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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자란다

등록일 2023-06-04 18:03 게재일 2023-06-0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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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정시인
이희정시인

산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자란다.

그 자줏빛 모습은

시도도, 피로도 없이,

도움도, 또한 박수갈채도 없이 일어선다.

그 영원한 얼굴 속에서

태양은 크나큰 기쁨으로

바라본다―오래―오래―금빛에 물들 때까지,

밤의 친교를 위해.

The Mountains grow Unnoticed,

Their purple Figures rise

Without attempt, exhaustion,

Assistance or applause.

In their eternal faces

The sun ―with broad delight

Looks long ―and last ―and golden,

For fellowship―at night.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강은교 옮김,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에서 ‘산들은 눈치채지 못하게 자란다(The Mountains grow Unnoticed)’ 전문.

1830년은 영문학 시사(詩史)에서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별을 탄생시킨 해이다. 지성과 영원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나는 그녀를 영화 ‘조용한 열정’으로 먼저 만났다. 벨기에와 영국에서 제작된 영화는 실은 영상시집에 가깝다. 롱테이크 화면 가득 디킨슨의 시편으로 흐르는 절제된 대사는 예술의 슬픈 미학을 느리지만 뜨겁게 담아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슬픔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시인”이라고 했다. 사랑에 실패한 후 디킨슨은 현실에 대한 문을 완전히 닫았다. 결혼도 물론 거부되었다. 디킨슨의 은둔은 피투성(내던져있음)의 은둔이 아닌 기투성(스스로내던짐)의 은둔이다. “영혼은 선택해서 사귀지, 그리고 닫아버리지” 그녀에게 있어 남성은 성스러운 세계,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영원한 세계 속의 우주’로 대체되었다. 디킨슨은 매일 흰옷을 차려입고 6년 동안 일천여 편의 시를 지었다. 그녀가 평생 쓴 작품 수의 반 이상을 넘는 숫자였고, 1862년 한 해에만 366편의 시를 썼다. 그 비극의 기간은 신생 미국의 역사를 결정짓는 한 격동기였던 남북전쟁(1861~1865)의 시기와도 일치한다. 또한 프래그머티즘과 경이적인 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에밀리 디킨슨의 내부에서도 단단한 과거가 부서지고 위대한 미래가 태어나려는 과도기가 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킨슨은 휩쓸리지 않았다. 새로운 미를 추구했으며, 그 어느 것에도 자기를 예속시키지 않고 독자성을 지켰다. 시인 강은교의 해설처럼 “그의 시는 완전히, 홀로, 어떤 ‘이즘(ism)’의 감염도 없이 순수하게, 그만의 양식으로 순화되었다.”

생전에 그녀는 단 7편의 시만 발표했다. 당시 여성은 사회 속에서 기능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시(dash)와 대문자의 사용, 행과 연의 특이한 구분 등의 디킨슨의 독특한 작법 스타일이 문제시되어 출판은 어려웠다. 하여 그녀의 고결한 시는 산처럼 “눈치채지 못하게 자랐다” 완전히 가려진 채 시인의 고독 속에서 은밀히 창조되었다. 세상을 향한 그 어떤 “시도도, 박수갈채도 없이 일어선다” 사후 69년이 되는 해 평생을 은둔했던 그녀의 방에선 파시클(fasicle, 손제본) 형태의 1800편에 가까운 시가 발견되었다. 그해 비로소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발간되어 세상에 나왔다. 디킨슨의 시는 사랑과 불멸, 자연과 신 등 여러 주제로 분류될 수 있으나, 무엇보다 동양의 죽음에 가까운 ‘고독’과 ‘자연에 대한 이해’는 내면의 깊은 심리를 담고 있다. 시어 “밤의 밀교”는 곧 시적인 순간과의 은밀한 친교를 말한다. 고도로 응축된 이미지로 그려진 ‘고독’은 우주로부터 화해하는 몰입의 순간이다. 그녀의 맑은 영혼은 조용하고도 폭발적인 열정의 시를 낳았다. 유월로 들어선 길은 영원의 깊고도 푸른 생명을 노래한다. 해파랑길 18코스 포항 오도(烏島)리 사방기념공원의 긴 수평선과 신록의 봉우리에 눈이 시리다. 커피향 한 올 피워물고 격자로 난 창가에 앉아 기다림을 키우는 대신 ‘고요’를 키워보기로 한다.

“태양은 크나큰 기쁨으로, 바라본다―오래―오래―금빛에 물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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