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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나오셨습니다”

등록일 2023-10-15 19:57 게재일 2023-10-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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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주문한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어요

나보다 지체 높으신 커피를 마신다

와플도 나오셨습니다

공손한 목소리다

커피숍의 원목 의자는

나이테가 자란다

덜 마신 커피를 놓고 품위 있게 일어서면

드디어 난 화가가 된다

고갱님, 감사합니다

―이송희,‘현대인의 화법’전문 (이름의 고고학, 2014)

한글날에 즈음하여 이송희 시인(1976년~)의 의미심장한 시 한 편을 만난다. 제목은‘현대인의 화법’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커피가 나오실 수는 없기에 첫수부터 어법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계속 이렇게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 표현도 맞는 표현으로 용인될지 모른다. 말을 바르게 만들려면 사회 분위기와 문화를 바꿔야 한다. 언어를 탓하지 말고 우리가 사는 모습과 환경을 돌아보는 게 먼저다.”라고‘표준국어대사전 바로잡기’에 나선 박일환 시인의 인터뷰 내용(2023년10월6일자 중앙일보, 오피니언)이 겹쳐오는 순간이다.

이송희 시인이 직접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2003년 등단 이후, 여전히 시조를 쓰고 있는 젊은 시인이다. 엄밀히 말하면 현대시조,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현재의 언어로 쓴다. 시조를 고지식한 편견에 가두는 독자들의 인식을 깨고 있는 실험적인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말하는‘변화된 언어’란 무엇일까. 정격의 양식 안에서 새 시대의 담론을 담아내는 것이 정형시의 숙명이라면 이 시가 견지하는 것은 현대인의 화법이다. 시의 첫 구절이 그리는 풍경은 다수의 현대인의 익숙한 일상을 보여준다. 어쩌면 아침밥은 안 먹어도 커피는 마신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다. 가볍게 주문한 커피는 등장부터 존엄하다. “아메리카노 나오셨어요” 눈치챘을 테지만 이 시는 어법에 맞지 않는 한국어 높임말 사용에 대해 풍자하고 있다. “나보다 지체 높으신 커피를 마신다” 커피의 지체만 높아진 것은 아니다. “와플도 나오셨습니다” 거기다 “공손한 목소리다”

이송희 시인의 시대 비판적 풍자는 비단 잘못된 언어 사용만이 아니다. 물신주의가 만연한 현 세태 속 돈의 위력을 풍자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풍자의 날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명철 평론가의 표현처럼 “자기풍자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의 해설을 요즘 신조어인 ‘복붙임(복사해서 붙이기)’을 해보면, “돈이면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사회, 돈으로 교환되는 대상은 이제 돈의 가치가 얹어지면서 돈이 활성(活性)을 띤 위력을 지닌 존경의 대상으로 둔갑한다. 심지어 “드디어 난 화가가 된다. 고갱님, 감사합니다.”처럼 “그 둔갑의 대상은 예술의 가치로 치환되는데, 즉 ‘고객(客)’+‘님’= ‘고갱(P.Gauguin, 19세기 말 프랑스 화가)’+ ‘님’으로 자음접변 음운 현상을 통해 그 실체가 보란 듯이 전도되고 있다.”

한글날을 앞두고 우리 학교 학생들은 한복을 입고 등교했다. 글로벌학교의 특성상 교내에서는 영어를 사용한다. 영어와 한국어 중 어떤 언어가 편하냐는 질문에 한 학생의 말 또한 이 시만큼이나 풍자적이다. “저는 0.5개 국어를 쓰는 것 같아요, 한국어도 영어도 온전치 못한 것 같아요.” 순간 이 학생의 말이 현시대의 전체를 상징하는 부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희정시인
이희정 시인

사실 그것 외에 언어의 왜곡은 더 심각하다. 심지어 신조어 사전이 생길 만큼 젊은 세대들의 줄임말이나 특정한 조어법을 통한 언어가 늘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대화 중에 여과 없이 흘러나오는 접두어 ‘개’는 맛있을 뿐만 아니라 “개 이쁨” 등 이쁘기까지 하다니. 불과 한 세대만 흘러도 어쩌면 사라지거나 변해 버린 언어로 인해 세종의‘나랏말쌈은 듕국’이 아닌 ‘지금과 달라’ 그 어원을 밝히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이송희 시인이 말하는 ‘변화된 언어’란 바로 이러한 현 세태의 안타까움을 외면하지 않고 적실히 담아낸 지금 이 자리의 뼈 아픈 사회적 언어이다. 서정시의 슬하에 풍자의 이면이 짙다.

“커피숍의 원목 의자는 나이테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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