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파리를 잡았다
손바닥에 날파리의 눈알이 느껴진다
작지만 단단한 세계가 거기 뭉쳐 있다
어떤 암흑은 방금 선사된 것이다
내가 잘 놀라는 이유를 알고 있다
언제부터 손바닥 마주치는 소리를 들었는지도
놀라지 않으면 불안하다
놀랄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놀랄 일을 걱정하느라 머리가 꽉 차지 않으면
텅 빈 머리로 나는 하루 종일 나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손바닥을 생각하는 이유다
누군가의 손에 작고 단단한 두 개의
동그란 세계를 선물해주고 싶은 이유다
―황성희, ‘손바닥을 생각하는 이유’ 전문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 아침달)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한다.”라는 클레의 유명한 공식을 황성희 시인의 시에 대입해 보면 어떤가. 우리가 문학을 감각 기관을 통해 구분한다면 소설은 후각이고, 시는 시각이라는 상징적 정의는 이 문법을 가능하게 한다.
화자는 이 찰나의 살생을 통해 존재의 무게와 실존적 불안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화자는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한 존재인 날파리를 죽이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생명의 단단함에 대해 감각하는 것이다.
“손바닥에 날파리의 눈알이 느껴진다”라고 했을 때, 화자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체의 ‘눈알’이라는 구체적인 감각에 집중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대상을 단순한 해충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던 하나의 시선을 가진 주체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기실 날파리의 몸집은 “작지만 단단한 세계가 거기 뭉쳐”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하나의 생명이 작동하기 위한 완벽한 세계가 들어있을 테니까. 시인은 그것이 파괴되는 순간 느껴지는 저항감을 단단함으로 표현하며, 생명의 밀도를 경이롭고 서늘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떤 암흑은 방금 선사된 것이다”라고 했을 때, 암흑은 날파리의 죽음이고, 시력의 상실을 뜻한다. 내가 손바닥을 침으로써 그 생명에게 영원한 어둠을 선사했다는 표현은, 가해자로서의 자각과 생사가 교차하는 섬뜩한 순간일 테니까.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회화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라고 정의했다면, 시에서 화자가 손바닥으로 타격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힘”의 내재성을 사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부터 손바닥 마주치는 소리를 들었는지도”에서 감각은 대상이 없는 감각 그 자체이다. 피부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재현이 아니라 신체가 경험하는 방식으로 생성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시의 놀라운 반전은 “놀라지 않으면 불안하다” “놀랄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이라는 언술에 있다. 화자는 일상의 평온함보다 충격과 사건에 길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송출한다. 손바닥을 마주쳐 생명을 죽이는 소리가 박수이건 타격음이든 이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오히려 자극 없는 정적을 견디지 못한다는 역설을 품고 있는 대목이다. 놀랄 일이 없다는 것은 죽음과 다름없는 상태로 받아들이는 현대인의 불안증을 묘파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시인의 눈이다.
누구보다 예민한 촉수를 지닌 시인이 손바닥을 생각하는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작고 단단한 두 개의 동그란 세계를 선물해주고 싶은 이유”
/이희정 시인