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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소멸하지 않는 봄, BTS 정류장

이희정 시인 바다로 가는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모래가 둔덕 만들고 파도가 길을 부른주문진 향호해변에 BTS정류장* 푸르다도착시간, 출발시간은 애초부터 없었다발길 닿는 대로, 성근 마음 이르는 대로젊음의 스펙트럼이 물때처럼 촘촘한 곳수수께끼 풀어놓듯 노래하며 신화 쓰듯당당히 자신을 향해 쉼표 찍는 봄날 오후후렴구 밀물에 닿자 바다정류장 만원이다―박희정, ‘BTS 정류장’ 전문*강릉시 주문진읍 향호해변에 있는 방탄소년단 ‘봄날’ 앨범 촬영지.우리나라에서 집단이 세계적인 ‘고유명사’가 된 예로 BTS(방탄소년단·防彈少年團·Bulletproof Boy Scouts)만큼 엄청난 족적을 남긴 이들이 또 있을까. 몇 해 전 ‘타임지’에선 그들이 세운 “최초, 최고, 최단기간의 기록들은 세상에 대한 위로이자 희망”이라고 올해의 연예인으로 선정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여태껏 세계의 미의 기준은 서양의 기준이었고 팝 시장의 중심이 미국이었다면 이것은 방탄소년단 이전의 이야기일 것이다.박희정 시인이 그리는 대상은 자신이 다녀온 BTS의 2017년 발표 앨범, ‘봄날’ 뮤직비디오 촬영지인 주문진 향호해변이다. 시적 화자는 첫 행에서 “바다로 가는 버스는 아직 오지 않았다”라며 단정적인 프레임을 내건다.뮤직 앨범 ‘봄날’은 편지 형식의 노랫말로 복수(複數)의 메타포를 거느리고 있다. 상징의 귀재들이라고 알려진 이들의 노래에는 몇 가지 은유적 코드가 숨어 있다. 화자는 “모래가 둔덕 만들고, 파도가 길을 부른” 그곳을 발길 따라 성근 마음에 기대어 왔다고 고백한다. “푸르다”, “젊음의 스펙트럼이 물때처럼 촘촘한 곳”이 상징하는 것은 청춘이고 희망이고 잊어서는 안 되는 특정한 시공간의 기억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이어 동일한 대상에 대한 묘사지만 “수수께끼 풀어 놓듯 노래하며 신화 쓰듯”으로 이 시의 중심에 핫플(명소) BTS의 상징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이 땅의 모든 청춘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바다가 보여 주는 것은 시간에 따라 이루어지는 무엇이 아니라 흐르는 움직임 자체다. “도착시간, 출발시간은 애초부터 없었”으므로 ‘공간의 이동은 시간의 이동’이라는 명제, 이는 예술사적으로 ‘동시대적인 명제’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당당히 자신을 향해 쉼표 찍는 봄날 오후”의 시간은 노매드(nomad)로서의 화자 자신을 위무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BTS의 ‘봄날’ 앨범은 특별한 사건(세월호 침몰)에 대한 기억을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메타포를 환기하고 있어 청춘, 그들이 그들에게 보내는 그리움의 연서로 품어도 무방하다. 뮤직비디오에선 그날의 상징을 9시 35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통해 암시했다. 이 순간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는 시원(始原)처럼 화자는 봄날의 “후렴구 밀물에 닿자 바다 정류장은 만원이다”라며 그리움의 현상학을 보여 주며 맺는다.언제나 시계의 방향은 후진이란 없다. 마치 자신의 뒷모습을 스스로 볼 수 없어 반사경으로 보는 것처럼 우리에겐 지난 시간을 비춰줄 지난 시간의 기억이 필요한지 모른다. 비록 그들의 봄은 중단되었지만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지상에 생명으로 온 모든 것, 하물며 바다를 다녀간 새들조차 소멸에 저항하듯 자신의 생을 기록하곤 한다. 모래사장에 흐릿하게 찍힌 새 발자국이 쉬이 잊히지 않는 까닭이다.후렴구 “보고싶다, 보고싶다, 만나러 갈게, 데리러 갈게” 그들은 고통과 냉소가 지나온 시기를 잊지 않겠다며 자신에게 주문 걸듯 노래한다.시인의 “주문진 향호해변에 BTS 정류장 푸르다”에 방점을 찍으며 그들을 불러 본다.

2023-04-02

봄을 소묘하는 소녀의 시간

이희정시인 촘촘한 체 같은 어스름이 번져 오고사랑니 뽑혀 나간 동그란 아픔 위에봄 저녁 물 끓는 소리 무심하게 고이는데만지면 부서질까 당신의 마음가닥가늘고 빳빳한 쓸쓸의 올올들이뜨겁게 곤두박질치며 물속에서 몸을 푼다참았던 시간들을 찬물로 헹궈 내면어쩜 몇 가닥쯤은 당신에게 가닿아반음쯤 낮은 자리에서 흰 음계로 울어줄까-서숙희, ‘국수를 삶는 저녁’ (‘가히’ 창간 특집- 2023년 봄호)우리에게 ‘국수’라는 식재료는 음식으로도 심상으로도 별미다. 주식인 밥과는 달리 소박하지만 특별한 친밀감을 자아내기에 이만한 서정도 없을 것이다. 작품 제목 ‘국수’를 뽑아내기 위한 오브제로 시어 ‘촘촘한 체’는 맞춤이다. 시적 화자는 색보다는 선과 면으로만 소녀의 무채색 봄을 소묘하고 있다.“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 라는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구호는 여전히 주효하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 시의 미덕이라면 더욱 이 시는 서사보다는 묘사가 승하다. 흔히 묘사는 창작 기법에서 인물의 마음속 풍경을 배경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쓰인다. “촘촘한 체 같은 어스름이 번져 오고”의 첫 행에서부터 심상을 거느린 묘사가 이미지를 믿음직하게 견인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시를 그림 대하듯 읊노라면 어느새 고요를 거느린 섬세한 풍경에 눈이 순해지고 마음결마저 연해지고 마는 것이니.“현실풍경이건 심상풍경이건 글은 해석의 산물”이라고 했다. 서숙희 시인(64)이 그리는 ‘국수를 삶는 저녁’의 풍경은 채색되지 않은 연한 봄이다. 시인이 시어를 길어내는 시간은 가는 국수를 체에 걸러내듯 촘촘하고 예민한 순간이기에 “물 끓는 소리마저 무심하게 고”인다. 이어 봄 저녁의 현실풍경은 “만지면 부서질까 당신의 마음가닥”의 심상 풍경과 절묘하게 포개지며 자연스레 운율의 음계를 놓는 것에도 일조하고 있다. 화자가 그리는 풍경은 반음 낮은 자리에서 단아한 서정의 여린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어떤 글이든 고명에 한눈을 팔면 노상에서 객사하기 십상이라고 했다. 시력 30여 년의 시인이 화려한 수사보다 시의 본령인 국수가락에 전심을 다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자. 시적 화자는 “가늘고 빳빳한 쓸쓸의 올올들”로 마치 시를 처음 대하는 소녀처럼 공손하게 맞는 것이다. 타협이나 굴종을 모르는 타고난 국수가락의 성정은 돌연 시의 허리쯤에서 “뜨겁게 곤두박질치며 물속에서 몸을 푼다.” 이는 제목이 상징하는 ‘국수를 삶는 저녁’의 창작(조리)과정을 풀어내는 동시에 화자의 내적 열망을 교묘하게 비등하며 카타르시스를 준다. 마치 영화 마블시리즈 앤트맨의 슈퍼히어로를 연상시키듯 줌인과 줌아웃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온탕과 냉탕을 벼리는 것이다.이처럼 화자는 대상에 대한 격정 어린 내성을 “찬물로 헹궈 내” 봄 저녁의 풍경 한 올 한 올을 체에 내리듯 소담스레 ‘국수’라는 가락에 풀어내고 있다. 오래 기다리고 감추었던 빳빳한 국수의 외형은 어느새 물의 방식에 순응하며 쓸쓸하고도 부드러운 봄 저녁으로 치환된다. 선에도 감정이 있다. 기다림의 애틋함이 높은 감정의 선이라면 쓸쓸과 울음은 낮은 무채색 감정이다. 울음은 감정의 바닥까지 다 긁어내야 도달할 수 있다. 시를 기다리며 한생을 살아가는 시인의 담백한 저녁, 그 애정의 발화를 본다. “어쩜 몇 가닥쯤은 당신에게 가닿아 반음쯤 낮은 자리에서 흰 음계로 울어줄까”마침내, 소녀의 국수 가락은 희디흰 음계로 저 먼 곳까지 공명할 것이다.

2023-03-19

세상의 모든 아들에게

이희정 시인 부모에게 자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끝이 없는 A/S 대상이다.“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 네 뒷모습에 대고 /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더러는 부모가 부실하면 아이들이 먼저 철이 들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훈련소 상사가 문자로 보내온 아들의 모습은 긴장된 가운데 늠름하다. 발가락 재해로 일 년 가까이 입대 시기를 늦춰야 했던 어느 집 아들의 이야기다. 무엇이 그리 급했을까. 겨우 나아갈 때 즈음 서둘러 급행을 신청해 입대했다. 전날까지 일언도 없이 문을 나섰던 아들이 훈련소 입소 직전 사진과 함께 “잘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보내왔다. 입대를 보류할 부모를 견제한 판단이었으리라 짐작한다.예전과 달리 복무기간도 단축되고 핸드폰 사용도 가능하다지만 여전히 어머니들에게 입대는 간절한 기도로 신을 부르는 일이다. 총에 맞아 죽기보다는 총소리를 듣고 먼저 쓰러진다는 시구도 있지 않은가.아들아너와 나 사이에는신이 한 분 살고 계시나보다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네 뒷모습에 대고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네가 어렸을 때우리 사이에 다만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사랑 한 알에도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이제 쳐다보기만 해도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너와 나 사이에는무슨 신이 한 분 살고 계셔서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문정희 ‘어린 사랑에게’(1992, 미래사) 중 ‘아들에게’ 전문그런데 어머니와 아들을 대하는 간절함의 인식은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없던 질병도 만들어 군 면제를 받았으면 하는 힘센 부모도 있다. 과거와 달리 너나 할 것 없이 자식이 한 둘인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군에서 맞는 생일에 공산품 초코파이 케이크는 거부하고 특별히 만든 케이크를 보내고, 군대 상사에게 사소한 것들까지 수시로 주문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풍토 속에서 부모의 배웅 없이 홀로 기차를 타고 가벼운 여행길 나서듯 그렇게 홀연히 떠나는 아들의 태도는 약한 부모를 부끄럽게도, 마음 저리게도 한다.서울 양재동 숲길을 걷다 보면 청년 윤봉길을 만날 수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사가 되어야 했던 그의 나이는 약관이었다. 고향에는 살아 있는 부모가 있었고 앳된 아내가 있었고 무엇보다 완두콩 같은 발가락을 고물거리는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었고, 가장이었고, 아버지였다. 현대 시점으로 보자면 저 어린 나이에 어찌 저리 큰마음으로 나설 수 있었을까 믿기지 않는다. 혼인 연령이 늦어지면서 아이들의 성장도 늦되어지는 것인가. 바뀐 세상이 성장의 키를 조율하는 것인가. 지금의 아이들에게 대자면 상상할 수도 없는 신화에 가까운 실화다. 훈련 중 부상보다 상사나 동기의 괴롭힘 등 정신적인 이유로 어머니들의 ‘간절’을 소환하는 예가 많은 것을 보면 더욱 실감이 나지 않는다.시대가 바뀌고 풍족한 환경에도 세상은 여전히 평온하지 않다. 저 먼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으로 실시간 대치 중인 우리나라를 보더라도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모든 어머니에게 귀하지 않은 발가락이 있으랴. 문정희 시인(1947~)은 말한다. “네가 어렸을 때 / 우리 사이에 다만 /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 사랑 한 알에도 / 온 우주가 다 녹아들곤 했는데 /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이 되어 있다고.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전하고 싶다. 내 아이들은 생각하는 것보다 어리거나 유약하지 않다고. 어머니의 간절함 속에는 강물처럼 흐르는 신이 한 분 살아 계셔서 결코 그 마음의 키가 작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아들을 믿고 모두를 위한 간절함으로 두 손 모을 수 있어야 한다고.내 아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들들’에게.

2023-03-05

다시 2월, 배웅과 마중의 행간

이희정시인 젖도 덜 뗀 어린 것이 아우를 보았던가이월 숲 아랫도리는 여전히 까칠해도보란 듯 우듬지 쪽은 핏물이 하마 돈다꽃샘이 뒤미처 와 눈을 자꾸 흘기더니날日수도 늘 모자라 무녀리만 같은 너를자투리 천 조각 이어 감침질로 안고 간다-이승은 시집 ‘넬라 판타지아’(2014) 중 ‘다시 이월’ 전문이승은(1958~) 시인이 부르는 이월의 마디는 환한 적막 속 어녹은 눈처럼 온다. ‘다시 이월’이 수록된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의 표제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는 ‘환상 속에서’로 번역되며, 1986년 발표된 영화 ‘The Mission’의 주제곡인 ‘가브리엘 오보에’에 이탈리아 가사를 붙여서 부른 노래다. 뜻밖의 새하얀 늦눈을 만나는 이월은 짧게 교차하는 ‘배웅과 마중’의 환상적인 간이 구간이 아닐까.1979년 KBS 문공부 주최 전국민족시대회에서 약관의 나이로 우리 곁에 온 시인은 “하마 도는 핏물”의 생경한 언어처럼 와서는 “다시 이월”이라고 했다. 이미 시인은 앞선 시집 ‘환한 적막’에서 ‘2월’을 선창하며 “늘 못다 떼고 덮어버린 국정교과서 같은 2월 / 어정쩡한 학기 말”의 모국어를 건너왔기에. 이즈음 다시 궁금한 그녀의 “젖니의 시간, 뜯고 싶은 봉함 편지”를 기어이 뜯어보려는 것이다.모자라거나 작은 것들, 여린 것들은 언제나 눈을 시리게 한다. 첫 행을 보라, 막 첫걸음마를 뗀 어린 형이 채근 대는 아우에게 유모차를 내어주고 조막만 한 발을 소심하게 내딛는 모습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이어 화자는 유독 날수가 모자라 다리가 짧은 2월을 “무녀리”라고 했다. ‘무녀리’의 사전적 의미는 “비로소 문을 열고 나왔다는 뜻 ‘문(門)+열다’의 ‘문열이’가 변하여 된 말이며, 짐승의 한 태(胎)에서 나온 여러 마리의 새끼 중에 맨 먼저 나온 놈을 일컫는 말”로 제일 먼저 나온 새끼는 다른 새끼들에 비해 유약하다. 화자의 애잔하고 깊은 내성의 눈빛이 짙게 묻어나는 둘째 수를 주목해 보자.“꽃샘이 뒤미처 와 눈을 자꾸 흘기더니 / 자투리 천 조각 이어 감칠질로 안고 간다” 며 동적인 시상을 입체적으로 펼치며 2월을 상징하고 있다. 기실 이승은 시인은 돌연 감침질로 안고 가버리는데 능하다. 그것도 바늘땀이 밟고 간 자국도 없이 귀신같이 홀쳐 꼬리를 감춰버리는 것이다. 첫 행은 오금을 박듯 오지게 들어 앉히고는 여봐란듯이 따돌리고 가는 비기(祕記)를 시인의 다른 시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지점이 곧 올곧게 이어온 현대시조가 담보하는 올무 같은 정형의 탄성을 만나는 마술적인 구간일 것이다. 그녀는 근작 시집 ‘첫 이란 쓸쓸이 내게도 왔다’에서 “아직 끝난 건 없다”라고 다짐하는데 화자의 이월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월이고 곧 다가올 뭇 생명을 예고하는 옴의 구간이기 때문이리라.겨울과 봄을 여닫으며 판타지풍의 발성으로 부르는 배웅과 마중의 행간, 2월이 여닫는 문은 여느 계절과는 다르다. 이월(February) 속에는 입춘이라는 절기가 들어 있는데 입춘은 봄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봄의 문턱에 들어서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아직 날씨는 한겨울이지만 얼었던 땅이 서서히 풀리고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다. 예로부터 입춘에는 대문 기둥이나 대들보 천장 등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였다. 이는 고대 서양에서의 2월이 가진 정화의 의미와도 다르지 않을 테니 겨울을 고이 보내며 다가오는 봄을 새 몸, 새 마음으로 맞는 정결한 의식과도 같다. 어느새 햇살을 입은 생명들이 번지듯 오고 있다.“이월 숲 아랫도리는 여전히 까칠해도, 우듬지 쪽은 핏물이 하마 돈다”◇ 이희정 시인 약력 ·201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내 오랜 이웃의 문장들’

2023-02-19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고 세상을 건널 수 없을까?

이희정 시인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이성선 ‘시전집’(시와시학사, 2005) 중 ‘별을 보며’ 전문“과학은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고, 시(詩)는 알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루소의 말은 한 시인을 불러온다.이성선(1941∼2001) 시인은 별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기웃거리며 산 시인으로 하늘의 달과 별과 구름과 바람의 친구였던, 말하자면 우주의 시인이다.지상이 어두울수록 낮은 자리에서 바라보는 별빛은 더 맑고 깊은 것인가. 좁게 이어진 처마 사이 총총거리는 별들이 눈시울 붉히는 밤이 있다.“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그는 별을 바라보며 눈물 흘린다. 이어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 무엇으로 가난하랴”는 고백처럼 그는 남의 앞자리에서 서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일 혹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남들이 다 보이는 단(壇)에 서는 일을 싫어했다. 그에게 시는 그 원초적 생명에 다가가는 길이며 우주와 조화로운 합일을 꿈꾸는 삶 속에서 피어난 별이다.어느 시대든 시인에게 있어서의 세상은 만족스럽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으로 어지러운 세태는 원망과 절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거부 정신이 이상향인 별을 꿈꾸게 한다.우주와 자연 속에서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추구했던 시정의 소유자, “시혼이 너무 맑아 유리 보석처럼 반짝이던 설악의 시인”이라 불리는 이성선 시인의 ‘별을 보며’는 시인이 동경했던 풀과 달과 벌레와 더불어 선(仙)의 세계에 닿아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한 ‘별’과 ‘하늘’은 우주이면서 영혼이다. 한편으로 시적 자아가 전이(轉移)된 대상이다. 그렇게 하늘이나 별처럼 초연하고 자연과 합일코자 하는 시인의 선망이 두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얇은 시집 ‘별이 비치는 지붕’에는 별이라는 낱말이 무려 39번 나온다. 현대라는 다원화된 구조 속에서 아직 시인이 별을 헤아리고 있음은 시대착오 아닐까요?”라고 묻던 박명자 시인과의 우정어린 대화는 세속의 우리를 향한 반문이다.너무 쉽게, 너무 빠르게, 너무 가볍게 버려지는 것들이 많은 세상이다. 편리에 따라 쓰다 버린 것들이 넘쳐 그림자처럼 깔리는 시대에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쳐다보기조차 조심스러웠던 시인. 어느 것에도 오염됨이 없어야 별을, 하늘을 떳떳하게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시를 읊을수록 무엇이든 아끼는 것이 없는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진다. 지상에 별을 노래한 수많은 시들 중 가장 격조 높은 시정을 아름답게 투영한 시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지상이 거칠고 소란스러워 “별을 너무 쳐다보아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염려했던 시인이 살기엔 세상은 너무도 상처 많고 벅찬 곳이었을까. 풍진의 8, 90년대를 건너오며 외롭고도 서럽게 별을 노래한 시인의 눈빛은 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몸은 지상에 묶여도 마음은 하늘에 살고자 했고 바람으로 울어도 영혼은 저 하늘에 별로 피어나리라 염원했다.사람과 생명이 있는 그 모든 곳, 어디서든 별을 볼 수 있어 눈이 맑아지면 좋겠다.

2023-02-05

‘이름’이라는 생애의 시

이희정 시인 자주 먼지 털고 소중히 닦아서가슴에 달고 있다가 저승 올 때 가져오라고어머닌 눈 감으시며 그렇게 당부하셨다.가끔 이름을 보면 어머니를 생각한다먼지 묻은 이름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새벽에 혼자 일어나 내 이름을 써 보곤 한다.티끌처럼 가벼운 한 생을 상징하는상처 많은, 때 묻은, 이름의 비애여천지에너는 걸려서거울처럼나를 비춘다.-‘이우걸 시조전집’(태학사, 2013) 중 ‘이름’현대시조에서 이우걸 시인(1947년~)의 위상은 각별하고 돌올하다. 이 시를 보며 오래전 초등학교 입학 사진 한 장을 떠올린다. 가슴에는 네모반듯하게 접은 하얀색 면 손수건과 이름표를 달고 입학식 운동장에 코흘리개들이 줄을 맞춰 서 있던 장면 말이다.화자는 “자주 먼지 털고 / 소중히 닦아서 // 가슴에 달고 있다가 / 저승 올 때 가져오라고” 어머니의 유언을 회고하며 이름에 부침하는 생의 의미를 환치하고 있다.어린아이의 콧물 닦기 손수건은 자라면서, 세상의 먼지를 닦듯 자기 삶의 먼지를 터는 용도로 바뀐다. 그렇게 이름을 잘 간수해서 명예롭게 가져오라는 어머니의 귀한 당부가 담겨 있다. 하나 실상은 이름에 먼지 묻히지 않고 살아내기란 쉽지 않다. “상처 많고, 때 묻기 쉬운” 이름의 비애다. 이름은 인생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리라.시간이 빚어놓은 인생, 그 안에는 고난도 있고 실패도 있다. 가족이라는 품에서 처음 사회라는 세상에 나온 아이들이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단 것은 공교롭게도 은유로 읽힌다. 이제 생필품이 된 티슈 같은 것이 없었던 이유도 있겠지만 가슴에 달린 이름표와 손수건은 완벽하게 짝패다. 삶은 어쩌면 성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실패가 만들어낸 개인의 역사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화자는 이름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떠오르고 티끌 같은 한 생을 이름이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볍지만 무겁게 한 번 왔다 쓰고 가는 그 이름에 이름값을 한다는 것, 맨 처음 부모로부터 받은 생애 첫 시(詩)라고 불리는 이름은 어떤 뜻이 있을까.“이름 명(名)은 저녁 석(夕)에 입구(口)가 붙은 뜻과 뜻이 합쳐진 문자로 결국 저녁에 부르는 이름이 된다. 해가 떠서 날이 환할 때는 사람의 얼굴이 표식이 되어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될 터인데 날이 저물면 사정은 다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이름이며, 이름은 나와 남을 구분하는 표식”이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이름은 나와 타자와의 식별이고 관계 속에서 이름은 다르게 호명된다.사람은 결코 아름답지만도 추하지만도 않다. 지상의 생명체라는 독특한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불릴까. 유년 시절 동네 아이들과 해가 지는 것도 모르고 놀고 있을 때면 골목마다 아무개의 이름을 부르던 어머니들의 긴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사회적 관계에서 부르는 누구 씨의 짧은 스타카토 음이 아닌 길게 메아리쳐 돌아오는 이름이 귓가를 지난다. 그렇게 어머니의 긴 호명은 더 깊은 여음으로 거울을 거느리고 되돌아오는 것이다.여명이 밝은 날 아침이면 거울을 닦듯 소중히 이름 석 자를 써 볼 일이다. ◇ 이희정 시인 약력 ·201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내 오랜 이웃의 문장들’

2023-01-15

평화를 주문처럼

이희정 시인 하루를 살아도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그런 날들이그날들이 영원토록 평화롭게  김종삼, ‘平和롭게’ 전문 한겨울 정신이 번쩍 드는 추위 속에 새해는 온다. 첫해, 첫날의 ‘첫’이라는 외자가 새 희망을 향한 각오로 들리지 않는가. 저마다 새해엔 지난해보다 더 나아질 거란 기대로 이른 새벽 일출에 기대어 소원을 빌곤 한다.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 새해 첫술로 김종삼 시인의 ‘평화롭게’를 올린다. 학기를 모두 마치던 날, 존경하는 은사님이 주문처럼 얹어 주신 글이다. 벽에 걸어 두고 마음이 분주할 때마다 읊조려 본다. 평화(平和)가 방 안 가득 울리는 듯하다. 언제나 끝은 출발이 예정된 길이기에 새 걸음으로 나아가라는 희망과 함께.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고 한다. 우리가 숨 쉬는 동안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는 리듬이 숨어 있다. 길가의 나무에도, 새근새근 잠든 아가의 숨소리에도, 함박눈 펑펑 쌓인 마당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의 통통 튀는 네 발에도 있다. 남다른 리듬감으로 짧은 시어를 견인하는 시인을 따라 소리 내어 노래하듯 ‘평화’를 불러내 보자.시인이 부르는 평화는 단순하고 순수한 듯하나 그를 바라보는 우리는 단순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평화’는 화자의 영혼에 찾아와 끊임없이 평화롭지 못한 평화를 확인시켜주는 듯 짧은 어휘를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으니까. 이런 의식은 길지 않은 행간을 담담하게 지난다. “하루를 살더라도”라는 간구는 평화가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의식으로도 들린다. 화자가 반복하는 평화와 평화가 마주 보는 눈은 온화하지만, 녹록지 않은 세상을 몸으로 살아낸 시인은 주문처럼 평화를 읊었는지도 모른다.김종삼(1921~1984)은 우리 시에서 ‘순도 높은 순수시’를 쓴 한국 시문학사에서도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으로 서슴없이 손꼽히는 인물이다. 평생 단칸방 월세살이에서 벗어나 보지 못했던 그에게 현실적으로 창작의 공간 같은 것은 허락되지 않았을 터. 그에게는 종교적 신앙생활에 비견될 수 있었던 술과 음악에의 탐닉, 그 의식 아닌 의식의 시간만이 유일하게 허락된 창작공간이자 시작의 모든 과정이었을 것이다.그는 말한다. 시는 가난과 소외 속에서도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과 위안이 되어야 한다고, 시가 하나의 말씀이고 복음이어야 한다고. 다시 호흡을 맞추어 가볍게 낭송해 보자. 시인이 바라 마지않은‘평화’가 평화롭기 그지없이 혀끝에서 울리지 않는가.시인이 말하는 평화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첫눈 오는 날 연인들에게도, 곁이 되는 문장의 밑줄에도, 시골 마을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에도, 새벽을 달리는 배송 기사의 바쁜 걸음에도, 완생을 꿈꾸며 사지선다를 읽는 미생의 독방에도 평화는 두루 미친다.‘평화’를 주문처럼 외다 보니 어느 경제학자의 시에 대한 한 줄 감상이 떠오른다. 시에는 경제성이 있다고. 시는 살림을 잘 살아서 짧게 축약된 몇 행 안에 넓고도 먼 보폭의 사유를 숨기듯 잘 담아낸다고.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종류의 위안으로 온기 있는 겨울을 날 수 있다고 말이다.새해에는 움츠렸던 살림이, 사람 사이 접혔던 주름이 포근하게 펴지면 좋겠다. 몸이 추우면 마음도 추워질 테니까. 가까이에서부터 저 먼 곳의 평화가 오는 것처럼 누군가 있는 먼 걸음까지 새해, 새날, 새마음의 평화가 ‘평화롭게’닿기를 주문처럼 외워본다.“하루를 살아도,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 이희정 시인 약력 ·201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내 오랜 이웃의 문장들’

2023-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