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촘한 체 같은 어스름이 번져 오고
사랑니 뽑혀 나간 동그란 아픔 위에
봄 저녁 물 끓는 소리 무심하게 고이는데
만지면 부서질까 당신의 마음가닥
가늘고 빳빳한 쓸쓸의 올올들이
뜨겁게 곤두박질치며 물속에서 몸을 푼다
참았던 시간들을 찬물로 헹궈 내면
어쩜 몇 가닥쯤은 당신에게 가닿아
반음쯤 낮은 자리에서 흰 음계로 울어줄까
-서숙희, ‘국수를 삶는 저녁’ (‘가히’ 창간 특집- 2023년 봄호)
우리에게 ‘국수’라는 식재료는 음식으로도 심상으로도 별미다. 주식인 밥과는 달리 소박하지만 특별한 친밀감을 자아내기에 이만한 서정도 없을 것이다. 작품 제목 ‘국수’를 뽑아내기 위한 오브제로 시어 ‘촘촘한 체’는 맞춤이다. 시적 화자는 색보다는 선과 면으로만 소녀의 무채색 봄을 소묘하고 있다.
“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 라는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구호는 여전히 주효하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 시의 미덕이라면 더욱 이 시는 서사보다는 묘사가 승하다. 흔히 묘사는 창작 기법에서 인물의 마음속 풍경을 배경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쓰인다. “촘촘한 체 같은 어스름이 번져 오고”의 첫 행에서부터 심상을 거느린 묘사가 이미지를 믿음직하게 견인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시를 그림 대하듯 읊노라면 어느새 고요를 거느린 섬세한 풍경에 눈이 순해지고 마음결마저 연해지고 마는 것이니.
“현실풍경이건 심상풍경이건 글은 해석의 산물”이라고 했다. 서숙희 시인(64)이 그리는 ‘국수를 삶는 저녁’의 풍경은 채색되지 않은 연한 봄이다. 시인이 시어를 길어내는 시간은 가는 국수를 체에 걸러내듯 촘촘하고 예민한 순간이기에 “물 끓는 소리마저 무심하게 고”인다. 이어 봄 저녁의 현실풍경은 “만지면 부서질까 당신의 마음가닥”의 심상 풍경과 절묘하게 포개지며 자연스레 운율의 음계를 놓는 것에도 일조하고 있다. 화자가 그리는 풍경은 반음 낮은 자리에서 단아한 서정의 여린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
어떤 글이든 고명에 한눈을 팔면 노상에서 객사하기 십상이라고 했다. 시력 30여 년의 시인이 화려한 수사보다 시의 본령인 국수가락에 전심을 다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자. 시적 화자는 “가늘고 빳빳한 쓸쓸의 올올들”로 마치 시를 처음 대하는 소녀처럼 공손하게 맞는 것이다. 타협이나 굴종을 모르는 타고난 국수가락의 성정은 돌연 시의 허리쯤에서 “뜨겁게 곤두박질치며 물속에서 몸을 푼다.” 이는 제목이 상징하는 ‘국수를 삶는 저녁’의 창작(조리)과정을 풀어내는 동시에 화자의 내적 열망을 교묘하게 비등하며 카타르시스를 준다. 마치 영화 마블시리즈 앤트맨의 슈퍼히어로를 연상시키듯 줌인과 줌아웃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온탕과 냉탕을 벼리는 것이다.
이처럼 화자는 대상에 대한 격정 어린 내성을 “찬물로 헹궈 내” 봄 저녁의 풍경 한 올 한 올을 체에 내리듯 소담스레 ‘국수’라는 가락에 풀어내고 있다. 오래 기다리고 감추었던 빳빳한 국수의 외형은 어느새 물의 방식에 순응하며 쓸쓸하고도 부드러운 봄 저녁으로 치환된다. 선에도 감정이 있다. 기다림의 애틋함이 높은 감정의 선이라면 쓸쓸과 울음은 낮은 무채색 감정이다. 울음은 감정의 바닥까지 다 긁어내야 도달할 수 있다. 시를 기다리며 한생을 살아가는 시인의 담백한 저녁, 그 애정의 발화를 본다. “어쩜 몇 가닥쯤은 당신에게 가닿아 반음쯤 낮은 자리에서 흰 음계로 울어줄까”
마침내, 소녀의 국수 가락은 희디흰 음계로 저 먼 곳까지 공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