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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처음처럼 울었다

등록일 2023-06-18 20:11 게재일 2023-06-19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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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정 우물가 빛을 불러온 날 이후

포박된 어둠 속의 아름다운 목청들은

천리 밖 꿈결에까지 말굽 치며 울었을까

돌아오지 않는 것은 밤하늘로 날아가

수억 광년 전에 죽은 빛을 품고 있었을까

무성한 노여움들은 뗏장으로 덮이고

혼령 같은 초승달 선문을 열고 나와

어둠을 품고 빛나는 푸른 알의 눈물들을

은장도 벼린 칼날로 곱게 깎아 놓는다

―박권숙, ‘홀씨들의 먼 길(고요아침, 2005)’에서 ‘천마총·5’ 전문.

 

신라 향가에는 “천지 귀신을 감동케 하는 힘”이 있다. 이 천지를 움직이는 서정의 힘을 박권숙 시인의 시조를 숙독하며 만난다. 시조의 발생 연원을 따질 때 한시, 고려 속요와 더불어 10구체 향가를 들고 있는 점에 주목해 감상해 보자. 노래로 불렸으니 그 곡을 알지 못하는 오늘이지만 향가의 가장 정교한 형태인 10구체 향가 사뇌가(詞腦歌) 중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비는 노래인 ‘제망매가(祭亡妹歌)’로 그 감응을 유추한다. “그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홀연히 바람이 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과장이 아니었음을 시인의 작품을 통해 실감할 수 있으리라.

박권숙(1962~2021) 시인의 작품집에는 연작 시조가 많다. 연작작품만 모아도 100편에 이른다. 특히 ‘아버지의 밭, 천마총, 청사포’는 15편씩으로 방대하고 유장하다. 현실적 대상에 대한 주관적 체험을 운율에 담아내는 서정 양식에서, 한 편의 작품만으로는 그 내적 체험을 다 읽어낼 수 없는 경우에 집중적으로 그 심층을 파헤쳐 보고자 하는 노력이 연작으로 표현된다. 천마총 연작은 죽음과 구원이라는 테마로 건너온 천년의 신화와 맞닥뜨린 순간이라고, 아니 찰나와 영원, 삶과 죽음, 어둠과 빛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초월의 공간에서 느끼는 전율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단 한 편의 시조로만 표현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던 시인을 우리는 기억한다.

시인은 “포박된 어둠 속”에서도 “아름다운 목청”을 잃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것은 밤하늘로 날아가” “수억 광년 전에 죽은 빛을 품고” 있다. 하여 시인은 의연하게도 “침엽의 정신들“로 그 푸른 가시를 세워 우리를 슬픔에서 몰아내려 한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연속되더라도 이를 초연하게 극복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듯 “빛나는 푸른 알의 눈물들”을 “은장도 벼린 칼날”로 곱게 깎아 내고 있다. 오늘도 저 청고한 하늘 위에서 견고한 서정의 광휘를 뿜어내며.

이희정 시인
이희정 시인

1991년 등단 시기부터 죽음과 삶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던 당시 시인이 그려낸 고독한 자화상, 첫 시집 ‘겨울 묵시록’부터 마지막 시집 ‘뜨거운 묘비’까지 투병과 창작을 병행하며 붙들어낸 치열한 삶과의 분투였음을 감히 짐작한다. “난삽하지 않고 격정적이고 또 명징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구사하는 박권숙 시인을 생각할 때마다 척박한 90년대의 시조 들판을 객토하기 위해 태어난 시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라고 이우걸 시인은 추억했다. 더하여 이지엽 시인의 바람처럼 가없이 푸르른 초록 “침엽의 정신”이 “깨끗한 눈물”로 빛나는 절정이 후대에까지 이어지리란 염원을 뜨겁게 품어본다.

삶과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 여전히 모를 일이다. 다만 선인들의 삶에 비추어 볼 따름이다. 올해로 천마총 발굴 50년을 맞은 경주 대릉원의 밤은 찬란하다. 저 먼 신라인들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신성한 동물로 여긴 천마(天馬)가 국립경주박물관 한복판에서 우리를 맞고 있다. 예술과 뉴미디어의 협업으로 황남대총 두 봉우리에 신라의 혼이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어내며 마침내 하늘로 비상하는 하얀 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국보 천마도가 다시 수장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전시회장 ‘장니(障泥 : 말다래)’에 부기 된 감상문과 더불어 시인의 노래 한 줄이 심금을 울린다.

“방금 막 화공이 붓을 놓은 듯, 천리 밖 꿈결에까지 말굽 치며 울었을까”

이희정의 월요일은 詩처럼 기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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