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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리는 사람, 부유하는 말들

등록일 2023-04-30 20:01 게재일 2023-05-01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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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 시인
이희정 시인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

말을 많이 한 날은 마음이 켕긴다

후환이라는 말 참 두렵다

말이 없는 사람은

분노를 감춘 사람

말을 쟁여두면 병이 온다

기괴와 기형으로

달변은 앙금을 남기지

거짓말을 복용한 날은 손톱을 깎는다

안경을 닦고 책갈피를 문지른다

나를 베어 문 웃음이

일생의 말들을 훑으며 지나간다

뻥 뚫린 폐점처럼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

중독자의 눈빛으로

말은 병든 난간에 앉아

지나가는 얼굴들을 쬔다

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아

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쓴다

―정병근, ‘중얼거리는 사람(여우난골, 2023)’ 중 ‘말의 신사’ 전문

시인만큼 언어에 대해 민감한 촉수를 가진 이가 있을까. 정병근 시인의 신작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닿지 못해 제 몸속을 떠돌아다니며 부유(浮游)하는 말들을 담고 있다. 시인은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 // 말을 많이 한 날은 마음이 켕긴다.”며 자문자답의 방식으로 중얼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모으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말이 없는 사람은 / 분노를 감춘 사람”이라고. 말은 마음을 품고 있다. 하여 “말을 쟁여두면 병이 온다 // 기괴와 기형으로”. 또한 말은 대단히 모순적이다. “달변은 앙금을 남기지”, “나를 베어 문 웃음이 // 일생의 말들을 훑으며 지나간다 // 뻥 뚫린 폐점처럼” 달변이 거짓에 가까운 것이라면 차라리 말문을 닫아야 할까.

육체노동이 줄어든 자리를 감정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메우고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은 시들고 아플 때가 많다. 최근 미디어 속 유명인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이 공황장애, 우울장애 등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언어는 공명하지 못한 채 떠다닌다. 시인은 “병든 난간”에 앉아 지나가는 얼굴들, 즉 말(言)들을 쬐고 있다. “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올 것 같”다면서 “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쓰”는 것으로 말로 말 많은 세태를 적시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말은 죄악의 원흉이 되기 쉽다. 우리는 ‘차단’이라는 단호한 말을 쓰지 않고도 ‘신사적’인 침묵으로 타인을 외면하기도 한다. 이렇듯 해도 탈, 하지 않아도 탈인 말은 이율배반적이다. 말하기의 5원소 중에 ‘침묵’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자책한다. 한순간의 말실수로 모든 것이 날아가는 일은 허다하여 ‘세치 혀에 재갈 물리라’는 금언도 있지 않은가. 사람에 따라 말보다 글을, 글보다 말을 더 잘하는 식의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결국 모든 것은 말로 시작된다. 구어든 문어든 발화하는 순간 말도 글처럼 발표(publish)되는 것이다. 시인의 말, 신문의 말, 드라마 속 배우의 말, 잡지의 말, 논문의 말, 유튜브의 말이 모두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기능과 취향만의 문제일까.

오래전 작은 아이가 막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중사공이 뭐예요?” 거대한 풍력 발전기 진입로에 세워진 안내 문구 ‘공사 중’을 그렇게 읽은 것이다. 당시에는 아이가 글을 역방향으로 읽은 사실보다 홀로 글을 깨쳤다는 사실에만 환호했었다. ‘공사 중’이든 ‘중사공’이든 때때로 우리는 말이나 행동에 자기검열의 팻말을 걸어 두고 싶을 때가 있다. 슬며시 몸속 깊이 묻어둔 침묵이라는 원소를 불러내 ‘공사 중’의 잠행 시간을 가져보아야 할까.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회이든 생각하는 마음 없이 말과 글이 생겨날 순 없으니 ‘중얼거림’은 기저음(基底音)처럼 시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입은 상처는 병을 물고 생을 흘리듯 말을 훑으며 떠다닌다. 누군가에게 ‘차단’된 혀들은 이렇듯 실소를 물고 부유(浮游)한다. 언어라는 기호는 마음을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연장이면서도 가장 불안전한 수단이기도 하다. 정병근 시인에게 언어의 재현은 사상의 배포가 아니라 사유에 대한 의심이기에 말의 신사는 없다.

“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아 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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