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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위, 종이쪽지에도

등록일 2024-06-09 19:41 게재일 2024-06-1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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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스미지 않을 적엔 스스럼없이

쉽게 떨어졌지만

그 몸에 물기가 점점 번져들자 종이 두 장은

 

마주 달라붙어, 서로를 견인하게 되었다

 

축축해진 두 몸이 혼신으로 밀착하여

한 쪽을 떼어내자면 또 다른 한 쪽이

사생결단,

먼저 자신을 찢어놓으라는 것이다.

 

이따위 종이쪽지에도 이별은

고통 없이는 없나 보다.

 

- 이수익, ‘이따위, 라고 말하는 것들에게도’전문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천년의 시작)

이희정 시인
이희정 시인

아프다, 지극히 감상적이고 개인적인 낭만을 종이 두 장이 견인하고 있다. 이 시는 시인의 구체적 체험을 재현한 서술 한 줄 없이 흡사 뼈와 근육만으로 이뤄진 것처럼 사건의 이미지에만 힘을 주고 있다. 마치 그들이 어떻게 찢어지는가를 두 눈 똑바로 뜨고서 보라고 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별은 사랑이라는 마술적 전제에서 비롯된다. 그 마술은 꼭 그 사람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우연을‘물’이 스밈으로써 반드시 그 사람이어야 하는 운명으로 바꿔버렸다. 혹은 반대의 방향으로 작용할 때 연인들은 가볍게 해체될 것이다.

이 시에서 종이 두 장은 이별의 분위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오브제다. 여기에 담긴 것은, 왜 어떤 연인들이 절박한 이별에 직면하는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담고 있다. 좋은 러브스토리는 가장 유별난 연애담을 다루는 듯 보여도 실은 지극히 사소한 장면으로 확인됨으로써 현대의 그 많은 연인의 사랑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별은 그 자체로 운명적이면서 예외 없이 허망하다.

인간의 정신적 자유와 평화가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진술은 새롭지 않다. 너무도 자주 반복되었기에. 하지만 그런 삶의 지혜는 이수익 시인이 말하는‘이따위’라는 사소하고 흔한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서 ‘이따위 것’으로 불리는 대상은 대체로 하찮고 비루한 것들이기 십상이다. 시인이 묵도한 풍경은 하찮은 종이쪽지 두 장이 우연히 물기에 젖어 달라붙어 있는 풍경이다. 회자정리, 생자필멸이라는 삶의 기본 원리를 떠올리면 문득 경건한 마음마저 든다.”(평론가 장영우) 함부로가 넘쳐나는 세상이지 않은가. 너무 쉽게 버려지고 너무 쉽게 잊히는 풍속 가운데 시인은“이따위 종이쪽지”의 붙음과 떨어짐의 사건에서 집착과 이별이 초래하는 삶의 근원적 비애를 읽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어떠할까. “이별에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면 뒤통수를 치고 떠나야 한다”는 어느 드라마의 대사는 현대인의 가벼운 세태를 조롱하고 있는 듯하다. 뒤통수란 곧 어느 한쪽의 잔인한 배신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것은 실연한 사람의 기억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에 반해 이별 후에 남는 것이 뒷모습이라면 로맨스에 가까울 것이고, 결국 로맨티시즘과 리얼리즘의 줄다리기가 연인들의 영원한 숙제임을 보여준다. 결국 이 시가 다루는 것은 연애라는 알고리즘, 사랑의 생과 멸 그 자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몸’이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두 장의 몸은 단지 이별의 정조를 만드는 피사체로만 기능하지 않고, 몸과 몸이 이끄는 사랑의 현재 위치를 가장 적실하게 지시하는 좌표 역할을 한다. 몸과 몸이 사랑의 심리를 긴밀하고도 절박하게 교직하는 시인의 재현이 놀랍다. 계절의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의 시간이 끝난다고 삶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별에는 그들만의 아름다움이 있다.

“마주 달라붙어, 서로를 견인하게 되었다”고, “축축해진 두 몸이 혼신으로 밀착하여” 있어 “떼어내자면 사생결단 먼저 자신을 찢어놓으라는”것이다.

이따위, 라고 말하는 것들은 슬프다. 견딜 수 없이 서늘한 정도로 성숙한 존재들이다. 매우 감성적이면서도 놀랍도록 철학적이다. 만일 이 시가 아무렇지 않다면 당신은 어쩌면 진정한 러브스토리를 가져보지 못했거나 사랑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따위 종이쪽지에도 이별은 고통 없이는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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