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 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
그 밖의 많은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건성으로 읽었던가 아버지, 라는 책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
면지가 찢긴 줄은 여태껏 몰랐구나
목차마저 희미해진 어머니, 라는 책
거덜난 책들을 따라 소금쩍이 일었다
밑줄 친 곳일수록 목숨의 때는 남아
보풀이 일 만큼은 일다가 잦아지고
허기진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
―박기섭, ‘달의 門下(작가, 2010)’ 중 ‘책’ 전문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책이 있다. 애잔하고 미안한 것들로는 에두를 수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 라는 책이다. 가족 서사로 빼곡한 오월의 서가에서 시인은 가장 깊이 있고 끈질긴 질문의 책과 조우한다.
박기섭 시인(1954~)이 기억하는 두 책은 외피부터 대조적이다. “아버지라는 책은 표지가 울퉁불퉁했고, 어머니라는 책은 갈피가 늘 젖어 있었다”는 비유처럼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자 그들 ‘다움’의 모습을 품고 있다. 아버지는 ‘표지’이고, 어머니는 ‘갈피’라는 인식의 시어는 잔상을 드리운다. 시인은 “그 밖의 많은 책들은 부록에 지나지 않았다” 며 이 모든 우주의 중심 서가에 두 책을 놓고 있다.
시인이 읽는 책의 서사에 주목해 보자. “건성으로 읽었던가 // 새삼스레 낯선 곳의 진흙 냄새가 났고 // 눈길을 서둘러 떠난 발자국도 보였다”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아버지의 생을 재독하고 있다. 이처럼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는 존재로서 집 밖의 영역에 속하는 사람으로 인식했다. 이에 반해 자식에게 헌신적이고 포용적인 어머니라는 책은 그것을 만지는 시인의 갈피에도 습기가 묻어난다. “면지가 찢긴” “목차마저 희미해진” “거덜난 책”이란 비유에서 보듯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온통 눈물의 소금밭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삶은 “목숨의 때” “생의 그믐에 실밥이 다 터진 책”이라는 밑줄 아래 연민이 곡진하게 스민다. 이 대목은 어머니다움의 본질이다.
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항상 궁금하고 모를 듯한 삶을 살면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이르는 궁극의 주제다. 어머니는 어떠한가. 현대사회의 확장된 어머니의 역할과는 다르게 과거 어머니의 삶이 있기나 했을까. 우리는 왜 뒤늦게 그리움과 영원의 주제로 항상 눈물과 가슴앓이를 했을 어머니와 주목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서사 도정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것인가.
책은 역사와 서사의 저장고다. 시인은 퇴색한 과거에 미래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을 한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인 주제인 부모를 갸륵하게 기억할 뿐만 아니라 생의 진정성에 대한 의미 있는 탐색이기도 하다.
은자의 미덕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그럼에도 박기섭 시인은 비슬산 한 자락에서 수북하게 쌓인 철 지난 책이나 고미술품과 함께 있다. 그의 삶이 소중한 것은 사라져가는 옛것을 수집하고 지키는 일상 가운데 발견이 발명하는 한결같은 시인의 자리에 흔들림 없이 거하기 때문이리라.
오래전 인터넷 헌책방을 샅샅이 훑은 적이 있다. 당시 찾던 책은 ‘신학국문학전집, 세로쓰기, 어문각, 1974년판’이었다. 아버님께 빌려온 몇 권의 책을 남편이 분리배출을 해버렸는데 김동인 외 무슨 책 몇 권 인지조차 가물가물했다. 오래된 책은 더군다나 세로쓰기 책은 가치 상실 도서라고 홀대했던 발언에 마음이 상하신 듯 반납을 명하셨다. 어렵던 시절 그분들의 할부 책의 역사를 간과(看過)했다. 이제 고인이 되신 아버지라는 책을 그리움으로 다시 읽는다.
오월의 목차에는, 실밥이 다 터진 애잔한 그리움의 책,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