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오른손 검지로 내 왼눈을 찔렀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그의 손가락이 후벼 파는 내 혈관의 피비린내를 음미했다
어쩌다 통증 같은 것이 올라오면
한밤중에 사 오던 감기약이나
목도리 둘러주던 손길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순간엔 눈꺼풀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눈에서 빠져나갔을 때
내 눈을 잊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
나는 그의 손끝이 지나가는 길을 잊지 않으려고
내 몸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잊기로 했다
나는 눈이 전부인 물고기였다
그가 손가락을 빼고
물 없는 수조에 나를 눕혀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숨쉬기를 기억해냈다
그가 왜 내 눈을 찔렀는지
나는 왜 물고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오른눈을 내 손으로 찔러보기로 했다
―최라라, ‘사랑’ 전문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는다, 2017)
최라라 시인이 그려내는 ‘사랑’은 독특하고 강렬하다. 제목과 달리 이 시는 그저 달콤쌉쌀한 멜로가 아님을 첫 행부터 시종일관 보여주고 있다. 장르적 관점에서 보자면 서정적 스릴러라고 명명하고 싶을 만큼 기이하고 매혹적이다.
“형식은 이데올로기의 벡터다” 에이젠시테인이 남겼던 이 말은 다른 예술처럼 시에서도 형식의 중요성을 그대로 요약한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형식의 자장 속에서 위축되지 않은 잔혹한 그로테스크(grotesque)의 미학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이 시에서 사건을 보는 것은 눈이 아니라 감각이다. 눈은 보는 대신 기억하고 꿈꾸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성혁의 말처럼 시인에게 사랑은 즉각적으로 고통을 주는 폭력의 의미가 아니라 ‘그’의 존재를 삶의 속살에 깊이 새기는 폭력, 그리하여 운명이 새겨지는 폭력이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새기는 일이기에 상처가 나기 마련인 사랑의 격렬함을 의미한다. 고통을 회피한다면 사랑의 극한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시인이 “그의 손가락이 후벼파는 내 혈관의 피비린내를 음미”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폭력의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그’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 속으로 격렬히 침입해 들어올 때 일어나는 피비린내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다. 이는 아마도 ‘그’에 대한 따스한 추억들, “한밤중에 사 오던 감기약이나/ 목도리를 둘러주던 손길”과 같은 추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시인이 기억하는 사랑은 소중하다. “나는 그의 손끝이 지나가는 길을 잊지 않으려고 / 내 몸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잊기로 했”던 것, 그리하여 그녀는 “눈이 전부인 물고기”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比目)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던 류시화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 시인은 “그가 왜 내 눈을 찔렀는지/ 나는 왜 물고기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에 시인은 자신의 “오른눈을 내 손으로 찔러 보”는 일을 자행한다. 자신의 눈을 찔러줄 ‘그’는 없다. 그렇기에 스스로 자신의 다른 쪽 눈을 찔러봄으로써 사랑의 고통을 체험하면서 자신 안에 깊이 존재하는 그를 이해하고 자신이 물고기가 된 연유를 알려고 한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눈을 찔러보는 고통스러운 실험이 시인이 시를 쓰는 바탕이 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떠나간 ‘그’를 기억하며 자신의 눈을 찔러 눈알이 된 지느러미만 남은 물고기가 시인의 숙명임을 견지하고 있다.
사랑의 방식이 서로 달라서 상처인 줄 모르고 내 방식을 고집하는 사랑이라고 말한 친구의 독해처럼 이 시는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다. 가학적인 사랑의 상처가 멈춰 선 자리에서 최라라 시인은 다소 모호하게 구두점을 찍으며, 고백의 바깥으로 배턴을 넘긴다. “그의 손가락이 내 몸을 빠져 나갔을 때”의 서술이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표현의 대담함이나 우울한 판타지의 대리 만족도 아니다. 이것은 헤어짐을 삶의 본질로 이해하게 되는 그에 대해 기억하는 그녀의 사랑 이야기다. 그가 떠나고, 환상이 끝나고, 꿈이 끝나야 비로소 사랑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이 시에서의 사랑이 처한 위치다.
“그의 손끝이 지나간 길을 잊지 않으려고 내 몸의 다른 부분은 모두 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