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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봄, 마음의 꽃갈피

등록일 2023-04-16 18:21 게재일 2023-04-1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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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시인
이희정 시인

옛말에 꽃싸움에서는 이길 자 없다 했으니

그런 눈부신 꽃을 만나면 멀리 피해 가라 했다

언덕 너머 복숭아밭께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울긋불긋 복면을 한

나무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바람이 한 번 불자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흐드득,

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

 

나는 저 앞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

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

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복사꽃’ 전문

시집의 서문 격인 시인의 말이 인상적이다. “작품을 정리하다 보니 꽃을 소재로 한 시가 여러 편이다. 고운 봄날 이 거친 시집을 꽃 피는 시집으로 잘못 알고 찾아오는 나비에게 오래 머물다 가진 마시라고 해야겠다.” 나비처럼 꽃에 관한 시를 뒤적이다 덩달아 마음이 흔들렸다. 나비에게는 꽃이, 꽃에게는 나비가 욕망처럼 무섭게 당기는 힘, 그것을 색(色)이라 한다.

신의 창조물 가운데 최고의 걸작은 꽃일 것이다. 예부터 ‘미’의 상징이 되어왔던 꽃은 그야말로 ‘아름다움’의 대명사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는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되면 너무 좋아 정신이 몽롱해지네”라는 시문을 남기기도 했다. 꽃에 매료되는 것은 현대인도 마찬가지이다. 송찬호 시인은 “꽃싸움에서는 이길 자 없다 했으니”, “멀리 피해 가라 했다”며 짐짓 미혹될까 두려워하는 포즈로 춘심을 드러낸다.

우리의 문학작품에서는 미인을 꽃에 비유한 예를 허다하게 볼 수 있다. 위 시에서도 복사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여인을 의미한다. 1918년에 발행한 ‘조선미인보감’에는 당시 서울의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름에 꽃이 들어간 기생의 수는 절반을 넘었다.

시인의 비유처럼 문을 열기 무섭게 “울긋불긋 복면을 한” 화인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야말로 ‘화신(花信)이 곧 춘신이고, 춘신(春信)이 곧 화신’이라는 봄의 정령들이 시인을 에워싸고 있다. 꽃은 그 아름다운 색과 자태, 그리고 그윽한 향기로 인하여 뭇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기 충분하다. 특히 복사꽃은 그 요염한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염부(艶婦)’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 열매와 관련해서는 벽사력(僻邪力)을 지녔다고 믿었고, 열매의 씨앗이 일반적으로 다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시인이 마지막 연에서 돌연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 한 연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곡우는 “봄비가 내려 백곡을 기름지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 봄의 마지막 절기가 아닌가. 그런데 눈부시게 무장한 무사들이 떡하니 막고 있어 다음 행보를 예비하는 데 조바심이 이는 것이 기우는 아닐 것이다. 해서 시인은 그것에 더해 비책을 제시한다.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한다며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놓고 물러날 수 있었다”라고. 결국 시인의 장기인 노래(詩)를 바치는 것으로 꽃의 무사들로부터 풀려난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헌화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생명체로서 꽃은 개화하여 번화하고는 시들어서 떨어지는 생리적 구조로 되어있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인간의 삶과 유사하나 꽃은 사람과 달리 다시 개화하는 재생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고전문학 세상과 만나다’의 저자 이강엽은 “꽃은 흔히 절정의 한순간으로 꽃다운 청춘이라고 할 때 꽃은 최고의 호시절을 의미하며, 꽃이 피면 마음이 밝아지고 자연스레 흥이 분출하는데 꽃노래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다시 기운을 얻어 재창조할 힘을 주는 리크리에이션(recreation)이다.”라고 했다. 독서 시간 청춘들과 일탈을 감행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교정을 거닐며 난분분 날리는 여린 꽃잎을 취했다. 이어 ‘모비딕’ 같은 두껍고 무거운 책 속에 한 잎, 한 잎 마음 다해 심었다. 다음 생에는 어여쁜 꽃갈피로 재탄생한 그녀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한 번 불자,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후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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