않게 마음먹어 본다

가고 싶은 곳에 앞장서 가는 발을 따라나서리라

머물고 싶은 곳에 발과 함께 머물리라 마음먹어 본다

발이 머리가 되고 머리가 발이 되어 생각해 본다

머리가 발 같고 머리같이 살아갈 날을 생각해 본다

―안상학,‘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걷는사람, 2016)’에서‘발에게 베개를’전문

우리의 제한된 삶, 그 불가역의 궤적을 발에 의탁해 형상화한 시들이 꽤 많다. 발만큼 시로 쓰는 인생론에 자주 쓰이는 클리셰도 없을 것이다. 안상학(1962~) 시인의 ‘발에게 베개를’은 제목부터 해학적이다. 해학이란 무엇인가, 예술 체험의 핵심인 즐거움과 깨우침을 주는 것이다. 시의 소재는 발이다. 그런데도 이 시는 발이 머리로 읽힌다. 이유가 무엇일까. 한 치를 나아가기 위해 두 발로 바닥을 디뎌야 하는 발은 머리와 달리 지상의 바닥과 맞닿은 우리의 몸 가장 아래쪽에 있다. 시인이 가진 발에 대한 연민에는 보이는 현상보다 더 복잡다단한 미안함이 실려있다. 대개의 사람들이 시에 대하여 갖고 있는 낭만적인 정조와는 사뭇 다르게 날카로운 사실적 세계의 인식을 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희정 시인
이희정 시인

“가고 싶은 곳에는 경쾌하게” “가기 싫은 곳에는 천근만근”이라는 표현처럼 하기 싫은 것들을 견디는 것. 하지만 발 스스로가 이끄는 삶과 끌려가는 삶은 그 무게가 다를 것이다. 발이 향하는 곳을 표현한 이 두 구절은 ‘경쾌’와 ‘천근만근’이라는 대비적인 시어로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심상을 적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 발은 앞서가는 발과 끌려가는 발로 병치된다. 우리의 삶처럼.

이 시의 클라이맥스는 “발에게 베개를 받쳐”주는 데에 있다. 마음의 발을 동동거리는 바람에” “마음의 신발을 찾지 못해 허둥대던”날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화자는 조곤조곤 발을 위무하듯 “열 발가락 하나하나 꼽으며 가고 싶은 곳을 헤아려 본다”정작 그가 가고픈 곳은 어디일까? 이 물음 앞에 우리는 그가 가자고 하는 곳은 정의와 평등 그리고 개인의 해방이 이룩된 곳일 거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시를 쓰는 까닭은 다른 이유도 많겠지만, 우리의 발이 견뎌내는 곳은 인간의 자유가 이룩된 세상이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비록 그런 삶을 꿈꾸며 사는 일이 힘들지라도 “더 늦지 않게” “발과 함께 머물고 싶은 곳을 머물리라”다짐한다. 때때로 나 자신이 자유할 수 있는 소유권은 얼마나 될까를 헤아려 본다. 대부분 직장이 가장 많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여분으로 각자의 역할에 맞게 할당된 크게 작게 소속된 장소에서 소유한 지분을 제외하면 오롯이 나만의 몫은 그닥 많지 않다. 그럴 때마다 안상학 시인을 따라 발에 베개를 받쳐 놓고 소리 내어 읊조려 보는 것이다.

“가고 싶은 곳에 앞장 서 가는 발을 따라 나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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