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와 음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먹이는 것과 먹는 것 혹은
만들어져 있는 것과 자신이 만드는 것.
사람은
제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가축은
싫든 좋든 이미 배합된 재료의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
김치와 두부와 멸치와 장조림과….
한 상 가득 차려놓고
이것저것 골라 자신이 만들어 먹는 음식.
그러나 나는 지금
햄과 치즈와 토막난 토마토와 빵과 방부제가 일률적으로 배합된
아메리카의 사료를 먹고 있다.
재료를 넣고 뺄 수도,
젓가락을 댈 수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
맨손으로 한 입 덥썩 물어야 하는 저
음식의 독재.
자본의 길들이기.
자유는 아득한 기억의 입맛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오세영, ‘햄버거를 먹으며’(정효구, 시 읽는 기쁨, 문지사)
‘인간은 그가 무엇을 먹는가가 결정한다’ 는 독일의 격언이 있다. 학자이자 시인인 오세영의 오래된 시 한 편을 감상해 보자. 이 작품은 시인의 ‘아메리카 시편(1997)’에 수록된 많은 작품 중 단연 독특한 시편이다. 작품의 미학적 수준을 따지자면 더 나은 작품이 있겠지만 미국 주도의 현대 자본주의 문명사회가 지닌 모순을 예리하게 들춰내고 있기에 한 음식을 통해 인간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불러내 봄 직하다.
오세영 시인은 1990년대 중반,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캠퍼스 동아시아학과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한 경험이 있다. 그 무렵의 체험이 이 시를 쓰게 했다. 그렇다면 ‘사료와 음식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인은 첫 행부터 대뜸 충격적인 질문을 한다. 우리는 사료는 가축의 먹이이고 음식은 사람의 먹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료는 단순한 먹이이고 음식은 먹이 이상의 문화적 존재라고 하면 어떨까.
시인이 이와 같은 저돌적인 질문을 던진 후, 스스로 음식과 사료의 차이점에 대해 말한 다음 행으로 눈길을 옮겨보자. “사람은 // 제 입맛에 맞춰 음식을 만들어 먹지만 // 가축은 싫든 좋든 이미 배합된 재료의 음식만을 // 먹어야 한다.” 라고 사람과 가축을, 음식과 사료를 대비시킨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과 음식을, 가축과 사료를 서로 짝지어 놓고 있다. 이러한 대비 구조 속에는 사람이 음식을 먹는 것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행위라면, 가축이 사료를 먹는 것은 수동적이고 획일적이고 몰취향적인 행위라고 말하고 싶은 속뜻이 들어 있다.
시인은 여기서 한 행 더 나아가 한국의 밥상과 미국의 햄버거 덩이를 대비시키고 있다. “재료를 넣고 뺄 수도,// 젓가락을 댈 수도, // 마음대로 선택할 수도 없이// 맨손으로 한 입 덥썩 물어야 하는 저// 음식의 독재,” 시인은 스스로 “아메리카의 사료”라고 부른 햄버거 덩이 앞에서 젓가락의 문화적 행위가 그리웠던 것, 자신의 문화적 욕구가 무참히 부서지는 심정에 빠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햄버거를 사랑한다. 아니, 어쩌면 햄버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햄버거를 사랑하는 것처럼 길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햄버거가 아니더라도 시인 오세영의 방식을 빌리자면 젓가락은 “아득한 기억”의 한 장면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햄버거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사회의 본질을 알려주는 하나의 상징체다. 미국인이 지닌 총기만큼이나 위력적이다. 여기서 앞선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떠올리며 그 이면을 읽는 방식으로 오세영 시인이 언급한 ‘젓가락’에 주목해 본다.
젓가락은 하나가 아닌 한 벌로 쓸 수 있는 도구다. 흥미롭게도 중국 뱃사람들이 빠른 항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젓가락을 콰이즈라고 불렀을 때, 그들은 아마 ‘콰이(快乐)’라는 말이 ‘르(子)’와 합쳐져서 ‘행복’을 의미하는 ‘콰이르’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차려낸 밥상에 얹힌 마르지 않는 찬들의 촉촉한 정성처럼 젓가락은 하나가 아닌 한 벌로 이루는 공손하고 상서롭게 존재하는 문화적 도구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